[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4.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4.
"아, 잠깐만."
"……?"
비류향은 물음표를 띄우는 나예린을 놔두고 침상으로 되돌아갔다. 우선 손을 댄 것은 침상이었다. 마치 오랜 시간 이곳에서 일했던 사람처럼 침상 아래서 커다란 바구니를 꺼내고는, 능수능란하게 침상보와 이불깃, 그리고 배겟잇을 벗겨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거기에 더불어 옷장으로 가 한 켠에 들어가 있던 예비 포보布褓를 씌우는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주변까지 싹 쓸고닦았으면 했지만 아쉽게도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오늘은 일단 당장 잠을 잘 곳만 깨끗하면 되리라 판단한 비류향은 다시 나예린에게 돌아왔다.
"이제, 들어갈까?"
"……아, 네!"
손길이 닿으면 주름이 사라지고 칼 같은 각이 잡히는 침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예린은 어느 새 정리를 마친 비류향을 따라 욕탕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눈에 들어온 것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선반과 바구니, 그리고 잘 개어져 있는 수건 뭉치들이었다. 며칠 간 지내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던 나예린은 그곳이 탈의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면 부모님 외의 다른 사람에게 나신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덜컥 겁이 난 나예린은 무심코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평범하게 옷을 입 고 있어도 자신을 덮치려는 이들이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눈앞의 소녀는 그렇게 변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을까. 스멀스멀 피어오르은 불안감에 무심코 뒷걸음질치며 돌아보니 비류향은 벌써 겉옷을 벗고 내의內衣 옷고름에 손을 대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것일까.
"? ……아!"
비류향은 자신을 바라보는 나예린의 시선에 고개를 갸우뚱하다 이내 알았다는 듯 수건 뭉치에 다가가, 거기에서 제법 두터운 천뭉치를 하나 꺼내들어 나예린에게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은 나예린은 곧 뺨과 어깨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는 것을 느꼈다. 수건이었다. 망토처럼 두르니 허벅지까지 내려올 정도로 컸다.
"이러면 괜찮지?"
"……네."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자신이 바보 같아지는 순간이었다. 나예린은 망토처럼 두른 수건 아래서 벗은 옷을 바구니에 담았다. 비류향은 그러한 나예린에게 벗어둔 옷을 어떻게 정리해둬야 하는지와 더불어, 욕탕에서 양 팔을 자유롭게 움직이면서도 수건이 쉽사리 풀어지지 않게 몸에 두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보통 그러한 조언은 불쾌한 참견이나 쓸데없는 잔소리로 들리기 마련이지만, 나예린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압도적인 가사능력과 용안으로 보이는 티끌 하나 없는 순수한 선의 덕분에 그러한 부정적인 인상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나예린이 수건 아래서 옷을 벗기 위해 악전고투 하는 사이, 그와 비슷하나 다른 방식─겨드랑이 아래로 감싸 몸을 가리면서도 손이 자유로운 형태─으로 몸에 수건을 두른 비류향은 먼저 욕실에 들어왔다. 고급 나무로 만들어진 욕탕은 한동안 사람 손을 타지 못해 썩 깔끔하지 못했지만─어디까지나 비류향의 기준일 뿐이다─ 욕탕이라는 특성상 먼지 정도는 물로 가볍게 씻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닥이 미끄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우둘투둘한 대리석이라는 것도 장점이었다.
게다가 두발용과 신체용이 따로인 향유 섞인 고급 비누를 비롯한 각종 여성용품들이 친절하게도 그림을 포함한 목판 설명서와 함께 구비되어 있었다. 비류향은 남몰래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동생 비류연 덕분에 남아를 씻겨본 적은 많았지만─그것도 비류연의 머리가 굵어지면서 하지 않게 되었지만─ 여아를 씻겨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무엇이 필요한지 몰랐다. 저잣거리 아낙들에게 듣기는 했지만 원체 미용에 관심이 없었고 그렇기에 사치라 여겼던지라 흘려들었던 게 화근이었다. 이런 일이, 그러니까 다른 집 귀한 여식을 씻기게 될 줄 알았다면 귀담아 들었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객실 욕탕에 여성에게 필요한 세면도구가 구비되어 있다는 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자세한 구조는 알 수 없었지만 벽에 달린 수도꼭지의 손잡이를 돌리면 각각의 구멍에서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확인했다. 온溫과 냉冷 자가 새겨져 있었기에 손잡이를 잘못 돌려 화상을 입는 일은 없을 듯 했다.
몇몇 결점─어디까지나 비류향의 기준에서─이 보였지만 전체적으로는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렇게 점검을 마친 비류향은 앉은뱅이 의자와 바가지를 수도꼭지 앞에 두고 탈의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려준대로 겨드랑이 아래로 수건을 몸에 두른 체 문가에 기댄 나예린이 있었다. 조심스레 빼꼼히 얼굴만 내민 게 여전히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비류향이 손짓하자 천천히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그 뒤에 무릎을 꿇고 앉은 비류향은 손잡이를 비틀어 바가지에 적당한 온도의 물을 담으며 말했다.
"머리 감을 테니까 눈 감아줄래?"
"네."
쏴아아아─. 쌀 쏟아지는 것과 비슷한 소리와 함께 따스한 물줄기가 나예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어디 한 군데에만 맞지 않도록 골고루 뿌려지고 난 후 비류향의 손길과 함께 향긋한 비누거품이 일었다.
"으응……."
"아프니?"
"아, 아뇨……."
"아프면 얘기해 줘."
"네……. 후아……."
아프기는커녕 기분 좋은 손길이었다. 이마부터 뒷목까지 정수리와 관자놀이를 비롯한 혈도를 적절히 자극하면서도 두피가 상하지 않게 가감한 손길에 통증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머리카락 또한 우악스럽지 않은 손길로 쓸어내렸다. 무심코 기분 좋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헹굴게."
다시 한 번 따뜻한 온수가 쏟아졌다. 이번에는 처음과는 달리 좀 더 적은 양이 제법 오래 쏟아졌다. 그 동안 비류향의 손길이 나예린의 머리카락 구석구석의 비누거품을 깨끗하게 닦아내었다. 매한가지로 온유하고 애정이 가득한 손길이었다. 대체 얼마만에 느끼는 타인의 손길일까. 기억조차 없는 갓난아기 시절 이후로 이토록 정성스레 머리를 감아주는 사람은 비류향이 처음이었다.
"자, 이제 몸 씻어야지."
그리 말하며 비류향은 신체용이라 적힌 통에서 비누를 꺼내 반투명한 무명천을 물에 적신 뒤 문질렀다. 순식간에 몽글몽글 거품이 일었다. 머리를 감던 것과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향이 은은하게 피어났다. 충분한 거품이 일자 비류향은 우선 오른쪽 어깨부터 손 쪽으로 닦아내려갔다.
사악─ 사악─
거품과 함께 피부를 스쳐가는 무명천의 감촉은 그 특유의 거칠음이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시원했다. 반대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손길은 갑작스럽게 끊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의 손길이 없자 나예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난처하다는 듯한 미소가 보였다.
"수건, 벗어줄래?"
탈의실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비류향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과연 다른 의도는 없는 것일까. 일반적인 소녀라면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나예린은 일반적인 소녀가 아니었고, 일반적이지 못한 상황들 또한 몇 번이나 겪어온 경험자였다. 부모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마음을 연 상대건만 오랜 경험으로 만들어진 인간 불신이 반사적으로 소녀에게 용안을 활용하게 만들었다.
악의는 없었다.
진득한 음심淫心도 없었다.
무색투명한 호의만이 빛나고 있었다.
나예린은 그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며 천천히 수건을 풀었다. 가식 없는 순수한 호의조차도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없게 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머리를 감을 때 젖은 수건을 풀자 느껴진 서늘한 한기는 그러한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마음을 어루만지듯 비류향의 부드러운 손길이 나예린의 몸에 비누칠과 동시에 땀과 먼지를 씻어냈다.
"시원하니?"
"네."
"화장은 아니더라도 세안은 매일 해야지. 자, 눈 감고."
"네, 으우……."
"코 풀고. 흥!"
"흥!"
"귀도 잘 닦아야 돼. 이목구비가 깔끔해야 괜히 깔보이지 않아."
"아, 네."
"앞으로 세안 잘 하기. 약속?"
"약속할, 앗! 아으으……"
"어머, 눈에 비눗물 들어갔구나. 잠깐만. 잠깐만. 자, 얼른 세수해."
"어푸, 어푸……. 으으, 아직도 따가워요……"
"한 번 더 세안하자."
나예린이 바가지에 받은 물로 눈가를 씻는 동안 비류향은 자연스럽게 다른 부분을 씻기기 시작했다. 등을 밀고, 가슴과 배를 문지르고, 둔부와 고간을 거쳐 허벅지를 타고 발끝까지 씻어내리는 솜씨는 매우 신속정확하면서도 애정이 가득했다.
비류향은 나예린을 씻기며 생각했다. 아름답다. 미성숙한 신체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리고 아름다움을 느끼면 느낄 수록 애잔한 감정 역시 커져갔다. 저잣거리에서 부모의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혹은 군것질거리를 찾아 홀로 휘적휘적 다니는 동년배에 비하면 너무나도 야윈 몸이었다. 서시빈목西施嚬目이라 하여 모든 이들이 저 야윈 몸조차도 아름답게 보고 있었지만, 비류향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용안이라고 했던가. 삼라만상의 이치를 직시하고 한 길 조차 알 수 없다는 사람 속을 꿰뚫는 재능. 그것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있는 그대로의 악의와 욕망을 경험하며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을까. 자신에게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가능한 이 아이를 도와주자. 비류향은 그렇게 다짐했다.
"비눗기 씻어내자."
"네."
쏴아아아──
물줄기에 비누거품이 씻겨내려갔다. 양액兩腋과 고간股間처럼 물이 쉽사리 닿지 않아 거품이 남아있던 부분도 비류향의 손길이 닿자 순식간에 녹아내려 사라졌다. 민감한 부위기도 했거니와 모친이 아이를 씻기는 손길이 이러할까 싶을 정도로 다정하고 부드러워 괜시리 부끄러워진 나예린은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완벽히 깔끔하게 몸을 씻은 나예린은 가히 천상의 선녀와 같았다. 스스로 빛을 내는 것 같은 희고 깨끗한 피부. 황금 비율로 배치된 이목구비. 살짝 야위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신체. 그야말로 미의 화신.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씻으니까 더 예뻐졌구나."
"……감사합니다."
나예린은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렇게 인사했다. 예쁘다는 칭찬에 이토록 솔직하게 감사를 표한 건 자신이 기억하기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음욕이나 질시 같은 어두운 감정 없는 칭찬이라서 그럴까. 익숙치 않았지만 싫지 않은 기분이었다.
"몸 식는다. 탕에 들어가 있으렴."
비류향은 나예린의 젖은 머리를 작은 수건으로 감싸 올려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나예린에게 해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몸을 씻기 시작했다. 나예린은 어깨까지 몸을 담그며 처음 해보는 수건 말아올림 머리가 풀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심스럽게 매만져보았다. 신기했다. 어떻게 하면 고작 천 한 장으로 이렇게 단단하게 고정할 수 있는 걸까. 푸스스 풀어지려는 수건을 어찌어찌 다시 끼워넣고 문득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한창 성장기에는 한두 살 차이도 성장 차이가 있다지만 그것과는 다른 어른스러움이 깃든 뒷모습이었다. 소녀에서 여인이 되어가는 몸이 그리는 완만한 곡선과 더불어 산중생활로 붙은 근육 위로 덮인 여인 특유의 부드러운 살이 육체적 성숙미를 보여주었다. 행동거지는 자유분방하면서도 절제되어 있고, 언행이나 배려가 사대부의 예법과는 거리가 있으나 무례하지 않으니 정신적으로도 성숙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
그와 동시에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덧없어 보였다.
손을 뻗으면 흩어질 것 같은 안개 같은 흐릿함.
깊은 산 속 바닥까지 비쳐보이는 고요한 호수와도 같은 투명함.
그런 이율배반적인 감상이 나예린의 뇌리에 맴돌았다. 온수의 따스함이 몸에 스며들수록 그러한 인상은 선명해졌다. 문득 불안해졌다. 정말 저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저렇게 자애로운 심상과 형용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공존할 수 있는 걸까?
당장이라도 욕조에서 뛰쳐나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달려나가 손을 뻗었을 때 상대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면? 끌어안고 울었던 상대가 사실은 그 자리에 없었고, 침상을 정리하고 자신을 씻겨주던 이가 그저 자신의 상상 속의 존재였다면? 너무 힘들고 지쳐서 환상 속의 존재를 만들어 거기로 도피한 것이었다면?
사라락…….
기어코 수건이 풀어졌다.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수건이 시야를 가렸지만 도저히 그것을 치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걸 치우면 비류향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나홀로 이곳에 있는 게 아닐까. 그제서야 이 모든 게 꿈이었다고 깨닫게 되는 게 아닐까. 이질감에서 시작된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크기를 키워나갔다. 간신히 숨만 쉬며 물에 젖어들어가는 수건 끄트머리를 붙잡고만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기다려 봐. 다시 해줄게."
찰박찰박. 물 밟는 소리와 함께 타인의 손길이 수건을 들어올렸다. 비류향이었다. 순식간에 다시 수건을 휘감아 머리에 고정하는 솜씨는 만약 이것이 환상이고 사실 나예린 스스로의 손길이었다고 할 수 없는 경지였다.
"이제 됐다."
비류향은 그리 말하며 탕 안으로 들어와 벽에 닿아있는 후미진 구석 자리에 앉았다. 너댓 명이 들어가도 될 법하건만 굳이 그런 자리로 가는 게 비류향다웠다. 이대로 쪽잠을 자 두자. 그리 생각하며 벽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피로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천향루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평소와 같은 쪽잠도 들지 못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러나 곧바로 잠들 수는 없었다.
"……언니……."
"……응?"
나예린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탕의 온기와 피로 때문에 반응이 늦었지만 거기에 잠을 방해받았다는 불쾌함은 없었다. 다가가는 것도, 멀어지는 것도 아닌 애매한 거리에 선 나예린을 보며 비류향은 끈기있게 어린 소녀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언니는……. 환상이 아니죠?"
처음 입에 담아보는 단어─언니의 어감이 익숙치 않은 듯 머뭇거리던 나예린은 그렇게 물었다.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소녀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떤 대답을 해줘야 저 아이의 불안이 해소될까. 고민하던 비류향은 살포시 손짓했다. 이리 오렴. 망설이던 나예린은 이내 비류향에게 다가와 그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비류향은 둥지로 돌아온 아기새를 보듬듯 나예린을 꼭 껴안아주며 물었다.
"이렇게 끌어안고, 서로 대화하고 있는데 환상인 것 같니?"
"……아니면, 꿈이거나……."
갑작스레 찾아온 작은 행복이 과연 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온기와 감촉이 눈 감았다 떴을 때 사라질 일장춘몽이 아니라 단정지을 수 있을까. 혹은 그럴지언정 찰나의 환상에 용기를 얻어 세상에 맞설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두려웠다. 칠흑 같이 어둡고 늪처럼 질척이는 인세人世에 대항하기에 소녀는 너무나도 여렸다. 그런 소녀에게 어떻게 하면 믿음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비류향은 부드럽게 나예린의 머리를 기울여 가슴께에 귀를 대게 하였다.
"예린아."
"네……."
"심장소리가 들리니?"
"……네."
두근. 두근. 희미했던 고동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다. 그 사이로 자신의 고동 또한 들려왔다. 어느 새 두 사람의 고동이 조화를 이루며 울려퍼지자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감이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것에 쐐기를 박듯 나예린의 귓가에 비류향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나는 여기 있어. 곁에 있어."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토록 하기 위해서일까. 비류향은 더욱 힘을 주어 끌어안으며 그렇게 속삭였다. 나예린은 그 속삭임에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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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인 요리 실력을 따지자면 사부가 제일이고, 그 다음이 나며, 매우 아쉽게도 누나가 마지막이다. 물론 이것은 상대적인 평가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내공이라고는 씨알도 없는 누나에 비해 대놓고 무학武學의 묘리妙理와 공력을 아낌없이 쓰는 사부와 나를 도저히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분뢰수를 이용해 펄펄 끓는 기름 속이든 활활 타오르는 가마솥 안이든 맨손을 들이밀어 온도를 조절하며, 육안으로는 구분조차 하기 힘든 섬세한 결을 따라 재료를 갈라 본연의 맛에 손상을 주지 않는 칼솜씨에, 소금 알갱이 하나까지 조절하여 간을 맞추는 안력眼力을 가지고도 요리를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만.
어찌되었든 앞서 말했다시피 내 요리 실력은 분명 누나보다 앞선다. 이건 내 오만이나 맹신이 아니라 깐깐하기로 소문난 사부 역시 인정한 사실이다. 누나야 뭐, 나쁜 짓만 아니면 성장하는 걸 다 축하해주는 사람이라 되려 자랑스러워 하고 있고. 여튼 그렇게 맛있는데.
"으음……."
"아니, 사부님. 왜 그리 깨작거리십니까. 맛없으면 치울까요?"
"아, 맛있어. 맛있다니까."
그러고는 또 젓가락질을 하는 둥 마는 둥. 요리를 해본 사람은 내 심정을 잘 알 것이다. 기껏 차려줬더니 이거 집다 저거 집다, 이거 깨작 저거 깨작. 차라리 맛 없다고, 이러저러하니 입에 안 맞는다고 하면 나중에 이래저래 다른 찬거리를 준비하든 조리방식을 바꾸든 할 텐데 그것도 아니고. 누나가 이 오두막을 떠나고 나서부터 식사시간만 되면 이 모양 이 꼬라지다. 사흘 정도는 괜찮았지만 나흘 정도 지나고 나니 매일 이 모양이니 식사준비하기 정말 싫어진다. 그렇다고 때려치자니 사부의 주먹과 누나의 부탁 때문에 내던질 수도 없고.
그나마 깨작거리는 걸로 끝나면 다행이다. 어떨 때는.
"거 네놈 밥은 맛만 있지 흥취가 없어, 흥취가. 향이가 했던 밥 생각해봐라. 얼마나 좋으냐! 보기만해도 이게 '아, 이게 정말 정성이 흘러넘치는 밥상이구나!' 하는 수준이잖아! 요리하는 거 보기만 해도 배부를 정도로 정성이 가득하잖아! 술상 차리는 솜씨는 또 어떻고! 보기만 해도 그냥 취해! 흥이 돋아! 너도 그렇게 좀 해봐라!"
"에이, 사부님! 제가 얼마나 정성을 쏟아붓는데요! 사부가 그렇게 칭찬하는 누나가 제 상을 얼마나 칭찬하는지 모르시죠? 그런데도 왜 이리 핍박하십니까!"
"말했잖아! 정성이 부족하다고!"
"그렇게 정성 좋아하시는 분이 왜 평소에 누나가 해주겠다고 하면 죄다 손사래 치십니까!"
"그건 정성을 초월해서 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한다. 심지어는.
"너도 나이 들어봐라. 시커먼 남정네가 해준 밥보다 고운 처자가 해주는 밥이 더 좋지!"
"시커먼 남정네라뇨! 이토록 멋진 미소년에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망난 색골 영감 같은 소리를 하기도 하니 원. 대체 누나는 이 사부의 뭘 보고 공경해야할 사람이라며 정성을 쏟아붓는 걸까. 알 수가 없다.
그런 사부의 반찬투정과는 별개로 나 역시 누나 밥이 그립기는 하다. 누나의 요리는 일품이기는 해도 극상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다. 당장 시장에서 유명한 객잔에서 큰돈 주고 먹는 요리가 더 맛있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맛있는 요리라는 게 꼭 혀가 닿자마자 눈앞에 별이 날아다니고 천하가 내 안에서 살아움직이는 것 같은 환상을 봐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소박하지만 풍미가 있고 매일 같은 반찬이더라도 질리지 않는 요리 또한 맛있는 요리다.
고된 수련과 노동행위 나가기 전에 먹는 아침밥과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먹는 저녁밥의 행복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르리라. 하물며 그게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 정성스레 차려주는 상이라면 더더욱. 가슴에 스며드는 어머니의 맛이라는 게 이런 거겠지.
"하아……."
오늘로 보름째인가. 어디 있는지도 알겠다, 마음 같아서는 수련과 가계활동 모두 때려치고 찾아가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사부에게 묵사발이 될 테니 차마 그럴 수가 없다. 졸지에 생이별이라니. 무림에 피바람이 불어도 나라는 갈라지지 않았건만 어째서 우리 남매는 이리 살아야 하는 걸까. 게다가 그런 비극의 원흉에게 밥을 지어 바쳐야 하다니. 비극도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
이것 뿐만이 아니다. 최대한 사부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매우 적극적으로 누나를 만나러 갈 수 있느냐고 했더니 사부가 말하기를.
"그러고보니 금琴 수련도 해야지. 하는 김에 여장女裝도 하고."
"……네?"
이게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었건만 아무래도 사부는 진심인 듯 했다. 누나가 없어졌다고 그 자리에 여장한 소년을 채워넣고 싶으신 건가. 세상에 맙소사.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것은 사부의 자금계획의 일환일 뿐이었다. 남정네가 타는 금보다 미소녀가 타는 금이 훨씬 더 가치있으며 돈 벌기 쉽다는 것이었다. 무학의 묘리니 수련이니 하는 포장을 제거하면 딱 그거였다. 사부가 이상성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해야할지, 그 악랄한 자금탈취수법에 이를 갈아야할지 모르겠다.
그나마 이 여장수련을 마치면 누나를 보러 갈 수 있다는 게 위안이다. 그러기 위해 여성스러운 말투와 행동거지를 주입받으며 마음 속 무언가가 심히 깎여나가고 있는 느낌이지만. 괜찮다. 괜찮아. 이게 끝나면 누나를 볼 수 있으니까! 그거면 충분해!
"후우, 얼른 누나 보고 싶다……."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커다란 냄비와 국자를 절묘하게 휘둘러 볶아낸 밥을 그릇 위에 담았다. 복스럽게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사부님. 제발 얌전히 드셔주세요.
#####
"그 소저는 누굽니까?"
"누구 말이냐?"
"거 린아璘兒 곁에 맨날 붙어있는 소저 말입니다."
"아, 비 소저 말인가. 내 예린이 말벗을 부탁한 아이야. 왜 그러느냐?"
정천맹주正天盟主 진천뇌벽검震天雷霹劍 나백천羅伯泉은 자신의 객실 앞에서 씩씩거리며 비류향이 누구냐 묻는 동생 나일천羅馹泉의 물음에 그리 되물었다. 이미 얼굴이 벌건 것을 보니 꽤나 술을 들이킨 듯 했다. 아직 해가 떨어지기에는 한참 시간이 남아있었건만 그러했다. 무심코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삼키고 있자니 나일천이 외쳤다.
"예린이 얼굴 좀 보러 갔더니 글쎄 대놓고 못 보게 막더이다! 형님이나 예린이 허락이 없으면 볼 수 없다면서요! 세상에 숙부가 조카 보는데 허가가 필요합니까!"
"……."
"'아이가 무서워하니 돌아가 주십시오. 아니면 맹주께 윤허를 받아오셨을 때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라니. 누가 보면 생판 남인 줄 알겠습니다! 예린이는 얼굴도 안 내밀고! 내 어릴 때 그토록 귀여워해줬거늘! 이리 문전박대라니!"
"……."
"이게 어찌 친지고 혈육입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침묵하는 나백천의 모습이 호응이라 생각한 것인지 나일천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그러나 너무 심하게 취했기 때문일까. 나일천은 친형의 눈이 매섭게 빛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허락 없이 아무도 예린이 숙소에 들어가지 마라고 했다."
"그야 그러시기는 했지만 친지 간에 굳이 그런 걸,"
"다시 한 번 말해야 알아들을 테냐."
"……."
서릿발 같은 형의 말에 나일천은 그제서야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동생을 노려보던 나백천은 축객령을 내렸다.
"내 이번 일은 취기로 인한 실수라 여길 테니 다음부터는 린아에게 함부러 가지 말거라."
"……흥. 팔병신 동생보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계집이 린아 옆에 있는 게 더 안심되십니까?"
"일천!"
나백천의 노호에 움찔한 나일천은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체 거칠게 몸을 돌려 사라졌다. 필시 또 술을 들이키리라. 피를 나눈 동생의 모습에 나백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비류향의 말이 떠올랐다.
『 이는 무례無禮로 형제간을 이간질함과 다름이 없는 죄악罪惡이나 감히 말씀드립니다. 예린이가 말하길 숙부의 마음에 큰 어둠이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두렵다 하였습니다. 부디 다가오지 않도록 살펴주십시오. 』
비류향이라는 소녀가 하기에는 제법 거친 말이었다. 그 자리에서는 형식상으로만 비류향을 꾸짖었으나 말 그대로 형식적일 뿐이었다. 딸을 바라보는 동생의 눈길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나백천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결혼도 하지 않아 자식도 없어 조카인 나예린을 특히 귀여워하는 것으로 여겼으나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딸인 나예린이 나일천을 꺼리는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혈육이었다. 거기에 정천맹 부총령으로서도 무난하게 일을 하며 자신을 도와주는 동생이었다. 언제까지고 강제로 밀어낼 수는 없었다.
"어렵구나, 어려워. 인사人事는 언제나 어려워……."
나백천은 탄식을 내뱉으며 객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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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이 목욕장면을 저리 길게 썼어야 했나 싶었지만, 마음 가는대로 타자를 두드렸기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
- 이제사 2부를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어 내용 수정이 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3화에서 비류향이 오두막 떠날 때 호위虎衛 관련 내용이 수정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 궁뢰신전 보고 싶네요 [?]
한자漢字, 오타,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