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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3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2.
- 2015.05.07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1.
- 2015.04.30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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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5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8.
- 2015.04.08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7.
- 2015.04.01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6.
- 2015.03.25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5.
- 2015.03.21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4.
- 2015.03.15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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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목점 은여우의 연애기담] 야시나리 혼례복 제작 분투기
[포목점 은여우의 연애기담]
야시나리 혼례복 제작 분투기
복잡한 일 하나가 끝났다.
아니, 어쩌면 더 엉키고 설켜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할 만큼 뒤엉킨 인과가,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인연에 닿았다.
굳이 어느 날이라고 특정할 수 없는 것은 분명 그 누구도 그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라 생각치 못하기 때문이리라.
해
가 떠있는 대낮의 일은 분명히 기억난다. 해가 진 밤 역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토씨 하나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네들과 있었던 일들은 마치 여름날 대낮 선잠 중에 본 꿈 속 풍경마냥 아스라히, 그러나 묘한 선명함을 품고 기억 한 켠에
남아있었다.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밤하늘을 그대로 옮긴 듯 수많은 별들이 쏟아지는 모습流星畵이 담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천이 증거로 남아있었으니까.
#####
평
양에서 돌아온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을까.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지만 모두가 포목점 은여우에 모여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남아있던
기억으로는 그러하였다. 누구랄 것도 없이 하나하나 어디에 누가 있었는지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으로는 매우 먼 광경이라고 느끼는 것이 기이한 일이었다.
젊은 남녀가 가게로 들어온 것은 미리 떠오른 저녁달과
태양이 서산을 넘으려고 하는 그 순간이었다. 의도된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으나 두 사람을 제외하면 다른 손님들은 하나도
없었다. 한양 제일의 옷가게라는 이름이 유명무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으햐, 간신히 성공했구만. 어떻습니까? 축지와 사람 물리기만큼은 내 당내에서 누구보다도 잘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너무 잘하셔서 걱정입니다. 이제는 떠날 사람이기는 합니다만, 진심으로 당이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어째서요?! 이토록 술법을 잘 다루는 이가 당주인데 든든해야죠?!"
"그 능력으로 하시는 게 일 때려치고 놀러가는 것 뿐이시잖습니까……."
경
은과 채선을 비롯한 포목점 은여우 일행 모두가 보고있는지도 신경쓰지 않고 주거니받거니 농담처럼 말을 주고받는 품새가 마치 오래
전부터 그래온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게 문제였다. 대화 내용은 둘째치고 옷차림을 보아하니 사대부 집안의 남녀 같은데 가게
안이라고는 하나 타인의 시선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저기,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금앵이었다. 그 말에 그제서야 남자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어이쿠, 미안하네. 우리끼리만 떠들고 있었구만. 여기 우리 유성당 하녀장님께서 혼례를 치르겠다고 해서 옷을 하나 지으려고 하거든? 듣자하니 요즘 한양서 포목점 은여우가 그렇게 잘나간다기에 맡기려 왔지."
묘
한 사내였다.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걸친 모습은 선비 같았지만 동시에 전혀 선비답지 않았다. 동네 건달이 선비 복장을 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렇다고해서 옷을 칠칠맞게 입었느냐고 하면 저렇게 잘 갖춰입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만큼 단정한 복장이었다. 그런
사내라서 그런지 분명 사대부 선비답게 진중하니 있었지만 어쩐지 광대패가 덩실덩실 춤추고 있는 것처럼 보여 괴이했다. 아니, 그전에
이 사내가 뭐라고 했지?
"하녀장……님?"
"그래. 하녀장님. 우리 당 집안일 대소사를 총괄하는 훌륭한 분이시지."
세
희의 물음에 사내는 그렇게 말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어 사내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뭐가 이상하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세상에
하녀장에 님을 붙이고 그것도 모자라 훌륭한 분이라고 말을 높이는 사내라니. 미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모두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한 것은 여인 측이었다.
"당주님. 아랫사람에게 경어를 쓰는 건 당내에서 인간 아닌 것들에게만 통하는 시대입니다. 지금은."
"그래요?"
"그렇습니다."
"밥해주고 청소해주고 빨래해주고 귀찮은 일 다 해주는 사람들에게 경어도 안 쓰는 시대였나요?"
"아쉽게도 그렇습니다."
"당 안에서는 안 그런데?"
"그건 당 안이니까요."
"흐음……, 이 나라는 아직도 미개한 상태로구만."
이
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선비 복장을 한 사내가 대놓고 나라가 미개하다고 하다니. 그러나 사람이 예상 외의 상황에 처하면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두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얼어붙어 있었다. 그런 주변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가
말을 이었다.
"여튼 혼례복이 필요하네. 허나 전통적인 혼례복은 안돼. 일평생 한 번 입을 옷인만큼 화려해야 하지만,
한동안 계속 입고 다녀야 하는 만큼 활동성과 기능성 역시 중요하거든? 그러면서도 이왕이면 2, 300년 정도는 입어도 괜찮을
형태여야하고. 음, 그쯤이면 되겠죠? 내 여우 신혼기간은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요."
"3백년씩이나 입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알콩달콩 지내면 되죠. 솔직히 지금 보면 한 5백년도 입고 다닐 것 같은데. 아아, 짝 없는 사람 어디 서러워서 살겠습니까."
"당주께서 조금만 주위를 신경쓰신다면 분명 배필의 인연이 생길텐데요. 너구리들과 여인네 멱감는 장면 훔쳐보기부터 일단 그만두시죠."
"어차피 보려고해도 다들 잽싸게 환술을 걸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풍산개 나리들과 도깨비님들이 등목하면 다들 일감 던져놓고 구경하는 건 어찌 변명하시렵니까!"
"저희는 보기만 할 뿐입니다. 당주님처럼 작대기에 치마저고리를 걸어 기수처럼 휘두르며 놀지는 않습니다!"
또
다시 유쾌한 만담을 이어가는 두 사람을 보던 세희는 문득 사내가 입에 담았던 유성당流星堂이라는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유성당. 유성당. 유성당? 분명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그러는 동안 도저히 남들에게 들려주지 못할 폭로전을 펼치고 있던 남녀에게
질문을 던진 것은 경은이었다.
"조금 더 설명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남녀 모두 음란하지 않았다면 생명이라는 것은, 어? 음?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혼례복을 입으실 분은 옆의 분이 맞습니까?"
"예."
대
답은 여인이 했다. 옆에 주인이라는 남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경은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유생으로서 한마디
해야하나?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러지 않았다. 여인의 눈을 본 순간 자연스럽게 질문이 의미가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지적으로 빛나면서도 '인간'적이지 못한 눈동자가 그렇다고 고하고 있었다.
"혼례복인데 한동안 계속 입으신다는 게 무슨 얘기입니까?"
"여우의 혼례이기 때문입니다."
"……여우의?"
"예. 맑은 날 비 올 때만 조금씩 해나가는 기나긴 혼례라서 그렇습니다."
이
건 또 무슨 농담이란 말인가. 여우의 혼례식? 맑은 날 비 올 때만 조금씩 식을 진행한다? 잠자리에 든 아이들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도 아니고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포목점 은여우 일행 모두가 이에 대응하지 못한 것은, 그 뒤에
여인에게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여우……?"
여인이 머리를 풀어헤친 순간, 사라락하고 내려온
머리카락에 사림의 귀가 가리져는 것과 동시에 머리 위로 아닌 귀가 쫑긋 하고 튀어나왔다. 그리고 치마저고리 뒤쪽이 갈라지며 사라락
하고 폭신폭신해보이는 꼬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가 아니다. 저녁밥 연기마냥 뭉실뭉실 흘러나온 여우꼬리는 모두 아홉 개였다.
"구미호……?"
"걱정마세요. 간은 안 빼먹습니다."
"사람들 반응을 보아하니 여우 처음보는 얼굴인데 그런 얘기하면 다들 농담으로 안 받아들일 걸요? 내 그토록 농담감각을 갈고 닦으라 했는데……."
"한 번도 그런 얘기 안하셨습니다만!"
"흘러간 기억 어딘가에 분명 있을 겁니다."
여튼,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 사내, 유성당주는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야시나리(여우님) 혼례복 좀 지어주시게."
#####
3권 읽고 뭔가 떠올라서 후다닥.
신臣에게 전반적인 조선 후기의 모습과 혼례복에 대한 고증을 해줄 이와 시간을 주신다면 능히 이 헌정단문을 완성시킬 수 있나이다. <-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2.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2.
그러니까 대충 열다섯 살 되던 해 초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레에 한 번 대장간이 쉬는 날이었기에 오후 시간이 비어야 했지만 나는 나물캐기와 사냥을 위해 아미산을 타고 있었다. 사부도 술 마시러 놀러갔겠다, 놀기 딱 좋은 날이었지만 사부가 수련거리─인 척하는 재화벌이─를 명하고 갔기에 우울한 심정으로 오두막을 나섰다. 청명한 하늘과 상쾌한 바람이 나를 더욱더 우울하게 만드는 날이었다. 그나마 누나가 산 타다가 배고프면 먹으라고 싸준 도시락이 있어 그나마 기분전환이 되었다.
누나의 도시락과는 별개로, 놀기 좋은 환경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나를 위해 하늘에서 선물을 내려주신 걸까. 나무 그늘 아래서 청아한 향기와 고결한 기품이 느껴지는 청보랏빛 꽃 세 송이가 피어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내 뇌리에 경종이 울렸다. 돈 된다. 분명 이것은 돈이 된다. 그것도 매우 큰 돈이.
매우 신속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땅을 파던 나는 순간 깜짝 놀라 손을 멈추었다.
"우와……."
어른 손바닥 만한 나신裸身의 여체女體가 있었다. 세상에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숨쉬는 것조차 잊어버릴만큼 경이로운 광경을 얼마나 보고 있던 것일까. 코끝을 간질이는 청아한 향기가 아니었다면 하루 종일 그 광경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신 차려라 비류연. 세상에 손바닥만한 인간이 어디 있으며 그런 인간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단 말이더냐. 눈꺼풀 벗겨저라 거하게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거기에는 한 뿌리의 산삼이 다소곳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게 바로 인형설삼人形雪蔘이구나.
그야말로 금덩이를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산이 흔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환호성을 터뜨리고 싶었으나 급작스럽게 떠오른 사부의 모습에 냉정을 되찾았다. 진정해야지. 심호흡과 함께 영사심결로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곧 고민에 휩쌓였다. 이걸 팔 것이냐, 먹을 것이냐. 전자前者의 경우는 막대한 돈을 얻을 수 있었고, 후자後者의 경우에는 심후한 내공을 얻을 수 있었다.
아니면 누나를 먹이느냐.
이제 와서 무엇을 숨기랴. 사실 제일 바라는 건 이쪽이다. 허나 오래 전 돌림병으로 상중하 삼단전과 전신기맥이 모두 망가진데다가, 내가 열두 살 때쯤 서오西汚놈에게 큰 내상을 입었던 누나의 몸에 영약은 독으로밖에 작용하지 않는다. 주화입마나 뭐 그런 건 걱정이 없지만, 극양極陽의 영약을 먹으면 열이 심하게 나고, 극음極陰의 영약을 먹으면 반대로 체온이 심하게 떨어지는 식이다. 약발을 잘 받는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앓고 나서 몸이 전혀 안 좋아지니 결코 좋은 게 아니다.
그걸 뼈저리게 느낀 건 누나에게 산삼을 먹였을 때였다. 예린이가 떠난 그해 겨울, 사부가 잠깐 놀러간 틈을 타서 누나 몸보신을 위해 고려국 인삼이라 속이고 산삼 넣은 삼계탕을 준비했었는데 그걸 먹고 열이 올라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것이다. 다행히 의사용안과 수련으로 오른 공력을 사용해 재빠르게 양기를 흩어내고 흡수한 덕분에 누나는 반나절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소림의 대환단도 네 누이에게는 독이다. 알겠냐?"
제자는 가차없이 굴리면서 누나는 애지중지하는 사부님은 돌아와 누나를 보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채고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귀한 거 사부한테 안 바치고 지 누나한테만 갖다바친다고 맞았다. 약藥이라는 게 원래 몸이 약弱한 사람이 먹는 거니 당연히 누나에게 줘야 된다고 했더니, 되려 누나가 자기는 괜찮으니 다음부터는 사부님 드리라고 했다. 아니야, 누나. 사부님은 안 먹어도 강한 사람이야.
어찌되었든, 심사숙고 끝에 나는 이 인형설삼을 내가 먹기로 했다. 돈도 돈이지만 몸이 제일이니까. 우선 누나의 도시락으로 빈 속을 채우고 한 식경 동안 사부가 가르쳐 준 영약 섭취시 주의사항을 되새긴 후, 꽃부터 뿌리까지 조심스레 입 안에 머금었다. 그러자 분명 딱딱한 뿌리며 질긴 줄기 같은 게 느껴지지 않고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더니 청아한 향기만을 남기고 자연스럽게 식도를 타고 뱃속으로 사라졌다.
어느 시점부터 뇌령심법을 운용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시작은 양陽의 삼蔘이었을 인형설삼은 극양도 극음도 아닌 순수한 기운을, 폭포처럼 몰아치는 거대한 힘을 품고 있었다. 그 힘이 육신을 거세게 후려치고 영혼을 찢어발기는 듯 했다. 도저히 제정신이라고 할 수 없는 시원時原의 혼돈 끝에 엄청난 깨달음이 영혼을 강타하고 갔다. 뇌령심법을 운용하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거대한 충격이었다. 문득 주화입마라는 단어가 떠올랐지만 자연스럽게 뜨여진 눈에 보이는 풍경을 본 순간, 모든 것이 끝났기에 자연스럽게 뇌령심법 운용을 멈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부터 하고 있었는지 모를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끄응~”
상쾌하다. 몸은 날아갈 듯 가볍고 정신은 바다처럼 넓으면서도 호수처럼 고요했다. 맑고 청명한 기운이 몸 안에 가득했다. 이야, 좋구나.
문제는 운기조식 전에 캤던 약초들이 죄다 쓸모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뭐, 쓰자면 못쓸 것도 없지만 캐서 바로 다음 날 약장藥場에 파는 것에 비하면 시원찮은 상태였다. 상태를 보아하니 사나흘 정도 지난 듯 했다. 그나마 짐승을 안 잡아서 다행이구만. 만약 사냥한 것들이 있었다면 진작에 썩어버렸거나 다른 짐승들이 낚아채 갔으리라. 내가 힘들게 잡은 걸 그런 식으로 못 써먹게 만들면 정말 가슴이 아프다.
여튼 며칠 지났다는 걸 깨달은 순간 빈손으로 돌아가면 사부님에게 추궁당할 게 뻔했기에 해가 질 때까지 근방의 약초란 약초는 죄다 캤다. 하는 김에 주제 파악 못하고 나를 덮치려던 호랑이 한 마리도 잡았다. 몰래 팔면 제법 큰 비자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인형설삼 먹은 거에서 더 이득을 보려다 피를 보느니, 그냥 사부님께 바치기로 했다. 대를 위한 작은 희생이다.
여튼 그렇게 돌아온 나를 맞이해준 것은 마루에 앉아 잠든 누나였다. 그제서야 누나가 걱정하고 있었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마음 같아서는 조용히 들어가고 싶었지만, 약초 바구니와 호랑이 시체가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약초는 몰라도 호랑이는 지금 당장 손질을 해둬야 비싸게 팔 수 있다. 별 수 없이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누나, 나 왔어.”
“……어서오렴.”
언제 자고 있었냐는 듯 깜빡 하고 눈을 뜬 누나는 내가 짊어진 호랑이를 보고는 놀란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
평야라면 노을빛에 물든 대지의 잔광殘光이 남지만 산으로 둘러쌓인 오두막은 해가 빨리 진다. 해는 이미 산 너머로 넘어간지라 어둑어둑했기에 비류향은 아궁이에서 불씨를 꺼내 등불에 불을 붙였다. 오두막 문가에 하나. 마루에 하나. 홀로 남은 오두막에 불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사아아아…….
산바람에 빗소리처럼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비류향은 그 소리를 들으며 마루에 앉아 천천히 숨을 골랐다. 나름 시골출신에 산에 살면서 체력이 붙었다고는 해도, 사람이 두 번이나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오면 기초체력이라는 게 턱없이 낮아지는 법이다. 거기에 후유증까지 있다면야. 일반인이었다면 외공이라도 배워 단련할 테지만 체질상 그 어떤 무법武法도 효과를 얻을 수 없기에 그저 자주 쉬어주는 수 밖에 없었다.
호흡을 가라앉히며 비류향은 문가를 바라보았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등불이 비치는 곳만 약간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안 오려나. 벌써 닷새 째 본의 아니게 혼자 오두막을 지키고 있었다.
“천향루에 좋은 술이 들어왔다니 마시러 갔다오마. 한 일주일 정도 있다 올 거야.”
노사부가 그리 말하며 나가고 다음 날, 약초를 캐러 간다던 동생 비류연 역시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고라도 난 것일까. 만약 백무후가 찾아와 동생은 무사하다는 얘기─라기보다는 스무고개 방식으로 겨우 알아차린 것이다─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걱정하고 있었으리라. 단 둘뿐이라고는 하나 나름 무가인 곳에서 일하고 있어도 무인의 생리는 잘 모르지만 도중에 깨달음을 얻어 수련하고 있다보다 했다. 그런 일도 있다는 얘기를 시장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래도 벌써 나흘째. 해가 뜨면 닷새고 노사부가 돌아올 때도 되었기에 다시 걱정되기 시작했다. 혹시나 방해가 될까봐 쉽사리 그러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내일은 백무후와 팔섬풍에게 부탁해 동생이 있는 곳에 찾아가봐야 할 듯 싶었다. 무공 수련하는 몸인데다가 백무후와 팔섬풍에게 물을 때마다 괜찮다는 얘기를 듣지만, 여든 노모가 예순 노인을 걱정하는 법이라 했던가. 모자母子도 아니고 나이도 고작 세 살 차이지만 하나뿐인 혈육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비류연의 나이가 떠올랐다.
연이가 벌써 열다섯이구나.
내년이면 열여섯, 성인이 되는 아이건만 눈을 감으니 어릴 적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그래도 말하는 품새나 행동거지도 제법 어른스러워졌고, 여태껏 아미산을 들쑤시고 다니며 온갖 약초를 채집하고 짐승들을 사냥한데다가, 무공까지 수련했으니 겉보기랑은 다르게 힘도 엄청나게 강할 것이다. 키도 벌써 자신과 비슷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집 남매들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고작 세 살 차이 밖에 안 나는 누이 말을 잘 들와 줬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마저도 세상을 뜨셨건만 잘 자라주었다. 비류연. 연아.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나의 동생아. 네 누이로 태어난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매일 말해주지 못하는 게 미안하단다.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림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게 벌써 5년 전 일이었다. 열세 살 꼬마였던 자신 또한 어느 덧 열여덟 여인이 되어있었다. 조금 더 지나면 연이가 새색시를 데려와 일가의 가장이 되지 않을까. 무림에서 활동하게 될 테니 조금 더 늦으려나. 그러면 여기가 아니라 좀 더 마을에 가까운 곳에 집을 얻겠다. 어쩌면 사천을 떠나 다른 곳에 갈 지도 모르고. 노야께서 윤허해주셔서 가끔 보러갈 수 있으면 좋겠다…….
“누나, 나 왔어.”
언제 잠들었던 것일까. 동생의 목소리에 비류향은 눈을 떴다. 문가에는 호랑이 시체를 짊어진 동생 비류연이 서있었다. 놀랐다. 백무후와 팔섬풍과 함께 지낸 시간이 있어 덜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놀란 건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할 말이 있었다.
“어서오렴.”
“……응.”
멋쩍은 듯한 웃음과 함께 비류연은 마당 한 켠에 호랑이와 약초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왠 호랑이를 잡았니? 덮쳐오길래 제물이겠다 싶어서 잡았어. 제물? 공양이랄까. 사부님께. 기특하네. 하. 하. 하. 기특하기는. 아참, 배고프지? 저녁 준비할게. 아냐, 내가 준비할게. 호랑이 고기 먹자. 금방 되겠어? 물론이지. 아궁이 불만 지펴줘. 그래, 알았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짧은 대화가 오가고, 누이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비류연은 발끝으로 마당에 핏물 빠질 배수로를 파낸 후 품 안에서 비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호랑이 시체 앞에서 부처님께 기도하듯 합장을 한 후,
“자, 시작해볼까~ 흠~ 흠흠~”
정교하고도 재빠른 손놀림으로 호랑이 시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나흘 만에 누이와 함께하는 식사를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
어느 날, 노사부는 구슬을 꿰는 동생 옆에서 옷자락에 수를 놓던 비류향을 불렀다. 드문 일이었다. 바깥이라면 모를까 이 산 속 오두막 안에는 어디든지 비류향이 노사부를 위해 준비한 것들 뿐이었다. 그리고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상황에 따라 적절히 노사부가 원하는 물건들을 내놓기에 부르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불려간 비류향이 받은 것은 한 잔의 술이었다. 무슨 술인지는 몰랐으나 밑도 끝도 없이 받은 잔에 술이 채워질 때마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노사부의 눈을 보아하니 매우 귀한 것인 게 틀림없었다. 귀한 것을 주시는구나. 어느 덧 스물둘 여인이 된 소녀는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잔을 받아들었다.
“마셔라.”
비록 주향이 맴돈다고는 하나 뭔지도 모를 것을 먹으라 명 받았건만 비류향은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는 잔을 입에 대고 내용물을 남김없이 마셨다. 청아하고 은은한 향과 입안에 맴도는 희미한 달콤함과는 달리, 식도를 태우며 위장으로 흘러들어간 액체는 자연스럽게 기침이 나오게 했다. 그러나 비류향은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 병자도 아니거늘 하사하신 주酒를 마시고 기침을 내뱉는 것은 무례無禮다. 그리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큽…… 쿠흡, 크흠……. 푸흡…….”
그 모습에 노사부는 참지 말고 기침하라 하였다. 그제서야 비류향은 거친 기침을 쏟아냈다. 격한 기침에 옆방에서 구슬을 꿰던 비류연이 달려왔지만 노사부는 약 먹은 거니까 호들갑 떨지 말라며 가볍게 제자를 쫓아냈다. 누나 괜찮은 거 맞죠?! 아 맞다니까! 넌 사부를 그렇게 못 믿냐! 사부님을 믿지만 사부님을 믿는 저를 더 믿습니다! 헛소리 하지 말고 구슬이나 꿰어 이것아! 소란 속에서 기침이 점점 잦아들어갔다.
“하, 하아……. 하아……. 후으…….”
“그래, 좀 어떠냐.”
한참 기침을 내뱉고 나니 근육이 당겼지만 술기운과는 다른 다른 청량감과 기분 좋은 온기가 온몸에 퍼져 있었다. 그것을 말하자 노사부는 “약쟁이 놈 약재 삥땅치지는 않았군.” 이라고 중얼거리고는 말했다.
“어제 내가 부엌에 가져다 놓은 항아리 있지?”
“예.”
”거기에 든 게 방금 준 술이다. 엄청 귀하고 비싼 약재 담가서 만든 건데 사흘에 한 잔 씩만 마셔라. 명심해. 딱 한 잔이야! 더 마시지 말어!”
“이리 귀한 술을 어찌…….”
“골골대지 말라고 주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식재만 축내는 부족한 아이도 이리 챙겨주시는구나. 그런 생각으로 감사의 마음이 가득한 비류향의 눈빛에 노사부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 향이랑 류연이 놈 섞어서 반으로 나누면 참 좋을 텐데. 그리 생각하며 노사부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절대 류연이 놈은 주지 마라. 그놈은 산 타고 다니면서 약초며 영물이며 제일 좋은 것들 알아서 주워먹고 있으니까 안 챙겨줘도 돼.”
“……네.”
반드시 지키라는 듯 엄포를 놓는 노사부의 말에 비류향은 유쾌한 사제지간의 모습에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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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 약초꾼과 사냥꾼들 사이에서 백호선녀白虎仙女의 소문이 떠돈 것은 대여섯 해 전부터였다. 처음에는 왠 소녀가 백호를 타고 아미산을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입소문을 타고 눈덩이처럼 불어나 이제는 사실 그 소녀가 둔갑한 백무후라느니, 아미파의 절정고수 중 하나가 반로환동으로 젊어져 백호를 타고 다니는 거라느니 하는 얘기까지 나오는 수준이었다.
아미산 산기슭 어디든 선녀가 백무후와 팔섬풍을 거느리고 다닌다는 얘기는 애들 잠자리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였으나, 실제로 멀리서 백호선녀의 모습을 보는 이가 하나 둘 늘어나자 이제는 다들 믿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호기심이 생기는 게 사람인지라 아미파에서 한동안 백호선녀의 정체를 알아보고자 했지만, 사람이 다가갈라치면 신출귀몰하게 사라져 결국 포기한 것이 3년 전이었다.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 사람 피하는 이를 애써 찾을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거기에는 지난 날 백무후를 토벌하자고 했다가 하지 않은 전례도 힘을 더했다.
무림인들이야 어찌되었든, 약초꾼과 사냥꾼, 그리고 나무꾼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백호선녀를 만나면 그날 운수가 좋다는 믿음이었다. 선녀를 보면 자주 보기 힘든 희귀한 약재를 캔다, 잡기 어려운 사냥감을 잡는다, 질 좋은 목재를 발견하거나 그날 도끼질이 잘 된다 등, 백호선녀는 이미 민간신앙의 영역에까지 도달해있었다.
물론 그런 건 단순한 헛소문이라 치부하는 사람들 또한 있었다. 금재월金才鉞 역시 그러한 사람이었다. 이름만 보면 도끼 좀 쓰는 나무꾼 같았지만 정작 그의 생업은 약초 채집이었다. 어찌되었든 그는 백호선녀 이야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혹여나 동료들이 그에 대해 얘기하면 말도 안되는 소리 말라며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적어도 며칠 전까지는 그랬다.
초여름에 들어서 제법 더웠던 그날, 재월은 땀 좀 씻고 목도 축일 겸 자신만 아는 냇가로 향했다. 초목에 가려 찾기는 어렵지만 들어가면 제법 너른 바위를 휘감는 계곡물이 흐르는 명당이었다. 잽싸게 등에 짊어진 약초 바구니를 내려놓고 소매를 걷은 후 계곡물에 손을 담갔다. 어이구, 차가워라. 계절에 아랑곳하지 않고 뼛속까지 시려오는 계곡물로 세안이며 양치며 땀과 흙먼지를 씻어내고 있자니 문득 이상한 기운을 느낀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음? 으헉?!"
적호赤虎. 아니, 백호白虎였다. 뭘 하다 그리 되었는지 모를 만큼 피칠갑한 얼굴 때문에 적호로 보인 것 뿐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대체 어느 새 이토록 가까이 다가왔단 말인가.
“그르르르르르…….”
“아, 으아으, 으흐흐, 으으…….”
낮게 깔리는 산군山君의 울음소리에 오금이 저려왔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이대로 죽는구나. 눈앞의 풍경을 덧씌우듯 지난 날의 삶이 좌르륵 스쳐지나갔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이라 생각했으나 별의별 오만가지 추억들이 우후죽순 떠올랐다. 그 끝이 이렇게 허무한가. 어머니 아버지. 불효자는 먼저 세상을 뜹니다! 재월은 천천히 다가오는 백호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지? 그 순간 찰박찰박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에라, 모르겠다. 죽더라도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고 죽어야지. 그런 생각에 재월은 눈을 떴다. 거기엔 백호가 계곡물을 핥짝이고 있었다. 단순히 물을 마시러 온 것이었나. 그 생각에 맥이 탁 풀리려 했으나 그 순간 백호가 고개를 들어 재월을 바라보았다. 맹수라고는 하나 결국 짐승이다. 허나 백호의 눈빛은 어지간한 사람들보다 깊고 맑았다. 영물이다. 영물이야. 백무후와 팔섬풍 중 하나겠구나. 어이구야.
자박자박 돌 밟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고개를 돌린 재월─훗날 그는 그때 도대체 어떻게 백호를 앞에 두고 고개를 돌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몸서리쳤다─의 시야에 지팡이인 듯한 장대를 든 여인이 들어왔다. 허름한 의복이었지만 끝단이 헤지거나 주름 잡힌 곳 없는 옷을 맵시있게 입은 여인이었다. 산행에 지친 듯 땀이 맺힌 얼굴은 산 사람치고는 생기가 희미했다. 그래서인지 제법 아름다운 얼굴이건만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여인은 백호를 보다가 재월을 눈치채고는 살짝 미소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 그, 그어, 그래……. ”
얼떨결에 인사를 받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웃으니까 좀 사람답구나. 아니, 정말 사람이 맞기는 한 건가? 피칠갑한 백호를 보고서도 놀라지 않으며 등에 짊어지고 있던 약초 바구니를 내려놓은 여인이 물가로 다가오는 것을 본 재월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아니, 너, 무슨…….”
찰박. 찰박.
여인은 자연스럽게 백호 곁에 다가가 피칠갑인 백호의 얼굴을 정성스레 씻기기 시작했다. 새끼 고양이마냥 낑낑거리는 백호를 어르고 달래며 피를 닦아내는 그 모습은, 마치 씻기 싫어하는 어린 동생을 씻기는 큰누나의 그것처럼 보였다.
“낑낑…….”
“참아. 백모白母께 한소리 듣는다.”
“끄응…….”
호랑이가 다른 고양잇과 생물들과는 달리 물을 좋아한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 손길로 귀며 수염이며 문지르는 걸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백호라고 아니그러할까. 그런데 우마牛馬보다 더 큰 백호가 훨씬 작은 여인의 행동에 따르다니.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이게 현실의 일이 맞는 건가?
공황 상태에 빠진 재월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호의 얼굴에서 피를 모두 씻어낸 여인은 자신 또한 계곡물로 세안을 하고는 다시 약초 바구니를 짊어졌다. 그러자 백호가 여인의 치맛자락을 살짝 물어당기며 엎드렸다. 그 모습에 여인이 괜찮다는 듯 가로저었지만 막무가내인 백호의 태도에 결국 조심스레 백호의 등 뒤에 올라탔다. 세상에 맙소사. 지금 내가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여인을 등에 태우고서야 일어난 백호는 마치 여인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듯한 발걸음으로 조용히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퍼뜩 정신을 차린 재월은 허겁지겁 짐을 챙겨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서두르던 나머지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진 그는 격통 속에 몸부림치다 백년삼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그는 열렬한 백호선녀의 신봉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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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백호선녀라…….”
“아 글쎄 진짜 있다니까요, 어르신!”
“누가 안 믿는다고 했나? 난 그저 어떤 고수인가 싶어서 그런 걸세.”
아미산 초입의 객잔에서 한참 백호선녀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철담비환鐵膽飛丸 진조운眞朝暈이었다. 천무학관의 요청에 따라 아미산으로 찾아올 주작단 16인을 가르치기 위해 온 무림고수인 그가 백호선녀 얘기에 관심을 드러내자 약초꾼이며 사냥꾼이며 아미산에 생업을 둔 이들 모두 신이 나서 그 얘기를 해주었다.
“아미파에서도 한때 정체를 밝혀볼까 했었는데 실패했지요.”
“그건 실패가 아니라 그냥 놔두자는 거였잖나.”
“아, 그렇구만.”
“여튼 여기 금재월이 이 사람이 백호선녀 얼굴 제일 가까이서 본 사람입니다.”
“어찌 생겼었는지 다시 말 좀 해드려 이 사람아.”
“그러니까, 와 이거 진짜 뭐라고 해야 되나. 음, 사람인데 사람 같지 않달까, 살아 움직이는데 허깨비처럼 생기가 없어 보이고. 예쁘긴 예쁜데 생기가 잘 안 느껴지니까 진짜 사람 같지가 않더라니까. 그런데도 웃으면 되게 예쁜,”
“거 누가 첫사랑 고백하랬나?”
“에이! 말도 안되는 소리 말어!”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을 보며 진조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적어도 자기가 아는 고수들 중에 약초꾼이 말한 인상착의나 기운을 풍기는 이는 없었다. 그것도 여성으로 한정한다면 하나도 없다. 혹시나 천겁혈세 때의 인물들까지 떠올려봤지만 도저히 맞는 이가 없었다. 대체 누구길래 백호가 자연스럽게 등에 태워주는 걸까. 특수한 무공을 수련했다 하더라도 고수일 것이고 그런 것 없이 순수한 힘으로 영물이 따를 정도라면 지고한 영역에 도달한 기인이리라. 그나마 나쁜 소문이 없다는 게 다행이었지만, 일반인에게만 이리 대하고 무림인에게는 달리 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먼저 가보겠네.”
“살펴가십시오, 어르신!”
일반인들에게도 이름이 알려진 고수가 자신들 얘기를 들어준 것이 기뻤는지 다들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객잔을 나선 진조운은 경공을 발휘해 아미산을 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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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타입문넷 자창게 글/조아라 1화)과 본문에서 등장인물들 간에 태도 차이가 나는 건, 서문은 연재 생각 없이 썼던 거라 그렇고 본문은 2부를 읽으면서 전개를 다 뒤집었기 때문입니다. 조아라 11화 후기에 언급했었는데 헷갈리시는 분들이 있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 최대한 원작의 등장인물과 전개를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하지만, 비틀어야 재밌는 게 팬픽이죠. 항상 고민하고 있습니다.
- 추가. 백호신녀라 되어 있던 부분 수정했습니다. 타입문넷 Satze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호랑이가 고양잇과 생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물을 좋아하는 동물이라는 제보를 받아 해당 부분 역시 수정했습니다. 조아라 다크비하인드 님 및 기타 제보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1.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1.
아미산은 험준하기로 소문난 산이지만 그렇다고해서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무작정 절벽과 수풀만 무성한 곳은 아니다. 다른 산처럼 세월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공터도 제법 있는 편이고, 그러한 공터 중 한 곳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노인. 여인. 여아 둘. 험하디 험한 아미산 산중, 그것도 이제 산 너머로 쏟아지기 시작한 햇살 아래서 보기에는 매우 기묘한 조합이었고, 이들이 하고 있는 일 또한 기묘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낸다면 여인의 모습은 이제 갓 중년에 든 것처럼 보이리라. 그만큼 고아하고 차분한 인상이었다. 슬그머니 그어지기 시작한 주름은 단순한 세월의 흔적이 아니라 수많은 경험의 증명이자, 유의미한 시간을 쌓아올린 이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현묘함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체, 앞에 선 노인에게 쉼없이 공세를 퍼붓는 여인의 모습은 마치 이제 갓 검을 잡은 무가武家의 아이 같았다. 물론 여인의 검로劍路에 아이와 같은 미숙함과 젊은이 특유의 조급함은 없었지만, 아이들만이 가지는 활기와 즐거음, 그리고 젊은이들의 특기라 여겨지는 패기와 기세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향상심. 무武를 향한, 상승의 경지를 갈망하는 진지함. 경탄할만큼 순수하고 올곧은 마음心이 나예린의 용안과 의사용안을 전개한 비류연의 눈에 파고들었다. 저런 식으로도 사람의 마음이 빛날 수 있다는 사실에 두 사람은 적잖은 충격을 받고 있었다.
반면 노사부는 시종일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이는 손에 쥔 대나무 빗자루를 설렁설렁 휘둘러 여인의 검을 막는 와중에도 마찬가지였다. 무학을 수련하지 못한 나예린은 물론이거니와 비뢰문의 유일한 제자로 제법 수련을 쌓은 연비─비류연 역시 마음 속으로 지금의 자신이라면 절대 막지 못한다고 생각한 공격들을 노사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고 있었다.
“……빗자루를 선택하신 건, 그게 제일 길었기 때문이십니까?”
“오냐.”
여인이 잠시 물러서 숨을 고르며 묻자 노사부는 그렇게 대답했다. 정말 귀찮은 듯한 태도였다. 아마 단 한 번도 반격을 하지 않은 이유 역시 그것일 것이다. 그러나 사정을 아는 이들이라면 경악을 금치 못했으리라. 천무삼성의 일원인 검후 이옥상의 진심어린 공격을 발 한 자국도 떼지 않고 모조리 파훼하는 노인이라니. 그것도 보이는데로 그냥 집어온 대나무 빗자루로 해낸 일이라는 건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손목만 까딱여도 될 만큼 긴 게 빗자루라서 빗자루 드신 걸 거에요. 게으르신 분이시거든요.”
“다 들린다 이것아!”
나예린에게 몰래 사부의 험담을 속삭이던 연비는 노사부의 호통에 꺄아, 하고 거짓 비명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노사부는 못 볼 것을 본 것마냥 부르르 떨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검후를 향해 말했다.
“제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를 확실하게 잡아야 돼. 알겠냐?”
“아하하하, 명심해두죠.”
“거 네가 데려갈 애는 향이가 잘 가르쳐서 괜찮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돼. 제자라는 건 꼭 순식간에 비뚫어지더라고. 거참 제자 복이 없어, 제자 복이……."
노사부의 푸념에 검후가 웃으며 대답했다.
“대신 인복人福이 있으시잖아요?”
“인복? 뭐? 아, 향이?”
“네. 요즘 세상에 그런 애가 어딨는데요. 없어요. 마음 같아서는 그 아이도 데려가고 싶은걸요?”
“안돼. 간만에 발품 좀 팔아서 피곤한 거, 향이 수발 받아서 풀어야 돼.”
“사부님, 그 얘기 언니가 들으면 어쩌시려고요?”
“아, 거…… 끄응……. 못 들은 걸로 해 둬.”
제자의 말에 말을 바꾸는 노사부의 모습에 검후는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만사 두려울 게 없는 노인이건만 비류향이라는 소녀에게만큼은 약했다. 극진함의 화신인 듯한 소녀의 정성이 부담스러운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게 인간의 본성이고, 본성에 연연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음에도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노인이라도 소녀─비류향의 지극함에는 당해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절정고수들의 싸움으로 내력이 부딪쳐 만들어지는 파동으로 내상을 입을 수 있으니 따라오지 말고 기다리라는 노사부의 말에 홀로 남은 비류향이 방금 전 노사부의 말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노인의 수발을 들기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정성을 다해 준비하리라. 얼굴을 본 건 고작 일주일이지만 검후는 어렵지 않게 그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미소를 그려졌다.
“하여튼, 이제 끝난 거냐?”
노사부는 퉁명스레 물었다. 애초에 원하지 않는 대련이었다. 노사부가 돌아다니다보니 예상보다 일주일 정도 늦게 도착했는데, 먼저 와 있던 검후가 그동안 진기 고갈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비류향에게 진기를 주입해었주고, 그와 더불어 매우 좋은 술 한 병을 바친 덕분에 간신히 이 자리가 성립된 것이었다. 혼자서도 알아서 쑥쑥 크는 애가 뭘 더 배우겠다고 노구를 힘들게 해, 아 몰라 뭐가 아쉬워서 너랑 투닥거리냐, 한참 어린 애랑 싸우면 주변에서 욕해서 안해요 등등 온갖 변명을 늘어놓다 이 자리에 섰으니 내키지 않을 만도 했다.
그런 노사부의 심정과는 달리 검후는 굉장히 신이 난 상태였다. 검후 정도의 고수에게 있어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상대란 극히 한정되어 있으며, 말 그대로 전력을 다할 수 있는 상대란 손가락에 꼽을 정도가 된다. 그런데 눈앞의 노사부는 자신의 모든 절초와 비기를 쏟아붓더라도 쓰러뜨릴 수 없는 상대였다. 손끝 하나 닿지 못한다는 건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일이었지만, 안심하고 모든 기술을 아낌없이 써볼 수 있다는 것은 그러한 단점을 단숨에 메꿔버릴만큼 굉장히 매력적인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검후는 구상을 마치고 이제 갓 연검練劍을 시작한 최후의 절기를 사용해보기로 했다.
“마지막 하나만 더 받아주시면 됩니다.”
함께 천무삼성이라 불리는 친구 중 하나인 도성 하후식이 강을 갈랐다며 보여준 초식에 자극받아 수련중인 기술. 아직 미완성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노사부에게 사용해보기로 한 것이다. 이 괴물 같은 노인은 분명 아무 탈 없이 받아내리라. 그 옛날 검을 처음 배우던 시절, 스승님께 어설픈 검기를 자신만만하게 펼치던 것을 떠올리며 검후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것만으로도 순식간에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고오오오오────
겨울바람이다. 투명하고 날카로운 냉기를 머금은 동풍冬風은 계절에 맞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초월적인 힘이었다. 의념意念이 자연의 섭리에 간섭하는 초월의 경지. 그러나 그것을 보고도 노사부는 안색을 바꾸지 않았다.
“에잉, 쯧. 후딱 해 봐!”
자세를 가다듬기는커녕 귀찮다는 듯한 얼굴 그대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서 있는 노사부의 모습은 헛점 투성이였다. 허나 검후는 어디를 향하더라도 사문死門이 되는 노사부의 헛점을 보며 미소지었다. 과연 기인奇人이며 성인成人이다. 그리 생각하며──
“말학末學의 기술, 받아주십시오!”
해상비조천참절海上飛鳥千斬切
──무지막지한 내공이 실린 검을 노사부를 향해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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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천……. 천겁령……. 허허……."
서천에서 한중으로 가는 문턱인 검각.
촉한 최후의 항전지로 유명한 이곳에서 누군가에게는 마지막이고 누군가에게는 처음인 객잔에 앉은 한 노인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후자는 100년 전부터 뒤숭숭한 단어였고 전자는 요 근래에 뒤숭숭하게 된 단어였다. 한 달 전 같았으면 노인네가 불길한 말을 입에 담는다며 꺼림칙해 했을 테지만, 다행스럽게도 요즘에는 언제 어디서든 모이기만 하면 다들 그 얘기였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범인凡人들과 다른 점이라면 은연중에 두려운 기운을 풍기는 대중과는 달리, 노인은 매우 귀찮아하면서 동시에 짜증 섞인 분노를 피워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기운으로 인해 거리에서 이름 좀 날린다하는 건달패가 기세 좋게 객잔에 들어왔다가 노인의 기도에 눌려 숨도 크게 못 쉬고 조용히 나간 게 방금 전 일이었다.
“성질머리만 급해서는 노인공경도 못하는 놈들 때문에 놓쳤구만. 에잉…….”
한 달 동안 이 잡듣 사천땅을 뒤지던 노인─노사부는 개방 거지들로부터 불과 나흘 전에 뒤숭숭한 기운을 풍기는 외팔이가 이 근방에서 목격되었다는 정보를 얻었다. 고작 나흘 차이로 놈을 놓쳤단 말인가. 간만에 사천땅을 돌아다니다보니 별 것 아닌 무인 나부랭이들이 시비를 걸어대길래 친히 교육적 가르침을 사사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리고 그로 인한 적절한 보상을 받느라 지체되지만 않았더라면 직접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노사부는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아, 조지러 갈까, 말까…….”
굳이 인간이 아니더라도 좋다. 원념이든 지박령이든 정령精靈이든 신수神獸든 닥치고 후드려패 놈이 간 길을 묻다보면 금방 뒤를 쫓을 수 있으리라. 정 안되면 구역질 나는 놈의 혼백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면 될 일이다. 섭리와 천도天道에 위배되는 일인지라 저승사자니 상천지사上天之士니 하는 것들이 시끄러워 심히 귀찮은 일이기는 하지만 못할 거야 없다. 허나 이제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슬슬 진원진기도 다 떨어졌겠지. 으음…….”
혹시 몰라 되는대로 대충 듬뿍 넣어주기는 했지만 비류향에게 주라고 하며 비류연에게 넣어줬던 진기는 이제 거의 다 고갈되었을 시점이었다. 진기 주입이야 그럭저럭 실력이 되는 무인(어디까지 노사부 기준)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테지만 문제는 그런 무인이 과연 비류향 같은 아이에게 아무런 댓가 없이 진기를 주입해줄 것이냐는 것이었다. 세상은 비정하기 그지 없는 밀림이다. 노사부는 문명과 지성을 가진 이들이 더 잔혹하다는 것을 수백 년 동안 지켜봐왔다.
“……쯧. 흐유……. 가야겄다. 나중에 찾지 뭐.”
한참 동안 고민하던 노사부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나일천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놈의 행적을 보아하니 아예 사천땅을 떠난 것을 보였다. 쉽사리 돌아오지는 않으리라. 신뢰할 수 없는 직감과 석연찮은 증거들이 가득했지만 왠지 그러한 생각이 노사부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무엇보다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조질 수 있는 쓰레기에게 시간을 버리는 것보다, 부담스럽더라도 자기 수발 들어주는 소녀에게 시간을 투자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혹시라도 돌아올 때를 대비해 노사부는 꼬박 하루를 소비해 지역 전체에 금제진禁制陳을 설치했다. 진법에 통달한 이가 보았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승상(제갈량)께서 살아돌아오셔서 다시 진법을 설치하면 이러지 않을까 싶을 만큼 정교하고 치밀하면서도, 오로지 특정한 한 사람만을 잡을 수 있는 진법이라니. 설령 어디 한 군데가 망가지더라도 자연스럽게 축을 바꾸어 스스로 고쳐지니 마치 살아있는 생물과 같았다. 진법을 기동시킨 노사부는 마지막으로 진의 중심인 바위에 한 문장을 새겼다. 놈이 이 진에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이 바위 앞으로 인도되어 문장을 보게 되리라.
[다시 사천땅 밟으면 뒤진다.]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폭력적인 문구는 노인의 화법이라기에는 매우 난폭했지만, 제자인 비류연이 봤다면 “야, 정말 사부다운 말이네요.” 라고 할만큼 노사부의 개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일을 마친 노사부는 천향루를 향한 귀로에 올랐다. 만약 검후가 다음 날 천향루에 도착할 것을 알았다면 그로 인해 벌어질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극한의 경공을 발휘해 달려왔으리라. 허나 노사부가 검후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은 불행히도 일주일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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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연이야 워낙 괴물 같은 사부를 두었기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지만, 나예린은 달랐다. 정천맹주인 아버지 나백천을 두고도 용안의 부작용으로 사람을 멀리했던 소녀는 아버지의 검식劍式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어떤 무인의 무학도 제대로 구경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소녀의 눈에 비친 노사부와 검후의 격돌은 단순한 무인들의 비무 이상의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단순한 병장기가 부딪침에도 놀랄 것인데 심후한 내공이 격돌하였다. 범인凡人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압도적인 파격이 담긴 무학武學의 소용돌이는 그 안에 깃든 기氣의 흐름까지 심오하기 그지없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이치가 폭포수 사이로 빛나는 무지개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술값은 했구만.”
노사부는 떫은 표정으로 말했다. 손가락 마디 하나 만큼 왼발이 앞으로 나가 있었다. 귀찮아서 별 생각 없이 대응했다고는 하나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약조가 깨진 것은 사실이었다. 만에 하나 움직인다면 한 번 더 대련에 응해주기로 했다. 어쩌자고 그런 약조를 맺은 걸까. 까놓고 말해서 선금으로 술도 받았으니 대련이야 이기든 말든 아무래도 좋았고, 한 번 더 해주는 거야 검후 정도로 실력도 얼추 되고 아리따운 꼬마 아가씨(어디까지나 노사부 기준이다)와 어울려주는 것 쯤은 기분이 좋다면 못해줄 것도 없다. 허나 안 해도 되었을 일을 괜히 입을 놀렸다가 하게 되었으니 찝찝할 따름이었다.
“반 걸음 정도는 움직이실 줄 알았는데…….”
검후의 말에 노사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제대로 가다듬지도 않고 그냥 거칠기만한 공격인데 뭘 반 걸음이나 움직여. 한 마디만으로 만족해. 그리고 그 기술 완성되면 그때 다시 찾아와.”
“에이, 그건 아니죠! 분명 금산적주金山赤酒받으실 때 언제든 다시 받아주시기로 하셨으면서!”
“네 기술들 중에 그나마 괜찮은 게 그거 하나 뿐인데 뭘! 또 이번처럼 한 마디 움직이고 끝내려고? 그럴 거면 덤비던가!”
“으으……!”
얼핏 보기에는 짠돌이 스승과 천덕꾸러기어린 제자처럼 보이는 대화을 나누며 투덜거렸지만 검후의 얼굴은 밝았다. 전력을 다한 공격이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후련한 표정이었다. 천상천天上天에 절망하던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나갔기에 새로운 경지가 있다는 것과 노력하면 닿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검후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설마 이 나이에 처음 검을 잡을 때처럼 두근거리는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이야.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류……연비야! 먼저 가서 식탁 좀 차려놔라!”
“네~ 가요, 린!”
“네. 먼저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마침과 동시에 길이라 하기도 힘든 좁은 오솔길을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까르르 웃으며 내달려가는 소녀들의 모습에 검후가 미소지었다.
“참 활기차네요.”
“너무 활기차서 문제야.”
“풀죽어있는 것보다는 좋잖아요?”
“이왕이면 얌전한게 좋아.”
“향이처럼요?”
“거긴 너무 얌전하고.”
소녀들이 뛰어간 길로 향하며 노사부는 빗자루로 허리를 두드렸다. 대련이라고 해봤자 노사부가 움직인 건 손목 뿐이었지만 이런 건 마음의 문제라 괜시리 허리나 무릎을 어루만지게 된다. 그러면 하나뿐인 제자는 정정하신 분이 왜 상노인네 흉내내냐 투덜거리고, 그 제자의 누이는 찜질하시라며 냉수건과 온수건을 준비한다. 망할 놈. 역시 제자는 휘어잡아야 되는 거야. 속으로 궁시렁거리던 노사부는 문득 검후를 향해 말했다.
“밥 먹고 나서 가는 거냐?”
“네.”
“짐은 다 챙겼고?”
“그럼요.”
노사부가 천향루로 돌아와 검후와 만난지로부터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나흘은 천향루에서 서로 온갖 이야기를 하며 지냈고 이틀은 아미산 모옥에서 지냈다. 노사부는 검후와 나예린의 모옥 숙식을 썩 내키지 않아 했지만 검후가 넘긴 금산적주의 독특한 주향이 노사부의 불만을 잠재웠다. 그러나 그것도 이틀이 한계였다.
그래도 목표인 대련을 해냈으니 검후는 아쉬울 건 없다. 다만 그 아이는 아쉬워하겠지.
검후는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한 나예린을 떠올렸다. 소문과는 달리 감정표현도 잘 하고 말수는 적지만 하고 싶은 말은 할 줄 아는 아이였다. 그렇게 되기까지 도움을 준 어머니이자 친구였던 이와의 이별이 어찌 아쉽지 않을까.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그 반대도 있는 거지 뭘. 너도 그만큼 나이 먹었으면 알잖냐. 걱정도 팔자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니까요.”
“평생 헤어지는 것도 아니구만.”
귀찮다 어쩌다 투덜투덜 말이 많았지만 그래도 노사부는 일일히 답을 주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검후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오늘 아침은 뭘까요? 먼 길 가야 되니까 맛있는 거면 좋을 텐데.”
“향이 밥은 뭐든 맛있어.”
“그래도 그날 딱 먹고 싶다는 거 있잖아요.”
“음, 죽순무침이 끌리는구만.”
“죽순무침 좋네요. 거기에 대나무통밥도 있으면 최고겠어요.”
그런 대화를 나누며 모옥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잠시 후, 식탁에 올라온 대나무통밥과 죽순무침을 보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 길러 가질 못해서 부득이하게 죽향竹香을 빌려 밥을 지었습니다.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반찬을 내오겠,”
“노야. 정말 데려가면 안될까요?”
“안된다니까.”
“금산적주 열 병 보내드릴게요.”
“평생 먹을 분량 가져다 줘도 안 보낼 거야.”
“저기……?”
심상치않은 표정으로 못 알아들을 대화를 나누는 어른들을 보며 당황해하는 비류향을 식탁에 앉힌 것은 연비와 나예린이었다.
“언니, 괜찮아. 그냥 밥 먹으면 돼.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어, 응, 그래…….”
자연스럽게 식기를 집는 동생들의 모습에 비류향 역시 조심스레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노사부와 검후의 말싸움은 아이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을 덧붙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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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스러운 아침식사를 마치고 차 한 잔을 마신 후 마지막으로 짐을 확인한 검후와 나예린은 오두막을 나섰다. 배웅하는 이는 비류향과 연비 뿐이었다.
“원래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만남인데 무슨 배웅을 해. 어차피 쉽사리 끊어질 인연도 아닌데 그냥 가.”
노사부는 그리 말하며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인연의 소중함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말이었지만 노사부의 성품을 알기에 다들 아무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
나예린은 말없이 비류향을 끌어안았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부모님을 제외하면 가장 깊은 인연과 헤어지는 것이며, 동시에 처음으로 만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이와 헤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이 따스한 품에 다시 안길 수 있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어린 소녀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런 불안을 읽은 것일까. 비류향의 손길이 살포시 나예린의 머리를, 뺨을 쓰다듬었다. 순식간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아아, 정말, 못 당해내겠구나. 이 온기를 지키고 싶다. 그날처럼 무력하게 보호받고만 있지는 않을 테다. 그렇게 다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나예린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스스로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갈게요.”
“……응.”
당찬 소녀의 말에 비류향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그리고는 검후를 향해 말했다. 비록 혈육은 아니나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걱정 말거라. 어지간한 놈팽이들은 손짓 하나로 내쫓을 수 있는 아이로 만들 터이니. 그런 대화를 하는 동안 나예린은 연비를 향해 말했다.
“갈게. 기회가 된다면 서찰을 보낼게. 답장, 해줄 거지?”
“기대하고 있을게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몸조심이에요. 알죠?”
“응.”
비류향이 친구이자 어머니였다면, 연비는 언니동생하며 지내기는 했지만 나예린이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꼭, 다시 만나자.”
“네. 아, 그때는 처음 만나는 걸지도 몰라요.”
“……후훗,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럴지도 모르죠.”
아마도 그때는 연비가 아닌 비류연으로서 만나게 되리라.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날이 어서 오기를. 그렇게 생각하며 나예린은 인사를 마치고 검후와 함께 남해로의 여정길에 올랐다.
산천초목의 신록이 더욱더 짙어지는 푸른 여름의 초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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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었네요. 역시 술이 웬수입니다. 이걸로 과거편은 종료입니다. 다음화부터는 다시 1부 초입으로 돌아갑니다.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0.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0.
노사부가 천향루를 떠나고 비류향이 눈을 뜬 그날 이후 세상은 더없이 소란스러워졌다. 중원 전체에 서천멸겁의 부활과 그 정체가 정천맹주 나백천의 친동생 나일천이었다는 사실은 무림 뿐만이 아니라 관官과 민民에도 퍼져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백천은 그날로부터 약 2주 후인 오늘, 예정보다 일찍 사천을 떠나게 되었는데, 딸인 나예린은 남겨두고 먼저 떠난다는 결정을 내려 주위 인물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정말이십니까?”
“그렇네.”
살해당한 전 정천맹 사천지부장 남궁현의 동생인 남궁진은 맹주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천멸겁이 나일천이라는 사실은 이제 천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가 조카인 나예린을 덮치려 했다가 실패하고 도망쳤다는 것은 극히 소수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남궁진은 그 소수 중 하나였다. 언제 나일천이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그 아이를 이곳 사천 땅에, 그것도 일이 벌어졌던 천향루 숙소에 그대로 두겠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노야께서 안배해두셨으니 세상 어느 곳보다도 더 안전할 걸세.”
“그 무희舞姬말씀이십니까? 확실히 무시무시한 내공을 전해주고 가신 것 같습니다만, 그 아이 하나로 되겠습니까?”
남궁진이 연비를 언급하자 나백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 아이도 있지만, 그 외에도 몇 가지 더 준비해두고 가셨네. 내가 만일 그놈이라면 감히 그곳에는 얼씬도 안 할 거야.”
“대체 뭘 하고 가신 겁니까?”
“……알고 싶나?”
“……나중에 듣도록 하지요.“
대체 무슨 안배이기에 천하의 정천맹주가 저리 심각한 얼굴로 되묻는단 말인가. 어찌되었든 그가 안심하고 떠날 수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게다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검후劍后께서 예린이를 거두어가실 걸세.”
나예린을 검후에게 맡긴다는 얘기는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왔던 일이었기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제자가 될 나예린을 보내는 게 아니라 스승이 될 검후 이옥상이 남해에서 사천까지 직접 찾아온다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은 일이었다. 정천맹주라 하더라도 오라가라 할 수 없는 것이 천무삼성이다. 거기에 검성劍星과 도성刀星 모두 대결을 꺼리기에 사실상 제일인 검후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검후가 제자로 맞이할 아이를 위해 이곳에 직접 온다니?
“노야의 서찰을 함께 보냈네. 그랬더니 '이곳 일이 있어 바로는 못 가지만 곧 간다.'라고 하셨다더군. 노야께서 돌아오실 때쯤이면 그분께서도 이곳에 도착하시겠지.”
“대체 뭐라고 쓰셨길래 검후께서 직접 오신답니까?”
“글쎄. 엄청나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고 들었네만…….”
“……그거, 엄청나게 화가 나셨다는 얘기가……?”
노사부의 평소 언행으로 보아 결코 정중한 말투와 내용은 아니었으리라. 아마 '더 강해지고 싶으면 찾아와라.' 내지는 '더 강한 놈이랑 싸우고 싶으면 찾아와라.' 정도지 않았을까. 새삼스럽게 검후의 미소를 상상한 두 사람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일이 급하니 어서 본부로 돌아가봐야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갈길이 멉니다! 서두르시죠!”
천겁령과 싸울지언정 검후와는 절대 칼을 맞대고 싶지 않다. 그것은 검후를 아는 모든 남자들이 동의하는 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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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음률을 타고 소녀의 몸이 자연스럽게 튕겨오른다. 동시에 울려퍼지는 방울소리는 청량했지만 관객들의 시선은 무언가에 홀린 것마냥 몽롱했다. 그러면서도 소녀의 손짓 한 번에, 발디딤 한 번에 정확하게 고개를 움직인다. 맑은 밤하늘마냥 투명하게 검은 옷자락과 진주인지 유리인지 모를 것이 박힌 주단이 별빛처럼 반짝이며 펄럭일 때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소녀의 춤에 매료되어갔다.
아름다운 춤이다.
단순히 흩날리는 무복舞服 아룸다운 것이 아니다. 소녀의 외모가, 시리도록 투명하고 맑게 빛나는 영명황금안瑩明黃金眼이 아름다운 게 아니다. 잠재된 아름다움美을 표면으로 끌어올려 타인을 매료시킨다는 것은 지극한 의지와 수천 수만 번의 반복이 있어야 가능한 행위이다. 그렇기에 소녀의 동작은 그 나이대 아이들이 쉽사리 닿지 못하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손짓 발짓 하나하나가 절도 있으면서도 기품이 담겨 있고, 그러면서도 소녀답지 않은 강직함이 깃들어 있다. 동시에 우아하고 부드러운 곡선이 그려지는 춤사위. 이것을 아름다움美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아름다움일까.
너무나도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취한 관객들은 소녀의 춤과 음악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누군가의 박수소리를 듣고나서야 정신을 차린 듯, 혹은 신들린 듯한 얼굴로 박수를 치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관객들의 환호에 잠깐 눈을 반짝이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소녀가 대연무장大演舞場를 내려와 객석으로 향하자 수많은 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녀를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누군가 식탁에 부딪쳤는지 와장창 소리가 울려퍼졌지만 그걸 신경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 멋진 춤이구나. 굉장했다. 누구에게서 배운 춤이냐. 한 번 더 춰줄 수 있느냐. 훌륭하다 등등. 경탄과 환호가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에는 노골적으로 소녀에게 오늘 밤 자신의 객실로 와달라고 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니, 요청이면 그나마 양호하다. 칼밥 좀 먹은 듯 공력을 풀풀 풍기며 추잡한 미소와 함께 오라고 명령하는 이들까지 나오는 판국이었다. 허나 소녀는 그런 이들의 손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피해 대연무장 문 밖으로 나갔다. 뒤따르던 관객들이 소녀를 따라 문 밖으로 나왔지만, 소녀의 모습은 어느 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두 소녀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혼란스러운 대연무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비교적 한산한 식당으로 들어온 소녀들─나예린과 비류향은 어느 새 연무복을 벗고 평소 입던 현의玄衣로 갈아입은 연비가 구석 쪽 조용한 자리에 앉아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동생의 손짓에 두 사람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땠어?”
“정말 아름답더라.”
“멋진 춤이었어.”
“후후후,”
소녀들의 칭찬에 연비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실제 성별과는 별개로 다분히 소년 같은 웃음이었지만 이미 비밀을 아는 소녀들에게는 그다지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비류향은 처음 연비─여장한 비류연을 봤던 날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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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향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을 지나 산허리까지 반절 정도 온 거리에 걸려 있었다. 이렇게 오래 잠들었던 게 대체 얼마만일까. 다만 개운한 느낌은 없었기에 푹 자고 일어났다고는 할 수 없었다. 심지어 몸에 힘을 주면 어디랄 것 없이 파르르 떨려와 상반신을 일으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언니!”
“언니!”
익숙한 목소리와,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엔 두 명의 소녀가 있었다. 하나는 나예린이었다. 한 달 동안 정을 붙인 소녀는 망설임없이 비류향의 품에 파고들었다. 다행이다. 무사했구나.
“다친 데는 없지?”
“네!“
품 안에서 들려오는 나예린의 밝은 목소리에 안도한 순간, 또 한 명의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그 소녀는──,
“저기, 혹시 연이니?”
친동생인 비류연이 여장을 하면, 아니, 만약 소녀였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 외모였다. 게다가 저 황금안을 어찌 몰라볼까. 체형도 비슷했고 묘한 친숙함이 느껴졌다. 허나 소녀의 대답은 비류향의 예상과는 달랐다.
“아뇨, 전 연비라고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래……?”
“아, 소개할게요. 비류연이 아니라 연비에요. 이번에 천향루에 임시 무희舞姬로 일하러 왔대요.”
아버지께서 저랑 함께 있어달라고 하셨대요. 나예린이 그렇게 말했지만 비류향은 그러냐고 대답하면서도 석연찮은 표정으로 연비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연비는 그저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비류향의 시선이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연비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의혹 어린 시선에 어리둥절하거나 언짢아할 법도 하건만 그러지 않기에 의심이 더욱더 깊어져 갔다. 그러다 문득 창 밖을 보더니 말했다.
“하긴, 연이라면 지금쯤이면 대장간에서 쇠를 두드리고 있겠지. 미안해. 동생이랑 헷갈려서 괜히 불편하게 했구나.”
“……괜찮아요.”
비류향의 말에 연비는 방금 전까지 그리던 미소 대신 미묘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나예린의 손을 잡아 일으켜 거리를 두었다. 이제 괜찮지 않아? 더 해볼래요? 아니, 이제 그만할래. 나도 어쩌구 저쩌구. 소녀들 특유의 재잘거림과 속삭임이 뒤섞인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피로감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눈앞이 침침해져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두 소녀가 대화를 끝낸 듯 다가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예린이었다.
“언니, 이쪽은 '지금'은 연비에요.”
“……지금은?”
“'지금'은 연비랍니다.”
“……아!”
잠시 고민하다 무언가 깨달은 듯 비류향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말문이 막힌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몰랐다. '여장'한 동생을 본 누이는 뭐라고 해야하는 걸까. 해괴망측한 일이라며 나무라야 하는 걸까. 왜 그랬는지 연유를 물어야 하는 걸까. 고민하던 비류향은 이내 답을 내렸다.
“처음 만나는 거지만, 보고 싶었어.”
비류향이 이리 오라는 듯 팔을 벌리자, 연비는 눈을 글썽이며 그 안에 파고들었다.
“처음 만나는 거지만,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비류향과 연비─비류연은, 이 세상에 단 하나 남은 혈육은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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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벌써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잠드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전처럼 쪽잠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이것이 회복인지 아닌지는 애매한 사항이었지만 비류향은 이것을 회복세라고 판단했다. 길게 자도 피곤한 것보다는 옛날처럼 쪽잠을 자더라도 비교적 덜 피곤한 것이 몸 상태가 좀 더 나은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거기에 동생을 통해 노사부의 진원진기를 받아들인 몸이 점점 활력을 되찾아가는 것도 그러한 생각을 뒷받침해주었다.
호전되어가는 몸 상태와는 별개로 정신적으로는 답답했다. 지금까지 잠잘 때나 병마에 휩쓸렸을 때를 제외하면 뭐든지 일거리를 손에서 놓지 않던 소녀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니 답답할 수 밖에 없었다. 매일 같이 움직이던 몸이 가만히 있으니 좀이 쑤시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가볍게 청소라도 할라치면 나예린과 연비가 모두 달라붙어 쉬라며 억지로 침대로 이끌었기에 일주일간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조금이라도 무리다 싶으면 둘 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매달려 비류향을 쉬게 하였다.
그렇게 함께해서 그런지 나예린과 연비─비류연은 금새 친남매처럼 친해졌다. 그 또래 아이들은 친하게 놀다가도 어느 순간 틀어져서 싸우기도 하건만, 둘 다 어른스러운데다가 한쪽이 용안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다투는 일은 없었다. 지금만 봐도 춤이 아름다웠다, 언니들이 보러 와줘서 더 열심히 했다 등의 얘기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특이한 점이라면 비류연─연비가 나예린을 언니라 부르는 점이었다. 서로 친구처럼 지내다가 갑자기 자매처럼 지내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서로 한 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른스러운 아이들치고는 다분히 유치한 이유였지만, 어차피 진지하게 언니동생하는 것은 아니라 친구 사이의 장난 같은 행위였다. 거기에 더해 비류향이라는 언니와 함께하며 동생이라는 존재를 의식하고 손윗누이가 되고 싶었던 나예린과, 남들은 다들 세네 명씩 되는 집안에서 단 둘인 게 아쉬웠던, 그리고 누나라고 하면 비류향 하나 뿐이니 세상 누나들이 모두 다 착하고 좋은 줄만 아는 비류연의 속내가 맞아떨어졌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처음에 어색했던 것은 연비─비류연의 모습이었다. 어릴 때부터 봐 온 남동생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화장을 하고 여성복을 입고, 여성스러운 언행을 하고 다니니 기억과의 괴리감 때문에 뭐라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노사부가 수련을 위해 여장을 지시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몸은 남자로 태어났으나 마음은 여인인 자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 반대도. 나는 네가 어떤 삶을 살든 개의치 않을 거란다. 허나 미안하구나. 내가 마음을 쓰지 못해서. 진작에 알았다면 챙겨주었을 것을."
"……어, 어?! 아니, 아냐! 걱정 마! 그런 거 아니니까!”
“아니니?”
“아니야! 사부님이 수련 때문에 시키신 거야!”
다행스럽게도 오해는 풀어졌다. 동시에 한 소년의 성 주체성을 지켜낸 순간이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여장을 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동안 은연중에 새로운 세계에 눈 떠 가던(?) 소년은 누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비류연은 어느 새 흩어져가고 있던 있던 자신 안의 남성성을 다시금 확립할 수 있엇다.
“고마워, 언니(누나).”
“응? 응.”
어찌되었든 이제는 잘 지내고 있으니 괜찮은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비류향은 주문을 위해 점소이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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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온 지 한 달 정도 되었나. 연비─비류연은 오늘의 마지막 공연을 마친 후 객실로 돌아가면서 노사부와 함께 이곳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세상에 하나뿐인 사랑하는 누나가 오늘내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노사부와 함께 바람 같이 달려왔던 날로부터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누나가 쓰러져 있다는 것 때문에 정신이 없어 별다른 감상이 없었지만 확실히 이곳은 편했다. 여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일단 사부가 없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모든 문제가 사소(?)해졌다. 그와 더불어 온갖 집안일과 부업으로부터도 해방된 상태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금전적 손해가 있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춤과 노래를 팔아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구멍을 메꿀 수 있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누이가, 비류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노사부에게 핍박받으며 고난의 행군길을 걸어오던 소년에게 상냥한 누이를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은 분명한 행운이요, 삶의 축복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힘들었지?”
객실 문을 열자, 바느질하던 비류향이 그렇게 물었다. 석양빛을 등진 누이의 모습에 비류연─연비는 근래에 배운 의사용안擬似龍眼을 펼쳤다. 의사용안이 발동되자 붉은 석양과 더불어 따사로운 푸른빛이 눈을 파고들었다. 자신의 춤과 노래가 아무리 사람들을 매료시켜도 이것을 따라갈 수는 없으리라. 그만큼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연비는 그대로 비류향에게 다가가 허리춤에 파고들어 매달리며 말했다.
“힘~ 들~ 었~ 어~”
연무와 가악歌樂은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고 추파를 던지는 관객들─특히 무림인들을 따돌리는 것은 심히 귀찮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힘든 것은 의사용안 수련이었다.
의사용안은 나예린의 용안 직시直示수련을 돕다보니 자극을 받아 심심풀이 삼아 만들어 본 기술로 그 자체는 연비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허나 문제는 기술을 쓸 때마다 보이는 사람들 마음 속의 어둠이었다. 처음 의사용안을 발동시키고 본 인세人世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끔찍하기 그지 없었다.
“린, 언니는, 매일, 저런 걸, 웁, 보고, 있었어요?”
“……응.”
연비가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애써 참으며 던진 질문에 나예린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비는 새삼스럽게 나예린의 정신력에 경의를 표했다. 들끓는 욕심. 추잡한 사심. 사악한 갈구. 선량한 가면 아래,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어둠이 일렁이는 세상. 아무런 힘도 없는 소녀가 저 지옥을 보며 살아오면서 미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예린이 왜 그렇게 비류향에게 마음을 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시리도록 투명하면서도 봄햇살처럼 따스한 하늘빛 심상心想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수고했어.”
비류향은 바느질하던 옷감을 탁자 위에 두고, 허리춤에 매달린 동생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연비는 더해달라는 듯 뺨을 부볐고 비류향이 남는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자,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얌전해졌다. 과연 누가 이 소녀가 무대 위에서 초연한 얼굴로 춤을 추고 금을 타던 소녀라 볼까 싶을 만큼 행복한 미소였다. 눈앞에 빛나는 하늘빛 심상이 있는데 어찌 행복하지 않을까. 이 광경을 포기하지 못하기에 의사용안 수련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분명 괴로운 수련이었지만, 비류향을 보면 알 수 있듯 의사용안이 꼭 나쁜 것만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꽃을 보러 가자. 폭포도 보러 가자. 오색 단풍도.”
“설산은 오르기 힘들지만, 순백설산 정경은 얼마나 멋진데!"
“……보러갈 수 있을까요?”
노사부의 안배에 기대다보니 천향루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된 나예린은 연비와 비류향에게 산풍경 얘기를 듣다가 그렇게 되물었다.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예린은 그러한 얘기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흥미가 동하는 아이였다. 다만 지금은 어려웠다. 언제 어디서 서천멸겁이 올지 모르는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도 어찌될지 모른다. 그걸 알고 있기에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한 나예린이 시무룩해 하는 찰나, 비류향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용안!”
“네?”
“용안은 사람의 심상을 읽을 수 있잖니?”
“……아! 그러면 되는구나!”
“……?”
“용안으로 큰언니랑 내 심상을 보면 되잖아!”
연비의 말에 나예린큰 큰 충격을 받았다. 분명 그렇게 볼 수도 있었다. 노사부가 가르쳐준 방법으로 단련한 덕분에 지금의 나예린은 더 집중하면 타인의 기억을 실감나게 공유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이와는 반대로 자제하도록 노력하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더 정확하게, 더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나예린은 비류향과 이마를 맞대고 눈을 감았다. 연비는 곁에서 의사용안을 발동시키며 두 사람의 손을 잡았다.
──풍경風景이, 아미산의 사계절이, 각자가 머금은 아름다움이 눈에, 뇌리에 파고들었다.
등에는 가벼운 바구니의 무게가 느껴진다. 사람 발길이 없는 무성한 수풀의 진한 초목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지금 이 순간 산을 타는 것처럼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감각. 그러나 어째선지 익숙하다고 느끼는 풀숲을 헤치고 나와 언덕을 넘은 그곳에는,
“어때?”
"와아……."
때마침 불어온 산바람과 함께 그윽한 꽃향기가 폐부를 채웠다. 능선 한가득 피어오른 들꽃밭.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 다음은 여름 폭포였다. 당장이라도 귀가 멀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쏟아지는 거대한 물줄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흘린 땀을 싹 식게 만들어주었다. 한여름이건만 발끝만 살짝 담가도 순식간에 몸이 부르르 떨려올 정도로 계곡물이 차갑다. 수련하다 계곡물에 폭삭 젖어 오들오들 몸이 떨려도 햇살에 달궈진 바위에 잠시 누워있으면 금새 몸이 따듯해졌다. 옷이 마르는 건 덤이다. 맑은 밤에 하늘을 보면 쏟아질 듯한 별들이 있었다.
“저렇게 많은 별은 처음 봤어요.”
“겨울에는 더 많아. 추워서 오래 보기는 힘들지만.”
가을이 되자 색색이 물든 단풍이 보인다.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하늘과 조금씩 차가워지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맨다. 그러면서도 알록달록하게 변한 산에서 눈을 땔 수가 없다. 월동을 준비하는 동물들이 보인다. 때떄로 형형색색의 숲 사이로 새하얀 것들이 빠르게 돌아다니는 게 보인다.
“그러고보니 백무후는 잘 있니?”
“우리 없어도 잘 지내지.”
“백호, 인가요?”
“응.”
차가운 백은白銀에 뒤덮인 산은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웠다. 설경雪景. 투명한 하늘 아래 솜이불처럼 쌓인 눈은 그 누구에게도 밟히지 않은 체 고요히 겨울 햇살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가까이 쌓인 눈은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냈다. 조심스레 손에 쥔 눈을 녹기 전에 얼른 입에 머금어봤다. 청명한 눈 맛은 단순한 얼음과는 달랐다. 한창 찬바람을 맞다가 따스한 온기가 들어찬 방에 들어가면 저절로 몸이 풀렸다.
“…….”
“어때?”
“……굉장해요.”
근 반나절 동안 심상 속 여행을 한 나예린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비류향과 연비는 서로를 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언젠가 꼭 직접 보러 가자. 대답은 당연히 긍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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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과 배경을 떠올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다음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집니다. 그게 안되면요? 오늘처럼 연재가 늦는 일이 벌어집니다. […]
- 조아라 sEcho님께서 프롤로그와 연재작에서의 나예린의 반응이 아귀가 안 맞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맞습니다. 안 맞습니다. 프롤로그는 생각난 거 그대로 휘갈겼던 것이고, 연재작은 제가 2부를 읽으면서[…] 전개에 수정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 타입문넷 유운풍 님께서 주술계도 다루느냐 물어보셨는데, 직접적으로 다룰 생각은 없지만 필요하면 묘사할 예정입니다. 솔직히 노사부 나올 때 빼고는 주술계가 나올까 싶기는 하지만요.
- 댓글에 대한 댓글은 안 다는 예전에 한 번 해봤다가 너무 귀찮아서[…] 실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 언제나 말씀드리다시피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은 언제나 받고 있으며, 본문 안에서 설명할 수 없거나, 본문에 묘사되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싶은 사항에 대해서는 다음 화 후기에서 대답해드릴 예정입니다.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9.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9.
“무슨 말이에요? 비류연이라니. 제 이름은 연비燕飛에요. 다른 사람하고 착각한 거 아닌가요? 그리고 여장이라뇨. 전 엄연히 여자에요!”
진짜 소녀와도 같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지만 나예린은 눈앞의 소년이 움찔하고 몸을 떨었던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히 진실을 간파당한 사람의 몸동작이었다.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는 착각할래야 착각할 수 없는 반응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
“……할 말 있으면 해요. 그렇게 보고 있지만 말고.”
“왜 여장하고 있는지 알려줘요.”
“그러니까 저는 여자라니까요?”
“거짓말.”
“거짓말 아니에요.”
“거짓말이잖아요.”
“아니라니까요?”
“…….”
나예린은 말없이 비류연을 바라보았고 비류연은 생글거리며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작은 언쟁이 있었지만 서로가 불쾌감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의문과 난처함이 있을 뿐이었다. 나예린은 생각했다. 화장을 하고 소녀다운 꾸밈을 하기는 했지만 저 모습은 분명 비류연이다.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한 달 동안 함께한 친구이자 어머니였던, 동시에 생명의 은인인 연상의 소녀가 투명한 심상 속에 가끔씩 떠올리던 활기차고 유쾌한 소년의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불구하고 너무나도 잘 알게 된 소년의 모습을 못 알아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소년은 어떤 사정이 있는지 자신을 속이려 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류연.”
“연비라니까요.”
“언니는 저한테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남동생'이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류연은 저를 처음 보는 거지만, 전 언니를 통해서 당신을 몇 번이나 '봤어요'. 그러니까 류연이 남자인 걸 알아요.”
나예린은 자신의 고백에 생글거리던 비류연의 얼굴이 그대로 굳는 것을 보며 말을 이었다.
”용안으로 직시直示하면, 아까 그분께서 알려주신 것처럼 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테지만 싫어하니까 그건 안 할 거에요. 사정이 있으니까 여장하고 있는 거겠죠? 그러니까 이제 이유는 묻지 않을게요. 하나만 대답해줘요. 비류연 맞죠?”
“……연비라니까요, 저는.”
“언니한테도 류연이 아니라 연비라고 할 거에요? 언니는 못 알아볼 거에요. 비슷한 다른 사람으로 보겠죠. 친동생처럼 대하는 게 아니라 생판 처음보는 남처럼 대할 텐데, 그래도 좋아요?”
조심스러우나 확고히. 담담하나 굳건하게.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살던 소녀가 이제는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허나 아직은 연약한 소녀의 수줍은 자기의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노사부와 교묘하고 치밀한 언쟁을 일삼던 비류연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거나 본심을 감추지 못한 체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된 이유는, 바로 한 달 동안 너무도 보고 싶었던 누이가 언급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류연은 올곧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나예린을 피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잠든 누이의 얼굴이 보였다. 누워 잠든 얼굴을 보는 게 대체 얼마만일까. 돌림병으로 죽다 살아나기 전에도 항상 자신보다 일찍 일어나고 비슷하거나 늦게 잠드는 누이였다. 간신히 살아난 이후에도 건강하다고 하기는 힘든 몸이건만 밤늦게 잠자리에 들어 이른 새벽에 깨어나 하루 종일 바지런히 돌아다니며 산 속 오두막 살림을 책임졌다. 낮에 드는 쪽잠도 앉아서 꾸벅꾸벅 졸거나 어딘가 기대에 눈만 붙이는 수준이고. 그러면서도 언제나 해실해실 웃으며 노인과 소년─두 남정네 뒤치다꺼리를 하며 지냈다.
정말 이 모습 보는 게 진짜 오래간만이구나. 새삼스럽게 누이가 제대로 누워자는 걸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은 비류연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높으신 분이 불러서 가길래 좀 편하게 지내나 했더니 누나도 참. 동시에 나예린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누나가 눈을 떠서 날 보며 “누구니?” 하고 묻는 광경이 무심코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다정하지만 어딘가 거리감 있는 태도로 웃으며 묻는 누나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연비라고 해요.”라고 대답하는 광경이 자연스럽게 그 뒤를 이었다.
“…….”
정말로. 소름끼치도록 끔찍한 광경이었다. 영사심결과 사부의 언어적 압력(?)을 통한 부동심과 평정심이 없었다면 격렬한 감정의 동요가 겉으로 드러났으리라. 지금도 썩 괜찮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나예린은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자, 그럼 이제 어떡한다. 비류연은 노사부가 여장을 하고 있는 동안은 그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된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노사부는 여장으로 완전히 자신을 잊고沒我 진정 한 사람의 여인이 되어一體 새로운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고 했지만, 비류연은 이미 그 말이 '시커먼 남정네보다 귀여운 소녀가 휠씬 더 돈 벌기 쉽다.'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물론 여장을 하고 춤과 노래를 파는 게 보법이나 분뢰수 등의 수련에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솔직히 노사부에게는 제자의 무공수련보다 수입증대가 더 중요할 것이라는 게 비류연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비류향이나, 누이를 통해 이미 자신이 누군지 아는 눈앞의 소녀─나예린에게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이 알려진다고 한들 수입에 별 영향이 없다면 괜찮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비류연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 밖의 호위─여무사들에게 다가가 묻고는 “사부님은 어디가셨나요?” “사부님?” ”수염이 긴 할아버지요.” “아, 그 분? 식당으로 가셨어. 왜?” “아무 것도 아니에요. 고마워요!” 그걸로도 모자라 창 밖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나서야 간신히 나예린 곁으로 돌아왔다.
“왜 그래요, 류연?”
“그러니까 저는 연비라니까요.”
그 말에 나예린이 입을 열려는 순간, 비류연은 검지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손짓과 함께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나예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요, 비류연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연비에요.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매우 빠르게 속삭인 말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잘못 들린 부분이 없었다. 말 못할 사정이 있구나. 어느 새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합장하듯 양손을 모아 부탁하는 자세를 취한 비류연의 모습에 나예린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잘못 봤었나 봐요, '연비'.”
“괜찮아요.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죠. 여튼 저는 '연비'랍니다. 비류연이라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게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소녀(?)는 이윽고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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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던가.
불과 닷새 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100년 전 악명을 날렸던 본인이 아니라 후계자라고는 하나, 천겁령을 지탱하는 네 기둥 중 하나인 서천멸겁이 부활하여 정천맹 서천지부장 남궁현을 살해하고 도주했다는 소식과 더불어, 그 정체가 정천맹주 나백천의 친동생 나일천이라는 사실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는 정천맹의 비상연락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나백천이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친동생이 혈겁의 후계자라는 사실은 나백천 개인은 물론이고 백도무림 전체의 치부가 될 수도 있는 사항이었지만, 그는 순간의 수치 때문에 사실을 은폐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무림은 물론이거니와 관官에서도 사람을 보내 정천맹 서천지부는 소란스럽기 그지 없었으나, 그는 쏟아지는 모든 비난과 아우성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동시에 말했다. 그러니 모두 힘을 모아 놈을 찾아야 하오.
그런 소란과는 관련 없다는 듯 이곳 천향루는 정상적인 영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문제의 서천멸겁이 직접 찾아와 후원 객실 한 곳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사람이 죽어나갔던 것을 생각하면 기이한 일이었으나, 이는 딸아이를 생각한 나백천이 재빨리 손을 써 정리한 덕분이었다.
“잘했어. 집에서 키우던 개가 광견병 걸려서는 도망쳤는데 마을 사람들한테 알려야지. 당연하잖아?”
“그렇습니까.”
“그래. 거, 지금이야 개를 어떻게 키웠길래 병에 걸렸느니, 키운 정이 있어서 못 잡았느니 어쩌니 징징거리겠지만, 그렇다고 입 다물고 있어? 당연히 알려야지.”
식사를 마친 후, 식후주酒를 홀짝이며 노사부는 그리 말했다. 나백천은 서천멸겁을 광견병 걸린 개라고 표현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비록 혈연을 끊기는 했지만 그래도 혈육이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가 저지르려 했던 죄악이 떠오르자 자연스럽게 그러한 마음 또한 사라졌다. 참살했어야 하는데. 나백천의 심정을 읽었는지 노사부가 말했다.
“지나간 일 후회하지 말고 앞으로 잘 하면 돼. 그놈, 분명 또 니 딸내미 노리고 다시 돌아올 거야. 그런 놈들은 꼭 그래. 그러니까 애 좀 강하게 키워. 꽁꽁 싸매지만 말고. 용안 가진 애니까 한 10년 동안 열심히 하면 오지게 크겠구만.”
“그렇잖아도 검후劍后에게로 보내 무학을 가르치려 합니다.”
노사부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에 나백천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노사부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검후?”
“모르십니까?”
“몰라. 요즘 애지? 내가 별호 알던 놈들 다 무덤으로 들어간지 오래 됐거든.”
노사부의 말에 나백천은 새삼스럽게 그가 얼마나 상식을 초월한 인물인지를 떠올렸다.
“천무삼성 중 하나인 여검객입니다. 천무삼성은 아십니까? ”
“이름은 들어봤던 것 같은데……. 아, 그, 걔들이구나! 걔들이지? 그 여자애 하나랑, 검 쓰는 애랑 도 쓰는 애랑 그 셋?”
“성별과 인원은 맞습니다만…….”
“그것만 맞으면 됐지 뭘. 어차피 걔네 말고 그렇게 다니는 세 사람 또 없잖아?”
“……네.”
“그래. 그럼 된 거지 뭘. 그래, 이제야 생각났다. 그리고 또, 공손, 거시기……. 에잉, 여튼 알아. 옛날에 봤지. 싹수가 있어 보인다 했더니 천무삼성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니는구만? 캬, 세월 참 빨라. 그래 그 꼬마 아가씨한테서 배우면 좀 괜찮겠네.”
세상에 누가 천무삼성에게 싹수가 있어 보였다고 하고, 천하의 검후를 꼬마 아가씨라고 할 수 있을까. 허나 나백천은 노사부의 말이 허언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술 한 잔을 넘긴 노사부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나백천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러고보니 너도 예전에 나랑 만났었나?”
“……저도 그게 궁금했습니다. 어디선가 뵜던 것 같은데…….”
“나야 늙었으니 그렇다치지만 넌 젊은 놈이 벌써부터 기억이 가물가물하면 어떡하냐.”
백을 넘긴 노인을 보고 젊다고 투덜거리며 노사부는 잔에 담긴 술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음, 술맛은 괜찮은데 안주가 영 좋지 못하구만. 향이가 만든 양고기 야채볶음이 생각나. 그런 생각을 하며 입 안의 주향을 음미하던 노사부의 눈에 나백천의 허리에 걸린 검이 들어왔다. 그것을 본 노사부는 술을 삼키며 손뼉을 쳤다.
“그 놈 매질할 때 기절해 있었던 꼬마!”
“무슨 말씀이신지……. ……설마!”
나백천은 천겁혈신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어 정신을 잃고 쓰러지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그때, 의식이 어둠으로 떨어지기 전 그가 봤던 것은 태극신군 혁월린과 패천도 갈중혁이 모두 중상을 입고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려는 찰나, 정체불명의 노인이 홀연히 나타났었다. 아니, 노인인지도 정확하지 않다. 그저 길고 매끈하고 새하얀 수염이 기억에 남아 노인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혹시 노야께서는, 양 무신이 천겁혈신을 상대할 때 오신, 그분이십니까?”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왔다. 대체 이 노인은 누구란 말인가. 도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베일에 감싸여 있던 과거가 벗겨지려는 순간이었다. 나백천의 물음에 노사부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도망친 노예 놈 잡으러 간 것 뿐이었어.”
정확하게는 그놈이 박살낸 명주가名酒家가 한둘이 아니라 매질 좀 해주러 간 거였지. 노사부는 그렇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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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자연스럽게 뜨였지만 시야가 맑아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주변이 어둡고 광원이라 할 것이 촛불 밖에 없었기에 시야가 제대로 돌아왔는지 확인하는 것도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여긴 어디인가 둘러보려고 했지만 고개를 살짝 움직이려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통증이 온몸에 울려퍼졌다. 산비탈을 굴러 온 몸에 멍이 들면 이러할까 싶은 통증이었다. 뼈마디며 근육이며 안 아픈 곳이 없어 저절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정신이 좀 드느냐.”
“……노야……?”
“그래. 나다.”
한 달 만에 듣는 목소리에 비류향은 고통을 참고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신선 같은 노인이 있었다. 초옥에 계실 분이 어째서.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가 싶어 어리둥절하고 있자니 향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그리고 딸랑, 하고 바람에 흔들린 작은 종소리가 들렸다. 풍경처럼 들리지만 그보다 더 가늘지고 길게 이어지는 건 초혼종招魂鐘 소리다. 설마. 아니나 다를까. 시야 한켠에 제문祭文이 보였다. 그렇다면…….
“얼굴을 보니 제대로 만났나 보구나.”
누구를, 이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노인도. 소녀도. 이미 알고 있는 질문과 대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녀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탄식했다.
“그럼, 그게, 꿈이 아니라…….”
위아래도 구분되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북받쳐오는 서러움에 하염없이 울고 있을 때, 다시는 느끼지 못하리라 여겼던 부모님의 손길이 자신을 달래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애썼다. 잘 했어. 연이도 잘 챙기고. 장하다 우리 향이. 사랑한다. 잘 지내렴. 양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히 남아있었다.
누군가에게 잘보이기 위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알아주기를 바랐다. 선행과 헌신은 천성이기도 했지만 또한 관심의 갈구이기도 했다. 열심히 했다고. 애썼다고. 어린 동생 잘 키웠다고.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비류향 역시 애정에 굶주린 아이였기에 진심어린 말 한마디가 고팠다. 한창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라나야 했던 시기에 모친이 세상을 떠났고, 남아있던 부친 역시 앳된 티를 벗어내고 소녀가 되어가는 시기에 그 뒤를 따랐다. 알고 있던 이들은 모두 돌림병에 죽었고, 유일하게 남은 동생은 사랑을 주는 상대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존재였다. 소중했지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꿈이라 생각했다. 너무나 간절해서 스스로가 만든 허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래. 그리고…….”
노사부가 손짓하자 초혼향이 세 번 울렸다. 딸랑. 딸랑. 딸랑. 그리고 제문이 펄럭이며 날아오르더니 끄트머리에서 조용히 피어오른 불꽃과 함께 재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조송지례祖送之禮. 지금의 것은 분명 산 자가 죽은 자를 배웅하는 방식이다.
“네 부모는 저승사자가 무사히 저승으로 데려갔다. 죽은 이가 곧바로 염라에게 가지 않은 건 중죄지만 사람을 홀리지도 않고 그저 자식들 보고 싶다는 마음에 남아있었던 것 뿐이니 참작되겠지. 염라가 어찌 판단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옥으로 가지는 않을 게다.”
만약 그렇게 되면 간만에 몸 좀 풀어야지. 노사부가 뒤숭숭한 발언을 덧붙였으나 비류향은 듣지 못했다. 환상이라 생각했던 것이 현실이었고, 그 현실이 오래 전부터 가장 바라마지 않았던 것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꿈이, 아니었구나……. 꿈이 아니었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가장 듣고 싶었던 이들이 들려주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여겼던 이들이 지금까지 지켜봐주고 있었다는 것과 이제는 진정 떠났기에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기쁨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감정에 목이 메여왔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순간 노사부가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비류향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힘이 없어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결례인데 어찌 함부로 눈물을 보일까. 그러나.
“울어라. 아니, 울어도 된다.”
노인은 그렇게 말했다. 어린 게 어린 것 답게 운다고 화낼 성 싶으냐. 부모 잃은 설움은 스스로 풀릴 때까지 울어야 하는 거다. 소돼지도 부모자식 잃으면 울게 놔두는데 사람은 아니할까. 노사부의 말에 비류향은 울었다. 목놓아 울지는 않았으나 그동안 쌓였던 회한을 강물에 흘려보내듯 조용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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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언제쯤이면 눈을 뜨나요?”
“오늘 오후 쯤이면 깨겠지.”
연비의 물음에 노사부는 그렇게 대답하며 국수그릇을 들어 입가에 대고 육수맛을 보았다. 음, 맛은 있지만 정성이 없구만. 유명한 객잔의 아침식사를 그렇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노사부 뿐일 게 분명했다. 어찌되었든 그 말에 연비는 물론이고 나예린 역시 눈을 빛냈다.
“정말요?”
“정말인가요?”
“아, 그래. 밥 좀 먹자 이것들아.”
갈 길도 먼데. 노사부가 궁시렁거렸다. 그걸 들은 나예린이 물었다.
“어딜 가시는데요?”
“사천땅 한 바퀴 돌러.”
“뒤숭숭한 시국에 유람가십니까?”
“유람은 무슨. 집 나간 똥개 잡으러 가는 거야.”
제자의 비아냥에 노사부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이 놈, 아니 이 년(?)이. 제 누이, 가 아니라 언니 반의 반의 반만 닮으면 좀 좋으련만.
“똥개요?”
“네 누이 물고 도망간 똥개.”
그 말에 연비 뿐만이 아니라 나예린까지 수저를 놀리던 손길을 멈추고 뜨거운 눈길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노사부가 허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향이 녀석, 인심은 잘 얻는구만.
“밥 먹고 준비 좀 하고 바로 떠날 거다. 그리고 연비 넌 여기 남아라.”
“왜요?”
“만의 하나고 정말 불가능한 일이지만 혹시라도 그놈이 돌아왔을 때 지킬 사람이 있어야 되니까. 알겠냐?”
“그건……. 네…….”
연비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납득한 듯 했다. 그러나 뒤이어진 노사부의 말에 결국 불만을 터뜨렸다.
“참고로 지금의 네 실력으로는 죽었다깨도 그놈을 못 이길 거다.”
“네? 아니 그럼 왜 남으라시는 건데요?”
“이길 수 있도록 진원진기를 주입해주고 갈 거니까.”
“……하나뿐인 제자 죽이시려구요?”
타인의 기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내공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 흡수해야 비로소 진정한 자신의 것이 되는데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매우 위험한 일이다. 같은 무공을 사용하는 사제지간에서도 매우 조심스럽게 시간을 들이는 일인만큼 연비의 의문은 도를 넘어선 것이기는 했지만 불합리한 것은 아니었다.
“너는 어째 사부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맨날 비뚫어지게 받아들이냐?”
“내력 증강하라고 하시는 건 아닐 테니까요.”
“그건 맞는데.”
“거봐요.”
“아, 거 참 말 끊지 말고 좀 들어라! 서오西汚놈 그거 조잡한 기술만 있는 놈이라 별 거 아니지만 지금은 네 공력이 부족해서 싸우면 개박살나! 그러니까 싸울 때만 쓸 수 있도록 금제를 걸어둘 거야! 알겠냐? 그리고 그 진기, 너만 쓰는 게 아냐! 향이한테도 정기적으로 주입해야 하는 거야!”
“……언니한테요?”
“그래.”
그제서야 연비는 진지한 눈빛으로 노사부를 바라보았다. 크으, 이런 것도 제자라고. 제자 복 참 없다. 노사부가 그렇게 속으로 한탄하고 있을 때 나예린은 무언가를 짐작한 듯한 눈빛으로 노사부에게 물었다.
“아직, 언니 다 안 나은 건가요……?”
“깨진 그릇은 아무리 멀쩡해보여도 물 부으면 물이 샌다. 그런 상태야.”
노사부는 아직 낫지 않았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리고 잠시 후, 식사를 마친 일행은 비류향이 잠들어 있는 객실로 향했다. 노사부는 연비의 몸에 진기를 주입하면서 말했다.
“지금보다 더 쪽잠이 많아지면 상중하 삼단전에 진기를 주입해라. 눈은 뜨고 있는데 안색이 하얗고 피곤해하면 소주천로와 대주천로를 따라 주입해라.”
대답은 없었다. 노사부야 이미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경지였지만, 보통 진기를 주고받을 때에는 말은 고사하고 입도 뻥끗하지 않는 게 상식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진 것의 몇 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공력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고통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주입이 끝나고 나서야 연비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얼마나 있다가 오시려고 이렇게 넣으시는 겁니까?”
“한 달. 일단 사천땅만 뒤져볼 거다.”
“없으면요?”
“그럼 내 손을 떠난 거지.”
“…….”
연비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럼 누이를 저렇게 만든 이가 잘 먹고 잘 살아도 신경 안 쓰신다는 얘기입니까. 그런 속내가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그 모습에 노사부가 말했다.
“그런 놈들은 절대 조용히 못 살아. 분명 어디서든 사고를 칠 거야. 허나 그때까지는 쥐죽은 듯 살 테니 찾고 싶어도 쉽지가 않아. 못 찾을 거야 없지만 귀찮게 찾아다니면 짜증이 나고, 그러면 보는 순간 죽여버릴 테니까 내버려두는 거야. 인생 즐기며 살다가 사고쳤다는 얘기 듣고 찾아가면서 가는 동안에 어떻게 꺾고 쑤시고 비틀고 뭉갤 지 궁리해야 되는 거다. 알겠냐?”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노사부의 눈 안에 번뜩이는 무언가를 엿본 연비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의 모습을 본 노사부는 이번에는 나예린을 향해 말했다.
“너도, 안력眼力 공부 좀 해둬라. 아니, 다른 건 몰라도 그 똥개 놈의 기운 기억하지?”
“……네.”
“그것만이라도 감지할 수 있도록 수련을 해. ……음, 아니다. 그냥 전체적으로 봐. 직시直示할 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직관直觀의 경지에 들 텐데 될 걸 괜히 샛길로 갈 필요는 없겠지.”
“알겠습니다.”
그 모습에 연비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좀 더 자세히 알려주면 안 돼요?”
“제자도 아닌데 뭘 더 알려줘? 내가 누누히 말했잖냐. 세상은 등가교환이야. 난 아무 것도 안 받았는데 이만큼이나 알려줬으면 됐지 뭘.”
“……예린이 아버지한테서 노잣돈 두둑히 받으시지 않으셨던가요?”
“그건 똥개 잡는데 쓰는 돈이고.”
자연스럽게 제자의 비난을 흘려보낸 노사부는 잠시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잠든 얼굴은 어제보다 안색이 밝아져 있었다. 마음의 짐을 덜어냈기 때문이리라. 내 참. 어쩌다 이렇게 정을 붙이게 되었을까. 세상 사는 일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다녀오마.”
그렇게 말하며 노사부는 방문을 나섰다. 그리고 연비가 미우나 고우나 스승인 노인을 배웅하러 나왔을 때, 노인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말 그대로 바람처럼 사라진 것이었다. 신출귀몰한 노인네. 연비는 그렇게 생각하며 방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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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뢰신전의 영압이 느껴진다……! 그리고 학점의 영압이, 사라졌어……?!
- 가끔 조아라에 보면 댓글 앞에 @ 다시는 분들 계시던데 이게 뭔가요?
- 어린 시절 편이 이렇게 길어질 내용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주작단은 언제 볼 수 있으려나…….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8.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8.
정신을 차렸을 때는 새카만 공간에 오직 자신만 있었다.
발에는 분명 땅을 디디는 감촉이 있건만 전후좌우상하 그 무엇도 구분되지 않았다. 시험해보지는 않았지만 허공에 발을 내밀어도 디뎌질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지금 자신이 제대로 서 있는 건지 누워있는 건지도 구분되지 않았다. 그렇게 그 어떤 것도 정확하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불안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문득 비류향은 고개를 돌렸다. 사실 어느 방향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위로 젖히든 아래로 숙이든 시선이 향하는 곳은, 바라봐야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봐야할 곳을 알고 있고 그대로 몸이 움직인다는데서 의구심이 들 법도 했지만 희한하게도 그런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새카맣던 공간에 유일한 빛이 있었다. 아득히 먼 곳에 바늘 구멍과도 같은 작은 빛이 보였다. 아주 먼 곳에 있는 아주 작은 빛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시선을 집중하자 그 빛이 매우 가깝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빛 속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굴까. 역광의 그림자 때문에 쉽사리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조금 더 집중하자 서서히 윤곽이 떠오르고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비류향은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오래 전에 자신의 곁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깨닫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엄마. 아빠.
입을 뻐끔거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쉼없이 불렀다. 엄마. 아빠. 아주 어릴 때 배웠을 가장 단순한 단어였건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 그제서야 이 불합리한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면서 비류향은 달리기 시작했다. 새카만 어둠 속에 뭐가 있는지도, 무엇을 밟고 가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내달렸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이들의 품으로 뛰어들기 위해서.
그러나 닿지 않았다. 도달할 수 없었다. 달리기 전에는 열댓 걸음 남짓으로 보이던 부모님과의 거리가 달리면 달릴수록 멀어졌고, 희미해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었다. 멈춰버리는 순간 그때는 저 희미한 모습마저도 다시 볼 수 없게 될까봐. 망가져버린 몸으로 뛰느라 순식간에 숨이 거칠어지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래도 달렸다. 애달픈 숨소리만이 정체모를 공간에 울려퍼졌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듣고 싶은 말이 많았다. 동시에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온갖 말들이 거품처럼 피어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대체 무엇을 전해야 할까. 나는 무엇을 전하고 싶은 걸까.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걸까. 어떤 말씀을 해주실까.
온몸을 부수는 듯한 통증이 덮쳐온 건 그때였다.
갑작스러운 격통에 균형을 잃은 몸은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구른 게 맞는지는 의문이었다. 몸 어딘가가 바닥에 부딪치는 감각도 없었고 넘어진 것 같은 느낌도 아니었다. 그러나 시야는 빙글빙글 돌았다. 폐부가 찢어질 듯 했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온몸의 뼈란 뼈에서 가시가 돋아나는 것 같았고 마디란 마디에 바늘이 수십 수백 개씩 꽂히는 듯 했다. 살이란 살은 죄다 비틀려 찢겨지는 것 같았고 오장육부는 누군가가 헤집는 것처럼 뒤틀려왔다.
그러나 육체의 고통보다 더 괴로운 것은 정신의 고통이었다. 부모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안타까움. 간절함. 초조함. 당혹감. 허탈함.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허상이라도 좋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고 싶어. 닿는 순간 사라지더라도 만지고 싶어. 어지럽게 흔들리는 시야 너머로 새하얀 빛이 보일 때마다 비류향은 그곳으로 향하려 했다. 부질없는 행위라 해도 포기할 수 없었다.
억겁일까 찰나일까. 어느 순간 그 모든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부모님과 빛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순간 비류향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엎드려 울었다.
계집애 하나가 운다고 세상이 돌아봐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울고 앉아있으면 누군가 밥을 떠먹여주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있어야 했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후에는 어린 동생의 유일한 혈육으로서 결코 약해질 수 없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보은을 위해 스스로 값싸다 여기며 눈물을 막았다.
그렇게 버티고 참았던 눈물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서러웠다. 왜 나는 어머니 품에서 울지 못하는가. 왜 나는 아버지께 노리개 하나, 과자 하나 사달라 조르지 못하는가. 진상인지 허상인지도 모를 것에 다가서는 것조차도 못한단 말인가. 보고 싶은데. 만나고 싶은데. 하염없이 서글프게 울던 소녀가 누군가의 손길을 느낀 건 너무도 지쳐 더 이상 울 기력도 없을 때였다.
투박하지만 따스한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칠지만 다정한 손길이 눈물을 훔쳤다. 익숙한, 허나 오랫 동안 느끼지 못했던 손길에 비류향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그토록 닿고자 했던 이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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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부는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로 했다. 기나긴 삶 동안 수많은 실수와 잘못이 있기는 했지만 노사부가 잘못을 인정한 횟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것은 강자의 오만이라기보다는 천성이었다. 물론 최강을 넘어 지고至高를 지나 무적無敵이 되면서 그 어떤 것도 그에게 물리적, 정신적 고난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일은 그에게 무시무시한 고난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지?”
“오늘로 닷새입니다.”
자연스러운 하대에도 불구하고 정천맹주 나백천은 공손히 답했다. 이미 비류향의 몸을 살폈을 때 노사부의 내공이 심후하다는 것을 알았던 만큼 처음 본 순간 노인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자연스럽게 노사부의 하대를 받아들였다. 것보다 이 노인,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펄럭! 좌악!
“!”
“아, 아!”
노사부는 거침없이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누워있던 소녀의 나삼을 벗겼다. 비명소리가 울려퍼질만도 했건만 정작 당사자인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옷섬을 여밀 생각은커녕 눈조차 뜨지 않고 죽은 듯 누워있을 뿐이었다. 나신이 허공에 노출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일까. 되려 옆자리에 있던 나예린이 놀라 소리쳤을 뿐이었다. 허나 그게 아니었다.
“……사흘 지난 시체 색깔이구만.”
아주 작기는 하지만 곰팡이처럼 조그만 시반屍斑이 여기저기 보이는 몸이었다. 특히 손가락이나 발끝으로 갈 수록 증상이 심했다. 왼쪽 어깨는 아예 시커멓게 죽어있었다.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게 기적이었다. 한 차례 소녀의 몸을 죽 훑어본 노사부는 한숨을 내쉬고는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날 내려왔어야 했나. 그리고 나예린이 조심스레 비류향의 옷섬을 여매는 것을 보며 나백천에게 말했다.
“쯧쯧쯧. 나 따라한다고 애썼구만 그래. 부족한 안력眼力은 딸내미 힘을 빌렸지?”
“그렇습니다.”
“그럼 그냥 삼단전하고 임독양맥 다 같이 돌렸으면 됐을 텐데. 용안龍眼이 있는데 뭘 망설였어. 그리고 어차피 남는 내공은 틈새로 흘러가 자연스레 흩어질테니 주화입마 걱정도 없었잖아.”
“그렇습니까……?”
“몰랐냐?”
“……예.”
“그, ……하아, 그래. 이런 몸이 세상 천지에 또 어디 있어서 그걸 알겠냐.”
대체로 타인이 억지로 주입한 내공은 쉽사리 섞이지 않고 맴돌다가 몸에 이상을 일으키거나 주화입마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내공이 흐르는 통로인 기맥과 혈도가 망가진 비류향에게 타인의 내공은 그저 스쳐지나갈 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서천의 악랄한 수법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물론 그 역시 지나치면 몸을 망가트리는 법이지만.
어찌되었든 산 사람의 몸은 아니었다. 천하의 화타가 살아돌아온다고 한들 차라리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숨을 끊으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놈 보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길 잘했군. 제 누이가 이런 몸이라는 걸 안다면 당장에 서천인지 뭐시긴지 잡아 족치겠다고 갈 게 뻔했다. 말릴 생각은 없지만 아직은 아니다. 10년은 더 수련하지 않으면 복수는커녕 한 줌 혈수로 녹아내릴 실력차일 것이다. 제자의 목숨도 중요하지만 비뢰문의 후계자가 고작 그런 놈에게 쓰러지게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놈 손에 맡기면 간단히 죽여서 안 되지.”
보자마자 전력을 다해 격살하려 들겠지. 그러면 안 된다. 어린아이가 팔다리날개 하나하나 떼어내고 개미굴에 던져버리는 벌레처럼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여야지. 어이쿠, 큰일날 뻔했군. 죽이다니. 죽이면 안 되지. 미쳐서도 안 되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숨 붙은 상태로 고통을 느껴야지.
“무슨 말씀 하셨습니까?”
“아니, 어찌 고칠까 혼잣말 좀 했어.”
서천, 아니 하늘이라니. 당치도 않다. 서쪽 쓰레기西汚에 대한 차가운 분노를 잠시 접어둔 노사부는 나백천의 질문에 그리 대답하며 다시금 비류향을 살폈다. 아무리 다시 살핀다한들 반송장인 몸상태가 돌아오지는 않았다.
“…….”
노인의 온갖 고약한 요청과 심부름에도 해맑게 웃던 아이였다. 하루종일 병상에 누워 있어도 뭐라할 사람 없는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수발을 드는 아이였다. 이미 심득의 경지조차 초월해 보는 순간 사람 됨됨이를 아는 노사부의 눈이 부실 정도로 선함이 빛나는 아이였다. 인간 오욕칠정 모두 가지고 살면서도 인연만큼은 가차없이 끊고 살아온 인생이었건만 이토록 정을 붙이게 될 줄 몰랐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간신히 숨만 붙어 죽어가고 있었다. 극진한 정성이 부담스럽고 힘든 몸 좀 편하게 살라고 내보냈더니 이렇게 되었다. 통한의 실수였다.
서오西汚놈이 사천멸겁의 하나고 그게 천겁령이라는 집단에 속한 놈들이라고 했던가. 그거 분명, 그놈이 만든 거였던가.
“매질이 부족했어, 매질이…….”
깊은 한숨을 내쉰 노사부는 그대로 비류향의 단전 위에 손을 얹었다. 어쨌든 낫게 해야지. 설마 같은 상대에게 똑같은 시술을 하게 될 줄이야. 노사부에게 있어 어렵지는 않지만 매우 귀찮은 일이었다. 그나마 비류향의 몸은 이미 혈도와 기맥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지라 편한 축에 속했지만 그래봤자 오십보백보였다. 허나 어찌하랴. 자신의 실수로 이렇게 된 것을.
문득 노사부는 곁에 선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나예린이 몸을 굳혔다. 마음을 읽을 수 없는 노인이었다. 마치 아버지 나백천처럼 단단한 심상이 속내를 가리고 있었다. 단순히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바위를 살펴본다고 사람의 심성을 느낄 수 있을까. 드넓은 바다를 꿰뚫어본다고 인정이 느껴질까. 인간 아닌 대자연의 시간축에서나 느껴질 법한 압도적인 무언가──
“넋놓고 멍하니 보는 게 아냐. 명확하게 봐라. 용안은 그럴 때 가치가 있는 거니까.”
“……! 네!”
“네가 나중에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직시直示하지 못하는 용안은 쓰레기야 쓰레기. 솔직히 조금만 생각하고 보면 다 보일 거 보는 눈이 뭐 그리 귀하다고. 이게 다 사람들이 생각이 없어서 그래 생각이. 쯧쯧.”
가진 자는 가진 것을 저주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자를 시기하는 눈에 대해 노사부는 그렇게 평가했다. 그리고 그런 평가에 소녀가 충격을 받거나 말거나 노사부는 비류향의 몸에 조심스럽게 내공을 흘려넣으려다,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주변을 살펴보던 노사부는 어느 한 곳을 유심히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이며 나백천을 향해 말했다.
“제문지祭文紙랑 초혼향招魂香이랑 위령소종慰靈小鐘 좀 챙겨와.”
“……역시 안되는 것입니까.”
노사부의 입에서 상喪을 치를 때 필요한 물건들이 튀어나오자 나백천이 나직히 탄식하며 말했다. 아무리 기인奇人이라도 역시 사기死氣에 침식된 이는 살리지 못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노사부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 걱정마. 향이 제사 지내려는 거 아니니까.”
“그럼?”
“쓸 데가 있어. 그러니까 챙겨와.”
그렇게 말하며 노사부는 내공과 진원진기를 동시에 끌어올렸다. 내공을 다루는 솜씨도 솜씨였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육신의 근간이 되는 진기를 뽑아내면서도 낯빛이 변하지 않는 노사부의 모습에 나백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예린 역시 용안에 비치는 기의 흐름에 눈이 멀어버리는 것 같았다. 어찌 저토록 찬연하고 화사할 수 있을까. 상황이 이러지 않았다면 순수한 감탄이 흘러나올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뼈까지 상했나……. 근골筋骨……. 중추中樞……. 두골頭骨…… 오장五腸……. 육부六腑……. 멀쩡한 곳이 없군. 근단根丹과 단로丹路도……. 서오西汚놈…….”
비류향의 단전 위에 오른손을 얹은 노사부는 빠르게 소녀의 몸을 검진하기 시작했다. 멀쩡한 곳이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나일천의 사악한 내공을 정면으로 받아낸 몸은 예상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심각했다. 그나마 나백천과 나예린의 처치가 있었기에 노사부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리라.
“우선 뇌장腦腸과 근골……. 폐부肺腑는 옛 병 때문인가. 한 번에 손봐야겠군……!”
노사부의 내공과 진원진기가 흘러들어 갈수록 비류향의 몸에서 지독한 악취가 흘러나왔다. 시체가 썩는 냄새와 같았는데 이는 몸 안의 썩은 살과 죽은 피가 흘러나오기 때문이었다. 몸 밖으로 흘러나온 노폐물을 노사부가 삼매진화의 이치로 모조리 태워버렸기 때문에 잔여물이 남지는 않았지만 냄새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환기를 하면 사라질 수준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나예린은 그 냄새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내었다. 그리고 이를 잊기 위해 용안으로 비류향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앞서 노사부가 했던 말을 떠올린 소녀는 정확하게 보기 위해貞眼之勢 노력했다.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개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저 흘러들어오기만 하던 것들을 의사적으로 배제하고 보고자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직시直示하게 된 나예린은 노사부의 기가 몸 속 깊은 곳의 사혈死血과 부육腐肉, 폐골廢骨을 태우고, 새 살과 신선한 피가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환골탈태가 이러할까. 그만큼 경이적인 순간이었다,
“거 이제야 좀 제대로 보는구만.”
노사부의 말이 나예린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는 낯빛 하나 변치 않고, 심지어 자신의 내공과 진원진기를 주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되려 뒤에 있던 나백천이 경악했지만 노사부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그 눈으로 어떻게 봐야되는지 좀 알겠냐?”
“앞으로 계속…… 이렇게 보면 되는 건가요?”
“그래 그렇게, 아니 죄다 직시하라는 게 아니라 때에 따라 볼 거 안 볼 거 가려 보라고. 나중에 심력心力이 쌓여서 자연스럽게 흐름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러라는 거지 누가 맨날 직시하랬냐?”
투덜거리면서도 노사부는 제법 자세하게 소녀에게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옛날 같았으면 혀만 찼을 뿐 어찌하라 알려주는 일은 없었을 텐데. 물러졌군. 나도 물러졌어. 그러나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소녀를 보고 있자니 그리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 식경 쯤 흘렀을까. 비류향의 몸에서는 더 이상 사기死氣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비록 안색은 파리했지만 미약한 병색이 있는 수준이라 할 정도였다. 한 식경 전까지 사경에 들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여겨졌던 소녀라고 믿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었다. 노사부는 요란하게 허리를 펴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끝났다. 에잉, 말년에 참 귀찮은 일 많이 하는구만!”
“수고하셨습니다, 노야.”
“그래, 수고했지. 거 급하게 오느라 밥도 못 먹었다니까.”
“식당으로 가시겠습니까? 곧 상을 차리라 하겠습니다.”
“괜찮지만 차려준다는데 먹어야지. 아 참, 아까 말한 거 제문지랑 그것들 좀 가져다 놓고.”
“알겠습니다.”
나백천의 말에 노사부는 거절하는 척 하면서도 잽싸게 식사대접을 수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객실을 나서며 그 앞에 서 있던 소녀(?)를 향해 말했다.
“이제 들어가 봐도 된다.”
대답은 없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녀(?)─비류연은 침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제 누이를 닮으면……, 아니 반의 반의 반 정도만, 딱 그 정도만 닮으면 좋을 텐데. 제자의 뒷모습에 노사부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비 소저의 동생입니까?”
“그래.”
“……남동생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쪽은 친동생. 저쪽은, 여튼 동생.”
“그렇군요.”
비류연을 미심쩍어하는 나백천에게 노사부는 그리 둘러댔다. 수련(?)을 위해 여장시킨 소년이라고 사실대로 말해도 거리낄 게 없었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소년이라고 하면 괜히 일이 더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배가 고팠기 때문에 노사부는 휘적휘적 식당을 향했다.
그런 어른들과는 별개로 아이들은 의외의 방법으로 진실(?)에 접근해가고 있었다.
#####
나예린은 노사부와 아버지가 방을 나섬과 동시에 들어온 현의玄衣소녀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그 소녀가 비류향의 맥없이 늘어진 손을 자신의 이마에 대며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깊은 한숨을 내쉰 순간 깨달았다. 이 아이가 언니의 동생이구나. 한동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한 말은 그 생각에 쐐기를 박아주었다.
“누, 언니는 이제 괜찮은 거죠?”
“네. 노야께서 다 치료하셨어요.”
“따로 뭐 해야한다, 조심해야 한다는 말 없었죠.”
“네.”
“다행이다…….”
바로 곁에서 보고서도 못 믿을 치료였다. 방금 전까지 시반屍斑이 보이던 몸을 말끔하게 고쳐냈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그러나 그 광경을 보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노사부의 실력을 믿고 있기 때문인지 소녀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
“……왜요?”
밝은 갈색, 아니 황금빛 눈동자였다. 그것만으로도 신기한데 눈앞의 소녀는 전혀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치 아버지처럼 든든한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했다. 그래도 궁금하여 방금 전 노사부가 말해준 것처럼 직시直示하려고 하자,
“소녀의 비밀은 같은 여자라도 함부로 엿보는 게 아니랍니다.”
소녀가 그렇게 말하며 경계의 기색을 띄었기에 그만두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용안으로도 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아 미련은 없었기에 나예린을 고민하게 만든 건 소녀의 말이었다. 그런 건가? 무색투명하게 모든 걸 볼 수 있었던 비류향과 함께해서 그런지 소녀의 반응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어찌되었든 상대가 불쾌하게 여기기에 나예린은 순순히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잘못한 일은 바로 사과할 것. 그게 비류향이 가르쳐준 것들 중 하나였다.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으음, 그렇게까지 사과는 안 해도 되는데……. 여튼 알았어요. 것보다 그 옷.”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현의소녀는 나예린의 옷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 혹시, 언니가 만들어준 건가요?”
“네.”
“역시나. 그런데 앞부분이 왜 그런 거죠?”
“그건…….”
나예린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나일천이 소녀에게 새기고자 했던 심저心底의 사악은 비류향 덕분에 없었지만, 날카로운 쇳조각이 몸에 닿을 듯 말 듯 옷을 가르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두려움에 몸이 떨려오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말하기 힘들면 말 안해도 괜찮아요. 일부러 망가뜨린 건 아니죠?”
“아니에요! 언니가 만들어준 옷인데, 그런데, 그런데…….”
“어, 아, 알았어요.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어두워지는 안색을 보고 농담삼아 던진 말에 기어코 나예린의 눈가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자 현의소녀가 당황하며 말했다. 어찌할 줄 몰라 하던 현의소녀는 누이가 해주던 것처럼 소녀를 안아주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흘러 진정한 두 소녀는 침대 곁에 의자를 가져와 나란히 마주보고 앉았다.
“이제 좀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고마워요.”
눈가가 부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시시 웃는 나예린의 모습에 현의소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렇게 울 줄 알았으면 안 물어봤을 거에요.”
“좀, 많이……. 많이 무서운 일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나예린은 고개를 돌려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가슴께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닷새 동안은 송장마냥 미동도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용안에 비치는 몸은 얼마나 끔찍했던가. 그러나 이제는 생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이, 푸르디 푸른, 하늘과도 같은 그대가 있었기에 이렇게 무사해요.
“언니가 있어줬어요. 그리고 두 번이나 구해줬어요.”
“……그렇군요.”
자랑스러움 반, 부러움 반. 현의소녀는 그러한 감정이 묻어나는 대답과 함께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자랑스럽지만 동시에 나만의 누이를 빼앗긴 듯한 느낌이지 않을까. 나예린은 현의소녀의 반응을 그렇게 추측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예린은 처음 봤을 때부터 품어왔던 질문을 던졌다.
“저기…….”
“뭔가요?”
“왜 여장하고 있는 거에요, 비류연?”
움찔. 현의소녀의 첫번째 반응은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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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뢰신전, 검령사, 탈혼경인을 읽고 있는데, 역시 선현의 문장이 좋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어서 다음 편이 나오길 바라고 있지만, 저도 글 쓰는 입장에서 재촉해봤자 안 나온다는 걸 알고 있는지라 […]
- 향이가 너무 전형적인 평면적 캐릭터라는 얘기를 들었고, 실제로도 그러하기에 입체감과 작품의 재미를 위해 흑화 같은 걸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싶더군요. 역시 결론은 굴리기 뿐인가 [?]
- 전공과 타과 전공이 화, 수 발표였기에 늦었습니다. 다음주 역시 시험기간인지라 늦거나, 연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학점이 바람에 스치운다. […]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7.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7.
흔히들 백색白色은 물들기 쉬운 연약함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나백천의 백색은 그렇지 않았다. 그 앞에 감히 어떤 것이 자신의 색을 뽐낼 수 있을까 싶은 고압적인 백색. 모든 것을 살라먹는 백색의 어둠은 직시하는 것조차 두려운 재앙이었고, 마주하는 것은 더더욱 피하고 싶은 폭력이었다.
“크윽…….”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정신을 잃었던 나일천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온몸이 얻어맞은 듯 욱신거렸다. 일격一擊. 고작 일격이었는데 이 모양이란 말인가. 만약 서천西天의 독문병기가 없었다면 진작에 고깃덩어리가 되어 처참하게 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눈에 들어온 것은 예상했던, 그러나 틀리기를 바랐던 인물이었다.
"……형님."
히죽. 입가가 자연스레 미소를 그렸다. 질투와 욕망으로 뒤틀어진 속내와, 이를 대변하듯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과는 다른 기계적이고 반사적인 미소였다. 그러나 그 인물─나백천은 나일천을 향해서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어느 새 침대에서 가져온 이불로 딸의 몸을 감싸며 물었다.
“괜찮느냐.”
“……아, 아아…….”
다정한 말에도 나예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그 여린 몸을 보는 사람이 안타까울 정도로 세차게 떨며 손끝이 새하얘질 정도로 아버지의 옷자락을 쥐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퍼뜩 고개를 들며 뒤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시선은 벽에 기대어 있는 비류향을 향하고 있었다.
처참한 몰골이었다. 예리한 칼바람에 찢겨져 나간 어깨에서 흐른 피로 물든 상반신. 입가와 코에서 흘러나온 피거품에 젖은 얼굴. 실 끊어진 인형 마냥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꺾인 체 축 늘어진 팔다리. 무엇보다도 가장 끔찍한 것은 망가진 수준을 넘어 처참하게 찢겨나간 기맥이었다. 숨은 간신히 붙어있었지만, 쓰러지기 직전의 포대자루도 이것보다는 생명력이 흘러 넘쳐 보일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백천은 가슴이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그런가. 네가 또 예린이를 구해주었구나.
“언니……, 언니……!”
“…….”
엉금엉금 기어 비류향에게로 가는 딸을 보며 나백천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어느 틈에 집어넣었는지 모를 검을 다시 뽑으며 몸을 돌려 자세를 잡았다. 어지간한 고수의 눈으로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일천은 목에, 가슴에, 단전에, 사람 몸의 급소란 급소에 모두 칼이 닿는 느낌을 받았다. 농밀하다, 섬뜩하다, 날카롭다, 싸늘하다.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정련되고 폭력이며 구체적인 살기였다. 심검心劍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지 않을까.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왜 이리도 크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변명을……, 해 봐라."
"무슨 변명 말씀이시오, 형님?"
"이 상황에 대한 변명 말이다."
"이 상황?"
나일천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방을 한 번 둘러보고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관의 말은 씨알도 들어먹지 않는 무례한 호위병들 혼쭐내고,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계집이 주제도 모르고 나대길래 벌 좀 주고, 우리 이쁜 예린이에게 사내 맛을 알려주려고 한 것 말이오? 하, 하하하하! 아니, 형님. 어찌 어른으로서, 남자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인데 변명을 한단 말입니까? 예? 노망이라도 드셨, 흡!"
콰아아아아아앙!
초식조차 아닌 일검一劍. 그러나 어지간한 초식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위력적인 공격에 검과 검이 부딪쳤다고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허공에서 몇 바퀴 돌아 간신히 기세를 가라앉히고서야 겨우 바닥에 착지한 나일천은 증오 가득한 눈길로 나백천을 보며 외쳤다.
"왜? 변명하라고 하면 내가 '아이고, 형님! 내가 욕심이 과해 눈이 멀었었소! 부디 용서해주시오!'하면서 바닥에 엎드릴 줄 알았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할 줄이라도 알았어?! 당신이 저 높은 자리에서 내려보며 대범하게 지껄이면 내가 다 나불거릴 줄 알았냐고!"
악에 받친 나일천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백천은 묵묵히 자세를 잡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격二擊이 몰아쳤다. 이번에는 명백한 살초殺招였기에 나일천은 반사적으로 오른손까지 뻗어 공세를 막으려 했으나──
콰아아아아아앙! ──콰앙!
"크헉!"
이번에는 바닥을 수 차례 굴러 벽에 부딪치고 나서야 멈추었다. 손에서 떨어진 검은 저만치 굴러가 있었고 왼팔에서는 한 줄기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왼손으로 검을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쳇. 일이 틀어졌나. 나일천은 자연스럽게 오른팔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섰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고개를 들어보니 정작 나백천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군. 그러니 저토록 냉정하게 자신에게 살초를 흩뿌는 것이겠지.
“놀라지도 않으시는구려. 당신이 자른 팔이 다시 돋아났는데. 거 좀 기뻐해주시지. 동생 팔이 다시 돋아났는데 말이오.”
“내 동생은 죽었다.”
“…….”
방금 전의 살초는 혈육의 연을 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리라. 나백천의 동생 나일천은 이제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선언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죽었노라 담담하게 공언하는 나백천의 모습에 나일천은 뒤틀린 심기를 감출 생각 없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서천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럼 여기 서 있는 나는 뭐요. 귀신이오?”
“서천멸겁이라는 악귀지.”
“허, 그렇구만.”
고오오오오──
서로를 바라보는 형제의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는 당장이라도 상대를 격살시킬 만큼의 공력이 맺혀있었다. 서로를 향한 살기가 방 안에서 부딪치며 자연의 것과는 다른 인위적인 불꽃이 튀어올랐다. 초식의 교환은 고사하고 출수조차 하지 않은 검권劍圈의 충돌이건만, 범인凡人은 순식간에 고깃덩어리가 될 정도의 압력이 휘몰아쳤다.
나백천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냐.”
“이런 짓? 무슨 짓? 남궁가주를 격살한 것? 무례한 계집들 손봐준 것? 예린이를 탐하려 한 것? 서천의 무공을 배운 것? 어떤 것 말이오?”
“전부 다 말이다.”
“거, 방금 전에 변명하라고 할 때 다 한 거 뭘 또 굳이 들으려 하시는 거요?”
“그건 죽은 내 동생의 변명이었지. ……이번에는 네가 이런 짓을 하는 이유를 말해보라는 것이다, 서천멸겁!”
번쩍! 새하얀 검기가 나일천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명백한 살계殺計로서 천둥번개와 함께 쏘아진 검기를 인지하거나 피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나일천은 신속하게 오른손을 휘둘러 공격을 막았다. 카앙! 맑은 쇳소리가 울려퍼졌으나 이번만큼은 멀쩡히 서있던 자리에 그대로 선 나일천이 코웃음치며 대답했다.
“흥! 서천멸겁이라 불리면 내가 뭔가 대단한 이유라도 댈 줄 알았나, 정천맹주? 이 엿 같은 세상 뒤엎어보겠다는 거 외에 뭐 더 있을까.”
“……!”
나백천은 단 번에 세 장 정도 뒤로 물러나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일만 삼천 장의 싸늘한 쇳조각으로 만들어진 서천의 독문병기 서풍의 광란西風狂亂. 자신의 검과 내공이라면 충분히 베어낼 수 있으리라 판단했지만 그것은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말은.
“……얼마나 서천의 내공을 수련한 것이냐.”
“흠, 뭐, 꽤 되었다고만 해두지.”
역시 그랬나. 나백천은 직접 검을 부딪쳐본 결과 나일천의 내공이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과거 천무삼성이 합공으로 상대하여 간신히 팔을 베어낸 것이 서천멸겁이다. 비록 눈앞의 상대는 옛날에 팔이 잘린 서천멸겁 본인이 아니라 무기와 내공만을 이어받은 후계자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무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언제부터 그 사이한 무공을 수련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검을 맞대보니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고사하고 싸우게 된다면 백중지세의 싸움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나백천에게는 지켜야만 하는 이들이 있었다. 나예린과 비류향. 그 둘을 무사히 지키면서 서천을 상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상대 역시 썩 유리하기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쳇, 아직 부족한가.'
방금 전의 일격으로 나일천은 지금 이 순간 나백천을 상대로 승리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신경쓰고 있는 두 소녀를 노려 빈틈을 만들지 않는다면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서천의 무공에 대한 수련과 이해가 조금 더 깊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아무래도 성급했던 것 같았다. 빌어먹을 놈. 높은 자리에 올랐으면 호위호식하며 있을 것이지 죽어라 수련해서 실력을 쌓았나. 겉으로는 자신만만한 척 했지만 나일천의 속은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해야 했다. 아둥바둥 싸운 끝에 얻는 승리는 의미가 없었다. 철저하고 확고한 승리로 상대를 짓밟아야 의미가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그 앞에서 딸을 범한다. 그러지 않으면 복수의 의미가 없다. 그러한 집착이 심마心魔가 되어 그를 얽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아쉽지만 이 정도로 끝내주지. 예린이를 못 취해서 흥이 나질 않거든.”
“네놈이……!”
“크흐흐, 그 얼굴 참 볼 만 하군.”
분노로 일그러지는 나백천의 얼굴을 비웃으며 나일천은 그 너머,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반송장 상태인 비류향을 끌어안고 두려움에 가득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조카의 시선에 나일천은 가학심이 충족되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예린아! 이 숙부가 오늘은 바빠서 이만 가봐야겠구나!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참으로 미안하구나! 허나 걱정하지 말거라! 이 숙부가 언젠가 꼭 네게 어른의 맛을 가르쳐 줄 터이니! 네 보드라운 속살을 가르고 듬뿍 귀여워 해 줄 것이니 기다리고 있거라! 반드시!”
검디 검은 악의였다. 색욕과 집착이 서로 뒤엉키고 얽히고설켜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의념이 소녀의 여린 마음을 부수고 집어삼키기 위해 날아들었다. 압도적인 악의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려는 소녀의 귓가에──
“……괜찮아…….”
──구원의 문구文句가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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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눈을 뜬 것일까.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숨을 애써 이어가며,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힘껏 치켜뜨며,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경련을 간신히 억누르며 비류향은 품 안의 소녀를 위해 입을 열었다. 기절할 것 같은 악의에 몸을 떨던 나예린의 귓가에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걱정마…….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은…… 겁이 나서야……. 무서울 거…… 없단다……."
“언니……. 언니이…….”
팔이 왜 이리도 무거울까. 그나마 왼팔은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나마 말을 듣는 오른팔로 울먹이는 나예린을 안아주었다. 피에 젖은 상의에 얼굴이 닿게 되어 아차 싶었지만 나예린은 떨어지지 않았다. 되려 가슴께에 얼굴을 파묻으며 자신을 불렀다. 그 모습에 비류향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나일천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시야에 자세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거무죽죽한 무쇠팔을 단 사내의 형상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평생…… 얻지 못할 것을…… 얻으려 헤매다…… 광야에서…… 아무도 모르게…… 쓰러져 죽을…… 그런 것의 말에…… 귀 기울일 것 없어…….”
폐부와 식도에 들어찬 피거품에 소리는 이상했지만 다정한 말투였다. 품 안에서 떨고 있는 소녀를 위한 것이리라. 나예린에게만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경지에 이른 무림고수인 두 형제 역시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나일천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허나 비류향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눈길로 나일천을 바라보았다. 추악한 존재에 대한 혐오와 악의어린 시선조차 아니었다. 마치 불 속에 뛰어드는 날벌레를 보는 것과도 같은, 아니. 그보다 더한, 저잣거리 모퉁이에 쌓여있다 바람에 휩쓸려 어디론가 굴러가는 먼지덩어리를 보는 듯한 무심하디 무심한 눈길.
사실 너는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느냐. 대단한 것은 네가 주워다 몸뚱아리에 붙인 그 쇳덩어리지. 자신도 모르게 품고 있던 열등감 때문에 나일천은 비류향의 시선을 그렇게 느꼈다. 만약 그에게도 용안이 있어 비류향의 심상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그는 더더욱 분노했을 것이다. 이 시선이 의도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욕망과 광기를 제외하면 오만과 자존심만이 남는 사내의 평정심과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과연 그가 언제쯤이면 알게 될까. 아니나 다를까.
“네년! 이 빌어먹을 년! 이 개 같은 년!!!!!!”
언제 미소짓고 있었냐는 듯 나일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압도적인 살기와 끔찍한 악의가 비류향과 나예린을 집어삼키려는 듯 몰아쳤다. 검디 검은 악의의 홍수가 밀려온다. 시선을 돌리고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사실에 나예린은 더욱더 비류향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처럼 고독과 공포가 가득한 세상에서, 홀로 길을 밝히는 등대가 그러하듯 온기와 안도감을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온기와 안도감을 발판 삼아 두려움을 극복할 용기를 주는 이였다.
피냄새가 가득 했지만 그 안에서도 비류향의 체취와 더불어 한 줄기 청량함이 나예린의 폐부를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모든 것을 직시直示하는 용안은 흔들리면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태양 같은 빛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린아…… 보렴…….”
“…….”
“괜찮아……. 괜찮아, 린아……. 봐…….”
“……네…….”
귓가에 맴도는 속삭임에 나예린은 용기를 내어 눈을 떴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바로 옆에서 넘실거리는 심독心毒이 너무나도 무서웠지만, 독기가 강하게 느껴질수록 바로 곁에서 자신을 감싸는 온기와 청량감 역시 대비되어 증폭돼 소녀의 마음을 지탱해주었다. 크게 심호흡하고 나예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일천을 바라보았다.
광기와 탐욕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굳이 용안으로 보지 않더라도 추악했다. 그러나 무섭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덮치려고 했던 사내다. 하지만 방금 전과 같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압도적인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비류향의 말에 분노가 일렁이는 나일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치 싸움에서 지고 분을 삭히지 못해 낑낑거리는 투견이 저러할까 싶었다.
"……어때……. 무섭지 않지……?"
“……네. 하나도, 하나도 안 무서워요!”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다. 그러나 어느 덧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정신을 좀먹던 공포는 사라져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추악한 심정心精이 눈에 들어와 욕지기가 치밀었지만 이제 그것은 공포라기보다는 단순한 생리적 거부감이 만들어낸 역겨움이었다. 두려운 것이 아니라 더러운 것. 나일천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런 나예린의 모습에 비류향은 힘겹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짖는 개는…… 시끄러울 뿐이야……."
“네!”
어느 새 나예린의 눈에는 적의敵意가, 나일천을 향한 저항의지가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일천은 실성한 듯 실없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허, 허허……. 허허허허허허허…….”
이제는 정말 참을 수 없었다. 그러한 생각에 나일천은 이를 갈며 오른손에 공력을 집중시켰다.
"그 개에게 물려 죽어가는 년이 말은 잘 하는, 크헉!"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찰나의 방심이 부른 빈틈은 치명적인 일격이 되어 나일천의 하복부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 일반적으로도 급소지만 무인에게 있어 하복부는 단전이며, 이곳은 내공을 담아두는 그릇과 같은 역활을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이곳에 공격을 받았다는 것은 무술의 근본이 흔들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혈육의 정은 기대하지 마라!!!!!”
“크으으으으으으으!!!!!!!!”
나백천은 확실하게 잡은 승기를 굳히기 위해, 그와 동시에 무림에 큰 위협이 될 서천멸겁을 이 자리에서 쓰러뜨리기 위해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혈육의 정은── 이미 살초를 펼친 시점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오른팔과 머리를 베는 검로劍路를 따라 부드럽게, 그러나 강맹하고 파괴적인 검기劍氣가 휘몰아쳤다. 그것을 본 나일천은 다급히 왼손을 뻗어 비류향과 나예린을 향해 장력을 내뿜었다.
“광풍장狂風掌!!!”
과거 백풍검객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의 나일천이 자랑하던 절초가 소녀들을 향해 내뿜어졌다. 이를 무시하면 서천의 목을, 하다못해 팔이라도 벨 수 있다. 허나 그렇게 되면 소녀들은 한 줌 혈수血水로 녹아내리리라. 찰나의 순간, 고민 끝에 나백천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취하기로 했다.
“이 금수 만도 못한 노오오오옴!!!!”
“무, 아닛?!”
백혼검뢰천검식白魂劍雷天劍式
오의奧義
뇌망백렬雷網白裂
새하얀 백광이 나일천의 장풍을 흩어버리고, 그의 상반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허나 그 압도적인 검풍에 휩쓸리기 직전, 나일천은 비릿한 웃음과 함께 오른팔을 휘둘렀다. 공격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집중한 나백천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벽력탄霹靂炭!”
주먹만한 쇳덩어리 겉에 난 조그마한 구멍에서 나온 실에 심상치 않은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본 순간, 나백천은 경악했다. 암기와 독에 능한 사천당문이라해도 함부로 쓰지 못하는 것이 화약무기다. 위력도 위력이지만 화약은 국가에서 엄격히 관리하는 통에 쉽사리 손댈 수 없거늘 어떻게!
“하하하하! 결판은 다음으로 미뤄두겠소!!!”
와장창창!
경악하는 나백천을 뒤로 하고, 나일천은 오른팔을 휘두른 반동을 활용해 창문을 부수며 폭풍우 속으로 사라졌다. 나백천은 허공섭물의 기지로 허공에 뜬 벽력탄을 나일천이 도망친 창문을 향해 내던졌고── 콰아아아아아앙! ──천둥번개와는 엄연히 다른 이질적인 굉음과 함께 후끈한 바람이 비바람과 함께 실내로 들이쳤다 가라앉았다. 재빨리 창가로 다가간 나백천은 이를 악물었다. 나일천의 흔적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으음……!”
안타까운 일이었다. 매우 위협적인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천겁령 사천멸겁 중 하나를 완전히 끝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쉽지 않은 상대였으나 적절한 기습으로 단전을 뒤흔들었기에 순식간에 승기가 기운 상황이었던 만큼 아쉬움은 배가 되었다. 게다가 이렇게 도망친 서천이 훗날 벌일 패악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졌다.
허나 이미 엎질러진 물. 지금은 뒷수습을 해야하는 시점이었다.
“아버지! 언니가!”
딸의 외침에 나백천은 잊고 있던 것이 떠올라 급히 신형을 날렸다. 부어오른 딸의 뺨에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위급한 이가 있었다. 나백천은 기어코 바닥에 쓰러진 비류향를 바로 눕히고 맥을 짚으며 물었다.
“정신차리거라.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
“……맹주님…….”
“그래. 힘들겠지만 절대 정신을 잃으면 안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백천의 마음 속에는 이미 낭패의 기색이 흐르고 있었다. 틀렸다. 출혈도 출혈이지만 기맥이 심하게 망가졌다. 이미 망가져 있던 기맥이 망가져봤자 얼마나 더 망가지겠냐 싶었지만, 전회前回가 구멍을 임시방편으로 막은 둑과 같았다면, 작금의 몸은 거센 홍수에 어디랄 것 없이 금이 가 터지기 직전의 보와 같았다. 그것을 알기 때문일까. 눈이 거의 감긴 비류향의 입에서 유언과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연이에게…… 노야께…… 부디…….”
“그런 건 살아서 훗날 전하면 된다! 눈을 뜨거라!”
“언니! 안돼요! 제발!”
용안에 비치는 가시화된 죽음의 형태에 나예린이 절규했다. 그런 딸을 본 나백천은 순간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에 눈을 부릅 떴다. 노사부의 그것이라면. 자신 혼자서라면 불가능할 테지만 딸의, 나예린의 도움을 받는다면 해볼만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순간, 당장 위급한 이 순간만을 넘겨 시간을 번다면 급히 노사부를 찾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가 과연 비류향의 몸을 고쳐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해봐야 했다.
“맹주님! 괜찮으십니까?!”
“대체 이게 무슨, 아닛?! 의원! 의원을 불러! 어서!”
“서둘러 조를 나눠 명을 따르도록! 1조는 전前 정천맹 사천지부 부총령 나일천에 대한 수배령을 내려라! 그는 2대 서천멸겁이다! 2조는 시급히 의원과 약재를 구해오도록! 그리고 3조는 당장 호법護法을 설 준비를 해라!”
“맹주님, 그게 무슨,”
“설명할 시간이 없다! 어서!”
때마침 도착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나백천은 비류향을 침대 위로 옮겼다. 맹주의 명령에 따르던 이들은 나백천이 옮기는 비류향의 모습을 보며 경악했다. 그들 역시 일정 경지에 이른 무인들이었다. 외상도 외상이지만, 외상으로 드러날 정도로 심각한 내상을 입은 소녀의 모습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것 외에도 무인들은 비류향이 나예린의 말벗을 하는 소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끔 지나가다 마주치면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아름다운 소녀라는 게 그들이 가진 비류향에 대한 인상이었다. 그렇게 알던 이가 반송장이 되어 있으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부하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은 체 나백천은 함께 따라온 딸에게 말했다.
“예린아, 네 도움이 필요하단다.”
“제, 제 도움이요?”
“그래.”
나백천은 당혹스러워하는 나예린에게 지금부터 자신이 할 일에 대해, 그리고 거기서 나예린이 해야할 일에 대해 간략하고 빠르게 설명했다. 내공으로 깨지고 망가진 기맥을 일시적으로 감싸 보호하는 것. 그러나 완전히 망가져 손을 댈 수 없는 부분은 피해야 하는 것. 그러기 위해 용안으로 시급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가려내어야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단시간에 끝나지 않으며 매우 힘들 것이라는 것.
“할 수 있겠느냐.”
“……할게요.”
하늘 없이 새가 살 수 있을까天鳥之關. 물 없이 물고기가 살 수 있을까水魚之交. 그대 없는 삶은 지옥과 같은데 어찌 여기서 물러설까. 나예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나백천은 항상 유약하게만 느껴지던 딸아이의 결의에 감탄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으며 비류향의 하단전과 상단전─아랫배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시작하마.”
“네.”
나예린의 대답과 동시에 나백천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내공을 흘려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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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8일. 제 생일입니다. 그래서 연참으로 자축하려 했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생일인데 왜 그런 고난의 행군을 해야하는가 싶더라구요. <-
-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오면 왜 그리 창작욕구가 치솟기 시작하는 걸까요. 정작 쓰기 시작하면 팍 식어버리지만요. […]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6.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6.
"아, 오셨습니까, 맹주님!"
"사인死因이 뭔가?"
"심장을 적출당했습니다."
"……."
보고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비가 심해 업무를 위한 출발이 지체되지 않았더라면 이 비보悲報를 저녁에나 들었으리라. 수하의 보고를 들으며 나백천은 정천맹 사천지부 지부장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피투성이였다. 한 사람의 몸에서 이만큼의 피가 쏟아질 수도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이미 복도까지 가득찬 진득한 혈향에 예상하고 있던 광경이었지만 가능하면 빗나가기를 바랐던 장면이었다. 특히나 그게 아끼던 수하의 죽음이라면 더더욱.
"어찌 그리 쉽게 갔는가 이 사람아. 어찌 그리 맥없이 갔어……."
얼굴에 씌인 천 하나로 생사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뼈와 살이 파헤쳐지고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가슴부위를 보면 생사는 싫어도 구분하게 되는 법이다. 명문세가의 가주가 맞이하기에는 너무나도 처참한 죽음이었다. 안타까움에 비난의 말이 흘러나왔지만 그것은 결코 진심이 아니었다. 서천西天의, 천겁령의 준동이 의심되는 이 상황에 유능한 이를 이렇게 잃다니.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 조직의 수장으로서도 아쉬운 순간이었다.
들것에 실려나가는 남궁현의 시신을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나백천은 그가 쓰러져있던 장소를 살펴보았다. 단서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싶은 심정이었다. 여전히 마르지 않은 피에 비릿한 혈향과 더불어 미지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동시에 지독히도 깔끔한 광경이었다. 피가 튀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망가진 가구도 없었고 흐트러진 기물 또한 없었다. 저항의 흔적이 없다는 말이었다. 대체 누가 어떻게 했길래 남궁세가의 가주를 이런 식으로 죽일 수 있었을까.
심장의 적출 방향은 앞. 게다가 방어흔과 저항의 흔적이 없다. 그렇다면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면 오대세가의 가주를 일격에 순살할 수 있는 은거기인이었던가. 허나 남궁현이 쓰러진 위치는 응접용 의자 근처로 아는 이가 찾아와 다가오다 당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러운 위치였다. 게다가.
"……사絲 변…… 아니, 마馬 변인가?"
피웅덩이에 아슬아슬하게 덮이지 않은 바닥에 피로 휘갈겨진 작은 글자가 있었다. 초서라 하기에도 조악한 글자였으나 생명이 다하여 스러져가는 와중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남긴 증거였다. 한참 동안 글자를 살피며 궁리하던 나백천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 떠졌다. 뇌리에 무의미하게 떠돌며 조각조각 흩어져있던 정보들이 순식간에 하나로 이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독문병기였던 '팔'을 가져간 서천. 악랄하기 그지 없었던 그의 무공과 기교. 외팔이. 안심할 수 밖에 없는 익숙한 상대. 여기 남겨진 한 글자.
일馹.
"……."
"맹주님? 맹주님?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괜찮네. 것보다, 자네 혹시 부총령을 보았는가?"
"부총령이라면 아까 천향루로 간다고 했습니다. 천둥 치는 날은 술이 잘 들어간다, 고……."
그 말을 하던 수하는 말하던 도중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피투성이였습니다! 부총령은 피투성이였는데, 그게, 너무 자연스럽게, 그래서──"
나백천은 그 뒷말을 듣지 못했다. 들을 겨를이 없었다. 이미 창문을 넘어 쏟아지는 폭우와 천둥번개 속을 돌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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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르르릉── 쿠쾅! 콰르르르릉!
천지를 울리는 천둥소리는 잠잠해져가는 듯 하다가도 예상치 못한 번쩍임과 함께 다시금 세상을 뒤흔들었다. 그때마다 나예린이 몸이 펄떡 뛰었다. 쉼없이 몰아치는 천둥번개 때문이기도 했지만, 눈을 감아도 눈가에 파고드는 심저心底의 사악邪惡이 자신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호랑이 입 안에 머리가 들어가 있더라도 이것보다는 희망적일 것이다. 바닥없는 늪도 이것보다는 긍정적일 것이다. 그 정도로 사내의, 나일천의 심상心想은 끔찍했다. 그나마 앞에 선 비류향이 없었다면 어찌되었을지 모른다. 혀를 물었을 수도, 창문 너머로 몸을 던졌을 수도 있다. 아니, 그게 가능할까? 자살은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생각조차 못하게 하는 압도적인 탁기 앞에서? 그렇기에 그저 방패처럼 앞에 버티고 선 소녀의 등 뒤에서 오들오들 떨 수 밖에 없었다.
등 뒤로 전해져오는 떨림에 비류향은 지금이라도 나예린을 품에 안고 달래주고 싶었다. 허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하는 건 이 악몽 같은 현실이 지나간 후에 할 일이었다. 허나 그게 과연 가능할까. 무공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힘도 못 쓰는 소녀 둘이 팔 하나가 없다고는 하나 건장한 남성을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추격을 뿌리칠 수나 있을까? 팔 하나가 없다고 해도 기본 체력과 체격에서 차이가 나는데? 게다가.
"어허, 뭐하고 있어. 이 숙부가 빗물에 젖어가면서도 여기까지 찾아왔거늘, 어찌 근본도 모를 계집 뒤에 숨어서 얼굴도 안 비추는 게냐! 자, 이리 오너라."
나일천은 마치 아이를 맞이하는 부모처럼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양 팔을 넓게 펼쳤다. 오른팔과 왼팔. 두 팔. 한 쌍. 본디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나 형제 간의 비무 이래 오랜 세월 그에게는 없던 것이 돋아나 있었다. 비록 소매 바깥으로 보이는 팔이 새카만 무쇠 같아 보였지만, 다섯 가락 열네 마디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팔이었다. 어떻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텅 빈 소매를 흔들며 돌아다니던 사내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했으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가 사지 멀쩡한 데다가 호위무사들을 소란 없이 살해할 정도로 강한 자라는 게 문제였다.
"허허, 그것 참. 예나 지금이나 부끄러움이 많구나. 아무리 그래도 숙부가 왔으면 얼굴을 비춰야지. 내 어릴 때부터 너를 가르쳤다면 이런 예의에 어긋난 행동은 하지 않았을 텐데."
피투성이인 사내가 하기에는 너무나 부드럽고 자상한 말투였다. 허나 용안 따위가 없어도 알 수 있는 광기狂氣가 들끓는 눈이었다.
소름끼치는 눈이다. 비류향은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수련한 자는 아니지만 백무후와 팔섬풍과 함께하며 짐승의 눈과 날카로운 살기殺氣 어린 눈빛을 겪어봤기에 구분 정도는 할 줄 알았다. 그렇기에 깨달은 것이다. 저것은 패륜悖倫을 행하는 자의 눈이다. 살고자 하는 짐승도 아니고 억울함과 분노에 불타는 인간의 눈도 아니었다. 오로지 탐욕과 아집에 얽메여 뒤틀린 자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네가 오지 않으니 내가 갈 수 밖에 없구나. 형님께서 너무 너를 감싸기만 하셨어! 내 형님을 대신하여 오늘 예절을 가르쳐줘야겠구나!"
짐짓 혼내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 모습을 직시하고 있던 비류향은 나일천의 얼굴이 추잡한 미소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색욕으로 가득찬 웃음. 그렇기에 소녀는 짐승조차 되지 못할 악귀가 발을 내딛는 순간 입을 열었다.
"물러서십시오."
"……."
바닥에서 떨어지려던 나일천의 발이 멈췄다. 그나마 남아있던 인간의 조각인 미소가 사라진 건 거의 동시였다. 지옥불에 빛나는 악귀의 얼굴이 저러할까 싶을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로 나일천이 울부짖었다.
"무공은 고사하고 제 몸뚱이 하나 간수 못하는 계집이 감히!"
사자후와 같은 포효. 어설프게 무공을 배운 이라면 곧바로 운기조식을 해야할 정도로 사특한 기세였다.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몸을 뒤흔드는 사이함에 속이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그러나 역으로, 내공은 고사하고 진원진기조차도 노사부에게 간신히 주입받은 몸이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상중하 삼단전과 전신 기맥이 망가진 비류향의 몸은 나일천의 탁기에 흔들리기는 했지만, 그 탁기를 몸 안에 잔류시키지 않고 모래사장에 쏟아진 물처럼 곧바로 흘려내버려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거센 바람은 깃대를 부러지게 하나 바람에 흩날리는 실타래는 끊지 못하는 법. 과거의 악재가 지금은 호재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비류향은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되려 등 뒤에 선 나예린을 지탱하며 외쳤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러서십시오. 맹주꼐서 윤허하시지도, 예린이가 허락하지도 않았습니다."
"……네 년이 감히, ……흠? 으음……."
그제서야 무언가를 감지한 듯 나일천의 눈이 비류향을 훑어내렸다. 미심쩍은 것을 보는 불신과 불쾌감, 그리고 업신여김이 뒤섞인 눈이었으나 이는 곧 경계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바로 눈앞에 있건만 기맥조차 잡히지 않았다. 몇 번 스쳐지나갈 때는 그러려니 했다. 형님꼐서 예린이 말벗 삼아 부른 년이라 했으니 필시 백도白道 어딘가의 후지기수리라. 그때의 나일천은 외팔이 한량이었기에 기맥조차 잡을 수 없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서천西天의 힘을 얻은 지금도 잡을 수 없다고?
"네 년, 그냥 병신이 아니었군. 어느 문파에서 온 거냐."
당장이라도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것 같은 섬뜩한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하자 비류향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무서웠다. 무섭고 두려웠다. 돌림병으로 죽을 날을 기다리던 그때와는 다른, 어찌될 지 알 수 없는 공포가 몸을 휘감았다. 사랑스러운 동생이, 존경하는 노야의 얼굴이 떠올라 울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만을 의지하며 떨고 있는 나예린을 떠올리며 참았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순간적인 도박이었다. 무공은커녕 범인凡人의 기력조차 가지지 못한 계집이 그런 거짓말을 한다면 대체 누가 믿을까. 그러나 비류향은 한 달 전 시장에서 만났던 나백천의 말을 떠올렸다. 기묘한 기맥이라 했던가. 무림 백도白道의 집약체인 정천맹의 맹주조차도 의심에 고개를 갸우뚱했던 자신의 몸. 이 보잘것 없는 몸뚱아리를 판돈 삼아 마음을 독하게 먹고 그럴 듯한 말로 상대를 속여 시간을 벌자. 짐승만도 못한 자를 막을 누군가가 올 때까지.
등 뒤에서 떨고 있는 이 아이를, 이 어린 것을 지켜야 한다. 맹주의 신의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무섭다. 허나 조금이나마 일찍 태어난 이로서, 어찌 겁먹고 물러서겠는가. 다짐과 함께 비류향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금부터 자신은 저 사내가 쉽게 덤빌 수 없는 무언가를 숨긴 무인武人이 되어야만 한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떨리는 손을 숨기기 위해 자연스럽게 소매를 늘어뜨렸다. 그리고 한 쪽 발을 살짝 앞으로 내딛으며 양 무릎을 살짝 굽혔다.
'무언가'를 하기 위한 것처럼.
'무엇인가'가 있는 것처럼.
노사부와 비류연의 수련을 곁눈질하며 배운 어설픈 흉내가 결코 자연스러울 리 없었다. 나일천 역시 헛점 투성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앞서 말했다시피 이 거리에서도 잡히지 않는 기맥의 희미함과 더불어 그 어설픔 때문이었다. 수십 년간 고개를 숙이고 등 뒤로 칼날을 갈아오면서 온갖 의심암귀와 모략을 일삼아왔던 사내는 경천동지할 힘을 얻고서도 정체불명의 상대에게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 누군가는 겁이라고 할 신중함이 몸에 배어 고정관념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도 우습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일천은 코웃음과 함께 출수出手하려 했다. 무엇이 있는지는 부딪쳐보면 알게 되리라. 설령 숨겨진 무언가가 있더라도 저 어설픈 꼴을 보아하니 쓰기도 전에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비류향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숙부가 조카를 탐함은 패륜悖倫이고, 색욕色慾으로 어린 아이를 범하는 것은 천도를 따르지 않음이니 의를 망각함不從天道卽忘義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으십니까?"
"……흐흐, 흐흐흐흐, 흐허허허, 흐하흐하흐하하하하하하하!!!!!!!"
광소狂笑. 그 단어가 이토록 잘 어울리는 이가 어디 있을까. 사람의 탈을 쓴 악귀가 웃는 모습이 이러할까. 입가에 흐르는 침에도 개의치 않은 체 그는 미친 듯이 웃었다.
"패륜? 천도? 후, 흐흐흐흐, 흐하하하하하하! 무림은 강자지존强者之存이다! 무법無法의 땅이었어! 흐후하흐하하하하! 되먹지도 않는 예법禮法을 나불거리면 내가 물러설 것 같더냐? 응? 그래? 아니면 네가 예린이 대신 몸을 바치기라도 할 테냐? 열다섯이라 했던가? 혼례를 올릴 때가 된 계집이니 패륜도 아니고 천도에도 어긋나지 않는구나? 네 그리하면 예린이는 건드리지 않겠다 약조하마. 어떠냐? 응?"
"그럴 수 없습니다."
"……후흐흐흐, 그래. 그동안 예린이를 아끼는 척 했지만 결국 네년도 사람이야. 제 몸뚱이가 제일 중요하지."
일언지하의 거절에 나일천이 비아냥거렸다. 허나 곧바로 이어진 소녀의 말에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인을 해치니 적이요賊仁者 謂之賊, 의를 해치니 잔이라賊義者를 謂之殘, 잔적한 자를 일부라 한다殘賊之人 謂之一夫."
"……네 이년."
맹자 양혜왕 장구 하편 제8장 孟子梁惠王 章句 下編 第八章. 나일천이 마음에 들어하는 문구였지만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문구의 해석은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도道를 품은 군자君子도 아니며, 신념信念을 지키는 패자覇者도 아닌, 추잡한 욕망만 들어찬 일부一夫의 약속을, 아니, 조카를 겁탈하려는 색마色魔과 어찌 약조를 나눌 수 있단 말인지요?"
"이 빌어먹을 년이─────!!!!!!!!!!!!!!!"
와장창창!
실성한 듯한 사내의 발길질에 탁자가 소녀들의 곁까지 날아와 나뒹굴었다. 일부러 그런 것이리라. 그러나 비류향은 바로 옆을 스쳐지나가는 탁자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아미산을 함께 오르내리는 백무후와 팔섬풍의 장난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되려 침착하게 함께 날아든 반짇고리 안에서 바늘이 걸린 실을 하나 꺼내 손가락 끝에 감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팔을 내려 소매로 손끝을 가렸다. 동생 비류연이 비뢰도를 수련하던 모습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떨림없이 자연스럽게 실을 감는 소녀의 모습이 나일천에게는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역시 이 년은 무언가가 있다. 스스로가 만든 의심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나일천은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하는 속내를 감추고 말했다.
"설마 그 바늘 하나로 나를 어찌할 수 있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예羿는 화살 하나로 태양을 떨어뜨렸습니다."
"흥! 말은 잘 하는구나. 혓바닥이 아주── 잘 움직여!"
사천지부장 남궁현의 목숨을 빼앗았을 때와 같은 살수殺手가, 이번에는 소녀의 목을 노리고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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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르르르릉! 데구르르르…….
번개와 함께 노인의 손에서 떨어진 밥그릇이 바닥을 굴렀다. 내용물은 이미 노인의 뱃속으로 들어가 있었고 그릇은 튼튼하기로 소문난 고급 도기였기에 깨지지는 않았으나 식사 분위기를 깨트리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분위기 파괴의 공신인 노인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이마를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소녀(?)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집으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소녀가 지어 올린 밥이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흑, 죄송합니다, 어르신. 다시 지어오겠으니 부디 매질만은, 꺅……?!"
따악!
"비명소리도 여성스러워지는 걸 보니 수련의 성과가 나타나는구나. 여튼 스승을 놀리려 들다니. 벌이다, 이 녀석아."
"……."
노인이 그리 말했으나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답할 수가 없었다. 노인이 신속으로 내던진 젓가락에 맞은 이마를 부여잡고 고통을 참기 위해 몸을 떠는 것만이 소녀(?)─비류연에게 허락된 유일한 행동이었다. 제자의 모습을 한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던 노사부는 싱숭생숭한 얼굴로 방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쏴아아아아── 우르르릉──…… 콰르르르릉!! 우르르…….
물내음과 함께 요란한 천둥번개가 몰아쳤다. 이미 사람의 말로는 표현조차 하지 못할 경지에 든 노사부에게는 별볼일없는 자연현상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노인의 마음이 썩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편하지 못한 상태에서 썩 쾌적하지 못한 자연환경에 둘러쌓여 있자니 괜스레 심란해졌다. 맛있는 음식도, 훌륭한 술도, 그리고 모든 것을 뒷바라지할 노예 겸 제자도 있건만 노사부는 마음 한 켠에 들어선 찝찝한 감정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끄응……."
"……뭐가 그리고 신경쓰이십니까, 사부님?"
"거 참, 그러고 있을 때는 말버릇 좀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사부님?"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 비류연이 이마를 비비며 퉁명스럽게 묻자 노사부는 근래 몇 번이나 했던 말을 입에 담으며 비류연을 바라보다 말을 멈추었다. 쉽사리 보기 힘든 사부의 넋 나간 모습에 비류연이 불안을 느끼며 되묻자, 노사부는 그제서야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스승의 건강을 걱정한 제자는 집요하고 끈질기게 안위를 묻다가 "사부님,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그렇다니까. 뭘 그걸 몇 번이나 물어봐?" "……갑자기 제가 어른으로 보이신다던가, 애들 간식이 먹고 싶으신다던가," "노망난 거 아니다, 욘석아!" "끄흐으억?!" 젓가락을 맞았던 바로 그 부위에 노사부의 탄지공을 맞고 나서야 물러났다.
"향아……. 잘 있지……?"
빠른 시일 내에 저 놈과 함께 천향루에 가봐야겠군. 노예 겸 제자가 저녁상을 정리하는 동안 노사부는 처마 밑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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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향이 현 무림의 중진이자 경지에 도달한 고수라 할 수 있는 남궁현조차도 즉사를 면했을 뿐이었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나예린 덕분이었다. 숨막힐 듯한 나일천의 독심毒心이 비류향에게 집중되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예린은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를 용기로 연상의 소녀를 옆으로 잡아당겼다. 그로 인해 내뻗은 무쇠팔의 살상 범위에 나예린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일천이 급히 방향을 튼 덕분에 소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대신 왼쪽 어깨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절기도 아닌 단순한 공격의 후폭풍에 휘말려 벽까지 날아가 쳐박힌 소녀들을 본 나일천은, 그제서야 비류향이 무공은 고사하고 평범한 일반인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분노했다. 기만당한 분노는 단순했지만 화풀이는 단순하지 않았다.
나일천은 왼손 하나만으로 쓰러져 신음하던 비류향의 목을 우악스럽게 붙잡아 벽에 밀어붙여 올렸다. 아무리 건장한 성인이고 벽에 밀어붙이는 상태라고는 해도 열다섯 소녀의 몸을 한 손으로 들어올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서천의 무공으로 사이한 내공을 얻게 된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그는 기괴한 쇳덩어리 오른팔을 비류향의 단전 위에 얹으며 말했다.
"보통 무림인은 말이야, 단전이 파괴되면 즉사하거나 폐인이 되지. 일반인들도 뭐, 비슷하던가? 자, 그럼, 이미 단전이 깨지고 기맥이 망가져 내공이 없는 인간은 말이야. 과연 죽을까 살까?"
"그, 윽……!"
"한 번, 알아보자꾸나!"
"────────!!!!!!!!!!"
한떄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서천의 독문병기를 타고 들어오는 나일천의 내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격통이 되어 비류향의 몸을 휘저었다. 평범한 무인이나 일반인이었다면 단숨에 온몸의 혈도가 뒤틀리고 기맥이 망가지며 즉사했을 만큼 악랄한 수법이었다. 그러나 이미 망가진 비류향의 몸은 나일천이 우겨넣는 내공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상하지 않았다. 폭포에 바가지를 들이밀어 물을 받으려고 하면 거센 물줄기가 바가지를 깨트리지만, 채를 내밀면 틈새로 물이 빠져나가 멀쩡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허나 그것이 행운이라고 하기에는 소녀가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 너무나도 컸다.
"──────, …………! "
"졸릴 정도로 지루한가 보구나. 하긴 무작정 세게 매질하는 게 능사는 아니지."
"……크흡, 흐으, 끄으으윽, 그륽……!"
""어떠냐, 이제 좀 정신이 들지?"
"─, ──, 컥──!!!"
나일천은 비류향의 반응을 보며 불어넣는 내공의 양과 강약을 조절했다. 쉽게 죽일 수는 없었다. 고작 이러한 꼬맹이에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사내는 최대한 고통을 주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비류향은 목이 졸려 숨을 쉬지 못하는 것도, 피가 철철 흐르며 욱신거리는 어깨도 잊을 수 있었다. 가시나무가 큰 바람에 흔들리는 것과 같은 기세로 내장을 헤집는 격통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런 반송장 몸뚱이였으니 기맥이 안 잡히는 거였는데 말이야. 응?"
"윽──, ──────!!!"
"그런 것도 모르고 뭐가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허 참, 대단해. 아주 대단해. 여태껏 이렇게 나를 엿먹은 건 네 년이 처음이야. 자랑스러워 해도 좋아!"
"─────!! 하악, 륽……."
그리고 채 역시 폭포 아래 오래 두면 망가지는 것은 자명한 이치. 어느 덧 비류향의 입가에는 기침과 함께 검붉은 액체가 함께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상의 증거였다.
"……."
나예린은 그 광경을 보며 공포에 휩쌓였다. 용인의 능력은 비류향이 겪고 있는 끔찍한 고통을 아무런 여과 없이 전달해주었다. 마치 자신이 고문당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일천이 내뿜는 광심狂心과 비류향에게서 전해져오는 고통이 소녀의 심상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예린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
도망쳐, 린아. 어서.
"윽──, 악──…………."
"어른을 놀리니 기분이 좋더냐? 응? 그래? 어디, 음?"
"────!!! ……, ……!"
"대꾸조차 안하다니. 이래서 길가에서 굴러먹던 년들은 안된다니까. 예의가 없어, 예의가!"
"그윽──, ────!!!!!"
어서. 도망쳐. 린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의 격류 속에서 도망치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그 순간에도 자신을 걱정하는 비류향의 마음에 나예린을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를 용기로 나일천에게 달려들었다.
"숙부! 놔주세요! 언니 놔주세요! 숙부! 언니를,"
"귀찮게 굴지 말고 얌전히 있어!"
"꺄아악!"
쿠당탕탕!
거칠게 내쳐진 나예린의 몸이 벽에 부딪쳤다 떨어졌다. 그 모습에 나일천은 흥이 식었다는 듯 공력 주입을 멈추었다. 침과 피거품이 뒤섞인 액체가 비류향의 입가를 타고 흘러 손까지 적시고 있었다. 더럽게. 나일천은 눈살을 찌푸리며 슬슬 이 행위를 그만두고자 했다. 어차피 이 소녀는 전채요리였다. 주식은 말할 것도 없이 조카딸인 나예린. 수작을 걸어두어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인 친형 나백천이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한 상태기는 했지만 맹신할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비류향 때문에 시간을 소비한 상황이었다. 이 년은 예린이를 맛보고 남는 시간에 가지고 놀아도 충분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던 나일천은──
"뭐, 네 년은 나중이다. 지금은 우선 예린이를──"
따끔. ──아주 작은 통증을 느꼈다.
"……."
말 그대로 따끔이었다. 그 통증의 원인은 비류향의 손끝에 걸린 바늘이었다. 손끝에 걸어두었던 그것이었다. 그 작은 바늘 끝이 나일천의 손을 찌르고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돌린 나일천은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피거품 섞인 침을 흘리면서도, 눈조차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도 자신을 막아서려고 하는 소녀의 모습에 사내는 말없이 오른손을 소녀의 단전 위에 얹었다.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냐, 이 빌어먹을 년!!!!!!!"
나일천은 전력을 다해 일격一擊의 내공을,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쏟아넣은 후, 비류향의 몸을 나예린이 쓰러진 쪽으로 내동댕이쳤다. 콰앙! 털썩. 물 담은 가죽주머니 같은 소리가 났다. 허나 바닥에 나뒹구는 것은 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나예린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 비류향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어, 언니……? 언니……? 눈 떠요……. 일어나요…… 꺅!"
"숙부가 예의를 가르쳐주고 있는데 어찌 다른 사람을 보는 거냐, 예린아!"
"느, 놔주세요……. 싫어요……!"
"가만히 있어!"
짜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나예린의 고개가 세차게 꺾였다. 뺨이 화끈거리고 얼얼했다. 그와 동시에 혀끝에 찝찔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제서야 나예린은 자신이 바닥에 눕혀져있고 그 위에 나일천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옆 벽에는 비류향이 벽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아니, 저것을 앉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쓰러지지조차 못했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앉아 죽은 시체가 저러할까 싶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소녀에게 뭐라 말 한 마디 전하기도 전에 나일천의 목소리가 나예린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이런, 이런, 예쁜 얼굴이 엉망이 되었구나. 그러길래 숙부 말을 잘 들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잖느냐. 뭐, 이건 이거대로 독특한 맛이 있지."
악귀는 나예린의 턱과 뺨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에 혀를 댔다. 뱀의 혓바닥도 이것보다는 덜 소름끼칠 게 분명했다. 기묘한 신음성과 미지근한 입김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공포로 몸이 굳은 소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나일천은 께름칙한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으로, 날카로운 쇠 손톱으로 천천히 소녀의 가녀린 교구 한가운데를 따라 선을 그었다.
사라락.
날카로운 칼날은 비류향이 한 달 동안 공들여 만든 옷을 잔혹하게 갈라버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소녀의 나신에 나일천의 욕정과 광기가 화산처럼 들끓어 올랐다. 눈을 질끈 감아도 용안을 타고 파고드는 심상에 나예린은 숨이 막혀왔다.
와장창창!
"네 이노오오오오오오옴!!!"
노호와 함께 몰아친 정천맹주 나백천의 새하얀 검기劍氣가 나일천을 날려버린 것은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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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포맷하려는데 usb 인식이 되지 않아 하루를 날려버리고 이제서야 겨우 올립니다. 원래대로라면 00시 땡 하고 올릴 예정이었는데. 여튼 다음 편은 다음 주 수요일입니다.
- 하얀 늑대들의 카셀처럼 비류향을 무력 상향 시킬 계획은 전혀 없습니다만, 나중에는 전개하기 편하도록 호신술 정도는 가르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 편 정말, 무공 하나 없는 주인공을 비뢰도 세계관에서 굴린다는 건 정말…….
- 검령사를 읽었습니다. 청민 님 어서 써주시죠! <-
- 4월 5, 6일 포병, 4월 7, 9일 별의 바다, 4월 8일 하늘과도 같은 그대, 4월 10, 11일 세이야가 이렇게 일주일간 연참할 예정입니다. 음? 앗, 오늘의 날짜가!
- 타입문넷 Rudein님, 조아라 sEcho님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5.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5.
주객酒客들의 고성방가조차도 사라진 시간에 밤짐슴이나 분간하고 다닐 어둠이 내린 시간이었다. 그러한 어둠 뚫고 한 인영이 정천맹주 진천뇌벽검 나백천이 머무르고 있는 귀빈실의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이미 초목들도 잠든 시간인지라 대답이 들려올 리가 만무했으나 놀랍게도 반응이 있었다.
"들어오게."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작은 소리를 포착한 인영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솜을 누빈 신발이라도 신은 것을까. 그의 발걸음에는 자그마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백천의 방으로 들어온 인물은 쓰고 있던 초립을 벗었다. 혹여나 창문 너머로 새어나갈까 두려워하듯 작게 켠 등불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사천 지부장 남궁현이었다. 그를 보며 나백천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많이 놀랐는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다른 주머니 채우는 일 숨기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허허허, 사람하고는."
짖궂은 농담에 웃음이 피어났다. 그러나 곧 웃음기를 지운 나백천은 품 안에서 서찰 두 장을 꺼내 남궁현 쪽으로 내밀었다. 하나는 낡은 것이었고, 하나는 비교적 새 것이었다. 그것을 본 남궁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건……."
"2년 전, 본부에서 일어난 도난사건을 기억하고 있나?"
"제칠비고 도난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기억하고 있습니다."
2년 전이라면 남궁현 역시 본부에 적을 두고 있을 때였다. 정천맹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일곱 겹의 감시를 두른 엄중한 창고가 뚫린 것을 어찌 잊겠는가.
"음, 무엇을 도난당했는지는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나백천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남궁현은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정천맹주가 입을 열고 도난당한 물품과 그 유래를 설명하자 남궁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남궁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그는 낡은 서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그런 일이……. 그렇다면 이 서찰은……."
"그날 밤 범인이 두고 간 것일세."
"역시……."
남궁현은 낡은 서찰을 내려보다 나백천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나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었다. 그러자 남궁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서찰을 펼쳤다.
『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간다. 그동안 잘 보관해 줘 고맙다. 다음에 보자. -빚을 진 자가- 』
두 번, 세 번 읽어도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서찰을 원래대로 접어 내려놓은 남궁현은 또다기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서풍의 광란'……. 도난당한 것이 서천西天의 독문기문병기였다니……. ……설마, 서천이 아직 살아있다는……!"
남궁현의 나이가 올해로 쉰이다. 일반인이었다면 노년의 나이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강호에서 보자면 젊은 축이었다. 그런 그에게 100년 전의 천겁혈세는 전설 속 이야기와 다름이 없었다. 대전에 참전했던 그의 조부로부터 간간히 듣기만 했던 일이다. 그러나 조부의 이야기 속에 담긴 공포와 절망은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동요했던 것이다.
"그건 모르는 일이야. 그러니 쉽게 동요하지 말게. 적들이 바라는 게 바로 그것일 수도 있어."
"으음,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나백천의 지적에 간신히 정신을 되돌린 남궁현은 자신의 실책을 시인했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만 하더라도 서천멸겁이 쓰던 무기가 사라졌다는 말 한마디에 이토록 동요하는데, 이 사실이 공표되기라도 한다면 어떠할까. 무림 전체가 술렁이게 될 것이다. 설령 정말로 서천멸겁이 없다고 하더라도 정사흑백 구분 없이 강한 심리적 부담감을 느낄 게 분명했다.
"이제 왜 내가 이 늦은 시간에 자네를 불렀는지 알겠는가? 모든 판단은 사실 확인을 마친 후에 내려도 늦지 않네."
"명심하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저것을 펼쳐보게."
남궁현은 새 서찰을 펼쳐보았다.
『바야흐로 때가 되었다. 빚을 청산할 때가! 서쪽 관문을 넘어 서쪽 끝에서부터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할 것이다. -빚을 진 자가- 』
내용을 몇 번 곱씹어 읽은 남궁현은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서쪽 관문은 옥문관일 것이고, 서쪽 끝이라면 이곳, 사천땅이겠군요."
"그래. 그래서 내가 이곳으로 온 것일세."
나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 서찰은 그를 안마당인 본부에서부터 끌어내기 위한 함정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백천은 딸인 나예린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었다. 자신이 없는 정천맹에 놔두느니 차라리 자신의 곁에 두는 게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다. 함정이든 아니든 직접 나서야 했다. 이것은 일종의 도전장이기도 했다.
"2년 만에 나타난 유일한 단서라네.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야."
"바로 조사에 착수하겠습니다. ……허나, 너무 막막한 일이군요."
수하들에게도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이상 번거로움은 물론이거니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조차도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나백천이 말했다.
"작은 단서는 있네."
"무엇입니까?"
"100년 전, 천무삼성天武三星께서 그 자의 오른팔을 잘랐네."
"오른팔이라……."
남궁현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서천멸겁의 독문병기는 그의 팔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권법이라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팔이라는 뜻이었다. 몸에서 잘려나간 팔이 100년 넘게 멀쩡할 리가 있겠느냐마는, 그건 그것이 사람의 살이 아닌 차가운 쇳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주제에 진짜 살덩어리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니 믿을 수가 없는 얘기였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기로 했다. 만약 서천멸겁이 살아있다면? 2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이러한 도발을 펼치는 이유가 100년 동안 몸에서 떨어져 있던 독문병기의 조정을 마쳤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찾아야 하는 건 무엇일까. 곰곰히 고민한 끝에 그는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입에 담았다.
"외팔이였던 자, 허나 지금은 외팔이가 아닌 자를 찾아야겠군요."
"내 자네에게 이곳을 맡긴 게 정말 잘 한 일인 것 같네. 어찌 그리도 정확하게 내 생각을 꿰뚫나?"
"과찬이십니다."
담백한 반응이 오갔다. 그만큼 막중한 업무였다. 실패하면 사천의 실마리를 놓치는 꼴이고, 성공하더라도 여차하면 사천과 맞서야 하는 일이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으나 이럴 경우에는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압박감에 한숨을 내쉬던 남궁현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물었다.
"……비류향이라는 그 소저는 어떻습니까?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자네는 그 아이가 외팔이로 보이는가?"
"허나 끄나풀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맹주님께서 이곳에 오시고 얼마 되지 않아 만났다는 게 수상합니다."
"내 사람을 시켜 뒷조사를 해봤네만, 거짓이 없었네. 실제로 그 아이가 살았던 마을도 있었고, 돌림병에서 살아남은 이들 역시 그 아이에 대해 증언해줬고."
"허나 특이한 기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인神人이 몸을 살폈다고는 하지만, 그게 혹여 그들이 몸을 만져 금제禁制를 건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자네라면 그토록 특이한 세작을 놓겠는가?"
"맹주님."
지부장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백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나 역시 그걸 의심해본 적이 있네. 하지만 그런 걸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는 이가 바로 곁에 붙어있지 않은가?"
"……설마, 예린이가?"
"그 설마일세. 덕분에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지."
믿음을 위한 의심이었다. 믿고 싶었기에, 그렇기에 나예린은 난생 처음 스스로의 의지로 용안龍眼을 전개하여 비류향을 샅샅이 살폈다. 결과는 순백純白이었지만 영혼까지 뒤흔드는 충격에 비류향은 하루 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 다음날에야 간신히 눈을 떴다. 그 동안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나예린은 연유를 묻는 비류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믿고 싶었노라고. 그래서 한 행동이었다고. 혼이 날까, 미움받을까 두려워하는 어린 소녀를 향해 비류향은 물었다.
"이제 믿을 수 있겠니?"
"……네."
"그래, 그럼 됐어."
몸 한 번 앓고 신뢰를 얻었으면 남는 장사지. 열다섯 소녀는 그렇게 덧붙였다. 곁에 함께 있던 나백천이 경탄할만한 대범함이었다. 그와 관련된 얘기는 하지 않았으나 남궁현은 용안으로 확인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용안으로 살펴 아무 것도 없았다면 믿을 수 밖에 없겠군요. 어찌되었든 서천에 대한 정보,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네."
그렇게 말을 마친 남궁현은 왔던 것처럼 초립을 쓰고 조용히 객실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백천은 두 편의 서찰을 품에 갈무리했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가. 불안과 더불어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정녕 서천멸겁이 나타날 것인가. 과연 일신一身의 힘으로 그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혹여나 다른 멸겁들이 함께 있다면 어찌될 것인가. 그렇게 되면 예린이는. 지켜줄 이가 사라지면 그 아이를 누가 보살펴줄까.
결국 나백천은 닭이 울고 아침햇살이 방을 비출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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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이토록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어머니의 태반이 아니라 스스로 숨 쉰 것은 이제 고작 십이간지를 일순一巡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언제나 고통스러운 순간들 뿐이었고, 찰나의 안식조차도 그저 한 숨 돌릴 수 있을 뿐인 세월이었다. 하루하루가 메마른 사막과 음습한 늪지를 헤쳐나가는 느낌이었다. 나예린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과거는 그런 잔혹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비류향이 오고 나서는 그 반대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고통에 대한 보답처럼 너무나도 행복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주식이 담긴 그릇을 앞에 두고 찬은 그 위로 놓는 거야. 오늘처럼 누군가와 함께 먹으면 가운데 두고. 젓가락은?"
"받침대 위에요."
"응. 먹기 전에는 어떻게 말하지?"
"잘 먹겠습니다, 라고 해요."
"맞아. 자, 이제 먹자.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다 먹은 후에는?"
"잘 먹었습니다."
"응. 나중에 동생이 생기면 린이 네가 언니로서 가르쳐줘야 돼. 알겠지?"
"네."
그릇 놓는 법. 바르게 앉는 법. 입 안에 음식물이 있을 때는 말을 삼가하는 것, 반찬을 헤집지 않는 것, 식사 때의 인사법 등을 배웠다.
"젓가락 한 쪽은 약지와 엄지 안쪽으로 잡고, 다른 한 쪽은 엄지 끝으로 고정하면서 검지와 중지로 움직이는 거야."
"……어려워요."
"처음엔 다들 그래. 자, 이렇게."
젓가락질은 식사 후에 따로 더 배웠다.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나예린이 울상을 짓자 비류향은 곁으로 다가와 세심하게 집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하다보니 조금씩 익숙해져갔다.
"속옷이 작구나. 좀 더 큰 걸 입어야겠어."
"중요한가요?"
"응. 몸에 맞는 속옷을 입어야 쑥쑥 크니까. ……나도 저잣거리서 들은 장사꾼에게 얘기지만."
"일부러 새 것 사게 하려는 걸 거에요."
"후훗, 그럴지도 몰라. 그치만 지금 속옷 입고 있으면 답답하지?"
"……네."
"그럼 새 걸 사야지. 그리고 속옷을 잘 입어야 겉옷도 맵시가 살아나지. 옷고름과 치마 매듭짓는 법 기억하니?"
"네. 그렇게 묶었어요."
"어디 보자. 응. 잘했어."
옷을 정갈하게 입는 법을 배웠다. 단순히 몸을 가리도록 꽁꽁 싸매는 것이 아니라 속옷부터 겉옷까지, 적삼부터 치마까지 어디에 두르고 어떻게 입으며 어찌 매듭지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우선 큰 빗으로 빗고, 그 다음에 작은 빗으로 빗어야 머릿결도 안 상하고 당겨서 아프지도 않아."
"젖어있어도 괜찮나요?"
"어지간하면 말리고 해야지."
"여름에는 부채질하면 되는데, 겨울에는 힘들 것 같아요."
"그래. 겨울에는 머리가 시려서 부채질 하기 힘들지."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부채 같은 게 나오면 좋을 텐데……."
"그러게. 그런 게 있으면 참 좋겠다."
머리 빗질 하는 법을 배웠다. 두피가 당기지 않도록, 중간에 엉키지 않도록 빗는 법을 배우며 서로의 머리를 빗겨줄 때 도란도란 얘기하는 게 정말 좋았다.
"여기서는 삼현을 튕기면서, 언제나 당신을 그리며我永慕上────……."
"언제나 당신을 그리며……."
"그리고 오현과 일현을 타고, 돌아올 날을 기다립니다待上復日也──……."
"돌아올 날을 기다립니다……. 음音 틀리지 않았나요?"
"……아, 응. 실수했네. 처음부터 다시 해볼까?"
"네."
음악과 금琴을 배웠다. 비류향 역시 비류연이 노사부에게 금을 배울 때 투덜거리는 걸 달래며, 혹은 누이에게 들려준다며 튕기던 것을 곁눈질하고 몇 가지 배운 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아는 곡조도 많지 않고 금 역시 때때로 음이 튀었지만, 두 소녀는 그때마다 까르르 웃으며 금을 타고 노래를 불렀다.
"거기서는 엄지 손가락으로 윗 실을 걸고, 아랫 실 사이로 빼는 거야."
"이렇……게…… 아……."
"그 상태로 엄지와 검지를 펼쳐봐."
"아, 아아……, 와……. 됐어요!"
"자, 그럼 이번에는 내 차례지? 자, 풀어볼래?"
"……언니이……."
"알았어. 가르쳐 줄게. 이번에는……."
실뜨기를 배웠다. 소일거리 삼아, 그리고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나예린을 위해 천과 재봉도구를 받아온 비류향은, 소녀를 위한 새 옷을 지으면서 남는 실로 틈틈히 실뜨기를 가르쳐주었다.
비류향은 그렇게 많은 것들을 가르치면서 틈틈히 수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일상의 신변잡기와 생활지식부터 경전과 고문古文까지, 민담民談에서부터 경극과 사서史書까지 다종다양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물론 제대로 배우지 못한 소녀였는지라 큰 흐름이 없어 번잡하고 조잡했지만,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왔던 나예린에게는 하나하나가 모두 귀하고 즐거운 이야기였다.
함께하는 시간 모두가 좋았지만 나예린은 특히 비류향과 목욕할 때가 제일 좋았다. 이때는 보통 특이체질로 인해 비류향이 쪽잠에 들어 대화는 없었지만, 세 살 연상인 소녀의 품에 기대어 몸을 담그고 있으면, 모든 소리가 아련히 사라지면서 고요해져 마치 태아가 되어 어머니 뱃속에 있는 것처럼 평온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하나만 놓고 보면 별 것 아닌 사소한 일상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상. 그러나 타고난 미색美色과 용안龍眼은 소녀로부터 그러한 일상을 빼앗아갔다. 이것이 소녀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면 이토록 괴롭지는 않았으리라. 허나 여태껏 소녀의 삶에 선택은 없었다. 어디서나 넘실대는 사람의 악의와 욕망에 쫓기고 또 쫓겨 도망칠 뿐이었다. 만약 소녀의 부친이 무림의 양맥兩脈인 백도白道의 중심 정천맹正天盟의 주인된 자가 아니었다면, 그 무공이 절정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었다면 나예린의 과거는 지금보다 더 참혹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만큼 인고의 세월 끝에 나타난 비류향은 나예린에게 있어 구원이었다. 사욕 없이 자신을 마주대해주는 상대였다. 부모님을 제외하면 거의 유일하게 거부감 없이 살을 맞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때는 어머니처럼, 어느 때는 친구처럼 곁에 있어주는 이였다. 어찌 기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찌 미소 짓지 않을 수 있을까.
해맑게 웃게 된 딸아이의 모습에 나백천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비록 자신의 손으로 딸아이에게 웃음을 되찾아주지 못한 것은 아쉬워했지만 그는 아이의 행복을 우선시할 줄 아는 참된 아버지였다. 서천의 수작이 언제 펼쳐질지 몰라 걱정하면서도 여식의 미소를 볼 때마다 그는 마음의 평온을 얻어갔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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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이 덜컹거리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천둥번개가 요란했다. 꽁꽁 닫힌 창문에 가려도 알 수 있을 만큼 거친 날씨였지만 사내는 물끄러미 탁자 위에 놓인 것을 내려다보았다. 철로 만들어진 작고 기다란 관棺이었다. 산덩쿨 칡뿌리마냥 얼기설기 얽힌 듯 하면서도 정교하게 내용물을 감싸는 쇠사슬은 이 관이 얼마나 엄중한 물건인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폭풍이 부는구만……. 크흐흐흐……. 좋아, 이 녀석과 참 잘 어울리는 밤이 되겠어."
사내는 한손을 뻗어 이중 삼중으로 철저하게 휘감긴 쇠사슬을 걷어냈다. 양손으로 해도 버거울 작업을 굳이 한손으로만 하는 이유는 사내가 외팔이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텅 빈 오른소매가 문틈 새로 흘러들어온 바람을 타고 맥없이 펄럭였다. 힘들고 괴로울 법도 하건만 사내는 싱글벙글 웃으며 작업을 계속해나갔다. 되려 콧노래를 흥얼거리듯 중얼거렸다.
"인을 해치니 적이요賊仁者 謂之賊, 의를 해치니 잔이라賊義者를 謂之殘, 잔적한 자를 일부라 하니殘賊之人 謂之一夫 일부를 죽였다는 말은 들어봤어도聞誅一夫紂矣 군왕을 시해한 적은 없나이다未聞弑君也."
맹자 양혜왕 장구 하편 제8장 孟子梁惠王 章句 下編 第八章의 내용이다. 유교가 시작되고 생활 깊숙한 곳까지 뿌리내린 나라에서 비록 성현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언급하지 않는 내용이었다. 내키지 않으면 설령 왕이라 한들 뒤엎어버릴 수 있다는 내용이 쉽사리 용인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일천은 그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왕일지라도, 다시 말해서 아무리 높고 귀한 이라도 베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만인지상萬人之上도 그러할진데 친형이라고 아니 그럴까. 맹자께서 살아돌아오신다면 '그건 네놈의 욕망일 뿐이다!' 하고 노호할 해석이었으나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달칵.
쇠사슬이 모두 걷히자 자연스럽게 상자의 잠금쇠가 열렸다. 그와 동시에 오랜 세월 잠들어있던 내용물이 빛을 받았다.
"이것이……."
묵빛으로 빛나는 사람의 오른팔이었다. 아니, 사람의 것으로 보일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의수義手였다. 그러나 꺼림칙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신체 일부의 형태를 한 기괴함 때문인지 아니면 수많인 이의 피를 머금은 흉악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찌되었든 불길한 물건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흐흐, 흐히, 흐흐흐, 흐흐흐흐흐……."
허나 사내는 웃었다. 광기를 머금은 황홀한 미소를 그리며 오른쪽 소매를 걷어 흘러내리지 않게 물었다, 턱을 타고 흐르는 침에도 개의치 않고 실성한 듯 웃음소리를 흘리며 사내─나일천은 허공에 드러난 어깨에 의수를 들이댔다. 원래 팔이 있어야 했던 자리, 그러나 지금은 텅 빈 자리에 불길한 묵빛 철완이 닿았다.
"으음, 큭! 크으으으윽! 쉽게, 크흐흐흐, 굴복하지느으으은! 않는다는 게로구나! 흐히히히, 그래! 그래야 서천의 이름이 아깝, 지 않지이이이이이이!!!"
고통의 비명과 열락의 탄성이 뒤섞인 절규가 흘러나왔다. 나일천은 마치 주인의 목을 노리듯 하는 의수를 제압하려 안간힘을 썼다. 어찌보면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핏발 선 눈으로 광소狂笑를 터뜨리는 지옥의 수라가 저리할까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우우웅──
몸 안을 울리는 공명음과 함께 의수가 갑작스레 축 늘어졌다. 그 모습에 나일천은 천천히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기리릭.
희미한 마찰음이 났지만 진짜 사람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신이 생각한대로 움직였다. 폭발적인 환희가 그의 가슴 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길고긴 인고의 세월은 끝이 났다. 때가 되었다. 그리 생각하며 나일천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너무나도 달콤할 복수의 열매를 수확하러 가는 순간이었다. 평생 기억에 남을 순간을 이런 엉망인 모습으로 남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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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몰아치겠네."
산중턱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소녀(?)는 습기를 머금은 거친 산바람에 펄럭이는 치마를 내리누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물기 어린 풀내음이 진동했다. 아무래도 요란하게 쏟아질 듯 했다. 구름의 두께와 색깔을 보아하니 천둥번개를 동반한 먹구름이 분명했다. 우르릉. 쿠르릉. 용이 꿈틀거리기라도 하는 것 마냥 하늘이 울렸다.
"류…… 아니 연비燕飛야! 빨래 걷어라! 폭풍우가 올 게다!"
"네에──."
등 뒤 작은 오두막에서 들려온 노사부의 목소리에 연비라 개명당한 것도 모자라 성별까지 일시적으로 박탈당한 소년 비류연은 불만스러운 듯 말끝을 늘리며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정녕 여아女兒가 투정하는 것이라 보았을 것이다. 고된 수련(?)의 성과였으나 본인은 그리 썩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저 어서 사부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어 이 세상에 하나 남은 유일한 혈육을 만나러 가고 싶을 뿐이었다.
"근데 빨래가 문제가 아니라 집이 문제가 아닐까요?"
조촐하나 단정하고 깔끔한 정자와 같던 오두막은 이미 옛말이었다. 무성하게 피어나는 잡초를 뽑고 하루종일 쓸고 닦던 이가 없어진 오두막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낡고 후줄근한 건물이 되어 있었다. 참혹한 풍경이었다. 오밤중에 보게 된다면 귀신이 사는 집으로 보일 것 같았다. 그런 상태로 폭풍우를 맞이하게 생겼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걱정은 혼자만의 것인 듯 했다.
"근성으로 버티면 돼!"
"……근성만 있으면 예산도 계획도 필요없는 것입니까?"
"엉!"
"……."
폭군에게 목숨 걸고 직언하는 신하와 같은 마음으로 한 항의는 묵살당했고, 이에 소년은 남몰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집에 없는 누이의 품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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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틈새로 파고드는 바람에 촛불이 흔들렸다. 그러나 치마에 수를 놓는 소녀의 손길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의자에 앉아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는 섬세하면서도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수를 놓는 모습은 엄격한 사대부 집안의 솜씨좋은 규방아씨처럼 보였다. 한 땀 한 땀 정성 가득한 손길에 보기만해도 화려한 꽃무늬가 마침내 완성되었다. 소녀─비류향은 이를 대 실을 끊은 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다 됐다."
"정말요?"
"응. 입어볼래?"
"네!"
옆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예린은 비류향이 건네준 옷을 받아들고 탈의실로 뛰어갔다.
"넘어진다, 조심해."
"네─!"
덜컹! 털컹! 미닫이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비류향은 기지개를 켜며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하나가 끝났다. 한 달 동안 틈틈히 천을 놀려 만든 옷을 과연 저 나이대 여아女兒가 기뻐해줄까. 지금이야 선물이라 그저 기뻐하지만 마음에 안 내키면 어찌할까. 그럼 다음 옷은 어떻게 지어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자투리천과 반짇고리를 정리하던 비류향의 귓가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
바람에 날려 부딪친 소리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번에는 좀 더 명확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똑똑똑똑똑똑.
"……."
분명 사람이 문 두드리는 소리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문 앞 호위무사들이 방문객이 누군지 알렸을 터였다. 나예린은 여전히 꺼려했지만 비류향은 이곳을 드나들면서 얼굴을 익힌 여무사들이었다. 힘든 일에 고생한다면 꿀떡이나 다과를 챙겨주니 금새 호의적인 관계가 된 이들이었는데 어째서인지 그네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번쩍───
창호지 너머로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창호지에 비치는 그림자는 하나였다. 호위 둘과 방문객 하나라면 셋이어야 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조심스레 문으로 다가가던 비류향은 갑작스레 발걸음을 멈췄다. 꺼림칙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
눅눅한 공기였다. 허나 단순히 비로 인한 눅눅함이 아니었다. 좀 더 비릿하고 끈적하게 달라붙는 냄새. 돌림병이 돌 때 질리도록 맡았던 냄새. 혈향血香.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사천 제일의 객잔에서, 부엌도 아닌 곳에서 혈향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비류향의 생각을 부정하듯 검붉은 액체가 문틈으로 천천히 흘러들어왔다. 혈향이 더욱 짙어졌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똑똑똑똑똑똑쾅쾅쾅!
"예린아! 숙부가 왔다! 문 좀 열어 보거라!"
그 소리를 들은 순간 비류향은 탈의실을 향해 달려갔다. 다급히 문을 열자 나예린이 때마침 옷을 모두 입은 참이었다.
"꺄, 아, 언니? 어때요? 후아, 놀랐,"
"도망쳐야 돼."
"아, 네? 언니? 무슨 일이에요?"
처음 보는 비류향의 다급한 모습에 나예린이 묻자, 비류향은 객실문 반대쪽 비상구로 소녀를 이끌며 대답했다.
"숙부님이 오셨어."
아무리 숙부님이라도 아버지나 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여기로 들어오실 수 없어요. 나예린은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죽 그래왔으니까. 몇 번이고 여기까지 찾아와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소녀가 이번에도 그러리라 믿고 입을 연 순간,
콰르르르르르릉!!!!
근처에 떨어진 것일까. 대낮이 된 것과도 같은 번쩍임과 동시에 엄청난 천둥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와 더불어 그것과는 다른 이질적인 파열음과 함께 부서진 문이 바람과 함께 객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혈향은 머금은 거센 비바람에 등 안의 촛불들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어이쿠, 문이 너무 약하구나. 하하하, 걱정 말거라. 내 나중에 친히 고치러 올 테니."
철퍽. 철퍽. 진득한 발소리와 함께 피투성이 사내가 걸어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나예린이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기 시작했다. 단순한 육신의 공포를 넘어 용안에 비치는 사내─나일천의 심상이 영혼에까지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인륜人倫을 거스르는 사악邪惡함. 도리道理를 벗어난 뒤틀린 욕정慾精. 분간 없는 짐승들조차도 하지 않을 끈적이는 어둠의 눈길. 지옥불에 뛰노는 악귀惡鬼가 저럴까.
비류향은 그런 나예린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완전히 막아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저것을 직시直示하는 것은 피하게 할 요량이었다. 그런 소녀들의 모습에 나일천은 광소했다.
"예린아! 숙부가 왔는데 인사는 해야지! 크하하하하하!"
쿠르르르르릉!
소녀들의 심상을 대변하듯 요란한 천둥번개가 울려퍼졌다.
#####
- 이을 연連은 리옌lián이고 제비 연燕은 옌Yān으로 중국어 발음이 다릅니다. 어차피 한국 무협지니까 굳이 중국어 발음 따를 필요도 없고, 시대에 따라 변화한 한중간 한자 발음 고증 같은 걸 따져봤자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테니 그냥 넘어갑시다. [...] 그래도 연꽃 연蓮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만.
- 2부를 제대로 못 보고 쓰고 있다보니 시간선이 마구 꼬이네요. 그래서 큰 흐름만 잡고 나머지는 그냥 재구성하기로 했습니다.
- 천겁령이니 서천이니 어쩌니 할 때마다 하늘 같은 그대라는 제목이 떠오르더군요. 노리고 지은 제목이 아니었는데. 이놈들, 하늘에 무슨 짓을 하려고!
- 교수님들은 언제나 학생들이 자기 수업만 듣는 줄 아시죠. 그런 고로 다음 주 수요일에 뵙겠습니다 여러분.
한자漢字, 오타,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4.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4.
"아, 잠깐만."
"……?"
비류향은 물음표를 띄우는 나예린을 놔두고 침상으로 되돌아갔다. 우선 손을 댄 것은 침상이었다. 마치 오랜 시간 이곳에서 일했던 사람처럼 침상 아래서 커다란 바구니를 꺼내고는, 능수능란하게 침상보와 이불깃, 그리고 배겟잇을 벗겨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거기에 더불어 옷장으로 가 한 켠에 들어가 있던 예비 포보布褓를 씌우는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주변까지 싹 쓸고닦았으면 했지만 아쉽게도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오늘은 일단 당장 잠을 잘 곳만 깨끗하면 되리라 판단한 비류향은 다시 나예린에게 돌아왔다.
"이제, 들어갈까?"
"……아, 네!"
손길이 닿으면 주름이 사라지고 칼 같은 각이 잡히는 침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예린은 어느 새 정리를 마친 비류향을 따라 욕탕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눈에 들어온 것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선반과 바구니, 그리고 잘 개어져 있는 수건 뭉치들이었다. 며칠 간 지내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던 나예린은 그곳이 탈의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면 부모님 외의 다른 사람에게 나신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덜컥 겁이 난 나예린은 무심코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평범하게 옷을 입 고 있어도 자신을 덮치려는 이들이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눈앞의 소녀는 그렇게 변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을까. 스멀스멀 피어오르은 불안감에 무심코 뒷걸음질치며 돌아보니 비류향은 벌써 겉옷을 벗고 내의內衣 옷고름에 손을 대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것일까.
"? ……아!"
비류향은 자신을 바라보는 나예린의 시선에 고개를 갸우뚱하다 이내 알았다는 듯 수건 뭉치에 다가가, 거기에서 제법 두터운 천뭉치를 하나 꺼내들어 나예린에게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은 나예린은 곧 뺨과 어깨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는 것을 느꼈다. 수건이었다. 망토처럼 두르니 허벅지까지 내려올 정도로 컸다.
"이러면 괜찮지?"
"……네."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자신이 바보 같아지는 순간이었다. 나예린은 망토처럼 두른 수건 아래서 벗은 옷을 바구니에 담았다. 비류향은 그러한 나예린에게 벗어둔 옷을 어떻게 정리해둬야 하는지와 더불어, 욕탕에서 양 팔을 자유롭게 움직이면서도 수건이 쉽사리 풀어지지 않게 몸에 두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보통 그러한 조언은 불쾌한 참견이나 쓸데없는 잔소리로 들리기 마련이지만, 나예린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압도적인 가사능력과 용안으로 보이는 티끌 하나 없는 순수한 선의 덕분에 그러한 부정적인 인상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나예린이 수건 아래서 옷을 벗기 위해 악전고투 하는 사이, 그와 비슷하나 다른 방식─겨드랑이 아래로 감싸 몸을 가리면서도 손이 자유로운 형태─으로 몸에 수건을 두른 비류향은 먼저 욕실에 들어왔다. 고급 나무로 만들어진 욕탕은 한동안 사람 손을 타지 못해 썩 깔끔하지 못했지만─어디까지나 비류향의 기준일 뿐이다─ 욕탕이라는 특성상 먼지 정도는 물로 가볍게 씻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닥이 미끄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우둘투둘한 대리석이라는 것도 장점이었다.
게다가 두발용과 신체용이 따로인 향유 섞인 고급 비누를 비롯한 각종 여성용품들이 친절하게도 그림을 포함한 목판 설명서와 함께 구비되어 있었다. 비류향은 남몰래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동생 비류연 덕분에 남아를 씻겨본 적은 많았지만─그것도 비류연의 머리가 굵어지면서 하지 않게 되었지만─ 여아를 씻겨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무엇이 필요한지 몰랐다. 저잣거리 아낙들에게 듣기는 했지만 원체 미용에 관심이 없었고 그렇기에 사치라 여겼던지라 흘려들었던 게 화근이었다. 이런 일이, 그러니까 다른 집 귀한 여식을 씻기게 될 줄 알았다면 귀담아 들었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객실 욕탕에 여성에게 필요한 세면도구가 구비되어 있다는 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자세한 구조는 알 수 없었지만 벽에 달린 수도꼭지의 손잡이를 돌리면 각각의 구멍에서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확인했다. 온溫과 냉冷 자가 새겨져 있었기에 손잡이를 잘못 돌려 화상을 입는 일은 없을 듯 했다.
몇몇 결점─어디까지나 비류향의 기준에서─이 보였지만 전체적으로는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렇게 점검을 마친 비류향은 앉은뱅이 의자와 바가지를 수도꼭지 앞에 두고 탈의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려준대로 겨드랑이 아래로 수건을 몸에 두른 체 문가에 기댄 나예린이 있었다. 조심스레 빼꼼히 얼굴만 내민 게 여전히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비류향이 손짓하자 천천히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그 뒤에 무릎을 꿇고 앉은 비류향은 손잡이를 비틀어 바가지에 적당한 온도의 물을 담으며 말했다.
"머리 감을 테니까 눈 감아줄래?"
"네."
쏴아아아─. 쌀 쏟아지는 것과 비슷한 소리와 함께 따스한 물줄기가 나예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어디 한 군데에만 맞지 않도록 골고루 뿌려지고 난 후 비류향의 손길과 함께 향긋한 비누거품이 일었다.
"으응……."
"아프니?"
"아, 아뇨……."
"아프면 얘기해 줘."
"네……. 후아……."
아프기는커녕 기분 좋은 손길이었다. 이마부터 뒷목까지 정수리와 관자놀이를 비롯한 혈도를 적절히 자극하면서도 두피가 상하지 않게 가감한 손길에 통증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머리카락 또한 우악스럽지 않은 손길로 쓸어내렸다. 무심코 기분 좋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헹굴게."
다시 한 번 따뜻한 온수가 쏟아졌다. 이번에는 처음과는 달리 좀 더 적은 양이 제법 오래 쏟아졌다. 그 동안 비류향의 손길이 나예린의 머리카락 구석구석의 비누거품을 깨끗하게 닦아내었다. 매한가지로 온유하고 애정이 가득한 손길이었다. 대체 얼마만에 느끼는 타인의 손길일까. 기억조차 없는 갓난아기 시절 이후로 이토록 정성스레 머리를 감아주는 사람은 비류향이 처음이었다.
"자, 이제 몸 씻어야지."
그리 말하며 비류향은 신체용이라 적힌 통에서 비누를 꺼내 반투명한 무명천을 물에 적신 뒤 문질렀다. 순식간에 몽글몽글 거품이 일었다. 머리를 감던 것과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향이 은은하게 피어났다. 충분한 거품이 일자 비류향은 우선 오른쪽 어깨부터 손 쪽으로 닦아내려갔다.
사악─ 사악─
거품과 함께 피부를 스쳐가는 무명천의 감촉은 그 특유의 거칠음이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시원했다. 반대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손길은 갑작스럽게 끊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의 손길이 없자 나예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난처하다는 듯한 미소가 보였다.
"수건, 벗어줄래?"
탈의실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비류향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과연 다른 의도는 없는 것일까. 일반적인 소녀라면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나예린은 일반적인 소녀가 아니었고, 일반적이지 못한 상황들 또한 몇 번이나 겪어온 경험자였다. 부모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마음을 연 상대건만 오랜 경험으로 만들어진 인간 불신이 반사적으로 소녀에게 용안을 활용하게 만들었다.
악의는 없었다.
진득한 음심淫心도 없었다.
무색투명한 호의만이 빛나고 있었다.
나예린은 그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며 천천히 수건을 풀었다. 가식 없는 순수한 호의조차도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없게 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머리를 감을 때 젖은 수건을 풀자 느껴진 서늘한 한기는 그러한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마음을 어루만지듯 비류향의 부드러운 손길이 나예린의 몸에 비누칠과 동시에 땀과 먼지를 씻어냈다.
"시원하니?"
"네."
"화장은 아니더라도 세안은 매일 해야지. 자, 눈 감고."
"네, 으우……."
"코 풀고. 흥!"
"흥!"
"귀도 잘 닦아야 돼. 이목구비가 깔끔해야 괜히 깔보이지 않아."
"아, 네."
"앞으로 세안 잘 하기. 약속?"
"약속할, 앗! 아으으……"
"어머, 눈에 비눗물 들어갔구나. 잠깐만. 잠깐만. 자, 얼른 세수해."
"어푸, 어푸……. 으으, 아직도 따가워요……"
"한 번 더 세안하자."
나예린이 바가지에 받은 물로 눈가를 씻는 동안 비류향은 자연스럽게 다른 부분을 씻기기 시작했다. 등을 밀고, 가슴과 배를 문지르고, 둔부와 고간을 거쳐 허벅지를 타고 발끝까지 씻어내리는 솜씨는 매우 신속정확하면서도 애정이 가득했다.
비류향은 나예린을 씻기며 생각했다. 아름답다. 미성숙한 신체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리고 아름다움을 느끼면 느낄 수록 애잔한 감정 역시 커져갔다. 저잣거리에서 부모의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혹은 군것질거리를 찾아 홀로 휘적휘적 다니는 동년배에 비하면 너무나도 야윈 몸이었다. 서시빈목西施嚬目이라 하여 모든 이들이 저 야윈 몸조차도 아름답게 보고 있었지만, 비류향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용안이라고 했던가. 삼라만상의 이치를 직시하고 한 길 조차 알 수 없다는 사람 속을 꿰뚫는 재능. 그것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있는 그대로의 악의와 욕망을 경험하며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을까. 자신에게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가능한 이 아이를 도와주자. 비류향은 그렇게 다짐했다.
"비눗기 씻어내자."
"네."
쏴아아아──
물줄기에 비누거품이 씻겨내려갔다. 양액兩腋과 고간股間처럼 물이 쉽사리 닿지 않아 거품이 남아있던 부분도 비류향의 손길이 닿자 순식간에 녹아내려 사라졌다. 민감한 부위기도 했거니와 모친이 아이를 씻기는 손길이 이러할까 싶을 정도로 다정하고 부드러워 괜시리 부끄러워진 나예린은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완벽히 깔끔하게 몸을 씻은 나예린은 가히 천상의 선녀와 같았다. 스스로 빛을 내는 것 같은 희고 깨끗한 피부. 황금 비율로 배치된 이목구비. 살짝 야위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신체. 그야말로 미의 화신.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씻으니까 더 예뻐졌구나."
"……감사합니다."
나예린은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렇게 인사했다. 예쁘다는 칭찬에 이토록 솔직하게 감사를 표한 건 자신이 기억하기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음욕이나 질시 같은 어두운 감정 없는 칭찬이라서 그럴까. 익숙치 않았지만 싫지 않은 기분이었다.
"몸 식는다. 탕에 들어가 있으렴."
비류향은 나예린의 젖은 머리를 작은 수건으로 감싸 올려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나예린에게 해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몸을 씻기 시작했다. 나예린은 어깨까지 몸을 담그며 처음 해보는 수건 말아올림 머리가 풀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심스럽게 매만져보았다. 신기했다. 어떻게 하면 고작 천 한 장으로 이렇게 단단하게 고정할 수 있는 걸까. 푸스스 풀어지려는 수건을 어찌어찌 다시 끼워넣고 문득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한창 성장기에는 한두 살 차이도 성장 차이가 있다지만 그것과는 다른 어른스러움이 깃든 뒷모습이었다. 소녀에서 여인이 되어가는 몸이 그리는 완만한 곡선과 더불어 산중생활로 붙은 근육 위로 덮인 여인 특유의 부드러운 살이 육체적 성숙미를 보여주었다. 행동거지는 자유분방하면서도 절제되어 있고, 언행이나 배려가 사대부의 예법과는 거리가 있으나 무례하지 않으니 정신적으로도 성숙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
그와 동시에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덧없어 보였다.
손을 뻗으면 흩어질 것 같은 안개 같은 흐릿함.
깊은 산 속 바닥까지 비쳐보이는 고요한 호수와도 같은 투명함.
그런 이율배반적인 감상이 나예린의 뇌리에 맴돌았다. 온수의 따스함이 몸에 스며들수록 그러한 인상은 선명해졌다. 문득 불안해졌다. 정말 저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저렇게 자애로운 심상과 형용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공존할 수 있는 걸까?
당장이라도 욕조에서 뛰쳐나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달려나가 손을 뻗었을 때 상대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면? 끌어안고 울었던 상대가 사실은 그 자리에 없었고, 침상을 정리하고 자신을 씻겨주던 이가 그저 자신의 상상 속의 존재였다면? 너무 힘들고 지쳐서 환상 속의 존재를 만들어 거기로 도피한 것이었다면?
사라락…….
기어코 수건이 풀어졌다.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수건이 시야를 가렸지만 도저히 그것을 치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걸 치우면 비류향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나홀로 이곳에 있는 게 아닐까. 그제서야 이 모든 게 꿈이었다고 깨닫게 되는 게 아닐까. 이질감에서 시작된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크기를 키워나갔다. 간신히 숨만 쉬며 물에 젖어들어가는 수건 끄트머리를 붙잡고만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기다려 봐. 다시 해줄게."
찰박찰박. 물 밟는 소리와 함께 타인의 손길이 수건을 들어올렸다. 비류향이었다. 순식간에 다시 수건을 휘감아 머리에 고정하는 솜씨는 만약 이것이 환상이고 사실 나예린 스스로의 손길이었다고 할 수 없는 경지였다.
"이제 됐다."
비류향은 그리 말하며 탕 안으로 들어와 벽에 닿아있는 후미진 구석 자리에 앉았다. 너댓 명이 들어가도 될 법하건만 굳이 그런 자리로 가는 게 비류향다웠다. 이대로 쪽잠을 자 두자. 그리 생각하며 벽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피로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천향루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평소와 같은 쪽잠도 들지 못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러나 곧바로 잠들 수는 없었다.
"……언니……."
"……응?"
나예린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탕의 온기와 피로 때문에 반응이 늦었지만 거기에 잠을 방해받았다는 불쾌함은 없었다. 다가가는 것도, 멀어지는 것도 아닌 애매한 거리에 선 나예린을 보며 비류향은 끈기있게 어린 소녀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언니는……. 환상이 아니죠?"
처음 입에 담아보는 단어─언니의 어감이 익숙치 않은 듯 머뭇거리던 나예린은 그렇게 물었다.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소녀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떤 대답을 해줘야 저 아이의 불안이 해소될까. 고민하던 비류향은 살포시 손짓했다. 이리 오렴. 망설이던 나예린은 이내 비류향에게 다가와 그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비류향은 둥지로 돌아온 아기새를 보듬듯 나예린을 꼭 껴안아주며 물었다.
"이렇게 끌어안고, 서로 대화하고 있는데 환상인 것 같니?"
"……아니면, 꿈이거나……."
갑작스레 찾아온 작은 행복이 과연 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온기와 감촉이 눈 감았다 떴을 때 사라질 일장춘몽이 아니라 단정지을 수 있을까. 혹은 그럴지언정 찰나의 환상에 용기를 얻어 세상에 맞설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두려웠다. 칠흑 같이 어둡고 늪처럼 질척이는 인세人世에 대항하기에 소녀는 너무나도 여렸다. 그런 소녀에게 어떻게 하면 믿음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비류향은 부드럽게 나예린의 머리를 기울여 가슴께에 귀를 대게 하였다.
"예린아."
"네……."
"심장소리가 들리니?"
"……네."
두근. 두근. 희미했던 고동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다. 그 사이로 자신의 고동 또한 들려왔다. 어느 새 두 사람의 고동이 조화를 이루며 울려퍼지자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감이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것에 쐐기를 박듯 나예린의 귓가에 비류향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나는 여기 있어. 곁에 있어."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토록 하기 위해서일까. 비류향은 더욱 힘을 주어 끌어안으며 그렇게 속삭였다. 나예린은 그 속삭임에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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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인 요리 실력을 따지자면 사부가 제일이고, 그 다음이 나며, 매우 아쉽게도 누나가 마지막이다. 물론 이것은 상대적인 평가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내공이라고는 씨알도 없는 누나에 비해 대놓고 무학武學의 묘리妙理와 공력을 아낌없이 쓰는 사부와 나를 도저히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분뢰수를 이용해 펄펄 끓는 기름 속이든 활활 타오르는 가마솥 안이든 맨손을 들이밀어 온도를 조절하며, 육안으로는 구분조차 하기 힘든 섬세한 결을 따라 재료를 갈라 본연의 맛에 손상을 주지 않는 칼솜씨에, 소금 알갱이 하나까지 조절하여 간을 맞추는 안력眼力을 가지고도 요리를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만.
어찌되었든 앞서 말했다시피 내 요리 실력은 분명 누나보다 앞선다. 이건 내 오만이나 맹신이 아니라 깐깐하기로 소문난 사부 역시 인정한 사실이다. 누나야 뭐, 나쁜 짓만 아니면 성장하는 걸 다 축하해주는 사람이라 되려 자랑스러워 하고 있고. 여튼 그렇게 맛있는데.
"으음……."
"아니, 사부님. 왜 그리 깨작거리십니까. 맛없으면 치울까요?"
"아, 맛있어. 맛있다니까."
그러고는 또 젓가락질을 하는 둥 마는 둥. 요리를 해본 사람은 내 심정을 잘 알 것이다. 기껏 차려줬더니 이거 집다 저거 집다, 이거 깨작 저거 깨작. 차라리 맛 없다고, 이러저러하니 입에 안 맞는다고 하면 나중에 이래저래 다른 찬거리를 준비하든 조리방식을 바꾸든 할 텐데 그것도 아니고. 누나가 이 오두막을 떠나고 나서부터 식사시간만 되면 이 모양 이 꼬라지다. 사흘 정도는 괜찮았지만 나흘 정도 지나고 나니 매일 이 모양이니 식사준비하기 정말 싫어진다. 그렇다고 때려치자니 사부의 주먹과 누나의 부탁 때문에 내던질 수도 없고.
그나마 깨작거리는 걸로 끝나면 다행이다. 어떨 때는.
"거 네놈 밥은 맛만 있지 흥취가 없어, 흥취가. 향이가 했던 밥 생각해봐라. 얼마나 좋으냐! 보기만해도 이게 '아, 이게 정말 정성이 흘러넘치는 밥상이구나!' 하는 수준이잖아! 요리하는 거 보기만 해도 배부를 정도로 정성이 가득하잖아! 술상 차리는 솜씨는 또 어떻고! 보기만 해도 그냥 취해! 흥이 돋아! 너도 그렇게 좀 해봐라!"
"에이, 사부님! 제가 얼마나 정성을 쏟아붓는데요! 사부가 그렇게 칭찬하는 누나가 제 상을 얼마나 칭찬하는지 모르시죠? 그런데도 왜 이리 핍박하십니까!"
"말했잖아! 정성이 부족하다고!"
"그렇게 정성 좋아하시는 분이 왜 평소에 누나가 해주겠다고 하면 죄다 손사래 치십니까!"
"그건 정성을 초월해서 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한다. 심지어는.
"너도 나이 들어봐라. 시커먼 남정네가 해준 밥보다 고운 처자가 해주는 밥이 더 좋지!"
"시커먼 남정네라뇨! 이토록 멋진 미소년에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망난 색골 영감 같은 소리를 하기도 하니 원. 대체 누나는 이 사부의 뭘 보고 공경해야할 사람이라며 정성을 쏟아붓는 걸까. 알 수가 없다.
그런 사부의 반찬투정과는 별개로 나 역시 누나 밥이 그립기는 하다. 누나의 요리는 일품이기는 해도 극상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다. 당장 시장에서 유명한 객잔에서 큰돈 주고 먹는 요리가 더 맛있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맛있는 요리라는 게 꼭 혀가 닿자마자 눈앞에 별이 날아다니고 천하가 내 안에서 살아움직이는 것 같은 환상을 봐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소박하지만 풍미가 있고 매일 같은 반찬이더라도 질리지 않는 요리 또한 맛있는 요리다.
고된 수련과 노동행위 나가기 전에 먹는 아침밥과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먹는 저녁밥의 행복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르리라. 하물며 그게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 정성스레 차려주는 상이라면 더더욱. 가슴에 스며드는 어머니의 맛이라는 게 이런 거겠지.
"하아……."
오늘로 보름째인가. 어디 있는지도 알겠다, 마음 같아서는 수련과 가계활동 모두 때려치고 찾아가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사부에게 묵사발이 될 테니 차마 그럴 수가 없다. 졸지에 생이별이라니. 무림에 피바람이 불어도 나라는 갈라지지 않았건만 어째서 우리 남매는 이리 살아야 하는 걸까. 게다가 그런 비극의 원흉에게 밥을 지어 바쳐야 하다니. 비극도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
이것 뿐만이 아니다. 최대한 사부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매우 적극적으로 누나를 만나러 갈 수 있느냐고 했더니 사부가 말하기를.
"그러고보니 금琴 수련도 해야지. 하는 김에 여장女裝도 하고."
"……네?"
이게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었건만 아무래도 사부는 진심인 듯 했다. 누나가 없어졌다고 그 자리에 여장한 소년을 채워넣고 싶으신 건가. 세상에 맙소사.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것은 사부의 자금계획의 일환일 뿐이었다. 남정네가 타는 금보다 미소녀가 타는 금이 훨씬 더 가치있으며 돈 벌기 쉽다는 것이었다. 무학의 묘리니 수련이니 하는 포장을 제거하면 딱 그거였다. 사부가 이상성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해야할지, 그 악랄한 자금탈취수법에 이를 갈아야할지 모르겠다.
그나마 이 여장수련을 마치면 누나를 보러 갈 수 있다는 게 위안이다. 그러기 위해 여성스러운 말투와 행동거지를 주입받으며 마음 속 무언가가 심히 깎여나가고 있는 느낌이지만. 괜찮다. 괜찮아. 이게 끝나면 누나를 볼 수 있으니까! 그거면 충분해!
"후우, 얼른 누나 보고 싶다……."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커다란 냄비와 국자를 절묘하게 휘둘러 볶아낸 밥을 그릇 위에 담았다. 복스럽게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사부님. 제발 얌전히 드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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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저는 누굽니까?"
"누구 말이냐?"
"거 린아璘兒 곁에 맨날 붙어있는 소저 말입니다."
"아, 비 소저 말인가. 내 예린이 말벗을 부탁한 아이야. 왜 그러느냐?"
정천맹주正天盟主 진천뇌벽검震天雷霹劍 나백천羅伯泉은 자신의 객실 앞에서 씩씩거리며 비류향이 누구냐 묻는 동생 나일천羅馹泉의 물음에 그리 되물었다. 이미 얼굴이 벌건 것을 보니 꽤나 술을 들이킨 듯 했다. 아직 해가 떨어지기에는 한참 시간이 남아있었건만 그러했다. 무심코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삼키고 있자니 나일천이 외쳤다.
"예린이 얼굴 좀 보러 갔더니 글쎄 대놓고 못 보게 막더이다! 형님이나 예린이 허락이 없으면 볼 수 없다면서요! 세상에 숙부가 조카 보는데 허가가 필요합니까!"
"……."
"'아이가 무서워하니 돌아가 주십시오. 아니면 맹주께 윤허를 받아오셨을 때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라니. 누가 보면 생판 남인 줄 알겠습니다! 예린이는 얼굴도 안 내밀고! 내 어릴 때 그토록 귀여워해줬거늘! 이리 문전박대라니!"
"……."
"이게 어찌 친지고 혈육입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침묵하는 나백천의 모습이 호응이라 생각한 것인지 나일천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그러나 너무 심하게 취했기 때문일까. 나일천은 친형의 눈이 매섭게 빛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허락 없이 아무도 예린이 숙소에 들어가지 마라고 했다."
"그야 그러시기는 했지만 친지 간에 굳이 그런 걸,"
"다시 한 번 말해야 알아들을 테냐."
"……."
서릿발 같은 형의 말에 나일천은 그제서야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동생을 노려보던 나백천은 축객령을 내렸다.
"내 이번 일은 취기로 인한 실수라 여길 테니 다음부터는 린아에게 함부러 가지 말거라."
"……흥. 팔병신 동생보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계집이 린아 옆에 있는 게 더 안심되십니까?"
"일천!"
나백천의 노호에 움찔한 나일천은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체 거칠게 몸을 돌려 사라졌다. 필시 또 술을 들이키리라. 피를 나눈 동생의 모습에 나백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비류향의 말이 떠올랐다.
『 이는 무례無禮로 형제간을 이간질함과 다름이 없는 죄악罪惡이나 감히 말씀드립니다. 예린이가 말하길 숙부의 마음에 큰 어둠이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두렵다 하였습니다. 부디 다가오지 않도록 살펴주십시오. 』
비류향이라는 소녀가 하기에는 제법 거친 말이었다. 그 자리에서는 형식상으로만 비류향을 꾸짖었으나 말 그대로 형식적일 뿐이었다. 딸을 바라보는 동생의 눈길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나백천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결혼도 하지 않아 자식도 없어 조카인 나예린을 특히 귀여워하는 것으로 여겼으나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딸인 나예린이 나일천을 꺼리는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혈육이었다. 거기에 정천맹 부총령으로서도 무난하게 일을 하며 자신을 도와주는 동생이었다. 언제까지고 강제로 밀어낼 수는 없었다.
"어렵구나, 어려워. 인사人事는 언제나 어려워……."
나백천은 탄식을 내뱉으며 객실로 들어갔다.
#####
- 굳이 목욕장면을 저리 길게 썼어야 했나 싶었지만, 마음 가는대로 타자를 두드렸기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
- 이제사 2부를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어 내용 수정이 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3화에서 비류향이 오두막 떠날 때 호위虎衛 관련 내용이 수정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 궁뢰신전 보고 싶네요 [?]
한자漢字, 오타,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3.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3.
나물과 고기를 자급자족하더라도 사람 사는 데에는 부족한 물건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물며 무공과는 연이 없는 여아도 함께 사는 집이니 정기적으로 장을 보는 게 당연했다. 그렇기에 노사부는
비류향이 시장에 다녀오는 것을 막지 않았고, 돈을 달라고 할 때도 망설임 없이 쥐어주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온갖
이유를 들어 거부하였으나, 귀찮은 일거리 시킬 요량으로 한두 번 허락해주다보니 매우 편해져서 아예 가계家計를 맡기게 된 것이다.
어차피 비류향이 사오는 건 전부 집안살림에 보탬이 되는 것들이었고, 헛돈은커녕 결코 자신을 위해 쓰는 일이 없는 비류향의
경제관념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저잣거리에 널리고 널린 군것질거리며 그 나이대 소녀라면 눈이 돌아갈 화장품과 장신구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물건값은 결코 부풀리거나 축소시키는 일이 없으니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육체의 편리와는 별개로 심적 부담은 한없이
늘어갔지만.
그런 고로 장에서 돌아온 비류향이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며 한동안 출가를 요청해왔을 때 노사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드디어 자유로운 생활이! 근심없는 일상이! 춤이라도 추고 싶은 감정을 애써 감추며 노사부는 짐짓 근엄한
얼굴로 물었다.
"넌 어찌하고 싶으냐?"
"……노야께서 윤허하신다면 다녀오고자 합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본래 제 일이라면 한사코 거절하고 원하는 것은 어디 도망치지 못하게 붙들고 늘어져야 간신히 입에 담는 게 비류향이라는
소녀였다. 어차피 허락할 테지만 어째서 가고 싶어하는지 본심이 듣고 싶어졌기에 노사부는 슬그머니 캐물어보기로 했다.
"평생토록 은혜갚기로 한 말은 벌써 잊은 게로구나?"
"어찌 그것을 잊겠습니까. 모시지 못하는 날만큼 더욱 보은할 것입니다."
"흠, 네 여태껏 해 온 정성이 있으니 일단은 믿겠다만……."
그 말에 무언가를 자극받은 것일까. 비류향이 당황한 듯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괜한 말로 노야께 심려를 끼쳐 송구합니다. 이 일은 없던 일로,"
"아니, 아니다! 어흠! 아직 말을 끝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짐
짓 내키지 않는 듯한 노사부의 태도에 비류향이 곧바로 없었던 일로 만들려고 하자, 노사부는 황급히 비류향의 말을 끊었다.
위험했다. 대나무가 가볍고 단단하여 가공하기 쉬워보여도 되려 그 대쪽 같음에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하게 하여 일을 어렵게 하듯,
올곧고 진솔한 비류향의 성품을 가볍게 생각했다가 일을 그르치게 만들 뻔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노사부가 질문을
이어나갔다.
"정천맹주正天盟主의 여식이 용안龍眼인 것과 네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모르면서 가겠다는 것이냐."
"정천맹주 같은 이가 만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은 여아에게 청을 한다면 연유가 있으리라 짐작만 할 뿐입니다."
"용안이 무엇인 줄 아느냐?"
"모릅니다."
"
물줄기 하나 만으로도 세상 흐름을 읽는 신안神眼이요, 손짓 하나만으로도 심상心想을 꿰뚫는 마안魔眼이다. 범인凡人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어찌보면 애비인 정천맹주보다 더 위험한 것일 수도 있어. 맹주조차도 힘든데 용안까지 네 일신一身만으로 감당해야
한다. 돌봐줄 이가 하나도 없어. 사지死地로 가는 길일 수도 있단 말이다. 그럼에도 가고 싶으냐?"
"……예."
"허허……."
고작 반나절 본 이의 부탁에 무엇이 있길래. 노사부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질문을 던졌다.
"정천맹주라는 감투의 향기에 취했느냐?"
"아닙니다."
즉답이었다. 그러나 이는 흉계凶計를 지적당한 소인배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렇기에 뒤이어진 비류향의 말은 얄팍한 변명이 아니었다.
"
소녀가 배운 것은 없으나 일신의 영달을 위해 보은하지 않음은 사람답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물며 권세의 향기가 아무리
달콤하여도 쉬이 상하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아비가 여식을 생각하여 미천한 여아에게 청을 한 것이니 응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아비의 청이라……."
그렇군. 그런 것이었나. 노사부는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친先親이 생각난 게냐."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자
기 딴에는 애써 숨긴다고 했지만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게 뭐 대수라고 숨기는가 싶었지만 본인이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걸 알기에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노사부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양친 잃은 소녀가 무슨 마음으로 그리 하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허나 부모들이 아이를 위해서라며 부탁하면 어지간한 건 다 들어주고, 저잣거리에서 자기 부모 손을 잡고, 품에 안겨
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빛에 아련함이 깃들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정천맹주의 여식 생각이 지극했나보군. 노사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비류향이 이렇게까지 움직일 리가 없었다. 무인武人의, 그곳도 정천맹주 정도 되는 자의
심후함이라면 사욕을 위해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내공이 없는 비류향에게는 그러한 사술邪術은 통하지 않는다.
어쨌든 이만하면 체면치레는 한 셈이다. 그렇기에 노사부는 깊게 한숨을 내쉬는 척 하고는 입을 열었다.
"천향루라 하였느냐."
"예."
"다녀오거라."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언제 돌아오든 상관 없다. 아니,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깊이 고개를 숙이던 비류향의 몸이 멈칫했다. 역시 내키지 않으시는 걸까. 아아, 미련한 향아. 어찌 네 욕심을 우선하여 은인의 심기를 불편케 한단 말이더냐. 그런 생각으로 굳어버린 소녀에게 노사부가 말했다.
"무학도, 깨달음도 없는 여아가 세상에 나가면 천하 험사險事와 다망多忙한 인과因過에 얽메일 것이다. 그 모든 것에 네 스스로 매듭結을 짓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거라."
"……노야의 금언金言, 삼가 받들겠나이다."
이
모자란 여아의 짧은 출가出家에도 금과 같은 참眞된 말씀을 내려주시는구나. 과연 은인이로다. 비류향은 흘러넘치는 감사의 마음으로
바닥에 이마가 닿게 큰절을 올렸다. 심히 부담스러운 광경이었지만 노사부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갈 아이다. 저 성품으로 분명
바깥에서 덕을 쌓아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않을 아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이틑 날 아침, 짐을 꾸린 비류향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노사부와 비류연의 식기를 정리한 후 오두막을 나섰다.
"몸조심하고. 스승님 말씀 잘 듣고. 알겠지?"
"안다니까. 누나는 내가 무슨 앤 줄 알아."
"구순 노모가 칠순 아들을 걱정하는 법이야."
네
가 천하제일인이 되어도 매사에 조심하라 하겠지. 그렇게 말하며 비류향은 동생을 품에 안았다. 어머니보다 더 많이 안긴 누이의 품
안에서 비류연은 머뭇거리다 이내 마찬가지로 누이를 꼭 끌어안았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온 남매다. 짧다고
해도 헤어짐에 아쉬움이 없을 리가 없었다.
"……누나도 몸조심해."
"응."
천천히 동생을 떼어놓은 비류향은 노사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옥체 보전하십시오."
"그래."
그렇게 두 노소老少를 뒤로 한 체 비류향은 떠났다. 그 곁으로 어느 새 말 만한 백호白虎 한 마리가 나타나 소녀를 지키듯 따라 걸었다. 노사부가 나물 캐러 산에 갈 때 데려가라며 붙여준 호위虎衛였다. 그르렁거리며 비류향의 손길에 머리를 부비는 품새는 저잣거리 고양이 같았으나 범인凡人이라면 울음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릴 만한 산왕山王의 기운이 품고 있으니 영물靈物이 틀림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백호는 아미산 인근은 물론 사천땅 전역에 소문만 무성한 백무후白武后의 직속인 팔섬풍八閃風 중 한 마리였다. 어지간한 무림 고수도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강하건만 정작 영물 취급해주는 이는, 정확하게 말해서 그나마 대우해주는 이는 비류향 하나 뿐, 노사부와 비류연에게는 그저 소녀에게 도움이 되는 좀 센 고양이 취급이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비류향의 영물 취급 역시 털 빗어주기와 벌레 떼어주기 같은 수준인지라 큰 차이는 없었지만 이게 의외로 호평인지라 팔섬풍 중에서도 가끔씩 순번(?)을 바꾸기 위해 싸우는 일이 있었다.
어찌되었든 비류연은 무언가에 홀린 것마냥 멍하니 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뒤의 노사부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뺨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자유다! 오오, 이 얼마나 달콤한 울림인가! 자유! 오오, 자유, 오오! 광희난무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비류연이 있었기에 참았다. 그러나 환희에 잠식된 육신은 이미 앞으로 펼쳐질 무릉도원에 반응하여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 노사부는 그러했던 자신의 모습에 후회하게 된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비류향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한탄하게 되지만, 어찌되었든 훗날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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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천四川 땅은 산세가 험하고 변두리에 있어 발달하지 못했다는 얘기는 되려 무식한 촌부나 하는 말이다. 되려 그 험한 산세와
원지遠地의 이치로 외적으로부터 수많은 학사와 경전을 지키고, 촉한대에는 승상인 제갈공명을 필두로 한 사영四英의 활약으로 법규가
지켜지고 물자가 풍부해지니 낙양과 북경이 부럽지 않은 땅이 바로 사천 땅이다.
그런 사천성에서 천향루는 특히나 이름
높은 기루로 유명하였다. 화려함과 정갈함을 고루 갖춘 객실에 수준 높은 악공樂工과 가무인歌舞人이 상시하며, 향이 강하기로 소문한
사천요리를 누구나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도록 조리하여 온갖 미주味酒와 함께 나오니 한 번이라도 들른 이들의 칭송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천향루 후원의 한 고급 객실은 널리 알려진 천향루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원래는 아기자기한
침상과 호화로운 장식들이 돋보였을 객실은, 태양이 중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침침해서 윤곽만 겨우 잡힐 뿐이었다. 이는 창문을
모조리 닫은 것도 모자라 그 위로 검은 천을 덧씌워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상喪중인 것마냥 칙칙한 분위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
인공적인 어둠 속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그야말로 실낱같은 빛줄기 밖에 없는
공간이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부드럽고 은은하게 빛나는 백옥 같이 하얀 피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만큼 정교한 비율의 이목구비. 그리고 소녀가 있는 어둠과도 같지만, 공허한 그것과는 다르게 신묘한 마력이 담긴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가 매혹적인, 누구라도 보게 된다면 한눈에 마음을 빼앗길 만큼 아름다운 소녀였다.
허나 침상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소녀의 표정은 무미건조했고 눈동자는 생기 없이 흐릿했다.
"……."
초점 없는 눈동자는 창문 너머, 자투리가 살짝 떨어진 검은 천 틈새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란 하늘이었다. 너무나도 맑고 아름다운 하늘. 그러나 닿지 않는, 가질 수 없는 하늘. 그 하늘이 소녀의 마음에 파문을 그렸다.
사람의 마음은 어찌 저러지 못할까.
아
름다운 미색과 더불어 소녀에게는 용안龍眼이라는 능력이 있었다. 상대의 마음 속 단편을 읽어내는 이 능력은 만약 소녀가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나 난세에 천하패업을 도모하는 영웅이었다면, 여인의 몸으로도 능히 삼황오제의 뒤를 잇거나 창업군주로 이름을 떨치게
하는 힘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어린아이가 아무런 단련 없이 있는 그대로의 인심지욕人心之慾을 그대로 접하면
어찌 되겠는가. 그 독기에 쐬일 때마다 소녀는 며칠이고 앓아누워야 했다. 빼어난 미모로 인한 수십 번의 납치 역시 소녀의 심력을
갉아먹어왔다. 게다가 그때마다 접하게 되는 사람들의 심저心底에 들끓는 악독惡毒이란.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소녀는 더더욱 사람을 기피하게 시작했다. 부모님과 함께 도망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소녀의
아버지는 정천맹주라는 직급을 가진 절정의 무인인지라 쉽사리 은거할 수 없는 몸이었다. 맹주의 권세와 일신의 무공 덕분에 딸을
지키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소녀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 마음 놓을 곳은 없는 걸까.
그러한 생각에 소녀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린아, 들어가마."
"……네."
아
버지의 질문에 소녀는 침묵 속에 가라앉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집에 계신 어머니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아버지였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파란 하늘빛과 함께 아버지인 정천맹주 나백천이 들어왔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소녀는 곧
아버지와 함께 들어온 그 시리도록 투명하고 따스한 푸른빛이 하늘빛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화려함이 없는
옷가지였다. 오랜 세월 입어온 듯 헤지고 닳아 천을 덧대거나 수를 놓은 부분도 보였다. 그러나 품새가 단정했고, 덧대거나 수 놓은
솜씨도 상당하여 거슬리지 않았다. 그 나이대 여인이라면 으레 할 장신구도 체면치레할 정도만 겨우 달고 있었으나 그로 인해 더욱더
단정하고 고아한 인상이었다.
천상의 미를 가진 소녀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이는 단순한 외적인 미가 아니었다. 용안으로 보이는 찬란한 심상心相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저 하늘 선녀들이 이러할까. 그런 생각이 소녀의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하
늘빛의 여인은 나백천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다가왔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나백천이 경악했으나 이미 소녀의 눈에는 그 모습이 들어오지 않았다. 한 장丈 정도 거리를 두고 소녀와 여인은 서로를
마주보며 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여인이었다.
"안녕. 난 비류향이야. 너는?"
"……예린…… 나예린羅叡璘이에요……."
오
랜 시간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투명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범인凡人들이었다면 이미
소녀─나예린의 모습과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여인은, 비류향은 그저 생긋 웃을 뿐이었다.
"예쁜 이름이네. 예쁜 얼굴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그
것 뿐이었다. 시기와 질투도 아닌, 집착과 음욕도 아닌 순수한 칭찬. 그 모습에 나예린은 천천히 비류향에게 다가가 그 품에
파고들었다. 결코 손에 닿지 않으리라 여겼던 청천淸天에 닿은 안도감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비류향은 처음 보는 아이가 자신을 붙들고
울기 시작하자 당황하였지만 이내 말없이 나예린을 끌어안아주었다.
한여름 나무 그늘 아래서 맞이하는 산바람의 상쾌함.
한겨울 바람막이 돌담 안에서 쬐는 햇살의 따스함.
청명한 햇살을 머금은 이불에서 느낄 수 있는 포근함.
그것이 나예린이 기억하는 비류향의 첫인상이었다.
#####
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옷자락을 꼭 쥔 손을 떼어내는데 조금 애를 먹기는 했지만, 울다 지쳐 잠이 든 나예린을 침상이 뉘인 후
나백천과 비류향은 천향루 후원 다정茶停으로 향했다. 사천 제일 기루라는 명성에 걸맞는 화려한 후원에는 이미 몇몇 선객들이 있었으나
빈 자리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고맙구나."
향이 피어오르는 차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인 나백천이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비류향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대인大人께 감사를 받겠습니까."
"아니야. 그 아이가 저토록 평온하게 자는 걸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그게 네 덕분인데 어찌 아비로서 감사하지 않겠느냐."
"어린 동생이 있어 달래는 게 익숙할 뿐입니다. 그런 일로 어찌……."
"그런 일조차 불가능했던 아이였거든."
나백천은 찻잔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용안龍眼. 삼라만상을 꿰뚫고 심저心底를 투시透示하는 조물주의 눈. 득의得意한 자가 얻을 수 있는 눈. 그걸 타고난 아이야.. 보지 말아야 할 것도, 봐선 안 될 것도,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모두 보이는 기분이 어떨 것 같으냐."
"……끔찍하겠지요."
"그래. 고행자苦行者도 쉽지 않을 심마心魔를 저 어린 것이, 그것도 자신의 것조차 아닌 심마와 접하며 괴로워해. 그런데 아비라는 자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어. 아무 것도 못하고,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
과
거의 고통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나백천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지금 그 순간만큼은 최고의 권세를 자랑하는 정천맹주도,
지고한 무공을 자랑하는 고수도 아니었다. 자식의 고통에 무력함을 느끼는 한 사람의 아버지일 뿐이었다. 그 마음을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비류향 역시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와병臥病. 부모의 무조건적인 자애慈愛에서 오는
고통에 비하면 보잘 것 없겠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이들이 괴로워하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데에서 오는 무력감이 얼마나
고통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스스로 다가간 이가 바로 너다. 부모를 대하듯 마음을 놓았어. 그러니 어찌 내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고맙다."
그렇게 말하며 나백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비류향 역시 황급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과분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아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감사를 받겠습니까."
"말했잖느냐. 예린이가 안심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야 노부의 마음이 편해지니 받아다오."
"……알겠습니다."
얼마 없는 객인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두 사람은 그제서야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찻잔을 비우고, 다시 채운 찻잔을 반 정도 비웠을 즈음 나백천이 물었다.
"기인께서 얼마나 말미를 주셨느냐."
"만사에 스스로 매듭을 짓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매듭結이라……."
인연에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는 법인데 매듭을 입에 담으셨다. 마치 제천대성에게 부처님 손바닥에서 벗어나보라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불가해한 말에 나백천이 다른 것을 물었다.
"또다른 말씀은 없었느냐."
"'갓 쓴 선비 곁에 사람을 두고 파란 원을 전하노라.' 이러면 아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 그렇군. 허허……."
"아시겠습니까?"
"그래. 잘 알았다. 참으로 대인大人이시구나……."
갓
쓴 선비壬 곁에 사람亻을 두겠다는 것은 임任이다. 파란 원은 청靑이고 이를 글이 아닌 말言로 전하니 청請이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인연에 매듭을 논하시며 임 자와 청 자를 전함은 눈앞의 소녀를 자신에게 부탁하겠다는 뜻이리라. 용안자龍眼者와의
인연은 사람의 힘으로 끊을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스스로 인연을 끊어 이토록 성정이 곧고 맑은 아이를 보내시다니. 나백천은 노사부의
배려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노사부가 자유를 원하며 한 짓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체.
"앞으로 필요한 것이 있거든 언제든지 말하거라."
"예. 허나 말씀만으로도 족합니다."
"어려워하지 말거라. 이는 대인께 보은하기 위함이기도 하니 너무 거절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 뒤로는 조용한 다도의 시간만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주전자와 찻잔이 모두 비워지자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린이를 잘 부탁하마."
"여부가 있겠습니까."
두 사람의 모습에 호기심이 동한 이들이 은근슬쩍 뒤를 따르려 했으나, 슬그머니 눈에 힘을 주어 바라보는 나백천을 보고는 모두 움찔하며 되돌아갔다.
#####
나
예린이 있는 객실로 돌아온 비류향은 고민하다 결심한 듯 창가의 검은 천들을 모조리 떼어냈다. 단단히 고정된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녀의 힘으로도 간단히 떨어졌다. 따스한 노을빛이 창호지를 빛내 방 안이 은은하게 빛났다. 아예 창문을 열어 환기까지 시킬까
했지만 나예린을 떠올린 비류향은 손길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물
론 이는 비류향의 개인적인 감상이었다. 이름 높은 천향루의 객실답게 정돈된 상태는 양호했으나 나예린이 입실하고 며칠 간 아무도
들어가지 못해 청소되지 않은 객실은 먼지투성이였다. 나예린이 누워있는 침상 역시 살짝만 건드려도 먼지가 풀풀 날릴 듯 싶었다.
허름한 오두막을 신선이 기거하는 도원처럼 보일 정도로 부지런히 청소하며 살아온 비류향에게는 끔찍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구세요?"
잔
뜩 겁먹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비류향은 침상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눈을 뜬 나예린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익숙한 어둠이 아닌 빛이 보여서일까. 아니면 낯선 이가 있어서일까.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른다. 허나 한두 시진 전에 보지
않았던가. 무심코 하늘을 보며 시간을 파악하려 했던 비류향은 그제서야 자신이 역광의 위치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법도 하구나. 비류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였다.
"기억하니? 비류향이라고 했는데."
"……아, 아아!"
나
예린은 언제 두려워 했었냐는 듯 침상을 박차고 일어나 비류향에게 달려왔다. 비류향은 갓 태어난 아기 사슴마냥 넘어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다가온 어린 소녀를 붙잡아 주었다. 나예린은 홀린 듯한 눈으로 천천히 손을 뻗어 비류향의 뺨에 닿았다.
"꿈이, 아니었어……."
"꿈이길 바랐니?"
"아뇨……. 꿈이 아니었으면 했어요……. 정말로…… 꿈이 아니었어……."
나
예린이 멍하니 자신을 보는 동안 비류향 역시 천천히 나예린을 살펴보았다. 아름다웠다. 대체 누가 이 소녀가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며
몸단장 한 번 안했다 할 수 있을까. 백옥 같은 피부와 청명한 밤하늘과도 같은 눈동자가 어찌 울다 지쳐 잠들었던 이의 것일 수
있단 말인가. 허나 비류향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야위었구나."
나예린과
마찬가지로, 그보다 더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얼굴의 눈물 자국을 닦아내었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 수더분한 곳들이 눈에
들어왔다. 폭력적일 정도로 압도적인 미색은 그것조차도 미용구가 되게 하였으나 보통 아이었다면 꾀죄죄한 몰골이었으리라. 넘어지지
않게 붙잡은 팔 역시 동년배 아이들보다 가늘었다. 정천맹주의 자식이 먹을 게 없어 굶지는 않았을 테니 마음고생이 심해 쉽사리 먹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안타까움에 마음이 저려왔다. 나예린은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우섯 씻어야지."
"……네."
고
급 객실이라 뜨거운 물이 상시 나오는 욕탕이 따로 구비되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용탕으로 가야했을 텐데 남녀
구분없이 홀리는 나예린의 미모를 생각하면 어불성설이었다. 그렇다고 물지게로 퍼나르기에는 너무 번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렸으리라.
아무래도 나백천이 여식을 위해 일부러 이 방을 잡은 듯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비류향은 나예린을 이끌고 욕탕으로 향했다.
#####
- 목욕장면은 다음 화에(?)
-
나예린이 비류연보다 한 살 더 많았네요. 어찌할까 하다가 이게 정확히 1년인지 어떤지 모르고, 비류연이 아이답게 조금이라도 더
어른이고 싶어해서 열 두 살이라고 하는 걸로 했습니다. 타입문넷 이르실렌 님 감사합니다. 덤으로 이름도 물 이을 연沇이 아니라
이을 연連이군요. 이 놈, 출판물에서 이름을 바꾸다니……. 타입문넷 라이티르 님 감사합니다.
- 비뢰도 옛날에 보고, 군대서 재탕하고 그게 다 1부만이라 헤매고 있습니다. 시간 들여 2부도 봐야 하는데 시간이 영…….
- Crimsoneyes님께는. 지원그림. 언제나. 항상.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네. 정말로요. 하하하하하핳하하하하핳하하하!!!
한자漢字, 오타,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0~2화
살짝 찬바람이 불었다. 그래봤자 몸이 축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때에 맞지 않는 찬바람은 비류연에게 누군가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당신보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당신보다 아름다운 사람이요."
나예린의 물음에 비류연은 선문답 같은 대답을 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며 이맛살을 찌푸렸을 테지만, 나예린은 잠시 고민하더니 답을 내놓았다.
"어머님 생각이군요."
"아쉽네요. 아니에요. 하지만 비슷했어요."
"그럼 누이로군요."
"맞아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두 사람 중 하나에요."
"당신이 무서워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다는 게 신기하군요."
비류연은 나예린의 말에 고개를 으쓱했다. "그럴 만한 사람들이니까요." 그리고는 하늘을 보며 말을 이었다.
"뭐 한쪽은 너무 괴팍해서 그냥 무섭다고 해두는 거고, 누님은, 음. 누님은 말 그대로 무서워요. 앞서 말한 괴팍한 양반도 무서워할 정도니까요."
"엄한 분이신가요?"
"아뇨."
비류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세상천지에 누님만큼 다정한 사람도 없을 걸요."
#####
"누나, 나 머리 아파……."
꾀
병을 부려보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건 노사부의 수련을 빙자한 집안일과 잡무가 너무 힘들고 귀찮아서였다. 기실 노사부의 수련은 비록
미력하게나마 내공이 있다한들 태어난지 이제 열두 해를 겨우 넘긴 사내아이가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칠고 힘들었으니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했다. 이전에도 몇 번 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노사부 앞에서였고, 그러한 행위는 너무나도 쉽게 간파되어 더욱더 힘들어질
뿐이었다.
허나 이번에는 노사부가 잠시 출타하여 누이 밖에 없었고, 날씨도 쾌청하니 도저히 수련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어린 비류연은 최대한 몸을 놀려 몸에 열을 내고─노사부에게 배운 약초학으로 잠시 몸에 열이 더 나게 하는 약초도 몇 개
주워먹었다─, 흙먼지도 약간 들이마셔 콧물과 기침이 나게 한 뒤, 누이에게 가서 최대한 몽롱한 시선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저 잠시
방에 드러누워 쉬다가 저녁 때쯤 되면 다 나았다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이의 반응은 비류연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무슨 일이…… 세상에, 연아 너 왜 그래. 몸이 왜 불덩이야. 아침에는 멀쩡하더니 대체……"
이마는 물론 몸 여기저기 상태를 보던 누이는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뭔가를 고민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되려 비류연이 놀랄 정도였다.
"너 혹시 속 울렁거려?"
"어, 어? 어, 조금……."
"눈앞이 빙빙 돌아? 땅이 막 너한테 달려드는 것 같아?"
"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목은? 목 많이 타? 막 찢어지는 것 같고 그래?"
"응. 목말라."
흙
먼지를 들이켰으니 목이 안 마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비류연의 대답에 누이는 더더욱 얼굴이 새햐애지더니, 입술까지 파르라니 떨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 뭐라 할 새도 없이 누이는 어린 비류연을 방으로 데려가 이불 위에 눕히고는 양동이와 물수건으로 열심히 열을
내리려고 했다. 이쯤 되자 양심에 찔린 비류연은 이게 꾀병이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그 어린 눈으로도 너무나도 절박해보이는 누이의
모습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래서 에둘러 사부가 시킨 장작패기와 빨래를 입에 담았으나,
"그거 전부 다 누나가 할 테니까 그냥 누워있어. 물 많이 마시고. 소금도 좀 물고."
누
이가 당장이라도 비류연이 어찌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절대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양동이 물을 한 번
간 후에, 장작패기와 빨래를 하고 온다며 방을 나섰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자 비류연은 어찌해야될 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허나 약초로 인한 열로 정말로 정신이 몽롱해지며 의식이 흐려지다 이내 잠이 들게 되었다.
잠에서 깼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곁에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린 노사부와 근심걱정 가득한 누이가 있었다. 아, 망했구나. 그
생각이 들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비류연은 최대한 힘든 척하며 누이를 불렀다.
"누나……."
"그래 연아, 누나 여깄어."
누이의 손이 비류연의 손을 잡았다. 비록 스스로 열을 내고자 주워먹은 약초 때문이라고는 하나 열이 나는 몸에 서늘한 누이의 손이 닿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 기분은 곧바로 이어진 노사부의 말에 산산조각났다.
"음, 심각하군."
"노야老爺. 어찌하면 좋습니까."
"탕약을 먹이고, 그 뒤는 지켜봐야지."
"그 말씀은……."
"이 놈이 이겨내길 바라야지."
노
사부의 말에 누이는 말없이 비류연의 손을 꼭 쥐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비류연은 그렇게 누이가 보지 못하는 동안 노사부가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망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
"안 먹을래……."
"안돼. 어서 먹어. 투정 부리지 말고."
누
이는 평소와는 달리 엄한 말투로 약사발을 비류연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잠시 실랑이를 벌였지만 결국 비류연은 약사발을 들이켜야
했다. 누이의 등 뒤에서 눈을 번뜩이는 노사부의 모습을 본 순간 모든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류연은 정말로 이틀 동안 앓아누워야 했다.
온
몸의 뼈란 뼈는 전부 송곳으로 쑤시고 얼음물을 들이붓는 것처럼 시렸고, 살이란 살은 당장이라도 형체를 잃고 뭉개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머리는 쉼없이 망치로 뒷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았고,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몸 안의 공력은 운기조식이나 혈로와는 관계없이 제멋대로 온 몸을 완전히 헤집어놓았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비류연은 신음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렇게 이틀째 밤이 되었을 때에는, 처음 꾀병을 부릴 때 정도로 미약한 열만 남은
상태가 되어있었다. 동시에 청량한 개운함이 느껴졌지만, 이틀 간 앓으면서 체력이 사라졌는지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나른했다. 누군가가 손을 잡는 걸 느낀 건 그때였다.
"연아."
나지막한 목소리. 세상천지에 하나 밖에 남지 않은 혈육의 목소리. 언제나 다정하고 따스한 목소리. 나의 누이의 목소리.
"연아."
물수건을 갈면서 서늘해진 손길이 기분 좋았다. 똑같이 잡아주고 싶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서 나아라, 연아. 어서 나아라. 제발. 제발……. ……제발……."
잦아드는 누이의 목소리에 비류연은 서서히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누이의 얼굴 윤곽이, 그리고 투명하게 빛나는 눈물이── 눈물?
"나 혼자 두고 가지 말아줘……. 너마저도 가면, 난, 나는 어쩌니……. 나 홀로 두고 가지 마라 연아……."
행여나 동생이 깰까봐 숨죽여가며 우는 누이의 모습에 비류연은 등줄기에 번개가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어
릴 적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일을 관장하던 누이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던 누이였다. 돌림병으로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사람들 모두가 죽어가면서도 결코 울지 않던 누이였다. 해실해실 웃으며 태양처럼 밝게 빛나던 누이였다. 그런 누이가 울고
있었다. 그것도 마치 죄인인양 숨죽여가며. 어린 동생에게 죽지 말아달라며 울고 있었다.
그제서야 누이가 언제나 자기
앞에서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는 걸 깨달았다. 굉장한 충격이었다. 천년거목마냥 든든했던 누이가 사실은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앙상한 나뭇가지였다. 그걸 깨닫자 비류연은 지금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누이를 안아주고 싶었다. 자신은 괜찮다고.
꾀병으로 놀래켜서 미안하다고. 그러나 이틀 동안 앓았던 몸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기껏해야 신음소리를 낼
뿐이었는데 이는 되려 누이가 울음을 멈추고 간병에 힘쓰게 하는 역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미안, 누나. 미안해. 다시는 꾀병 안 부릴게.
그렇게 다짐하며 비류연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곁에는 누이 대신 노사부가 있었다.
"영약 먹고 앓다가 일어나니 기분이 어떠냐."
"누나는요?"
"욘석이, 사부 묻는 말에 대답도 안하고. 옆에 봐라."
노사부의 말에 비류연은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누이가 잠들어 있었다.
"사흘 간 잠도 안 자고 네놈 뒤치닥꺼리하다가, 아침에 너 괜찮아졌다고 하니 혼절해서 눕혀놨다."
"……."
"멍청한 놈. 세상에 사기쳐도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는데, 나랑 네 누이는 사기치면 안 될 사람이야. 왜 그런지 알겠냐?"
"……네."
"하여튼. 차라리 다리를 삐었다고 하지 그랬냐. 하필이면 돌림병 증상 비슷하게 꾀병을 부려서 괜히 네 누이 걱정하게 만들어."
비류연은 그제서야 증상을 물어보던 누이가 왜 그렇게 당황했었는지를 깨달았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돌림병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잃은 사람 앞에서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혈육이 비슷한 증상으로 아프다 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그렇게 잠든 누이는 그 다음날에서야 간신히 일어났다. 노사부는 비류연에게 누이는 사흘 간 잠 안자서 몸이 축난 것보다 네가 앓아서 마음의 충격이 더 심했던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 일이 있고난 후로, 비류연은 적어도 누이 앞에서만큼은 절대 꾀병을 부리지 않았다.
#####
"좋은 분이시군요."
"네."
비류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나예린은 비류연이 그토록 해맑게 웃는 걸 보며 자신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뵙고 싶네요."
"그렇잖아도 좀 있으면 만날 수 있을 거에요."
"……네?"
갑작스러운 비류연의 말에 나예린은 무슨 소리냐는 듯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이래저래 일이 좀 있었는데, 괴팍한 노인네가 누님 세상 구경 좀 시켜주라며 보냈다고 했거든요. 중양표국 사람들 딸려보냈다고 했는데, 내일쯤이면 도착할 거에요."
꼭 소개시켜 줄게요. 그렇게 말하며 싱글벙글 웃는 비류연의 모습에 나예린은 얼떨결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 밤, 정말로 비류연의 누이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민하다 잠이 들었다.
#####
비류연 이놈 한자로 뭐라 쓰는지 아시는 분 부디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누이 설정은 대충 비류연 이놈이 여장한 모습에서 미인 등급과 키가 한 단계 낮은 모습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름은 비류향響.
성
격은 착해빠져서 노사부도 어려워하는 상대로, "배운 것 없고 힘 없는 여식이지만, 세상천지 갈 곳 없고 기댈 곳 없는 어린 오누이
구해주신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연이가 사내로서 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도록 무공까지 하사해주셨으니, 평생 은혜
갚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하며 노사부가 양심에 찔려 부담을 느낄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비류연이 가출했을 때, 새하얗게 변해서 목숨으로 갚겠다고 하는 걸 노사부가 "죽어도 못 갚을 은혜를 죽어서 갚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 라고 해서 간신히 말릴 정도입니다.
전염병으로 아는 사람들이 죽는 걸 봐서 그게 트라우마인지라 누가 아프다 싶으면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비류연과 노사부의 브레이크 역할을 하며 이 두 사람을 갱생하는 느낌으로 써보고 싶은데, 언제나 그렇듯 언제 쓰게될런 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덧글 한 100개 달리면 모를까. ......어, 잠깐, 옛날에 이런 거 했더니 진짜로 100개 달렸던 것 같은데......
비뢰도 - 하늘과도 같은 그대 1.
"하나 더 파자."
"왜?"
"아버지 무덤에 물 안 차게 물 빠질 구멍 만들어 놔야지."
영
리하기는 했지만 세상물정을 잘 몰랐던 나는 누나가 시키는데로 아버지 무덤 옆에 좀 더 작고 크기로 약간 더 깊게 땅을 팠다. 사실
그냥 파라고 했어도 팠을 거다. 누나 말 들어서 나빴던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에 누나 말 잘 들으라고
하셨으니까.
누나도 함께 팠지만 흙먼지가 너무 심해 계속 기침을 해서 그리 많이 파지는 못했다. 한 삽 뜨고
재채기하고, 한 삽 뜨고 기침하고. 우리 남매는 그렇게 고생하며 간신히 무덤과 물 빠질 자리를 팠다. 열세 살 여자애와 열 살
남자애가 판 것 치고는 번듯하고 깊게 잘 파진 땅이었다. 문득 옆에 있는 어머니 무덤을 보고 떠올라 물었다.
"엄마 무덤 옆에는 물구멍이 없는데?"
"옛날에 있었는데 시간 지나면 물길이 생겨서 필요없어져서 메꾼 거야."
"그렇구나."
그렇게 대답한 누나는 한동안 그 아버지 무덤자리 옆 구멍을 보다가 말했다.
"연아."
"왜?"
"만약에……."
"만약에 뭐?"
"……아냐. 어서 가서 밥 먹자."
"응."
밥
이라고 해봤자 나물죽이었다. 농사는 흉년은 아니었지만 그리 잘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돌림병으로 마을 사람들이 거의 다
죽어서 먹을 걸 구할 곳도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돈 들어올 구멍이 없어졌으니 남아있는 것도 곧 바닥날 게 뻔했다. 이제
어쩌나 하고 있는데 누나가 내 밥그릇에 자기 죽을 부었다.
"더 먹어."
"누나는?"
"밥맛이 없네."
어서 먹어. 누나는 잔기침을 하며 그리 말했다. 너댓 숟갈이나 떴을까 하는 양이었기에 비어있던 내 그릇은 거의 가득 차다시피 했다. 나는 배가 고팠기에 망설임없이 숟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향響아, 연連아, 집에 있느냐."
"예-."
운
좋게 돌림병에 걸리지 않은 마을 아저씨의 부름에 누나가 대답하며 방을 나갔다. 따라나가지는 않았지만, 들려오는 얘기에 내일
아버지 관을 묻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괜시리 밥맛이 없어졌다. 누나가 왜 밥맛이 없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왜 안 먹고 있어."
방
에 들어온 누나는 내 밥그릇을 보더니 그리 물었다. 밥맛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내는 언제 무슨 일을 하게될 지 모르니 늘
배가 든든해야 한다고 누나가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 안 계시니 네가 누나 지켜줘야지, 하고 덧붙였다. 맞는 말이라는 생각에 남은
죽을 다 먹었다.
누나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잠자리를 준비했다. 무심코 아버지 자리를 펴다가 돌아가셨다는 걸 깨닫고
다시 접었다. 그 빈 자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방으로 돌아온 누나는 자기 자리에 앉아 잠시 아버지 자리를 바라보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누나 이불 속으로, 누나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누나는 말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지금껏 살면서 제일 따듯하고 포근한 잠자리였다.
#####
잠든 동생 몰래 방을 나와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제서야 억눌렀던 기침을 내뱉었다.
"콜록, 콜록, 크흠, 콜록……."
쉽
사리 멎지 않는, 애초에 끊이지 않는 기침을 애써 억눌러 가라앉히며 비류향飛流響은 오늘이 며칠인지를 생각했다. 아버지 관을 묻은 지
오늘로 나흘 째. 아니, 닷새 째인가? 집안 살림 중 돈 될 만한 것들은 처분했고, 마을 정리를 하면서 일가친척 다 죽어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나온 돈도 모아두었다.
마음 같아서는 버리고 싶은, 썩 내키는 돈이 아니었지만 함께 마을 정리를 하던
어른들이 억지로 떠넘기고 갔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에는 쉽사리 만져보지 못한 큰돈이었지만, 그네들이 챙겨간 것에 비하면
푼돈이었다. 찝찝한 돈이니 적게나마 애들에게 쥐어주며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심산이리라.
비류향은 그 돈을 몰래 버릴까 하다가 가지고 있기로 했다. 동생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자기 혼자였다면 안 받았겠지만 딸린 식구가 있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콜록, 커흑……. 큽……."
선
명하게 붉은 핏물이 기침과 함께 튀어나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뿜던 것과 비슷했다. 그러고나서 이틀 뒤에 돌아가셨으니
자기도 비슷하리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오늘이 사흘 째가 맞나? 엿새였나? 시간 감각도 점점 희미해져 가는 와중에 해 뜨고 지는
걸로 간신히 밤낮만 구분할 수 있었다. 먹은 것도 없건만 헛구역질이 올라오고 숨쉬기가 괴로웠다. 아버지도 이러셨을까.
"……."
죽
는 게 무섭지 않을 리가 있을까. 이제 열셋 된 아이가 뭘 알까 싶겟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 살림이며
아버지와 동생 뒷바라지를 하며 살아온 소녀의 정신연령은 더 높았다. 죽음을 아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랬기에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게
있었다.
비류연飛流連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동생. 이 세상에 하나 남은 혈육. 나 죽으면 너는 어떻게
될까. 이제 열 살인 아이가 밥은 챙겨먹을 수 있을까. 이 거친 세상 모진 풍파 헤쳐나갈 수 있을까. 네가 장성해 일가를 이루는
것까지는 보고 싶은데.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꿈이라는 것은 비류향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오늘내일 하는
몸뚱이로 10년 20년 뒤를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 그렇기에 고개를 휘휘 젓고는 품 안에서 꺼낸 무명천으로 입가를 닦았다.
몇 번이나 빨았지만 수 차례 각혈을 닦아낸 천에는 핏자국이 가득했다.
입가의 피를 닦아내자 새로운 핏자국이 생긴다. 그 모습을 보며 비류향은 결심했다. 내일, 아니 모레 보내자. 없는 살림이건만 아이 하나 보내는데 챙겨야 할 게 왜 이리 많을까.
동
생 비류연을 시장이 서는 큰 마을로 보내기로 결심한 건, 아버지와 자신이 돌림병에 걸린 걸 안 순간부터였다. 아버지가 목각을 팔던
가게에 모아둔 돈과 편지를 함께 보내기로 했다. 가게 주인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고 돈이 부족해도 류연은 손재주가 있어 가게에
도움이 될 테니 내치지 않을 것이다.
열 살 꼬마 혼자 보내기에는 멀고 험한 길이다. 비류연이 제법 빨리 걷는 축에 속하지만 그래도 아침부터 바지런히 걸어야 닿을 거리다. 도적도 걱정이지만 돌림병 도는 동네라는 소문이 나서 도적은 얼씬도 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그
러나 뭐라고 해야 아무 걱정 없이 갈까. 총명한 아이다. 어설프게 거짓말하면 금새 눈치채고 안 가려고 할 것이다. 일부러 모질게
대해야 할까. 나 혼자 먹고 살기도 힘든데 너까지 붙어있어 못 살겠다. 이 집구석 나가 알아서 살아라. 다시는 이 집 문턱 넘을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며 내쫓아야 할까.
한참 고민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천애고아가 될 아이에게 마지막에
모질게 대하면 그 어린 것이 얼마나 가슴 아파할까. 웃으며 보내도 모자랄 판에. 그럼 어떡해야 할까. 어찌하면 얼른 이 못난 누나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린 소녀가 하기에는 너무 힘든 고민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푸흡, 큭, 쿨럭……. 콜록……. 하아……."
또 한 번 피섞인 기침을 내뱉고, 한참 동안 숨을 고른 후에야 비류향은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
#####
아
버지 관을 묻고 엿새 쯤 됐나. 집안에는 남아있는 게 없었다. 정확하게는 마을 전체에 남아있는 게 없다고 하는 게 옳았다. 일가가
떼죽음 당한 집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 살아남은 사람들이 시체만 간신히 염하고, 남은 것들은 그나마 값어치 하는 것들만 모아놓고
죄다 불태웠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한동안 마을에는 탄내가 진동했다.
"나 아버지 무덤에 갔다올게."
"그래……. 후우, 조심하고."
누나는 가면 갈수록 파리해져갔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괜찮냐고 물어보면 조금 힘든데 괜찮다며 해실해실 웃는다. 그때만큼은 건강해보인다.
그
래서 괜찮다고 생각하며, 얼마 없는 어른들과 함께 마을 정리가 얼추 끝나고 시간이 남게 되자, 나는 아버지 무덤으로 갔다. 돈이
없어 휑한 무덤 앞에 조각이라도 깎아놓기 위해서였다. 장례가 끝난 그날 바로 하려고 했지만 영 시간이 나질 않았다.
"아버지, 우리 이제 어찌될까요?"
무
덤 앞에서 통나무를 깎고 있자니 요 며칠 간 일을 떠올리자니 답답해져서 괜시리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마을 탈탈 털고 불태우고,
음, 사실이기는 하지만 어감이 썩 안 좋군. 여튼 그러고 마을에 남은 사람은 열댓 명이 될까말까 한데 과연 어찌되려나. 솔직히
다른 사람들이야 알 바 아니고 누나랑 나만 잘 살면 되는데.
아버지 조각을 마치고, 허전한 느낌이 들어 어머니 조각도
했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비석을 세워야지. 내 살 길도 막막하건만 조각을 하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부모님
조각을 마치고 나니 점심 때 언저리였다. 집에 가서 밥이나 먹자.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보니 왠 노인이 서 있었다. 돌림병 돈다고
소문난 마을에 뭐하러 온 영감님인가 고민하고 있자니 그 노인이 물었다.
"이 무덤 네가 만들었느냐?"
"뭐, 누나랑 같이 만들었는데, 거의 제가 다 만들었죠."
그러자 노인은 흐음, 하고 고민하는가 싶더니 또 물었다.
"거기 조각들도 너랑 네 누이 솜씨고?"
"아뇨, 이건 전부 제가 만들었죠."
그
러자 노인은 찡그린 얼굴로 잠시 생각하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며 내게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모르는 사람 함부로 따라가지
말라는 누나 말이 떠올라서 따라갈 생각은 없었지만, 심심해서 당신을 따라가면 뭐가 생기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노인은 허허허 웃더니
천하제일의 무공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끌리기는 했다. 무림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고, 어차피 아무 것도 없는 마당에
따라가서 손해는 안 볼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갈 생각은 없었다.
"안 갈래요."
"왜?"
"누나 혼자 놔두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나 혼자였다면 따라갔을 테지만 누나가 있으니까.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누나 놔두고 혼자 어딜 간단 말인가? 이제 누나 지킬 사람은 나 밖에 없는데.
"그럼 네 누이랑 같이 간다면?"
"그럼 갈 수도 있죠."
"허허, 그럼 네 누이한테 말해보자꾸나."
노
인이라고는 해도 수상쩍은 인물을 집으로 안내하기가 영 껄끄러웠지만 어차피 털어봤자 아무 것도 없는 집구석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앞장 서서 걸었다. 나름 머리를 굴려 빙빙 돌아 길을 헤매도록 하면 어떨까 싶었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일가 전체가 떼죽음 당해
집까지 태워 휑한 마을인지라 돌 곳도 없었다.
"저기가 네 집이냐?"
"네."
예전에는 중간에 있던
다른 집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우리 집이 보였다. 중간에 있던 집이 두 채 있었는데 하나는 일가가 몰살당해서 불태웠고, 또
하나는 스물 조금 넘은 형 빼고 다 죽었는데 그 형이 스스로 자기 집을 불태웠다. 뭐, 나 같았어도 누나까지 죽었었으면 집
태워버렸을 것 같기는 하다.
"……너 누이랑 같이 산다고 했었지?"
"그랬죠."
"그렇구나. 그런데 네 누이는 건강하냐?"
"요새 밥도 잘 안 먹고, 좀 힘들어 보이기는 하는데 건강해요. 맨날 여기저기 바지런히 돌아다니고 그러면서도 집안일 다 하고."
"흐음……."
"왜요?"
"네 누이, 아니 가서 일단 보자꾸나."
노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누나~ 나 왔어~"
집
문턱을 넘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나갔나? 이 시간대면 밥 짓고 있을 텐데. 나물죽이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부엌에 연기도 안 올라온다. 진짜 나갔나? 그렇다면 마루에 뭔가 먹거리라도 놔뒀을 텐데 그것도 없다. 대체 어디를 간 거야.
"누나~ 어딨어~?"
방 안을 둘러보고 나오니 노인이 부엌문 앞에 서 있었다. 방 안에도 없으니 거기 있나 해서 누나를 부르며 들어가려니,
"누나 거기──"
"들어오지마!"
난생 처음 들어보는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날카로우면서, 동시에 찐득한 느낌이었다. 이상하고 싫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심한 기침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같은 잔기침이 아니라 좀 더 크고, 질척하며 소름끼쳤다.
"누나……?"
"쿨럭, 컥, 하아……. 연아……. 하아……. 들으륽……. 들어오지, 마, 쿨럭……."
아
궁이 불조차 없는 부엌 한 켠 그늘 속에 누나가 주저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수록 누나의 모습이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옷자락 앞섬 여기저기 피어난 붉은 자국. 백짓장처럼 새하얀 손과 얼굴. 그리고 그런 손과 얼굴에 어설픈 화가가
놀린 붓질마냥 그려진 선홍빛 흔적. 처음 보는 광경─── 아니, 아니다. 아주 최근에 이와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일주일
전쯤에. 그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
비류향이 눈을 떴을 때 가장 처음
보인 것은 늘 보던 집 천장이었다. 기이한 느낌이었다. 신선 같은 노인에게 동생을 부탁하고나서, 죽기 전에 동생 얼굴 본 게
다행이라는 생각과, 아버지도 모자라 누나까지 죽는 걸 보게 된 동생에게 미안한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으로 눈을 감은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다시는 못 보리라 생각했던 광경을 보니 정말 기이했다.
무엇보다도 몸이 가벼웠다. 몇 주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기침은 물론, 두통과 어지럼증까지 없어졌다. 온몸이 나른했지만 머리는 맑고 상쾌했다. 숨이 이토록 편안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대체 어찌된 영문이란 말인가.
"정신이 들었느냐?"
"……누구십니까."
새하얀 수염이 마치 신선과도 같은 노인이 곁에 앉아있었다. 노인은 비류향의 물음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허. 누구긴 누구야, 네 목숨 반 구한 생명의 은인이지."
"……! 은인께 결례를,"
"아아, 괜찮아, 괜찮아. 누워 있어라. 아직 회복이 덜 되었어.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지 않느냐."
노인은 비류향의 어깨를 슬쩍 누르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는 비류향을 막았다. 그말 그대로였다. 고작 몸을 일으키려 했을 뿐인데 쌀 가마니 하나를 옮긴 것마냥 숨이 가쁘고 온몸이 피곤했다.
"……어찌 이런 은혜를 베푸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잠시 후 몸 상태가 괜찮아지자 비류향이 물었다. 그 말을 어찌 여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노인은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자가 울고불고하며 누이를 살려달라고 하고, 내가 살릴 수 있었으니 살렸지."
"제자, 라 하심은……. 학사분이십니까?"
"그 샌님들보다 좀 더 활동적인 사람이다."
"……강호 분이시군요……."
노인의 눈썹이 씰룩였다. 고작 열 몇 살짜리 여아가 말 몇 마디에 자신이 강호인이라는 걸 알아차릴 줄이야. 영특한 아이를 보면 즐겁다고 했던가. 지금 노인의 심정이 그러했다.
"그래."
"연이를……, 무림인으로 키우려 하십니까?"
"그놈이 무림에 나갈지 어떨지는 그놈 마음이니 모르겠다만, 일단 무공을 가르치기는 할 게다. 그러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림인이 아니라 무인武人으로 키우는 게지."
"……연이가 하겠다고 한 겁니까?"
"그래."
"……."
정
확하게 말하자면, 침구나 탕약 없이 기공만으로 누이를 살려내는 노인의 모습에 비류연이 자신도 무공을 배우면 그리 할 수 있느냐
하기에 가능하다고 대답했기에 무공을 배우기로 한 것이었지만, 노인은 굳이 그 사실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나 비류향은 침묵했다.
그리고 노인은 어린 소녀의 침묵이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분명 무언가 있었음을 깨달았다는 것에 대한 표시임을 알아차렸다.
영특하다 영특해.
" 마음에 안 드느냐?"
"아닙니다. 사내아이가 선택한 길을 어찌, 계집아이가 왈가왈부 하겠습니까. 그리고, 은인께서 거두어 주신다는데, 감사를 못 올릴 망정 어찌 토를 달겠습니까."
"허허, 참. 얼굴에 금칠하는 재주가 있는 아이구만."
노인의 말에 비류향은 "송구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어른스러운 아이의 모습에 노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 쉬거라. 다 낫거든 여길 떠나 제법 멀리 가야할 터이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동생 무공 수련을 위해 산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 말에 비류향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연이만, 데려가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네가 다 나으면 그러려고 했는데, 일이 여의치 않게 되었어."
"……?"
노인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병 때문에 망가진 폐로 무리하게 멀쩡한 척 호흡을 하고 기침을 억누르는데 기맥氣脈이 버틸 리가 있나."
"그건,"
덜
컥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동생에게는 철저히 숨겼지만 다른 이들에게 숨길 생각은 없었다고는 해도 나름 빈틈 없이 숨겼다고
생각한 것을 본 지 얼마 되지 않는 노인에게 들킨 꼴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에 관해 굳이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
안다. 동생한테 병든 모습 보이기 싫어서 그랬겠지. 허나 그때문에 기맥이 망가지고, 기맥이 망가지니 혈도가 틀어지고, 혈도가
틀어지니 오장육부가 썩어들어가고, 오장육부가 뒤틀어지니 상중하 삼단전이 모두 깨져 진원진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화타가 살아돌아와도
못 살 몸이었어."
"……그런데 어찌……."
"어찌 살기는. 다 내 하늘과도 같은 내공으로 살렸지. 상한 피와 살을 내공으로 불태우고, 재생력을 촉진시켜 다시 생살이 돋게 하고, 망가진 기맥과 틀어진 혈도를 바로잡고! 깨진 삼단전을 다시 되살리고! 진원진기를 불어넣고!"
다
른 강호인들이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봤다면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말이야 내공으로 병환을 불사르고
삼단전을 고치고 진원진기를 불어넣는다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당장 건장한 무인의 운기조식을 돕는 것조차도 매우 위험한
행동이거늘, 무와는 일절 관련이 없는 아이의 몸에, 그것도 완전히 죽기 직전까지 망가진 아이의 몸에 내공을 불어넣어 몸을
치료한다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노인은 실제로 그 일을 해냈다.
"그래서, 네 진원진기가 돌아올 때까지 살펴야 하니 같이 간다는 게다."
"……감사합니다……."
겨우 내뱉은 한 마디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노인이 이를 모를 리 없었지만,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럴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너무 감사할 것 없다. 완전히 산 게 아니니."
"경청하겠습니다."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새어나간 진원진기는 내 천천히 회복시킬 테니 걱정이 없다. 되살렸다 한들 한 번 깨지고 뒤틀린 삼단전에 내공이 쌓이지 않는 거야, 어차피 네가 무학武學에 뜻을 두지 않았으니 개의치 않아도 된다. 허나……."
무
엇이 그리 걸리는 것일까. 세상 그 어떤 것도 거리낄 게 없어 보이는 노인이 망설이는 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본인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비류향은 묵묵히 노인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병환을 앓고 손가락 까딱할 힘 하나 없건만 아이 같지 않은 담담한
눈빛에 노인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인으로서의 삶은 힘들 것이다."
대답도, 반응도 없었다.
허나 노인은 비류향이 결코 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자기는 아이를 낳지 않으리라 결심하는 여인들도
있다지만 스스로 그리 선택하는 것과 하고자해도 못하게 되는 건 다르다. 이 아이는 어찌 반응할까. 호기심히 동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비류향의 대답은 예상 외이면서도, 예상했던 것이기도 했다.
"……살아서……."
어린 손이 노인의 손끝에 닿았다. 파르르 떨면서도 애써 손을 쥐었다. 감사를 전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아이의 손길이었다.
"살아서, 연이 장성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
새
벽에 눈을 뜨니 부엌에서 가마솥 물이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범인들은 듣지 못할 소리이나 심후한 내공을 갖춘
노사부에게는 생생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비류향이리라. 노사부는 그리 생각하며 방문을 나섰다. 문 옆에는 이미 미지근한 세숫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이 놓여있었다.
"끄응……."
쌓인 눈 위로 또다시 눈이 쌓이는 산 속의 겨울 날씨는
매섭다. 그런 산 속 오두막에서 세수하기 딱 좋은 미지근한 온도의 물을 적절한 때에 준비해두는 건 어지간한 정성이 아니고서는 못할
일이다. 심지어 뜨거운 물은 되려 더 빨리 식어 얼음이 생기니 온도 조절이 매우 중요한데, 그런 어지간하지 않은 정성을 여태껏
하루도 쉬지 않고 들이는 이가 있었으니…….
잠시 고민하던 노사부는 결국 세안을 했다. 이 정성을 어찌 무시한단 말인가. 씻은 물을 저 멀리 마당 너머로 훌쩍 쏟아낸 노사부는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부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
엌은 매우 깔끔했다. 4년 전까지만 해도 허름한 오두막 부엌 수준이었으나 노사부가 매일 그곳을 들락날락하는 비류향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겨 새로 짓게 된 것이었다. 물론 노동력을 담당한 것은 비류연 혼자였다. 소년은 당연히 처음 계획을 들었을 때는
맹반대를 했다. 노동력을 발휘할 인력이 자신 밖에 없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상당한 액수의 돈을 들여 으리으리한 부엌을
만들겠다는 노사부의 계획 때문이었다. 멀쩡한 부엌 뭣하러 큰돈 들여 새로 짓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네 누이가
맨날 저기 들락날락 하는데 불쌍하지도 않느냐!" 라는 스승의 일갈과, 새로 부엌 하려는데 어떠냐는 질문에 되려 "누나 신경쓰지
말고 네 무공 수련 열심히 하렴." 이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누이에게 자극을 받은 비류연이 단숨에 부엌을 신축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험준한 아미산을 거침없이 뒤져─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노사부 역시 숲을 뒤졌다─ 나무를 짜맞추어 견고한 대들보를
올리고 황토로 벽을 쌓고, 매끄럽게 갈아낸 돌로 아궁이를 세 개 짓고 그 위에 튼튼한 무쇠 가마솥을 얹었다. 남쪽으로는 큰 창을
내고 북쪽에는 작은 창을 달았다. 그 창은 둘 다 위아래로 열 수 있게 하였으며 이중창으로 만들었기에, 여름에는 시원하게 통풍을
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난방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렇게 만들고 나니 방 두 개 짜리 오두막에서 부엌이 제일 컸다.
가
마솥 하나는 방 쪽 벽에 붙은 둘과는 반대쪽에 있었는데 형태가 조금 특이하였다. 그 옆에 목욕탕으로 가는 작은 문이 있었다.
취사와 목욕을 위해 따로 배치한 것이었다. 이 목욕탕은 철저히 비류향을 위한 것으로, 부엌을 개축하던 당시 비류연이 푹푹 찌는
무더위에 땀을 닦다가 문득 떠올린 의문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사부님!"
"귀 안 먹었다. 작게 얘기해도 돼."
"누나는 어떻게 해도 내공 못 얻잖습니까?"
"그렇다고 몇 번이나 말했느냐."
"그럼 겨울에 사부님이나 저처럼 내공으로 몸을 청결케 하지 못하겠지요?"
"그래서 지난 겨울에 네가 열심히 향이 씻을 물 끓일 장작 만들었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부엌 옆에 목욕탕을 만들까 합니다."
"목욕탕?"
"네."
스
승과 제자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끓인 물을 손쉽게 소나무 욕조로 부을 수 있는
손잡이 달린 기울임식 솥과 수도水道, 미끄러지지 않을 정도면서도 맨살로 문질러도 살이 다치지 않는 돌바닥이 깔린 목욕탕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본인은 한사코 거절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사연 있는 부엌 안 아궁이 앞에 한 소녀가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그 모습에 노사부가 헛기침을 했다.
"어흠."
그 소리에 소녀의 눈이 뜨였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졸린 기색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전혀 보이지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는 정중하게 노사부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기침하셨습니까."
비류향.
5
년 전 동생과 함께 노사부의 거처로 온 소녀였다. 아니, 이제는 꽃다운 열 여덟의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앞치마를 두른 모습은 뭇
사내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정도로 단아하고 아름다웠지만, 노사부는 그것보다 불편함과 미안함(!)을 느꼈다.
"향아, 그냥 찬 물 놔두래도. 아니, 겨울에는 세숫물 안 떠놔도 된다 하지 않았느냐. 내 지난 번에도 말했는데. 수고를 들이지 말거라."
"어찌 노야老爺께 그러한 결례를 범하겠습니까. 그리고 노야께서도 겨울일수록 더 잘 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그건 이 집에서 너만 해당되는 얘기다. 나나 연이는 내공으로 안 씻어도 청결을 유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서 수련을 하는 게야."
"그럼 하릴없는 소녀가 보은키 위해 하는 일이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십시오."
정
내키지 않으시면 마당에 부으셔도 좋습니다. 비류향은 그리 대답하였고 노사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끄응……." 아이고 맙소사. 셀
수도 없을 만큼 반복된 논쟁은 언제나 노사부의 패배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노사부는 5년 전 병상에서 일어난 소녀가 정중히 절을
올리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배운 것 없고 힘 없는 여식이지만, 세상천지 갈 곳 없고 기댈 곳 없는 어린 오누이
구해주신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연이가 사내로서 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도록 무공까지 하사해주셨으니 그 은혜,
평생토록 갚겠습니다. 』
그때 노사부는 알지 못했다. 일생 동안 수발을 들겠다는 이 소녀의 말이 얼마나 진중했는지를. 그리고 5년 동안 그 말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비
류향은 무서울 정도의 부지런했다. 이는 병의 후유증이기도 했다. 상중하 삼단전이 모두 망가져 오래 잠들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침상에 누워 제대로 자는 건 자시子時에서 축시丑時까지 두 시진時辰 남짓이고 부족한 잠은 모두 쪽잠으로 때우고 있었다. 시장서
장보다 잠시 쉬다가 자고, 목욕하다가 자고, 빨래 널고 마루에 앉아 자고, 아궁이 불 보다가도 자고. 그러면서도 귀신 같이 일어나
제 할 일을 다하니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눈만 붙이고 있을 뿐 제정신으로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부지런함을 바탕으로 비류향은 요 5년간, 말 그대로 '극진히' 노사부의 수발을 들었다. 한겨울에 세안용 미온수를 준비하는 건
약과에 불과했다. 노사부가 생활의 편리를 위해 가르친 것이 있다고는 해도, 허름한 오두막이 조촐하지만 단정하고 깔끔한 정자와 같은
공간이 되고, 식탁에 오르는 요리의 다양함과 풍성함이 이전과는 비교를 할 수 없게 된 것은 모두 비류향의 손길을 거친 이후
였다. 술안주거리라도 할라치면 어쩌면 그렇게 딱 먹고 싶은 걸 그날 딱 마시고 싶은 술과 함께 준비하는지 몰랐다. 의복은 항상
깔끔하게 다려져 있었고, 조금이라도 닳거나 해지면 귀신 같이 새 것으로 바꾸거나 천을 덧댔는데, 그 솜씨는 마치 옷이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삶의 질이 변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처음에는 좋았다. 노사부는
타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때때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무한히 쏟아지는 비류향의 호의가 한없이
계속되자 노사부는 조금씩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만두라고 해도 생명의 은혜를 갚는다며 달라붙는 데에는 아무리 천하의
노사부라고 하더라도 장사가 없었다. 어린 소녀가 존경이 가득한 눈빛으로 하는 일을, 그것도 아무런 흠집 없이 하는 일에 무슨
트집을 잡는단 말인가.
그나마 식소사번의 예를 들어 침소사번이라 말하고, 정녕 오래도록 은혜를 갚고 싶다면 네 목숨을
중히 여겨야 하니 적절히 휴식을 취하며 일을 하라고, 까놓고 말해서 땡땡이 좀 치고 빈둥거리라고 애둘러 말해서야 이 정도다.
그전에는 정말 궁인宮人들 저리가라 할 정도로 따라다녔다. 그 와중에 자기 동생까지 챙기니 그 정성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아침 수련을 다녀오마. 그리고─"
"오시는 데로 식사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두겠습니다."
"─그래."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비류향의 모습에 노사부는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모를 표정으로 부엌을 나갔다. 천하의 노사부가 계집아이 하나에 쩔쩔매게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잠시 후, 비류연 역시 노사부와 비슷한 과정─세안용 미온수와 수건─을 거쳐 부엌에 들어왔다.
"아, 누나! 이런 거 안 해도 된다니까!"
"세안은 몸의 청결만이 아니라 마음도 다스리는 법이라잖니. 그리고 너 돕고 싶어서 한 일이니 신경쓰지 마렴."
"아, 그러니까……."
"씻을 물 끓여두마. 노야께도 말씀드리고."
"괜찮아! 괜찮다니까! 오늘 수련할 거 많아서 씻을 시간 없어! 안 해도 돼! 그리고 목욕탕 누나만 쓰면 된다고!"
"사람이 염치가 있지 어찌 그러니."
"……하아, 아침 수련 다녀올게. 그리고 물 준비 안해도 돼. 괜히 낭비하지 말고."
"그래, 알았어. 잘 다녀오렴. 식사 준비해두마. 먹고 싶은 거 있니?"
"누나 밥은 뭐든지 맛있으니까 아무 거나──!"
비
류연은 경공을 써 도망치듯 부엌을 나가며 그렇게 외쳤다. 이제 열 다섯. 입지立志의 나이건만 동년배는 물론 당대의 절정고수와도
견줄 수 있는 무공을 가진 소년이라도 어머니와 같은 누이에게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런 동생의 모습에 비류향은 활기차서
좋구나, 하고 미소를 지으며 공경하는 노사부와 사랑하는 동생을 위한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5년 동안 이어져 온 비뢰문의 평범한 아침이었다.
#####
- 새벽에 올리려 했으나 갑자기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아 미뤄졌습니다.
-
비류향의 증상은 '급성 폐결핵으로 나오는 각혈을 억지로 참아 혈전이 생겨 이게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지면 비슷한 증상일까.'
라고 부실한 의학적 지식으로 고민해봤으나, 그냥 무협식으로 기맥이 망가졌다고 하는 게 제일 무난하다고 판단했습니다.
-
쓰다보니 생각났는데, 군대서 누가 입원실에 비뢰도 1부 전권을 가져다놔서 시간날 때 보고 있자니, 군의관님께서 그걸 보시고는
이게 아직도 나오고 있느냐며 놀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분도 전역하셨을 텐데, 잘 지내고 계시려나…….
- 댓글
도박[…]으로 200 이상의 댓글이라는 화살에 맞고, Crimsoneyes님의 지원그림이라는 창까지 맞아 시작하게 되었습니만,
정말 이런 내용의 팬픽을 보고 싶은 분들이 계셨는지 의문이 듭니다. 마치 부모님 세대의 이상적인 누님상[…]이랄까, 조아라에
범람하는 여주인공 같은 주인공이 먹힐지 모르겠네요. 여튼 도박이라도 약속은 약속이니, 최소한 1부까지는 가보겠습니다. 더불어 댓글
200돌파 라는 성원에 힘입어[…] 주간 연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솔직히 일일 연재는 도저히 안되겠는지라……. 이번에 학점
붕괴되면 집에서 맞아 죽습니다. 살려주세요 /굽신굽신
- 다시 한 번 Crimsoneyes님께 (복잡한 심정이 뒤섞인)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 하늘과도 같은 그대 2
도끼를 보고 있자면 새삼스럽게 왜 이런 걸로 장작을 패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게 무슨 개소리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첨언을 하자면, 이는 힘이 없더라도 요령과 속도를 활용해 비도만으로 장작을 쪼개는 비뢰문의
수련을 하다보니 들게 된 생각이다. 처음에는 이게 과연 사람이 할 짓인가, 이 문파는 대대로 제자에게 이런 미친 짓을 시켜왔던
건가 싶었지만─추측이기는 하지만 왠지 정말 그렇게 해왔던 것 같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나 역시 그짓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
론 단번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고 1년 반이라는 기나긴 수련기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동안 장작패기에 사용된 것은 당연히
도끼였다. 금부연 도끼만행사건이라는 상당히 수상쩍은 사연을 가진 더럽게 무거운 도끼로 장작을 패면서 팔 힘과 균형감각을 배울 수는
있었지만 더럽게 힘들었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참고로 이 오두막에는 전설의 도끼 외에, 매우 가볍고 실용적이며,
장작에 슥 내려치면 쩍 하고 갈라지는 우수한 도끼가 하나 더 있지만, 그건 절대 내가 손대서는 안 될 물건이다. 누나를 위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행여나 손이라도 댔다간 사부에게 "수련으로 단련하지 않고 어찌 병약한 누이를 위한 물건으로 편함을 도모하려고
하느냐!" 라는 소리를 들으며 얻어맞는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째 제자보다 누나를 더 챙기는 것 같은 느낌인데.
여튼 그러한 이유로 빨랫방망이 역시 내가 쓰는 더럽게 무거운 쇠방망이와 누나가 쓰는 가볍고 튼튼한 나무 방망이 이렇게 두 개가
있다. 그리고 이 빨랫방망이 역시 수상쩍은 쇠도끼와 마찬가지로 익숙해지기까지 1년 반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동안
걸레 조각이 된 의복을 만결복이라 부르며 매일 바느질한 덕분에 바느질 실력 또한 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뭐, 이쪽은 누나의
도움을 좀 많이 받기는 했지만. 내공도 없이 슥삭슥삭 바느질을 해치우는 누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놀라울 따름인데, 누나 말을
들어보면 어머니께서도 생전에 마을 어느 아낙들보다도 삯바느질을 잘 하셨단다.
"그래서 나랑 네 옷은 물론 아버지 의복도 손수 만드시는 분이셨어."
호
롱불 아래서 함께 바느질을 하며 누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넝마 조각 같은 옷을 꿰메는 건 정말 싫었지만 그 동안 이런 얘기,
그러니까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듣는 게 좋았다. 어릴 때 돌아가셔서 자세히 기억나지 않기에 누나가 어머니에 대해 더 말해줬으면
하고 바랐지만, 괜시리 누나가 애잔해보여서, 애써 담담하려는 것 같아 보여서 더 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결론은 누나의 도움을 받아
성장해서 이제는 엄청나게 바느질을 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혹독하다 못해 무식하기까지 한 장작패기와 빨래로 육체적 수련을 지속함과 동시에 사부에게 배운 것은, 비뢰문의 2대 비전秘傳인 뇌령심법雷靈心法과 영사심결靈絲心訣이었다.
사
부는 침을 튀겨가며 "본문本門의 독문내공심법獨門內攻心法인 뇌령심법雷靈心法은 인체의 호흡뿐만 아니라 천지 간의 교류(交流)를 통해
천지 세상만물의 기운을 받아들여 그 기운으로 뇌령雷靈, 즉 뇌雷의 영혼靈魂을 생성生成하는 천하제일의 내공심법內攻心法이다." 라고
설명하였다. 거기에 "이 뇌령심법雷靈心法은 뇌雷의 기운인 쾌快, 섬閃, 강强, 찰나刹那의 구결과, 집集, 산散, 유柔의 구결이
있으니 이를 잘 암기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 역시 덧붙였다.
뇌령심법과 함께 배운 영사심결靈絲心訣은
일종의 정신수양법으로서, 어떠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영혼을 꼬아 실처럼 만들어 자연스럽게 부동심不動心을 가지게 하고, 그
마음이 항상 투명한 호수와 같이 맑고 고요하며 평안하도록 하는 심법이었다.
솔직히 처음에 2대 비전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는 이게 무슨 약장수의 헛소리가 아닌가 싶었지만, 수련하면 할 수록 장작패기와 빨래가 압도적으로 쉬워졌기에 효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동시에 사부가 처음부터 이걸 알려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묵금墨琴을 건드리려다 손가락을 베여 피를 보고 그로 인해 분뢰수吩雷手도 배웠다. 덤으로 분뢰수가 6성에 도달해야 묵금을 건드릴 수 있으니 그때까지는 평범한 금을 타라는 사부의 말을 들었다. 뭐, 이건 아무래도 좋다.
겨
우 기초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면서 영사심결을 활용하면서 비도 날리는 법과 비뢰문의 운신법運身法인 봉황무鳳凰舞를 배웠다. 비도
던지기와 봉황무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자 야외수업이라며 뒷산으로 가서 나물 채집과 사냥을 배웠다. 사부는 산 전체를 가볍게
돌아다니게 되니 봉황무의 수련이고, 비도만으로 사냥을 하니 무공의 수련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게 식비를 아끼기 위한 짓이라는 걸
순식간에 간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힘은 사부에게 있었고, 고생해서 얻은 나물과 고기는 나와 사부만 먹는 게 아니라 누나도 함께
먹는 식재료가 되었기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이 행위를 이어갔다.
나물 채집과 사냥은 새벽 눈뜬 이후부터 오전까지의
시간에만 이루어졌다. 오후에는 철화장鐵化莊에서 철을 두드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은자 2냥에 특별수당지급이라는 말도 안되는 조건으로
팔려나가 해가 기울 때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허나 집에 돌아와도 그곳에 안식은 없었다. 사부가 철을 만지며 둔화된 섬세한 손
감각과 안력을 수련하기 좋다며 구슬을 꿰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사부는 정교함과 섬세함을 단련하는 또다른
수련이라며 목각 조각상과 공예품 제작까지 만들게 하였다.
채집採集. 수렵狩獵. 제련製鍊. 관옥貫玉. 목각木刻.
모조리 돈이 되는 일이었다. 허나 수입이 늘어난다고 좋아하는 건 사부 뿐이었으며, 나는 숙달되면 숙달될수록 일거리가 늘어나 도저히 편해지지 않는 하루하루를 보내야했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세월이었다.
난
왜 이렇게 불행한가! 하늘은 어찌 이렇게 큰 시련을 주는가! 사나이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지만 너무나 서러워서 눈물이 마르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힘들었다. 만약 누나가 없었다면 정말 천하제일 무공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힘들지?"
"응. ……아니! 전혀!"
유
난히 힘든 날이었다. 쓸만한 나물도 없고, 괜찮은 사냥감도 없으며, 철도 잘 두드려지지 않았다. 구슬도 잘 꿰이지 않고, 조각칼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던 날. 영사심결을 단련해도 흔들리는 울분을 애써 억누르며 어찌어찌 잠자리에 든 내게 누나는 그렇게 물었다.
무심코 힘들다고 했다가 급히 상반신을 일으키며 아니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누나한테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린 아이의 치기稚氣이기도 했고, 나보다 더 힘들 혈육에게 괜히 걱정을 끼치고 싶지도 않다는 미숙한 배려이기도 했다.
누
나는 그런 내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혼나고 있는 것도 아니건만 괜시리 마음이 찔린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바느질을 하던 누나는 잠시 바느질거리를 내려놓고 내 곁으로 다가와 살포시 품에 나를 안아주었다. 부끄러웠지만 익숙한 체향과 귓가에
들리는 누나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자니 떨어질 수가 없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을 잊고 그 품 안에 있다보니 어느 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밖에 나갔다 오려고 했으나, 누나는 그런 날 더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참고 숨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고름을 짜내야 종기가 낫잖니. 울어도 뭐라할 사람 없어. 괜찮아. 괜찮아, 연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엄마 대신 누나를 부르며 말 그대로 펑펑 울었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도 그렇게 안 울었던 것 같다. 울다 지쳐
잠든다는 걸 그때 알았다. 여튼 그렇게 속이 후련해지도록 울고난 후로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고된 일과를 받아들였다. 물론 정말
힘들었지만 그때처럼 다 때려치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이 후련해졌지만 육체의 고단함은 변함이
없었다. 만약 그대로 내가 일만 주구장창했다면 분명 과로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불쌍한 우리 누나는 평생 사부 수발만 들다가 죽었을
테고. 하지만 그날의 사건 덕분에 나는 그렇게 될 뻔했던 미래를 바꿀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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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다 지쳐
잠든 비류연을 자리에 뉘인 비류향은 동생의 눈물과 콧물에 푹 젖은 옷을 갈아입고 바느질감을 잡았다. 그리고 짧은 잠에 들었다. 일
다경一茶頃 쯤 지나 눈을 뜬 소녀는 호롱불에 남은 기름을 보고 자기가 얼마나 잤는지를 가늠하고는 바느질감을 가지런하게 정리해두고
부엌 아궁이에 장작을 넣기위해 방을 나섰다. 슬슬 불길이 사그라들 때였다. 산을 휘감아 내려오는 새벽바람은 계절을 막론하고
차가우니 온기가 돌게 하려면 이때 장작을 넣어둬야 했다.
그리 생각하며 문을 나선 비류향의 눈에 들어온 건 마당에 서서 밤하늘을 보고 있는 노사부였다. 비류향은 신속히, 그러나 결코 경망되지 않은 동작으로 신발을 신고 노사부에게 다가갔다. 기침해 계셨습니까, 라고 입을 연 순간,
"과하다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노야老爺."
노사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비류향은 당황하였으나 이내 사부의 경중을 읽고 대답하였다.
"대답이 늦는구나. 얼굴에 근심도 가득하고. 그러면서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느냐."
"송구스럽습니다."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깊게 허리를 숙이는 비류향을 보며 노사부는 됐다며 손을 휘젓고는 말했다.
"네 보기에는 노구가 일신의 영달을 위해 제자를 핍박하는 것처럼 보일 지 모르겠으나, 이는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네 동생이 성장함에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
거
짓말이었다. 전통적(?)으로 비뢰문은, 적어도 노사부는 '제자와 노예의 차이는 비전을 배우느냐 마느냐의 차이일 뿐, 하는 일은
똑같다.'는 견지를 유지해왔다. 그렇기에 노사부가 비류향에게 하는 말은 괜한 심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했다.
그러나 노사부는 모르고 있었다. 비류향이 얼마나 진심으로 노사부를 신뢰하고 있는지를.
"
어찌 그걸 모르겠습니까. 비록 무학武學의 궁리는 모르나 연이의 일과가 열두 살 아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연이가 그 힘든 수련을 하면서도 심화心火를 품을지언정 육신은 병에 걸리지 않으며 크게 다치지 않으니 노야께서 안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허나 이제는 세상에 없는 양친께 부탁받은 동생을 자식처럼 보살펴 왔습니다. 그러한 아이가
힘들어 하는데 손윗누이라는 것이 해줄 수 있는 게 치맛폭에 품고 원없이 울게 해주는 것 뿐입니다. ……스스로가 한심하여 노야
앞에서 안색을 어둡게 하였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
식은땀이 등 뒤로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제아무리 세상 무서울 것 없고 거칠 것 없는 노사부라도, 이렇게 올곧고 순수하게 자신을 믿어주는 소녀에게 차마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고, 네가 생각하는 안배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니, 설령 그게 아니라 일신의 탐욕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말하더라도 이 소녀가 과연 그걸 믿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분명 서투른 겸양의 표현이라 여길 게 뻔했다. 그래서
노사부는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스스로 일을 하고 식구를 먹여살리는 사내를 치맛폭에 감싸는 것은 과한 일이다."
"
압니다. 허나 연이가 사내라고는 해도 아직 열두 살 아이입니다. 그것도 스스로 우기니 열둘이지 아직 띠도 돌아오지 않아
실질적으로는 열하나입니다. 본디 모친의 품에서 울분을 하소연할 나이지 않습니까. 나이가 차면 스스로 사리구분하여 멀어질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
"하늘을 나는 용도 머무는 구름이 있고 호랑이 또한 잠드는 굴이 있는데, 저 어린 것에게도 마음 놓고 있을 곳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무례한 줄은 아나 그래도 부디 윤허해주셨으면 합니다."
쏴아아아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어내린 산바람이 숲을 흔들고는 노사부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이제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식은땀이 순식간에 식는 것과 동시에 노사부는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야, 이거. 이야. 정말.
"……어흠! 여튼, 밤이 깊었다. 어서 자거라. 짧은 잠이라도 편히 자야 다음 날 일하는데 지장이 없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아궁이만 확인하고 곧 들어가겠습니다."
그리 대답하며 비류향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노사부는 잠시 소녀가 들어간 부엌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별이 쏟아지는 것 같은 아름다운 밤하늘로 시선을 돌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
지금 뭔가 심적으로 엄청난 부담이 될 흉악한 것을 곁에 두고 키우고 있는 게 아닐까. 불현듯 떠오른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노사부는 애써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뭔가 해야한다. 그 생각에 노사부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인을 알지 못했다. 그 생각으로 인한 선택과 결과가 평생토록 그를 얽메는 쇠사슬의 단초가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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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맹주正天盟主 진천뇌벽검震天雷霹劍 나백천羅伯泉이 사천四川땅에 온 것은 자신의 딸을 검후劍后에게 맡기는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찌하다보니 시간이 남아 장터에 들어선 그는 기이한 것을 보게 되었다.
입
지立志와 약관弱冠 사이의 연배일까 싶은 여인이었다. 보통 그 나이대의 여성은 소녀라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나백천은 소녀라는 단어가
가진 앳됨이 없으며 마치 한 집안의 자당慈堂과도 같은 품격을 느껴 여성이라 표현이 적절하다 여겼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어른스러움 때문에 기이하다 여긴 게 아니었다.
"산 사람인데 기맥이 있는 듯 없는 듯 흐릿하고 희미하니, 이는 중병에
걸린 이나 곧 죽을 자의 맥동이다. 허나 저 처자는 비록 큰 움직임은 없으나 활기가 있고 중심은 진중하고, 그러면서도 내공은 한
줌도 느껴지지 않으니 괴이하다."
그 말 그대로였다. 희한한 일이었다. 별의별 일들을 마주했다 생각했건만 이토록
진귀한 경험도 하니 역시 세상은 넓도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 걸음을 뗀 나백천은 순간, 매서운 눈길로 방금 전 여인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없었다. 아니, 있었다. 절정의 고수인 나백천의 안력眼力으로도 찰나에 잡아내지 못한 것은 그 여인의 있는 듯 없는 듯
기이한 존재감 때문이었다.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은 존재. 잡히지 않는 기맥.
"……."
평소라면 단순히
넘어갔을 일이었으나, 나백천은 최근 사천땅에서 천겹령의 끄나풀이 움직였다는 징후가 포착되어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이를
우연이라 여기지 않고 은밀하게 여인의 뒤를 좇기 시작했다. 기우였다면 다행이다. 허나 정말로 저 여인이 천겁령에 속한 자라면
이대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나백천은 한 시각 동안 조심스레 의문의 여인의 뒤를 밟았고, 그 길은 기이함의 연속이었다.
이
미 몇 번이나 장터를 나온 듯, 여인은 상인들의 인사에 화답하며 물건을 샀다. 그러다 때때로 장터 틈바구니 어디나 쉴 자리가
있으면 그대로 앉거나 기대어 눈을 감고는 잠이 들었다. 저잣거리 소란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때는 잠깐이라도
눈을 돌리면 금새 기척이 사라져 있었다. 바로 보고 있거늘 인식할 수 없었다. 혹여 무림인인가 싶어 시험삼아 살기를 쏘아내도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다경, 혹은 그 이하의 짧은 쪽잠을 자고 나면, 마치 잠깐 눈만 감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짱히 눈을
뜨고 일어나 다시 장을 보기 시작했다.
"내 허깨비를 보고 있는 것인가……."
여인 곁을 지나가는
일반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건만 자신만이 저 여인을 기이하게 보는 작금의 상황에 나백천은 고심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의혹
역시 깊어져만 갔다. 그리하여 그는 여인이 장보기를 마친 듯한 시점에서 의문을 해소하기로 했다.
"소저. 잠시 몇 가지 물어보고 싶소만."
"……하문하십시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여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여인은 기척 조차 없이 나타난 이가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에
놀랐는지 약간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곧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리 대답했다. 짧으나 정중한 대답은 그 안에 의義와 예禮가 담겨
있었으나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으며, 감정을 절제하되 무공無空하지 않아 중용지도中庸之道를 실천하고 있었다.
나
백천은 재차 여인을 바라보았다. 의복은 허름하지만 단정했고, 옷매무새 역시 정돈되어 있었다. 잘 살거나 명문은 아니더라도
신의信意와 학식을 갖춘 고아한 선비士 집안의 자당慈堂과도 같은 품격이 느껴졌다. 이에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나백천은 말을 높여
물었다.
"혹 일가의 안주인이십니까."
연배가 있다고 한들 강호와 연관이 없는 일반인이라면, 지아비가 있고 자식이 있는 여인이라면 함부로 하대하지 않는 게 예법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대하십시오. 올해로 열다섯인 여아에게 말씀을 높이실 필요 없습니다."
"허어, 허허. 이거 미안하구나. 너무 어른스러워 결례를 저질렀구나."
"결례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아니다. 안사람이 여인의 나이는 함부로 아는 게 아니고 완숙하여도 어리게 보인다 해야한다고 했으니 내 결례를 저지른 게지."
"자당께서 농으로 하신 말씀이실 터이니 심려치 마십시오."
두
사람 사이에 훈훈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나백천은 점점 더 신중해졌다. 이 거리에서도 여인의 기맥이 희미했고
일반인 수준의 기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무형지기에는 반응조차 하지 않는다. 대체 이 처자는 누구란 말인가.
"하여, 제게 무엇을 묻고자 하십니까?"
"아, 미안하구나. 네 기맥이 기이하여 그 연유를 묻고자 하는데, 답해줄 수 있느냐?"
"기맥 말씀이십니까? 이상하다 하심은 어떤 것인지……."
여인이 잘 모르는 일인지 말을 흐리자 나백천이 설명했다.
"앞에서 보기에는 활기가 있거늘 죽기 직전이거나 중환자와도 같은 기맥이다. 내공은 한 줌도 느껴지지 않으며 기력도 없어 틈만 나면 잠에 드니 이는 산 사람의 형태가 아니니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그
설명을 들은 여인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백천의 의문에 대답해주었다. 돌림병에 걸려 죽을 뻔 했던 것. 노사부가
제자로 들인 동생의 청을 들어주어 몸을 고쳐준 것. 그러나 치료시기가 늦고 병세가 너무 깊어 상중하 삼단전과 전신 혈맥이 모두
망가진 상태라는 것. 그로 인해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해 부족한 잠을 쪽잠으로 때운다는 것 등을 모두 듣고도 나백천은 쉽게 믿지
못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인의 말에 따르면 노사부라는 인물은 내공으로만 죽기직전의 중환자를 살려낸 것이다. 그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일인지는 절정의 무인인 자신이 더 잘 알았다. 그걸 알기 때문일까. 여인은 조심스레 소매를 걷어 손목을
내밀었다.
"노야께서 무인들은 쉽사리 믿지 않을 터이니 맥을 짚게 하면 이해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의 몸에 함부로 손댐을 용서하게나."
맥을 짚은 나백천은 실제로 여인의 기맥의 뒤틀려 있고, 망가진 삼단전을 복구한 솜씨를 알게 되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천지 기인을 많이 만나봤다 생각했건만 아직도 내 견식이 부족하구나. 이와 같은 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이런 능력에 너와 같이 기품 있는 여인을 키워냈으니 범상치 않은 분이실 터. 필시 기인奇人이나 신인神人일 테지."
"신묘한 솜씨로 보잘 것 없는 여아女兒를 살려 주셨으니, 갚아야 할 은혜가 하해와도 같은 은인이십니다."
자
리에 없는 이에게도 공경을 다하는 여인의 태도는 의문이 풀려 마음이 가벼워진 나백천의 호감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여인의
상태를 이해하고 눈을 살피니 과연 맑고 투명하여 비록 내공은 없으나 깨달음을 얻은 자와 같은 정갈함이 있었다. 나백천은 자리를
바꿔 좀 더 대화를 함이 어떻겠냐 물었다. 여인은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하더니 반 시각이라도 괜찮다면 따르겠다 하였다.
"어째서 반 시각이더냐?"
"노야께 올릴 석반과 동생의 식사를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허허, 내 그리 시간을 뺏지 않도록 하마."
그
렇게 가까운 객잔에 자리잡은 두 사람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체적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나백천이었으나
여인은 경청하며 현명한 답을 하여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반 시각이 흐르자 서로는 아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토록 즐겁게 시간을 보냈건만 서로 통성명도 안하고 있었다니. 이제서야 자기소개를 하는구나. 노부는 정천맹주 진천뇌벽검 나백천이라고 한단다."
"……비류향이라 합니다. 귀한 분을 몰라뵌 점 용서해주십시오."
처
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살짝 놀란 듯 비류향의 눈이 약간 동그랗게 변했다가 돌아왔다. 호들갑을 떨 만도 하건만 일관된
태도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신뢰감이 생겼다. 저잣거리와 객잔에서 나눈 대화가 자신의 심상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소녀는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그렇기에 나백천은 이 소녀를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내 간만에 좋은 인연을 만들었는데 서로의 일정이 바빠 오늘은 이렇게 헤어지지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있겠느냐?"
"귀한 분께서 훗날을 기약하시니 응함이 옳으나, 은인의 수발을 들어야 하기에 함부로 약조할 수 없습니다."
"음, 어찌 안 되겠느냐?"
"사정을 설명해주시면 노야께 윤허를 구해보겠습니다."
비류향의 대답에 나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금 천향루에 머무르고 있는데, 여식과 함께 왔다. 헌데 아이에게 심병心病이 있어 쉽사리 바깥출입을 못하니 말벗이 필요한데 이를 부탁할 수 있겠느냐."
"저와 동년배인지요."
"올해로 열 둘이니 세 살 어린 셈이지."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인 비류향은 잠시 고민하더니 난처하다는 듯 되물었다.
"심병은 그 종류가 무궁무진하여 그 하나만으로는 윤허를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증상이라도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흠……, 네 몸 상태를 보면 기인께서는 무공과 의학에 조예가 깊으신 듯 하니 바른대로 말하는 게 좋겠지." 『용안龍眼』 "그리 전하면 아실 게다."
"……방금 그것은……."
"전음傳音은 처음 듣느냐?"
상
승의 경지에 달한 무인은 내공을 활용하여 원하는 이에게만 말을 전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전음인데 노사부와 비류연의 대화에서
그런 것이 있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을 뿐인 비류향은, 방향 없이 들리는 기묘함에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그것만으로도
용안이라는 것이 쉽사리 입 밖에 내놓으면 안 될 것이라는 것을, 눈앞의 무인이 얼마나 자신을 신뢰하고 있는가 또한 깨달았다.
"오늘 처음 만난 미숙한 여아에게 이토록 신의를 보여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부디 기인께서 윤허해주셨으면 좋겠구나."
"천지인 삼륜三倫을 깨달으신 분이시니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을 헤아리실 것입니다."
그날의 만남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인연이 시작됨을 알리는 효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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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는 공부가 많이 필요한 소설입니다. 구파일방 오대세가를 제외하고도 이름 있는 문파가 흘러넘치고, 그들의 절기와 본가의
위치와 중국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 어느 지역이 어떠하다까지 고민해야 하고, 주요 혈맥 자리 정도는 몇 가지 주워담을 수
있어야 하지요. 어휘 또한 온갖 옛말과 국한혼용체와 말 그대로 무협지에서만 활용되는 한자까지 꿰뚫고, 복잡한 인간관계와 거기에
맞는 호칭에 경어와 하대까지 능숙하게 써야 그래도 좀 무협지 같은 형태의 글이 나옵니다.
……그걸 아는데 왜 제가 이런 걸 쓰게 되었을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도박은 안됩니다 여러분.
- 쓰면서 처음과 마찬가지로 댓글 몇 개 달리면 곧바로 다음화 올리 같은 걸 해볼까 했다가, 이게 스스로를 지옥으로 몰아넣는 전초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포기했습니다. 이 놈의 도박……!
- 포병과 아스티와 세이야를 거치면서, 팬픽은 기세요 흐름이니 타오를 때 최대한 질러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공모전과 학점이 날아가는구나…….
- 비류연의 연이 뭔지 알기 위해 학교 도서관을 찾아가 본 결과 강 이름 연沇이었습니다. 이게 그리도 안 나오던가.
- 소제목 수정할까 하다가 일단 돌려놨습니다. 계획 없던 연재의 부작용이 이렇게 나타나는군요 <-
- Crimsoneys 님께서 또 그림을 그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정말로. 감사합니다. 크으으으으으……!!!!!!
한자 및 오타 지적 받습니다.
[아이돌 마스터] 저요? 아이돌일걸요? 아마도. 프롤로그~6화
모음
[아이돌 마스터] 저요? 아이돌일걸요? 아마도.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지금 이곳은 산 속입니다. 네, 조난이에요. 그렇답니다. 조난이에요."
고등학생 정도 되어보이는 소녀가 시니컬한 듯 하면서도 미묘하게 개의치 않는 듯한 자연스럽고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입고 있는 옷은 최근 10대 소녀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캐주얼한 등산복. 디자인과 실용성을 동시에 잡았기에 낮이 되어도 선선한 요즘에 입고 다니기 편한 옷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뭔가 불편한 듯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살짝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 결코 생존에는 효율적이지 못한 옷이네요. 빌딩풍이 몰아치는 대도시에서는 유용하겠지만, 으음, 적어도 이 숲에서는 그리 유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만일 가정에 제 또래의 따님이 있고, 그 따님께서 이 옷을 사달라고 한다면 사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따님께서 그 옷을 입고 산에 간다고 하면 반드시 말리세요. 아, 참고로 마코토는 꽤 마음에 들어하더군요. 뭐, 가벼운 캠핑에는 좋을 것 같네요."
아무렇지도 않게 협찬받은 상품을 깎아내리고 있다. 말투도 묘하게 날카로워서 정말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래도 이 소녀가 입고 있는 옷을 한 번 입어보고 싶게 만드는 말투. 종잡을 수 없는 느낌이다.
"어찌되었든 조난당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헬기에서 낙하산과 함께 던져졌습니다. 랭크가 바닥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뭐랄까, 랭크 이전에 아이돌이잖아요? 그런데 왠지 취급은 단백질을 탐하는 그분과 같네요. 그보다 요령 한 번만 듣고 간신히 낙하산 펼쳐서 내려오기는 했지만, 잘못했으면 그냥 낙사라구요? 이 방송 진짜 괜찮은 건가요? 안전점검 같은 거 하고 있는 거 맞죠? 아니, 그리고 이 방송 원래 아이돌 애들 시골 같은데 가서 2박 3일로 일하고 놀고 뭐하고 그런 거 아니었나요? 적어도 처음에는 지붕 아래서 잠을 잤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나 혼자 이렇게 산 속에 던져져서 문명세계로 돌아오는 고생을 하고 있는 건가요?"
투덜투덜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정말로 곤란해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다. 아침에 세수하다가 잠옷 소매가 젖은 걸 궁시렁거리는 것 같은 가벼운 느낌이다.
게다가 방송이라고는 해도 오지에 내던져졌는데 전혀 곤란한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되려 능숙하게 낙하산을 수거해 가방에 넣으며 짐을 확인한다.
"이번에도 있는 물품은 나이프랑 부싯깃, 그리고 물통입니다. 아니 정말 그분 따라가는 거에요, 이 방송? ……뭐, 지금 여기 있는 건 저랑 카메라맨뿐이니까 알 수가 없군요. PD님을 만나봐야겠군요.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산을 빠져나가야 하구요. 그래도 하다못해 삽이라도 좀 넣어주면 좋을 텐데……. 아무리 방송 설정상 안된다고 해도 아쉽다구요 정말."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하늘을 본다.
"일단 국내고 오전이니까 해가 있는 저쪽이 동쪽이군요. 이 방송 계속 보신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 테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해주는 게 이 바닥 약속이죠. 어차피 식상해진다 싶으면 알아서 편집될 테니까요. 여튼 동서남북은 알았고, 헬기에서 내던져지기 전에 봤던 지도에는 남쪽으로 가는 게 가장 가까운 도시라고 했었으니까, 이쪽으로 가야겠네요. 전 아즈사 언니처럼 몸 속 어딘가에 워프엔진을 내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발품을 팔아야 합니다. 귀찮네요."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가방을 맸다.
"슬슬 봄이 되니까 월동을 끝내고 튀어나오는 동물들이 있을 테니 그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 근처에 뭐가 튀어나온다는 정보를 받은 게 없어서 걱정되네요…… 라고 말해봤자 다들 TV 앞에서 편안하게 앉아서 '그래도 잘 헤쳐 나오겠지.'라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아 정말……. 전 히비키마냥 동물들과 대화하는 스킬 레벨 낮다구요. 어정쩡하게 했다가 여차하면 골로 가버리니까 걱정 좀 해줬으면 합니다. 그리고 하는 김에 정부의 높으신 분들한테 이 방송 계속해도 되는 건지, 미성년자를 위험에 내던지는게 아닌지 좀 찔러주시면 정말 고마울 거에요."
터무니없는 말을 하면서 소녀는 숲을 헤쳐나가기 시작─ 하려다 다시 카메라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늘 하는 말이지만 제 팬 여러분, 세상에 별의별 취향 다 있는 거 알지만, 저같이 뭔가 좀 이상한 아이돌 팬질 하지 마세요. 세상에 무대 나가는 것보다 야생에서 구르는 일이 훨씬 더 많고, 드레스보다 이런 활동복 더 많이 입고, 노래보다 비명하고 기괴한 환호성 내지르는 이상한 아이돌 팬질 그만 두라니까요?"
그리고는 다시 숲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 방송, 진짜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을 품는 시청자는 비단 나 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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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맨의 마지막 질문에 756프로덕션 사람들은 이렇게 답했다.
"음, 그러니까, 어, 뭐든지 할 줄 아는 사람?" 아마미 하루카
"고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키쿠치 마코토
"같이 놀면 즐거운 사람~" 후타미 아미
"없으면 아쉬운 사람~" 후타미 마미
"가족들하고 대화가 되는 사람!" 가나하 히비키
"부러워요. 어디서든 당당하다고 할까, 자유롭다고 할까……." 하기와라 유키호
"굉장해요! 세일기간 같은 거 모두 꿰뚫고 있고 숙제도 잘 도와줘요!" 타카츠키 야요이
"정말 진지하게 왜 아이돌 하고 있는지 모를 사람?" 미나세 이오리
"종잡을 수 없는 사람…… 같습니다." 키사라기 치하야
"노력하는 아이라고 봐요." 미우라 아즈사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하는 게 제 생각이랍니다." 시죠 타카네
"편하고 편리한 사람." 호시이 미키
"옆에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죠." 아키즈키 리츠코
"옛날부터 정말로 도움이 많이 되는 아이였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오토나시 코토리
"대견한 아이라고 보네." 타카기 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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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고 싶은데요. 일단 아이돌이긴한데 하는 일 보면 이건 무슨 만능잡일꾼 같아요."
「 아이돌이란 뭘까? 」라는 질문에 그 소녀─타카기 세이야 高木 聖夜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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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기 세이야 高木 聖夜
나이 : 17(고2)
키 : 165cm
몸무게 : 52kg
생일 : 12월 26일.
혈액형 : B형
BWH : 미정
취미 : 미정
이미지 컬러 : 은색 (하지만 보통 대놓고 '사실 회색이에요. 다들 알면서 뭘.' 같은 소리를 한다)
어깨 언저리까지 오는 어정쩡한 단발. 머리 관리하기 귀찮기 때문에 자르고 싶다는 말을 하지만 팬들과 사장님의 설득에 내버려두고 있다.
생계형이 아닌 생존형 아이돌. 서바이벌, 야생, 생존, 등산, 낚시 등등 전혀 아이돌스럽지 않은 장소에서 아이돌 영업중.
하는 일이 그런 지라 스스로는 물론 팬과 시청자들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평소의 해탈한 듯 하면서도 시니컬한 말투와 시키면 투덜거리면서도 어지간한 레벨 이상으로 모두 해내기 때문에 그 갭이 세일즈 포인트.
틈날 때마다 765프로덕션 내 다른 아이돌들이 자기보다 훨씬 더 잘한다면서 계속 언급하여 지명도를 올려주는 역할도 하고 있는데, 의식적으로 하는 건 아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해서 그러는 것이다.
시니컬하면서도 따스한, 어딘가 해탈한 듯한 말투로 다른 아이돌을 버프로 밀어주는 특수캐.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친척인 타카기 가문에 맡겨졌다. 즉 사장님들과는 사촌 사이지만, 친척이라고 봐주는 거 없이 험하게 구르고 있기 때문에 동료들 사이에서는 되려 고생한다는 평가. 본인은 먹고살기만 해도 어디냐는 심정인데다가 용돈도 꽤나 많이 받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이돌 동료들을 부를 때 이름으로 부르는데 성을 부르는, 거리를 두는 듯하면서도 거리가 없는 느낌. 프로듀서는 마스터P라고 부른다.
──라는 설정으로 끄적여 봤습니다.
왜 이런 걸 썼냐고 물으신다면 애니마스를 봐서, 라고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연재는 포병과 별의 바다가 끝나고. ……그러니까 계획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이돌 마스터] 저요? 아이돌일걸요? 아마도.
#1. 타카기 세이야라고 합니다. 아이돌입니다. 못 믿겠지만 분류상으로는 일단 그래요.
"어서오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동생 내외가 사고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에 형님과 함께 빈소를 찾았을 때, 그 아이는 어딘가 초연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하였다. 담담하고 차분한 얼굴로 오고가는 객들과 인사를 나누는 그 아이의 얼굴에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나 형님이나 그것을 그 아이가 무정해서 그러는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치 않았다. 그 어느 곳보다도 '사람을 보는 눈'을 필요로 하는 연예계에 종사하는 우리들의 눈은 그 아이의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저건……."
"음. 틀림없어."
닳고 닳은 바위.
늙디 늙은 나무.
깎이고 부러지고 깨지고 꺾이고, 세상 모진 풍파 다 헤쳐나온 끝에 비바람에 순응하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바위와 고목 같았다. 슬퍼하지 않는 게 아니라 어르고 달래고 삭혀서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앳된 소녀이기 때문일까. 눈가가 살짝 부어있는 것을 보니 이제는 맞이해주는 이 하나 없는 집안에서 홀로 울었던 게 분명했다.
예전부터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쉽사리 희로애락들 드러내지 않는 아이였다. 속이 상하면 으레 그래왔다는 것도 동생 내외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그 흔적을 지우려 한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예리한 사람들이나 알 수 있을 만큼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저 나이대에는 쉽게 가질 수 없는 자기절제능력이었다.
그렇다고는해도 이제 겨우 10대 중반에 들어선 소녀이지 않은가. 그런 조카가 앞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갈지를 걱정하는 건 친인척으로서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넌지시 물어봤을 때 돌아온 구체적인 대답에 놀라고 말았다.
"관리인과 경비원이 있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갈 거에요. 봐둔 데가 있어요. 재산은 유산보호신청해뒀습니다. 비용이 조금 비싸긴 하지만 믿을 수 있는 법률회사입니다. 이사비용 빼면 매달 나오는 생활비 조절해서 쓰면 성인이 될 때까지는 충분해요. 사망보험금─이 단어를 언급할 때 그 아이는 잠시 멈칫했다─을 쓰면 대학도 갈 수 있지만, 그러면 바로 취직못할 경우 위험해지니까 대학은 포기할 겁니다. 고등학교 졸업한 후 곧바로 취직할 생각입니다."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이 정도로 구체적인 행동방안이 정해져 있을 줄은 몰랐다. 강철같은 의지와 질풍같은 행동력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않을까.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철두철미한 아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거대하지만 닳고 닳아 잔잔한 여운을 주는 바위와도 같은 그 아이를, 웅장하지만 켜켜이 내려앉은 세월의 무게로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고목과도 같은 그 아이를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동생이 남긴 유일한 혈육이 바위가 천천히 바스러지듯, 고목이 스러지듯 조용히 시간의 흐름에 파뭍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 사무실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아르바이트라고는 했지만 실상은 곤란하지 않도록 눈 닿는 곳에 두고 싶다는 어른의 욕심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권유에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회계랑 법률 자문이랑 문서 작업 정도라면 가능합니다만, 가족 경영으로 주주들에게 비난받으실텐데, 괜찮으신가요?"
나와 형님은 그 대답에 잠시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고는 빈소라는 것도 잊고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요즘 시대에 어떤 여학생이 회계와 법률 자문이 가능하다고 대답할까. 게다가 가족 경영이라니. 애초에 765프로덕션은 주주는커녕 주식상장도 못하는 약소 프로덕션이라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진심이든 농담이든지간에 그 허를 찌르는 대답에 우리는 동생이 정말 터무니없는 아이를 남겨놓고 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찌되었든, 오겠니?"
"학업에 지장이 없는 한도 내에서 노동량에 비례하는 임금 수준이라면요."
물론 그럴 것이라 대답했다. 거기에 말은 안 했지만 생활비 지원 명목으로 좀 더 줄 생각이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그 아이, 타카기 세이야高木 聖夜는 765프로덕션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형님이나 나나 그때는, 세이야가 그렇게 활동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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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5프로덕션은 약소 프로덕션이기 때문에 험난한 방송이라도 일단 일이 들어오면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타카기 사장이나 현재 유일한 프로듀서인 리츠코는 결코 위험한 일은 시키지 않고 있지만, 돌발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다시 말해서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방송은 출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번에 들어온 방송이 바로 그러한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것이었다. 모 유명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마이너 카피한 듯한 이 방송은, 지명도를 얻고 싶어하는 중하위권 아이돌들을 2~3인 1조로 묶은 후, 수영복 차림으로 남쪽 지역 무인도에 풀어놓고 2박 3일동안 주어진 미션을 해결하면 식료품과 텐트 등의 장비를 나누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방송이 유명해진 이유는 A랭크 아이돌 몇 명이 과거 여기에 출연했던 기록이 있기 때문이었다. 소위 스타의 리즈 시절을 보고 싶어하는 팬들에 의해 입소문을 타 이제는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그럭저럭 인지도 있는 방송이 되었다.
그런 방송에서 지원서류를 제출하지도 않았는데 미나세 이오리와 타카츠키 야요이를 지명했던 건 분명 어떠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에 대해 765프로덕션 사람들은 미나세 그룹의 영애와 생계형 아이돌을 대비시켜 시청률을 올려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판단하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그 가정이 정확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다른 오디션은 모두 탈락해서 동생들의 다음 달 급식비가 위험했던 야요이와, 그런 야요이를 내버려둘 수 없으며 자신을 단순히 부잣집 딸로만 여기고 있는 방송국의 태도에 열받은 이오리가 적극적으로 지원했기에 결국 출연하기로 한 것이다.
사장의 조카딸이며 765프로덕션의 잡무 담당인 타카기 세이야가 두 사람과 함께 이 방송에 출연하게 된 것은 순전히 두 사람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아이돌들은 다른 일이 잡혀있었고 유일한 프로듀서인 리츠코가 거기에 묶여 함께갈 수 없었기에, 이래저래 다방면에서 프로덕션을 지탱하고 있던 세이야가 대타를 뛰게 된 것이다. 거기에 방송 특성상 아이돌이나 스탭이 아니면 무인도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점도 작용해서 리츠코는 세이야에게 이번만 아이돌로 출연해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고, 이에 세이야는 평소와 같은 무덤덤한 태도로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PD역시 한 사람 늘어나는 것 쯤이야 허용범위라 판단하고 허락해주었다.
그리하여 무인도에 내던져진 세 사람은 여섯 팀 총 열 다섯 아이돌들과 경쟁하고 협동하면서 미션을 수행하였고, 첫째 날 저녁이 되었을 때 남은 것은 장작과 텐트 뼈대, 그리고 작살 뿐이었다. 다른 팀에 비하면 굉장히 저조한 성적이었다. 이는 비교적 나이가 어린 야요이와 이오리가 체력적 열세에 있기 때문이었으며, 그나마 체력이 있는 세이야가 직접적으로 나서기보다는 두 사람을 지원해주는 형태로만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침낭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응……."
자신들의 키 이상으로 쌓여있는 장작들을 보며 야요이와 이오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무리도 아니었다. 장작만 있을 뿐 불을 피울 수 있는 도구는 얻을 수 없었으니까. 이미 해는 뉘엿뉘엿 서쪽바다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고, 야자수를 볼 수 있는 남쪽의 섬이지만 완벽하게 열대는 아닌 무인도에는 가을의 초입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희미하게 서늘한 공기가 감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스탭들은 그렇게 풀이 죽어있는 수영복 차림의 두 소녀의 모습을 무정하게 찍고만 있을 뿐이었다.
세이야가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그럼 불을 피워볼까."
"……네?"
"무슨 소리하는 거야? 도구가 어디있다고?"
"장작만 있으면 돼."
세이야는 그렇게 말하고는 적당한 크기의 장작을 들어올리더니, 근처 바위에다 내동댕이쳤다. 장작들은 단숨에 몇 조각으로 나뉘어졌다. 아무리 잘 마른 장작이라고는해도 내던진다고 깨지는 물건이 아니었기에, 스탭들은 놀라면서도 노련하게 무난한 원피스 형태의 회색 수영복 차림을 한 소녀가 무심한 표정으로 장작들을 작살내는 장면을 찍기 시작했다. 물론 세이야는 찍든 말든 상관없이 박살난 장작 조각들을 모아 모닥불 형태를 잡아두고는, 넓게 쪼개진 조각에 기다란 나뭇가지를 대고 맹렬하게 비비기 시작했다.
"진짜로 그렇게 불붙이려고 하는 사람 처음 봤어……."
"하면, 붙더라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이오리의 말에 세이야는 그렇게 대답했다. 도대체 언제 그런 걸 실험해본 것일까.
이 시점에서 스탭들은 세이야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과거에도 저렇게 불을 붙이려고 한 아이돌들이 몇 명 정도 있었지만, 5분도 되지 않아 모두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이번에도 저렇게 하다가 곧 포기하리라.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정확히 5분 후에 세이야는 불붙이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그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었다. 주변에 흔한 나무줄기와 나뭇가지로 활을 만든 세이야는 그것을 이용해 훨씬 더 빠르게 나무판을 긁어댔고 약 20분 후에는 연기를 피워냈다. 야요이와 이오리가 모아온 마른 나뭇잎으로 불씨를 살려 모닥불에 불을 붙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그 광경에 스탭들은 경악했다.
"굉장해요! 세이야 언니 대단해요!"
"끈기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어."
"아니, 끈기만으로는 못해, 그런 거……."
이오리가 딴죽을 걸었지만 진심으로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찌되었든 모닥불이 생기자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게 분명했다. 세 사람의 배에서 꼬르륵하고 소리가 났으니까. 카메라가 가까이 있었으니 소리도 녹화되었을 것이 분명했기에 이오리는 투덜거렸고, 야요이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으며, 세이야는 작살을 쥐었다.
"……뭐하려고?"
"먹을 거 잡아오려고."
"……작살로?"
"응.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아니, 야요이. 이건 다녀오세요가 아니라……."
"? 아니라 뭐?"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래도 방금 전 불을 피우던 광경을 눈앞에서 직접 목격했기 때문인지 야요이는 세이야가 정말로 무언가를 잡아올 것이라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이미 해가 진 바다에서 전문적인 도구를 가지지 못한 10대 소녀가 무언가를 잡아올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이오리는 세이야가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무언가 하는 게 훨씬 더 긍정적인 결과를 낼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움직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있으면 부정적인 생각밖에 하지 못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세이야가 빈손으로 돌아올 것이라 예상했다.
그렇기 때문에 약 30분 후, 폭삭 젖은 세이야가 농어 한 마리와 참돔 두 마리에 심지어 광어까지 한 마리 잡아온 시점에서 이오리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스탭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와! 굉장해요! 특가할인 때나 살 수 있는 생선이 잔뜩 있어요! 웃-우우─!"
"작살이 있어서 다행이었어. 히비키라면 맨손으로도 잡아왔겠지만 난 그런 건 못하니까."
"……지금 그걸 잡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굉장해."
스탭들은 진짜로 물고기를 잡으라고 작살을 준 게 아니었다. 보통 여자애들이 대부분인 아이돌이 작살을 쥔다한들 그걸로 무언가를 잡을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기에, 작살은 그저 시청자들의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이야는 그걸 사용해서 물고기를 잡아왔다. 속임수 같은 건 없었다. 그것은 세이야와 동행했던 카메라맨이 찍어온 영상이 증명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세이야는 작살날을 칼날삼아 능숙하게 물고기를 손질한 후 나무 꼬챙이에 꿰어 모닥불 곁에 세웠다. 그리고는 불을 쬐며 생선이 다 익기를 기다리다 문득 떠오른 듯이 물었다.
"물이 있던가?"
"없어요."
"스탭들 옆에 있는 생수를 강탈하고 싶어지는데."
"세, 세이야 언니?! 그런 말 하면 안돼요?!"
"분명 편집될 거야. 그 대사."
야요이와 이오리의 말에 세이야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시선을 돌리더니,
"그럼 코코넛을 따와야겠네."
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물방울을 흩날리며 근처에 있는 야자수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10~12m 정도는 되는 야자수 나무 끝에 올라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있어! 코코넛 맞으면 아픈 정도로 안 끝나!"
자신의 말에 야요이와 이오리는 물론 스탭들까지 멀찍이 떨어지자 세이야는 나무에 매달린 코코넛들을 비틀어 따 바닥으로 떨어뜨렸고, 곧바로 바로 옆 나무로 옮겨가 같은 작업을 반복하였다. 그한 작업을 두어 번 정도 반복한 결과 2박 3일 내내 버틸 수 있는 수준의 코코넛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직접 얻은 것들이니까 아무 문제 없겠죠?"
텐트 뼈대에 야자수잎을 엮어 지붕과 바닥을 만들어 잠자리까지 완성한 후 코코넛으로 목을 축이며 세이야는 그렇게 말했다. 출연하는 아이돌이 직접 식량과 잠자리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버린 방송 사상 초유의 사태에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고 있던 스탭들을, 마치 하루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에 몸을 실은 중년 직장인과도 같은 얼굴로 그런 질문을 던지는 세이야의 모습에 무심코 괜찮다고 대답해버렸다. 미리 선수를 친 세이야는 곧바로 텐트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그 모습에 허겁지겁 카메라맨 하나가 그 뒤를 쫓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밖으로 나왔다.
"잘 건데 뭘 찍어요. 말리지는 않겠는데 어차피 저 자는 거 찍어봤자 방송에 5초도 안 나오고 편집될 테니까 야요이랑 이오리나 찍는 게 훨씬 나을 거에요."
아이돌스럽지 못했지만 옳은 말이었다. 그랬기에 카메라맨은 텐트 밖으로 나왔다. 야요이와 이오리는 모닥불 옆에서 다른 카메라맨을 앞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식량과 물, 잠자리에 불까지 고민하고 있던 문제들이 대부분 해결되었으니 더 이상 걱정할 게 없어서 그런지, 두 사람 다 평범한 예능방송을 녹화중인 아이돌 소녀들의 모습이었다. 그래, 이쪽이 아이돌답지. 카메라맨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른 각도에서 765프로덕션의 두 소녀를 찍기 시작했다. 세이야의 분량인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 세이야의 방송 분량은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그 여파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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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리 언니. 지난 달 결산 이거 맞는 건가요? 여기랑 여기가 좀 이상한데요."
"응? 어디어디? ……진짜네? 어떻게 된 거지? 확인해볼게."
삐리리리.
"네, 765프로덕션입니다. ……그건 계약 위반이잖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분명 계약할 때 저희 측 아이들 분량은 최소……. 무슨 말도 안되는,"
"잠깐만 바꿔주세요. 누구 계약이에요?"
"잠시만. 유키호랑 마코토."
"아, 그놈들인가. 네, 전화 바꿨습니다. ……네. ……네. 뭐, 분량 자르셔도 좋은데 그러면 위약금 물어주셔야 하는 거 아시죠? ……계약서 3페이지 2항 보시면 나와있습니다. ……설마 진짜로 다음에 우리랑 좋은 관계 유지하고 싶으면 얌전히 물러나 같은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당신 그만한 권한 없잖아요? 그쪽 방송국 권력 계통 보니까 당신은 그냥 끄나풀 수준이던데. ……뭐, 그러시다면야 저희는 방송법 위반으로 당신을 찌르면 됩니다. 솔직히 방송국에서 당신 보호해줄 것 같지 않던데요. ……아뇨, 이 계약하고는 별개로 당신 방송 짜둔 거 보니까 검사들한테 넘겨주면 당장 물어뜯을만한 건수가 두 세 개 있어요. 그러니까……."
수화기를 통해 몇가지 법률적 용어들이 오고가는 동안 765프로덕션의 프로듀서인 아카즈키 리츠코는 초조하게 세이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세이야가 수화기를 내려놓자 리츠코가 물었다.
"어떻게 됐어?"
"일단 이번 분량은 괜찮겠지만, 다음 번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일단 찍혔으니까 그리 좋은 취급은 못 받겠죠."
"역시나인가……."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해서……."
"아냐아냐. 네가 없었으면 이번 분량도 못 건졌을 거야. 고마워."
삐리리리.
"네, 765프로덕션입니다. ……네? ……세이야를요?"
"……?"
리츠코의 의문에 회계 시트 정산을 위해 모니터를 바라보던 세이야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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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일은 절대 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765프로덕션 초대 사장인 타카기 준이치로나 현 사장인 타카기 준지로는 물론, 최고참인 오토나시 코토리와 프로듀서인 아카자키 리츠코까지 모두가 동의하는 경영방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방송국에서 온 서바이벌 프로그램 섭외는 고민할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아이돌을 태평양 한가운데 던져놓고 살아돌아오는 법을 찍겠다니. 인근에 구조대를 준비시켜두겠다고는 하지만 그 인근이라는 게 수평선 너머에 있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도구도 고작 손바닥만한 나이프 하나만 쥐어주겠다니. 조난상황이라는 현실성을 위해서라는 게 이유였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렇지만 중견 방송국의 방송 거부 압박과 고정 게스트 권유를 이겨내기에 765프로덕션은 너무나도 약소했다. 결국 그 방송국 어느 프로그램이든 765프로덕션 소속 아이돌 세 명을 6개월 이상 고정 게스트 섭외라는 걸로 세이야는 팔자에도 없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찍게 되었다.
"걱정할 거 없어. 그쪽 언저리라면 얼어죽을 일도 없고, 일단 방송이니까 괜찮은 무인도일테니까. 정 안되겠다 싶으면 뗏목 만들어서 해류타고 오면 될 거야."
"셋찡, 그거 묘하게 사망 플래그 같아."
"……마미, 나 돌아오면……."
"우와우오우오와앗!?!?! 셋찡이 일부러 사망 플래그를 세우고 있다아아!?!"
"게다가 평소보다 묘하게 더 밝아보여! 작화가! 묘사가 왠지 좋아!?!"
"거기 쌍둥이! 불안한 소리 하지마!"
"……뭐, 여튼 다녀오겠습니다."
"어, 아, 응. 조심해서 다녀와."
그리하여 세이야는 평소처럼 소란스러운 동료들의 배웅을 뒤로 하고 태평양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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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녀는 망망대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바다 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싸구려 추리닝 운동복에 구명조끼를 입은 체 말하고 있었다.
"태평양은 분명 넓지만, 그만큼 무인도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라도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배가 침몰해서 탈출한 다음에 해류를 타고 무인도에 도착할 가능성은 의외로 높지요. 그렇다고해서 일부러 비행기에서 떨어뜨리는데서부터 시작할 줄은 몰랐지만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 되었을 법한 소녀는 흔들리는 파도에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몸을 띄우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구명조끼를 끼고 있기 때문에 어지간한 강풍이 불어오지 않는 한 바닷물을 들이킬 가능성은 적습니다. 사실 구명조끼가 없어도 인체는 물에 뜨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몸이 떠오릅니다. 숨을 쉬기는 좀 더 힘들겠지만요. 그러니까 폭풍이 몰아치거나 무언가에 끌려들어가는 게 아니라면 바다에 빠졌을 때는 당황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하여튼 그런 고로 지금 제게 제일 큰 문제는 저체온증입니다. 적도 지방이라 따듯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수온은 언제나 체온보다 낮습니다. 이대로 30분만 있으면 생명에 위험한 지경이 되겠죠. 이건 제가 10대 소녀가 아니라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무인도를 찾아야 합니다. 때마침 저쪽에 섬이 보입니다. 이 절묘한 타이밍은 방송이니까 가능한 것이겠죠. 그렇다고는 해도 과연 30분 안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해봐야겠죠."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횡영으로 천천히 섬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에 횡영은 체력을 보존하기 쉬운 수영법이라고 하거나, 태평양에 식인상어가 많다고 하거나, 혹시라도 구명보트를 타게 된다면 바닷물에 반사되는 햇빛에 타지 않도록 방수시트를 뒤집어 쓰고 있으라는 등의 정보를 전해준다. 아무리 체력이 적게 들어가는 횡영이라고 해도 수영하면서 말하는 건 쉽지 않을 터인데 소녀는 쉴 새 없이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전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해안가에 도착한 소녀는 그제서야 지쳤는지 모래사장 위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춥고, 피곤합니다……. 변온동물은…… 아니지만…… 햇볕으로…… 몸을 데우고…… 움직이겠…… 습니다……."
그렇게 소녀가 가만히 햇볕을 쬐는 동안 나레이션으로 생각되는 남성의 목소리가, 지도와 함께 섬의 위치와 소녀가 가지고 있는 물품 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위치는 적도 근처의 태평양. 도구는 달랑 나이프 하나. 아무리봐도 저녁 나절이 되면 소녀가 울상을 지으며 방송포기를 선언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체온을 회복했으니, 이제 섬을 탐색해서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봐야 합니다. 혹시라도 이곳이 무인도가 아니라면 그것만으로도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간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하지만 이건 방송이니 무인도겠지요. 그렇다면 이 섬에 어떤 쓸만한 것들이 있는지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탐색을 해야하죠."
해안가를 걸으면서 소녀는 해안의 야자수만으로도 생존에는 무리가 없기에 일단 물과 음식은 급하지 않다는 것, 우선 해가 지기 전에 불을 피워야한다는 것과 같은 생존기술적인 이야기를 하더니, 잠시 후에는 태평양의 섬들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 근처 생물종의 분포와 진화론의 발전양상 등의 자연과학적인 지식을 입에 담았다. 그 해박한 지식을 그토록 담담한 표정으로, 그러면서도 결코 지루하지 않게 설명하는 모습은 묘하게 시선을 끌었다.
그 기나긴 나레이션 아닌 나레이션의 마지막은 이 방송이 여러가지 현행 법률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고 있다는, 무서울 정도로 논리적이고 법률적인 강도높은 비판이었다. 어떻게 방송할 각오를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섬을 모조리 둘러본 소녀는 다시 해안가로 돌아와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나뭇가지 비비기였지만 아무래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솔직히, 신발끈으로 활을 만들어서 돌리면 훨씬 더 쉬운데, 꼴에 예능이라고 이렇게 불을 피우라네요. 이쪽은 죽을 맛인데 그놈의 시청률 따위가 뭔지. 애초에 제정신이 아닙니다, 이 방송은."
정말 그랬다. 자기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욕을 하는 출연자나, 그런 장면을 그대로 방송에 내보내는 PD나, 어느 쪽 하나 제정신인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널을 돌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30분 후라는 자막과 함께 마침내 소녀가 비비고 있던 나뭇가지 끝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불이 붙은 것이었다. 불씨를 마른 야자수 섬유줄기로 키워 만들어둔 모닥불에 집어넣자, 이제는 명확한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환호성을 질러도 될 텐데 소녀는 무덤덤한 얼굴로 모닥불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다 카메라를 바라보더니, 곧 귀찮은 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솔직히 야자수가 있는 시점에서 식량과 물은 모두 해결된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게 영 아니꼬운지 다른 식량을 구하라네요. 그냥 편집 짜집기로 상어를 잡았다고 해도 의심하는 사람 얼마 없을 텐데 사람을 귀찮게 합니다. 네, 아쉽게도 이 방송은 연출이 없습니다. 연출을 위해 각본가를 구하는 시점에서 돈이 들어가니까 그냥 그런 거 없이 진행하는 겁니다. 밑바닥 아이돌이라 몸값 싸다고 막 굴리는 거죠."
연출이니 각본가니, 아이돌이 입에 담으면 안될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수면 위로 튀어나오고 있다.
"그래서, 흔하디 흔한 물고기를 잡고 싶지만 아무런 도구가 없어요. 히비키라면 맨손으로도 잡을 텐데 전 아무래도 거기까지는 못합니다. 굶고 싶지는 않으니까 먹을 걸 찾아보기는 할 테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10대 소녀가 이런 무인도에 떨어졌는데 손쉽게 식량을 구할 가능성은 0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코코넛으로 때우고 싶습니다만, 카메라맨이 어떻게든 방송분량을 만들고 싶어하니까 뭐라도 좀 잡아봐야겠네요."
그러더니 그 소녀는 물고기를 마비시키는 독을 가진 덩쿨식물을 빻아 집을 내더니 그걸 얕은 물에 풀어 놓은 후, 긴 나뭇가지 끝에 섬유줄기로 나이프를 묶어 만든 창으로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방송에는 고작 3~5분 밖에 안 나가겠지만, 실제로는 네 다섯 시간은 노력해야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실제로 소녀가 한끼 정도 되는 물고기를 잡았을 때는 석양이 해안을 뒤덮고 있었다.
"늦었네요. 그러고보니까 잠자리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물고기를 잡느라 못 만들었습니다. 코코넛으로 때웠으면 만들었을 텐데. 지나간 일을 후회해봤자 어쩔 수 없고, 무엇보다도 살아남으려면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하니까, '어차피 불이 있고 열대 지방이니까 집은 없어도 돼. 게다가 물고기를 잡았잖아?'라고 생각하기로 하죠."
순간 눈을 의심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 운운한 부분에서 소녀가 굉장히 생동감 넘치는 미소를 지은 것이다. 이 방송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웃은 것 같았다. 정작 본인은 다시 무덤덤한 표정으로 전통적인 방식이라며 물고기를 커다란 나뭇잎에 싸 모닥불에 달군 돌과 함께 모래에 파뭍고 있었다. 그게 끝나자 모닥불 근처에 나뭇가지와 야자수잎으로 잠자리를 만들고는 그대로 드러누워 완전히 붉게 물든 해안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멍하니 저녁노을을 보고 있던 소녀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카메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 이렇게 시간이 남으면 다른 아이돌들은 자기 노래나 춤을 보여주면서 인지도를 올리죠. 하지만 전 그런 거 없습니다. 애초에 땜빵 멤버……도 아니고 일반 데스크워커인데다가, 다른 아이돌들이 나오기 전에 테스트용으로 이 방송 나오는 거니까요. 솔직히 하루 종일 움직여서 노래고 춤이고 나발이고……, 뭐 막말해도 알아서 편집해주겠죠. 그러니까 노래고 춤이고 나발이고 지쳐서 하라고 해도 못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완전히 드러누워버린다. 카메라가 돌고 있으면 어떻게든 미소를 만드는 다른 아이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솔직히 이제는 아이돌인지도 의심스럽다. 그래도 재밌기에 채널을 돌릴 생각은 없지만.
그때 소녀가 무언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우는 것이라면 쉬울지 모르겠지만─♪ 슬픔에는 휩쓸리지 않아─♩"
처음 듣는 노래였다. 하지만 굉장히 좋은 노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소녀의 노래인 걸까. 하지만 방금 전에 자기 노래는 없다고 했는데.
"……? 아, 이 노래요? 파랑새라고 우리 프로덕션에 키사라기 치하야라는 애 노래인데, 진짜 좋더라구요. 이 방송 끝나고 시간 되시는 분들은 근처 음반 가게에서 파는지 알아보세요. 네, 광고에요. 어차피 계약서에 자기 PR이나 소속사 광고해도 좋다고 했으니까 막 할 거에요."
그러면서 이번에는 좀 더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좋은 노래다. 있다가 편의점 갈 때 한 번 들러봐야지. 그런데 방송에서 대놓고 계약서 같은 걸 말해도 되는 걸까. 걱정스럽긴 하지만 묘하게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방송은 계속 진행되어 소녀가 대나무와 나무섬유줄기로 뗏목을 만들고, 야자수잎으로 돛을 만들어 섬에서 탈출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제 슬슬 끝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시계도 슬슬 그즈음이었다. 지금껏 축적한 식량과 물을 코코넛 껍질에 담아 뗏목에 묶고 키를 겸하는 노로 파도를 가르며 소녀는 말했다.
"사실 구조신호로 불을 피워두는 게 제일 안전합니다. 지나가던 구조선이나 비행기가 연기를 볼 확률이 높거든요. 이 방법은 정말로 구조될 희망이 없다고 생각될 때 쓰시길 바랍니다. 여차하면 태평양 한가운데서 해류를 타고 돌다가 아사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일사병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저도 그냥 기다리고 싶었습니다만, 이래야 시청률이 나온다고 뗏목을 만들어 탈출하라고 하더군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찍는다면서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이 방송 아무래도 오래갈 것 같지 않습니다. 뭐, 저야 출연료만 받고, 소속사 애들 고정 게스트 자리만 얻으면 되니까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제는 그 냉소적인 말투가 묘하게 정겹게 느껴진다. 묘한 매력이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수평선 너머로 배 한 척이 보이기 시작했다. 설정상 지나가는 배겠지만 분명 대기하고 있던 방송국 소속 선박일 것이다.
"이쯤되면 시청자 여러분들도 잘 알겠죠. 저거 방송국 선박입니다. 꽤 크네요. 저 정도 크기라면 화장실과 욕실 같은 시설도 있을 겁니다. 저기 타고 있는 사람들은 제가 무인도에서 고생하는 동안 선상 파티 같은 거나 즐기고 있었을 거에요. 뭐, 산다는 게 그런 거죠. 내가 고생하는 동안 있는 사람들은 여유롭게 사는 거죠. 세상 참……."
무심코 웃고 말았다. 시청자의 생각을 거침없이 대변한다. 정말 질리지 않는 소녀였다.
스탭롤과 협찬 광고가 올라오는 가운데 소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방송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요 PD님. 이 방송 아무리봐도 안될 것 같아요. 어떤 소속사가 아이돌을 이런 정신나간 방송에 던져넣으려고 하겠어요? 그리고 어떤 아이돌이 이런 오지에 떨어지려고 하겠어요? 아무래도 안 될 거에요, 이 방송. ……네? 이름이요? 처음에 말 안했나요? ……아, 안했지. 시청자 여러분. 제 이름은 타카기 세이야입니다. 잊어버리셔도 상관없어요. 아마 이게 마지막 방송출연일테니까요. 그렇게 방송국이랑 PD를 깠는데 설마 다시 부를까."
그 소녀, 타카기 세이야의 독백으로 방송은 끝이 났다. 아쉽다. 좀 더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인터넷을 돌고 있자니 방금 전 방송을 주제로 몇 가지 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전부다 그 방송이 계속되기를 바란다는 글이었다. 방송국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이미 계속해달라는 글이 게시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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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쓰잘데기없이 모인 시청자들 때문에 정규방송이 되버려서,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 오지에 나가서 살아돌아오는 정신나간 짓을 하고 있지요. 안 나갈 때는 국내에서 등산이랑 낚시랑, 기계공작도 하고, 농사도 도왔고, 또 뭐했더라……."
"춤이랑 노래 빼고는 거의 다 했지."
"뭐, 그래요. 애초에 이름만 아이돌일 뿐이니까요."
이오리의 설명에 세이야는 그렇게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넌 그걸로 괜찮은 거니?"
"괜찮아요. 솔직히 시청률이니 뭐니해서 안해도 될짓거리를 하라고 하면 그 방송국이랑 PD, 검사들한테 찔러서 매장시켜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고정 게스트 자리가 위험해지니까요."
"……."
"정말 괜찮으니까 마스터P는 다른 애들 프로듀스에 집중해주세요."
"……마스터P?"
"프로듀서니까요. 리츠코 언니는 로드P라고 했었는데 그냥 이름으로 부르라고해서 좀 아쉬웠어요."
"호칭은 별 상관없는데……. 정말 괜찮겠어?"
"네. 그러니까 얼른 진짜 마스터P가 되서 다른 애들을 톱 아이돌로 키우세요. 그래서 765프로덕션이 커지면 전 무사히 데스크워커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아, 응. 노력할게."
"영 미덥지 못한데……."
"그런 말 하지마 이오리. 신입사원은 언제나 미덥지 못한 법이니까."
"너 은근히 아무렇지도 않게 독설을 내뱉는구나……."
"이게 세일즈 포인트니까요. 왜 팔리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다른 애들이 나보다 훨씬 나은데 저 같은 거 팬질하고 있는 거 보면 제 팬들은 다들 제정신이 아니에요."
아이돌이 팬을 디스한다. 다른 아이돌이었다면 순식간에 인기를 잃고 바닥으로 떨어질 대사건만, 세이야가 하면 어째 다들 납득하고 넘어가버린다. 확실히 일반 아이돌의 궤도를 아득히 벗어난 존재였다.
"어찌되었든 잘 부탁드려요, 마스터P."
"그래. 잘 부탁해, 세이야."
그것이 765프로덕션의 신인 프로듀서와 일단은 아이돌인 타카기 세이야의 첫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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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창게의 세이야는 그야말로 천원돌파도 할 것 같지만 원래 제가 생각하던 세이야의 이미지는 위와 같습니다. 여튼 정식 연재본[?]는 애니마스를 기준으로 나아갈 예정입니다.
- 개인적으로 세이야를 제일 잘 써주신 분은 키루찌 님을 뽑습니다. 다들 생존에 집중할 때 아이돌스러운 모습과 그 나이대 소녀다운 심리를 묘사해주셔서 높은 점수를 드렸습니다. 참고로 부모님 비행기 사고는 닥터회색 님이 넣으신 설정이고, 원래는 구체적으로 언급할 예정이 없어 위와 같이 써두었습니다.
- 결국 썼습니다. 이걸로 세 개로군요. 스트라이크 위치스에 IS에 이제는 아이마스까지. 뭐가 되었든 다음 편은 이번 주 안에……, 나오려나……. 언제나 그렇듯 기대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아이돌 마스터] 저요? 아이돌일걸요? 아마도.
#2. 사진을 다시 찍어봅시다. 그러니까 큰아버지, 그 사진 못 써먹는다니까요.
챙!
맑
은 소리와 함께 소년이 잡고 있던 도가 바닥을 굴렀다. 후들거리는 오른손을 다잡을 생각도 못한 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본 듯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소년의 모습에, 소녀는 자신의 도를 칼집으로 밀어넣었다. 스르릉. 찰칵. 맑은 쇳소리를
울리며 빨려들어가는 듯한 깔끔한 동작은 소녀의 경지가 상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여인의 검에도 닿지 못함을 깨달으셨는지요?"
그말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소년이 이를 갈며 외쳤다.
"이익, 너! 너! 아버님께 말씀드릴 것이다!"
"
이런이런, 영주님께서는 남아일언중천금을 지키시는 훌륭하신 분. 여인에게 졌다하여 화를 내시는 남자답지 못한 도련님의 말씀에
기울어지실 분이 아니십니다. 설마 도련님께서는 영주님께서 그러한 소인배같은 분이라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이, 아, 크으으윽……!"
분한 듯 이를 가는 미래의 영주님의 모습에도 소녀는 그게 무슨 위협이라도 되느냐는 듯한 얼굴로 코웃음치며 대답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오늘부터 도련님의 검술스승이 된 세이야成刃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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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야 팬 스레 - 세이야가 대하 드라마 출연이라니(4)
412: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드라마 끝난지 아직 30분도 안 지났는데 벌써 4번째 스레 절반 가까이 왔다
413: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3천을 30분만에 채우다니. 뭐야, 이 화력 무서워. F랭크 아이돌 화력이 아니잖아.
414: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앞에 것들은 죄다 세이야 하아하아 하는 게 절반 넘지 않았냐
415:
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세이야쨔응하아하아매도해줘욕해줘디스해줘세이야쨔응하아하아매도해줘욕해줘디스해줘세이야쨔응하아하아매도해줘욕해줘디스해줘세이야쨔응하아하아매도해
줘욕해줘디스해줘세이야쨔응하아하아매도해줘욕해줘디스해줘세이야쨔응하아하아매도해줘욕해줘디스해줘
416: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슬슬 내용가지고 얘기해볼까. 나 세이야 나온다고 했을 때 타임슬립 같은 걸로 에도시대 떨어져서 생존해오는 그런 건 줄 알았다
417: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415 정신차려라.
418: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416 동감
419: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416 여기에 또다른 내가 있다
420: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연기 꽤 하던데?
421: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연기 미묘하지 않았나?
422: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생각보다 연기 잘해서 놀랐다.
423: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20, 21 호평과 비평이 교차할 때 이야기가 시작된다
424: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세이야와 설교왕님의 크로스인가.
425: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그쪽은 세이야 크로스물 스레로 가라.
426: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아까 누가 그러지 않았냐, 세이야 검도 배웠냐고?
427: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배운 것 같던데? 마지막에 칼 넣을 때랑 자세 같은 거 보니까 자세 잡혀있던데. 대역도 없고 카메라도 그대로 찍고 있었잖아.
428: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배우 속성 교육 그런 거로 가르친 거 아냐?
429: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그런 거 하면 티가 난다. 뭣보다 F랭크 아이돌한테는 그런 거 해주지도 않아.
430: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세상은 예산이 지배하니까. 생각해보니까 세이야 F랭크인데 무술액션까지 하잖아? 감독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 아냐?
431: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난 세이야의 미소를 봤으니까 그걸로 만족.
432: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하긴 서바이벌에서는 맨날 투덜거리지. 웃으면 냉소뿐이고. 감독님 GJ.
433: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누가 벌써 세이야 나오는 장면만 편집해서 올렸다 <링크>
434: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433 보러 간다
435: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433 워프
436: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433 타디스 타고 온다
437: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433 하이퍼스페이스 점프
438: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평범하게 어디로든지 문으로 다녀와라.
439: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다들 링크탔냐. 5분째 아무 글도 없어.
440: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돌아왔다. 대역없이 찍었다고 하길래 엉성할 줄 알았는데 소드마스터였다.
441: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내찌르고 비틀어서 튕겨내다니, 저거 실제로 가능한 거였냐.
442: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귀환. 검도 처음 시작한 여고생인 줄 알았는데 소드마스터였어.
443: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442 브라더
444: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중간에 저거 아무리봐도 NG나올 장면이었는데 무사히 넘어갔다. 오오 세이야 오오
445: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어디?
446: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링크 2분 10초에서 도련님 넘어지면서 찌르는 거 막는 거. 여차했으면 중상인데 그것도 막았고 애 넘어지는 것도 막았다.
447: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상대는 아역이니까 넘어지면 애드립이 안되지. 것보다 다시 보니까 진짜 위험한 장면인데.
448: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항상 하는 말이지만 왜 세이야 F랭크인지 이해가 안된다.
449:타카기 세이야: >>448 항상 하는 말이지만 왜 세이야 팬질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450: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448 동감
451: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449 여기 이단이 있다.
잠깐만.
452: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본인인가!
453: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본인이 왔다!
454: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당황하지 마라. 이건 공명의 함정이다. 세이야가 이런 데 올 리가 없잖아.
455:타카기 세이야: 본인이다. 블로그에도 여기 올렸다. <링크>
456: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왜!!!!!!!!!!!!!!!!!!!!!!1111
457: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왜!!!!!!!!!!!!!!!!!!!!!!1111
458: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왜!!!!!!!!!!!!!!!!!!!!!!1111
459: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왜!!!!!!!!!!!!!!!!!!!!!!1111
460: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왜!!!!!!!!!!!!!!!!!!!!!!1111
461:타카기 세이야: 놀라는 반응들이 왜 다들 이 모양이야. 단역이래도 연기한 거 반응이 궁금해서 검색하다 들어왔는데. 일단 아이돌이니까.
462: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그건 그렇다치고 일단 팬들 모인 스레인데 무례한 거 아니냐. 반말이라니.
463: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팬들을 생각하는 마음 같은 거 없나보네. 연예인이라고 막 나가네.
464:타카기 세이야: 새삼스럽게 뭘. 카메라 돌아가나 안 돌아가나 디스하는 건 똑같은데. 다른 애들 하는 것처럼 하면 싫어할 거면서 따지기는.
465: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이거야!!!! 이걸 원했어!!! 역시나 우리의 아이돌!!!!
466: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이래야 우리의 아이돌이지!!!
467: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462, 463 잘했다 네놈들. 훌륭한 낚시였어.
468: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어.
469: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이 톡톡 튀는 맛!
470:타카기 세이야: 역시 나 같은 거 팬질하는 인간들 제정신이 아니었나. 여튼 내일 등산하러 가니까 이만 간다.
471: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왠 등산?
472:타카기 세이야: XX산인가 다큐 찍으러. 아이돌이 할 짓이 아닌 것 같은데 회사 상황이 영 안 좋으니까. 그러니까 765프로덕션 상품 많이 좀 사주세요. 아니, 사라. 꼭 사라. 두 번 사라.
473: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XX산 거기 엄청 험한 데잖아. 진짜 아이돌이 갈 곳이 아닌데.
474: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세이야니까 괜찮지 않을까.
475: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뭐가 되었든 상품 광고는 하고 가는군. 세이야 무서운 아이!
476: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하지만 그 점이 매력이지.
477: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여튼 본인에게 저격당했으니까 스레 옮길까.
478: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다른 애들도 아니고 세이야니까 안 옮겨도 되겠지만 그래서는!
479: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우리들의 근성을!
480: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부정하는 것이다!
481: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뭐야 이 사람들 무서워
482: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일단 스레 새로 팠다. [본인을 피해 만드는 팬 디스 아이돌 스레 1]
483: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482 이동할 것을 강요받고 있는 거다!
484: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482 이러면 이동할 수 밖에 없잖아! 너도! 나도!
485:타카기 세이야: 아, 말하는 거 잊었는데, 나 4화 뒤에 죽어. 단역이라.
486: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스레가 닫히고 3시간이나 지나서야 그런 중요 정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뿌리고 가는 너란 아이돌은 정말!
487: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이 맛에 우리가 팬질을 합니다.
*****
"밖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고, 저는 폐산장에서 비를 피하고 있습니다."
번쩍. 콰르르릉! 섬광과 굉음이 울려펴졌건만 그 소녀는 바깥 상황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
누가 보면 추리물이나 호러물의 시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그냥 흔해빠진 케이블 채널 등산 다큐멘터리입니다.
하산하는 길에 폭우로 길이 끊어지고, 같이 있던 촬영팀과도 떨어져버렸습니다. 심각하게 위험한 상황이기는 한데, 지금 여러분들은
따듯한 방구석 소파나 어디나 하여튼 편하게 안거나 드러누워서 바보상자에 나오고 있는 저를 바라고 계시겠죠. 몇몇 분들은 옆에
컴퓨터도 놓고 게시판을 불태워가고 있을 것 같군요."
덜컹덜컹. 두드드드드. 몰아치는 장대비가 썩어부스러져가는 지붕과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제법 건장한 사내들도 움찔거릴 광경이었지만 소녀는 시큰둥한 표정을 바꾸지 않은 체
작디작은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져넣었다. 설마하니 이 폭풍우 속에서 야생에서처럼 불을 피운 것일까.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이 불은 라이터로 붙인 겁니다. 그 정신나간 서바이벌 방송도 아닌데 뭐하러 고생하면서 불 피우겠어요? 그러니까
산에 가시는 분들은 라이터든 성냥이든 물에 젖지 않도록 비닐로 싸서 보관해 가방 구석에 넣어두는 게 좋습니다."
그
런 말 해도 되는 거냐, 라고 묻고 싶지만 정작 발언자는 '뭔가 방송하기 껄끄럽다 싶으면 PD가 알아서 편집하겠죠.'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런 투덜거림까지 다 방송하고 있다는 걸 알면 저 소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소녀가 순간
멈칫하더니 고개를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야생동물들이 무언가를 느꼈을 때 귓가를 쫑긋거리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소녀는 곧바로 잽싸게 가방을 챙겨일어서 폭우가 몰아치는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상황이 좋지 않네요. 곧 무너질 것 같습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괜찮은 바위 밑을 찾았어야 했는데 마음이 급해서 눈에 보이는데로 들어온 게 잘못이었습니다."
흔
들리는 화면 너머로 귀찮게 되었다는 듯한 소녀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우르르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멈춘 카메라 너머로 산장이었던 잔해물들이 보였다. 그 모습에 소녀가 낙담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들려온 건 작은 한숨 뿐이었다.
곧바로 카메라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동하는 것 같았다.
"등산복은 대체적으로 방수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체온을 빼앗긴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합니다. 제일 좋은
건 동굴이고, 다음으로 커다란 바위 밑, 마지막으로 잎이 우거진 나무 아래입니다. 어디든 적당하다 싶으면 들어가면 됩니다. 뭐,
지금 같은 상황에 그런 곳에 들어가면 야생동물들이 먼저 진을 치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냅다 쳐들어가서 죽으나 비 맞다가
저체온증으로 죽으나 마찬가지니 이왕이면 생존확률이 높은 쪽에 거는 게 낫겠지요. ……등산 다큐는 어디로가고 조난 다큐가 되버렸는지
모르겠군요."
투덜투덜거리면서도 소녀는 묵묵히 폭풍이 몰아치는 어두운 산길을 거침없이 헤쳐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꽤 커다란 나무둥치 밑에 자리를 잡은 소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느 새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적당한 벽을 만들고 불까지
피워놓고 있었다. 꽤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빗물이 새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무난하기
비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0분 정도 방풍벽을 만들고……, 불을 피운다고 난리를 쳤더니…… 피곤하네요……. 뭐,
이렇게까지 해놨으니까……. 이제 한숨 자도 얼어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1분 뒤에 광고 하나 나오고 대충
마무리지으면서 방송 끝날 거에요. 나머지 분량은 대충 때우겠죠……. 솔직히 이 상황 방송 분량 잡아도 10분도 안 나올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일단 전 자겠습니다……."
소녀가 말한대로 곧바로 광고가 지나가고, 소녀와 제작진이 모두 무사히
산을 내려왔다는 것과 함께 방송은 끝이 났다. 그 소녀가 말했던 조난 장면은 약 15분 정도였을까. 하지만 그 시간이야말로
진국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
이오리의 투정과 함께 있는 다른
아이돌들─후타미 아미, 후타미 마미, 그리고 타카츠키 야요이의 말상대를 하며 프로듀서는 살짝 찔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사무실
문고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불이 꺼진 사무실 안에서 침통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고 있는 코토리의 뒷모습을 본 순간 멈칫했다.
"네. ……네. 그럼 다음 기회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찰칵. 수화기가 내려가고 형용할 수 없는 잠시 감돌았다.
"어, 오토나시 씨. 혹시 오디션은……."
"……네. 전멸입니다."
찰칵. 이번에는 야요이가 사무실 불을 켜는 소리였다.
"납득 못해! 어째서 이 미나세 이오리를 뽑지 않는 거야?!"
"그런 말 해도 뽑는 쪽은 저쪽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흥. 보는 눈이 없는 걸 거야. ……아니면 누군가가 엉터리라서라던가."
"……남탓하지 마라."
이오리의 투정에 프로듀서는 살짝 찔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고, TV 앞 소파에 누군가가 누워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세이야구나."
회
사에 타카기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둘이나 되기에 본의 아니게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서로가 그걸 신경을 쓴 적은 없었다. 애초에
세이야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모두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고, 자신을 어떻게 부르든 별 신경쓰지 않는 소녀였으니까.
어
찌되었든 세이야는 누워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고 있다고 해야할까. 하긴, 폭풍우가 몰아치는 산에서 내려온 게 바로 엊그제다.
말이 내려왔다지 들고 있던 카메라에 찍힌 장면들을 보면 거의 조난상황에서 생환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 고생을 했으면 하루쯤
푹 쉬어도 뭐라 하는 이가 없을 터인데 세이야는 오전 중에 회사에 와서는 오후 중에 밀려있던 잡무─세이야는 이것이 자신의
본업이라고 말한다─를 해치워놓고 저녁나절에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코토리가 사무실 불을 꺼뒀던 건 침통한 분위기를 묘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 소녀를 위한 배려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렇긴 하지만…….
"침낭은 어디서 가져온 거지……."
"협찬받았던 물건입니다."
"어, 깼어?"
"방금 전에요."
프
로듀서의 물음에 세이야는 여전히 피곤한 듯한 음색으로 그렇게 대답하며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마치 주일 내내 야근과 추가업무로
녹초가 되어 주말 늦게 일어난 중년 아저씨 같았다. 문제는 그게 어느 정도 맞는 표현이라는 것이었다. 서바이벌 출연을 대가로 받은
고정 게스트 세 자리를 765프로덕션 아이돌들이 시간에 맞춰 돌아가며 출연하는 걸 제외하면 모두가 이번 달 내내 모든 오디션에서
떨어진 상황에서 그나마 제대로 계약을 맺고 일을 나가는 건 세이야 뿐이었으니 비슷하다면 비슷하다 할 수 있었다.
꿈틀거리며 일어나 침낭에서 기어나온 세이야는 능숙한 솜씨로 침낭을 갈무리해 소파 한켠에 밀어놓은 후 물었다.
"오디션 다 떨어진 건가요, 마스터P?"
"……응."
"이해가 잘 안 가는데요. 사고라도 치지 않는 이상 이렇게 떨어질 리가 없을 텐데요. 하다못해 이오리는 쉽사리 떨어뜨리기도 힘들 텐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니까."
"저기, 그거라면 혹시……."
두 사람의 의문을 해결해준 것은 코토리가 건네준 사진다발이었다. 선재宣材사진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책상 위에 펼쳐진 사진들을 본 순간, 두 사람은 말을 잃었다.
"이게 선재사진……?"
"응? 왜 그래, 오빠?"
"아니, 이거, 선재사진이지?"
"응. 맞아."
"지금까지 이런 걸 계속 보냈단 말야?!"
넘
어질 것 같은 하루카, 완벽하게 굳어있는 유키호, 발레 자세의 타카네, 마릴린 먼로와 같은 아즈사, 전신복을 입은 아미 마미
쌍둥이 등등, 전부다 도저히 선재용 사진이라고 볼 수 없는 것들 뿐이었다. 그렇기에 프로듀서의 외침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문제는
이것이 사장의 마음에 들었다는 사실이었다.
"큰아버지……."
모 유명 게임 제작사의 공식 답변 글자 그림과도 같은 포즈로 눈가를 가렸던 세이야는 작은 한숨을 내쉰 후, 평소처럼 어딘가 해탈한 듯 하면서도 냉소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다시 찍어야겠네요."
"역시 그렇지?"
"연예인들 장난사진 같은 사진을 선재사진으로 쓸 수는 없으니까요."
"사장님은 무진장 좋아하시던데 그래도 돼?"
"큰아버지한테는 설교해둘 테니까 괜찮아."
"뭐 그렇다면야. ……어? 설교?"
마
미가 되물어 왔지만 세이야는 이미 책상 앞에 앉아 수첩을 뒤지며 알고 있는 카메라맨의 연락처를 찾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프로듀서는 다른 아이돌들의 스케줄을 확인해보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번 달에 스케줄을 확인해야하는 건 고작 네 사람뿐이지
않던가. 뭘 어떻게 하든지간에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자유롭게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는 말만 놓고 보면 좋은
일이지만, 그게 아이돌의 시간표라고 한다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노력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 프로듀서의 귓가에 리츠코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저기, 문 좀 열어줄래─?"
"아, 네!"
가장 먼저 달려나간
야요이가 문을 열자 리츠코가 커다란 행거를 밀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걸려 있는 것은 지난 번에 큰 돈을 들여 만든 맞춤 무대
의상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멋진 옷을 입고 무대에 서는 거구나.' 하는 감개무량한 기분이 들 법한 의상들이었다. 하지만
그 의상을 본 순간 세이야의 표정이 굳었다.
"맙소사……."
"왜, 뭐야, 뭔데? 왜 보자마자 그런 반응인데?"
"리츠코 언니, 그 의상 그때 얼마라고 했었죠?"
"이거? 분명 XXX정도였나? 뭐, 회사 자금 거의 다 썼……는데……. 왜?"
대답을 듣자마자 회계 장부를 뒤적이는 세이야의 모습에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리츠코가 질문을 던졌고, 장부에 정신이 팔린 세이야 대신 대답한 것은 프로듀서였다.
"아무래도 선재사진을 다시 찍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네? 어째서요? 찍은 지 한 달도 안된 사진들이잖아요?"
"이걸 봐봐."
"……확실히 이게 최고라고 할 수는 없지만서도……."
"최고가 아니다 정도가 아니에요. 저건 아무리봐도 선재용이 아니라구요. 정말 큰아버지들 센스는 두 분 다……."
"거봐. 세이야도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딸을 시집보내는 마음으로 새롭게……."
"딸이라뇨! 아직 그런 나이 아니거든요?"
"아니, 그러니까……."
"간당간당하네요. 열두 명 사진 찍으려고 하면 간당간당해요."
견적이 나왔는지 세이야는 장부를 덮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가, 하고 고민하던 프로듀서가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열두 명? 너는?"
"……? 절 왜 찍나요?"
"아니, 아이돌이잖아, 너도."
"……아."
"아, 가 아니지 아, 가."
"하지만 마스터P. 제가 하는 일들은 아이돌 영업하고는 백만 광년 정도 떨어져 있는데요."
"그래도 아이돌이잖아."
"뭐, 일단은, 그렇네요."
"게다가 저기 의상 열세 벌이잖아. 네 것도 있다고."
"……아아, 맞다."
765에서 아이돌이라는 자각이 제일 부족한 건 아마 세이야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이들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런데 저까지 끼면 예산이 부족해지는데요?"
"음……."
"아, 지난 번에 들어온 일주일짜리 록키산맥 서바이벌 하고 오면 자금이 생길 것 같기는 하네요."
"릿짱! 셋찡이 뭔가 무서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어!"
"잠깐, 세이야! 그러지 마! 안 그래도 될 거야! 고정 게스트 자리 있으니까 거기서 나오는 출연료 합치면 되니까!"
"합쳐도 부족해요. ……이참에 작정하고 남극 다큐팀하고 한 번 교섭을 해봐야 하나. 이오리. 미나세 그룹하고 교섭자리 좀 만들어줘."
"……파파랑 오라버니들 힘을 빌리려는 거야?"
"아니, 자리만 만들어주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오오, 셋찡이 권력과 힘을 합치려고 해!"
"우리는 지금 전설의 시작점을 보고 있는 것인가!"
"거기 쌍둥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그렇게 한바탕 폭풍같은 회의가 지나가고, 결국 회사자금 여유분을 총동원해서 사진을 다시 찍는다는 결정이 나오고서야 사무실은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까 지난 번에 받은 카메라 있지 않아?"
"……어, 그러 네."
이오리의 물음에 세이야는 잠시 책상 아래를 뒤지더니 정규 카메라맨들이 들고 다니는 거대한 카메라를 꺼냈다. 대형 보온병만한 엄청나게 커다란 렌즈까지 달려있는 무시무시한 물건이었다.
"오오, 셋찡! 카메라맨 같아!"
"찍어줘! 찍어줘!"
찰칵. 찰칵.
""진짜 찍었다?!""
"디카니까. 필름 나가는 것도 아니니까."
"에에, 그래도 뭔가 포즈 같은 거 취하고 싶었는데~"
"맞아맞아!"
"어차피 편하게 찍는 사진이니까 그냥 찍어도,"
찰칵.
"괜찮, 뭐야, 찍은 거야?"
"응."
"뭔가 말이라도 하고 찍어!"
"어라, 사진 찍으시, 와아! 카메라 굉장히 크네요!"
찰칵.
"헤?"
"음, 협찬으로 받은 물건치고는 그럭저럭 괜찮네, 이 카메라."
"벌써 찍으신 건가요?"
"응."
"협찬이면 거의 공짜로 받은 거니까 그럭저럭 같은 단어 쓰지마."
"이미 방송에서 그럭저럭이라고 했으니까 괜찮아."
"……사진이나 보여줘. 어떻게 나왔는지는 보고 싶으니까."
"저도 보고 싶어요."
반
쯤 포기한 듯한 이오리와 살짝 기대한 듯한 얼굴로 타박타박 다가오는 야요이, 그리고 어느 새 등 뒤에서 다가온 쌍둥이들에게
둘러쌓인 세이야는 시험삼아 찍은 거라 엉망이니 곧 지울 거라며 별다른 저항없이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오오……."
"셋찡 카메라 공부도 했어?"
"시험삼아 조금."
"시험삼아 조금 한 수준으로 이렇게는 안 나와."
"이렇게 잘 나온 사진 보는 건 오랜만이에요~"
활기차고 유쾌한 아미와 마미. 세련되면서도 자연스럽게 귀여운 이오리. 밝은 미소와 빛나는 눈동자가 매력적인 야요이. 사진 속의 소녀들은 각자의 매력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
"……굉장하다. 진짜 잘 나왔어."
"프로듀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세이야 언니 대단해요."
"음, 세이야. 혹시 선재사진 한 번 찍어볼래?"
프로듀서 곁에서 사진을 본 리츠코가 그렇게 묻자 세이야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대답했다.
"찍어보기야 하겠지만, 별로 기대하지는 말아주세요. 그렇게 좋은 건 안 나올 테니까. 아미, 마미. 도와줘."
""예스 캡틴!""
그
리하여 잠시 후, 화이트보드가 걸려있던 사무실 한 켠에 흰색 전지로 배경삼고 비닐우산을 반사판으로 삼은 간이 스튜디오가
완성되었다. 별다른 의상이 없었기에 일단은 지금 입고 있는 옷 그대로 찍기로 하였다. 결과는 예상 외, 아니 어찌보면
예상대로였다.
"……그냥 이대로 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어때 리츠코?"
"그러게요. 이 정도라면 굳이 스튜디오까지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그래도 프로가 찍은 사진에 비하면 한참 멀었어요. 그리고 이런 빈약한 사진 제출하면 자기네들을 뭐로 아느니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이것들은 그냥 개인소장만 하는 게 나을 거에요."
이
미 예약도 잡아버렸고 말이죠. 그렇게 말하며 세이야는 카메라를 정리했고, 아미와 마미, 그리고 야요이는 간이 스튜디오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련의 작업들이 모두 끝나자 세이야는 소파 구석에 밀어두었던 침낭을 들고는 구석 소파로 향하며 말했다.
"그럼 전 조금만 더 잘게요. "
"아, 응."
"에에, 셋찡 놀자~ 놀자아~"
"맞아맞아. 오늘 미라보레아스 잡는 거 도와준다고 해놓고서는~"
"얘들이, 세이야는 계속 일했으니까 쉬게 놔 둬."
""부우~ 릿짱 짠돌이~""
"누가 짠돌이야!"
"진정해 리츠코. 그리고 너희들도 장난 그만 치고."
""네에~""
꾸물꾸물 기어들어간 침낭 속에서 천천히 멀어져가는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이야는 다시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이러니저러니해도 역시 아직은 아이들인가.
분
장에 가까운 화장을 하질 않나, 가슴에 공을 잔뜩 집어넣지를 않나,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에 슬릿까지 넣지를 않나. 물론 그렇게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면서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게 그 나이대 아이들이니까 혼내지는 않았다. 게다가 원래 그렇게 컨셉을 잡아줘야하는
프로듀서가 초보나 다름없으니, 이건 내 책임이기도 하다.
그래도 모두 다 무사히 찍을 수 있었다. 다만 리츠코는 뭔가
불만이 남은 듯한 얼굴이었다. 왜 그런가 물어보니 세이야가 찍은 사진과 비슷하다나. 사진의 완성도 같은 건 물론 비교할 수
없었지만 구도나 분위기 같은 건 별 차이가 없어서 그쪽을 그대로 썼어도 되지 않았나 하는 고민인 듯 했다. 예산을 생각해야하니
복잡한 심정이겠지.그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기에 다음에는 그러도록 해보자고 하고 넘겼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개인사진 촬영 최대의 난관은 세이야였다. 물론 사고를 쳤다거나 이상한 구도를 잡은 건 아니었다. 문제는 어떤 컨셉을 잡던지 간에
그럭저럭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남유럽 해안가를 배경으로 하면 좋을 것 같은 새하얀 원피스도, 힙합 스타일의 펑퍼짐한 후드티도,
남성적인 정장 스타일도, 심지어 인형옷까지 모두 사진을 찍으면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한 사람 씩
여러 복장을 추천하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인형놀이 하듯 온갖 의상을 입혀보는 경지까지 가게 된 것이다. 카메라맨까지도 참가했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정한 의상은 반팔 블라우스에 청바지, 악세사리로는 단순한 디자인의 금색 목걸이와
팔찌 하나라는 심플한 복장으로 찍기로 했다. 단추를 두 개나 풀어서 쇄골이 훤히 보이는 복장이었지만 섹시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휴일을 맞이한 커리어 우먼의 캐주얼한 복장 같다는 의견도 있었고, 어른스럽게 꾸며본 소녀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전자
쪽에 가깝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이런 촬영은 평소 세이야가 하는 일에 비하면 휴식에 가까웠으니까.
"휴식이라면 휴식이죠. 마지막에 인형놀이만 안 했었다면."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세이야는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그렇긴 하다.
"여튼, 사진도 다들 괜찮게 찍었으니까 일거리 좀 팍팍 물어와요. 그 텅 빈 스케줄 수첩을 가득 채워주세요."
"윽, 말 안해도 알아."
"믿어요. 힘내요, 마스터P."
"너 이럴 때만 미소 짓기냐……."
"써먹을 수 있는 건 다 써먹어야죠."
방금 전 보여줬던 아이돌다운 미소는 어디로 날려먹었는지 곧바로 시니컬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정말 이래저래 종잡을 수 없는 아이다.
여
튼 세이야 말대로 사진도 제대로 된 걸로 찍었으니 이제 열심히 일을 따와야지. 힘들 거라는 건 알고 있다. 목표는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모두 톱 아이돌이니까. 하나하나 차근차근일지 단숨에 와장창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내가 일을 얻어와야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힘내요. 믿고 있으니까."
"응."
최근에서야 알게 된 냉소적인 미소 너머에 있는 격려의 눈빛에 대답하며 나는 수첩을 집어넣었다.
*****
- 신이다 님의 그림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렇게 2화를 쓰게 되었습니다.
- 선재사진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에는 없더군요. 적당한 단어가 있다면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 다음 모바게가 신데마스를 내줄 거라 믿습니다. 네이버 지분을 모조리 흡수할 수 있는 최강의 패라구요. 안 뽑을 리가 없어요.
- 내용 축약이 심하고 세이야가 많이 나오는 것 같다면 제대로 보신 겁니다. 이건 팬픽이니까요 <-
- 아이돌이 나왔으니까 포병은 3월로 미뤄질 것 같은 예감이 무럭무럭 솟아나고 있습니다. […]
- 내일 수강신청과 동생놈 컴퓨터 부품구입을 위한 용던 레이드가 있는 날. 잘되길 바랍니다.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아이돌 마스터] 저요? 아이돌일걸요? 아마도.
#3. 인생 원래 하기 싫은 일은 제끼는 거에요. 근데 이런 거 왜 하냐구요? 알면서 왜 물어요. 돈 때문이지. 안 굶어죽으려면 별 수 있나요. 그러니까 회사 애들 물건 좀 사줘요. 싫으면 말고요. 강요는 안 해요.
청명한 하늘 아래 새하얗게 빛나는 건물들. 골목 사이사이 수로를 타고 움직이는 곤돌라. 그리고 그 곤돌라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미소와 활기.
누
구나 이름을 말하면 알 수 있는 지중해 도시 베네치아. 로마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역사 깊은 도시에서 그 소녀─타카기 세이야는
곤돌라에 타고 노를 젓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무덤덤한 표정은 과연 이 소녀가 아이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
지만 결코 불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되려 현지인마냥 익숙하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곤돌라 위에 서 있는 모습도, 노를 젓는 자세도 익숙했기에 더더욱 그러하였다. 문득 예전부터 간직해왔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과연 저 소녀가 서투르게 처리하는 일은 뭐가 있을까.
"베네치아에서 방송 하나 찍는다고 하길래 뭔가
했더니, 이런 거였습니다. 야생에 내던져진 건 아니니까 괜찮은 거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 이 곤돌라라는 건 원래
건장한 남성들이 힘차게 젓는 물건입니다. 저 같은 10대 소녀들이 움직이기에는 상당히 힘든 물건이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쉬엄쉬엄 노를 젓는 세이야의 얼굴에 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적당히 노를 젓다가 속도가 조금 난다 싶으면 천천히 강물의
흐름을 타고, 속도가 떨어지면 다시 노를 젓다가 쉰다. 확실히 힘이 부족한지 곁을 스쳐지나가는 다른 곤돌라에 비하면 상당히 느린
축이었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Buon giorno!"
"Buon giorno─."
되려 늘상 해오던 일인 것마냥 스쳐지나가는 현지인들의 인사에 당황하지 않고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하는 모습은, 누군가에게 베네치아 주민이라고 해도 믿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
사실 이렇게 곤돌라를 몰기 위해서는 몇 년 간 전문교육과정을 수료해야 합니다. 뱃사공의 업무 중에는 베네치아 가이드도 있기
때문이죠. 거기에 최소 4개 국어는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서는 쉽다고 생각합니다.
한심한 일이죠."
거기까지 말한 후 세이야는 크게 팔을 휘저어 큰 수로를 향해 방향을 꺾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분명 이 방송 제작한 PD는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이 방송 기획한 게 분명합니다. 노를 저으면서 베네치아 가이드까지 하라니. 이게 전문교육과정이 필요하다는 건 전혀 몰랐을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유유자적 다리 아래로 지나가던 세이야는 트레이드 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냉소적인 코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
그러니까 전 제가 아는 것들만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모르는 것들은 PD가 알아서 해설을 넣든지 어쩌던지 하겠죠. 그래도
궁금하다 싶으신 분들은 인터넷 찾아보세요. 아니면 베네치아 관광책자라도 뒤져보시던가요. 그 정도 노력은 할 수 있죠? 적어도 이
재미없는 교양방송의 시청자라면 자기 앞가림은 할 수 있는 사람들일 테니까 그 정도 쯤은 알아서 할 거라고 믿습니다."
터무니없는 폭언이었다. 교양지식을 전해야할 방송에서 지식은 알아서 찾아보라는 말을 하다니. 방송국에 항의라도 할까. 하지만 그 생각은 곧바로 이어진 세이야의 해박한 설명에 사라졌다.
베
네치아의 역사, 기후, 주변 국가들과의 정세, 유적들의 학술적 문화적 가치, 주민들의 생활, 산업, 관광명소, 특산품 등 과연
언제 저런 걸 공부했을까 싶을 정도로 방대한 지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지만 결코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었다. 명쾌하고
깔끔하며 자연스러운 설명을 듣고 있자면, 이 소녀가 사실은 앞서 말했던 전문교육과정을 수료한 후에 방송에 임한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뭐, 아는대로 일단 나불거리기는 했습니다만, 백과사전 한 번 훑어보면 다 써있는 내용이라는 걸 아실 겁니다. 인터넷에서 검색 한 번만 해도 다 알 수 있는 내용들이지요."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이야가 했던 것처럼 설명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결코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리고 뒤이어진 칸초네는, 과연 누가 저 아이가 F랭크 아이돌이라는 걸 믿을까 싶을 정도였다. 듣는 순간 이거다 하는 느낌은
없었지만, 정확한 발음과 생명력이 느껴지는 탄력있는 리듬으로 이탈리아 뱃사공들의 화려하고 흥겨운 노래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자연스레 소화해내는 모습을 본 순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주민들이 흥겨워하며 끼어들어 함께 노래를 불러주고 앵콜까지 했으니 말
다한 셈이다.
"노래는 치하야가 저보다 더 잘 부릅니다. 이런 거 할 줄 알았으면 불러왔을텐데 말이죠. ……아, 물론 PD가 제작비 절감 운운하며 허가 안해줬을지도 모르겠군요."
세이야는 비웃듯 피식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 대화를 편집없이 틀다니. PD도 제법이다. 아니면 익숙해진 것이던가.
여하튼 그렇게 지루하지 않은 베네치아 안내를 끝낸 소녀의 곤돌라가 정박지에 도착했다.
"
이걸로 제 일은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느긋하게 관광을 즐기고 싶지만 곧바로 귀국 비행기를 타야합니다. 첫날에도 저녁 늦게
도착해서 다음 날 새벽부터 촬영하더니 마지막날도 이렇군요. 제작비 아끼려고 빡빡한 시간표를 만든 게 분명합니다. 그래도 돌아가는
비행기는 비즈니스 클래스니까 좀 낫겠죠."
노를 놓고 배에서 내린 후 천천히 기지개를 펴며 세이야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허리에 손을 얹고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음 번에 베네치아에 올 때는 느긋하게 즐기다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돌답지 않은, 그야말로 주변에 흔한 10대 소녀의 미소와 함께 화면이 멈추고, 스탭롤과 협찬회사 이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미소는 세이야의 등 뒤로 보이는 베네치아의 모습과 잘 어울렸다.
*****
프로듀서와의 대화를 끝내고 이제 차에 탈까 하는 유키호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하던데."
"아, 후훗, 고마워."
기
자재를 정리하고 온 세이야의 칭찬에 유키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무대 연출을 비롯한 아이돌 활동 전반에 일가견이 있는
세이야가 저런 말을 했으니 충분히 괜찮았던 듯 하다. 본인도 아이돌이니까 전문가일 수 밖에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돌 활동과 무대 연출은 전혀 다른 분야다. 그 모두에 통달한 사람이 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고, 그런 사람 중
하나인 세이야가 하는 말이니 신뢰할 수 있다.
"물론 공포증이라고 해도 냅다 도망친 건 감점이야. 라이브까지 망쳤다면 당장 아이돌 그만두고 심리치료부터 받으라고 했을 거야."
"하윽……."
가
차없는 지적이 푹 하니 꽂혔다. 그래도 촌철살인의 폭풍이 아닌 게 어딜까. 언젠가 모 PD와의 마찰로 법정 소송 직전까지 갔을
때, 작정하고 준비해서 그 PD가 소속된 방송국의 법률자문단(한 사람이 아니었다)을 파죽지세로 갈아버리고 뒤에 0이 상당히 많이
붙는 합의금을 뜯어내던 세이야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유키호는 마음 한 구석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괴로운 듯한 신음과 함께 작아지는 유키호의 모습에 세이야는 피식 웃고는 물었다.
"이제 좀 자신감이 생겼어?"
유키호가 고개를 돌려보니 팔짱을 낀 세이야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아니. 아직은 잘 모르겠어."
세이야의 질문에 유키호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생
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잘 모르겠다. 프로듀서 덕분에 이번 후루사토 마을 잔치는 어찌어찌 무사히 넘겼지만,
그렇다고해서 모든 걸 다 극복했느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다. 여전히 성인 남성이 두렵고 개가 무섭다. 한 발짝 나아간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계속 두려워했던 걸 모두 극복해낸 건 아니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리라.
문득 시야에
세이야의 신발이 보였다.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 윤곽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완전히 헤지고 닳아빠진 운동화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돌의 신발이 아니라 체육계 부활동을 하는 남학생의 신발 같다. 약 한 달 전에 중소 메이커에서 협찬 받은 거라고
얘기했던 게 기억났다. 고작 한 달만에 저렇게 헤진 것이다. 그만큼 격렬한 활동들을 했으니까 저렇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유키호가 생각하는 건 신발이 아니라 신발의 주인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평정심을 유지하며 당당한 태도로 온갖 고난과 역경을 뚫고 다니는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
부럽다. 언제쯤이면 나도 저렇게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설 수 있을까. 어떻게하면 저렇게 당황하지 않고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을까.
"나처럼 되고 싶어?"
마치 마음 속을 읽고 있었던 것처럼 날아든 세이야의 말에 움찔하고 말았다. 정곡을 찔렀다는 걸 알았는지 세이야는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나처럼 될 필요 없어. 되서 뭐하려고. 그리고 나처럼 됐다가는 잘 날던 비행기에서 내던져질걸? 그리고……."
전혀 농담 같지 않은 말을 농담으로 던지며 세이야는 허리에 손을 얹고는, 방송을 끝낼 때 가끔 보여주는 담백하고 수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잘했어. 그렇게 계속 해나가면 돼."
"……응. 고마워."
"그런 고로 마스터P가 유키호를 위한 길거리 라이브를 팍팍 물어오도록 찔러볼까."
"아, 우아, 아니, 그건 좀……."
"마스터P─."
"응? 왜?"
"다음 번 유키호 일거리로 괜찮은 걸 추천할까 해서요."
"자, 잠깐?! 세이야! 세이야?!"
평소에는 보기 힘든 그 나이 또래 소녀다운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하는 세이야. 당황한 얼굴로 그런 세이야를 막는 유키호.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물음표를 띄운 프로듀서의 목소리가 밤하늘 아래 울려퍼진다.
그렇게 아이돌 소녀 하나가 한 걸음 내딛은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후하하하하하하!!! 드디어 쓰러지는 것인가 지구방위대!]
"큭, 헷! 이걸 어쩌나! 아직은, 크흑, 충분히 싸울 수 있는데!"
[그 걸레짝 같은 몰골로? 후, 후흐흐, 후흐하하하하하하하하!!!!! 가소롭구나! 정말로 가소로워! 그 정도로 사천왕 중 하나인 이 파이프 백작에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서
있는 것조차 힘든 것 같은 레드의 외침을 허세라 생각했는지 파이프 백작은 등 뒤에 달린 파이프에서 소름끼치는 소음과 함께 회백색
탁한 연기를 내뿜어댔다. 유해물질로 이루어진 독한 연기에 다섯 명의 지구방위대원 모두 기침을 했다. 최첨단 기술을 집약한
마스크로도 모두 걸러지지 않을 정도로 독한 연기였고, 그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대원들의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이미 유해물질에 면역이 생긴, 혹은 유해물질로 이루어진 파이프 백작의 병사들이 지구방위대를 조금씩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하압! ㅤㅋㅡㅅ, 쿨럭! 그 애는, 아직인가!"
"언제나처럼! 핀치일 때! 콜록! 도착하겠지!"
"지금이 그 핀치인, 크ㅤㅎㅜㅂ! 것 같은데!"
"콜록콜록! 어쩔 수 없잖아! 크흠! 그 애는 공무원, 이니까!"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대원들은 애써 농담을 주고받으며 희망을 북돋았다. 쓰러지고 싶었지만 지금은 안된다. 여기서 쓰러지면 파이프 백작을 비롯한 악의 조직 다크 스웜의 군단은 지구를 잿더미로 만들고 모든 생명체를 몰살시킬 것이다.
그리고 지구방위대원들을 위해 신무기와 새로운 슈츠를 가져오고 있을 그 소녀를 위해서라도 버텨야 한다.
[호오. 그런가. 어리석게도 그년이 도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거로군.]
대
원들의 대화에 파이프 백작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와 동시에 회백색 연기 위로 어디선기 쏘아진 빛이 영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영상 속에는 지금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을 UN이 개발하여 지구방위대에 제공한 비행정의 모습이 보였다. 비행정은 지금 대원들을
괴롭히고 있는 연기와 비슷한 회백색이었지만 햇빛에 빛나는 아름다운 유선형 동체는 결코 같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비행정의 앞에는 탁한 연기를 뿜어대며 푸른 하늘을 더럽히고 있는 수백 척의 공중전함들이 있었다. 그것은 분명…….
"녹철함대?!"
"그럴 리가 없어! 지난 번에 모두 파괴했을 텐데?!"
"모두들, 속지마! 조작영상일 거야!"
[후후후후후. 조작이라고? 안타깝지만 녹철함대는 모두 복구했다. 그리고 네놈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그년은 말이지…….]
파
이프 백작의 음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영상 속 공중전함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목표는 함대와 비교하면 티끌과도 같은 작은 비행정.
폭풍과도 같은 공격에 급하게 방향을 꺾는 비행정의 모습이 포착되었지만, 어디로 가든 하늘을 불꽃과 폭연으로 뒤덮는 대공포화에 그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함대의 대공포화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조각 하나라도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지 고출력 레이저까지 내뿜으며 비행정이 있을 만한 공역을 모두 불사르기 시작했다. 광기와 집착마저 엿보일 정도로 촘촘한 화망이었다.
[하하하하하하!!!! 불타라!!!! 불타올라라라!!!!! 드디어!!! 드디어 그년을 죽였다!!!! 우리의 계획을 끈질기게 방해하던 그년을 드디어!!!!!!!!!]
아
무리 열세에 몰려있다고 하더라도 숙적인 지구방위대원들이 눈앞에 있건만 파이프 대왕은 그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영상을 보며
광희난무하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연극이나 거짓말을 하는 듯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거짓말일 거야."
누군가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믿고 싶다. 언제나 시니컬한 태도로 툴툴거리지만 망설임없이 도움을 주던 그 아이가 죽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그렇게 모두의 마음이 절망에 물들기 시작한 순간,
<죽을 각오하고 왔는데 그런 꼬라지 하고 있으면 속에서 울컥하는데요.>
너
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통신기 너머로 들려왔다. 그리고 곧바로 지구방위대원들의 헬멧 바이저에 아군 식별신호가 떠올랐다.
UNAC-TGS. United Nations AirCraft-Terra Guard Supporter. 유엔 소속 지구방위대 지원
항공기. 그리고 약간 노이즈가 낀 영상이 떠올랐다. 대충 자른 듯한 어정쩡한 머리에 시니컬한 눈동자의 소녀. 이마에는 대충 붙인
듯한 지혈팩과 마구잡이로 묶은 듯한 압박 붕대, 뺨에는 심상치 않은 양의 피가 흘렀던 흔적이 남아있건만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무심한 얼굴. 그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세이야!!!"""""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 살아왔을 때나 볼 법한 얼굴들이네요.>
대원들의 환호에 세이야는 그렇게 피식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까칠한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안도감이 담겨있었다. 상태가 어찌되었든 일단 지금 당장 중상인 대원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여튼 신무기나 받고 얼른 저 파이프 아저씨나 처리해요. 영 몸이 안 좋아서 얼른 심부름 끝내고 돌아가고 싶으니까.>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나의 녹철함대를 돌파했다고?! 그럴 리가 없어!!!!]
<그럼 여기 있는 나는 뭔데 이 아저씨야.>
[합성영상이로군! 인간들도 제법 제대로 된 영상을……]
그
러나 파이프 백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기를 가르는 소음과 함께 비행정 하나가 그의 머리 위로 스쳐지나갔다. 여기저기 그을리고
찌그러져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 세이야가 타고 있던 기체였다. 다시 말해서 지금 대원들과 얘기하고 있는 세이야의 모습은 합성영상
같은 게 아니라는 증명이기도 했다. 그리고 거기에 쐐기를 박듯, 세이야는 시니컬한 표정으로 파이프 백작을 향해 말했다.
<아군이었다면 그 함대의 약점을 모조리 까주고 싶지만, 안됐네요 적군이라. 어차피 지금쯤이면 지구방위함대가 모두 박살냈을 테지만.>
[네 년!!!! 네 녀어어어어언!!!!]
<시끄러운 남자는 사랑 못 받아요. 그리고 받아요. 신무기랑 새 슈츠.>
빠
르게 되돌아온 세이야의 비행정 하부가 열리고 그곳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정확하게 지구방위대원들 앞에 착륙했다. 가로세로높이 약 2m
정도 되는 그 상자는 대원들 앞에서 촤라락 하는 기계음과 함께 열렸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세이야 말대로 새로운 무기와
셔츠였다.
"고마워 세이야!"
"좋았어! 이거면 충분해!"
"금방 이기고 돌아갈게!"
"가는 길에 선물 사갈게! 정말 고마워!"
<이기고서 돌아오기나 해요.>
세이야는 대원들의 환호에 퉁명스레, 하지만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말하고는 통신을 종료하고 기지 방향으로 날아갔다.
#####
아
마미 하루카가 765프로덕션까지 오는데는 전철로 두 시간이 걸린다. 상당히 긴 그 시간 동안 하루카는 흔들리는 전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낸다. 오늘도 그렇게 전철로 사무소에 도착한 하루카는 익숙한 회사 사무실에서 마주하게 된 전혀 익숙하지 못한
광경에, 그러니까 야요이의 허벅지를 베개삼아 소파에 누워 자고있는 세이야의 모습을 보고는 멈칫했다.
"세이야?"
"아, 하루카 언니 쉿."
검지를 입술에 대며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야요이의 모습에 하루카는 조심스레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평
소같으면 침낭 속에 들어가 구석 소파에서 자고 있을 세이야가 어째서 오늘은 야요이의 허벅지를 베고 TV앞 소파에서 자고 있는가,
그리고 토요일인 오늘 왜 교복 차림인가,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는 기계는 무엇인가, 다리에 묶은 붕대와 여기저기 붙은 반창고는
무엇인가 등등의 여러가지 질문이 함축된 질문이었다. 영리한 소녀인 야요이는 그러한 하루카의 의도를 모두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요이가 입에 담은 대답은 굉장히 짧고, 난해했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서, 래요."
"……네?"
넌센스 퀴즈라도 되는 걸까. 힌트를 부탁드립니다 야요이 MC님. 아쉽게도 그런 건 없습니다 하루카 도전자.
눈빛만으로 그런 대화를 하고, 대체 무슨 의미인지 고민하고 있는 하루카의 귓가에 세이야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그말 그대로야. ……후아아암."
"아, 깼어?"
"의식만."
몸
은 나른해. 세이야는 그렇게 덧붙였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반쯤 감긴 눈동자 속에는 희미하게 피로가 녹아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팬들, 그러니까 자타공인 '팬은 물론이고 방송계 전체를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들의 의견을 빌리자면, '막나가는
분위기가 누그러들어 있다'고 해야할까. 물론 세이야의 지난 한 달간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럴 법 하기는 하다.
2주
동안 시베리아 툰드라 지역에서 서바이벌 가이드를 겸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귀국한 다음 날 곧바로 베네치아로 날아가 특집 교양방송을
찍었다. 거기서 돌아온 다음날에 곧바로 후루사토 마을 잔치 라이브. 그 다음날부터는 반쯤 스턴트에 가까운 버라이어티 방송 몇
편에 참여해서 이리뛰고 저리뛰고 인공 장애물을 넘고 기고 구르고. 인터넷에서 팬들의 사소한 질문에 법률용어를 몇 개 섞어 대답한 게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되어 교양법률방송에 얼굴도 비추게 되었는데 얼떨결에 끝장토론이 되어 새벽까지 논쟁. 마지막으로 찬조출연
형식으로 가끔 얼굴을 비추던 모 전대물 극장판 촬영에 참여하느라 반쯤 철야로 닷새.
근 한 달 동안 어지간한 아이돌도
기겁할 정도로 하드한 스케줄을 소화한 것이다. 지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리라. 아니, 세이야의 활동이 대부분 몸으로 때우는
격렬한 활동이라는 걸 감안하면 고작 저 정도의 피로호소밖에 하지 않는다는 게 10대 소녀의 체력으로 가능한 일일까.
"덕분에 발목은 나갔고 무릎도 작살나기 직전이야. 압박붕대랑 반창고로 간신히 버티는 거지."
"헤에……. 아니아니, 그러니까 그 정도로 끝나는 게 이상하다는 것입니다만."
"만보계 광고가 끼어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 철야하는 바람에 옷도 못 갈아입었고."
"그렇구나. ……아니 그러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
"태클 타이밍이 좋아졌어."
세이야는 반쯤 감긴 눈으로 하루카 쪽을 바라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코믹해서 하루카는 피식 웃고 말았다. 동시에 약간 애잔하기도 했다.
"왠지 미안하네……."
모
두가 함께한 후루사토 마을 잔치 이후 하루카가 나간 방송은 게로게로키친을 비롯해 두세 개 밖에 되지 않는다. 이건 다른 사람들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노력한 끝에 방송 분량은 확실하게 확보해서 지명도가 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사무소를 먹여살리고 있는 건
세이야뿐이다. 거기에 아이돌 활동─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하드한 일들이지만─틈틈히 원래 업무인 데스크워크에 악질적인 PD들과
그들이 고용한 법률단 박살내기도 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어떻게든 동료들을 괜찮은 방송에 넣기 위해 분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내색은 하지 않는다.
그런 하루카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세이야는 야요이의 손을 잡아 자신의 코끝에 대더니,
"……생선, 조기를 다듬고 왔구나."
"엣, 어떻게 아셨어요?"
"
희미한 바다 냄새랑 녹차향이 나. 요 며칠간 전국적으로 조기값이 쌌지. 제철이라고는 해도 어획량이 많았으니까. 그리고 최근
야요이네 동네 신문들이 근처 마트 할인쿠폰 전단지를 끼워뒀었으니 안 샀을 리가 없어. 또, 이 정도 냄새가 아직도 남아있으니까
사무소에 오기 전에 했다는 걸 테고, 녹차향은 비린내 제거를 위해 다 쓴 티백으로 손끝을 문질러서 그렇겠지."
"오오, 굉장해요."
왠지 명탐정의 추리와도 같은 추론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시 하루카를 바라보더니,
"하루카."
"응? 왜?"
"핥게 해줘."
"……어?"
의미불명인 말을 내뱉었다. 핥아? 뭘? 나를? 왜?
의외의 질문에 굳어버린 하루카를 향해 세이야는 여전히 반쯤 감겨있지만 기이한 진지함이 담긴 눈으로 말을 이었다.
"하루카."
"응."
"피로와 스트레스에는 당분이 좋아."
"아, 응. 들은 적 있어."
"그리고 하루카는 귀여워."
"어, 고마워."
"여자애는 설탕과 향신료와 온갖 멋진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고 하루카는 귀여우니까. 그러니까 핥으면 단맛이 날 것 같아. 그러니까 핥게 해줘."
"아하하하……."
대충 무슨 의미인지 이해는 갔다. 그와 동시에 하루카는 세이야가 반쯤 잠에 취해있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그렇기에 반쯤 장난삼아 물었다.
"그럼 야요이는?"
"야요이는 쌉싸래한 고급 초콜릿. 하드보일드한 어른의 맛이야."
"……헤?"
정말로 의외의 대답이었다.
"생활전선이라는 거친 일상을 살아가며 단련된 야요이의 맛은 100%에 가까운 카카오 맛. 희미하고 순수한 단맛이 남아있지만 한때의 여흥으로 남을 뿐 거기에 기대지는 않아. 그러니까 하드보일드야."
"에헤헤, 그렇게까지는……."
칭찬인걸까. 일단 야요이는 칭찬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잠이 깬 듯 세이야가 일어나며 말했다.
"점심이나 먹자."
"벌써 그렇게 됐네. 뭐 먹을까?"
"고기."
"엑."
"고기."
"아니, 비싸잖아?"
"맞아요. 요즘에 닭이랑 돼지고기 비싸졌어요." 쇠고기라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에버린 체 대답하는 게 야요이다웠다.
"게다가 점심으로 먹기에는 좀 무거운 메뉴지 않아? 게다가 그, 몸무게도……." 10대 소녀가 제일 신경쓸만한 부분을 언급하는 게 하루카다웠다.
그러한 두 사람의 대답에 세이야는 걱정마라는 듯 검지를 까딱이며 말했다.
"중형 육류 체인점에 컨설턴트 해준 대가로 받은 이용권 있어. 돈은 안 들어. 그리고 야요이."
"네?"
"쇠고기야."
"……."
"먹고 남으면 싸가져 갈 수 있어."
"갈게요."
언제 반대했었냐는 듯한 빠른 전향이었다.
"하루카."
"응?"
"먹고 댄스 레슨 두 세트 뛰면 다 빠져."
"그, 그건 그렇지만……."
"공복의 아이돌은 아무 것도 못해.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지 않으면 스테이지(전장)에 설 수 없어."
"하루카 언니. 가요."
"……가겠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 하루카는 결국 찬성을 표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날, 세 사람이 VIP대우를 받으며 특등급 쇠고기를 먹고, 그것도 모자라 회사를 살려준 답례라며 '일단 급한대로' 라며 최상급 쇠고기 세트를 선물받은 건 말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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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티는 확실하게 타 작품 출연이 많고, 세라는 그나마 본작 출연이 많은 편이지만 슬슬 따라잡힐 것 같고, 세이야는 애초에
처음부터 외주(…)가 많았었죠. 여튼 세이야도 근 8개월 만에 돌아왔습니다. 연중은 아닙니다. ……일단은.
- 애들 나이가 헷갈립니다. 하루카랑 유키호 나이는 동갑인 것 같은데 학년은 다르고, 치하야와 하루카는 한 살 차이인 것 같은데 학년은 같고. 뭐야 이건, 어디에 맞춰라는 거야. […]
그냥 큰 차이 없다 싶으면 대충 맞추고 있습니다. 제 팬픽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 설정 언제나 대충 짜고 씁니다. […]
- 추석 전에 올리려고 했는데 실패했네요. 이럴 때마다 자신의 느려터진 타자 실력에 한숨을 내쉽니다. 다음 화는 10월 중에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포병이든 별의 바다든 아이돌이든 말이죠. […]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아이돌 마스터] 저요? 아이돌일걸요? 아마도.
#4. 어머니랑 자기랑 빠지면 누구 구할 거냐는 질문할 생각 말고 수영을 배우세요. 그래서 미래의 시어머니 구하고 점수 따둬요.
"어딜 가느냐!"
"……."
말
을 타고 달려온 젊은 영주님의 모습에 10년 전과 거의 달라진 게 없는 여인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제아무리 10년 동안 어린
영주에게 검을 가르치고 몇 번이나 생명을 구했다고는 해도 상당히 무례한 태도였지만, 처음부터 그런 건 신경쓰지 않는 여자였다.
말이 몰고 온 흙먼지를 피해 살짝 뒤로 물러나면서─이것도 누군가 본다면 무례하다할 행동이었다─ 그 여인은 홀가분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야 물론 떠나는 길이지요."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더냐. 떠나지 말라고. 내 곁에 있어달라고."
"저도 분명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떠날 것이라고. 당신의 곁에는 있을 수 없다고."
"……."
보
름달이 빛나던 그날 밤의 대화가 떠올랐다. 어엿한 영주가 된 당신 옆에 검 휘두르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 없는 여인이 있을 수는
없다고 말하던 여인. 온갖 이유를 들어 붙잡으려는 자신을 가차없이 논파하던 그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검으로는 일당백을 논하고, 식견은 학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으며, 정무는 선대 영주님보다 뛰어나시니, 이제 저 같이 미천한 계집의 도움은 필요없으실 겝니다. 그러니, 떠나야지요."
말문이 막힌 자신 앞에서 홀로 잔에 술을 채워 마시며 덧붙인 말이었다.
"그리 말씀드렸거늘 정무를 내팽개치고 저를 붙잡으러 오셨습니까."
"……."
"돌아가십시오. 성군이라 칭송받고 계신 지금 고작 계집 하나 때문에 그 명성을 뒤흔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 말하며 여인은 고개 숙여 일방적으로 작별을 고한 후,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그것을 꾸짖을 사람도 없었고, 당사자들 또한 그런 것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랬기에 방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지 마라!"
작
은 충격과 함께 여인은 발걸음을 멈췄다. 어깨와 허리를 감싸고 있는 것은 건장한 남성의 팔이었다. 어느 새 말에서 내린 영주님이 등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평소라면 금방 눈치챘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그리하지
못했다.
"……끈질기십니다."
목소리가 떨린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영주님 또한 그걸 깨달았는지 팔에 더욱더 힘을 주며 속삭였다.
"남자는 끈기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던 것은 그대지 않는가."
"허나 아녀자에게 끈질기면 미움받는 남자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래서 그대를 붙잡은 내가 미운가?"
"밉다마다지요. 오랜만에 대련을 빙자한 구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어이쿠, 그건 무섭군."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그리고 여인의 손이 자신을 붙잡은 영주의 손 위에 포개졌다.
"신분도 불문명하고 혼기는 애저녁에 넘긴 늙은 계집 때문에 움직이시면 아야카 공주님께서 질투하실 텐데요."
여인이 부드러워진 태도로 꽃다운 열 여섯으로 아리따운 이웃나라 공주님이자 영주님의 약혼녀의 이름을 언급하자, 영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를 잡아오라고 한 사람 중에 하나가 그녀다."
"……호오."
"'부전승은 납득할 수 없으니까 어서 돌아와라. 그렇지 않으면 에조국 모든 닌자를 풀어 쫓을 것이다.' 라고 전해달라더군."
"이름높은 에조의 닌자들에게 쫓길 바에야 감금생활을 하는 게 훨씬 낫겠군요."
"감금이라니. 항상 편할 데로 다녔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가?"
"새장 안의 자유일 뿐입니다. 아아, 어리숙한 사냥꾼에게 잡혀 길들여지게 되었으니 앞날이 어둡군요."
"사냥꾼을 마구 부려먹는 사냥감도 있던가?"
"글쎄올시다."
소소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영주와 세이야 두 사람은 그렇게 잠시 동안 서로에게 기대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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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세이야의 생각날 때 업데이트 하는 블로그.
제목 : 인기 좋다고 살게 됐다.
XXXX년 ○월 ★일 AM 07:09
제목 그대로. 원래 이번 화에서 죽는 장면 찍을 예정이었는데 뭔가 이상한 멜로 드라마 장면틱한 걸 찍었습니다.
이런 거 별로인데. 현실에도 짝이 없는데 무슨 연애놀음 촬영을. 발연기에 눈 버리실 수도 있으니까 보지 마세요 이번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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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야 팬 스레 - 세이야가 대하 드라마에서 애정극 촬영을 했어 (6)
389: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슬슬 진정해야하지 않을까.
399: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무리다. 난 세이야가 얼굴 붉히는 장면 계속 돌려보고 있어.
400: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399 자중해라.
401: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399 그만 봐.
402: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399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만 둬.
403:
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우리는 세이야 하아하아 라던가 세이야 할짝할짝 같은 단어는 쓰지 않는다. 당당하게 거친 숨을 내쉬고
당당하게 핥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사! 우리는 세이야 하아하아 라던가 세이야 할짝할짝 같은 단어는 쓰지 않는다. 당당하게 거친
숨을 내쉬고 당당하게 핥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사!우리는 세이야 하아하아 라던가 세이야 할짝할짝 같은 단어는 쓰지 않는다.
당당하게 거친 숨을 내쉬고 당당하게 핥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사!
404: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399 여기 또 하나의 내가...!
405: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403 패턴 블루! 폭주팬이다!
406: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403 놈을 잡아! 세이야의 팬들은 언제 어디서나 COOOOL해야 한다!
407: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403 세이야의 시니컬 멘트 링크로 녀석을 제압해! <링크>
408: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안돼! 그 링크에 저항이 있는 건 코어한 팬들 뿐이라고! 어설픈 녀석들이 들으면 아이돌 팬 활동 뿐만이 아니라 인생 자체를 비관적으로 보게 돼버렷!
409: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시험인가! 녀석의 팬심을 시험하는 것인가! 우리는 지금 시험을 강요받고 있는 거다!
(중략)
900: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이제 좀 가라앉았군.
901: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가라앉을 때가 됐지. 시간도 그렇고.
902: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이제 좀 정리를 해볼까.
903: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팬클럽이 가장 나중에 느긋하게 얘기하는 아이돌은 세이야 뿐이지 않을까.
904: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어쩔 수 없잖아. 본인이 '열광적인 성원 그런 거 필요없고 상식적이고 차분하게 활동할 것. 열정은 765프로 다른 아이돌들에게 부을 것.'이라고 했으니까.
905: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팬클럽에게 다른 애들 좋아하라고 주문하는 아이돌이나 거기에 따르고 있는 팬클럽이나.
906: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여튼 확실히 세이야 팬이 늘었군. 예전에는 4천대 들어가서 진정했는데 오늘은 6천대다.
907: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게다가 조금만 더 있으면 7천 찍을 것 같은데.
908: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세이야 녀석 뭐가 눈 버리니까 보지 마야. 최고였다구.
909: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소녀심 같은 건 내던진지 오래라고 했던 애가 하루 종일 소녀심 폭팔이었잖아. 좋다.
910: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야생에서 "끼요오오오옷!!!" 같은 비명 지르던 애가 나긋나긋하게 웃다니. 반칙이다.
911: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성숙하게 분장하고 보여주는 것은 소녀심이라니. 안돼, 심장이 버티지 못한다.
912: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음
913: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음
914: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음
915: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음
916: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음
917: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안 오네.
918: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그러게.
919: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슬슬 이쯤에서 세이야가 등장해서 우리를 뒤흔들고 갈 것 같은데.
920: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오늘 동남아 서바이벌 아니었냐?
921: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아
922: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그럼 오늘은 끝낼까.
923: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난 먼저 자러 간다. 오전에 자격증 시험 봐야돼
924: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ㅤㄴㅓㅋㅋㅋㅋㅋㅋㅋㅋ 시험있는 놈이 이 시간까ㅤㅈㅣㅋㅋㅋㅋㅋㅋㅋㅋ
925: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세이야의 팬은 팬활동으로 일상에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되거늘
926: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걱정마라 자격증 따서 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겠어
927: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926 힘내라
928: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926 합격기원 세이야의 미소 <링크>
929:타카기 세이야: 촬영 들어가기 전에 잠깐 모니터링. 926은 시험 합격 기원하고, 그 눈 버릴 장면에 왜 다들 좋아하고 있는 거야. M들만 모여있나.
930:타카기 세이야: 그리고 2화인가 3화 뒤에 죽어. 이번에는 진짜로. 감독님이 뭐라고 해도 내가 힘들어서 못해.
931:타카기 세이야: 그럼 굿바이.
932: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왜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
933: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왜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
934: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안돼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
935: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당했다.
936: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설마 동틀녘에 잠깐 스쳐지나가면서 이런 정보를 던지고 갈 줄이야.
937:팬을 디스하는 아이돌의 팬: 과연 내가 선택한 아이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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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아아아아아아악──────!!!!"
풍
더어어엉──!!! 거대한 물보라와 함께 소녀의 몸이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칠게 흐르는 수면 위로 솟구쳐 나온
소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천천히 물가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급류에서 빠져나온 소녀는 그대로 대자로 드러누워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가끔씩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는 것을 보니 제법 물을 많이 먹은 듯 했지만, 잠시 후 상반신을 일으킨 소녀의
얼굴에 그로 인한 불편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친 짓이었습니다."
세이야는 폭삭 젖은 옷과 신발을 벗어던지며 그렇게 말했다. 방송에서 쓸만한 단어는 아니었지만 익숙해진 시청자들에게는 별다를 감흥을 주지 못했다.
"
정말, 미친 짓이었습니다. 높이도 그리 높지 않고 별다른 우회로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뛰어내렸지만, 와류는 생각치 못했네요.
생각보다 물살이 빠른 것도 문제였습니다. 그러니까, 시청자 여러분은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 차라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덩굴로 밧줄을
만들어 내려오는 게 훨씬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속옷을 제외한 모든 옷을 훌훌 벗어던지는 세이야의 모습에
사람들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화면을 주시했다. 비치발리볼이나 육상 선수들이 입을 법한 조금 스포츠틱한 디자인에 그라데이션 효과가
들어간 군청색 상하의가 제법 요염……하지는 않았지─활동성이 느껴지는건강미는 엿보였다─만 아무리 세이야라고 해도 속옷 밖에 입지
않은 모습을 화면에 비춰도 괜찮은 걸까.
그러나 세이야는 옷의 물기를 짜내며 무심하게 말했다.
"속옷 노출이니
뭐니 하는 시청자 분들이 계실 것 같지만 아쉽게도 이건 비키니 수영복입니다. 이번 화 끝나고 협찬 올라올 때 잘 살펴보세요.
수영복 회사가 있을 겁니다. 동남아 촬영이라는 말에 혹한 것 같은데, 더 예쁘고 몸매 좋고 정상적인 화보 촬영하는 애들 놔두고 왜
저를 모델로 삼았을까요. 사장님이 이 계약 체결한 사원을 갈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언제나
그렇듯 담담한 어조로 시청자의 상상─이라는 이름의 망상을 가차없이 박살내는 발언이었다. 무엇보다도 양반다리로 앉아 구부정한 허리를
펴지도 않은 체 젖은 옷의 물기를 죽죽 짜내는 모습에서 아이돌다움이라는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뭐, 그렇게
뛰어다녔는데도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없는 걸 보니 제법 괜찮은 수영복이긴 하네요. 이번 여름에 피서여행 가실 분들은 이 회사 제품 사
입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담이지만 저도 이런 정신나간 방송활동 말고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여행을 가고
싶습니다."
잠시 신세한탄과도 같은 한탄을 내뱉은 세이야는 이내 포기했다는 듯한 한숨과 함께 머리를 북북 긁으며 자신이 뛰어내린 폭포를 한 번 바라보고는 고래를 돌렸다.
"여튼 내려와서 시간을 벌었으니 그만큼 이동해야겠죠. 정글은 밤이 일찍 찾아오고, 불 피울 시간에 먹을 걸 구할 시간, 그리고 온갖 해충들에 대한 대비를 하려면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니까요."
그리 말하며 세이야는 불쾌할 게 뻔할 젖은 옷을 다시 걸치고는 터프한 발걸음으로 정글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
달칵. 765프로덕션 사무실 위쪽에 위치한 연습실 문이 열리며 세이야가 고개를 내밀었다.
"점심 먹읍시다─."
피
곤한 기색이었다. 그럴 법도 하다. 주말 대하 드라마 촬영이 끝나자마자 엿새 동안 동남아 밀림을 헤치고 나와 간신히 휴일을
맞이했다. 그나마 한동안은 일이 없다는 게 다행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지금 당장의 피로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를
증명하듯 뒷목과 어깨를 주무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거기에 방금 전까지 자다 일어났다는 걸 가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한 그
모습은 도저히 아이돌이라 볼 수 없었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타카기 세이야라는 소녀 자체가 아이돌 활동과는 연이 없다는 현실부터
문제가 생긴다.
"아, 세이야. 잠깐 온 김에 발성시범 좀 보여줘."
"……네에."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연습실에 있던 발성연습코치는 세이야를 불러들였다. 그 말에 세이야는 머리를 긁적이며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답한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 아─ 아─ 아─ 아─"
"한 번 더. 이번에는 한 옥타브 위까지."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한 옥타브 더."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응. 좋아. 고마워. 알겠어? 저런 느낌으로."
그제서야 세이야는 연습실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당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회사 최고 가수 앞에서 발성 연습을 시키시다니……."
"응? 아아. 아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분명 키사라기 양이 노래가 최고기는 하지만 발성시범만 놓고 보면 세이야 쪽이 훨씬 더 좋으니까."
"맞아. 기준으로 삼기에 제일 좋아."
코치에 뒤이어 치하야까지 그렇게 말하자 세이야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점심이나 먹죠."
#####
문
제는 점심을 먹고 난 후였다. 날씨는 더웠고 에어컨은 고장난 상태인 사무실의 냉방은 선풍기 하나 뿐이었고, 당연히 그것만으로는
실내 냉각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동료들의 불평불만에 어디까지나 며칠 전까지 있던 동남아 밀림보다 쾌적한 실내에서 자고 있던
세이야는 공구 상자와 함께 에어컨을 분해하고는 수리를 시도했지만…….
"……안돼겠는데."
"엑?! 어째서입니까 선생님?!"
"선생님! 다시 살펴봐주세요! 이 아이 좀 살려주세요 선생님!"
아미와 마미의 농담 섞인 절규에 세이야는 분해했던 에어컨을 조립하고 공구상자를 정리하며 대답했다.
"기판이 눌러붙었어. 내 영역 밖의 일이야."
""안돼애애애애애애!!!!""
"조─ 용─ 히─!"
""네에에에에…….""
"정말, 정 안되면 세수라도 하고 와 둘 다."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리츠코 대장님!"
"맞습니다! 이대로라면 모두 녹아버릴 겁니다!"
"일단 그렇게 열 내는 것부터 줄이면 덜 더워질걸."
달
칵. 세이야는 리츠코에게 열변을 토하는 쌍둥이를 보고는 공구상자를 닫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신문지와 뜯은 박스를 깔아둔
바닥에 드러누워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돌들이 이렇게 하면 곧바로 다음 날 특종으로 연예계 신문에 뜰 게 분명했다.
"어이, 아이스크림 사왔다~"
약 10분 후 도착한 프로듀서의 말에 사무실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오오오~ 하며 프로듀서를 맞이했다. 어느 샌가 일어난 세이야도 그 틈에 끼어 아이스크림을 받아 입에 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더운 건 매한가지인 듯 했다.
"후아, 살 것 같아……."
"우움, 집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바다였는데……. 츄라우미가 그립다……."
"바다인가……."
하루카와 히비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이야가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쉰 건 그때였다.
"……바다인가……."
"응, 바다. ……왜?"
"아니, 요 1년 간 바다에 대해 좋은 추억을 만든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서."
"……아하하하……."
그
럴 법도 하다. 명색이 아이돌이건만 세이야와 바다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건, 수영복 입은 소녀와 아름다운 해안가가 아니라
다 헤진 옷을 입은 생존의 달인 소녀와 울퉁불퉁한 해안선일 정도니까. 거친 파도에 휩쓸려 해안가 암초에 내동댕이 쳐진 적도
있으니 바다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리라.
"1m이내의 작은 파도에 미풍 이상의 바람이 몰아치지 않고,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넓은 영역과 안전대책이 확보되어 있으며, 치명적인 해양생물이 살고 있지 않으며 문명세계와 단절되지 않은 해안가라면 가고 싶어."
"……그렇지 않은 바다를 찾는 게 더 힘들지 않아?"
"그렇다면 난 왜 그런 바다에 가지 못하는 걸까."
"……그, 미안."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세이야 님.""
어쩐지 미안해진 히비키와 하루카, 그리고 아미마미 쌍둥이가 고개를 숙였다.
#####
그런 자그마한 소란이 있었지만 결국 피서여행 겸 1박 2일 바다여행이 정해졌다.
장
소를 정한 건 세이야였다. 자신이 말했던 '1m이내의 작은 파도에 미풍 이상의 바람이 몰아치지 않고,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넓은
영역과 안전대책이 확보되어 있으며, 치명적인 해양생물이 살고 있지 않으며 문명세계와 단절되지 않은 해안가'라는 구체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면서도, 그리 멀지 않으며 적당한 가격의 숙소가 있는 곳을 찾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능적인 거야. 야생에서 안전한 피난처를 찾는 것과 비슷한 감각으로 고르면 되거든."
여
행이 결정되자마자 그날 모든 교통권과 숙박지까지 예약하고는, 간이 팜플렛까지 만들어 동료들에게 나눠주던 세이야의 모습에 히비키가
감탄을 터뜨리자 세이야가 했던 말이었다. 그러한 감각이 있어서 야생에서도 안전한 피난처를 찾고 만드는 것인지, 야생에서 안전한
피난처를 찾고 만들었던 경험 때문에 사회에서도 그러한 감각을 가지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스케쥴이 없는, 다시 말해서 765프로 아이돌 전원이 동참한 피서여행은 짧은 기차여행이 시작이었다.
"작살은 왜 가져온 거야?"
"……잊어버렸었어."
"……잊어버려서 가져온다는 게 말이 돼?"
"평범한 바다를 간다는 걸 잊고서 식량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챙겨왔어."
"어이어이……."
"그래도 식재료를 얻을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아니, 타카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음, 식재료는 충분히 샀다고 생각하지만 부족할 수도 있으려나. 아무래도 다들 성장기니."
같
은 좌석 박스에 앉은 히비키와 타카네와 그런 대화를 하며 도시락을 먹다보니 기차는 어느 새 해안가를 달리고 있었다. 햇살이
반짝이는 새파란 바다와 구름 조각들이 걸린 푸른 하늘이 뒤섞인 듯 하면서도 수평선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무심코 미소가 그려지는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이런 바다도 있었구나."
"누가 들으면 한평생 거친 바다만 보고 온 사람인 줄 알 거야."
"ㅤㄲㅠㅅ."
히비키와 햄조의 태클에도 세이야는 멍하니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
"그로부터 30분이 지났고, 우리는 무사히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다들 해안가에서 헤엄치고 있네요. 이 근방은 안전하니까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시청자에게……."
"응?"
"……직업병이야. 신경쓰지마."
"……응."
자기가 말하고서도 실수였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말하는 세이야의 모습에 치하야는 이해했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이야는 곧바로 파라솔 그늘 아래 누웠다. 그라데이션이 들어간 군청색 비키니─동남아 서바이벌 촬영 내내 광고삼아 입고 있던 수영복은
제법 매력적인지라 아이돌에게 가산점을 줄 수 있을 법했지만, 정작 입고 있는 당사자는 그러한 외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러니까 노숙자와도 같은 궁색한 자세로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스스로도 아이돌이라는 자각이 없는 치하야마저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대형 타올을 덮어줄 정도였다.
어찌되었든 활동적인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두 사람은 그렇게 평온한 시간을 지낼 터였다.
"누나. 누나 그 누나 맞지? 막 사막이랑 정글 헤치고 다니는."
그 소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누구니, 넌."
"이카야 쿄우."
초
등학생 저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초록색 남방에 짙은 군청색 사각 수영복을 입고 있는 걸 보아 놀러온 피서객인 듯
했다. 쿄우는 그 나이대에 걸맞는 활기가 감도는 얼굴에 마치 보물을 찾은 듯 눈을 빛내며 세이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 잘못 봤습니다."
"에이, 거짓말. 맨날 TV에 나오면서. 그 세상만사 다 귀찮은 것 같은 눈매는 누나 밖에 없어."
"……내 눈매가 그래, 치하야?"
"……노코멘트."
"무, 치하야 누나도 있어?! 역시 누나 타카기 세이야 맞지? 역시 맞지? 그렇, 줍?!"
세이야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에 환호를 터뜨리려는 소년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취하고 쿄우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손을 땠다.
"푸하! 와, 치하야 누나도 있네."
"팬이니?"
"응! 저 누나 노래 진짜 잘 부르잖아."
"치하야 네 팬이야. 맡길게. 사인하고 악수하고 돌려보내면 돼."
"오오, 진짜 TV에서나 현실에서나 똑같네."
"개인적으로 그러한 내 모습에 실망하고 팬질 그만뒀으면 좋겠어. 치하야는 계속 팬질해주고."
"히히히히."
세이야의 말이 그 나이대 특유의 재미점을 자극했는지 쿄우는 키득거렸다. 그러한 소년의 모습에 세이야는 피곤한 듯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튼 쿄우."
"응."
"난 주말 내내 드라마 촬영하고 그게 끝나자마자 일주일 동안 동남아 정글을 헤치고 와서 이제 겨우 한숨 돌리고 있어."
"응."
"다시 말해서 엄청 피곤해."
"응."
"그러니까 저기 치하야 누나랑 놀아."
"응!"
"에?!"
치하야가 당황하든지 말든지 세이야는 팬 하나를 떠넘겨놓고 다시 드러누웠다.
그 소년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고민하고 있던 치하야에게 같이 바다에서 놀자며 달려온 하루카의 모습은 천사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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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루찌 님 생일 선물로 당일 연성해서 좀 부실합니다. 실제로 5화 부분 끊기기도 했고 말이죠.
- 트위터로 세이야 봇 같은 거 굴려볼까 고민중입니다.
- 심정은 알지만 포병 얘기는 좀 자제해주세요.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추가: 세이야 수동봇 만들었습니다 @765seiya_bot
[아이돌 마스터] 저요? 아이돌일걸요? 아마도.
#6. 휴가 끝. 노동시작.
"그거, 귀신이 아니라 타카네 아냐?"
"그래그래. 창백한 피부는 넘어가더라도 새하얀 머리카락은 타카네잖아."
횡설수설하던 세 사람─이오리, 마코토, 유키호의 들은 아미마미 자매는 당연하지 않냐는 듯이 말했다.
"……어?"
"그, 그런가?"
"그럴 거야! 응! 그렇겠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세 사람의 모습에 쌍둥이 자매는 몰래 씩 웃었다. 그리고는 방금 전 말을 뒤집듯 평소에는 보기 힘든 진지한 표정으로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그럴거야. 익사한 시체의 색깔은……."
"그리고 여기서 물에 빠져 죽은 여자는……."
"아미."
"아, 그래. 응. 미안……."
"뭐야?! 뭔데?! 뭔데?!"
좀
처럼 보기 힘든 굉장히 진지한 쌍둥이의 태도에 세 사람이 공황상태에 빠져들었지만, 장난꾸러기인 자매에게 적당한 선에서 멈춘다는
선택은 없었다. 결국 잠시 후 히비키와 함께 돌아온 타카네가 진실을 말할 때까지 세 소녀는 공포에 질려있어야 했다.
"정말, 그런 농담은 적당히 좀 해!"
"니히히, 그렇게 속을 줄은 몰랐지."
"맞아. 특히 이오링~ 오늘 하루 종일 무서운 얘기만 했으면서~"
"그그그, 그건 그렇지만!"
"후후~ 창백한 피부~"
"새하얀 머리카락~"
"그만해!"
그렇게 이오리를 놀리던 아미아미 자매를 멈추게 한 건 히비키의 한마디였다.
"그런 여자, 한 사람 더 있었는데?"
"……뭐?"
"……히비킹. 그건 무슨 소린지……?"
"피부는 잘 모르겠고, 머리는 하ㅤㅇㅒㅆ어."
"……아니, 잠깐만. 지금 달이 떠있기는 하지만 어두운데 머리가 하얀지 어떤지 어떻게 알았어?"
"그야……."
마
코토의 냉정한 지적에 히비키의 얼굴이 뭘 그런 걸 물어보느냐는 표정에서 점차 새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히비키도 눈치챈
것이다. 달빛 아래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보았던 그 여자의 하얀 머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새하ㅤㅇㅒㅆ다는 것을.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 사이로 보이던 피부가 도저히 산 사람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는 것을.
"……."
누
구의 것이라 할 수 없는 기묘한 침묵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저녁이라고는 해도 여름날씨라고는 볼 수 없는 싸늘한
공기가 소녀들의 어깨를 스쳐지나갔다. 방금 전까지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마저도 어느 샌가 사라져 있었고 숙소 내의 형광등 불빛이
파르르 떨리며 내는 고주파음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히비키가 몸을 튕기며 벌떡 일어난 건 그때였다.
"세이야!"
"……세이야가 왜……?"
유키호의 떨리는 목소리에 히비키가 다급하게 외쳤다.
"세이야가 우리를 먼저 보냈어! 그 여자를 보더니, 나랑 타카네한테 먼저 가라고 하고! 그래서 그 여자랑 뭔가 얘기를! 그래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럼 세이야는 지금……?"
"세이야가 위험해!"
"아, 잠깐! 히비키! 혼자 가면 안돼!"
"세이야!"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순식간에 몸을 돌린 히비키가 여관 문을 열어젖히자,
"왜."
"우와아아아아앗?!"
문을 열려는 듯 문고리 높이까지 올린 손을 세이야가 히비키의 외침에 대답하며 서있었다. 그 모습에 히비키는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얼굴부터 시작해서 세이야의 온몸을 확인하듯 만져본 후 물었다.
"세이야 맞지?"
"그렇게 주무르고 맞냐고 물어보는 건 뭐냐고 묻고 싶다고 말하면 당신이 아는 세이야가 맞을,"
"맞구나! 다행이다! 그 말투! 세이야야!"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진짜! 정말! 진짜 다행이라구 셋찡!"
"……."
방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자신을 와락 끌어안는 히비키와 아미마미 자매를 지탱하며, 세이야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
보
호자실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듀서의 방에는 이미 제법 많은 수의 빈 캔들이 쌓여있었다. 간간히 음료수 캔이 보이는 걸로 봐서
맥주만 소비된 게 아니라는 것은 명확했지만, 그렇다고해서 맥주캔 수가 적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어른들의 방이고 피서여행
저녁 날이니 상당량의 주류가 소비되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과년한 총각 처녀들이, 그것도 이름이 잘 안
알려져 있다고는 해도 연예인 계통의 인물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는 게 세간의 시선으로 보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술 때문에 문제를 일으킬만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리츠코 언니도 말했지만, 너무 많이 마시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네에~"
세이야의 말에 아즈사는 장난스레 그리 대답했다. 그리고 세이야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라, 세이야, 술 마시려고?"
"엑? 아니, 미성년이 술은……."
"보호자들이 있으니까 마시는 건 문제없고, 마셔도 문제없지만, 이건 바닷가를 헤메는 사람을 위한 공양으로 잠깐 빌리는 거에요."
세이야는 제지하려는 프로듀서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는 스르륵 방을 빠져나갔다.
"……공양?"
"바닷가를 헤메는 사람?"
남겨진 사람들이 의문을 표했지만 그에 대답해 줄 사람은 이미 방을 떠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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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달빛과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파도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수학여행 잠자리에서 그러하듯 동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하루카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았다.
"……근데 혹시 그렇게 되면, 이렇게 모두 모여서 놀러오는 것도 힘들어지겠지?"
그
럴 것이다. 매일 즐겁게 지내는 같은 학교 같은 반 친구들도, 학년이 바뀌고 반이 바뀌고 학교가 바뀌면 자연스럽게 멀어져
떨어진다. 그러할진데 모두가 바쁘게 지내게 된다면 같은 회사에 소속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모두가 함께 여행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성장하고 발전할 수록 멀어진다니. 모순적인 일이지만 현실이다. 그랬기에 마코토도, 치하야도, 이오리도 좀처럼
그 쉬운 의문에 답하지 않았다.
"살아있기만 하면 돼."
대답은 담담한 목소리였다. 단어의 무게와는 달리 그 어떤 무게감도 없고 진중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깨어있는 이들 모두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힘들겠지.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냐. 살아있기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절
실함이나 처절함 같은 건 전혀 느낄 수 없는 담백하다못해 건조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세이야는 평소와는 달리 동료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이부자리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독백처럼 읊조린 것이다. 그것이 세이야가 타협할 수 있는 최대의
영역이었으리라.
"……그럴까."
"그래."
의외로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치하야의 의문에 세이야는
단언했다. 목소리는 여전했다. 나름의 허세일지도 몰랐지만 일행은 굳이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동료들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오리는 분위기를 바꾸고자 톤을 바꿔 말했다.
"일단 유명하게 되고 난 후에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건."
"아하하, 그렇네."
"그래. 어서 톱 아이돌이 되서 우선 내 부담부터 덜어줬으면 좋겠어."
"윽, 노력하겠습니다……."
그런 유쾌한 대화를 끝으로 소녀들의 대화는 조금씩 잦아들어갔고, 이내 파도소리에 뒤섞여 조용히 사라져갔다.
#####
미
우라 아즈사, 미나세 이오리, 후타미 아미가 류구코마치라는 그룹으로 활동한다는 얘기에 타카기 세이야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세간에는 아이돌로 알려져 있지만 본업(?)은 765프로의 회계 겸 법률 자문인 세이야가 회사의 프로젝트를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는 해도 그게 일행이 모두 놀러가 있던 날에 시동이 걸리다니.
"코토리 언니랑 사장님이 왜 피서여행에 못 오시나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그래. 어쩔 수 없었지."
굳
이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할 사항은 아니었다. 간단하게 전화 통화로도 문제가 없었겠지만, 765프로의 사장 타카기 준지로는 그리하지
않고 직접 발품을 팔고 대면하여 일을 성사시켰다. 결국 연예계도 인맥이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모든 걸 무시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런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애초에 그게 가능한 인물은 아이돌이 아니라 뭘 하든 성공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제 리츠코 언니를 경리활동에는 못 넣겠네요."
아
이돌 팀을 이끌어야 하는 프로듀서로서 바빠지는 것도 무시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독립된 팀의 실권자에게 장부를 맡겼다가는
회계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그게 설령 아주 작은 문제라고 하더라도 적대 회사나 금융기관의 태클이 들어오면 765프로 같은
약소회사는 단숨에 공중분해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노릇이다.
"미안. 이제부터 한창 바빠질 텐데……."
"사과는 류구코마치로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받겠습니다."
"응."
그러한 리츠코와 세이야의 모습에 아미가 눈을 껌뻑였다.
"……어라, 내 눈이 이상한가? 지금 릿짱이 기세에 눌렸어?"
"제대로 봤어."
곁
에 선 이오리는 담담하게 아미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대기업 영예로서 기업 내 회계, 혹은 관련자들과 만나보고 그들의
실제업무활동도 지켜본 적이 있는 이오리에게는 세이야의 모습이 매우 당연하게 느껴졌다. 어디든 돈을 움직이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기백은 강렬한 법이다. 그렇다고는해도 세이야 분명 여고생 아니었나. 어째서 정글보다 더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칠 듯이 싸우는
전사(샐러리맨)들보다 더한 기백을 내뿜는 걸까. 아니, 이건 전사(샐러리맨)이 아니라 초인(간부)급이나 인외마경(대주주)급 것
같은데.
"아라아라, 세이야는 결혼하면 가계부를 꼭 붙잡고 있겠네."
"내 눈에는 가계부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 예산안을 잡고 있는 모습 밖에 안 보이지만……."
사람좋은 웃음과 함께한 아즈사의 말에 이오리는 그렇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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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세이야도 사람이고, 그런 만큼 가끔 다치기도 한다.
종이 끝에 손가락을 베일 수도 있고, 새끼발가락을 모서리에 찧을 수도 있는 법이다. 물론 실제로 그런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지만.
그
렇다고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다친 적이 없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생명에 위협이 될 정도로 위험한 부상이 훨씬 많은 축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명사회에서는 곧바로 의료시설을 이용할 수 있어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지만, 야생에서는 당장 목숨이 위험한
부상'이 많다. 이번처럼 말이다.
"……."
고통이 너무 크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설령 비명을 지를 정신과 힘이 있다고 해도 세이야가 그렇게 비명을 질렀을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너무 거대한 고통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오, 온 몸이…… 하아…… 금이 간, 거엇…… 같네요오……."
한
참 후라는 자막과 함께 화면에 비춰진 세이야의 얼굴에는 여전히 고통이 남아있었다. 숨도 거칠었고 새하얗게 눈이 내린 주변과는 달리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 땀 때문에 체온이 낮아져서인지 세이야의 몸도 조금씩 떨림이 커지고 있었다. 셀프 카메라이기
때문인지 더욱더 떨림이 심했다.
"삐, 삔 정도로…… 끝나도록 해했지마는…… 여, 역시…… 현실으은…… 녹록치 므못하네요오……. 켈록, 큽……. 트흑히 발목, 이…… 굉장히……."
스
키 상급자 코스 같은 경사와 길이의 언덕에서 온갖 바위나 나무둥치랑 부딪치며 튕기며 내려온 사람이 삐는 정도로 끝나면 기적이다.
게다가 뼈는 둘째치고 전신 타박상 상태일 게 뻔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카메라에 대고 이러니 눈이 얼어붙은 응달을 지나가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하는 일이며, 특히 산세가 험한 곳에서는 사람을 잠깐이나마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 매서운 돌풍이 갑자기 몰아칠 수
있다는 둥의 얘기를 하고 있다니. 반쯤은 신경을 돌리기 위한 것이겠지만 무서운 프로 정신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세이야는 눈 속에 파뭍혀있어 찾기도 함든 주변에서 용케 부목으로 쓸만한 나뭇가지와 그것을 묶을 줄기들을 찾아냈다. 부상과 그로
인한 통증 때문인지 평소처럼 쉽게는 찾지 못했지만, 기어코 찾아내 응급처지를 마친 세이야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경탄을 쏟아냈다.
"
이런 방송이…… 시청률이…… 높아지고 있다니……. 현대사회의 윤리는…… 확실히 박살…… 났군요……. 혹시라도 동의하고 있는……
크윽…… 시청자가 계시다면…… 우선 채널부터 돌리세요……. 당신들 때문에…… 제가 지금…… 후우, 이러고 있는 거니까요……."
응
급처치 덕분인지 세이야의 목소리는 조금 차분해져 있었지만, 역시 부상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더 날카로운 말투였다. 하지만 이미
익숙해진 독설에 시청자들은 쓴웃음만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위화감이 시청자들을 업습했다.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세이야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셀프 카메라 영상이라 그것을 알아차리는 게 늦었던 것이다. 보통
진행자가 부상을 입으면 방송이 끝나지 않나? 어째서 지금 당장 구조대가 오지 않는 것일까.
"아마…… 이 방송이……
나갈 때 쯤이면…… 전 병원에 있거나…… 무덤에 있거나…… 여튼 그럴 겁니다……. 여튼, 제가 지금…… 자력으로…… 기어가고
있는…… 모습을…… 시청자분들이…… 보고계실 텐데……, 후우……. 별 거 없습니다……. 구르면서 무전기가…… 박살났고…… 다른
촬영팀이 여기로…… 오는 길이…… 하아, 없는 데다가…… 해가 떨어지기 전에…… 쉘터를…… 만들어야…… 크윽……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한 이유로 여고생이 눈쌓인 산을 기어서 내려가고 있는 장면이 방송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눈 덕분에…… 미끄러져서…… 좋은데……, 하아, 후우, 이 방송…… 대체 무슨 깡으로 법에 안 걸리고…… 계속 나갈 수 있는 건지…… 진짜 모르겠네요오!"
마지막에는 악바리를 내지르는 세이야의 모습에 시청자들도 같은 의문을 떠올렸다. 진짜 궁금하다. 대체 무슨 백이 있길래 이 방송이 계속되는 것일까. 시청률로 어찌할 수 있는 것 같지가 않은데.
어
찌되었든, 결론부터 말하지면 세이야는 무사히 귀환했다. 전치 4주의 부상과 함께. 천운으로 뼈는 무사했기 때문에 장기입원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방송은 굉장한 시청률과 함께 열화 같은 성원에 힘입어 재방송까지 하게 되었고, 병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세이야는 나라에 망조가 든 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고등학생 밖에 안된 애가 아파죽겠다고 징징거리면서 욕하는 방송을 좋다고 재방송까지 하다니. 이 나라에는 S만 가득한 건가……."
굳이 따지자면 일반 여고생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에 끌리는 게 아닐까. 하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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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가 무사하니 오랜 입원은 필요없다며 세이야는 불과 이틀 만에 퇴원했고, 곧바로 회사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사장을 비롯한 모두의 만류에 하루는 집에서 푹 쉰 후에 돌아왔다. 부상을 입고 난 후 거의 닷새 만이었다.
"류구코마치가 정상궤도에 올라갈 때까지 만이에요. 딱 이틀. 이틀만 바짝 일하고 한동안 쉴게요."
몸
여기저기 압박붕대와 파스로 도배한 세이야가 한 말이었다. 척 봐도 입원해 있어야 할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면 아무도 안 듣는 게
당연하지만, 이미 담당의사와 병원의 억류도 뿌리치고 나온 세이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병원에 입원해
있더라도 데스크 워크는 무리가 없고 그렇다면 병원이나 사무실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말에 사람들이 납득하고 넘어간 것도 있었다.
애초에 일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지만 그 문제를 스리슬쩍 넘겨버린 게 세이야의 수완이리라.
여튼 세이야의 귀환은 요
며칠 간 아이돌들의 스케쥴을 엉망으로 짜고 있던 프로듀서의 실수를 상당 부분 고쳐냈기에 회사 입장에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그
회사의 주인인 타카기 준지로 사장의 심정은 그리 편치 못했지만, 그도 결국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동생 딸아이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그래도, 병원에 있는 게 낫지 않을까?"
"하루카가 삼시 세 끼 사식을 넣어준다면 생각해볼게."
"……그, 그렇게 병원식이 맛없어?"
하루카의 물음에 책상 대신 소파에 앉아 류구코마치 활동으로 생기는 손수익표를 훑어보며 계산기를 두드리던 세이야는, 잠시 서류를 내려놓고 하루카를 바라보았다.
"……하루카."
"으, 응."
"절대, 아프지 마."
"어, 응, 응……."
야생에서는 벌레라도 씹어먹는 소녀가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로 맛이 없단 말인가.
"맛도 맛이지만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 건강해질 사람도 약해져. 병원은 그런 곳이야. 사람 기운을 쑥 빼가서 오래 있어서 좋을 게 없어."
들어앉아 있는 사람이나 밖에 있는 사람이나 힘들지. 세이야는 그렇게 덧붙였다. 시니컬하기로 소문한 세이야가 무덤덤하게 그리 말하니 굉장히 설득력이 높게 느껴졌다. 그때 급탕실 쪽에서 유키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 마실 사람 있나요?"
"아, 나."
"부탁할게."
"나도. 도와줄게."
세
이야, 코토리, 하루카 순이었다. 대답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하루카는 급탕실로 들어갔고, 잠시 후 두 잔의 컵을 들고 돌아왔다.
자신과 세이야의 것이었고 나머지는 유키호가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런 전조도 없이 하루카의 왼발이 미끄러졌다.
"우와아앗?!"
세이야는 하루카의 외침을 듣자마자 서류를 내팽개치고 하루카를 받아냈기에 다행스럽게도 잔이 깨지거나 뜨거운 차가 흘러넘쳐 화상을 입는 일은 없었다. 다만,
"……하루카……."
"아, 우와, 우와아앗?! 미미미미미안?!"
전신 타박상으로 전체적인 근력이 떨어져 힘이 부족했던 덕분에 하루카를 받아냈다기보다 반쯤 쿠션 역활을 하게 되어, 하루카의 팔꿈치에 어깨를 내려찍힌 꼴이 되버린 게 문제였다.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말로…… 해줘……."
"아냐 실수였어?!?!"
"하루카가 아무 것도 없는 바닥에서 넘어질 때 생기는 에너지를 1D(덜렁이/도짓코)라고 했을 때, 방금 전 일격은 약 13D라고 할 수 있어."
"훌륭한, 일격……."
"아니라니까?! 마미! 세이야! 진짜야?!"
그런 만담 같은 일들만이 일어나고 있었기에 오늘도 765프로덕션의 하루는 무사히 저물었다.
그리고 사건은 언제나 그렇듯 급작스럽게 다가왔다.
#####
"죄송합니다!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네!"
달
칵. 타박타박타박! 전화를 끊자마자 스케쥴 표로 달려간 코토리는 빠르게 그것을 훑어보고는 곧바로 프로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히비키의 스케쥴이 겹쳐있다. 그로 인해 이벤트 회사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왜 오기로 한 아이돌이 오지 않느냐고.
"그럼 그쪽은 히비키에게 맡기고, 이쪽에서 새로 보낼까요?"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세이야를, 아……."
코
토리가 자신을 바라보자 세이야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신 타박상으로 붕대와 파스로 도배하고 있는 몸이다. 이번 일은 댄스.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은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의상도 노출도가 제법 있는 옷인데 틈새로 붕대와 파스를 보인다니. 말도
안된다. 그걸 풀고 떼어낸다고 해도 푸른 멍과 상흔이다.
"그럼……."
타카네와 치하야가 있지만 이쪽은 댄스 레벨이 벅차다. 게다가 지금가면 안무를 외울 시간도 촉박하다. 그렇다면 남는 건 미키인데 문제는 미키가 의욕을 보일 것인가. 그러나 그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그럼 미키가 가도 돼?"
"미키? 정말?"
"응. 갈게."
"그럼 부탁할게. 준비해 줘. 아, 프로듀서. 이쪽에서는 미키가……."
"어쩐 일이야? 네가 직접 나서고."
치하야의 물음은 당연했다. 지금까지 미키가 스스로 나서서 일을 하려고 한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그런 의문에 미키는 씩 웃으며 말했다.
"미키, 조금 열심히 해보기로 했어!"
그 미소는 지금까지의 미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열정이 엿보였다.
#####
그리고 그렇게 미키의 활약으로 무사히 사건을 넘긴 다음 날.
세이야는 프로듀서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마스터P."
"어, 응."
"어른과 아이가 아니라, 같은 회사 동료로서 한마디 하고 싶은데, 들어주실 건가요?"
"……들을게."
결심을 다진 듯한 프로듀서의 대답에 세이야는 심호흡을 하고는,
"정신 못 차려요?"
어
마어마한 기세로 그렇게 말했다.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지른 것도 아니건만 연하에 남녀라는 차이는 단숨에 메꿔버리는 엄청난
기백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멱살이라도 잡힌 것 같았다. 과연 생존형 아이돌. 위대한 어머니Mother Nature와 싸우는
소녀의 기운이란 이 정도란 말인가. 상상 이상인 세이야의 기세에 프로듀서는 주먹을 꽉 쥐고 다음에 대비했다. 하지만.
"……?"
아무 것도 없었다.
"……끝, 이야?"
"끝인데요."
그 말에 되려 맥이 탁 풀려버렸다. 아니, 딱히 혼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말 그대로 한마디로 끝나버리니 묘한 기분이었다.
"호되게 당해서 기합 바짝 들어간 사람을 뭐하러 또 혼내나요."
"아하하……"
"그리고 사람은 그렇게 실수하면서 성장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다음에도 이런 실수가 나온다면, 감봉 3개월이에요?"
"명심하겠습니다."
잊고 있었다. 리츠코가 류구코마치로 빠져나가서 현재 회사 경리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게 세이야라는 것을.
자신이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세이야가 말했다.
"뭐, 이제는 좀 주변 돌아볼 여유가 생기셨으니까 이번 같은 실수는 안하시겠죠."
"응."
혼
자서만 열을 내다가 실패했던 요 며칠 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서는 안된다. 좀 더 아이돌들의 의견을 듣고, 그에 맞춰 함께해야
한다. 혼자서 노력해봤자 이번과 같은 결과를 낼 뿐이다. 그걸 뼈저리게 느꼈다. 잊지 말자. 그리고 반복하지 말자.
"그래요. 그러시면 돼요."
세이야는 소파에 늘어지듯 주저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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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모두가 모여 함께 본 류구코마치 첫 데뷔를 본 세이야는 모두가 환호하는 가운데 역시나 하는 얼굴로 TV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저게 아이돌이지."
일단 당신도 아이돌이지 말입니다. 타카기 세이야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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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5일, 그러니까 내일이 입대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병원식은 정말 맛없습니다. 사흘 전에 장염으로 링겔도 맞고 죽만 먹었더니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 피서여행 6화 가지고 몇 달을 끌었는지 모르겠네요. 단숨에 7화까지 워프! 하지만 입대! <-
- 여튼 다음 세이야는 휴가 때나 전역 후네요. 다음에 뵈요!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정말 연재 속도 느리구나...
[소드 아트 온라인] 승리의 열쇠는 대전차 오함마술
문넷에 올렸었던 소아온 팬픽 [?]
소드 아트 온라인 - 승리의 열쇠는 대전차오함마술
『 ……이상으로 소드 아트 온라인 정식 서비스 튜토리얼을 종료한다. 플레이어 제군들의─ 』
"아, 잠깐만. 질문 하나만."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소년에서 청년으로 향하는 중간 단계의 적절한 중저음은 제법 넓은 곳까지, 그리고 이곳에 모인 만여 명의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꿰뚫고 모두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물론 이 사태의 주범인 카야바 아키히코에게까지도.
『 ……무슨 일이지? 』
카아바 아키히코의 질문과 동시에 이곳에 모인 거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키리토는 그 목소리가 제법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동시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얼마나 기상천외한 인물인지를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아니, 그……, 그전에 댁을 뭐라고 불러야 되는 거야?"
『 카야바 아키히코다. 』
"음, 그래 GM양반."
그럴 거면 대체 왜 물어본 거야. 순간적으로 마음 속으로 울컥한 건 분명 한 두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거기에 대해 지적하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누가 뭐래도 '바닥에 두 자루 검을 꽂아놓고 그 위에 서 있는 사람'에게 그러한 지적을 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텐구가 신는 신발 같다고나 할까. 애초에 저렇게 설 수 있기는 한 걸까. 외모가 평범하다는 것 때문에 그러한 행동이 더욱더 눈에 띄었다.
여튼 소년은 그러한 사람들의 의문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너브기어 말이야, 고출력 전자파로 뇌를 삶는 거라면 알루미늄 호일을 끼워넣고 벗으면 되잖아? 그건 전기가 끊긴 것도 아니고 네트워크 회선이 끊긴 것도 아니고, 너브기어 본체를 파괴하거나 분리하는 것도 아니고 해체하는 것도 아니니까."
『 ……그런 일이 가능할 것이라 보는가? 』
"적어도 우리 어머니라면 가능할껄. 너브기어랑 머리 틈새로 철사에 호일 감아서 이렇게 슬쩍 파고 들어서, 이렇게, 이렇게 하면 끝."
실제로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를 묻는다면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사실상 혼자서 이 세계를 창조한 천재 카야바 아키히코에게 있어 그러한 방법은 이미 예상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치 정말로 손에 호일이 있는 것처럼 동작을 재연하는 소년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만에 하나 가능하다고 한다면, 정말로 무서울 정도로 현실적이고 단순하면서, 무식한 방법이었다!
『 그것 또한 너브기어 본체와의 강제 분리에 속한다. 』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카야바의 목소리에는 어처구니없음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뭐, 그럴 줄 알았어. 나도 생각해내는 방법인데 설마 해결방법이 없을까봐."
그럴 거면 대체 왜 물어본 거야. 다시 한 번 모두의 마음 속에서 울컥하고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 ……그럼, 플레이어 제군들의 건투를─ 』
"잠깐, 질문 하나만 더."
『 ……. 』
"아니 두 개 더……가 아니라 세 개다."
야 이 짜샤. 그렇게 생각한 건 비단 카야바 뿐만이 아니었으리라.
『 ……뭐지? 』
"일단 첫 번째로 말야, 그, 아까 GM양반 목적이 이 세계, 그러니까 소드 아트 온라인 세계의 완성이라고 했었지? 그리고 이 세계를 완성함으로써 목적은 완성했다고 했고?"
『 그렇다. 』
"그럼 이 세계는 적어도 당신 입장에서는 완벽한 거지?"
『 그렇지. 』
"그럼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지간에 그건 다 예상된 일들 중 하나라는 거지?"
『 ……그렇다. 』
"그래. 그럼 일단 첫 번째는 됐어."
뭐가. 뭐가 된 거냐. 그런 의문을 떠올릴 새도 없이 소년은 두 번째 질문묶음을 던졌다.
"그리고 다음으로, GM양반 마음에 안든다고 아이템 성능을 수정하거나 갑자기 난이도를 바꾸지는 않는 거지? 예를 들어서 사람들의 레벨업 속도가 너무 빠른 것 같으니까 난이도를 올린다던가, 아이템 드랍률을 낮춘다던가."
『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
"그럼 이후로 게임에 손대는 일은 절대로 없는 거야? 그러니까 운영자나 GM이나 개발자로서 개입해서 이 세계를 수정하지는 않는다는 거냐고?"
『 그렇다. 』
나중에서야 깨닫게 될 테지만, 카야바는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저 그렇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흠, 좋아. 그럼 마지막 질문 패키지. 버그가 생겨서, 혹은 서버렉으로 죽으면 어떻게 해줄 거야?"
그것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문제였다. 당면한 사태로 인해 집단공황상태에 빠져 떠올리지 못했던 문제에 사람들은 다시 소년을 바라보았다. 만에 가까운 사람들의 시선과, 이 세계─소드 아트 온라인의 절대자인 카야바 아키히코의 시선에도 그 소년은 씩 웃으며 말했다.
"완벽한 세계에 버그나 서버렉 따위는 있을 수 없고, 따라서 그렇게 죽으면 모두 플레이어의 책임이 되는가 싶어서 말이지."
『 그럴 일은 없다. 』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GM양반. 분명 눈앞에서 스킬 썼는데 안 나가고, 위치랙 걸려서 이상한데 떨어지고 하는 사람 나온다니까. 다른 때도 곤란하지만 전투 때 그러면 어떡할 건데. 아니 애초에 버그 없는 프로그램이 어딨어?"
진리였다. 천문학적인 숫자의 코드가 활용되고 있을 이 세계에 버그가 없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 버그로 인해 죽게 된다면.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죽게 된다면.
그러나 카야바는 그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 여기에 있다. 』
그는 말했다. 카디널 시스템이 기동중인 이 세계─소드 아트 온라인에서 버그나 렉으로 죽을 일은 결코 없다고.
이 사태의 주범이자 증오할 수 밖에 없는 상대의 말임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있다고 느껴졌다.
오직 단 한 사람만 빼고.
"님 패기 쩌내효. 어디서 그런 개구라를."
『 ……. 』
소년은 콧방귀까지 뀌며 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흔해빠진 10대 불량청소년 같았다. 물론 그가 진짜 불량청소년이었다면 이럴 담력은 있지도 않았을 테지만.
『 ……만에 하나 그러한 일로 인해 플레이어 제군들이 죽게 된다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도록 하지. 』
사람들의 술렁거림에 카야바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그렇게 약속했다. 그 속에는 '너희들이 예상하는 사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을 테니 일단 그렇게 말한다'는 속내가 담겨있었지만 그걸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케이. 콜. 나중에 구라치지 말어. 손모가지 날라가붕게."
소년은 손을 절단하는 시늉과 함께 씩 웃으며 카야바 아키히코를 바라보았다. 세계의 창조주이자 절대자임이 분명할 그에게 하는 행동치고는 너무나도 조심성이 없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런 것 또한 예상의 하나였던 것일까.
『 ……그럼 플레이어 제군들의 건투를 빈다. 』
정정하겠다. 나타날 때와는 달리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잽싸게 사라지는 그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그 역시 이 사태가 예상 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년─KIMCHIMAN 킴치맨이 예상 외의 인물이라는 것을 소드 아트 온라인 내부의 모든 사람들이 좋든 싫든 뇌리에 각인하게 될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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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야바 아키히코는 후회하고 있었다. 그때 그러한 약속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설령 그러한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 '놈'을 막을 수 있었을까. 분명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기어들어왔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서비스가 시작된지 오늘로 6일째. 그렇다. 고작 6일 밖에 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식 서비스 튜토리얼이 끝난지 6일이 지났다. 그러나 '놈'은 벌써 아인크라드 82층에 도달해 있었다. 레벨은 놀랍게도 여전히 1.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애초에 뭐하는 놈일까.
물론 정상적인 방법으로 도달한 것은 아니다. 그는 끝에 와이어를 연결한 검 여러 자루로 아인크라드 외벽을 타고 층을 올라왔다. 다시 말해서, '버그를 사용해서' 층계를 넘은 것이다. 당연히 원래대로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놈은 해냈다. 대체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손에는 크리스탈을 들고 한손에는 와이어를 매달은 검을 들고, 각 층의 끄트머리에서 특정한 동작─놈은 그것을 시몬 춤이라고 했다─을 취하면 윗층으로의 구멍이 뚫리는 것이다. 그렇게 구멍이 생기면 포탈이 열리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적인 구멍이 뚫리는 것이기에 그냥 올라갈 수 없다. 그리고 그때, 와이어를 연결한 검을 피크처럼 사용하여 올라가는 것이다.
물론 각 층계 끝 지역 아무데서나 열리는 건 아니다. 그야말로 무작위지만 '놈'은 노가다에 가까운 반복 끝에 그 길을 개척한 것이다. 게다가 정식으로 층이 개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몬스터는 생성되지 않는다. 일단 시스템상 구현해둔 배경이나 NPC, 아이템 등은 존재하지만 몬스터는 나오지 않는 것이다. 애초에 '놈'은 그런 건 전혀 신경쓰지 않고 층 뚫기만 계속했기 때문에 그런 건 알고 있지 않았다. 설령 몬스터가 나온다고 해도 신경 쓰기는 했을까 의문이다.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명백한 버그 플레이였다. 게다가 카디널 시스템이 이 현상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놀랍게도 '놈'은 다수의 유저들이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미세한 시간차만 두고 레벨업하여 시스템이 그쪽에 집중하는 타이밍에만 프로그램 구멍을 뚫으며 시스템을 속여왔던 것이었다. 모니터링해본 결과 계획한 게 아니라 그저 우연의 일치였지만, 그래서 더 나쁘다. 본능적으로 버그를 사용한다는 말이지 않은가. 프로그래머의 숙적이라 할 수 있는 놈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강제 로그아웃─다시 말해서 사망처리 시키고 싶었지만 첫날한 약속으로 인해 그럴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시간을 되돌려 엿새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 세계의 창조주인 그에게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카디널 시스템은 이러한 프로그램 구멍을 통한 층계 돌파를 명백한 악의적 프로그램 사용으로 판단하고, 이 방법을 완전히 막아버린 후 '놈'을 1층으로 되돌려 보냈다. 이 처사에 '놈'은 GM의 간섭이니 약속이 다르다니 등의 얘기를 했지만 눈앞에 나타난 카야바가 '이것은 GM의 간섭이 아니라 관리 프로그램이 작동한 것일 뿐이다'라는 얘기를 듣고는 납득했다. 온갖 진상짓을 다 하리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지만 일단 '놈'의 흥분을 가라앉혔다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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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룸에서 장작 6개와 성냥으로 모닥불을 만들고 거기에 힐링포션을 부은 후 초보자용 가죽 신발을 올려둔다. 그러면 그 모닥불은 오브젝트로 설정되어 최초의 설치자가 아니면 제거할 수 없는 버그가 있었다. 게다가 겉으로 보기에 불길은 무릎 높이까지밖에 안 올라오지만 그 누구도 그 위를 넘어갈 수 없었다. 즉 임시로 절대 깨지지 않는 벽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사용자는 킴치맨이었다.
[감히, 감히 하등한 인간이이이이이이!!!!!!!!]
"하하하하하하!!! 울부짖어라 멍청한 악마야!!! 하하하하하하하!!!!!!"
보스를 구석에 몰아넣고 모닥불 버그로 가둔 뒤 그 틈새로 자신의 전용무기가 된 오함마를 휘둘러 보스를 잡던 킴치맨의 모습은, 바로 그가 이 층계의 보스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사악했다.
여튼 그를 발견자가 아니라 사용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처음 써먹었기 때문이며, 도대체 언제 그런 걸 알아냈는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자신도 언제 그런 걸 알게 되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어, 그냥. 왠지 그렇게 해보고 싶었어. 왠지 하면 될 것 같았거든."
언제 그런 걸 알아차렸느냐는 키리토의 질문에 킴치맨은 그렇게 대답했다.
"어차피 알아봤자 이미 써먹었으니 다음 번에는 못쓰게 될 테니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잖아?"
맞는 말이었다. 전설의 6일 82층 돌파 이후, 그가 일으킨 버그는 거의 한 두 시간이면 완전히 디버그되었다. 분명 굉장한 처리속도였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그러한 처리속도보다는, 그 처리속도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버그를 일으키는 킴치맨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혹자는 그러한 킴치맨의 모습을 보고 '그의 버그는 마치 인간의 3대욕구와 같은 레벨일 것이다' 라고 표현했다.
그렇기에 키리토는 두어 시간 후면 사라질 이 완전한 보호벽을 보며 말했다.
"다시 말해서 버그로 여기 보스를 잡는 건 이번 뿐이라는 거네."
"응? 아니. 시험해볼만한 버그는 꽤 많은데?"
"……어?"
쉽게 볼 수 없는 키리토의 얼빠진 표정에 킴치맨은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걱정하지마. 이 허접한 악마 보스 잡을 때 시도해볼만한 치명적인 버그는 대충 13개 정도 있으니까."
"……."
"후후후, 카야바 아키히코 녀석, 뭐가 완벽한 세계냐. 이토록 수많은 버그가 살아숨쉬는데. 음, 아니군. 현실도 수많은 꼼수가 존재하니까 이것도 나름대로 완벽한 세계로군. 그래, 디버깅 프로그램이 사회집단의 규약과도 같은 위치에서 개체의 불법적 행동을 감시하고 행동을 강제하는 거니까……."
뭔가 자신의 세계에 빠져든 그의 모습에 키리토는 생각했다. GM─카야바 아키히코와 카디널 시스템이 오늘도 불을 뿜겠구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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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벼라 이 괴물아!"
"무오오오오오오오──" 퍼억! "─────음모오오오오오오오?!!??!?!?!"
어느 새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미노타우로스의 아래로 파고든 킴치맨은 단숨에 미노타우로스의 무릎에 그의 무기가 된 오함마를 휘둘렀다. 압도적으로 높은 힘 스탯과 숙련된 동작의 파괴력은 거대한 괴수의 무릎을 단숨에 부숴놓았다. 무릎을 잃고 쓰러진 미노타우로스가 고통의 비명을 내질렀지만,
퍼걱!
"쿠ㅤㅎㅡㄾ──……."
킴치맨의 오함마가 미노타우로스의 두개골을 박살냈다. 상당히 끔찍한 광경이었기 때문에 아스나는 무심코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뇌리에 박힌 그 장면은 계속해서 눈앞에 아른거렸다. 게다가.
"흐헤헤헤헤, 훌륭한 사골을 얻었군. 후후후후후……."
푸욱. 퍽. 끼익. 카카가각. 쯔억. 콰득, 콰드드극.
뼈와 살이 갈라지고 찢어지는, 등골이 오싹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귀에 파고들었다. 킴치맨이 항상 가지고 다니는 만능 단도로 미노타우로스를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HP가 0이 된 몬스터의 시체는 곧바로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사실에 굉장히 분개하며 이건 게임도 뭐도 아닌 되다만 물건이라며 카야바 아키히코를 욕했다. '현실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며, 이렇게 흔해빠진 게임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들 '아, 그런 게임이 유행했었지.' 하고 사라져버릴 물건이라며 한탄을 쏟아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몬스터 시체를 굳이 갈무리하지 않아도 아이템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욕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한탄이 이 세계의 창조주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몬스터 시체는 아이템창에 들어오는 돈과 아이템과는 별개로 그 생물체의 신체 일부를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당신 정말! 역시 뭘 좀 알아! 날 가져요 엉엉!"
『 ……필요없다. 』
그러한 사실을 공표하자마자 곧바로 태도를 바꾸는 킴치맨의 모습에 그는 진저리가 난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어찌되었든 그 이후 킴치맨은 열광적으로 모든 몬스터를 때려잡고 그 시체를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고기, 가죽, 뿔, 뼈, 내장 등 재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모든 것을 뜯어냈다. 혹자는 그러한 그의 모습에 '그 녀석 언젠가 이 세계 전체를 약탈하고 다닐 것이다.' 라고 예언하였다.
어찌되었든 그는 미궁의 보스인 미노타우로스를 쓰러뜨렸다. 그것도 모자라 그 시체를 완전히 해체하고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쥐어짰고, 그제서야 미노타우로스의 잔해는 빛과 함께 사라졌다.
"아스나."
"어, 응?"
"미노타우로스는 쇠고기 맛이야."
"……헤?"
"그것도 A등급. "
"그걸 어떻게 알, 히익?!"
아스나는 자신의 질문에 고개를 돌린 킴치맨의 얼굴을 보고는 비명을 내지를 뻔 했다. 완전 피칠갑한 얼굴에 음미하는 듯한 표정으로 미노타우로스의 고기라 추정되는 것을 씹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무, 뭘 먹는 거야?!"
"소머리 고기."
"왜?!"
"먹을 수 있으니까? 왠지 이 녀석 해체하다보니까 육회 같아 보여서."
"그렇다고 먹지마?!"
"!"
"으, 왜?!"
"이 고기, 씹을 수록 고소해. 질감이 쉽게 변하지 않아. 마치 쇠고기맛 껌을 씹는 듯한, 그러면서도 고기의 질감은 충분히 살아있는! 음! 오오! 오오오! ㅤㅃㅡㅎ릴리언트! ㅤㅃㅡㅎ완타스틱! A++! A+++++++!!!! GM양반 당신 정말! 엉엉! 날 가져요 엉엉!"
진심으로 울고 있는 킴치맨의 모습에 아스나는 어서 집에 돌아가 쉬고 싶다는 생각과, 저렇게 극찬하는 미노타우로스 고기가 무슨 맛일지 궁금해하는 자신의 심정에 약간 자괴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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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치맨이 지금까지 휘둘러왔고 앞으로도 휘두를 무기인 오함마는 사실 무기 카테고리에 속해있지 않다. 아니, 애초에 오함마라는 아이템이 존재하지 않는다. 저건 어디까지나 '오함마 형태를 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질 제련체'다. 강철에 탄소를 섞듯, 그보다는 패밀리 레스토랑 드링크바에서 모든 음료수를 적절한 비율로 섞다보니 나온 정체불명의 무언가와 비슷한 것이다. 그러한 물건인 주제에 왠지 모르게 가끔씩 빛을 내기도 하고, 어떨 때는 꼭 폭탄처럼 터질 듯 빠르게 점멸하기도 한다. 그런 기괴한 물건이다.
만들어낸 본인도 두세 시간 뒤면 버그로 판정되어 사라지리라 예상했고, 그렇기에 킴치맨은 공중날기 버그를 사용해 도시 상공에 올라가 투포환 던지기와 같은 느낌으로 빙글빙글 돌다가 오함마 비스무리를 내던져버렸다. 물론 사람이 전혀 없는 방향이었고, 그의 기괴한 스텟과 버그로 인해 잠시 꼬여버린 물리엔진 덕분에 오함마 비스무리는 잘 날아가다가 도시 벽 쯤의 위치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역시 버그였군. 킴치맨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도시로 내려왔다.
그랬기에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던져버린 오함마 비스무리가 악명높은 PK길드 래핑 코핀의 본진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을 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건 전혀 의도되지 않은 버그였다. 하지만 본거지, 그것도 길드장을 비롯한 핵심간부가 모여있는 중심부에 갑자기 나타난 그 물체와 그 표면에 새겨진 단어─KIMCHIMAN을 본 순간 래핑 코핀 길드원들은 집단 패닉을 일으키며 본거지에서 뛰쳐나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 분명 자신들에게 좋은 일은 아닌 무언가가. 애초에 킴치맨과 엮여 좋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해안가에서 내 마음에 드는 모래알 한 알 찾는 것과 같은 확률이다. 그리고 그렇게 무질서하게 도망쳐 나온 그들을 맞이한 것은,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 모인 대규모 토벌대였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토벌대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여담으로 래핑 코핀의 본진에서 발견된 오함마 비스무리로 인해 사람들은 킴치맨도 일원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지만, 그의 투포환(…)을 지켜본 유저들이 그의 결백을 증언해주었기에 킴치맨은 무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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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버그 플레이는 생각나면 올려보겠습니다.
책 사긴 했지만 1권만 봤고, 애니는 건드리지 않아서 오류가 있을 것 같지만 뭐 어때요. 애초에 주인공이 버그캐인데 [...]
소드 아트 온라인 - 승리의 열쇠는 대전차오함마술 2.
"지금 당장 쭈그리고 앉아서 벽에 붙어! 그리고 그대로 일어나!"
"어, 에? 무슨……?"
"시간 없어 빨리!"
그렇게 외치며 킴치맨은 곧장 가까운 기둥으로 달려가 곧바로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마치 앞에 구멍이 있는 것처럼 꿈지럭거리며 기어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대체 이 급박한 상황에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빨리!"
"뭐야, 뭔데 그게?!"
"벽뚫기! 이렇게 하면 전체공격을 피할 수 있어!"
킴치맨이 몸은 돌릴 수 없는지 고개만 돌려 그렇게 외치자 모든 유저들이 벽을 향해 달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버그의 화신이자 전자세계라는 전장에서 미쳐 날뛰는 한 마리의 체셔 고양이인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방금 전 킴치맨이 했던 것처럼 벽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바싹 붙은 후 그대로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와 동시에 공략부대원들 모두 확연한 이질감을 느꼈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지금 정상적이지 못한 방법─버그를 사용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곧바로 이어진 보스의 전체범위공격이 지나갔음에도 아무런 데미지를 받지 않았다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나올 때는 반대로 하면 돼! 쭈그려 앉아서 뒤로 움직여!"
그야말로 번개같은 동작이었다. 나오기가 무섭게 팔다리를 흔드는 요란한 동작으로 크게 점프하며 보스에게로 달려가며 킴치맨은 외쳤다.
"입던은 점프가 개념!"
어질형 검사도 아니건만 킴치맨은 눈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도로 유연하고 빠르게, 그러니까 마치 WHEEL BUG를 떠오르게 하는 끔찍하게 잽싼 동작으로 보스에게 달라붙어, 형용할 수 없이 두려운 속도로 꿈틀거리며 오함마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분명히 감정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을 보스가 경기를 일으키며 마구잡이로 자신의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훗날 공략전에 참가했던 혹자는 그러한 보스의 모습을 '킴치맨이라는 WHEEL BUG가 달라붙어 필사적으로 떼어내려고 하지만 그러지 못해 광란 상태에 빠진 심약한 인간'같다고 표현했다.
제법 많은 HP를 깎아낸 킴치맨은 그제서야 떨어져 나와 다시 한 번 벽으로 달려갔다.
"뭐하고 있는 거야! 다시 달라붙어! 놈이 전체공격을 할 거라고!"
""""""너 때문이잖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모두가 그렇게 외치며 전체공격을 피하기 위해 벽에 달라붙었다.
훗날 공략부대원들은 생각했다. 그때 그렇게 외쳤을 때, 보스도 왠지 같이 외쳤던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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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불려나온 키리토는 대뜸 돈을 받았다. 10만 콜. 가볍게 주고받기에는 너무나도 큰 금액이었고, 준 사람 또한 문제였다.
"……왜?"
"잔말말고 일단 받아봐."
온갖 버그로 기행을 일삼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그와 연관되어 불이익을 받은 적은 없었기에 키리토는 말없이 돈을 받았고, 그와 동시에 킴치맨은 곁에 있던 다른 사람과 거래창을 열었다. 이번에도 10만 콜이었다.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걸까. 킴치맨은 그렇게 지나가는 사람마다 거래를 걸어 10만 콜씩 돈을 쥐어주었다. 그것은 키리토와 마찬가지로 불려나온 아스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돈을……?"
"일단 받아봐."
최상급 식재료인 라구 고기가 10만 콜이다. 그런 돈을 벌써 40번 가까이 정도 나눠준 셈이다. 아스나의 집 가격과 엇비슷한 거금인 셈이다. 아니, 그의 성격과 지금까지의 활동에 비추어 봤을 때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줬을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은 돈을 번 겐가?"
앞선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불려나온 히스클리프 역시 의문스러운 듯한 얼굴로, 동시에 희미한 불쾌감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지만 킴치맨은 나중에 대답해주겠다며 다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뿌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그렇게 돈을 얻은 거야?"
저녁노을로 거리가 주황빛으로 물들 때쯤에 키리토가 킴치맨이니까라는 납득 반, 킴치맨이라도라는 어이없음 반으로 그리 물었다. 당연한 질문이었다. 현실의 자원은 유효하다. 그것은 가상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도저히 개인이 벌어들일 수 없는 거대한 금액이라는 것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그 유효 범위가, 전자세계─실존하지 않는 허구의, 숫자로만 존재할 뿐인 거대한 '돈'의 범위가 현실을 아득히 상회할 수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보유 콜이 대체 얼마길…… 래……."
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
화면 창을 뚫고 나온 숫자의 향연에 키리토와 아스나, 그리고 히스클리프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킴치맨은 그러한 두 사람의 모습에 씩 웃었다. 눈이 이상해진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상한 단위였다. 게다가 방금 전까지 마구 퍼 준 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9 이외의 숫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사실상 무제한이지."
"……어떻게……, 아니, 물론 버그겠지만……."
"아니, 설마하니 나도 이 허접한 돈 버그가 될 줄은 몰랐어. 그래서 시험삼아 제곱 단위로 복제하다보니까 이렇게 되버렸지."
아무 것도 아닌 양 말하지만 이건 이 세계의 경제 시스템을 뿌리부터 뒤흔들 수 있는 엄청난 행위였다. 사실상 무제한인 NPC상점의 물건들을 제외하고 나면 유저들이 거래하는 모든 물건들부터 시작해서 주인없는 모든 건물들을 전부 다 한 사람이 소유할 수 있다는 얘기다. 화폐경제 시스템 자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뭐, 돈이 필요해지면 나한테 얘기해."
"그전에 버그로 처리되서 사라질 것 같은데."
"음, 통화 시스템이 어떻게 구축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복제화폐를 각 층에 마구 뿌리고 뒤섞었으니까 이제 분리도 못하고 회수도 못 할껄?"
"……어떻게?"
아스나의 의문에 킴치맨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각 층 NPC상점에 가서 세 자리 네 자리 단위로 물건 사고팔고 사고팔고 반복하고, 너희들 포함해서 유저들한테 돈 막 뿌리고, 하여튼 그렇게 막 뿌려서 다들 돈 적어도 1콜은 썼을 거 아냐? 이제 분리나 회수는 불가능하지. 유일한 방법은 서버 전체 백섭이겠지만, 이 게임은 그럴 수가 없지."
"……."
"……."
그야말로 완벽한 범죄였다.
키리토와 아스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못한 체 킴치맨을 바라보았고, 히스클리프는 "오늘도 야근인가……." 라는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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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아트 온라인에서의 전투는 소드 스킬을 얼마나 잘 쓰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그렇다고해서 소드 스킬을 쓰지 않으면 데미지를 입히지 못한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효율이 떨어진다. 일반 공격은 한 번의 공격에 1의 데미지밖에 주지 못하지만 소드 스킬을 사용하면 10의 데미지를 줄 수 있다. 그만큼 큰 차이인 셈이다.
어찌되었든 데미지를 입히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기에 버그 또한 존재한다.
최고급 장작 8개와 피닉스의 불꽃으로 만든 장작불에 요리용 올리브유를 듬뿍 바른 아이템 제작용 망치를 4초 동안 올려둔다. 그러면 불타는 망치가 만들어지는데 이것을 집어던지면 맞은 몬스터는 5초 동안 제법 큰 불데미지를 받는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이 망치는 상대가 누구든지간에, 그러니까 일반 몹이든 보스든지간에 3초간 스턴에 걸리게 하고 4m 정도 넉백을 시키는 효과를 가진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게다가 무조건적으로 망치를 던진 사람에게 어그로 우선순위를 배정한다.
터엉!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뒀던 망치를 던지자 보스가 스턴에 걸리며 밀려났다.
[어째서…….]
"너희는 항상 그렇게 똑같은 말만,"
터엉!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뒀던 망치가 명중했다.
[이 하등한 인간이!]
"하는 것 같아. GM양반이 AI에 좀 더 투자를,"
터엉! 중지와 약지로 물고 있던 망치가 허공을 갈랐다.
[아직이다! 나는 아직!]
"했으면 다양해졌을 것 같은데 말이야!"
터엉! 약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마지막 망치가 보스에 직격했다. 그와 동시에 킴치맨은 재빠르게 달려가 왼손에 쥐고 있던 오함마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메가 스터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언!!!!!!!!!!!!!!!!!!!!!!"
콰직! 킴치맨은 왼손에 쥐고 있던 오함마를 양손으로 꽉잡고, 보스의 '엄지발가락'을 정확하게 내리찍었다. 훨씬 더 큰 데미지를 줄 수 있는 다른 부분들은 모두 제껴버리고 집요하게 그 부분만 노리고 있었다. 이는 몇 번이고 반복된 일이었기에 공략대원들은 익숙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뒤에 이어진 보스의 비명에 차라리 얼른 잡아죽이는 게 사람다운 일이 아닐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래, 비명소리는 제법 다양하네."
그냥 얼른 죽여 이 미친놈아. 모두의 생각은 동일했다.
결국 이러한 일이 두어 번 반복된 후, 더 이상 이 참극[?]을 지켜볼 수 없다 판단한 유저들은 재빠르게 보스를 잡은 후, 가지고 있던 포션 등으로 조촐한 위령제를 올렸다. 그리고 킴치맨은 그러한 유저들 뒤에서 조용히 보스의 시체를 어떻게 갈무리할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만해 이 미친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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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보스는 보스룸에 가기 위해 미궁을 돌파해야했다. 가는 길에는 끊임없이 몬스터가 리젠되었는데,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지만 정신적으로 피로해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공략팀에 킴치맨이 들어간 순간, 몬스터들은 언제 그렇게 튀어나왔었냐는 듯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 유저들은 기뻐하면서도 불길한 징조가 아닐까 불안해했다. 하지만 킴치맨이 매우 불만스러운 듯한 얼굴로 입을 열자 그 불안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왠지 몬스터들이 나를 피하는 것 같지 않아?"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클라인이 말도 안된다는 듯이 말하자 킴치맨은 요 최근 동안 겪은 일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1층 필드에 나갔는데, 왠지 몬스터들이 슬금슬금 멀어지더라고. 선공 아닌 애들은 안 건드리면 그냥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그러잖아?"
"그렇지."
"그런데 왠지 나를 보더니 조금씩 멀어지는거야."
"허어……."
"게다가 선공인 몹들도 내가 노골적으로 눈앞에서 얼쩡거려야 겨우 인식하고 달려들고, 그게 아니면 가까이 오지도 않고. 미궁 던전 같은데서 리젠되는 애들은 뭐시냐, 왠지 '아 X바 오늘 일진 거지같네.' 같은 표정 한 번 짓고는 전투준비하고. 하여튼 좀 그래. 오늘도 그렇고. 덕분에 몬스터 실험이 좀 힘들어서 짜증나지."
투덜거리는 킴치맨의 말에 곁에서 걷고 있던 히스클리프가 묘하게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포의 피드백이 몬스터 프로그램 침투했을지도 모르네. 자네가 한 악행에 프로그램이 변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
"음, 내키지 않는데……. 난 언제나 선량한 플레이어였는데."
누가 선량한 플레이어냐.
"흥. 영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세계의 완성도 측면에서 봤을 때는 훌륭하다고 밖에 못하겠군. 개인의 영향력 피드백이라는 측면에서는 훌륭해. 마음에는 안 들지만."
그러한 킴치맨의 말에 히스클리프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듯한 얼굴로 킴치맨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프로그램이 스스로 변화해버릴 정도로 거대한 영향력─버그를 행사한 프로그래머의 숙적이, 자신이 그토록 꿈꿔왔던 이 세계의 완벽함을 인정해주었다는데서 온 감정이라는 걸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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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걸 필드보스라고 하던가. 전력을 다해 도망치면서도 시리카는 그런 생각을 했다. 옆에는 킴치맨이 마치 흥겨운 듯 깡총깡총, 하지만 결코 깡총거림으로는 낼 수 없는 속도로 달리는 킴치맨이 있었다. 쫓기는 상황이건만 이러한 그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대체 그게 뭐에요?!"
"스머프식 전투기동이라고 하지! 가가멜을 쓰러뜨리기 위해 푸른 난쟁이들이 완성시킨 전설의 보법이야!"
달리면서 웃느라 호흡이 흐트러졌음에도 외칠 수 밖에 없었던 물음에 킴치맨은 그렇게 대답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쉽사리 배울 수 있는 기술은 아니지만 일단 배우고 나면, 고개 숙여!"
갑작스러운 외침이었지만 시리카는 군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럽게 흐트러진 균형에 결국 앞으로 구르며 넘어져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시리카는 갑작스레 명령한 킴치맨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아니었다면 거대한 도마뱀과도 같은 그 보스의 입이 자신의 머리를 물어뜯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제기랄, 오함마 메가스턴이 패치되었군! 잊지 않겠다 GM양반! 카디널 시스템! 일단 넉백은 살려뒀으니 다행이지만!"
킴치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약 30m 정도 밀어냈으나 공격적인 몸짓과 함께 자신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집채만한 도마뱀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잠깐 시리카를 바라보고는, 놀랍다는 얼굴로 외쳤다.
"시리카! 너 테이머였어?!"
"……지금까지 뭘로 알고 계셨어요?!"
"난 닌자인 줄 알았어!"
"그런 직업 없잖아요?! 게다가 제 어딜 보면 닌자라는 소리가 나오는 건가요?!"
"내 감! 제길, 내 감도 이제 다 죽은 건가! 아니, 여튼 테이머라면 다행이야!"
오함마 공격에 넉백당했다는 걸 아는지 20m 거리에서 노려보고만 있는 도마뱀의 모습에 킴치맨은 오함마를 땅에 박아 세우고는 아이템 창에서 강철 부츠 두 켤레와 강철 투구 하나를 꺼냈다.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던지고 아이템 창에 넣는 것은 거의 그와 동시였다.
"잘 들어 키리카. 지금 내게는 고속이동과, 몸통 박치기, 무서운 얼굴, 어, 그리고 마지막이…… 시부럴, 뭐였더라……. 아 그래, 파괴광선이 있어. 4족보행을 시작하면 말을 할 수가 없으니까 네가 나한테 명령을 내려줘야돼. 알겠지?"
"모르겠어요!"
"괜찮아! 포●몬 하던 것 같은 감각으로 하면 돼! 저 놈의 패턴은 강 약 중간 약이니까 무서운 얼굴, 몸통 박치기, 고속이동, 파괴광선 순으로 계속 명령하면 돼. 알겠어?!"
"어, 그러니까……."
"좋아. 못 외웠으면 이 쪽지 순서대로 해."
킴치맨은 자신이 말한 기술 순서를 그대로 휘갈겨 적어 시리카에게 내던지다시피 넘겨주었다.
"그리고 패턴이 바뀌면 그냥 네 눈대중으로 기술을 쓰게 해. 설명은 짧게 할게. 고속이동은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몸통 박치기는 말 그대로 냅다 들이 박는 거야. 난 조금 있다가 투구를 써서 괜찮을 터니까 된다 싶으면 신경쓰지 말고 써버려. 그리고 무서운 얼굴은 녀석에게 스턴을 거는 기술이야. 쿨타임이나 횟수 제한이나, 하여튼 포●몬 같은 제한이나 버그로서의 한계가 있을지도 몰라. 잘 써 줘. 그리고 파괴광선은 말 그대로 파괴광선이야. 아마 다섯 번이 한계일 거야. 참고로 날 기르기 위해서는 그냥 내 질문에 '우훗, 멋진 남자!' 라고만 하면 돼."
"어어, 네……."
시리카의 얼떨떨한 대답을 들으며 킴치맨은 투구를 쓰고, 양손발에 강철 부츠를 신었다. 그렇다. 발 아이템인 강철 부츠를 손에도 끼운 것이다. 그리고는 마치 벤치가 있는 듯한 자세를 투명의자로 해내는 경이롭다고 해야할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야할지 모를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기르지 않겠는가."
"……."
시리카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그래픽이 굉장히 이상하게 변했던 것 같은데……. 잘못 본 걸까. 그러나 길게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도마뱀의 으르렁거림을 들은 시리카는 킴치맨을 보며 방금 전 그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어, 그러니까, 우훗, 멋진 남자……?"
"음!"
그 말에 킴치맨은 기괴한 투명의자 자세를 풀고 양손발로 서 도마뱀을 노려보았다. 다시 말해서, 4족보행이라는 소리였다.
"……."
시리카는 물론이고, 저 거대 도마뱀도 이 상황이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것처럼 보였다.
"……저기……."
"킴치! 킴치킴치!"
"……그러니까……."
"킴치킴치킴치! 킴치킴치!"
"……."
4족보행을 하면 말을 못한다는 건 이런 얘기였나. 아, 진짜 이제는 아무래도 좋아. 그렇게 생각하며 시리카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외쳤다.
"가자 킴치맨몬!"
"킴치!"
그렇게 장렬한 포●몬 배틀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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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병, 별의 바다, 아이돌과는 달리 여전히 1권 밖에 안 읽어서 정식 연재 기약은 없습니다. 그래도 진지하게 고민 안하고 막 쓸 수 있어서 좋아하기에 고민중이긴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각종 게임 버그 제보받습니다.
[스트라이크 위치스] 프로젝트 위치스!
[스트라이크 위치스] 프로젝트 위치스!
[스트라이크 위치스] 프로젝트 위치스! 2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 않나.
이제는 입원실을 내 방으로 삼는 게 좋을까. 아니면 내 방을 입원실화 시키는 게 나을까. 물자관리 측면에서 보자면 후자가 낫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아무래도 그건 무리겠지. 음. 그렇다고해서 전자를 선택하자니 있는지도 의문인 보안점검 같은 게 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한테 민폐다.
"그런 의미에서 역시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뭔 의미에서?"
"팀의 체력을 책임질 인간 성기사가."
"……."
"왜?"
내 물음에 메이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체력을 책임진다는 건 일단 우리가 맞아서 체력이 깎인다는 게 전제 아냐?"
그런 말을 내뱉었다. 그런가. 그렇군. 그렇다면.
"좋아. 실드로 바꾸자. 이지스가 필요해."
"방공체계라는 개념이 나오려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
"지금 도입해. 그리고 리베리온의 우월한 국력으로 공돌이를 갈아넣어서 만들면 1년 안에 나오겠지."
"되겠냐."
평소라면 이쯤에서 나와 메이가 석양이 물든 바닷가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제법인데." "너도 마찬가지야." 하는 열혈청춘틱한 싸움을 시작했을 타이밍이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무리다. 왜냐면 둘 다 붕대를 칭칭 감고 침대에 누워있으니까. 난 양쪽 다리에 평타 직격이고 메이는 왼쪽 어깨 관통상. 네우로이 빔의 독성 침투는 옵션이다. 마녀가 아니었으면 당연히 골로 갔을 중상이다. 제기랄. 이 작전 입안한 녀석 내 반드시 대서양 바닷물에 내동댕이 쳐주겠어. 그런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자니 메이가 그땐 반드시 자신에게도 알려달라고 말했다. 그래. 해치우자!
뭐, 그건 그렇다치고. 베로니카 상태가 영 심상치 않다. 이쪽도 오늘 체인소드로 네우로이의 빔을 가르고 코어를 개발살 내는 활약을 했는데,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서보암 경파, 우측 옆구리 스침, 스트라이커 유닛 경파라는 기록을 달성했다는 거다. 덕분에 전투 끝나고 복귀하자마자 테이크다운. 곧바로 입원실로 실려왔다. 그리고 저쪽 침대에서 실시간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하고 있다. 평소에는 관운장마냥 마취 없이 살을 째고 뼈를 긁어도 신음소리 하나 안 내던 아가씨가 그랬다는 건, 이거, '그거'로군.
"'그거'지."
"'그거'네."
나와 메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프리카에서 로니카가 있던 부대는 항상 박살났다지?"
"그러면서도 본인은 멀쩡했었고. 그게 놈들 작전이었던 것 같지만, 이제 전술을 바꾼 것 같은데."
"덕분에 본인도 깨지고 덤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도 깨진 거구만. 나중에 아프리카 가서 그 아저씨 다시 만나면 이제 슬슬 일할 때가 되지 않았냐고 좀 쪼아봐."
"내가 쫀다고 되겠냐."
그래도 언젠가 만나면 한 번 거하게 쪼아보자고 생각하며 나는 오른손으로 주머니를 뒤적여 주사위를 꺼냈다. 그 모습에 메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좋아. 해치워버려."
"그렇게 쉬운 게 아닌데……. 『강제 집행(Game Set). 선공 양보(Batting Second). 목적은 강제 퇴거(Eviction). 시작(Start).』"
언젠가 꿈에서 배운 단어를 읊으며 주사위를 던졌다. 허공에 떠오른 주사위는 순간적으로 격하게 회전하더니 5라는 숫자를 위로 한 체 침대 바닥에 떨어졌다.
"호오, 세게 나오는데."
"그러게."
나는 다시 한 번 주사위를 던졌다. 방금 전과는 달리 힘없이 돈 주사위는 침대 바닥에 떨어졌다. 숫자는 2. 졌다. 그와 동시에 베로니카의 상태도 나빠졌다. 숨이 막혀오는 것 같다.
"엑, 뭐야. 질 때도 있었어?"
"당연하잖아. 맨날 이기는 약속된 승리의 검 같은 게 아니라고."
"그 검 가지고서도 결국 브리튼은 멸망했던 것 같은데. 여튼. 그럼 끝이야?"
"아니."
머리를 긁적이며 나는 다시 한 번 주사위를 쥐었다. 그리고 말했다.
"『2연격(Double strike).』"
던져 나온 주사위의 눈은 6. 합은 8. 이기고도 남았다. 그와 동시에 일그러져 보이던 베로니카의 침대 위 풍경이 정상적으로 돌아왔고, 메이는 YES! 라고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감사합니다 주사위의 신이시여Thanks Dice God. 이걸로 한 건 해결. 자, 그렇다면.
"우리 꼬마 아가씨들은 어쩌고 있으려나."
중환자인 우리와는 달리 경미한 타박상이나 찰과상 정도로 끝난,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마음고생하고 있을 제이니와 쟌을 생각하며 나는 주사위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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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늘을 날던 사람이 며칠, 혹은 몇 달 동안 움직이지 못할 부상을 입고 돌아온다.
그 중에는 부상의 후유증으로 몇 년, 혹은 몇 십 년, 아니면 평생 고생하며 살아갈 사람도 있고, 갑작스레 영원히 눈을 감기도 한다.
"……."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 수많은 사람들만큼 수많은 부상자들을 보았다.
그토록 많았던 사람들과 헤아리고 싶지 않을 만큼 많은 부상자들과, 절대 잊지 못할 사망자들을 기억한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나였다.
"……니……."
잊고 있었다. 분명 잊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이곳에 와서 언제 어디서든 그 어떤 역경이든 헤치고 나올 것 같은 이들과 함께 하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는 안되건만.
"……이니……."
아무 것도 몰랐다는 건 결코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걸. 내가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걸.
이번에도. 내 실수 때문에.
"제이니 씨?"
"……어? 어, 응."
상념에 잠겨있던 의식을 떠올리자 눈앞에 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그렇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인 순간, 붕대를 감은 손이 보였다. 쟌의 손이다. 무리하게 클레이모어를 휘두른 여파다. 옷에 가려져 있지만 붕대는 팔꿈치까지 메여 있을 것이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쟌은 황급히 손을 등 뒤로 감추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제는. 요시카한테 치료도 받았고. 오히려 치료할 때 아팠죠."
그건 요시카가 앨리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거야. 실천주의 학파의 힘이 날로 강해지는 게 느껴진다.
그것보다도, 여기 사람들은 왜 그렇게 다들 자기 아픈 것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신경쓰는 걸까. 오늘만해도 그렇다.
베로니카.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했던 오라샤 소녀는 기절하기 전에 "패배는 흔한 일이다. 그리고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다가 입은 상처다. 신경쓰지 마." 라고 했다.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말이다.
메이. 스물이 넘어 실드가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나는 감사관은 "괜찮아. 애초에 전멸할 뻔했던 작전을 성공시킨 건 너야. 가슴을 펴라고 꼬맹이. 우울해 하지 마. 살아남았잖냐." 라고 했다. 붕대를 감지 않은 쪽 손을 휘저으며.
세라. 다른 이로쿼이 아이들을 전선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 하늘의 포병이 된 상냥한 들소는 "괜찮아. 잘했어. 그러니까 울지 마." 라고 했다. 반파된 스트라이커 유닛에서 피로 젖은 다리를 빼내며.
쟌. 두렵고 무서워도 굴하지 않고 날아올라 용맹하게 검을 휘두른 작은 새는 지금도 이렇게 내게 괜찮다고 얘기하고 있다.
뭐야. 왜 그렇게 다들 얘기하는 거야. 뭐냐고 대체.
내 실수였다. 적의 변화와 함정을 인식한 시점에서 작전을 바꾸던가 포기했어야 했다.
그런데 다들 잘했다고 한다. 괜찮다고 한다. 마녀가 아니었다면 죽도록 괴로웠을, 혹은 죽었을지도 모를 상처를 입고도, 그런 상황에서 간신히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뭐가."
"네?"
"뭐가 괜찮은 거야."
"제이니 씨……."
"욕하고 화내야 하는 게 정상이지 않아? 잘못한 지휘관은 욕 먹는 게 당연하잖아."
바르크호른과의 대화가 떠오른다. 그녀가 알려준 인생과 긍지를 떠오르게 한다.
눈부신 사람들이다. 당연하다는 듯이 앞서 나가 방패가 되는 사람들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가 고민하는 것보다도,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눈부신 긍지와 명예를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초라함을 더욱더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왜 다들 괜찮다고만 하는 거야. 왜 그러는 거냐고."
"제이니 씨."
"아프잖아. 힘들었잖아. 투덜거리고 비아냥거리고 그러는 게 사람이잖아."
"제이니 씨."
"내 말에 따르다가 그렇게 된 거잖아! 그런데 왜. 다들……. 모르겠어……."
고개가 숙여진다. 눈앞이 흐려진다. 가슴 속이 답답하다.
그때, 무엇인가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게 무엇인지를 깨닫는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쟌?"
"똑같으니까요."
"……뭐가?"
"아프고, 힘들고, 무섭고, 화가 나는 건, 다들 똑같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쟌의 목소리는 촉촉히 젖어있었다.
"다들 똑같아요. 똑같이 아프고, 똑같이 힘들고, 똑같이 무서워요. 그러니까 다들, 제이니 씨랑 같은 마음이니까……. 그러니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숨죽여 우는 작은 소리만이, 기대듯하면서도 지탱해주는 온기만이 이어졌다.
납득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완전히 부정한 것도 아니다.
그저, 다들 소중했던 누군가의 희생을 뒤로 하고, 그걸 가슴에 품고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을 뿐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울고 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 지금은.
"……응. 고마워."
함께 눈물을 흘리며, 온기를 나누기로 했다.
#####
"……우리가 안 나가도 되겠는데?"
"그러게."
입원실 앞에서 들려오는 두 꼬마 아가씨의 대화를 들은 나와 세라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 언니, 간만에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뭐, 제이니는 나중에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얘기를 해서 풀어줘야할 필요가 있겠지만. 역시 아직 과거를 떨쳐내지 못했나. 물론 쉽게 휙휙 던져버릴 수 있는 건 아니지만서도.
바르크호른과의 대화로 제이니가 조금은 나아졌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쉽게도 여전히 그 꼬마 아가씨는 [아군의 죽음은 자신의 지휘 때문이다] 라는 트라우마를 버리지 못한 것 같다. 전쟁 초기에 사령부가 보여준 멍청함이 아직까지도 제이니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은데도.
여튼.
"후후, 이 훈훈함. 지금 나가서 둘 다 안아주고 싶군."
"너 그러다가 어깨 주저앉는다. 깔끔한 관통이라서 푹 쉬면 깔끔하게 나을 거라는 말 맹신하지 마. 여차하면 훅 간다고."
"알고 있어 나도."
자, 그럼 이제 조용히 물러나서 침대에 누워 한 숨 푹 자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용무는."
"끝나셨나요?"
요시카와 앨리스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Holy shit…….
삐걱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멀쩡한 오른손을 뻗어 세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잡았다 요놈. 어딜 도망가려고.
"옛날부터 시즈 탱크는 적이 근접하면 시즈 모드 풀고 도망치도록 되어 있어."
"도망칠 수 없다면 퉁퉁포로 버텨야지."
"왜 하필 다리를 다친 걸까. 제기랄. 잊지 않겠다 네우로이."
투닥거리던 우리는 결국 두 사람에게 붙잡혀 그대로 침대 위로 직행했다.
이후 우리가 어찌되었냐면, 요시카랑 앨리스에게 중환자가 휴식 취하지 않고 뽈뽈거리며 돌아다닌다고 혼났습니다. 넵.
최근에 요시카 엄해진 감이 없잖아 있다. 특히 다친 사람들한테는 더더욱.
뭐, 환자가 휴식 취하지 않고 돌아다니면 안 나으니까 당연히 혼내겠지만서도. 뭐, 무섭다기보다는 귀엽지만.
"……듣고 있나요, 메이 씨?"
"그야 물론."
"……."
의심의 눈초리가 사라지지 않지만, 아쉽게도 높으신 어른들과의 눈치 싸움을 밥 먹듯이 해온 내게는 아직 상대가 되지 않는단다.
결국 포기했는지 다시 설교를 시작한 요시카를 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딴 생각을 시작했다. 오늘 저녁은 뭐려나. ……이런. 최근에 세라랑 같이 다니면서 먹을 거 생각만 늘어난 것 같구만.
#####
"진지한 얘기가 있었던 것 같지만 본 프로젝트는 기본적으로 유쾌함과 훈훈함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암요. 그렇구 말구요."
"……."
"지금 당장 그게 누구한테 하는 얘기인지 말하지 않으면 베로니카가 체인소드를 휘두를 것 같은데."
"아니, 괜찮아. 베로니카. 워프의 속삭임 같은 거 아니니까 체인소드 뽑지마."
어허. 넣어둬. 어허. 씁. 어허. 일단 체인소드에서 손은 뗐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히 빛나고 있다. 무섭다 베로니카. 무서워.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본 페리느가 평소의 우아한 톤으로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전파를 수신하신 건가요?"
"시공을 초월하여 세계를 뛰어넘은 전생의 전파."
메이의 정답이지만 이해하는 사람이 없을 대답을 들은 페리느는 찻잔을 기울여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그러신가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다. 되려 경악한 건 셜롯과 메이였다.
"페, 페리느가 태클을 걸지 않았어!"
"성장인가! 페리느의 정신적 성숙인가!"
"뭐가 어찌되었든 좀 조용히 할 수 없겠나 리베리안."
"동감이에요. 다과회에서의 소란스러움은 운치가 없지 않나요."
"설마했던 갈리아와 카를스란트의 동맹이 현실로!"
"우리는 지금 역사의 순간에 서 있는 건가……."
소란스러운 구대륙 동맹 대 신대륙 동맹 인원들은 일단 제껴두고, 나 역시 머그컵을 들어 홍차를 입에 머금었다. 음, 좋다. 무슨 찻잎인지는 모르겠지만. 참고로 다른 사람들은 다 찻잔인데 나만 머그컵인 이유는, 예전에 홍차를 한 입에 털어넣는 내 모습을 본 부대원들이 정말로 진지한 얼굴로 그건 아니라며 머그컵을 주었기 때문이다. 왜. 솔직히 그때 주전자 다이렉트로 마시고 싶었어.
여튼, 오늘은 무슨 일인가 하면 501부대와 프로젝트 위치스의 교류회다. 교류회라고는 해도 사실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인지라 그냥 모여서 다같이 차 마시고 과자 먹고 수다 떠는 걸로 끝이다. 바로 어제 네우로이도 때려잡았겠다, 특별히 할 일도 없겠다, 그러면 모여서 수다나 떨자, 하는 김에 차랑 과자도 준비하고, 좋겠네, 야간조도 참여할 수 있게 저녁 때 하자, 그래, 오고 싶은 사람 모여라, 하는 과정을 거쳐 급조한 모임이다.
……그것 뿐이라면 좋겠지만, 사실 이 교류회는 상당히 고도의 정치적 공작에 의해 마련된 자리다.
왠지 모르게 바깥에서는 501부대와 프로젝트 위치스 멤버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듯 하다. 착실하게 실적을 쌓아온 501과 그걸 위협하는 PW 사이에 갈등이 없을 리가 없다나 뭐라나. 정작 우리는 언제든 상부상조하고 있는데. 서류상 편제가 갈려있을 뿐 실제로는 완전한 하나의 부대나 다름이 없다. 부대원들 사이도 약간의 편차는 있을지언정 다들 양호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고. 헛소문 퍼뜨린 건 누구야 대체.
어찌되었든 그러한 소문 때문에 사령부에서는 우리에게 '화기애애한 장면을 연출하도록'이라는 명령을 내려보냈다. 평소에도 화기애애하게 지내고 있는데. 그렇지만 일단 뭔가 했다는 걸 보여주기도 해야하고, 솔직히 소문도 신경쓰였기 때문에 그 소문을 잠식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교류회를 계획했다.
"……그리고 증거가 될 사진을 찍을 사람들로 우리를 불렀고."
"응. 정확하게는 메이가 불렀지만."
한숨을 내쉬며 찰칵, 하고 사진을 찍는 남자─알버트 카일 어니스트의 말에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하긴, 그런 게 아니면 금남구역인 이 부대에 들어오지도 못했겠지."
"금남구역 해제된 지 꽤 됐던 것 같은데, 여튼 미안해. 한창 바쁠 텐데."
"최근에는 한가해졌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덕분에 미인들 가득한 공간에 들어올 수 있게, 농담이야 농담."
내 매서운 눈빛을 눈치챘는지 알버트는 양손을 들어올리며 항복의사를 표명했다. 이 아저씨가 사선을 몇 번 넘기면서 계급과 배짱이 늘더니 묘하게 아저씨틱한 개그가 늘었어.
"근데 굳이 부를 거면 저쪽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어?"
내가 앉은 의자 등받침 쪽에 양 팔을 걸치며 알버트가 가리킨 쪽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사진기를 들고 미나 대장님과 대화 중인 중성적인 느낌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필립 카린스. 브리타니아 공작가의 청년으로, 우리와 마찬가지로 스트라이커 유닛을 가동시킬 수 있는 인물이다. 우리들을 마녀Witch라고 부르듯 그는 마법사Wizard라고 불린다. 그런데 위치Witch는 남녀 구분없는 말이었던 것 같은데.
"프로젝트 위치스 멤버잖아. 중립적인 입장에서 쓸 수가 없다던데."
"그런가. ……어? 카린스가 PW 멤버였어? 예전에 왕립연구소 소속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둘 다 맞아. 왕립연구소 항공각 연구부…… 여튼 거기서 파견되서 지금은 PW 멤버야."
덕분에 한동안 부대 안 분위기가 껄끄러웠지. 미나 대장님이 과거를 떨쳐내기 전까지 왠만하면 서로 안 부딪치게 해야 했으니까. 설마 우리가 대립한다는 소문은 그때 생긴 거였나. 가능성은 있다만.
"그럼 저걸 찍으면 되겠네. 자, 가라 알버트!"
"Rog!"
장난스러운 내 명령에 알버트가 씩 웃고는 기세 좋게 포즈를 잡으며 사진기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찰칵. 카메라가 서로 미소를 지으며 대화하고 있는 필립과 미나 대장님을 찍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또래 소년소녀들의 모습 같아서 좋다.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면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다른 쪽도 왁자지껄이든 흥얼흥얼이든 대체적으로 온화한 분위기다. 한동안 이런 분위기에 잘 끼지 않던 베로니카도 에리카랑 공중전에서의 기동로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하고 있다. 뭐, 소녀틱한 얘기 같은 건 당연히 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하고 얘기하는 게 어디야.
우리가 서로 으르렁거리니 어쩌니 하는 사람들이 이 광경을 봐야할 텐데. ……메이와 바르크호른 대령님이 서로 헤드락을 걸고 메다꽂으려고 하고 있는 건 장난일 것이다. 응. 그래야 한다. 감사관과 카를스란트 에이스의 싸움은 여차하면 국제문제가 된다는 것 쯤은 메이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알고 있겠지?
그때 조용히 피아노 소리가 울려퍼졌다. 사냐다. 주변에는 에이라, 요시카, 루키니, 쟌, 제이니가 같이 피아노를 뚱땅거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운율에 튀는 음이 섞이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지만, 딱히 듣기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화기애애해서 좋다. 까르르 하는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섞여있다.
찰칵. 사진기 소리가 들렸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알버트가 옆자리에 앉아서 사진기를 들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찰칵.
"뭐."
"자식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훈훈한 미소를 찍어봤어."
"……."
그러지 마시오 전폭대장. 가뜩이나 어머니 소리 듣고 있고, 본의 아니게 딸처럼 키운 아이들이 여럿 있다지만, 아직 스물도 안 넘긴 소녀를 유부녀로 만들지 마시오.
그런 복잡한 심정과는 달리 교류회는 무사히 지나갔고, 사진들 또한 별일 없이 신문에 실려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덕분에 불화설은 가라앉았지만, 이제는…….
"네가 할머니고, 사카모토랑 미나가 아빠 엄마에 나머지는 자식들이라. 꽤 적절하지 않아?"
"……적절하냐."
501+PW 가계도 같은 게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이제는 할머니냐. 엄마 들소에서 할머니로 업그레이드냐.
낄낄거리며 가계도(?)를 보고 있는 메이의 모습에, 나는 한숨과 함께 집무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창문 너머 우중충한 브리타니아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자연이 내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는구나. 후후후…….
#####
- 세라 비중이 많아 보이는 건 쓰는 사람이 저이기 때문입니다. 아쉬우면 쓰시던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시던가! 하하하하하핳하하 ……써주세요 아무나! 제발! 내가 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걸 시작한 거야?!? 살려줘!! 잊지 않겠다 PW 멤버들이여어어어어어!!!!
- 설정을 쪽지나 덧글로 부탁했던 이유는 다른 거로 봤다가 기준을 알 수 없는 사지방 통제에 걸리지 않기 위함입니다. 부디 불쌍한 군인에게 따스한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메일도 통제되는 세계라구요, 여기는!
- 그러니까 여러분. 위치스 팬픽 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스트라이크 위치스]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1~33화
티스토리 다시 시작하는 기념으로 최신화까지 호이호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그러하듯, 사건의 계기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된다.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일이 대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어쩌다 알게 되어도 그렇게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사소한 일 때문에 그렇게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잘 믿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세상 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사소한 일들이 발단이 되어서 커다란 사건을 만들고, 또 그 커다란 사건이 사소한 일들을 만들어내는 식으로 굴러간다.
그러니까, 이 일의 발단이라고 할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게 아닐까 싶다.
*****
연합군 제501 통합 전투 항공단, 통칭 스트라이크 위치즈의 지휘관인 미나는 최근 한 가지 문제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애초에 군대 지휘관이라는 자리가 별의별 일들로 인해 뒷골이 당기고, 혈압이 상승하고, 신경성 질병들이 폭증하는 자리기는 하지만, 이지적이고 현명한 그녀는 조금만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해결책이나 차선책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지간한 문제로 인해서 그녀가 골머리를 앓는 일은 없었다.
즉, 이번 문제는 그녀의 현명한 머리로도 해결하기 힘든 난해한 문제라는 것이었다.
미나는 책상 위에 펼쳐진 대형 군용 지도를 바라보았다. 복잡한 기호들과 문자, 그리고 여러가지 색깔의 선들이 어지럽게 지도 위를 달리고 있었다. 군용 지도라는 것이 본래 난해하지만서도, 읽을 수만 있다면 수많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그리고 미나는 그 누구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군용 지도를 읽고, 그 안에서 얻어낸 정보들을 바탕으로 아군을 승리로 이끄는 전략 전술을 짜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최근 그녀를 골치아프게 하고 있는 단 한 가지 문제 때문에 그녀는 구체적인 작전을 수립하는데 난항을 겪고 있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아직도 보고 있나?"
듣는 것만으로도 굳은 심지를 느낄 수 있는 당찬 목소리가 미나의 귀에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동양 특유의 짙은 흑발을 하나로 묶은 안대를 한 여성이 서 있었다.
사카모토 미오.
브리타니아가 극서에 있는 섬 국가라면 그와 반대로 극동에 있는 섬 국가 후소 소속 마녀.
훌륭한 교관이자 베테랑 군인인 그녀는 미나가 보고 있던 지도를 향해 눈길을 던졌다. 그 안에서 가장 최근에 추가된 몇 가지 점과 그 위에 표시된 기호들을 읽어내고는, 한숨을 내쉬는 자신의 상사를 향해 질문했다.
"아직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건가, 이 문제는?"
"그래, 정말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
미오는 다시 지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개인 탄약 용량을 늘리는 건 어때?"
"지금도 다들 한계치까지 싣고 날고 있어."
"사냐를 주간으로 돌리고 초계 비행에 한 사람을 더 배치하는 건?"
"효율이 나빠질 거야."
"군용 대검 지급, 은 내가 생각해봐도 무리군."
부대원 모두가 대형 네우로이도 일격에 썰어내는 그녀의 검술을 사용할 수 있다면, 지휘관 입장에서는 굉장히 좋은 일이겠지만 그건 너무나 장기적인 안목을 필요로하는 계획이었다.
"하아,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두 사람이 집중적으로 보고 있는 지도의 표시들은 조금씩의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점을 잡아내면 대충 이러했다.
H. S. NL.
첫 번째 위치는 네우로이의 크기. 두 번째는 네우로이의 속도. 세 번째는 본체에 달린 소형 네우로이의 수량.
알파벳의 의미는 각각 크다(Huge) 느리다(Slow) 무수하다(Numberless).
해석해보면 '작은 호위기들을 잔뜩 달고 있는 느리지만 거대한 네우로이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저 중 하나라도 문제가 안되는 것이 있을 리가 없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바로 NL이었다.
탄약이 부족해질 정도로 수많은 소형종들을 달고 다니는 대형 네우로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보급함 하나만 띄울 수 있어도 좋을 텐데 말이지."
"우리한테 올 정도로 함선 사정이 여유롭지도 않고, 설령 받는다고 해도 호위 부대를 따로 편성해야하니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오히려 더 안 좋아."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그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만. 지난 번에 탄약이 떨어졌다는 무전을 들었을 때는 정말 가슴이 철렁했으니까."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미오는 말을 이었다.
"그 이후로 다들 의식적으로 사격 정확도 증가 훈련을 하고 있어. 탄약 소비 효율이 올라간다는 게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게 탄약 걱정 때문에 발생한 일이니 마음 놓고 웃을 수가 없군. ……음? 이건?"
미오는 지도 구석에 놓여 있던 서류를 들어올렸다. 누군가의 신상 정보가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본 미오는 '봐도 되는 건가?' 하는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자신의 상관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허물 없이 지내는 사이지만 공적으로는 상관이다. 이 방도 원래는 용무가 없으면 와서는 안되는 곳이고, 그런 곳에 놓여진 서류라는 것은 함부로 봐서는 안되는 물건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뼛속까지 군인인 미오에게 그런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 그게 거기 있었네. 봐도 괜찮아. 오히려 봐줬으면 해."
다행스럽게도 기밀 문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봐줬으면 한다니. 작은 의문을 느낀 미오는 서류를 바라보았다. 어떤 한 군인,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마녀의 개인 정보 자료였다.
미오의 시선이 우선적으로 포착한 것은 증명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검은색 머리카락에 약간 황색빛을 띄는 피부를 가진 동양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소녀가 있었다. 녹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영락없는 동양인이었다.
"흠, 리베리온 측인가. 세라 둘리틀……. 뒤에 상냥한 들소는 성? 별명?"
"윈주민 이름이야. 아버지 쪽이 원주민이거든."
"혼혈로 태어나서 부족에서 쫓겨나 먹고 살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라는 건 아니겠지?"
미오의 질문에 미나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런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아니야. 리베리온 정부가 부족한 위치 수를 채우려고 원주민 사회에 요청했대."
"솔직히 내 망상이 훨씬 더 그럴 듯 하게 들리는데. 그쪽 정부와 원주민들은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지 않았었나? 용케도 부탁을 들어줬군."
"소문에 의하면 옛 땅의 일부를 되돌려 받기로 했나봐."
"위치를 아군으로 들이기 위해 토지를 주었다, 인가. 리베리온 측이 손해인 것 같은데?"
"전우애라는 걸로 젊은 층을 묶어서 자국 내의 대립 관계를 조금이나마 줄이고 싶은 거겠지. 그리고 그걸로 어떻게 좀 밀어붙여보겠다는 속셈일거야."
"정치, 라는 거군."
미오는 머리 아프고 생산성 없는 일은 사절이야, 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해군 수송대? 위치를 수송대에 쓰던가, 리베리온은?"
"그 아이는 좀 특별해서."
계속 읽어봐, 하는 미나의 얼굴에 미오는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특별하다고?
잠시 후, 서류를 훑어 내려가던 미오의 얼굴에는 황당함과 어처구니없음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끝까지 다 읽고 나서는 어딘가 납득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적절한 판단이군. 아니, 확실히 수송대 이외에는 둘 곳이 없어."
그렇게 말을 한 그녀는 서류에 클립으로 고정된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첨부된 사진들 대부분이 엄청나게 거대한 짐을 싣고 부대를 날아다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 중에는 짐이 잔뜩 실린 트럭을 들고 기절초풍할 것 같은 얼굴로 하늘을 날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미오는 다른 건 몰라도 그 사진에서만큼은 감탄을 터뜨렸다. 당장이라도 추락할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그렇게라도 날 수 있는 게 대단한 일이었다. 저건 어느 위치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발크호른 정도면 가능할까? 아니, 그녀라도 이건 불가능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위치로서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많은 물건을 들고 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느려서야 실전에 나갈 수가 없겠는데."
마법 특성란에 적힌 등가교환은 이런 걸 의미하는 것이었나. 속도를 버리는 대가로 화물 중량을 늘린다.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이것만큼 가치 있는 마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시였다. 훈련용 스트라이크 유닛이라고해도 시속 300도 간신히 넘을까 말까한 속도라면, 실전에 나가서는 당장에 격추되거나 쫓기기만 하다가 되돌아올 것이다. 무기를 들려준다고 해도 속도가 지배하는 공중전에서 이렇게까지 느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대형 여객기도 아니고 이 속도로 대체 무엇을…….
"그렇지? 지금 그 아이 때문에 다들 고민하고 있어. '과연 어느 부대에서 데려갈까?' 하고 말이야."
"흐음."
"서로 눈치보느라 정신이 없어. ……왜?"
어떤 발상이 미오의 뇌리를 번뜩하고 스치고 지나갔다.
과연 가능할까? 그 의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와 군용 지도를 번갈아 훑어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답을 도출해낸 그녀는 자신이 발견한 무언가를 듣기 위해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어주었던 자신의 상관을 향해 물었다.
"이런 건 어떨까?"
*****
그것은 한가한 어느 봄날 아침의 일이었다.
생일이 지나, 그러니까 4월 중순이 되어 슬슬 옥수수를 심을 시기가 되었기에 오늘도 열심히 일해볼까, 하고 든든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나를 보더니,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너, 영장 나왔더라?"
"뭇, 크헉, 켁 케헥, 콜록, 쿨럭?!"
"우엑, 누나 더러워!"
"언니 너무해!"
사래가 들려 먹던 것을 뿜어냄과 동시에 동생들의 야유가 들려왔지만 내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뭐가 나왔다고?
"다 큰 여자애가 기침이 그게 뭐니?"
"케헥, 컥, 하아, 하아……. 영장이라뇨?"
어머니는 뭐가 그리 놀랍냐는 듯한 어투로 말씀하셨지만, 내게는 사래가 들릴 정도로 심각하게 놀라운 일이었다.
구대륙 쪽이야 전투가 극심해서 거의 대부분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다고 하지만, 리베리온은 직접적으로 전선에 맞닿아 있지 않기에 널널하게 모병제를 실시하고 있다.
그 대신이라고 할까, 풍부한 자원을 이용한 대량 생산으로 반쯤 황폐화된 구대륙으로 물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리베리온 합중국이다.
그런데 갑자기 영장이 날아온 것이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옛날'이라면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지금'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병제 국가이기도 하고, 세계가 전쟁중이라고 하지만 이 시골 마을에서는 그런 건 머나먼 얘기이기도 하니까.
게다가 지금 난, '여자'니까.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대체 어느 새 징병제로 바뀐 걸까. 설마 '또' 가야 되는 건가? 것보다 영장이라니? 신검도 안 받았는데?
"위치Witch가 뭘 신검을 받는다고. 전선이 밀리니까 위치 같은 유용한 인력들은 바로바로 써먹겠다는 거겠지."
구대륙 출신 집안 사람인지라 금발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진 어머니께서는 한 손에 들린 편지를 살랑살랑 흔들며 내 질문에 대답해주셨다.
그리고는 군 홍보 라디오 특유의 톤으로 편지를 읽어주셨다.
"에헴, '네우로이가 많이 날뛰고 있습니다. 혈기왕성한 총각들을 박살내 줄 신체 건강한 젊은 마녀들의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라고 써 있단다."
"……그거 늘상 날아오는 모병 홍보잖아요. 깜짝 놀랐네."
원래 내용을 미묘하게 왜곡하여 들려주시는 어머니의 말씀에 가볍게 딴지를 걸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딸내미 놀려먹는데는 뭐 있으시다니까.
하지만 그 뒤로 들려온 어머니의 말씀은, 방금 전 뿜어내버린 아침 식사로 인해 엉망이 된 식탁을 정리하던 내 손을 다시 한 번 경직되게 만들었다.
"이게 아니더라도 가야될 것 같더구나. 군대에."
"……예?"
"자세한 건 아버지께서 오시면 여쭤보렴."
어머니는 무언가 굉장히 언짢은 듯한 얼굴로 그렇게 말씀하시고 흔들고 있던 편지를 단숨에 우그러뜨리셨다. 콰직. 아무래도, 뭔가 영 좋지 않은 일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크게 벌어진 것 같았다.
어머니의 심정이 영 편치 않다는 걸 깨달았는지 동생들도 조용해졌다. 저 상태의 어머니는 여차하면 폭풍이 된다는 걸 오래 전에 깨달았기에 자연스럽게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여튼 그 일이 무엇이었는지는 바로 그날 저녁, 이로쿼이 연방Iroquois League 대족장 회의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께 들을 수 있었다.
*****
이미 눈치챘겠지만, 나는 환생했다.
환생했다고 해도 전생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건 아니고 드문드문 기억하는데다가 그것마저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부분 잊어버렸다. 가끔씩은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거야 가끔 있는 일이니까 패스.
간신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곳이 스트라이크 위치스, 라는 애니의 세계였다는 것과 그것이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 그리고 인간 대 네우로이의 대결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 정도? 그 외에도 몇 가지 자잘한 점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쪽과 이쪽의 차이점으로 인해 대부분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그래도 이곳에서 성장하면서 정말 놀란 점은 이곳 원주민들, 그러니까 홍인들이 여전히 이곳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으로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이 세계 존재하는 마법의 힘 덕분에 전염병으로 몰살당하지 않은 덕분인 듯 했다.
하지만 총화기의 힘만은 어쩔 수 없었기에 현재는 저쪽과 마찬가지인 상태, 까지는 아니고, 대륙 곳곳에 대규모 부족 단위로 모여 살고 있다.
그렇게 리베리온 정부와는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싸우는 반 공존 상태로 수 십 년이 지난 현재는, 내가 태어나고 살아온 마을처럼 원주민과 구대륙인이 가정을 이룬 사람들이 만든 마을도 이렇게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이런 마을들은 대부분 원주민 사회 쪽에 더욱 가깝다. 리베리온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도, 주 정부는 혼혈들에게 벽을 쌓는 반면에 원주민들은 너그럽게 포용해주기 때문이다. 사람은 당연히 따스하게 대해주는 쪽으로 가는 거니까. 음음, 차별 없는 세상 만세. 퍼스트 네이션스 만세.
하지만, 오늘만큼은 만세의 손길을 내리고 싶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던대로 저녁 나절 즈음.
젊었을 때는 리베리온 정부에 직접적으로 대항했던 용맹한 전사로서, 현재는 고된 농사일을 하는 농부로서 단련되어 겉모습만 보아도 강인할 것 같은 인상을 원주민 중년, 즉 우리 아버지는 대족장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내게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나는 침묵했다.
"……."
"……."
"……."
"……."
"……."
"……."
부녀가 서로 말이 없다.
보통 때는 어머니께서 이렇게 굳어버린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주시지만, 현재 뿔이 단단히 난 그분은 먼저 침대에 드러누우셨다. 동생들 역시 무거운 얼굴로 돌아온 아버지를 보고는 자기네 방에 들어갔다.
결국 지금 이곳에 있는 건 분위기를 가라앉히는데 특화된 나와 아버지 뿐.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대충 이랬다.
리베리온 정부의 요청에 따라 재앙의 사자, 그러니까 네우로이의 격퇴를 위해, 일정한 수의 인력과 정령의 축복을 받은 아이들, 구대륙인들의 말로 마녀witch들 일부를 그들의 군대로 보내기로 했다고.
그 대신 잃어버렸던 땅과 권리의 일부를 되돌려받기로 했다고.
그리고 그렇게 보낼 아이들을 제비뽑기로 뽑았는데, 그 중에 내가 있었다고.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전생도 있고 지금 인생도 합치면 대충 30년은 넘는 인생 경험이 있기에 아버지의 침묵의 이유는 안다.
꾹 다문 입술과 투박한 주먹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미안한 것이다. 아니, 속이 타들어가고 계실 것이다. 자식을 마치 물건마냥 거래하듯 전쟁터로 보내야하는 부모의 심정이 어떨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감이 온다.
절대 최전방으로는 보내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지만, 전장이라는 게 언제 어디가 최전방이 될 지 알 수 없는 곳이 아닌가.그런 곳에 자식을 보내야 한다는 건데 결코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나이 서른(전생 포함)인데 그 정도도 모를까.
결국 꺾인 것은 내쪽이었다. 애초에 꺾이고 뭐고 할 것도 없었지만.
한숨과 함께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굳어버린 분위기를 어느 정도 풀어낸 후, 나는 어설프게나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전방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후방으로 가는 거잖아요. "
"……."
"사람 몇 명 보내고 고향땅 되찾는거면 할만한 일이잖아요."
"……."
"죽을 때까지 거기 있는 것도 아니고, 몇 년 지내고 돌아오는 거잖아요. 괜찮아요."
"……."
여전히 말이 없으신 아버지.
나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그분의 두텁고 거칠지만 따스한 손을 잡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버지께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가장 처음 하신 말씀은, 사과였다.
"미안하다."
"뭐가요?"
"우리가 젊었을 때, 더 열심히 했었다면, 그랬었다면,"
"녀석들의 이런 어처구니 없는 제안 같은 건 무시할 수 있었을 텐데, 죠?"
"……그래."
"그랬었다면, 우린 재앙의 사자들과 직접적으로 싸웠어야했을 거에요. 그러는 것보다는 저들보고 직접 싸우게 하고 우리는 뒤에서 적당히 도와주기만 하는 게 훨씬 낫잖아요? 좋게 생각하세요."
아버지는 당연히 저쪽 세계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고 이렇게 공생 관계에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걸 모르신다.
그리고, 내 기억에 따르면 리베리온은 직접적으로 전쟁이 펼쳐지는 곳이 아니었다. 저쪽 세계의 미국도 진주만이 털린 것 이외에 본국이 공격당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군대에 간다고 한들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네우로이도 구대륙에서만 나타나고 있고, 만에 하나 파견 명령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등 뒤에는 이로쿼이 연방이 있다. '우리 애들 전방에 보내면 내전이다.'라고 하는데 함부로 보낼 수는 없겠지. 애초에 계약에도 후방 부대에만 둔다고 했고, 중간에 스리슬쩍 구렁이 담 넘어가듯 전선으로 넣으려고 하기도 하겠지만 대놓고 밀어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다시 한참 동안 침묵하신 후, 아버지는 내 눈을 응시하며 말씀하셨다.
"불리하다 싶으면 누구보다 빠르게 도망쳐라."
젊은 시절에는 맹렬한 황소라고 불리시던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굉장히 어색했다. 하지만 알 것 같다. 아버지니까.
반드시 그러겠다고 말씀드리는 걸로 부녀 간의 대화는 끝이 났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 위로 몸을 던지고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래저래 복잡한 심정에 잠이 오지 않는다.
군대라……. 미군이 바탕인만큼 어디 일반적인 군대만큼 험한 동네는 아니겠지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전생의 군생활을 생각해보면…….
'총은 녹슬지만 삽은 영원하다!'
'방독면 벗어! 방독면 벗어!'
'김 병장 잡아와! 이 새퀴 제대 일주일 남았다고 짱박힐라 그래 자꾸!'
'군대스리가 우승 부대는 일주일 휴가다! 젠장, 이건 이길 수 밖에 없어!'
'연병장 온덴다! 칫솔! 틈 닦는 칫솔 어디갔어!'
'TV! 선반! 탁자! 창틀! 걸레질 순서다! 외워!'
'오늘 급식 메뉴! 몰라? 엎드려!'
……어, 음, 괜찮겠지?
*****
그렇게 내 입대가 결정된 지 사흘 후, 나를 데려가기 위해 지프 한 대가 집 앞에 도착했다.
운전병 한 사람과 행정병으로 보이는 여군 한 사람이 왔는데, 그, 뭐랄까, 이 세계가 스트라이크 위치스 세계라는 걸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한창 때 금발벽안 아가씨인데 이 사람, 하의를 안 입었어! 그런데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있어!
말하지 않은 것 같아서 말해두는데, 난 착실하게 하의-일할 때 편한 칠부치마를 입고 있다. 덧붙여서 속바지도. 그리고 원주민 아가씨들도 다들 착실하게 입고 다닌다. 뭐, 세계가 세계인만큼 굉장히 짧은 미니스커트나 길어도 깊게 슬릿이 파인 치마들이지만.
여담으로, 거의 안 입고 다니는 이 세계 여성들의 기준으로 나는 '현대 서구 여성이 본 19세기 말 조선 여인네'처럼 중무장 한 거라고 한다. 어머니 역시 뭘 그렇게 꽁꽁 싸매고 다니냐고 하실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다. 흉한 상처가 있어서 그걸 가리기 위해 그렇게 입는거냐고 물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뭐야, 이 세계…….
간단한 신원 조회를 마친 후, 나는 짐가방과 함께 지프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부모님을 향해 인사했다.
"다녀올게요."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어머니는 몸만 성하게 돌아오라고 하셨다.
나 역시 목숨 걸고 싸울 마음은 없었기에 알겠다고 대답하였고, 그걸 신호로 하듯 지프가 출발하였다.
*****
그렇게 시작된 군 생활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전생의 거친(?) 군 생활과 비교해서 그런지, 아니면 리베리온 군의 훈련이 느슨해서인지지, 아니면 원주민들의 집단 반발을 피하기 위해선지,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위치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그렇게 결성된 연합군(?)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저기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모든 원인은 리베리온 정부가 윈주민들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원인은 역시 문화적인 차이.
이게 하의를 입니 안 입니 같은 참으로 만화다운 전개였다면 그냥 사소한 충돌로 끝났겠지만, 기본적인 의식주부터 자연관, 가치 기준까지, 말 그대로 하나부터 열까지 삐그덕거리니 문제가 안 날 수가 없었다.
뭐, 이 정도까지는 아마 그들도 예상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생각치도 못한 난관에 부딪쳐야 했다.
바로 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와 같은 정령의 축복을 받은 아이들─위치들 때문이었다.
사실 리베리온 정부가 원했던 것은 바로 위치들이었을 것이다.
네우로이에 대항하기 위해 개발된 스트라이크 유닛을 사용할 인재가 필요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들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그건 우리가 무능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령의 축복을 받은 아이들의 비행술은 리베리온의 마녀들과는 차원을 달리 하였다. 우리들 중에서 가장 어설프게 비행하는 아이도, 리베리온의 마녀들에 비하면 굉장히 잘 나는 축에 속했다. 속도, 기술, 공간 지각 능력. 무엇 하나 빠지지 않았다. 나는, 음……. 나중에 얘기하자.
여튼 그런 우리가 왜 저들의 기대에 못 미쳤느냐 하면, 총화기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이곳에 온 아이들 중에는 오기 바로 전날까지 정부와 전투를 벌이던 마을에서 온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은 사격 훈련 때 총을 쥐어주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탄약이 다 떨어질 때까지, 혹은 총을 빼앗길 때까지 기지를 향해(!) 쏴대었다. 넘치는 적개심을 가차없이 발휘하는 것이었다.
부족의 가르침 때문에 무기를 아예 쥐지도 않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런 아이들은 총을 '맨손'으로 부숴버렸다. 그래, 맨손으로.
아예 사격을 못하는 애들이었다면 리베리온 측도 사격 훈련을 빼버렸을 테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모두 백발백중의 사격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상층부라면 정말 속이 탈 것이다. 유능하지만 제어할 수도,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인재니까.
나? 나는 내키면 쐈다.
기지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기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어떤 날은 예비 탄창까지 비워가며 쏘기도 했고, 어떤 날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총을 부수었다. 사실 부수고 싶지는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한다는 의미를 담은 행동이었다.
함께 한다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곳에서의 내 모습은 조금은 우스꽝스러웠다. 그 이유는 복장 때문이었다. 치마 어쩌구 때문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조금은 있지만.
원주민 아이들이 타향에서의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동질감을 얻는 일을 추구했다. 예를 들자면 머리에 깃털을 꽂거나 전통 장식을 다는 것 같은 거. 군복만 입고 있던 소녀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동포가 있다는 걸 직접적으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그렇게 소녀들은 깃털을 꽂는 대가로 모자를 버렸고, 목걸이를 하는 것으로 군번줄을 버렸고, 장신구를 허리에 두르는 것으로 허리띠와 함께 다는 소형 가방을 버렸다.
그게 방아쇠가 되었다.
마찰의 근본적인 이유는 전에 말했다시피 문화적인 차이점의 충돌이었지만, 그게 군대라는 특수 사항 속에서 쌓이고 쌓인 끝에 마침내 폭발한 것이었다. 바로 우리 부대에서.
리베리온인들은 말도 안 듣는 데다가 계속해서 자기들끼리만 모이는 원주민들을 불쾌하게 바라보았고, 원주민들은 강압적이고 배려심 없는 리베리온인들을 적대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이 터지지 않는다면 그게 더 신기했을 것이다.
결국 올 것이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은 엉뚱한 방법으로 맥없이 풀려버리고 말았다.
그, 자랑할 마음도 없고, 자세한 사정을 알게 된다면 분명 웃어버릴 테지만, 나 때문이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허겁지겁 비몽사몽 끝에 손에 잡히는대로 옷을 입고 나갔는데, 그것이 모자를 쓰고 그 위에 깃털을 꽂고, 서로 엉킨 목걸이와 군번줄을 목에 걸고, 허리띠에 가방 대신 노리개를 달고 있는, 좋게 말하자면 대륙의 조화, 나쁘게 말하자면 엉망진창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우연찮게 이것을 발견한 한 장교가 나의 행동이 무언가 생각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대로 나를 모두가 보는 가운데 지목한 것이 이 사건의 해결의 시작점이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것쯤은 그 장교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단지 그는 평화적인 해결 방법을 원했고, 때마침 쓸만한 패가 눈에 들어왔기에 바로 밀어붙였다고. 뭐, 나쁜 방법도 아니었고 결과도 좋게 나왔으니 잘 된 것이겠지.
그 이후로 두 세력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게 된 나는, 늦잠으로 시작된 그날의 패션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뭐랄까,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쉽게 찾기 위해서, 라는 이유로. 참 미묘한 이유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1년 정도 되었을까.
제일 최전방의 전투가 거세지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올 즈음,
"세라 둘리틀 하사. 금일부로 연합군 제501 통합 전투 항공단으로 전출이다."
"……네?"
헤?
*****
비행기 정보, 무기 설정, 주인공 설정하는데 일주일이나 걸렸습니다. ……어차피 보는 사람은 얼마 없을 테지만!
ac-130 + b52 컨셉으로 가려다가 당시 기준에 맞추려고 b-47 수송기를 개조하는 쪽으로 바꿨습니다.
주무장은 여전히 88m 대공/전차포 [?]
현란한 공중전은 기대하지 말아주세요. 말했다시피 주인공은 수송기 개조 기체입니다 [...]
p.s 둘리틀은 어머니 측 성. 그 둘리틀 맞습니다 /도주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2
공인 격추수 250을 자랑하는 에이스 오브 에이스 게르트루트 바르크호른은 일시적으로 창고 중앙에 쌓아둔 보급품들을 본 순간, 마음 속에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버렸다.
"완벽하게 못 알아들었군."
전투시 탄약이 부족하다고 보고했더니 탄약만 산더미만큼 보내오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물론 다른 보급품도 제대로 들어왔다. 하지만 바르크호른에게는 보는 것만으로도 넋이 나가버릴 것 같은 저 무지막지한 탄약더미만이 눈에 들어왔다. 예비 탄약이 아니라 전투시라고, 들고 다니는 게 문제라고 그렇게 강조했거늘 대체 뭘 보고 저렇게 탄약만 한 가득 보냈는지 알 수 가 없었다.
MG42 두 정을 들고 전투를 벌이는지라 탄약 소모도 남들의 두 배인 만큼, 최근 나타나는 대형 네우로이가 여간 성가시지 않은 그녀에게 이번 보급품 내용은 참으로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래도 공사 구분 없이 엄격한 카를스란트 군인인 그녀는 복잡한 심정을 뒤로 한 체, 보급품 분류 업무를 별 탈 없이 완수한 후, 그 보고를 위해 관련 자료들을 챙긴 후 자신의 상관이자 전우인 미나의 집무실을 향했다.
*****
원주민 아이들은 스트라이크 유닛만 장착했다하면 마치 처음부터 날아왔던 것처럼 하늘을 난다.
그 보는 사람의 넋을 빼놓는 비행이 리베리온 정부로 하여금 굴욕적인 협상을 하게 만들었으리라.
속도, 기동성, 기술, 공간 지각 능력, 어느 것 하나 빠질 것 없는 이 아이들은, 지금까지 리베리온 소속 위치들과의 모의전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음으로서 그 실력을 입증했다.
첫 모의전에서 리베리온 위치들은 지금까지 자신들보다 미개하다고 생각했던 원주민에게, 그것도 거의 신병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에게 압도적인 실력 차로 눌렸다는 것에 별로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방심하고 있었으니까 진 거라는 생각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조금 놀아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임했을 것이다. 총을 쥐어주면 기지를 쏘거나 부숴버리는 애들하고 진지하게 싸워서 이긴다한들 전혀 기쁘지 않을 테니까. 설령 지더라도 '씁, 어쩔 수 없지.' 하는 수준이었을 테고.
하지만 그 모의전이 횟수를 거듭할 수록 그녀들은 점점 절망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 바로 눈앞에 있던 아이가 눈 한 번 깜빡하고 나니까 등 뒤에서 자신을 겨누고 있다면, 뒤를 점했다고 생각한 순간 격추 판정을 받는다면, 한 두 번도 아니고 매번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면 당연히 그런 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단적인 존재였다.
……솔직히 말해보자. 사람은 땅을 디디고 살아가는 생물이다.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건 그걸로 이미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난 인간으로 살기 위해 대지를 선택할 것이다. 저 하늘은 자유롭지만 난 위대한 어머니의 품을 떠날 수는 없다. 이건 속박이 아니다. 위대한 영혼의 품에서 조화와 공존을 실천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연친화적인 삶의 실천 방식 중 하나로서…….
"괜찮아, 상냥한 들소?"
……헛소리는 그만 두기로 하자.
나는 조금만 더 꺾였다면 그대로 목뼈가 부러져 버렸을 아슬아슬한 각도에서 구르기가 멈춘 것에 감사하며, 처참하게 추락한 내 곁에 너무나도 우아하게 착륙한 동포의 질문에 대답했다.
"……무진장 아파."
"음, 의무병 언니 부를까?"
"하는 김에 내가 정말 살아있는지 확인을," 꾸우우우욱. "……수수하게 아프니까 밟는 건 그만 해."
내 말에 룸메이트이기도 한 그 소녀─따사로운 가을 햇살은 살짝 뛰어오르는가 싶더니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세밀한 기동으로 제자리에서 공중제비를 함과 동시에 내 손을 붙잡아 나를 일으켜 세웠다. 뭐야, 이거 무서워. 이 무슨 사람 넋 빼가는 기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난 나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치료 전에 일단 씻어야 할 것 같은데."
"……응."
모의전용 페인트탄에 푹 절여진 상태로 흙바닥을 가차없이 굴렀으니까. 길리슈트를 입고 있는 저격병처럼 보이지 않으려나. 그냥 흙먼지 뒤집어쓴 모습으로 보이겠지. 뭘 기대하는 거냐.
여튼 나는 날 이렇게 만든 상대, 그러니까 이번 모의전 상대인 리베리온 마녀들을 올려다보았다.
"……우와아……."
그, 뭐시기냐, 참 뭐라고 해야 할 지 감이 안온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우르르 몰려와서 웃는 얼굴로 나만 집중 사격할 때는 죄다 악마 같이 보였는데, 나 하나를 격추시킨 것으로 기뻐하고 있다가 우리 동포들에게 말 그대로 '쳐발리고' 있는 리베리온 마녀 아가씨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켠에서 연민이 솟아오른다. 우와, 좌우에서 동시에……. 으아, 머리 위에서 내려찍기 사격이냐. ……거, 왠만하면 그만 가지고 놀고 얼른 떨구지 그래. 그애 막 울라고 하는데. 그래도 윈주민이라고 업신여기지 않고, 우리하고 비교적 친하게 지내주는 애들인데 정말 가차없다.
결국 그날의 모의전도 우리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후 스트라이크 유닛을 벗어던진 윈주민 소녀들은 내게 다가와 열심히 잘했다고 격려해주었다. 이 무슨 따사로운 마음씨.
사실 집단 모의전에서 가장 만만한 내가 제일 먼저 낙오되는 건 꽤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이기에, 이 격려는 약자에 대한 연민과 위로가 담긴 것이었다.
원주민 소녀들이 모의전에서 격추 판정을 받은 횟수는 지금까지 개인 평균 4회. 엄청나게 적다고 느낄 지 모르겠지만, 내 격추 판정 횟수를 빼면 평균은 0.3회. 그냥 오늘은 운이 안 좋아서 맞고 말았어요,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소수점 이하 단위는 뭐야 대체. 날 수치심으로 죽일 셈이냐.
속이 쓰리다. 이래봬도 원주민 애들 중에서는 제일 나이가 많은데! 키도 제일 큰데! 이 세계에서 여자 키 173이면! ……너무 크다. 늘씬한 이미지는 있지만 꽃다운 16세에 173은 확실히 너무 크다. ……아무래도 좋잖아, 키 따위는……. 전생에서는 작아서 문제였는데 이번에는 커서 문제냐.
여튼, 이렇게 말하고만 있으면 내 공중전 성적은 부대 내 최하위를 달리는 것 같지만, 놀랍게도 중상위권에 속한다. 못 믿겠지? 하지만 사실이다. 공간 지각 능력만큼은 그 누구보다 탁월한 데다가, 원주민 아이들 중에서 총화기를 가장 능숙하게 다루니까.
하지만 이 모든 장점을 뒤엎을 거대한 약점이 있으니…….
느리다.
무진장 느리다.
도저히 뭐라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다.
어렴풋한 전생의 지식을 떠올려보면 공중전은 가면 갈수록 속도를 중시하게 되었던 것 같은데 이건 뭐…….
아무리 회전 반경이 작더라도 속도가 느리면 그대로 끝이라는 얘기다. 제로센이 그랬던 것처럼.
여튼 훈련용 스트라이크 유닛이 내는 속력은 평균 400~500km/h인데, 이건 리베리온 마녀들 기준이고 원주민 아이들은 저기에 보통 +50km/h가 더 붙는다. 그 속도로 그 기동성이라니. 원작의 아이들이 쓰는 스트라이크 유닛이라도 쓰면 그대로 제공권을 장악할 기세다.
그래서 나는 얼마냐고?
……400이 최대였습니다.
모든 무장을 다 던져버리고, 마력을 다 쥐어짜내서, 특수 마법까지 사용해서 약 30초 동안, 겨우 400에 턱걸이. 평소에는 350이면 양호한 수준.
게다가 그날, 내 비행 역사상 최악의 착륙─이라 쓰고 추락이라 읽는 것─을 경험하였고, 마력 고갈 + 체력 고갈 + (공식적으로는)비상 착륙(비공식적으로는 추락) 후유증으로 일주일간 앓아누워야 했다.
아니,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사람은 땅을 디디고 살아야 해. 난 틀리지 않았어. 이 세계가 옳지 못한 거다. 뭔가 잘못된 건 이 세계라구. 음음. 그래.
……현실 도피는 그만두자.
그 대신이라고 할까, 보통 마녀들은 물론, 그 누구도 들 수 없는 굉장히 무거운 물체도 들고 날 수 있다. 가장 최근에 성공한 것이 짐을 가득 실은 화물 열차 한 칸이었다.
부대 근처를 지나가는 선로에 이상이 생겨 멈춘 화물 열차 때문에 대민 구호 차원에서 파견나갔을 때의 일인데, 실험 삼아 스트라이크 유닛을 장착하고 들어올렸더니, 생각보다 수월하게 들어올릴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열차 기관차까지 포함해서 열 다섯 칸을 옆에 만든 임시 선로로 옮기고 나니까 또 하루 정도 드러누워 있어야 했다는 거지만.
세상이 노오랗게 보이고 음식도 못 먹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정신줄이 들어갔다 나갔다 했던 일주일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곧바로 해군 수송대로 배속되었던 것 같다.
덤으로 계급은 하사인데, 자대 배치를 받고 곧바로 하사 계급장을 달아주는 건 대체 무슨 속셈인 걸까. 위치라서 부사관급부터 시작인지, 아니면 이쪽 부대들 전통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난 현재 리베리온 해군 제11수송대 하사다.
여담으로, 내가 깃털 꽂은 군모를 쓰고 얽힌 군번줄과 목걸이를 걸도록 한 그 장교가 바로 제11수송대 대장이었다. 샌더슨 대령이라고 했던가. 하얀 정장 차림의 누군가가 스쳐지나가는 이름인데…….
그런 생각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리길래 돌아보니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얼굴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어떡할 거야?"
"음? 뭘?"
"우우, 안 듣고 있었지─."
뺨을 부풀리는 룸메이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는 뭘 물어본 거냐고 다시 물어보았다.
"전출 말이야. 전출. 어떡할 거야?"
아아, 그 얘기였군.
그래, 우선 상황을 정리해볼까.
군대라는 것이 애초에 상명하복이 기본인 조직인지라 일단 전출 명령이 떨어진 이상 반드시 가야만 한다. 그것도 구두 명령이 아니라 문서화된 정식 전출 명령서까지 함께 날아왔다면 거부할 권리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들 때문에, 나는 전출 명령을 따를 것이냐 말 것이냐를 선택해야 했다. 일개 하사인데 말이지.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일이었더라…….
*****
노크는 했다. 그런데 반응이 없다.
그렇다면 안에 사람이 없다는 얘기가 되겠지만, 문 너머로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찌할까 고민하던 바르크호른은 잠시 고민한 후, 문을 열었다.
똑. 똑.
혹시 몰라 다시 한 번 노크를 한 후 미나의 집무실 문을 연 바르크호른에게 보인 건 들뜬 얼굴로 대화하고 있는 미나와 미오의 모습이었다. 군용 지도가 새겨진 대형 칠판은 이미 두 사람이 써내려간 내용들로 빈틈 없이 채워져 있었다. 그러고서도 부족했는지 둘은 계속해서 자신들이 써놓은 부분들을 가리키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속도가 느렸지? 너무 가까워서 말려들면 위험해."
"너무 멀면 탄약 보급이 힘든데. 적정 거리는?"
"10~20km 내외? 분대 단위로 돌아가며 보급하면 충분한 거리일 거야."
"그 정도라면……. 아니, 잠깐. 이 녀석도 위치다. 무기를 들려주면 좀 더 가까이 올 수 있지 않나?"
"아, 그렇구나. 수송대라는 말에 잊고 있었어. ……아니, 수송대였는데 능숙한 무기가 있을까? 게다가 도그파이팅 능력이…… 어라?"
"이 속도로 중상위다. 가능할 것 같지?"
"그러네. 하지만 그래도 너무 어중간하지 않아? 소형 네우로이에게 둘러쌓이면 도망칠 수가 없어."
"흠……. 아, 그래! 그럼 여기와, 여기. 그리고 여기에 대공포를 달아주면 어때?"
"대공포?"
"우리들이 쓸 분량의 탄약을 모두 싣고도 이만큼 여유가 남아. 이렇게 양 옆에 달고, 마법으로 제어하면, 되지 않을까? 거기에 자체 무장까지 하면 버틸 수 있을 거야."
"재고로 남아있는 대공포가…… 아, 트루데. 무슨 일이야?"
이제야 눈치챘군. 바르크호른은 손에 들린 보급품 분류 업무 서류를 흔들며 대답했다.
"업무 보고차 왔다만, 놀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대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들 하고 있는 거지?"
그러나 미나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칠판을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다.
"이거. 어떨 것 같아?"
"뭔데?"
상사이자 오랜 전우의 물음에 바르크호른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빡빡하게 채워진 칠판을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끊고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몰라 잠시 헤멘 후, 미나의 도움을 받아 겨우 판서가 시작된 위치를 찾은 그녀는 천천히 내용들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내용은 대충 새로운 위치에 대한 운용법 연구인 것 같았다.
"신병 얘기 뿐인 것 같은, 음? ……어?"
초반부는 특별한 게 없었지만 중반부를 넘어선 순간부터 칠판의 내용은 그녀의 상식을 가볍게 뛰어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모든 판서를 다 읽은 바르크호른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미나를 향해 물었다.
"정말 이런 게 되는 건가?"
"세세한 건 실험해봐야 알겠지만, 90%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아."
"다 되면 좋겠지만, 일단 이 탄약 보급만 가능해도 충분히 수확이 있을 것 같군. 그렇잖아도 이것 때문에 방금 전까지 골치 아팠는데 말야."
손에 들린 서류를 가리키자 미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문제는 어느 정도 거리에서 대기하고 있느냐야."
"그게 대공포 어쩌구 하는 얘기였군."
"들었어?"
바르크호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두 사람의 대화 끝나자 미오가 칠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중전 실력은 어느 정도 된다. 하지만 속도가 느리다. 그렇다면 화력을 증가시켜주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해?"
에이스 오브 에이스의 고견을, 이라는 미오의 말에 바르크호른은 잠시 고민한 후 대답했다.
"글쎄……. 여객기보다 조금 빠른 속도인데 들 수 있는 무게는 수십 배, 라고 하면, 으음……. 아무리 화력을 높힌다한들 우리 속도를 따라올 수 없다면 숫자에 밀려서 격추되버릴걸."
"역시 그런가. 그럼 미나의 의견대로 수평선 근처에서 대기시켜두고 최대한 빠르게 보급하는 쪽으로 가야겠군. 직접적인 전투력으로 쓸 수 없다는 건 좀 아쉬운데……."
"꼭 그렇지만도 않아."
"음? 무슨 소리야?"
"굳이 네우로이에 접근할 필요 없이……."
미오의 의아해하는 얼굴에 바르크호른은 빨간 분필로 적재 가능 무게를 동그라미치고는 뒷말을 이었다.
"지원 화기를 들려주면 되잖아?"
"지원 화기?"
"보아하니 이 정도면 왠만한 무기는 다 들어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굳이 접근할 필요 없이 이렇게,"
주욱─ 바르크호른은 빨간 분필로 선을 하나 그었다.
"네우로이의 사정거리 밖에서 지원 사격을 해준다면 괜찮지 않을까?"
"호오, 그렇군. 왜 이 방법을 생각 못했지?"
"일반적인 위치와는 다르니까 안 떠오른 거겠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나 역시 무언가 깨달은 듯한 얼굴로 말하였다.
"그렇네.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이 아이라면 대전차 무기도 가능할 것 같은데……."
"탄약창을 거치대 삼아서 대전차 라이플을 쏘는 것도 가능할 것 같고, 사냐가 쓰는 미사일을 쓸 수도 있겠군. 느리다고 얕볼 게 아니겠어."
"네우로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수평선에서 섬멸시킬 수 있다면, 호위기만 붙여주고 편대로 구성시킬 수도 있겠어."
"일반적인 구경의 화기로는 안되겠는데."
"실을 수 있는 중량이야 널널하잖아?"
"그럼 적어도 20mm 이상의……."
미오와 미나가 그런 대화를 하고 있는 사이,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했던 바르크호른은 다시 칠판을 보고 있었다.
"혹시나해서 말인데……."
"응? 뭔데?"
"생각해둔 좋은 무기가 있는가, 바르크호른?"
두 사람의 재촉에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대하는 어린이 같은 얼굴로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88mm는 어떨까?"
"……."
"……."
일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88mm라고?
미오는 자신과 똑같이 침묵하고 있는 미나를 보고는,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88mm라는 단어와 관련된 지식들을 떠올려본 후, 묘하게 들뜬 얼굴을 하고 있는 바르크호른을 향해 되물었다.
"88mm라면, 티거의 그걸 말하는 건가?"
"맞아. 전차포 겸 대공포 겸 야포지."
"아니, 만능포라는 건 알고 있는데……."
미오의 질문 의도는 '장갑차에나 쓰는 대형 병기를 항공보병에게 쓰게 하겠다는 건가?' 였지만, 바르크호른에게는 그 의미가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평소에 착실한 군인이다보니 이렇듯 묘한 데서 어긋나버리면 도저히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는 게 그녀의 단점이었다.
어찌되었든 자랑스러운 태도로 대답하는 걸 보니 역시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기계화보병단에서도 쓰는 녀석이 있다고 들었다. 이런 녀석이 와준다면 항공단에서도 88mm를 쓸 수 있겠지."
미오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거야 그렇겠지. 원래 육군 병기니까.
하지만 눈앞의 에이스 오브 에이스는 그 88mm를 쓸 때 지면에 고정해놓는다는 기초적인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거야 땅에서 대구경 화력의 반동을 견딜 수 있는 녀석들이 쓰는 거잖아? 이 녀석, 88mm를 들고 날 수는 있겠지만, 그거랑 쓰는 건 별개의 이야기잖아."
"……훈련시키면 되지 않을까?"
"사람은 훈련시킬 수 있다고 치더라도, 스트라이크 유닛은? 지금까지 전차포의 반동을 버티는 스트라이크 유닛이 개발되었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카를스란트 기체 중에 88mm의 반동을 버티는 기체가 있나?"
"……없어."
"기술 강국에도 없는 기체를 바라면 곤란해."
"으음……."
바르크호른은 여전히 아쉬운 얼굴이었다.
미오 역시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다. 88mm라는 대화력이라면 중형 이상의 네우로이에게 굉장히 효과적일 것이다. 하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위치에게 88mm의 반동은 너무 큰 부담이었다. 일단 적당한 화기를 찾아봐야겠지만, 적어도 88mm같은 대구경 화포는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괜찮을 것 같은데……. 88mm……."
"미나, 너까지……."
최고 지휘관의 마음이 동했다는 것이다!
*****
내전이 벌어질 뻔 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내 전출 소식은 내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원주민 아이들의 비밀 연락망을 통해 리베리온 군 부대 내의 모든 원주민들에게 알려졌고, 그것은 곧바로 그들의 가족들에게 알려졌으며, 마침내 이로쿼이 대족장 회의에까지 전달되었다.
그리고 대족장 회의가 리베리온 정부에 대한 전쟁 결의안에 대해 만장일치로 찬성하고, 그것이 모든 원주민들에게, 리베리온 군 부대 내의 원주민들에게, 마지막으로 당사자인 내게 들려온 것은 정확하게 바로 그 다음 날 아침이었다. 뭐 이리 빨라?
당사자인 내가 어버버하고 있는 사이, 윈주민 병사들은 순식 간에 농성 상태로 들어갔고, 리베리온 정부 역시 계엄 상태에 들어갔다. 누가 방아쇠 한 번만 당기면 곧바로 내전이 시작될 기세였다.
헷갈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서 설명하겠는데, 이곳 원주민들은 현재 리베리온 정부와 공존에 가까운 대립 관계에 있다.
즉, 대립을 성사시킬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리베리온 정부처럼 군수 공장도 돌리고 있고, 기름이 부족해서 오래 사용할 수는 없지만 전차와 항공기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이 세계 전력의 핵심인 마녀들은 정부보다 많다! 저쪽 세계 원주민들마냥 창, 칼, 화살 이런 걸로 싸우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내전이 벌어지면 리베리온 정부가 승리할 것이다. 쇼미더 머니를 현실에 투영하는 저 더러운 물량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승리가 상처 뿐인 승리일 건 불을 보듯 뻔하다. 이기면 뭐해. 개척 시절로 돌아가 버릴 텐데. 원주민들이야 그 정도 불편함은 감수할 수 있을 테지만 저들에게는 치명적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리베리온 정부도 멍청이가 아닌 이상에야 나를, 아니, 굳이 내가 아니라 원주민 병사들 중 그 누구라도 최전방으로 보냈다가는 이런 사태가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저쪽 세계처럼 윈주민을 무시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닐 텐데 대체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인 걸까?
그러나 그 의문에 대한 진지한 사색에 빠져들기도 전에 윈주민 병사들은 농성을 중지하였다. 그래서 오늘처럼 모의전을 벌일 수 있었지.
하지만 왜 농성을 그만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이로쿼이 연방에서 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하긴 하는데…….
나야 그런 상황 속에서 전출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급성 신경성 위염이 생길 정도로 고민하고 있었고.
눈빛으로 사람 수십 명 정도는 쓰러뜨렸을 것 같은,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강렬한 눈빛을 가진 이로쿼이 연방의 사자가 나를 찾아온 건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네가 용맹한 창날의 딸인가."
"……네, 넷!"
솔직히 보는 순간 쫄았다. 뭐야 이 양반. 2m는 될 법한 키에 저 위압적인 근육. 게다가 우리 아버지보다 더 딱딱한 얼굴에 저 눈빛이란. 꿈에 나올 것 같아서 무섭다. 하지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외모가 아니라 그가 가져온 연방의 결정 때문이었다.
"연방은 네가 구대륙으로 건너가는데 동의하였다."
……네?
"그러니까, 가라는 건가요? 바다 건너, 전방으로?"
"그렇다."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설마 나, 팔려가는 건가? 아니, 리베리온이라면 모를까 이로쿼이에서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유일하게 내 질문에 대답이 가능한 사람은 방금 전의 짧은 대답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저 그 살벌한 눈빛으로 지나가는 리베리온 병사들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말이 노려보았다지 가까이서 보고 있으면 눈으로 적을 사살하는 것 같다. 이 아저씨 왜 이렇게 눈빛이 살벌해. 그나마 나에게 시선을 향할 때는 그 눈빛의 기세가 '약간'이나마 줄어드는 것이 위안 아닌 위안이었다.
결국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심란한 기분이었지만 숙소로 돌아오니 윈주민 아이들이 울며불며 매달리는 바람에 되려 담담해질 수 있었다.
저기,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하늘에 뜨자마자 죽을 거라는 건 좀 아니지 않니?
여튼, 갈 때 가더라도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알고 싶었다.
밤새도록 고민한 끝에 난 장교들 중에서 그나마 면식이 있는, 그러니까 늦잠으로 시작된 이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나만의 정규 복장으로 지정해버린 내 상사 샌더슨 대령를 찾아갔다. 대령은 나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왔군. 비극의 공주."
반쯤 놀림이 섞인 말이었다. 익숙하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지만. 사석이기도 하기에 나 역시 계급 따위는 던져버리고 편하게 응대했다.
"닭튀김 장사나 준비하시죠."
"그렇잖아도 잘 되고 있어. 광고만 제대로 때리면 이건 세계적인 음식이 될 거야."
"그렇게 자신만만하다가 안 팔려도 난 몰라요?"
"맛있다고 칭찬할 때는 언제고? 살찐다고 적당히 먹으라고 해도 꾸역꾸역 먹었으면서."
"하늘 나는 일로 영양이 죽죽 빠져나가니까 많이 먹어도 괜찮아요, 우리는."
정말이다.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거든. 같은 거리를 달리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 마력까지 쓰다보니 몇 배로 힘들기도 하고.
"그건 참 부럽군. 난 슬슬 아랫배가 나오는 게 신경쓰이는데 말이야. 역시 젊은 게 좋아. 것보다 살찐다고 해도 별로 신경 안 쓰는군? 리베리온 애들은 살찐다고 하면 하극상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노려보던데."
"안 찔 자신이 있으니까요."
어릴 때부터 말타고 사냥하고 돌아다니면 살이 찔 리가 없다. 나처럼 농사일만 하더라도 살이 죽죽 빠지는데 뭘. 리베리온 아가씨들은 너무 안 움직여서 살이 찌는 거다. 게다가 원주민들은 체형을 중시해서 몸무게는 별로 신경쓰지 않으니까 나 역시 그 애들처럼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도 몸무게는 비밀. 왠지 말하기 싫다. 음, 소녀의 심리란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랬군. 음, 그래. 일단, 홍차? 커피?"
"우유는 없나요?"
환생하고 나서는 왠지 우유가 맛있다.
우유 좋지 우유. 마음을 진정시켜주고 영양분이 풍부한 우유. 고소하고 든든한 우유.
"호? 그 키의 비결은 우유에 있었군?"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대령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냉장고에서 우유병을 하나 꺼내 주었다. 이런 사람이 상사라 다행이다.
소파에 앉아 우유를 반쯤 마셨을까, 자신의 홍차를 타온 대령이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왜 최전방으로 전출가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온 거지?"
곧바로 본론이었지만 대화의 물꼬를 트는 사소한 잡담은 방금 전에 마쳤기에 나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대령은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건 정말 운이 없는 경우긴 한데, 일단 원인을 따지자면 리베리온 정부 쪽이야. 물론 상부는 절대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내 말을 증언으로 채택해봤자 효력은 없어. 하여간에, 네 어머니 쪽 집안 친척 중에 준장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처음 듣는 얘기였다. 뭐야, 나도 이른바 빽 있는 아가씨였던 건가? 하지만 어머니께서 원주민과 결혼한다고 했다가 의절당했다고 하셨으니, 친척이 위관이든 장성이든 이제는 별 상관 없겠지.
"이 인간이 군 예산을 삥땅쳤거든. 게다가 신병으로 들어온 자기 집안 사람들은 모두 후방의 안전한 부대로 빼버렸던 게 들통이 났어. 그래서 그 뒤로 빠졌던 인간들을 전방으로 돌리는 와중에, 네가 걸렸다는 거지."
그 준장이라는 인간이 현실적으로 있을 법한 부패한 군인이라는 건 일단 넘겨두고, 문제는 그거였다. 왜 내가 거기에 연관되느냐.
"어,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전 이로쿼이 사람이라 여기 군입대 하기 전까지 리베리온 정부에 아무런 기록도 없었을 텐데요? 어떻게 찾아냈답니까? 어머니가 이쪽에는 출생 신고 안했다고 하셨는데."
내 물음에 대령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대답했다.
"제 자식을 사지로 보내고 싶지 않은 부모의 정성이 기적을 일으킨 거야."
"……아아……."
익숙한 장면들이 대뇌를 어루만진다. 필사적으로 보내도 괜찮을 적당한 혈연 관계의 인물을 찾는 인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의절한 관계라는 것도 신경쓰지 않았겠지. 항상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인간들이 문제인 건 여기나 저기나 변함이 없군.
대령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너를 찾아낸 것까지는 좋아. 그런데 이 인간이 '내 친척 중에는 이렇게 최전방에 간 인간도 있다!'라고 자랑하고 싶었는지 덜컥 최전방 부대들에 연락을 한 게 문제였어. 나중에 보니까 이 인간, 네가 이로쿼이에서 파견된 것도 몰랐다더군."
"그저 얼씨구나하고 앞뒤도 안 보고 밀어넣었겠죠."
"그렇겠지. 여튼 계급이 계급인지라 정말로 최전방 부대에 공문이 보내졌어. 이런 신병이 있는데 데려가겠냐고. 그리고 대부분의 부대에서 모두 거절 의사를 표시했지. 왜 그런지는 알지?"
"누구보다 잘 알지요."
느려터진 위치를 어따 써먹겠는가, 라는 이유지.
"그런데 여기서 대반전이 터진 거야. 에이스 오브 에이스가 깔린 연합군 제501 통합 전투 항공단에서 널 요청한 거지. 그야말로 최전방 중에 최전방인 부대에서 말이야."
"공인 격추수 200을 돌파하는 인외종들이 날아다니는 마계촌에서 대체 뭘 보고 절 요청한 걸까요."
"인류의 희망을 마계촌의 인외종이라고 말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틀린 말이 아니라는데서 더 질이 나빠. 대령은 그렇게 덧붙이고는 다시 이야기를 재개했다.
"문제는 이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준장 선에서 결정된 일이라는 거야. 그래서 연합군 사령부에서 네 정식 전출 명령서가 도착한 날, 군부는 물론이고 백악관이 뒤집어졌지. 어떻게 몰래 처리해보려고 했는데 눈치도 없는 행정병 하나가 어떻게 손 쓸 틈도 없이 네게 명령서를 전달했고, 그 결과 내전이 벌어질 뻔했지."
그래서 그런 일이 벌어졌었던 게로군.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든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다.
대령 역시 그걸 알고 있었는지 곧바로 다음 이야기를 얘기해주었다.
"정부가 주목한 건 네가 혼혈이라는 점이었어. 즉, 협약에 쓰여진 '퍼스트 네이션'이 아니라고 들이댄 거였지."
"개인적으로 씨알도 안 먹혔을 것 같은데요."
"처음에는 그랬지. 하지만 리베리온 정부가 필사적으로 협상을 벌인 덕분에 먹혔어."
"……그렇게도 절 보내버리고 싶은 겁니까, 리베리온은?"
내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목소리에 대령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501항공단이잖아? 에이스 오브 에이스. 퍼스트 클래스 스트라이크 위치스. 네가 순수 리베리안이었다면 정부는 언론에 홍보까지 했을걸? 이제 501항공단에 리베리온 위치가 둘이나 있게 되었다고. 리베리온 군인은 우수하다고."
"기왕이면 조용히 살다가 제대하고 싶었는데 말이죠. 관심 병사는 사절이에요."
진태는 동생 전역시키려고 태극 무공훈장 노리고 싸웠다지만 난 아니다. 가족들 다 안전한 데 있으니까 나만 빠져나오면 되는데 왜 최전방으로 끌려가는 거야? 이건 설마 세계의 억지력인가? 앙돼, 난 왜 햄보칼 수가 업서?!
머리를 부여잡는 나를 보며, 대령은 달관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포기하면 편해."
"……."
순간 혹했다. 이 양반, 이름만 샌더슨인게 아니라 외모도 비슷해서 순간 K●C와 안 선생님이 연동되어서 떠올라버렸어. 이 무슨 설득력.
그렇게 대화는 끝이 났고, 축하 선물인지 위로 선물인지 모를 우유병들을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또 애들이 달라붙어서 울고불고. 진심으로 걱정해서 이러는 거니까 억지로 떼어낼 수도 없고 참.
여튼, 이 상황을 정리하자면, 정신 나간 친척들의 착복&군복무회피 때문에 나도 모르는 새에 최전방 부대에 지원 서류가 들어갔고, 당연히 탈락해서 자연스럽게 잊혀질 줄 알았더니 외려 다른 후보들은 다 날려버리고 덜컥 뽑힌데다가, 혼혈이라는 점 때문에 이로쿼이 연방에서도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해서 전출 확정이라는 얘기였다.
"하아……."
환생하자마자 이런 전개였다면 두근두근했겠지만, 평범한 농촌 아가씨로 살다가 이런 전개가 벌어지니까 마음이 무겁다. 무거운 정도가 아니라 심란해 죽겠다. 스트라이크 위치스 이거, 분위기야 가볍고 발랄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얄짤없이 다 죽어가는 그런 세계잖아? 특히 남정네들. 나야 여캐로 환생했지만 그래도 뭐야, 이거 무서워. 제길,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아니, 안되잖아? 으아아아아악?!
결국 그로부터 일주일 후, 브리타니아 연방으로 가는 수송선에 몸을 싣게 되었다.
……별 탈 없이 제대할 수 있게 해주세요.
*****
이건 여담인데, 내 전출 사정을 알게 되신 어머니께서 집안을 뒤엎어버리셨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중기관총을 양 어깨에 둘러매고 터미네이터처럼 친척집을 쓸어버리셨다고 한다.
그, 뭐시냐, 나를 보면 알겠지만 어머니께서도 위치셨던데다가, 나이 스물을 넘기시고서도 마력을 잃지 않으셨었으니까, 그리고 실드는 쓸 수 없으셔도 다른 마법은 쓸 수 있으시니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폭격기까지 보였다고 하던데, 뻥이겠지? ……아니, 어머니라면 왠지 정말로 그렇게 하셨을 것 같아서 더 무섭다.
젊어서 군인이셨을 때─이때 아버지를 '적'으로 만나셨다고. 이 무슨 드라마─ 별명이 완전히 쓸어버린다는 의미로 리셋 머신이셨다고 하니까. 본인은 부정하지만 당시 동료들의 증언으로 봐서 확실하다.
거기에 아버지 역시 합세해서 주춧돌 하나 남기기 않고 집안을 쓸어버리셨다고 한다. 최배달마냥 맨손으로 들소 뿔을 박살내시는 분이다. 젊으셨을 때 어머니와, 그러니까 리셋 머신과 호각으로 싸우셨던 분이시다.
그런 두 분께서 움직이셨으니. 우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친척들이 참으로 불쌍해진다. 집도 분명 주춧돌 하나 남기지 못하고 박살났으리라.
하지만 감사합니다, 아버니, 어머니. 딸내미 속 풀어주셔서. 제대하면 말 잘 듣는 딸내미가 될 게요.
……그러니까 제발 무사히 제대했으면 좋겠다.
*****
세계관을 살펴보면 항공보병 외에 장갑보병도 있는 것 같더군요. 시마다 씨의 일러스트에서 보던 그 육군 위치스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항공보병들이 제공권을 장악해주면 세라는 건쉽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육군을 지원할 수 있겠네요. 이얏호!
대공포 깔리면 순살이겠지만…….
리네의 보이즈 대전차 라이플 사정거리가 91m라고 나오길래 '구라지? 조선 궁수 뜨면 다 죽겠네?' 이러고 있었는데 대전차 사정거리더군요. 어, 잠깐. 네우로이 중갑 아니었나? 애니에서는 수평선 너머도 쏴재끼는 것 같던데?
무기 설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초기 설정은 88mm, 20mm 대공포 2문, mg42 둘이었는데, 미군 무기를 좀 뒤지다보니까, 그리고 너무나도 끌리는 105mm, 20mm 대공포 2문(근접신관사양), m2로 갈까 생각중이에요. 어차피 탄약은 빵빵하니까!
……격추되면 탄약과 함께 내 몸이 불타고 있어, 가 되겠지만요.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3
미나, 미오, 바르크호른이 '과연 세라에게 88mm가 합당한 무기인가?' 라는 주제로 토론한지도 벌써 일주일 째였다.
사실 그녀들의 대화는 토론이라고 할만큼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잘 살펴보면 군 부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사소한 잡담에 불과했다.
단지 부대 최고 지휘관과 그 부관이 그들의 마음 속 한 구석에 결코 작지 않은 희망을 품고 대화에 임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단순한 잡담으로 끝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대형종에게는 소구경 총탄을 쏟아붓는 것 너무 비효율적이니까."
"우선 우리가 소형종을 처리하고, 그 다음에 그 녀석이 접근해서 포격을 쏟아부으면……."
그러니까 미나와 바르크호른이 일찍 포기했다면 이 사소하디 사소한 잡담이 일주일이나 지속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에 두통을 느끼며 미오는 일주일동안 반복한 지적을 다시 한 번 입에 담았다.
"소형종을 처리해두더라도 네우로이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이 애는 격추당해. 그럼 결국 놈들의 사정거리 밖에서 포격을 실시해야하는데, 그게 가능한 대구경 포는 대부분 육전형이라고? 반동은 어떡할 건데? 속력을 버리는 대가로 추가 중량을 얻은 상태에서 반동 제어까지 신경쓰려면 마력이 부족해. "
"그 반동이 계속 문제로군. 으음……."
"아, 그럼 네우로이를 비행 반경의 중심에 놓고 쏘면 어때?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반동을 제어한다면?"
"네우로이를 축으로 삼아 지속적으로 공격을 해준다라……."
"일반 항공기의 선회 개념을 위치에게 적용한 것 까지는 좋은데, 옆으로 돌아도 반동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비행 경험을 왜곡하지마."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미오는 평소에는 냉정하고 사리판단 잘 하는 두 사람이 어째 이 88mm만 얘기가 나왔다 하면 이렇게 미련을 못 버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 역시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포기한 지 오래였다.
이렇게만 말하면 그녀들이 생산성은 전혀 없는 탁상공론만 하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유능한 인재인 이들은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업무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문제지. 문제가 표면화되지 않으니까 아무도 지적을 못 하잖아. 그런 생각들이 미오의 뇌리를 스쳐갔다.
미나의 한 마디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어, 잠깐만. 세라의 마법 특성은 등가 교환이니까 반동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면 어때?"
사격의 반동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힘의 반작용을 전혀 다른 방향의 에너지로 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있을 수 없는 힘인 마법이 존재한다. 게다가 그녀들의 대화의 중심인 그 소녀─세라의 마법은 그 있을 수 없는 일을 가능케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순간, 두 사람은 외쳤다.
""……그거다!!""
그 뒤로는 88mm를 공중전 사양으로 개조해야한다, 탄약은 넉넉하게 실을 수 있냐에서부터 이륙할 때 활주로를 얼마나 달려야 하느냐, 포는 어떻게 들고 이동하느냐까지 별의별 것들이 논의되었다.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녀들 뒤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고만 있던 에리카 하르트만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다 좋은데 말이야."
"응? 뭔데?"
"지적할 만한 거라도 있나, 프라우?"
개인적인 호기심과 훈련도, 할 일도 없었기에 만들어진 무료함 때문에 세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그녀의 발언에 세 사람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집중되자 지상에서는 헛점투성이지만 하늘에서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에이스 오브 에이스─에리카 하르트만은 아무도 신경쓰지 못했던 점을 파고들었다.
"88mm 사격은 누가 가르칠 건데?"
짧은 침묵 후,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바르크호른이었다.
"그야 물론 사카모토가……."
부대 내에서 그녀가 신병 훈련을 맡고 있으니까, 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미오는 88mm는 써본 적이 없다며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애초에 기계화보병들도 일부만 쓰는 88mm를 항공보병이 써봤을 리가 없었다.
겨우 문제가 해결되는가 싶더니, 산 너머 산이었다.
"……부대 안에 사격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없겠지."
"그렇네……."
"으음, 어쩐다……."
생각치도 못한 문제에 그녀들은 다시 한 번 머리를 싸맸다.
*****
안녕, 고든?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야. 하지만 일이 잘 풀릴 것 같지가 않아. 그래서 난 진작에 감독관에게 말했지. 이 일은 중지시켜야 할 것 같다고. 하지만 감독관은 말을 듣지 않았어.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어떻게되긴 뭘 어떻게 돼……."
수송선단에 몸을 싣고 항해한지 어언…… 며칠이 지났더라. 중요한 게 아니니까 넘기자. 지금 중요한 건, 함장실로 불려가게 생겼다는 사실이다!
젠장, 어떡하지?! 아무 것도 안하고 내 방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왜 관심 병사가 된 거지?! 말년 병장이 행보관 눈 피해서 짱박혀있던 것도 아닌데 왜?! 일 없어서 뒹굴뒹굴 탱자탱자였는데 왜?!
어찌되었든 가기는 가야했다. 아니, 그럼 안 가고 개겨? 수송함대도 함대고 함장 정도면 별이잖아? 최소한 준장은 될 텐데 하사가 준장한테 개길 수는 없잖아?
결국 나는 궁시렁거리면서도 심심풀이 삼아 무라도 베어낼 정도로 날카롭게 각을 잡은 군복을 입고 함장실로 향했다.
여담이지만, 여군복은 각 잡을 곳이 참 애매하다. 전체적으로 한번에 좍 세우기 보다는 부분부분 손가는 곳이 많다고 할까. 나만 그러나 싶어서 다른 애들한테도 물어볼까 했는데, 할 일 없다고 군복 각 세우는 건 나 밖에 없었다. 헛, 전생의 버릇이 10년의 세월을 넘어 되살아나고 있는 건가?! 무섭군, 군대 버릇!
그러면서 함장실을 향해 가고 있자니, 여기저기서 시선이 느껴졌다. 수병들의 시선이었다.
이 세계 참 이상한 게, 남자들은 성인들 중에서만 군인을 뽑는다. 정상이기는 하지만 위치들은 다들 20세 이하잖아. 소년병은 안되고 소녀병은 되는 거냐. 뭐,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여성들 뿐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만서도.
그런고로 이 배의 수병들도 다들 건장한 성인 남성들이었다. 후하하하하! 난 열 여섯에 하사고 네놈들은 스물에 이등병이지! 아하하하하……. 좋아할 일이냐, 이게.
여튼 수병들은 내가 보이면 인사는 해주었다. 일단 계급상 위인지라 경례해주는 것 같기는 한데, 이것들 어째 나만 지나가면 수근거린다. 뭐가 불만이냐 이것들아. 할 말 있으면 앞에서 똑바로…… 할 수 없지. 여긴 군대니까. 설마 나중에 소원수리하면 누구누구 하사님이 괴롭힙니다,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런데 난 아무 것도 안 했는데? 게다가 나 501 부대에 드랍하면 니들 다시는 안 볼 거 아냐? 왜 다들 나만보면 수근거려?
그런 생각에 작은 한숨을 내쉰 순간, 내 황갈색의 피부색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때문인가?"
그러고보니 여기 녀석들 죄다 순수 구대륙 계통이었군. 흠, 위치고 하사고 이전에 이로쿼이 사람이라는 게 아니꼬웠던 건가.
거, 묘하게 열받는데? 이쪽은 니들 윗대가리들이 요청해서 얼떨결에 끌려온 건데 환영해주지는 못할 망정 뒤에서 까고 있어? 이것들을 어떻게 할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조져야지. 계급도, 힘도(마력으로 증강하면) 내가 위다!
그런 생각에 난 가장 마지막에 나를 스쳐지나간 수병들을 돌아보았다. 좋아, 여전히 수근거리고 있다. 딱 걸렸어. 일단 병장 계급 단 녀석을 찔러보았다.
"뭐가 불만이냐?"
"그러니까 저건…… 응? 흐헉?!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니들 암말도 안하고 있다가 나 지나가니까 수근거리잖아."
"다른 얘기입니다!"
"헤에? 다른 얘기? 내가 니들이 처음이면 말을 안해요. 이건 이 배 있는 놈들 전부다 나만 지나가면 다들 일 팽개치고 쑥덕거려. 전부다 나만 지나가면 얘기 거리가 생기냐?"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방금 전에 '그 하사 이상하지?', '네, 저런 하사 처음이에요.', '원주민이라서 그런가보지.' 하는 소리 다 들었는데?"
"……."
나는 보았다. 너의 얼굴에 '쓰벌 X됐다.' 라는 대사가 흘러가는 걸.
자, 그럼 이제 결정타를 날려보실까.
"내가 연방 족장 회의에 '애들이 종족 차별합니다. 어떡할까요?' 전신 하나 날리면 그 뒷감당 다 할 수 있냐?"
병장과 그 외 병사들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해가는 게 보인다. 사람 얼굴이 이렇게도 빠르게 변할 수 있구나, 하는 감상에 잠겨 있는데 아까부터 안절부절 못하던 이등병 하나가 외쳤다.
"그, 그게 아닙니다! 하사님 치마 때문입니다!"
"……어?"
뭔 소린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나를 제외한 수병들은 다들 그 이등병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두고보자, 저 새퀴, 이래서 이등병은, 저 새퀴 또 사고쳤네, 하는 얼굴이다. 아니, 이놈들은 냅두고, 치마 때문이라고?
옷 때문이라고 했으면 군모에 깃털 꽂고, 허리에 장신구 차고, 팔에 완장 걸친 이 기묘한 복장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는데 치마라고 딱 잘라 말했다. 일단 내 치마는 군복 규정에 맞는 타이트 스커트다.
……설마 이것들이 치마에 눈 돌아간 건가.
확실히 위치스를 제외하면 군대 내 여성 비율은 무지막지하게 낮다. 아니,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실제로 이 선단에도 간호장교 아가씨들을 제외하면 여성 군인은 나 하나 뿐이니까.
하지만 이놈들, 하의 안 입어서 사람 참 심란하게 만드는 간호장교들이 지나갈 때는 아무 말도 안한다. 심지어 나보다 휠씬 더 예쁜 아가씨들인데도.
그래서 물었다.
"내 치마가 왜?"
그 질문의 대답은──.
*****
지휘부의 고민과는 별개로 연합군 제501 통합 전투 항공단의 부대원들은 신병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탄약 걱정 없이 전투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다들 그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외에, 화력 지원이 가능하지만 기본적으로은 '탄약 보급이 중점을 둔 비전투병과 위치'라는 개념을 생소하게 느끼는 건 다들 똑같았다. 신병보다 못한 비행 속도에 의문을 떠올리고,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화물 적재량에 놀란 것도 마찬가지였다.
임시라고는 하지만 예정된 지원 화기가 88mm라는 것에 의혹의 눈초리를 한 것도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지휘관들의 고민과는 상관 없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과연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이 지배적인 분위기였지만
어떤 일을 하느냐와는 별개로 사람에 대해서는 '성격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하는 분위기가 대체적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이곳의 부대원인 샬롯 E. 예거 때문이었다.
"샤리, 괜찮아?"
"뭐가?"
"리베리온 사람들은 원주민하고 사이가 나쁘다고 하잖아."
"아아, 그거?"
라틴계 혈통의 구릿빛 피부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진 소녀, 루키니의 질문에 샬롯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글쎄? 난 원주민들을 거의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으음, 오자마자 샤리한테 뭐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리고 혼혈이라잖아? 절반은 리베리안이니까 괜찮을 거야. 거기다가 이제는 동료잖아?"
샬롯은 사선을 넘나들어야 하는 전우끼리 투닥거리는 건 사양이야, 라고 덧붙이며 창문 너머, 리베리온 쪽을 바라보았다.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그래야 하고 말이지.
그녀는 마지막 말을 삼키며 유쾌한, 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함장이 부른 이유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대기타고 있어라.'였다. 네우로이가 나올지도 모른다, 라는 전신이 도착했다고 한다.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했더니 연합군에는 이것만 조사하는 부서가 있어서 뭘 어떻게 하면 어디서 어느 정도의 놈이 튀어나오는 지 알 수 있다고 하는데, 대체로 하루 이틀 틈으로 맞아떨어진다고 한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이로쿼이안이라고 정보 통제당한 건가.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일 터지기 전에 제대로 알려줬으면 된 것이다.
문제는 내가 할 일이지.
"간단하게 말해서 5분 대기조군요."
"호, 잘 알고 있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전생 군 생활하면 떠오른 것들 중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건데요. 게다가 오늘인가 내일 쯤 되면 도착한다는데 하루 이틀 차이로 나온다고 하면 그때까지 대기타고 있으라는 거잖아. 왜 하필 이 타이밍이냐. 제대 전에 하계 훈련해야하는 병장의 기분이다. 으아, 귀찮은 건 싫은데…….
물론 귀찮다는 건 농담이고 사실은, 무서우니까 그런 것이다.
무섭지. 죽어봤으니까 잘 안다. 전생에 뭐하다 죽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튼 그 순간도 그렇고, 죽기 전의 그 심정도…… 그만하자.
"후우……."
함장이 상당히 궁금하다는 얼굴로 질문을 던져온 건 내가 무거운 한숨을 내쉰 후였다.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혹시 전 부대에서 심하게 다친 적이 있나?"
"네. 비행 훈련 중에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습니다."
다리 뿐인가. 가차없이 굴렀었지. 초기에는 비행에 능숙하지 못해서, 나중에는 모의전에서 격추당해서. 군의관 중에 누구 하나 내 추락 부상 사례만 연구한 사람이 있을 정도로 많이 다쳤었지. 덕분에 추락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덜 다치는가에 대해서 빠삭해졌다.
"비행 중에 추락해서 골절이라…… 흉터가 심하게 남았겠군?"
"아뇨. 마법 치료를 병행해서 흉터는 거의 없습니다."
내 대답에 함장은 더욱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이 양반이?
그리고 뒤이어진 질문이 내 뇌리를 강타하였다.
"그럼 그 치마는 왜 입은 건가?"
"……제가 입고 싶어서 입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묻는 거였냐. 그러고보니 아까 그 수병 놈들도 내가 왜 치마를 입느냐 가지고 쑥덕거렸지.
내 말에 함장은 물론 근처에 있던 장교 및 부사관들까지 기묘한 얼굴로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원주민 풍습인 줄 알았는데."
일단 입는 게 풍습이긴 하다. 아니, 원래 이게 정상 아니야?
"아냐, 그쪽은 입어도 짧거나 옆에 긴 슬릿이 있어. 저런 할머니 치마가 아니야."
할머니 치마라 미안하군. 그리고 무릎 위 3cm의 평범한 타이트 스커트가 어째서 할머니 치마인 거냐.
"안 더운가?"
안 더워. 이것들아. 그리고 여성은 하복부를 따듯하게 해야하니까 조금 더워도 돼. 그리고 바닷바람 차가워 이 자식들아.
수근수근. 웅성웅성…….
아니야,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젊은 여성에게 하의 벗기를 강요하는 이 세계가 이상한 거야. 글러먹었어, 이 세계는!
결국 나는 잽싸게 경례한 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의 군인들을 뒤로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
세라를 실은 수송선단 위로 이형의 기체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너무나도 고요하고 매끄럽게, 동시에 갑작스럽게 하늘 위로 나타난 그것은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천천히, 수송선단을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
문득 떠오른 생각인데, 보통 이런 전쟁물에서 주인공이나 혹은 주인공에 준하는 조연들이 이야기의 중심에 등장할 때는 항상 긴박한 순간인 것 같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그랬고, '밴드 오브 브라더즈'가 그랬고, '태극기 휘날리며'가 그랬고, 그 외에 여러가지 매체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음, 스트라이크 위치스가 전쟁물이 맞냐는 질문에는, 뭐, 일단 엑스트라들이 가차없이 죽어나간다는 점에서 이 세계도 전쟁물이라면 전쟁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녀들이 하의를 부실하게 입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싸운다는 점에서 마법소녀물이라고 해도 괜찮을 듯 싶지만, 마법도구가 아니라 중화기를 다루는 마법소녀는 좀 이상하지 않나?
……환생해서 그 문제의 마법소녀(?)로 활동하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로군.
여튼 왜 이렇게 별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이유는,
[적습! 적습! 이건 ─쿠와아아아아아앙!!!─ ……훈련이 아니다(This is not drill)! 다시 한 번 말한다! 이건 훈련이 아니다!]
5분 대기조가 된지 5분 만에 일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제길, 아까 함장이 뭐라고 했지?! 대기하라고! 어디서? 격납고! 왜? 출격해야하니까…… 그래, 그거다!
"스트라이크 유닛!"
외침과 동시에 나는 방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그래, 스트라이크 유닛이다. 위치니까, 바람의 딸이니까!
이미 외부는 어수선했다. 각자의 위치로 달려가는 수병들의 외침과 제어되지 않는 대공포들이 내뿜는 불꽃과 폭음이 파도 소리만 있던 바다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동시에 울려퍼진 방송이 내가 제대로 달려가고 있음을 확신시켜 주었다.
[──하사! 격납고로! 세라 둘리틀 하사! 격납고로!]
"달려가고 있습니다아아아!!"
[이 방송을 듣는 즉시 격납고로!]
"가고, 있다니까아아아!!"
들릴 리가 없는 외침을 외치며 복도를 달린다. 난간을 뛰어 넘는다. 벽은 올라탄다. 아, 진짜 치마 이거 걸기적거리잖아! 그 생각에 코너를 돌면서 치마의 옆트임을 잡아당겼다. 부욱! 허벅지 너머까지 좍 찢어졌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전시니까!
방금 전보다 더 빨라진 속도로 격납고에 도착하자, 당직 병사들이 손가락으로 저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쪽입니다!"
그곳에는 훈련용이 아닌 스트라이크 유닛 하나가 포장을 뜯고 나와 있었다. 스트라이크 유닛의 종류에 대해서 배울 때는 본 적이 없는 기체였다. 신품인가? 신품이든 구품이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나는 신발을 벗어던짐과 동시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우웅─ 마음 속에 무언가 차오르는 감각과 함께 머리 양 옆으로 뿔이 돋고, 꼬리가 나타난다. 기묘하고 익숙한 감각. 사다리를 뛰어 올라가 뛰어들듯이 다리를 밀어넣으며 스트라이크 유닛을 기동시켰다. 마력을 흘려넣고, 감각을 되살리면,
부웅─.
좋아! 됐어!
격납고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물론 이 배는 항모가 아닌 수송선인지라 날아오르기는커녕 달리기도 빠듯한 거리지만, 스트라이크 유닛은 수직 이착륙도 가능하니까 문제 없다.
날아오르려 한 순간, 나는 무기가 없다는 걸 깨닫고 당직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무기! 무기 없어?!"
그말에 그들은 잠깐 우왕좌왕 하는 것 같더니 곧바로 보급품 하나를 향해 달려고 번개와 같은 속도로 포장을 풀어해친 후, 그 안에서 나온 기관총 한 정과 묵직해보이는 탄창을 꺼냈다. 그리고는 곧바로 탄창을 장착한 기관총을 내게 들려주었다. 그, 브라우, 브라우닝인가? 집요정이라고 불렀는데. 저쪽에 미리 가 있는 리베리온 위치가 쓰고 있는 물건이라고 들었,
콰아아아아앙!!!
격납고 문 너머로 성대한 물보라가 일었고, 짠맛이 가득한 물방울들이 내 몸을 덮쳤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떠보니 몸 앞부분은 폭삭 젖어있었다. 고개를 돌려보자 당직 병사들은 어느 새 방수포로 자신들과 방금 전에 뜯은 보급품 상자를 덮고 있었다. 니놈들 나중에 두고 봐!
여튼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빗맞은 것 같았다. 빗맞은 게 저 정도인데 정면으로 맞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무섭다. 희미하게 손이 떨려오는 걸 알 수 있었다. 들고 있는 기관총의 냉기가 떨림을 더하고 있었다. 그 순간 당직 병사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겁에 질린 얼굴들. 아마 나도 저들하고 똑같이 겁에 질린 얼굴일 것이다. 하지만…….
"……빌어먹을……."
네우로이는 나타났고 그나마 녀석에게 대항할 만한 상대는 나뿐이다. 그리고 스트라이크 유닛은 기동시켰고 무기는 손에 들려 있다. 그래, 총대 맨 거지. 막노동도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사람이고! 거기 방수포 덮어쓴 니놈들 진짜 돌아오면 한 번 보자!
그 생각과 동시에 나는 귀에 통신용 인컴을 착용하고 스트라이크 유닛을 발진시켰다.
"간다아아아아!!!!"
허공에 떠오르는 부유감과 가속의 압박을 느끼며 너무나도 짧은 활주로를 지나, 꽤 오래동안 수면 위를 내달리 듯 난 후, 나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묵직한 기관총과 실탄의 무게. 화약 내음과 비명 소리. 섬광.
그것이 내 첫 실전 비행이었다.
*****
통제실은 이미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호위함이 부족합니다! 이대로라면 전멸합니다!"
"501 항공단으로부터 전문! '출격하였음. 30분 예정.'!!"
"늦어! 다 침몰하고 올 생각인가!"
네우로이 앞에서 일반 병기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게다가 정규 함대도 아닌 수송 함대에게 네우로이는 너무나도 거대한 위협이었다.
"함장님, 하사가 출격했습니다!"
"무장은?!"
"BAR! 보급품 상자를 하나 뜯었답니다!"
함장은 자신의 부대에 나타난 네우로이를 바라보았다. 수송 함대 화력과 위치 하나. 요격까지는 불가능하지만 저지하는 것 정도라면 충분한 화력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세라가 착용한 스트라이크 유닛의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 운용 개요와 성능. 결코 충분한 화력이 아니다. 아니, 어찌보면 이 상황에서는 마이너스였다. 여차하면 제일 중요한 위치를 잃을 수도 있다. 그 생각에 그는 다급하게 명령을 내리려 했다.
"위치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해! 화력 지원을 쏟아부," 쿠쾅! 콰과광! "맞았나?! 어디가 맞았지?!"
"3번 수송함 피격! 기울고 있습니다!"
"구조 작업 서둘러! 저 상태면 곧 가라앉는다!"
"방송해! 하사 인컴 안 켰어! 인컴 켜라고 방송해!"
콰아아아아앙!! 끼이이이이익────
"이번에는 어디야?!"
"2번 호위함!! 아니, 안 맞았습니다! 하사가 막았습니다!"
그 말에 함장은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세라가 각 함선들 주변을 돌면서 실드를 펼쳐 네우로이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
50년대에 미국은 공군이 없었네요.
그래서 세라는 해군 소속으로 바뀌었습니다. [?]
항공포병Air Atillery Witch를 향한 지휘관들의 노력이 눈물겹습니다.
이런 전개가 되면 주인공이 뭔가 할 것 같죠? 안합니다. 아니 못해요. 하긴 뭘 합니까, 전투기도 아닌데. [...]
구야자 님 reines silver 얼른 번역해주세요. 현기증난단 말이에요 <-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4
기지를 출발한 501항공단 부대원은 총 네 명이었다.
사카모토 미오, 페리느 H. 클로스텔만, 프란체스카 루키니, 샬롯 E. 예거.
모두가 에이스 위치라는 것과 수송함대를 습격한 네우로이가 일반적인 크기의 중형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한 화력이었지만, 문제는 화력이 아니었다.
미오의 인컴으로 통신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수송함대가 버틸 수 있을까요?"
어딘가 도도한 기운이 감도는 목소리, 페리느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백금발과 햇살에 반짝이는 호박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전형적인 갈리아 소녀의 질문에 미오는 잠시 고민한 후 대답했다.
"버틸 거다. 나타난 네우로이도 일반적인 크기고, 함께 이동중이던 위치도 제대로 출격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설명대로라면 그 하사의 도그파이팅은……."
"굳이 싸워 이길 필요는 없어. 함대를 보호하고 네우로이를 저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위치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있다. 버텨주기만 한다면, 그 뒤는 우리가 맡으면 된다."
"……알겠습니다, 소령님."
페리느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통신을 종료했다. 미오는 페리느의 목소리에 희미한 불안감이 담겨있던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자신 역시 마음 속으로 조금이나마 초초해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무리도 아니다. 저쪽의 전황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열세였다.
중소형종이라고 해도 상대는 네우로이. 정규 함대도 격추시키지 못하는 상대다. 수송함대가 일정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전멸하지 않고 버텨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용한 일이다.
그 네우로이를 상대하기 위한 위치가 있다고 해도 고작 한 사람. 그것도 이제 첫 실전에 나선 신참 아닌 신참.
네우로이와의 1:1 접전은 닳고 닳은 베테랑이라도 가능하면 회피하고, 공인 격추수가 백 단위를 넘어가는 에이스 오브 에이스들에게도 죽을 각오를 해야하는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제 첫 실전에 나선 위치가 전장의 압박감을 이겨내고 제대로 된 함대 호위를 하고 있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미오는 세라가 스스로 무기를 챙겨들고 출격했다는 통신을 들었을 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신병들은 옆에서 챙겨주지 않으면 무기는 고사하고 뭘 해야할 지도 모르고 우왕좌왕하기 일쑤니까.
하지만 그 훌륭한 군인 정신이 실제 전력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지금 필사적으로 수송함대를 호위하고 있을 세라가 착용하고 있는 스트라이크 유닛은, 기본 설계 및 운용 개요대로라면 도그파이팅은 고사하고 원칙상 전투 자체가 불가능한 기체다. 화력 지원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원'하는 수준으로 사실상 옵션에 가깝고, 그것도 실전에서 써먹으려면 호위 기체가 필요하다.
'……버텨다오.'
지금은 그저 그렇게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
훈련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심하지는 않아도 분명하게 떨리고 있는 손으로 기관총의 안전 장치를 해제하고, 사격 자세를 취하는 일련의 자세에 망설임이나 실수가 없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제 어떡하지?
전투? 혼자서? 모의전에서 가장 먼저 격추되는 실력으로? 상대는 에이스 오브 에이스들도 편대를 짜고 협공하는 녀석인데?
"그러니까 좀 봐 주," 파츠츠츠츠츠츳!!! "봐 달라고 이 짜샤아아아아!!!!"
죽을 뻔 했다! 왜 이 세계에서 일반 항공기가 전혀 힘을 못 쓰는지 알겠어!
이 빌어먹을 레이저, 예비 동작도 없이 쏴대냐! 실드 없으면 그대로 당하잖아!
그렇다고 무작정 실드만 펼치고 있을 수도 없고! 마력은 무한한 게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다른 함선들의 대공포 사격에 맞춰 놈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어깨 걸치고, 조준하고, 날숨과 함께, 당긴다!
투타타타타타!!!
둔탁한 격발음과 함께 전부 명중하였다. 하지만 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전히 섬광을 흩뿌리고 있었다.
이걸로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냐. 그래, 떨어질 거였다면 진작에 함포에 쓰러졌겠지. 물론!
"그런다고 안 쏘겠냐아아아아!!!"
아무데나 맞추면 될 정도로 크다지만, 유효타를 만들려면 집중 사격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가까이 다가가야 하지만, 그렇지만……!
"익, 이이익…… 빌어먹으으으으을!!!!"
다가갈 수 없다. 더 가까이, 갈 수 없다.
이성적으로는 실드가 있으니까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가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본능적으로는 얼른 도망쳐야한다는 생각만이 떠올라 도저히 다가갈 수가 없었다.
무서우니까. 다치고 싶지 않으니까. 죽고 싶지 않으니까.
꼴불견이라고 비웃어도 좋다. 할 일도 못하는 군인이라고 욕해도 좋다. 하지만, 그래도 도저히 못 다가가겠다.
나도 안다. 지금 내 모습은 전쟁 영화에서 참호 밖으로 안 나가려고 발버둥치는 찌질한 병사처럼 보인다는 거.
하지만, 하지만……. 무섭다고! 무서워 죽겠다고!
결국 유효사거리에 닿을락 말락한 어정쩡한 거리에서 기관총을 쏘는 것이 전부였다.
그게, 너무나도 빈약한 내 용기의 한계였다.
한심하다. 너무 한심해. 북받쳐오는 무언가 때문에 눈앞이 흐려졌다. 제길…….
그 때문일까. 탄약이 떨어진 기관총에서 철컥거리는 소음만 들려오게 되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안심하고 말았다.
동시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무런 무기 없이 전장에 나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방금 전의 안도감을 모조리 날려버리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다시 탄창을 받기 위해 하강하려는 순간, 네우로이의 무차별적인 공격이 쏟아졌다. 실드, 실드!
"큭, 뭇, 으, 으와으아아앗?!"
실드 펼치느라 총을 놓쳤어!
급히 따라갔지만 책상 높이에서 떨어진 연필도 못 잡는 인간이 몇 배나 무거운 총화기를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별 수 없이 다른 무기를 찾으려는 순간,
쿠과아아아앙!!!!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거대한 폭음이 울려퍼졌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수송선 하나가 두꺼운 연기 기둥을 내뿜으며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크게 기울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폭발의 충격으로 튕겨나간 수병들이 수면 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허우적거리고 있으면 다행이다. 기절했는지 축 늘어진 녀석들도 있고, 바닷물을 붉게 물들이며 당장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은 녀석들도 있었다.
……신체 일부분이었던 것들도 떠다니고 있었다.
순간 토할 뻔 했다. 이래서 전쟁터 같은데 안 나오고 농사지으며 살고 싶었는데!
애써 그 처참한 광경으로부터 눈을 돌려 치밀어오르는 구토감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저 밑에서 수병들이 나를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살려줘!"
"하사님! 살려주세요!"
"여기요, 여기!"
그 순간, 나는 고민했다.
구조 활동을 벌일 것이냐, 아니면 다른 함선에서 무기를 꺼내 들고 다시 싸울 것이냐.
고민할 것도 없었다.
목숨 걸고 싸울 용기가 없었던 내 몸은 곧바로 근처 함선에 걸려있던 구명 튜브와 밧줄을 모조리 끌어왔으니까.
전투 중에 도망친 건 아니니까 처벌받지는 않겠지. 전우를 구한다는 명분이 있으니까. 아하하, 사람이란 건 이렇게 비겁했나?
그렇게 자조적인 생각을 하며 나는 구명 튜브와 밧줄을 집어던지며 외쳤다.
"일단 붙잡아! 그리고 기절한 녀석들도 붙들어! 기절한 놈 내버려두지말고 목덜미라도 붙잡으라고! 시체는 빼, 시체는 빼! 그 놈 죽었잖아, 멍청아!"
그렇게 외치고나자 열 댓 명 정도가 튜브와 밧줄을 붙들어매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나는 다른 위치들은 엄두도 못낼 일에 도전했다.
스트라이크 유닛에 마력을 밀어넣는다.
마도엔진의 회전 수가 증가하고, 에테르와 공기의 반응이 격렬해진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속도가 늘어나야할 상황에서, 내 고유 마법─등가 교환을 발동시킨다.
"끌어올린다! 꽉 붙잡아!"
화물 열차도 들어올려봤는데, 사람 열 댓 명 쯤이그윽, 좀 무겁, 큿, 왜 사람이 늘어난 거냐아악! 거기에 물 먹은 옷 무게까지!
하지만 곧 괜찮아졌다. 지속적으로 불어넣은 마력이 들어올릴 수 있는 중량을 늘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끌어올린 수병들을 가장 가까운 배 갑판 위에 내려놓았다.
다른 수병들도 구조해야한다는 생각에 반쯤 내팽겨치듯 떨어뜨렸지만, 다행스럽게도 불평 불만은 나오지 않았다. 있어도 어쩔 거야, 생명의 은인한테.
갑판에 나뒹구는 그들을 무시하고 빠르게 튜브와 밧줄을 회수한 나는 다시 한 번 방금 전과 같은 행동을 반복했,
빠지지지지직!
"우와으아으앗?!"
죽을 뻔했어!
바로 눈앞에 스쳐 지나간 섬광에 하마터면 들어옮기던 수병들을 떨어뜨릴 뻔 했다.
"으아아아악?!"
"떨어져요!!!"
"아아아악!?!?"
"시끄러, 나도 죽을 뻔 했어!!!!"
이번에 살아돌아가면 수송선단에도 대공포 좀 빠방하게 붙이라고 건의해야지.
그렇게 굳게 다짐하며 아까와 같이 집어던지다시피 수병들을 내려놓은 곧바로 녀석들에게 외쳤다.
"다른 놈들 구해올 때까지 무기 갖다놔! 저 녀석 떨어뜨릴 수 있는 걸로!"
…….
…….
……어?
맙소사,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
다가가지도 못하는데다가 잘못해서 또 바다에 떨어뜨리려고?
아드레날린이 돌고 있어서 말이 헛나온 건가?
그 순간, 내 쪽을 바라보던 수병들 몇몇이 내 뒤를 가리키며 외쳤다.
"하사님! 뒤에!"
그 말과 함께 실드를 펼친 건, 내가 생각해봐도 정말 기적적인 일이었다.
콰아아아아앙!! 끼이이이이익────
"우와아아악?!!?"
어정쩡한 자세로 실드를 펼쳤기에 착탄의 반동으로 해수면까지 튕겨져 나갔다.
주, 죽을 뻔했어! 저놈 저거! 레이저 주제에 정확도 바닥인 녀석이 이럴 때만 잘 맞추냐!
그 순간, 녀석이 다시 한 번 공격하려는 동작을 취했다.
목표는 아무래도, 방금 전에 애들 꺼내다 놓은 그 배에!
"내버려둘까 보냐아아아!!!"
멀지 않은 거리다, 제발 늦지 말아라!
다른 때 늦어도 좋으니까 이럴 때 늦지 마라!
난다.
닿아라. 제발 닿아라.
조금만 더, 한 끝 차이만, 막았다!
빠지지지지지직!!
예압, 성공했다!
함선 갑판을 미끄러지듯이 날아 펼친 실드는 아슬아슬하게 녀석의 공격을 막았다.
덕분에 왼쪽 어깨 뒤쪽이 제대로 쓸려나간 것 같다. 이거 따끔따끔 수준이 아니다. 크읍, 쓰라려!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참기 위해 방금 전에 건져놓은 수병들을 향해 외쳤다.
"무기 가져오라니까!"
"여긴 호위함이라 없습니다! 저쪽 수송선으로 가셔야 합니다!"
"뭣, 아, 진짜! 좋아, 알았어! 니들은 나머지 녀석들 구조해! 당장!"
"네, 넵! 튜브 다시 던져! 밧줄 풀어!"
병장이었나. 다른 녀석들에게 명령하는 게 익숙하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수송선을 향해 날아가─ 지 못했다.
네우로이의 몸체가 빛을 발하는 것을 본 순간,
"왜 또 나야아아아아!!!"
빠지지지지직!!!!
실드를 펼치는 것과 동시에 그 무시무시한 착탄 압력으로 인해 다시 한 번 해수면까지 튕겨져 나갔다.
으따다다다다다다! 쓸린 데 바닷물이 들어가서 미칠 듯이 쓰라렸다. 함선에는 아무렇게나 흩뿌리면서 왜 나만 정밀 조준 사격인데?!
하다못해 녀석의 위로 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녀석은 내가 놈보다 높이 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수송선에는 다가갈 수도 없었다.
내가 쓸 수 있는 무기가 있는 수송선을 향해 다가가려고만 하면, 녀석은 모든 화력을 나에게 쏟아부었다.
안 다가가면 함대 전체에 흩뿌리고, 다가가면 나만 노리고. 어쩌라는 거냐. 뭘 어떡하라는 거냐.
대기 중에 퍼진 마력을 수렴 압축하여 스타라이트 브레이커를, 아니 여긴 그 세계가 아니야.
그럼 노래를? 아니아니 그것도 아니잖아. 은하 아이돌이 아니라고.
안돼, 너무 아파서 머리가 뒤죽박죽이다.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냐고?!
[하사! 인컴을 작동시켜! 통신 연결해!]
방송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인컴? ……아, 아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제서야 귓가에 느껴지는 이질감을 인식할 수 있었다. 챙기는 건 잘 해놓고 켜는 건 잊어버리다니.
방송에 따라 인컴을 켜자 삐익─하는 짧은 소음이 지나가고 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는가, 하사! 들리는가, 하사! 들리면 바로 대답해!>
"네, 네, 네 들립니다! 들려요!"
<좋아. 다음부터는 인컴 바로 켜둬! 고립된 위치는 죽어! 알겠나!>
"알겠, 우왁?!"
파츠츠츠츠츳!
<하사? 하사?!>
"살아있어요! 살아있다구요! 으햐?!"
죽을 뻔 했지만 살아있습니다!
눈앞에서 섬광이 터질 때의 그 심정은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정신 차려! 또 온다!>
"뭐가 온다는, 흡!"
빠지지지지직!
<……또…… 피해……>
지지지지지직!
"저놈 저거 나만 때리느아우아으아악!?!"
파즉, 빠지지지지직!!!!
삼진 아웃이 그렇게 아쉽더냐. 4월 중순은 야구 시즌이라 이거지? 난 야구 싫어 이놈들아.
속도가 빠르면 네우로의 공격 같은 건 피하기라도 할 텐데, 느려터져서 다 막아내야하니 체력도, 마력도, 정신력도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초조한 심정을 최대한 꾹꾹 눌러담아 인컴에 대고 외쳤다.
"어떡하죠?! 어떡하면 되죠?! 어떡하면 되냐구요?!"
<정신 차려! 허둥대면 죽어! 죽고 싶지 않으면 정신 차려!>
살면서 죽는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귓가에 파고들 날이 다시 찾아 올까.
화끈거리는 어깨 뒤의 상처. 끊이지 않는 폭음. 네우로이 특유의 날카로운 괴음. 요동치는 심장 소리. 떨리는 몸.
무엇 하나 만만치 않은 것들이 뒤섞인 전장의 하늘에서 함장의 말은 가슴 속에 너무나도 깊숙히 내리꽂혔다.
그 덕분에 끓어올랐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식힐 수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내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어?! 여기! 여기야! 살려줘!"
"여기 갇혔어! 살려줘!"
"제발, 빌어먹을! 물 찬다! 물 차! 으아아아악!!"
방금 전 연속적으로 쏟아진 공격으로 튕겨진 자리에서 구조 요청의 외침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이런 젠장……."
기울어져 가라앉고 있는 3번 수송선에 갇혀 있는 수병들의 목소리였다.
함선 특유의 작고 동그란 창틀 너머, 깨진 유리창 밖으로 손을 내밀며, 너무나도 절박하고 처절한 목소리로 그들이 구조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뻗어져 나온 손을 붙잡으며 화를 내었다.
"뭐 하다가 갇힌 거야, 이 머저리들아! 다른 놈들은 다 빠져 나왔는데에에에!!!"
"문이 우그러져서 안 열렸습니다!"
"하사님?! 제발 살려주세요!"
"공구! 공구 없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손으로 뜯어내! 이런 함선 벽 따위 손으로 뜯어내! 물어뜯어!"
논리 따위는 애저녁에 날려먹은 말도 안되는 엉망진창 헛소리다. 나도 안다. 말한 나도 지금 내가 뭔 소리를 지껄이고 있나 싶으니까.
어쨌든 뭐라고 외치고 있는 수병들을 무시한 체 주변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뭔가 쓸만한 게 없나? 이 녀석들 구할 수 있는 도구가?
호위함 함포를 떼어다가 쓰면……, 가능하겠냐! 쏘는 순간 수병들도 같이 날아가지!
젠장, 생존함 막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왜 이런 것까지 발목을 붙잡는 거야?!
대공포 구경 정도면 구멍만 뚫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인컴 너머로 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사! 뭘 하고 있나!>
"어, 어, 그러니까, 가라앉고 있는 배 보이세요? 수병 셋, 넷, 아니 다섯! 다섯 명이 갇혀있습니다!"
<3번 수송함 구조 활동은 다른 수병들에게 맡기고 자넨 네우로이와 싸우게!>
"당장 애들 죽게 생겼는데요?!"
<자네가 지금 안 싸우면 모두 죽어! 다섯 명 때문에 전원을 몰살시킬 생각인가!>
"……빌어먹을……."
<냉정해지게. 자네가 침몰하는 배를 인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나. 포기하게. 어서!>
차가운 방정식.
순간적으로 그 단어가 스쳐지나갔다.
고결하다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생명의 무게를 저울질할 수 밖에 없는 차갑디 차가운 수식. 이래서 난 수학이 싫다.
눈앞에 뻔히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건가? 위치의 힘을, 이런 데는 못 쓰는 건가?
……방금 함장이 뭐라고 말했지?
쿠콰아아아아아앙!!!!!
함장의 말에서 무언가 키워드가 될 만한 단어를 되짚으려는 순간, 하늘에서 폭음이 울려퍼졌다.
고개를 돌려보자, 그곳에는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한 위세를 자랑하던 네우로이가 탁한 회색빛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인컴에서 함장이 아닌 어떤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직후였다.
<연합군 제501 통합 전투 항공단. 대 네우로이 전투 개시한다. 버텨줘서 고맙다, 리베리온 수송 함대.>
참으로, 참으로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방금 전까지 절망적이었던 상황을 단숨에 뒤엎어버렸다.
"하, 하하, 아하하하하!!! 왔어, 왔다구! 왔어! 함장님! 전 그대로 구조 활동에 들어가겠습니다!"
굉장하잖아? 백마탄 왕자님, 아니 마녀들인가?
너무 전형적인 등장인 것 같지만 그래서 그런지 더 멋져 보인다.
여튼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들이 왔으니, 나는 여기 바보같이 갇혀버린 놈들을 구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창틀 위로, 이미 절반 이상 기울어진 수송선의 갑판 위로 날아올랐다.
"어어?! 하사님?! 어디가세요?!"
"버리지 말아요! 버리지 마아아아!?!?!"
"안 버려 이 짜식들아! 잠깐, 참아! 군인이잖아!"
못 참는 건 나도 안다. 당장 발 아래 물이 차오르는데 진정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래도 버리는 거 아니니까 조금만 참아다오.
문이 우그러졌다고 했지? 네우로이의 공격으로 뭉게졌던 것이리라. 그렇다면, 물만 빠져주면 공병들이, 구조 부대가 들어가서 문을 뜯어내고 녀석들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함장님! 구조 부대 보내주세요! 함선 문 뜯어낼 수 있는 장비 들려서!"
<뭐? 뭘 할 생각인가?>
위치스의 지원으로 한숨을 돌렸는지 함장의 목소리는 조금은 여유로웠다.
이 사람이, 한숨 돌렸으면 사람 구할 생각은 안하고. 방금 전에 말했는데 그새 잊어버린 건가.
물론 네우로이가 격추되기 전까지는 긴장을 늦출 수 없겠지만서도 이제 전투는 저기 마녀들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사람을 구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천천히 가라앉고 있는 수송선 선단을 움켜잡았다.
자, 그럼. 한 번 놀래켜 줘 보실까?
마력을 활성화시키고…….
활성화시키려고 해도 솔직히 말해서 남아있는 마력이 얼마 없었다. 하지만 아둥바둥 애를 쓰면 어떻게 될 분량이다.
좋아, 어차피 나한테 섬세한 일 같은 건 머나먼 나라 얘기였으니까. 부족한 나머지는 근성으로 어떻게든 하면!
"하아, 후우……."
마력을 밑바닥부터 긁어내 끌어올린다.
그 한 줌의 마력을 전부 스트라이크 유닛에 쏟아붓는다.
마도 엔진의 회전 수가 급속도로 증가한다.
에테르와 공기의 반응이 격렬해진다.
가시화된 마력의 증거인 프로펠러의 회전이 그것을 증명한다.
"……간다아아앗!"
고유 마법을 발동시킨다. 어차피 아무리 많은 마력을 쏟아부어도 늘어나지 않는 속력 대신, 내가 들어올릴 수 있는 무게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수송선의 침몰 속도가 느려지는 게 확실하게 느껴진다. 아직 녀석들이 있는 곳이 침수되지는 않았겠지?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 있는 마력 없는 마력 다시 한 번 더 긁어모아 밀어넣는다.
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크우우우와악!
과연, 수송선은, 장난이, 아니, 구우우운!!!
열차랑은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물에 어느 정도 떠 있어서인지 제어하기에는 더 쉬운 느낌이었다.
이제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침몰 속도도 느려져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어어어!
찰박.
수송선이 살짝 떠오르는 건 같은 감각과 함께,
쏴아아아…….
어쩐지 설거지 할 때 자주 들었던 물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전투는 끝나지 않았지만 통제실에 감돌던 긴박한 분위기는 어느 새 사라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들을 위협하던 네우로이가, 그 압도적인 적이 위치스의 공격에 맥을 못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 참, 과연 위치스로군요."
"우리들 함포로는 흠집도 제대로 못 냈었는데 말이죠."
"어쩔 수 없지. 우리는 녀석의 광선도 못 막으니까."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끼며 장교들은 잠시 501부대원들의 전투를 바라보았다.
물론 마냥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군인은 없는 할 일도 만들어서 하는 법이고, 지금은 만들 필요도 없이 처리해야할 일이 산더미였으니까.
곧바로 정신을 차린 그들은 자신들의 할 일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멍하니 보고 있기만 하면 안 되지. 자자, 빨리 움직이자고!"
"예스 캡틴. 전 포문, 적기 조준 후 현 상태 유지!"
"전원 각자 위치로! 복구 작업 개시!"
"구조 작업 개시! 부상자들 전부 의무실로 옮기거나 위생병 불러! 물에 빠진 녀석들 건져내고!"
세라의 통신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여기 구조 부대 보내달라니까요! 연장 들려서!>
"하사? 어디로 말하는 건가?"
<3번! 수송함! 말입니다!>
함장은 그녀의 말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그곳에 있었단 말인가?
전투 자체야 소강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라앉고 있는 배에 갇힌 수병들을 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선체를 잘라낼 만한 장비가 얼마 없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배가 가라앉는 속도도 너무 빨랐다.
수병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바로 앞에서 사람이 죽어가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수 십 년 간 그런 안타까운 광경을 목격했던 함장은 그렇기에 세라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포기하게. 구조는 불가능하니까.
<아니! 보내면! 된! 드아니까요!>
"못 알아들었나! 그 배는 지금 가라앉고 있으니까 포기하라……"
그는 세라가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에게 현실을 보게 하려고 고개를 돌려 그녀가 있을, 가라앉고 있을 3번 수송선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그는 말을 잃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맙소사……."
"무슨 일이십니까, 함장님? ……어, 어어?!"
"아니, 하사가 뭐라고 했길, 래……."
기울어져 침몰하고 있던 배가, 마치 잠수함처럼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
그 광경은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던 501부대원들에게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한눈 파는 것이 곧바로 죽음으로 직결되는 상황에서도 눈을 돌리게 만들 정도로, 너무나도 초현실적이고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다.
기울어진 배를 바로 세우고, 다시 끌어올린다.
적어도 배 두 척은 필요한 일을, 한 사람의 위치가 해내고 있었다.
세라는 노력했지만 도저히 할 수 없었던 네우로이의 상부 점령을 가볍게 해낸 그녀들은 그 광경을 보며 각자 한마디씩 하였다.
"뭐, 저런……."
"바로세우는 것 까지는 바르크호른 대위도 가능할 것 같은데, 솔직히 저건 뭐……."
"우와, 굉장하다……."
"하, 하하, 이건 참. 미나도 정말 굉장한 월척을 낚았군!"
바다에 빠진 수병들을 수 십 명 단위로 들어올릴 때부터 범상치 않은 인재라는 건 어느 정도 깨닫고 있었지만, 저건 이미 그런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만화 영화 속의 영웅처럼 가볍게 들어올리는 것은 아니라 안간힘을 다해 서서히 인양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현실적인 모습이 상황을 더욱더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 광경으로부터 눈을 뗄 수 있게 해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네우로이의 공격이었다.
"좋아!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최대한 빠르게 녀석을 처리하고 하사를 돕는다!"
미오의 명령에 간신히 현실로 돌아온 부대원들은 통일된 대답으로 그녀의 말에 응했다. 라져.
믿음직스러운 대답에 미오 역시 잠시 사그라들었던 전의를 다시 한 번 불태우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 확고한 전의를 담은 에이스 오브 에이스들의 공격에 네우로이의 코어는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마지막 공격이 핵에 닿으려는 순간, 녀석 또한 자신의 마지막 공격을 내뿜었다.
모든 방향으로 내뿜어지는 붉은 빛 섬광들.
사실상 조준을 포기한 무차별적인 전탄 발사. 그야말로 재수 없으면 맞는 정확도 제로의 공격이었다.
부대원들은 실드를 펼칠 것도 없이 현란한 기동만으로도 피할 수 있었고, 함선을 향해 떨어지는 공격을 막기 위해서만 실드를 펴면 되었다.
그 눈 먼 공격에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퍼엉!
그러나 단 한 번의 폭음이, 눈 먼 공격에 당한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
어느 것 하나 늦은 건 없었다.
무엇 하나 잘못된 건 없었다.
관측병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계속해서 네우로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마지막 발악을 감지한 순간, 망설이지 않고 통제실을 향해 고했다.
함장 및 휘하 장교들 역시 긴장감을 풀지 않고 있었다.
위치의 지원이 오더라도 이 마지막 공격에 전멸당할 뻔한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관측병의 외침에 전원 경계령을 내릴 수 있었다.
세라에게 녀석의 무차별적인 공격이 쏟아진다고 통신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 통신은 결코 누락되지 않았으며, 세라 역시 그 공격을 확인하고 제대로 실드를 펼쳤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실드가 네우로이의 공격을 막아내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아니었다.
퍼엉!
심장을 멈추게 하는 싸늘한 폭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통제실을 스쳐지나갔다.
"무슨 일이지?! 하사가 실드를 펼치지 않았나?!"
"실드 확인했나?! 관측병!"
"펼쳐졌습니다!"
"확실한가!"
"마력 잔류 확인! 제대로 펼쳐졌……. 이상합니다!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피격 시점과 실드 소멸 시점 오차 0.6초!"
오차 0.6초.
간발의 차이로 피했을 수도, 피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사! 들리는가 하사!"
<삑──.>
"젠장!"
세라에게 연결된 인컴은 무선 불가를 의미하는 소음만을 내뿜고 있었다.
격추. 그 단어가 장교들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하사 발견!"
"뭣?!"
"어디? 어디에?!"
"1번 호위함 방향!"
검은 연기 속에서 비틀비틀, 마치 술에 취한 듯한 움직임으로 날아간 그녀는 위태로운 비행 끝에,
쿵!
1번 호위함 함선 난간에 스트라이크 유닛이 걸리며 성대하게 엎어졌다.
마치 희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제대로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가 비틀거리며 착륙한 함선에서 도착한 무전은 그들의 등 뒤로 서늘한 한기가 달리게 하였다.
<위치 피격! 피격입니다! 간호 장교! 위생병!>
*****
갑자기 일어났을 때 눈앞이 새까맣게 변하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너무 건강해서 그런 건 한 번도 겪여본 적이 없다면 FPS였나, 여튼 그 총 쏘는 게임에서 섬광 수류탄을 직격당했을 때를 떠올려보면 된다.
그런 것도 안 해봤다고? 흠……. 대충 시각과 청각이 모두 사라진 상태를 떠올려보면 된다.
그러면서 온 몸에 힘이 죽 빠지고, 눈곱이 잔뜩 낀 눈을 억지로 떼는 것과 같은 불쾌한 감각과 함께 시각과 청각이 되돌아올 때 즈음이면, 어쩐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거나 쓰러져 있는 자신을 볼 수 있게 된다.
의학적으로는 뇌로 가야할 혈액이 제때 도달하지 못하여 순간적인 기절 상태에 빠지는 거라고 한다.
여튼 갑작스럽게 그런 상태가 된다고 한다는 것은 상당히 심적인 부담으로 다가온다.
자신만 혼자서 어둡고 고요한 별세계에 툭 떨어져 있는 것과 같은 고독감과 괴리감만이 느껴지게 되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하던 일이 있다면 그게 어떻게 될 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방금 전까지의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
"……사! 하사! ……위생…… 생병! 위생병! ……."
청각이 돌아오는지 아득한 메아리 같던 소리들이 천천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어라, 촉각도 사라졌었나? 갑작스레 딱딱한 바닥이 느껴진다.
새카맣게 물들었던 시야가 흐릿하게나마 되돌아오며 그 너머로, 갈색 나무 갑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짜고 비릿한 바다내음에, 또다른 비릿한 무언가의 냄새가 느껴진다. 토할 것 같은 냄새다.
그런데.
뭐지? 왜 누워있는 거지? 뭔 일이 있었지?
방금 전까지 쌩쌩하게, 는 아니더라도 여튼 수송선을 끌어올리고 있었는데?
조금만 더 하면 구조 부대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빠질 거였는데. 그런데 내가 왜 여기서, ……아.
네우로이.
녀석에게 당했나. 어? 실드 펼쳤는데?
펼쳤나? 펼쳤다. 펼쳤는데…… 마력이 부족해져서……. 그래서 맞았구나.
바다에 안 떨어지고 옆 배까지 날아온 게 용하다.
어, 그럼 살아 있는 거지?
괜찮아. 아직 목숨줄 붙어 있어. 감각도 서서히 돌아오고 있고.
그러니까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세라 둘리틀! 갇혀있는 녀석들 구해야지! 제길, 일어나라고!
"위생병들 얼른 찾아와!"
어느 순간, 갑자기 청각이 모두 돌아왔다.
자명종 소리를 들은 것처럼 의식이 급부상한다.
그러나 의식만 떠오른 상태였는지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어찌되었든 일어서야 한다.
"……배, 배 끌어올려……."
"정신 차려 하사! 응급 처치 할 테니까!"
"차렸으니까아…… 비켜어……."
"앗, 일어서지마! 어깨 눌러! 고정시켜!"
간호 장교 언니인가.
여성이라 생각되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여러 사람들의 손길이 어깨를 누르는 게 느껴진다.
어, 신기하네? 아까 어깨 쓸려서 무진장 따가웠는데,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것보다 왜 막는 거야? 애들 구하러 가야된다니까?
갓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몸이 무겁다.
지금처럼 마력까지 사용하고 있으면 이 정도 압력 쯤은 간단하게 뿌리칠 수 있을 텐데, 힘이 안난다.
"……비켜…… 비키라니까……."
"꽉 누르고 있어!"
"위생병! 몰핀! 놔! 이상한 데 찌르면 어떡해 임마! 정맥! 정맥!"
"지혈제 가져와! 출혈 심하다!"
"좋아! 의식 각성 마법 들어간다! 셋!"
뭐야, 그건? 그런 마법도 있나? 치료 마법도 여러 가지가 있구나. 것보다 나 의식 돌아왔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간호 장교의 치료마법이 발동됨과 동시에,
우웅─
"둘!"
두근, 하고,
"하나!"
통각이 되돌아왔다.
……아, 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순간 머리 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방금 전에는 새까맸는데 이번에는 허옇게냐. 난 염색 탈색 연습용 천이 아니야!
"……극…… 가아…… 학……!."
"몰핀 더 놔! 쇼크 온다!"
"숨 쉬세요! 숨 쉬세요!"
안돼, 너무 아파. 상반신 근육이 움직이지를 않아.
몸이 덜덜덜 떨리는 게 느껴진다. 응, 눌러주고 있어서 고맙다. 안 그랬으면 볼품 없이 떨고 있을 거다. 지금도 그렇게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지혈제! 지혈제 더 가져와!"
"옆에 있잖아! 소독부터 해! 소독부터, 젠장 골절이다! 왼팔 골절! 고정대!"
"숨부터 쉬게 해! 숨부터! 숨 안쉬잖아! 심장은 뛰고 있어?!"
"뛰고 있어요! 인공 호흡 실시!"
순간 입술에 무언가가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인공 호흡? 환생한 후 첫 키스인가? 보호 필름맛이 아니라 다행이다. 물론 농담이다. 전생 첫 키스는 여친 맞습니다.
그런데 구조 활동이잖아. 게다가 간호 장교들은 여성이고. 노 카운트인가.
어, 그, 잠깐만, 지금 숨도 못 쉴 정도로 아파서 숨 못 쉬는 건데 거기에 숨을 불어넣으면……!
"후우우욱!"
따스한 숨결이 호흡기를 간지럽히는 감각과 폐가 부풀어오르는 고통이 동시에 뇌리를 흔들었다.
……그하으아그아아악!?!?!?!?!?
"긋, 으핫, 하악! 학, 카흑, 하악! 하아아아아……!!!"
"호흡 확인! 숨 쉽니다!"
횡경막과 폐를 둘러싼 흉부 근육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각이 완전히 돌아온다. 눈앞에 간호 장교 언니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바로 몇 시간 전의 상냥하게 웃던 아가씨들이 아니었다. 주변에 겁먹은 수병들보다 훨씬 더 거칠고 살벌한 분위기다.
백의의 천사가 아니라 백의의 전투 천사들이었군요. 네.
덕분에 살았지만 그래도 다음부터는 좀 더 상냥하게 해줘요!
하지만 고통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진통제 더 놔! 얼른 뼈 돌려야 돼! 출혈 늘기 전에 뼈 돌려야 돼!"
조금 연륜이 있어보이는 간호 장교 언니가 그렇게 외치고는, 내 고개를 억지로 오른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좋아! 자, 비틀어진 뼈 돌릴 거야! 아파도 참아!"
뼈가 부러졌나? 알 수 없었다. 의식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었다.
기절하고 싶다. 아니, 이 정도면 기절할 고통인 것 같은데?
"맞추면 바로 고정시켜! 쇼크로 경련하니까 스트라이크 유닛 눌러! 거기 수병 둘! 그래 니들!"
"꼬리도 잡아! 꼬리!"
설마 방금 전의 의식 각성 마법 때문에 기절도 못하고 있는 건가?
신종 고문입니까? 그냥 기절시키고 치료하면 안되는, 우드드두득.
"……!!!!!!!!!!!!"
아까거랑, 차원이 다르잖아아아아아아아!!!!!!!!!!!!!
"악, 아극, 힉, 히흑, 각, 아으악, 커학……?!?!"
여긴 어디지? 나는 누구? 살아있는 건가?
눈물이 쏟아진다.
다물지 못하는 입에서 기침과 함께 침이 튀어오른다.
분명 못 볼 꼴일 거다.
하지만 너무 아프잖아! 진통제 놓은 거 아니었어?! 놨으면 하나 더 놔 줘!
"몰핀 그만 놔! 안락사 시킬 작정이야!"
언니이이이이이?!?!!?!??!
안락사든 쇼크사든 죽을 것 같은데요!?!?!
기절시켜줘! 차라리 기절시켜줘! 이래서 전쟁이 싫다니까!
"잘 참았어, 아가씨! 압박 붕대! 이런, 붕대 더 가져와! 이마도 까졌어! 뼈 보인다!"
뼈 보이는 거면 까진 정도가 아니잖아아아아아!?!?!
*****
"하사가 맞았다고요?"
<지금 응급 처치 중이네. 간호 장교들 말에 의하면 '목숨 건졌고 사지 멀쩡하니까 괜찮다.'라는군.>
"……간호 장교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샬롯의 중얼거림이 전해졌는지 함장의 대답이 들려왔다.
<치료 마법만 있으면 모두 낫게 할 수 있으니까.>
"아니,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녀들도 전장에서 닳고 달은 고참들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 후방의 심약한 간호사들을 떠올리면 안된다네.>
그 말을 듣고 호기심에 세라의 치료 장면을 보러간 부대원들은, 괜히 보러 왔다는 생각과 함께 결코 다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부상병을 치료하는 군의관들이야 많이 봐왔지만, 저처럼 터프한 치료는 사양하고 싶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에게 달라붙은 루키니를 토닥거리며 샬롯은 질린 듯한 얼굴로 읊조렸다.
"하다못해 기절시키고 치료하라고……."
의식 각성 마법을 가차없이 활용─이라 쓰고 남발이라 읽는다─하는 간호 장교들의 모습은 역전의 용사들에게도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페리느 역시 못볼 것을 본 것 같은 얼굴로 샬롯의 말에 동의하듯 "저런 건 사양이에요……." 하고 중얼거렸다.
정말 치료하는 거, 맞지?
그런 의문이 부대원들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오직 가장 굳은 심지를 가진 미오만이 그 광경으로부터 담담히 고개를 돌리며, 부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지."
"예? 네우로이는 이미 격추시켰는데요?"
"저거다 저거."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완전히 기울어져 간신히 떠 있는 수송함이 있었다.
*****
포풍…… 포풍…… 발음이 안된다.
프, 폭, 폭풍, 음, 그래. 폭풍 같은 치료가 끝났다.
압박 붕대 때문인지 몰핀 때문인지 머리가 몽롱하다.
그렇다고 졸리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다. 자려고 해도 의식 각성 마법 효과가 남아 있어서 안되고. 누구냐, 저 흉악한 마법을 만든 건.
어쨌든 말 그대로 몽롱하게 있는 것 뿐이다. 누가 보면 아편 맞고 뻗어있는 것처럼 보일 것 같다.
……뭔가 할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뭐였더라…….
분명 뭔가 하고 있었는데…….
……아.
떠올랐다.
녀석들. 애들 구해줘야 한다.
이렇게 멍 때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깨."
"예?"
"어깨애애, 임마아아아아!!! 하욱, 우욱……."
"하사님!"
내가 미쳤지. 뭔 깡으로 큰소리를 내서.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다.
내 외침을 듣고 내 입가에 귀를 들이대는 수병 목덜미에 팔을 걸쳤다.
"하, 하사님?!"
"일으켜, 으극, 세워어어엇……."
"네, 넵!"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자 아직 스트라이크 유닛이 장착된 다리를 볼 수 있었다.
꼬리도 있는 걸 보니 아직 마력도 어느 정도 남아 있는 듯 했다.
그럼 얼른 잽싸게 날아올라서 구조 부대 들어갈 틈만 만들어 주면,
그렇게 생각하며 스트라이크 유닛을 기동시키려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안돼! 눕혀! 눕혀! 송장 만들고 싶어?!"
고개를 돌려보자, 아까 전에 내 고개를 돌렸던 그 연륜 있어보이는 간호 장교 언니가 엄청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다른 간호 장교 언니들과 위생병들이 따라오다가, 그 언니가 "다른 놈들 구하러 가! 왜 따라와!" 하고 소리치자 다시 샤샤샥 하고 흩어졌다.
선임? 주임? 여튼 그렇게 달려온 왕언니─지금 그렇게 부르자─는 다시 한 번 외쳤다.
"얼른 눕혀! 몰핀 때문에 헛소리 할 수 있으니까 내버려 두면 돼!"
아뇨, 나 정상이에요?
정신 나간 사람이 정신 나갔다고 하지는 않겠지만서도 그래도 나 정상이라니까요?
그리고 지금 누워있으면 안되요. 애들 구해야 하니까.
그렇기에 나는 스트라이크 유닛을 기동시켰다. 부우우웅!
그리고, 멋지게 갑판에 들이박았다. 터엉!
통증이 온다. 그런데 뭐랄까. 뭉실뭉실 하고 온달까. 이거 진통제 때문인가?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허우적대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들었다. 왕언니다.
"죽고 싶어?! 환자면 얌전히 엎어져 있어!"
"안돼요오…… 구해야되요…… 애들……."
"니가 죽는다니까!"
그렇겠죠. 하지만 포기 못하겠어요.
난 봤거든요. 살려달라고 하던 그 수병들의 눈동자. 그런 거 보고나면 포기 못해요.
그러니까 기절시켰으면 이런 짓 안하잖아요.
그렇게 바둥거리며 일어서려는 내 귓가에, 늠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심해, 하사. 전원 구조 완료했다."
"……아?"
검은 색 머리카락에, 안대를 한, 위치였다.
새하얀 제복을, 이 세계 아가씨들이 다들 그러하듯 상의만 입고 있었다.
팬티가 아니라 수영복이었다……. 아니 수영복이라고 해도 하의 안 입은 건 똑같잖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그녀 옆으로 차례차례 다른 위치들과 구조를 요청하던 수병들이 내려앉았다.
물을 잔뜩 들이마셨는지 콜록거리고 있었지만 다들 무사한 것 같았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정말로.
"……하, 하하, 아하하하……. 살아 있냐아……, 이것들아……."
"쿨럭, 케헥, 구해준다면서, 콜록콜록! 먼저 뻗어계십니까? 콜록!"
"죽을 뻔…… 했는데…… 니들 때문에…… 그렇게 말하냐……"
"물만 빼주면 어떡합니까. 읍, 쿨럭! 크흠! 또 죽는 줄 알았다구요?"
야, 난 니들 때문에 완전히 골로 갈 뻔했는데 그러기냐.
처절하게 박살났다고? 시집갈 수 있을까 없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박살났는데 뭐야 이 취급은.
물론 치료 마법이 있어서 흉터 없이 나을 수 있겠지만, 좀 감사해주라, 이것들아.
"쿠롤록, 콜록! 감사하고 있어요. 하사님 없었으면 우리 다 물에 빠져 죽었을 테니까요."
"킥킥킥…… 그래, 그거면…… 그 한 마디면……."
"히히히큭, 콜록! 쿨록! 흐하하하하!"
"아하하하…… 하하하하……."
"후흐흐하흐하! 킥킥킥!"
웃음이 절로 터져나왔다.
그런데 어떻게 나온 거지? 구조 부대 갈 시간이 된 것 같지는 않은데?
그걸 묻자 수병들은 내 옆에 선 그 수영복 아가씨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기 소령님이 벽을, 푸엣취! 크흠, 잘라주셨습니다."
그러고보니 기관총말고 길다란 칼을 하나 등에 매고 있었다. 카타나인가?
그런데 소령이라고? ……소령?! 영관이었어?!
"그것도, 쿨럭, 501 부대래요. 하하하, 에이스라구요?"
……더 큰일 났다아아?!! 직속 상관이 될 지도 모르는 사람이잖아?!! 이렇게 누워 있으면 안되잖아?!!?
나는 다시 일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왕언니, 어깨 그만 눌러요. 지금 누워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요!
"소령님 앞에서…… 누워 있으면……."
일단 몰핀 맞고 뿅간 정신줄부터 추슬러야 하나? 발음도 지금 제정상 아니지?
움직여라, 몸아! 지금 안 움직이면 내리 갈굼이 온다! 우오오오옷!!
"하하하,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아. 부상자에게 일어나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그 말에 맥이 탁 빠졌다. 넵, 감사합니다. 솔직히 일어날 힘도 없었어요.
"여튼 대단하더군? 설마 수송선을 끌어낼 줄은 몰랐어."
"필사적…… 이었으니까요……."
다시 하라면 죽어도 못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뭔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배를 들어올리다니? 어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소령님이 내 얼굴을 보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반사적으로 나도 웃고 말았는데, 어, 이거 괜찮은 건가? 뭔가 이상한 타이밍에 웃은 건 아니겠지?
다행스럽게도 소령님의 미소는 어떤 비뚫어진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이왕이면 몸 성하게 만나서 대화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무리겠군."
"죄송합니다……."
"아냐. 환자에게 말 시키는 게 문제지. 편히 쉬게, 하사."
"아뇨…… 괜찮, 윽."
"거봐. 인사 같은 건 나중에 다 낫고 하면 돼."
"감사…… 합니다……."
아픈 부하를 생각해주는 상관이라니, 이 무슨 따스한 광경인가.
제발 다 나아서 부대 생활 시작하면 이 사람 부하가 됬으면 좋습니다.
실력이야 501부대원이라는 걸로 이미 입증되어 있고, 성품도 방금 전의 대화로 확인되었으니까 모두 OK.
……라고 생각했었는데.
"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에?"
"치마 속에 속바지까지 입은 건가?"
그 말에 근처에 있던 수병들까지 모두 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치마 옆트임 찢어냈었지.
하지만 괜찮아! 소령님 말씀대로 속바지 입었으니까 보여도 문제 없으니까!
것보다 이 상황, 어째 익숙한데. 꽤 최근에 겪어본 것 같은 기분이……. 데자뷰인가…….
그러고 있자니 옆에서 수병놈들이 수근거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직접 물어보는 녀석들도 있었다.
"우와, 진짜다……."
"이거 원주민 풍습인가?"
"하사님, 할머니도 아니고 뭡니까 그게."
"이렇게 입고서 하늘 나는 거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수근수근 웅성웅성.
떠올랐다. 아까 통제실에서 장교들이 쑥덕거리던 그거로군. 그나마 음란한 눈길이 아니라는 게 다행인가.
아니 그러니까 치마 입는 게 정상이라고 이 양반들아.
이 상황을 야기시킨 소령님은 정말로 궁금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여기 이런 세계였지.
아하하하, 하고 메마른 웃음 소리를 흘리며 나는 대답 없이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의식 각성 마법 효과가 종료되었습니다.
현실 도피는 아닙니다. 정말이라니까요?
*****
애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본에서는 계급 뒤에 님을 안 붙이는데 우리는 붙이잖아요?
뭔가 어색하지만, 어쩌겠습니까.
포는 다음 화에서나 쏘겠네요.
문득 떠올랐는데, 세라는 교량 전차 대용으로도 쓸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우와, 만능이잖아?
하지만 소형기한테도 격추당하잖아? 안 될 거야 아마 [...]
reines silber 번역이 안 나와서 그냥 읽고 있습니다. [?]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p.s <a href="http://pds16.egloos.com/pds/201004/18/90/b0059790_4bcb00be4527e.png">누군가 해주길 바랬지만 아무도 해주지 않아서 결국 같잖은 실력으로 그린 세라의 예상도 스케치(자작)</a>
지금 모습은 아니고, 아마 후반부에 무장이 완전히 갖춰지면 이럴 겁니다.
완성은 미래의 어느 날 언젠가 /도주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5
자다가 가장 기분 좋게 눈을 뜨는 방법은 빛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니, 고문실 스탠드 불빛 같은 거 말고, 아침 햇살 같은 자연광 같은 거. 낮잠 자던 중이었다면 오후 햇살이겠지.
낮잠 하니까 점심 먹고 집 뒤뜰에 만들어둔 해먹 위에서 낮잠 자던 게 생각난다. 그때도 항상 햇빛 덕분에 늦잠자지 않을 수 있었다.
……저녁 노을에 눈 뜬 사람이라면 다시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라.
여튼, 그런 의미에서 소리는 최악이다.
특히나 군대 아침 나팔 소리. 그건 인간에게 향해서는 될 소리가 아니야.
자명종 소리도 가능하면 듣고 싶지 않다. 찌르르릉 하고 울리든 일어나 일어나 하고 소리치든 뭔 소리를 내든지간에 짜증이 밀려온다.
그 무엇보다 강력한 외침인 어머니의 잔소리는…… 듣고 싶다. 너무너무 듣고 싶다.
"……."
궁상 맞게 이게 무슨 짓이야. 살아있으면 언젠가 볼 얼굴인데.
살아있잖아. 볼 수 있잖아. 그럼 된 거잖아. 우울함이여, 사라져라! 훠이! 훠이!
여튼 얼굴을 간지럽히는 따스한 빛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뻑뻑한 눈동자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러자 흐릿하던 시야가 천천히 되돌아오며 주변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후암."
후후후, 모르는 천장 같은 소리는 하지 않아. 쉬어터진 떡밥은 취급하지 않는다. 게다가 요 며칠 간 익숙해진 이 공간을 모른다고 할 쏘냐.
가라앉은 공기. 새하얀 천장과 벽. 햇살이 비쳐들어오는 창문과 커튼.
세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푸근한 향기를 내뿜는 이불과 배게. 특별 환자에게 지급되는 푹신푹신한 침대.
병원 특유의 삭막함이 느껴지지만 전체적으로는 온화하고 포근한 분위기.
으음, 너무 좋다. 이 시간이 너무 좋다. 조금만 더 잤으면 하는 유혹이 슬금슬금 밀려오는 이 시간이 너무 좋다. 이걸로 네 번이나 말하는 거지만 그래도 좋다. 체온으로 푸근해진 이불 속에서 뒹굴거리는 이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는 경험해본 사람들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
게다가 할일도 없어서 계속 이대로 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을 때면 그 행복감은 몇 배나 증폭된다.
넵, 지금의 제가 그렇습니다. 이예이!
앞으로 최소한 일주일 간은 이렇게 여유로운 생활입니다. 와아~!
경사났네, 경사났어~
아아, 행복하다.
골절에 찢어진 이마, 쓸려나간 등은 물론이거니와 가벼운 타박상도 안 나아서 하루 종일 누워있을 수 밖에 없는 상태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지루해하지 않고 무의미하지 않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아주 많이 알고 있는 내게는 아무렇지도 않다.
전생의 경험과 원주민들로부터 배운 수많은 놀이 방법들이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거기에 리베리온 훈련소에서 가차없이 구르면서 병실에 익숙해진 것도 있다. ……아니, 그건 좀 아니군.
사실대로 말하자면 약간은 좀이 쑤신다. 거야, 한창 때인 젊은 아가씨의 몸이니까…… 는 뭔가 좀 에로틱하군.
미안, 사실은 단지 버릇 때문이다. 이맘때쯤이면 옥수수밭에서 일하고 있어야 하는데 가만히 있으려니 근질근질하는 것이지.
음? 농사 짓는 게 어때서? 환생하면서 느낀 거지만 인생은 평온하게 사는 게 제일이야.
서른 넘겨보면 느긋하게 땅 일구면서 사는 게 최고라는 걸 깨닫는다니까. 봐. 괜히 어설프게 설치니까 이런 꼴이 되잖아.
자 그럼 이제…….
안녕히 주무세요오~
아침 식사를 가져오는 간호사 언니가 올 때 까지 다시 잡니다아~
Just little morning sleep……
Zzz…….
*****
리베리온 수송 함대가 네우로이와 조우한 날로부터 사흘 째.
겨우 수송선 한 척만 잃는 정도의 손실을 끝으로 무사히 브리타니아에 도착한 함대는 남아있던 보급품들을 모두 내린 후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네우로이가 사라진지 얼마 안 된 지금 떠나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원래 목표는 북아프리카 전선에도 보급품을 전달하는 것이었만 그곳으로 갈 보급품은 3번 수송함과 함께 대서양에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직접적인 전투 담당이 아닌 수송 함대가 취해야할 태도는 무엇일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적이 없을 때 최대한 빠르게 전선을 이탈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번 함대가 가지 않는다고해서 북아프리카 전선의 보급에 당장 문제가 오는 것도 아니었다.
압도적인 물량으로 승부하는 리베리온에게 원양수송선 한 두 척 쯤이야 침몰해도 괜찮은 수준이었고, 게다가 지금쯤이면 침몰한 배를 대신할 새 수송선이 가라앉은 것의 몇 배는 될 보급품을 싣고 본국을 출발하여 대서양을 건너오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러면서도 군수 산업을 제외한 기타 산업 발전과 시설 투자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하니, 과연 리베리온. 국토와 국력이 무서울 정도로 정비례한다.
원주민과의 마찰과 위치 수 부족이라는 커다란 문제가 없었다면 지금쯤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나라에서 온 위치들이라서 그런 건가……."
샬롯도, 세라도. 굉장한 사람들이네.
한 사람은 리베리안이라고 하기에는 좀 미묘하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미나는 다시 한 번 사흘 전에 있었던 전투 보고서를 펼쳐보았다.
출현 네우로이 종, 전투 경과, 교신 기록, 피해 상황 등을 죽 훑어내려가던 그녀의 눈동자가 멈춘 것은 한 위치의 활약이 적힌 문장 위였다.
'세라 둘리틀 하사. 30분 간 보급 함대 엄호. 이후 침몰하는 원양수송선을 일시적으로 인양하여 수병 구조에 도움을 줌.'
글자만 보면 그녀가 한 일은 겨우 단 두 가지.
하지만 실상은 그날의 출격이 첫 실전이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대활약이었다.
30분 간 보급 함대 엄호.
그래, 30분이다. 중소 함대 쯤은 가볍게 섬멸시키는 네우로이를 상대로 30분간, 그것도 자신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함선들을 보호하며 생존했다.
에이스라고 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숙련된 병사와 같은, 아니 수많은 전장을 겪고 살아남은 베테랑 병사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보고서와는 달리 실제 세라가 한 일이 '인간 방패 역할'이었다는 것쯤은 미나도 잘 알고 있었다.
출격 직후에 행했던 단 한 번의 공격도 유효 사격이라기보다는 위협 사격 수준에 그쳤던 것도 살아남은 장교와 수병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것을 통해 그녀의 공중전 실력이 기본적인 자기 보호 능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도, 지휘관 입장에서는 전선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기 위한 미끼가 아니라면 절대 내보내지 않을 실력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이 다른 모든 지휘관들이 그녀를 뽑지 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미나는 처음부터 세라에게 전투력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한 것은 보급과 각종 지원 장비를 들고 전장에 나올 수 있는 '보급형 위치'.
물론 차후 실험 결과에 따라 화력 지원 업무를 지시할 수도 있지만 그건 별개의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세라는 원양수송선을, 그 거대한 배를 혼자서 아주 잠깐이나마 들어올림으로써, 미나의 요구 조건을 상상 이상으로 충족시켜 주었다.
공중으로 띄운 건 아니라지만 침몰하던 배를 다시 끌어올린 것만 해도 어지간한 중형 함선과 맞먹는 출력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볼 때 만약 세라가 30분 간 함대를 엄호하지 않았고, 도중에 네우로이에게 피격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3번 수송선은 침몰하지 않고 무사히 브리타니아 항구에 도착하여 수리를 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세라 혼자서 100km가 넘는 거리를 끌어온다는 게 아니라 침몰하지 않을 정도로만 끌어올린 후, 다른 함선들이 예인해오는 게 되겠지만 어느 쪽이나 놀라운 일 마찬가지다.
게다가 앞서 말했다시피 네우로이 앞에서 30분간 버틴 저 경이로운 생존력도 눈여겨볼 만했다.
보급 계열의 생존력이 높다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따로 차출해야하는 병력의 수가 줄어든다.
그것은 그만큼 적을 향해 투자할 수 있는 병력, 다시 말해서 가용가능한 병력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걸 싫어하는 지휘관은 어디에도 없다. 전쟁의 기본은 우선 상대방보다 우세일 것이니까.
지휘관의 입장인 미나에게 있어 저것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과 다름없었다.
저 생존력이 세라의 모의전 성적표와는 괴리가 있어보이지만, 지금까지 그녀를 격추시킨 것은 빠르고 날렵한 위치들이었다.
즉, 소형 고기동형 네우로이와의 접근전만 피한다면 세라의 생존률은 대폭 상승한다는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501 부대에는 세라를 대신하여 접근전을 펼칠 수 있는 우수한 위치들이 많았다.
아니, 우수한 위치들만이 모여서 이 부대가 만들어졌다.
미나는 지금 이 순간 그 사실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어찌되었든 종합적으로 보자면 이건 가려져 있던 원석을 발굴해낸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터무니 없는 패를 뽑았다는 생각에 미나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얼른 나아서 와주길 바래요, 세라 둘리틀 하사."
조용히 중얼거린 그 한 마디가 미나의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
아침 식사를 가져다주신 간호사 언니는 만화에나 나올 법한 너무나도 상냥한 간호사였습니다.
하나도 아프지 않게 몸을 일으켜주시고, 스스로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환자를 위해서라며 영양 스프를 떠먹여주시고, 물수건으로 몸도 다 닦아주시고, 마지막으로 다시 침대에 눕혀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말그대로 이상 속의 간호사가 현실에 투영된 것 같은 상냥함에 눈물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만.
문제는…….
"자, 이제 점심 때 보자."
"……네."
"음? 아픈 데 있어? 대답이 왜 그렇게 시원찮아?"
그때의 그 선임 간호 장교─왕언니라는 거지만.
그래, 아파 죽겠는데 몰핀 투여 중지시키고, 부러진 뼈 맞추고, 까진─뼈가 드러날 정도면 이미 까진 수준이 아니지만─ 이마에 붕대를 묶어주고, 침몰하는 배에 갖힌 수병들을 구하려고 했을 때 막은 그 언니다.
'어른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간호사'라는 특정 계층을 자극하는 직업의 언니지만, 특히나 하의 안 입고 다니는 이 세계 아가씨답게 하의는 속옷만, 그것도 마법을 쓸 때 꼬리가 돋는 걸 대비한 로우라이즈 팬티만 입고 있지만, 시대를 타고난 건지 잘못 타고난 건지 모를 터프함으로 백의의 '전투' 천사들을 이끄는 사람이다.
여하튼 왜 이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거지?
그것을 묻자 그녀는 "파견되었으니까." 라고 대답했다.
"……브리타니아 병원에요?"
여기가 군인 병원이니까 간호 장교가 있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만, 선임 간호 장교는 전방 쪽으로 가는 게 아니었나?
게다가 간호 장교들은 원래 나 치료할 때처럼 최전방에서 뛰는 사람일텐데?
내 의문에 왕언니는 씩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원래대로라면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가야하는데 말이지, 수송선하고 보급품이 다 가라앉았잖아? 그래서 그걸 정리하다가 위에서 인선 미스가 생겼나봐. 덕분에 한동안은 여기서 일하게 됐어."
"……어느 정도 계시는 건가요?"
"음, 3개월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같더라. 아, 그리고 말이지. 나 항공보병 전담 간호 장교다?"
"……전담?"
"응. 전담."
"다치면, 무조건 언니가……?"
"응."
"……3개월이라……."
"왜?"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좋아, 다치지 말자. 3개월 동안은 절대로 크게 다치지 말자. 훈련이든 뭐든 몸을 사려야 한다.
이 언니, 의식 각성 마법 걸린 상대의 뼈를 가차없이 돌리는 자비심없는 언니니까.
그 아픔은 지금도 안 잊혀진다. 가능하면 얼른 잊고 싶은데 말이야. 떠오를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핫, 안돼. 떠올리지 마. 떠올리지 마. 떠올리면 안돼!
"……휴우."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애써 가라앉히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래서 위치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았다구. 집에 돌아가고 싶다. 농사 지으며 살고 싶어. 엄마 밥 먹고 싶다. 엄마아……. 왠지 둘리의 심정을 알 것 같다.
향수병에 걸린 사람처럼 멍하니 있자니 왕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튼, 몰핀 적정량 두 배 맞았던 사람치고는 건강한 것 같네."
"……무슨 소린가요 그건?"
아무리봐도 위험한 대사 같은데요, 그거.
내 물음에 그녀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나중에 보니까 너 몰핀 몇 개 더 맞았더라고. 그때 있던 애들이 전방에서 구른지 얼마 안된 애들이라 당황해서 그랬나 봐."
"……저 죽을 뻔 했군요."
"그래. 의식 각성 마법 효과가 남아 있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대로 안락사할 뻔 했어. 뼈 돌리고서 하나 더 놨으면 정말로 황천 구경했겠지."
놓지 말라는 얘기 들었을 때는 아파 죽을 뻔했지만요.
여튼 그때의 왕언니, 정말 감사합니다. 전 자는 동안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탈 뻔 했던 거군요. 오오 생명의 은인 오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지만! 핫?! 또 떠오르려고 한다! 훠이! 훠이!
"자, 그럼 쉬어. 있다가 점심 때 또 보자."
"계속 오시는 건가요?"
"아까 말했잖아. 항공보병 전담이라고."
아, 그랬지 참. 썩어도 준치라고 나도 일단은 항공보병이지. 것보다 전담 간호사라니, 이 무슨 사치인가.
어머니, 저 출세한 것 같아요! 계급은 여전히 하사지만요!
"여튼 부작용도 없어보이니까 3일치 주사 맞아도 되겠네. 오후에는 계속 주사 맞을 거야."
……어머니, 저 얼른 퇴원하고 싶어졌습니다.
*****
속도광인 리베리안 소녀, 샬롯은 자신의 스트라이크 유닛 개조를 즐기는 편이다.
아니, 이미 즐기는 선을 넘어서 그녀의 스트라이커 유닛은 이미 그녀만이 쓸 수 있는 오더메이드 제품이 되어 있었다.
스트라이커 유닛 자체가 준 오더메이드에 가까운 고급 장비이기는 하지만, 완벽하게 자신에 맞춰 개조한 것은 그녀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를 찾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별다른 일이 없는 한, 훈련이 끝난 이후에 샬롯은 항상 격납고에서 자신의 기체를 점검하고 있으니까.
덕분에 바르크호른은 헤메지 않고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어이, 리베리안."
"응? 뭐야?"
전형적인 군인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바르크호른이 자유분방한 이주민의 견본이라고 할 수 있는 샬롯에게 말을 거는 건 흔치 않은 일은 아니다.
다만 대부분이 제대로 된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인 군인 정신 훈계와 흘려듣기라는 게 문제일 뿐. 혹은 공무에 관련된 일이라던가.
오늘은 아무래도 후자인 듯 했다.
"네 본국으로부터 온 보급품 목록이다."
"Oh, Thanks Karlslander. ……Karlslandian? Karlsland girl? Which do you want?"
"호칭은 아무래도 좋다만, 원래대로라면 네가 네 조국 함장에게 직접 받았어야 하는 거라는 것 정도는 알아둬라."
소속 국가가 다른 타국 군인이라지만, 자신이 건넨 차트를 한손으로 가볍게 집어가며 농담 섞인 말투로 인사하는 리베리안 소녀를 향해 바르크호른은 눈살을 찌푸렸다.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자타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엄격한 카를스란트 군인에게 있어 눈앞에 있는 소녀의 군기 빠진 태도가 눈에 거슬리는 것이었다.
정작 불쾌한 눈빛을 받는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All right, all right. 어차피 연합군이고 같은 부대니까 국가는 아무래도 좋잖아?"
"국가 기밀서라도 오면 어떡하려고 그러는 거지?"
"걱정 마. 걱정 마. 어차피 나한테는 그런 거 안 와."
대범하다고 해야할지, 보안 의식이 결여되었다고 해야할지.
가만히 차트를 넘기는 샬롯을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던 바르크호른은, 오늘도 역시나 한 마디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도대체 넌 군인으로서의 자각이─"
"얼레, 이거 진짜야?"
"……."
너무나도 절묘한 타이밍으로 말이 끊겨버린 덕분에 순간적으로 맥이 탁 풀려버린 바르크호른은 일순간 휘청하였다.
샬롯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확인해줘, 라며 차트를 내밀었다.
바르크호른은 잠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입을 뻐끔거리더가 결국 진한 한숨과 함께 낚아채듯 차트를 받아들었다.
"뭐가 문젠데? 안 들어온 거라도 있는 건가?"
"아니, 내가 요청한 것들은 제대로 들어왔는데, 이상하게 M2가 있어."
"M2가?"
샬롯의 말에 바르크호른은 차트를 살펴보았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M2와 예비 부품, 그리고 12.7mm 탄약들이 리베리온답게, 그러니까 거의 세 달은 넉넉하게 쓸 만한 분량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 특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던 그녀는 차트를 샬롯에게 건네며 물었다.
"이게 뭐 어때서?"
"못 쓰는 물건이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건 지난 번에 온 함선에도 설치되어 있는 걸 봤는데. "
"함선이니까 쓰는 거지."
"……?"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바르크호른의 얼굴에 샬롯은 차트를 두드리며 말했다.
"무게만 40kg 가까이 나가는 중장비라고 이거."
과연, 잘못 들어왔다고 물어볼만하군. 그렇게 생각하며 바르크호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 무게만해도 그렇게 나간다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항공보병이 쓸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뒤이어진 샬롯의 말에 바르크호른 역시 잘못 들어온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게다가 하나씩 온 건 사격 연습이든 뭐든 한다고치면 억지로나마 이해하겠는데, 2연장 함선 장착식도 왔다고."
"흠……."
"이거 암만 봐도 기계화보병 애들이나 쓰는 건데 왜 여기로 온 건지……."
"……그러니까 네가 직접 보고받았으면 알았을 거 아니냐!"
"오오, 그렇군."
"큿, 이래서 네놈은……. 새로 오는 그 녀석은 너같은 성격이 아니길 바란다."
"글쎄~ 네이티브들은 대부분 음……. 그러고보니 지난 번에 규율이니 뭐니해서 내전을 일으킬 뻔 했다고 들었는데……."
"……."
"응? 괜찮습니까, 바르크호른 씨? 왜 그렇게 부들부들 떨고 계신 겁니까?"
"네놈 때문이잖냐! 그러니까 넌 항상 그렇게 물러터졌어! 도대체 군인 정신은 어디다 두고─"
어김없이 터져나온 바르크호른의 잔소리를 오늘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내며 샬롯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그 녀석이라면 쓸 수 있을지도……"
"듣고 있는 거냐!"
"예이예이─."
"안 듣고 있잖아!"
"Take it easy, girl~"
"좀 들어!"
결국 오늘도 두 사람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
눈을 떴을 때는 오밤중이었다. 그리고 침대 위였다.
그걸 깨달은 순간 스스로 생각해봐도 무거운 한숨이 토해져나왔다.
"……하아……."
꿈이었나보다.
방금 전까지 어디서 쏟아지는지 모를 붉은 섬광을 피하고, 피하고, 피하다가 결국 피하지 못하고 격추당한 건, 그래, 꿈이었다.
지독한 악몽이다.
"……읏."
식은땀에 젖은 옷이 피부에 달라붙어 기분 나빴다.
목을 타고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린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목이 탔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바싹 마른 목구멍이 쓰라렸다.
멀쩡한 오른팔로 옆을 더듬어 물병을 집어 그대로 입가에 대고 마셨다. 마시지 못한 물이 뺨을 타고, 목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방금 전의 미적지근한 땀방울과는 달리 서늘한 밤공기에 식은 물은 약간은 상쾌하게 느껴져 기분 나쁘지 않았다.
"후우……."
물통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여전히 가볍지 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걸로 세 번째인가. 어쩐지 별 탈 없이 무사히 넘어가는가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꿈이고 뭐고 정신없이 뻗어있었기에 괜찮았던 것 같지만.
스스로도 그렇게 강한 정신력을 가진 존재는 아니라는 걸 자각하고 있었지만, 그렇지만…….
……아, 진짜.
역시 전장이라는 건 안 좋다. 체력은 물론이거니와 정신력도 가차없이 깎아먹는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PTSD였나. 아니, 이름은 아무래도 좋다. 심장에 안 좋다는 것 만큼은 확실하니까.
다른 마녀들도 이런 경험이 있었을까. 모른다. 지금까진 난 실전을 겪어본 위치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
전생의 기억을 참고해보려고해도 애초에 이 기억이라는 것이 멋대로 떠올랐다 말았다 하는 거라 원하는 정보는 얻을 수가 없었다.
목덜미와 얼굴의 땀과 물을 손으로 대충 털어내며 생각한다.
다시 전장으로 나갈 수 있을까?
못할 것 같다.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못할 것 같다.
정말, 마녀라는 것들은 대체 어떻게 되먹은 애들인 거야.
뭐가 되었든 나이 스물도 안된 애들이 전장으로 나가는데 망설임 같은 건 하나도 없고.
그렇다고 어디 외계 종족인 것도 아니고 뭐냐고 그 어처구니 없는 정신력은. 근성? 신념? 열정? 아니면 증오?
지금은 그저 처음이라 그렇고, 나중에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망설임 없이 전장으로 향하게 되는 걸까?
이렇게 악몽을 꾸지 않고 그저 담담히 잠들고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걸까?
익숙해지면 괜찮아지는 걸까?
"……잠이나 자자."
그래, 일단 자자. 자야할 시간이니까.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낸 후, 나는 눈을 감았다.
*****
그로부터 일주일 후. 그러니까 퇴원 이틀 후.
<탄도 기록 준비 완료. 그럼, 쏴 봐, 하사.>
어쩐지 스트라이커 유닛을 기동시킨 체, 88mm 전차포를 허리에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머리에는 스카우터 비슷하게 생긴 조준경을 쓰고 말입니다.
이걸 뭐라고 해야할까, 이대로 포탄이 아니라 빔을 쏘면 지구 용사 누구누구, 같은 로봇들 필살기 같을 것 같다.
것보다 이거 암만 봐도 기계화보병 무기인데 어째서 내가 들고 있는 거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
음, 제가 작중 설명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세라는 수송선을 인양한 게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송선에 남아있는 부력을 최대한 이용하여 배를 물 위로 밀어올린 거죠. 마치 설거지통에 가라앉기 직전의 밥그릇을 살짝 눌러 기울인 후에 한 번에 밀어올려서 다시 떠오르게 한 것 같은…… 뭔 소리야 이게. 그냥 들어올렸다고 하죠. [야]
많은 분들이 무반동포를 추천하시는데, 그걸로 2km 이상 날릴 수 있나요?
제가 굳이 세라에게 포를 들려주려는 이유는 크고 아름다워서…… 인 것도 있지만, 그만한 사정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가씨, 도그파이팅에 들어가면 '소형종 자코에게도 쳐발리는 실력'이에요.
공중전 중상위니까 괜찮지 않냐구요? 그 성적은 전생+현생의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늘어난 훼이크[...]로 얻어낸 겁니다.
그러니 그런 훼이크가 안 먹히는 네우로이한테는…….
그래서 최대한 사정거리가 긴 병기가 필요했고, 그러다보니 포를 들게 한 것이죠.
공중전이 멋지게, 가 아니라 정말 처절할 정도로 현실감 있게 묘사된 작품이 있다면 추천해주세요.
이왕이면 추락 직전의 모습이 많은 걸로 부탁드립니다. [?]
아, 요시카는 아마 몇 화 더 지나야 나올 것 같습니다.
원래는 빨리 등장시키려고 했는데 연표 설정을 보니까 1944년 7월 쯤에 오는가 하더군요.
현재 이 작품의 시간대는 4월 말입니다. 훈련 시작했으니까 앞으로 2~3주 뒤면 미오가 브리타니아를 떠나고, 5월에는 포격 훈련 몇 실전 몇 번 하고, 6월에는 리네트 양의 우울증[?] 상담해주다가 또 네우로이한테 대차게 굴러서 트라우마 심어주고, 간신히 7월 초중반 쯤에나 부활[?]할 것 같습니다.
내일 올라오면 아마도 주 2회 달성일 듯. 사실은 밀린 거지만요.
죄송합니다아아아 /도주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6
퇴원 3일 전 아침.
쓰잘데기 없는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난 많이 먹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힘 쓰는 일이 많은 농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순수 농가는 아니지만─든든하게 먹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삼시 세끼 외에도 참을 자주 챙겨 먹는다. 다음 날 몸에 무리가 오기 때문에 야참은 안 먹지만, 식사 외에 먹는 것들만 따져도 굉장히 많은 양이다. 그렇다고 걸신 들려서 배고프면 사람이 바뀌고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고.
살 안 찌냐고? 몸을 움직이는 만큼 먹는 거니까 괜찮다.
게다가 스트라이커 유닛을 사용해 하늘을 나는 일은 생각보다 휠씬 더 많은 열량을 소모하기 때문에 살찔 걱정은 없다. 체질상 통통한 마녀도 잘 챙겨먹지 않으면 홀쭉해지는데 뭘.
병원에 있는 동안 살찔지도 모르겠지만, 몸무게라는 건 일주일 정도 놀고 있는다고 확 늘어나는 물건이 아니다. 기껏해야 1~2kg? 그 정도는 완전 무장하고 훈련 한 번 받으면 쑥 빠진다. 축구 선수도 전후반 다 뛰고 나면 2~3kg정도는 가볍게 쑥 빠진다는데 그보다 더 격하게 움직이는 우리야 뭐.
게다가 나는 환자다. 환자는 회복을 위한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 그런 고로 나는 아무런 걱정 없이 먹는다.
"그래도 두 그릇이나 먹는 건 좀 아니지."
역전의 야전 간호 장교이며 현재는 서류상의 실수로 브리타니아 군인병원에서 마녀 전담 근무중인 간호사, 에밀리 스칼렛─1인 한정(나) 통칭 왕언니는 그런 내 모습이 신기한 듯 했다.
뭐, 환자식이라 양이 조금 적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두 그릇 정도 되면 확실히 한 끼 식사로는 많은 양이니까 신기해 보일 수도 있다.
"용케도 먹는구나. 환자용 영양식은 맛없기로 소문났는데."
그쪽이었습니까.
확실히 병원식은 맛있냐 맛없냐를 따지자면 맛없는 축에 속한다.
그, 뭐랄까, 정말로 아무 맛이 없다. 간을 할 향신료나 양념, 소금 같은 건 거의 다 제거하니까 밍밍하고 닝닝하고, 심심하다.
"맛으로 먹는다기보다는 배고프니까 먹는 거에요."
"공복이 최고의 반찬이라는 거구나. 그래도 두 그릇이나 먹을 수 있는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
네, 확실히 보통 때라면 쳐다도 안 볼 물건이기는 합니다.
이렇게까지 영양만을 생각해서 다른 걸 다 버린 음식은 처음봤어요. 아니, 이건 이미 음식이 아니라구요.
재료 본래의 맛 마저도 씻어낸 것 같은 무미無味 결정체에게 남은 건 씹는 맛 뿐.
하지만 부드럽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병원식이다보니 그것도 느끼기 힘들다.
게다가 향도 거의 안 느껴지니 원. 왜 이렇게 무미무취인거야, 이 병원 밥은? 이건 뭐 초기 우주 비행사의 음식도 아니고. 아니, 그건 맛이라도 있지!
"외상 밖에 없으니까 그냥 일반식 줘도 괜찮을텐데……."
"하아? 애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걸까? 네우로이한테 공격받고서는 내상이 없을 리가 없잖니."
"……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설명해주세요, 라는 얼굴로 바라보자, 왕언니는 정말로 모르느냐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말 모르는데요.
"녀석들의 빔에는 독기가 있어. 일반인은 스치기만해도 조직이 괴사해서 죽는데 내상이 없을 리가 없잖아. 위치로 태어났으니까 지금 그렇게 버티는 거야."
왕언니는 '위치로 태어난 걸 감사하렴.' 이라고 덧붙였다. 아뇨, 위치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렇게 침대에 뻗어 있는 건데요.
그렇게 대답할까 했지만, 뭐 왕언니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날 빔 한 발에 얼마나 많은 일반 병사들이 죽어나갔던가.
감사할 건 감사하자. 살아있다는 건 좋은 거니까.
……그런데 난 왜 이런 걸 모르고 있었던 거지?
왕언니는 분명 이걸 '상식'이라고 했다. 하지만 난 살아오면서 이걸 처음 듣는다.
아무 것도 몰랐던 때라면 모를까, 리베리온의 위치로 훈련받을 때도 이런 정보를 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고보니 지난 번에 수송선에서도 네우로이 출현을 조사하는 부서가 따로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너무 당연한 거라 설마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안 가르쳐 주는 건가?
설마 정보 통제를…….
아니아니아니, 일부러 안 가르쳐 줄 리는 없을 테고.
그럴 테지. 암. 이래뵈도 귀중한 몸. 잘못되면 내전 발발─ 이런데 설마 그럴 리가.
"그렇게 믿고 있다가 최전방까지 불려나왔지만……."
"응? 뭐라고 했니?"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래? 아, 여튼 그러니까 네 몸 상태는 아직 엉망진창이라는 거야. 안 아픈 건 아마 신경이 꼬여서 그런 걸지도. 끊어진 곳도 있던 것 같은데……. 진료 차트에 뭐라고 써 있었더라……."
"아하…… 아니, 네?!"
방금 무진장 위험한 내용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확실히 뭔가 몸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건 상처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면 주사나 약의 영향이라거나?
그런데 갑자기 신경이 꼬였다니? 끊어졌다니?
보통 그러면 몸 못 움직이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제 몸은 분명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데요?
"아, 아하하하.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제 몸 잘 움직인다구요? 확실히 왼팔에 아무런 감각도 없지만 움직이는 것 정도는……."
"왼팔에 감각이 어떻다고?"
"……어라?"
"확인해 봐."
뻣뻣한 목을 애써 움직여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왼손 검지를 움직여봤다. 꼼지락. 움직인다. 아무런 감각이 없지만.
손목을 살짝 움직여봤다. 꿈지럭. 움직인다. 아무런 감각이 없지만.
골절 부위를 두드려봤다. 툭툭툭. 아프다. 아픈데, 피부나 살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다. 마치 뼈만 골라 두드린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다.
"……."
등줄기를 타고 싸─ 한 무언가가 스윽─ 흘러내렸다.
……어, 음, 그러니까, 거짓말이지? 다시 한 번 손을 움직여봤다.
움직인다. 감각이 없다. 다시 한 번.
움직인다. 감각이 없다. 다시 한 번.
움직인다. 감각이 없다. 다시 한 브큭?! 등줄기를 타고 찌르르한 격통이 치솟았다. 무심코 힘을 준 듯 싶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만져보았다. 물컹. 내 손이 분명한데도 마치 물에 젖은 고무 덩어리를 만지는 것 같은 불쾌한 감촉이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 어째서, 어째서 이런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던 거지?
그런 내 모습이 꽤 심각해보였는지 왕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 마, 걱정 마. 치료 마법 몇 번 받으면 완치되니까."
"……정말인가요?"
"그래그래. 잘려나간 팔다리도 멀쩡한 거 주워오면 다시 이어붙일 수 있게 해주는 게 치료 마법이니까."
예시가 살벌하기는 했지만 그 말에 겨우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평생 이렇게 사는가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니었다. 정말, 정말 다행이다.
내 목표는 누가 뭐래도 몸 성히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다. 상이군인 같은 거 될까 보냐.
"그래도 나는 지금 이 상태가 딱 좋다고 봐."
"엑, 기분 나쁜 소리 하지 말아주세요."
"그렇긴 하지만서도, 주사 맞을 때마다 우는 소리 내는 애한테는 감각이 없는 게 좋으니까."
"……왼팔에만 주사 놓으시는 게 그런 이유였습니까."
"응. 안 그러면 너 계속 아프다고 칭얼거리니까."
링겔도 모자라 대형 주사기가 두 세 개 씩 푹푹 찍히면 당연히 아프잖습니까.
그러고보니 이렇게 막 맞아도 되는 건가? 약물 부작용 같은 건 없는 건가?
그걸 물어보자 왕언니는 웃으며,
"어차피 치료 마법 받으면 다 괜찮아져."
……역시 이 분은 하루라도 빨리 야전으로 돌아가셔야 된다고 봐.
*****
예상은 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말을 잃게 만드는 크기였다.
익숙하다면 익숙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변한 모습을 보고 나니 새삼스레 놀라웠다.
오전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에이리카는 스트라이커 유닛을 벗어던짐과 동시에 그 앞에 서서는 간단한 감상을 말했다.
"정말로 크네."
그리고 그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훈련을 끝내고 자신과 같은 것을 보고 있는 바르크호른을 향해 물었다.
"이거 정말로 항공보병이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에이리카는 신경쓰지 않았다. 새로운 장난감을 보는 듯한 얼굴로 눈을 빛내고 있는 전우를 본 순간, 자신의 질문이 그녀에게 들리지도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희귀한 모습, 다시 말해서 놀려먹을 것이 생겼다는 사실에 만족한 에이리카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대포 한 문이 있었다.
88mm.
대포의 구경임과 동시에 일반적인 명칭이었다.
카를스란트제 무기들 중에서도 MG42와 함께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받는 대공포이자 전차포이자 야포.
어디에서든 쓸 수 있고, 언제든 쓸 수 있고, 누구든 쓸 수 있는 범용성과 네우로이의 장갑조차도 어느 정도는 파괴 가능한, 무시하지 못할 위력을 가진 이른바 만능병기.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항공보병은커녕 장갑보병 중에서도 일부만 쓸 수 있는 무기다.
장갑보병도 특별한 스트라이커 유닛을 장착하지 않으면 들고다니는 것조차 힘든 중장비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요충지 방공 장비로 만들어진지라 지상 거치가 전제된 무기니 기동성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큰일인 게 당연했다.
게다가 네우로이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마력을 담아 쏘아야하는데, 88mm 정도 되는 대구경포탄 하나에 담을 마력이면 30mm이하 기관총탄 탄창 두 세 개 정도는 채우고도 남는다.
장갑보병은 둘째치고 항공보병에게 저런 마력 잡아먹는 괴물을 감당할 여력이 있을 턱이 없다. 스트라이커 유닛의 가동과 비행 제어만으로도 대부분의 마력을 소비하기에 그들의 무장이 빈약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가끔씩 항공보병이 88mm를 써서 적을 격파했다는 보고가 올라오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88mm로 전투를 했다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으로 쓴 것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88mm는 처음부터 주무장으로 채택된 무기였다.
비행 시야 확보를 위해 허리를 축으로 삼도록 한 고정대.
공중에서의 원활한 재장전를 위해 아예 공간 마법을 걸어버리고 포신 뒤쪽에 붙여버린 대형 카트리지.
마녀는 오로지 전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탄도 계산 등을 돕는 사격 보조 장비 등.
정진정명 세계 최초의 항공보병용 88mm였다.
"사격 보조 장비가 붙어있어서 다행이군. 난 이런 거 못 가르쳐."
어느 새 다가온 미오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녀가 아니라 다른 교관들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항공보병의 훈련 목록에는 포격 훈련이 없으니까.
경험 많은 마녀들이야 한 두 발 쏠 수 있다지만 그것과 가르치는 건 별개의 이야기다.
그리고 앞서 말했다시피 무게와 마력 소비량까지 생각하면 사실 이렇게 항공보병용 88mm가 만들어져 온 것 자체가 더 신기한 일이었다.
"가르치고 어쩌고 이전에 그 하사, 이거 쓸 수 있을까?"
그걸 깨달은 에이리카의 현실적인 지적에 그제서야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온 바르크호른이 대답했다.
"수송선도 들어올리던 녀석이니 이 정도는 문제 없을 거다. 나도 반신반의했지만 미나가 가능하다고 결론내렸으니까 가능하겠지."
"그거, 탄약창도 든 상태에서 쓴다고 한 거야, 아니면 이것만 든다고 한 거야?"
"전자다."
"……."
탄약은 결코 가벼운 물건이 아니다.
공간 마법이 걸린 가방에 넣고 다니기에 평소에는 잘 모르지만, 잠깐 들고 다녀보면 클립형만 하더라도 그 묵직함을 실감할 수 있다.
드럼 탄창 정도 되면 드는 순간부터 버겁고, 총의 무게까지 합치면 심각하다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에이리카는 격납고 저편에 있는 세라의 탄약창을 바라보았다.
"……저것도 들고?"
탄약창─ 이라고 생각되는 강철 상자는 대형 세탁기와 비슷한 크기였다. 연합군의 모든 무기와 탄약을 최소한 한 종류 이상씩 집어넣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마법 가방은 뒀다 뭐하고 이런 걸 만들었나 싶겠지만, 일시적으로 전선을 이탈한 아군 위치가 언제든지 보급품을 집어갈 수 있도록 상시 전개해두는 것을 전제로 두었기 때문에 이런 물건이 나온 것이었다.
덕분에 보급형 위치 활동에 맞게 '언제든지 보급 가능한 상태를 유지할 것'과 '신속한 보급 활동'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아공간을 활용한 마법 가방이 있는데 굳이 저런 물건이 필요한가 싶기도 하지만, 실전에서는 저런 게 후방에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진다.
적의 공격에 마법 가방을 소실할 수도 있고, 필요한 물건을 꺼낼 때 적이 느긋하게 기다려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튼, 예비 탄약은 물론이고 예비 총기까지 빈틈없이 가득 채워 넣은 대형 세탁기 크기의 탄약창은, 에이스가 모인 이곳 501부대원들이라면 그것만으로도 대형 네우로이 대여섯 마리는 상대할 분량이었다.
어쩌면 세라를 이곳으로 불러내게 한 원인인 '소형기를 마구 생산해내는 항모航母형'도 상대할 수 있을 듯 했다. 저걸 들고 날아야 하는 세라의 입장에서는 그저 짐덩어리에 불과하겠지만.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것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마법 가방과 마찬가지로 공간 마법이 걸려 있는 탄약창은 탄약이나 총기를 꺼내는 순간, 아공간에 있던 예비품이 곧바로 그 자리를 채우게 된다.
이론상 무한에 가까운 질량을 집어넣을 수 있는 아공간 덕분에 세라의 탄약창이 고갈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게 뭐가 심각한 문제냐 싶겠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심각한 일이다.
결코 무게가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보급품이 나가는 순간 예비품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 예비품이 나가는 순간 또다른 예비품이 그 자리를 채운다.
또다른 예비품이 나가는 순가 여분의 예비품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게 거의 무한정 반복되는 것이다. 운반하는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리라.
거기에 저 무지막지한 88mm(개조)까지.
톤 단위의 무장을 들고 전투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에이리카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항공보병의 한계는 애저녁에 초월해있었다.
"처음에야 힘들겠지만 익숙해지면 괜찮겠지."
"톤 단위 무장을 하고 전투를 벌이는데 익숙해지라니. 얼마나 굴릴 작정이야?"
"굴리다니. 오해할 만한 발언 하지 마. 그리고 하사는 비전투병과로 들어갈테니 전투엔 참가 안 해."
"아니, 이런 걸 가져다두고 그런 말 하면 설득력 없거든?"
"지원 화기잖아. 네우로이의 사정거리 밖에서 쏠 수 있으니까 걱정 없어. 뭐냐, 프라우. 그렇게 88mm가 못 미더운 거냐?"
"그런 문제가 아니잖,"
"그럼 믿어. 카를스란트 장비는 세계 제일이다."
"……."
결국 에이리카는 자신만으로는 폭주하는 트루데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고 순순히 물러섰다.
자신은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흐름(?) 속에서 그녀는 말없이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미안, 하사.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
퇴원 이틀 전 오후.
"신경 치료는 CAS에 집중해. RET와 EC는 무시해도 좋아. 음, 그렇게. 환자 상태 보는 거 잊지 말고."
"아, 이 환자 복합 신경 굴절 현상이 보이네요. BP체크 필요하지 않나요?"
"이미 했어. 아, 그거 조심해. 중추 반사 신경 건드리지 않도록."
중년으로 보이는 여의사 선생님과 인턴으로 보이는 내 (겉모습)나이 또래로 보이는 소녀가 뭔가 전문적인 용어가 섞인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것이 이공계의 힘인가? 정확하게는 의사의 힘? 이 따스한 푸른 빛은 그들의 힘인가? 샤이닝 닥터 파워? 우와아아아아악?!
"둘리틀 씨. 어떤가요?"
"아, 네. 딱 좋아요."
뭐,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하고, 사실은 치료 마법이라는 것을 체험 중이다.
푸른 마법진이 마법의 발동을 알리고, 따스한 빛이 몸에 스며들 듯 내려앉는다. 기분은 최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분 좋음이다.
굳이 예를 들면 온천에 들어가서 맛사지를 받는 기분이랄까. 전신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 세계의 치료 마법이라는 거, 원래 저렇게 전문적인 기술이었던가? 그냥 마법으로 샤라라라, 하는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야전 간호 장교들도 그랬고.
대부분의 마법들도 대충 그런 느낌이고, 나도 마법을 쓸 때 감각적으로 쓰지 이론적으로 발동시켜본 적은 없다보니 이런 광경은 생소했다.
"연구중이라서 그래요."
평소 보던 것과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흘러나왔는지 인턴 소녀가 대답해주었다.
"치료 마법은 만능이긴 하지만, 누구나 쓸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치료 마법을 받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일반 치료법을 연구중이라서 그런 거에요."
"쉽게 말하면 실험이라는 거지. 인체 실험."
"서, 선생님!"
"농담이야 농담. 그냥 의학 발전을 위해 인체를 쓰는 것 뿐이지."
"선생님!"
그렇게 마법 치료─를 빙자한 인체 실험… 은 아니다. 진짜로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를 받고 나니 몸이 한결 개운했다.
왼팔의 감각도 일부 돌아와 있었고, 몸 전체에 남아있던 쉽사리 사라지지 않던 피곤함도 줄어 있었다. 새삼스럽게 마법의 굉장함을 깨달았다.
자, 그럼 체력 회복을 위해 또 한숨 자보실까.
"후아아암, 푸엣취. 음? 얼레? 흐음……."
감기는 아닌데, 누가 내 얘기 하고 있나?
*****
1944년 4월 하순.
세라 퇴원 하루 전.
새벽녘에 나타났던 네우로이를 섬멸한 후 점심 때 즈음, 샬롯은 자유분방한 이주민의 후예답게, 그러니까 아무런 비유나 돌림 없이 솔직하게 용건을 말했다.
"그런 고로, 병원에 다녀오려고 합니다만."
그말에 집무실의 주인인 미나는 물론이고 그녀를 보좌하고 있던 바르크호른 역시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샬롯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바르크호른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중위?"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런 고로' 라고 운을 띄웠지만 샬롯은 말 그대로 운을 띄웠을 뿐,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형식적인 군례를 한 번 올리는 것으로 모든 것을 끝냈으니 두 사람이 저 한 마디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평소 그녀의 행동으로봐서 이렇게 추궁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설명도 들을 수 없을 게 뻔했다.
그렇기에 앞서 말했던 것처럼 바르크호른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부대의 최고 지휘관이자 501 항공단의 사령관인 미나는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가 싶더니 평소와 같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네, 허락합니다."
"오, 역시 대장. 말이 통한다니까요?"
"뭣, 미나, 아니 중령님! 뭔지도 모르는 걸 허락해주셔도 괜찮은 겁니까?!"
부관의 입장에서 업무를 보좌해주고 있던 오랜 친구의 외침─업무중이었으므로 존칭에 계급명을 불렀다─에 미나는 그 친구를 한 번 바라본 후, 다시 샬롯을 향해 말했다.
"혹시 모르니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샬롯 E.예거 중위. 귀관은 조국 동료인 세라 둘리틀 하사를 만나기 위해 병원에 가는 겁니다. 맞습니까?"
"Yes, Ma'am."
샬롯은 과연 중령, 이라는 얼굴로 미나를 바라보았다. 정확하게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웃 국가지만요, 라고 장난스럽게 덧붙이며 경례를 올리는 리베리안 소녀의 모습에 바르크호른이 신음소리를 냈지만, 미나는 그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오후 근무는 없는 걸 확인, 그럼 저녁 식사 전까지는 돌아오세요. 그리고 이걸 세라 둘리틀 하사에게 전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미나는 책상 서랍에서 봉납 처리된 서류 봉투를 샬롯에게 건넸다. 봉투 겉면에는 해당 병사외 영관급 이상 열람 가능을 의미하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걸 본 샬롯은 언제나 규율과는 관계 없어 보이는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정중한 태도로 봉투를 받아들었다. 할 때는 하는 성격인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그녀답게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기밀 서류를 볼 수 있는 계급은 아닌데 괜찮겠습니까?
혹시나 중간에 꺼내본다면 어쩌시려구요? 그런 의미의 뒷말이 생략되어 있었지만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뼛속까지 철저한 군인이었다면 당장이라도 화를 낼 대사였다.
실제로 군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바르크호른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네가 그러고도 군인이냐, 어떻게 그런 영창갈 소리를 함부로 하느냐, 하는 얼굴이었다. 집무실이 아니었다면 당장에 고함쳤으리라. 아니, 실제로도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허나 이 부대의 사령관은 샬롯의 장난에 넘어갈 정도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미나는 화사한 미소가 어떻게 하면 사람을 압도할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듯한 얼굴로 샬롯에게 말했다.
"감봉과 자실 대기, 그리고 군법 회의와 영창이 두렵지 않다면 열어봐도 좋아요."
웃고 있지만 웃고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 어떤 말인지 알 수 있는 얼굴이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아군인 바르크호른마저도 움찔할 정도의 기세가 담긴 지휘관의 모습에 샬롯은 굳어버렸다.
과연 여공작. 단 한 마디 뿐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
"동료가 될 사람들끼리 싸우고 오지 말 것."
샬롯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나가려는 순간 미나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그렇게 말했다.
신대륙 사정을 알기에 하는 말이리라. 그말에 샬롯은 웃으며 경례를 올렸다.
"Yes, ma'am!"
*****
퇴원 전날.
아침 식사 후에 마법 치료를 받고 왕언니와 수다를 떨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점심인 병원식은 여전히 맛이 없었지만, 체력 회복을 위해 군말없이 먹어치웠다.
그 후 다시 마법 치료─ 이게 마지막 치료였다. 입원한지 근 10일만에 완치된 것이다. 역시 마법이 있으니까 빠르구나.
"드디어 내일이면 이 침대를 떠나는군요."
"아쉬우면 또 구르고 돌아오면 돼. 여기 네 지정석으로 비워둘까?"
"……아뇨,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마력이 사라져서 평범한 시골 아낙으로 돌아가는 게 꿈이에요. 병원은 가끔씩 오도록 하고 싶습니다. 아니, 가능하면 평생 병원과는 연이 없이 건강하게 살고 싶어요!
그말에 왕언니는 내 왼팔의 붕대를 풀어내며 웃었다.
"후후후, 그래. 건강한 게 제일 좋은 거야. 치료 마법으로 어떤 병이든 낫게 한다고 해도, 병이 없고 안 다치는 게 제일 좋은 거니까."
그렇게 말하시고는 저녁 때 보자며 방을 나가셨고, 나는 문이 닫힘과 동시에 침대에 드러누웠다.
치료 마법의 여운과 오후의 햇살 때문에 졸음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요 며칠 새에 버릇이 되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원인이야 어찌되었든간에 천천히 잠이 들어갈 즈음,
똑똑─.
거의 잠들기 직전이었기 때문일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새벽녘에 먼 곳에서 아스라이 울려퍼지는 것 같은 묘한 울림이 느껴졌다.
다시 한 번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잠들어버릴 뻔했다.
우음, 누구지? 왕언니라면 노크할 것도 없이 들어올 테고, 다른 간호사들이라면 노크 후 알아서 들어올 것이다. 굳이 두 번이나 노크할 필요가 없을 텐데?
멍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스스로 생각해봐도 졸리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열─ 려 있어요─."
"그럼 실례합니다~."
어딘가 들뜬 것 같은 소녀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여어, 네가 세라 둘리틀 하사 맞지?"
"……아, 네."
들어온 것은 예상대로 소녀였다.
붉은 빛이 감도는 갈색, 어찌보면 주황색에 가까운 머리카락에 어딘가 장난기가 가득한 푸른 눈동자가 반짝이는 소녀였다.
소녀는 리베리온 육군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 세계 아가씨들이 다들 그렇듯이 치마는 입고 있지 않았다. 야, 신난다! ─일까 보냐!
아니, 신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세계여, 나까지 벗기려고 하는 건 그만 둬!
여튼 소녀는 소녀인데…….
"흐음, 반응이 미묘한데……. 아, 이쪽 이름 싫어해? 상냥한 들소라고 하는 게 좋아?"
"……아뇨, 호칭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만……."
선생님, 여기 현실에 존재해서는 안될 가슴이 있습니다.
뭐냐 이 크기는. 아니 크기 뿐만이 아니야. 균형도,형태도 흠잡을 데 없어!
인체의 아름다움이라는 건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는 건가…….
"어─이. 정신 차려."
……헛, 너무 빠져 있었다. 나는 사념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들었다.
그러자 소녀가 걱정스러운 듯한 얼굴로 물었다.
"내일이 퇴원이라고 들었는데, 정말 퇴원해도 되는 거냐? 아직 몸 상태가 영 아닌 것 같은데."
"아뇨, 괜찮아요.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에요."
내 말에 그녀는 웃으며 "뭐야, 그 열혈 청춘 소년 같은 대사는?" 이라고 말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몸이 안 좋으면 며칠 더 쉬게 해주겠다는 말이 무진장 양심에 찔립니다. 가슴에 정신이 팔렸었을 뿐이니까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여튼 괜찮다고 말하자 그녀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럼 그건 그렇다치고, 세라라고 부를게? 괜찮지?"
"네, 호칭은 상관없어요."
"이 대화는 방금 전에도 했었지. 여튼 난 샬롯 E. 예거. 리베리온 육군 중위야. 현재는 제501통합전투항공단에서 활동중이고. 정식 업무 때가 아니면 계급은 무시해도 좋아. 같은 나이고 말이지. 잘 부탁해. 아, 편하게 샤리라고 부르면 돼."
그렇게 말하며 소녀─ 샬롯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악수하고 싶다는 것 같다.
조금 놀랐다. 겉으로는 같은 국가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적국 사람이나 다름 없는 이에게 악수를 청하다니. 저쪽에서는 총부리가 더 익숙했는데 말이지.
거기에 대놓고 계급 무시하라고 말했다. 하사랑 중위면 벌써 몇 급 차인데.
쿨하다. 무진장 쿨하다. 이 무슨 대인인가. 가슴인가. 역시 가슴인가. 이 대범함의 근원은 역시 저것인가.
……어, 아니, 잠깐. 나랑 같은 나이라고? 그럼 열 여섯?
흉부에 돌출된 그것은 절대로 16세의 소녀가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난 적어도 열 여덟은 됐을 줄 알았어! 어딘가의 여교황님도 열 여덟이라고!
어찌되었든, 일단 자기 소개를 받았으니, 나도 응해줘야겠지.
나 역시 오른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세라 둘리틀. 리베리온 해군 하사. 그리고 용맹한 창날의 장녀이며 이로쿼이의 바람의 딸들 중 하나. 앞으로 잘 부탁해."
그리고 덧붙었다.
"함께 하늘을 날 전우로서."
계급 무시해도 좋다고 한 건 그쪽이니까 반말했다고 지적하지 말라구?
다행이 그 걱정은 기우였다.
샬롯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 싶더니,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하!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이야, 걱정했다구. '구대륙 인간들 다 죽어라!' 하는 애면 어쩌나 했거든."
아아, 그런 걱정 할 만도 하다. 꽤 많은 원주민들이 그렇게 극단적이니까.
그럴 수 밖에. 이주민들 때문에 고향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으니까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아버지의 형제자매나 친구분들 중에서도 그런 분들이 많다보니, 샬롯의 걱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걱정 마. 우리 어머니는 구대륙 사람이니까."
"어, 아아, 그랬지. 혼혈이었지. 그래도 걱정했다고? 리베리온 고유 회선으로 들어오는 소식을 보니까, 원래는 안 와도 될 것을 군 비리인가 뭔가가 얽혀서 왔다고 하니까 왠지 비협조적일 것 같아서."
벌써 그게 다 알려진 건가. 여튼 그런 불미스러운 일로 이곳에 왔다고 하니 걱정할만도 하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정말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은퇴했던 리셋 머신이 한바탕 날뛰었다는 얘기도 들려오고."
……어머니?
"이로쿼이 전사단이 비행장을 습격해서 폭격기를 탈취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내전 벌어지나 싶었어."
……아버지?!
들어서 알고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으니까 정말, 뭐라고 해야하나…….
딸을 생각해주시는 하늘과 바다 같은 넓은 마음은 너무나도 고맙습니다만, 무작정 기뻐할 수 없는 딸내미의 심정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것보다 아버지, 비행장 습격은 처음 듣는데요?! 대체 뭘 하신 거에요?! 폭격기는 소문이 아니었던 거에요?!
"아, 그러고보니 본국에는 네가 무사히 수송함대를 보호했다고 알려져 있더라? 오보인데 수정 안하려나?"
"……할 수 있을까."
딸내미가 최전방으로 나간 것만으로도 그 난리가 벌어졌는데, 격추당해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얘기가 들리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리베리온 정부도, 언론도 상상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오보를 낸 거겠지.
"아, 그리고 이거."
샬롯은 "우리 대장님으로부터의 선물."이라고 말하며 들고 있던 봉투를 내밀었다.
영관급 이상, 혹은 해당 병사만 볼 수 있다는 표식의 봉납이 붙어있는 봉투였다.
"뭐야, 이건?"
"몰라. 전해주기만 하는 역할이니까."
하긴, 봉납 붙은 건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군 기밀이니까 그걸 알려주는 게 더 문제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봉납을 뜯고 봉투를 열어보았다.
"어이어이, 일단은 군 기밀이라고? 타인이 옆에 있는데 그렇게 열어봐도 되는 거냐?"
약간 당황한 듯한 샬롯의 항의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서류를 꺼내보았다. 몇 장의 서류와 클립으로 엮인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서류의 내용은 활동 지침이라고 하면 될까, 부대내에서 내가 무엇을 하면 되는가에 대한 내용이 쓰여있었다.
굳이 영관급 봉납을 붙일 필요는 없어보이는……데?
"……뭐야, 이건?"
에이스 오브 에이스 부대에서 대체 뭐하러 나 같은 녀석을 불렀나 싶었는데, 이런 걸로 부른 건가?
미리 말해두지만 결코 잡무 같은 걸로 부른 게 아니었다. 하지만 차라리 그게 훨씬 나았으리라.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 대체…….
"아, 이거?"
방금 전에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는지 샬롯이 서류를 들여다보고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항공보병용 88mm 대공 지원 화기. 대장님하고 부관님의 기대가 걸린 녀석이지."
그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샬롯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에 그녀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운명이야. 포기해.' 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이걸 어떡하라고?
*****
스팀 게임 중에 Altitude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2D지만 상당히 재밌는 전투기 게임입니다. 거기서 폭격기와 뇌격기를 보면서 세라가 가야할 방향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탄막은 힘이에요. <-
애니 3화에서 샬롯은 자신을 중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5화 음속 돌파 때는 미오에게 대위라고 불리더군요. 언제 진급한 거야 이 아가씨.
근 한 달 만에 돌아왔습니다. 사실 지금도 설정이 꼬여서 고민하고 있는데, 이럴 때 뭐 있나요.
그냥 밀어붙이는 거죠. [야]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7
병원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군인병원이라고 하길래 최전방 같은 분위기인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니었나보다.
뭐, 그렇게 혼란스러우면 이렇게 사람 만나러 오는 것도 힘들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하사가 어느 병실에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 프론트 데스크에 다가가려는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너 그 때 그 위치지?"
고개를 돌려보자 그곳에는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간호사, 아니 간호 장교가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아, 그때 그 수송 선단에서 봤던가.
하지만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 병원은 후방 시설이라 최전방에 서는 야전 간호 장교가 있을 자리가 아닌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해 보았다.
"혹시 그때 그 수송 함대에서 봤던……?"
"호오, 기억하고 있었네?"
역시 그 사람이었다. 기억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말투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러니까 치료받는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야전 간호 장교라고 해도 의식 각성 마법을 걸고 부러진 뼈를 되돌리는 살벌한 짓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사람을 쉽게 잊을 수가 있을까. 당사자는 아니지만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진짜 이 사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윗선에서 서류가 꼬였어."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 이유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주1회 근무(?)라고는 해도 이곳이 최전방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그렇다보니 이처럼 서류가 꼬이는 것도 흔하다면 흔한 일이니까.
"그건 그렇다치고, 넌 무슨 일로 온 거야?"
나는 손에 들린 서류를 흔들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엄격하기로 소문난 카를스란트 군인─예를 들자면 우리 부대의 군기 반장─이었다면 눈살을 찌푸렸을 광경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간호 장교는 그저 말없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한 듯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엄지를 치켜들어 자신의 등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으로 쭉 가서 왼쪽으로 꺾은 후 세 번 째 방이야. 혹시 모르니까 명패 제대로 확인해 둬."
그녀는 "얼른 안 가면 그 애 잠들어버릴지도 몰라." 라고 덧붙인 후 반대편 복도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자기 일을 하러 간 것이겠지. 자, 그럼 나도 움직여볼까.
그런데 잠들지도 모른다니. 이제 겨우 점심시간이 지났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루키니가 떠올랐다. 뭐, 그쪽 부류인가보다. 게다가 원주민들은 대체적으로 느긋한 편이라고 하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납득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방금 전 그녀가 가르쳐준 방향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에는 화창한 4월의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브리타니아 날씨는 보통 전체적으로 우중충한 편인데 오늘만큼은 달랐다. 오늘 일이 별 탈 없이 끝날 것이라는 징조면 좋겠는데…….
징조라고 하니 생각난 건데, 으음, 여기까지 와서 갑자기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찾아올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미나 대장이 결코 에이스라고 할 수 없는 성적에도 불구하고 뽑아왔다는 것과, 탄약 보급을 중심으로 한 화력 지원 마녀라는 게 흥미롭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수준의 흥미에 불과했고, 이로쿼이에서 반쯤 용병 비슷하게 팔려오다시피 했다는 것도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여파로 장성의 집이 불타고 폭격기가 탈취된 건 꽤 놀랐다. 정부가 괜히 신경쓰는 게 아니었구나, 하고 중얼거렸더니, 갈리아 아가씨한테서 어쩜 그렇게 조국에 무신경할 수가 있냐고 혼나기까지 했다. 뭐, 네우로이에게 나라를 빼앗긴 입장인 그 아가씨의 눈에는 조국 일에 무신경한 내가 확실히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그쪽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여하튼, 브리핑에서 본 사진 속의 어른스러운 얼굴을 한 원주민 소녀를 향한 나의 감정은 그저 '친하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수준이었다.
적어도 지난 번 네우로이 공습 전까지는.
바로 며칠 전의 일이다보니 생생하게 떠오른다.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침몰해가던 수송선이 수면 위로 올라오던 그 모습이.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누가 위치 혼자서 침몰해가는 수송선을 다시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까.
덕분에 다섯 명의 수병은 목숨을 구했다. 만약 격추되지 않았더라면 사카모토 소령님의 검이 없었어도 수병들을 구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수송선까지도 무사히 끌고 왔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만나고 싶어졌다.
충동적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연관성을 찾기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졌다.
"……엇차, 지나칠 뻔했다."
생각이 좀 깊었나보다.
무심코 지나칠 뻔한 명패를 다시 돌아보았다.
세라 둘리틀
■■■■■■■(상냥한 들소)
위에는 알파벳으로 된 리베리온식 이름이, 아래에는 원주민 문자로 쓰인 이로쿼이식 이름─으로 추정되는 것─과 거기에 알파벳 해석이 붙은 것이 쓰여져 있었다. 누가 보면 두 사람이 있는 줄 알겠다는 생각과 함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반응이 없다. 정말 자고 있는 건가?
혹시나해서 다시 한 번 노크를 하자, 그제서야 막 잠에서 깬 듯한 늘어지는 대답이 들려왔다.
"열─ 려 있어요─."
"그럼 실례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창가 쪽으로 놓인 침대 옆에는 사카모토 소령과 같은 황갈색의 피부를 한 소녀가 이쪽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여어, 네가 세라 둘리틀 하사 맞지?"
"……아, 네."
반응이 느리다고 할까, 조금 지쳐보였다. 어릴 때 몇 번인가 본 원주민들은 다들 하나같이 건강해보였는데 눈앞의 소녀는 어째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진짜 자다 일어난 건가, 아니면 지난 번 전투의 후유증을 아직도 앓고 있나.
후자라면 이쪽은 꼭두새벽부터 전투를 벌이고 왔는데, 하고 생각한 순간, 눈앞의 소녀가 전투와는 그다지 연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 아마 1, 2차 대전 모두 합쳐서 최초일거다. 네우로이의 마지막 발악 같은 공격에 격추당한 위치는. 그것도 첫 실전에서.
여튼 동갑이기도 하고, 여기 오고나서는 거의 신경도 안 쓰고 있었지만 일단 계급상 위인지라 편하게 세라라고 부르려고 하다가, 리베리온 식 이름으로 부르면 싫어할까 싶어서 물어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답변이 되돌아왔다. 의외로 그런 건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멍한 분위기이길래 괜찮냐고 물어보자,
"아뇨, 괜찮아요.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에요."
어째 동년배의 남자애들이나 할 법한 대답을 했다.
조금 걱성스럽기는 했지만 본인이 괜찮다고도 했고, 방금 전에 만났던 간호 장교 아가씨도 딱히 뭐라고 하지 않았으니까 괜찮겠지.
"그럼 그건 그렇다치고, 세라라고 부를게? 괜찮지?"
"네, 호칭은 상관없어요."
"이 대화는 방금 전에도 했었지. 여튼 난 샬롯 E. 예거. 리베리온 육군 중위야. 현재는 제501통합전투항공단에서 활동중이고. 정식 업무 때가 아니면 계급은 무시해도 좋아. 같은 나이고 말이지. 잘 부탁해. 아, 편하게 샤리라고 부르면 돼."
그렇게 말하며 난 오른손을 내밀었다.
거기에 놀란 듯 내 얼굴과 오른손을 번갈아 보던 세라는 이윽고 뭔가 납득한 듯한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세라 둘리틀. 리베리온 해군 하사. 그리고 용맹한 창날의 장녀이며 이로쿼이의 바람의 딸들 중 하나. 앞으로 잘 부탁해."
세라는 거기까지 말하고서는,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함께 하늘을 날 전우로서."
여전히 지친 표정이었다. 맞잡은 손에도 기력이 되돌아오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멍하니 어딘가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얼굴이, 깊고 부드러운 빛이 흘러넘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꾸밈없는 미소가 가슴 한켠에 따스한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것 때문일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아하하하!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이야, 걱정했다구. '구대륙 인간들 다 죽어라!' 하는 애면 어쩌나 했거든."
"걱정 마. 우리 어머니는 구대륙 사람이니까."
"어, 아아, 그랬지. 혼혈이었지. 그래도 걱정했다고? 리베리온 고유 회선으로 들어오는 소식을 보니까, 원래는 안 와도 될 것을 군 비리인가 뭔가가 얽혀서 왔다고 하니까 왠지 비협조적일 것 같아서."
리셋 머신과 이로쿼이 전사단 얘기를 하자 세라는 어딘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자기가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런 듯 했다.
여하튼, 최우선 사항을 넘겼기에, 나는 "우리 대장님으로부터의 선물."이라고 말하며 들고 있던 봉투를 내밀었다.
그걸 본 세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야, 이건?"
"몰라. 전해주기만 하는 역할이니까."
봉투를 받은 세라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봉투를 뜯었, 자, 잠깐만?!
"어이어이, 일단은 군 기밀이라고? 타인이 옆에 있는데 그렇게 열어봐도 되는 거냐?"
내용을 알게 되면 내가 곤란하다고? 그러나 이 원주민 소녀는 아무래도 그런 건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좀 신경 써달라고. 우리 대장님은 평소에는 온화해보이지만 화나면 무서우니까.
일단 임시 방책으로 일부러 한 발 짝 물러서서 고개를 돌리고 있자니, 어리둥절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이건?"
순간 움찔했다. 기밀이라고 하니 보고 싶어서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려고 했다. 위험해 위험해. 영창이나 군법회의는 사양이야.
……그래도 신경 쓰인다. 특히 사락사락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몸이 움찔거린다. 아아, 보고 싶다…… 헛, 안돼, 참아야 돼. 점심 때 봤던 미나 대장의 그 미소는 '진짜'였어!
…….
………….
……………….
……………………아아, 몰라!!! 못 참겠다!!!
영창이든 군법회의든 감봉이든 궁금해! 어차피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고! 좋아!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세라가 보던 서류를 곁에서 들여다보았다.
얼레…… 이거였어? 이거라면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 참…….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는 세라는 그저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이건 알려주는 수밖에 없네.
"아, 이거?"
세라는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인 그녀를 보고 있자니 입가가 살그머니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일부러 한 박자 쉬고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줄 대답을 말했다.
"항공보병용 88mm 대공 지원 화기. 대장님하고 부관님의 기대가 걸린 녀석이지."
내 말에 세라는 더욱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렇겠지. 항공보병한테 저런 무지막지한 걸 주무장으로 들려주는 부대가 있을 리가 없으니까. 아, 그러고보니 탄약창도 있던가. ……운명이야. 포기해. 그런 의미를 담아 어깨를 으쓱했다.
……어라? 그럼 M2는 대체 뭐지? 2연장 함선 장착식을 누가 쓰라고?
*****
드디어 퇴원일.
별로 있지도 않던 짐가방은 브리타니아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실려온 주인과는 달리 제대로 부대로 가 있었기에, 나는 별다른 문제없이 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라면 좋았을 텐데…….
"저기, 제 치마는 어디에 있나요?"
깨끗하게 세탁된 내 군복을 가져와 준 세미 롱 금발에 차분한 분위기의 녹색 눈동자를 가진 간호사─당연하다는 듯이 치마 미착용─에게 물어보자,
"네?"
어쩐지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아니, 그런 반응을 보여주셔도 곤란한데요.
"치마요, 치마."
"치마, 말씀이신가요? 치마, 치마……. 죄송하지만 이로쿼이 말인가요?"
……진짜 모르는 듯한 얼굴이다.
아니, 나 이로쿼이 말 쓴 거 아니거든요? 브리타니아랑 리베리온 사람들, 그러니까 당신들이랑 똑같은 말 쓴 거거든요?
나는 내 군복을 든 후, 아래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군복 치마요."
"……아, 아아! 그 치마였구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간호사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정말 뭐라 하기 힘든 반응이라 싫다.
일단 환자용 가운을 벗고 상의를 입은 후, 속바지를 입어두었다. 이대로 위에 치마만 입으면 된다.
잠시 후 상의와 마찬가지로 깨끗하게 세탁한 후 고이 개어진 치마를 가져온 간호사는, 앞서 말했던 속바지 차림의 나를 보고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이시여, 속바지를 입은 것 뿐인데 동성에게 이상한 눈길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내 얼굴을 보더니 무언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치마를 건네주었다. 뭘 납득한 겁니까 대체. 무진장 신경쓰였다.
여튼 건네받은 치마를 입어 완벽하게 여군복 차림이 된 나를 보더니,
"헤에, 처음 봤어요, 치마 입는 거. 입는 사람이 있기는 했구나."
시선을 숨길 생각도 안하고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 죽을 때까지 여기서 이런 취급 받는 건가. 왠지 힘이 빠졌다.
병원을 나서면서도 어째 다들 기이한 얼굴이었다. 그만 봐! 치마 입는 게 그렇게 신기한 거야?! 뭐야, 이건?! 벌칙 게임 받는 것 같잖아?!
무덤덤했던 사람은 왕언니 한 사람 뿐이었다. 아, 이 분은 그 때 수송선에서 내 모습 봤었지.
……그 때문일까, 왕언니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당황하게 만드셨다.
내가 가면 자신은 무슨 낙으로 살아가냐며 한탄을 늘어놓는 왕언니의 모습에서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물론 장난이셨겠지만 그거 때문에 허둥대다가 찻물용 주전자를 엎질러 화상을 입을 뻔했다. 난 잊지 않는다. 그 순간 번뜩이던 왕언니의 눈빛을.
의식 각성 마법 걸고 부러진 뼈를 돌리시는 분이다. 화상에는 대체 어떤 심장이 멈출 것 같은 고통이 찾아올지를 생각하면, ……생각하지 말자. 몸이 떨려온다. 그만 둬! 생각해내지마!
여튼 그런 소소한 이야깃거리 같은 사건들을 제외하면 무사히, 정말로 무사히 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여어, 세라!"
"야호!"
어제 보았던 샤리와 건강미 넘치는 트윈테일 소녀가 지붕이 없는 자동차를 탄 체 기다리고 있었다. 우와, 오픈카다, 오픈카.
1940년대 디자인이기는 하지만 미래의 디자인을 아는 나한테는 빈티지처럼 보여서 훨씬 더 고급스러워 보였다. 것보다 하사 하나 데리러오는데 오픈카라니, 얼마나 돈많은 부대인거야 501부대는.
그외에도 16세인 샤리가 운전석에 앉아있는 게 더 신경쓰였지만, 어제 얘기해본 바에 의하면 저 아가씨는 스피드 퀸인데다가 스트라이커 유닛이 아닌 비행기도 몬다고 하니 그점은 문제 없으리라.
그런 걸 생각하며 나는 차문을 짚고 다리를 모아 뛰어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덜컹─ 하고 차체가 살짝 흔들렸다. 아니, 이 차 앞좌석만 문이 있는 데다가 조수석에는 트원테일 소녀가 앉아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어제보다는 나아보이네. 그런 곡예도 펼치고."
샤리는 그런 말을 하며 차를 출발시켰다. 부드러운 출발이었다. 스피드 퀸이라고 하길래 급가속할 줄 알았는데.
"문이 달려 있었으면 이런 짓 안해."
"아니, 치마 입고 그렇게 뛰니까."
"……."
"왜?"
"아니, 아무 것도. 그런데 조수석의 그애는 누구야?"
치마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 화제를 돌렸다. 내 물음에 샤리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 소녀가 입을 열었다.
"난 프란체스카 루키니! 로마냐 공군 소위!"
"음, 그럼 루키니라고 부를게."
"응!"
건강한 애구나. 활발해서 좋다. 공군이라면, 이 애도 위치인 건가? ……잠깐만.
"소위?"
"응, 소위야."
생기발랄한 대답이 들려왔다…… 가 아니라.
……어, 음, 나 하사지? 그럼 소위랑 몇 급 차지? 그전에 암만봐도 나보다 몇 살은 어려보이는데 소위라고? 불합리한 세계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불합리하잖아?!
아니, 진정해. 이건 공명의 함정이야. 침착해야해. 쿨해져라 세라. ⑨OOL…… 가 아니라!
우선 싱글벙글 웃고 있는 로마냐 소녀의 호칭을 조심스럽게 바꿔보았다.
"……루키니 소위님?"
"에에? 뭐야, 그건. 아저씨들처럼. 루키니라고 부른다고 해놓고는."
"아하하하! 세라! 큭큭큭, 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그냥 불러도! 하하하하! 501에서는 보통 다들 계급 무시하고 있으니까! 푸흐하하하하!"
"엑? 그런 거 때문에 그런 거야? 걱정 마, 세라. 그냥 루키니라고 불러줘. 계급 붙이면 왠지 혼나는 기분이란 말야."
"대장님이 혼낼 때 항상 웃는 얼굴로 계급 붙여서 말하지."
"아아, 샤리! 말하지 마!"
"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아하하하! 세라, 그런 걸로 놀라지 마. 계급 가지고 시끄러운 건 카를스란트 군기 반장님 뿐이니까. 아하하하하!"
뭐가 그리 우스운지 샤리는 절찬리에 대폭소하고 있다. 리베리안의 유머 포인트를 직격당한 듯 하다.
그러면서도 자동차에 흔들림이 없는 걸 보면 이 아가씨의 운전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 했다. 그러니까 그만 웃어 이 아가씨야.
그래도 덕분에 첫만남의 어색함을 풀어버린 우리들은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기지로 향할 수 있었다.
"키 크다. 샤리보다 큰 여자애는 처음 봤어."
굳이 이 세계가 아니더라도 173은 여자애에게는 확실히 큰 키였다. 아마 501 부대에 가도 내가 최장신이지 않을까. 리베리온에 있을 때도 나보다 키 큰 여자애는 본 적이 없─그왓?!
"헤에…… 흐음……."
마치 구렁이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온 루키니가 내 가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척추반사적으로 후려칠 뻔했지만, 상대가 동성이고 나보다 어리며, '계급이 위'라는 사실을 간신히 상기시킨 덕분에 간신히 하극상은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건 여동생도 가끔씩 하던 짓이라 놀라울 게 없는 일이었다. 여동생은 꿀밤 한 대라도 먹일 수 있지만 이쪽은 그럴 수 없다는 게 차이지.
여튼 남의 가슴을 실컷 만지고서도 부족했는지, 이제는 얼굴을 묻고 부비적거리는 루키니 때문에 곤란해하고 있자니,
"어때?"
샤리가 그렇게 물어왔다. 뭐가 어떻다는 거야?
그러나 그 질문은 나를 향한 게 아니었다.
"적당히 큰 데다가 만지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 샤리가 푹신하다면 세라는 편안한 느낌?"
무슨 차이냐 그건.
"딱 엄마 같은 느낌이야!"
어머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애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전에 시집도 안 간 처녀한테 엄마 같다고 말하면 심란한데 말이지. 전생에 남자였다고 해도 벌써 16년 째 여자로 살고 있는지라 미묘하게 상처받는다고.
그런 내 심정은 전혀 신경쓰지 않은 체, 루키니는 여전히 하이텐션이었다.
"있지 있지. 세라는 낮잠 자주 자?"
"음, 그럭저럭?"
"그럼 낮잠 같이 자자! 응? 응?"
바로 앞의 대화 내용을 떠올려보면 내 가슴을 배게 삼아 낮잠을 자고 싶다는 걸로 해석되는데…….
그렇지만 해맑은 미소를 띄운 체 달라붙는 꼬맹이─의 계급장=소위─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았어."
"야, 신난다!"
그래, 신나시겠지요, 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다. 결국 같이 낮잠 자주는 것 뿐이니까.
……그런데 이 부대 낮잠 자도 되는 건가? 아니면 소위 짬밥인 건가?
"군기 반장한테만 안 걸리면 돼. 아, 그리고 찌릿찌릿 갈리아 귀족 아가씨한테도."
그러니까 알아서 짱박혀 자라는 거잖아, 그거. 최전방에서 말년 병장 스킬을 발동시켜도 되는 걸까.
그런 걸 걱정하고 있자니 샤리가 네우로이 공습, 훈련, 정규 업무만 빼면 나머지 시간은 언제나 자유 시간이라고 덧붙였다.
그래도 되는 거냐고 묻자 어차피 에이스만 모아둔 부대인데다가 실적도 잔뜩 쌓아놔서 어지간한 일 아니면 다 통과된다고 한다. 뭐야, 이 낙원은. 전생 군생활 떠올리면 진짜 이건 낙원이잖아.
……그렇지만 네우로이 공습은 진짜 목숨 걸고 싸우는 거지. 순간적으로 잊고 있었다. 응, 바로 사선을 왔다갔다 하는 거니까 봐주는 거겠지.
"괜찮아! 어차피 세라는 절대 전투 안하니까!"
"맞아 맞아. 보급 마녀를 싸우게 내버려둘 리가 없잖아."
그 말에 어제 봤던 봉투 안의 서류를 떠올렸다. 확실히 일반적인 위치들 같은 전투는 안하지만, 88mm를 들려주는 건 대체 어떻게 된 노릇일까. 암만봐도 싸우게 하겠습니다, 라고 광고하는 건데. 나중에 모든 건 오해였다고 하지만 말아다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리고 세라 약하잖아?" 푸욱.
"게다가 느리고." 푸욱.
"사격도 잘 못하고." 푸욱.
"비행 기술도 별로고." 푸욱.
……비수가 꽂혔다. 둘이서 시간차 공격으로 푹푹 꽂아주는구나. 후, 후후후후. 그래, 난 약하고 느리고 사격도 잘 못해고 비행 기술도 별로다 뭐. 어차피 짐만 많이 들 수 있다 뭐.
난 그저 말없이 먼 곳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브리타니아의 신록도 푸르구나. 후후후…….
"그러니까 세라가 격추 안 당하게 잘 지켜줄게!"
"……그래."
어린이는 순수하기에 잔혹하다고 했던가. 무서울 정도로 순수하구나 루키니. 지금 그 공격으로 내 라이프 포인트는 0이 되었단다. 엄마가 없어도 착한 아이로…… 뭔 소리를 하는 거냐 난.
그런 군인스러우면서도 군인스럽지 않은 대화를 하며 얼마나 달렸을까. 바닷가 도로 끝, 해안가에 세워진 거대한 성이 보였다.
아니, 성은 해안가에 세워진 게 아니었다. 조금 더 가까워지자 성이 해안가에서 조금 떨어진 섬에 세워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섬과 해안을 잇는 뒷길 같은 작은 바윗길이 보였지만 제대로 된 도로라고 볼 수는 없었다.
더 가까워지자 활주로와 여러 가지 군 관련 시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긴가."
"응. 저기야."
루키니의 대답에 가정은 확정이 되었다.
어느 새 나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길 바라는─ 해외 부임지인 제 501 통합 전투 항공단 기지에 도착한 것이었다.
*****
「그래도 멍하니 어딘가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얼굴이, 깊고 부드러운 빛이 흘러넘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꾸밈없는 미소가 가슴 한켠에 따스한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었다.」
병원신은 샬롯이 주인공, 세라가 히로인입니다. 혼혈 소녀 루트입니다. [?]
5화에서 수송선이 침몰한 곳이 태평양이라고 했는데, 사실 대서양이죠.
라이자 님의 지적 덕분에 수정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쓸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제대로 된 설정을 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Reines silber에서 마법 가방이라는 말이 나오길래 얘네 보급 없어도 되는가 싶어서 이걸 처음부터 갈아엎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게 되거든요.
6월이 다 끝나가는 시점에서 깨달았습니다.
이건 스트라이크 위치스 2기가 다 끝날 때쯤 되어야 원작 1기 종료 시점까지 갈 것 같다고. [얌마]
어떻게든 옛날 속도를 되찾거나, 혹은 뛰어넘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p.s 저한테는 잠만 안 자면 아직까지 주말이에요... 가 아니라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8
샤리는 근처의 항구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는 그곳의 군 시설이라 생각되는 곳에 차를 주차시켰다. 여기서부터는 배를 타고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군 시설이었는지라 정말로 여기 주차해도 괜찮냐고 묻자, 샤리는 항상 여기에 차를 주차시킨다고 대답했다.
"기지가 섬에 있으니까 자동차 같은 건 화물 수송선을 옳겨야 하는데 매번 그러면 번거롭잖아. 그래서 아예 여기 부대 쪽에 맡겨두는 거지. 우리는 마을에 나갈 때 빼고는 거의 안 쓰니까."
"그럼 빌려주기도 하는 거야?"
"아니. 미나 대장이 필요하면 써도 된다고 했었는데, 이쪽 부대 대장이 숙녀들의 것을 함부로 쓸 수는 없다고 거절했나봐. 레이디 퍼스튼지 뭔지."
"차 청소도 매번 해준다고 하던데? 정비랑 다른 것도 다."
루키니가 추가로 그런 말을 덧붙였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심히 민폐스러운 일인 것 같지만, 정작 이쪽 부대원들은 차 청소권[?]을 얻기 위해 서로 피터지게 싸운다고 한다.
……남자란 슬픈 생물인 거야.
여튼 기합이 잔뜩 들어간 이쪽 부대 병사들─그 기합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기에 더욱 슬펐다─의 경례를 받으며 부두에서 작은 배를 타고 몇 분 후, 나는 501 부대 기지땅을 밟을 수 있었다. 내 짐가방은 이미 내 방에 놓여 있다는데 나는 근 10일 만에 도착한건가.
……서, 설마 제대 10일 연기는 아니겠지? 아니, 그전에 위치는 언제 제대하는 거야? 네우로이가 근절될 때까지? 아니면 스무 살 되서 실드 못 칠 때까지?
"……어느 쪽이든 내게 미래는 없는 건가."
"응? 왜?"
"언제쯤 제대해서 다시 농삿일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어이어이, 이제 도착했는데 그런 소리하면 어떡해?"
"그냥.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니까……."
"88mm때문에?"
……그러고보니 그것도 있지. 뭐가 꼬여서 팔자에도 없던 포병짓을 하게 된 걸까. 그것도 항공보병으로.
"음, 뭐, 그래. 힘내."
대답이 없는 나의 모습에서 뭘 생각했는지 샤리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러운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뜸을 들이고 나온 격려의 말이 무진장 가슴 깊이 와 닿는다. 가벼운 인상이지만 실제로는 속깊은 아가씨다.
루키니는 어느 새 저 앞에 달려가고 있었다. 꼬맹이 소위님은 뭐, 저렇게 활기찬 게 좋으니까 그냥 넘어가자. 어느 정도는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두 사람의 안내를 받아 헤메지 않고, 제 501 통합 전투 항공단의 대장인 미나 디트린데 뷜케 중령의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똑똑.
"네, 들어오세요."
미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집무실 문이 열리며 세 명의 소녀가 들어왔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기지 제일의 몸매를 자랑하는 샬롯이었다. 그 다음은 나이에 걸맞는 활기참으로 가득한 루키니. 최고 지휘관의 집무실에 들어오는 것이건만 두 사람에게서 긴장된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건 두 사람의 경례를 통해서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중령님."
"다녀왔습니다!"
마치 놀러갔다 돌아오는 것 같은 가볍고 활기찬 인사였다. 군대에서 해도 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지만, 501부대는 미나가 대장으로 취임한 이래로 공식적인 상황이 아니면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가끔씩 미오나 바르크호른이 통제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방임주의인 셈이다.
그런 두 사람과는 반대로 세 번째 소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이곳에 도착한 오늘의 주인공 세라는 처음보는 곳이기도 하고, 상관의 집무실이기도해서 그런지 약간 긴장한 듯 한 얼굴이었다.
앞선 두 사람의 인사를 본 그녀는 어처구니없음 반, 떨떠름함 반인 얼굴로 미나를 향해 경례를 올리고는,
"……세라 둘리틀 하사. 리베리온 해군 제11수송대에서 파견, 제501통합 전투 항공단에 배속되었기에 이를 신고합니다."
곧바로 오른손을 주먹 쥐고 왼쪽 가슴─심장 위에 얹으며 말했다.
"용맹한 창날의 장녀 상냥한 들소. 이로쿼이의 바람의 딸로서 이곳에 왔다."
복잡한 인사였지만 미나는 상부의 보고서를 통해 이런 인사가 세라의 공식적인 경례로 정해진 걸 알고 있었다.
반 내전 상태인 이로쿼이와 리베리안의 혼혈인데다가, 이로쿼이에서 보내진 마녀임에도 불구하고 리베리온의 내부 비리로 인해 해외로 파견된, 양국의 정치적, 군사적 문제점의 정점에 서있는 세라의 입장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미나는 복잡한 경례어구보다는 세라의 긴장한 모습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복잡하기는해도─세라의 경례가 일반적인 군인의 그것일테지만, 앞선 두 사람의 경례가 너무도 긴장감 없었기 때문일까. 세라의 모습은 필요 이상으로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마치 두 사람의 긴장감을 모두 가져간 것처럼.
그것을 눈치챈 미나는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넸다.
"그렇게 딱딱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세라 씨."
"……."
"뭔가 문제라도?"
"……영관이 사관에게 존댓말이라뇨……."
"아아, 버릇 같은 거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되요. 우리 부대는 여유로우니까요."
여기 두 사람을 보면 알겠죠? 미나는 그렇게 말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걸 본 세라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미나는 책상을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자, 그럼 갈까요?"
*****
선두에는 부대 대장인 미나 중령, 중간에는 나, 그리고 뒤에 일단 공식적으로는 조국 군인인 샤리와 꼬맹이 소위 루키니.
이렇게 네 사람이 걷고 있다.
목표 장소는 브리핑 룸.
"여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서류를 봐서 알고 있겠죠?"
"네. 하지만, 으음…….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도 좋아요. 참고할 테니까."
"……그, 아무리봐도 굳이 제가 필요해보이지는 않은데요."
탄약 보급과 화력 지원.
이 두 가지가 내가 이곳에 온 이유이다.
아니, 직접적인 전투인원으로 지정되지 않은 건 좋은데, 굳이 내가 필요한가?
"탄약 보급이라면, 마법으로 만들어진 가방이 있지 않던가요?"
도라에몽의 4차원 주머니 비슷한 거였던가. 이론상 무한정 들어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런 게 있는데 왜 내가 필요하다는 걸까.
게다가 이 아가씨들, 박스 타입 탄창 하나만으로도 대형 네우로이 하나 쯤은 충분히 떨궜던 것 같은데?
"게다가 88mm와 같은 대화력이 필요한 초대형 네우로이가 흔히 있는 것도 아니구요."
기관총 든 에이스 위치 4~6명이 주 1회 패턴으로 날아오는 대형 네우로이를 충분히 요격해내고 있는데 굳이 88mm같은 정신사나운 무기가 필요할까?
물론 전쟁의 기본 중 하나가 적보다 강한 병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니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게 낫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과잉 화력인 것 같은데…….
아프리카 같은 데는 집채만한 것들도 굴러들어온다고 하지만 여기는 그런 건 안 나오지 않던가?
……중령님 혹시 카를스란트가 아니라 오라샤 출신이신가요? 포병은 전장의 신이라는 건 인간과 인간의 전쟁에서 통하는 말인데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중령님이 수수께끼를 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H. S. NL.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요?"
알파벳 세 자리. 군용 기호였다. 무슨 뜻이었더라……. 아, 네우로이 구별 신호.
그러니까, 첫 번째가 네우로이의 크기, 두 번째가 속도, 세 번째가 호위기의 숫자였던가? 커다랗고 느리지만 호위기가 잔뜩 달린 네우로이가 나타났다는 신호인 것 같은데……. 맞는 건가?
"맞아요. 최근 들어서 그런 녀석들만 나타나기 때문에 당신이 이 부대에 온 거에요."
중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샤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소름끼친다니까. 처음에 다가가면 그냥 혼자인 것처럼 움직여. 그러다가 갑자기 툭툭툭 하고 쪼그만 녀석들을 막 뽑아내는거야. 그 녀석들을 신경쓰다보면 본체는 어느 새 저 멀리까지 가 있고. 또 어느 정도 싸우다가 쪼그만 녀석들을 다시 날려대고. 그것들까지 정리하고나면─"
"앗, 총알이 없어!"
"─라는 거지."
중간에 루키니의 상황 재현까지 들어간 멋진 설명이었다.
그런데 그럴 때를 위해서 마법 가방 있는 거잖아.
"움직이는데 걸리적거리니까 잘 안 해."
루키니의 대답. 참으로 어린애다운 대답이다.
"챙긴다고는 하는데 말야. 그거 은근히 날 때 귀찮거든. 게다가 아까 말한 녀석들 같은 놈들이 아니라면 들고다닐 필요도 없고."
샤리의 대답. 네임드 몹 잡을 때만 필요한 아이템처럼 얘기하는구만. 마법 가방이라는 거 상당히 어정쩡한 물건인가보다.
아니, 방금 전에 자주 튀어나온다고 했잖아. 좀 들고 다녀라.
그런게 말했더니 샤리는 직접 들고다녀보면 그 귀찮음을 알게 된다고 대답했다. 이 아가씨가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그런 우리들을 본 미나 중령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제로 다들 움직이는데 불편하다고 해요. 게다가 네우로이랑 싸울 때는 그 작은 차이가 목숨을 좌우하다보니까 억지로 하게 하는 것도 좀 그렇고. 그러다보니까 당신이 여기에 오게 된 거죠."
과연, 귀찮은 일이니까 아예 누구 하나 뽑아서 그 일만 전담하게 하는 거구나.
……마법 가방 개선 좀 해라, 기술부. 나 같이 탄약 셔틀로 최전방에 뽑혀 오는 아이가 더 이상 없도록!
여하튼, 일부러 나같은 짐만 잔뜩 들 수 있는 위치를 뽑아온 건 알겠는데, 그럼 88mm는 어쩌다 붙게 된 거지?
그것을 물어보자 중령은 왠지 모르게 화사한 얼굴로 대답했다.
"세라 씨의 공중전 성적 때문이에요."
여기서 '네?'라고 말할까 '잘못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십시오.' 라고 말할까. 이 부대 분위기를 보면 전자로 해도 문제 없을텐데.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내 공중전 성적이 어때서? 추락 판정만 세 자리 수에 달하는 내 성적이 뭐가 어때서? ……말하고 나니 슬퍼진다.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중령님은 설명을 시작했다.
"전체적인 공중전 성적은 좋은데, 유독 대對마녀전은 취약하더군요."
"……느리니까요."
신입도 일주일만 훈련시키면 저보다 빠르게 날지요. 게다가 한달만 더 지나면 저같은 건 껌으로 알고 격추시키죠. 후후후, 이제는 익숙해졌습니다.
뭐, 처음에는 좌절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스스로를 초보마을의 NPC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괜찮다.
그 외 뭐시기냐, 기본적인 플레이를 완료하고 간단하게 테스트로 자신을 쓰러뜨려보라고 하는 마을 교관 같은 존재.
실제로도 내 대마녀 전투 능력이 그 정도뿐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윗사람한테 직접 그렇게 들으니까 기분이 묘한 건 어쩔 수 없네.
"그렇다는 건 소형고속형 네우로이에게 취약하다는 얘기죠."
……네, 그렇습니다. 잘 알고 계시네요, 중령님.
"보통 갈리아에서 브리타니아로 건너오는 네우로이들은 대부분 느린 대형종이에요. 하지만 그중에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항공모함처럼 소형종을 수납하고 다니는 종이 가끔씩 나타나죠. 물론 소형종들은 일반적인 위치보다는 느려요. 그래도 세라 씨의 비행 속도보다는 빠른 수준이죠."
음, 보통 마녀들이 시속 600~700이었지. 그리고 내가 400 언저리니까, 소형종의 기본 속도는 500정도 된다는 게로군.
하지만 실전에서는 더 빠르겠지. 아니, 내 예상이 맞아서 500정도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보면 더 빠르게 느껴질 테고. ……전역하고 싶다.
내가 좌절하든 말든 중령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그렇다보니까 세라 씨가 다른 마녀들과 함께 편대를 짜서 싸우는 건 힘든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세라 씨는 고유마법인 등가교환으로 대량의 화물을 들고 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지원 화기를 들게 하면 되지 않을까, 네우로이의 사정거리 밖에서 화력 지원을 해주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서 고민하다보니 88mm를 선택하게 된 거에요. 그 포라면 상황에 따라서 대형종용 철갑탄과 소형종용 대공포탄을 바꿔가며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세라 씨의 생존력도 올라가고 말이죠─ 중령은 그렇게 덧붙였다.
하긴, 대포라면 굳이 접근해서 쏘지 않더라도 위력적이니까 네우로이의 공격이 닿지 않는 범위에서 안전하게 화력 지원을 펼칠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중령님은 어떤 문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는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자, 그럼 인사부터 하죠."
그리고는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었다.
*****
에이리카는 지금 이 상황에 솔직하게 반응하기로 했다.
"……."
그랬기에 경악에 휩쌓인 얼굴로 자리를 살짝 옆으로 옮겼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경악에 휩쌓이게 만든 대상으로부터 눈길을 돌리지 않은 것은, 그녀가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면서─네우로이와의 결전이라는─눈을 돌릴 수 없는 잔혹한 현실로부터 결코 눈을 뗀 적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건 에이리카가 그만큼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는 말이 되지만, 그렇다고해서 전혀 충격을 받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자리를 옮겼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여튼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충격에 휩쌓이게 한 것이냐면, 바르크호른의 콧노래 때문이었다.
"……흠~ "……흐흠……. ……흥……. 흐흥……."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저 바르크호른이.
온몸이 규율과 군기로만 만들어졌다는 소리를 듣는 카를스란트의 군인 중에서도 특히나 엄격한 그녀가 브리핑룸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곁에 있는 에이리카만이 간신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흥얼거림이었지만, 묘하게 들뜬 표정과 합쳐져 그 파괴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트루데?"
"흐흠~ 음? 뭐야, 프라우?"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음? 이상한 녀석. ……흠~"
이상하다. 무서울 정도로 이상하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듯한 저 상쾌한 미소와 나지막하게 울려퍼지는 콧노래가 굉장히 무겁게 와닿는다.
평소라면 놀림거리가 생겨난 것을 기뻐할 터였다. 하지만 왜일까. 오늘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오랫동안 수많은 전장을, 결코 살아돌아올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사선死線을 함께 해온 전우의 기이한 모습에 에이리카는 무심코 다시 한 번 살짝 자리를 옆으로 옳겼다.
"흐흠, 흠~"
"……우와……."
물론 에이리카는 바르크호른이 저렇게 들떠있는 원인이 며칠 전 부대에 새로 들어온 장비─88mm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겨우 위치 하나에 장비 하나 추가되는게 그렇게 기뻐할 일인가 싶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부대 화력 증가라는 실질적인 이점과 타국 위치가 자국 장비를 사용한다는 정신적인 충족감, 거기에 오래 전부터 골치 아픈 문제였던 보급 문제까지 단숨에 해결되는 상황이다. 기뻐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다.
그래도 지금의 트루데에게는 다가가고 싶지 않아.
에이리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어서 미나가 오기를 기도했다.
그런 카를스란트 소녀들과는 달리, 다른 소녀들은 평상시와 같은 상태였다.
새벽까지 초계 비행을 하고 온 사냐는 애용하는 배게를 끌어안은 체 수면을 취하고 있었고, 에이라는 그런 사냐를 바라보며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오는 여느 때처럼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자리에 앉아 있었고, 페리느는 그런 미오의 뒷자리에 앉아 오늘 그녀가 할 일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렇게 각자가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 드르륵하고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미나가 들어오고 그 뒤를 루키니와 샤리가, 마지막으로 세라가 들어왔다.
"그럼 있다 봐, 세라!"
"욥, 잘 해봐."
두 사람의 격려에 세라는 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잠시 후, 샬롯과 루키니가 자리에 앉고 단상 앞에 선 미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세라는 부대원들을 바라보며 경례를 올렸다.
"세라 둘리틀 하사. 리베리온 해군 제11수송대에서 파견, 제501통합 전투 항공단에 배속되었기에 이를 신고합니다."
그리고는 미나의 집무실에서 했던 것처럼 주먹 쥔 오른손을 왼쪽 가슴 위에 얹고는 말했다.
"용맹한 창날의 장녀 상냥한 들소. 이로쿼이의 바람의 딸로서 이곳에 왔다."
어느 정도 이 부대의 분위기를 파악한 세라의 경례는 집무실에서의 그것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결코 군기가 빠진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거기에 묘하게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 같은 차분한 목소리가 부대원들의 시선을 끌었다.
동양인인 사카모토 미오보다 약간 더 진한 황갈색 피부는 원주민 소녀의 건강함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혼혈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심록深綠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고요함과, 어깻죽지까지 닿는 검고 긴 머리카락의 자연스러운 굴곡은 그녀에게 묘한 신비감을 더해주었다.
게다가 어지간한 남성과 비슷한 키─확실한 건 501부대원들 중에서 제일 키가 크다는 것이었다─와 어른스러운 얼굴은 온화함과 포근함을 느끼게 하였고, 의지할 수 있는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세라의 손이 내려옴과 동시에 미나는 부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지난 번에 설명해서 다들 잘 알겠지만, 하사는 탄약 보급 및 화력 지원을 위해서 이 부대에 왔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편대를 짜는 일은 아마도 없을 테지만, 서로 사이좋게 지내길 바래요."
그리고는 세라를 향해 주의 사항, 업무 정보 등을 설명한 후,
"기지 안내는 이후에 샤리 씨에게 받도록 해주세요. 그리고 지금은……. 자기소개를 해볼까요?"
그렇게 말했다.
*****
그리고 서로 궁금한 점이 있다면 물어보도록 해요─ 그렇게 말한 미나 중령이 제일 먼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전 미나 디트린데 뷜케. 카를스란트 공군 중령으로 현재 이곳 501 부대의 대장을 맡고 있어요. 힘든 게 있으면 바로바로 얘기해줘요."
그렇게 말하며 살포시 미소 짓는 중령님.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이분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사람에게 다가가는 게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벽을 안 쌓는다고 할까. 쉽게 다가오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같다.
그러면서도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선명한 붉은 빛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외유내강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종합적으로 믿음직한 상사라는 느낌이다. 한눈에 책임자라는 걸 알 수 있다고 할까. 그런 분위기가 와닿는다.
중령 다음은 지난 번에 수송선단에서 봤던 소령이었다.
나와 비슷한 검은 머리카락과 황색 피부, 그리고전형적인 동양인의 외모였지만, 단정한 이목구비에 날카롭게 정련된 분위기는 역전의 용사의 그것이었다.
특히 손에 들린 칼과 안대는 여기저기 닳거나 흠집이 나 있어서, 그것들이 결코 장식품이 아니라 수십 수백 번의 격전을 헤치며 나타났다는 증거라는 걸 소리높여 외치고 있었다.
그런 소령의 복장은 새하얀 후소 해군 상의에…… 수영복…….
뭐, 여기가 그런 세계인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사카모토 미오다. 후소 해군 소령이지. 이제야 제대로 인사를 하게 되었군. 앞으로도 그때처럼 잘 해주길 바란다."
겉모습과 같은 늠름하고 당당한 인사. 지난 번에 봤을 때의 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눈에 군인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절도 있는 기색이 느껴졌다.
말씀하신데로, 정말 이제서야 제대로 인사하게 되었네요, 소령님.
그래도 말입니다, 그때처럼이라뇨. 수송선 띄우는거요? 그거 전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전 보급마녀지 인양마녀가 아니라구요. 게다가 원래 그런 건 전문 인양함으로 끌어올려야하는 거라구요?
뭐, 마음 속이야 어찌되었든 겉으로는 그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수 밖에 없었다. 계급이 깡패지 뭐…….
그 다음은 미나 중령과 같은 카를스란트 군복을 입은 아가씨였다. 다만 디자인은 중령의 것과는 달리 연미복마냥 끝이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인상은, 뭐랄까, 사카모토 소령님처럼 역전의 용사 같은 분위기인데 좀 더 꽉 조여 있는 느낌이다.
무진장 엄격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그녀는,
"난 게르트루트 바르크호른. 카를스란트 공군 대위다."
그렇게 말하고는 그 엄격해보이는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는,
"복장 불량이로군."
가차없이 지적했다.
헛, 설마 샤리가 말했던 군기 반장이라는 사람이 이 사람인가?! 이대로 징계?! 얼차려?! 융단폭격?!
아니, 진정해라, 이건 공명의 함정이다! 내가 원해서 이렇게 입은 것도 아니고 직속 상관이 까라고해서[?] 깐 것 뿐이니까 직접적으로 내가 조인트를 까일 가능성은 낮아! 게다가 상대가 윗 계급이라고 해도 조국 상관이 아닌 이상 중징계를 내릴 수는 없을 터!
그렇다고는해도 상관은 상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고민하고 있자니 뒤에서 미나 중령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하사의 기본 복장이에요, 바르크호른 대위."
나이스 중령님! 적절한 지원입니다!
이 타이밍을 타 나도 적절하게 변명을 해야지.
"이로쿼이와 리베리온 양국의 협상의 결과물이라 제 힘으로는 어떻게 못 합니다."
"흠, 그래도 신경쓰이는군……."
"네, 군복은 역시 잘 다려서 딱 각을 세운 정복 차림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호오, 너, 뭔가 아는군?"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바르크호른 대위님은 만족스러운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너라면 88mm를 맡길 수 있겠어."
"네. ……네?"
"폭동, 아니 항쟁사건이 들려왔을 때는 불안했지만, 이렇게 훌륭한 군인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괜찮겠지. 잘 부탁한다, 하사."
"……네."
군복 발언으로 점수를 딴 건 좋은데, 카를스란트 사람이라 그런지 88mm에 대해서 무진장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아뇨, 그렇게까지 기대하시면 곤란한데 말입니다. 포라구요? 기관총도 아니고 포란 말입니다. 그것도 일반 위치는 들지도 못하는 거라구요?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그렇게 무진장 부담스러운 대위의 인사 다음은 그 옆에 있던 작은 소녀였다.
이번에도 카를스란트 군복이다. 이 부대, 브리타니아에 세워져 있으면서 카를스란트 군인만 벌써 세 명이다. 뭐야 이거…….
"에이리카 하르트만. 카를스란트 공군 중위야. 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말이야……."
"네."
"그, 뭐……, 힘내."
"……네?"
에이리카 씨, 그 따스한 시선이 굉장히 신경쓰입니다만? 뭔가요, 대체? 모든 것들 다 이해한 듯한 그 미소가 굉장히 신경 쓰입니다만?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없이 그저 따스한 시선만을 보내올 뿐이었다. 뭐야, 이 부대의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는 거야?
마음 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불안감이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가운데, 다음 사람이 인사를 해왔다.
"난 페리느 H. 끌로스떼르망이에요. 소속은 자유 갈리아 공군으로 계급은 중위랍니다."
귀족 아가씨 같은 인사였다. 어투에도 우아함이라고 할까, 그런게 묻어난다. 이런 사람이 정말 현실에 존재하는 거였구나…….
음, 왠지 기가 셀 것 같다. 금발에 안경이라서 그런가? 거기에 귀족 아가씨 버프까지 받으니 더 그렇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에 나는 조금 생각을 바꿨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 프로필만 봤을 때는 당신을 무시했답니다. 하지만 지난 번 전투를 본 후, 능력 있는 마녀라는 걸 깨달았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기가 센 건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 인정할 건 확실하게 인정하는 것 같다.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가질 지도 모를 유형이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한 듯 하다. 사이좋게 지낼 수 있으면 든든해지겠지.
하지만 갈리아라……. 할아버지께서 예전에 갈리아 군하고도 싸운 적이 있다고 했었는데……. 음, 이 얘기는 나중에 친해지면 하기로 하고 묻어두자.
그 다음은 아침에 만났던 두 사람이었다.
"그럼 다시 한 번! 난 프란체스카 루키니! 로마냐 공군 소위!"
"샬롯 E. 예거. 리베리온 육군 중위. 어서 와, 세라."
"응, 잘 부탁해."
여전히 활기찬 한 쌍이다.
그럼 이제 누가 자기소개할 차례인가, 하는데 루키니가 내 허리에 매달리며 말했다.
"아아, 세라!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응? 뭔데?"
"원주민 이름은 왜 상냥한 들소인거야?"
"아, 맞아맞아. 원주민들은 이름을 나중에 지어주지? 그 뭐시기냐, 애들의 특징에 맞춰서 지어주는 거였던가?"
의외로 원주민에 대해서 잘 알고 있구나, 샤리. 보통은 다들 그냥 원래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던데.
여튼 왜 상냥한 들소냐면…….
"들소처럼 급하면서도 일 시키면 잘 해서, 라는 이유로."
"……정말로?"
"농담이야."
"어이어이, 그러면 상냥하다고 안 하지."
"아니, 스스로 말하기에는 좀 낯부끄러운 이유라서……."
사실 상냥한 어미 들소에서 어미를 뺀 거다. 엄마마냥 잔소리가 많다는 소리도 참 많이 들었지.
그걸 말하자 주위 사람들이 모두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무언가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같다라……. 부대원들 중에서 제일 어른스러워 보이는 건 사실이군. 키 때문인 것 같은데?"
……바르크호른 대위님, 그거 나이들어보인다는 말을 빙 돌려서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그리고 거기 미나 중령님, 기쁘시다면 그냥 마음 편히 기뻐해주세요. 평소에 늙어보인다는 소리 자주 듣는 사람이 어려보인다는 얘기 들었을 때의 반응이라는 거 눈치챘거든요?
여하튼,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나타났다.
한쪽은 신비로운 분위기의 새하얀 소녀. 다른 한쪽은 투명한 분위기의 새하얀 소녀. 말해놓고보니 둘 다 새하얗다고 해버렸네. 북구 출신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신비로운 분위기의 소녀가 입을 열었다.
"난 에이라 일마타르 유틸라이넨. 수오무스 공군 소위. 그리고 이쪽은 사냐 V. 리트뱌크. 오라샤 육군 중위."
왜 두 사람 소개를 혼자서 하는가 했더니, 투명한 분위기의 소녀─사냐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냐의 어깨를 지탱하는 에이라. 사이 좋구나, 이 둘은.
……저쪽 세계에서였다면……. 아니, 그건 그쪽 세계의 이야기다. 이쪽은 사이좋잖아. 그럼 된 거다.
"저기 말이야."
"네?"
"가슴 만져봐도 될까?"
무서울 정도로 쉬크한 말투로 무서울 정도로 쉬크한 걸 요구하는군요, 에이라 씨!
뭐지?! 오히려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니까 더 대답하기 어려워! 차라리 루키니처럼 대놓고 들이대면 어물쩍 넘어갈 수 있을 텐데!
선임의 성희롱?! 제길, 계급 폭력인가?! 소위가 하사를 성희롱하고 있어! 어떡해야하지?! 이게 공명의 함정인가?!
루키니는 애니까 그냥 넘어갔지만 눈앞의 수오무스 아가씨는 격동의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소녀에게 내 가슴을 맡겨도 되는 건가?!
어떡하지?! 어떡해야해?!
……조커를 꺼내들자! 저쪽에 서 있는 미나 중령님을 돌아보았다. 도와주세요, 중령님! 메이데이!
하지만 그것보다 빠르게 루키니가 내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뉴후후, 그냥 이렇게~ 마음 편하게 끌어안으면 되는데~"
"호오, 그렇구나. 그럼 이제 나도 만져볼래."
"싫~다! 세라 가슴은 내꺼다!"
"에에-? 네 전용 가슴은 저기 있잖아. 좋은 건 서로 나눠쓰는 거라고."
"베에- 안 나눠쓸꺼다!"
"흐음, 에잇!"
"우왓, 만지지 마! 내 꺼야! 앗, 아앗!"
"흐흥- 미래예지 마법을 쓰면 네 미숙한 방어 따위야 식은 죽 먹기지롱~"
거기 저 수오무스 출신 아가씨. 댁 고유마법을 이런 곳에 쓰지 마.
그리고 루키니. 언제부터 내 가슴이 니 물건이 되었냐.
무엇보다 두 사람 다 내 가슴 주물럭거리는 건 슬슬 그만뒀으면 하는데. 아프다, 이 아가씨들아.
"아하하하! 고생길이 훤하구나, 세라!" "음, 이건 꽤나 큰데……. 게다가 이 부드러운 감촉……."
"웃지만 말고 이 둘 좀 어떻게 해봐 샤리." "이이익!! 이얏! 얍! 호잇! 우헤헤, 막았, 아앗?! 치사해!"
"뭐, 부대 전통 같은 거라고 생각해. 참고로 거기 둘, 누가 먼저 신입 가슴 만지느냐로 싸우는 라이벌 관계야." "흐음, 좋은 가슴이구만……."
"남의 가슴가지고 뭐하는 것들이야 대체……." "우이이잇! 에이이잇! 합!"
이건 뭐 말괄량이 둘이 달라붙은 것 같다.
정말 이제 좀 그만 해줬으면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등 뒤에서 미나 중령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두 사람 다 거기까지. 그 이상 소란을 피우면 벌칙이니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싸움을 멈추는 두 사람.
그러면서도 서로 혀를 베에- 하고 내민다. 어디까지 애들이냐 니들은.
그렇게 혼란스러웠던 자기 소개가 끝나는가 싶었는데…….
"아, 하사.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음, 지난 번에 배 위에서도 물어봤던 것 같다만……."
"뭘 말씀이십니까?"
사카모토 소령님이 갑작스레 질문을 던졌다.
배 위에서도 물어봤던 거라고? 서로 질문하고 답했던 게 있었던가? 잠깐 몇 마디하고 난 그대로 기절했었는데?
……아, 잠깐만. 소령님, 혹시 그거,
"치마 속에 지금도 속바지 입고 있나?"
"……네."
역시나 그거냐아아아!!!!
왜 그렇게 궁금해하는 건데요 그거어어어어언?!!?!?
소령님의 질문과 내 대댑에 부대원들이 모두 나를 기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야, 다들?! 내가 이상한 거야? 어, 확실히 이 세계에서는 내가 이상한 거지만! 그런 눈으로 볼 만큼 신기하냐고, 이게?!
"흠, 그렇군. 전투시에 불편하지 않은가?" 안 불편해요.
"그거, 안 더워?" 안 더워요.
"상처 자국이라도 남아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거지, 그거. 부족 풍습?" 아니야.
"신기하네- 타이츠도 아니가 속바지인가아-" 안 신기해.
"아하하하! 할머니 같아!" 그게 어때서.
"그냥 취향입니다."
헤에─ 하고 다들 이해한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지만, 문제가 일단락되었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간신히 자기 소개 시간이 끝났다.
……앞으로 자기 소개 시간이 트라우마가 될 것 같아.
*****
마법 가방 설정이 공식적으로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역사 설정도 갈아엎은 판국에 보급 설정쯤이야 <-
2기에 나온 네우로이가 12000m 거리에서 요시카 일행을 공격했죠.
……세라 어떡하냐. 대공포는 거리가 안 닿아, 88mm는 난사할 마력이 없어…….
수오무스Suomus더군요. 스옴스라고 하는 게 잘못된 표현이었습니다.
근 두 달 만이네요. 연중되었다는 소문이 제 귀에 들어올 정도로 긴 시간이었습니다.
reines silber가 번역되지 않아 위치력이 떨어져 있었습니다만, 2기 보정과 다른 위치스 팬픽의 힘으로 부활했습니다.
하지만 다음편은 언제일지 모릅니다. [야]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9
자기소개가 끝난 후, 샤리와 루키니가 부대 안내를 해주었다.
감상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여기 최전선 맞냐?" 그 생각 밖에 안 떠오르는 곳이다.
모자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데다가, 시설은 전부 최신식이며, 목욕탕, 사우나까지…….
마녀 하나가 항공대 하나 정도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상주인구라고 해봐야 나까지 합쳐서 겨우 열 명 밖에 안되는 부대에 이건 과한 투자가 아닐까.
물론 요리나,청소나 스트라이커 유닛 정비를 해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사람들은 근무시간 외에는 이 기지에 없는 데다가 시설 사용 권한도 없다.
결국 기지 내 시설들은 모두 열 명의 마녀들만의 것이라는 소리다.
어쨌든간에 쓰라고 만들어줬으니 써줘야지. 이렇게 복지 사업을 잘해준 이유는 그만큼 잘 싸우라는 의미일 테니까.
……그리고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최대한 즐기라는 거겠지.
여튼 그렇게 기지를 한 바퀴 돈 후, 마지막으로 내 방을 배정받았다.
들어가보니 남쪽으로 커대란 창문이 달렸고, 그 너머로 바닷가가 보이는 방이었다. 창문을 열자 상쾌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흐음, 좋다. 날씨가 화창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지만 흐린 날씨가 계속되기로 유명한 브리타니아다. 바람이 상쾌한 것으로 만족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겠지. 그래도 햇빛이 아쉬운데……. 으음…….
아쉬운 마음을 접고 창문을 닫은 후,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내가 오기 전까지 분명 빈방이었을 터인데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여기 일하는 사람들이 해둔 건가?
하지만 오늘부터 내가 들어오게 되었으니, 이 방 청소는 앞으로 내가 해야할 것이다.
……아니, 사람이 들어와도 해주는 건가? 잘 모르겠네. 나중에 셜리에게 물어보자.
일단 스스로 청소해야할 경우를 생각해서 방을 살펴보았다.
천장이나 벽은 별로 손 댈 게 없고, 어차피 짐도 그리 많지 않고 방에도 간단한 가구들만 있으니까, 먼지나 좀 털면 되겠다. 바닥은, 흐음, 돌바닥이네.
신발과 양말을 벗어 맨발로 바닥을 디뎌보았다.
찰딱─ 찰딱─
호오, 매끄럽게 잘 연마되어 있다. 잘 갈아진 돌바닥이라니, 이 무슨 사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기지는 옛날에 어떤 귀족이 쓰던 성을 보수해서 쓰고 있는 거라고 하니, 이런 방도 남아있는 것이리라. 단지 그런 방이 나한테 왔다는 게 신기한 것 뿐이지. 그래도 신기하네. 대체 뭐하던 방이었을까?
여튼 통짜 돌바닥이니 바닥 청소는 물 한 번 쫙 부어서 싹싹 밀어내면 단숨에 처리할 수 있을 듯 하다만……. 겨울에 춥지 않으려나? 온돌처럼 따듯한 돌바닥…… 일 리는 없겠지. 서양식 성이니까.
가구는 침대와 옷장, 그리고 책상, 이렇게 세 가지 뿐.
어차피 짐이 적으니까 곤란할 건 없지만, 돌벽이라 그런지 너무 삭막해보인다.
게다가 이 방은 분명 남향이지만 대부분 흐릿한 브리타니아 날씨를 생각하면 방이 너무 우중충한 느낌이고.
음, 나중에 뭔가 화사한 것 좀 걸어두던지 해야겠다. 소녀다운 동화풍은 아니더라도 사람 사는 냄새는 풍겨야지.
사경을 헤메고 온 주인과는 달리 칼같이 부대에 도착한 내 짐가방은 책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일단 옷은 옷장에, 잡다한 것들은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걸로 방 정리는 끝.
그리고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읏챠!
덜커덩! 끼익─ 끼익─.
"후우……."
살짝 삐걱거리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좋은 침대였다. 푹 잘 수 있겠네. 우와, 이거 2인용 침대인가? 무진장 크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똑똑─하고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라, 방 정리 끝났어?"
셜리였다.
다 끝났다고, 그리고 문은 열려있다고 말하자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그녀가 들어왔다.
루키니도 함께 왔나 싶었는데 셜리 혼자 뿐이었다.
방 안에 들어온 셜리는 약간 의아한 듯이 물었다.
"어라, 방 정리 끝난 거 맞아?"
"응. 왜?"
"아까 전에 너한테 방 알려줬을 때랑 똑같아서."
그야 그렇겠지. 짐이라고 해봤자 옷가지 몇 벌에 이러저러한 잡동사니 뿐이니까.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 옷장 문을 열어 안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 걸린 옷가지를 본 셜리는 뭔가 희한하다는 듯이 말했다.
"군복 두 벌에 사복 세 벌에……. 속옷……. 단순함의 극치네."
"그 외에 들고올 건 없었으니까."
"뭐, 그건 그렇네. 나도 옷가방만 들고 왔었으니까. 그것도 절반은 군복으로 채운 걸로."
군인이 되니까 들고다닐 짐도 줄더라고. 셜리는 그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다가 다시 내 옷장에 걸린 옷들을 보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군복은 둘째치고 사복은……. 곧 죽어도 바지로구나."
"……냅둬."
"저건 뭐야?"
"잠옷."
"남자애들 거 같네."
"내가 입는 건데."
"뭐, 그럴 줄 알았어."
아무런 꾸밈도 없는 단촐한 회색빛 파자마. 셜리가 남자애들 것 같다고 한 내 잠옷이다. 당연히 상하의 제대로 맞춰진 물건인데, 그렇다고 남자용이라니. 그러고보니 어머니께서도 그러셨지. 무슨 남자애들이나 입을 법한 걸 입는다고. 일단 전생에는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 세계의 하반신 방어력이 너무 높은 거에요!
하여튼 어느 날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다른 걸 골라보라고 하시기에 발목까지 오는 원피스 파자마를 골랐더니, 이번에는 왜 그런 노인네 잠옷 같은 걸 입느냐고, 어째 큰딸내미는 이리도 귀여운 맛이 없냐고……. 도대체 어쩌라고요…….
그런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께서는 내 잠옷을 마음에 들어하셨다. 밤에 급하게 움직여야할 때 좋다는 이유로.
다른 집 여식들과는 달리 필사적으로 하의를 챙겨입는 딸내미를 이상하게 여겨주시지 않으신 건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오밤중에 급하게 움직여야할 때라는 건 대체 어떤 때인가요. 심히 불안합니다만?!
여하튼 편해서 입는다고 하자 셜리는 그렇군, 하고 중얼거리고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의 취향에 대해서는 굉장히 마음이 넓다. 역시 리베리안.
"그럼 갈까?"
"어딜?"
"어? 아아, 잠옷 때문에 말하는 걸 잊어버렸군. 점심시간이야. 아까 봤던 식당으로 가면 돼."
"오오오! 드디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거구나!"
"어이어이, 진정해. 며칠 굶은 것도 아닌데 뭐야, 그 반응은?"
셜리, 영양을 위해 맛을 완전히 내던져버린 병원식을 일주일 이상 먹고나면 내 기분을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맛 없니?"
식재료의 원래 맛까지 싹 씻어내고 완전히 새로 창조해내면 그런 맛이 나올 것 같아.
그런 느낌으로 설명해주자 셜리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얼른 가서 퇴원 기념으로 잔뜩 먹어야겠군."
"밥이다~ 밥이다~"
"아하하하! 아, 그리고 오후에 내 스트라이커 유닛이랑 무기 보러 갈 거야."
"그 문제의 88mm인가. 우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싫다……."
내 투덜거림에 셜리는 웃음을 거두고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보급창도."
라고 중얼거렸다. 아, 보급창. 그게 원래 내 일감이었지.
전선에 내보낼 수 있는 최소한의 전투력……이라기보다는 속력을 가지지 못한 내가 최전방인 이곳에 온 이유.
"그래, 그거. ……장난이 아니야, 그건."
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네가 더 장난이 아니게 느껴진단다, 셜리. 방금 전의 호쾌한 웃음소리는 어디로 사라진 거니.
대체 어떻길래? 그러고보니 아까 자기소개 때 에이리카 중위장난삼아 겁을 주는 거라면 좀 더 놀리는 듯한 말투를 써줘. 진지한 눈동자로 창문 너머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지 마!
어찌되었든 점심밥이 우선이므로 우선 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점심밥~ 점심밥~
……결코 현실도피하는 게 아니다. 정말로!
*****
신대륙 원주민 아이들이 균형잡힌 몸매를 유지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많이 먹고 많이 움직인다. 그것을 잘 지키기 때문이다. 덕분에 동년배 이주민 아이들보다 훨씬 더 건강한 아이들이 많다.
특히나 마녀─그들 말로 정령의 축복을 받은 아이들의 경우에는 마력과 함께 가지고 태어난 선천적인 미모에, 앞서 말한 후천적인 노력까지 합쳐져 눈부실 정도의 건강미를 자랑하는 미녀들이 된다.
어찌되었든 중요한 건, 많이 먹고 많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에 모인 501부대원들은 원주민들의 '많이 먹는다'는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우물우물……. 꿀꺽. 아앙, 우움……. ……꿀꺽. ……왜 다들, 저만 보고 계신가요?"
우선 알아두어야할 것은, 오늘 점심이 중간에 자기가 원하는 토핑으로 채워넣어 먹는 샌드위치라는 것, 그리고 세라가 채소와 햄, 치즈 등 거의 모든 토핑을 집어넣은 샌드위치를 벌써 다섯 개째 먹어치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샌드위치에 쓰인 식빵의 크기는 최소한 A5용지 크기이며, 세라의 샌드위치는 영양을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먹고 싶어서─인지 모든 토핑을 집어넣은 덕분에 두께가 성인 남성의 주먹만했다는 것도.
덤으로 마신 우유의 양은 이미 머그컵으로 다섯 잔이었다.
참고로 세라는 결코 게걸스럽게 먹어치우지 않았다.
단지 다른 부대원들이 오기 전에 이미 세 개를 먹고, 다른 부대원들이 도착해 일반적인 10대 소녀들의 한 끼 식사분을 먹고 있을 때 나머지를, 다시 말해서 네 개째를 먹고 지금 이 순간, 마지막 하나를 먹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다른 부대원들은 그저 많이 먹는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이거, 다섯 개째야……."
"지금 세라가 들고 있는 거, 다섯 번째 샌드위치야……."
처음부터 세라가 먹는 걸 지켜보고 있었던 셜리와 루키니의 발언에 경악했다.
"지금, 뭐라고……?" "거짓말이지?" "아니, 잠깐만. 처음에 재료가 얼마나 있었지?" "아, 줄어든 양을 알아보면…… 에? 거짓말……." "잠깐잠깐잠깐. 에에, 우리가 먹은 분량을 빼면……. 우와아아……." "……몇 인분이냐로 세어보면 5, 아니…… 잠깐,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잡으면 5인분이겠군."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다섯 개째라고." "……믿을 수가 없어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이야, 그거?!" "많이 먹기 대회라도 하는 거야 뭐야?" "원주민들 식성이 대단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어젯밤 초계비행 때문에, 그리고 오늘밤 초계비행 때문에 다시 방으로 돌아가 자고 있는 사냐를 제외한 모든 부대원들은 충격에 휩쌓였다.
정작 당사자인 세라는 는 주위의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체 행복한 얼굴로 마지막 샌드위치를 먹고 있다가, 질린 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부대원들의 얼굴을 보고는,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런 세라를 보고 한마음이 된 부대원들의 마음을 대변한 건 셜리였다.
"너, 진짜 많이 먹는구나?"
자유로운 리베리안답게 직설적인 발언이었다.
같은 나이대의 소녀에게 하기에는 상당히 민감한 발언이었지만 정작 그 말을 들은 세라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 흐음, 다른 애들보다 조금 많이 먹는다는 소리는 들어."
"아니, 조금 정도가 아니잖아……."
"우물우물……. 아아, 우리 애들 말야. 구대륙 사람들 말고."
"……이로쿼이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먹어?"
"음, 보통은 나보다 좀 적게 먹지. 이런 거 세 개 정도?"
그것도 충분히 많은 양이었다.
"아이들은 뛰어놀고, 어른들은 일하느라 많이 움직이니까 다들 많이 먹게 되지."
도대체 얼마나 놀고 얼마나 일하길래 이만큼 먹는 걸 보통이라고 하는 걸까. 그리고 먹는 양만 놓고 보면 적어도 두세 배는 일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원주민들은 느긋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이지 않았던가?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마지막 조각을 다 먹어치운 세라가 무언가 생각난 듯 손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내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우리들이랑 모의전 하던 부대 애들도 우리만큼 먹었어."
"어? 리베리온 애들이? 너희들처럼?"
"응. 모의전하는 날은 같이 밥 먹는데, 왠지 화가 난 얼굴로 막 먹어. 음식은 행복하게 먹어야 힘이 되는데 말야."
"……그건 너희들한테 지고 나서 홧김에 폭식하는 거야."
셜리는 질린 얼굴로 세라의 말에 그렇게 대답했다.
여섯 잔째 우유를 마시고 있던 세라는 셜리의 말에 푸념하듯 말했다.
"지든 이기든 난 언제나 격추당하지만……. 하여튼, 잘 먹었습니다─."
"아, 식판은 저기다 갖다놓으면 돼."
"라져─."
세라는 셜리가 가리킨 곳으로 식판을 들고 가며 중얼거렸다.
"저녁은 뭘까나~"
벌써 저녁 생각이니. 모두의 마음 속으로 그 한마디가 스쳐지나갔다.
잠시 후, 세라와 셜리, 그리고 루키니가 먼저 식당을 나가자 미오가 미나를 향해 물었다.
"보급, 괜찮겠지?"
"……아마도."
괜찮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식비 지출이 지금의 몇 배 이상으로 늘어나리라.
실질적으로 부대를 운영하는 사령관인 미나는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가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때 다른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하르트만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야, 이번에 하사가 먹은 거, 아무 것도 안하고 먹은 거지?"
"무슨 소리냐, 프라우?"
뜬금없는 질문에 바르크호른은 오랜 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훈련이나 전투 같은 거 안하고 그냥, 하사 기준으로 평범하게 한 끼를 먹은 거지?"
"그런 것 같은데……, 잠깐. 저게 '평범하게 한 끼'라면……."
바르크호른은 하르트만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했다. 아아, 그런가.
"탄약창을 짊어지고 전투라도 한 번 벌이면……."
"……하루치 식량이 거덜나겠군."
사실 오늘 점심에서 세라가 그렇게 먹은 건, 일주일 넘게 맛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병원식만 먹다가, 고급 재료들이 쌓여있는 광경이 폭식─세라 기준으로는 조금 과식─한 것 뿐이었지만, 501부대원들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여하튼 두 사람의 대화에 미나는 생각했다.
'식비 예산, 얼마나 추가 신청해야할까…….'
윗사람의 고충이었다.
*****
점심식사는 맛있었다.
자유롭게 원하는만큼 끼워먹는 샌드위치라니. 군대에서! 이 무슨 행복! 군대리아가 아니야! 빵도, 햄도, 야채와 채소도, 과일도, 치즈도!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고급품! 그런데 군대리아가 뭐지? 전생의 지식인가?
……아아, 떠올랐다. 아니다, 절대로 그런 게 아니다. 대충 집어넣어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훌륭한 샌드위치였다.
게다가 일주일 이상 맛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아볼 수 없는 병원식만 먹다가 신선한 재료들로 만든 음식을 먹어서 그랬을까. 정말 맛있었다.
"저녁 때는 뭐가 나오려나~"
"벌써부터 저녁 생각이냐……."
"으에……. 세라, 살쪄……."
질리지도 않느냐는 듯한 얼굴의 셜리, 그리고 이 나이대 소녀들의 유리 같은 마음을 가차없이 긁는 대사를 날리는 루키니. ……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아가씨들 기준이다.
배불리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먹는 만큼 움직이는 게 기본인 우리들의 가치관을 이해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렇기에 나는 그저 씩 웃어넘겼다.
"먹은 만큼 움직일 테니까 괜찮아, 괜찮아."
그런 식으로 잡담을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 새 격납고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이후로 처음으로, 제대로 내 스트라이커 유닛을 볼 수 있었는데…….
"……어라, 이런 거였던가?"
"어때?"
"……크네."
"그리고?"
"……두껍네."
"그렇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스트라이커 유닛이라고 한다면 대부분 다리보다 약간 두껍지만 그래도 유선형으로 늘씬하게 잘 빠진 장비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내 유닛은 조금 달랐다. 일반적인 스트라이커 유닛에 비해 길이는 팔 관절 하나 정도 더 길었고, 두께는 팔 하나 정도 더 두꺼웠다. 게다가 붙어 있는 날개도 일반 유닛보다 두껍고 컸다.
그, 뭐시냐……. 그때는 급하게 날아오르느라 몰랐는데 이거, 아무리봐도…….
"전투용으로 쓸만한 유닛이 아니잖아……."
난 이런 걸로 날았던 건가. 죽으려면 뭔 짓을 못하겠느냐마는…… 이 아니라, 왜 이런 걸 주는 거냐, 리베리온!
왜 이렇게 투덜거리느냐면, 일반 비행기로는 따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위치들의 우월한 기동성이 스트라이커 유닛의 늘씬한 디자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뭔 소린가 싶겠지만 조종간을 잡는 일반 비행기와는, 달리 스트라이커 유닛은 다리를 움직여 조종한다는 걸 떠올려보자.
그렇다. 얇으면 얇을수록, 가벼우면 가벼울수록 움직이기 쉬워진다.
즉, 내 스트라이커 유닛처럼 두껍고 크다는 것은 움직이기 힘들다, 다시 말해서 기동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기동성이 떨어지는 위치가 전장에서 어떻게 되는지는…… 말 안해도 알겠지.
그러니까 이런 걸로 첫 실전에 나가서 살아돌아온 건 정말로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이야, 정말 운이 좋았다! ……정말로. 진짜 정말로.
마음 속으로 서글픈 눈물을 흘리고 있자니, 루키니가 감탄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진짜 이런 걸로 어떻게 버틴 거야? 나 같으면 줘도 안 탈 텐데."
"준비도 안하고 있는 애한테 일단 날아, 라고 명령 받으면 빗자루라도 잡는 법이야."
그러고보니 집에서 쓰던 빗자루가 떠오르는군. 밭일하러 갈 때 참 편했는데.
하여튼 대체 뭘 베이스로 했길래 이런 유닛이 나온 걸까.
"이거 모델명이 뭐야?"
내 물음에 대답한 건 셜리였다.
"모델명……. 음, 분명히 C-47B……였지."
"C-47B…… 어? 수송기?"
비행기나 스트라이커 유닛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명색이 수송대 하사였는지라 그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 음? 수송기라는 건 알고 있네?"
"수송대에 있었으니까 수송기 기체명 정도는 알아. 아니, 것보다 왜 스트라이커 유닛인데 수송기 베이스인 거야?"
보통 스트라이커 유닛은 전투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특별히 몇몇 유닛은 뇌격기를 기반으로 했다고 하지만, 아무튼 수송기를 기반으로 삼은 유닛을 개발하다니. 뭔 정신으로?
"으음, 전투기로는 도저히 네 능력을 되살릴 수 없으니까 아예 수송기를 베이스로 한 거라고 했어."
그야 일반 전투형 스트라이커 유닛은 줘봤자 최고 속도 절반도 못 내니까 그렇겠지.
그렇다고해서 수송기를 기반으로 한 유닛을 개발해 보내는 건 대체 뭔 생각인 거야? 이런 거 보통 연 단위로 개발하는 거잖아? 내가 여기 오게 된 건 겨우 몇 달 전에 결정된 일인데? 설마 공돌이를 갈아넣은 건가…….
"육군에서 예전에 속도 대신 힘을 우선시하는 유닛을 개발했었나 봐. 그러다 효율이 안 좋아서 버려진 걸 해군이 주워다 이번에 개량해서 만든 거라고 하더라. 그리고, 또 뭐였더라……. 아, 너를 기준으로 최대 속도 400km/h, 순항 속도 300km/h 정도 라고 했다."
"곧 죽어도 400이 한계점이라는 건가……."
후후후, 훈련용 스트라이커 유닛으로 수없이 도전하여 수많은 비상착륙(이라 쓰고 추락이라 읽는다) 끝에 간신히 턱걸이로 도달했던 400의 장벽은 정식 스트라이커 유닛으로도 턱걸이 수준인 건가…….
괜찮아! 난 어차피 보급유닛이니까!
"그게 아마 순수 유닛 속도고 무장시에는 속도가 조금 줄어들 수도 있다고 했었지."
"……뭐, 그렇겠지."
그 순간 갑자기 등 뒤로 턱 하고 무언가가 달라붙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루키니였다.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점프력도 좋아요 이 아가씨는.
일단 미끄러지려고 하기에 다리를 붙잡아 제대로 등에 업었다. 웃샤. 양손을 깍지껴서 엉덩이를 받쳐든다. 여동생 어부바로 익숙한 일이다.
자세가 안정되자 루키니가 내 어깨에 턱을 걸치며 말했다.
"괜찮아, 세라! 세라가 쿠구구구구구궁!! 하면 내가 콰과과과과광!! 해서 슈슈슈슈슝!! 해줄 테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고마워 루키니."
그래, 괜찮아! 난 어차피 보급유닛이니까! 정말로 괜찮아! 정말이라니까! 정말이란 말야!
……이 동네는 겉보기에는 꿈과 희망으로 가득찬 소녀들의 세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속을 들여다보면 정말 꿈도 희망도 뭣도 없는 동네라니까.
아, 그런데 말야, 셜리. 왜 네가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거야? 보통 이런 건 정비관들이 알려주는 거 아니었던가? 전 부대에서는 그랬던 것 같은데.
내 물음에 그녀는 조금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뭐, 이 부대 사정이 좀 있기도 하고, 네 스트라이커 유닛이 궁금해서 좀 알아보기도 했고, 일단은 네 직속 상관이니까 알게 됐지."
"호오, 직속 상관이라서라……."
"왜?"
"그, 왠지 너는 상관이라는 느낌이 영……."
"어이어이, 그렇다고 대놓고 말하냐고……."
그렇긴 하지만, 실제로도 이렇게 계급 무시하고 대화하고 있는데 말이지.
여담이지만 하사와 대위가 서로 말을 놓고 있는 이 풍경이 나한테는 얼마나 놀랍고도 우스운 일인지, 셜리 너는 절대 모를 거야. 그 카를스란트 대위님이나 후소 소령님은 좀 이해할까. 하지만 그 아가씨들도 이 세계 주민인데다가 계급에 얽매이지 않는 위치니까 완전히는 이해 못하겠지.
아무튼 상관다운 지적─하는 시늉─을 하기는 했지만, 셜리는 곧바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계급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어차피 너랑 난 함께 하늘을 날 전우지,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명령받는 그런 관계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잘 부탁해. 그녀는 그렇게 덧붙였다.
나도, 나도! 등에 업힌 루키니가 외쳤다.
아아, 앞길이 전도다난하지만 이 두 사람이 있어준다면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두 사람이 말했다.
"자, 그럼 세라 양. 저쪽을 보시죠."
"저기야, 저─기!"
두 사람이 가르킨 곳에는,
"……."
대형 세탁기 크기의 강철 상자가 있었다.
"……세라?"
"……."
"……어이, 세라?"
"……헛?!"
잠깐 정신이 나갔었다. 내 눈앞에 이건, 그럴 만한 파괴력을 충분히, 아니 흘러넘치도록 가지고 있었다.
혹시나해서, 만에 하나의 가능성에 걸고, 셜리에게 물었다.
"……이게 탄약창?"
"그래."
"……가서 더 먹고 올래."
"먹는 건 좋지만 그런다고해서 이게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야."
"……."
이게 뭐야아아아아아아아아?!?!?!
이런 걸 들고 날라고?! 아니, 나는 건 문제가 아니야. 이것보다 더한 것들도 들고 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안전한 장소에서 느긋하게 옮긴 거지, 네우로이의 빔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한 게 아니라고!
그런데 이건 뭐야?! 공중전에 들고 갈만한 장비가 아니잖아, 이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가위……, 가 아니라 세탁기 만한 탄약창을 짊어지고 회피 기동을 펼치라고 하면 난 멋지게 바다로 떨어지는 길을 선택하겠다.
"덧붙여서 세라 무기는 그 옆에 있어. 88mm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가차없이 파헤치는구나, 루키니."
사람 키의 서너 배는 되어 보이는 길이에 사람 허리통만한 두께를 가진 카를스란트의 만능포가, 탄약창 옆에서 그 크고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나고 있다.
손잡이나 고정대 같은 걸 보니, 확실히 일반적인 88mm와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원래 몇 사람이 달라 붙어서 쏘는 대공, 대전차 화기를 분대지원화기로 만들다니. 나한테 대체 뭘 바라는 거야, 이 부대.
어찌되었든 일단 날아보기로 했다. 탄약창과 대포가 아무리 크고 무겁다한들, 들고 나는 것까지는 쉬우니까. 기동 비행은 무리지만.
88mm 사격은 나중에 지상에서 실험해본 후에 하기로 했다. 위치 혼자서 사격할 수 있도록 조준경이 있다고는 해도, 501부대 내에서 이런 괴악한 물건을 써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사격 제원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어서 보류된 것이다. 게다가 포병대에서 빌려주기로 한 포탄용 과녁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도 있다.
그리고 개인적인 예감인데, 이걸 지금 아무 생각없이 하늘에서 쐈다가는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스트라이커 유닛에 다리를 밀어넣고 마력을 흘려넣었다. 그러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을 되살리자,
부웅─.
마도 엔진이 회전한다. 에테르와 공기가 격렬하게 반응한다. 가시화된 마력의 증거인 프로펠러가 가열차게 움직인다. 흠, 전투기와는 다른 수송기만의 엔진음은 스트라이커 유닛에서도 똑같이 들리는군. 그때는 급해서 몰랐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하나하나 관찰할 수 있다.
그러면서 고정대를 장착했다. 88mm와 탄약창을 걸치는 장비다. 투박하게 생겼지만 걸치고 보니 생각 외로 편했다. 인체공학적으로 만든 건가?
동시에 프로펠러의 회전으로 엔진의 움직임이 정상 궤도에 올랐는지를 확인한다.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더……. 됐다. 이제 고유마법─등가교환을 발동시켜 화물적재량을 늘린 후, 등에는 탄약창을, 허리에는 88mm를 매달았다. 그리고 인컴을 귀에 단다. 이것으로 이륙 준비 완료.
그와 동시에 스트라이커 유닛의 엔진 소리 너머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가라, 세라~!"
어느새 루키니가 격납고 입구 앞에서 깃발을 흔들며 외치고 있었다. 기운이 넘치는 소위님이다.
고개를 돌려 셜리를 바라보니, 그녀는 엔진 때문에 생긴 바람 때문인지 목에 걸고 있던 고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 내 시선을 확인하고는 말없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갔다 와.
나 역시 엄지를 치켜들어 대답했다. 다녀올게.
고정대가 풀리는 감각과 함께 스트라이커 유닛이 천천히 앞으로 전진한다.
오랜만에 짐덩이들을 달고 하는 비행인지라 조금 긴장된다.
그래도 다시 하늘을 난다는 것 때문일까. 두근거리기도 한다.
그럼 가볼까.
다시 한 번 하늘로.
*****
시험비행으로 기지 주변 도는 모습은 501부대 전원에게 포착되었다.
"……진짜로 날았군."
신기하다는 듯한 바르크호른의 어투에 에리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트루데, 어제까지는 잘 날 거라고 확신했었잖아."
"그렇긴 하지만 정말로 날고 있는 걸 보니 신기해서 말야."
적어도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에리카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하려다 잠시 뜸을 들인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잔소리 심한 전우를 따라 묘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세라를 바라보았다.
"……."
바라보았다.
"……."
바라보았다.
"……."
바라보았다…… 가 말했다.
"저거 회피 기동인가?"
"……그런 것 같다만……."
"바베큐 하는 것 같은데?"
"……그렇군."
배 아래 쪽에 중심을 두고 천천히 회전하는 것은, 원래대로라면 기초적인 회피 기동 중의 하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래왔을 터였다.
물론 빠르게 돈다고 해서 훌륭한 회피 기동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세라의 움직임은 에리카의 말대로 바베큐 그릴이 돌아가는 것처럼 느렸다.
"쓸데없는 움직임이 너무 많군."
"그래도 저런 짐덩어리를 매달고 날고 있는 거잖아? 대단한 거 아니야?"
"……그렇긴 하군."
애초에 우리는 들지도 못하니까. 바르크호른은 그렇게 생각하며 에리카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 뒤로 다른 여러가지 회피 기동─이었을 것─이 지나가고, 상승, 급상승, 하강, 급하강, 선회, 공중정지(호버링) 등이 선보여졌다.
평범한 비행이었다. 조금 인심을 쓰자면 그럭저럭 잘 날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저게 일반적인 마녀였다면 바르크호른은 훈련이 안되었다며 화를 냈을 것이고, 에리카는 그런 바르크호른을 보며 키득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위치가 탄약창을 짊어지고 나는 게 아니라, 탄약창에 위치가 붙어있는 겁니다.'라고 말해도 믿는 사람이 꽤 나올 법한 모습으로 저 정도 수준의 비행 실력이다. 적어도 공중 제어 능력은 훌륭했다.
"적어도 최초 목표였던 탄약 보급에는 문제가 없겠네."
"그렇군. 이제 88mm 시험만 해보면 되겠어."
"……포탄용 과녁 이틀 후에 도착한다고 했던가?"
"아아. 기대되는군."
기대에 가득찬 반짝반짝 빛나는 바르크호른의 모습에 에리카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야에 기지 주변을 선회중인 세라의 모습이 들어왔다.
힘내, 하사. 정말로 힘내. 나중에 과자라도 줄게.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
저녁식사 때까지 비행을 해본 결과, 적어도 브리타니아 공역 근처에서 501부대가 무기 부족으로 퇴각해야할 일은 없다는 게 판명되었다.
그래, 무한탄창마법─정식명칭과는 별개로 내가 붙인 별명─을 걸고서도 더럽게 무거운 질량을 자랑하는 탄약창이다. 연대급 병력을 완전무장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물건으로 정원이 열한 명인 마녀 한 부대 보급을 못할까.
하여튼 오랜만에 줄기차게 비행을 해서 그런지 피곤했다.
저녁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일단 배가 든든한 걸 보니 제대로 먹은 것 같지만, 중간에 누가 그렇게 먹어도 괜찮냐고 했던 것 같은데……. 에이, 모르겠다. 식탁 위에 있는 걸 먹었으니까 괜찮겠지.
그 후, 루키니 손에 이끌려서 목욕탕에 갔다. 중간에 셜리도 내일 근육통으로 고생할지도 모르니까 씻고 자는 게 낫다며 나를 목욕탕으로 이끌었다.
눈 감고 어딘가에 머리를 내리는 순간 잠들어버릴 것 같았지만, 타당한 말이었으므로 저항없이 끌려갔다.
씻다가 졸고, 뜨끈뜨끈한 온탕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졸고, 루키니랑 셜리, 그리고 목욕탕에 와 있던 사카모토 소령님과 뭔가 이것저것 얘기하다가 조는 등─영관 앞에서 졸았다는 걸 깨달은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비몽사몽한 끝에 간신히 목욕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연합군 제501 통합 전투 항공단─통칭 스트라이크 위치스에서의 첫날이 지나갔다.
*****
리네와 요시카가 안나온다는 질문이 많았는데, 현재 이 작품의 시간대는 4월말입니다.
요시카가 7월에 오고 리네는 그 한 달 전에 오므로 6월 쯤에 등장할 겁니다.
……그때까지 얼마나 걸리려나…….
샤리 -> 셜리. 이번 화부터 수정합니다. 지난 화들은 수정하기 귀찮으니 내버려둡니다. <-
에이리카 -> 에리카. 역시 이번 화부터 수정. 그런데 초기에는 에리카로 하다가 중간에 에이리카로 쓰고 있었네요. 뭐야 […]
위치력이 부족해……. 힘을! 무한한 힘을! 빠와! 언리미띠드 빠와!
그리고 제목 옆에 별 붙는 거 대체 조건이 뭔가요? 아시는 분?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p.s선생님, 일일연재가 하고 싶어요 […]
p.s 2 별일 없다면 아마 주말에 10화가 올라올 겁니다.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10
지루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따사로운 가을 햇살은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타…… 하는 훈련용 물감탄이 눈앞의 리베리온 소속 마녀의 스트라이크 유닛을 노랗게 물들였다. 격추 판정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허리를 굽혀 급강하. 방금 전까지 자신이 날아갈 예정이었던 궤도로 쏟아지는 물감탄을 보고 상대의 위치를 가늠했다.
눈으로 볼 것도 없이 총구만 돌린 후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 타타타, 타타타……. 정확한 3연속 3점사.
"뭐, 무슨?! 말도 안돼?!"
당황한 듯한 소녀의 목소리에 가을 햇살은 미소지었다. 자신의 위협사격을 피하다 다른 이로쿼이 아이의 물감탄을 뒤집어 쓴 것이리라.
그러나 곧 무심한 얼굴로 돌아왔다.
역시 지루해. 재미없어.
'그 사람'이 이곳을 떠난 이후로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게 모의전은 지루하기만 할 뿐이었다.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라 지금 모의전에 참가하고 있는 모든 이로쿼이 소녀들이 공통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로쿼이 사람 같지 않은 취록빛 눈동자가 아름답고, 몸도 마음도 어른스러운 그 사람. 치마에 속바지까지 입는 약간은 희한한 사람.
언제나 제일 먼저 격추당해 상처가 끊일 날이 없어도 웃던 사람.
힘든 일이 생기면 기대고 싶고, 기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전해주고 싶고, 슬플 때면 그 품 안에서 울고 싶은 사람.
어딘가 엄마 같은…… 아니, '같은'이 아니다. 이 부대에서 그 사람은 진짜 엄마였다.
얼른, 무사히 돌아와 줘, 상냥한 들소.
그렇게 바라며, 이로쿼이 소녀들은 하늘을 날았다.
──리베리온 소녀들을 느긋하게, 허나 착실히 격추시키면서.
"거짓말?! 보지도 않고 쏘는, 꺄아악?!"
"뒤에 쫓아와! 뒤에 쫓아와! 뒤뒤뒤뒤뒤! 으아아악?!?!?"
"조심, 히야아아아악?!!?"
그리고 언제나 격추시킬 수 있었던 '표적'이 없어지면서 완패를 당한 리베리온 소녀들이 그날 저녁 폭식을 하고, 오른쪽으로 살짝 더 돌아간 몸무게 눈금에 절규하게 되는 건 또 다른 이야기.
*****
퇴원 하루 후, 그러니까 501 부대 둘째 날 새벽.
해도 뜨지 않은 데다가 브리타니아 특유의 화창하지 못한 날씨 덕분에 방 안은 아직도 어두침침했다.
게다가 어제의 피로가 덜 풀렸는지 몸에서 조금 더 침대에 누워있자는 신호를 보내왔다. 대부분의 신체 기관들이 그에 동의하는 신호를 보냈다.
그렇지만 십 수년 간 단련된 농사꾼 기질이 발휘되어, 결국 일어나게 되었다. 버릇이란 건 행동 결정에 큰 비율을 차지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나니, 할 일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리베리온 부대에 있을 때는 여기저기 만들어 두었던 텃밭을 돌아보고 다녔지만 여기는 그런 게 없기 때문이었다. 흐음, 어떡한다…….
고민하다가 일단 산책이라도 하기로 했다. 일어난 직후와는 달리 조금 더 밝아져서 사물을 분간할 정도는 되었기 때문이었다.
기상 나팔도 아직 멀었고, 아침 식사 준비도 아직 안 되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방을 나와 어스름한 새벽길을 걷기 시작한지 불과 몇 분.
쏴아아아……. 철썩……. 철썩…….
파도소리와 함께 짭쪼름한 바다내음이 밀려왔다. 거기서 조금 더 걷자, 모래사장과 함께 바다가 보였다.
수송선을 타고 오면서 줄기차게 봤던 바다지만, 이렇게 육지에서 보는 건 또다른 맛이 있다. 게다가 새벽이라 그런지 꽤나 운치있는 정경이다.
"스읍─ 후우─……. 조개 먹고 싶다……."
집에서였다면 지금쯤 뭔가 주워먹고 밭에 가있을 시간이지. 그래서 조개가 떠오른 듯 하다.
굳이 조개가 아니더라도 좋다. 미역도 좋고, 해초도 좋고. 음, 파도에 떠밀려 온 게 있다면 좀 건져갈까.
조개는 갈퀴가 필요하니 지금 당장 잡을 수 없지만, 해조류라면 그런 게 있을 테니까.
먹는 거야 가져가서 씻어낸 후 말려서 먹든지, 아니면 지금 바닷물에 헹궈서 그대로 먹든지 어떻게든지 간에 먹을 수 있으니까.
그런 생각에 약간 들뜬 가슴을 안고 모래사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곳에는…….
"오오오……."
먹을 게 지천에 널려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면 되는 말일까.
군 부대라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지역인데다가, 이곳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이 부대 소녀들은 그 누구도 파도에 떠밀려온 해조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기 때문인지, 김이며, 미역이며, 다시마며, 이러저러한 먹거리들이 널려 있었다…… 라고 말은 했다만.
솔직히 말해서, 바닷 속에서 갓 딴 것도 아니고 물살에 뜯겨 부유하다가 파도에 떠밀려 온 것들이니 신선도가 떨어지는 건 둘째치고, 다른 바다생물들이 먹다버린 듯한 것들도 태반인지라 제대로된 먹거리는 얼마 없었다.
물론 지금이 조난 상태라면 가볍게 헹군 후, 가차없이 위장으로 밀어넣었겠지만, 취사 선택의 여유가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게다가 방금 전에 태반이 못 먹을 것들이라고 말했는데, 그걸 뒤집어서 말하면 적어도 반절은 먹을 수 있는 것들이라는 소리다.
뭐, 실제로는 반절은커녕 3할 정도 회수하면 다행이리라. 그래도 그게 어디야.
그렇게 생각하며 팔을 걷어붙이고 하나하나 줍기 시작했다.
"흥흥~ 흐흥~ 흥~"
오, 미역 발견. 다시마도 있군.
……불가사리 네놈은 육식이었을 터인데 어째서 미역에 붙어 있는 거냐. 덕분에 괜찮은 미역 하나 버렸잖아, 짜샤. 전방 불가사리 투척! ……이 아니라 네놈도 먹어치워주마. 이놈은 구워야지.
해변가 바위에 붙어있는 홍합도 발견했지만, 맨손으로 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므로 나중에 캐기로 하고 해조류 수집에 집중했다.
음! 호, 이 녀석 꽤 신선한데? 우물우물, 음, 이 녀석은 지금 당장 먹어둬야겠어.
그런 느낌으로 먹기도 하고 챙겨두기도 하기를 몇 분.
손에는 꽤 많은 해조류가 들려있었다. 음, 이 정도로 해둘까.
말려뒀다가 간식거리로 먹던가 해야겠다.
충분한 수확에 만족하며 기지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 때, 방풍림 근처에서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반짝이는 건, 검인가? 호기심에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보니, 사카모토 소령님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침 단련인가? 일단 인사라도 건네기 위해 다가갔다.
*****
내딛는 발. 흔들림 없는 검의 궤적. 군더더기없는 동작.
숙련된 무인의 움직임이라는 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예술이 된다.
무라는 것이 결국 무언가를 해하는 기술이라고 해도, 눈앞에서 보여지는 유려하고 호쾌한 움직임에 매료되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런 훌륭한 동작을 행하는 자, 사카모토 미오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검을 멈춘 건 그때였다.
검을 멈추었다고는하나, 그것이 궤적을 그리던 도중에 부자연스럽게 멈춘 것인 아니다.
검극이 칼집으로 향하고, 스르릉─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마치 빨려들어가듯 칼집에 들어간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 끝에 멈춘 것이었다.
그리고 몸을 돌린 미오가 본 것은,
"아, 하사인가. 일찍 일어났……."
소매를 걷어붙이고 팔에 해조류를 '수북하게' 걸친 세라의 모습이었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소령님."
"……그건?"
"해조류입니다. 미역, 김, 다시마, 파래, 그리고 여러가지."
아니, 그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 캐온 건가? 아니, 아무래도 바닷가에 널려있는 것들을 주워온 것 같다. 그것보다 이 새벽에 왜 그걸 들고 있는 거지?
게다가…….
"……지금 먹고 있는 건?"
"다시마입니다."
실시간으로 먹고 있다. 약간 갈색빛을 띄는 다시마를 맛있게, 정말로 맛있게 먹고 있다.
자세히 보니까 불가사리도 있었다. 이 소녀에게 가리는 음식, 아니 식재료라는 게 있을까.
아연실색하고 있는 미오의 시선에 세라는 무언가 떠오른 듯, 팔에 걸고 있던 미역을 하나 건네며 말했다.
"드시겠습니까? 초장이나 밥은 없지만 그냥 먹어도 맛있습니다."
"……사양하지. 이제 곧 아침식사니까. 그러니 너무 많이 먹지 마라."
아침식사 못하게 돼. 미오는 그렇게 덧붙이려다 그만두었다.
세라라면 지금 손에 든 해조류를 모조리 먹어치우고서도 아침식사를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빰 빰 빰빰빰~
때마침 기상 나팔이 울렸다. 그 소리에 두 사람은 기지 쪽을 바라보았다.
옛 귀족의 성을 개수하여 만든 기지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성은 무언가 신비로움을 간직한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팔 소리를 듣고 있던 세라가 말했다.
"아침밥 나팔이군요."
"……돌아가지."
틀린 건 아니지만 참으로 노골적인 말이라고 생각하며 미오는 발걸음을 옮겼다. 세라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러던 중 미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세라를 향해 말했다.
"둘리틀."
"네, 소령님."
"식후에 모의전을 해라."
그 말에 세라는 새 미역을 입가로 가져가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
그런고로, 격납고에 있습니다.
스트라이커 유닛을 장착하고, 모의전용 물감탄이 장전된 훈련용 MG42를 들고서 출격 대기중이지요.
……대체 왜…….
아니, 설명은 들어서 알고 있다.
보급병, 다시 말해 비전투병과인 나는 직접적인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에 하나 공격당했을 때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라는 걸.
특히 나같은 경우는, 고속형 소형종만 아니라면 어느 정도 생존률이 보장되기 때문에 이것저것 알아봐야한다는 것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짜고짜 모의전을 하라니. 사카모토 소령님, 굉장히 하드하시군요.
여객기와 경쟁 할 수 있는 속도 덕분에 혼자서 이로쿼이 아이들의 평균 격추 판정 수를 늘리는 사람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면 심장이 멎습니다.
처음에 그 소리 들었을 때, 혹시 미역 때문에 화내시는가 싶어서 놀랐다구요.
하여튼 납득할만한 이유였기 때문에 모의전을 해보기로 했다.
납득하지 못하더라도 까라면 까야하는게 군대니까 할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마음의 문제라는 게 있으니까.
하지만 말입니다.
"뭐어, 잘 부탁해-."
왜 하필이면 상대가 유틸라이넨 소위인 겁니까. 이 아가씨,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피격된 적이 없다는 전설급 마녀잖아.
게다가 실드는 장식일 뿐이라고 말하고 실제로 그걸 실천하는 괴수고! 안돼, 난 여기서 빠져나가야겠어! 어? 안돼잖아? 으아아아악!!!
"뭐하는 거야?"
"……조금 현실도피를……."
"흐응, 이상한 녀석."
누구 때문인냐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지만 차마 내뱉을 수는 없었다.
에라이, 계급이 깡패지. ……아니, 계급 뿐만이 아니라 실력도 깡패구나. 아아, 싫다. 지는 게 당연한 싸움을 하라니.
리베리온에서의 싸움은 단체전이었기에 나 하나 쯤 희생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건 개인전이잖아. 그것도 톱 에이스 클래스 위치와 드잡이질을 하라니. 난 안될 거야 아마…….
그렇게 사람이 심란해하고 있는데…….
"아, 뭔가 걸고 하자."
내기를 걸어온다, 이 아가씨.
"……에이스랑 보급병이 싸우는데 뭘 겁니까."
"5분 이상 살아남으면 네 승리, 아니면 내 승리. 어때? 생존력 시험에는 딱인 내기지?"
단체전에서도 5분 버티면 오래 버틴 거라고 평가받는 애한테 뭐가 딱입니까.
일반 위치에게도 못 버티는데 에이스에게 5분을 버티라니, 벌칙게임인가요. 그리고 말이죠.
"뭘 거는 건가요?"
"내가 이기면 가슴 주무르게 해줘."
"……어제도 그렇게 만지고서는 뭘 더 바라십니까."
"어제는 루키니가 막아서 제대로 못 만졌다구."
가슴에 한이 맺혔나, 이 소위님은.
……그러고보니 루키니랑 이 아가씨, 둘 다 소위로군. 소위가 되면 다들 가슴을 갈구하게 되는 건가?
그럴 리가 있나. 가슴 좋아하는 소녀들이 우연찮게 둘 다 소위일 뿐이겠지. 상당히 신경쓰이는 우연이지만. 어찌되었든.
"만약 제가 이기면요?"
"글쎄……. 원하는 거 하나 들어주지."
"……."
저 당당한 자세와 자신만만한 표정.
확실하다. 자기가 질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고 있지 않는 상태에서 내기를 걸어온 거다.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이럴 때 쿨하게 내기에 응하고, 쿨하게 이긴 다음에, 쿨하게 말하겠지. 빚으로 달아두지, 라고.
……난 얌전히 가슴을 상납해야 하겠지.
하지만 타짜와 만난다한들 판을 벌리지 않으면 아무 것도 빼앗기지 않는 법.
내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위험한 것이라 한들 안 하면 그만이다.
"질 게 뻔한 내기는 안 합니다."
"흐응-, 그럼 그냥 만지게 해줘."
"싫습니다."
"체엣- 재미없구만-. 루키니는 마음대로하게 하면서."
전혀 재미없거든요. 남의 몸 멋대로 만지도록 할 것 같습니까.
그리고 루키니야 아직 어린애고, 엄마를 생각해서 그러는거니까 그런 걸 감안해서 만지게 해주는 겁니다.
"흐응-."
그런 소리를 내며 의외로 순순히 떨어져나갔다. 루키니처럼 때를 쓰며 달라붙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달라붙어도 곤란하지만.
"그럼 머리카락 만지게 해줘."
정정한다. 끈질기다.
그런데 왜 머리카락을? 가슴보다는 낫지만 묘하게 타인에게 맡기기는 싫은 부위를…….
"검은머리는 신기하니까."
"제쪽에서 보자면 소위님의 하얀 머리가 더 신기합니다만. 그리고 사카모토 소령님도 검은머리잖습니까."
"그쪽은 못 만지잖아."
이쪽은 만져도 별 탈 없고 만만해보인다는거로군. 계급이 계급이니까!
제길, 난 언제까지 하사인거냐. 진급 언제야?
……헛, 그러고보니 위치는 연합군으로 차출되면 한 계급 올려준다면서! 그런데 난 왜 안 올려준 거야?
"그래서 할 거야, 안 할 거야?"
"……할게요. 하겠습니다."
"음후후후, 한다고 말했다-?"
"네, 네."
거절해도 다른 걸로 내기를 걸 게 분명했기에 이 정도에서 타협하기로 했다.
"하아……."
한숨과 함께 훈련용 총과 인컴을 챙긴 후, 몸을 앞으로 수그렸다.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스트라이커 유닛이 고정대에서 풀려났다.
다리를 움직여보니 새삼스럽게 움직이기 힘든 기동성 떨어지는 기체라는 걸 깨닫는다.
"그럼 먼저 간다-."
그렇게 말하며 유틸라이넨 소위는 먼저 활주로로 나아갔다. 그리고 가속 후 이륙.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후우, 그럼 나도 가볼까.
내기도 내기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최소한 5분은 버텨보자.
내 목숨줄이 얼마나 질긴가를 시험하는 거니까 그 정도는 버텨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스트라이커 유닛에 마력을 밀어넣었다.
기체 크기만큼 엔진도 큰 건지 소음이 컸다. 한 번 써본 기체건만 이래저래 깨닫는 게 많은 기체다.
하지만 싫지는 않다.
활주로 위에 섰다.
아직 달리지는 않든다.
생각한다.
마법은 마음의 힘.
간절히 바랄 수록 더욱더 힘을 낼 수 있다.
그러니까 생각한다.
그러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느긋하게, 여유롭게, 조금 빠르게, 더 빠르게, 내달리듯이.
실바람처럼, 산들바람처럼, 된바람처럼, 큰바람처럼, 왕바람처럼.
우우우우우웅────
스트라이커 유닛의 엔진음, 그리고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마중삼아 활주로를 달린다.
그리고 1/4 정도 내달린 시점에서 공중에 몸을 띄웠다. 일반적인 마녀라면 너무 짧은 거리다.
수직 이착륙도 가능한 스트라이커 유닛이 활주로를 달리는 건 빠른 시작속도를 얻기 위함인데, 그걸 생각하면 난 너무 빨리 몸을 띄운 것이다.
하지만 지금 뛰든 다 달리고 뛰든 어차피 내 속도의 한계는 400km/h 언저리.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일찍 날아오르는 게 이익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눈앞에 푸른 바다와 약간 흐릿하지만 맑은 브리타니아의 하늘이 보였으니까.
마지막으로 인컴을 통해 들려온 미나 중령님의 목소리가 내 판단이 옳았다는 증거가 되었다.
[에이라 일마타르 유틸라이넨 소위와 세라 둘리틀 하사 이륙 및 안전 고도 도달 확인. 설명했던 건 모두 숙지하셨죠?]
이륙 전에 들었던 걸 다시 한 번 떠올린다.
제한 시간 30분. 전투 공역은 기지를 중심으로 반경 10km 이내. 그 외 기타 등등.
잊어버린 게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복창.
[라져-]
[예스 맴.]
소위와 나의 대답이 번갈아 전해졌다.
정확하게 수신되었는지 곧바로 다음 설명이 이어졌다. 목소리가 바뀌어, 이번에는 사카모토 소령님이었다.
[기상 양호. 바람 양호. 양측 안전 고도 도달 재확인. 현 시점을 기준으로 지휘부 이외의 교신은 모두 봉쇄한다.]
방금 전과 똑같이 대답한 후, 나는 천천히 소위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전투를 벌일 필요는 없다. 뭐가 되었든 살아남는 게 중요하니까.
[그럼 카운트다운이다. 10, 9, 8……]
내 움직임을 눈치챘는지 소위도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오지 말아줬으면 합니다만, 그럴 리가 없겠지.
저 빛나는 눈동자를 보면 안다. 어떻게든 내기에 이기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있다. 안 올 리가 없다.
"……하아."
아, 진짜. 저쪽이 느긋하게 하고 이쪽이 전력을 다해도 안될 게 뻔한 싸움인데, 뭐야 이건.
그렇게 내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은 건가, 저 수오무스 아가씨는.
그렇다고해서 얌전히 당해줄까보냐.
이쪽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주지.
격추당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페이크는 다 걸어보겠어!
[……2, 1. 시작!]
시작과 함께 유틸라이넨 소위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난 곧바로 몸을 뒤집어 바다 위로, 추락하듯 급강하했다.
우선 삼십육계 줄행랑!
*****
에리카는 고개를 돌렸다.
"난 안 볼래. 이걸로 충분해."
약 1분 간, 세라가 에이라에게 페이크를 걸고, 그것이 모조리 실패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세라의 페이크는 훌륭했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대담하고, 동시에 치명적이었다.
직접적인 타격 뿐만이 아니라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심리적인 것들까지, 종류도 굉장히 다양했다.
속도가 느리다는 사실조차도 페이크인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가 에이라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녀의 고유마법은 미래예지.
그렇다. 애초부터 페이크를 걸 수가 없는 상대인 것이었다.
그리고 페이크를 견제하기만 하던 에이라가 드디어 공세로 돌아섰다.
동시에 하늘 위로 처절한 도주극이 펼쳐졌다.
"아아, 세라……."
"이건, 끝났군."
루키니는 애가 타는 얼굴로, 셜리는 씁쓸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될 줄이야 알고 있었지만, 역시 눈앞에서 직접 보고 있자니 너무나도 처참했다.
"당연한 결과로군요."
페리느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전력 비교를 해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오히려 세라가 우세였다면 그게 더 이상했으리라.
"신병 훈련 때가 떠오르는군."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며 바르크호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그녀 나름대로 세라에 대한 전술적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뼛속까지 군인인 그녀에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부대원들이 각자 감상을 표현하는 동안 미나와 미오는 담담한 얼굴로 원래 목표였던 세라의 생존능력을 측정해갔다.
"어때, 미나?"
"음, 생각했던 거랑 비슷해. 그리고 저 페이크 기술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
"확실히 그렇군. 노련한데다가 숙련돼 있어. 에이라가 아니었다면 몇 개는 먹혔을 테지. 게다가……."
미오는 잠시 말을 끊고는 세라의 움직임을 쫓았다.
"고유마법 활용은 정말 대단하군."
처절한 도주극 속에서 세라는 물리 법칙을 무시한 말도 안되는 회피 기동을 펼치고 있었다.
관성을 무시한 회전은 기본이고, 튕기듯 꺾고, 때로는 번개처럼, 때로는 깃털처럼 내려앉고 날아오른다. 잠자리의 그것과 비슷했다.
아니, 훨씬 더 예측불가능하고 인지초월적인 궤적을 그린다는 점에서 세라의 움직임은 상식의 경계 너머의 것이었다.
양력, 중력 가속도, 풍압, 관성, 회전 원심력, 구심력 등등 얻을 수 있는 모든 에너지들을 그녀의 고유마법─등가교환으로 다시 한 번, 무차별적으로 배분함으로써 저런 상식을 벗어난 기동을 펼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녀가 위치고, 동시에 등가교환이라는 고유마법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기동이었다.
거기다 페이크 기술까지. 느린 속력에도 불구하고 세라의 공중전 성적이 중상급인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이라는 쉽사리 세라를 격추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식을 뒤엎는 미래에는 당황하기 마련이니까.
세라는 그 틈을 노려 필사적으로 회피하여 에이라의 공격으로부터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인 듯 했다.
*****
에이스라도 페이크 10개 쯤 걸면 그 중 두세 개는 걸려주겠지.
그런 식으로 하다보면 5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왜 하나도 안 걸리는 거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신인류야 뭐야?! 건담이냐?! 난 자쿠냐?! 아니, 볼이냐?!
하늘땅, 아니 은하계 단위의 실력차가 있으니까 가능성이 적다는 건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래도 한두 개 정도는 걸려줘야 그래도 사람이구나 하잖아!
결국 내가 건 페이크는 모조리 실패했다.
게다가 저 아가씨는 실드 한 번 안 펼치고 내 공격을 모조리 회피했다. DEX를 어디까지 찍은 거냐!
으악, 안돼, 로그아웃을 요청한다! 아니, 안되잖아?! 으아니, 챠! 왜 난 햄보칼 수 엄서?!
"흐아아아아아압!!!!!!!!!"
이제 믿을 건 등가교환을 이용한 불규칙 비행 뿐인,
타타타타타!
회피회피회피회피회피!!!!!
급속기동급속기동급속기도오오오오오오오옹!!!!!!!!!!
물구나무서기하듯 몸을 돌려 방향을 바꾼다. 7시 역방향.
관성의 방해는 없다. 그 에너지는 이미 상시 전개 실드의 마력에 밀어넣었으니까.
이걸로 조금 더 시간을 벌었다!
……라고 생각했다.
유틸라이넨 소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얼굴로 내 뒤에 바싹 붙어 있었다. 안돼, 하느님 제발!
"머리카락 받았다~"
"우왓잠깐마─," 퍼버버벅─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폭풍과 같은 기세로 물감탄이 쏟아졌다.
*****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지만, 내기는 에이라의 압승이었다.
세라가 버틴 시간은 3분 남짓이었을까.
나름대로 선전하기는 했지만 내기에 눈이 먼 에이라에게 5분 이상 살아남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내기가 없었더라도 세라가 격추 판정을 받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으리라.
[일단 모의전은 종료, 두 사람 다 격납고로 귀환해주세요.]
미나의 통보와 동시에 교신이 재개되자 들뜬 에이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흥~ 이겼다~]
[졌습니다. 후우…….]
세라의 목소리는 내기에서 진 사람치고는 담담했다.
애시당초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게 모의전이라고도 말하기 힘든 싸움이 끝나고, 착륙한 두 사람의 모습은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이륙할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희희낙락하는 에이라와 페인트탄 범벅이 되어 '그럼 그렇지.'하는 초탈한 얼굴로 웃고 있는 세라.
에이스와 그렇지 못한 이의 싸움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러나.
"유틸라이넨 소위. 훌륭한 전투였습니다만, 분명히 네우로이식 공격을 취하라고 했을 텐데요."
"……아."
내기 때문에 잊고 있었던 것이다.
미나와 미오는 담담히, 다시 한 번 모의전을 벌이라고 말했다.
그 명령을 듣는 순간, 에이라는 세라에게 외쳤다.
"그래도 내기는 내가 이긴 거야!"
"……."
"어이, 듣고 있어?"
"……아, 네."
다시 한 번 모의전을 벌이라는 소리에 넋이 나간 세라는 멍하니 대답했다.
그걸 본 셜리가 물에 적신 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그래도 잘 한 거야. 미래를 읽는 에이라한테서 그 정도 버틴거면."
"……미래를 읽어?"
"응. 몰랐어?"
"처음 들었…… 아. 아아, 어제 자기소개 때……."
"그러고보니 어제 루키니랑 네 가슴가지고 싸울 때 얘기했었군."
"그러게. 잊고 있었어. 흐에, 미래예지인가……."
세라의 반응에 이륙을 준비중이던 에이라가 말했다.
"뭐, 미래예지라고해도 조금 앞의 미래뿐이지만."
"……아하하하."
찰나의 판단이 승패를 가르는 공중 격투전에서 조금이라도 미래를 안다는 게 얼마나 사기적인 능력인가.
질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세라는 허탈한 듯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뭔가가 떠오른 듯 정신을 차린 그녀는 무기고로 가더니 훈련용 MG42를 하나 더 들었다.
아니, 하나로 끝이 아니었다. 거기에 하나 더. 또 하나 더. 옆구리에 둘, 등에 둘. 모두 합쳐 넷.
그게 끝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그런 기능이 있었는지, 스트라이커 유닛에까지 MG42를 장착하였다. 왼쪽 오른쪽 각각 하나씩.
등에 맨 것은 분명 예비용일 터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유닛에 장착한 것은 그대로 사격이 가능한 듯 싶었다.
마지막으로 물감탄이 장전된 드럼탄창 다발을 걸쳤다.
거기에 직접 사용하게 될 옆구리의 두 정, 예비용으로 등에 맨 두 정, 유닛에 장착한 두 정, 모두 합쳐 여섯 정의 MG42.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게의 무장이었지만 세라는 얼굴을 약간 찌푸리면서도 결코 무장을 풀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 모습을 격납고에 있던 모두가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특히 다시 모의전을 벌이게 된 상대인 에이라는 더했다.
"어이어이, 정말 그러고 날 거야?"
"네. 실험해보고 싶은 게 있으니까요."
"……이거 괜찮은 거야?"
에이라는 이 모의전을 주관하는 지휘부, 즉 미나와 미오를 향해 물었다.
당연한 의문이었다. 모의전의 기본을 송두리째 뒤엎은 무장이었으니까.
하지만 미나는 허가하였다.
"화물적재량이야 문제될 게 없고, 방위 무장은 염두해두었던 것이니까 괜찮아요."
"그래도 말이지……."
"에이라, 네가 해야하는 건 네우로이식 공격이고, 세라가 해야하는 건 생존력 증강이다. 문제 없다."
"으음, 그렇다면야……."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한 듯한 얼굴이었지만, 미오의 말에 결국 에이라도 인정하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다시 벌어진 싸움은, 결과는 같을지언정 전개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
세라는 식탐꾼이 아닙니다. 단지 먹는 만큼 일할 뿐이죠.
게다가 평범한 1인분씩만 먹어도 활동하는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단지 애가 흉폭해질 뿐이죠. […]
하지만 어지간하면 그럴 일은 없습니다. 틈틈히 알아서 주워먹으니까요. 설령 그것이 길가의 잡초든, 선량한 개미들이든. […]
사실 세라가 환생으로 얻은 능력은 무엇을 먹든지 탈없이 흡수할 수 있는 소화능력입니다 <-
그리고 바닷가에 떠밀려온 해조류, 잘 씻어내면 먹을 수 있습니다. 맛있어요. [?]
소위면서 중령에게 말 까는 에이라의 위엄 <-
어차피 이 부대에서 계급 신경 쓰는 건 바르크호른이나 세라 뿐이죠.
예전에도 말했던 것 같지만, 제게는 자고 일어나서 월요일이라고 인식하기 전까지를 주말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런고로 주말이네요. 전 약속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가 아니라, '별일'이 있었던 관계로 늦었습니다. 수험생은 서글프답니다.
원래는 88mm 연습 사격까지 쓰려고 했으나, 모의전에서 꼬여서 일단 이 부분까지만 올립니다.
다음 편은, 달이 바뀌기 전에는 올라올 듯 합니다만, 제 연재 예고는 믿으라고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도주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p.s 빌헬미나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11
화력은 탄막! 탄막은 화력! 우오오오오!!!!
예지 따위 알게 뭐냐! 알고도 맞는 탄막이라는 걸 보여주마아아아!!!!
등 뒤로 따라오는 소위를 향해 발사! 다리에 장착한 기관총은 폼이 아닙니다!
설령 장착 기관총을 피하더라도 이쪽에는 양손에 기관총이 또 있다!
투타타타타타타타!!!
전기톱이라는 별명이 붙은 기관총 4정이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소음과 함께 일반 위치는 엄두도 못낼 탄막을 형성한다.
과연 MG42. 모의전용인데다가 물감탄인데도 불구하고 미칠듯한 연사력을 자랑하는구만.
소위는 어떻게든 달라붙어보려고 하지만, 이 탄막을 뚫는 건 아무리 에이스라도 쉽지 않겠지.
설령 미래를 읽는다 하더라도 피할 길은 없다. 피할 수 있는 모든 범위에 총탄을 흩뿌렸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쉽지 않게 여기고 좀 떨어져주세요! 우와아아아아악?!?!?!!
결국 그녀는 급상승하여 내 탄막의 범위를 벗어났다. 휴우…….
저건 일부러 열어둔 활로다. 알면서도 갈 수 밖에 없는 길.
원래대로라면 그곳을 향해 탄막을 퍼부어야하지만 상대는 미래를 볼 수 있다. 대체 어떤 수로 나올지 모르니 일단은 회피를 선택한다.
그와 동시에 드럼탄창에 탄약이 다 떨어졌다. 엇차, 재장전, 재장전.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빈 탄창이 떨어져나간다. 그 자리에 새 탄창을 밀어넣고 장전한다. 철컥.
이걸로 전투 준비 완료.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유틸라이넨 소위를 보며 생각한다.
아무리 빨라도 스트라이커 유닛의 속도의 범위는 정해져있다.
아무리 기동력이 좋아도 물리법칙을 벗어난 기동은 불가능하다.
거기에 지금의 소위는 위치의 전투규정─속도를 이용한 일격이탈 전술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 않다.
미래를 볼 수 있다고해도 그것이 완벽한 게 아니라면, 그걸 미끼로 상대를 유도하면 된다.
무진장 머리아프긴 하지만, 그걸 보충해줄 탄막이 있다.
어차피 속도는 느리다. 도망칠 수 없다. 그렇다면 실드로 버틴다.
그러니까……, 왔다!
타타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타타타타!!!!!!!!
투타타타타타!!!!
시간차를 두고 사격을 가해 소위의 움직임을 유도한다.
원을 그리듯 총구를 회전시키며 방아쇠를 당긴다.
인간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밀도의 탄막을 만들어낸다.
동시에 활로를 반드시 만들어둔다.
그러니까 저리로 가라. 열린 활로로 나가라. 나한테서 떨어져라, 떨어져라, 떨어져라아아아───!!! 떨어졌다!
탄막을 견디지 못한 소위가 다시 멀어져간다.
바닥을 보이는 탄창을 새것으로 교환한다. 탄약 소모율이 너무 빠르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격납고에 있을 탄약창이 떠오른다. 그걸 들고 다니게 되면 탄약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하지만 그런 커다란 걸 들쳐매고 나는 건 '나는 표적입니다. 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온다아아아아!!!!!
"으아아아, 으그그그으으으윽……!!!"
안돼, 끓어오를 뻔했다. 흥분하면 당한다.
부서져라 어금니를 물어 터져나올 것 같은 비명을 참는다. 침착해라. 냉정해져라.
저 아가씨는 어디까지 미래를 읽을 수 있는 걸까. 몇 초? 괜찮다. 몇 십 초? 안 좋다. 몇 분? 이길 수 없다.
그만. 생각하기를 그만둔다. 목표에 집중하자.
주변을 빙 두르듯 탄막을 만들고 천천히 줄여 압박하는 거다. 목표를 중앙에, 목표를 중앙에, 몪표를 중앙에……!
요동치는 심장과 떨리는 손가락을 억누른다. 상대는 찰나의 틈이라도 생기면 거길 파고들 실력자. 목줄이 걸려있다고해도 맹수는 맹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지금!
타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
이번에는 동시에 사격을 가한다. 좋았어! 탄막에 들어갔다!
천천히 탄막의 범위를 줄여나간다. 이번에는 활로를 만들지 않는다. 너무 가깝다. 뒤로 빠지도록 해야한다. 밀어내야한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바아아아알!!!! 안돼, 안 떨어져나갔, 젠장……! 사격이다!
실드를 펼친다. 불꽃이 튀기는 실드를 보며 상대방과의 거리를, 가까워가까워가까워뭐이리가까워?!?!?!
그 순간 소위가 기겁한 듯한 얼굴로 멀어져갔다. 표정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왔는데 왜?
그런 생각과 동시에 왼손에 쥐고 있었을 터인 MG42가 소위를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집어던진 걸까.
그래도 누가 예언능력자 아니랄까봐 가볍게 피해냈다. 우월하구나 우월해. 좀 맞으면 덧나냐. 아니, 그걸 피해서 거리를 벌려준 것만해도 다행이다만.
어찌되었든 스트라이커 유닛 기관총 사격! 쫒아낸다!
"으랴아아아아아아압!!!"
타타타타!!! 타타타타타타!!!
그제서야 소위가 유효사격 범위 너머로 떨어져나갔다. 오오, 위대한 영이시여!
등 뒤에 매고 있던 예비 MG42를 쥐었다. 챙겨오길 잘했다, 정말로.
아, 진짜! 모의전인데다가 물감탄 장전된 훈련용 총인데 왜 이렇게 긴장감이 흘러넘치는 거냐고!
*****
"무기를 집어던지다니……."
"도롱뇽 같네. 꼬리 자르고 도망치는 그거."
바다로 떨어지는 훈련용 MG42를 보며 바르크호른은 망연히 중얼거렸고, 에리카는 담담하게 자신의 감상을 말했다.
다른 부대원들의 감상은 대부분 바르크호른의 의견에 가까운 듯, 다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법 가방이 있어도 무기는 하나씩 들고 가는 게 보통인만큼, 그걸 집어던진다는 행위가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분명 당황해서 던졌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뭘 어떻게 했는지 MG42는 수평직선으로 수십 미터를 날아가고 나서야 추락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집어던진 것이라면 네우로이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할 테지만, 하지만 방금 전처럼 집어던진다면 어느 정도 피해를 줄 수 있을 듯 했다.
"투척으로 네우로이 잡기라도 하려는 건가."
"잡는 건 무리겠지만, 견제 정도는 충분할 것 같네."
"마력을 담지 못한다면 효과가……. 아니, 탄약 유폭을 이용하면……. 흐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죠. 방금 전의 일격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지휘부를 향해 모두 그렇게 마음 속으로 태클을 걸었다.
그런 느긋한 지상의 모습과는 달리, 하늘에서는 여전히 처절한 모의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저것 온갖 제약을 걸고서도 에이라가 여전히 세라보다 몇 배나 우월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에이라의 공격을 두 번 정도 격퇴했을 즈음, 세라는 갑자기 해수면을 향해 급하강하였다.
추락하는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떠오를 정도로 하강하던 그녀는 거의 파도에 닿을락말락한 높이에서 멈췄다.
그리고는 위치 기준으로 상당히 느린 속도로 천천히 선회하며 에이라를 향해 총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저 녀석?"
바르크호른의 의문은 당연했다. 세라의 행동은 회피 기동을 펼칠 수 있는 범위를 줄여버린 꼴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인 고유마법을 이용한 불규칙기동을 스스로 제약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 아래 쪽에 위치했다. 더 높은 고도에서 강습하는 게 휠씬 더 유리하다는 건 공중전의 상식이다.
그런데 그 유리한 위치조차도 버린 것이었다.
그대로 있어도 불리한데 거기에 스스로 불리한 조건들을 더 만들었다는 사실에 부대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어쩌면 올바른 선택일지도……."
"응? 무슨 소리냐, 하르트만."
"봐봐."
오랜 전우의 손짓에 바르크호른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에이라가 세라를 향해 급하강하고 있었다. 위치적으로 유리한데다가 기술적으로도 훌륭한 강습이었다.
그러나 그 공격은 유효타가 되지 못했고 에이라는 다시 상승하여 세라로부터 멀어져갔다.
세라가 한 일은 단순했다.
우선 첫 번째는 회피하지 않고 실드로 버티는 것.
원래 제대로된 모의전이라면 실드 출력을 조정하여 물감탄에도 뚫리도록 해두는 법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생존력을 시험하는 자리였기에 출력 조정을 행하지 않았다.
물론 세라만 그렇고 에이라는 착실하게 조정해두었다. 불공평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세라는 진작에 격추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버티는 게 고작이라는 게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는. 사람 크기의 물체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밀도의 탄막을 에이라의 회피범위에 뿌리는 것이었다.
마치 근접신관이 개발되기 전의 대공포대처럼 예측 범위 내의 공격 가능 지점에 모든 포탄을 쏟아붓는 것이다.
"……확실히 효과적이긴 하다만, 이게 공중전인지 함대전인지 모르게 되어버렸군."
"정확하게 말하자면 배랑 비행기가 싸우는 것 같은데."
"어느 쪽이든, 정상적인 공중전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네."
"그러게."
속도가 느리니까 도주는 애초에 포기한다.
그리고 무장은 가능한 한도 내에서 모조리 추가한다.
고유마법─등가교환의 힘으로 총화기의 반동, 공기 저항, 중력 가속도 등 모든 에너지를 마력으로 바꿔 실드에 밀어넣는다.
저속 비행, 고화력, 중장갑(Heavy shield). 통상적인 위치의 공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르트만은 희한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공포함이랑 전투기 싸움이네……."
그말 그대로였다. 부대 내 최고의 격추수를 자랑하는 에이스답게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보급위치가 구시대적 전함 전술을 펼치고, 제약이 걸린 에이스가 그걸 뚫지 못하고 있다.
그런 하늘을 바라보면서 501부대 소녀들의 마음에는 자신들이 지금 1차 대전 시절로 돌아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어떻게 30분이나 버텼나 했는데 저렇게 버틴 거였구나."
"아아. 비행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을 충전할 수 있는데다가, 그렇게 충전한 마력을 실드에 모조리 때려박으니……."
"정면으로 부딪치면 뭘 해도 안되겠네."
"그러게 말이다. 생존력 시험이라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질길 줄이야……."
희미하게 신기하다는 듯한 에리카와 어이가 없다는 듯한 바르크호른의 대사는 다른 부대원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자신의 회피 범위를 줄임과 동시에 상대의 공격 범위도 줄인다. 공격을 피하지 않고 실드로 버틴다. 제압사격으로 상대를 밀어낸다.
하나부터 열까지 공중전 교리와는 전혀 달랐다. 방금 전 말했던 것처럼 완벽하게 1차대전식 전술이었다. 어쩌면 그 훨씬 전일지도 모른다.
아니, 전술이기는 할까? 그런 의문이 부대원들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이래저래 상식을 부수는군요, 저 하사는……."
"예이, 힘내라, 세라!"
"버텨라, 세라! 이겨버려!"
페리느는 질렸다는 듯이 중얼거렸고, 루키니와 셜리는 그런 세라의 모습을 그저 열심히 응원할 뿐이었다.
"……공중전이라 하기는 뭐하게 되었다만, 자신이 유리한 전장을 선택하는 능력이 있군."
그렇게 말한 건 약간 떨떠름한 얼굴의 사카모토였다.
수많은 전장을 경험해본 역전의 용사인 그녀에게도 이 싸움은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그런 사카모토의 말에 곁에 있던 미나 역시 난처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미나는 한동안 사령관에게 요구되는 냉정한 판단력으로 모의전을 지켜본 후 말했다.
"슬슬 때가 되었네."
"음, 그렇군."
사카모토는 세 번째 공격을 끝내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에이라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에이라도 조금은 진심으로 덤벼들겠어."
*****
총알은 직선으로 나아간다.
물론 지구 자전과 강선에 의한 회전, 공기 저항 등을 고려하면 완벽하게 직선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허나 고지식한 학자나 저격소총을 든 저격병이라면 모를까 기관총에게 그 정도의 오차는 허용 범위 안이다.
그렇기 때문에 총의 위력 범위는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다. 총구와 목표점, 그리고 총신으로부터의 거리. 즉, 평면적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세라의 손에 들린─그리고 유닛에 장착된─ 네 대의 기관총이 퍼부어대는 화력은 '입체적'이었다.
이건 방공포대도 아니고…….
그 생각과 함께 에이라는 2시 방향으로 살짝 떠올라, 그대로 수직 나선 하강 비행을 시작했다.
동시에 방금 전까지 그녀가 지나가려했던 곳과 있던 곳으로 탄환의 비가 쏟아졌다.
아무리 노련한 위치라도 실드를 펼치거나 후방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는 탄막의 폭풍우.
그러나 에이라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회피에 성공했다.
예지 능력자인 에이라이기에 가능한 기동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마술과도 같은 회피를 펼친 당사자는 짜증난다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정말 귀찮구만……."
첫 번째 모의전 때와는 달리, 벌써 20여분이 지났다.
아무리 에이라가 제 실력을 내지 못하게 제약이 걸린 상태라 해도, 에이스와 최소 전투력도 갖추지 못한 보급마녀와의 전투치고는 상당히 길었다.
물론 그 20여분 동안 에이라가 수세에 몰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세라야 처음부터 방어일변도였고, 만약 공격을 하려했다면 그 순간 이미 격추되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실력차는 그 정도였다.
그래도말야, 까다롭잖아-…….
에이라는 세라의 머리 바로 위에서 수직으로 하강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투타타타……!
비행속도에 중력가속도까지 얻은 물감탄은 날카로운 기세로 내리꽂혔다. 깡까가강……!
세라의 실드에 불꽃 튀었다. 그러나 세라의 몸을 물들인 용사는 아무도 없었다.
칫. 에이라는 혀를 차고는 곧 3시 방향으로 꺾어 선회하듯 상승했다.
그 뒤를 세라가 내뿜는 탄막의 폭풍우가 바싹 쫓아왔다. 물론 유효타는 하나도 없었다.
저속 비행, 고화력, 중장갑의 조합이 이렇게 까다로운 상대가 될 줄이야.
'처음 겪는 일에 고전을 면치 못한다'였나. 오늘 아침에 점쳐본 타로 운세의 말 그대로였다.
다시 공격을 준비하며 에이라는 방금 전의 공격 때 실탄을 썼다면 효과가 있었을까 생각해봤다.
"……."
대답은 '아니다'였다.
세라는 첫 실전에서 중형 네우로이의 빔을 30분 동안 버텨냈다.
그런 정신나간 강도와 지구력을 자랑하는 실드를 정면에서 뚫으려면 함포라도 쏴야할 텐데, 그건 당연히 위치가 운용할만한 화력이 아니다.
게다가 솔직히 함포로도 뚫을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결국 남은 건 기동성과 속도로 실드의 사각을 파고드는 것 뿐.
하지만 탄막이 문제다. 일반적인 위치가 저 정도의 탄막을 쏟아냈다면 예비 탄약까지 모두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세라의 탄막은 지금까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몸에 건 탄창이 절반 이상 줄어든 건 알 수 있었지만, 뒤집어서 말하자면 그건 아직도 탄막을 펼칠 수 있다는 얘기다.
"흐응- 별 수 없나-……."
그렇게 말하며 에이라는 7시 방향으로 천천히 선회하며 하강했다. 그리고 곧바로 강습. 동시에 탄막이 몰아쳤다.
귓가에 들려오는 탄환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들으며 에이라는 계곡의 급류처럼 빠르게 하강했다.
부러지기 일보직전인 것처럼 몸을 꺾으며. 뇌의 인식한계까지 회전하며. 여기저기 터져나오는 관성의 포효를 버티며.
바위에 부딪친 것처럼 거칠게. 좁은 틈새를 파고들듯 세밀하게. 길을 막는 돌을 깎아내듯 빠르게.
그리고 회피가능범위 전체에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탄막의 폭풍이 몰아친 순간,
"욥-."
에이라 앞에 푸른 빛을 내뿜는 마법진이 펼쳐졌다.
*****
탄막이 막혔다. 마법진이 보였다. 실드다. 그래서 외쳤다.
"그건 반칙이잖아아아아아?!!?!"
아니, 사실 반칙은 아니다.
마력이 담긴 공격이 아니면 금새 복구되는 더러운 회복력을 가진 네우로이의 장갑을 생각하면 실드쯤이야 반칙이랄 것도 없다.
그게 출력을 조절한 물건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외치고 나서야 그걸 깨달았다……가 아니라! 실드라니?! 아니 이게 무슨 소리,
타타타타타!!!!
"누와아으이아아아아으아아악!?!?!?!"
실드 위로 불꽃이 튀었다. 바로 눈앞에서 이런 걸 보는 건 정말 심장에 안 좋다. 물감탄이라 죽지는 않지만 맞으면 무진장 아프니까.
얼굴에 정통으로 맞기라도 하게 된다면 그대로 끝. 시야를 잃고 추락한다.
게다가 여긴 바다 위. 여차하면 익사한다. 모의전이라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여튼 물에 빠져 괴로워지는 시간이 있을 거라는 건 틀림없다.
거기에 이 물감탄은 끈적임이 남는다. 씻어내는 것도 일이다.
이 기지에는 목욕탕이 있어서 조금 수월하겠지만 그래도 비누와 거친 수건으로 악전고투를 벌여야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니까 순순히 맞아주기 싫다고!
탄막을 펼치며 9시 방향으로 급선회! 실드를 펼친다! 고도를 올린다! 너무 높아! 낮게! 해수면 위 3미터!
휘오오오오오오───!!
뭔가온다뭔가온다뭔가온다뭔가온다아아아아아악!?!?!
탄막탄막탄막탄막탄마아아아악!!!!!!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
훈련용 총이라도 기본 바탕이 분당 1,500발을 자랑하는 MG42니 훌륭한 탄막을 만들어준다.
물감탄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유틸라이넨 소위가 멀어져간다. 유도사격이 아니었지만 거리가 가까웠기에 틈을 없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드를 써도 저쪽은 출력을 조절했기에 탄막을 모조리 막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튼, 살았다아…….
하지만 소위가 실드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탄막의 힘 덕분이다. 단 한 순간의 빈틈도, 1mm의 여유도 용납치 않는 탄막으로 겨우 이렇게 버티는 거다.
그런데 소위가 실드가 펼치면 단 한 순간이나마 빈틈이, 1mm나마 여유가 생긴다.
일반적인 위치라면 아무렇지도 않다. 파고들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상대는 미래예지라는 사기적인 능력에 개인의 전투능력까지 우수한 에이스 오브 에이스.
찰나의 빈틈을, 1mm의 여유를 파고들어 나를 격추시킬 수 있는 능력자다.
답이 없어요. 캐리어 가야죠. 하지만 캐리어가 없잖아? 난 안 될 거야, 아마…….
……안돼,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끝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애초에 이 싸움은 질 걸 예상한 싸움이었잖아.
첫 싸움은 5분도 안되서 끝났다. 이렇게 버틴 것만해도 대단한 거다. 그것도 미래예지라는 사기 기술을 가진 상대에게서.
그쪽이 온갖 족쇄를 달고 싸운 거라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야. 무장 차이가 난다지만 그래도 버틴 게 어디야.
그러니까……
생각해내라. 이 모의전의 목표는? 나의 생존력 시험.
그러니까 대적할 필요는 없다. 아니, 대적해서는 안된다.
도망치고 피해내고 흘려내고 막아내야 한다.
1분이라도, 1초라도 더……
고도를 내린다. 해수면 위를 스치듯 난다. 뒤로 물보라가 이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게 빠른 속도는 아니다. 구축함 정도의 속도를 유지. 속도를 내봤자 소위를 떨쳐낼 수 없으니까. 대신 실드에 마력을 더 밀어넣는다.
탄창을 확인한다. 남은 탄창은 서너 개. 잘도 버텼다. 이제 한두 번 막아내면 탄막은 끝이다.
그렇게되면 소위를 밀어낼 수 없다. 그때는 실드와 회피 기동에 모든 걸 걸자.
발버둥친다!
바람을 가르며 무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심장의 고동도 점점 더 빨라져간다.
하지만 머리는 차갑게 식어간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래,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경로는 9시 방향으로 크게 선회. 속도는 불규칙 변환. 고도 변환 없음.
모든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긴다.
탄막 전개! 탄막 전개! 탄막 전개애애애애!!!!!!!!!!
물보라로 시야를 어지럽히고 탄막을 흩뿌려 진로를 방해하고 실드로 공격을 막는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 그대로.
하지만.
"─────-"
어떻게 그걸 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제대로 본 거였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치열한 모의전 와중에 찰나의 순간, 물보라 너머로, 탄막 너머로 보인 그게 사실이라면.
에이라 일마타르 유틸라이넨 소위는, 저기 북방에서 온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진 에이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보라를 꿰뚫어보고, 수많은 전장을 넘어온 경험과 미래를 읽는 능력과 푸른 빛의 마법진으로 나의 탄막을 넘어─
체크메이트-
그렇게 말하며 내 실드의 사각으로 파고들어왔다.
한 건 해결, 이라고 말하는 듯한 상쾌한 얼굴이 보임과 동시에,
퍼버버벅!
물감탄이 시야를 가렸다.
*****
누가 봐도 인정할만한 정확한 유효타에 미나는 무전기를 작동시켰다.
"세라 둘리틀 하사 피격 확인. 격추 판정입니다. 모의전 종료. 둘 다 귀환해주세요."
장장 30여분 간의 처절한 모의생존전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에이라가 세라를 격추시키는 것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방금 전과는 달리 공방의 교차가 있었다는 점에서 전회의 일방적인 전투와는 달랐다.
그랬기 때문일까.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에이라의 목소리는 약간 지친 기색이 섞여있었다.
[아, 정말-. 탄막마녀라니, 무진장 귀찮구만-.]
"말은 그렇게 해도, 꽤 즐긴 것 같네요."
[흐응-. 뭐, 재밌기는 했는데……. 그래도 귀찮은 건 귀찮은 거라고-.]
웃음기 섞인 미나의 말에 에이라는 그렇게 대답했다.
[뭐, 그건 그렇다치고, 저 녀석 생존력 점검은 어떻게 된 거야?]
"예에, 충분히 합격점이에요. 수송기 기반의 유닛으로 저 정도면 실전에서의 생존력은 충분하니까요."
[게엑- 수송기? 뭐야, 그럼. 난 수송기를 상대로 30분이나 싸웠다는 거야?]
"뭐, 그렇게 되네요."
미나의 대답에 에이라는 [속도가 느린 것만 빼면 저 녀석도 에이스가 될 수 있겠구만-.]하고 덧붙인 후 천천히 활주로를 향해 날아왔다.
해안가를 바라보고 있던 사카모토가 미나를 부른 건 그때였다.
"미나. 9시 방향에 저거. 보여?"
"응? ……어, 세라……?"
사카모토가 가리킨 곳에는 배를 하늘로 향한 체, 다시 말해서 위아래가 뒤집힌 상태로 마치 꿀벌처럼 8자를 그리며 하늘을 날고 있는 세라가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카모토는 미나 외의 다른 부대원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모두에게서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저건 세라라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그 광경에 사카모토는 안대를 들추고 보라색으로 빛나는 마안을 개방했다.
수 km 앞의 물체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그녀의 마안은 사카모토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세라의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얼굴에 물감탄이 묻은 상태로 굳어서 못 떼어내고 있군."
"신병들이 모의전 할 때 가끔 그러는 거?"
"그래. 훈련소 시절에 동기 중 하나가 그런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게 되는 건 그때 이후로 처음이군."
"교관일 때는 못 봤어?"
"흐음, 교관일 때는 못 봤던 것 같은데……."
어찌되었든.
사카모토는 그렇게 말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거랑, 뭔가 외치고 있는데……. 무전 봉쇄 해제했지?"
"응. 분명히 해제했어."
미나의 대답에 사카모토는 무전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아무 것도 안 들려오지?"
"사고……는 아니겠지? 일단 에이라에게 회수명령을."
"알았다."
사카모토는 무전기를 들어 에이라를 호출했다.
때마침 에이라는 활주로에 착륙하려고 하고 있었다.
"에이라."
[음?]
"9시 방향에 저게 보이나?"
[……어-, 세라……인가? ……저 녀석 뭐하는 거야?]
"네가 쏜 물감탄이 굳어서 시야가 차단된 것 같다. 무슨 이윤지는 모르겠지만 무전도 안돼. 그러니 회수해오도록."
[게엑, 착륙 직전이었는데 귀찮, ……음후후후후-. 라져-.]
투덜거리던 에이라는 무언가 꿍꿍이가 생겼는지 묘한 웃음소리와 함께 곧바로 세라를 향해 날아갔다.
*****
푸합?! 입은 막았지만 코는 조금 들어갔다. 으으, 쓰라려…….
하여튼, 당연하게도, 졌다.
뭐, 그래도 여기까지 버틴게 어디야? 상대는 북유럽 굴지의 에이스고 난 짐 옮기는 거 외에는 쓸모가 없는 보급위치인데.
휴우, 지쳤다 지쳤어. 얼른 돌아가서…… 어라?
앞이 안 보인다……?
그믐달에 안개깔린 흐릿한 밤하늘…… 같은 문학적인 상황이 아니다.
그야말로 새카만 어둠 속에서 날고 있는 거다.
어라, 왜? 그렇게 생각하며 눈가를 만져보았다.
…….
………….
……………….
……물감탄이 굳어서 안 떨어진다.
아아, 음…….
어둠 속을 비행한 경험이 있느냐면, 일단 있기는 있다. 훈련 중에 야간훈련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하늘에, 달빛과 별빛을 이정표 삼을 수 있는 비행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이번처럼 물감이 굳어서 안 떨어져서 눈이 가려진 상태로 난 게 아니란 말이다아아아!!!!
리베리온에서 훈련할 때도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물론 얼굴에 맞은 게 굳은 적은 있지만, 양쪽 눈이 다 가려진 적은 없단 말이야!
노린 건가?! 유틸라이넨 소위 무서운 아이!
확실히 날고 있으면 금방 굳기는 하지만 여기 건 뭔 재질이길래 이렇게 빨리 굳어버리는 거야?!
크윽, 시멘트라도 넣었냐?! 왜 이렇게 딱따갸아아아아아악?!!? 머리카락머리카락머리카락머리카락!??!?!!!
쓰읍, 안돼, 이건 착륙해서 처리해야 돼…….
아, 진짜! 리베리온에서 훈련할 때도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물론 얼굴에 맞은 게 굳은 적은 있지만, 양쪽 눈이 다 가려진 적은 없단 말이야!
노린 건가?! 유틸라이넨 소위 무서운 아이!
어떡하지? 어떡할까? 어떡할까요? 아니, 진짜 어떡해야되는 거야?!!?!?
치, 침착해라! 그래, 소수를 세는 거야!
1과 자기 자신으로밖에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고독한 수의 집합이라면…… 지금 숫자나 세게 생겼냐아아악?!!?
"메이데이! 메이데이! 시야 확보 불능! 시야 확보 불능! 아, 진짜 제발 무전 좀 받아줘요오오!!!"
크윽, 일단 순환 궤도! 순환 궤도를 그려야 해! 바다에 빠지지도 않고, 위치가 변하지도 않는 궤도를!
생각해라세라생각해생각해생각해! 8자! 8자다! 그거라면!
생각과 동시에 몸은 이미 8자를 그리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축을 어떻게 잡고 있는지 모른다는 거지만, 그래도 퐁당 빠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 순간, 갑자기 뭔가가 내 허리띠를 낚아챘다. 뭐야뭐야뭐야뭐야대체뭐야아아아?!?!
"우와으아우와아악!?!?!??!"
"아, 가만히 좀 있어. 구해주러 왔으니까-. 귀찮게스리-"
세상만사가 다 귀찮은 듯한 느릿하면서도 정확하게 들려오는 이 목소리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딱 한 사람 밖에 없다.
"어, 어어, 소위님?! 유틸라이넨 소위님?!"
"응, 나야. 참나, 뭐하길래 무전도 안 하고 이상하게 날고 있는 거야?"
"엑? 아까부터 계속 했는데 응답이 없었는데요?"
무전을 안 하다니, 그렇게 외쳤는데?! 뭐야,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인컴 확인을 위해 귓가에 손을 댄 순간, 굳어가는 물감의 진득한 감촉이 느껴졌다.
반쯤 마르고 반쯤 물기가 남아있어 찐득찐득한 게 기분 나쁘다. 이거 때문에 무전이 막힌 거였군.
얼굴은 다 말라서 떨어질 생각을 안하는데 이쪽은 아직 물기가 남아있으니 묘하다.
여튼 애써 긁어내고 인컴을 다시 착용하자,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무선이 잡히며 사카모토 소령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되었……. ……하사? 반복한다. 통신 복구 되었나, 하사?]
"네, 넵! 들립니다!"
[그래서, 원인은?]
"물감탄에 덮여서 안 들렸었습니다!"
[그건 또 드문 경우로군. 옛날에 훈련소 동기가 그런 적이 있었는데 말이야. 뭐, 일단 귀환하도록. 이상.]
"네, 알겠습니다."
후우, 뭐 그런 얼빠진 일로 무전이 봉쇄됬었냐고 깨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행이지만, 그 뭐시기냐. 소령님이 훈련소 시절에 있었던 일이랑 동급으로 취급받으니 기분이 묘하-느으억?!
"무으와으아악!?!"
순간적으로 몸이 뒤집혔다. 목 부러지는 줄 알았네!
"이번엔 뭡니까, 소위님?!"
"아니, 허리띠 잡고 가는 게 좀 불편해서. 읏샤-, 잡았다-. 이대로 유도할 테니까 그대로 날아."
그말과 함께 등 뒤에서 겨드랑이 사이로 양손을 넣어 나를 끌어안는 유틸라이넨 소위.
확실히 방금 전 보다는 편하지만, 그렇게 잡으면 옷에 물감이 묻을 텐데 괜찮으려나?
물어보니 소위는 어깨 위쪽만 안 잡으면 된다고 한다.
……그런데 말입니다.
"소위님? 지금 뭘 하고 계신 겁니까?"
"흐음, 크구만-. 부드럽고-. 루키니 녀석, 셜리도 있으면서 이런 걸 독점하려고……."
나는 인컴에 대고 사령부를 호출했다.
"대장님! 적습입니다! 공격 받고 있어요! 지원이 필요합니다!"
"시끄럽구만-. 가슴 만지는 것 정도 괜찮잖아-? 닳는 것도 아니고-."
사령부 쪽에서 잠깐 침묵이 돌았다. 그리고 곧바로 작고 메마른 웃음소리가 들려온 후, 독자판단에 맡긴다는 연락이 왔다.
유틸라이넨 소위보다 몇 단계나 높은 두 사람이 독자판단에 맡긴다고 한 것은, 다시 말하자면 알아서 처리하라는 말이렷다.
이등병이 주임원사에게 "말년병장을 알아서 하라."라는 말을 들으면 이런 기분이겠지.
……전생의 지식은 유용할 때도 있지만 왜 이럴 때 이런 미묘한 지식이 떠오르는 걸까…….
여튼, 알아서 처리하라는 말을 들었어도, 난 눈앞을 못 보는 상태로 소위의 유도를 받으며 기지로 돌아가고 있다.
유혈사태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무사히 착륙할 수 없을 게 뻔하고, 설령 일으킨다한들 내 피만 보게 될 것이 뻔하다.
무력은 좋지 않아. 비폭력으로 가자. 비폭력으로.
음, 좋아. 이럴 때는 가장 대중적인 수단을 쓰자.
"그야, 물론 닳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당히 만지는 것도 올바른 건 아닙니다. 누가 소위님 가슴 함부로 만지면 싫잖습니까?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억지로 만지작거리면 동성이라해도 범죄입니다. 성희롱이라구요."
"째째하긴-. 루키니는 냅두면서-."
"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루키니는 애니까 내버려두는 겁니다. 다 큰 아가씨가 애랑 똑같이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리고 루키니가 저러는 것도 원래는 혼날 짓이라구요. 나이들어서도 저러기 전에 얼른 버릇을 고쳐줘야죠. 여하튼 그러니까 소위님도 이러는 거 그만하세요. 남들한테 뭐라 한소리 들을 짓이라는 거 아는 나이시잖아요. 그럼 좀 자제하고 하면서-"
"아아아, 진짜! 알았어! 알았다구! 치이- 아줌마 잔소리- 흥!"
소위는 투덜거리며 손을 아래로 내려 허리를 잡았다.
화가 났는지 내장을 압박하듯 조이는데, 밭농사로 단련된 복근은 그 정도에는 어림없습니다. 하하하!
……여자애가 일해서 만들어진 복근 자랑하는 것도 좀 뭐하군.
하여튼 잔소리 계획은 성공했다.
요 미묘한 나이대에 이래저래 잔소리 듣는 걸 싫어하는 심리를 노린 계획이었다.
아줌마라고 하는 거야 뭐, 엄마 잔소리랑 똑같은 말 한다고 다른 애들한테 많이 들어서 익숙하다.
"머리나 잘 씻어둬! 저녁 때 만져볼 거니까!"
……예정에도 없던 가슴만지기로 그 건은 무효화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뭐, 이건 생명의 은인에게 보은하는 셈 치기로 하자.
그렇게 소위의 유도를 받아 기지에 도착하여 물감 덩어리를 간신히 대충 떼어내자, 주변에 있던 부대원들이 다들 물어왔다. 왜 8자 비행을 했느냐고.
바다에 안 빠지면서도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대답하자 다들 그럭저럭 납득하는 눈치였는데, 그때 루키니가 말했다.
"호버링하면 되잖아? 그리고 팔 힘빼고 내버려두면 위아래도 알 수 있고."
"……아."
그렇게 말 많고 탈 많았던 모의전이 끝났다.
*****
저녁 식사 후, 목욕탕에서 오전에 있었던 모의전의 피로를 풀고, 동시에 루키니와의 물놀이로 다시 피로를 얻고 나왔다.
……같은 10대인데 왜 이렇게 체력 차이가 느껴지는 거지…….
분명 오전에 했던 모의전 때문이다. 응, 그럴 거야 분명히.
여튼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있자니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열려있다고 대답하자 들어온 건 유틸라이넨 소위였다.
"머리카락 받으러 왔다구-."
그러더니 내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내 침대 모서리에 앉아, 이리저리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내기 건도 있었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어린 아이마냥 흥얼거리는 소위의 모습에, 나는 말없이 그녀가 하고싶은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잠시 후, 땋기도 하고 엮기도 하고 풀기도 하며, 별로 길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소위는 문득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왜 그런가 하고 가만히 보고 있자, 소위가 말했다.
"그 뭐랄까-. 옛날에 이런 거 비슷한 걸 봤는데 말야-."
"비슷한 거 말입니까?"
"아기가 엄마 머리카락 막 쥐고 노는 그런 거."
"……."
자기가 하자고 해놓고서 그렇게 말하기냐! "음, 역시 가슴을 걸었어야 했는데……." 핫! 큰일났다! 소위의 눈빛이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실컷 만져놓고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중간에 아줌마 잔소리 늘어놓고는 뭐가 실컷이야?"
"피해자에게는 충분하다못해 과하거든요?!"
잔소리 공격을 다시 한 번 발동시켜야 하는 건가…….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루키니가 들어왔다.
"세~라~! 놀~자아아- 앗?! 에이라?! 읏! 세라의 가슴을 노리고 왔군! 그건 내 꺼야!"
"쳇-."
소위는 혀를 차고는 번개처럼 내 앞에 달려온 루키니과 교대하듯 내 방을 나섰다.
후, 살았다…… 고 생각하고 있자니 뭔가가 가슴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당연히 루키니다.
곧바로 루키니를 끌어안으며 침대 위를 굴렀다. 동생들하고 자주 하던 일이다.
"으랴으랴으랴~!"
"꺄하하하하하! 한 번 더! 한 번 더!"
"으라차차차~!"
"우햐햐햐햐~ 이히히히!"
잠들기 전까지 나와 루키니는 그렇게 놀며 하루를 끝맺었다.
목욕 때도 느꼈지만, 같은 10대인데 왜 루키니의 체력은 무한인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
에이라는 실전에서 한 번도 실드를 펼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건 2기 6화에서 깨집니다만, 여하튼 사실이죠. 제 소설에서도 변함없을 겁니다.
이번 편에서 세라의 정신 나간[…] 화력망을 뚫기 위해 사용하긴 했습니다만, 모의전이니까요.
게다가 귀찮아서 쓴 거지 세라가 강해서 쓴 건 아닙니다. 건쉽 화력이 통하는 건 육군이지 전투기가 아니니까요.
몇 달에 걸쳐 쓰다보니[…] 세라의 모티브가 건쉽이라는 걸 잊어버리고 폭격기틱한 미래를 쓰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수정하긴 하는데, 제일 귀찮은 건 역시 무장 수정. 방위용 기관총을 떡칠한 폭격기와는 달리 건쉽은 플레어뿐이니…….
뭐, 애초에 자창게에 올렸을 때 컨셉은 ac-130 + b-29였지요. 섞고 있습니다. <-
원래 연합군으로 차출되면 한 계급 올려준다고 합니다.
그 러면 세라는 중사가 되어야 합니다만, 이 세계에서 정식 국가로 인정받고 있지 못한 이로쿼이 연방의 국제적 위치, 동시에 그런 이로쿼이와 리베리온의 혼혈인 세라의 출신 등으로 인해 이래저래 꼬여서 올라가지 못한 거죠. 이것에 대해서는 언젠가 쓸 예정입니다.
……가 한 달 전 쯤에 써둔 후기 내용이고, 지금은 보니까 안 올라가는 애들도 있는 것 같아서 어떻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야]
어느 비공사의 추억/연가에서 공중전 정보를 얻고 있습니다.
흐려지는 시야, 멈추지않는 출혈, 불굴의 의지. 아, 좋아요, 이런 거. [음?]
세라 나이 설정을 잘못했어요. 꽃다운 열아홉으로 하고 실드를 없에야 진정한 건쉽이거늘……. /문제발언
제가 문명을 하는 건 아닙니다. 계획은 있지만요.
그저 타자가 느리고, 필속도 느린지라 이 글은 언제나 느립니다. […]
위치스 공식 소설인 소녀의 권─券입니다. 拳이 아니라─에 보면, 요시카의 우월한 실전수행능력과 항상 말아먹는 훈련의 격차에 루키니가 전투 때마다 무언가 씌이는 게 아닌가 의심합니다.
그래서 꿍꿍이를 품고 사람들을 모아 강령회 개시, 요시카는 뭣도 모르고 참가했다가 토모에 고젠에 빙의당합니다.
그리고는 때마침 나타난 네우로이를 격파하고 사라지죠.
뭐, 중요한 건 이후에 루키니가 페리느에게 잔다르크를 강림시키는 등 온갖 오컬트 기술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뭐야 이거 무서워…….
미오 -> 사카모토
미오라고 쓰니까 자꾸 케이온이 떠올라서 말입니다 <-
수능 끝나고 레고 사다 좀 만져봤습니다. 4시간이 훌쩍 가더군요.
수능 끝나고 친구들과 술마시다 뻗고, 숙취로 고생하고, 감기몸살 작렬, 그 다음날은 몸살 증상 중 복통이 남아 앓고…….
폭풍같은 일주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후기가 긴 이유는 두 달 치가 쌓여있기 때문입니다. <-
다음 화는, 예고하면 오히려 더 늦어지는 것 같으니 그냥 예고는 안하겠습니다. 어차피 맞지도 않고.
일단 수능이 끝났으니 빠르게 올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p.s 조아라에서 연재하시는 분들 중에서 제 글을 봐주시는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도 그쪽 작품들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p.s2 주인공이 환생하는 소설 써서 죄송합니다 […]
p.s3 연평도에서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12
퇴원 이틀 후 아침.
"언니, 얼른 일어나!"
"……어?"
눈을 떠보니 여동생이 나를 깨우고 있었다. 왜, 얘가 여기에? ……어, 뭐야, 여기는? 내 방……인가?
주변을 돌아보니 분명 바다 건너 이로쿼이 땅에 있을 고향집 내 방의 모습이었다.
……뭐야, 뭐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제 분명 501부대 기지의 내 방 침대 위에서 루키니와 놀다가 의식이 끊겼는데? 그런데 왜 눈을 떠보니까 내 방인거지?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일단 멈추지 않고 도는 팽이는 없는데…….
절찬리에 혼란중인 내 앞에서 여동생이 팔을 휙휙 흔들었다.
"언니, 깼어?"
"어, 응. 그런데 내가 지금 깬 게 맞는지 모르겠다."
"응? 무슨 소리야?"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일어나서 상황을 파악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난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은 후 방을 나섰다.
우선 제일 먼저 간 곳은 부엌.
어머니께서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계셨다. 도우려고 다가가니,
"얘가 지금 뭐하는 거람?"
핀잔을 들었다. 아니, 식사 준비 돕는 건데요? 매일 하던 건데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걸까.
어머니께서는 갸우뚱하는 내 모습을 보시고는 작은 한숨을 내쉬시더니 외치셨다.
"아직도 잠이 덜 깼니? 얼른 준비해!"
"……무슨 준비를요?"
"기상 준비!"
빰 빰 빰빰빰 빰빰빰빰 빰빠라밤 빰빰빰 빰빰빰──
눈이 번쩍 뜨였다.
"하……."
…….
………….
……………….
…………………….
나팔 소리, 이불, 아침햇살, 돌벽.
몽롱한 정신 속에서 하나하나 뭐가 뭔지 파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도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꿈인가. ……꿈이냐. ……꿈이로군.
정말, 뭐랄까, 그, 뭐시기냐…….
"……최악이다아아……."
그것 밖에 할말이 없다. 아니, 이것저것 투덜거리고 싶은 것들이 마음 속에서 우후죽순, 아니 마그마처럼 끓어올랐다.
동시에 그것보다 더 큰 허무감이 밀어닥쳤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평소라면 아침 나팔보다 일찍 일어나서 이런 일은 없었는데…….
그러고보니 전날 비행 관련으로 뭔가 사고가 생기면 항상 이렇게 나팔 소리를 들으며 깼었다. 어제 모의전에서 뭔가가 트라우마라도 생긴 건가?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모르겠다. 일단 유틸라이넨 소위가 요주의인물이라는 것만큼은 알겠지만…….
어찌되었든 심장은 두근거리고, 머리는 멍하고, 기분은 심란하다.
……일어나자. 세수라도 하고나면 이 꿀꿀한 기분을 조금이나마 떨쳐낼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도구를 챙겨 방문을 열었다. 세면실 가자. 세면실.
*****
생각 외로 강력한 악몽의 위력에 휘청거리며 세면실에 도착해보니, 그곳에는 셜리가 먼저 와 있었다.
역시 깊은 산 속 옹달샘을 제일 빠르게 제패하는 건 토끼의 몫인가.
……나도 뭔 소린지 모르겠다. 아직 잠이 덜 깼나. 아니면 악몽의 영향인가. 여튼 영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
셜리는 브래지어와 팬티……가 아니라 바지……. 그냥 속옷 차림 그대로라고 하자. 여튼 그런 모습으로 양치를 하고 있었다.
군인의 기운, 그러니까 군기라고 하는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지만, 사실 군기 따윈 날려먹은 위치가 더 흔한 게 현실이다.
애초에 10대 여자애들 모아놓고 군기가 잘 잡히길 바라는 게 더 신기하지 않나? 바르크호른 대위님이나 사카모토 소령님 같은 게 오히려 희귀한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세면대로 다가가자, 셜리가 입을 헹구고는 나를 눈치챘는지 한 손을 들어올리며 인사를 건네왔다.
"여어, 잘 잤……, 잘 못 잤군."
한눈에 눈치챌 정도로 안 좋아 보이나보다.
"응. 심한데. 악몽이라도 꾼 거야?"
"……최악의 악몽이었어."
자대배치 받은지 한 달도 안된 이등병이나, 반대로 전역한지 한 달도 안되는 인간들이 꾸는 꿈을 왜 하필이면 이럴 때 꾸게 된 걸까. 1년 넘게 군생활 중인데다가 계급도 하사인……, 아.
휴 가가기 힘들구나 여기. 배 타고 몇날 며칠이라니, 싫다 싫어.……잠깐만, 그러고보니까 여기 올 때 휴가 어떻게 된다는 얘기는 하나도 못 들었던 것 같은데? 어라, 이거 정말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설마 네우로이 섬멸 때까지 계속 여기 있어야 하는 건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위대한 영이시여…….
"후아아암, 좋은 아침……, 무왓?! 세라 얼굴이 시커매!"
때마침 세면실로 들어온 루키니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자기 전에 봤던 것처럼 머리를 풀어해치고 파자마를 입은 루키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좋은 아침이야, 루키니."
"세─라아아──!!"
"읏챠!"
나는 바람처럼 달려온 루키니를 끌어안아 영화처럼 한 바퀴 빙글 돈 후 바닥에 내려주었다.
포옹은 풀지 않았기에 루키니가 내 품 안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그래, 세라? 어디 아파?"
"아냐, 괜찮아. 그냥 악몽을 꾼 것 뿐이야."
"에엑, 세라 악몽 꿨어?"
"응. 그런데 지금 루키니를 보니까 괜찮아졌어."
단순이 말만 그런 게 아니다. 정말 루키니를 보니 악몽과 휴가 문제로 심란했던 마음이 약간은 가벼워졌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허리를 숙여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루키니의 뺨에 내 뺨을 댔다. 그리고 이마와 코를 맞대었고, 서로의 얼굴을 비비는 어린 동물들마냥 반대편 뺨도 비비었다.
마지막으로 이마에 입술을 대고 투레질하듯 바람을 불었다. 푸르르르~
"꺄하하하, 간지러워!"
웃으며 품 안에서 버둥거리는 루키니. 아아, 피폐해진 정신이 정화된다아아─…….
잠시 그렇게 회복의 시간을 가진 후, 간단한 세면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다.
루키니는 셜리와 함께 갔다. 루키니 옷을 셜리가 정리해뒀다나 뭐라나. 애엄마 다됐구나, 셜리.
그러고보니 루키니는 어디서 잔 걸까?
으음, 어디서든지간에 잘 잔 것 같으니까 괜찮겠지.
그래도 걱정이니까 나중에 한 번 물어보기로 하자.
일단은 밥이다, 밥.
뒤숭숭한 악몽으로 심란할 때는 배를 채우는 게 제일이다.
밥~ 밥~ 밥~♪
*****
악몽을 꿔서 식욕이 줄었다는 말과는 달리, 세라는 평상시와 똑같은, 혹은 더한 식욕으로 아침식사를 평정했다.
그 후, 세라가 셜리와 함께 일반 사무 업무를 보고 있을 즈음, 미나와 사카모토는 창고에 있었다. 포격 훈련용 과녁 때문이었다.
창고에는 대형 화물 운반용 크레인을 비롯한 각종 장비들과 정비병들의 외침이 뒤섞여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 들뜬 듯한 얼굴로 화물 정리 업무를 지휘하는 바르크호른의 모습이 그 풍경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왔군."
사카모토는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반짝하고 스쳐 지나간 생각. 일주일 간의 토의. 나타난 벽. 의외의 해답. 새로운 장애물. 극적인 해결.
그리고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시간 끝에, 이것이 도착한 것이었다.
오늘 오후에 있을 포격 훈련을 위해 바닥에 내려놓아진 과녁은, 과녁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총화기 과녁과는 달랐다.
그것들이 세로로 세워놓고 명중률을 확인하는 '판'이라면, 이것은 포탄의 위력범위와 탄도학 자료 수집까지 생각해서 만들어진 복잡하고 거대한 '구조물'에 가까웠다.
거기에 일반적인 보병화기과녁과는 궤를 달리하는 크기는, 이것이 포라고 하는 압도적인 화력을 내뿜는 무기의 위력을 측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한눈에 보여주었다.
과녁 뿐만이 아니라 정비병들에게서도 뭔가 심상치않은 기색이 느껴졌다.
처음부터 88mm 도입을 적극 주장했던 바르크호른이 들떠 있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88mm는 어찌보면 일거리를 늘리게 하는 귀찮은 물건일 수도 있었다. 찡그린 얼굴을 보인다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정비병에게서도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후후후, 대철수 당시에 뿔뿔히 흩어진 마스터 피스 중 하나를 여기서 시험하게 될 줄이야……."
"그것도 방공포대도, 전차대대도 아니고 위치가 쓰도록 개조한 물건을!"
"서둘러! 카를스란트의 자랑이 빛을 발하는 날이다!"
"88mm! 위치! 후흐흐흐흐하하하하하! 이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카를스란트의 기술은 세계 제이이이이이이이이이일!!!!!!!"
"조여! 붙여! 용접! 어차피 박살날 물건이라고 엉성하게 하지 마라!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88mm가 빛을 발한다!"
"카아아아아아를스란트으으으으으으으으으!!!!!!!!!"
"""조국이여어어어어어어어!!!!!!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반쯤 광신도들의 집회에 가까운 광경이었다.
"……괜찮은 건가, 미나?"
"……아마도."
사카모토가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묻자 미나 역시 어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미나의 머리 속으로 열심히 일하는 건 좋지만 이런 건 좀 자제를 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현명한 그녀는 잠시 상황을 지켜보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본 후, 곧 그 결정을 철회했다.
기백은 광신도의 그것과 가까웠지만, 그들의 작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고, 무서울 정도로 효율적이었다. 마치 정비병들 전체가 하나의 생물체처럼 느껴질 정도로.
신뢰도가 보장된다면 굳이 의지를 꺾을 만한 발언을 할 필요가 없겠죠. 미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조국이여어어어어어어어!!!!!!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그래도 역시 좀 제재를 해야하지 않을까?
미나가 어찌할까 고민하는 사이, 카를스란트 정비병들의 정열 덕분에 처음에 4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던 포격 훈련용 과녁 조립 및 설치 작업은, 정비병들의 정열 덕분에 그 시간을 무려 2시간이나 단축할 수 있었다.
*****
사무 업무는 그리 어려운 게 없었다. 가끔 어려운 게 있기는 했지만 셜리가 가르쳐 준 덕분에 쉽게 끝낼 수 있었다.
오히려 문제는 루키니였다. 두 번인가 세 번 정도 나를 찾아와 놀자고 하기 때문이었다.
일이 있으니까 나중에 놀자고 하려고 했더니 되려 셜리가 "좋아, 그럼 잠깐 쉴까. 먼저 간다, 세라! 가자 루키니!" 하고는 뛰쳐나가버렸다. 그래도 되는 거니, 셜리.
다행스럽게도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두세 번 정도 놀고서도 점심시간 10분 전에 일을 끝내고 식당으로 향할 수 있었다. 참 널널하구나, 501부대. 나야 좋지만서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질린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다른 부대원들의 시선을 덤덤히 받아넘기며 식사를 마쳤다.
그 후 남은 시간 동안은 루키니와 셜리 두 사람과 함께 부대 근처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잘 봐. 강아지풀을 이렇게 잡고 손을 이렇게 움직이면……."
"……아, 어, 우와! 해볼래! 해볼래!"
"자. 해봐."
"응! 응! 오"
"손바닥만한 납작한 돌을 세워두고, 이 정도 거리에 서서 던져 맞추는 거야."
"……어, 세라. 30m정도 되는 것 같은데?"
"너무 가까운가?"
"멀어!"
"봐봐. 이렇게 나뭇가지로 틀을 만들고 풀잎을 촘촘하게 엮으면 돼."
"즉석 바구니네."
"그리고…… 어야, 이건 약초네."
"에? 이게? 잡초가 아니라?"
"짓이겨서 까진 데 붙이는 거야."
"이건 여기를 잡고 이 부분을 불면 돼. 자, 해봐."
"후우-." 삐이이이이─.
"어때?"
"이런 풀에서 이런 소리가 나? 신기하네."
"이걸로 불면," 부우우우─. "좀 낮은 소리가 나고."
"헤에……."
그런 느낌으로 놀고 있자니 점심시간 종료 10분 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제 슬슬 격납고로 가야했다. 놀 때는 시간이 정말 빨리 간다.
이제 가자, 하고 말하니 셜리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반면에 루키니는 얼굴을 찌푸렸다. 뭐,저 나이 때에는 지쳐쓰러질 때까지 놀지 못하고 중간에 방해를 받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법이니까 그럴 법도 하다.
"부우─. 더 놀고 싶은데……."
"그래도 가야하잖아. 알지?"
"히잉……."
"있다가 또 놀자. 응?"
"……알았어."
셜리의 달램이 통했는지 루키니는 불만스러워하면서도 그렇게 대답했다. 어째 투정부리는 딸과 그걸 달래는 엄마 같다. 입가가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게 느껴진다.
여튼 입술이 한 가득 튀어나온 루키니를 위해 나는 무릎을 굽히고 등을 보였다. 그리고 불렀다.
"루키니."
"……왜?"
"목마 태워줄게."
"……응!"
목 소리 톤이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건강함이 엿보이는 구릿빛 피부의 가느다란 다리가 보임과 동시에 목에 가벼운 충격이 느껴졌다. 루키니가 잘 앉은 걸 확인한 후, 떨어지지 않도록 루키니의 허벅지를 잡고 천천히 일어섰다.
"간다."
"이예이~!"
걷기 시작하자 눈앞에 루키니의 다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게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즐거운 듯 했다.
그것이 기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가슴아팠다.
이 세계는, 이렇게 목마를 타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지는 아이들이 총을 들고 죽음과 마주하며 싸워야 한다. 그것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가장 중요한 생존의 문제 때문에. 설령 그것이, 위치가 되어 네우로이와 싸우는 게 자신의 선택이었다고해도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이 아이들이 고르고 싶어서 고른 선택이었을까?
살 아왔던 집과 매일 걷던 거리가 불타 잿더미로 화하고,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소중한 이들까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고,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이별하고 무덤 앞에서 오열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에게, 슬픔과 분노 밖에 남지 않은 아이들에게, 이 길은 정말 고르고 싶었던 길이었을까?
네우로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위치라 불리는 소녀들은 무기를 들고 하늘을 나는 일을 선택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시야 위쪽으로 루키니의 얼굴이 거꾸로 나타났다.
"응? 세라?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냐."
"……나 무거워?"
"아니."
"우웅……, 힘들어보여, 세라."
생각하던 게 얼굴에 드러났나보다. 쓰잘데기없는 걱정거리를 어린아이에게까지 전할 필요는 없지. 그런 생각에 나는 곧바로 어깨를 좌우로 흔들었다.
"냐아아앗?! 우오옷?! 오오오오!!"
비명이 환호성으로 바뀌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3초였다.
거꾸로 걷기를 하자 환호성은 더욱더 커졌다.
"오오오오오!!! 셜리! 셜리!! 봐봐! 봐봐!"
"아하하하! 그래그래, 보고 있어."
루키니를 향해 그렇게 말한 셜리는 나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수고한다는 의미 같았다.
나 역시 웃었다. 내 목마를 타고 있는 루키니를 위해. 이 세상에서 네우로이와 싸우는 소녀들을 위해.
*****
점심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격납고에 온 미나는 상당히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정비복을 입은 아저씨와 청년들─정비병들이 세라의 무기인 88mm 앞에 모여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네우로이를 쳐부숴라……."
"조국 탈환……!"
"카를스란트…… 카를스란트…… 카를스란트……."
"세계 제일…… 세계 제이이이이이이이일……!"
그 마음은 충분히 알 만 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초대형 네우로이조차도 일격에 소멸시켜 조국을 빛낸 자랑스러운 무기니까. 위치가 쓰기에는 너무 무거워서 비상시에만 쓰이던 게 제식장비로 채용되었으니까. 온갖 기대를 걸 만도 했다.
하지만 88mm는 지원화력일 뿐이다. 애초에 저걸 들 수 있는 위치부터 극소수이며, 한 발이라도 사격을 할 수 있는 위치는 그 중에서도 또 극소수이다.
세라가 탄약창을 짊어지고 반영구적으로 사격을 가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지원사격의 범위 내에서이며 네우로이와 1:1 상황이 된다 싶으면 그녀는 전력을 다해 전투공역으로부터 탈출해야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미나의 귓가에 챙그랑, 하고 맑은 쇳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세라가 약간 당혹스러워하는 얼굴로 서 있었다. 쇳소리는 그녀의 발치에 떨어진 스패너를 차면서 생긴 듯 했다.
그러나 세라가 그런 표정을 지은 이유는 단지 스패너를 찼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소리에 세라를 발견하고 척척척 하고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듯 걸어와 그녀를 에워싼 정비병들 때문이었다.
"부탁한다, 리베리안!"
"카를스란트를! 조국을!"
"조국 기술의 결정체로 네우로이를 쳐부숴다오!"
"리베리안인 네게 이런 말 하기는 뭐하는 거 잘 안다!"
"그래도! 카를스란트 탈환을!"
미나 역시 같은 카를스란트인으로서 그들의 기분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이성적일 것을 요구받은 부대 최고 지휘관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 난장판 속에서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그녀는 세라가 작은 한숨을 내쉬는 걸 볼 수 있었고, 그것이 지금 당장 이 난해한 상황을 정리하지 못할 경우, 심각한 유혈사태가 발생한다는 걸 암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미나는 짝, 하고 박수를 한 번 쳤다. 결코 크지도 그렇다고 너무 작지도 않은 박수소리에 세라와 정비병들이 모두 미나를 바라보았다.
"자, 모두들 거기까지. 마음은 잘 알고 있으니 이제 각자 위치로 돌아가세요."
"하지만 중령님……!"
"전원 위치로. 못 들으셨습니까?"
이럴 때는 확실하게 군기를 잡아야한다. 다년 간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진리였다.
엄격한 미나의 얼굴에 그제서야 기묘한 열기를 흩어낸 정비병들은 자신들의 작업장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미나는 그런 정비병들의 뒷모습을 보는 세라의 어깨가 조금 풀린 것을 알아차리고는 다시 평소와 같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괜찮나요, 하사? 많이 놀랐죠?"
"아, 예. 아니, 아닙니다."
횡설수설하는 것을 보니 놀랐던 것 같았다.
하지만 세라는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은 얼굴로 말했다.
"다들 88mm에 기대가 큰가 보네요."
"……예에. 많지요."
미나는 얼굴 위로 그녀의 형용하기 힘든 복잡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내며 한탄하듯 말했다.
그러나 곧바로 회복한 미나는 세라를 향해 말했다.
"그럼 스트라이커 유닛 착용 후 88mm를 들고 활주로 옆으로 나오세요. 포격 연습 및 탄도 기록은 그곳에서 실시합니다."
"예스, 맴."
간결한 대답과 함께 세라는 자신의 스트라이커 유닛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우선 지대지 포격 연습부터 하기로 했다. 대공포로 뭐하는 짓인가 싶지만 만능포니까 괜찮겠지. 게다가 위에서 하라고 하는 거고. 사고만 안 나면 된다.
일 반 스트라이커 유닛보다 1.5배는 더 큰 C-47B를 기동시키고, 스카우터 비슷하게 생긴 조준장비를 착용하였다. 그리고 고유마법─등가교환을 사용하여 88mm를 들어올렸다. 으윽, 역시 무겁다. 위치용으로 개조했는데 왜 더 무거운 걸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여튼 격납고를 나와 활주로 옆에 서자 조준경이 끼리릭하는 기계음을 내며 움직여 목표지점을 알려주었다. 포를 살짝 움직이자 목표지점과의 오차거리까지 떠올랐다. 이 무슨 하이테크. 지금 이 동네 기술로 이런 걸 만들 수 있었나? 뭐, 마법이 있는 세계니까 이런 것도 가능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인컴을 착용한 귓가에 무전이 들려왔다.
[탄도 기록 준비 완료. 우선 목표는 제1과녁이다. 그럼 쏴 봐, 하사.]
사 카모토 소령님이었다. 말을 주고받기에는 멀지만 얼굴은 보이는 거리에서 측량기를 앞에 두고 무전을 보낸 것이다. 루키니와 셜리, 그리고 미나 중령님도 그곳에 있었다. 그 옆에는 바르크호른 대위님이 필기구를 들고 있었다. 탄도 기록은 대위님이 하시나보다.
……것보다 대위님? 두근두근하시는 게 뻔히 보이지 말입니다. 그러고보니 저 아가씨도 아까 격납고에서 정비병들과 함께 88mm에 기도하고 있었더랬지. 그렇게 기대하셔도 곤란하지 말입니다.
복잡한 심정에 한숨인지 심호흡인지 모를 숨을 내쉬며, 88mm의 포신을 목표지점으로 향했다.
"힘내라, 세라!"
루키니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약간 마음이 풀리는 걸 느꼈다. 자, 정신차리고…….
포신을 옆구리에 더욱 밀착시킨다. 조준경이 알려주는 목표지점을 확인하고 오차거리를 줄여나간다. 그리고 자세고정.
이제 포탄에 마력을 싣는다. 일반 총기라면 탄창 하나를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마력이 들어가고나서야 간신히 포탄 하나에 마력을 충전시킬 수 있다. 정말 몇 발 쏘고 나면 비행할 마력이 다 사라지겠다. 여튼 준비 완료.
"제1탄. 쏩니다."
그렇게 말한 후,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쿠구우우우우우웅!!!
그리고 굴렀다.
쿠당당탕! 끼이이이익──!!!
시야가 바뀌었다는 걸 인식했을 때는 이미 5m 가까이 떨어진 곳에 엎어져있었다.
[하사?! 괜찮은가?!]
"세라!"
"어이, 괜찮은 건가?!"
"정신 차려!"
"위생병 불러야 하나?!"
허,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포격에 신경쓰느라 반동 제어를 잊고 있었어. 이거 기관총 반동은 진짜 애들 장난이잖아? 상시 전개중인 보호마법이 없었다면 허리 부분만 우드득 하고 돌아가거나, 아니면 방금 전에 구를 때 어디 한 군데─혹은 여러 군데─ 찍혀서 장기자랑을 하고 있었을거야.
"괜찮습니다. 으윽, 괜찮아요."
강가에서 물놀이하다 돌멩이들에 부딪친 것처럼 몸 여기저기 삭신이 쑤셔왔다. 우우윽, 쑤신다아…….
그래도 어찌어찌 정신을 차리고 스트라이커 유닛을 제어하여 일어서서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혼란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계속할 수 있겠나?]
"해보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건 실수였으니까요. 자폭이죠. ……이게 대체 뭔 뻘짓인지…….
여튼 사카모토 소령님은 미나 중령님과 잠시 대화를 나누는 듯 하더니 허가를 내려주셨다.
자, 다시 한 번 과정을 반복한다. 목표를 잡고, 포탄에 마력을 채워넣고, 마지막으로 잊어버리고 있던 반동 제어를 준비하고…… 발사.
쿠구우우우우우웅!!!
굉음과 함께 포탄 발사로 나온 모든 에너지를 등가교환의 힘으로 모조리 마력으로 바꿔 다음 포탄에 밀어넣었다.
그때문인지 포격음은 생각보다 작았다. 그래도 일반총기보다는 큰……, 갑자기 속이 안 좋은데……. 머리도 멍한…….
[……탄착 확인. 명중이다. 이번이 포격실험 처음인 것 맞나?]
"……."
[하사?]
"……네, 네?"
[무슨 일이지? 무전 상태가 좋지 않은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간신히 상태가 괜찮아졌다. 뭐였던 거지? 큰 병의 징조 같은 건 아니면 좋겠는데…….
[흐음. 그럼 계속하겠다. 이번엔 제2과녁이다. 제2탄 준비.]
"라져."
대 답과 동시에 조준장치가 두 번째 과녁을 가리켰다. 어라, 난 조작한 적이 생각한 적이 없는데? 지휘관이 지정하는 건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셜리에게 물어보자. 아니, 이거 카를스란트제니까 중령님께 여쭤봐야하는 건가? 그런 생각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쿠구우우우우우웅!!!
[……탄착 확인. 포탄 위력 범위 안에는 들어갔지만 약간 위로 빗나갔다. 다음, 제3과녁. 발사 준비. ……하사?]
"네. 말씀하십시오."
[안색이 안 좋군. 괜찮나?]
"괜찮습니다."
말한 직후,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시야가 암전했다. 몸이 허해졌나. 물 건너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건가.
[……몸이 안 좋다면 말하도록.]
"네."
[그럼 제3과녁 조준. 발사 준비.]
그렇게 세 번째, 네 번째 포탄이 각각의 과녁들에 명중했다.
다행스럽게도 몸 상태가 안 좋아지는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신무기에 적응하느라 그랬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어어……."
눈앞이 샛노랗게 물든다고 생각한 순간, 바닥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 충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픔이 없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방금 전까지는 멀쩡했었는데? 자각몽? 데이드림?
저쪽에 있던 다른 부대원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가장 먼저 도착한 건 셜리였다. 급박한 표정이었지만 당황해서 허둥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세라, 괜찮아? 내가 보여?"
"보여……."
"제일 아픈데가 어디야?"
아픈 것보다…….
"……것 같아."
"응? 다시 말해줘. 뭐라고?"
"토할…… 것 같, 웁……."
셜리는 곧바로 나를 스트라이커 유닛에서 빼내어 활주로 옆 모서리 부분으로 옮겼다.
10m도 안되는 거리였다지만 사람 하나 든 상태로 3초만에 도착하다니. 경의를 표할만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머리는 멍한데다가 눈앞은 샛노랗고 속은 뒤집어지기 직전.
그리고 추락 방지 구조물 너머로 넘실거리른 파도가 보인 순간,
"우웨에에엑──"
식도를 역류하는 시큼하고 따가운 무언가가 느껴진다. 거의 다 소화된 점심식사가 햇살에 반짝이는 해수면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 불쾌한 장면에 자극받은 위가 다시 한 번 경련. 방금 전 상황이 되풀이 된다. 여기가 어느 정도 높이가 있는 게 다행이다. 튀어서 곤란한 데 묻는 일은 없으니까.
"케헥, 쿨럭, 콜록, 콜록! ……하아아아……. 후으으으……."
뒷 처리 문제야 어찌되었든 내장까지 토해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격하게 위 속의 모든 것을 게워냈다. 그런데도 여전히 속이 안좋…… 잠깐, 그만, 이제는 더 토할 것도 없, "웨에에엑─ 흐으웩, 케헉, 우웨엑……." ……죽는다. 나 죽어…….
"세라?! 괜찮아?! 세라?!"
루키니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 등을 두드려주는 게 느껴진다.
아, 토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토할 때 등을 두드리면 더 심하게 토하는, "웨에에엑……."
……살려줘어어어…….
*****
수능이 끝났더니 로동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쇄소 알바로 아침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야근이 붙으면 저녁9시까지입니다.
내게 야근을 주었던 하이모, 웅진식품, 현대종합상조, 씨스택, 잊지 않겠다…….
13화는 이번 주 내로 올라옵니다.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p.s 문명5 샀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못해봤습니다. 저주도 아니고 뭐야 대체…….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13
세라를 진찰한 군의관 앨리스 그릴스Alice Grylls 브리타니아 출신으로, 바이킹의 후예인 앵글로 색슨계라는 것과, 마녀─위치는 모두 미녀라는 것을 증명하듯 찬란히 빛나는 금발과 보석 같은 파란 눈동자가 아름다운 소녀였다.
하지만 그녀의 품행은 결코 용맹하면서도 자유로웠던 선조들의 그것과 같지 않았다.
"저 하사가 뭘 했는지 알게 되면 군사재판에 회부됩니까?"
소녀라기엔 너무 딱딱하고 사무적인 말투에 부드러우면서도 절도 있는 어조였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전형적인 영국 군인같았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유머스럽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이 소녀가 브리타니아 특유의 블랙 유머에 능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방금 전에 마력을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하듯, 사역마로 추정되는 골든 리트리버의 귀와 꼬리를 살랑거리며 앨리스가 던진 물음에 사카모토가 되물었다.
"무슨 말이지?"
"그러니까, 저는 지금까지 꽤 많은 환자들을 봐왔습니다만, 어떻게 하면 저런 부상을 입게 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부상에 환자가 군인이라는 요소를 합치면, 아는 것만으로도 군사재판에 회부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흐음, 군사재판에 회부될 정도로 큰 기밀은 아닌데……."
"그렇다면 왜 저렇게 됐는지 알려주십시오. 치료에 필요합니다."
"그냥 치료할 수는 없나?"
"가능하지만 최소 2주 동안은 비전투원으로 처리하고 후방 병원으로 이송시켜야 합니다."
앨리스의 대답에 사카모토는 미나를 바라보았다. 끄덕. 미나의 고개가 아래위로 한 번 끄덕였다.
사카모토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군의관을 향해 말했다.
"하사의 고유마법인 등가교환을 이용한 마녀용 88mm 부대지원화기 활용 실험을 했다."
"……어, 그러니까, 위치가 전차포를 쏘는 실험이요?"
"그래."
"……저기 보드카에 환장한 북동애들 수뇌가 맨날 포병은 전장의 신이니 뭐니 한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연합군까지 포에 집착하고 있는 줄은 몰랐군요."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얼굴과, 참으로 정중하고 절제되었으면서도 신랄한 말투가 어우러졌다. 아무래도 앨리스는 블랙 유머 외에 직접적인 비아냥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군의관의 말에 미나와 사카모토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 그리고 등가교환이라는 게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포를 쏠 때 나오는 반동과 기타 에너지를 마력으로 바꾼다는 말이다."
"흐음……. 그래서 그런 상태였군요."
"어떤 상태인지 설명할 수 있겠나?"
"Yes, Ma'am."
사카모토의 말에 앨리스는 품에서 작은 풍선을 하나 꺼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작은 풍선이었다.
그녀는 그걸 입가에 대고 불었다.
"후욱─."
인간 폐활량의 한계를 보여주겠다는 듯, 손가락만했던 풍선은 앨리스의 몸통만하게 부풀어올랐다. 거의 터지기 직전까지 부풀어오른 풍선은 입을 떼자마자 곧바로 다시 줄어들었다.
그걸 다섯 번 정도 반복하고나니, 풍선은 처음과 비교했을 때 두배 가까이 커져 있었고 후줄근해보였다. 늘어난 탓이었다.
앨리스는 그 풍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원주민 아가씨 상태가 대충 이렇습니다."
군의관의 말에 미나가 중얼거렸다.
"반동과 기타 에너지를 마력으로 바꾸는 건 괜찮지만, 그렇게 생성된 방대한 마력이 갑자기 주입되었다가 소모되는 건 상당한 부담이라는 거네……."
"산 넘어 산에, 이번에는 바다가 나온 격이로군."
사카모토의 말에 미나는 한숨과 함께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군의관이 말했다.
"하사는 내일 점심시간 이후에는 정상 근무로 돌릴 수 있을 겁니다."
"내일? 최소 2주는 쉬어야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자연회복에 맡겼을 때의 회복기간입니다. 이제 원인을 알아 정확히 치료할 수 있으므로 내일까지 낫게 할 수 있습니다."
회복에 도움을 주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들을 많이 알고 있으니까요. 앨리스는 그렇게 덧붙였다.
"단백질?"
"입버릇입니다. 전 단백질이지만 다른 애들은 비타민이라고도 하고, 탄수화물이라고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그렇군."
"그럼 전 통상 업무로 복귀하겠습니다."
"음. 수고했다."
앨리스가 돌아가자 사카모토는 미나를 향해 말했다.
"결국 세라는 원래 계획대로 보급 전담 임무에만 투입해야겠군."
"그래야겠네. 하아, 정비반 인원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하나 더 있다, 미나."
"응? 뭔데?"
사카모토는 계단 모퉁이를 돌아 나타난 바르크호른을 슬쩍 가리켰다.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눈동자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바르크호른의 모습에 미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액땜한다고 해야할지, 그냥 액이 낀 거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아니, 따질 필요는 없구나.
어느 쪽이든지간에 액운이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아하하.
……위대한 영이시여, 가엾은 당신의 아이를 돌보소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걸 보니 의외로 몸은 멀쩡─뚜두두두두둑─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으으, 쑤신다 쑤셔……. 속도 안 좋고, 시야도 약간 노랗다.
그나마 덜 쑤시는 고개만 이리저리 돌려보니, 아무래도 내가 있는 곳은 의무실인 것 같았다.
퇴원한지 사흘도 안됬는데 또 의무실이냐. 이젠 건강미를 자랑하는 이로쿼이 소녀라고 못하겠네.
"앗, 세라! 괜찮아? 셜리, 세라 눈 떴어! 셜리~! 셜리~!"
루키니 목소리다. 내가 눈을 뜨자마자 셜리를 부르러 간 듯 싶다. 그 목소리가 기쁘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이 아니리라.
만난지 불과 사흘도 채 안된 사람을 이렇게까지 걱정해주다니. 착한 아이구나 루키니는.
"세~라~아~!"
반쯤 뛰어들 듯 내 품에 안겨오는 루키니.
닦아내듯 루키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직 될 회복됐는지 팔이 무겁다.
그래도 루키니에게 내색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아이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루키니는 아직 불안한 듯한 얼굴로 얌전히 내 손을 맞잡았다.
"괜찮아?"
"응, 괜찮아……. ……아."
"왜?"
"루키니한테……, 옮기면 안되는데……."
"감기가 아니잖아."
"……그렇구나……."
머리가 띵 하니 생각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여어, 상태는 좀 어때?"
밝고 장난기가 담겨 있는 것 같으면서도 진중한 목소리. 셜리다.
루키니 머리 위로 시선을 향하자 리베리온 군복을 입은 스피드 퀸의 모습이 보였다.
"그럭저럭……, 괜찮아……."
"맥이 다 빠졌으면서 괜찮기는."
"아하하……."
정확하게 짚어내는구나, 셜리.
"우우, 세라……."
나의 힘없는 웃음소리에 루키니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프지는 않다. 단지 걱정하게 한 게 미안할 뿐이다.
"그런 무식한 걸 쏴대고서는 멀쩡한 게 더 신기하지."
셜리는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직접 써 본 사람으로서, 응, 동감이야. 그건 아무리봐도 위치 혼자서 쓸 수 있는 무기가 아니야.
……그렇지만.
"잘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은데……."
"응?"
"회피비행을……, 포기하고……, 보호마법을……, 강화하면……."
호버링 상태에서 포에 집중하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몸 상태가 이런 건 아마 고유마법을 너무 많이 써서, 혹은 포탄에 마력을 너무 많이 투자해서, 등의 이유일 것이다.
정확하게 뭐가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옛날에 열차를 들어옮기고 나서 이랬었으니까, 마력계열의 문제인 게 확실하겠지.
그리고 그런 게 문제라면, 보호마법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처방이 된다.
다만, 말했던 것처럼 회피비행을 포기하게 되겠지만.
내 말에 셜리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네가 고생할 필요는 없어. 88mm 지원사격이야 있으면 정말로 좋겠지만, 없다고해서 전투에 심각한 지장이 생기는 건 아니야."
보급창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셜리는 그렇게 덧붙였다. 루키니 역시 셜리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 그거면 된다. 원래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었으니까. 화력지원은 가능하면 해보자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정말 그걸로 끝일까?
마음 속 한 구석에 무언가가 남는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
"왜?"
"그래도……, 될까……?"
"돼. 괜찮아."
셜리의 말이 마음 속에 스며들며 마음 속 한구석에 있던 무언가를 천천히 녹여간다.
맞잡은 루키니의 손에서 전해져오는 온기가 천천히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반쯤 뜨고 있던 눈도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고, 의식도 검게 물들어간다.
천천히. 천천히…….
*****
"……아."
"왜?"
서서히 눈을 감던 세라가 갑자기 입을 열자, 샬롯이 물었다.
동시에 세라의 시선이 초점이 안 맞는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녀가 비몽사몽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미안하네……."
"뭐가 미안해?"
"그 사람들……. 정비사들……. 카를스란트……, 사람들……."
"그러니까 괜찮다니까. 지금은 네 몸이나 살펴. 알겠어?"
"……응……."
그걸 끝으로 세라는 확실하게 잠이 들었다.
샬롯은 루키니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가자. 세라 푹 자게."
"히잉……."
"의사 선생님이 내일이면 괜찮아진다고 그랬어. 그러니까 우리는 쉬게 나가줘야지."
"……알았어."
마지못해 맞잡은 손을 푼 루키니는 시무룩한 얼굴로 샬롯보다 먼저 의무실을 나섰다.
찰칵-덜컹하고 루키니가 나가는 소리가 들린 후, 샬롯은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침대 커튼 너머를 향해 말했다.
"세라의 직속상관으로서 말하지. 난 88mm 운용에 반대해. 게르투르드 바르크호른 대위."
그말에 천천히 커튼이 젖혀지며 한 소녀가 나타났다. 양갈래로 묶은 갈색 머리카락과 카를스란트 공군복. 바르크호른이었다.
"……거부권 발동인가, 샬롯 E. 예거 중위."
"그래."
분명 한 계급 아래였지만, 샬롯은 대등한 자세로 말했다.
연합군의 깃발 아래 모여있어도 실질적인 전투 지휘를 제외한 나머지 사항에 대해서는 각 국가별로 처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합당한 명령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거부권을 발동시킬 수 있었고, 그렇기에 샬롯은 망설임없이 거부권을 발동시켰다.
거기에는 이 이상 세라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리베리온이 이로쿼이로부터 '모셔온' 위치에게 문제가 생길 경우 발생할 양국 간의 충돌을 피한다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런 샬롯의 심정과 양국 간의 정치적 배경을 이해했는지 바르크호른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88mm 운용은 포기했다. 샬롯 E. 예거 중위."
"기대하고 있었던 것 치고는 포기가 빠른데? 중령한테 이미 뭐라 들은 건가?"
"……그래. 화력지원건은 백지로 하고 당초 계획대로 보급지원임무만 맡기기로 했다."
그렇게 말하는 바르크호른의 모습은 마치 비에 젖은 강아지마냥 완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런 모습에 샬롯은 고개를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바르크호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뭐, 기운내라고. 언제든 용감하게 싸우는 게 카를스란트 군인이잖아?"
"……훗. 그렇군. 카를스란트 군인인 자, 좌절하고 멈춰있을 수는 없지."
"그래, 그렇게 쿨하게 나와야 우리 군기대장님답지."
샬롯의 말에 바르크호른은 잠시 멈칫하더니, 씨익 웃으며 말했다.
"호오, 아무래도 요즘 훈련이 너무 쉬웠었나? 내일은 좀 더 가열차게 해봐야겠군."
"으겍, 그렇게 나오기냐……."
거부권을 발동시킬 수 없는 '합당한 이유'에 샬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렇게 주객이 전도된 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투닥거리며 조용히 의무실을 나섰다.
*****
88mm를 쏘고 기절했다가 잠깐 눈 떴다가, 다시 뻗었다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그리고 나온 아침식사는 상당히, 어,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
"엄선된 환자용 식단입니다. 남기지 말고 다 먹으세요."
식판도 아니고, 1000cc 정도 되는 것 같은 커다란 컵에, 어,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자. 도대체 눈앞에 있는 것들의 원재료가 뭔지 도저히 짐작도 못하겠다.
덜풀린 미숫가루에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을 넣으면 이렇지 않을까 싶은 음식이었다. 아니, 이거 음식의 범주에 들어가기는 하는 건가? 아무리 가리는 음식 없는 나라고 해도 이런 건 영 손이 가질 않는다.
그러나 그런 나의 심정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눈앞의 금발벽안 간호사는 아침식사를 강요하고 있었다.
일단 물어나 보자.
"……재료가 뭡니까?"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들입니다."
순간적으로 어떤 남자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이 군의관 아가씨의 성, 묘하게 익숙한데…….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잘 알겠지만, 그걸 안 먹으면 2주일 정도 후방병원에 뻗어있어야 합니다."
"먹겠습니다."
후방병원으로 가면 그 용맹한 간호장교 언니가 있잖아. 나온 지 일주일도 안되서 다시 실려가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진퇴양난. 사면초가. 그렇다면 임전무퇴, 저돌맹진.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했다.
겨우 환자식 하나 먹는데 참으로 요란하다 싶겠지만, 누구라도 이걸 보면 그렇게 될껄?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그것'을 입에 댔다.
그리고 다 마셨다고 생각한 순간, 누군가가 내 팔을 흔들었다.
"……라. 세라! 일어나!"
그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내가 언제 눈을 감았지?
여하튼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루키니가 있었다. ……잠깐, 나 언제 다시 침대에 누웠지?
"우웅……. 앨리스가 세라 이제 깨워도 된다고 했는데……."
"일어났어, 루키니."
대답하는 나의 목소리는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활기찼다.
"오, 오오! 다행이다! 이예이!"
나는 그렇게 기쁨의 미소와 함께 팔짝팔짝 뛰는 루키니를 향해 물었다.
"아침은 먹었어?"
"아침? 아~까 전에 먹었지롱! 점심도 먹었어~!"
점심? 그말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분명 방금 전까지 의무실 중간까지 파고들었던 햇살이 창문 언저리까지 후퇴해있었다. 루키니 말대로 점심시간 이후인 듯 했다.
담요를 걷어내고, 신발을 신으며 생각해봤다. 타임슬립이냐. 뭐가 원인이지? 이래저래 의심가는 게 몇 가지 떠오르지만, 가장 의심스러운 건 의무관이다. 특히 그 환자식.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그게 제일 의심스럽다. 정말 뭐로 만든 걸까.
……뭐, 건강해졌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굉장히 효율적이라는 건 알았으니까 기회가 되면 어떻게 만드는지 물어보기로 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난 루키니와 함께 의무실을 나섰다.
일단 셜리에게 가서 복귀보고를 해야할텐데, 우리 꼬마 소위님이 내손을 붙잡아 이끌고 있어서 따라가고 있는 실정이다.
"어디로 가는 거야?"
"셜리한테!"
그렇게 말하며 앞서가던 루키니는 다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있잖아, 있잖아. 이제 그거 안 써도 된다?"
"뭘?"
"그거 말야. 커~다란 대포."
"88mm?"
"응! 으갹?!"
"엇차! 조심해."
뒤를 보고 걷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한 루키니를 잡아당겨 일으켜세웠다. 손잡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휴. 위험했다……."
"그러니까 뒤로 걸으면 안돼."
"알았어."
루키니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앞서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에 맞춰 살랑거리는 양갈래로 묶인 머리카락을 보며 물었다.
"안 써도 된다는 게 무슨 말이야?"
"셜리가 그랬어. 이제 세라가 그거 안 써도 된다고. 아, 소령이랑 미나 중령도."
그말에 난 셜리가 거부권을 발동시켰다는 걸 깨달았다.
것보다 루키니. 윗사람인데 막 부르는구나. 뭐, 나도 그렇지만. 애초에 연합군인데다가 부대 분위기도 뭔가 느슨하니까.
그런데…….
"루키니."
"왜?"
"행정실은 저쪽 아니야?"
"맞아."
"그런데 왜 격납고 쪽으로 가는 거야?"
"셜리 지금 마도엔진 손보고 있거든."
평소에도 일없으면 언제나 거기 있어. 루키니는 그렇게 덧붙였다.
세계최고속기록 보유자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는 거로군. 열정이란 그런 거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 새 격납고에 도착해있었다.
"야호! 셜리! 세라 데려왔어!"
루키니의 외침에 셜리의 스트라이커 유닛 고정대 아래 쪽에서 셜리가 불쑥 나타났다.
"어, 왔네? 읏차!"
기합소리와 함께 셜리가 주루룩 미끄러져 나왔다.
정비소에 가면 있을 것 같은 바퀴 달린 판자로 고정대 밑에 들어가 있었나보다.
그런데 스트라이커 유닛만 보는 거라면 그 안에 안들어가도 되지 않던가?
"아아, 스트라이커 유닛 조정하다 걸리적거리길래, 고정대도 좀 손보는 중이었어."
이제 그러다 격납고 설비도 손대고, 기지 설계 같은 것도 손대게 되지 않을까.
"그런 거야, 셜리?"
"아니, 아무리 나라도 거기까지는 안해."
셜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나와 루키니의 의문을 부정했다.
여튼 복귀보고를 하고난 후, 나는 이 격납고에 들어오면서부터 궁금했던 점을 질문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저기서 뭐하는 거야?"
내가 가리킨 건 88mm앞에서 우중충한 얼굴로 초상집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정비병들이었다.
셜리는 그쪽을 한 번 보고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라 네가 저걸 못 쓸 것 같다는 소리를 들어서 저래."
"……."
"참고로 말하자면 바르크호른도 저기 있다."
셜리의 말에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로 카를스란트 군기반장님이 있었다.
……무진장 우울해보인다. 포 하나 못 쓰게 되었다고 너무 우울해져 있잖아, 이 사람들.
없어도 되는 거 그냥 포기하면 될 것을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어차피 맨몸으로 왔다 맨몸으로 가는 인생인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 역시 아쉽다면 아쉽다.
총과는 달리 포는 쏠 때마다 통쾌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 반동이 부작용으로 오는 건 싫지만.
……어째 마약중독자가 마약에 대해 설명하는 것 같은 느낌이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내가 온 것을 눈치챈 정비병들이 얼굴을 맞대고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해볼까?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등등, 뭔가 의논을 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우리 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난 번처럼 우르르 몰려오는 건 아니었지만, 십 수 명의 남정네들이 긴장한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이 상당히 압박감이 느껴진다.
정비병들+α는 네댓 걸음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고, 그 중심에는 바르크호른 대위님이 있었다. 무진장 비장한 얼굴이다.
먼저 입을 연 건 바르크호른 대위님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저걸 다시 쏴 볼 생각이 없나?"
카를스란트 사람들이 지극히 직설적인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 직설적이잖아.
여튼, 저건 미나 대장님이 쓰지 말라고 했던 거 아니었던가?
"거부권은 이미 접수됐을텐데? 저걸 쏘고 또 쓰러지라는 말이야?"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셜리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대위님은 말을 고르는 듯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하사가 쓰러진 건, 포탄에 마력을 주입하고, 포격의 반동을 몸으로 받았기 때문이었어. 그러니까, 포탄에 마력을 실을 생각은 하지 말고, 그냥 쏘는 것만이라면, 그렇게 무리가 가지 않을 테니까, 한 번 만 쏴 봐달라는 거다."
"……."
"안되겠나?"
그러니까 순수한 포격만 하면 괜찮을 거라는 얘기로군.
내가 쓰러졌을 때의 증상이 예전에 마력 관련 문제로 쓰러졌을 때와 비슷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회복하자마자 다시 실험해보자니 영 껄끄러운데…….
그렇다고 할 수 없다고 단언하자니…….
"……." "……." "……." "……." "……."
"……." "……." "……." "……." "……."
"……." "……." "……." "……." "……."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슬쩍 옆을 돌아보자 셜리가 살며시 좌우로 고개를 흔드는 게 보였다. 거절하라는 건가보다. 그게 말은 쉽지만서도…….
……에라 모르겠다.
"해보겠습니다."
내 대답에 셜리가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건 정비병들의 환호성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불안하긴 하지만, 포탄에 마력을 싣지도 않고, 등가교환을 써서 반동을 마력으로 바꾸는 것도 하지 않으니까 괜찮겠지.
……괜찮겠지?
*****
결과만 놓고보면 성공적이었다.
일반 유닛보다 1.5배 더 큰 C-47B를 장착한 세라가 위치용 88mm로 실행한 지대지 포격은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혹시 몰라 30분간 휴식을 취한 후, 이번에는 원래 목표인 공대지, 공대공 포격을 실시했다.
이것 역시 성공적이었고, 정비병들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문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회피기동은 불가능한가?"
[비행제어와 반동제어만으로도 힘듭니다. 실드를 펼치고 나면 끝입니다.]
"그렇담 이동은 가능한가?"
[이동 자체는 가능합니다. 허나 능동적인 회피는 무리입니다.]
"으음……. 수고했다. 착륙하도록."
[라져.]
인컴을 통해 전해져온 세라의 보고에 바르크호른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결국 위치가 88mm를 쓰는 건 불가능한가……."
"트루데─."
"포탄에 마력만 넣으면 되는데……."
"트루데─."
"등가교환을 약간만 적용시킬 수는 없는 건가……."
"트루,"
"아, 진짜! 뭐냐, 프라우!"
신경질을 내는 전우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리카는 느긋한 어투로 물었다.
"88mm 그거 말야, 굳이 마력 안 넣어도 괜찮은 거 아니었어?"
"……어?"
"그 왜, 예전에 신문에서 봤잖아? 아프리카에서 일반 병사들이 저걸로 네우로이 격파했던 거."
"스톰 위치즈가 참여했던 그 작전?"
"그래, 그거."
"흠……."
바르크호른은 팔짱을 끼고, 인상을 쓰며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였다.
잠시 고민한 후, 얼굴빛이 환해진 바르크호른이 고개를 들며 말한 순간,
"그렇다면 작전 참여도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거절한다." 뭐, 어째서냐, 프라우?!"
"나 아니야."
에리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바르크호른의 등 뒤를 가리켰다.
거기엔 샬롯이 조금 굳은 얼굴로 바르크호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냐, 리베리안."
"안전이 불확실한 무기를 쓰라는 거야?"
"마력을 쓰지 않으면 안전하다. 너도 봤잖아?"
"그 대신 날아다니는 표적이 되지."
"네우로이의 사정거리 밖에서 공격하면 되잖아."
"자리잡고 준비하는 동안 네우로이는 접근할텐데?"
"호위 병력을 붙이면 된다."
"……그 정도면 괜찮겠군."
샬롯의 말에 바르크호른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나타났다.
하지만 뒤이어진 말에 다시 굳은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난 분명히 거부권을 발동시켰고 미나 중령은 이를 받아들였어. 이건 어제 본국으로 전신을 보냈고."
"뭣……."
세라의 입장. 그리고 리베리온과 이로쿼이 양국 간의 문제를 생각해보면 이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이대로 88mm 화력 지원 계획 자체가 취소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결국 안돼는 건가. 그런 생각이 바르크호른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절로 한숨과 함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그 모습에 샬롯이 복잡한 심정이 담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랬더니 이런 답장이 오더군. '개선책을 찾아라.'라고."
"……그 말은……."
"개선책이 나와버렸잖아? 세라가 고생해야한다는 거지."
샬롯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르크호른은 정비병들에게로 달려갔다.
기쁨을 함께 하기 위함이리라.
"……세라도 힘들겠네."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에리카는, 스트라이커 유닛을 탈착하고 자신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세라를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1944년 쯤이면 근접신관이 실용화되어있다고 하는데, 이거 대체 구경이 얼만가요?
세라야 88mm든 105mm든 없으면 죽으니까 둘 다 근접신관이지만 구경이 뭐뭐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세라의 화력은 요시카가 올 때쯤이면 오를 때까지 오르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언제일지는 저도 모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20화가 되어도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
일단 요시카 신이나 이후 1기 장면들을 써두고 있기는 합니다.
애니에서는 그런 장면이 없었지만, 소설을 보면 전투 중에 잔탄 걱정을 하는 장면들이 종종 나옵니다. 마법 가방도 만능은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거죠. 즉, 세라가 보급병으로 온 게 그렇게 커다란 설정 오류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야, 다행이다.
……하지만 국가 설정을 갈아엎었지…….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E=mc^2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등가교환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판입니다.
좀 괜찮은 기술인 줄 알았는데 너무 좋은 기술입니다. 현실 물리학 그대로 적용시키면 세라는 네우로이 빔에 맞아도 마력이나 다른 걸로 바꿔서 무적이 될 판입니다. 이 무슨 먼치킨. […] 패널티를 더 붙여야할 것 같습니다.
한 1년 되니까 저도 막 헷갈립니다. 왜 세라가 포를 들게 됐더라……?
대학 오티서 여학생들이 저보고 '어, 교수님... 이 아니구나.' 하더군요.
내가 교수였으면 니들 다 F야! <-
능력만 된다면 일역해서 일본 쪽의 반응도 보고 싶습니다만, 아쉽게도 그럴 능력이 못되는군요.
제가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다른 분들의 위치스 팬픽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것보다 reines silber는?!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p.s 생각해보니까 이거 평균을 따지면 월간연재로군요.
p.s2 군의관의 성은 그릴스 [?]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14
현 오라샤의…… 뭐였더라…….
거기까지 생각한 에리카는 허리를 꺾어 방향을 바꿈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MG42가 특유의 소음을 내며 총탄을 쏟아냈고, 그녀를 향해 날아오던 소형 네우로이가 산산조각나며 빛으로 화했다.
그리고 잠시 생긴 여유를 틈타, 에리카는 자신의 약 500m 아래를 지나가고 있는 중형종이 서너 번의 거대한 폭음 후 빛으로 화하는 광경을 구경했다.
"트루데."
[전투중이다. 용건만 간단히.]
"포병은 신이었던가? 그 오라샤…… 스탈, 뭐시기가 그랬었지?"
거기까지 말하는 동안 멋도 모르고 88mm 화망에 뛰어든 소형종 둘이 빛을 흩뿌리며 허공에 흩어졌다.
['포병은 전장의 신이다.' 이오시프 비사리노비치 스탈린이 그랬지.]
"아, 그랬지. 그 이름 용케 외우고 있네?"
[상식이다. 그리고 전투중이다. 집중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바르크호른의 어투 역시 평소보다 덜 긴박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두 사람의 전투력이 떨어진 건 아니었다. 넓은 시야와 효율적인 움직임은 변함없었다.
에리카는 7시 방향으로 나선을 그리며 하강했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3번 끊어쏘기에 소형종이 박살났다.
MG42는 한 번에 긁어버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과열도 심하고 탄약 소모도 심하니 적당히 끊어주면서 쏘는 게 제일이다.
상식이 된 지식을 떠올리며 에리카는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소형종이 앞질러 지나갔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붉은 빔이 날아들었지만 가볍게 회피하며 사격을 가하자 소형종은 곧바로 격추되었다.
중형종은 없었다. 세라가 자리를 잡은 순간 중형 이상의 네우로이가 하늘을 나는 광경은 모두 과거의 장면들이 되었다.
쿠광! 하나 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에리카의 귀로 세라의 무전이 날아들었다.
[너무 가깝습니다, 하르트만 중위님!]
"엇차, 알았어─."
에리카는 대답과 함께 11시 방향으로 상승했다. 그러자 약간 잦아들었던 포탄의 폭풍이 다시 거세졌다.
마력을 채우지 않았어도 88mm 포탄은 그들의 장갑을 가차없이 파쇄하고, 강철처럼 단단한 동체 깊숙이 숨어있는 코어까지 뒤흔들었다.
파헤쳐진 장갑 사이로 드러난 코어에 포탄이 직격이라도 한다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었다.
대형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력이 담겨있지 않았기에 포탄의 위력인 상당히 감소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몇몇 녀석들이 포격을 무시하고 세라를 향해 빔을 쏘기도 했지만, 다른 부대원들의 엄호 사격이 시작되면 곧 멈춰졌다.
그리고 자신을 집어삼키려고 창공을 붉게 물들이던 섬광의 궤적이 가라앉음과 동시에, 세라는 망설임없이 포탄의 폭풍우를 쏟아부었다.
쾅! 쾅! 쾅! 쾅!
사실 포격은 2초~3초 간격으로 쏘아졌기 때문에 폭풍우처럼 몰아쳤다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상황에서의 이야기.
포격 지원을 받는 부대원들에게, 그리고 포격 지원에 전신을 두드려맞고 있는 네우로이에게 그것은 정진정명 폭풍우였다.
원래 이렇게 밀도 높은 포격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여러 대의 포가 필요하다. 방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등가교환이라는 고유마법을 가진 세라가 포신의 열을 마력으로 바꿔 방출하고 있었기에 혼자서 이런 고밀도 포격 지원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럼 지난 번처럼 마력문제로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겠지만, 변환된 마력은 모조리 실드에 주입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피뢰침을 세워둔 건물은 번개를 맞아도 괜찮은 것과 같은 이유이다.
그때문에 포격 도중에는 이동이 불가능해져서, 방금 전과 같이 다른 부대원들의 지원이 있을 때까지 버티고 있어야만 한다는 게 문제지만, 우수한 부대원들의 분투로 그것은 그리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광경에 501부대와 함께 싸우던 다른 부대의 마녀들도 한마디씩 늘어놓기 시작했다.
[헤에, 이번에 우리만 나가라고 하길래 다들 뒤지라고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말했지! 내가 말했지! 88mm 쓰는 항공보병 있다고! 이야─호!]
[저거 쓰는 애, 리베리안이라고 했던가? 읏챠아아아!]
[아니, 누아으아으왓! 헛! 원주민이라고 하던데?]
[진짜? 아니, 거기 애들은 뭘 먹고 살길래 저런 걸 저렇게 빵빵 쏴대는 거야?]
[야, 놀지 마! 제기랄! 내 뒤에 붙었어! 내 뒤에 붙었어! 내 뒤에 붙었어! 붙었다고오오오오오!??!!?]
[그대로 돌아 그대로 돌아 돌아 돌아 돌아! 돌라고 멍청아! 좋았어! 잡았다!]
[젠장, 뒤지는 줄 알았네. 살았다!]
[카를스란트 무기는 세계 제이이이이이이일!!!!!!]
[야, 지금 외친 거 어디 부대냐? 하여간 대륙 것들은 빠져가지고는.]
[지금 말한 건 어떤 년이야! 섬나라 꼬맹이들이냐?! 갈리아 얼간이들이냐?!]
[카를스란트 둔탱이가, 흐압! 누구보고 얼간이래?]
[오늘 나불거린 것들 다들 템즈 강 굴다리로 와라. 언니가 애정을 담아서 매우 후드려주마.]
[아하하하하! 우리 왕언니가 손수 만든 브리타니아 요리를 네년들 아가리에 쑤셔 넣어주지!]
[굴다리 갈 거 없다. 이번 거 막으면 이번 주 안에 위치들 회식한댄다. 거기서들 보자?]
[오오오! 회식! 고기다! 고기! 고기! 고기!]
[지금 고기고기 한 거 브리타니아냐? 애들 굶냐? 왜 저래?]
[카를스란트 애들은 감자나 먹여. 우리는 고기 먹자.]
[지금 어떤 X이 감자나 먹으랬냐. 감자 물리고 연병장 열 바퀴 돌리게 튀어나와!]
어느 새 교신은 각 국가별 위치들의 욕설과 비방이 뒤섞여 대혼란을 이루고 있었다. 그만큼 전투가 여유롭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허나 압도적으로 우월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각 부대 지휘관들은 부대원들을 추스르기 시작했고,
[야, 지금 포병질 하는 원주민. 그 각도에서 좌로 3 위로 1 꺾어서 거기 제압 좀 해라.]
[개수작 부리지 마! 우로 2 아래로 2다! 거길 노려! 거기 날아다니는 날파리 년들 모두 박살내버려! 아하트 아하트으으으!!!!!]
[지금부터 뻘교신 계속하는 것들은 템즈 강 굴다리 아래서 내가 직접 만든 브리타니아 요리 풀코스 먹일 거다? 그리고 봉급 깎아버린다? 알겠으면 닥치고 전투 집중해라? 안 그럼 한방에 훅간다?]
[라져.] [카피.] [예스, 맴]
근성이 느껴지는 상급자의 호통에 그제서야 소녀들의 요란했던 교신은 간신히 끝을 고했다.
"……여기에 와서 이렇게 여유가 느껴지는 전장을 보긴 처음이군."
임시로 총지휘관 역할을 하고 있던 사카모토는 그 교신을 그렇게 평했다.
어찌되었든 압도적인 포격 지원 아래서 전열을 재정비한 소녀들은 다시 한 번 남은 네우로이 소탕에 나섰다.
그렇게 총구의 화약냄새, 포탄의 굉음, 죽음의 섬광이 뒤섞인 격전의 1분이 지나가고,
카앙───!
쇳소리와 같은 맑고 높은 소음과 함께 마지막 대형종이 새하얗게 빛나며 산산히 부서져 내려갔다.
마안으로 격추를 확인한 편대장 사카모토 미오는 얼마 남지 않은 소형종을 쫓으며 인컴에 대고 외쳤다.
"대형종 격추 확인! 잔존 세력은 각개격파한다! 지원부대는 사정거리 밖으로 후퇴 후 대기!"
라져─.
통일된 소녀들의 대답이 인컴을 타고 흘러나왔고, 그로부터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아 네우로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마안을 통해 이 공역이 완전히 정리된 것을 확인한 사카모토는 지원부대에게 감사를 표하고 귀환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저 멀리, 커다란 강철상자와 88mm포를 짊어진 마녀─세라를 보며 생각했다.
이러면 걱정없겠군.
*****
격납고로 돌아오면 우선 스트라이커 유닛을 고정시킨다. 몸이 함부로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보급창 탈착. 무게가 무게인만큼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보급창을 떼고나면 88mm를 옆에 고정시켜둔다.
그제서야 기어나오듯 스트라이커 유닛을 벗고, 조준경을 옆에 걸어둔다.
마지막으로 마력을 갈무리하자 사역마인 소의 귀, 뿔, 꼬리가 사라지고 피로감이 밀려온다.
허리를 펴자 우두두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힘이 빠져 옆 난간에 기대고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곧바로 들려오기 시작한 왁자지껄한 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누군지는 예상이 갔다. 아니나 다를까, 카를스란트 정비병들이었다.
"오오, 수고했어!"
"오늘도 멋지게 활약했다며!"
"최고야, 이로쿼이 아가씨!"
"자, 그럼 푹 쉬어!"
"88mm는 우리가 책임지고 정비할 테니까!"
"예에……."
지난 번에 이로쿼이 사람이라고 말해서 그런지 나를 보고 리베리안이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정비병들은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88mm가 고정된 고정대를 밀어 옮기기 시작했다. 분명 저렇게 옮길 수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꽤 무거울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들이다. 아니, 싱글벙글 웃고 있기까지 하다. 세상 일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게 사실이구나.
어찌되었든, 피곤했다. 그 생각에 다시 난간에 기대고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후방에서 안전하게 포만 쏘면 될 거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지만, 역시 실전은 힘들었다.
그것도 정식 작전. 긴장해서 그런지 제대로 기억나는게 없다. 그나마 다들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큰 실수는 안했었겠지. ……확신이 안 서네.
이번 공습에서의 네우로이 규모는 대형종 셋, 중소형종 일곱, 소형종 스물.
전함 셋, 프리깃 일곱, 고속정 스물 정도로 비유하면 될까. 실제 전투력은 그 이상일테지만.
거기에 더해 전투가 중반에 접어들었을 즈음, 녀석들의 증원부대가 도착했다. 포격 지원 요청에 응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얼마나 더 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측에서도 증원이 필요했을 정도로 많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여튼 이에 대항하는 우리측 세력은 사카모토 소령님, 바르크호른 대위님, 하르트만 중위님, 클로스테르망 소위, 그리고 셜리와 루키니, 거기에 다른 부대 마녀들이었다. 모두 합쳐서 한 2~30명이었고, 나중에 열댓명 정도 지원이 왔던 것 같으니 총 참가인원은 마흔 정도일까.
보통 대형종 하나에 여섯 명 이상 달라붙어야 하는 걸 생각하면 사실 충분한 인원수는 아니었지만, 적절한 지휘와 개개인의 우월한 전투력 덕분에 무사히 네우로이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솔직히 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중간에 소형종들이 나만 노려서 중대형종 제압이 풀렸을 때는 정말 가슴이 철렁했다.
작전 자체는 단순했다. 우선 내가 위치를 잡고 부대원들이 공격 위치에서 대기한다.
그리고 선제포격으로 대형종과 중소형종을 제압하고, 부대원들이 소형종을 처리한다.
중간중간 사선을 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작전대로 잘 된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몸 성히 서서 중얼거리고 있는 거겠지.
부대 자랑살 생각은 없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활약이 컸던 건 우리 501부대였다.
아무래도 격추수가 세 자리를 넘어가는 인외종들과 그와 견줄 수 있는 실력자들이 모인 부대여서 그렇겠지.
그런 부대에 왜 내가 있는 걸까. 고향에 돌아가서 농사나 지으며 살고 싶다. 전쟁 싫어. 무서워.
"……후."
"세─라─♪─!"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폭, 하고 허리에 가벼운 충격이 왔다. 밝고 활기찬 목소리. 루키니다.
방금 전까지 치열한 전투가 있었음에도 루키니는 결코 지친 것 같지 않았다.
"목욕하러 가자! 목욕! 목욕!"
"셜리는?"
"먼저 갔어! 가자! 가자!"
"알았어, 알았어."
팔을 잡아끄는 루키니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몸도, 정신도 한계다. 목욕으로 좀 풀어내야지.
*****
"어땠어?"
"예상 이상으로 훌륭하더군."
미나의 물음에 사카모토는 그렇게 대답했다.
"사거리, 제압 능력, 위력. 무엇 하나 빠지지 않아. 보급에 화력 지원까지 완벽했어."
"평가가 후하네?"
"그만큼 능력이 있었으니까. 이번에 저 녀석이 없었다면 브리타니아 남부 지역에 좀 피해가 있었을 거다."
"우리 기지도 포함해서, 겠네."
"그러고보니 우리 기지가 녀석들의 침공 루트 사이에 있었군."
"덕분에 사냐까지 대기중이었어."
"지금은?"
"다시 잠들었어."
"오늘 초계비행은 힘들겠군. 나이트위치가 한 사람 더 있으면 좋으련만."
어찌되었든, 하고 사카모토는 다시 화제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보급 문제 해결, 화력 충당, 전력 공백 보충. 커다란 문제는 모두 다 처리했군."
오늘과 같은 대규모 공습에서도 충분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원래 목적인 H. S. NL에 해당하는 네우로이가 나타나더라도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으리라.
그런 생각에 사카모토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걱정없이 다녀올 수 있겠군."
"어딜, 아아, 본국에? 미야후지 박사님 건 때문에?"
"그것도 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본국에 가서 해야할 일들이 많아. 뭐, 결국 제일 중요한 일은 그거다만."
"언제 출발하는 거야?"
"공습이 끝났으니, 적어도 사흘 내에는 출발할 거야."
사카모토의 말에 미나는 달력을 넘겨보았다.
"5월이니까, 지금 출발하면, 7월 초에나 돌아올 수 있겠네."
"그동안 잘 부탁해."
"걱정말고 다녀와."
신뢰할 수 있는 상관이자 전우의 말에 사카모토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
"그러고보니 보급은 괜찮나?"
"음? ……아아."
무엇을 떠올린 걸까. 미나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아직까지는 괜찮아. 앞으로도 한동안은 괜찮을 것 같고."
"……한동안이라면 어느 정도?"
"……."
"미나."
"……두 달 정도일까."
"……."
형용할 수 없는 침묵이 감돌았다.
두 사람의 시선은 똑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미나의 책상 위. 지난 달과 대비하여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내용물이 줄고 있는 '식재료 창고' 관련 서류였다.
"……셜리를 불러서 리베리온 정부에 지원을 요구하는 게 좋겠군."
"……실적 증명 서류를 붙이면 되겠네."
양날의 검이란 이런 걸 말하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두 영관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
목욕탕에서 졸았다. 아니, 잤다.
수건으로 목과 머리를 괴고, 뜨거운 욕탕에 몸을 푹 담그고 있자니, 어느 새 완전히 잠들어있었다.
셜리가 깨워주지 않았다면 아마 저녁식사 때까지 계속 들어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몽사몽한 정신을 어찌어찌 추슬러 방으로 돌아와서, 다시 잤다.
너무 피곤했다. 마력을 쓰고 안쓰고 이전에, 인간이 들고 쏘라고 있는 게 아닌 88mm를 몇 시간 동안 들고 쏴댔으니 안 피곤하면 그게 더 이상할 테지만, 그런 걸 감안해도 장난이 아니었다. 으으, 아직도 팔이 후들거린다. 착륙 직후에는 몸이 떨리는 이유가 전투의 공포와 긴장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있었지만 포격 부작용(?)이 더 크다.
네우로이가 주 1회 간격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이런 걸 매일해야 한다면 정말 다 때려치고 돌아갔을거야.
것보다 아무렇지도 않았던 다른 아가씨들은 대체 뭘까. 역시 여긴 인외종 부대야…….
여튼 한숨 자고 일어나니 저녁시간이었다.
약간이나마 개운해진 몸─팔은 여전히 후들거렸다─을 이끌고 식당에 내려가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바르크호른 대위님이었다. 그 옆에는 하르트만 중위님도 있었다.
"수고했다, 하사."
무진장 해맑은 얼굴이다. 루키니처럼 환하게 웃는다는 건 아니고,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긴한데, 뭐랄까, 얼굴이 빛난다고 할까. 등뒤에서 오오라가 방출되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88mm 지원받는 게 그렇게도 기쁘셨습니까.
대위님은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먼저 식당으로 가버렸다. 산뜻한 발걸음이다.
그 뒤를 따라가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하르트만 중위님이 나를 불렀다.
이번에는 무슨 일인가 했더니, 내 손에 큼지막한 사탕 하나를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굉장히 연민에 가득찬 얼굴로, "힘내." 란다.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할지 감이 안잡힌다.
일단 식당에 가자.
그 생각에 식당에 갔더니, 이번에는 또다른 일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오, 왔구만-. 너 소포 왔다?"
"네?"
유틸라이넨 소위의 말에 식탁 위를 보니, 말 그대로 소포가 있었다. 위에는 편지도 있었다. 자세히 보니, 편지는 어머니와 동생들로부터 온 것이었고, 소포는 아버지께서 보내신 것이었다.
꽤나 묵직하고 컸다. 지난 번에 뭐 먹을 거 있으면 챙겨보내달라고 했었기에 보존식품 같은 거라도 왔는가 해서 뜯어봤더니…….
"응? 도끼네?"
"왠 도끼야?"
루키니와 셜리의 물음에 답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니까. 이걸 왜 보내신 거지?
소포는 도끼, 정확하게 말하자면 토마호크였다. 이거 아버지께서 쓰시던 것 같은데…….
설마 전투 때 쓰라고 보내신 건가 했지만 생각해보니 그럴 리가 없었다. 부술斧術 같은 걸 배우지도 않았다. 줘봤자 집어던져서 멧돼지 잡는 것 밖에 못하는 건 알고 계실 텐데? 으음…….
그런 생각을 하며 토마호크를 들어내니, 그 밑에 쪽지가 보였다. 아버지의 글씨체였다.
<동생들 것 만드는 김에 네 것도 새로 만들까 하다가 내가 쓰던 걸 보낸다. 유용하게 쓰거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새것보다는 몇 번 써서 손에 익숙한 연장(?)이 더 좋습니다.
……그런데 이 토마호크, 제가 기억하기로는 아버지께서 현역 시절에 쓰셨던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흠, 이 검붉은 문양, 상당히 오묘하게 그렸군."
바르크호른 대위님, 그거 분명 문양이 아닐 겁니다.
여튼, 올해였지. 작년에 같이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미안하다 얘들아. 언니가 힘이 없어서 이런데 끌려와 일하고 있어서 약속을 못 지키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토마호크를 휘둘러봤다. 미약한 바람소리가 났다. 아직 멀었군. 아버지가 휘두르시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우와아! 세라 인디언 같애!"
"인디언 맞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로쿼이안이지만. 그렇게 덧붙였다.
"아, 그렇구나! 나도 들어볼래!"
"조심해."
"읏차. 오오? 흐음……. 음……. 무거워어……."
루키니는 토마호크를 몇 번 위아래로 들어보고는 그렇게 말했다. 애초에 단련된 이로쿼이 남자가 쓰는 거다. 아직 어린 루키니에게는 무거우리라. 나야 요령이 붙은 거고.
일단 토마호크는 다시 상자에 넣었다. 딱히 어딘가 쓸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여기저기 만능으로 쓰이는 물건이니 놔두면 쓸데가 생기겠지.
"흠, 둘리틀."
"어, 네. 소령님."
이분 언제 오신 걸까. 방금 전까지 안 계셨는데. 신속神速이라도 쓰신 건가. 후소의 마녀들은 모두 괴물인가!
"그런 건 아니다만. 일단 그 도끼, 다시 볼 수 있나?"
"아, 네!"
생각을 읽혔다?! 아니, 진짜 후소 마녀들은 뭐 특수기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당황하고 있는 나를 무시한 체 소령님은 내 토마호크를 꺼내보셨다. 그리고는 몇 번 휘둘러보고는,
"괜찮은 무기로군. 출격시에 소지하고 있도록."
"……네?"
아니, 소령님. 이게 무슨 소립니까. 포격 특기생(?)에게 토마호크를 들고 가라고 하다니요.
제가 소령님처럼 토마호크 들고 닥돌할 상황을 일반 군대에 비유하자면, 후방 보급대가 털려서 삽자루 들고 닥돌하는 거랑 같은데요? 이미 전선 붕괴 상황 아닌가요? 접근전 걸리면 포병은 창병한테도 썰린다구요? 그것도 그게 반만년 수련한 창병이라면…… 아니 이게 아니라.
어쨌든, 제가 이걸 들고가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걸로 싸우라는 얘기가 아니다. 비상용으로 들고 있으라는 거지. 뜻밖의 상황에 낼 수 있는 패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거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유비무환이라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대체 무슨 생각이신걸까.
뭐 어쩌겠어. 군대인데.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보급창에 넣든, 스트라이커 유닛 여유 공간에 넣든, 이도저도 안된다면 그냥 고정대 하나 붙여서 달아버리면 되니까, 수납은 문제가 아니다.
일단 토마호크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 되었고, 남은 건 저녁식사 뿐.
오오, 밥이다, 오오.
그런데 미나 대장님의 얼굴이 묘하게 어두워보이는데, 무슨 일일까?
*****
세라와 네우로이 관계도
소형 : 시즈탱크 시즈모드 연사 속도가 3초인데 내가 저글링.
중형 : 시즈탱크 시즈모드 연사 속도가 3초인데 내가 히드라.
대형 : 시즈탱크 시즈모드 연사 속도가 3초인데 내가 울트라. 근데 저놈 언덕 위에 있어.
501부대 지원나온 다른 부대원 아가씨들 말투가 험악한 건 전쟁 때문입니다.
거기에 말년병장 마인드가 침투해서 그래요. [?]
밀리터리 설정의 대가이신 윤민혁 님과 많은 분들의 조언에 세라의 무장 설정을 고쳤습니다.
카를스란트제 88mm는 근접신관을 쓸 수 없군요. 뭐, 조준기도 있고 하니 일반 포탄으로도 제압 능력은 충분할 겁니다.
등가 교환이라는 캐사기 마법으로 방열 없이 마구 쏴댈 수 있으니까 좋네요.
제가 포병을 못 쓰고 있는 이유는 제 팬픽의 원천인 reines silber가 연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다른 분들의 양질의 S.W 팬픽이 필요합니다. 내게 힘을! 빠와! 언리미티드 빠와! <-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p.s 생일 기념으로 한 편 올립니다.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15
한없이 가라앉은 눈빛. 고요하다. 흔들림없다. 과연 이게 숙련된 무인의 자세라는 걸까.
한계까지 갈고닦은, 아니, 한계를 뛰어넘어 지금도 더더욱 정련되어가는 기백에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식은땀이 찬다.
비수가 내 가슴에 박히는 것 같다. 하지만 걱정 마라. 손은 눈보다 빠르─
챙! 깡!
"빈틈을 보였군, 하사."
─니까.
단 두 합만에 내 목 바로 옆에 멈춘 칼날의 예리함을 느끼며 나는 내 패배를 인정했다.
"……졌습니다."
분명 손은 눈보다 빨랐다. 소령님의 손이 내 눈보다 말이지. 이 사람은 위치로서도 우월한데 일반 무인으로서도 우월하다. 이 무슨 먼치킨이야.
칼이 칼집에 들어가는 모습 또한 예술이다. 호랑이가 발톱을 숨기듯 단 한 점의 투기鬪氣조차 남기지 않고, 잎사귀를 타고 흐르는 이슬마냥 자연스럽게 빨려들어간다. 스르릉─ 철컹. 소리가 맑다.
나는 별 것 없이 그냥 허리춤에 토마호크를 꽂아넣었다. 무기 좀 다룬다 하는 사람들이 보면 경기를 일으킬만큼 무신경한 행동이지만, 어차피 아버지의 토마호크는 이 정도로 이가 나가거나 내구도가 떨어질 정도로 허약한 물건이 아니다. 하루종일 바위를 득득 긁어도 멀쩡한 물건인데 뭘.
당시 제사장께서 밤낮정성으로 축복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런 사정이야 어찌됐든 나야 관리 같은 복잡하고 귀찮은 일 없이 부담없이 쓸 수 있어서 좋을 뿐이다. 그래도 나중에 살펴보기는 해야지.
"그래도 반응이 빠르던데. 역시 리셋 머신의 딸이라는 건가?"
"……모르겠습니다. 아하하……."
어머니. 당신께서는 대체 현역 시절에 어떤 일을 했길래, 바다 건너 머나먼 후소의 마녀까지도 당신의 별명을 알고 있는 겁니까.
어정쩡한 대답과 함께 방금 전의 움직임으로 달아오른 근육을 식히기 시작했다. 실제로 움직인 건 10초도 안되는데 10분 동안 전력을 다해 움직인 것 같은 느낌이다. 바닷바람으로 선선한 날씨 덕에 몸은 금방 정상 체온을 되찾았다. 그와 동시에 기상나팔이 울려퍼졌다.
"어, 벌써……."
"음? 뭐지? 할 일이라도 있었나?"
"해조류 주우러 간다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아침 식사용인가?"
"네."
내 대답에 소령님의 얼굴 위로 희미한 고민의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어라, 나 뭔가 잘못 대답한 건가? 어떡하지?! 아침 건너뛰고 연병장 스무 바퀴 뛰어, 같은 거 나오는 건가?! 역시 해조류 주우러 가는 게 문제였나?! 군인답지 않아서 그런 건가?!
절찬리에 방황중이던 내 귓가에 소령님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해조류 수집을 허가한다. 6시 반까지, 아니, 근무 시간 전까지 알아서 시간 조절하도록."
"네, 넷, 알겠습니다!"
연병장으로 뛰어…… 가 아니라, 뭐? 허가가 나왔어? 이게 꿈이야 생시야?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하고 군인답지 않게 머뭇거리고 있자니,
"가능한 많이 주워오도록."
이라신다.
소령님도 드시려는 걸까? 음, 최대한 많이 주워와야겠군.
허가도 나왔겠다, 더 이상 걱정이 없어진 나는 해안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바닷가로 달려가는 세라의 뒷모습을 보며 사카모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걸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오늘도 눈에 띄게 줄어들 식재료와 어제보다 늘어날 미나의 한숨. 그 생각에 허가를 내주었다.
언 발에 오줌누는 격, 혹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리 생각하며 사카모토는 식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자기 덩치만큼 해조류를 모아온 세라의 모습에 부대원들이 경악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체.
*****
오전에 해야할 일인 간단한 서류업무를 끝내고 확인을 받기 위해 격납고로 향했다. 상관인 셜리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마도엔진 손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음속을 뛰어넘는 게 그 아가씨 꿈이라고 했으니까. 음속을 뛰어넘고, 언젠가는 광속도 뛰어넘으려나? 뭐, 광속은 후손들에게 맡기기로 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격납고 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스트라이커 유닛을 외장을 열고 마도엔진을 손보고 있는 셜리가 있었다.
"결재받으러 왔어."
"응? 아, 그래? 잠깐만."
그리 말하며 셜리는 손에 들고 있던 몽키 스패너로 나사 몇 개를 조이고는 외장을 덮었다. 그리고는 내가 내민 서류를 살펴보았다.
"휴, 어디보자……. 흠. 흠. 좋아. 문제 없어. 한 달도 안됐는데 벌써 능숙해졌네?"
"복잡한 일이 없으니까 그렇지."
"그렇긴하네."
셜리는 대답과 함께 내게 다시 서류를 건네다가, 갑작스럽게 떠오른 듯 말했다.
"아, 오늘 저녁 네가 만드는 거 알고 있어?"
"저녁? 왜?"
"가끔씩 부대원들이 식사 만들 때가 있거든. 미나 대장이 말했었는데, 아 그때 너 없었지."
내가 한창 해조류 줍고 있을 때였나보다. 아침 먹을 때 얘기해줬으면 좋았을텐데. 그렇게 말하자 셜리는 산더미만한 해조류 때문에 말하는 걸 잊어버렸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충격인가. 하긴, 서양 사람들은 대부분 해조류를 먹는 게 아니라 바다잡초 정도로 생각하니까.
"흠, 그럼 미역국이라도 끓여볼까."
"아, 해조류는 사용 금지."
"엑, 왜? 신선할 때 써야되는데. 오늘 쓰는 게 제일인데?"
"먹는 사람들을 좀 생각해줘."
"편식은 몸에 안 좋아, 셜리."
"편식 수준이 아니잖아. 그걸 먹는 건 너뿐이니까 그렇지."
"사카모토 소령님도 계시잖아?"
"나머지 사람들은?"
"……알았어."
남은 해조류를 말려두기를 잘 했다. 이렇게까지 안 먹을 줄이야.
그럼 오늘 저녁을 뭘로 만든담. 어머니와 함께 주방에 서기를 어언 10년. 어지간한 요리는 그럭저럭 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메뉴를 정하라고 하면 곤란한데. 언제나 어머니께서 정하셨으니까. 어찌할까나.
"적당히 먹을 수 있는 요리로 만들면 돼. 바르크호른 대위나 하르트만처럼 해도 OK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고기와 삶은 감자의 산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대충 알 것 같은 대답이었다. 그러니까 거창한 수준의 요리는 바라지 않는다는 거로구만. 다행이네. 일단 요리 문제는 해결됐고.
"그럼 셜리."
"응?"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말이지."
"뭔데?"
나는 소녀들의 소소한 잡담이 가지는 온화한 분위기를 단숨에 날려버리려는 듯, 폭풍같은 분노를 휘두른 체 우리 주변에 모인 카를스란트 정비병들과 리베리온 정비병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사람들은 왜 여기 모여 있는 거야?"
미나 중령님 말에 의하면 업무 건이 아니면 위치와 일반 병사들이 대화하는 건 금지라고 들었는데 어찌된 일일까…….
*****
결국 대리만족이다. 바르크호른이, 카를스란트 정비병들이 88mm를 애지중지하는 이유는 그런 것이다.
네우로이 때문에 고향과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88mm는, 단순히 위력적인 무기를 넘어서 하나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분명 88mm가 카를스란트 탈환에 큰 역할을 해줄 거야. 그런 희망을 품고 88mm의 활약에 대리만족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그게 무엇이든지간에 88mm의 이름에 흠집을 낼 것 같다 싶으면 과하게 반응하게 된다.
세라가 셜리에게 던진 질문에 대답한 건 회백색 수염을 분노로 씰룩거리고 있는 카를스란트 정비반장이었다.
"88mm를 처분한다는 말을 들었소, 둘리틀 하사."
"처분?"
"자세한 건 예거 대위가 말해줄 것이오."
그 말에 세라는 샬롯을 바라보았다. 의문스러운 얼굴이었다. 당연했다. 사용한지는 2주도 안 지났고, 실전에는 겨우 한 번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처분이라니? 지난 번에 형편없는 전과를 보였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닐 텐데 밑도 끝도 없이 처분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라의 의문어린 시선, 그리고 정비병들의 분노 가득한 시선에 샬롯은 옆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아, 그러니까, M101가 온다는 말에 저렇게 몰려든 거야."
"M101이 뭐야?"
"리베리온제 105mm포."
"그래서 88mm를 처분한,"
"어림없는 소리! 지대지포인 105mm로 어떻게 하늘을 날아오는 네우로이를 맞춘단 말이야! 하늘은 88mm로 충분해!"
세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를스란트 정비반장의 고함이 터져나왔다.
"아니, 88mm를 처분한다고는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 마이스터Meister."
"그렇담 어째서 리베리온에서 포가 오는 거요? 그것도 위치용으로 개조한 물건이!"
"그러니까 단순한 시험이라니까요."
"시험이라면 그대들 본국에서 해도 충분하잖소!"
"포를 쏠 수 있는 항공보병이 여기 있으니 이리로 보내는 거지요."
샬롯의 설명에도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고 따져댔다. 거기에 105mm를 거침없이 깎아내렸다.
근처에서 그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리베리온 정비반장이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거기에 끼여든 건 그때였다.
"지금 88mm에는 일반 포탄을 쓰고 있지 않소? 105mm는 근접신관을 사용한단 말이오. 훨씬 더 위력적이란 말이지. 88mm의 공백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소. 댁들 것 못지않게 훌륭한 포란 말이외다."
"흥! 신관은 소형종이나 잡을 떄 쓰는 거겠지. 대형종에게 신관이 먹히기나 하던가? 그래봤자 발걸음 잡는 수준이겠지!"
"……적어도 일반포탄보다는 잘 먹힐 것 같소만."
"뭐야?"
분위기를 바꾸는데는 한 마디 말이면 충분하다. 그것이 좋게 바꾸는 것이든 나쁘게 바꾸는 것이든지간에.
사소한 말 몇 마디로 단숨에 험악해진 분위기 속에서, 각 정비반장들의 말이 오갈 때마다 주먹을 움켜쥐는 정비병들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연장을 챙기는 이들도 있었다. 여기서 이겨야 우리 무기가 인정받는다. 윗대가리들이 바꾸라고 해도 안 바꿀 거다. 그런 얼토당토않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잠시나마 멈춘 건 세라였다.
"그래서 어느 쪽이 더 가벼운가요."
""……뭐?""
"어느 쪽이 더 가볍냐구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질문자인 세라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일반포탄이든 근접신관이든, 지대공이든 공대지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직접 들고 날아다녀야 하는 입장에서 보면 가벼운 게 제일이니까요. 저거 탄약창 드는 것만으로도 힘들단 말입니다. 105mm가 더 가벼우면 그걸 들 겁니다. 아니라면 이대로 88mm를 들면 됩니다."
세라의 말에 리베리온 정비반장이 말했다.
"88mm는 7톤이고, 105mm는 2.5톤이야."
"그럼 105mm 쓰겠습니다."
"자, 잠깐! 그건 지상포 무게야! 지금 네가 쓰고 있는 건 겨우 4.5톤 밖에 안돼! 저놈들은 근접신관이랬지?! 공간마법을 걸어도 탄약창 무게가 2톤은 될 거야! 그럼 무게는 똑같아!"
"그렇다면 위력이지! 105mm가 훨씬 더 위력적이야!"
"연사력에서 88mm가 앞선다!"
다시 한 번 옥신각신 생산성없는 말다툼이 오갔다.
앳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후아암……. 그냥 둘 다 써보고 어느 걸로 더 많이 때려잡는가 세 보면 되잖아?"
목소리는 천장에서 들려왔다. 모두가 그걸 깨닫고 고개를 위로 향하자, 그곳에는 천장 철골 구조물에 깔아둔 담요 위에서 이제 막 잠에서 깬 듯한 얼굴로 눈가를 비비고 있는 루키니를 볼 수 있었다.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자, 사람들은 관심을 말로 돌렸다.
세 보면 된다?
일순간의 침묵. 그리고.
『 그거다────!!!! 』
"냐아앗?!"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터진 외침에 격납고가 뒤흔들렸다. 그로 인해 깜짝 놀란 루키니가 비명을 질렀지만 곧바로 정비병들의 함성에 뭍혀버렸다.
"당연히 88mm지! 반드시 승리한다!"
"105mm를 무시하지 마!"
"카를스란트 무기는 세계제이이이일!!!"
"리베리온 무기는 외계인을 갈아넣어 100년을 간다!"
"88mm 오른쪽! 105mm 왼쪽!"
"아니! 105mm를 오른쪽에 붙여!"
"어느 쪽이든 상관 없어! 부왘! 포성을 울려라! 부왘! 부왘!"
『 카를스란트! 카를스란트! 카를스란트! 』
『 리베리온! 리베리온! 리베리온! 』
"……쓰는 건 난데. 그리고 그렇게 달아놓으면 균형은 어떻게 맞추라고……."
각국 정비병들의 가열찬 외침에 세라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어느 새 내려와 자신의 허리를 끌어앉고 있는 루키니를 안아주며 샬롯을 향해 말했다.
"도와줘, 셜리."
"……미안. 나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웃으면 된다고 생각해."
"……하하하."
싸움으로 번지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이건 어찌해야하나…….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해야하는 자신의 입장에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샬롯이었다.
"탄약창에 2연장 M2 붙이는 문제도 있는데……."
"……방금 뭔가 흘려들어서는 안되는 단어를 들은 것 같지만 일단 넘어갈게."
세라는 졸지에 포 두 개를 들고 하늘을 날게 된 자신의 처지에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두 소녀가 생각하기를 그만둔 사이, 수많은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
폭풍같았던 격납고에서의 시간이 지나갔다. 뭐시냐, 그러니까…… 한숨 밖에 안 나온다.
흐트러진 정신은 점심을 먹고나서야 겨우 되돌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세라! 세라!"
"응. 이 나무, 아니 저 나무면 되겠다."
"그리고 어떡해?"
"가지를 이렇게 꺾고 여기 덩쿨줄기로 묶고, 이런 걸 두 개 만들어서 사이를 덩쿨로 엮으면……. 됐다."
"……그물침대?"
"낮잠자기 좋겠다!"
이렇게 루키니와 셜리와 함께 놀고 있다. 시간표에는 '타국 및 자국 군인과의 친선교류'라고 적혀있다. 거창하게 써있지만 어차피 10대 소녀들 친선교류라고 하면 결국 노는 거밖에 없지.
"써볼래?"
"응! 읏샤! 오오……. 흐음……. 으음……. 약간 불편해."
"모포 같은 걸 깔아야 돼. 옛날에는 가죽 같은 걸 썼지. 제일 좋은 건 쿰카웨고."
"쿰카웨?"
"어, 북풍의 아들들, 그러니까…… 너희들은 뭐라고 하더라……. 여튼 북쪽 사냥꾼들이 쓰는 망토 겸 침낭이야. 엄청 따듯해."
"헤에……."
"잠깐만! 담요 가져올게!"
그렇게 말하며 달려간 루키니는 금새 어디선가 담요를 들고 나타났다. 여기저기 비밀기지를 만들어놨다고 하더니, 그 중 어딘가에서 가져왔나보다.
곧바로 담요를 깐 루키니는 그 위에 엎드려 보더니 금새 마음에 들었는지 양다리를 번갈아 흔들며 웃었다. 그리고는 나와 셜리의 팔을 잡고 그물침대 양끝에 앉게 하였다.
발끝으로 그물침대를 끄덕끄덕 움직이며 우리는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였다. 루키니의 고향 얘기, 셜리의 스피드 기록 얘기 등. 그중에서도 두 사람의 흥미를 끄는 건 내 얘기였다. 정확하게는 내가 알고 있는 이로쿼이 얘기들이었다.
"돌로 늑대를 잡아?"
"아는 할아버지 한 분이 그랬어. 도끼는 부러지고 칼도 잃어버렸는데, 주먹 절반 만한 돌로 네 마리 머리를 맞춰서 잡고, 남은 하나는 왼팔을 물게 하고 머리를 돌로 찍어서 잡으셨대."
"거짓말 아냐?"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머리가 뭉게진 늑대 다섯 마리가 그 할아버지 천막 앞에 있었어."
"……세라 너도 돌 던져서 늑대 잡을 수 있어?"
"아니, 늑대는 보통 몇 마리 씩 몰려다니니까 못 잡아. 내가 잡을 수 있는 건 여우까지야."
"……그것도 충분히 대단해."
"그 아저씨가 멧돼지를 사흘 정도 쫓아가서 기진맥진한 걸 잡아왔는데……."
"어, 잠깐. 어떻게 잡아왔다고?"
"쫓아가서 기진맥진한 걸 그냥 잡아왔다고."
"그게 가능해?"
"응. 다른 동물들은 금방 머리에 열이 올라와서 지구력이 떨어지니까. 멧돼지는 사흘 정도면 돼."
"우와, 굉장해!"
"아니, 그건 굉장한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내게는 익숙한 이야기가 두 사람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긴, 이로쿼이 사람들이 가끔씩 터무니없는 일을 심심찮게 해치우니까.
여튼, 중간에 격납고에 들린 듯한 바르크호른 대위님이 내 무장에 대해 몇 마디 하고 가신 걸 제외하고는 무난한 오후시간을 보냈다.
이제 밥 준비 해야지.
*****
그렇게 별다른 특별한 일 없이 오후가 지나가, 어느 덧 저녁시간이 되었다.
오후 느즈막부터 오늘 저녁당번이 세라라는 걸 떠올린 부대원들은 마주칠 때마다 물었다. 전통요리를 할 거냐고. 이상한 재료 쓸 거냐고.
그런 질문에 세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별로 기대하지 마세요. 원주민 전통요리는 재료가 없어서 못 만드니까 그냥 집에서 먹던대로 요리할 겁니다. 이상한 재료도 안 써요."
그리고 저녁시간이 되었다. 식당에 도착한 부대원들은 식탁 위에 놓여진 저녁식사를 볼 수 있었다. 야채 수프, 옥수수빵, 달걀부침, 베이컨, 소세지, 오븐에 구워낸 생선 그리고 샐러드. 분명 식욕을 돋우는 차림이었지만 세라가 말했던 것처럼 그다지 기대할만한 무언가가 있는 식단은 아니었다. 단지 양이 많다는 게 특이했지만, 세라의 먹성을 생각해보면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다.
무난한 저녁식사가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부대원들의 마음 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 생각이 깨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울고 있다. 다들 울고 있어! 왜?! 너무 맛있어서?!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왜?! 처음 먹을 때는 다들 멀쩡히 먹었잖아?! 야채 수프가 다 떨어져서 잠깐 주방에 냄비 가지러 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당황해서 냄비를 든 체 굳어 있는데, 사카모토 소령님이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좋은 요리다. 타국 요리에서 어머님의 손맛을 느낄 줄이야."
……칭찬으로 하신 말씀일테지만,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는 이유는 '어머님의 손맛'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일 테지요. 저 아직 스물도 안됐습니다. '어머님의 손맛'이라고 하니까 굉장히 나이들어보여서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는데요.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령님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식사를 계속하셨다.
"……갈리아가……."
클로스테르망 중위는 뭐가 그리 분한지 고개를 숙인 체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그러면서도 식기를 사용해 음식을 먹는 동작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다. 과연 명문가 아가씨는 다르구나.어쨌든 먹어주고 있으니 음식을 만든 입장에서 참으로 고맙기는한데, 조금 불안하다. 저러다 갑자기 폭발할 것 같아서.
일단 식탁 위에 냄비를 올려두고 자리에 앉았는데, 루키니가 고개를 숙이고 식사를 안하고 있었다. 얘는 또 왜 그럴까. 불러보자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내 품에 파고들었다.
"세라아……."
"응, 응. 괜찮아. 괜찮아."
일단 등을 토닥여주며 반대쪽에 있는 셜리에게 왜 그런가 물어보려 했더니,
"어 왜?"
"루키니 왜 이런지, 왜 그래?"
"뭐가?"
"울 것 같은 얼굴이야."
"그래? 잠깐 고향 생각한 것 뿐인데……."
왜 갑자기 고향 생각을 하고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건지 묻고 싶지만, 향수에 젖어있는 걸 일부러 바꾸고 싶지는 않기에 내버려두기로 했다. 저쪽의 수오무스 아가씨와 오라샤 아가씨 커플도 왠지 모르게 촉촉한 눈빛으로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고양이 두 마리가 서로를 기대고 있는 것 같은 마음 포근해지는 광경이다만, 아무래도 그 원인이 내 요리 때문인 것 같아서 기분이 싱숭생숭한데…….
하르트만 중위는 멍한 얼굴로 창 너머만 바라보고 있고, 바르크호른 대위님은,
"큭, 허머니……. 크리슷……."
거기 대위님, 이 갈지 말아요. 그리고 발음 이상합니다. 그런데 다들 눈치 못 채고 있어!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누가 좀 알려줘. 알려줘서 나 좀 구해줘. Liberate me!
핫, 대장님은? 미나 대장님은?! 그분이라면 평정심을 유지하고 계실 거야! 생각이 떠오른 순간 내 눈동자는 이미 대장의 자리를 향하고 있었다.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대장님은 살포시 미소를 지으셨다.
"맛있네요."
칭찬이 나왔다. 다행이다. 다행인데……. 뭐냐, 이 시름에 잠긴 청초한 백합과 같은 분위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대장님이 말을 이으셨다.
"어머니께서 해주시던 음식이 떠올라요. 달지도 않고, 그렇다고 짭짤하지도 않고, 투박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질리지 않고 매일 먹을 수 있었던 그런 게……."
고향의 맛입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맛있는 음식의 수는 이 세상 어머니의 수와 같다고 했던가요. 아니, 그러니까 나 아직 어머니 소리 들을 나이 아니라니까요?
내가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대장님은 눈물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살짝 올리고 눈을 지그시 감으셨다. 단순한 동작인데 미인이 하니까 굉장히 아름답게 보인다. 아니, 지금 이런 거 감상할 때가 아닌데. 요리하면서 보니까 2주에 한 번 꼴로 내가 요리하는 것 같던데 그때마다 이런 상황이 펼쳐지는 건가.
"하아……."
품 안에서 훌쩍거리고 있는 루키니를 토닥이며, 나는 아무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밥이나 먹자.
*****
NG
한없이 가라앉은 눈빛. 고요하다. 흔들림없다. 과연 이게 숙련된 무인의 자세라는 걸까.
한계까지 갈고닦은, 아니, 한계를 뛰어넘어 지금도 더더욱 정련되어가는 기백에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식은땀이 찬다.
비수가 내 가슴에 박히는 것 같다. 하지만 걱정 마라. 손은 눈보다 빠르─
"열풍차아아아아아암!!!!!"
"으갸아아아아아아아아앍?!?!!?!?"
쿠과과과과과가가각!!!!!
─니까. 그것도 무진장.
열풍참이라니. 필살기인가요. 혼자서 슈로대 출전하시는 겁니까, 소령님. 그런데 슈로대는 뭐지? 전생의 기억인가? 모르겠다. 일단 기절하고 보자.
폭격이라도 맞은 듯 초토화된 광경이 검게 물드는 것을 뇌리에 담으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후소의 마녀들이란…….
*****
-1-
Q. 요시카 언제 나오나요?
A. 리네도 안 나왔는데요.
Q. 리네는 언제 나오나요?
A. 저도 모릅니다.
Q. 야 임마.
-2-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88mm는 처음부터 주무장으로 채택된 무기였다. 비행 시야 확보를 위해 허리를 축으로 삼도록 한 고정대. 공중에서의 원활한 재장전를 위해 아예 공간 마법을 걸어버리고 포신 뒤쪽에 붙여버린 대형 카트리지. 마녀는 오로지 전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탄도 계산 등을 돕는 사격 보조 장비 등. 정진정명 세계 최초의 항공보병용 88mm였다.> -6화 내용 중-
지금 세라가 장비중인 88mm는 위의 묘사처럼 정식 88mm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2~3초 연속 포격이 가능하지요. 거기에 고유마법으로 포 반동을 무시한 호버링이 가능한데다가, 사격보조장+스카우터틱(…)한 조준경 덕분에 탄도학을 몰라도 쓸 수 있지요.
사실 위의 묘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세라의 88mm는 밀리터리 지식없는 일반인이 대충 상상해서 만든 무기였습니다만, 윤민혁 님께서 27톤이라는 매우 가벼운 무게의 장전보조장치 붙은 2연장 88mm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얏호!
어째 혼자서 위치즈가 아니라 아머드 코어를 찍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결론은 세라가 고생하는 거밖에 없지만요. <-
그리고 본문의 무게 어쩌구 하는 거, 고증 따위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위키피디아에 나온 무게로 대충 때려맞춘 거에요.
저 부분 고증하셔도 수정하기 힘듭니다. […]
-3-
세라의 고유마법인 '등가교환'에 대해 말이 많던데, 명색이 주인공이니까 좀 먼치킨스러운 능력 있어도 눈감아주세요. [야]
농담입니다. 여튼 세라의 등가교환은 이론상 질량<->에너지 변환도 가능합니다. 그외의 온갖 판타지스러운 기술도 모두 쓸 수 있죠. 예압, E=mc^2!
그런데 불가능한 이유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쓴 등가교환 활용기술은 전부 몸으로 익힌 거지 공부해서 깨달은 게 아닙니다. 전생에 자연계 전공자도 아니었는데 알 리가 없지요. 이 세계 상황상 혼혈 원주민에게 고등과학지식을 가르칠 리도 없고 말이죠.
그렇습니다. 전 세라에게 패널티로 무지無知를 내렸습니다. 어차피 주변에 이걸 알려줄 사람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니 괜찮겠지요.
-4-
세라 열차포 들 수는 있습니다. 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구스타프 열차포 말입니다. 단지 들 수만 있어요. 쏘는 거요? 애 잡을 일 있습니까?
-5-
14화 부분 수정했습니다.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p.s 15화가 예정보다 일찍 나왔기 때문에 16화는 언제 나올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16
세라가 본의 아니게 부대원 전원의 향수를 자극해던 격동의 저녁식사가 끝나고 이틀이 지났다.
"먹어! 먹어! 먹어!"
"안돼, 그만 쳐먹어! 제기랄!"
"좋아! 먹어!"
"야, 안돼, 그만! X발!"
갖가지 욕설이 터져나왔지만, 세라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랬기에 일반 식기라기보다는 대량의 식재료를 다듬는데에나 쓸 법한 거대한 그릇이 비워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텅─. 빈 그릇이 식탁와 부딪치며 둔중한 금속소리를 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으아아아아악!!!!"
"하하하하하!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판돈! 판돈!"
"소스 남았어! 소스 남았어! 소스 남았어! 소스소스소스소스!!"
"소스 같은 소리하고 있네! 지들도 안 쳐먹으면서 소스는 개뿔이!"
"아직 안 끝났어! 소스 남았어! 손 대지 마! 손댄 년 손모가지를 잘라버,"
쭈우우우루루룩. 꿀꺽─.
"릴…… 거야……."
"……이야! 이야아아아! 이얏호!"
"최고다! 최고다! 원주민 최고다! 앗핫핫핫!!"
"이겼다! 이겼다고! 이겼다고! 어, 야 지금 판돈 손댄 년 누구야?!"
"저기 튀는 로마냐 년 잡아! 저년 판돈 건드렸어! 어, 어, 제길, 여깄던 브리타니아 년 어디 갔어! 자기 돈 빼갔어!"
세라가 저걸 다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내기로 도박을 했던 위치들의 환호, 절규, 비명, 욕설이 뒤섞여 터져나왔다. 왁자지껄 시끌벅적. 10대 소녀들이 아니라 닳고 닳은 중년 남자들 같았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숙녀의 교양 같은 건 애저녁에 내던지고 생사를 오가는 전장에서 구른 게 적게는 1년이요, 많게는 6, 7년이니까.
그것 뿐이랴.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전장. 규율로 억누르는 군대. 가족과 고향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혹은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 언제나 그런 것에 시달리다보면 이렇게 거칠어지게 되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망가지던가.
그렇다고는 해도, 지휘관들로 하여금 지금 당장 달빛이 빛나는 연병장을 달리라 명령하고프게 만드는 광경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흐하하하하하! 두목! 잡아왔습니다!"
"이거 놔! 이거 놔! 이거 놔! 나 아니야! 나 아니라고! 저기 저년이잖아?!"
"개수작 부리지 마! 니년이 훔쳐간 거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두목! 여기 한 년 또 잡아왔습니다요!"
"야, 잠깐! 항복하면 풀어준다며?! 돈 줬잖아?! 약속이 틀리잖아?!"
"두목이 뭐냐, 두목이. 여튼, 얘들아! 돈 훔쳐가면 어떡해야지?"
『 처벌! 처벌! 처벌! 처벌! 』
"좋아. 그럼 우리가 해야할 처벌은 뭐지?"
『 벗겨라! 벗겨라! 벗겨라! 벗겨라! 』
"므, 뭐?! 야, 잠깐! 안돼! 흐햐앙?! 어딜 만지느읏?!"
"하지마! 하지마! 제니! 살려줘! 제니! 윌마! 앨리스! 대장! 대장! 살려주, 왜 당신까지 벗기고 있는 거야아아아아!?!?!"
『 벗겨라! 벗겨라! 우리는 벗긴다! 힘차게! 용맹하게! 단추를 풀어라! 지퍼를 내려라! 후크를 풀어라! 벨트를 풀어라! 』
"흠, 하나는 브리타니아. 하나는 카를스란트. 음, 뭔가 부족한데?"
"갈리아 하나 넣을까?"
"균형을 맞춰보자고. 히스파니에 출신은, 없고. 누가 좋을까?"
"여기 로마냐 년 하나 추가요! 앗핫핫핫핫핫!!!"
"잠깐, 난 왜, 으갸아아아아악?!?!!?"
"오오, 로마냐 추가다! 좋았어! 간다!"
『 벗겨라! 벗겨라! 우리는 벗긴다! 거침없이! 폭풍처럼! 상의를 벗겨라! 바지를 벗겨라! 속옷을 벗겨라! 양말은 남겨라! 』
"안돼! 안돼! 안돼애애애앳!!!"
"하지마! 하지말라고! 야, 너 막내 너 지금 무슨, 꺄아아아악?!!?"
"난 아니야! 난 아니라고! 난 아니라고 이년들아! 좀 들어쳐먹으라고오오오오!!!"
『 간지럽혀라! 힘을 빼라! 거친 저항 이겨내고! 우리는 벗겨내리라! 』
"아아아아악!!! 아하하하하하?!!?!? 흐하햐하햑?!?"
"하, 하학, 핫, 하악 히이익?!?!"
"우으아, 응앗, 앗, 아, 어, 우아, 힉……."
목, 옆구리, 발바닥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간지럽히는 전우들의 손길에 세 소녀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있었다. 그나마 앞에 두 사람은 몸을 비틀며 비명이라도 지르고 있었지만, 영문도 모른 체 끌려온 로마냐 소녀는 이미 반응할 기력도 없는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체 경련하듯 파들파들 떨 뿐이었다.
기묘한 열기. 살짝 맛이 간 주변 소녀들의 광기 어린 눈빛. 울려퍼지는 기괴한 노랫소리. 반나체를 드러낸 희생자들. 붉게 달아오른 피부. 초점이 사라진 눈. 다물어지지 않는 입에서 흘러나온 침. 주변에 있는 게 동년배 소녀들이 아니라 건장한 남성들이었다면 능욕의 현장이 펼쳐지고 있었으리라. 아니, 이것도 이미 능욕의 현장이었지만.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가장 구석진 자리에 모여 조용히 저녁식사를 즐기던 이들. 바로 각 부대 지휘관들이었다.
"……슬슬 정리해야지?"
가장 냉철하게 빛나는 눈을 가진 소녀가 입을 열었다.
끄덕. 광기가 지배하는 그 공간에서 유일하게 침묵과 이성을 지키고 있던 소녀들의 의견이 일치됐다.
언제? 지휘관들의 눈빛이 교차됐다. 바로 지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지휘관 소녀들은 욕망과 광기가 뒤섞인 현장을 향해 몸을 내던지며 외쳤다.
『 그 욕망을 쳐부숴주마! 』
아무리 날고 기어도, 병사는 언제나 간부 손바닥 안에 있다는 진리를 깨달아라, 소녀들이여.
*****
그러니까 적당히 했었어야지.
나는 간지럼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해버린 희생양 세 사람과, 자대까지 토끼뜀으로 복귀할 것을 명령받은 다른 부대 소녀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았지.
일단 희생양들이 어떻게 기절했느냐면, 한 사람은 너무 웃어서 과호흡으로 기절했고, 한 사람은 무리하게 몸을 비틀다가 근육경련이 일어나면서 기절했으며, 마지막으로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잡혀들어왔던 로마냐 아가씨는, 뭐라 설명했다가는 19금 전개로 갈 것 같으니 그냥 '연속되는 자극에 한계치를 돌파하고 기절했다.'고 해두기로 하자.
그래도 이번 회식은 무난하게 끝이 난 편이란다.
이렇게 커다란 사고가 있었는데 어떻게 무난하게 끝났다고 말하는가 싶겠지만, 다른 부대 지휘관들의 말에 의하면, 적어도 템즈 강 굴다리 아래서 마법까지 사용해가며 처절한 패싸움을 벌이지 않은 것만해도 무난하게 끝난 것이라고 한다. 매번 이러면 좀 자제 좀 시키면 안되나.
어찌되었든, 이름모를 세 마녀들이여. 그대들의 희생으로 전쟁은 없었도다. 이제 편히 잠들라. 위대한 영혼이 그대들을 보살피기를.
마음 속으로 묵념을 올리며, 나는 이런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다른 곳으로 빠져나간 우리 501 부대원들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빠져나갔다기보다는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간 거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갈 때 저도 데려가 주셨으면 좋았을텐데 말입니다.
뭐, 덕분에 든든하게 먹었으니까 괜찮겠지.
지루함을 떨쳐내기 위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5분 정도 걸었을까. 항구가 보였다. 전시라는 것을 증명하듯 군함 몇 대가 정박해 있었고, 그 중에는 출항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배들도 있었다. 여기저기 세워진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는 깃발을 살펴보았다. 여럼풋이 보이는 '해를 가리는 초승달' 표식. 후소의 깃발이다. 제대로 찾아왔군.
조금 더 걷자 약속된 장소가 나타났다. 후소 항공모함 옆 부두. 몇 사람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501부대원들이다. 이 시간에 왜 여기 다들 여기 모여있느냐면, 오늘 떠나는 사카모토 소령님을 배웅하기 위해서다. 낮에 출발하면 좋겠지만, 네우로이의 위협 건도 있고, 이래저래 말 못할 사정들도 있어서 이 시간에 출발한다고 들었다. 아, 리트뱌크 중위는 야간 초계 임무라 빠졌다. 유틸라이넨 소위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지루해보이는 건 그거 때문이려나.
"세라 둘리틀 하사, 지금 도착했습니다."
나는 경례를 붙이며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회식은 어땠나요?"
"……사고가 있었지만 무사히 처리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사고가……."
내 대답에 미나 중령님을 필두로, 다들 불길한 예상이 맞아떨어졌다는 씁쓸함과 익숙한 광경에서 느껴지는 담담함이 뒤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인데도 왜 상부는 계속해서 이런 회식자리를 마련하는 걸까. 뭔가 매리트가 있는 걸까? 잠깐, 그러고보니 그때 그 자리에 있던 높으신 분들이 굉장히 흡족한 얼굴이었던 것 같은데……. 네놈들 눈요깃거리 때문에 이런 걸 벌이는 거였냐. 다음에 보고서 쓸 때 이 건을 얘기해봐야겠군!
어찌되었든 다른 부대원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사카모토 소령님이 배로 향했다.
"그럼 다녀오지."
『 다녀오십시오. 』
소령님은 말없이 경례로 답했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돌려 중령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중령님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다녀와."
"응."
어째 출장가는 아버지와 배웅하는 어머니 같은 구도다. 옷매무새를 다듬어주고 살그머니 끌어안으며 짧게 입맞춤까지 했다면 정말로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음? 그렇게되면 우리는 일하러 가는 아버지를 배웅하는 자식들이 되는 건가?
한 번 자리를 맞춰 보면, 큰 자식들에 셜리와 바르크호른 대위님, 중간에 하르트만 중위랑 클로스테르망 중위, 아, 유틸라이넨 소위도 있군. 막내는 루키니랑 리트뱌크 중위려나.
나는 큰 자식들 범주에 들어가겠지? 셜리나 대위님과 언니야 동생아 하는 건, 흠……. 나쁘진 않은데? ……나쁘지 않은데, 으음……. 왠지 내가 자식들 범주에 들어가는 걸 상상하기가 어렵다. 어째서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철제 사다리가 치워지고 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간에 서서 어깨 높이로 손을 흔드는 소령님의 모습이 보인다. 경례로 답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루키니는 어깨 위로 양손을 크게 휘두르고 있다. 괜찮을까. 괜찮겠지.
소령님이 탄 배를 비롯한 다른 후소배들이 모두 시야에서 사라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배와 등대의 불빛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불빛만 보일 뿐 윤곽은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그렇게 소령님은 떠났다.
돌아오는 건 두 달 정도 후던가. 왔다갔다하는 시간 외에도 이러저러한 업무 등을 처리하다보면 조금 더 걸리겠지만.
음, 분명 주인공인 아가씨를 데려왔던 것 같은데. 이름이 뭐였더라……. 뭐, 그때 가면 알겠지. 나는 팔을 내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기지로 돌아갑시다."
중령님의 명령에 우리는 부두 근처에 있던 차에 나눠 타고 부대로 복귀했다.
어쩐지 그 목소리에 약간 힘이 없게 느껴졌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
네우로이의 공습이 시작된 건 사카모토 미오가 501부대를 떠난지 이틀째 되는 날 저녁이었다.
상대하기 까다롭지 않은 일반 중형종. 거기에 야간 초계를 준비중이던 사냐까지 작전에 참여했기 때문에, 501부대 소녀들은 날이 바뀌기 전에 네우로이를 요격하고 기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경보가 울렸을 때 네우로이는 이미 기지로부터 불과 40km 떨어진 해상 위에서 북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애초에 그런 걸 이해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녀석이 연합군 경계 체계의 빈틈을 뚫고 올라온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때문에 501 부대원 소녀들은 전투보다도 훨씬 더 긴급하고 치열한 출격을 해야만했다. 녀석의 속도가 비교적 느렸고, 습격 대비 기간이라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었지, 여차했으면 출격도 못하고 전멸당할 뻔한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지 사령관인 미나가 해가 뜨자마자 연합군 사령부에 연락해 경계 체계의 빈틈을 메꿔줄 것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나의 요구에 연합군 사령부는 경계 체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였고, 그 결과 501부대 담당구역 외에도 또다른 수도방위취약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허나 초계기와 경비정의 수를 늘리는 임시 대책 외에는 별다른 해결 방안이 없었다.
군사기밀이기는 하지만, 이것도 사실 무리를 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물자와 인력의 소모량은 생산량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알고 있다고는 해도 이쪽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하는 입장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간신히 막아냈지만 다음에는 잠들어있는 사이 사이좋게 산화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미나의 항의는 그칠 줄을 몰랐다. 자칫 잘못하면 군사재판이나 강등 같은 중징계가 떨어질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간 쌓아온 공로와 명성 덕분에 수뇌부 역시 함부로 미나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서로의 신경만 곤두세우게하던 도중, 501부대의 전투보고서를 읽던 한 장군이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이참에 신형 레이더 하나 가져가서 운용하시오, 뷜케 중령."
*****
"……그래서 지금 이 레이더가 우리 기지에 왔다는 거로군."
"응. 그렇게 된 거야."
격납고에 선 바르크호른과 미나의 말에 곁에 있던 샬롯이 징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아저씨 분명 세라가 들고 다니라고 하면서 보낸 것 같은데……."
"뭐, 전투보고서를 보고서 이걸 보냈다고 한다면, 그렇겠지."
세 사람은 눈앞의 강철 상자를 바라보았다. 크기는 대형 세탁기만하고, 그 위로 바둑알처럼 둥글넙적한 무언가가 붙어있다. 안테나 접시 같은 것일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레이더 기지를 축소시켜놓은 것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양옆에 안테나 접시 같은 게 붙어있다는 점일까.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딱 보는 순간 레이더 기지를 연상키셨다.
"……날아다니는 레이더 기지인가. 포병도 모자라 레이더까지 쓰게 되었군. 어, 그런데 이거 어떻게 쓰는 거야? 그리고 세라한테 사용법 가르쳐야 되지 않아?"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하더군. 들고 다니기만 하면 된다고 하던데. 처음부터 마녀용으로 개발중이던 장비라 별다른 조작이나 기반지식이 없어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하더군. 정 불안하다 싶으면 마도침을 쓸 쑤 있는 마녀가 동행하면 문제가 없다고 하더군."
"헤에, 그렇습니까, 중령님?"
"네, 그래요. 그래서 한동안 사냐가 세라 하사와 함께 아갼초계임무를 맡을 겁니다."
"어, 사냐는 나이트위치로 야간업무전담인데, 그렇다면……."
"야간업무도 추가된다는 거지."
바르크호른의 대답에 샬롯은 역시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리베리온과 이로쿼이의 계약상 세라가 이걸 거부한다한들 제재할 수단은 없다. 하지만 그 혼혈 원주민 소녀는 투덜거리면서도 분명 이걸 들쳐매고 하늘을 날 게 분명했다. 도망치지 않는 세라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레이더의 덕을 보는 건 생판 남도 아니고 같은 부대원이 아닌가.
"이래저래 언제나 세라한테는 도움만 받게 되네."
"그것도 군인의 임무다…… 라고 하기에는 확실히 너무 부담만 크군."
그러나 마땅한 보상거리가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나마 자유시간을 늘려주는 것이 보상이라면 보상이겠지만, 애초에 포격지원을 하고 나면 전투가 불가능할 정도로 녹초가 되어버려 자유시간 내내 앓는 소리를 내며 쓰러져 있는 게 일상이니, 그걸 보상이라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두 위관의 대화에 미나가 입을 열었다.
"그 문제는 본 기지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문제입니다. 본국에 건의해주세요, 예거 대위."
미나의 말대로 이 이상은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샬롯은 군말없이 경례를 올렸다. 그리고는 다시 레이더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미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사냐와 함께 난다면 신형 레이더를 운용하는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동안, 이라고 했던 거에요."
샬롯의 질문에 미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형이라는 것은 검증이 미숙하다는 말과도 동일하다. 게다가 눈앞의 레이더는 말 그대로 진짜 신형인지라 501부대에서 사용하는 게 첫 실전투입이다. 그런만큼 아무래도 신뢰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한동안 사냐와 함께 비행하며 성능을 검증한다는 것이다.
"그 장군님은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다고 열변을 토하셨지만,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죠."
게다가 이걸 사용하게 된다면 세라의 전투능력이 떨어질테니까, 호위기가 필요하게 되죠. 미나는 그렇게 덧붙였다.
부대장의 설명에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샬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세라의 한숨소리가 벌써부터 들려오는 것 같네요."
*****
마법가방에 쓰이는 술식이 개량되어서 도X에몽의 4차원 주머니마냥 정말 작고 가벼워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럼 탄약창의 필요성이 줄어들테니까, 이야, 그럼 이제 난 필요없겠구나. 이제 짐 싸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나 할까?
……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아."
대형 세탁기─그러니까 탄약창만한 크기였다. 게다가 그 위로 둥글넙적한 무언가가 붙어있었다. 안테나 접시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한다. 양옆으로는 평범한 안테나 접시가 하나씩 붙어 있다. 것보다 저 위에 달린 저 바둑알처럼 생긴 거, 전생에 이거 비슷한 걸 봤던 것 같은데……. 그거 조기경보기였나, 무슨 정보 지원해주는거였나. 여튼 지금 기술력으로 나올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걸 들쳐 매고 밤하늘을 날라고 하시는 겁니까?"
"응. 사냐 중위와 함께 주2회 정도 야간초계임무를 수행하면 돼. 임무 내용은 신형 소형 레이더 시험 및 방공망 순찰이고."
눈물의 바다를 만들었던 식사 이후, 몇 마디 주고받으며 친해진 덕분에 중령님께서 자연스럽게 하대하고 계신다. 아니, 것보다 소형?! 어딜 보면 소형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야?! 위치가 들고 다닐만한 레벨이 아니잖아! 괴롭히는 건가?! 괴롭히는 거지?! 괴롭히는 거로군!
"소원수리때 가혹 행위 한다고 써도 됩니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네 평소 무장보다 가벼워?"
"확실히 그것보단 가벼워보이지만, 개조 88mm에 부무장까지 달고 탄약창까지 들쳐멘 상태에서 이거까지 업고 나는 건 얘기가 틀립니다!"
내 말에 미나 중령님은 잠깐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모든 것을 다 이해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이것만 들고 날면 돼."
이것만 들고 날면 돼. 이것만 들고 날면 돼. 이것만 들고 날면 돼. 이것만 들고. 이것만 들고. 이것만. 이것만. 이것만…….
중령님의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정말로? 정말로 이것만?
내 의문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중령님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상하로 끄덕이셨다. 정말 이것만 들면 되는 건가.
그래서 일단 들쳐매 보기로 하고 스트라이커 유닛을 기동시켜 들어봤는데…….
"느그억……?!"
뭐, 야, 이, 거, 어어어언?!?!? 무겁, 잖아?! 마력소모가 장난이 아닌, 읏, 우윽, 큿, 흐아아아압!!
내부가, 대체, 어떻게, 허억, 생겨, 먹었는지, 재질이, 쿡, 크헉, 콜록! 뭔지, 모르겠, 지만, 허억, 정말, 뭣같이, 무겁다!
아, 안돼! 더는, 무리가아아앗!?!?
쿠웅────…….
"허억, 허억, 허억……."
간신히 원래 자리에 되돌려놓았다. 그래도 바닥이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내려놨다고 생각했는데, 격납고가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음이 발생했다. 이거 대체 여기에는 어떻게 들여놓은걸까. 크레인? 그런 거 들어오는 건 못 봤던 것 같으으으은!!! 허리가! 허리가! 허리가아아앗?!!?
"세라, 괜찮아?!"
"괜찮스으다다다닷 거기 건드리시면 으그으으히야악?!?!
찌릿 수준이 아니라 빠지지직, 하고 척추를 타고 올라온 통증에 순간 휘청하고 넘어질 뻔했다.
이런 걸 들고 야간초계를 하라니.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어진다. 포들고 날아다니는 것도 힘든데 이런 걸 매달고 날라고? 어디까지 혹사시킬 작정이냐. 이거 진짜 소원수리때 가혹행위라고 써도 되는 거지? ……울고 싶어진다.
"……다른 건 들라고 해도 못 들겠네요."
통증이 사라지고나서야 간신히 두 다리─스트라이커 유닛으로 설 수 있었다.
"비행은 무리야?"
"어, 저것만 든다면 못할 건 없습니다. 무게는 88mm랑 탄약창 합친 것보다 조금 더 무거운 정도니까요."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균형잡기 어려웠을 뿐이지 제대로 고정한다면 못 날 거야 없다.
……그리고 어쩌겠어.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게다가 이번 건 사령부 별님이 하라고 하신 거라며. 계급이 깡패지 뭐. 에휴…….
그나마 오늘부터 들쳐매고 나는 게 아니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야간비행도 힘든데 말이지.
*****
501부대원들이 대부분 그러하지만 사냐와 접점을 가지고 있는 부대원은 얼마 없다. 나이트위치라는 특성상 근무시간도 엇갈리고, 생활장소도 엇갈리기 때문이다.
그나마 에이라가 가끔씩 함께하고, 나이트위치들간의 무선으로 완전한 고독 속에 내팽겨쳐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동료 위치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건 사냐에게 외로움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주변환경에 더해, 내성적인 성격으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 서투른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냐는 야간초계임무를 눈앞에 둔 상태에서, 세라와 에이라의 대화를 복잡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우와, 엄청 크네-. 이런 거 매고 하늘나는 건 너뿐일 거야."
"그렇겠지. 아니, 애초에 이런 거 매고 날라고 하는 것부터가 이미 고문이라고."
"흠. 그러면서도 이 틈바구니에 착실하게 간식거리를 챙겼겠지-. 여긴가? 여긴가? 흐음-. 아, 여기인,"
"OK, Stop. 거기까지다, 에이라."
"체에- 어차피 한 3인분 챙겼을 거면서-. 하나 쯤은 지금 여기서 먹어도 되잖아?"
"안돼."
"쪼잔하게스리-."
계급명으로 상대를 부르던 세라가 언제부터 이름으로 에이라를 부르게 되었는지 사냐는 알 수 없었다.
에이라가 다른 이와 장난을 치고 농담을 주고받는 걸 질투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저 대화에 낄 수 없다는 데서 소외감을 느낄 뿐이었다.
그때,
"중위님이랑 먹을 거니까 건드리지 마."
"……아."
"응? 왜 그래, 사냐?"
"아냐. 아무 것도……."
에이라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사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세라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야간초계임무 시작시간입니다, 리트뱌크 중위님."
"……네."
"사냐가 힘들어질 일은 하지 마. 알겠지?"
"할까 보냐!"
세라와 다시 한 번 농담을 주고 받은 에이라는 사냐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 다녀와."
"응. 다녀올게."
그 대화를 끝으로 에이라는 말없이 활주로 옆에 섰고, 사냐와 세라는 유도등을 따라 천천히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대장기인 사냐가 머리 위로 녹색 빛 탐사마법을 전개하며 고요하고 매끄럽게 날아올랐고, 그 뒤를 이어 세라가 등에 맨 거대한 레이더의 육중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날아올랐다. 세라의 머리 위로도 녹색빛 탐사마법이 전개되고 있었다. 사냐와 레이더의 힘 덕분이었다.
세라가 무사히 날아오른 것을 확인한 사냐는 관제탑을 향해 보고했다.
[야전초계분대Night Patrol team 전원 이륙 성공. 작전을 개시합니다.]
[Copy, 작전을 개시하라.]
[Night 1 Rog.]
[Night 2 Rog.]
그렇게 두 사람은 칠흑같은 밤하늘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
오늘 내로 올린다는 얘기를 해버리는 바람에 뒷부분을 정리 못하고 그냥 이대로 16화 사출.
17화는 정리가 끝나는데로 올라옵니다.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17
상냥한 들소는 나를 달빛눈꽃이라 불렀다. 그쪽이 훨씬 더 예쁘고 부르기 쉽다고 했다.
부모님이 주신 서리 내린 나뭇가지라는 이름도 좋았지만, 상냥한 들소가 준 달빛눈꽃이라는 이름도 마음에 들었다.
함께 밤하늘을 보며 별들의 이야기를 할 때면, 우리들의 이야기 외에도 구대륙 사람들의 이야기들까지도 해주었다.
타고난 말꾼은 아니었지만 잔잔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별들의 세계에 대한 신화와 전설을 듣고 있노라면, 자신이 그 이야기와 함께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나한테는 리베리온 사람들이 레이더 마법이라 부르는 '소리를 보고 세상을 듣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가끔 밤하늘을 날기도 했는데 그날마다 상냥한 들소는 나를 배웅해주고 새벽 일찍 일어나 마중해주었다. 그렇게 스쳐지나가며 몇 마디만 할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은 정말로 즐거웠다.
가끔씩 너무나 가족들이 보고싶어 잠들지 못하고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상냥한 들소는 어느 새 다가와 차갑게 식은 내 어깨 위로 모포를 둘러주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꿰뚫어보고는 격려의 말을 건네주었다.
"괜찮아. 이별은 그리 길지 않을 테니까. 옥수수가 자라고, 물고기를 낚고, 들소를 사냥하고, 눈이 내리고. 그렇게 언제나 해왔던 일들을 몇 차례 반복하고나면 자연스럽게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뻔한 소리. 그리고 아이를 달래기 위한 어른들의 흔하디 흔한 거짓말.
언제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상냥한 들소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느 날, 결국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거짓말."
따스한 거짓이 섞인 격려에 차가운 진실로 엮인 투정으로 답했다.
그렇지만 상냥한 들소는 화를 내지도, 당혹스러워 하지도 않았다. 그저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는 살포시 끌어안으며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하지만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고 증명하지는 못하니까 네게는 거짓말처럼 들리겠구나."
"……."
"하지만 돌아갈 수 있어. 만날 수 있어. 그럴 거야."
"……응."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그래도 난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안긴 품의 온기와 부드러운 손길을 밀쳐낼 수 없었기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함께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얼핏 스쳐지나갔던 상냥한 들소의 슬픔 가득한 얼굴은 내가 더 이상 투정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냥한 들소가 쉽사리 돌아올 수 없는 저 먼 이방인들의 옛땅으로 끌려갔을 때 생각했다. 역시 그건 거짓말이었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아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라는 의문이 솟았지만 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른들의 이야기가 오고갔던 거겠지.
어찌되었든 상냥한 들소의 말이 맞았다. 이별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렇지만 상냥한 들소는…….
"세라 둘리틀 하사의 귀환은 미정이다."
"둘리틀 하사의 귀환 예정일은 군사기밀이다."
"말할 수 없다."
나 외에도 상냥한 들소가 언제 돌아오는지를 물었던 아이들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듣기 싫은 대답은 "어차피 떠나는 녀석들에게 알려줄 의무는 없다." 였다. 멋대로 불러와서 멋대로 이것저것 시켜놓고서는.
그러나 그 순간, 무언가가 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래서 난 말했다.
"난 남을 건데?"
그들은 몰랐을 테지만 우리가 돌아갈 수 있게된 날을 기점으로 처음 보는 리베리온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특별하게 하늘을 잘 나는 아이들이나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들에게 조금만 더 이곳에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이 레이더 마법이라 부르는 '소리를 보고 세상을 듣는 능력'을 가진 내게도 그런 말을 했다.
난 상냥한 들소가 돌아올 때까지 남는다는 조건과 이것저것 특혜를 받는다는 조건을 걸고 이곳에 남기로 했다. 그리고 달이 한 번 차고 기우는 동안 '소리를 보고 세상을 듣는 능력'을 능숙하게 쓸 수 있도록 노력했다. 상냥한 들소가 있는 곳까지 듣고 볼 수 있기를 바라며. 하지만 역시 혼자서는 힘들었다.
난 솔직하게 리베리온 기술자들과 우리에게 우호적이었던 몇몇 리베리온 소녀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거절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의외로 선뜻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덕분에 난 내 능력을 훨씬 더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날아올랐다.
바라보는 곳은 태양이 뜨는 곳. 상냥한 들소가 있을 그곳.
떠올리는 것은 어른스러운 얼굴. 우리와는 다른 깊은 녹색빛 눈동자. 따스한 손길. 포근한 품.
머리 위로 빛으로 이루어진 나뭇가지를 펼친다. 소리를 보고 세상을 듣는 나뭇가지.
만나고 싶다. 그 마음을 담아 아득한 바다 저편을 향해 외쳤다.
"[상냥한 들소를 찾고 있어요! 아는 사람 없나요? 있다면 답해주세요!]"
돌아오는 것은 그게 누구냐는 질문과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비난 뿐.
비난은 무시하고, 질문에 리베리온 이름으로 세라 둘리틀이라고 답해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역시 무리였을까.
우리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 리베리안 대신 직접 정보를 얻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만나고 싶은데. 보고 싶은데. 그런데.
그때,
[──여기는 제501통합전투항공단 야간초계분대 분대장 사냐 V. 리트뱌크 중위. 세라 씨는 어제 있었던 전투 이후, 부상을 입어 당일 야간초계임무에서 제외되어 취침중입니다.]
소극적인 듯하면서도 따스한 온기를 지닌, 나와 엇비슷한 연배로 들리는 목소리가 수평선 너머에서 들려왔다.
*****
"으으으……."
허리를 삐끗했다. 왠 노인네 같은 소리냐 싶겠지만, 포격지원을 마치고 돌아와 탄약창을 내려놓다가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릴 뻔한 걸 막으려다 그렇게 되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간신히 탄약창을 되돌려놓은 순간 힘이 빠져 고꾸라지는 바람에 앞에 있던 난간에 이마를 들이박았다. 격납고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났으니 얼마나 세게 부딪쳤었는지는 말 안해도 알겠지. 이마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구르고 싶을 정도로 아팠지만, 삐끗한 허리가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통증을 호소해왔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 죽여라, 날 죽여어어어…….
덕분에 셜리에게 업혀서 의무실에 왔다. 오면서도 계속 올라오는 통증 때문에 "읏, 컥, 으억, 억, 느걱……." 하고 신음소리를 내버렸는데, 그것 때문인지 셜리가 굉장이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되려 내가 미안해졌다.
그리고 치료를 받았는데, 이게 또 삐끗하는 걸 능가하는 고통을 몰고와서 반쯤 정신을 잃고 있었다. '서양 의학이 미개했던 건 중세에서 이미 끝나지 않았나? 왜 근현대까지 와서도 이 모양이야?'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찌되었든 그 덕분인지 숨도 크게 못 쉴 정도의 격통은 사라졌다. 그래도 여전히 통증이 줄지 않아서 결국 수면제를 몇 알 받아먹고 죽은 듯이 의무실에서 뻗어버린 게 바로 어제 저녁이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해가 어째 약간 동쪽으로 가있었다. 뭐야, 시간을 달린 건가? 알고 봤더니 거의 하루 종일 잔 것이었다. 약발 굉장하구만. 그래도 통증은 남아있어 진통제를 요구했더니 지난 번에 기묘한 영양식을 줬던 그 군의관이 얼음주머니를 올려주었다. 이쪽이 더 낫다나. 그래서 지금, 허리에 얼음주머니를 올려놓고 의무실 침대에 엎드려있다.
……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기 오고나서……가 아니라 오기로 결정된 순간부터 굉장히 많이 다치고 있지 않나 싶은데. 슬슬 이 의무실 침대가 내 방 침대처럼 익숙해져가는 기분이 든다.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재대하길 그토록 바랐건만 어째 이래 잔병치레부터 시작해서 온갖 부상을 다 달고 살게 된 걸까. 이게 다 QB때문이야. ……응? QB가 뭐지? 전생의 기억인걸까.
아, 것보다, 슬슬 뼈가 시려온다. 잠깐 빼둘까.
머리 위를 더듬거려서 줄 같은 걸 잡아당긴다. 얼음주머니를 묶어든 끈이다. 너무 차가우면 이걸 당겨서 잠깐 올리라는 것이, 흐갸악……. 얼음주머니가 올라가며 고여있던 찬물이 옆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많이 녹았나? 그러고보니 찰랑찰랑하는 물소리도 들리는데 슬슬 주머니를 갈아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줄을 잡지 않은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올려두었던 부위를 두드렸다. 윽, 여전히 찌릿찌릿 통증이 올라온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훨씬 나아졌구만. 이제 얼음주머니 안 대고 있어도 되겠다. 훌륭하다 위치의 회복력! 좀 더 훌륭하길 바라는 건 내 욕심이려나…….
꾸르르르르르륵…….
아가씨 배에서 나기에는 심히 민망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사실 나야 아무렇지도 않지만. 여튼 배가 고프다. 하긴 어제 점심먹고나서 아무 것도 못 먹었지. 깨닫고나니까 무진장 배가 고파진다. 그럼 밥 먹으러 갈 크헉?! 허, 허리가! 허리가아앗?!
*****
"오오, 세라! 세~라~아!"
"어서 와, 세라, 아, 루키니! 안돼안돼안돼안돼!"
샬롯의 다급한 외침에 세라를 향해 뛰어들려고 하던 루키니의 발걸음이 멈췄다.
"셜리, 왜?"
"세라 어제 허리 다쳤잖아."
"아, 아앗! 맞아! 괜찮아?"
"아슬아슬하게 괜찮아……."
달려오는 루키니를 보고 긴장했던 탓에 허리에 무리가 왔는지 살짝 얼굴이 어두워진 세라가 한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우리 부대에는 치료마법 가진 사람 없으려나."
"아직까지는 없지. 어쩌면 사카모토 소령님이 후소에서 데려올지도 모르고."
"소령님 탄 배에 무전 때릴 수 있고, 그분이 신병을 데려오실 예정이 있다면, 으읏, 부디 치료마법을 가진 애를 데려와주시면 좋겠어."
"아직도 아파?"
세라가 식탁 의자에 앉는 순간 나직이 신음소리를 낸 것을 들었는지 루키니가 걱정스러운 듯한 얼굴로 물었다.
"어제보다는 나아졌어. 그래도 군의관이 하루 더 뻗어있으래."
평생 침대 위에서 유유자적 느긋하게 살고 싶다면 나가도 좋다고 하더라고. 세라는 그렇게 덧붙이며 샬롯이 받아와준 자신의 식사에 손을 뻗었다. 호밀빵과 야채스프. 그리고 삶은 감자와 베이컨에 딸기. 지금이 전시라는 것과 이곳이 군대라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상당히 호화로운 구성이었다. 게다가 그 양도 성인 두 세 사람은 너끈히 먹을 분량이었다. 물론 세라에게는 한끼 식사였지만.
"그러고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미 먹고 각자 일하러 갔어. 다들 걱정했다구."
"그랬구나. 루키니. 오늘은 뭐했어?"
"응? 웅~ 그러니까아, 셜리랑 놀다가아, 낮잠자다가아, 밥 먹고 스트라이커 유닛타고 날다가, 또 자다가아, 응! 그랬어!"
"그랬구나. 재밌었어?"
"응!"
어린아이다운 대답에 세라는 환하게 웃는 루키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것이 기분좋은지 루키니는 니히히~ 하고 웃었다.
"별다른 일은 없었어?"
"없었어. 굳이 있었다고 한다면, 네 부상 소식을 상부가 철저하게 씹어먹었다는 것 정도?"
"그거야 늘상 있는 일이잖아? 대신 날아올 위문품이나 기다려야지."
어깨를 으쓱하는 샬롯의 말에 세라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씩 웃고는 식사에 집중했다.
실상이야 어찌되었든 세라는 명목상 리베리온이 이로쿼이에서 모셔온 위치다. 그런 인물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면 '후방지원이므로 위험할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호언장담했던 리베리온 정부의 입장이 불리해진다. 그렇기에 리베리온 정부는 우선 정보를 통제하여 세라의 부상을 없는 것으로 하고, 대신 입을 다물고 있어달라는 의미로 이것저것 위문품을 보내오는 것이었다.
약간 늦었지만 그래도 평소와 다름없이 셜리, 루키니와 함께 식사를 하던 세라의 귓가에 뜻밖의 목소리가 들린 건, 마지막 딸기를 놓고 세라와 루키니가 벌인 가위바위보에서 루키니가 이겨 환호성을 지르고 있을 때였다.
"저기……."
"음? 아, 리트뱌크 중위님. 윽, 무, 슨 일이십니까?"
"앉아있어도 되요. 허리 다쳤다고 들었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다시 자리에 앉은 세라가 질문하자 사냐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서리 내린 나뭇가지'를 알고 계신가요?"
"……달빛눈꽃…….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위님께서는 어떻게……?"
"오늘 새벽 0115시경 리베리온 해군 야간수색대 소속 '서리 내린 나뭇가지'중사로부터 교신이 들어왔어요. 처음에는 상냥한 들소를 찾고 있다고 하다가, 나중에 상냥한 들소가 세라 둘리틀이라고 하길래, 같은 부대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고 물어보길래 힘들 때도 있지만 잘 지내고 있다고 대답했어요. 며칠 후면 야간초계비행을 할 테니 직접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하니까 굉장히 기뻐했어요."
"……그렇군요."
사냐의 말에 세라는 뜻밖의 선물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기뻐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물었다.
"……방금 전에 리베리온 해군, 야간수색대, 라고 말씀하셨죠?"
"네. 뭔가 문제라도?"
"어떤 부족의 아이라던가, 누군가의 딸이라고는 하지 않았나요?"
"그런 말도 했어요."
"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세라는 방금 전까지 그리던 미소를 지우고 무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일까? 사냐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알게 된 건 이틀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난 후 였다.
*****
"왜 군에 남은 거니?"
[상냥한 들소가 오는 걸 기다리려고.]
"……고마워. 하지만 난 괜찮아. 그러니까 집으로 돌아가도 돼. 나도 금방 돌아갈 거니까."
[금방 언제? 언제 오는지 알려주면 나도 돌아갈 거야.]
"정확하게 언제일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예전에 내가 말했지? 곧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그러고 다들 돌아갈 수 있었잖아? 그러니까,"
[하지만 상냥한 들소는 못 돌아왔잖아.]
"……."
[돌아오지도 못하고 거기까지 가버렸잖아.]
"……달빛눈꽃아. "
[바보야. 상냥한 들소는 바보야. 왜 맨날 속아? 왜 맨날 손해만 봐? 거기 있기 싫다고 하면 올 수 있잖아. 그런데 왜 참고 있는 거야?]
"……."
여전하구나. 차분하게 보이려고 애쓰고 있지만 명백하게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게 느껴진다.
달빛눈꽃─서리내린 나뭇가지가 올해로 열셋이었지. '저쪽'이었다면 초등학교에 다닐 나이인가. 그런 아이가 진심으로 걱정하여 화를 내주고 있다.
그런 생각에 말문이 막혔다. 고마운데 안타깝고, 기쁜데 눈물이 난다.
"고마워. 걱정해줘서 고마워."
[……알면 얼른 돌아와.]
"응. 금방 돌아갈거야."
[또 거짓말.]
예전에도 한 번 들었지. 그때처럼 거짓말이 아니라 말하고 싶지만 이번에는 진짜 어떻게 될 지 모르, ……아.
"적어도 첫눈이 내리기 전까지는 돌아갈게."
[……정말? 아, 안돼. 너무 오래 걸려.]
"그럼 '휴식의 밤'이 오기 전에."
[그것도 너무 오래 걸려. '손바닥 섬에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 와.]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마 안될 거야. 그러니까 '마음껏 베푸는 날' 전에는 꼭 돌아갈게. 그 이상은 나도 장담못해."
[……그럼 약속해. 그때까지는 꼭 돌아오겠다고.]
"응. 모든 것을 보듬는 위대한 어머니 앞에서 한 치의 거짓없이 약속할게."
문득 떠오른 전생의 기억은 이곳에서의 싸움이 9월에 끝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럼 그 후에 이것저것 정리하고 나면 10월쯤이겠지. 그러면 추석과 추수감사절을 합친 것 같은 '마음껏 베푸는 날' 전까지는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좋아. 늑대와 독수리와 고래가 언제나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사냐도.]
……사냐?
"사냐?"
[응. 사냐.]
"리트뱌크 중위님?"
[상냥한 들소는 사냐를 그렇게 불러?]
……그렇게 안 부르면 원래 큰일나.
"저기, 달빛눈꽃아, 리트뱌크 중위님이라고 해야,"
"괜찮아요."
내가 달빛눈꽃에게 말을 고쳐야한다고 하려고 하자, 리트뱌크 중위님이 그렇게 말했다.
"어,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요. 어제도 그런 거 신경안쓰고 서로 얘기했으니까."
[거봐. 사냐가 괜찮다고 하지? 그러니까 상냥한 들소도 그냥 사냐라고 불러. 리트, 리트…… 그 뭐는 너무 길잖아.]
"아니, 그렇게까지는,"
"괜찮아요. 사냐라고 불러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그리고."
중위님, 아니, 사냐는 변함없이 시선을 앞으로 항햔 채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경어, 안 써도 돼요. 에이라처럼 편하게 말해주세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뻔 했다.
아니, 에이라는 뭐시냐, 이것저것 부딪치다보니까 그렇게 된 거지만, 사냐와는 뭐랄까, 이제 겨우 성+계급에서 이름으로 한 발짝 가까워진 것 뿐이잖아? 그런데 여기서 단숨에 거기까지 올라가란 말인가? 난이도가 단숨이 올라가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사냐의 얼굴이 보였다. 무얼 기대하고 있는 걸까. 설마하니 진짜 편하게 말했다고 군기가 빠졌네,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뭐, 여기에 그런 건 없지. 다른 데는 몰라도 501부대에는 그런 게 없다. 그러고보니까 나 대위인 셜리랑 소위인 루키니와 에이라한테도 말놓고 지내잖아? 이제와서 뭘 새삼스럽게 그런 걸 걱정하고 있는 걸까.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러자 달빛눈꽃의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이제야 서로 편하게 말하는 거야? 하긴, 상냥한 들소는 가끔씩 이상한데서 고집을 부렸으니까.]
"응. 세라 씨는 가끔씩 이상한 일을 해."
[거기서도 그래? 여전하구나. 거기선 뭐해?]
"아침에 해초를 주워와서 먹어."
[진짜? 여기있을 때도 그랬는데? 아, 여기서는 말야……]
갑자기 내가 이상하다는 걸 주제로 두 사람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사냐도 처음에는 조금 말하기 힘들어하더니 어느 새 그 나이 또래답게 잘 말하고 있었다. 일단 내가 걱정하던 군기 어쩌구는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렇긴한데 왜 하필이면 주제가 나인 걸까. 그것만 아니었다면 정말 좋았을텐데.
그런 생각을 마음 속에 담으며, 나는 옆에서 들려오는 두 소녀의 나를 주제로 한 대화를 조용히 들었다.
간간히 두 사람이 왜 내가 그런 행동을 하느냐고 물어볼 때마다 설명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두 사람 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라며 웃거나 어이없다는 반응을 했다. 그렇게 이상한가?
어찌되었든 대체적으로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나와 사냐는 부드럽게 초계항로를 미끄러져갔다.
*****
세 사람의 대화가 끝난 건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
시차 문제도 있었지만 야전초계라는 본래의 임무로 인해 더 이상 대화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거기에 원래 레이더 마법에 재능이 없었던 데다가 허리 통증까지 합쳐져 세라의 피로가 가중된 것도 있었다.
다들 아쉬워했지만 다음날을 기약하며 통신을 종료하였다.
그후 사냐와 세라는 챙겨갔던 간식거리와 보온병 속에 넣어둔 홍차로 피로를 달래고는, 원래의 일정대로 야간초계임무를 끝마친 후 무사히 기지로 귀환했다.
*****
미칠 듯이 졸렸다.
또 허리를 삐끗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무사히 레이더를 내려놓자마자 긴장이 풀리더니, 곧바로 정말 미칠 듯한 졸음이 밀려왔다. 분명 눈을 뜨고 있는데 시야가 희뿌옇고, 발을 땅에 디디고 있는 것 같은데 어딘가 둥실둥실 떠오르는 기분이다. 안돼, 정말 한계다. 어서 방으로 가야한다. 아, 사냐는 어디있지?
"후아아아암……. 사냐. ……사냐?"
불러도 대답없는 그대. 뭐라는 거니. 헛소리가 마구 튀어나오는 걸 보니 진짜 위험하다.
사냐는 스트라이커 유닛 거치대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아무래도 잠깐 앉았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린 것 같았다.
"사냐. 사-냐. 일어나. 방에 가서어…… 후우. 자야지."
"우웅……."
잠깐 몸을 꿈지럭거리는가 싶더니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에구 어쩔 수 없나. 업어다 줘야지. 얼른 침대에 눕혀주고오…… 후암. 나도 얼른 뻗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사냐를 등에 업고 사냐의 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 안돼. 너무 졸려. 자고 싶, 으헉?! 벽에 들이박을 뻔했다. 아아, 위험해. 한계야.
어떻게든 잠들지 않으려고 고개를 옆으로 흔들고 헛소리를 중얼거리며 간신히 사냐의 방으로 짐작되는 곳의 문고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침대로 보이는 것을 향해 돌격. 그리고는 곧바로 등에 업고 있던 사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으음……. ……우와으아우앗?! 뭐, 뭐야?! 뭐야?! 뭐야?!"
"어, 에이라. 안녕. ……왜 사냐 방에서 자고 있는 거야?"
"무무무무슨 소리하는 거야, 너?! 사냐 방은 옆방이라고! 여긴 내 방이야!"
"……아, 아아…… 아, 몰라몰라. 그냥 재워. 나도 이제 내 방으로 돌아갈 체력밖에 없으니까아아……후아아암……. 아, 사냐. 옷은 벗고 자야지."
"우와아아앗?! 너너너너 무슨 짓을?!??!"
사냐의 옷을 벗기고 있자니 외야가 시끄럽다. 아, 정말 귀찮게스리……. 비몽사몽간에 사냐의 옷을 벗기고, 배게를 놓고,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옷은 대충 개어놓고 침대 아래쪽에 놔두었다.
"그럼 간다……."
그렇게 말하며 엄지를 척! 왜 했는지는 모르겠다. 졸리니가 별의별 헛짓거리를 다하는구나.
등뒤로 에이라가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
…….
……헛?!
순간 의식이 사라졌었다. 다리에서 힘이 빠졌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내라 대뇌! 아직 침대의 도원향에는 닿지 않았어! 이불의 천국이 눈앞이다! 버텨라! 조금만 더 버티면 돼!
그 순간 기상나팔이 울려퍼졌다.
빰 빰 빰빰빰 빰빰빰빰 빰빠라밤 빰빰빰 빰빰빰──
……동시에 정신이 되돌아왔다. 벽이 마치 전우인양 외치고 있었다. ……진짜 위험하다. 복도에서 뻗어버릴 것 같아. 얼른 방으로 돌아가자.
가까스로 방에 도착해 침대가 나를 향해 날아오는 장면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잠들기 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에이라의 외침과 세라 씨의 웃음소리가 멀어져간다.
처음으로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된 건 그 사람의 요리를 먹었을 때였다.
전혀 다른 재료로 만든 전혀 다른 요리인데도, 이제는 몇 년이 지난 옛날에 먹어본 게 된 어머님의 요리가 떠올랐다.
울고 싶고, 가슴이 따듯해지고, 어딘가 안도하게 되는 그런 맛이었다.
그때부터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다음은 등에 업혔을 때였다.
야간비행을 끝내고 기지로 돌아와서 졸릴 때, 몇 번이고 나를 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따듯하고 든든한 등이었다.
옷을 갈아입혀주고,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를 쓸어주는 손길의 온기는 잠결에도 정말 따스하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즐겁게 대화할 수 있는 또래아이와 대화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고요한 밤하늘을 홀로 조용히 날며 가끔씩 누군가와 QSL카드를 교환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같은 나이의 아이와 이야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런 내 앞에 세라 씨를 찾는 달빛눈꽃이 나타났다.
이것저것, 여러가지를 이야기하는 색다른 즐거움이 너무 기뻤다.
의지하고 싶은 사람.
기대고 싶은 사람.
행복을 나눠주는 사람.
아직 말하지 못했지만,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고마워요.
*****
- 저는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설정이 필요해지면 그때서야 설정을 만드는 타입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얘기가 꼬이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다 열받으면 일단 던져버립니다. 그리고 쉬다가 다시 씁니다. 그러니까 정리한다는 말이 제 입안에서 나온다면 그건 설정도 없이 막 써둔 걸 주섬주섬 기우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고로 시간이 엄청 걸린다는 거죠. [야]
- 세상에 이럴 수가! 배달부와 마탄의 사수가 올라왔어! 게다가 이 조야한 팬픽을 보고 위치스 팬픽을 써주시는 분들이 생겼어! 오오오오! 위치력이 상승한다! 지금이라면 1기 진입까지 필요한 5화 분량이 한 달이면 충분할 것 같아! ……음?!
- 7월 4, 5, 6 동아리 MT를 다녀왔습니다. 계곡이다! 술이다! 고기다! 하하핳하하핳!
- 배드섹터와 키보드 고장의 벽을 뚫고 간신히 주말 업데이트 완료……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뚫지 못했습니다.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p.s 다음에는 [다시 한 번 별의 바다로 - 4화]를 올릴지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 18화]를 올릴지 고민중입니다.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18
나무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못해 울고있는 새끼 고양이를 구하려 했다. 고양이는 구했지만 마지막에 실수하는 바람에 미끄러져 떨어져버렸다.
다행히 나뭇가지에 옷이 걸려 떨어지는 건 피할 수 있었다. 선생님에게 위험한 일을 했다며 혼이 났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구하고 싶었으니까. 끝에 엉망진창이 되기는 했지만 확실히 구했으니까. 그러니까.
"으읏……."
"밋짱!"
약상자도, 붕대도, 아무 것도 없다. 근처에 쓸만한 풀이 나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그걸 찾을 여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양손을 상처 위에 올리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마력을 끌어올린다. 사역마와의 융합. 그 결과로 마메시바의 귀와 꼬리가 돋아난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마법을, 치유마법을 사용하는 것 뿐.
"조금만 참아……!"
푸르스름한 빛과 함께 따스한 온기를 품은 마력이 우리를 감싼다.
"제발……. 제발……."
이번에도 구할 수 있기를. 그런 생각을 하며 소중한 친구에게 치유마법을 건다. 하지만 쉽사리 낫지 않는다.
엄마라면, 할머니라면 금방 치료할 텐데. 나는 왜 이렇게 못하는 걸까. 잘 하고 싶은데. 이런 건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미치코! 정신차려라!"
안돼. 정신 차려야 한다. 할아버지의 외침에 간신히 정신을 되돌린다. 집중해야 해.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구해야 한다.
입학식 전에 아버지와 했던 약속을 위해서. 구하고 싶다. 소중한 친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몸은 점점 더 지쳐간다. 숨이 가빠지고 눈앞이 흐릿해진다. 어째서? 왜? 난 할 수 없는 거야?
"진정해라, 미야후지."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덕분에 순간 끊어질 뻔했던 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집중해라. 의식을 흐트러뜨리지 마라. 어깨에 힘을 빼고, 마법을 제어해라."
엄하면서도 상냥하고, 굳은 심지가 느껴지는 말투. 엄마보다 젊은 것 같은 여성의 목소리. 누구일까.
아니,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지금은 눈앞에 집중해야 한다. 집중하고, 의식을 흐트러뜨리지 말고, 어깨에 힘을 빼고, 제어한다.
그러자 마력이 한 곳으로 모이며 눈에 띌 정도로 빠르게 상처가 회복된다.
다행이다, 라고 생각한 순간, 눈앞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
……어어어어어어어…….
"미나."
"응."
사카모토가 본국으로 가면서 그 빈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한 오랜 전우─바르크호른의 부름에 미나는 여공작이라는 그녀의 별명에 걸맞는 우아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보고 있던 서류를 옆으로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양손을 깍지껴 머리 위로 쭉 폈다. 그 다음은 심호흡. 간단한 스트레칭을 끝낸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자리에 앉았다.
그 모든 동작이 완료됨과 동시에 그녀의 집무실 문이 열렸다. 아니, 박살나듯 제껴졌다.
쿠당탕탕탕!!!
"미나 중려어어어어어어엉!!!!!"
미나는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경첩이 날아가든 문짝이 부서지든 둘 중 하나의 길을 걷게 될 것 같은 자신의 집무실 문의 미래를 상상해보며 급작스럽게 쳐들어온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박살나지 않은 게 용하다 싶을 정도로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묘령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거의 뛰어오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빠르게 걸어와 미나의 책상을 양손으로 후려치며 외쳤다.
터엉!!
"저 녀석이 어째서 항공보병이야?! 넘겨!"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압도할 것 같은 기백이었다. 그러나 그 기백을 정면으로 받아낸 미나는 담담하게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복장과 계급장을 보아하니 카를스란트 육군 중령이었다. 그것을 본 미나는 일단 조금 마음을 놓았다. 같은 국가에 같은 계급이면 그나마 상대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일단 그녀는 옆에 있던 바르크호른에게 눈짓을 했다. 여차하면 던져버려. 그런 의미였다.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싶겠지만 사카모토가 본국으로 간 후 요 며칠 사이, 서신으로, 통신으로, 전보로, 그리고 이렇게 방문을 빙자하여 직접 집무실까지 쳐들어와 때를 쓰는 장갑보병 장교들 때문에 미나의 처치는 상부에서도 어느 정도 눈감아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어찌되었든 의례상이라도 인사는 해야했다.
"네,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저기 저 녀석 넘겨! "
"마음에 든 병사라도 발견하신 건가요?"
"말 돌리지 마, 미나 중령! 저 녀석! 지금 88mm들고 날고 있는 저 녀석!"
"아, 그 아이라면 수송대 소속이라 옮겨두는 것 뿐입,"
"웃기지 마! 쏘는 거 봤어! 무장 빈약하기로 소문한 항공보병이 88mm를 쐈다고! 하늘에서! 게다가 스트라이커 유닛에 2연장 M2도 붙어있었어! 젠장, 왜 저런 녀석이 장갑보병이 아니라 항공보병인거야?! 넘겨! 넘겨, 중려어어어엉!!!!"
하필이면 세라가 훈련중인 걸 본 건가. 타오르는 장작에 기름을 쏟아부은 격이었다. 게다가 추가무장도 확인했나. 어쩔 수 없네.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같은 계급의 여성이 내지르는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에 미나는 옆에 서 있던 전우와 눈을 맞춘 후,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던져버리고 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내려진 결정이었다.
바르크호른 역시 대답삼아 고개를 끄덕인 후, 직속 상관의 명령에 따라 같은 조국 출신인 육군 중령을 어깨에 들쳐맸다.
"뭐, 뭐야?! 안돼, 이거 놔! 이거 놔! 대위! 이거 놔! 젠장, 중령! 이런 식이면 후회 할 거야! 중령! 미나 중령! 이런다고 포기할 줄 알아?! 웃기지 마! 저 녀석은 장갑보병이 되야돼! 항공보병 따위로 남을 게 아니야! 중령! 중령…… 내놔…… 저 녀석…… 열차포가…… 희망이……."
메아리가 울리듯 도플러 효과를 내며 사라져가는 목소리를 들으며 미나는 어깨에 힘을 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이걸로 대체 몇 번째인지. 자연스럽게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힘든가보네, 미나."
"……아, 에리카."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뜨자 이 있었다.
미나는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하소연하듯 입을 열었다.
"말도 마. 도대체 전선은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 건지. 어떻게 하면 저렇게 매일매일 다른 사람이 올 수 있는지 모르겠어. 그것도 카를스란트 뿐만이 아니야. 갈리아, 로마냐, 오란샤, 스옴스, 리베리온, 거기에 북아프리카 전선에서까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장갑보병 전우회인가 뭔가를 조직해서 틈을 메꾸며 한 사람씩 파견하고 있다는데?"
"……."
이 인간들이 하라는 전투는 안하고 멀쩡히 잘 있는 전우회를 무슨 용도에 쓰는 거야.
엄습하는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지듯 책상 위로 엎어지는 미나의 모습에 에리카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세라 인기 많네. 그럴 거면 진작에 데려가지."
"……그러게."
아무도 데려가려 하지 않았던 굼벵이 마녀. 그것도 정치 문제를 부록으로 달았던 소녀. 그것이 이제는 모두가 바라마지않는 최고의 인재가 되었다.
세상은 정말 살고 봐야 하는 일이구나. 높은 자리에서 온갖 사건들을 보아왔음에도 항상 세상이 신기하다고 느끼게 되는 젊은 지휘관의 뇌리로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동시에 저 멀리서 묘령의 여성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길고 아득한, 어쩐지 긴장감을 느낄 수 없는 희극적인 느낌이 드는 비명이었다. 바르크호른이 돌아온 건 그 비명소리가 사라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방금 전의 난폭한 방문객과는 달리 얌전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는 약간 지친 듯 하면서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구스타프, 라는 게 뭔지 알아?"
"음, 분명히 몇 년 전에 만들던 대포였던 것 같은데……. 함포와 같은 대구경 포를 열차로 실어날라서 쏜다고 했던가……. 그게 왜?"
"같이 온 육군 부대원 전원이 그 녀석만 있으면 구스타프를 제식 장비로 채용할 수 있다면서 울면서 달라붙어 오길래."
"……."
"……."
한 번 쏘면 선로를 수리해야하고 기동성도 떨어져서 결국 다들 필요없다고 하며 십 몇 년 전에 버려버린 무기를 이제 와서 다시 쓰려고 하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여기나 저기나 왜 그렇게 다들 괴상망측한 무기에 목숨을 거는 건지. 미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전선이 밀려서 급하게 보내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당최 납득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이유로 요긴하게 써먹고 있는 병사를 달라고 하면 당연히 보내줄 리가 없다.
그런 미묘한 침묵에 잠긴 집무실로 육군 마녀들의 외침이 새어들어왔다. 오늘이 끝이라 생각하지 마라.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설령 쓰러지더라도 우리의 뒤를 전우들이 이을 것이다. 대충 그런 내용인데, 아무리봐도 패배한 악당이 도망치면서 내뱉는 대사다. 미나의 머리 속에 조국을 잃어버린 충격이 너무 커서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린 카를스란트 마녀들이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유아퇴행현상 등의 정신질환을 보여준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그런 종류인가. 아니, 진짜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세라는 이런 거 알고 있어?"
"모르고 있는 것 같던데. 그 녀석은 의외로 자기 일에는 무신경하니까 육군에서 직접 말을 걸지 않으면 분명 왜 외부인들이 자기를 노려보나 하는 생각만 하겠지."
바르크호른의 대답에 미나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혼혈소녀는 자기 일에는 둔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어찌되었든 세라를 육군부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비행제어로 화력도 부족하고 탄약 적재량도 부족하여 만성적인 화력 부족에 시달리는 항공보병들에게 있어 보급과 화력을 모두 충족시켜주는 세라의 존재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 말은 결국 골치아픈 육군 마녀들을 계속 상대해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군인들에게 부끄럽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아……."
미나 디트린테 뷜케. 신경쓸 일이 갑자기 늘어나 최근 잠 못 이루는 밤과 원인을 알 수 없는 속쓰림이 늘어난 501 부대 지휘관.
이도저도 못하고 한숨만 쌓여가는 매일매일이 너무나 고단한 낭랑 18세. 최근 피로도 급상승중.
*****
퍽. 퍽. 퍽. 퍽. 카각카각카각……. 퍽. 퍽. 퍽…….
넓적한 돌 위에 놓여진 꽃과 풀이 짓이겨진다. 형체가 점점 사라져갈 때마다 쌉싸래한 풀내음과 향기로웃 꽃내음이 뒤섞여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반쯤 곤죽처럼 된 그것을 엉성하게 짠 천으로 감싸 네모난 형태를 만들고, 이번에는 촘촘하게 짜인 면 위에 얹어 조심스럽게 감싼다.
세라는 그렇게 만든 타박상용 약을 페리느에게 건네며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만들어."
"즙을 내서 액체만 쓰는 게 아니군요. 굳이 나머지 부분을 다 집어넣는 이유는 뭔가요?"
"글쎄.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난 쓸 수 있다고만 배웠지, 왜 이렇게 하는지는 안 배웠으니까."
"약효는 비효율적인 것 같지만, 그렇게 감싸두면 휴대하기는 편리하겠네요."
페리느의 말에 세라는 고개는 천천히 가로저으며 말했다.
"악효도 이쪽이 더 좋아."
"어라, 그런가요? 흠, 알 수 없는 일이……"
페리느의 말이 끊어진 건 어느 새 서너 마리의 지렁이를 슬그머니 손에 쥔 세라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기분 탓인지 세라의 눈매가 희미한 열기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페리느는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둘리틀 씨? 그 지렁이들은……?"
"방금 여기서 잡았어."
"뭐에 쓰시려구요?"
"텃밭에 풀어놓으려고."
다행스럽게도, 굉장히 정상적인 대답이었다. 설마하니 젤리처럼 보인다고 먹어보려고 했던 것이라면,
"젤리처럼 생겼는데 한 번 먹어볼,"
"당연히 안되죠!"
번개처럼 내떨어진 불호령에 세라는 아무 것도 없는 반대쪽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지금은 먹는 것보다는 텃밭에 풀어두고 지력을 끌어올리는 쪽이 훨씬 좋으니까."
"당신이 말하면 농담처럼 들리지가 않는다는 건 알고 계시지요?"
"거짓말을 안 하니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구요."
페리느는 그렇게 말하고는 작은 한숨을 내쉬웠다. 처음 보는 사람 같았으면 '이런 야만인!' 하고 쏘아붙였겠지만, 벌써 몇 번이나 사선을 함께한 동료로 서로를 인정하고 있는데다가, 이 기지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확실하게 효능이 검증된 민간요법 지식 보유자이다. 무엇보다도 야만인이라고 한다한들 "너희들 시선으로 보면 우리가 야만인이지만, 우리 시선으로 보면 너희가 야만인이지." 라고 되받아치니 별 효과가 없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지렁이를 먹는 등의 행동은 자제해주세요. 컬쳐쇼크 이전에 배려를 해주시라구요."
"참고할게. 흠, 컬쳐쇼크라. ……아크 데카르챠……. 문화폭탄으로 4턴 이내 영토를……."
세라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기 시작했지만 가끔씩 있는 일이었기에 익숙해진 페리느는 그걸 무시하고 방금 제작한 타박상 약을 챙긴 후, 재료였던 약초의 형태와 효능, 그리고 사용법을 챙겨온 공책에 적기 시작했다.
잠시 후 페리느가 기록을 완료하고 일어서자, 세라 역시 천천히 허리와 다리를 폈다. 손에는 지렁이 몇 마리를 가볍게 움켜쥔 체였다.
"점심식사 전에 손 꼭 씻으세요."
"명심할게."
말하지 않더라도 위생에 엄격한 세라는 식사 전에 손을 씻을 것이다. 그래도 굳이 말한 건 지렁이를 먹어보려 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려 하는 것이다.
별 효과는 없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말이라도 한 마디 내던지는 게 속편한 법이니까.
작은 한숨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던 페리느의 시선에 또다른 인물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어? 여어. 뭐하는 거야, 둘이?"
"약초에 대해서 좀 알아보고 있었어요."
"……지렁이는 뭘 하려고?"
"먹으려 했는데 페리느가 막아서 텃밭에 풀어두려고."
세라의 대답에 셜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좋은 토마토가 있어도 그걸로 스파게티를 만들기는 힘들 것 같은데?"
"요리사의 재량에 따라 달라지지."
"생으로 먹으려고 하시고서 요리사의 재랑 같은 단어를 운운하는 건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렇게 따지면 후소의 회는 어떤데?"
"생선과 지렁이를 동급의 식재료로 두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동감이야."
두 사람의 지적에 세라는 '그런가?' 하는 듯한 얼굴로 가볍게 넘겨버렸다. 그 모습에 두 사람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애초에 식재료의 범위라는 주제를 놓고 세라와 논의한다는 것인 한없이 어려운 일이었다. 포기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운 일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여기까지 온 거야? 슬슬 점심시간인데."
"아, 맞아. 혹시 루키니 못 봤어?"
"루키니? 아침 시간에 보고 그 뒤로는 못 봤는데?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데, 아까 얼굴이 빨갛길래 이마를 대보니까 열이 조금 있더라고. 그래서 의무실에 가자고 했더니 도망쳐 버렸어."
셜리의 말에 세라는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말했다.
"병원이 싫을 때니까. 아픈 바늘이라던가, 쓴 약이라던가. 좋아할만한 게 그리 많지 않은 곳이지."
"안 가면 나중에 아파서 더 고생하는 거 알면서도 그런다니까."
"'지금'은 안 아프잖아. 괜찮아질 거라고 믿는 거야. 어찌되었든 사나흘 고생해야겠네."
"얼음 주머니랑 물수건 필요하겠지?"
"응. 해열제랑 감기약은 의무실에서 받으면 될 거고."
능숙하게 할 일을 정해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 페리느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식 딸린 아주머니들 같은 대화네요."
"실례로구만. 이제 열 여섯인데. 세라라면 모를까."
"금슬 좋은 부모님이 동생으로 다섯 살 넘게 차이나는 남녀 쌍둥이를 떠넘기면 누구나 이렇게 될 거야, 셜리."
어찌되었든. 세라는 화제를 바꾸듯 그렇게 화두를 던졌다.
"루키니라면 이 기지 곳곳에 숨겨둔 비밀 기지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데……. 찾으려면 쉽지 않겠군. 배가 고프면 나오려나?"
"농담한 거라고 생각할게. 그러니까, 도와줄 거지?"
셜리의 물음에 세라는 허리를 굽혀 지렁이들을 땅에 놓아주고는 손을 털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럼 우리 꼬마 소위님을 찾으러 가보실까. 세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기지개를 쭉 켜며 어슬렁거리는 듯 하면서도 제법 빠른 속도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셜리 역시 결코 느리지 않은 걸음걸이로 그 뒤를 따랐다.
"감기라면 뭐가 원인일까?"
"날씨 더워졌다고 이불 걷어차고 자서 그런 걸 거야."
"더워도 배는 꼭 덮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하아……."
"이번에 앓고 나면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지."
"앓기 전에 조심해주면 좀 좋을까."
페리느는 그런 대화를 나누며 떠나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역시 자식 딸린 아주머니들 같다고.
*****
점심 나절 내내 찾았지만 결국 루키니를 찾지 못했다.
셜리가 미리 미나 대장님한테 말해둔 덕분에 오후 일과에서 빠진 건 다행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기지 곳곳에 숨겨져 있는 비밀기지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루키니를 찾아낸다는 건 상당히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얘는 비밀기지를 하루에 한 개 씩 만든 건가 싶을 정도의 숫자도 숫자거니와 그게 숨겨진 위치들도 참으로 절묘해서, 잠깐 집중력을 잃으면 그대로 지나쳐버리다보니 계속 신경을 써야했다. 피곤한 일이었다.
게다가 점심도 못 먹었고. 중간에 하르트만 중위님이 과자 몇 개 쥐어주신 게 전부다. 정말로 감사했지만, 솔직히 간에 기별도 안 갔다. 그렇다고 아파서 앓고 있을지도 모를 애를 내버려두고 밥 먹으러 갈 수도 없고. 짜증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것보다 부대 내에 외부인들이 돌아다니던데 무슨 일일까. 복장을 보아하니 육군 마녀들 같던데. 그리고 대체 나는 왜 그렇게 바라보는 거야?
여튼 그렇게 점심도 못 먹고 셜리와 함께 기지 전체를 뒤지다시피한 결과, 저녁 때가 되서야 간신히 격납고 뒷구석에서 모포를 뒤집어 쓴 체 끙끙 앓고 있는 루키니를 찾을 수 있었다. 여기 분명 네 번 정도 뒤졌었는데 왜 못 찾았던 걸까. 말년병장의 은신 스킬은 소위가 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시덥잖은 농담은 둘째치고, 한눈에 봐도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루키니를 업고 의무실로 향했다. 싫다고 칭얼거리며 등에 이마를 비비는 게 느껴졌지만 그 이상의 저항은 없었다. 그럴 체력이 안되는 것이리라.
"감기네요."
내게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을 주재료로 한 영양식을 주었던 군의관 아가씨는 루키니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고, 간단한 검사를 마친 후에는,
"영 좋지 않은 감기네요."
라고 말했다. 이보시오, 군의관 양반. 그게 무슨 소리요? 내 물음에 앨리스는 주사바늘을 준비하며 대답했다.
"감기가 악화되는 기운이 보여요. 마녀들은 저항력이 높아서 어지간하면 폐렴까지 안 가는데, 혹시 모르니 주사 한 방 놔드리지요."
"히잉……. 주사 싫어어……."
루키니가 칭얼거린다. 울상인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러나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앨리스는 루키니의 팔을 낚아채 소매를 걷어올리고는, 알코올에 적신 솜으로 주사 놓을 곳을 소독하기 시작했다. 소아 주사는 엉덩이가 낫지 않던가? 양학적 의학 지식이 없으니 모르겠다. 전문가가 하는 일에 그냥 따라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린 루키니의 얼굴을 품에 안아주었다.
찰싹. 찰싹.
"힘 빼시고~."
"히익……. 우으으으으……."
"네, 끝났습니다."
번개 같은 속도로 주사가 끝났다. 주사량이 꽤 되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넣었다는 건 냅다 밀어넣었다는 거 아닌가? 그거 무진장 아프잖아? 실제로도 루키니는 알코올 솜으로 주사 부위를 누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미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모이고 있었다. 루키니가 아니더라도 이런 주사는 맞기 싫을 거다. 애초에 주사 맞는 거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가만. 이 철저한 효율주의 치료법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험한 것 같은 기분이……. 그 간호장교 언니! 이 아가씨도 그 언니 계통이었나!
"실천주의 학파의 행동력은 타 학파의 추종을 불허하지요."
품에 파고드는 루키니의 등을 토닥여주며 범인을 발견한 토끼와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그런 소리를 하는 군의관 양반. 이 사람이 진짜. 여기가 최전방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전투중도 아니잖아. 좀 더 어린애한테 맞는 방법을 쓰라고. ……아니, 뭐? 학파? 지금 그런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건가? 안돼, 맙소사. 알 것 같아! 왜 위치스 주인공이 사랑받았는지를! 치유마법 쓰잖아? 안 아프잖아? 그러니까 사랑받을 수 밖에 없지!
쓰잘데기없는 전파를 수신한 머리를 휘휘 젓고는 우선 루키니를 일으켜 세웠다. 아픈 몸 이끌고 대체 뭘 했는지 흙이며 뭐며 꼬질꼬질한 것도 씻겨야하고 있다가 약도 먹어야 하니 간단하게나마 뭐라도 좀 먹여야 한다. 얼음 주머니랑 물수건이랑 갈아입을 옷 같은 건 셜리가 준비한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고.
그렇게 앞으로의 해야할 것들을 생각하며 앨리스에게 감기약이랑 해열제 좀 달라고 말하고 있자니, 무언가가 상의 끝을 잡아당겼다. 고개를 숙이니 루키니의 모습이 보였다.
"업어줘어……."
눈물이 그렁그렁. 이제는 옆으로 한 방울 또르륵 흘러내린다. 그 눈물을 닦아주며 생각해본다. 응석부리는 걸 계속 받아주면 성숙한 어른이 되기 힘들다고 한다지만 어찌해야할까. 건강하다면야 당연히 거절했겠지만 감기, 그것도 꽤 심해서 악화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무작정 거절하기도 그렇다. 진짜 어찌해야하나.
어쩌긴 뭘 어째.
"자."
"……웅."
무릎을 굽히고 등을 내밀자 익숙한 무게가 느껴졌다. 평소보다 조금 더 따듯하다. 사실은 따듯한 게 아니라 열이지만.
어찌되었든 결국 업어주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이 기지에 루키니에게 엄격한 사람은 많고, 셜리도 은근히 엄격하다. 그리고 응석이란 건 이럴 때 받아줘야 하는 거지. 아플 때.
뭘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고 있나. 나한테 여유가 있고 아픈 아이가 있으면 도와주는 거지.
우선 씻겨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우리 기지가 자랑하는 대목욕탕으로 향했다.
*****
아버지는 돌아가셨을 거라 생각했다. 그 편지가 오기 전까지는.
브리타니아. 저 먼 곳에 있는 후소와 같은 섬나라에서 온 편지. 그 안에는 두 장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하나는 아버지의 사진. 다른 하나는 밋짱에게 치유마법을 쓰다 쓰러진 나를 집까지 데려다 준 군인인 사카모토 씨와 아버지,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가운데 처음 보는 기계를 놓고 찍은 사진. 사진 속의 사카모토 씨는 어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려보였다. 몇 년 전에 찍은 사진인걸까.
"어째서 지금에서야……."
할머니는 아버지의 사진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셨다. 어머니도.
아버지는 살아계시는 걸까? 살아계신다면, 그렇다면 왜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셨던 걸까. 말못할 사정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면 또 군 기밀이라는 것 때문일까. 모르겠다.
그저.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
입학식 때 왜 못 왔는지, 왜 약속을 못 지켰는지,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그런 의문들도 산더미 같지만 우선은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 만나서, 우선은 만나서, ……그 뒤는 그 다음에 생각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사카모토 씨, 였었죠?"
"……그래."
"저, 내일 만나보고 올래요."
살아계신지 어떤지, 살아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그 모든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지금으로선 이 사람 뿐이니까.
내 말에 할머니와 어머니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셨다. 잠시 눈을 마주친 후, 먼저 움직인 건 할머니셨다. 할머니께서 고개를 고개를 끄덕하고 움직이시자, 어머니께서 나를 돌아보시고는 말씀하셨다.
"그러렴."
*****
갈아입을 옷을 챙겨온 셜리가 루키니를 씻기는 사이, 난 먼저 저녁을 먹었다. 점심을 걸렀지만 신경쓸 게 많다보니 영 식욕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네우로이 발견한 일반 비행기 조종사 같은 얼굴로 저를 보는 건 그만둬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501부대원 여러분? 스스로도 많이 먹는다는 건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직접적으로 바라보면 저도 기분이 묘하거든요?
여하간 식사를 마치고, 루키니에게 뭘 먹여야 할까 고민하고 있자니 쌀이 눈에 들어왔다. 부대 내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사카모토 소령님이 본국에 가시면서 남아돌게 된 것이다. 그러고보니 밥을 했으면 누룽지를 파서 끓여 먹였으면 좋았을 텐데. 루키니를 좀 더 일찍 발견했다면 그렇게 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와서 그런 거 생각해봤자 무엇하리. 일단 죽이나 끓이자. 파와 당근을 잘게 썰어 넣으면 맛도 좋고 겉보기에도 괜찮을 것이다. 간은 소금과 후추로 맞추면 되고.
반찬은 뭐가 좋을까. 생강, 오미자, 도라지 같은 건 구하기 힘들 테고. 미역 같은 건 질색할 것 같으니 일단 빼두고. 쌉싸래한거나 짭쪼름한 거나 뭐 없나.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홍합이라도 캐두는 건데. 전복은 아무래도 힘들고. ……또 쓸데없는 걸 후회한다. 정신차리자. 일단 반찬은 나중에 생각하자. 죽도 제대로 먹을 수 있을지 어떨지 의문이니까.
"치킨수프는 어때-? 영국에서는 감기에 걸리면 치킨수프를 먹는다는데-. 마침 재료도 있고-."
"손질된 닭고기가 있던가?"
"냉동된 건 있어-."
"그럼 내일은 그걸 먹여야겠네."
에이라의 의견은 일단 내일로. 다른 데 같았으면 지엄하진 소위님의 고귀한 제안에 냉동닭을 가슴에 품고 녹여서라도 당장에 치킨수프를 만들어내야 했었을 테지만 우리 부대는 그런 게 없으니까. 그리고 치킨수프 만드는 방법도 모른다. 브리타니아 출신인 부대원이 있으면 물어볼 텐데. 그러고보니 이 부대 브리타니아에 있으면서 브리타니아인은 한 사람도 없네. 있을 법도 한데. 나중에 들어오려나? 이야, 신난다! 후임이다!
……아냐, 생각해보면 위치는 다들 부사관부터 시작하잖아? 운이 좋아 나랑 같은 계급이라면 모를까, 다른 부대에서 전입된 거라면 나보다 계급이 높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여긴 에이스 오브 에이스들이 모인 마굴이잖아? 격추횟수가 세 자리 수에 달하는 초베테랑이 올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인간들이 우리 부대에도 둘이나 있잖아? 차라리 안 오는 게 훨씬 나을지도 모르겠다. 응.
쓰잘데기없는 상상을 하면서도 손은 쉬지 않는다. 죽을 끓이고, 파와 당근을 썰어넣고, 냉동실에서 닭을 꺼내 냉장실에 넣어둔다. 그리고 페리느에게 부탁해 얻은 말린 허브를 잘 빻아 솔솔 뿌려 넣고 기다리기를 몇 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이 완성된다. 향은 그럭저럭 괜찮다. 맛도 싱겁기는 하지만 환자에게 줄 것이니 짜고 자극적일 필요는 없으니 소금과 후추는 아주 조금만 넣는다.
"맛있어 보이네요."
"조금 먹어볼래?"
내 제안에 사냐는 아픈 루키니가 먹을 걸 자기가 먹을 수는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착한 아이다 정말로.
야간 초계 비행을 나가는 사냐에게 루키니에게 저녁을 먹이고 곧바로 갈 거라 말하고, 준비해둔 쟁반 위에 죽을 담은 그릇과, 물잔, 수저를 놓고 들어올렸다. 가야할 곳은 루키니의 방. 루키니를 씻기고 곧바로 방으로 옮기자고 아까 셜리와 얘기했다. 지금쯤이면 방에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쟁반을 들고 있었기에 발로 문을 두드리자 셜리가 나왔다.
"루키니는?"
"옷 갈아입히고 방금 침대에 눕혔어."
"잠든 거 아니지? 죽 좀 먹이고 약 먹이고 재워야 되니까."
내 말에 셜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우리도 참 부산을 떠는구나, 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니.
그걸 알고있기 때문인지 셜리는 루키니를 천천히 일으켰다.
"루키니, 일어나. 저녁 먹어야지."
"우웅……. 싫어어……. 안 먹을래애……."
"안 먹으면 약 못 먹잖아. 그럼 계속 아프단 말야. 자, 눈 뜨고."
"싫어어……. 히잉……."
칭얼대고 투정부리는 아이는 싫어한다. 하지만 그게 아파서 그러는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솔직히 루키니가 이렇게 투정부리고 있기는 하지만 땡깡부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다. 우리집 쌍둥이들은 아프면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아픈 녀석들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고집을 부리니 원. 약 먹이는 것도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루키니를 사이에 두고 셜리의 맞은편에 앉아, 죽 한 숟갈 퍼 후후 불어 식힌 뒤 몽롱한 시선으로 칭얼거리고 있는 우리 꼬마 소위님의 입가로 가져갔다.
"자, 아─."
"……."
묶지 않고 흘러내리는 생머리와 열 때문에 몽롱한 눈동자는 평소의 루키니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동일 인물이라고 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흐릿한 시선은 분명 희미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는 죽을 확실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 이후 아무 것도 안 먹었을 테니까 분명 식욕은 없지만 배는 고픈, 그런 이상한 상태일 것이다.
그런 내 예상이 맞았는지 루키니는 곧 수저에 입을 대더니, 후룩후룩 죽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숟가락을 기울여 먹기 좋게 해주었다. 그렇게 서너 숟갈쯤 먹이니 내가 불편해져서 그릇을 잠시 셜리에게 맞긴 후, 루키니를 품에 안고 다시 그릇을 들었다. 이러니 좀 편해지는구만.
그러는 동안 셜리는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가는 것이다. 있다가 다시 올게. 입모양만으로 말하는 셜리에게 알았다는 시선을 던진 후, 죽 먹이기에 집중했다.
이러고 있자니 동생들 먹일 때가 떠오르네. 싫다싫다 그러면서도 입에 수저를 들이밀면 그때부터는 얌전히 받아먹었지. 녀석들 감기 걸리지는 않았겠지? 꼭 같이 감기 걸려서 사람 힘들게 한다니까. 아버지는 바깥일 보셔야하니 어머니 혼자서 그 둘 뒤치다꺼리 하셔야 할 텐데. 괜찮을까. ……애들이.
얘들아, 어머니는 아프다고해서 봐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지?
간만에 집을 생각하며 한 두 숟갈 계속 먹이다보니 어느 새 그릇은 바닥을 보였다. 죽이 겉보기에는 많아보여도 사실 양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 더 가져다줄까, 하고 묻자 루키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 약을 먹이고 재우면 된다. 가루약이라 써서 먹기 힘들겠지만, 그럴 줄 알고 미지근한 꿀물과 섞어두었다. 다행히 루키니는 그냥 꿀물인 줄 알고 꿀떡꿀떡 잘 마셨다. 다행이다.
이제 푹 자고 나면 조금 괜찮아지겠지. 거의 잠든 것과 다름이 없는 루키니를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후 방의 불을 껐다.
그리고 쟁반을 들고 조용히 방을 나가려는 순간,
"……아……."
루키니의 신음소리인가? 귓가에 들려온 소리에 잠깐 멈칫한 사이에 이번에는 조금 더 큰 소리가 들려왔다.
"세라아……."
"아, 깼어? 미안. 자. 금방 나갈게."
그릇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생각보다 커서 깬 걸까.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가지 마아……."
"……."
"히잉……. 가지 마아……. 세라아……."
울먹이는 목소리가 가슴에 와닿는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옆에 있어주고 싶지만, 오늘 밤은 사냐와 함께 야간초계다.
루키니 찾아다니느라 잠을 못 자서 살짝 불안하긴 하지만 명령이니까 따를 수 밖에 없지. 그리고.
'나 왔으니까 어서 가. 사냐가 기다리고 있어.'
때마침 돌아온 셜리가 그렇게 속삭이고는 나 대신 루키니 곁으로 다가갔다. 잠깐 실랑이가 있는 듯 했지만 곧 셜리가 OK사인을 보내왔다.
그 모습에 난 안심하고 살그머니 방문을 닫았다.
"후우……."
머리가 띵─하고 울려온다. 오전에는 느긋하나 싶었는데 결국 정신없이 하루를 마감하게 되었다. 아니, 마감하려면 아직 몇 시간 더 남았나. 일복 터진 하루일세. 하아, 어지럽다 어지러워. 하이포션 같은 거 어디 없나. 굉장히 필요한데.
어찌되었든 초계 돌고와서 자고 나면 루키니도 다시 건강해져 있겠지. 어서 건강해져다오, 루키니. 네가 아프니까 이 기지 분위기가 진짜 확 가라앉는단다. 네가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해.
그런 생각을 하며 사냐가 기다리고 있을 격납고를 향해 걸었다. 아, 머리 아파…….
*****
- 연재 시작한 지 근 1년 6개월만에 원작 주인공 묘사. 이 무슨 장대한 팬픽. […]
사실 이것도 플롯이 살짝 바뀌면서 내용이 틀어지는 바람에 당겨진 겁니다. 원래 쓰려던 내용으로 가면 요시카는 내년[…]에나 볼 수 있을 것 같아 시간축을 당겨봤습니다.
- 하늘을 나는 마녀들은 항공보병이라 합니다. 그럼 땅을 달리는 애들은? 정식명칭은 육전윗치인데, 이걸 기계화보병이라 해야할지, 장갑보병이라 해야할지, 기갑보병이라 해야할지 모르겠네요. 일단 위치스의 전신인 메카무스메 피규어가 장갑보병이라는 단어를 사용중이므로 전 장갑보병을 채택하기로 했습니다.
- 8월 5일. 고지전을 봤습니다. 이런 걸 쓰고 있는 게 한심스럽더군요. 위치력을 대폭 깎아먹는 물건이었습니다. 전쟁은 미친 짓이야……. 그렇게 위치력이 부족한 와중에 '위저드즈vs위치즈' 같은 걸 써올리겠다고 협박하는 분이 계시질 않나……. 힘들었습니다. 이번 글이 재미없다면 분명 그 영향일 겁니다. <-
-제 연재속도가 극악인 이유는 아마 제가 보는 팬픽들도 연재속도가 극악이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힘의 원천은 맥이 끊겼고…….
- 목표는 연말까지 1기 종료. 과연 가능할지 스스로도 의문이 생깁니다. 포병말고 별의 바다도 써야 하는데……. […]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p.s 목표 기간 수정. 월말이 아니라 연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19
"세라 씨 조심하─!"
카앙─!
"세라 씨?!"
높은 금속음과 함께 만화의 한 장면─바나나 껍질을 밟고 미끄러지는 사람처럼 잠시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던 세라는, 사냐의 비명소리와 함께 곧바로 격납고 바닥에 요란한 소음과 함께 넘어졌다. 쿠당탕탕! 낙법도 뭣도 없는 순수한 부딪침. 머리가 먼저 떨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어깻죽지가 먼저 떨어진 게 아무런 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세라는 눈을 질끈 감고 있는데로 인상을 찌푸리기만 할 뿐 움직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벌어진 입에서는 소리없는 비명이 요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기에 짧고 얕은 호흡. 등허리와 폐에 통증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괘, 괜찮으세요?!"
"……."
엄지가 치켜올라왔다. 하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그 손과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괜찮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세라는 간신히 숨을 들이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팔을 들어 새빨갛게 부어오른 이마를 감쌌다. 지금은 새빨갛지만 조금 있으면 분명 새파랗게 멍이 들 게 분명했다.
"잠시만요. 의무병을 불러올게요."
"아냐. ……아냐, 괜찮아. 넘어진 것, 뿐이잖아……."
"하지만……."
망설이고 있는 사냐의 모습에 세라는 힘겨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의무병을 부르면, 분명 엘리스가 온다구……."
실천주의 학파의 실습대상이 되는 게 훨씬 더 아프니까. 세라가 그렇게 말하자 사냐는 마지못해 의무병을 불러오는 걸 포기했다.
잠시 후, 완전히 통증이 가셨는지 세라는 천천히 일어서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목 흔들기, 어깨 돌리기, 허리 돌리기가 순서대로 이어졌다. 모든 것을 마친 세라는 마지막으로 긴 심호흡을 했다. 아니, 길디긴 한숨이었다.
"흐아아으아아……."
찌릿찌릿한 등허리와 폐, 그리고 징징 울리는 머리와 바람결에도 흠칫하게 만드는 부어오른 이마가 주는 통증과,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자기 혐오감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한숨이었다.
그런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사냐를 본 세라는, 곧 피식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제 가자."
"네……."
한바탕 소란 끝에 두 사람은 간신히 스트라이커 유닛을 장착한 후, 가슴 한 구석에 담긴 걱정과 통증과는 다르게, 머리 위로 떠오른 녹색빛 마도침과 관제탑의 인도에 따라 살짝 구름이 낀 밤하늘을 향해 미끄러지듯 날아올랐다.
*****
멍든 곳에는 냉찜질이 좋을까 온찜질이 좋을까. 그리고 타박상에는 냉찜질이 좋을까 온찜질이 좋을까. 아니, 아무래도 좋으니까 일단 찜질부터 하게 해줘. 욱씬거려. 쑤셔. 부었어. 저려. 뜨끔뜨끔해. 아주 종합 통증을 주는구나.
특히나 이마가 아프다. 허리는 레이더가 지압 비스무리하게 압력을 주어서 되려 덜 아픈데, 이마는 바람이 스쳐지나갈 때마다 쓰라리다. 부딪친 상처인데 왜 이렇게 복합적으로 아픈 거야? 살짝 만져보니 꽤나 크게 부풀어있다. 기지로 돌아가서 한숨 자고 일어나면 시퍼렇게 멍들어있겠군. 허리는 괜찮을라나. 다시 생각해보니까 이게 지압 비스무리한 게 아니라 신경을 짓누르고 있다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하아, 고민만 잔뜩 늘어나는구나.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한층 더 높은 경지로 이끌고 있는 감각이 있는데, 그게 뭐냐하면…….
배고프다. 무진장.
루키니 신경 쓰느라 끼니를 대충 때운 게 문제였나. 그것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더 아프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아프고 배고프다. 이제 추운 것만 있으면 되겠군. 지끈거리는 이마에서 나오는 열 때문에 그리 춥게 느껴지지 않는 게 다행인 걸까 불행인 걸까. 오오 위대한 영이시여, 부디 이 불쌍한 영혼을 돌보소서…….
그렇게 날기를 30분. 시계는 브리타니아 표준시를 기준으로 새벽 1시를 가리킴과 동시에 우리는 인컴을 작동시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냐였다.
"여기는 야전초계분대 정시연락. 나이트 원 이상 무."
"나이트 투. 레이더 장비 이상 무."
[Copy.]
그렇게 일단 정시연락을 마친 우리는 잠시 구름 위에 멈췄다.
"간식 먹고 가자."
"네."
내 말에 사냐는 내 옆으로 날아와 레이더 장비 옆구리 쪽에 있는 작은 문짝을 열었다. 덜컹. 그러자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내가 넣어둔 보온병들과 호밀빵, 샌드위치, 삶은 계란, 삶은 감자, 과일 등이 드러났다. 보온병들이라고 한 이유는 우유, 스프, 물, 허브티 등 종류별로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우선 사냐가 건네 준 물로 목을 축인 후, 무엇을 먹을지 생각했다. 일단 스프랑 호밀빵부터 먹어볼까.
"여기요."
"고마워."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사냐는 내게 스프가 든 보온병과 호밀빵을 건네 준 후, 따끈하게 데워둔 우유와 샌드위치를 들고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작게 오물거리면서도, 결코 깨작거리지 않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편식하지 않는 아이가 잘 자라는 거야.
"셜리 씨 처럼 클 수 있을까요?"
"우물우물……. 응. 클 거야. 셜리보다도 더 커질 거야. 셜리를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아뇨, 그게 아니라……."
그렇게 말하며 사냐는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상반신. 아아, 그쪽을 물어보는 거였구나. 어디보자. 흐음, 달빛눈꽃이 올해로 열셋이었지. 그리고 사냐가 동갑이고. 셜리가 나랑 동갑이니까 사냐가 셜리 나이가 되는 건 앞으로 3년 후가 되겠군. 그때쯤이면 사냐가 셜리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인가?
……무리일 것 같은데.
물론 지금 사냐의 발육상태랑 미인이라는 미래가 보장된 동유럽 오라샤 혈통, 그리고 그런 거 빼더라도 기본적으로 다들 미인인 위치라는 특성 같은 걸 생각해본다면, 분명 사냐도 미래에는 글래머한 미인이 될 것이 분명하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백야白野의 여인이 되어 뭇 남성들의 가슴을 뒤흔들겠지. 상냥한 성격과 신비로운 분위기는 다른 여성들의 질투를 초장부터 꺾어낼 것이다. 은하수처럼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과 깊고 다정한 취록빛 눈동자가 3년 후에는 얼마나 더 아름다워질지 나로선 상상이 안 간다.
하지만 가슴은, 특히나 셜리의 가슴을 목표로 한다면……. 그건 힘든 수준이 아니라 무리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셜리의 그건 16세의 소녀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천조국의 치트키가 크리티컬 히트로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니까. 진짜 치트키야 그건. 사기라고.
"아무래도 그건 좀 힘들 거야."
"……그렇네요."
"걱정하지마. 그건 셜리가 상식의 바깥에 있는 거니까. 너도 분명히 클 거야."
바르크호른 대위님이라던가, 미나 대장님 정도나 그 이상은 노려봐도 괜찮을 거야. 그렇게 덧붙였더니 사냐는 이미 붉은 얼굴을 더 붉게 물들이며 "……네." 하고 작게 대답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과 마찬가지로 빨개진 귀가 보인다. 머리 위 마도 레이더도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고. 동요하고 있구나. 무심코 미소짓게 만드는 귀여운 모습이다.
그 나이에 걸맞는 아이같은 표정. 그 나이에 걸맞는 사소한 고민.
"……."
그래, 이 아이는, 이 나이대의 아이들은 이래야 한다. 시간이 해결해 줄 별것 아닌 문제를 고민해보기도 하고, 이것저것 다양한 것들을 경험해보며 세상을 알아가야 하고, 즐겁게 뛰놀며 행복한 미소를 지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차가운 병기를 손에 쥐고 어떻게하면 적을 쉽게, 피해 없이 없앨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전투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고, 살기 위해서, 도망치기 위해서 달린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왜 그래야 할까.
네우로이 때문에.
명확한 적이 있다는 건 이럴 땐 좋은 것 같다. 원망할 수 있는 원인이 확실하니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눈앞에 있는 존재에게 증오를 쏟아부으면 되니까. 네우로이가 없다고 해서 아이들이 무조건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었는지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이 세계'를 마주대하고 있으면 항상 사고가 그렇게 흘러가버린다. 역시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게 다르기 때문인걸까.
"세라 씨."
"아, 응. 왜?"
"루키니 걱정하시나요?"
사냐의 말에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게 아니었기에 잠시 멈칫했었지만, 내 쓸데없는 고민을 알려줄 수는 없으니까.
"사냐는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해. 알았지?"
"네."
"응. 착한 아이야, 사냐는."
손을 뻗어 사냐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얼굴을 쓸어내린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뺨. 귀엽다. 그리고 가엽다.
살며시 몸을 돌려 끌어안았다. 사냐는 말없이 내 포옹을 허용했다. 따스하다. 그리고 여리다. 희미하고 미약한 심장의 고동이 전해져온다.
왜 이런 아이들이 싸워야 하는 걸까. 내가 이런 걸 고민해야하는 걸까. 멈추었던 부정적 사고의 원이 다시 돌기 시작한 순간,
"괜찮아요."
사냐는 그렇게 말했다.
누가, 무엇이, 왜, 어떻게. 부연설명은 아무 것도 없었다.
품 안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투명한 에메랄드빛 눈동자 속에는 다정함과 상냥함이 담겨있었다.
"괜찮아요."
다시 한 번. 이번에도 그외의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한 마디가 가슴 속에 스며들어 그거면 되었다고 느껴졌다.
"……응. 고마워."
상냥하고 어른스러운, 앞으로 훨씬 더 아름다운 여성이 될 소녀를 꼭 끌어안았다.
위대한 영이시여. 이 아이가 행복한 미래를 향할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별이여. 세계가 희망을 잃지 않도록 빛나주소서.
*****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을 오랜만에 들어보았다. 어머님께서, 아버님께서 하시던 말씀. 걱정해준다는 게 기뻤다.
흙을 자주 만지기 때문인지 약간 거칠게 느껴졌지만 세라 씨의 손은 따뜻했다.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말없이 끌어안긴 품안은 포근했다. 가슴에 닿은 이마로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계속 이렇게 있고 싶었다.
하지만 스쳐지나간 걱정을 담은 얼굴이 떠올랐다. 루키니 걱정 때문인 걸까. 그렇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세라 씨는 가끔씩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훌륭한 전과를 올린 베테랑 위치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네우로이와 싸우고 돌아가는 위치들을 보았을 때, 그리고 군에 들어온 얼마 안되는 신병들을 보았을 때. 다른 군인들은 대단하다고, 굉장하다고 칭찬하는 걸 볼 때도 그런 표정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느냐고 물어보면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작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 안에는 분명 희미한 슬픔이 담겨있었다.
어떤 고민을 품고 있는지, 왜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지 물어도 분명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고민을 덜어내주고 싶다. 걱정을 털어내주고 싶다.
그래서 말했다.
"괜찮아요."
그게 어떤 고민이든, 어떤 걱정이든.
아무리 괴롭고 힘든 미래가 닥쳐오더라도.
견뎌낼 수 있을 테니까. 뛰어넘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괜찮아요."
슬퍼하지 말아요.
불안해하지 말아요.
"……응. 고마워."
미소와 함께 나를 끌어안는 팔힘이 강해졌다.
조금은 힘이 된 것일까. 그런 생각에 약간 기뻐졌다.
*****
지금의 나는 아마 성장한 아이를 보는 부모의 대견스러워하는 미소 같은 걸 짓고 있지 않을까. 아직 열여섯이지만. ……현재만 생각해서.
하여튼 사냐가 어른스러운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새삼스럽게 재인식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응. 좋은 아이다, 사냐는.
이후 우리는 조금 더 간식을 챙겨먹은 후, 다시 초계항로를 따라 이동하려 했다. 왜 과거형이냐고?
"자, 그럼 이제 가볼,"
■■■───────……………………………….
"……까……."
잘못 들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길고 큰 괴이의 음성.
마도 레이더를 타고 흘러드는 이 소름끼치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닮은 게 없는 괴음.
틀림없다.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 건, 지금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녀석들' 뿐.
"들었지?"
"네."
사냐는 이미 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할 일은 하나 뿐이지.
난 곧바로 인컴을 작동시켜 우리 기지와 수도방위사령부를 비롯한 모든 방위시설에 무전을 날렸다.
"여기는 야전초계분대! 네우로이 접근중!"
[접수. 보고하라.]
"방위 남남서, 고도 7000, 속도 500, 크기 대형. 목표는 수도로 예상. 앞으로 5분 뒤 접촉합니다."
[Copy. 22연대 휘하 위치부대가 출동했다. 도착까지 5분. 지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적기를 관측하라. 실질적인 전투는 회피해도 좋다.]
"Night 1 Rog."
"Night 2 Rog."
무전을 종료함과 동시에 온갖 생각들이 떠올랐다. 22연대는 특수부대 아니었나. 거기 휘하 위치부대가 있었나. 5분 뒤에 접촉하는데 5분 뒤에 지원이 온다니. 이 무슨 절묘한 타이밍이야. 그리고 관측이라니. 내가 네우로이보다 빨라야 가능한 거 아닌가 그거? 사냐라면 가능하겠지만 난 아니라고. 이봐요. 난 400 간신히 넘기는 사람이야. 게다가 레이더 든다고 포 안 들어서 무장은 스트라이커 유닛에 달린 2연장 M2 2문 뿐이라고? 501부대 다른 부대원들이라면 M2 하나만 들고도 네우로이 찜쪄먹겠지만 난 아니라고.
좋아. 이쯤해두자. 나보다 어린 사냐는 이미 네우로이의 소리가 들려왔던 방향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급습당한 것도 아니고, 지원이 안 온다는 것도 아니잖아? 나보고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온 것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며 정신을 집중하였다. 기이이잉─ 등 뒤의 기계음과 함께 머리 위 마도 레이더의 녹색빛이 강해진다. 좋아. 상태 양호.
나도 사냐가 바라보는 방향을 향해 섰다. 푸르스름한 달빛. 드문드문 뜬 구름. 칠흑같은 바다. 고요한 밤하늘. 흩뿌려진 별빛. 아름다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 멋진 광경을 즐길 여유가 없다. 평화로운 안식의 밤은 싸늘한 침묵과 폭풍 전의 고요함으로 가득찬 전장이 되어버렸으니까. 폐를 옥죄이는 긴장감이 스멀스멀 전신으로 퍼지는 감각. 기분 나쁘다.
그때 사냐가 약간 당혹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세라 씨."
"왜?"
"적기 크기, 어느 정도로 느껴지세요?"
"크기?"
다시 레이더에 집중했다. 제길, 이렇게 일일히 해야하는 건 진짜 귀찮다니까. 어디보자. 녀석이 느껴졌──
"……무슨……."
크기는, 제기랄 대형종이다. 그것도 대형종 중에 대형종. 200m 정도 되는 거 아냐? 그래도 크지만. 그래서인지 속도는 조금 빠른 수준이다. 그래봤자 대형종 속도지만 그 조금 차이가 압박으로 다가오는 게 전장이잖아.
그 외에 특이한 점이라면 형태일까. 커다란 삼각형처럼 생겨서는 꼭지점 끝에 날개라 생각되는 부분이 붙어있다. 트라이앵글 각 꼭지점에 작대기를 붙여둔 것 같이 생겼다고 하면 될까. 항공역학은 완전히 무시하는 모습이었다. 스트라이커 유닛을 장착하고 하늘을 나는 우리가 할 말은 아닌가?
보고를 다시 해야겠군.
"여기는 야전초계분대. 관제탑 들리나?"
[들린다. 말하라.]
"적기 크기 대형. 200m에 가깝다. 목표 카테고리를 대형종에서 대대형종으로 변환."
[……확실한가?]
"확실하다."
[……Copy. 지원부대를 출격시키겠다.]
"Rog. Night 2 Log-out."
무전을 종료하고 스트라이커 유닛에 마력을 흘려넣는다. 철컹. 유닛 끝에 고정되어있던 2연장 M2가 움직인다. 원래는 소형종이 접근했을 경우 자동으로 요격하라고 붙여놓은 건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것보다 이거 실전은 처음인데 괜찮겠지?
괜찮겠지. 육해공 모든 부대에서 다용도로 거칠게 쓰여도 튼실한 녀석이니까. 잘 부탁한다. 부디 우리 무사히 부대로 돌아가자.
■■■■───────………!!!
"……옵니다."
9연장 로켓 발사기─플리거 허머의 안전장치를 해제한 사냐의 말에 난 다시 레이더에 집중했다. 제길, 예상보다 빠르다. 이제 3분이라고.
어찌되었든 녀석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북서서 방면으로 이동하며 접촉 확인 무전을 날란다.
"야전초계분대 네우로이와 접촉! 회피기동 돌입!"
[Copy. 지원…… 도……지 앞으로 …….]
"수신 상태가 좋지 않다. Five by two."
[……도착까지…… 1분……. 들리나? ……로이 재밍이…….]
"지원부대 도착까지 앞으로 1분. 맞나?"
[……해지고 있다. 통신…….]
"반복한다. 지원부대 도착까지 앞으로 1분. 맞나?"
[……는가? 반복한다. 제대로 들었다. 네우로이 재밍이 심해지고 있다. 들리는가?]
"Copy."
네우로이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시간을 가속했군요. 고마워요. 그래도 조금 더 욕심을 부려도 될까요? 좀 더 빨리 와주세요.
녀석이 이제 시야에 들어오거든요?!
■■■■■──────────!!!!!!!!!!!!!
메아리가 아닌 확실한 굉음. 동시에 꼭지점 부분에서 붉은 섬광이 뿜어져나와 우리를 향해 덮쳐들었다. 쯔즈즈즈즈즈──! 고열에 연소된 대기가 내뿜는 특유의 냄새와 잔류하는 기이한 열기가 이것이 전장이라는 걸 뇌리가 끊어질 정도로 상기시켜온다. 맞은 건 없지만 십 수 미터 옆을 스쳐지나가는 공격이 긴장의 실을 한계까지 잡아당긴다.
이쪽도 사나의 플리거허머가 불꽃을 내뿜었다. 콰아아아앙──! 하얀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로켓탄이 네우로이의 지근거리에서 폭발했다. 비명 아닌 비명이 밤하늘에 울려퍼진다. 폭연 속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녀석의 각 한 군데가 반쯤 박살나있었다. 하지만 코어 쪽에 충격을 받은 게 아니었는지 복구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사냐가 다시 한 번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한 발 더. 또 한 발 더. 푸슈슈슈우우우우우──! 동시에 실드!
파츠츠츠츠츠츠츳!
로켓탄과 교환하듯 날아온 세 줄기 섬광이 실드에 막혀 분산되며 위력을 잃고 소멸해간다. 이걸로 명백해졌다. 녀석은 지금 '우리'를 노리고 있다. 수도 방향이 아니라 분명히 우리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게 그 증거다. 동시에 쉴새없이 괴성을 질러댄다. 전파 재밍인가.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인컴을 작동시켜 외친다.
"적기 방향 전환! 북서서 방면으로 이동중! 전투 돌입!" 빠지지지지직──!!!! "지원이 시급하다아아아아아!!!!"
전해질지 어떨지 모를 무전을 끝냄과 동시에 스트라이커 유닛에 추가 마력을 주입. 계속해서 녀석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양 유닛 끝의 2연장 M2 2문이 불을 내뿜기 시작했다. 벌써 이렇게 가까워졌어!
"산개!"
"Rog!"
사냐는 위로, 나는 아래로. 갑자기 흩어졌기 때문인지 녀석이 멈칫한 순간, 사냐가 남아있던 로켓포를 쏟아냈고 나 역시 총신이 녹아내려라 M2를 퍼부었다. 잘하면 끝낼 수 있다. 야간초계시 1:1을 상정하고 화력을 집약한 플리거허머를 이 거리에서 얻어맞았다. 적어도 코어를 드러낼 정도의 피해는 입었을 거야.
하지만 현실은 훨씬 더 잔혹했다.
"……합체했었던 거냐."
폭연 속에서 나타난 네우로이의 모습은 참담했다. 한 녀석은 코어까지 바깥으로 드러내고 있었고 나머지 둘도 그리 멀쩡해보이지는 않았다.
그래, 그러니까, 셋이다. 연결선을 반으로 나누면 저렇게 되는 걸까. ㅅ자 형태가 된 네우로이 셋이 하늘을 날고 있다. 합체라니. 나중에 가면 변신도 하겠군.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전개에 멈칫한 나와 사냐는, 이런 제기랄……!
"피하세요!"
■■■■■───────────!!!!!!!!!!!!!!
■■■■■───────────!!!!!!!!!!!!!!
■■■────────!!!!!!!!!!!!!!
쯔즈즈즈즈즈── 쯔즈즈─── 쯔즈즈즈즈즈즈즈즈────── !!!!!!!!!!!!!!!!!
사냐의 외침을 덮어버리듯 중창과도 같은 놈들의 괴성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허공을 수놓는 붉은 광선의 세례가 쏟아졌다. 피하라고 했지만 이건 피할 수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앞에는 이미 실드가 펼쳐져 있었다. 높으신 분들이 본다면 훈련의 성과라고 하며 좋아하겠, 크으으으으읏!!! 제기랄! 분리했다고 너무 빨라진 거 아냐?! 등허리에 이딴 고철 상자 들쳐매고 있는 사람한테 회피기동 강요하지 말라고오오오오!!!!!!
파츠츠츠쯔쯔쯔즈즈즈즈즈즈즈!!!!!!!!!
짓누르듯 쏟아지는 공격에 어느 새 해수면 위 100m 근처까지 떨어졌다. 등가교환으로 착탄 압력과 공격을 마력으로 바꿔 실드에 밀어넣었으면 이렇게까지 떨어지지 않았겠지만, 그것도 적이 하나일 때 가능한 일이다. 두 놈이 양쪽에서 공격하면 실드를 하나 밖에 못 펼치는 난 피할 수 밖에 없,
빠지지지지직!!!!!! 파츠츠츠츠츠츳!!!!!!
실드로 공격을 막는다. 이번에는 제대로 등가교환을 사용했다. ……사냐는? 사냐는 어디있지?
하늘을 올려다보니 실드의 마법진 사이로 사냐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불꽃과 궤적. 분리된 녀석들 중 하나와 전투중이다. 다른 한 놈은 지금 나를 쫓고 있지.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녀석은?
"……."
무심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등줄기를 타고 싸늘한 감각이 흘러간다. 나를 쫓는 녀석의 공격을 실드로 막아내며 레이더를 작동시킨다. 내장이 오그라들고 심장이 식어버리는 것 같다. 눈앞에서 흩어지는 섬광이 주는 것과는 다른 긴장감과 초조함이 전신에 퍼진다. 제기랄, 어디야. 어디냐?!
[……분대 응답하라! 야전초계분대 응답……,]
빠지지지지직──!!!
[──들리는가?! 야전초계분대!]
[여기는 나이트 1! 적기 분리! 대대형종 1기에서 중대형종 3기로 분리! 2기 전투 1기 수도를 향해 이동중! 시급한 지원 요망!]
평소에는 듣기 힘든 다급한 사냐의 목소리가 인컴을 타고 들려온다. 놈들이 무선 재밍을 하고 있지 않았었나? 아니면 분리되면서 재밍 능력이 떨어진 건가? 어찌되었든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이제 사라진 녀석만 찾으면!
몸을 돌려 해수면을 등지고 나를 쫓는 녀석에게 화력을 쏟아붓는 그 순간, 처음 들어보는 여성의 목소리가 인컴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여기는 22연대 예하 특수전마녀단Commando Witches. 야전초계분대가 보고한 중대형종 1기와 조우. 전투 개시.]
지원부대다! 브라보!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
쯔즈즈즈즈즈즈즛──────!!!! 쏴아아아아아…….
그래, 기뻐하기는 아직 이르다 이거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붉은 빛줄기와 빗나간 섬광에 터져오르는 바다. 솟아오르는 물기둥에 옷이 젖는 게 느껴진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이제 물 속으로 다이빙이 되겠군. 그리고 달빛을 가리는 그림자가……, 빌어먹을, 눌렸다! 완전히 제압당했어! 위력적인 한두 발 대신 자잘한 산탄을 흩날린 건 이 때문이었나! 전방위 회피불가 탄막이라니, 그건 내 전문분야라고!
"여기는 나이트2! 제압당했다! 지원 요청! 반복한다! 제압당했다! 지원 요청!"
M2의 화력은 결코 약한 게 아니다. 하나만해도 그게 어딘데. 게다가 지금 내 스트라이커 유닛에 달린 건 2연장으로 2문. 총 4개의 포구가 불을 내뿜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제압되어 한쪽 면만을 공격하고 있다보니 별다른 치명타를 줄 수가 없다. 적어도 바닥 쪽에 코어가 없다는 건 확실하군. 사카모토 소령님의 마안이 그리워지는데!
그 순간 내 주변을 가리던 네우로이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뭐지? 그 거체가 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날렵한 급상승에 고개를 꺾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앞에 있는 건 분명 절벽──이런 젠장! 전력을 다해 몸을 돌려 배가 해수면─이제는 육지 쪽을 바라보게 하고 상승했다. 큭, 이 뭣같은 레이더 때문에 안 올라가! 이 X랄 같이 레이더 무게 안 줄이면 연구소를 날려버릴테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제발올라가제발올라가제발올라가──"
눈앞에서
"제발올라가올라가올라가올라가올라가──"
절벽 끄트머리가
"올라가올라가올라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주먹 하나 정도의 틈을 남기고 스쳐지나갔다. 성공했,
카가가가가각!!!!
스트라이커 유닛이 걸렸다! 실패했나?! 황급히 고개를 숙여보니 유닛 앞부분이 와장창 깨져있었다. 비행에는 지장이 없는 듯 하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50m도 안되는 거리에서 40~50m는 되어보이는 절벽을 피해 급상승 하는 건 분명 스트라이커 유닛을 장착한 위치나 가능한 비행곡예이지 않을까?! 수직이착륙기 같은 거 빼면! 하지만 그런 건 이 세계에 아직 안 나왔잖아?! 결론은 위치나 가능한 거로군!
어찌되었든 절벽에 안 부딪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순간, 다시 네우로이의 공격이 쏟아졌다. 보급병한테 네우로이 하나라니 너무하잖아?!
지원은 언제 오는 거야?! 것보다 내 무전은 들었던 건가?! 녀석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실드를 펼치기 위해 몸을 돌리며 왼팔을 내뻗었,
빠각!
──어?
무엇인가가 왼팔을, 후려쳤다……? 뭐지? 뭐가?
그제서야 나는 절벽 너머의 땅이 어떤 곳인지 인식했다.
나무. 나무. 나무. 나무.
빽빽하게 나무가 들어찬 브리타니아의 숲. 내 왼팔을 후려친 건 그 중에서 다른 나무들에 비해 좀 더 길었던 나무의 끄트머리였다. 거기에 부딪친 건가.
그러고보니 사람 팔은 팔꿈치에서 한 번만 꺾일 수 있지? 두 번째는 손목이고. 그렇다면 팔꿈치와 손목 사이 부분이 꺾인 건──
인식한 순간, 왼팔에서 뜨거운 열기와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
큰소리로 내지르지도 못할 정도의 격통이 뇌수를 불태우듯 끓어오른다. 부러졌는지 덜렁거릴 때마다 통증이 배가 된다. 위험하다. 오른손으로 감싸보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프다. 돌아가면 또 의무실로 직행이군. 앨리스 특제 단백질 보충식을 먹게 되려나? 팔이 너무 뜨겁다. 후방병원 이송은 봐줬으면 하는데. 그 간호장교 언니한테 치료받는 건 사양하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지원 좀 오라고오오오오오오!!!!!!!!!"
울고 싶다. 이미 울고 있나. 눈앞이 흐릿하다. 눈물 때문인가. 아니면 부러진 팔의 열기가 머리까지 올라온 것인가. 전투시에는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통증이 둔화된다고 했던 건 누구야. 전혀 그런 게 없잖, 크읏! 바로 앞에 솟아나듯 나타난 나무줄기를 피한다. 상승하려고 하면 제압 사격. 나무가 점점 더 빽빽해진다. 숲 중심부인, 안돼 부딪친────
콰아아아아아앙!!! 끼이이이이익!!!!!!
제법 큰 나무줄기가 왼쪽 어깨를 후려쳤다. 머리를 부딪쳤으면 즉사했겠지. 보호마법을 써도 이 모양이니. 거기다 또 왼쪽이냐.
굉음은 어디서 난 걸까. 왼팔 부딪쳤을 때는 이런 소리가 안 났는데. 그러고보니 등이 가볍다. 레이더가 부서진 걸까. 시말서 쓰려나. 좀 봐주라. 봐줄 거지 셜리? 하하, 하하하…….
비행이 제어가 안된다. 흐릿한 시야로 왼쪽 스트라이커 유닛이 산산조각나기 일보직전인 게 보인다. 날개 쪽은 M2와 함께 완전히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곧 추락하겠군. 한쪽 유닛으로도 비행은 가능하지만 위에는 네우로이가 있으니까. 보급 유닛으로 이 정도 버틴 게 어디야.
순간, 기우뚱하고 유닛이 처박히듯 숲을 향해 돌진했다. 위를 향하고 있던 실드를 앞으로 펼쳤다. 눈앞에서 수십 수백 년 된 나무들이 박살나는 광경이 펼쳐진다. 부딪칠 때마다 충격이 온몸을 뒤흔들고 실드가 흐릿해진다. 등가교환을 유지할 집중력이 떨어지고 있다. 차라리 그냥 이대로 땅바닥에 처박히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눈앞을 메우던 나무들이 사라지고, 희끄무래한 절벽이 나타났다.
아니, 절벽이 아니다. 창문과 문. 그건 분명 인간이 쌓은 건축물이다.
피해야 돼.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스트라이커 유닛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아하하하……. 별 수 없잖아? 스트라이커 유닛에 마력 공급을 중단하고 실드에 전력을 다하며, 난 눈을 감았다.
*****
- 문명 멀티 한 번 뛰고 싱글 한 번 뛰었는데 벌써 일요일 저녁이네요. 어라, 내 금요일과 토요일은 어디로 갔지?
- 피그마 하츠네 미쿠 어텐드 구매. 그리고 은하영웅전설 완전판 예약완료. 이제 남은 건 기계식 키보드 뿐인가. [?]
갈축은 써봤고, 청축을 써보고 싶네요. 흑축도 써보고 싶지만 쫄깃한 맛을 내는 청축을 써보고 싶습니다.
- 아이리의 유도를 받아 포격지원을 쏟아내거나, 메이와 함께 쑥밭을 만들거나, 제이니의 관제에 따라 다종다양한 화력을 지원하거나, 여튼 그런 식으로 다른 팬픽 위치들과 함께하는 이야기를 써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만, 다른 분들의 허락이 문제지요. 게다가 그렇게 하면 서로의 세계관을 완전히 갈아엎어야 하니 손 가는 데가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귀찮네요. <-
"우리 애들보다 못 나는 것들이 말만 많아서는." 이런 얘기 쏴주고 싶은데 <-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20
심장을 멈칫하게 하는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도 몇 번이나 듣게 되면 익숙해지는 법이다.
하지만 그게 일상적으로 영위해오던 훈련의 알림이 아니라 실전을 알리게 되는 소음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훈련소는 이미 완전한 비상사태에 돌입해있었다.
"뛰어뛰어뛰어뛰어!" "각─자─ 위─치─로오오오오─!" "소대장 보고! 소대장 보고!" "1소대 전원 배치 완료!" "엘리엇! 엘리엇?! 얘 어디갔어?!" "2소대 전원 배치 완료!" "5소대 전원 배치 완료!" "정신차려 멍청아! 네우로이가 왔다고!" 쿠콰아아아앙!!! "무슨 소리야?!" "상황 보고해!" "훈려소 밖에서 들려온 소리입니다!" "3소대 전원 배치 완료!" "뛰어뛰어뛰어! 실전이라고!" "네우로이 육안 확인! 아군이 제압당했다!" "무전 연결해!" 쿠르르르릉─! "바깥이다! 더 가까워졌어!" "온다! 녀석이 온다!"
때가 좋았다. 훈련소라고 하더라도 이미 햇병아리 탈을 벗고 실전에 투입가능한 어엿한 전투마녀들로 성장한 소녀들이 부대 안에 2/3을 넘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로 내일이면 자대에 배치될 소녀들이 그 정도라는 말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각 소대의 전투 배치와 명령 전달 및 실행 속도는 실전부대의 그것과 견줄 만 했다. 모의훈련을 위해 임시로 분류한 소대가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지만 그래도 훌륭한 편이었다.
굳이 부족한 점을 따지자면 첫 실전이라는 긴장감에 뻣뻣해진 신체와 돌발상황에 따른 임기응변 정도겠지만, 훈련생들의 실질적인 전략 목표가 인명 소실 최소화와 거점 방어 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두 가지 요소를 시험당할 일은 없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랬다.
남쪽 복도에서 담당 구역으로 이동중이던 훈련생들은 창문 너머로 푸른 빛이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엎드려어어어어어어어엇──────!!!!!!!!!!!!!!!!"
콰과과과과과과과광────────!!!!!!
훈련에 익숙해졌기에 가능한 묘기였다고 생각한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조교의 외침과 동시에 뒤를 따르던 훈련병들 모두가 좁은 복도에서 어떻게든 엎드렸다. 누군가가 욕설을 내뱉은 것 같지만 푸른 빛을 앞세운 무언가가 우리 층 복도와 위층 복도를 동시에 박살내는 굉음에 묻혀버렸다. 돌가루와 나무 부스러기가 후드득 떨어졌다. 엎드리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그 사이로 진득한 핏물과 박살난 신체 파편이 함께했으리라.
"……뭐, 뭐야……?"
"뭐였어? 누구, 누구, 누구 본 사람?"
"……위치였지?"
"위치라고?"
"실드 펼치고 하늘 나는 사람이 위치 말고 더 있어?"
"리베리온 군복이었지?"
그리고 곧바로 또다른 굉음이 들려왔다.
콰드드드드드드득────…………………….
대지를 갈아엎는 듯한 둔중한 소음이 소녀들의 입을 막았다. 동시에 운동장 쪽에서도 비명과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소리에 비틀거리며 일어난 한 소녀가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부서진 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광경을 바라보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뭐야, 이거……."
세계 불가사의 중 나스카 지상도의 한 획이 저것과 비슷할까. 평소 뛰어다니던 운동장은 중앙에는 남에서 북으로, 아무리 작아도 분명 사람보다는 큰 쟁기로 긁어낸 것처럼 땅이 패여 있었다. 참호가 하나 생겼네. 실없는 농담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운동장에 그어진 거대한 획의 끝에 있는 것은 분명──
"……what the hell……."
──추락한 마녀였다.
*****
울먹이는 아이의 얼굴을 뒤로 해야한다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다. 그것도 아픈 아이가 그런 얼굴로 옷깃을 부여잡는다면 더더욱.
옆에 있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쉽게도 현실은 언제나 그리 녹록치 못한 법이다. 울려퍼지는 경보음 속에서 루키니의 손을 힘겹게 떼어내고 착잡한 심정을 뒤로 한 체 격납고로 달렸다.
"늦었네."
"안 늦었어."
"그렇네."
어느 새 나타나 내 옆을 달리기 시작한 하르트만과 그런 짧은 대화를 주고 받았다. 평소라면 1등으로 도착해 있을 텐데 오늘은 늦었네. 출격 시간에는 안 늦었어. 그건 그렇네. 그런 느낌의 대화다. 그것 뿐이지만 정련된 기세가 느껴진다. 평소의 하르트만이 아니다. 에이스 오브 에이스 에리카 하르트만이다. 신뢰할 수 있는 전우.
우리가 격납고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정비반의 움직임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스트라이커 유닛 고정대를 이동시키고, 격납고 문을 개방하고, 활주로에 유도등을 점등한다.
움직이는 고정대를 향해 달려 뛰어오른다. 수십 번은 넘게 한 익숙한 동작이기에 정비반은 멈추지 않는다. 다리를 밀어넣으며 스트라이커 유닛을 장착한다. 마력 주입. 유닛 기동. 제어권 확립. I have control. 준비가 끝났다.
"Stand by!"
"Yes ma'am!"
곧이어 에이라가 도착했다. 야간급습에 불려나온 것일 텐데 잠에서 깬 듯한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점괘가 좋지 않았으니까-. 예감도 좋지 않았고-."
과연 미래예지 능력자.
어찌되었든 출격조는 이 셋인 듯 했다. 나머지는 기지 방어조인가. 루키니가 감기로 앓아누워 있는 데다가 사카모토 소령님도 없으니 이 이상 인원을 차출하는 건 힘들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출격 신호가 떨어졌다. 1번기는 하르트만. 왼쪽 날개는 나, 오른쪽 날개는 에이라. 곧바로 활주로를 내달려 달이 빛나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목표는 브리타니아 남서부 해안가 인접 훈련소.
셋으로 분리된 네우로이 중 하나는 브리타니아 22연대 예하 마녀부대가 처리했고, 또다른 하나는 사냐가 견제중이다. 전투를 끝낸 22연대 마녀들이 사냐를 도우러 갔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하나를 요격하기 위해 우리가 출동한 것이다.
세라 혼자 상대하고 있을 녀석을 잡기 위해. 사냐와 떨어진 후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들었다. 지금도 통신은 연결되지 않고 있다. 괜찮을까.
"루키니 걱정?"
하르트만이 그렇게 말을 건네왔다. 물론 그쪽도 걱정이다. 하지만 지금은…….
"세라?"
"……응."
"괜찮지 않을까-."
대답은 에이라에게서 돌아왔다.
"모의전 봐서 알잖아-? 생존능력은 제일이라구-."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언제나 보아온 태도로 그렇게 덧붙였다.
그걸로 우리들의 대화는 종료되었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필요 없으니까.
우리들의 상냥한 들소가 무사할 것이라 믿으며, 각자 말없이 스트라이커 유닛에 마력을 밀어넣었다.
*****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리네트 비숍은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멍하니 눈앞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 방금 전 자신이 부딪칠 뻔한 게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단지 그 무언가가 가까운 곳에서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게 침묵하고 있다는 것만이 느껴졌다.
"……콜록, 콜록."
기침이 나왔다. 목덜미가 아팠다. 방금 전 뒤에 있던 동기가 목덜미를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동기가 자신의 목덜미를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자신은 저기 있는 무언가와 함께 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결코 성하지 않은 몸으로. 감사인사를 해야지. 쿠키를 구워주는 게 좋을까. 말도 안되는 얘기였다. 훈련생은 사적으로 주방을 쓸 수가 없다. 그렇다면 공적으로는 되는 걸까. 그럼 실전은 공적인 일인 건가? 그렇다면 괜찮을지도 몰라.
어찌되었든 죽을 뻔 했네.
"……히익……."
그제서야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돌발상황에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 뇌가 떠올린 말도 안되는 엉뚱한 생각들이 거친 심장고동 소리에 흩어져갔다.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뛰는 심장소리와 함께 온 몸이 떨려왔다.
죽을 뻔했다. 네우로이에게 공격당한 것이든 아니든, 방금 전 동기가 목덜미를 잡아당기기 않았다면 저것과 부딪쳐 죽었을지도 모른다.
간신히 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자신을 죽일 뻔한 물체에 대한 의문이 리네트의 생각을 잠식했다. 대체 뭐였지?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체가 궁금했지만 고개는 그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다. 거기에는 훈련소 건물 벽이 있어야 했다. 그래, 벽은 있었다. 하지만 그 벽에는 사람이 걸어다녀도 될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적어도 이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없던 구멍이었다. 그 구멍 너머로 다른 훈련생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쪽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인 듯 했다.
"……."
바람이 새는 것 같은 가늘고 높은 숨소리에 리네트는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함께 있던 소대원들은 방금 전부터 보고 있던 그것의 정체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위치……?"
반쯤 부서지다시피한 스트라이커 유닛은 일반 유닛보다 반절 정도 더 컸다. 게다가 한쪽 날개 끝에는 커다란 기관총 한 쌍이 붙어있었다. 결코 일반적인 위치가 쓰는 장비가 아니었다. 대체 누구인 걸까.
상반신은 왼쪽 어깨 부분이 완전히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게다가 마치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정상적이라면 있어서는 안될 위치까지 내려가 있었고, 손바닥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꺾을 수 없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비틀어진 팔꿈치와 손목 사이 소매 부분이 꺾여있는 걸로 설명이 되었다. 섬유 아래가 어떻게 되어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하……."
숨소리가 들려왔다. 리네트는 고개를 더 돌렸다. 그 위치의 얼굴이 보였다. 갈색빛 피부. 로마냐 사람인 걸까? 얼굴에는 자잘한 생채기가 가득했고, 당장이라도 감길 듯 힘없이 뜨여진 눈꺼풀 아래에는 초점이 맞지 않는 짙은 녹색 눈동자가 있었다. 그런 눈동자를 수원으로 하는 눈물 자국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 가하……, 하가……. 컥……. 쿨럭……."
목에 걸린 무언가를 내뱉 듯 기침을 터뜨릴 때마다 피거품이 섞인 침이 튀어나왔다. 어디를 다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심각한 부상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의, 의무병…… 의무병!"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소대원 중 한 사람이 의무병을 불렀다. 그러자 소대장은 의무병을 찾는 훈련생에게 찾으러 다녀오라고 명령을 내린 후, 다른 훈련생들을 원래 위치로 이동시키며 외쳤다.
"리네트 비숍!"
"흐, 흐에, 에! 네!"
"의무병이 올 때까지 이 위치를 보호해라. 실드 펼칠 줄 알지?"
"으, 아으……."
"대답은!"
"Y, Yes ma'am!"
리네트의 대답을 들은 소대장은 곧바로 먼저 간 소대원들을 뒤쫓아갔다. 고개를 돌려보니 구멍 주변에 있던 훈련생들도 어느 새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훈련소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란은 여전했다. 그리고 이제 리네의 눈에도 밤하늘을 날고 있는 네우로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쿨럭…… 흐…… 으……. 그륽……."
"괘, 괜찮으세요?!"
기침소리에 정신을 차린 리네트는 몸을 움직여 그 위치 곁으로 다가갔다.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팔은 둘째치고, 주저앉은 어깨뼈가 폐를 찌르고 있다면 자칫하다가는 그대로 사망할 수도 있으니까. 피가 섞인 기침이 계속되고 있었다. 기침할 때마다 튀어오른 피거품은 입술 위쪽과 턱 부분 전체를 물들인 후, 서서히 흘러내려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거무죽죽하고 끈적이는 피웅덩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했다.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
방금 전까지 미칠 듯이 고동치던 심장이 단숨에 싸늘하게 식어내리는 것 같은 감각이 리네트의 전신을 감쌌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너무나도 잔혹한 현실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그때, 그 위치와 리네트의 눈이 맞았다.
"……쳐……."
"……흐, 흐에, 에? 에, 네?"
당황한 나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리네트의 모습이 보이는지 안보이는지, 위치는 고장난 라디오처럼 힘겹게 입술을 달싹일 뿐이었다.
"도, 극……, 오망…… 도…… 망……."
"예, 예?!"
지금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숨으로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리네트는 심장이 철렁이는 감각을 느꼈다.
"마, 말, 말하지 말아주세요! 지금은 말하면, 안되니까! 괜찮아요! 금방 의무병이──"
──올 테니까.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리네트가 말을 끝내기 전에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외쳤다.
"실드 펼쳐어어어어어어어엇!!!!!!!!!!!!!!!!!!!!!!!!!!!!!!"
훈련의 성과라고 자랑해도 좋을 것이다. 리네트가 눈앞의 위치를 감싸며 실드를 펼친 순간, 붉은 섬광이 훈련소를 할퀴고 지나갔으니까.
쿠콰과콰콰과과콰콰과과광────────!!!!!!!!!!!!!
굉음과 함께 후끈한 열기가 확 다가왔다. 하늘에서는 튀어오르는 건물 잔해와 흩날리는 흙먼지, 인근 숲에서 날아온 거라 생각되는 나뭇가지, 누군가의 옷가지 등이 하나둘 떨어졌다. 동시에 난생 처음 맡아보는 기이한 냄새가 리네트의 후각을 자극했다.
"……쿠, 콜록! 쿨럭콜록! 케헥! 하아─! 하아─! 하아아아──!!!"
심호흡을 해도 폐에 제대로 산소가 들어가지 않았다. 지옥이 이런 곳일까. 여전히 주변은 어두웠다. 네우로이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녀석은 천천히 북동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수도로. 브리타니아의 심장으로. 막아야한다.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어떡해야할지 몰랐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하지? 뭘 해야하지? 일단 일어서자. 그런 생각에 리네트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으큭……."
"흐, 으앗! 죄송해요!"
자신이 감싸고 있던 위치의 신음소리에 리네트는 자신이 그 위치를 무릎으로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살짝 툭 건드린 수준이었지만 부상자에게는 심각한 자극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리네트에게 이 사람들 내버려두고 갈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의무병이 올 때까지는 대기해야했다.
그 순간 어두웠던 주변이 다시 밝아졌다. 하늘을 보았다. 달이 보였다. 네우로이가 완전히 훈련소 밖으로 나갔다는 증거였다. 다행인 걸까. 불행인 걸까. 살아남아서 다행인 걸까.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불행한 걸까. 알 수 없었다. 부상자를 알리는 외침, 소대원을 찾는 함성, 아직도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건물의 파열음이 뒤섞여 메아리치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알 수 없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치솟는 무력감이 리네트의 마음을 잠식해나갔다.
"어째서……. 어째서……."
땅을 짚은 손이 바닥을 긁고, 숙여진 고개는 눈물을 불러온다. 참아보려고 하지만 한 번 새어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무너진 제방처럼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흑……, 으흑, 어째서……. 어째서어……. 윽, 흐윽…… 어째서어……!"
그때, 무언가가 리네트의 손을 건드렸다.
"……?"
리베리온 군복 소매 끝에서 튀어나온 손. 리네트는 고개를 들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이국의 마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등 너머로 미지근한 손길이 느껴졌다. 희미하게 떨리는 손이었다. 리네트는 멍하니, 반사적으로 그 오른손을 맞잡았다.
"……."
"……네?"
무언가를 말했다. 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말한 게 아니었다. 눈앞의 마녀에게는 더 이상 말할 기력이 없었다. 그저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전하고 싶어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
"……다,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부탁드릴게요. d, o, m, o, e?"
"……."
"d, o, m, 아니, n, d, t? don't?"
"……."
"w, o, r, r……."
"……."
말이 나오질 않았다. d, o, n, t, w, o, r, r, y. 걱정하지 마. 이 사람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네우로이에게 격추당해 추락한 사람이, 일분일초가 급한 사람이 난생 처음 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대체 무엇을 믿고? 아니면 그저 울고 있는 자신을 위로하고픈 것일까. 어느 쪽이든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정적인 미래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당장 죽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한다.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무엇이 이런 생각의 차이를 만드는 걸까.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걸까? 만일 그런 것이라면 더욱더 참혹하다. 그렇다면 자신은 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상대를 안심시킬 수 있는 거짓웃음이라도 지어야 하는 걸까. 할 수 없다. 지금은 아무리 노력해도 미소를 그릴 수 없었다. 부정적인 사고가 가속한다.
"읏…… 흑……."
일그러지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인다. 맞잡은 상대의 손이 점점 더 차가위지는 게 느껴진다. 양손으로 마주잡고 품에 끌어안는다. 안돼, 죽지 말아요. 제발.
그때,
■■■■■──────────!!!!!!!!!!!!!
네우로이의 괴음이 들려왔다. 희미한 총소리가 섞여있었다. 총소리? 리네트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북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네우로이가 움직이던 방향. 녀석은 허공을 향해 붉은 섬광을 흩뿌리고 있었다. 아니, 명확한 목표를 노리고 있었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며 네우로이와 대적하는 것. 이 세계에 그런 것은 하나 밖에 없다.
"……위치?"
리네트의 말을 들은 것일까. 상대의 손이 움찔했다. 그리고,
"어디야, 제길! 아까 위치 추락한 곳이 어디라고, 오 이런 세상에 맙소사! 이건 나 혼자 못해! 지원 바란다. 운동장 북부 추락마녀 발견. 상태는, 겉보기만 해도 복합골절에 탈구에 내장파열에, 하여튼 히포크라테스 선서 한 것들 중 괜찮은 사람들 다 튀어와!"
적십자 완장을 찬 의무병은 위치를 본 순간 인컴에 대고 그렇게 소리쳤다.
살았다. 이 사람 살 수 있어.
그 생각이 리네트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
10분 남짓이었을까. 주관적으로는 한 시간은 넘게 싸운 것 같았지만 시계가 알려주는 전투시간은 그 정도 뿐이었다.
물론 아무리 에이스가 셋이고, 상대 네우로이가 중형종이라고 하더라도 사실상 10분은 불가능한 시간이었지만, 훈련소에서 대공포화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게 행운이었다.
전투를 끝마치고 곧바로 돌아가려 했지만 훈련소로부터 날아든 통신이 그걸 막았다. [지원 감사한다 501. 그런데 해당 훈련소에 추락한 마녀는 501 부대 소속인가?] 추락이라는 말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또, 빗나갔네-……."
점을 말하는 것일까. 에이라는 평소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엄숙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고, 하르트만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말을 걸 수 없는 분위기를 휘감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훈련소 운동장에 임시로 착륙했다. 네우로이의 일격을 받은 훈련소는 반쯤 초토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세라가 누워있었다.
부목. 고정대. 붕대. 몰핀. 피에 물든 옷. 어딘가 본 듯한 광경. 그때는 바다 위였던가.
"……니는…… 루키니……는?"
"괜찮아. 자고 있어. 열이 많이 내렸어."
"사, 냐……."
"무사해. 22연대 애들이 도와줬대."
"……으응…… .""
이 와중에도 루키니와 사냐를 걱정하는 건가.
스트라이커 유닛의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기조의 옷과 스트라이커 유닛. 머리 위의 녹색빛 마도침. 9연장 플리거 허머.
사냐는 세라를 본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 에이라가 그런 사냐를 품에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지만 사냐는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어떡할 거야?"
하르트만은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 하지만 그 아래 흐르는 복잡한 심정이 느껴졌다.
"본국에 보고해야지."
"이번에도 무시될 텐데?"
"……"
하르트만의 말이 옳다. 지상에서는 게으름뱅이라 된다고 해서 창공의 에이스가 가진 판단력과 통찰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결정해야한다. 그리고 난 결정했다. 군인으로써 틀린 결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옳지 못한 명령이라면 항명할 줄도 알아야 한다. 지금 하지 않는다면 분명 난 평생 후회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멈추지 않으면, 리베리온은 분명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냐."
스스로도 소름끼칠 정도로 낮은 목소리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알고 싶지도 않다.
내 부름에 돌아본 사냐에게, 나는 극약의 처방을 던졌다.
"달빛눈꽃에게, 연락해 줘."
*****
등에는 활을 메고, 손에는 빗자루를 든 소녀가 거리에 나타난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보통은 그냥 특이한 아이구나, 하고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고 원래 하던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그런 소녀가 여럿이 나타난다면?
그래도 당신은 분명 신기하다고만 생각할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소녀들이 수십 수백에 달한다면?
그때쯤 되면 이제 당신은 무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그 소녀들 모두가 이곳 이 신대륙 옛 주인들의 모습을 하고, 이제는 빗자루와 아마 비행도구라 생각되는 무언가를 타고 정부 청사를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가고 있다면 있다면?
신대륙에 짧지만, 아주 강력한 인상을 남긴 리베리온 내전, 아니 이로쿼이-리베리온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 이 조잡하고 느려터진 팬픽 말고 다른 것들도 많이 보세요. 마탄의 사수라던가 창공의 배달부라던가 AWACS라던가. 2010년 3월 29일부터 시작했는데 2011년 10월 중순이나 되서야 겨우 20화 나오고, 심지어 본편에도 못 들어가고 있잖습니까. 좋지 않아요 이런 거. 불량소설이에요.
- 체리 청축 주문 완료. 갈축과는 과연 어떻게 다른지를 시험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어서 와라.
- 아슬아슬하게 일요일…… 인 줄 알았는데 어쩌다 0시의 게시물이 되었지 […]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21
전란의 소용돌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최전방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과는 인연이 없어 보이는 최후방 산골짜기 마을이라도 조금씩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어 천천히 모든 것을 뒤흔든다.
안전하다면 가장 안전하다고도 할 수 있는 브리타니아의 수도도 그런 전란의 소용돌이에 침식당한지 오래였다. 수만은 피난민들이 끌고온 공포와 절망과 분노. 실질적으로 한계에 가까워져가는 구호물자. 쉽사리 역전될 기세를 보이지 않는 전세. 그 모든 것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마음 속 어둠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리타니아 국민들의 생활 태도는 변함없이 침착하고 차분했다. 어지간한 일에도 부산스럽게 호들갑을 떨지 않는 국민성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 본토가 유린당하지 않았다는데서 오는 여유 때문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찌되었든 조금 가라앉았다고는 해도, 전쟁이 터지기 전과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수도의 거리는 최근 바다를 건너온 새로운 소식에 들썩이고 있었다.
"소식 들었나?"
"뭘?"
"포병 말이야. 포병."
"아, 아아. 들었지. 저기 밀러에게 들었어. 그것 때문에 지금 카를스란트 애들 분위기가 말이 아니야."
"어? 카를스란트 애들이 왜? 포병은 리베리안이잖아. 아니, 그 이로쿼이……인가?"
"국적이야 어찌되었든, 88mm 쓰는 마녀가 포병 하나 뿐이잖아. 희망의 별이 떨어졌다는 거지."
"그거로군. 거참……."
오늘도 흐릿한 하늘 아래 도시를 감도는 미적지근한 공기 속에서 사람들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원주민 아가씨 갈비뼈가 내려앉았다고 하더라고."
"어이고, 나중에 나이들면 엄청 고생하겠구만."
"근데 그게 원래는 그렇게 다칠 필요가 없었데."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아가씨 리베리온 군복 입지만 사실은 그 뭐시냐, 이로쿼이 거기 사람이잖아? 거기서 원래 여기 올 때 비전투인원으로 왔었다는 거야. 그런데 어쩌다보니까 88mm들고 싸우게 된 거래."
"싸우지도 못하는 사람을 전선에 밀어넣었다는 거야? 에이, 그건 아니겠지."
"근데 그게 진짜인가봐. 게다가 말이지, 이걸 이로쿼이에 통보를 안 했다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미심쩍어하는 동료의 표정에 그는 잠시 주변을 살펴보고는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생각을 해봐. 전투마녀가 추락한 거 가지고 저렇게 난리를 치겠어? 전투마녀가 전투에 나가서 추락했는데 전쟁을 터뜨리겠냐고?"
"……."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들 뿐만이 아니라 이 대화를 하고 있는 수도의 사람들 모두가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고민은 정치적, 혹은 세력 구도적인 관점과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좀 더 현실적이고 절박한 문제였다.
"어찌되었든 얼른 전쟁 좀 끝났으면 좋겠어. 먹을 게 점점 떨어져 간다고."
"그나마 봄이라 다행이지. 가을이었으면 겨울 날 준비하느라 죽어났을껄."
"그건 진짜 다행이지. 지난 번 겨울도 덜덜 떨면서 보냈는데 올해도 그래야 한다고 하면 정말……. 어휴……."
"애들 안 다치게 하는 것도 있잖아. 어제 의사양반이 그러드만. 사나흘이면 약 다 떨어진다고."
압도적인 물량으로 구대륙에 물자를 공급하던 리베리온이 이로쿼이와의 전쟁으로 본의 아니게 지원을 중단한 게 벌써 일주일 전의 일이다. 그 사이 네우로이가 한 번 쳐들어왔고, 알음알음 신대륙의 전쟁 소식이 전해져오기 시작했다. 중부는 초토화되었다는둥, 이미 몇몇 주는 항복해서 이로쿼이의 손에 떨어졌다는둥, 리베리온은 수도가 불타고 있다는둥, 신뢰하기에는 영 껄쩍지근한 소식들 뿐이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리베리온이 명백하게 밀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외부 원조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인 게 당연했다.
"어느 쪽이든지간에 얼른 전쟁 끝내고 다시 지원 좀 해줬으면 좋을 텐데……."
"그러게나 말이야……."
늘어나는 건 한숨 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브리타니아 사람들은 오늘도 차분하게 그들의 일상을 영유해가고 있었다.
*****
"……하, 항복한다……."
어느 부족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로쿼이안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한 소녀가 시퍼렇게 날이 선 토마호크로 목젖을 지그시 누르자, 새된 목소리가 주지사의 목에서부터 흘러나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로쿼이 전사가 주지사의 오른손을 낚아채 인감으로 보이는 붉은 것을 바른 후, 한 서류에 대고 꾹 눌렀다.
난폭한 조인방식. 분명 후대의 리베리온 역사가들은 불평등 조약이라 말하리라. 하지만 고향을 잃고 헤매야했던 이로쿼이안들에게는 이제서야 겨우 한 대 되갚아준 것에 불과했다.
그 모든 것이 끝나자 사역마와 융합하여 머리에 사슴 뿔이 돋아나 있던 다른 이로쿼이 소녀가 자신들이 부수고 들어온 벽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수많은 이로쿼이안들이 리베리안을 제압하고 있었다. 명백한 승리. 그렇기에 소녀는 외쳤다.
"탈환 완료!"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렇게 큰 소리가 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웅장하면서도 소녀 특유의 맑고 높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것을 뒤덮는 훨씬 더 거대한 환호성이 주 청사 건물을 뒤덮었다.
*****
"코드 AFA 다운은 1급 군사 기밀이었을텐데 저들이 어찌 알았지?"
AFA. AirForce Artillery. 항공포병. 세라가 88mm를 들게 된 이후 반쯤 장난으로 붙게 된 별명은 어느 새 정식 코드명이 되어 있었다. 세라의 군 소속은 해군, 정확하게는 해군항공대 소속이니 정식으로 쓰자면 틀린 말이 되지만 이제와서 그런 걸 따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그런 걸 따지기에는 상황이 너무나도 급박했다.
"연합군 501부대 소속인 나이트 위치가 이쪽 윈주민 나이트 위치와 주기적으로 통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내버려뒀다고? 제정신이야?!"
"대륙간 통신 연구에 도움이 된다며 허락한 건 당신이었소. 잊었소이까?"
"무, 뭣?! 잠깐잠깐잠깐! 원주민이 실험 조종사라는 얘기는 없었어!"
"원주민 애들을 쓰면 제대로 지원비를 주지 않아서 전부 다 리베리안이라 고쳐 올렸겠지요. 그러니까 지원 제대로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건만……"
"내 탓이라는 말인가?!"
"워워워, 진정들 하시오. 그 문제는 나중에 처리하고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할 것 아닙니까."
완벽하게 전시 체제로 들어간 펜타곤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작전회의와 책임문제로 시끄러웠다. 의회와 행정부, 그리고 언론 역시 소란스럽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직접적으로 활동중인 국방부에 비하면 한가한 수준이었다.
"발슨 준장을 불러. 펜타곤으로. 지금 당장."
"서부 도시들은 사실상 버려야 합니다. 해당 지역 군부대는 사실상 연락 두절입니다."
"그러니까 진작에 원주민 놈들 연락망 알아보고 끊어야 한다고 했잖아!"
"뭘 좀 알고서나 그런 소리를 하시오! 그렇게 쉽게 끊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진작에 끊었어!"
"녀석들은 지금 중부를 집중 공격하고 있어. 그러니 북부와 남부 주둔군을 움직여서 포위한 다음 몰아치면……."
"녀석들 별동대가 한 둘이 아니야. 보급시설 방어력 증강시켜. 분명 그쪽을 노린다. 당하면 끝이야."
"최대한 빨리 끝내야 돼. 해외로 나간 녀석들 보급이 끊긴 지가 벌써 일주일째야!"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방어선 라인 구축해."
"아니, 참호 같은 거 파지 마. 우리가 죽어. 알겠어? 느슨하게 연결망만 구축해. 유기적으로. 그래, 그렇게."
부서지듯 문을 열어젖히며 병사가 들어온 건 그때였다.
"급보! 텍사스 주에서 리셋 머신 확인! 교전 돌입 연락 후 통신두절!"
그리고 곧바로 또다른 병사가 들어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절박하게 외쳤다.
"급보! 미시건 주에서 이로쿼이 전사단 확인! 선두에는 맹렬한 황소가 있답니다!"
방금 전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던 펜타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만큼 충격적인 소식들이었다. 누구와 누구가 어디와 어디에 있다고? 거짓말이겠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두 병사들을 제외한 다른 장성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겨우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들은 병사들이 가져온 서류철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그리고는 방금 전까지 작전회의를 하고 있던 대형지도 앞으로 모여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미시건?! 중부 전선은 유지되고 있는데?! 어디로?! 어떻게 건너온 거야?!"
"……설마?! 파러웨이 랜드로?!"
"그 설마가 맞는 것 같군. 파러웨이 랜드를 경유한 다음 5대호를 건너서 왔다면 미시건에 있는 것도 가능하겠지."
"파러웨이가 원주민 놈들과 손을 잡았다는 건가!"
"아니, 녀석들은 그냥 숲을 달렸을 거야. 그런 놈들이니까."
"중부전선 북부가 포위되었다면…… 제기랄!"
지도 앞에 모인 장성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동안,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듯한 장군과 이제 갓 별을 단 듯한 비교적 젊은 장군이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맹렬한 황소면, ……그로군. 본명이 용맹한 창날이었나. 전설을 만든 전사지."
"어떤 전설말입니까?"
"리셋 머신을 알고 있나?"
"물론이죠. 그 전설의 마녀를 모르는 군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중부전쟁때 그 리셋 머신과 사흘 밤낮 호각으로 싸우며 도시 하나를 초토화시켰어."
"……중부전쟁 때라면, 맙소사, 리셋 머신 전성기 아닙니까? 사람입니까?"
젊은 장군의 말에 노장군은 노쇠한 육체와 달리 강직함을 담은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자네가 원주민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다시 인식하도록 하게. 특히 이로쿼이 전사들, 그것도 마녀의 아버지라면 더더욱. 그들은 초인적인 육체능력과 상상도 할 수 없는 정신력을 가진 자들이라네."
"……."
"그런 그가 선두인가. 전사장의 자리에 오른 것이군. 게다가 리셋 머신이 텍사스를 뒤엎는 중이라니."
쉬운 전쟁은 없지만, 이번 건 정말로 쉽지 않겠어. 노장군의 말에 젊은 장군은 딱딱한 얼굴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두 사람과는 달리 지도 앞에 모인 이들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어머니는 남쪽에서, 아버지는 북쪽에서. 참으로 굉장한 집안이로군."
"어, 잠깐. 잠깐만. 제군들? 리셋 머신이 텍사스를 갈아엎고 있다고? 난 왜 리셋 머신이 원주민 편에 가담해서 리베리온 도시들을 쑥밭으로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네만,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있나?"
"코드 AFA, 그러니까 세라 둘리틀 하사는 리셋 머신의 장녀입니다."
"……만약 내가 야전 지휘관이었다면 난 당장에라도 백기를 들어올렸을 거야."
"타임머신이 있다면 하사가 구대륙으로 건너가는데 찬성표를 던졌던 나를 때려주러 가고 싶군."
"중장님! 아무리 리셋 머신이라도 이제는 평범한 30대 여성입니다."
"안과에 가서 검진 좀 받고 오게. 그리고 서류를 다시 읽게. 그러면 그 평범한 30대 중반의 여성이 지금 텍사스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 알게 되겠지."
한 장군의 말이 끝나자마자 또다른 병사가 열린 문으로 들어와 외쳤다.
"급보! 텍사스 주 청사가 이로쿼이에 점령되었습니다!"
"……귀도 검진 받아야 하나?"
"……."
지도 앞 인물들이 침묵에 휩싸이자 젊은 장군이 말했다.
"실질적으로는 우리 리베리온이 우위에 있습니다.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고 이로쿼이 주요 도시들을 폭격한다면,"
"자국 내 폭격을 의회와 국민들이 용인할 것 같은가?"
"하지만!"
"이로쿼이안을 무시하지 말게. 그들도 로비스트를 쓸 줄 알고, 그들의 입김이 닿은 의원들도 있어. 그리고 국방부에 불만이 있는 이들도 많지. 지금 사태로 신이 난 이들 말일세."
정말로 쉽지 않겠군. 그리 말하며 노장군의 씁쓸한 미소와 함께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인 순간,
"장군님들, 정부의 정식 공문입니다."
앞서 전력을 다해 달려왔던 병사들과는 달리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낯선 이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가져온 소식은 이로쿼이-리베리온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
용맹한 창날은 회의라는 것을 그리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엄숙하다못해 어깨가 무거워지는 대족장 회의의 호출을 탐탁찮게 여기면서도 결코 빠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미시건에서부터 여기까지 오기 위해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꼬박 움직이느라 몸이 굉장한 피로를 호소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쉬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대족장 회의는 분명 그가 그런 노력을 해서 참가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둥글게 모여앉은 회의장 가운데 선 것은 구대륙으로부터 온 자들이었다. 브리타니아, 갈리아, 카를스란트 삼국의 사절단. 중장년 남성들이 사절이고 그옆의 소녀들은 아마 호위역인 위치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이 전해온 소식과 요구 사항은 단순했지만 복잡했다.
"대규모 네우로이의 공세가 도버 해협으로 집결중입니다. 근시일내 브리타니아 침공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양국 간의 마찰은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나, 이번 위기의 극복을 위해 잠시나마 협력하여 브리타니아 본토 방위에 협력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전쟁을 끝내고 리베리온이 당신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이로군."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숨길 것도 없다는 듯 사절단 중 한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숨길 것도 없었다. 신대륙, 정확하게 말해서 리베리온의 지원이 없다면 구대륙이 네우로이의 공세를 버티기에는 너무나도 힘들다. 당장 전투에 임하는 군대는 어찌어찌 버틴다 하더라도 식량과 약품을 비롯한 소모품과 피난민들에게 주어지는 각종 지원물자는 바닥을 보이고 있다. 지금 당장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브리타니아 역시 붕괴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경우, 브리타니아 정부는 모든 국민들과 피난민, 그리고 전군을 리베리온으로 이주시킬 예정입니다."
"……중부전쟁이 다시 일어나겠군. 알고 있나?"
"국토를 잃고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시점에서 일부 국민들이 국경을 넘어 불법행위를 저지른다 하여도 저희로서는 제어할 수 없습니다."
브리타니아 사절의 말에 한 족장이 일어서 말했다.
"리베리온 놈들도 그와 비슷한 말을 했었지. 정부의 영향력을 발휘하기에는 영토가 너무 넓어 일일히 잡아들일 수 없다고. 그렇게 한 놈 두 놈 야금야금 몰래 숨어들어오더니 어느 날부터는 군복을 입은 녀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지."
"……."
"뭐, 다 지난 얘기야.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게. 그때는 얌전히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늑대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거친 목소리로 위협하는 족장의 모습에 사절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위협에 굴해서라기보다는 대안을 찾는 듯한 얼굴이었다.
브리타니아 사절이 입을 다물자 갈리아와 카를스란트 사절이 각각 말하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줄이자면 지금 상황은 정말로 급박하니 어서 종전협상을 하고 다시 지원해주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부전쟁 이전에 갈리아와 충돌한 적이 있던 부족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혹은 성난 얼굴로 마구 소리치는 족장도 있었다.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그런 이유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절단 역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다. 이쪽은 전 국민의 목숨이 달려있으니 필사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외면한다면 목소리가 커질 수 밖에.
대대로 전해지면서 너무나도 거대하진, 잠시도 덮어둘 수 없는 뿌리 깊은 증오와 분노만이 회의장을 뒤덮고 있었다.
"……."
적어도 오늘 안에 답이 나올 것 같지 않군. 회의가 두 시간 정도 지나자 용맹한 창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끝자리에 앉아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돌린 용맹한 창날의 귓가에 이 모든 사태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대족장의 부름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용맹한 창날."
노인의 말. 하지만 결코 연약하지 않으며 연륜이 묻어나는 우렁찬 목소리였다. 호리호리하니 마른 몸에서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한 대족장의 한 마디에 회의장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나의 귀는 열려있습니다, 위대한 인도자여."
그러니 말하십시오. 모든 것을 듣겠습니다. 그런 뒷말이 숨겨져 있는 이로쿼이 말에 대추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엄숙한 얼굴로, 폭탄과도 같은 말을 전했다.
"이 문제의 결정을 자네의 손에 맡기겠네."
일순간의 침묵. 그리고 회의장은 단숨에 끓어올랐다.
"대추장!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는 분명 훌륭한 전사지만 이토록 중대한 결정을 어찌!"
"인정할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 혼자 결정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일입니다!"
"조용!"
대기를 떨게 하는 웅장한 외침이 회의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아무런 장비 없이 단신의 인간이, 그것도 저리 늙은 노인이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 걸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다시 고요를 되찾은 회의장에 대추장은 조용히, 그러나 끝에 있는 이들도 들을 수 있는 크기의 소리로 말했다.
"전통을 지키도록 하지. 한 사람 씩. 알겠나?"
사절단을 제외한 모두가 동의를 표하자 대추장이 말을 이었다.
"이 일은 모두 용맹한 창날의 딸에게서부터 시작된 일이네. 그렇기에 난 그 아이를 대신하여, 그 아이의 아버지가 이 일을 정하도록 한 걸세."
"대추장, 그는 분명 훌륭한 전사입니다. 그가 그의 아내와 만든 전설이 사실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토록 중대한 결정을 한 사람의 손에 맡기는 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이건 그의 딸로부터 시작된 일이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격앙되어 있지만 방금 전보다는 차분해진 족장들이 그렇게 부정의 뜻을 내비쳤다.
대추장은 그 모든 의견들을 묵묵히 들은 후,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말하는 이가 없어지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먼 곳에서 온 자들이 있지만, 그냥 말하겠네. 늑대와 독수리와 돌고래에 맹세코, 우리가 더 싸울 수 있을 거라고 보는가?"
무언가 외치려던 족장들이 있었지만, 이내 그들은 억누르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다들 잘 알고 있었다.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우리의 한계가 어디인지. 하지만 흐르는 세월에 묻어둘 수 밖에 없었던 감정들이 폭주한 순간 멈출 수 없었다. 더. 조금만 더. 동쪽으로. 더 동쪽으로. 우리들의 옛땅으로. 그렇지만──
"이제는 끝내야 할 때지. 우리도, 상대도 한계에 도달했어. 20일도 넘지 못하는 이 시간 속에서 말이지.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결정권을 주었네. 만약 그가 없었다면 난 아무에게나 주었을 거야."
왜냐면, 인정하기는 싫지만, 너무나도 슬프고 분하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은 모두 똑같으니까.
"그러니 용맹한 창날이여."
"네."
"사심을 버리라 말하지는 않겠네. 하지만 흐릿한 육신의 눈이 아닌, 영혼의 눈으로 보고 결정해주게. 전쟁을 계속 할 텐가?"
대족장 회의에 참여한 모든 이들과 사절단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만인의 시선을 느끼며 용맹한 창날은 눈을 감았다. 눈앞으로 수많은 영상들이 스쳐지나갔다. 할아버지가 사냥을 하던 숲. 아버지가 내달리던 들판. 이제는 리베리온의 도시가 들어선 옛땅. 그 모든 것이 스쳐지나가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가족들의 얼굴. 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된 첫째 딸의 얼굴.
"……아내가 이곳에 있었다면 분명 제 머리를 꺾어버리려고 했을 겁니다."
농담과도 같은 말을 하며 용맹한 창날은 눈을 떴다. 그리고 말했다.
"전쟁을, 끝냅시다."
2주도 안되는 시간 동안 벌어졌던 이로쿼이-리베리온 전쟁이 끝나고, 구대륙 국가들이 이로쿼이 연맹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
- 세라 어머니 쪽이 좀 있는 가문이지요. 하지만 어머니가 세라의 아버지와 결혼하자 의절당했고요. 아버지는 현재 전사장(위에 대전사장이 또 있습니다)을 하고 계시지만, 예전에는 평범한 이로쿼이 전사였습니다.
그 외에, 리베리온에 있을 때 부대에 있던 이로쿼이 아이들 중 몇몇이 각 부족 귀한 딸내미였지요. 서리 내린 나뭇가지, 그러니까 달빛눈꽃 같은 경우 부족 대주술사가 외할머니시지요.
어라, 세라 인맥 좋은 아이?
- 주말에 올린다고 했는데 또 넘겼군요. 여러분. 그냥 제 말은 안 믿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이 무슨 불량 글쟁이.
- 각설하고, 꽤 중요한 투표를 하나 하려고 합니다.
제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와 RadioNoise님의 'AWACS's War', 그리고 메이사이 님의 '창공의 배달부' 이 세 편을 엮어 새롭게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두 분의 허락은 이미 받은 상태입니다.
문제는 포병을 계속 쓰느냐, 아니면 저 합작 신작을 쓰느냐입니다. 그런 고로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투표 참여 부탁드립니다.
1. 합작 신작을 보고 싶다. 포병은 버려.
2. 헛짓거리 하지 말고 포병이나 써라.
3. 기타 (사유를 써주세요)
선택지는 대충 이렇습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타입문넷과 조아라 양측의 결과를 합산하여 연말 전에 결정된 쪽의 소설 한 편을 들고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22
"……흠, 알았다."
찰칵. 함내 무전실에서 사카모토는 그렇게 말하며 무전기를 껐다. 결코 길지 않았지만 양국의 판도를 확정지은 이로쿼이와 리베리온의 신대륙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었다. 일단 네우로이의 대규모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서 양국이 협력하여 연합군의 보급에 전력을 다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현재 사카모토가 있는 후소 보급함대의 중요도가 줄어들 일은 없었다. 정부 기관과 군부대만 집중 타격했다고는 하지만 어찌되었든 전후 복구에 시간이 걸릴 테니 그 동안 버티기 위해서라도 함대가 운송중인 보급품이 필요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걷고 있자니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사카모토 씨."
고개를 돌려보니 한 소녀가 있었다. 새의 날개처럼 양끝으로 펼쳐진 갈색 머리카락과 의문을 품은 동글동글한 눈동자. 위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입고 있는 것은 군복이 아닌 중학교 교복. 소녀의 이름은 미야후지 요시카. 스트라이커 유닛을 개발한 미야후지 박사의 외동딸.
"무슨 좋은 일 일으셨나요? 얼굴이 밝아보이시는데."
"아아, 신대륙 전쟁이 끝났다고해서."
그 말에 미야후지가 환하게 웃었다.
"정말요? 다행이다!"
"그렇게 기쁘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 소녀가 이렇게 기뻐할 일은 아니다. 조국도 아니고 지인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뻐하는 것일까.
"네우로이가 있는데 사람들끼리 싸우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이제 안 싸운다고 하니까 다행이죠."
단순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와 과거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면 그 단순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번 전쟁 같은 경우는 그 단순한 생각을 무시해버릴 정도로 쌓여있던 게 터져버린 거지만.
하여튼 이번 사태의 핵심 인물이 501부대원이라는 걸 생각하면 복잡한 심정이 된다. 미나가 고생하고 있겠군. 그런 생각이 사카모토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
여느 때처럼 아낌없이 탄환을 쏟아붓고 있는 바르크호른의 모습을 본 하르트만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인컴에 대고 말했다.
[트루데, 괜찮아?]
"무슨 소리를…… 아차!"
바르크호른은 그제서야 깨달은 듯 황급하게 사격을 멈추고 다른 분대에게 공격권을 물려주며 일시적으로 전선에서 이탈했다. 그리고 그런 바르크호른의 귓가에 다시 한 번 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트루데─ 아, 아니었구나.]
"방금 전에 들었잖아. 같은 실수는 안 한다."
[그게 벌써 두 번째인데…….]
"이게 마지막이다."
탄약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포격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건. 그런 의미였다. 씁쓸한 현실에 어금니를 깨물며 다시 돌격하려는 찰나,
[그러니까 말했잖아. 대위한테 총 쥐어주지 말고 전투망치 들려줘야 한다고.]
"상관모독죄다 예거 중위!"
[아니, 소령님 없는 시점에서 누군가는 접근전을 해야하니까 엄청 중요한,]
"예거 중위이이이! 쳇!"
혀를 차면서 거칠게 U턴. 회피기동을 펼치고 있자 곧바로 하르트만이 지원사격으로 격추─ 그것을 확인한 바르크호른은 그대로 상승했다. 아래에서는 샬롯과 페리느가 녀석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바르크호른은 허리를 펴 깊게 심호흡을 한 후, 다시 한 번 네우로이 군세의 중앙을 종심돌파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미나는 곁에서 함께 날고 있는 신병─리네트 비숍에게 명령을 내렸다.
"신호가 떨어지면 곧바로 대형종을 노리세요."
"넷!"
미나의 말에 리네트는 곧바로 공중에 정지하고 자세를 잡았다. 음색이 살짝 떨리기는 했지만 총구와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은 냉정했다. 어깨에 좀 더 힘을 빼면 좋겠지만 아직은 무리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미나는 들어올렸던 왼손을 들었다. 대기.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바르크호른이 흐트러놓은 진열 사이로 날아든 대전차 소총탄이 네우로이의 장갑을 꿰뚫었다.
한 발, 두 발, 세 발. 네 발. 마지막 다섯 발은 다시 모여든 네우로이 군세에 막혔다. 하지만 네 발만으로도 녀석의 코어를 찾아내는 건 충분했다. 유리가 깨져나가는 것 같은 카랑카랑한 소음과 붉은 빛을 확인한 미나는 곧바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
"알파팀 돌격! 베타팀 2차 돌격 대기! 비숍 중사, 화력지원 개시! 엄호합니다!"
Roger. Copy. Yes, ma'am.
다양한 대답. 하지만 일치된 의사. 그렇기에 연계 공격은 물 흐르듯 이루어졌고, 네우로이가 빛으로 산화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코어가 파괴된 것이 확인되자 미나는 귀환 명령을 내렸다. 다시 한 번 통일되지 못한 복창과 함께 모든 부대원들의 궤적이 같은 곳을 향하였다.
전장에서 되돌아온 자들 특유의 분위기 속에서, 하르트만은 바르크호른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마지막 탄창이었지?"
"……그렇군. 아슬아슬했어."
"옛날 생각나? 그때는 맨날 부족했잖아."
"그랬지. ……몇 주 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옛날이로군."
하르트만의 말에 탄창을 확인해본 바르크호른은 그렇게 말했다. 그랬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해도 전투중 탄약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든 뒤로 미루려고 노력하는 게 일과 중 하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력이라기보다는 거의 발악에 가까운 짓들도 많았다.
어떻게보면 되돌아온 것이다. 조금 더 힘들기는 했지만 네우로이를 쳐부숴야 한다는 사실은 변치않았으니까. 아니, 훨씬 더 나아진 편이다. 마법가방의 개선은 마녀들을 전투보급으로부터 훨씬 더 자유롭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인간은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것에 집착하는 법이다.
"아직도 연락이 없나, 리베리안?"
"그걸 나한테 물어도 말이지……."
"네 후임이잖나."
"이제는 그 영역을 한참 벗어났다구. 게다가 돌아오면 영관 자리를 떡하니 차고 나타날지도 모르고."
세라가 영관이라니 영 상상이 안 가지만. 샬롯은 그렇게 덧붙였다.
그렇기는 했다. 영관이 된다고 해서 세라의 행동이 바뀔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것도 의식을 회복하고 돌아올 때의 얘기지요."
"……."
"……."
"……."
"무, 뭔가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하세요!"
"아니, 틀린 말은 아닌데, 너 진짜 분위기 못 타는구나."
"당신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요!"
"이야, 고생한다 신병."
"네?!"
"당신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세요!"
"어, 없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자, 브리타니아의 용맹을 보여줘! 계급은 장식일 뿐이야!"
"네에엣?!"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리베리안!"
"예거 중위 당신 진짜!"
"근데 높으신 분들 하는 거 보면 진짜 계급이 장식이긴 하지."
"프라우!"
"하르트만 중위!"
가벼운 농담을 즐기는 샬롯. 발끈하는 바르크호른과 페리느. 은근슬쩍 끼어들어 소란을 키우는 하르트만. 그런 선임들 사이에서 당황하고 있는 비숍.
이래서야 평소와 다를 게 없구나. 그런 생각이 미나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세라가 격추되어 후방병원으로 후송되고, 그로 인해 리베리온과 이로쿼이가 전쟁을 벌이느라 연합군 전체의 보급상황이 여의치않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501부대는 늘 해왔던 것처럼 하늘로 날아올라 네우로이를 격추시키고 있었다. 마녀들이 보급 1순위인 것도 있었지만, 다른 병과들과는 달리 직접적인 전투병과임에도 불구하고 유지비가 적게 들기 때문에 오래 버틸 수 있는 것이었다. 적어도 스트라이커 유닛은 기름을 먹지 않는다. 실드를 펼치기 때문에 유닛 수리에 많은 자원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501부대는 비교적 보급상황으로부터 여유로웠다.
미나가 항상 걱정하던 식량문제도 세라가 입원하면서 해결되었다. 먹는 입이 겨우 한 사람 분 줄었을 뿐인데 계산해보니 네다섯 사람 분의 식량이 남게 되었다. 사카모토가 빠진 걸 생각하더라도 굉장한 양이었다. 그렇지만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세라의 포격지원과 무한에 가까운 탄약보급을 생각해보면 그 정도는 말 그대로 남는 장사다. 되려 화력이 줄어든 지금 상황을 걱정해야할 판국이다. 무엇보다도 전우가 쓰러진 공백이라는 걸 의식하게 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찌되었든 세라가 쓰러진 후 벌어진 두 번째 전투이자 신병과 함께한 첫 번째 전투는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 예상 외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
포격과도 같은 광역제압 효과는 없었지만 리네트의 저격은 요점에 정확하고 날카롭게 화력을 쏟아낼 수 있었다. 단독으로 활동하기에는 아직 부족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 분명했다. 훈련평가서에 소심한 성격이라 기재되어 있었기에 전투에 대한 부담감으로 실전에서 제 실력을 내지 못하지 않을까 걱정했었지만 그런 건 없었다. 그러고보니 그 훈련소가 지난 번에 세라가 추락한 곳이었던가. 그곳에서 네우로이를 보고, 실전을 접하고, 무언가를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훈련과 실전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신병의 태도는 상당히 변하는 법이니까.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던 미나의 귓가에 무전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아, 아아, 여기는 501부대 기지─]
"어라, 에이라?"
"왠일로 무전을?"
[급보입니다─]
"조용히 하고 집중해라."
"예이예이……."
"리베리안……."
"쉿. 모두 집중."
급보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급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 말투는 분명 에이라였다. 그런데 무슨 내용이기에 어지간해서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에이라가 무전을 한 것일까. 부대원들이 그런 의문을 떠올림과 동시에 에이라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무덤덤하게 급보를 전했다.
[세라가 깨어났다는데─.]
일순간의 침묵. 그리고…….
"우와, 진짜?! 진짜로?! 이얏호! 만세! 아하하하하! 들었지?! 그치?!"
"그래 들었, 우왓?! 떨어져! 떨어져라, 리베리안! 이익!"
"예이─!"
"우왓, 프라우 너까지! 붙지 마! 흔들지 마! 으, 우랴아아아앗!!"
"기쁜 건 알겠지만 조금 진정하는 게 어떨,"
"만세! 이얏호오오오!"
"듣고 있습니까, 예거 중, 꺄아아악?!?!"
"페, 페리느 중위님?!"
샬롯이 바르크호른에게서 떨어지자마자 단숨에 가속하며 만들어진 충격파에 휩쓸린 페리느가 비명과 함께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그걸 본 리네트가 당황하여 우왕좌왕, 하르트만은 필사적으로 떨어져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바르크호른의 손을 잡고 공중에서 왈츠라고 생각되는 춤을 추고 있다.
단숨에 난장판이 된 주변상황에 미나는 작은 한숨을 내쉰 후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
"더 주세요."
"싫어."
병원식을 먹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격추당하지 않을 거라 다짐하며 식기를 내밀자, 간만에 얼굴을 보게 된 마녀전담 간호장교 언니에게 단칼에 거절당했다. 왜?! 가뜩이 영양이 부족한 10대가! 이주일 넘게 뻗어있다가 이제 겨우 일어나서 밥 달라고 하는 건데!
"너 그게 다섯 그릇 째거든?"
"씹는 맛도 없고 양도 그럭저럭인 어정쩡한 걸로 다섯 그릇 먹어봤자 아무 효과도 없어요."
"아니, 그거 고칼로리 영양식이야. 하루에 한 그릇만 먹어도 충분하거든? 살찐다?"
"위치의 운동량을 생각해보면 전혀 설득력이 없는데요."
"그래도 안돼. 전문가가 봤을 때 넌 진짜 엄청 많이 먹었어."
그리 말하며 식기에 수저까지 빼앗아가신다. 별 수 없나. 저녁 식사 때를 기다려야지.
"저녁도 조금만 줄 거야."
신은 없는가. 허탈한 기분에 천천히 몸을 뒤로 기울였다.
풀썩. 푹신한 감촉이 몸을 뒤덮고, 동시에 찌르르르 하고 감전된 것 같은 통증이 상반신 전체에 퍼져나갔다. 으그흐야아앗?!
"헉, 허억, 허억……."
"잘하는 짓이다."
한심하다는 듯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치유마법을 걸어주는 언니. 당신이라는 사람은 친절한건지 악독한건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온찜질+초음파 치료 같은 치유마법의 빛을 쬐고 있자니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대로 계속 받고싶어라아…….
하지만 통증이 사라짐과 동시에 언니는 치유마법을 거두었다. 무서울 정도로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과연 실천주의 학파.
"등신 같은 짓 하지 말고 깁스 풀 때까지 얌전히 있어. 의식불명인 동안 치료마법 쏟아부어서 다 나아가기는 하지만 아직 멀었으니까.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척추랑 갈비뼈가 내려앉고 팔 관절이 늘어나서 오는 건지 원. 하여튼 신기한 애라니까."
전 그렇게 반신불수로 살아야 할 지도 모를 엄청난 중상을 고작 일주일만에 여기까지 회복시킨 치료마법이 더 신기한데요.
왼팔의 깁스와 환자복 아래 상반신에 둘둘 감긴 붕대를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언니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나 말고도 몇 사람 더 달라붙었으니까 이 정도가 된 거야."
후방이라고 해도 전쟁통의 군인병원에서 의식불명의 환자에 여러 사람이 달라붙다니. 위치라서 그런 건가?
야, 마녀되길 잘 했네. 고작해야 하사밖에 안되는데도 이렇게 해주다니.
하지만 다음으로 들려온 언니의 말에 난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네가 그렇게 높으신 집안 딸일 줄은 몰랐어. 너 하나 추락한 걸로 전쟁도 나고, 너 죽으면 안된다고 장관이니 장군이니 하는 사람들 막 왔다갔다 하고. 굉장하더라?"
"……네?"
"이로쿼이 전사장과 리셋 머신의 딸이라니. 그러면 좀 더 근성을 보여줘야지."
"……흐어?"
아니 이게 무슨 소리요, 의사양반? 전쟁이라니? 나 없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자초지종을 들어보려는 순간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실례합니다─. 여어, 오랜만일세. 그쪽 간호사님도 오랜만입니다."
"면회는 아직 안될 텐데?"
"에이,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하지 마세요. 게다가 단순 면회가 아니라니까요?"
들어온 것은 셜리였다. 게다가 손에는 뭔가 서류 같은 걸 들고 있다. 이 아가씨는 어째 나랑 병원에서 만나면 항상 뭔가 서류 같은 걸 가지고 오는 것 같단 말이지.
언니도 그걸 봤는지 순순히 물러나주었다. 여튼 언니가 방을 나가자 셜리는 침대 옆 간의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는데 벌써 다 나아가네? 퇴원은 언제야?"
"몰라. 이제야 일어나서 점심먹었는데 아는 게 있을 리가 있나. ……아, 맞다."
"응?"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전쟁이 났었다고 하던데?"
"아아, 그거……."
내 질문에 셜리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추락. 이로쿼이와 리베리온의 전쟁. 평소와 같은 출격. 대규모 네우로이 군세의 움직임. 501부대의 신병. 유럽 국가들의 사절단. 종전. 이로쿼이의 정식 국가 인정. 신병을 포함한 출격. 그리고 내 회복 소식.
"감상은?"
"……어떡해야 하지?"
"묻지마, 나도 모르니까."
사람 하나 때문에 전쟁이 날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나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로쿼이와 리베리온 사이에 전쟁난 것만 해도 머리가 복잡해지는데, 그 여파로 연합군 보급도 삐걱댔었다고 하니 대체 어디서부터 뭘 해야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일단 역사서에는 이름이 남겠구나. 하하하하하하하…….
……진짜 어쩌지…….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에 나오는 것은 그저 한숨 뿐이다. 그러자 셜리는 이미 다 지나간 일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으니까 문제인거지. 그리고 말이지…….
"달빛눈꽃이 다 듣고 있었으니까 다행이지, 정말 네가 연락해서 일 터진 거였으면 영창 정도로는 안 끝난다고."
셜리가 작정하고 내 추락 소식을 전하려고 했던 그 때, 달빛눈꽃은 사냐를 비롯한 다른 나이트위치들을 경유해서 부대원들의 무선을 듣고 있었다고 한다. 이건 리베리온의 우월한 기술력의 힘일까, 아니면 이로쿼이 소녀들의 초월적인 마법의 힘일까.
어찌되었든 그덕분에 그 자리에 있던 501부대원들과 훈련소 사람들 몇 명은 제일 먼저 전쟁이 터질 거라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뭐, 그랬으면 지금 내가 여기에 있을 수가 없겠지."
"그걸 잘 아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하려고 했어?"
"그때는 머리에 열이 확 끓어올라서 말이야. 아하하하."
쾌활하게 웃는 셜리.
하지만 만약 달빛눈꽃이 듣고 있지 않았다면, 그래서 셜리가 정말로 전했었다면. 그랬다면 이렇게 웃고 있을 수 있었을까.
"……평생 후회했을지도 몰라."
"……분명 그랬을 걸."
길든 짧든, 순조롭든 급박하든 전쟁은 전쟁이다.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불씨를 당긴 사람이 과연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기억이 추억이 되고, 희미하고 빛바랜 파편이 되더라도, 문득 떠오를 때마다 생각할 것이다.
과연 그때의 난 옳은 결정을 한 것일까. 훨씬 더 좋은 선택이 있지 않았을까.
만약의 이야기. 하지만 너무나도 현실적인 이야기.
고작 열여섯 소녀 둘이 논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주제가 끝나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눈뜨자마자 이렇게 우울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니. 세상은 언제나 이럴 리 없는 일들 뿐이라더니만. 한숨이 절로 흘러나온다.
……아, 맞다.
"사냐는?"
"무사해."
다행이다. 그러고보니 사냐도 에이스지. 단일화력도 우월하고.
"루키니는?"
"진작에 다 나았지. 지금은 쌩쌩해. 여기 오겠다고 하는 걸 말리느라 고생했다고."
"오늘 네우로이 격추했으면 한동안 널널하지 않아? 그럼 와도 될 텐데."
"사카모토 소령님 다음 주에나 도착하신다고 하고, 너 없고 해서 인원이 좀 빡빡해. 신병이 오긴 했지만 신병이니까 완전히 맡길 수도 없고 말이지."
셜리는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그러고보니까 그날도 날 보자마자 한 말이 루키니랑 사냐는 괜찮냐는 거였지."
"그날이라니?"
"너 추락한 날."
"……기억 안 나."
"그럴 수도 있어. 의사가 그러던데, 어깨를 부딪쳤을 때 척추랑 중추 신경이 타격을 받아서 뇌가 기억 일부를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
다 죽어가는 상황에 남 걱정 같은 걸 하고 있었다니. 난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닌데.
분명 셜리 말대로 중추신경이 맛이 가서 그랬을 거다. 응. 그래. 그런 걸 거야. 분명 그게 진실일 것이다.
"뭘 부끄러워하고 있어."
"시꺼."
내 대답에 능글거리는 미소로 웃는 셜리. 진짜 이 아가씨가……!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보고자 셜리가 가져온 서류에 대해 물었다.
"아, 이거? 음, 한 줄로 줄이면 '네가 계속 리베리온 해군 소속으로 남아있어준다면 리베리온 정부가 해줄 수 있는 것들'이라고 할까, 뭐 그런 거야."
건네받은 서류를 대충 훑어보았다. 어, 그러니까…….
"시민권이나 영주권 비스무리한 건가?"
"대충 훑어보니까 국빈 대우도 받을 수 있을 것 같던데."
"……솔직히 내가 그렇게 유능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88mm로 몇 시간 동안 포격지원을 할 수 있는 마녀는 너 하나 뿐이거든?"
"그래서 성과낸 건 별로 없잖아?"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투자라는 걸 거야."
참고로 이거 전쟁나고나서 온 거야. 셜리는 그렇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VIP 대우해줄 테니까 리베리온을 위해서 일해다오, 라는 거로구만.
전쟁의 불씨였던 내가 리베리온에 가게 되었을 때의 정치적 파장 같은 걸 생각하면 도저히 갈 수가 없는데 말이지.
뭣보다도 그렇게 리베리온에 가면 어머니가 내 목을 꺾어버리실걸…….
"리셋 머신이 나서면 도시 하나도 함께 날아가겠군."
"……."
부정할 수가 없다. 실제로 이번에도 도시는 아니지만 기지 같은 거 두 자리 수 단위로 박살내셨다고 하고.
분명 소문이라 부풀려진 거겠지. 응, 그럴 거야.
"뭐, 그 서류는 무시해도 돼."
"리베리온 군인이 그런 소리 해도 되는 거야?"
"바르크호른 대위 같은 소리 하지 말어."
셜리는 손을 휘적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보게?"
"응. 너한테 서류 전해줬다고 보고서 비스무리한 거 써보내야지."
"고생하겠네."
"누구 때문인데."
"그러게. 누구 때문일까."
그렇게 대답하자 셜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나 역시 웃었지만 그러다 통증이 도져서 마지막은 괴이한 신음소리가 되었다.
으으으, 얼른 낫고 싶다.
"얼른 나아서 돌아와."
"나도 그러고 싶어."
"돌아올 거야?"
뭘 또 물어, 라고 대답하려다 진지한 셜리의 눈빛에 잠시 말을 멈췄다.
돌아오라는 얘기는 그런 거였나. 부대로. 기지로. 군으로. 전장으로.
"……아마도?"
"아마도는 뭐야."
"루키니의 편식을 고쳐야하니까 돌아가야지."
"어이어이……."
농담과도 같은 대답에 맥이 빠진 것 같은 셜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고민할 시간이 필요한 문제다.
두어 달 뿐이지만 정말 가족처럼 지낸 부대원들과 헤어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전쟁 같은 건 피하고 싶다.
스트라이커 유닛을 타고 하늘을 나는 건 좋다. 하지만 네우로이와 싸우는 건 싫다.
또다시 격추되고 싶지 않으니까. 다치고 싶지 않으니까. 병원 신세 지고 싶지 않으니까. 죽고 싶지 않으니까.
그 모든 걸 감수하면서까지 난 돌아가야 할까?
"시간이 필요한 질문이지. 퇴원할 때까지 고민해 봐."
"……너는 어때?"
"글쎄?"
셜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결정하고나면 그때 말할래."
하지만 어느 쪽이든지간에 네 결정을 존중할 거야. 셜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음에 보자고 하며 방을 나섰다.
내 결정이라. 올 때는 마음대로가 아니었지만 나갈 때는 마음대로가 된다니. 남는 장사네. 시덥잖은 농담거리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아아, 정말. 눈 뜨고 나니까 해야할 일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정말 한숨만 늘어나는구나.
*****
- 헤에, 의외네. 그냥 포병 보고 싶다는 사람이 많을 줄이야. 아참, 너희들은 몰랐었겠지만 하늘아리 님께서도 아이리를 넣으면 어떨까 하는 연락을 해주셨어. 만약 합작을 쓰게 되었다면 아이리도 나오는 건데. 흥, 바보들. 포병이 보고 싶다니. 솔직히 말해봐. 거짓말이지? ……뭐, 진짜라고?! ……알았어. 포병 계속 쓰면 되잖아. ……차차차차착각하지마! 네가 보고 싶다고 해서 써주는 게 아니니까! 그냥 이대로 끊어버리면 내가 나중에 찝찝해지니까! 그런 것 뿐이니까! 절대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 아니니까!
……이 츤데레 대사는 AWAKES의 작가분이신 RadioNoise님께서 저를 츤데레라 설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같은 뻘소리는 그만두고, 여튼 포병 계속 써달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의외였습니다. 다들 합작하면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저도 개인적으로 엉킨 설정 같은 거 갈아엎고 싶어서 합작에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된 이상 포병부터 끝을 봐야겠네요.
- 설정이라던가 앞으로의 전개에 대해서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여러분.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로쿼이-리베리온 국경선 이런 거 안 쓸 것 같으니까 아직 설정 없습니다. 이 글의 설정들은 다 그때그때 막힌다 싶으면 만들어지는 겁니다. 공식 설정도 막 갈아엎고 있잖아요. 확연하게 이상하다 싶지 않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주시길 바랍니다. 안 그러면 제가 헷갈려서 글을 못 써요. […]
-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별 생각없이 쓰다보니 댓글에 뭔가 진지한 태클이 달리면 그거 가지고 하루 종일 고민합니다. 그래서 설정 꼬인 게 꽤 되지요. ……그래서 합작으로 갈아엎고 싶었는데 <-
- 연말은 '별의 바다', 신년은 '포병'이군요. 아, 조아라에는 별의 바다를 안 올리나. […]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23
다시 눈을 떴을 때, 세라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자신을 가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눈뜬지 얼마 되지 않아 흐릿한 시야로는 창문가에 있는 무언가가 원인이라는 것 밖에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세라는 멀쩡한 오른손으로 눈가를 비빈 후 그쪽을 다시 바라보았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엄마?"
덜 풀린 목소리에 그 사람은 몸을 돌렸다. 쏟아지는 아침 햇살 아래 모습을 드러낸 여성은 분명 세라의 어머니였다.
"……엄마?"
"……응. 엄마야."
다시 한 번 자신을 부르는 딸의 목소리에 어머니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침대 곁으로 다가와, 자신이 낳은 첫번째 딸의 얼굴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평생 걱정 안 시킬 것처럼 하고 돌아다니더니, 이렇게 크게 사고치려고 여태껏 얌전히 있었던 거니?"
어색한 잔소리였다. 장녀는 갓난아기 티를 벗어낸 이후로는 말 그대로 부모걱정과는 인연이 없던 아이였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되려 자신의 칠칠치 못한 점을 나무라는 아이였다. 듣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어색한 잔소리. 그래서일까. 뾰루퉁한 어머니와는 달리 딸은 그저 살짝 놀란 듯한 얼굴에 어정쩡한 미소를 그릴 뿐이었다.
"언제, 오신 거에요……?"
"새벽에. 바보 같이 추락이나 하고."
"쌍둥이는요……?"
"집에. 알아서 챙겨 먹겠지."
"걔들 아직, 꼬맹이들이라구요……. 돌봐줄 사람이 있어야……."
"그럼 너는?"
"……많아요. 저 돌봐주는 사람……."
"그래서 이 꼴이 난 거야?"
"……아하하하……, 아야야야야야야……."
웃음으로 얼버무리려는 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귓불을 잡아당기는 어머니의 체벌 아닌 체벌에 세라가 나직이 비명을 질렀다.
속을 썩인 딸에 대한 화풀이가 되었는지 손을 놓은 어머니는 딸의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정말 어떻게 이렇게 배신을 할 수가 있니. 어떻게 그렇게 엄마 가슴에 못질을 할 수가 있어."
"……죄송해요……."
"……하아, 정말……."
솔직하게 사죄하는 딸의 모습에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건강하지 못한 장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세라가 루키니에게 해주는 것 같은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딸은 어머니를 닮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잠시 내려앉은 침묵을 깬 건 어머니였다.
"정말, 눈을 뜬 걸까 싶었어."
세라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리베리온 정부를 닦달해 마련한 비행기로 이곳에 도착했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자리가 불편했던 것도 있지만, 혹시나 세라가 어떻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온갖 걱정들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병실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그랬다.
"깨워볼까 했는데, 덜컥 겁이 나더라."
만약 내가 잘못 들은 것이었다면. 세라가 여전히 의식불명 상태라면. 흔들어 깨웠는데 일어나지 않는다면.
죽은 듯이 잠들어있는 딸의 모습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체 그저 침대 옆에 앉아있기만 하였다. 뭐가 리셋 머신이냐. 겁많은 여자일 뿐이지. 자괴감에 몸부림치며, 기껏 용기내어 한 건 성한 오른손을 살그머니 잡아보는 것 뿐이었다. 겁쟁이인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건 그것 뿐이었다.
"그렇게 널 보고 있다보니까, 옛날 생각이 났어."
쭈글쭈글하고 눈도 제대로 못 뜨던 신생아. 나름대로 엄격한 가문에서 언제나 똘망똘망한 눈동자에 귀여운 옷을 입고 있던 아이들과는 전혀 달랐다. 나중에서야 그런 건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아이들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기에 당시에는 굉장히 실망했었다.
"피부색도 달랐고."
"피부는……."
"그래. 그래서 네 아빠는 굉장히 좋아했단다. 내 속도 모르고."
피식. 콜록콜록. 작은 웃음을 터뜨리다 상처를 자극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기침을 내뱉는 큰딸의 이마를 쓸어올리며 어머니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네가 눈을 떴을 때, 눈동자를 보고 알았단다. 거울에서나 보던 내 눈동자가 딱 보이는 거야. 그제서야 '아, 이 아이는 내 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정말, 눈물나게 사랑스러웠어."
"……."
"그랬는데, 막상 키우게 되니까 재미가 없더라. 보채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그나마 어릴 때는 때쓰기라도 했는데 나이를 먹어갈수록 시키면 척척 다 하고, 말썽도 안 부리고, 투정도 안 하고, 놀래킬라치면 이미 다 알고 있고. 뭐 해줄까 하면 애늙은이처럼 됐어요, 괜찮아요, 없어도 돼요……."
"부모가 바라는…… 이상적인 아이잖아요……?"
"난 재미없었어."
어머니는 뺨을 부풀리며 말했다.
"엄마 노릇을 해보고 싶었단 말야."
"그거야말로, 배부른 소리라구요……."
"그래도 해보고 싶었어. 엄마는, 그러니까 네 외할머니는 그런 거에 엄격했으니까. 아무리 아파도 잘 때는 혼자 자야했고. 맨날 예의범절, 규범규칙. 그러니까 내가 아이를 키우게 되면 꼭 엄마 노릇이라는 걸 해보자고 생각했어."
"난 엄마가 아팠다는 게 더 신기한데요……."
"사고였지. 나무에서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었거든."
"우리 모녀는 떨어져서 다치는 게 운명인가요……."
"그러게. 하지만 넌 적어도 사고뭉치는 아니었잖니? 게다가 넌 네 아빠 닮아서 무진장 튼튼해서는 병 걸려본 적도 없고. ……역시 재미없었어."
"엄마……."
그렇게 엄마 노릇이 필요없었던 장녀였다. 그래서 어쩌면 이번에도 딸아이는 내 도움없이 스스로 털고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눈을 뜬 딸의 얼굴을 본 순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볼지 몰라도 엄마이기에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다시 한 번 딸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모두 다. 엄마가 왔으니까. 괜찮아."
언제나 어른스럽게 처신하던 아이에게 하기에는 유치하고 어색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안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 옳은 선택이었다.
맞댄 뺨으로 물기가 느껴졌으니까. 자신을 끌어안는 딸의 팔힘이 느껴졌으니까. 귓가에 자신을 찾는 눈물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지금의 세라는 누군가의 버팀목도, 누군가의 동료도, 누군가의 어머니도 아니었다.
그저 엄마의 품에서 조용히 우는 한 사람의 소녀일 뿐이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점심 나절이었다. 자다 일어나서는 어머니의 품에서 울다 지쳐 다시 자다 일어난 건가.
울다 지쳐 잠이 든다는 게 정말 있는 일이었구나. 이렇게 울어본 건 처음인데. 생각해보니까 꽤나 부끄러운데. 어, 그런데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
"간이 침대에 있다."
"……아버지?"
20대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것 같은, 오히려 어지간한 20대는 압도할 것 같은 강인한 인상의 이로쿼이 중년 남성. 분명 아버지셨다. 어머니만 오신 게 아니었구나.
"……불리하다 싶으면 누구보다 빠르게 도망치라고 했었다."
굵고 낮은 저음에는 어딘가 책망하는 것 같은 듯한 느낌도 섞여있었다. 잘못한 건 없는데 왠지 모르게 움츠러든다. 아버지 말씀대로 도망치지 못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긴 하지만.
"그게 쉽지 않더라구요, 아하하쿠엣, 켁, 아하하하……."
"……."
무겁다. 무진장 무거워! 간만에 본 아버지의 바위 같은 기백이 엄청나게 무거워. 게다가 어설피 웃다가 상처가 울려서 이상한 표정을 지어버렸더니 더더욱 무거워졌어! 걱정해서 그러시는 건 알지만! 답답해서 그러시는 건 알지만! 그래도!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움츠러든 내 모습을 그저 묵묵히 바라보실 뿐이었다. 부, 부담이……. 차라리 뭔가 말씀이라도 해주세요!
한동안 거북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평소에도 우리 부녀는 서로 말이 그리 많지 않기는 했지만, 이렇게 거북한 침묵은 집 떠날 때 이후로 처음이다.
"……전쟁에 대해서는 들었더냐."
"아, 네……."
"서쪽 바다부터 대륙 중앙을 조금 더 넘은 곳까지가 우리들의 땅이 되었다는 것도 알겠구나."
"……네. 어, 그러면 리베리온이 서쪽 도시를 포기한 건가요……?"
"아니. 그저 글자 장난일 뿐이지. 도시들도, 몇몇 곳을 제외하고는 리베리온 소속 그대로다. 예전처럼 뒤섞여 살지."
하지만 분명 문제가 생길 것이다. 언젠가 구대륙의 네우로이가 정리되고, 리베리온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국력을 회복한다면 분명 다시 한 번 전쟁이 터질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진보된 무기로 싸울 것이고. 더 많은 피해자들이 나올 것이다. 평화로운 해결방법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분명 언젠가 또 터질 거에요……."
"……그러지 않도록 노력해야지."
네가 돌아갈 곳을 지켜야지.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 모습은 마치 상처입은 거인이 힘겹게 내뱉는 거친 호흡 같아서, 왠지 모르게 가슴 한켠이 울컥했다.
*****
다음 날 아침, 아침식사를 가져와주신 간호장교 언니는, 부모님은 브리타니아 정부와 해야할 일이 있다며 아침 일찍 나갔다는 말을 해주셨다.
난 마지막 수술이라며 깁스를 풀고 마법 치료와 물리 치료를 병행하여 받은 후, 수면제 비스무리한 약을 먹고 뻗었기에 몰랐다. 저녁 나절에 돌아오신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그렇게 시간이 남게 되자 셜리의 말이 떠올랐다. 부모님이 오셨어도 변하지 않는, 영양은 충분하다는 소리를 듣는 영 미덥지 못한 아침식사를 마친 후, 그에 대해 고민하며 하릴없이 빈둥거리고 있자니, 전혀 예상치못한 인물이 면회를 왔다.
"몸은 좀 어떤가요?"
"중령님?! 추, 충스어헉?"
"왜 그러죠?"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경례를 위해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올리다 갈비뼈에서부터 통증이 올라왔다. 역시 아프다아…….
그래도 침대 위로 쓰러져 꿈틀거리는 수준에서는 벗어났으니 장족의 발전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하여튼 말이지.
"어째서 중령님께서 여기에……?"
"병문안이랍니다."
생긋 웃으며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과일 바구니를 내미는 미나 중령님. 이건 정말…….
"……?"
다시 태어나 10년 넘게 동성으로 살아온 사람의 심장도 단숨에 격추시키는 진정한 미소녀가 눈앞에 있었다.
위험했어. 그러고보니 이 분도 굉장한 미소녀였지. 애초에 마녀들은 전부다 미소녀에 미녀가 되지만서도. 부대원들은 같이 부대껴 살다보니까 익숙해졌기에 그냥 또래 소녀들 아니면 전우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냥 스쳐지나가다시피 하던 중령님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게 되니까 그 미모를 실감하게 되었다. 얼굴이 빛나는 사람이라는 건 이런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구나.
게다가 뭐야 저 귀여운 포즈는. 한 손으로 과일 바구니를 내밀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가볍게 뒷짐. 거기에 고개도 살짝 옆으로 갸웃. 순간 만화마냥 별이 반짝하고 사라진 것 같은 착시가 보인 건 나뿐만이 아니겠지. 아, 지금 나 중령님이랑 둘 뿐이구나. 하여튼 미소녀와 미녀의 중간에서 양쪽의 매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저러니까 진짜…….
거기에 더해 이 세계 특유의 하의 실종 패션. 네, 아무리봐도 범죄입니다.
"저기……."
"……아, 네!"
"괜찮나요?"
"네, 괜찮습니다!"
그러자 중령님은 살포시 미소짓고는 침대 옆 간이의자에 앉으며 말씀하셨다.
"계급 높은 사람 왔다고 긴장할 것 없어요."
그것까지 꿰뚫어보시니까 더 힘을 뺄 수가 없다는 것도, 아시겠지요?
그런 생각을 하며 쭈뼛거리고 있자니, 미나 중령님은 내 가슴팍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눌러 나를 침대에 눕히셨다.
"부대 분위기 잘 알잖아요?"
"아니, 그래도……."
"괜찮아요."
결국 난 마지못해 누웠고, 심지어 미나 중령님이 깎아주시는 과일도 받아먹게 되었다. 누군가가 이렇게 먹여주는 건 대체 얼마만일까. 그것도 진짜 미인이 이렇게 옆에서 말이지. 전생현생 통틀어 처음인 것 같……으니까 생각하지 말자. 그냥 현재를 즐기자. 뭘 필사적으로 생각하는 거야 대체.
하지만 현재를 즐기는 것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우리들로서는 좋은 일이었어요. 카를스란트가 갚아야 할 빚의 일부를 이로쿼이가 깎아줬으니까요."
전쟁에 대해서, 미나 중령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로쿼이가 종전협상을 하면서 리베리온이 가지고 있는 구대륙 국가들의 국채를 꽤 많이 깎아줬다고 한다. 뭔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아무래도 그냥 리베리온 엿먹이기는 게 목표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튼 리베리온으로서는 분통 터지는 일이었겠지만, 다른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게 왠 떡이냐 싶었을 거다. 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그런 걸 말해주니까. 따지고보면 빚이 리베리온에서 이로쿼이로 옮겨간 거지만, 그래도 리베리온보다 이자가 적으니까 훨씬 낫겠지.
"이기적인 소리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는데 조국의 빚이 줄어들었다고 좋아하다니. 그 사이 쓰러진 동료들도 많은데……."
"……정치는 그런 거니까요."
"……그러게요."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살며시 입을 열었던 미나 중령님은 작은 한숨과 함께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유능하고 총명하더라도 이제 열아홉. 분명 조금 더 먼 미래라면 고등학교를 다니며, 친구들과 사소한 잡담을 하고 미래에 무엇이 될까 고민하며 즐거운 학창생활을 즐겼을 나이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서길 강요받고, 결코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정치와 외교에 집중해야하는 피곤한 현실 속에서, 열아홉은 성인이길 강요받는 나이임과 동시에 성인일 수 밖에 없는 나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이러한 세계에서 살면서, 평범한 열여섯 소녀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깨달았다.
자, 생각해보자. 제일 중요한 전략자원인 마녀임과 동시에 전쟁의 원인이라는 핵폭탄급 중요인물이라고 해도, 계급상 아직 나는 일개 하사에 불과하다. 그러한 하사가 전투중에 쓰러졌다고 해서 부대 사령관이, 그것도 연합군 최고의 마녀부대인 501부대의 대장이 이렇게 병문안을 올 수 있을까? 가뜩이나 전투가 있든 없든 바쁜 자리에 있는 사람이? 그것도 대규모 네우로이의 움직임 때문에 이로쿼이와 네우로이가 종전 포착되었다고 하는데?
순수한 병문안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자신이 싫었지만, 희미하게 흔들리는 미나 대장님의 눈을 본 순간, 내 생각이 옳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말했다.
"나의 귀는 열려있습니다."
"이로쿼이 속담인가요?"
"속담이라기보다는 관용어입니다. '그러니 말하십시오. 모든 것을 듣겠습니다.' 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을 해주세요."
"……못 당하겠네요."
허를 찔린 듯 멈칫했던 미나 중령님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곧바로 냉철한 군인의 얼굴로 입을 여셨다.
"상냥한 들소. 귀하는 연합군 제501통합전투항공단, 통칭 스트라이크 위치스에 복귀할 의향이 있습니까?"
……혹시나가 역시나인가.
"그런 건 명령하시면 될 텐데, 왜 굳이 질문으로 하시는 건가요?"
"세라 둘리틀 하사였다면, 그랬을 거에요."
과연. 그래서 상냥한 들소라 부르신 건가. 방금 전 들은 국채 얘기가 떠올렸다. 그렇다면 지금 미나 중령님은 카를스란트 군부 사령관이자 외교관으로서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저 질문은 단순히 내가 부대에 복귀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이로쿼이가 명목상으로나마 구대륙에 군사적인 지원을 하느냐 마느냐가 되는 것이다. 단순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정치를 끼얹으면 된다고 하더니 지금이 딱 그꼴이다. 고작 한 사람의 마녀에 불과한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이로쿼이의 군사적 대응방안을 논하는 외교관처럼 활동해야하는 것이다.
정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처음에 501부대 올 때는 그냥, 멀찍이서 탄약이나 나르다가 때 되면 전역하고, 돌아가면 농사나 지으며 느긋하게 살자고 했었는데, 어쩌다 이런 걸 결정하게 되었는지 원.
"살아가다보면 한 번 쯤은 그런 결정을 하게 되는 날이 오는 법이에요."
자조섞인 목소리로 쓴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시는 미나 중령님.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평소와 같은 화사한 웃음을 볼 수가 없다는 게 가슴이 아프다.
"돌아간다면, 환영해주실 건가요?"
"부대 사령관으로서는 환영해요. 포격 지원과 탄약 지원 모두 정말 유용하니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돌아갔으면 해요.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으니까. 훌륭한 성과도 많이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또 추락했다가 전쟁나면 곤란하니까요.
장난스레 덧붙인 그 말은 분명 본심이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중령님이 그렇게 괴로운 미소를 짓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분의 성격상, 고생하지 말고 돌아가라는 말씀일 것이라 생각한다.
"조금 시간을 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요. 쉽게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아, 그리고 당신을 보러 온 사람이 또 있어요."
"……?"
미나 중령님은 그 말만 하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리고는 방문을 열고는 "들어오렴." 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들어온 것은,
"세라아─!"
"루키니?"
밝고 활기찬 로마냐 소녀 프란체스카 루키니였다.
침대 곁으로 달려와 단숨에라도 뛰어들 듯 하던 루키니는 내 팔에 묶인 붕대를 보았는지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괜찮아?! 아직도 아파?!"
"조금. 이제 거의 다 괜찮아졌어. 루키니는? 잘 있었어? 감기는?"
"진작에 다 나았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동네 골목 개구쟁이마냥 씨익 웃는 그 모습은 분명 루키니였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는지 루키니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뭔가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내 결심한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저기, 세라."
"응."
"그……, 갈 거야?"
"어딜?"
"……리베, 아니, 이로쿼이……."
조심스레 묻는 루키니의 얼굴에는 긴장되고 경직되어 있었다. 셜리와 미나 중령님이 물었던 질문이 스쳐지나갔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보니 미나 중령님은 이미 방에 없었다. 자리를 비켜주신 것일까. 이래저래 감사인사 할 거리만 늘어난다.
루키니에게 오른쪽으로 오라고 해서 성한 오른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아직, 잘 모르겠어."
"왜?"
"부대에는 있고 싶어. 같이 있으면 재밌으니까. 스트라이커 유닛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도 즐거우니까. 하지만……."
또 추락할까봐. 이번에는 간신히 살아났지만 다음 번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정확하게 어떻게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그런 느낌으로 횡설수설하고 말았다.
"……."
내 말이 끝나자 루키니는 말없이 자신의 머리 위에 얹어진 내 손을 잡았다. 무언가 고민하는 걸까.
나보다 훨씬 여리고 작은 손에서 전해져오는 온기가 조용히 체온에 녹아갈 즈음, 루키니는 천천히 내 손을 붙잡아 내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에 얹었다.
그리고 다시 보게 된 루키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세라가 안 갔으면 좋겠어."
"……."
"그치만……. 그치만 세라는 약하니까."
"……."
"그러니까 가."
"……루키니……."
"괜찮아. 세라가 없어도 우리는 강하니까."
"……."
"그러니까 괜찮아."
"……."
"분명 세라가 돌아가도, 갈리아도, 되찾고, 로마냐도 안전, 해질 거야."
"……."
"읏, 분명, 분명 그럴, 으흑, 거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응. 알았어. 말 안해도 돼."
애써 눈물을 참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루키니의 모습에 난 통증을 참으며 루키니를 품에 끌어안았다.
마음 한 켠이 울컥하고 요동쳤다. 아니야, 넌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돼. 희생하지 않아도 돼. 이 잔혹한 세계에 짓눌리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흐아앙! 가지 마, 세라아! 응? 안 가면 안돼? 응? 가지 마아아─!!"
"……루키니……."
해줄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다독여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왜 그런 표정이니?"
"그냥,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중이에요."
리베리온과 이로쿼이의 전쟁의 여파, 지금 내가 가진 정치적, 외교적 위치와 위력, 셜리의 질문, 미나 중령님의 권유, 루키니의 눈물 등 모든 것들이 뒤섞여 머리 속에서 맴돌다 사라져간다.
어떻게 하면 후회하지 않을 최고의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이거다 싶은 답이 나오질 않는다.
모두가 행복한 미래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싶다.
단념이라 해도 좋다. 타협이라 해도 좋다. 그래도 좋으니까, 모범답안이 아닌 편법이라도 좋으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남느나, 남지 않느냐를 정하면 되는 것 뿐인데.
"……안 돌아갈 거니?"
소등 시간을 넘어 희미한 스탠드 불빛만이 유일한 광원인 방 안에서 어머니는 나직이 질문을 던지셨다.
"……모르겠어요."
훌훌 털어버리고 재빠르게 떠나버리는 건 의외로 나쁘지 않다.
한 번 불을 붙였다고는 해도 여전히 위험한 불씨인 내가 이곳에 어정쩡하게 남아있는 것도 그리 좋은 건 아니니까.
하지만 막상 돌아가자니 또 이것저것 마음에 걸리는 게 많다.
사실상 내가 원인이 되어 전쟁이 터졌고, 그로 인해 이곳 구대륙 전선의 보급은 한 번 크게 휘청거렸다. 지금도 그 후유증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내가 갑자기 발을 빼버리면, 이로쿼이에 좋지 않은 여론이 생겨버린다. 쉽사리 떠나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돌아간다면 다시 네우로이와 싸워야 한다. 화약이 격발하고 빔이 스쳐지나가는 죽음의 세계에 뛰어들어야 한다.
하루하루를 목숨을 걸고 전력을 다해, 모든 기력을 쥐어짜내 넘겨야 하는 일상을 지내야 한다.
그런 각오를 할 수 있을까.
정치·외교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부대원들과 이렇게 헤어지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온화한 미나 대장님, 후소에서 돌아오고 계실 사카모토 소령님, 무뚝뚝하지만 믿을 수 있는 바르크호른 대위님, 함께 있으면 즐거운 하르트만 중위님, 귀족가 영양이지만 실력있고 당당한 페리느, 이래저래 투닥거리지만 미워할 수 없는 에이라, 멋진 노래를 부르는 사냐, 속도 바보지만 유쾌한 셜리, 그리고 언제나 활기찬 루키니.
에이스 오브 에이스가 아니더라도, 분명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이렇게 떨어지고 싶지는 않다.
그 사람들은 여전히 사지로 향하는데, 나 혼자 이렇게 떠나고 싶지 않다.
어쩌면 좋을까.
"……들소는 버릴 게 없지. 고기는 먹고, 가죽은 입고, 힘줄은 활줄로, 뼈는 도구로. 그렇기에 옛날부터 우리는 들소를 잡았다. 이민자들의 학살로 그들을 보호해야될 때까지."
"……."
"네가 이곳에 남으면, 그렇게 될 것 같아 걱정이구나."
전설 중 하나다. 겨울의 문턱에서 들소는 털은 고슴도치에게, 꼬리는 쥐에게, 가죽은 옷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고기는 굶는 새끼 늑대들에게, 뼈는 대지의 풀과 나무들에게 나누어준 후 죽는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상냥한 들소가 그렇게 모든 것을 내주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마지막에 들소는 위대한 어머니께서 되살려주셨죠?"
"전설이니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뒷말이 축약되어 있었다.
결국 답이 나오지 않기에 이 건은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 화제를 돌렸다.
"아침에 브리타니아 정부에 다녀오셨죠? 무슨 일 때문인가요?"
"……이로쿼이와의 외교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다녀왔다."
공식 국가로 인정받았으니 정식 외교 관계를 수립해야하니까. 그렇게 덧붙이셨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다. 특히 이러니저러니해도 위치고, 군인이다보니까 군사적인 부분이 심히 신경쓰인다.
이로쿼이는 국제 연합에 가입한 걸까. 그랬다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국제 연합의 일부로서 네우로이 전선에 지원을 해야한다. 설령 가입하지 않았다고 해도 정식 국가로 인정받은 이상, 네우로이라는 천재지변과도 같은 재앙을 겪는 국가들에게 일정 규모 이상의 인도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봐도 구대륙이 멸망할 경우, 네우로이와 피난민들은 신대륙으로 몰리는 미래를 피하려면 구대륙 국가들을 지원해야한다.
결국 어느 쪽이든지간에 지원의 의무를 지게 된다. 이제는 리베리온이라는 방패로 피할 수 있었던 네우로이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맞부딪쳐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로쿼이가 리베리온에 비해 나은 게 뭐가 있지? 자원? 가공 능력이 떨어진다. 공업 생산력? 말할 필요도 없지. 인구? 엇비슷하다. 하지만 확실한 메리트는 아니다. 그렇다면 남는 건…….
"정령의 축복을 받은 아이들……."
또다른 말로는 마녀. 스트라이커 유닛을 타고 하늘을 날며 네우로이와 싸우는 전투의 주축.
그렇다면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나 달빛눈꽃이 이곳에 와서, 네우로이와 싸우게 되는 걸까.
"그런 건가요?"
"직접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그랬던 제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인,"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왜 저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거죠?"
갑자기 머리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로쿼이는 정식 국가가 되었고, 국제 연합의 일원이든 아니든 지원의무를 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제일 우수한 자원인 마녀를 지원하게 되었다. 직접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긴급 상황이 오면 그 아이들도 싸워야할 것이다. 그때 그 아이들이 항상 무사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지원 같은 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징발이겠지. 나와 다른 소녀들이 리베리온 훈련소에 들어가야했던 것처럼 그렇게 억지로 끌려올 것이다. 그런데 난 왜 '권유'받은 걸까. 어떻게 '선택'할 수 있는 걸까. 전쟁의 원인이었다는 특수성 때문에? 자기자랑 같지만 연사가 가능한 포를 들고 장시간 포격 지원을 할 수 있는 위치는 나 뿐이다. 연합군이든 이로쿼이든 엄청나게 매력적인 패다. 그런데 그걸 자유롭게 내버려둔다고? 그게 가능하다면 뭔가가 있었다는 얘기겠지.
"그렇죠, 아버지?"
"……."
침묵은 긍정.
그렇다면, 내 대답은 정해졌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전 여기 남을 거에요."
어쩌다 운이 없어서 온 한 둘이 아니다. 수십 수백 수천 명의 아이들이,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사선을 넘나들어야 한다. 나는 그 아이들을 그렇게 내버려두고 돌아가 모든 걸 잊고 마음 편히 여생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냉정하지 못하다. 돌아간다한들 평생 괴로워 몸부림칠 것이다. 그러니까 하다못해 같은 사선에 남을 것이다.
"……혹시나 해서 만들어왔지만, 안 쓰길 바랐건만……."
"이것 또한 위대한 어머니의 시련인가……."
내 말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하시며 각자 무언가를 꺼내셨다.
서류 몇 장과 내 사진이 들어간 신분증 하나. 그리고 엄지 손톱만한 메달이 달린 목걸이. 이건…….
"이로쿼이에서도 곧 대사를 파견할 거야. 그 대사 직속 권한 증명서야. 잘 챙겨둬."
"정령의 축복을 받은 아이들은 우선 여기 브리타니아에 배치될 거다. 실질적인 관리는 다른 사람이 하겠지만, 명목상으로나마 그 아이들을 모두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전사장'의 증표다."
너와 다른 아이들을 지켜줄 물건들이다. 부모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미리 다 준비해두셨던 건가. 딸의 바보 같은 투정에, 급작스럽게 정한 무모하고 위험한 선택에도 이런 걸 넘겨주시다니.
정말, 어른스럽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들어도 부모님은 못 따라가는구나.
"그러니까 이제는, 다시는, 절대 다치지 마."
"……네. 약속할게요."
여전히 싸워야 하는 건 두렵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고개를 돌려버릴 수는 없다.
나 때문에 이곳으로 오게될 아이들을 외면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결심했다.
모두 함께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
- 자캐 커뮤니티에서 한 번 이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지요. "넌 여캐존중도 없냐." 그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게 여캐존중 따윈 없다." 전 공명정대한 전체굴림정신을 준수합니다. 乃^▽'
- 1월 31일 전에 올릴 예정이었으나, 언제나 그렇듯 미뤄졌습니다. 제가 그렇죠 뭐. […]
- 아이돌 마스터를 봤습니다. 애니마스 좋네요. 왠지 애니마스 팬픽도 쓰고 싶네요. 정신차려보니까 설정도 대충 짜놨고. 한 번 해볼까.
- 전쟁까지 났는데 결국 세라는 다시 501부대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 과정이 영 이상하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저 1기 진입하고 싶어요. <-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24
회복속도는 다른 치유마법의 배나 되지만 받고나면 30분 정도 온몸이 저리는, 분명 실천주의학파가 개발한 것으로 추측되는 속성치유마법을 받아 퇴원하자마자 일을 시작했다. 강물을 모으는 이, 그러니까 이로쿼이 외교관과 함께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추기도 하고, 명목상이나마 전사장이기에 각종 군사업무도 처리하고, 이것저것 해야할 일들이 많았다. 거기다 그 틈에 쳐들어온 네우로이 군세도 한 번 격퇴했고.
기절해있던 시간을 빼면 내 입장에서는 일주일도 안되서 만난 것이다. 그것도 대형종 세 마리. 순간적으로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 것도 있고, 또다른 문제도 있어서 몸이 굳고 말았다. 분명 혼자였으면 또 멍하니 있다가 추락했을거다. 다행히 501부대 전원에 다른 부대의 지원이 있었기에 무사히 포격지원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거기에는 루키니와 사냐가 옆에서 실드를 펼쳐준 것도 한몫했다. 활동시간대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함께 있었냐고 하면 저녁 시간때라서 가능했었다고 대답해주겠다. 뭐, 전선에서야 어찌되었든 돌아와서는 한동안 덜덜 떠느라 아무 것도 못했지만. PTSD겠지. 아무리봐도 멀쩡한 다른 애들은 정말 강철같은 정신력의 소유자들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전사장이라는 사람이 이 모양이다. 갈 길이 멀구나, 난.
다음날은 도저히 진정되지 않아서 반나절 정도 쉬고, 오후에는 밀린 일을 처리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강물을 모으는 이와 함께 외교협상. 전투마녀가 필요하다는 연합군과 절대 전선에는 아이들을 내보내지 않겠다는 이로쿼이의 외교전쟁은 예상대로 치열했다. 전시라서 장성들까지 뒤섞인 협상이었으니까 말 다한 셈이지. 전쟁이 정치의 연장선이 아니라 정치가 전쟁의 연장선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래도 아이들을 전선에 내보내겠다고 하는 게 나만의 억지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훨씬 더 힘든 싸움이 되었을테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외교경험이 전무하다는 게 문제였다. 강물을 모으는 이야 원래 다른 부족들의 교섭을 담당하던 사람들 중에서 제일 능력있는 자를 뽑은 것이었으니 괜찮았지만 난 그런 경험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낙하산이라면 낙하산인데 그래도 쌓아둔 전공이 있으니까 완전 낙하산은 아니지만, 영 부실한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기에 회의가 시작하고나서부터 한마디도 안하고 조용히 있었는데…….
"그렇다면 이로쿼이는 대체 무엇을 한단 말이오! 대답을 해보시오 전사장!"
핀포인트로 저격을 맞았습니다. 깐깐한 인상의 브리타니아 공군 사령관 아저씨, 이름이 리 말로리였나.
물론 화내는 건 당연합니다.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보면 이로쿼이는 구대륙 국가들을 방패삼고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말입니다.
"……이로쿼이 마녀들은 모두 기초군사교육도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전장에 투입하면 산화될 뿐입니다."
모의전이야 몇 번 있었지만 그것도 하는 애들이나 계속하고, 총은 쥐어보지도 못한 애들이 태반이다. 부족의 가르침에 따라 주는 족족 부숴버리는 애들도 있는데 군사훈련 같은 게 가능이나 할까. ……새삼스럽게 리베리온 훈련소 시절에 큰 문제가 없, 지는 않았구만. 전쟁 터질 뻔 했으니까. 그래도 내가 잠결에 한 뻘짓 덕분에 무사히 넘어갔으니까 없었던 걸로 쳐도 될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까 그거 나한테는 흑역사 같은 느낌이 드는데…….
여튼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변명거리가 안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내가 가진 유일한 패를 내밀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로쿼이 마녀들은 우선 연합군 사령부에 배치된 후, 정찰 및 통신 등의 비전투마녀 업무와 함께 3개월 간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후 서유럽전선에 투입될 예정입니다."
"무슨 말도 안되는……!"
"그리고 현 브리타니아 방면의 전력 증강을 위해서 제가 전면적인 화력 지원에 나섭니다. 범위는 브리타니아 본토 방위선 전체 및 유럽 대륙 탈환 전선 전체. 기간은 이로쿼이 마녀들이 실전에 투입되기 전까지 3개월 간. 어느 부대든 요청하면 됩니다. 다만 우선권은 501부대가 가지며 그 후에는 연합군 사령부의 결정에 따릅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에 연합군은 44년 9월에 서유럽 지방을 탈환한다. 물론 저쪽 세계 기억이니까 이 세계에서는 정확하게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비슷하니까 어느 정도는 맞을 것이다. 거기에 서유럽 전선이라고 명시했다. 다른 전장은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계획대로만 된다면 서유럽 전선이 끝남과 동시에 이로쿼이 아이들은 가게되었을지도 모를 전장을 잃어버리게 된다. 약은 생각이다. 실제로도 그렇고. 어차피 악명은 제일 위에 앉은 내가 다 가져간다. 그럼 된 거야. 내 멍청한 짓에 다른 애들이 피해볼 필요는 없잖아.
하여튼 여기에 내가 리베리온제 105mm와 카를스란트제 88mm를 모두 활용할 예정이라는 소식까지 곁들이자 연합군 장성들의 얼굴에 꽃이 피는 게 보였다. 완전무장시 지상타격용 105mm 1문, 대공포화용 88mm 1문, 자기방어용 20mm 대공포 2문을 모두 들고 전장에 투입된다는 소리까지 하니 아주 전쟁 다 이긴 것 같은 얼굴들이다. 이 사람들 한물간 거함거포주의에 심취해 있는 거 아닌가. 내가 날기 위해서는 적어도 마녀 둘을 호위로 붙여줘야 한다고. 거기 문서에 써있거든요? 그것도 나중에 사기라고 하지 않도록 엄청 크게 써놨거든요?
"……."
그렇게 다들 신나서 싱글벙글인데 방금 전 나를 핀포인트 저격한 브리타니아 아저씨는 어째 뚱한 표정이다. 뭐야, 뭐가 불만이야. 어차피 이걸로 내 역활은 끝이 났기에 난 "자세한 사항은 여기 계신 강물을 모으는 분께서 말씀해주실 겁니다." 라고 말하고 뒤로 물러섰다. 닳고 닳은 다른 외교관들은 떫은 표정이었지만 곁에 있는 장성들의 모습에 그저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그외에도 여러가지 사항들이 논의되었고, 회의는 저녁 나절을 넘기고 나서야 간신히 끝이 났다.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회의 끝난 기념으로 고급 뷔페에 가서 잔뜩 먹었다. 허겁지겁 먹는 것은 언어도단. 만물을 키운 위대한 어머니의 자비와 음식을 만든 이의 정성을 생각하며 경쾌하면서도 여유롭게 박자를 타야 한다. 어찌되었든 먹는 양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많지만.
"음! 훌륭하군, 상냥한 들소! 간만에 복스럽게 먹는 이를 봤어!"
"저도 간만에 함께 먹는 사람이 생겨서 좋습니다."
부대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같이 먹기는 하지만 끝까지 같이 먹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지.
우리들의 대화에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미묘해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신나게 뷔페 음식들을 처리해나갔다.
*****
"계획에는 문제가 없겠지?"
"리베리온이 야간정찰권을 획득한 것이 문제긴 하지만 변수는 아닙니다."
"귀찮은 마녀들같으니……."
나지막히 중얼거리는 리 말로리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은 없었지만 예리한 사람이라면 그의 눈매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눈매가 이로쿼이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도. 이러한 고급 뷔페가 아무리 비밀스런 외교전투의 장이라고 하더라도 쉽게 드러내기 힘든 것이었다.
"혹시 모르니 야간 순찰을 강화하도록."
"네."
명령을 받자마자 조용하게 신속하게 자리를 뜨는 부하를 보며 말로리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입가에 댔다. 고급 와인의 달콤하면서도 씁쓰레한 향이 코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는 그런 걸 느끼지도 않은 체 거칠게 샴페인을 들이삼켰다.
"……흥."
불편한 심기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은 체 그는 이로쿼이 진영을 고까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
"네. ……알겠습니다. 그럼."
찰칵.
"돌아온다네."
미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말이었지만 곁에서 보좌업무를 하고 있던 바르크호른은 방금 끝낸 서류를 갈무리하고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추락하고나서는 한 달 만, 퇴원하고나서는 여드레만이군. 하사에서 원수까지, 몇 계급 진급한 거지?"
"그러게. 별을 달고 돌아온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게 됐어."
"고생하겠군. 이런 서류업무를 하루 종일 달고 살아야 하는 자리라니. 거기에 전장투입도 지속이었지?
계급은 낮은데 업무가 과하다면 계급을 높히면 된다는 건가. 물론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과로가 이어지는 일상이 변함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모기지는 역시 여기?"
"응. 최전방이니까."
"환영회라도 열어야겠군. 호화로운 저녁식사면 될까?"
"풍성하면 될 거야."
"그렇겠네."
싱거운 농담에 피식 웃으며 두 사람은 다시 업무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상급자들이 통상 업무로 분주한 사이,
"뭘 하면 좋을까."
"으음, 진급한 걸 놀려먹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아……."
"대장님과의 신나는 모의전 같은 거 어때?"
"모의전용 대포 같은 거 있으면 해볼 텐데."
"만약에 진짜로 그런 거 있으면 우리 전부 다 실드만 펼치다 게임 끝날 걸."
"저기, 그랬다가 징계라도 받으면……."
"괜찮아 괜찮아. 세라니까."
"말씀대로 괜찮기는 하겠지만 그리 가치있는 대화는 아닌 것 같군요."
"가치라는 건 부여함으로써 생기는 거지 원래 가지고 있는 게 아니야."
"오오, 뭔가 그럴 듯한 말인데. 과연 카를스란트인. 철학적이야."
"후후~"
"뭐하고 있는 거야 페리느. 이대로 끝낼 거야? 자유와 관용의 갈리아가 여기서 이렇게 카를스란트에게 패배하는 거야?"
"은근슬쩍 싸움 붙이지 말아주시겠어요?!"
"그렇다면 전통과 변혁의 브리타니아가 나서야겠군. 그레이트 오브 브리타니아의 힘을 보여줘!"
"네. ……네?!"
야간초계임무로 지금은 잠들어있는 사냐와 마중나간 루키니를 제외한 모든 부대원들이 한곳에 모여 '어떻게하면 진급한 세라를 놀려먹는가'로 이야기를 꽃피우고 있었다.
다른 곳 같았으면 중징계는 물론이고 군법회의까지도 갈 수 있는 일을 태연하게 꾸미고 있을 수 있는 건 이곳이 각국의 에이스 오브 에이스들이 모인 정예부대이기 때문이리라. 애초에 전과를 내기 위해 일반적인 군기와 군법은 눈감도록 한 부대였다. 게다가 같은 부대의 전우가 돌아오는데 그런 걸 신경쓴다는 건 되려 분위기를 깨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결국 반대하던 페리느와 리네 역시 꺾여 이 회의는 좀 더 구체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
뷔페에서 배를 가득 채운 그 다음 날. 드디어 501기지 땅을 밟았다. 퇴원하고 일주일만이다 아니, 어제가 일주일째였으니까 여드레만인가. 추락하고 나서는 거의 한 달 정도 된 것 같은데. 여튼 집은 아니지만 집이라 할 수 있는 곳에 오니 기분이 미묘하다. 처음 도착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몇 번이나 구르고 포격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며 저녁노을에 붉게 물든 바닷가를 바라보며 걷고 있자니
"세─라─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루키니가 달려와 내 품에 안겨들었다.
"돌아온 거지?! 그렇지?!"
"응. 돌아왔어."
"만세!"
환호하는 루키니의 모습에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뭐, 앞으로 할 일이라던가 임무라던가 포격이라던가 그런 거 생각하면 골치아프지만, 지금은 그냥 그대로 있자고.
여튼 싱글벙글 노래하는 루키니를 목마 태워 기지 건물에 들어서자,
"연합군 제501전투항공단, 스트라이크 위치스 기지를 방문해 주신 것을 환영합니다, 상냥한 들소 전사장. 일동 경례!"
미나 대장님의 인사와 함께 부대원들 모두의 경례를 받았습니다……. 사냐는 없지만. 지금은 자고 있을 시간이니까.
아니, 것보다. 여기 501부대 맞지? 죄송해요, 저 그냥 나갈게요. 핫, 설마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때는 아닌 건가?!
"문제라도 있으신지?"
"아, 어, 음……."
"말씀만 하십시오 전사장님! 니히히!"
머리 위에서 루키니가 장난스레 경레를 붙이며 그리 말했다. 루키니 너도냐…….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한 발 짝 앞으로 나와서 절도있는 자세로 그리 말하는 건 바르크호른 대위님. 묘하게 눈동자에 장난기가 서려있다. 언니! 당신만큼은 믿었는데!
"그만둬주세요, 미나 중령님. 심장에 안 좋습니다……."
진짜다. 농담 아니고 정말로. 뭐지 이건. 신종 괴롭힘인가?
"하지만 외교관 직속 권한에 해외로 파견된 이로쿼이 마녀 통제권까지 있으시잖습니까?"
"지휘권 전부 양도해드릴테니까 봐주세요. 그리고 그냥 세라라고 부르셔도 되요."
그제서야 미나 대장님은 미소를 지으셨고, 다른 부대원들도 경례를 풀었다.
"미안해요. 한 번 쯤은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야 물론 하는 사람은 재밌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라구요. 것보다 이거 대장님 작전이었습니까! 어째서?!
"아니- 이거 하자고 한 건 페리느라고-?"
"무슨 말씀이신가요! 전 반대했었다구요!"
"하지만 아이디어는 페리느가 냈지. 아, 리네였나?"
"브리튼-갈리아 동맹전선에서 나왔지-."
"에엣?!"
나 없는 사이 에이라가 하르트만 중위님과 태그를 맺었군. 페리느는, 어라, 신병인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런 고민을 하고 있자니 셜리가 다가왔다.
"이야, 영관까지는 예상했었는데 진짜 별을 달고 올 줄이야. 그것도 최고 사령관이잖아?"
"달고 싶어서 단 건 아니야."
"그게 좋은 거야."
책임의 무게를 알기에 달고 싶지 않은 사람이 달아야 가치가 있는 거야. 셜리는 그렇게 말했다. 뼈가 있는 말이었다. 이번 일로 많은 고민을 했기 때문일까. 얼핏 보기에는 가벼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속이 깊다는 걸 알고 있기는 했지만 이번만큼 진지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게 오래 못 간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거봐, 페리느. 돌아왔잖아."
"당신도 가만히 있지만 말고 뭔가, 마치 제가 안 돌아온다고 했던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런 뉘앙스였잖아?"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뭐, 여튼 세라가 돌아왔으니까 이제 숨겨둔 비장의 허브 와인을 꺼낼 차례인가?"
"그런 걸 만들 리가 없잖아요!"
"갈리아 사람인데 와인이 없다고?"
"그 발언은 갈리아에 대한 도발이라 봐도 괜찮을까요!"
"오오오, 무섭구만. 무서워."
수오무스-카를스란트 라인에 리베리온까지 가세했는데도 갈리아 아가씨의 전투력은 꺾일 줄을 모르고 있다. 이것은 아스테릭스 파워인가. 골족의 후예의 전투력인가. 오오 전투민족 오오…….
그러나 역시 무리였는지 페리느는 분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픽 돌려버렸다. 그리고는 잠깐 심호흡을 하고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정말 화려하게 돌아왔군요, 이로쿼이 전사장님."
"그건 그만두라니까……. 그냥 옛날처럼 해줘."
"원하신다면야. 여튼 때마침 잘 돌아왔어요. 텃밭 돌볼 손이 늘어서 좋네요."
"전사장을 텃밭 일구는데 쓰려고 하다니, 이 무슨 하극상."
"옛날처럼 대해달라고 한 건 당신이었어요?"
뭐, 그렇긴 하지. 그렇기에 피식 웃으며 넘겼다. 이러니저러니해도 동료를 생각해주는 마음에서 저렇게 말하는 거니까.
페리느는 우아한 미소와 함께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몸은 좀 어떠신가요?"
"실천주의 학파의 제물이 된 덕분에 멀쩡해."
"그런 것 치고는 왼팔이 양호해보이지 않는데요."
페리느는 희미하게 경련하고 있는 내 왼팔을 가리키며 말했다.
들켰나. 전투마녀로 키워져서 실력이 부족하다고는 해도 역시 명문 의사 가문 아가씨라 눈썰미가 예리하다.
"추락할 때 부러진 곳 아닌가요?"
"응."
주저앉은 갈비뼈를 먼저 치료하느라 약간 늦어진 것 때문에 후유증이 남은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경련하는 수준이다. 그대로 요단강을 건너거나 반신불수가 되지 않은 것만해도 어디야. 게다가 계속 치유마법을 받으면 완치될 수도 있다고 하니까 괜찮다.
"무리하지 않도록 하세요. 이제는 홀몸도 아니니까."
"누가 들으면 애라도 가진 줄 알겠어."
"딸린 식구가 많은 건 사실이잖아요?"
묘한 눈빛으로 묘한 대사를 하는 페리느. 이러니저러니해도 역시 귀족 출신이라 정치에 대한 눈썰미 같은 것도 있는 아가씨라 이런 대화가 가능하다.
어찌되었든 일단 일부터 처리해야지. 서류는 해치우고 왔으니까 이틀 정도는 괜찮을 거고, 우선 격납고에 가보실까.
*****
바르크호른 대위님과 셜리와 함께 격납고에 왔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 개인 업무를 처리하러 갔고, 루키니는 파티 준비를 한다며 에이라와 하르트만과 함께 갔다. 왠 파티냐고 물었더니 내가 전사장에 취임한 기념으로 이것저것 받았단다. 그런 거 있으면 진작에 최전방 부대에 돌리라고. 비축해서 뭐 할 건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최전방이구나.
여튼,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러가지로 할 말은 많지만, 줄이고 줄이고 줄여서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크네."
이거 그냥 항공보병이 아니라 기갑보병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아니, 기갑보병들도 이렇게 중무장하고 다니지는 않잖아. 게다가 나 추락하기 전에는 이렇게까지 막나가지는 않았잖아. 왜 소닉 다이버가 덴드로비움이 된 거냐고.
스트라이커 유닛에 엔진이 4개다. 다른 기체들처럼 다리 쪽에 하나씩해서 둘, 그리고 바깥 쪽으로 엔진이 하나씩 더 붙어 있다. 컨셉은 아무래도 쌍발기, 아니, 4발기인 것 같다. 힘은 좋을 것 같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걸로 세밀한 기동을 하라고 하면 차라리 전차포로 동전 맞추기를 하겠다. ……생각해보니까 88mm나 105mm나 전차포로도 쓰네.
무장은 오른쪽 옆구리에 익숙한 88mm, 왼쪽 옆구리에 105mm. 105mm는 길이만해도 5m였다. 이쪽도 보급창에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장전 시간만 빼면 마음껏 쏠 수 있다. 것보다 이거 원래 땅에 박고 쏘는 거 아니었나? 마법이란 편리하구나. 이런 정신나간 물건을 한 사람이, 그것도 하늘을 날면서 쏠 수 있게 해주다니. 그런데 이륙할 때 어떻게 잡고 있어야 하는 거지? 균형은 맞춰놓은 거겠지?
등에는 개량되어 작고 가벼워진 보급창. 그리고 거기에 붙은 20mm 2연장 대공포. 말이 20mm지 근접신관을 채용했기에 소형종 같은 건 가볍게 쫓아낼 수 있단다.
"……20mm인데 근접신관이라고?"
"응. 왜?"
뭐가 문제냐는 듯한 셜리의 대답. 문제 많지. 나 뻗기 전에 이런 거 없었잖아. 개발중이고 이제 풀렸다고 하더라도 중간에 내전 있었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제식으로 쓰게 된 거야? 이 사람들 내전은 그냥 껌이었나? 이런 거 대체 언제 만들어서 찍어낸 거야? 무섭다 무서워 리베리온…….
"그렇게 따지면 리베리온과 대등하게 싸운 이로쿼이가 더 무섭다. 뭘 어떻게하면 토마호크로 탱크를 쪼개는 거야."
아니, 그건 나도 몰라. 반만년 수련한 이로쿼이 전사인가.
"출격은 선행부대가 전장에 도착한 후에 정해진다. 그리고 호위기가 붙지."
"보디가드가 붙는 거야. 국빈 대우라고?"
포 둘의 반동에 비행까지 제어하려면 실드를 펼칠 여력이 없을 테니 호위기가 붙어주면 좋긴 한데, 그럴 여력이 될까? 가뜩이나 사카모토 소령님도 없어서 전력이 부족한데.
"네가 나오면 화력이 부족할 일은 없으니까."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바르크호른 대위님. 겉치레라던가 뭐라던가 그런 말로 되받아칠까 했지만 저 정신나간 무장을 보고 있자니 화력이 부족하다는 말은 못할 것 같다. 그전에 저거 실전에 나가기 전에 좀 써봐야지. 높으신 분들이 뭔가 기합 넣고 이것저것 붙여준 거 같은데 제대로 쓸 수 있을지 불안하다.
"그리고 사카모토 소령님은 내일 도착하신다더군."
"오, 진짜? 생각보다 빠르네. 더 걸릴 줄 알았는데."
"후소에서 브리타니아까지 배로 한 달 남짓 걸리지 않던가? 그럼 슬슬 도착할 때 아냐?"
"처리할 일이 뭐 하나 있다고 들었으니까 더 걸릴 줄 알았지."
"금방 처리하고 오시는 거겠지."
여튼 그러면 이제 다 모이는 건가. 미나 대장님, 바르크호른 대위님, 하르트만 중위님, 페리느, 에이라, 셜리, 루키니, 아직 이름을 못 물어본 신인, 이제 깨어났을 사냐, 그리고 돌아오는 사카모토 소령님. 하나하나 떠올리고 나니 왠지 모를 자신감이 솟아나는 것 같다. 이 멤버들이라면 뭐든 해낼 것 같은 기분이다.
"셜리."
"왜?"
"예전에 그랬지. 잘 부탁한다고."
"……'함께 하늘을 날 전우로서.' 말이지?"
"응.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 번 말할게. 앞으로 잘 부탁해. 함께 하늘을 날 전우로서."
"물론이지."
하이파이브와 굳은 악수로 마무리─ 아니. 한 사람 더.
"전우는 리베리안 뿐만이 아니라고? 잘 부탁한다."
"오오, 이것 봐. 하면 되잖아? 평소에도 이렇게 분위기를 타면 얼마나 좋아."
"시, 시끄럽다 리베리안."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도 손을 얹는 바르크호른 대위님. 정말 평소에도 이렇게 좀 더 부드러워지면 좋을 텐데. 군인으로서의 책임감 같은 게 너무 강한 사람이니 쉽지 않겠지. 전쟁이 끝나면 쉽겠지만서도 아직은 먼 것 같으니까.
그래도 부대원들과 함께 하면 이 전쟁도 곧 끝나지 않을까 싶다. 고생길을 꽤 많이 가야할 것 같기는 하지만 별 수 있나.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며 우리는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파티다 파티. 퇴원하고 여기저기 참가하기는 했지만 죄다 높으신 분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라 불편했는데 여기는 그런 게 없지. 마음 편히 먹어보자.
*****
- 월드 오브 탱크 미국 TD 타고 놀다가 중中전차 타기 시작했습니다. 독일 자주포로 시작해서 미국 TD, 중전차를 타는데 포탑이 돌아가니까 좋네요.
- 다음 편부터 드디어 1기 시작. 길었습니다. 정말로 길었습니다. 뭔가 할 말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모르겠네요. 목표는 다음 주말까지 25화. 될지 안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래놓고 3월로 넘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갑자기 IS력이 솟구쳐서 '별의 바다'를 쓸지도 모르고, 아이마스력이 끓어올라서 '아마도 아이돌' 쓸지도 모르니까요. 일단 다음 주에 뭔가가 튀어나오기는 할 겁니다. […]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25
환영잔치로 신나게 먹고 마시고 한 다음 날 아침, 간만에 해조류 채취라도 해볼까 하고 일찍 일어났는데 미나 대장님이 부르셨다. 무슨 일인가 하고 가봤더니 강물을 모으는 이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오늘 도착하는 사카모토 소령님과 후소 함대에 별도로 인사를 하러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가는 거야 나쁘지 않은데 항구에서 맞이할 예정 아니었던가? 그렇게 물으니 항구에서 맞이하는건 연합군 전체의 행사로 복잡하고 시끄러울 것 같으니까 그전에 살짝 인사나 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뭐, 전사장이라고 해봤자 지휘권 같은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강물을 모으는 이가 나보다 더 높은 사람이니까 얌전히 따라야겠지. 인사라고 해봤자 어차피 서로 면식도 있고 전투도 몇 번 참여했던 사람이니까……, 아니 사카모토 소령님은 둘째치고 후소 함대 사령관하고도 만나야 하는구나. 선물 같은 거 챙겨가야하나? 다행히 그런 거 없이 그냥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몇 마디만 하고 그냥 같이 돌아오라는 얘기를 들었다. 말 그대로 그냥 인사로구만.
그래서 그냥 단신으로 훌훌 다녀오려고 했더니 완전 무장을 하고 가란다. 아니, 고작 인사하러 가는데 그 무거운 것들 다 들고 다녀오라니? 그랬더니 실속이야 어찌되었든 전사장이니까 뭔가 있어보이게 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 사람들 무슨 대통령이 부대 방문한다는 소리 들은 행보관처럼 나를 굴리는 건가 싶은데. 거기에 501부대에서 호위역으로 한 두 사람 차출까지 하란다. 아니, 그랬다가는 힘들거든요? 이 부대 지금 나까지 포함해서 고작 열 명 밖에 없는데 거기서 하나를 차출하라니.
"괜찮아요. 관측반 조사에 따르면 네우로이는 최소 20시간 이내에는 출현하지 않을 테니까."
"그 조사 영 미덥지 못하지 말입니다."
"나흘 전에 네우로이가 출현했으니까 얼추 맞을 거에요. 그리고 완전무장상태로 호위역까지 붙으니까 여차하면 그대로 전선으로 이동하면 됩니다."
후소함대에 있는 사카모토 소령과 함류할 수도 있으니까 괜찮을 거에요. 미나 대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괜찮겠다 싶어서 그리 하겠다고 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근데 누구를 데려가야 하는 걸까. 그 고민은 아침식사시간에 단숨에 해결되었다.
"후소함대에 인사하러 가야하는데 호위해 줄─"
"제가 가겠어요!"
"─사람……."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기립하고 있는 페리느. 이 상황에 페리느 너는 오늘 정찰임무가 있었잖아, 라고 말했다가는 대역죄인이 될 것 같다. 뭐, 내가 징발했다고 하면 되니까 그쪽은 문제없지만.
"……응. 알았어. 1100시까지 출격 준비해줘."
"Absolument stratege!"
번개와도 같은 속도일세 페리느 양. 식사를 끝마침과 동시에 페리느는 사실 고유마법이 셜리와 같은 가속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속도로 식당을 뛰쳐나갔다. 일단 평소에 입에 달고 사는 매너와 에티켓을 무참히 박살내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귀족다운 모습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소령님 얼굴 보러 가는 게 그렇게 좋은가. 1100시까지는 아직 3시간 넘게 남았는데.
"소령님 좋아하는 걸로는 이 부대 최고니까."
"페리느니까~"
셜롯과 루키니가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그런 표정으로 말하니까 묘하다. 적어도 10대 소녀들의 표정은 아니라고 그거.
그러한 지적이야 둘째치고, 느긋하게 식사를 마친 나는 격납고로 향했다. 이참에 저 정신나간 무장들을 점검해보기 위해서였다. 세상에 88mm랑 105mm를 동시에 쓰라니. 일반전차도 그런 정신나간 짓은 안하는데. 하다못해 같은 무기로 통일해주던가. 높으신 양반들 생각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말 하는 나도 일단은 높으신 양반들에 속하지만.
시험삼아 기존에 쓰던 88mm에 105mm까지 끼고 날아보니, 날면서 포격지원을 하는 건 괜찮았지만 반동제어 때문에 실드를 펼칠 여력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하려고 하면 못할 건 없는데 그랬다가는 예전처럼 먹은 거 다 게워내고 기절할지도 모르니까 일단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그러니까 호위역을 붙이는 거지만서도. 나중에는 호위역이 없어도 되도록 특수실드를 연구중이라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쓰기 전에 전쟁이 끝나고 그때가서는 군사기밀이라 안 알려줄 것 같은데 말이지.
무장 점검을 마치고 착륙하니 10시쯤이었는데,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페리느가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것 같은 기세로 격납고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출발 한 시간 뒤에 하는데?"
"군인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답니다."
우아하게 대답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봐도 주인을 향해 달려가기 직전인 애완견 같은 모습이다. 페리느 사역마 고양이 아니었나. 것보다 바로 어제까지만해도 이지적인 귀족 영애였잖아. 어쩌다 이렇게 되버린 거야.
결국 30분 정도 쉰 후에 출격하기로 했다. 페리느를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정시까지 기다렸다가는 뭔가 사단을 낼 것 같아서 말이지.
"욥, 잘 다녀와."
"잘 다녀와용~"
"……그러고 있어도 되는 거냐."
활주로 구석자리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선탠하고 있는 셜리와 루키니에게 그렇게 묻자, 중령님 허락도 받았다고 한다. 뭐, 20시간 이내에는 공습 없을 거라고 하니까 괜찮으려나. 쉴 수 있을 때 쉬는 것도 능력이니까. 일단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페리느가…….
"어서 출발하죠."
이미 저쪽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다. 뭐, 안 부딪치니까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난 모든 정비반의 점검확인 사인을 확인하고, 조준경을 착용한 후 인컴을 작동시켜 관제탑에 무전을 넣었다.
"상냥한 들소, 출격합니다."
"페리느 H. 클로스테르망 중위, 출격합니다"
[Copy.]
관제탑의 허가를 받음과 동시에 몸을 살짝 앞으로 숙이자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스트라이커 유닛에 마력을 더 주입하자 프로펠러 소리가 커지며 속도가 높아진다. 더욱더 몸을 기울인다. 가속. 기울임. 가속. 기울임. 가속. 다른 사람들은 이럴 필요가 없지만 난 무장이 무거우니까 이렇게 천천히 나아갈 수 밖에 없다. 다시 기울임. 가속. 활주로를 절반 정도 달리고 나서야 이륙할 수 있었다.
"수신감도 확인."
[Five by Five.]
시계視界는 청명. 무전감도는 양호. 브리타니아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맑은 하늘을 가르며 우리는 후소함대를 향해 날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해도 별 문제 없이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
함장실에 다녀온 사카모토의 모습에 요시카는 대걸레질을 멈추고는 물었다.
"무슨 일이셨던 건가요?"
"이로쿼이 전사장이 온다고 해서 말이지."
"어, 그러니까……. 지난 번 전쟁의 원인이었던……?"
"그래. 그 녀석이지."
"그런 사람이 전사장이라니……."
납득할 수 없다는 듯한 요시카의 표정에 사카모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반적으로 보면 이해가 안되겠지. 하지만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이로쿼이 소속 마녀는 그 녀석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냥 올라가 있는 걸 거다. 높은 자리는 질색하는 녀석이니까 분명 그 자리를 귀찮아하고 있을걸."
"그래도……."
"너무 그렇게 부정적으로 볼 거 없어. 따지고보면 그 녀석도 피해자니까. 어떤 사람인지는 직접 보고 판단하면 된다."
"……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사카모토의 말에 요시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두 개의 점이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왔군."
안대를 제껴 보라색으로 빛나는 마안으로 그쪽을 확인한 사카모토가 말했다. 무전이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연합군 제501통합전투항공단 스트라이크 위치스 소속 상냥한 들소 전사장 및 호위기 페리느 H. 클로스테르망 중위 2인의 착함허가를 요청합니다.]
[허가합니다. 우리 함대는 스트라이크 위치스 마녀들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마녀가 아카기의 갑판 위로 미끄러지며 착륙했고, 갑판에 있던 사카모토와 요시카가 먼저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차이가 있었다. 일반인인 요시카는 불안과 신기함이 뒤섞인 표정이었지만, 사카모토의 경우에는 다가갈수록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어갔다.
"오랜만입니다, 소령님."
조준경을 벗으며 먼저 인사를 건네온 세라를 멍하니 보고 있던 사카모토는 곧 놀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못 본 사이에 무장이 엄청나졌군? 혼자서도 네우로이 한 두 마리는 가볍게 잡을 것 같은데?"
"그러면 좋겠습니다만 실제로는 빔 한 발만 스쳐도 끝입니다. 호위기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해요."
"실드는?"
"반동제어 때문에 실드를 펼칠 여력이 없습니다. 펼칠 수는 있지만 동시에 포격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기동시켜도 써먹을 수 있는 강도가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유닛 강도를 올렸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항공보병용 장갑이 아니라 기갑보병용 장갑으로 떡칠했다고 듣기는 했는데, 그래봤자 네우로이 빔 한 발이나 버티면 다행이죠."
"한 발이 어디야 한 발이. 넌 의외로 자주 얻어맞으니까 그 한 발 버티는 게 굉장히 좋은 거다."
"그렇긴 하죠. 어찌되었든 호위기 없이 나는 건 저한테는 자살행위입니다."
더 이상 병원 신세지는 건 피하고 싶으니까요. 세라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 말에 사카모토가 살짝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전투에 나가도 괜찮은 거냐."
"며칠 전에도 출격했습니다."
"그 팔로?"
"일상에서나, 아니면 세밀한 작업할 때 힘든 거 빼고는 괜찮습니다. 전투중에는 긴장하고 힘을 주니까 문제없지요. 그리고…….
제가 바보같은 짓을 해서 이렇게 된 걸요. 희미하게 경련하는 왼팔을 감싸며 세라는 그렇게 덧붙였다.
"……마음 같아서는 부상자 처리하고 후방으로 내던지고 싶다만, 이제는 계급도 더 높아서 그것도 불가능하군."
"게다가 이제는 정치도 엮여서 쉽사리 빠질 수도 없게 되었지요."
"고생이로군."
"그래도 직접전투가 아니라 전투지원이니까요. 게다가 호위도 붙고 말입니다."
그 모습에 사카모토는 쓴웃음과 함께 시선을 돌려 페리느를 향해 말했다.
"너도 고생하는구나, 페리느."
"아뇨, 임무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래, 별다른 일은 없었나?"
"네, 부대 상황은……."
우아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페리느의 모습에 기지를 출발할 때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세라가 그 모습을 미묘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세라는 포신에 팔을 얹고 시선을 돌려 사카모토 곁에 서 있는 소녀를 향해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이름이 뭐니?"
"미야후지 요시카에요."
"미야후지 요시카라……. 난, 으음……. 뭐라고 설명하면 쉽게 이해하려나. 상냥한 들소나 세라 둘리틀 중에서 편한 쪽으로 불러줘. 어느 쪽이나 내 이름이니까."
"이름이 두 개신 건가요?"
"응. 하나는 이로쿼이식, 하나는 리베리온식이지."
그러한 두 사람의 대화에 사카모토가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보니까 소개하는 걸 잊었군. 미야후지, 그쪽은 들었다시피 상냥한 들소다. 세라 둘리틀이기도 하고. 이로쿼이 전사장으로 쉽게 말해서 총사령관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리고 이쪽은 페리느 H. 클로스테르망. 갈리아 공군 중위."
"페리느 H. 클로스테르망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 네! 전 미야후지 요시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요시카의 씩씩한 인사에 세라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소령님. 일반인인가요?"
"응. 미야후지는 미야후지 박사님 건으로 브리타니아에 가는 것 뿐이다."
"……이 애 성이 미야후지고, 박사님 성도 미야후지니까 부녀 관계 같은데 맞습니까?"
"맞다만. 왜?"
"그 뭐시냐, 아버지를 찾으러 가는 길이라고는 해도 일반인을 군함에 실어도 되는 겁니까?"
그러한 세라의 물음에 페리느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일반인이라고는 해도 미야후지랍니다, 전사장님. 스트라이커 유닛의 개발자가 누구였는지 잊으셨나요?"
"……아. 아아……. 그 박사님 따님이 있었군요."
"미나에게 네 일반 상식 공부를 부탁했었는데 잘 안된 것 같군."
"추락해서 사경을 헤매다가 깨어나서 이제 겨우 2주 되었나 하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시는 것 같은데요."
"그전에도 일반 상식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만?"
"초과근무 때문이야 그건."
"틀린 말은 아닌데 지금 상황에서는 변명으로밖에 안 들리네요."
"이해심이 없구만. 이해심이."
그렇게 잠시 시덥잖은 대화가 이어진 후, 세라는 기지개를 한 번 쭉 켜고는 말했다.
"이런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후소함대 사령관님을 뵐 수 있을까요? 나중에 공식적으로 후소함대와 만났다고 보고해야 되니까요."
"그럼 일단 함장님께 가도록 하지. 미야후지, 다녀오마."
"네."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페리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사람을 불성실한 인물로 만들려고 하시는 건가요? 당연히 따라가야지요."
"그런 말 할 줄 알고 해본 말이었어."
"다녀오세요─."
세 사람은 그리 영양가 있다고는 할 수 없는 대화를 하며 요시카의 배웅 아래 함장실로 향했다.
*****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탐관오리 같은 얼굴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그런 인상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남자들과 비교해도 큰 편에 속하는 키. 나나 사카모토 씨보다 살짝 진한 피부. 브리타니아로 오면서 스쳐지나왔던 남쪽 섬들의 해안가에서 봤던 맑고 투명한 연녹색 눈. 내가 지레짐작하고 있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겉모습만 그렇고 속은 다를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며 사카모토 씨와 대화하는 걸 듣고 있었다. 그렇지만 거기서도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되려 전쟁의 원인이었던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온화하고 유쾌한 느낌이라 놀랐다. 전쟁터보다는 시골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순박한 사람 같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기는 군함에 붙어있을 법한 커다란 대포를 두 개나 들고 있는 게 이상했지만,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자랑하는 기색은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상한 사람. 하지만 왠지 싫지는 않은 사람.
그런 생각을 하며 사카모토 씨와 함께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라?"
그러고보니 왜 치마를 입고 있는 걸까? 추락해서 다쳤다고 했는데 그것 때문인가? 사카모토 씨가 돌아오면 물어보자.
*****
후소함대 수뇌부와 인사도 나누고 이것저것 잡다한 대화도 하고나니 점심나절이었다. 슬슬 허기가 느껴진다고 하자 어째선지 사카모토 소령님과 페리느 모두 네우로이를 발견한 정찰병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을 지으면 저도 상처받지 말입니다.
여튼 항모를 타고 가면 적어도 반나절은 가야한다고 하니 어찌해야할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대충 인사도 끝냈겠다 일단 기지로 돌아가서 점심을 먹고 서류업무를 처리한 다음에 저녁 때 항구로 갈까, 아니면 그냥 여기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함께 항구로 갈까. 어차피 처리해야할 일이니까 그냥 하는 게 좋으려나. 하지만 막상 가서 일하자니 귀찮은데. 사람 본능이라는 게 역시 이런 건가 싶다.
"어쩌면 좋을까."
"기지로 돌아가는 게 상책이지 않겠어요?"
"돌아가도 돼? 소령님하고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은 거 아냐?"
"……예거 중위와 어울리시더니 이상한 장난만 느시는군요, 전사장님."
"우와, 그 귀족틱한 얼굴 왠지 열받는데! 소령님 계실 때는 애완견 같았구만!"
"사람을 애완견 취급하지 말아주시죠!"
그렇게 잠깐 페리느와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은 후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 있어봤자 할 일도 없고, 아무리 시간 오래 걸리지 않는 서류업무라고해도 밀리면 늘어나니까 후딱후딱 해치우는 게 좋을 테니까.
"그럼 저녁 때 뵙겠습니다."
"그래, 그때 보도록 하지."
작별인사를 마친 후 스트라이커 유닛을 기동시켰다. 호위기인 페리느가 먼저 활주로를 달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후소함대 항모 아카기의 관제탑에 무선을 넣었,
"상냥한 들소, 페리느 H, 클로스테르망 2기 이륙합─"
"적스으으으으으으으읍!!!!!!!!!!!!!"
왜애애애애애애애앵────────!!!!!!!!!!!!!!!
바로 옆에서 들려온 사카모토 소령님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시 시작했다. 포탄이 하늘을 가르고 날아가 시야를 가리는 구름을 흩어버리자 불길한 검은색에 항공역학을 완전히 무시하는 기괴한 모양새로 하늘을 나는 괴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얘들은 점심시간도 없는 건가……."
["그런 시간관념 같은 걸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내 말도 안되는 투덜거림에 이미 하늘로 날아오른 페리느가 농담삼아 대답했다. 그 뒤로 곧바로 안전장치 해제라는 말이 들려왔다. 기지로부터 무선이 들려온 건 거의 동시였다.
[여기는 501부대. 응답하라, 상냥한 들소.]
"여기는 상냥한 들소. 수신확인. 중령님이신가요?"
[맞아요. 네우로이가 후소함대를 습격, 지원요청을 접수했습니다. 해당 공역으로 신속하게 이동하세요. 추가지원병력은 30분 후 도착합니다.]
"이륙하자마자 발견했습니다. 저와 클로스테르망 중위는 곧바로 후소함대와 함께 적기 요격에 들어갑니다."
[알겠어요. 행운을 빕니다.]
"Rog."
[Rog.]
나와 페리느의 복창과 동시에 기지로부터의 무선은 끊어졌다.
[지휘권은 어떡하실 건가요?]
"당연히 사카모토 소령님 휘하로 들어가야지."
[이로쿼이 애들이 당신 이러는 거 알면 어떨지 모르겠네요.]
"괜찮아.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훈련병 시절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걸 말이지. 슬픈 일이로구만. 어찌되었든.
"그런 고로 명령 대기중입니다, 소령님."
"음……. 날지 않으면 실드를 제대로 펼칠 수 있나?"
"네, 문제없습니다."
"그럼 하늘은 나와 페리느가 맡도록 하지. 넌 실드로 항모를 보호하며 대공포화지원을 하도록."
"Rog!"
"미야후지! 넌 비전투원이다! 의무실로 피난해 있도록!"
"아, 네!"
멍하니 하늘을, 네우로이를 바라보고 있던 그 아이는 소령님의 말에 퍼뜩 놀라더니 주춤거리며 함내로 들어갔다. 가면서도 계속 불안한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는 걸 보니 역시 민간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령님도 전투준비를 위해 갑판 너머로 달려가셨다. 나는 두 포의 안전장치를 해제하며 페리느에게 물었다.
"승률은 어떨 것 같아?"
[전투가능한 마녀가 셋인데 그중 제1선에 나올 수 있는 건 둘이고 하나는 화력지원이죠. 거기에 함대…… 라고 해도 보급함대니까 제대로 된 전투력을 기대할 수는 없겠죠? 30분 방어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네요.]
"그렇다고 후퇴할 수는 없잖아."
[당연한 말씀을.]
함께 싸울 전우가 있고 타도해야할 적이 있는데 후퇴라뇨, 어불성설이죠. 페리느는 그렇게 말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귀족이란 정말 멋진거구나. 높으신 분들이 다들 이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조준경이 보여주는 예상탄착지점이 네우로이가 떠 있는 하늘과 겹치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어디 한 번 해보자고!
*****
"무슨 일이 있다면 그걸로 내게 연락하면 된다."
사카모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의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다다다, 하고 복도를 달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퍼졌다. 요시카는 천천히 흩어져가는 사카모토의 발소리를 들으며 귓가를 만졌다. 작은 이물감이 느껴졌다. 인컴이라고 했던가. 마녀용 무전기 같은 것이리라. 처음에는 몰랐지만 방금 전에 만났던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기에 알 수 있었다.
[승률은 어떨 것 같아?]
[전투가능한 마녀가 셋인데 그중 제1선에 나올 수 있는 건 둘이고 하나는 화력지원이죠. 거기에 함대…… 라고 해도 보급함대니까 제대로 된 전투력을 기대할 수는 없겠죠? 30분 방어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네요.]
[그렇다고 후퇴할 수는 없잖아.]
[당연한 말씀을.]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 무섭지 않은 걸까. 나는 여기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 걸까. 공포로 떨림이 멈추지 않는 가운데 그러한 고민들이 쉴 새 없이 요시카의 머리 속에서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 순간 의무실 풍경이 요시카의 눈에 들어왔다.
"……."
소독약, 붕대, 알코올, 거즈, 메스, 식염수. 집에서 봐왔던 것들. 늘상 만져왔던 것들.
그것을 본 순간 요시카는 두근하고 가슴이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커다란 의료용 가방에 의약품들을 밀어넣고 있었다. 그대로 나가려고 하는 요시카의 눈에 옷걸이에 걸린 흰 가운이 보였다. 잠깐 망설인 끝에 요시카는 가방을 내려놓고 가운을 걸쳤다. 거기에 붉은 심자가가 그려진 완장을 왼팔에 끼웠다. 그냥 나간다면 분명 무시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고 나간다면 그러지 못하리라.
크기가 맞지 않아 헐렁이는 가운을 다시 부여잡고, 약과 붕대를 가득 채운 가방을 맸다. 그리고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
무섭다.
대공포화의 둔중한 울림. 네우로이의 빔이 대기를 불태우는 소리. 매캐한 화약 냄새. 사람들의 비명. 함선의 폭발음. 검붉은 연기.
무엇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모든 게 마음을 꺾기 위해 달려드는 것 같다.
"……."
하지만.
문고리를 움켜쥔 손을 비틀었다. 찰칵. 열린 문을 밀어젖히고 텅 빈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하는 일이 옳다는 확신은 없다. 달리고 있지만 내딛을 때마다 다리가 떨리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끝내고 싶지는 않다. 그런 생각에 요시카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몇 차례 커다란 진동에 넘어져 타박상이 생겼지만 멈추지 않고 달려 도착한 갑판은 이미 전쟁터였다. 어느 쪽이든 검은 연기와 붉은 빔, 그리고 총포탄의 섬광이 끊이지 않고 있었고,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폭음이 계속 터져나왔다. 그 속에서 위생병을 찾는 수병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생병! 위생벼여영!!!! 위생……, 어, 어?!"
"뭘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거야?! 얼른, 어……?!"
역시 당황하고 있다. 그틈에 요시카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어딜 다친 거에요?"
"어, 어, 그러니까 너는……."
"어디에요!"
"다, 다리! 다리가 부러졌어!"
"그쪽에 앉혀주세요!"
수병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요시카의 말에 따라 환자를 앉혔다. 폭발에 튕겨나온 파편에 다리를 직격당해 부러진 것 같았다. 상태를 확인함과 동시에 바늘과 같은 마취제를 놓고 부러진 뼈를 돌렸다. 까드득, 하고 소름끼치는 소리와 뼈가 부딪치는 촉감이 손끝으로 전해져와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구토감이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넘겼다. 뼈가 맞았는지 확인하자마자 터지다시피한 살을 의료용 실로 꿰메고 지혈제를 뿌렸다. 마지막으로 붕대를 감고 치유마법.
우웅─
푸른 빛과 함께 방금 전까지 신음하던 병사의 표정이 약간은 가벼워졌다. 이왕이면 완쾌될 때까지 마법을 쓰고 싶었지만 다른 곳에서 위생병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무실로 옮겨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요시카는 곧바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살짝 뒤를 돌아보니 다른 수병들이 환자를 옮기고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금속 파편을 뽑아내고, 화상으로 죽은 조직을 제거하고, 뼈를 맞추고, 살을 꿰메고, 치료 마법을 쓰고……. 다시 반복.
치료를 위해 알코올과 식염수로 씻어내는 손은 괜찮았지만 가운은 이미 재와 먼지, 그리고 피로 더러워져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피에 젖은 가운이 다리에 달라붙어 불쾌감을 높였다. 거기에 매캐한 화약 연기, 비릿한 혈향, 머리카락이 타는 듯한 악취, 새삼스러운 바다 냄새. 온갖 것들이 뒤섞인 전장의 내음이 요시카를 자극했다.
토할 것 같았다. 큰 부상을 입은 환자들이야 집이 진료소라는 특성상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까지 처절하고 잔혹한 광경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요시카는 멈추지 않았다. 그게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네우로이도, 환자도 없는 먼 바다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한 후, 요시카는 피에 젖어 달라붙는 가운을 떨쳐낸 후 다음 환자에게 달려갔다.
그 순간,
"위험해애애애앳!!!!!!"
등 뒤에서 들려온 수병의 외침에 고개를 돌린 순간, 붉은 섬광이 눈앞에 들이닥치는 게 보였다. 네우로이의 공격.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무언가 해야했다. 하지만 무엇을?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올리는 게 고작. 그러면 이대로 끝인─
파츠츠츠츠츠츠츳───………………
[……지 ……나…… 미야후지! 괜찮나?! 미야후지!]
"네, 무사합니다, 소령님. 그러니까 이왕이면 제 걱정도 좀 해주셨으면, 으윽, 하는데요."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어느 새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들어올렸던 팔을 내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일반적인 것과는 달리 더 큰 스트라이커 유닛. 사람 몸통보다도 더 큰 강철 상자. 오른쪽 옆구리에는 군함에서나 쓸 것 같은 커다란 포. 그건…….
[이참에 그 애한테 치료 좀 받,] 빠지지지지직!!!
"내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페리느!!!"
콰─앙! 콰─앙! 콰─앙! 귀가 멀 것 같은 커다란 굉음이 울려퍼지며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 사람은 분명…….
"괜찮으면, 후우, 치료 좀, 받을 수 있을까?"
스트라이커 유닛 끝의 바퀴로 몸을 살짝 돌리며 그렇게 말한 건, 붉게 물든 왼쪽 옆구리를 누르며 힘겨운 미소를 짓고 있는 상냥한 들소─세라 둘리틀이었다.
*****
- 2010년 3월 29일에 1화가 올라왔으니까, 대충 2년 만에 1기 진입이군요. ……그러니까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런 불량 소설을 버리고 다른 글을 재촉해야 합니다. 배달부는 메이사이 님께서 군대를 가셔서 차마 재촉할 수 없으니까 에이왁스라던가 마탄의 사수라던가 에이왁스라던가 마탄의 사수라던가.
- 신이다 님 그림 감사합니다. 다만 세라의 보급창은 크기가 좀 줄었습니다. 예전에 세탁기만했다면 지금은 소형 냉장고 수준? 그게 말이 되냐고 하신다면 마법이니까라고 대답해드리겠습니다.
- 월드 오브 탱크 한동안 이것저것 해봤는데 역시 전 TD가 제일 잘 맞더군요. 은신해서 먼 거리에서 저격하는 재미가 쏠쏠하더군요. 뭐, 그것도 아이마스 팬픽을 쓰라고 강요받아서 제대로 즐기기 못했습니다만. 잊지 않겠다 팀 구지가 […] 농담입니다. 그림 정말 감사합니다.
- 그것과는 별개로 3월 초는 좀 바쁘므로 뭐가 되었든지간에 다음 편은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별의 바다도 안 쓴지 꽤 되었으니까 써야할 텐데 그쪽은 IS 원작이 끝장나버려서. […] 하지만 애초에 IS는 다른 팬픽 보고 쓰는 거였으니까 괜찮습니다. <-
- 하여튼 포병이든 별의 바다는 아마도 아이돌이든 적어도 3월 중반은 되어야 나올 것 같습니다. 시간되면 좀 더 일찍 나오겠지만 제가 이런 말을 했을 때 제대로 나온 적이 없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리 믿을만한 정보는 아니군요 […]
- 요시카 의료스킬버프는 이 팬픽 구상할 때부터 생각했던 겁니다. 주인공이니까요 [?]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프랑스어 지적 환영합니다. […]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26
[이해할 수 없네요!]
"뭐가?!"
[적기의 공격이─ 너무 단조롭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우선 내게 그런 걸 판단할 수 있는 시간으,"
빠지지지지지지익────!!!!!
"크으윽! 주면 한 번 생각해볼게!"
온몸을 짓누르는듯한 착탄압력이 사라짐과 동시에 포구를 하늘로 향한다. 목표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묘한 검은 물체─네우로이. 조준경의 예측 탄도에 녀석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방아쇠를 당긴다. 콰─앙! 콰─앙! 제기랄, 커서 좋구만. 아무렇게나 쏴도 맞으니까.
문제는 내가 지켜야 하는 항모도 엄청나게 커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해야 한다는 거다. 그것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그 때문에 기갑보병 애들이 쓰는 것마냥 마구 혹사당하고 있는 보조바퀴가 삐걱삐걱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애초에 스트라이커 유닛에 달린 바퀴는 이렇게 과격하게 달리기 위한 용도가 아니니까 그럴 법도 하다. 기지로 돌아가면 정비병들이 또 유닛 가차없이 굴리는구나 하고 쳐다보겠는데?
덤으로 무릎을 굽히지 못하는 스트라이커 유닛의 특성상 가랑이도 무진장 땡겨오기 시작했다. 허리? 그쪽은 만성이라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까 말이지.
"저 놈 시선 좀 잘 끌어줬으면 좋겠어!"
[대포가 취향인 녀석이라! 큿, 눈 돌리게 하기가 쉽지 않네요!]
"그럼 나도 소총, 은 영 아니고 무리고 기관총으로 바꾸면 될까!"
[기관총이라고 하면서 4연장 M2 같은 걸 꺼내면 그다지 효과가 없을 것 같군요!]
그렇겠지. 그쪽도 사거리가 좀 짧다 뿐이지 접근해서 쏟아내면 엄청 강하니까. 문제는 내가 접근을 못한다는 거지만. 무장을 교환할 시간도 없고. 아니 그것보다!
"소령님?! 코어는 아직입니까?!"
[지원이 필요해! 이 녀석 우리들만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어!]
[단조로움 속에 핵심을 찌르는 공격─ 이군요! 적이지만 칭찬해드리고 싶은 기분이에요!]
"적어도 저 녀석들이 그걸로 기뻐할 것 같지는 않은데!"
[세라!]
"봐쓰우와아앗?!"
페리느의 외침과 동시에 다급하게 포를 놓고 실드를 펼쳐 항모 갑판으로 쏟아지는 붉은 빔을 막아냈…… 다아아앗!!! 호흡이 끓는 것 같다. 심장 언저리가 삐걱거린다. 등가교환 과부하인가. 시야에 왼팔이 심하게 경련하는 게 보인다. 어쩐지 탄착군이 벌어진다 싶었더니 슬슬 한계치인가. 요 몇 달 간 농담 안하고 생사를 넘었는데도 이 모양이냐.
"……제기랄."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억지로 팔에 힘을 줘 포를 조준하자 사카모토 소령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돌격하겠다! 뒤따라올 녀석들 남아있나!]
[4번기 붙겠습니다!]
[22번기 붙겠습니다!]
[75번기 붙겠,] 콰앙! [크윽! 당했다! 탈출한다!]
"75번기?! 75번기! 괜찮나?! 응답하라!"
[저 녀석이라면 괜찮습니다! 비상탈출 경험만 이걸로 다섯 번째인 녀석입니다!]
"그렇다면, 아니, 뭐?! 다섯 번?!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기합이다, 세라!]
[기합입니다, 리베리온 전사장님!]
[기합이죠!]
"괜찮은 거냐, 후소?!"
마음에 여유가 있어서 주고받는 농담은 아니다. 하지만 무심코 터져나오는 헛소리와 농담이 끊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건가? 전쟁과도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뇌가 미칠 듯이 마약을 분비한다는 그거? 하긴, 그런 거라도 나오지 않으면 못 버틴다. 내색은 안하고 있지만 심장이 필요 이상으로 빠르게 뛰고 있다. 쿵쾅거리는 고동소리가 무전까지 잠식하는 것 같다. 폭음이 멀어지고 세상이 느려지는 것 같은──
[──정신차려!]
"흐억?!"
붉은 빛이 번쩍인다고 느낀 순간 반사적으로 실드를 펼쳤, 제길 늦었,
콰광!!!!
[피해요 세라!]
"괜찮아! 안 맞았어! 옆에 대공포탑에 맞았,"
[그러니까 피하──,]
파캉─!!!
페리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왼쪽에서 열기와 함께 무언가가 내 몸 전체를 후려쳤다.
"……아, ……아으……."
온통 새하얗다. 그렇기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새하얀 암흑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 외의 감각은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후각, 청각, 미각, 촉각은 물론 마녀의 육감인 마력도.
얼마나 지났을까. 간신히 희미하게 감각이 돌아온다. 우선은, 어지럽다. 그리고 심하게 죄여오는 왼쪽 옆구리가, 아아, 잠깐만. 잠깐잠깐잠깐만──
"……그에엑……. 에긋, 프엑……. 으웨에엑……."
토한다. 아니, 토하고 싶다. 아침 먹은 건 이미 다 소화되어 빈 위장에서 올라오는 건 쓰디쓴 위액 뿐이다. 점점 구분되기 시작한 시야로 용케 서 있는 내 자신도 보인다. 솔직히 이건 스트라이커 유닛과 대포를 지지대 삼았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았다고 보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리고.
[들리나 세라?! 괜찮은가?!]
[──대답하,] 쯔즈즈즈즈──……!! [세라?! 세라!]
"살아있습, 크윽, 살아있습니다악……."
[뭔가, 부상인가?]
"좌현 대파 상태, 입니다아……."
대공포탑이 터지면서 날아온 파편이 왼쪽에 장착했던 105mm을 박살냈다. 그리고 박살난 105mm 파편들은 내 옆구리를 후려쳤고. 파편이 박히는 수준─솔직히 자세히 안 봐서 모른다. 어쩌면 박혀있을지도 모른다─까지는 아니지만, 근육파열이나 갈비뼈 금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래도 위치니까 이 정도지 일반인이었다면 허리가 두동강나서 갑판을 굴러다니고 있을 거야.
[이걸로 확실해졌네요! 당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투입시키면 안된다는 걸! 어떻게 혼자만 있으면 그렇게 다치는 건가요!]
"내가 알고 싶, 다아앗!"
철컥! 터엉! 터텅! 짐덩어리가 되버린 105mm를 분리시킨다. 순간적으로 무게중심이 빗나가 기우뚱하지만 곧 균형을 되찾는다. 이래뵈도 포격 숙련자라고. 실제 포병들이 들으면 쌍욕할 소리구만. 아니, 위치니까 괜찮으려나? 그래도 삼가해야할 말인, 아아, 잠깐만요. 기다려 봐. 잠깐, 아니 그러니까 제발 좀…….
"아으아어으어으어으아어아……."
[이로쿼이식 주문인가?]
단순히 옆구리가 죄여오기 시작한 것 뿐입니다, 소령님. 슬쩍 내려다보니 왼쪽 옆구리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내출혈이 아니니까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건가 아니면, 아니 애초에 다친 것부터가 문제잖아. 숨을 쉴 때마다 죄여온다. 그래도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뇌에서 아드레날린이 마구마구 분비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지난 번에 너무 가차없이 박살나서 이 정도는 상처 축에도 못 낀다거나.
어느 쪽이나 엉망진창이로구만!
[전투 속행은?]
"안하면 수장될, 위기이히흐이이그으으윽! 잖습니까! 지원 범위 지정해주십시오!"
[남동남 9시 방향에서 2시 방향 중앙 곡선! 제압해서 고도를 낮춰! 위에서 강습하겠다! 함대 대공포격에 맞추도록!]
"Rog!"
퉷. 입안에 남아있는 쓴 냄새를 뱉어내고 88mm를 조준한다. 포신 끝이 흔들리는게 보인다. 상대가 더럽게 커서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지만, 이제는 둔한 통증과 함께 미적지근한 열이 느껴지는 옆구리를 상기시킨다. 지원군 빨리 좀 와줬으면 좋겠다 진짜. 오래 버티기 힘들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명령에 따라 곡선을 그리며 포격. 기관총마냥 드르륵 긁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렇게는 못하니까 함대의 대공포격 궤적을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일부는 시즈모드 일부는 퉁퉁퉁퉁. 아니, 이건 아닌가.
[페리느! 따라와라!]
[네!]
그틈에 소령님과 페리느가 녀석보다 고지대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그걸 눈치챈 네우로이가 목표를 수정한다. 붉은 궤적이 하늘을 가르다 푸른 원 앞에서 흩어진다. 미안하지만 그쪽만 상대하고 있다가는,
"배때기에 칼빵이 꽂힐 거란다!"
콰앙! 콰앙! 콰앙!
반쯤 무방비 상태가 된 네우로이 하부에 포탄을 때려넣는다. 함대의 대공포격도 더해져 녀석의 공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틈을 타 소령님과 페리느가 더욱더 가까이 접근. 이 상태가 반복된다면 좋겠지만 네우로이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갑작스레 긁어내리듯 쏜 레이저에 후소 순양함 한 대가 순식간에 폭발과 함께 기울더니 가라앉기 시작한다. 같은 공격범위에 들어가있던 다른 함선 두 척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폭발을 일으킨다. 일단 최소가 항행불능이라는 것만큼은 알 것 같다.
그래도 소령님과 페리느가 녀석에게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일섬!
키이이이이잉──────…………!
맑은 쇳소리와 함께 녀석의 왼쪽 날개가 완전히 썰려나간다.
─────────────!!!!!!!!!!!!!
가청영역을 초월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진폭으로 울려퍼지는 녀석의 괴성에 일시적으로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 남아있는 것은 시각 뿐. 청각과 촉감은 애저녁에 마비된 지 오래다보니 마치 오래된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아니, 이 세계에서는 지금 영화인? 여튼. 다른 점이라면 이건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며 끔찍하도록 피곤하다는 것이다. 늪을 헤치며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쉴새없이 이어지는 대공포격과 네우로이의 위를 점령한 두 사람의 공격에 녀석이 갈팡질팡한다.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건가. 무차별적으로 분산되는 레이저는 대부분 바다에 떨어지고 있고, 함선에 맞더라도 치명타는 아니다. ……어, 잠깐만. 저 녀석 지금 저거 어째 뭔가 묘한데…….
[네우로이 공격 패턴 확인! 목표는 기함항모 아카기!!!!]
"역시냐아아아아아아!!!!"
흩뿌리는 듯 해서 관심을 돌린 후에 중추를 부수겠다는 거로구만! 제길, 네우로이는 계획 따위는 없고 무차별적인 섬멸전만 한다고 했던 놈 누구야!
퍼뜩 고개를 돌려보니 다들 무전을 들었는지 미칠듯이 대공포화를 쏟아내고 있다. 갑판 위로 내달리는 수병들 속도고 빨라진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흩어져 있는 부상자들과 그걸 치료하고 있는 위생병……?
"소령님! 소령님이 데려온 애 의사였나요?!"
[무슨 소리지!]
"지금 제 눈이 이상한 게 아니라면 갑판 위에서 부상병 치료하고 있는 여자애 모습이 아까 소개시켜준 그 애랑 똑같이 보입니다!"
[아래가 피에 물든 가운을 입고 있는 애를 말하는 거라면 제게도 그렇게 보이는군요! 단순한 보호대상은 아니었나보네요!]
[아니, 집이 진료소긴 하지만 민간인이다! 피난해 있으라고 했었는데!]
"가운 입고 위생병 완장 차고 절찬리에 외과 수술중입니다!"
[그 정도 실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고해도 민간인입니다. 전장 한복판에 놔둘 수는 없습니다, 소령님!]
[알고 있, 젠장! 세라!]
"저도 봤습니다!"
잠깐 공격이 뜸해진 사이 네우로이의 공격이, 지금 저 상태라면 노리는 건,
"[갑판!!!]"
지금 아카기 갑판 위에는 부상병에 거의 비무장에 가까운 수병들이 있다. 그리고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사람을 살리고 있는 꼬마 아가씨가──
"세상은 언제나 불합리한 거냐아아아아!!!!!!"
폭발적으로 스트라이커 유닛을 기동시켜 날아오른다. 거의 막무가내로 날아올랐기 때문에 방향제어도 엉망이고 온몸이 삐걱거린다. 날아오른 높이도 겨우 6~7m 남짓. 하지만 투덜거릴 시간은 없다. 동시에 실드를 펼쳐 네우로이의 공격이 최대한 흩어지도록 한다. 혼자서 펼칠 수 있는 실드의 크기는 한계가 있고, 지킬 수 있는 아카기 범위도 작다. 그러니까 최대한 다가가서 분산시키지 못하면 아카기에 바람구멍이 뚫린단 말이,
터어어어어엉────────!!!!!
"……!!!!!!!!!"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실드 앞을 붉게, 마침내는 새하얗게 불태운 녀석의 레이저를 막은 순간에. 실드를 받치는 양손이, 양팔이, 어깨가, 척추가 삐걱거린다. 와장창창!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양 종아리에서 뼈가 뒤틀리는 충격이 느껴졌다. 그 충격은 무릎을 타고 올라와 허벅지까지 쥐어짠 후 골반 관절을 지나 허리에 도달했다. 한마디로, 죽겠다.
게다가 아까 엊어맞은 옆구리는 분리독립이라도 주장하는 건지 전신을 울리는 통증과는 별개의 고통을 외치고 있었다. 위치의 근성이나 마력 같은 거 없었으면 진작에 쇼크사하지 않았을까.
영원할 것 같던 압력이 사라지고 다시 시야가 되돌아왔다. 분명 방금 전까지 날아올라 있었는데 어느 새 갑판 위에 있다. 게다가 내 앞으로 괭이로 긁은 것 같은 흔적이 남아있고. 착탄압력이 밀려 갑판에 쳐박힌 후 버티다가 밀린 건가. 어쩐지 스트라이커 유닛 아래 부분이 엉망진창이더라니. 이래서는 더 이상 고속기동은 무리다. 날아야 하나. 아니, 그것도 무린데.
"……후아……."
여튼 막았다. 아, 진짜 못할 짓이라니까…….
[……지 ……나…… 미야후지! 괜찮나?! 미야후지!]
"네, 무사합니다, 소령님. 그러니까 이왕이면 제 걱정도 좀 해주셨으면, 으윽, 하는데요."
급작스런 통증에 왼쪽 옆구리를 부여잡, 지 못했다. 뭔가 잘못 건드렸는지 찌르르르 하고 격통이 일었다. 야이…… 크윽. 옷은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이 피에 물들어 있었다. 쓰라리며 쑤시는, 설명이 안되네 이거…….
[이참에 그 애한테 치료 좀 받,] 빠지지지지직!!!
"내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페리느!!!"
이를 악물고 네우로이를 포격하여 페리느를 향한 공격을 멈춘다. 그걸 봄과 동시에 나 역시 공격을 멈췄다. 멈출 생각은 없었는데 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다른 팔은 덜덜 떨려서 별 도움도 안 되고. 정말 어쩔 수 없잖아.
"괜찮으면, 후우, 치료 좀, 받을 수 있을까?"
쑤시다못해 삐걱거리는 옆구리를 조심스레 감싸안으며 나는 뒤에 있던 소녀─미야후지 요시카에게 말을 건넸다.
"……안돼니?"
"아, 아니요! 부상은 어딘가요!"
언제 멍하니 있었냐는 듯 곧바로 내게 달려온다. 부상이 어디일까. 온몸이 쑤신다. 순간적으로 멍해지는 건 피가 부족해서 빈혈이 오는 건가. 일단 옆구리라고 대답하자 앉아달라는 소리를 들었다. 아, 그렇지. 내 스트라이커 유닛이 커서 손이 안 닿는구나.
반쯤 쓰러지듯 앉았다. 부딪치다시피한 엉덩이가 얼얼했지만 다른 통증이 더 커서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보급창을 등받이 삼아 앉아있으니 그 아이가 다가왔다. 옆구리를 보자마자 뜯어낼 듯한 기세로 상의를 벗기기 시작했다. 터프하구나. 저만한 나이대 애들이라면 원래 옷이 피에 물든 것만 봐도 '어떡해, 어떡해.' 하면서 발만 동동 구를 뿐 아무 것도 못할 텐데.
[부탁한다, 미야후지!]
"네!"
소령님의 무전에 그 아이는 힘차게 대답한다. 식염수로 생각되는 서늘한 액체의 감촉이 옆구리를 타고 흘러내린다. 둔하게 뜨끔뜨끔하다. 힘이 풀린 목이 빙글 하고 왼쪽으로 구른다. 열심히 내 상처를 살펴보고 있는 아이가 보인다. 파편이 박혀서 뽑아야 한다느니, 살이 뭉터기로 터져나가 봉합이 쉽지 않다느니 하는 얘기를 열심히 하고 있건만 어쩐지 현실감 없게 들린다. 하지만 그런 끔찍한 상처를 보면서도 필사적으로 치료하려고 하는 태도는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야후지 요시카. 방금 전까지만해도 평범한 소녀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미야후지 박사의 딸이라고 해도 그렇게 특별한 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하는 걸 보니 충분히 큰 인물이 될 것 같, 아…….
"……이구나……."
"지혈제를 뿌리고 몰핀 두 방 투여한 다음에 적출하면, 네?"
"아냐, 아무 것도 아냐……."
그렇구나. 주인공이었구나. 처음에는 어리버리하고 미숙하지만 성장해서 큰일을 해내는. 정확하게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이런 기억이 떠오르는 건 진짜 오랜만이다.
물론 기억해낸다한들 그러한 정보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뿐이다. 그렇잖아? 그 세계에서는 없었던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떡하니 움직이고 있는 시점에서 너무 많은 변수가 움직이고 있는데 예측은 무슨.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내 옆에서 열심히 치료를 하고 있는 이 애는 분명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걸. 응. 분명 그럴 것이다. 주인공이라서? 아니다. 그냥 감일 뿐이다.
"아파도 조금만 참으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좀 큰 핀셋 같은 걸 옆구리 속살에 밀어넣는다. 뭔가 휘적이는 느낌이 들긴 하는데 섬뜩하리만치 통증이 없다. 몰핀이 어쩌구 하더니 마취를 해서 그런가. 효과 좋네. 그러는 사이 뭔가 손가락 한 마디만한 조각이 뽑혀나온다. 조금만 위에 박혔어도 횡경막이 찢어질 뻔했다고 하기에 "그런가……." 하고 멍하니 대답한다. 그러는 사이 요시카가 상처를 봉합하고, 다시 지혈제를 뿌린 후, 거즈를 덧댄 후 붕대를 감는다. 마취 때문에 별다른 감촉은 느껴지지 않지만 숨 쉬기 힘들다는데서 붕대의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따스한 푸른 빛. 치유마법인가. 온기가 스며드는 것 같은 기분이 참 좋지만, 이제 슬슬 일어나야 할 때인가.
"안돼요! 지금 움직이면 봉합한 상처가 터져요!"
어깨를 누르는 손길이 제법 매섭다. 간호장교 언니가 떠오르는데. 그 언니는 멱살을 잡아 주저앉히겠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네우로이한테 터져."
구체적으로는 이 배가 말이지.
"그래도! 그 상처로는 안돼요! 환자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넌 민간인이고 난 군인이야."
"그……!"
누르는 힘이 잠시 약해진 틈을 타 재빠르게 일어선다. 스트라이커 유닛은 이미 삐걱거리고 있다. 치료를 받은 덕분에 통증은 줄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취빨이겠지만. 그래도 무시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게 어디야.
"왜 그렇게……."
"응?"
요시카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싸우는 건가요? 어떻게, 그런데도, 싸울 수 있는 거죠?"
이 지랄맞은 전장에 다시 돌아와서, 또 지금처럼 죽을까 말까 하는 상황을 넘고 있는 이유라. 뭐, 다른 게 있나. 따사로운 가을 햇살, 달빛눈꽃, 차가운 땅의 빛나는 달. 그리고 또 수많은 이로쿼이 아이들 때문이지. 내가 여기 없다면 그 아이들이 당장이라도 총을 들고 싸워야 하니까. 그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알겠어요."
요시카는 그렇게 말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나를 포함한 부상병들의 피와 먼지가 엉겨붙어 더러워진 얼굴에는 거기엔 빛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내 말에서 뭔가 느낀 거라도 있는 걸까. 모르겠다. 일단은 말이지.
"영차─."
"엣, 앗?! 에엣?!"
서서 땅짚기 하듯 해서 성한 오른팔로 요시카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무, 무슨?!"
"부상병들 옮기는 건 다른 수병들한테 맡기고 넌 의무실로 돌아가."
"어째서요?!"
"거기에 환자가 득시글거리고 있으니까. 그리고 챙겨온 의료품도 다 떨어졌잖아."
내 말에 정곡을 찔렸는지 요시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말 잘 듣는 애들은 좋아.
"그러니까 요시카를 의무실에 떨궈주고 복귀하겠습니다."
[알았다.]
[무리하지 마세요. 홀몸이 아니니까.]
"오해받을 소리 함부로 하지 마, 페리느."
시덥잖은 농담을 던지며 스트라이커 유닛을 움직인다. 그래도 용케 굴러가는구나. 물론 덜컥거리고 삐걱거리고, 하여튼 정상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게 어딘,
[조심해!]
반사적으로 실드를 펼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생사를 결정한다. 이미 몇 번이고 그걸 경험해본 나는 무전을 듣는 순간 일단 가장 가능성이 높은 머리 위로 실드를 전개했다. 콰광! 다행스럽게도 공격은 나를 향한 게 아니었다. 항모 뒷쪽 갑판에 떨어졌다. 불행스러운 일이라면,
"꺄아아악!"
"우와아아앗!"
빠르게 가려고 비행기용 엘리베이터 쪽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충격으로 흔들려서 스트라이커 유닛이 걸렸다는 거지! 설상가상으로 그 충격으로 한쪽이 완전히 고장나서 비행제어도 힘들, 고오오오오옷?!!?!?
쿠탕당탕타탕! 쿠쾅! 와장창! 끼이이익!!! 쿠쾅!
"읏, 콜록! 콜록! 핫?! 괜찮으세요?!"
"……모르겠다아……. 으겍……. 쿨럭, 켈록! 푸합!"
벽에 부딪치고 장비에 부딪치며 요란하게 굴러떨어졌더니 몸이 징징 울린다. 그래도 아픔이 별로 없는 건 역시 아까 맞은 마취약 때문인가. 하지만…….
[괜찮은가, 세라?! 미야후지는?!]
"둘 다, 콜록, 크흠, 무사합니다만, 켈록, 아무래도 복귀는 힘들 것, 같습니다. 스트라이커 유닛 한쪽이 완전히 맛이 갔네요. 이거, 콜록. 고정포대 노릇이나 해야할 것 같습니다."
[큿, 조금만 더 조이면 될 것 같은데……!]
[세라! 갑판으로 나와주실 수는 있나요! 탄약이 다 떨어져 가요!]
[이쪽도, 아니 이쪽은 칼로 버텨보지!]
"소령님 칼질 훌륭한 거 알지만 가능하면 제발 총 쓰세요! 그리고 여기 탄약 빌리면,"
[규격이 안 맞죠!]
"규격이 안 맞는군! 젠장, 알았어! 엘리베이터가 살아있는 것 같으니까 금방 올라갈 수 있을,"
"안돼요! 상처가 터졌어요! 지금 봉합해야 해요!"
"아니, 아직 멀쩡하잖아?"
"허리 아래로 피가 쏟아지고 있잖아요!"
정말이었다. 마취 때문에 몰랐어. 그러는 사이 요시카는 다시 붕대를 뜯고 얼마 남지 않은 지혈제와 의료용 실로 내 상처를 꿰메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악전고투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것보다 희미하게 따끔거리는데 이거 설마 마취 효과가 벌써 다 떨어져 가는 건가? 다행히 봉합 자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큿, 거기서 탄창 전해줄 수 있는 인원이 없나요?!]
"없을 걸. 일단 봉합 끝났으니까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갈,"
"……갈게요."
"테니, ……뭐?"
요시카는 그렇게 말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요시카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보았다. 그곳에는 백색의 스트라이커 유닛이 고정대에 거치되어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걸까. 요시카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굳은 눈빛으로 말했다.
"제가 갈게요."
*****
- 팬픽 쓸 때 보통은 메모장을 사용하고 USB와 외장하드에 저장을 합니다만, USB를 깜빡했을 때는 암담해지더군요. 그래서 자주 사용하는 라이브 메신저의 스카이 드라이브와 웹 오피스 기능을 사용해봤는데 나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이제 USB를 분실해서 타자치기 싫어지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 어느 새 두 달이 훌쩍 지나갔네요.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훌쩍훌쩍 지나가버렸습니다. 할일도 많은데 대체 뭘 하고 지냈는지를 모르겠네요. 그래도 기다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27
엘리베이터가 기동하면서 묵직한 무게가 다시 한 번 등허리를 짓눌렀다. 99식 13mm와 브렌 경기관총의 탄창이 등에 짊어진 배낭에 한가득. 어깨에는 예비용 99식이 하나. 스트라이커 유닛이 없었다면 걷기도 힘들 무게였다. 그렇지만 요시카는 허리에 힘을 빼지 않았다. 만신창이 상태인 세라가 옆에서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표정의 원인이 자신이다보니 자연스레 긴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긴장 풀어. 어깨에 힘 빼고."
"아, 넷!"
"……나는 건 어렵지 않아. 대신 실드 펼치는 걸 잊지 마."
"넷!"
긴장한 요시카의 목소리를 어떻게 생각한 것일까. 툭 하고 세라의 손이 요시카의 머리에 얹어졌다. 이마를 쓸어넘기고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농부의 그것과도 같은 거칠고 투박한 감촉과 총포의 화약냄새, 그리고 피와 약냄새가 뒤섞인, 그러면서도 어딘가 포근하고 안심되는,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느낌이었다. 방금 전에 보았던 무서울 정도로 분노하고 있던 사람의 손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 세라는 방금 전까지 분노하고 있었다. 스트라이커 유닛으로 한창 전투중인 사카모토와 페리느에게 탄창을 전해주겠다고 한 요시카에게, 그러한 요시카의 제안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는 해도 허락을 내린 사카모토에게, 그리고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재 상황에.
"일반인이야! 스트라이커 유닛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애라고! 그런 애보고 날라고?! 제정신이냐, 사카모토 소령!"
[그렇다면 어떡하란 말인가! 항공전력은 궤멸! 함대도 반파! 원군은 기약이 없어! 위치 셋 중 하나는 전투불능에 나머지 둘도 보급부족인데!]
"내 말 이해 못해?! 훈련은 고사하고 한 번도 날아본 적 없는 애라고! 미친 도박이라고!"
[녀석한테는 비행적성이 있어! 그냥 미친 도박이 아니다!]
"적성이고 나발이고 아무런 훈련도 못 받은 민간인을 전장에 투입하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잖아!"
[그럼 다른 수가 있나! 너도 스트라이커 유닛이 박살나서 못 오잖아! 어차피 지금 이 상황이 계속되면 전부 다 끝이라고!]
한바탕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아마도 이로쿼이─말로 욕지거리─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쏟아낸 세라는 복잡한 얼굴로 요시카에게 등에 맨 보급창에서 예비총과 탄창을 꺼내도록 했다. 그리고 요시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취로 간신히 고통을 억누르고 있을 몸을 이끌어 요시카의 스트라이커 유닛 착용을 도와주었다. 그 후 엘리베이터로 함께 갑판으로, 활주로로 올라가고 있는 게 지금이었다.
덜컹.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다시 올라온 갑판 위는 변함없이 처참했다. 조금 더 엉망진창이 된 것 같기도 하다. 가슴 속에 울컥하고 감정이 솟구쳤지만, 감상에 젖어들 여유는 없었다.
"알려준 요점만 기억하고 있으면 나는 건 쉬울 거야. 그리고 네우로이의 상태가 이상하면 무조건 실드를 펼쳐."
"넷!"
"그리고……."
"?"
고개를 갸우뚱하는 요시카를 보며 세라는 손목에 감고 있던 이로쿼이 장신구를 풀어 입가에 대고는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리고는 장신구를 요시카의 이마에 대고 다시 한 번 속삭임. 그게 끝남과 동시에 요시카는 청량한 무언가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무사히 돌아오렴."
"……네."
축복이라는 것만 겨우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요시카는 앞을 보고, 스트라이커 유닛에 집중했다.
첫 비행. 그것도 결코 안전하지 않은 전장에서의 비행.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설 생각도 없다.
"미야후지 요시카, 갑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
"엉망진창이네요."
전투가 끝나고, 아카기에 착륙한 페리느는 벗어던진 스트라이커 유닛을 등받이 삼아 기대어 앉아있는 세라에게 그렇게 말했다.
"기절하지 않았으니까 성장한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성장하는 건가요, 당신이란 사람은."
쓴웃음을 짓는 페리느를 보며 세라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새삼스러운 의문인데 말이지."
"뭔가요?"
"나 이렇게 죽을 뻔한 것만 벌써 세 번째이지 않아?"
"그렇군. 수송선 타고 올 때가 첫 번째고 야간초계 하다가 떨어진 게 두 번째고. 그리고 오늘로 세 번째인가."
"아, 소령님."
어느 새 다가온 사카모토가 페리느 대신 세라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리고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절했느냐 안 했느냐는 둘째치고서라도 확실히 성장했더군. 설마 그런 상황에서 너한테 그렇게 대차게 욕을 먹을 줄은 몰랐어."
"아, 뭐, 그때는……. 실례했습니다."
"아니. 계급만 따지면 내가 잘못한 거지."
"지휘권 넘겨드렸으니까 제가 항명한 꼴이잖습니까."
"그래도 옳은 말이기는 했다."
만약 미야후지가 날지 못했었다면 네 말대로 무가치한 희생이 되었겠지. 사카모토는 그렇게 덧붙였다. 거기에 원군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더욱더 위험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정말로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걸 알기에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그래서, 주인공은 어디로 갔나요?"
"자기 방에. 체력과 마력 모두 소진해서 기절해있지. 처음 실전에 투입됐을 때의 너랑 비슷하다 생각하지 않나?"
"전 피격당하고 처박혔다가 백의의 전투천사들한테 억지로 되살아난 기억 밖에 없습니다."
농담을 하는 듯한 세라의 말투에 페리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침몰할 뻔했던 수송선 견인했던 건 잊어버린 건가요?"
"그러다가 얻어맞았잖아. 결국 그 배 침몰했고."
굳이 따지자면 흑역사야. 세라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끊긴 대화 사이로 항모에 착륙하는 501부대원들의 스트라이커 유닛의 엔진음이 흘러들어왔다.
*****
"다음부터는 어딜 가든지간에 호위마녀 둘 정도 붙여서 다녀야겠는데."
나를 본 순간 울먹울먹하기 시작한 루키니를 품에 안고 달래고 있자니 셜리가 그렇게 말했다. 진짜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진짜 혼자 있기만 하면 무조건 부상이니 원. 오래 살겠나 이거. 이게 다 포 때문이야. 중기관총 쓰는 정도면 에이라랑 모의전 할 때처럼 중장갑 두르듯 실드 펼치고 살 수 있는데 이놈의 포 때문에 안되는 거야.
반쯤 농담삼아 그렇게 투덜거리다가 바르크호른 대위님이 당황해서 "그래도 대구경 화기의 화력지원이 전선을 유지하는데 효과적이며 일선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키는데 큰 효과가 있다."며 횡설수설하기에 그만두었다. 그러고보니 이 항공포병 개념 처음 주장한 게 대위님이었다고 했던가. 음, 나중에 나 포격 그만두고 중기관총 쓸 거에요 같은 얘기 꺼내면 어떨지 궁금해지는데. 놀려먹을 게 생기면 한 번 써먹어봐야지.
뭐, 그런 건 둘째치고 전투도 끝났겠다, 온몸에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싫다. 그냥 이대로 푹 자고 싶어. 마취제 효과가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왠만하면 효과 있을 때 뻗어버리는 게 제일인데. 아무리 요시카가 주인공 버프 받고 무사히 치료 끝내고 봉합했다고 해도 속 헤집고 터져나간 살 간신히 꿰메놓은 건 사실이고, 거기에 나도 마취제 효과 믿고 막 움직였잖아? 후폭풍이 무진장 걱정되는데 말이지.
"그냥 자. 환자인데 뭘 걱정해?"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왜? 무슨 일인데?"
말단이었다면 별다른 걱정 없이 뻗었겠지만, 아니 협정만 아니었더라도 마음 편히 뻗었을 것이다. 하지만 협정에 유럽 전선 전반에 걸친 화력 지원을 약속한 상태에서 내가 그냥 뻗어버리면 연합군 측에서 이로쿼이 애들에게 눈을 돌릴 것이다. 그것만큼은 안됀다. 그 꼴을 안 보기 위해서 이렇게 구르고 있는 건데.
그러니까 지금은 실제 상태가 어떻든지간에 스트라이커 유닛이 반파될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사나흘 정도 쉬면 회복될 정도의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 라고 해둬야 한다는 것이다. 강물을 모으는 이가 비밀리에 치유능력이 있는 이로쿼이 애들을 모아뒀다고 했으니까 실제로도 집중치료 받고 사나흘만 쉬면 되기는 하겠지만. 여튼 결론적으로 오늘 저녁 때까지는 멀쩡한 척하고 버텨야 한다는 것이다.
"……."
"왜?"
"아니, 그런 문제를 제외하고도 뭔가 엄청나게 고민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음, 그거 외에는 별다른……. 아."
"뭐야?"
"배고파."
그래. 배고프다. 무진장 배고파. 그러고보니까 네우로이 놈들 때문에 점심도 못 먹었잖아. 후소 함대는 지금 피해 복구중이라 정신 없는 상태고. 이런 젠장. 브리타니아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 것도 못 먹는 건가. 아, 안돼. 이럴 순 없어. 으으, 온몸에 힘이 빠진다…….
그때 바르크호른 대위님이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보급창에 전투식량 넣어두지 않았었나?"
……아.
*****
계속 활주로 구석에 앉아있기도 뭐해서 일단 요시카가 뻗어있는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른 곳은 네우로이의 공격에 박살나 있거나 엉망진창이 되어 있거나, 여튼 써먹을 수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원군으로 왔던 사람들은 돌아갔고, 스트라이커 유닛과 보급창은 일단 활주로 구석에 내버려두었다. 치우려고 해도 치울 곳이 없어서 암묵적으로 놔두기로 한 것이다.
가는 길에 의무실에서 붕대, 거즈, 소독약, 지혈제, 식염수, 그리고 진통제를 빌렸다. 묶어둔 붕대가 눈에 띄게 붉게 변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새 또 터진 건가. 이왕이면 의무병에게 치료를 받고 싶었지만 의무실은 치료라는 이름의 전투가 여전히 진행중이었기에 조용히 빠져나왔다. 나야 치료는 요시카가 해줬고 붕대만 갈면 되니까. ……아마도.
여튼 요시카의 방에 도착해서 우선 붕대를 갈았다. 뭔가 보는 것만으로도 처참한 상처였지만 꾹 참고 거즈와 식염수로 닦아내고, 지혈과 소독을 마치고 붕대를 감았다. 페리느가 도와주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었다. 마취제 만세. 근데 이거 효과 얼마나 가는 걸까. 새삼스럽게 심각한 부상이라는 걸 인식하고 나니까 후폭풍이 상당히 걱정되는데.
하여간에 가능한 소란스럽지 않게 보급창에서 챙겨온 전투식량인 리베리온제 통조림을 개봉했다. 참고로 소령님이 따주셨다. 내 손으로 따려고 했는데 왼손 경련이 가라앉지 않아서 말이지. 여튼 통조림에 대해 맛없느니 어쩌니 하는 얘기가 나도는 것 같지만 허기를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생각만큼 맛없는 물건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중에 먹으라고 한다면 안 먹을 것 같다.
"네 개나 먹어놓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요."
"어쩔 수 없잖아. 먹을 게 이거 뿐이니까."
"그렇다고해서 그걸 다 먹는다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만. 뭐, 네 식성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누가 들으면 식신인 줄 알겠습니다.
"반신이나 현인신 정도는 될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면 사도나 천사급일 것 같네요."
"……아무리 그래도 그런 소리 들으면 상처받지 말입니다."
이 사람들이 작정하고 나를 놀려먹네.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리 상처받지는 않는다. 고향 돌아가면 다들 나만큼 먹는데 뭘. 소인국에 온 걸리버 같다고 생각하면 될 거다. 그리고 예전에도 말한 것 같지만 이렇게 먹어야지 저 정신나간 포격도 가능하다고.
여튼, 편의상 요시카의 방이라고는 했지만 벽침대가 양쪽에 둘 씩 붙은 전형적인 수병의 방이다. 요시카가 누워있는 침대 쪽에 소령님이 앉았고, 반대쪽에 나와 페리느가 앉아있다. 그래서 잠들어있는 요시카의 모습이 훤히 보인다. 아버지 얼굴 보러 왔다가 무슨 고생인지.
것보다 그 박사님 돌아가시지 않았었나? 어찌된 겁니까?
"……늦게 도착한 편지……라 보고 있다."
사카모토 소령님은 잠시 뜸을 들인 후 그렇게 대답했다.
"나 역시 편지와 사진을 본 순간에는 박사님이 살아계시지 않을까 했었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니 그럴 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출항한 뒤였지."
"……편지에 쓰여진 주소는 이미 없어졌겠군요."
"흔적만 남아있겠지."
가볍지 않은 침묵이 감돌았다. 죽을 고생하고 갔는데 결국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한다면……. 이건 무슨 마법소녀 마녀되는 것도 아니고. 아니, 애초에 우리는 마녀잖아. 아니, 이게 아닌가. 내가 지금 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그래도 주인공이니까 어찌어찌 견뎌내지 않을까. 10대 초반인 애가 처참한 전장에서 의무병 노릇도 했고, 난생 처음 착용한 스트라이커 유닛으로 하늘을 날아 전투에 참여도 하고 했으면 정신력은 충분히 강한 축에 속하지 않나 싶은데. 근데 이런 애들이 심지라 볼 수 있는 부분이 꺾이면 또 맥없이 무너지는데…….
진짜 어찌되려나. 예정이라고 해야할지 뭐라고 해야할지 여튼 501에 들어오게 되려나, 아니면 다른 길을 선택하려나. 이전 세계 같았으면 고민할 것도 없이 후자라고 주장했겠지만, 그러기에는 이 세계 사람들 정신력이 너무 엄청나다. PTSD 같은 거 심각하게 나타나는 사람들을 거의 본 적이 없어. 네우로이에 과잉 분노하는 애들은 본 적 있지만 전투에 뛰어드는데 망설이는 애들은 거의 없다니. 뭐야 이거 무서워.
결국 브리타니아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뭐, 원래 전투 끝나고 체력 마력 다 쓴 위치들은 축 늘어져 있는 게 정상이니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일반부대의 지휘관들이 그렇게 늘어진 위치들을 가리키며, 아가씨들이 저렇게 싸우고 왔는데 니들은 뭐했냐고 까기도 한다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대화하기 좀 그런 분위기기는 했지.
그런 분위기에 전투의 피로가 몰려와 바다가 붉게 물들 때 즈음에는 거의 자기 직전이었지만 때마침 마취제의 효과가 풀리면서 통증이 몰려와 잠에서 깨어났다. 참으로 절묘한 알람이로구나, 젠장. 진통제를 먹었지만 이미 달아난 잠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 잘 된 일이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브리타니아에 도착하고, 그러면 연합군에 지원 물자를 전달해준 후소를 위한 환영회에 참석해야 하니까.
"흐으, 환영회 같은 귀찮은 일은 높으신 분들끼리 하라고 하고 그냥 푹 쉬고 배터지게 먹게만 해주면 충분한데……."
"그 높으신 분들 중 하나가 너다만."
"……내가 어쩌자고 전사장이 되어서어어어……."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생각하세요."
침대 위에서 몸부림치고 있자니 페리느가 그렇게 말했다. 두고보자 페리느. 언젠가 복수해줄 테다!
그렇게 투덜거리고 징징거리기는 했지만 결국 도착하자마자 잽싸게 움직였다. 환영회가 시작되기 전에 피투성이에 넝마조각이 된 옷을 갈아입고, 잠깐 집중치료 받고 진통제 맞은 후에 환영회 참가했다. 진통제를 맞아도 몸 상태 자체가 엉망이라 몸이 삐그덕거리는 걸 애써 괜찮다고 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특히 거기 어느 나라 출신인지 모를 올빽장군 양반. 엄살 피우고 있는 거 아니냐고? 나중에 댁 부대 지원 요청할 때 봅시다.
그렇게 환영회가 끝나고 다시 이로쿼이 귀빈실에 들어와 집중치료를 받았다. 이번에는 실밥을 뜯어내며 치료를 받았기에 반쯤 수술에 가까웠다. 그래도 이로쿼이 아이들 치유마법이 효과가 좋아서 별 통증 없이 무사히 끝났다.
"들소는 맨날 이렇게 다쳐서 오는 거야?"
"바보 들소. 느려터졌으니까 이렇게 다치는 거야."
"흔적이 남을 거야. 대체 뭘 했길래 살이 터져?"
"분명 느려서 못 피하고 다 얻어맞은 걸 거야. 느림보 들소~"
"또 혼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다가 맞은 거지?"
……치료받는 내내 애들한테 놀림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걸 아니까. 그 증거로 그렇게 계속 놀리면서도 다들 내 곁에서 안 떠나고 있지 않은가. 옆자리에 앉아서, 손을 맞잡고, 머리맡에 앉아서. 그리고 다들 이로쿼이식 복장이다. 그래서인지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라 왠지 마음이 놓였다. 그러니까 묵묵히 그 수많은 놀림과 투정을 듣고 있는 거다.
"──듣고 있어, 상냥한 들소?"
"응.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자면 안돼?"
"알았으…… 후암."
"아아! 자면 안된다니까!"
"알았어. 알았어."
환영회도 어찌어찌 넘겼고, 치료도 무사히 끝나서 모든 긴장이 풀려 단숨에 졸음이 몰려왔지만 참았다. 이제 또 언제볼 지 모를 아이들이다. 나 하나 때문에 이곳에 온 애들을 위해서 함께 있는 것 정도도 못해줄까.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들이 졸음에 이기지 못하고 잠들 때까지 계속 아이들의 상대를 해주었다.
마지막 아이까지 잠들어 침대에 뉘이고 모포를 덮어주고나니 새벽 1시 반이었다. 부대복귀는 실패했나. 뭐, 이미 이럴 줄 알고 연락해뒀으니까 문제는 없다. 정 안된다 싶으면 계급으로 밀어붙이면 된다. 최후의 패니까 함부로 써서는 안되지만. 그리 생각하며 준비되어 있던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몇 시간 전이었다면 시도도 못했을 동작이지만 이로쿼이 아이들 덕분에 다 나은 지금은 문제 없는 동작이다.
"……."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기절도 안 했고. 농담삼아 얘기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정말 성장한 것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적어도 다음에는 부상이 줄어든다는 얘기니까. 이왕이면 멀쩡히 돌아오는 게 제일이지만 쉽지 않겠지. 사카모토 소령님과 페리느도 안 그런 것 같지만 다들 조금씩 부상이 있었다. 살짝 긁힌 수준에 불과하지만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인 두 사람도 그런데 나는 말할 것도 없이 한참 멀었지.
그래도 다음 번에는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가 아니라 이제는 반드시 호위가 붙을 테니까 나아지겠지. 나아져야 한다. 그래서 이로쿼이 애들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연합군 수뇌부에 퍼져 나가야 한다. 그래서 이로쿼이 아이들의 희생을 줄여야 한다. 이기적인 욕심이라는 건 안다.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다.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았고, 의식이 사라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흔적만 남아있는 연구소를 봤을 때는 자신이 생각해봐도 그리 충격을 받지 않았다. 분명 마음 한구석에서 이미 이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계속된 부모자식간의 엇갈림이 또 생겼을 뿐이라고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무덤 비석에 새겨진 생전의 좌우명이자 유언이 된 말을, '그 힘을 모두를 지키기 위해'라는 말을 보게 된 순간,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라? 이상하네. 왜 자꾸 눈물이……."
"……미야후지."
"괘, 괜찮아요. 금방 멈출 테니까……."
하지만 말과는 달리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와의 빛바랜 추억들이 떠오르며 가슴이 메여오기까지 시작했다. 그런 요시카의 모습에 사카모토는 말했다. 우는 게 좋다고. 울어도 된다고. 고인을 기리기 위해. 슬픔을 흩어내고 내일을 향할 수 있도록.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나오고 절규가 뒤섞일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새 태양은 세상을 붉게 물들이며 천천히 어둠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슬슬 갈까."
"네."
사카모토의 말에 요시카는 우느라 눈가가 살짝 부어 있었지만 어딘가 후련한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카모토의 등 뒤를 따라가다 발걸음을 멈추고 등 뒤를 돌아보았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땅거미가 져가는 언덕 위로 아버지의 무덤이 보였다. 요시카는 잠시 그곳을 바라보았다.
사카모토는 그러한 요시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 미련이 남은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소중한 사람이라는 건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는 게 아니다. 하물며 부모자식간이라면 더더욱. 그렇기에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저기, 사카모토 씨."
"뭐니."
"……저를, 스트라이크 위치스에 넣어주세요."
"……뭐?"
상상을 초월하는 요청이었다. 군은 싫다고 하던 아이였는데 자청해서 넣어달라고 할 줄이야.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사카모토가 머뭇거리는 사이 요시카는 자신의 생각을 더 말했다.
"여기에 남아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제 힘을 쓰고 싶어요. 아카기에서는 그것 밖에 못했지만, 노력해서, 꼭……."
"미야후지……."
"분명 아버지도, 그걸 바라실 테니까요."
석양빛을 등 뒤로 받으며 요시카는 그렇게 말했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위해서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의 의지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던 그 사람처럼.
"……하, 하하! 좋아! 알겠다! 충분히 제 역할을 할 때까지 철저히 단련시켜주마!"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것이 소녀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대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 결정에 후회는 없었다. 그만큼 굳은 결의와 신념이 담겨 있었으니까.
그렇게 미야후지 요시카는 연합군 제501통합 전투항공단 스트라이크 위치스에 입대하였다.
*****
- 라디오노이즈 님께 일요일에 올리겠다 했었는데 결국 오늘도 타임아웃이군요. 에이왁스 그냥 넘기셔도 됩니다. ……나란 녀석은 어째서 이렇게 느린 걸까…….
- 5월 16일에 입원해서 5월 26일에 퇴원했습니다. 병명은 복막염. 네, 수술했습니다. 여기에는 우여곡절이 좀 많은데, 그냥 간단하게 설명하면 쓸데없는 근성으로 하루 뻐팅기다가 병원갔더니 맹장염, 그리고 병원에서 수술 늦게 해줘서 복막염이 되었다, 입니다. 인생은 그저 건강한 게 제일입니다. 미안하다 세라야. 맨날 굴려서. 그리고 병원식 정말 더럽게 맛없다. 내 묘사는 옳았어. 정말로. 되돌아오는 체력을 깎아먹는 수준이라니. 정말 끔찍해.
- 세라 행동이 병을 악화시키는 것 같죠? 맞습니다. 그리고 제가 저런 식으로 행동합니다. […] 이번에 맹장염 참다가 복막염 되었듯이 말이죠. 저와 세라의 다른 점이라면 세라는 마녀라서 우월한 저항능력과 신체능력이 있어서 저래도 괜찮다는 거고 전 그랬다가는 골병만 든다는 겁니다.
- 여튼 퇴원한지 한 달이 가까워져 가는데도 몸 상태는 영 좋지 않습니다. 배와 허리에 힘이 없어 몸이 굽어지고, 몸이 굽어지니 폐가 압박을 받아 숨을 크게 못 쉬고, 숨을 크게 못 쉬니 빨리 지치고……. 총체적 난국입니다. 일단 다음 편은 7월 중반 예정입니다만, 어찌될지 모르겠습니다.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28
포화를 쏟아붓는 위치가 있다는 소문이 부대에 돈 건 두어 달 전쯤부터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항공보병의 무장이 빈약하기 그지없다는 것은 갓 입대한 이등병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기갑보병들의 무장과 장갑에 비하면 이것도 무장이라고 한 건가 싶어 한숨이 절로 나오는 수준이다. 물론 항공보병은 입체적이고 압도적인 기동력과 속도가 있기에 그 모든 악조건을 무시할 수 있다.
여하튼 그렇기 때문에 급탄장치와 연결된 88mm포를 장착하고 하늘로 날아올라 공대공이든 공대지든 무지막지한 화력을 쏟아붓는 마녀 얘기에 일선 병사들은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88mm라니. 기갑보병들도 특수한 몇몇이나 장착하고 다니는 그걸 항공보병이? 그것도 급탄장치까지 장착해서?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얼마 후,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다들 환호하였고, 그 마녀가 추락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모두 절망하였으며, 다시 부활했다는 소식에 다시금 환호하였다.
몇몇 병사들은 그 사이에 있었던 이로쿼이와 리베리온의 전쟁이나 연합국 간의 치열했던 외교전을 생각하며 그 마녀에 대해 복잡한 심정을 느꼈지만, 다른 전우들을 위해 일부러 입을 열지 않았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배경이나 뒷이야기가 어찌되었든지간에 그 마녀가 한 번 뜨기만 하면 고착된 전선을 단숨에 밀어버리고, 네우로이화된 요새도 거침없이 파괴하는 최전방의 영웅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이번처럼 말이다.
"전원 2차 방호선까지 퇴가아아아아아악!!!!"
함포 사격으로 발트란드 해안가에 생성된 네우로이의 방어선을 박살내고 연합군 부대가 상륙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점령을 마침과 동시에 밀려들기 시작한 육상 네우로이 세력이 연합군을 포위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다분히 지능적이고 전술적인 동작이었다. 지금까지의 네우로이에게 전략전술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저 압도적인 숫자나 위력으로 밀어붙이는 전면전일 뿐이었기에 이러한 상황은 일선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수뇌부까지 당혹스럽게 하였다. 그나마 하늘에는 녀석들이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수뇌부가 개전 초에 그 마녀를 호출한 것은 상당히 괜찮은 판단이었다. 마치 재고 있었던 것처럼 전 병력이 2차 방어선에 모여듦과 동시에 항공지원이 도착했으니까.
[상냥한 들소 도착했습니다. 전장 돌입까지 20초. 포격지원위치를 지정해주십시오.]
"알겠다. 유도등 점화!"
"점화!" "점화!" "점화!"
지휘관의 명령에 병사들은 다이너마이트 도화선 기폭장치와 닮은 기계를 부서져라 내리눌렀다. 치지지직. 푸화아악. 후퇴하며 곳곳에 숨겨둔 유도등이 차례차례 붉은 섬광을 내뿜으며 네우로이 군세 사이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하늘에서도 인식할 수 있는 선명한 불길이었다. 인간 군대였다면 그 불꽃에 당황했을 테지만 녀석들은 그걸 무시하며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연합군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지 상관없었다. 이미 녀석들은 유효 범위 안에 들어와 있었으니까.
[목표 확인. 돌입합니다.]
"모두 엎드려! 포격이다아아아앗!!!!!"
무선이 끊김과 동시에 전방의 지휘관과 병사들은 모두 수류탄을 던진 것 마냥 모래 주머니 뒤나 참호 안에 엎드렸다. 방금 전까지 들려오던 총포소리가 사라진 자리로 철컥거리는 네우로이의 기동음과 대기를 태우는 빔 소리가 들어찼다. 고작해야 5, 6초 정도일까. 그러나 일선의 병사들에게는 억겁의 세월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기다리던 폭음이 울려퍼졌다.
쿠쾅─ 콰광── 콰과── 콰광── 콰광── 쿠콰콰콰과과과과과─────!!!!!!!!!!
88mm와 105mm 포탄이 대지에 작렬하는 굉음 사이로 타타타타, 하는 M2중기관총의 소음이 간간히 섞여들어왔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포격과 총격이었다. 하지만 결코 익숙하지 않은 연사 속도는 마치 함포사격을 실시간으로 경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방향성을 가진 포격에 휩쓸린 네우로이 군세는 비명 아닌 비명과 함께 마치 빗자루질에 쓸려가는 쓰레기처럼 전장 한켠으로 튕겨져 나갔다. 통쾌한 장면이었다. 그렇게 한 차례 포격이자 폭격인 공격이 지나가자, 네우로이들은 하늘의 마녀를 향해 미칠 듯이 빔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쯔즈즈즈── 쯔쯔즈즈즈────!!!!!
무시무시한 대공포화였지만 어느 새 곁에 붙은 호위 마녀 편대의 실드에 모든 공격은 산산히 흩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선회하여 돌아온 항공포병Airforce Artillery의 포구가 다시 한 번 불을 내뿜었다.
쿠쾅─ 콰광── 콰과── 콰광── 콰광── 쿠콰콰콰과과과과과─────!!!!!!!!!!
방금 전의 장면이 재생되었다. 대공포화는 농밀하다못해 벽처럼 하늘을 채우고 있었지만 선행한 편대의 실드로 공격을 막고 그 뒤에 바싹 붙은 포병의 공격에 그러한 대공포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마녀들만이 가능한 날렵하고 민첩한 저공비행 덕분에 대공포화의 위력을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도 컸다. 그렇게 세 번, 네 번, 여섯 번, 여덟 번, 마지막으로 열 두 번째 포격이 성공한 뒤에 남은 것은 쑥대밭이 된 전장과 거기에 널부러진 네우로이 군세의 모습이었다.
[호위 편대의 마력이 고갈되어 갑니다. 항공보병들은 후퇴하겠습니다.]
"……수고했다, 항공포병대Artillery Witches."
인사에 회답하듯 그 마녀─세라는 방어선을 따라 빙 돌며 네우로이에게 포탄을 쏟아부어준 후 보호 편대의 호위를 받으며 바다로, 그녀의 모기지인 501기지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병사들은 그러한 영웅의 뒷모습에 환호하다가 이러고서도 지면 남자가 아니라는 지휘관들의 말에 남은 네우로이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다.
전투가 끝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탈 것을 조종한다는 건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조종이 아니라 그냥 타고 다니는 것만 해도 몸이 뻐근해지는데 직접 움직여야 한다면 더할 수 밖에 없다.
거기에 시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더욱더 피곤해진다. 가장 간단한 자전거도 대여섯 시간 타고 나면 온 몸이 쑤셔온다. 뭐, 나야 마녀니까 자전거보다는 빗자루를 애용하지만 피곤하다는 건 변함이 없다. 특히나 나는 빗자루를 보드 타듯 서서 타니까 더 피곤하다.
여튼,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해 뜬 시간 내내 비행을 하고 와서 그렇다. 아침에는 발트랜드 서부 해안까지 날아가 포격지원을 하고 왔고, 점심 나절에 기지에 돌아와 밥 좀 먹으려고 하니 이번에는 히스파니아 북부에서 지원 요청이 왔다. 덕분에 빵과 우유만 챙겨 날아가는 도중에 먹고 포탄을 쏟아부은 후 다시 기지로 돌아왔더니 어느 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죽을 맛이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이런 하드한 비행이다. 게다가 내가 자초한 일이라 누구에게 뭐라고 하소연 할 수도 없고. 으휴…….
그렇게 생각하며 최근 들어 크지는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통증이 느껴지는 허리를 두드렸다. 으그그그그……. 있다가 목욕탕에 좀 푹 담그고 있어야지. 우선은 밥이다. 밥. 배고파. 고작 팔뚝만한 빵 한 덩이와 우유 한 통으로는 내 허기를 잠재울 수 없어!
"아, 돌아왔군요."
허기 때문에 조금은 난폭하게 보급창과 포를 고정시키고 스트라이커 유닛에서 빠져나와 식당으로 향하고 있자니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페리느였다. 그런데 영 언짢아보이는 얼굴이다. 뭐야, 나 없는 사이에 뭔가 일이라도 터진 거야?
"미야후지 요시카를 기억하고 계신가요?"
"기억하고 있지. 헤어진 게 이틀 전인데 벌써 잊어버렸을 리가 있나."
그리고 그 이틀 중 하루는 서류와 정부와 군부 고관들과 싸웠고, 다른 하루인 오늘은 네우로이와 싸우고 왔지. 내 인생은 투쟁의 연속인가. 의외로 충실한 자아성찰의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아가씨 이름이 왜 나온 거지?
"내일부로 여기에 임관이랍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사카모토 소령님께서 부대원들에게 인사시킬 예정이지요."
"……그래?"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빠르구나. 아니, 것보다 너무 빠른데. 행정절차는 어떻게 한 거지? 아무리 마녀가 귀중한 자원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이틀 만에 임관처리가 되는 건가? 나는 한 몇 개월간 하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국가 단위로 티격태격했던 것 같은데.
"그건 당신의 경우가 특이한 것이죠."
"그렇긴 하네. 근데 그거랑 네 심기가 언짢은 거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거야?"
"그건……."
내 물음에 페리느는 평소와는 달리 횡설수설 우물쭈물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걸 종합해본 결과,
"우리 귀한 소령님이 관심을 보이는 난생 처음보는 도둑고양이를 떼어내고 싶은데 명분이 없다는 거로구만. 아, 그 애 사역마가 개였으니까 도둑강아지가 되나."
"그, 그것과는 다르답니다! 완전히 달라요! 전 그저 공사다망하신 소령님께서 신병 관리까지 맡아 피곤하시지 않을까 싶어서,"
"그냥 솔직하게 인정하면 편한 것을."
"아니라니까요!"
공사다망의 극한에 다다른 내가 봤을 때 소령님께 신병 하나 붙은 것 쯤은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보다 조금 이상한데. 페리느의 말투가 신병─미야후지 요시카에 대해 그리 적대적이지 않게 느껴진다. 사랑하는 님의 관심을 빼앗아간 상대에 대한 말투치고는 너무 온화한데.
그걸 지적하자 페리느는 한숨을 폭 하니 내쉬며 말했다.
"개인적인 감정은 둘째치고, 부대에 도움이 되는 인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죠."
"하루 밖에 안 본 사람에 대한 평가치고는 후한데?"
"부상병들을 치료하던 능력, 난생 처음 스트라이커 유닛을 착용했음에도 무사히 날아올라 전투에 도움을 준 실력, 그리고 그 모든 행동을 거침없이 실천한 담력. ……하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니까요."
과연. 확실히 이래저래 도움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는 인재다.
"특히나 당신과는 상당히 궁합이 잘 맞지요. 그 아이에게서 전투능력을 빼더라도 실드와 치료실력이 있으니, 화력에 집중해서 방어력이 떨어지는 당신의 호위기가 된다면 금상첨화 아닌가요?"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이기적인 소리기는 하지만 그 아이가 호위기가 되어준다면 전장에 투입되더라도 조금은 안심될 것 같다.
뭐, 여튼 페리느가 왜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는 알았다.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하필이면 존경하는 사람의 관심을 받는 존재라 마냥 기뻐할 수 없다는 거다. 시덥잖은 고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10대에게는 정말 복잡한 고민이다. 뭐, 굳이 10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류의 고민은 어딜 가나 있는 법이긴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그 애가 성장해서 어엿한 마녀가 되면 소령님도 적당히 거리를 두실 테니까."
"……그럴까요?"
"그럴 거야. 그리고 지금은, 미야후지 박사님 건도 있을 테니 좀 더 관심을 두시는 거겠지."
늦게 도착한 편지. 아마도 폐허가 되어있었을 연구소. 그곳에서 두 사람이 무엇을 보고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결과 그 아이는 501부대에 입대했다. 그 중간에는 우리가 쓰는 스트라이커 유닛의 개발자인 미야후지 이치로 박사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개인적으로도, 공적으로도 은인인 사람의 딸이니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겠군요."
"고민할 거 없어. 지금 고민해봤자 그 사람 딱 눈 앞에 두면 생각했던 거랑은 전혀 다르게 흘러가니까. 인간관계는 그런 거야."
"후후, 마치 사회생활 오래 한 중년 같은 말투네요."
"후방에서 안전하게 입만 나불거리는 높으신 분들하고 만나다보면 이렇게 되더라고."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높으신 분들 중 하나인데요?"
"난 후방에서 안전하게 있지는 않잖아."
"그렇네요."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는 페리느의 얼굴에 방금 전과 같은 언짢은 분위기는 사라져 있었다.
*****
저녁 인사는 말 그대로 가벼운 인사뿐이었다. 통성명이랄 것도 없고 일단 다함께 모여 부대 앞에서 환영해주고 함께 숙소로 돌아오는 정도였으니까.
붙임성 좋은 셜리와 루키니, 그리고 에이라 쪽은 벌써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만 바르크호른 대위님은 제외. 왠지 모르게 굳은 얼굴로 미야후지 요시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아가씨는 또 왜 그러는 걸까.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자, 주목.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오늘부터 우리 501부대에서 함께하게 된 미야후지 요시카 중사입니다."
"미야후지 요시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차후 부대 안내는 같은 계급인 리네 양, 부탁드립니다."
"네."
미나 대장님의 말에 에이라 옆에 앉아있던 소녀가 대답했다. 리네트 비숍이라고 했던가. 내가 추락한 후에 들어와서 얘기해 본 적이 없어 어떤 성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루키니가 말하기를 얌전한 성격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슴이 크다고. 처음 보는 동성의 가슴에 거리낌없이 손을 대는 우리 꼬마 소위님을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맨 뒷자리 책상 위에서 졸고 있는 루키니를 보며 그런 고민을 하던 중 문득 떠올라 셜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리네트를 바라보았다. 셜리와 리네트. 리네트와 셜리. 흠…….
"……뿌리가 같아도 이파리는 전혀 다를 수 있구나."
"무슨 소리지?"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소령님의 질문을 얼버무리며 생각했다. 비교하기에는 표본이 부족하다. 파라웨이 랜드 아가씨도 한 사람 있어야 비교할만 해질 것 같은데.
에이. 시덥잖은 생각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앞에 선 미나 대장님과 요시카의 말에 집중했다.
"……필요없습니다."
"만일에 대비해서 가지고 있는 게 좋을 텐데……."
음? 뭐가 필요 없다고 한 거지? 딴짓하고 있느라 못 들었다.
"군의관이니까 쓸 일은 없을 거에요."
그런 말을 하며 요시카는 권총을 미나 대장님께 내밀었다. 군의관인가. 하긴 치료능력을 생각하면 적당한 위치긴 하다.
것보다 권총수령거부라니. 그냥 받아놓고 안 써도 될 텐데 굳이 거부하는 건 왜일까. 뭐, 하늘에서 네우로이를 권총으로 요격한다는 건 불가능하고, 군의관으로서 활동을 한다면 총을 쏠 일도 비교적 적을 테니 괜찮겠지.
……어, 그런데 잠깐. 생각해보니까 군의관이나 의무병은 무장금지 아니었나? 네우로이 상대하는데 그런 인간 사이의 조약은 통하지 않으니까 없었나? 아니, 어딘가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또 떠오른 건데.
"소령님."
"음?"
"권총 가지고 계세요?"
"있긴 하지. 쓰지는 않지만."
그것보다 검이 더 편하니까. 소령님은 그렇게 덧붙이셨다. 거야 소령님은 그러시겠죠. 네우로이도 일격에 베어내는 분이시니.
"페리느는?"
"가지고 있습니다만, 평소에는 쓸 일이 없으니 정식 예장을 입을 때만 소지하죠. 그것도 예장용 검을 차면 균형이 안맞아서 잘 안 가지고 다닌답니다."
그런가. 그게 아니더라도 페리느는 권총보다는 검이 어울린다. 이유는 없지만 이미지라는 게 그렇지. 평소 훈련도 사격과 검술을 겸하고 있고. 이러다 나중에 건카타 같은 무술 하나 창안하지 않을까.
"셜리. 혹시 권총…… 가지고 있었지."
"응. 콜트 M1911. 보여줘?"
"아니, 괜찮아."
루키니는 베레타였고, 미나 대장님과 바르크호른 대위님도 초기 형태지만 그래서 왠지 더 멋진 카를스란트제 권총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하르트만 중위님은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MP40 기관단총. 에이라랑 사냐도 쓰지는 않지만 각자 한 자루씩 있었고. 리네트도 지금 요시카에게 지급하는 걸 보아하니 있을 법하고. 뭐야 이거. 거의 다 가지고 있잖아. 난 없는데. 그러고보니까 여기 올 때 한 자루 쥐어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끝까지 안 줬네. 잊어버린 건가, 아니면 아예 줄 생각이 없었던 건가. 아버지께서 주신 토마호크가 있으니까 굳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들 받는 것 같은데 나만 없으니까 기분이 묘하다.
"하나 줄까?"
"그래도 돼?"
"루키니한테도 빌려주고 있으니까 괜찮겠지."
"……아니, 그건 좀 아니지."
"뭐 어때. 그래서. 줘?"
"음……. 아니. 없어도 돼."
셜리의 제안은 부드럽게 거절했다. 코트를 걸치고 입에는 성냥을 물고, 품에서 권총을 꺼내 범인에게 겨누는 동작 같은 거 해보고 싶기는 하지만, 있어봤자 쓸 데도 없고. 뭣보다 그, 뭐시기냐, 포랑 중기관총을 막 쏘다가 권총을 보면 왠지 그냥 없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라……. 너무 빈약해서 무장의 의미가 없어보이기도 하고……. 실제로도 토마호크 휘두르는 게 더 세기도 하고…….
"화력중독이구나."
"화력중독이네요."
"화력중독이로군."
"……부정은 못하겠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까지 된 걸까. 평범하게 밭 갈고 살던 꼬마가 권총은 빈약해서 무장의 의미가 없어보인다고 하다니. 시대에 희생된 거야.
그러는 사이 미나 대장님이 소개를 마쳤다. 다음은 개별적인 인사인가. 처음은 의외로 바르크호른 대위님이었다.
"게르트루트 바르크호른. 카를스란트 공군 대위다."
그것만 말하고는 업무가 있다며 굳은 얼굴로 곧바로 방을 나갔다. 어제부터 뭔 일이지 대체.
그 다음은 하르트만 중위님. 마찬가지로 이름과 계급만 말하고는 대위님을 쫓아갔다. 다른 점이라면 평소와 같은 얼굴에 잘 부탁한다는 말을 덧붙였다는 점일까. 여튼 대위님 심기가 불편한 이유를 알아와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그 다음은…….
"아, 우아……?!"
"어때?"
"음……. '노력상'."
언제 잠에서 깼는지 번개처럼 날아가 요시카의 가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건 분명 우리의 꼬마 소위님 루키니. 그리고 그 앞에서 악수하며 잘 먹지 않으면 크지 않는다며 웃고 있는 셜리. 이 사람들이 어제 만났을 때는 안 하길래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가 했더니 일부러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음- 세라랑 리네가 컸으니까-, 이제 슬슬 균형을 맞출 때라는 건가-."
"무슨 균형이냐."
"가슴의 균형이지. 미야후지는 가슴의 균형을 가져온 거야-."
"그런 균형 따위 필요없어."
포스도 아니고 가슴의 균형이 뭐야. 그리고 예언능력 가진 사람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런 말 하지 마라. 모르는 사람이면 홀라당 넘어가겠어.
내가 그렇게 가차없이 태클을 거는 동안 리네트는 얼굴을 붉히며 양팔로 가슴께를 가렸다. 그런다고해서 숨겨지는 게 아니다만. 되려 강조되는데.
그런 우리 둘의 모습에 에이라는 평소와 같은 오묘한 미소를 짓고는 반쯤 자고 있는 사냐를 부축해 요시카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사냐는 저녁시간 때 깨있을 때 소개시키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싶다만. 것보다 야간초계하고 와서 자고 있어야 할 애가 왜 여기 와 있는 거야?
"……희생된 거야. 사냐는."
"너 그러니까 쓸데없이 진지한 분위기로 뻥치지 말라니까."
분위기 잘 타는 루키니와 셜리도 괜히 진지한 표정으로 요시카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신병 놀리기냐. 여기서 밉보이면 전장에서 다쳤을 때 치료 못 받는다……고 말하고 싶지만 애초에 다치지도 않는 사람들이로군. 특히나 에이라는 그놈의 더러운 미래예지로 '실드? 장식이잖아?' 같은 소리를 진심으로 하는 에이스 오브 에이스고.
그러는 사이 페리느가 다가가 인사를 했고, 남은 건 리네트인가? 나나 소령님은 이미 얼굴 보고 통성명도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기지개나 켤겸 일어섰더니 요시카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얼레?
"저기, 상처는 괜찮으신가요?"
"아, 괜찮아. 그날 저녁에 또 치료 받았으니까."
그것도 이로쿼이 애들이 달라붙어서 마법으로 듬뿍 받았다. 전치 몇 주 단위가 나올 처참한 부상이 하루 만에 낫는 기적이란. 마법 만세.
여튼 걱정해줘서 고맙네. 그게 군의관의 임무겠지만서도.
"임무기도 하지만, 걱정되니까요. 지난 번처럼 무리하려고 하신다면 군의관으로서 닥터스톱을 내릴 거에요."
"어, 응……."
뭔가 박력 같은 게 느껴져서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원래 이런 아가씨였던가. 평소에는 좀 더 부드러운 성격이었던 것 같은데.
"문제는 대전사장님께서는 그걸 무시하고 가차없이 출격할 것 같다는 거지만 말이지."
"난 그렇게 자기희생적인 사람이 아니라 닥터스톱 받으면 얌전히 후방으로 빠질 건데."
"설득력 없는 설득이란 이런 거로군."
"아니, 그러니까……. 뭘 다들 납득하고 있는 거야."
셜리와 소령님의 연격에 뭐라 반박할 틈도 없이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아니, 난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닌데. 무진장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그렇게 내가 변명을 하거나 말거나 요시카는 소령님에게 오후에 훈련이 있다는 말을 들은 후, 리네트와 함께 기지를 둘러보러 갔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일을 처리하러 하나둘 방을 나섰다.
그럼 나도 슬슬 서류와 싸우러 가볼까. 오늘은 또 얼마나 쌓여있을지 모르겠구만.
"부우, 또 일이야?"
루키니가 뺨을 부풀리며 물었다. 그래, 일이란다. 그러고보니 루키니 너도 서류 업무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만.
"응. 있어. 한 장."
"……한 장?"
"응. 한 장."
새삼스럽게 세상이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루키니에게 서류를 잔뜩 준다 한들 제대로 안 할 게 뻔하니까 일부러 조금만 준 거겠지만 그래도 한 장이라니. 난 맨날 두꺼운 서류철과 싸우는데. 직위가 직위라지만서도 말이지.
뭐, 이런 거 투덜거려봤자 할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그냥 후딱 끝내고 조금이라도 더 쉬도록 하자.
"끝나고 놀자!"
"그래그래."
폴짝 뛰어올라 등에 매달린 루키니를 업으며 그리 대답했다. 그런데 과연 금방 끝나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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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반의 폭격 장면은 DOW2의 임페리얼 가드 글로벌 스킬인 바실리스크 폭격(http://www.youtube.com/watch?v=V3IJdfki4Ks)이나 로켓 런(http://www.youtube.com/watch?v=5N92zNiF7ZQ)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혹시 월드 오브 탱크를 하시는 분들이라면 미 구축 최고봉인 T30이 155mm 주포를 2초에 한 번 꼴로 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 세라는 좀 나은 편이지만 아스티랑 세이야는 어째 제 글보다 다른 분들 글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더군요. 미묘한 기분입니다 […].
- 조금만 차갑거나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복통이 일어나는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건강이 제일이에요.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29
"저기, 이것도?"
"네, 전사장님 거에요."
"……저것도?"
"음, 글쎄요. 하지만 아마 맞을 거에요. 부대에서 밭을 일구시는 분은 그분 뿐이니까요."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질문과 답변의 종지부를 찍는 말이었다. 그 대답에 요시카는 멍하니 길가의 조그만 텃밭을 바라보았다. 난생 처음보는 식물들이 줄지어 자라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무엇이 자라고 있느냐가 아니었다. 기지를 돌면서 그러한 텃밭을 벌써 열댓 개나 봤다는 게 중요했다.
"헤에, 굉장하다……."
아무리 작은 텃밭이라고 해도 열댓 개가 넘어가면 벌써 큰 밭 하나 정도는 된다. 그렇다면 아무리 빠르게 일해도 다 둘러보려면 한나절일텐데 대체 어느 틈에 이런 밭을 일군 걸까. 심지어 작물들 상태도 좋고 잡초도 얼마 없다. 어지간한 정성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서는 만들 수 없는 밭들이다.
"듣자하니 씨앗 심을 때 마력을 담아 심고, 주기적으로 비료랑 함께 마력을 넣어주신다나봐요. 그러면 며칠 동안 안 돌봐도 알아서 잘 자란다고."
"그렇구나. ……어, 근데 그러면 출격할 때 마력이 부족하지 않아?"
"그건 고유마법으로……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하신다 그래요."
방법이야 어찌되었든지간에 적어도 지금까지 세라가 마력이 부족해서 출격하지 못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도 묵인되는 것이리라. 다른 마녀들 같았으면 전투준비 미숙이라는 거창한 명목으로 군법위반이라며 처벌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다음 장소로 가죠."
"아, 응."
리네트의 말에 요시카는 그제서야 텃밭에서 시선을 떼고 브리타니아 소녀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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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정신노동이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농사를 지으면 작물을 얻고, 사냥을 하면 고기와 가죽을 얻는다. 그러나 정신활동은 끝까지 아무런 구체적인 결과물을 내놓지 못한다.
말이 좋아 정신활동이지 사실상 다른 사람들의 생산에 빌붙어 있을 뿐이지 않는가.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러니까 이런 쓸데없는 일들을 일일히 하나하나 정성들여 서류로 만들어 보내지 말라고.
어떻게 된 게 이로쿼이 애들이 보내오는 사소한 일상 편지보다 훨씬 더 사소한 일들이 보고서로 올라오는 거야. 뭐야 이거. 신참 소위 괴롭히는 고참병사들이냐. 이런 도장찍고 사인하는 것보다 텃밭 둘러보는 게 훨씬 낫겠다.
"후우……."
어찌되었든 기합을 넣어 절반 이상의 서류를 처리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오전 중에 이 정도 했으니까 이 기세로 가면 2, 3시 쯤이면 다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뭐, 일단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안건들이라서 그렇게 끝난 거다. 내 펜굴림으로 사람 목숨 수백 수천이 산화될지도 모를 그런 안건들이었다면 하나가지고서 하루 종일 씨름하고 있었겠지.
어차피 이로쿼이에서 실질적으로 전장에 나서는 건 나 하나 뿐이니까 그런 거 결정할 일은 없지만. 적어도 지금은 말이지.
덜컹. 끼익.
"점심 먹자-"
"……."
"왜-?"
"하다못해 노크 정도는 해줬으면 했어. 아니, 좀 해. 군사기밀을 다루는 중이었다고."
기지개 켜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내 대답에 에이라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높으신 분들의 서류는 대체적으로 쓸모없는 내용을 쓸데없이 중요한 척 꾸미는 법이야-. 기밀은 무슨-. 게다가 문제가 생길 것 같았으면 이렇게 열지도 않았다구-."
미래예지가 알려주는 위험회피의 범위는 피탄 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정치외교적인 부분도 포함하는 건가. 정말 굉장히 부럽다.
그래도 이왕이면 좀 지켜라. 매너잖아. 너 그렇게 벌컥벌컥 여는 버릇 들여놓으면 나중에 사냐가 옷 갈아입을 때 딱 마주치게 된다.
"……."
에이라가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 설마…….
"바보냐-. 그런 짓 할까-."
"우선 내 눈을 보고 대답하시지 에이라 일마타르 유틸라이넨 소위."
"……."
"설마 고유마법을 사용해 매번 사냐가 옷 갈아입을 때를 노려서 문을 여는 건 아니겠지."
"무무무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는-!?!"
"일단 사냐에게 옷 갈아입을 때는 꼭 문을 잠그라고 말해둬야지."
"그러니까 일부러 그런 짓 안 한다니까-!"
"사고로 몇 번인가는 있었겠지. 어디까지나 사고로."
"그건, 그……!"
그랬군. 그렇게 된 거였어.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아니라니까-!"
"뭐, 그렇겠지."
그런 건 모든 환상을 쳐부수는 오른손을 가진 소년이나 가능한 일이지. 그러니까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체엣, 계급 오르더니 쓸데없이 말기술만 늘어서는-……."
"너도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온갖 계산 다하는 아저씨들하고 투닥거리다보면 이런 기술 늘어난다."
"다시 말해서 너도 그런 아저씨가 되었다는 거로군-."
"……그렇게 말하니까 기분이 묘하구만."
어째 이겨도 이긴 것 같지가 않은 기분일세. 에이, 모르겠다. 밥이나 먹자. 먹는 동안은 아무 생각 안해도 되니까.
*****
하지만 식당에 도착하니 새로운 문제가 나를 반겨주었다.
"……."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식당에는 바르크호른 대위님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당히……. 뭐시냐. 우중충하다. 누가 보면 전우라도 잃고 돌아온 사람인 줄 알겠다.
에이라가 중간에 자기네 정비팀에게 불려가 얼떨결에 나 혼자인데, 이 무거운 분위기를 상대해야 하는 건가.
일단 식판에 점심메뉴를 담아와 그 앞에 앉았다. ……어라, 반응이 없다? 일단 말을 걸어 볼까.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
"대위님?"
"……어, 어. 무슨 일이지?"
그제서야 나를 알아차린 듯 바르크호른 대위님이 허둥대며 대답했다. 앞에는 점심식사를 놔두고, 손에는 식기를 든 체로.
어제 저녁부터 계속 저런 상태다. 굉장히 심각하고 딱딱한 얼굴로 우중충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고, 집중력도 떨어져 있다. 대체 뭐가 문제야.
한숨을 내쉬며 물어보았다.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냐고 여쭤봤었습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지금은 네가 상관이잖나. 그런 존칭은 내가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갑자가 말 놓기는 좀 미묘하지 말입니다. 공식 석상도 아니고.
게다가 그러한 규율과는 거의 담 쌓다시피한 이 부대서는 그냥 평소에 부르던대로 부르는 게 마음이 편하다구요. 하여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니라면 얼굴은 좀 펴고 다녀주세요."
"평소랑 다를 게 없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십니까."
"……."
대위님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캐묻고 싶어지는 얼굴일세그려. 자기 상태가 평소랑 다르다는 걸 인지는 하고 있다는 거다.
이런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대체적으로 사소한 일에 영감을 받거나 화려하게 폭발해서 주변까지 휘말려드는 식이라 걱정이다.
전자라면 다행이지만 후자라면 위험하다. 특히나 우리들 하는 일─네우로이와의 싸움을 생각하면 더더욱.
구체적으로 전투 중에 전장에서 사소한 실수를 해서 피떡이 되어 추락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러니까 뭐가 문제길래 그렇게 끙끙 앓고 있는 거냐구요."
"……아무 것도 아니다."
"사고 터져서 미나 대장님이 한숨 푹푹 내쉬면서 사건 경위서 쓰는 거 보고 싶으신 겁니까."
"……."
여전히 대답회피인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끈덕지게 달라붙어서 일단 원인이라도 알아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외교적으로나 지휘계통적으로 문제가 생기니까 그럴 수도 없고. 진퇴양난일세그려.
결국 대화는 그걸로 끝이 났고, 식사를 마친 대위님이 먼저 자리를 뜨셨다. 시종일관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 뒤로 교차하듯 하르트만 중위님이 나타나 자리에 앉았다. 한눈에 봐도 우울한 전우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과 함께 쓴웃음을 짓는 걸 보니, 바르크호른 대위님이 왜 저런 상태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물어볼까. 그런데 왠지 그러면 남의 사생활 캐묻는 것 같아서 좀 그렇다.
"미야후지 때문일 걸."
"……그 이름이 여기서 튀어나올 줄은 몰랐는데요."
정말로 의외였다. 임관한 지 만 하루도 안된 애 때문이라니.
곰곰히 생각해보면 대위님 상태가 뭔가 이상해진 게 어제 저녁이었고, 요시카가 온 것도 어제 저녁이니까 어느 정도 맞물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얼굴 본 지 하루 밖에 안 된 애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드시길래 저렇게 동네 사람들 다 알아볼 만큼 우중충한 분위기 흩뿌리고 다니는지 영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여동생이랑 똑같이 생겼거든. 미야후지. 깜짝 놀랐어."
대위님에게 여동생이 있었나? 처음 듣는 소리다. 왠지 상상이 잘 안 가는데. 요시카가 대위님 성격 같다고 하면 얼추 비슷하려나?
내 의문에 중위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위님의 친혈육인 크리스티아네 바르크호른은, 앞서 말했다시피 생긴 건 요시카와 판박이고 성격도 비슷하다고 한다. 현재는 카이저부르크 함락 당시에 대위님이 격추시킨 네우로이의 파편에 부상을 당하고 혼수상태에 빠져 지금도 입원중이라고.
그런 거였나. 그렇다면 트라우마나 PTSD를 가차없이 자극할 만도 하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걸 말씀해주셔도 괜찮습니까?"
"왜?"
"개인적인 가정사인데……."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면 안돼. 미나한테는 되지만."
미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중위님은 그렇게 덧붙이셨다.
아니, 비밀은 보통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면 안되는 우리들만의 비밀'이라는 이름 하에 퍼져가는 법인데요. 이것도 그런 식입니까.
그러자 중위님은 평소에는 보기 힘든, 동시에 하늘에서는 언제나 볼 수 있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로 말하면 안돼. 트루데가 말해도 된다고 할 때까지는."
"그럼 왜 제게……."
"다른 사람들한테 말할 거야?"
"……아니요."
"그러니까 말해준 거야."
"하아……."
뭐라 대답해야할지 몰라서 그냥 그렇게 대답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내뱉었다. 중위님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 믿고 있다는 대답을 건네주셨다.
아니, 믿으셔도 곤란하지 말입니다. 그건 그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적극적으로 관계 개선에 힘쓰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런 능력은 없지 말입니다?
"아니, 그렇게해서 좋은 결과를 내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지."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군요."
그런데도 제게 그리 말씀하시는 연유를 모르겠다는 게 문제입니다만.
"음, 감이야 감. 너라면 뭔가 해줄 것 같거든. 믿고 있다구용, 전사장★님~!"
한쪽 눈을 찡긋하고, 혀를 살짝 빼물고, 상대를 향해 손바닥을 보이며 중지와 약지를 접은 포즈로 말씀하시는 중위님. 귀여운 모습이기는 합니다만 앞에 나온 부탁이 너무 무거운데요. 그리고 그 자세는 식민선단의 아이돌이 하는 것과 왠지 묘하게 비슷하지 말입니다. ……간만에 뭔지 모를 전생의 기묘한 기억이 스쳐지나갔구만.
그리고, 글쎄요, 이런 사람 관계 조율하는 능력이 제게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자기 스스로도 건사 못해서 추락 세 번 하고 결국에는 전쟁 불씨까지 당긴 사람이지 말입니다.
하지만 중위님은 더 이상 내 의문에 대답하지 않고 단지 씩 웃으실 뿐이었다. 정말 뭐가 뭔지…….
에라 모르겠다. 밥이나 먹자.
*****
"음, 예정과는 조금 다르지만 모의전을 실시하겠다. 우선 나와 페리느를 한 편대로 잡고, 미야후지와 리네를 한 편대로 잡는다. 그리고 양팀이 협력하여 저 녀석에게서 격추판정을 얻어내면 된다."
"……네?"
"……어, 네?"
사카모토가 말한 '저 녀석'은 세라를 의미했다. 상상을 초월한 훈련 내용에 요시카와 리네트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미리 언질을 받은 듯한 페리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세라 또한 딱히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요시카와 리네트의 모습에 사카모토 대신 페리느가 설명에 나섰다.
"정상적인 훈련 방식이 아니라서 당황하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상당히 효율적인 훈련법이랍니다. 전사장님의 대규모 화력 투사와 포격 대신 사용하는 실드의 강도는 네우로이의 그것과 비교적 유사해요. 그래서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할 수 있답니다."
정규 훈련중이기 때문인지 페리느는 엄격하게 지위명으로 세라를 호칭했다.
"……언제 포격지원요청이 들어올지 모르니까 가능하면 쉴 수 있을 때 쉬고 싶었지 말입니다……."
어느 새 스트라이커 유닛을 착용한 세라가 다가와 한숨을 내쉬며 그리 말했다. 서류작업을 끝내고, 텃밭을 둘러보고, 루키니와 함께 그물침대에 누워 발끝으로 흔들흔들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다가 도와달라고 하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런 일인가. 아니,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마치 오랜 격무 끝에 간신히 맞이한 휴일에 쉬다가 어정쩡한 시간에 회사로 불려온 회사원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 세라의 모습에 사카모토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단기간에 실력을 상승시키려니 이게 제일인 것 같아서 말이야."
"뭐, 호위해주는 사람들이 강해지면 제 생존률이 올라가니 협력해야지요."
약간 맥이 빠진 듯한 목소리였지만 무장 상태는 그것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페인트탄이 장전되어 있는 것이라고는 해도 양손에 2연장 기관총을 하나씩 들고, 일반 유닛의 1.5배 정도 되는 크기의 스트라이커 유닛은 기관총을 장착하니 원래 목표가 수송용이라는 걸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위압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준비는 착실했다.
"……."
"……."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 이 부대 있는 사람들은 다들 하품하면서 뚫으니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요시카와 리네트의 모습에 세라는 어깨를 풀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페리느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농담도 잘 하시네요, 전사장님. 그 탄막을 하품하며 뚫는다뇨. 거친 숨과 함께겠죠."
"지금까지 모의전하면서 501 사람들 중에서 숨 거칠어진 사람 한 사람도 없었는데."
"하품한 사람도 없었답니다."
"에이라랑 하르트만 중위님이 수상해."
"물증이 없네요."
페리느에게 모두 반박당하자 세라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어차피 나는 느려터졌다고. 전투도 화력지원만 하지 1:1 도그파이팅 실력은 바닥이고. 그거야 그거. 게임에서 초보들이 게임 규칙을 잘 숙지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싸우는 NPC 같은 존재라고."
"파괴한 네우로이 수가 천 단위에 달하는 마녀가 초보용 NPC라고 말하는 건가."
"……네? 천이요?"
"몰랐나?"
사카모토는 그러한 세라의 모습에 되려 의외라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포격 지원 나갈 때마다 수십 수백 단위를 한 번에 박살내고 있잖나?"
"……어, 그게 제가 파괴한 숫자로 들어가는 거였나요?"
"당연하지. 네가 쏴서 네가 파괴했는데 그럼 누구 숫자로 들어갈까."
"……아니아니, 그래도 그건 제공권 완전히 장악하고 아군 호위기가 붙어주니까 가능한 거죠. 결국 공중전 실력은 그대로잖습니까. 걱정하지마. 난 네우로이 하나만 붙어도 격추당하는 최약체니까."
"이제는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게 일부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여튼."
어흠. 헛기침으로 시선을 모은 사카모토는 자신의 모의전용 기관총을 집어들며 말했다.
"중요한 건 네가 여기 있는 두 사람을 훈련시키기에 가장 적절한 인재라는 사실이지."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날아보면 알겠죠."
덜컥, 덜컥, 덜덜덜덜, 부우우우우웅──────………….
마도엔진에 시동이 걸리고, 마력이 돌고 있다는 증거인 가시화된 에테르─프로펠러가 회전한다. 양력과 속도를 얻은 스트라이커 유닛은 착용자의 몸을 앞으로, 그리고 하늘로 천천히 밀어올렸다.
[여기는 관제탑. 훈련 지휘관 사카모토 소령 이하 위치 다섯 명의 이륙 확인.]
"Copy. 자, 그럼 훈련 개시!"
Rog─.
흔히 볼 수 없는 브리타니아의 맑은 하늘 아래 소녀들의 복창이 울려퍼졌다.
*****
오후 일과를 모두 마치고 저녁 식사도 끝나고 나면 마녀들의 하루는 사실상 끝난 것과 다름이 없다.
물론 초계근무에 들어가는 나이트위치나 별도의 업무가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하늘에서, 혹은 책상 앞에서 각자의 업무를 계속하게 되지만, 평소 일선에 서는 대다수의 마녀들에게는 상관 없는 이야기이다. 어느 쪽이든지간에 네우로이 습격 알람이 들리면 출격해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지만.
여튼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그 하루 동안 쌓인 피로를 풀고 싶기 마련이기에, 대부분의 501부대원들은 목욕탕에 모이게 된다.
후소 해군에서 폐함 처리한 구축함의 엔진으로 만든 보일러가 내뿜는 열은 목욕탕에 충분한 양의 뜨거운 물을 상시 제공하고 있어 목욕탕은 설치 이래 모두에게 호평 일색이다.
그러한 목욕탕 한켠에 요시카는 머리만 가장자리에 걸쳐놓은 체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옆에는 리네트 역시 비슷한 형태로 늘어져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요시카는 전신을 푹 담그고 있었지만 리네트는 두터운 흉부장갑 일부가 수면 위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일까. 하지만 거기에 신경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완전히 뻗었네. 둘 다."
에이라와 함께 야간초계에 나가는 사냐를 마중하고 온 세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네."
"……네."
요시카와 리네트는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한 두 사람의 모습에 세라는 그 옆자리에 앉아 욕탕에 발을 담궜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 익숙해질 거야."
"전혀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아요……."
"처음에는 원래 다들 그런 법이지. 것보다 리네 너는 훈련소에서 이미 이 정도는 하고 왔잖아?"
"그렇게 두꺼운 탄막은 실전에서도 상대해본 적 없어요……."
리네트의 푸념 아닌 푸념에 세라는 허리까지 몸을 담그며 웃었다. 상식을 초월한 훈련의 내용과 강도 덕분에 세 사람 사이의 거리는 아침보다 훨씬 더 가까워져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부대 사람들은 너네들 빼고 다 그 두꺼운 탄막 뚫고 들어온단다. 특히 저기 에이라라던가."
"뭐- 안 맞으면 장땡이니까-."
평소에는 사우나에 가지만 간만에 목욕탕에 온 에이라가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으며 세라의 말에 대답했다. 그 모습에 세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얼른 모의전 사양 4연장 기관총이 나와야 저걸 상대하지."
"너 그건 반칙이다-? 지금 있는 2연장도 사기인데-."
"미래예지로 다 피하는 사람이 반칙을 논하다니."
"그래도 나는 총 하나만 가지고 싸운다고-. 너는 네 자루에 실드도 두껍잖아-. 새삼스럽게 반칙이구만-."
"그걸 뚫고 들어오는 넌 뭔데."
"평범한 에이스-."
"결국 에이스잖아."
투닥거리면서도 얼굴에서는 미소를 지우지 않는다. 마치 10대 소년들이 호감 섞인 악담을 주고받는 것처럼 기묘한 말싸움을 이어간다.
그러한 세라와 에이라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요시카의 눈에 세라의 옆모습이 보였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보자면 여기저기 상흔이 많은 몸이었다. 희미하게 경련하는 왼손도 일종의 상흔이리라.
옆구리의 흉터는 알고 있었다. 자기가 응급처치했던 것이니까. 그만큼 심한 상처였으니 아무리 치료마법을 받는다 한들 흉터가 남을 수 밖에 없으리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나쁜 일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다던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처참했다. 하지만 이로쿼이 아이들의 집중치료를 받아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괜찮다고 들었다. 그래도 자신의 손을 한 번 거친 환자(?)이기 때문일까. 신경 쓰였다.
그런 요시카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왜?"
"역시 흉터가 남았네요……."
"아, 이거. 괜찮아. 아무 문제 없느으으으그그그그극?!?!"
요시카의 대답에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옆구리를 바라본 세라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하다가, 어느 새 나타난 셜리에게 왼쪽 어깨를 잡히자마자 기괴한 비명을 내질렀다. 중간에 이를 악물게 되어 더욱더 소리는 더욱더 기괴해졌다.
"옆구리는 괜찮은데, 여기는 아직인가……."
"……셜리 너, 네 손힘으로 주무르면 어디든지 아프다고……. 주저앉았던 데를 그렇게 주무르냐……."
통증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조금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는 세라의 말에 셜리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힘 안 줬어. 혹시나해서 묻는데, 아직 다 안 나았는데 억지로 움직이는 건 아니지?"
"후유증 있을지 모르니까 시간날 때마다 치료 받으라는 얘기는 하던데."
"……왜 말 안했어?"
"음, 어쩌다보니까? 걱정 마. 이제는 언제나 호위받으며 마음 편히 다니니까 별로 아프지도 않아. 오히려 오래 날면 허리가, 으그그그…… 푸하, 아프더라고."
쭉 기지개를 켜며 그렇게 말한 세라는 그대로 어깨까지 푹 몸을 담갔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듯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으으으……."
"세라, 할머니 같아."
세상 모든 이들의 한숨을 대신 내쉬는 듯한 세라의 모습에 넓은 욕탕을 수영장처럼 헤엄치다 온 루키니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세라는 피식 웃으며 루키니를 향해 살랑살랑 손짓했다. 그러자 루키니는 둥지로 돌아온 새끼가 어미의 품을 향하듯 세라의 품에 폭 하니 안겨들었다.
"마력이 남아있었다면 치료마법 조금 써드렸을텐데……."
"아냐아냐. 소령님에게 훈련받고 마법을 쓰겠다니. 다음날 고생하는 정도로 안 끝난다 그거."
"그래도……. 앗,"
쏴, 하고 수면 위로 솟아난 세라의 손이 요시카의 이마 위에 툭 하고 떨어졌다. 또래에 비해 약간 거칠고 투박하지만 따스한 감촉이 요시카의 이마에 천천히 퍼져나갔다. 어쩐지 푸근하고 안심되는 손길에 자연스레 눈이 감긴다. 그러한 요시카의 귓가에 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리하지마. 오늘 못한 건 내일 잘하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면 돼."
"……네."
"그래. ……후으으……. 여기에 거품기인가, 그것도 있으면 좋겠다아……."
"사치의 극한이로구만-."
"아니, 모터랑 에어펌프만 있으면 의외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만들며언…… 나도 쓰게 해주라아……. 흐으으으어어……."
"세라 할머니~ 세라 할머니~ 니히히히~"
진심어린 걱정과 격려가 마음의 평온을 주고, 목욕탕에 도란도란 울려퍼지는 유쾌함 가득한 목소리가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준다.
요시카는 새삼스럽게 이곳에 있다는 게 기뻤다.
*****
- 문넷에서는 지금 마이레 님께서 프로젝트 팬티스(…)라는 것이 준비중입니다. 위치스 팬픽을 쓰시는 분들이 각자의 캐릭터를 모아 만담집을 써보는, 상당히 재밌는 프로젝트입니다만, 강제참가인 저로서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입니다. […]
- Crimsoneyes님께서 팬아트를 그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원래 이번 편은 그 답례로 지난 주말에 올릴 예정이었습니다만, 제 타자 속도는 예상을 아득히 초월한 속도였습니다. 이래서야 올해 안에 완결을 낼 수 있을 런지……. 것보다 2기에 진입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30
"……."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희미한 잡음도 들렸다.
"……라."
의식을 되찾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라……. 세……. ……세라……."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였다. 익숙한 목소리다. 루키니인가. 어제 같이 잤으니까 루키니일 가능성이 높긴 하다. 하지만 체내 시간으로 봤을 때 지금은 오밤중이거나 잘해봐야 이른 새벽이다. 잠꾸러기인 루키니가 일어나 있기에는 너무 이른데. 아니, 농사일로 단련되어 아침잠이 적은 나나 단련왕인 사카모토 소령님도 자고 있을 시간이다.
그럼 사냐인가. 새벽 출격을 해야할 때 가끔씩 나를 깨우고 가기도 한다. 자기도 졸릴 텐데 와주는 걸 보면 참 착한 아이다.
문제는 오늘 내가 새벽 출격 예정이 없다는 건데. 사냐일 가능성도 없어졌군. 그럼 셜리나 에이라? 하지만 어느 쪽이든지간에 새벽 출격 일정이 없으니 논외다.
반쯤 잠에 취한 머리로 누군지 추리하고 있자니 목소리의 주인이 내 어깨를 흔들기 시작했다. 해먹을 흔드는 것 같은 부드러운 손길. 그제서야 완전히 부활한 사고로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으음, 루키니이……. 왜애……."
"깼어?"
"……응……."
잠결에 쉰 목소리로 대답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스름은커녕 실낱같은 빛도 보이지 않았다. 2~3시 쯤 된 것 같은데. 새벽도 아닌 한밤중이다.
"화장실 가고 싶어?"
"으으응."
그런 건 아닌가보다. 그럼 뭣 때문에 깨서 날 깨운 걸까 고민하고 있자니 루키니가 내 왼팔을 꼬옥 끌어안으며 말했다.
"세라 팔 너무 심하게 떨어서."
그제서야 난 내 팔이 심상치않은 기세로 경련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또 무슨…….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계속해서 들려오는 희미한 잡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빗소리. 요란하게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많은 비가 내리는 소리였다. 아아, 그래서였나. 아니, 비가 오면 삭신이 쑤시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경련도 심해지던가.
주먹을 쥐락펴락하자 루키니가 더욱더 세게 내 팔을 끌어안았다.
"아파?"
어둠 속이었지만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 말에 난 오른팔로 루키니를 끌어안고 방향을 돌렸다. 왼팔은 등 뒤로 빼고 오른팔로 우리 꼬마 소위님을 끌어안았다.
"이제 괜찮아."
"정말?"
"응. 깨워줘서 고마워. 괜찮아졌어. 자자."
"니히히. 잘 자."
사실 경련은 멈추지 않았지만 그걸 굳이 애한테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게다가 경련만 할 뿐 아픈 건 아니니까 자는데 지장은 없다.
아침에는 고생할 것 같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루키니의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리 기분 좋은 아침은 아니었다.
비가 왔기 때문에 텃밭도 못 둘러봤고 해조류도 못 주웠다. 뭐, 그쪽은 반쯤 취미 같은 거니까 하루 이틀 안한다고 문제 생길 일은 없지만, 몸이 징징 울리고 쑤신다. 특히 왼팔의 경련은 누가 봐도 한눈에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심했다. 비 오는 날이면 상처가 쑤셔온다고 하고, 나도 엄청나게 쑤시고 울리는 어깨와 옆구리를 실시간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경련도 심해질 줄은 몰랐어.
큭, 악마를 봉인한 왼팔이 쑤셔온다! 진정해라 왼팔…….
그만두자. 장난칠 기분이 아니다. 진짜로 아프다.
왼팔도 왼팔이지만 어깨랑 옆구리는 숨도 크게 못 쉴 정도로 쑤신다. 태풍 올 때는 아주 죽어나겠네. 하하하하. ……살려줘.
마음 같아서는 수면제 하나 먹고 침대에 누워 비가 그칠 때까지 푹 자고 싶지만, 서류업무도 있고 저녁에는 출격 예정도 있으니 그럴 수는 없다. 땡땡이는 다른 이로쿼이 아이들을 전장으로 내모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안돼. 통증은 진통제로 무시할 수 있다. 세 알 정도면 오늘 하루는 충분히 버티겠지.
"근육 이완제라도 주사해 드릴까요? 부작용은 없어요. 아마도."
아침부터 진통제를 요구하는 내 모습을 보고 군의관인 앨리스는 그렇게 말했다. 왼팔의 경련을 보고 그런 얘기를 한 것 같은데, 마음은 고맙지만 아마도라는 단어가 무진장 신경쓰인다. 물론 부작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치유마법을 받으면 멀쩡해지겠지만, 그렇다고해서 내 몸으로 인체실험을 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잠시 후, 나는 차라리 주사를 맞는 게 나았으려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는 내가 더 심장 떨려서 안되겠어."
셜리가 내 식판을 들어주면서 한 말이었다. 나도 감각은 없는 주제 요동치는 왼팔을 보며 심란하던 차였다.
자리에 앉으며 식탁 위에 양손을 올렸다가 곧 왼팔을 내렸다. 식탁 위에 덜그럭거리는 팔을 올려둘 수는 없으니까 말이지.
"심하네."
"그러게."
"아파보이지는 않네?"
"진통제 먹었거든."
"빈 속에?"
"언제는 든든하게 먹고 먹었니."
"그것도 그렇군."
그런 대화를 나누며 셜리와 아침식사를 하고 아침조회를 위해 회의실로 향했다. 몸이 무겁다. 진통제로 통증을 속이고 있다고 해도 몸의 이상은 변함이 없기에 거기서 오는 위화감이 정신적인 피로까지 얹어준다. 결국 식당에서 회의실 잠깐 이동하는 동안 체력이 방전됐는지 의자에 앉아마자 앞으로 고꾸라졌다. 기껏 루키니가 부축해줬건만 이 모양인가.
그리고 고개를 돌린 순간 바르크호른 대위님과 눈이 마주쳤다.
상당히 할 말이 많은 듯한 눈빛이었다. 왜 그런지 예상은 가지만.
"……."
"……."
"……."
"……."
언제까지 입 다물고 계실 겁니까.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흐트러진 기강에 대해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하십시오."
"넌 나를 환자에게도 기강을 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방금 전까지 그렇게 생각하며 바라보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만.
"반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하지만 환자한테까지 그러지는 않는다, 프라우."
"등받이에 작대기를 붙이고 거기에 묶어서라도 똑바로 앉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노려보면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그걸, 크흠."
"역시나~"
하르트만 중위님의 놀림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리는 바르크호른 대위님. 간만에 언니야의 농담기 있는 목소리를 들었다. 요시카와 리네가 들어오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야.
"옛 상처가 쑤셔서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만, 네 앞에서는 그런 소리도 못하겠군."
"어서 아프다고 하세요. 상급자 둘이 아파죽겠다고 하면 일과가 사라질지도 몰라요. 아픈 거 참지 마세요. 몸에 좋을 거 하나도 없어요."
"아프지는 않잖나?"
"피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 궁시렁에 사카모토 소령님은 피식 웃기만 하실 뿐이었다. 그러시깁니까.
그나마 미나 대장님이 회의를 질질 끄는 성격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부대원들이 모두 모이고 미나 대장까지 들어오자 허리에 힘을 주고 똑바로 앉았지만, 널부러져있던 내 모습을 봤는지 미나 대장님은 쓴웃음을 짓고는 회의를 간단하게 끝냈다. 별다른 안건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오늘 회의는 제법 빨리 끝난 축에 속했다. 정말 좋은 상사님이라니까. 계급만 따지면 지금은 내가 더 높기는 하지만서도.
여튼 나는 곧장 집무실로 들어와 서류업무를 시작했다. 진지하게 검토해야할 서류들이 없은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는 굉장히 쓰잘데기 없는 내용들을 엄청나게 심각한 척 포장한 것들 뿐이었다. 특히 리베리온과 브리타니아 쪽에서 보내온 서류가 그렇다. 전자는 나 때문에 이래저래 피해가 많았으니까 엿 좀 먹어보라는 심정이 이해는 가지만 후자는 대체 무슨 심보인 걸까. 어느 쪽이든지간에 짜증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늘상 이런 식이기는 하지만 날이 날이라서 그런지 오늘 따라 짜증난다. 으으…….
"무시하고 넘어갈 수 밖에 없어요."
미나 대장님과 사카모토 소령님,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하게 된 티타임에 내가 서류업무로 투덜거리자 미나 대장님이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군이라는 조직 내에서 비교적 유지비가 적게 들어가면서도 실적은 타 부대에 비해 많죠. 시기와 질투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어요."
"그리고 그 시기와 질투를 시시한 서류로 표출하는 거군요."
"힘을 합쳐도 부족할 판에 대체 무슨 짓인지……."
소령님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그렇게 말씀하셨다. 동감입니다. 아니, 도와주기 싫으면 방해라도 하지 말던가. 이쪽은 격일출격이라고는 하지만 평균을 내면 거의 매일 출격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쉬는 날이면 좀 쉬게 해달란 말이야. 중대 소대 단위에서 끝낼 수 있는 일을 내 선까지 끌어오지 말라고.
"한 달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에요."
"브리타니아 쪽은 몰라도 리베리온 쪽은 그리 쉽게 멈출 것 같지 않습니다만."
"한 주가 지나면 질리기 시작할테고, 2주가 지나면 슬슬 잊어버리고, 3주 정도가 되면 그네들도 바빠서 장난칠 겨를이 없죠. 그렇게 한 달이면 그런 일은 대부분 없어져요."
"상당히 구체적으로 알고 계시네요."
"당해봤으니까 말이지."
찻잔을 입에 댄 미나 대장님 대신 사카모토 소령님이 대답해주셨다. 그런가. 하긴 501도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있으니 그걸 아니꼽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데 그걸 질투하는 꼬라지하고는. 외계인이 쳐들어와도 실적이니 어쩌니 하는 걸로 갈라져서 싸울 인간들 같으니라고.
……음, 몸이 영 안 좋다보니 투덜거림이 늘어난 것 같다. 징징대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여튼 대장님 말씀을 듣고 나니 욱해서 시덥잖은 걸로 서류업무를 늘리는 부대들 닦달하려고 했던 걸 참기로 했다. 조금만 참자. 괜히 들쑤셨다가 역효과가 나면 힘들어지는 건 나일 테니까.
그리 생각하며 나는 찻잔을 기울여 남아있던 차를 모두 들이켰다.
*****
22연대 예하 특수전마녀단Commando Witches의 활동은 일반적인 마녀들과는 조금 다르다. 직접적인 전투 활동보다는 지속적인 정찰 활동으로 네우로이의 활동을 감시하다가 번개 같은 급습작전으로 전선을 뒤흔들거나 후방을 교란하여 정규부대의 활동을 돕는 등의 활동이 주된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처럼 제법 요란하게 비가 내리는 날에도 후드 달린 판초 하나만으로 구름 아래서 갈리아 지방의 네우로이 둥지에 대한 정찰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특수전마녀단의 임무는 대체적으로 10대 소녀가 수행하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한 것들이 태반이지만, 소녀들은 언제나 강철같은 의지로 이 임무를 수행해왔다. 그것은 현재 브리타니아 방위전을 맡고 있는 연합군 501부대에 브리타니아 인이 없어─지금은 한 명 생겼지만─ 조국방위를 타국에 맡기고 있다는 불쾌함과 무력감을 떨쳐내기 위함이기도 했고, 정규군은 할 수 없는 임무를 수행한다는 자부심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도 22연대 예하 특수전마녀단 소속 캘런 레이Karen Ray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갈리아 지역을 주시하며 북해 공역을 정찰중이었다. 특수부대원들에게 우선적으로 지급된 최신 방수처리가 된 판초와 고급 항공 재킷 덕분에 꽤 오랜 시간 빗속을 돌아다녔음에도 체온유지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그래도 슬슬 어깨부터 시작해서 싸늘한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기에 캘런은 슬쩍 시계를 봤다. 교대 10분 전. 평소 같았으면 태양의 위치를 보고 시간을 추측했을 테지만 오늘은 비 때문에 불가능했다. 구름 위로 올라가면 해결될 문제기는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정찰행로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어찌되었든 교대까지는 남은 시간은 10분이었다. 캘런의 마음 속으로 뜨거운 핫초코와 푹신한 침대가 기다리고 있을 기지가 떠올랐다. 한동안 늘어지게 쉴 수 있으리라. 반나절 정도는 느긋하게 퍼질러 자야지. 특수전마녀단은 남들과는 다른 힘든 임무를 하는 만큼 평소의 군기는 엉망이라고 해도 좋기에 그 정도는 약과에 불과하다. 그게 아니더라도 마력을 모두 써버린 마녀가 할 수 있는 건 마력이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것 밖에 없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임무에 있어 불성실함은 없었다. 그랬기에 캘런은 네우로이 둥지의 이변을 재빠르게 알아차렸다. 모태라 할 수 있는 검은 구름 속에서 튀어나온 커다란 물체가 튀어나왔다. 차가운 금속질의 외형만으로도 그것의 존재는 명확해졌다. 네우로이. 인류의 숙적.
하필이면 교대까지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발견이라니. 따끈한 핫초코와 늘어지는 늦잠은 며칠 뒤로 미뤄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캘런은 인컴을 작동시켰다.
"알파 6 보고. 응답바란다."
[──삑. 메인 센터 온라인. 보고하라 알파 6.]
"갈리아 둥지에서 네우로이가 생성되었다. L. Q. Q."
[알겠다. 알파 6는 분류코드가 확정될 때까지 정찰임무 속행하도록.]
네우로이의 분류코드는 네우로이를 보자마자 붙이는 게 아니다. 크기는 곧바로 확인할 수 있지만 녀석의 크기와 단일종인지 복수종인지는 움직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지속적인 관찰로 알아내는 방법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렇기에 캘런은 뒤의 두 문자는 알 수 없음(Question)의 Q를 붙인 것이다.
"길게 활동할 수 없다. 앞으로 40분 후면 모든 마력이 고갈된다. 기지까지 돌아갈 마력을 생각하면 아슬아슬하다."
[알겠다. 곧 교대조를 투입하겠다.]
"Rog."
통신을 종료함과 동시에 캘런은 네우로이의 빔 사정거리를 생각해 언제든 실드를 펼칠 수 있도록 준비하며 망원경을 꺼내 동북동 방향으로 기수─라 추측되는 부위─를 향하고 있는 네우로이를 바라보았다. 크기는 L(대형종)이었다. 형태는 대리석 비석을 뉘여놓은 듯했고, 색깔은 전형적인 네우로이 특유의 불길한 검은색이었다. 전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속도는 알 수 없었지만 크기로 봐서는 그리 빠른 속도를 낼 것 같지는 않았다. 장갑으로 돌파하는 중重전차 타입인가. 아니면 저런 형태로도 빠르게 움직이는 경전차 타입인가. 아직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추측은 똑같은 형태의 네우로이가 하나 더 나오면서 모두 빗나갔다. 아니 하나가 아니었다.
"……알파 6 보고."
[보고하라 알파 6.]
"L. Q. Q. 4체 더 출현. 움직이지는 않고 있지만 예상 항로는 동북동에, Holy Shit……."
[무슨 일인가 알파 6. 응답하라 알파 6.]
캘런은 특수전마녀단 배속되어 활동한 3년 간, 정규군은 경험할 수 없는 제법 다양한 상황들과 조우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 충격적인 광경은 더는 없으리라 확신했다.
"……합체했다. L. Q. Q. 5체 합체. 이건, 샌드위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옆에서 보면 단순한 직사각형이지만 앞에서 보면 로마 숫자 3처럼 보였다. L(대형종) 다섯이 합체했으니 단순 계산으로도 크기는 H(거대종)다. 게다가 입체적으로 합체했기 때문인지 더욱더 커보였다. 거기에…….
"What the……."
[무슨 일인가 알파 6.]
"……알파 6 보고."
[한참 뜸을 들이는 걸 보니 좋은 정보는 아닌가보군.]
"나도 이 이상 나쁜 정보를 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너무도 믿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농담을 주고받은 캘런은 망원경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네우로이 분류코드 확인. H. S. NL. 예측경로는 동북동. 브리타니아 방면. 다시 한 번 말한다. H. S. NL. 예측경로는 동북동. 브리타니아 방면. 간만에 엄청난 녀석과 싸워야 할 것 같다."
길이가 200m를 넘을 듯한 거체는 매우 느리게, 하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로 천천하 하늘을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거대종 내부에서 튀어나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Numberless 사람 몸통만한 크기의 소형종 네우로이들이가 마치 왕을 지키는 병사들처럼 그 주변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
"측우기 대용으로 써도 될 것 같군……."
"뭔 소리야-?"
에이라의 물음에 아침 때보다 덜 경련하는 왼팔을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경련이 가라앉고 있다고."
"할머니 같구만-."
"알고 있어."
뼈에 사무치도록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방풍 재킷 목단추를 채웠다. 마법으로 보호한다고 해도 그쳐가고 있다고 해도 비가 내리는 브리타니아 밤하늘을 뚫고 칼바람이 몰아치는 북해 상공을 통과해 발트란드까지 가려면 보온장비를 꼼꼼히 챙겨야 한다. 뭐, 고작 재킷 하나만 걸쳐도 어지간한 보온효과를 얻는 걸 보면 확실히 위치가 사기긴 하다.
"출격해도 괜찮은거야-? 아직도 꿈틀거리는데-."
"남의 팔 가지고 꿈틀거린다고 하지 마라."
"사실이잖아-?"
현재시간은 브리타니아 표준시로 2150. 앞으로 10분 후면 발트란드로 출격이다. 최근 들어 북유럽 쪽으로 많이 가는 것 같은데.
뭐, 일단 그쪽이 남쪽에서 올라오는 네우로이를 효과적으로 격퇴하고 역공을 가해 밀어붙이고 있다고 하니 힘을 실어주는 건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거기까지 날아가서 지원해야하는 내 입장에서는 피곤하다고. 게다가 은근히 가까운 곳이라 당일치기 작전이 많아서 더 힘들다. 새벽에 가서 하루 종일 날다가 저녁 늦게 오거나, 오밤 중에 출발해서 다음날 저녁 때 돌아오고 하면 엄청 피곤하다고.
"괜찮으세요?"
"응. 뭐, 비가 완전히 그치면 괜찮아질 거야."
사냐가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물어보기에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발트란드 도착할 때쯤 되면 괜찮아지겠지.
"눈이 안 내리길 빌어야지-."
"왠 눈?"
"그거, 비 뿐만이 아니라 눈 내릴 때도 쑤실걸? 우리 동네 할머니들이 그랬거든. 그러니까 작전지에 눈 내리고 있으면 또 쑤실 걸 아마-.
"악담을 해라 그냥."
"조심하라는 거지-."
조금은 악질적인 격려에 콧방귀를 뀌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2200. 출발시간이다.
"출발한다."
"Yes, Ma'am."
"Copy-"
스트라이커 유닛에 마력을 흘려넣는다. 부우웅── 마도엔진이 기동하면서 그 증거인 가시화된 에테르─프로펠러가 회전한다. 그 상태로 조금 더 마력을 주입하고 속도를 적재용량으로 변환시킨다. 준비완료.
덜컹. 고정대가 열리며 스트라이커 유닛이 자유를 되찾는다.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여 활주로로 향한다.
북해를 건널 때까지 사나와 에이라의 호위를 받고, 그 다음부터는 해당 지역 마녀들의 호위를 받아서 작전지역까지 간다. 기체가 전투기가 아닌 수송기 기반이라 항속거리가 몇 배는 되고, 등가교환으로 마력을 지속적으로 충전할 수 있기에 가능한 비행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엄청 피곤하다. 위치 전용병원의 간호장교 언니야가 보면 늙어서 고생하려고 발악을 하는구나, 라고 말하지 않을까. 하지만 어쩌겠어. 내 업보인데.
그런 생각에 작은 한숨을 내쉬고, 오후에 진통제랑 수면제 먹고 낮잠 푹 잤으니까 졸지 않기를 바라면서 활주로를 날아올랐다. 그리고 30분 후,
[여기는 관제탑. 응답하세요 상냥한 들소. 여기는 관제탑. 응답하세요.]
"여기는 상냥한 들소. 말씀하십시오."
[발트란드 지원작전은 취소되었습니다. 기지로 귀환하세요. 반복합니다. 발트란드 지원작전은 취소되었습니다. 기지로 귀환하세요.]
"……알겠습니다."
작전이 취소되었다는 미나 대장님의 무전이 날아들었다. 음, 이번 작전은 큰 규모라서 어지간하면 작전이 취소될 일은 없을 텐데. 영 불안한데.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일단 내 지휘권은 대장님이 가지고 계시니까 명령에 따라 착륙하는 건 변함이 없다. 하지만 왜 그런지 물어볼 권한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 일단은 명목상이기는 해도 계급은 내가 더 위니까.
여튼 그런 내 물음에 미나 대장님은 약간 굳은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갈리아 제1네우로이 둥지에서 생성된 네우로이 거대종이 시속 13km로 둥복동 방면으로 이동중입니다.]
"어, 거대종이라고는해도 그 녀석 하나 때문에 이번 작전을 취소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거대종, 그러니까 200m 이상이라고 해도 하나 뿐이라면 501부대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작전을 중지시키면서까지 나를 소환할 필요가 있나? 그러한 의문은 이어진 미나 대장님의 대답에 해결되었다.
[접근중인 네우로이 식별코드는 H. S. NL. 입니다.]
……위대한 어머니시여.
*****
- 전투폭격기의 인유님 생일 축전으로 당일 연성. 19일에는 키루찌 님 생일 축전으로 세이야 4화 연성. 이틀 만에 2화라니. 시험기간인데……. 여튼 인유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 이미 다들 알고 계시리라 믿고 있습니다만, 전 시대 고증이나 무장 고증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습니다. 애초에 그런 걸 신경쓰면 건쉽인 세라의 위치라던가, 88mm, 105mm 2연장 M2 중기관총 같은 걸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는 무장부터 이미 걸릴 게 산더미라…….
- 위치스 팬픽은 대체적으로 둘로 나뉘어집니다. 훈훈하던가, 암울하던가 […] 쓰시는 분들 자유기는 합니다만, 암울한 전개를 보고 있으면 위가 아파져서 결국 안 보게 되더군요. 그러니까 위치스에 꿈과 희망을 줍시다 여러분. 하는 김에 모에라던가 불끈불끈하는 것도 <-
- 심정은 이해하지만 여기서 아스티나 세이야를 찾지는 말아주세요. 아, 조아라에는 포병만 올리던가…….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31
"최소한 마녀부대 셋은 집결해야 무사히 대적할 수 있을 걸─."
기지에 착륙하자마자 회의실로 향하는 내게 에이라가 야간초계임무에 나가며 한 말이다. 참고로 사냐는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꾸벅 인사했다. 에이라 너도 이런 귀염성을 좀 가져봐라. 그리 생각하며 나는 사냐의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추며 잘 다녀오라고 축복해줬다. 에이라가 옆에서 얼굴을 붉히며 뭐라고 했지만 안 들린다~ 안 들린다~ 묘하게 북적이는 격납고가 시끄러워서 안 들린다~
여튼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본다. 대형종Large 다섯이 합체해서 거대종Huge이 됐다고 했으니 그 정도 병력은 있어야 대항할 수 있겠지. 솔직히 다섯 부대 정도 모여주는게 제일이지만 아무래도 그건 무리려나. 지난 번에 대형종 셋, 중소형종 일곱, 소형종 스물과 싸울 때 모인 게 서른 정도 였으니까. 거기에 적도 추가되고 우리도 열 명 정도 더 추가됬었으니 최종적으로는 40명. 마녀부대식 기준으로 따지면 네 부대 정도로 모인 건가.
다른 부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에이스 오브 에이스들만 있는 501부대라면 단순한 거대종 하나 정도는 무리 없이 잡아낼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크고H. 느리며S. 무수히 많은 소형종NL을 끌고 다니는 녀석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쏴도 쏴도 줄지 않는 소형종 무리로 탄약소모도를 증가시켜서 전투난이도를 대폭 올려버리니까. 실제로도 몇 번인가 마주칠 때마다 아주 힙겹게 쓰러뜨렸다고 들었다. 두 번 정도는 나도 전투에 참가했었고.
……애초에 그것 때문에 내가 이 부대에 왔었지.
별일 없었다면, 그러니까 내가 추락한다거나 전사장 자리에 오른다거나 하는 일들이 없었다면 그냥 평범한 보급병으로 멀찍이서 탄약창만 들쳐매고 대기타고만 있었겠지만, 이제는 멀찍이 있기는 하되 포격 지원도 해야한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처음부터 88mm가 기본무장이었잖아?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돌아왔습니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그렇게 말하며 미나 대장님 집무실 문을 열자, 탁자 위에 펼쳐진 커다란 전략지도와 그 곁에 선 미나 대장님과 사카모토 소령님의 모습이 보였다. 지도는 이미 온갖 기호와 선들로 화려했다. 작전구성은 거의 다 끝난 것 같았다.
"아, 왔군."
"어서와요."
"정해진 게 있나요?"
"거의 다 정해졌지."
"출격할 부대는요? 우리만 가는 건 아니겠죠?"
"501, 연합군 부대 하나, 22연대. 갈리아 부대 하나."
"22연대라면 특수전마녀단?"
"아니오. 특수전마녀단은 현재 네우로이 진격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어요. 함께 작전에 투입되는 건 22연대 휘하 다른 마녀부대입니다."
아무리 특수전마녀단이라고는 하지만 그네들도 열 명 언저리 아니었던가? 그야 물론 지금까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전쟁의 향방을 뒤집었던 아가씨들이니까 이번에도 뭔가 했겠지만서도, 도대체 어떻게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다는 거야?
"지속적으로 대구경 빔 사격을 유도해서 진격을 막고 있다고 하더군요."
"대구경 빔?"
"본체가 최소 직경 600mm 정도의 빔을 쏜다더군."
"……그런 걸 어떻게 피해요?"
피하고 뭐고 그 정도 크기면 스플래시만으로도 어지간한 마녀는 때려잡겠는데.
"조준시 예광이라 할 수 있는 작은 빔이 나오고 그 뒤에 대구경 빔이 쏟아진다더군. 일부러 느리게 움직여서 예광에 가까이 다가간 후, 예광이 밝게 빛나면서 대구경 빔이 발사되려고 하는 순간에 가속해서 도망친다는데, 익숙해지면 피하기 쉽다고 하더군."
"그게 특수전마녀단이 한 말이라고 하면 안 믿는 게 좋을 걸요."
"그렇긴 하겠지만 그 녀석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니까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화력을 위해 방어력과 기동력을 포기한 제게는 굉장히 걱정스러운데요?!"
요시카의 실드로도 그건 못 막을 것 같은데. 설령 막더라도 착탄압력에 km 단위로 밀려난다던가 마력이 단숨에 고갈된다거나 할 것 같다. 600mm라고? 60cm라는 거잖아? 완전히 열차포 구경이잖아? 네우로이 놈들 카를스란트에서 열차포 보고 감명받아서 저런 식으로 튀어나오는 건 아니겠지? 항모형인데다가 대구경 빔을 주포로 달고 있다니. 사기잖아! 베인블레이드나 타이탄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걱정 말아요. 보고에 따르면 대구경 빔 연사속도는 시간당 1회. 게다가 빔속도 그리 빠르지 않고 지속시간이 길지만 유도속도가 상당히 느리다니까 장거리 화력지원인 세라도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거에요."
일단 일반 네우로이들처럼 빔으로 빠르게 긁어내리는 짓은 못하는 것 같다. 요새나 진지파괴용인가.
"그 녀석 하나라면 괜찮겠지만 소형종도 있잖습니까."
"아군을 믿어요. 그리고 세라가 격추되면 사실상 작전은 실패나 다름없으니까 다들 최선을 다해 지켜줄 거에요."
"연합군 최고 화력이자 야전보급 중추인 네가 쓰러지면 이미 끝난 거지."
제 화력보다는 등에 맨 보급창이 더 중요하죠. 네우로이는 아무리 거대해도 코어만 박살내면 끝나니까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보급만 충실히해도 충분하니까요. ……얼라?
"그런데 대구경 빔 사격을 유도하는 거랑 진격을 막는 게 무슨 관계인 거죠?"
"일단 빔을 쏘면 40~50분 정도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요격 아니면 이동인 셈이지. 지금까지 다섯 번 중 한 번 꼴로 이동시키고 있다고 했으니까 가뜩이나 느린 녀석의 발목을 충분히 잡아내고 있는 거지."
"그러면 전투 공역까지 도달하는데는 걸리는 시간은?"
"지연작전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이틀 뒤 1700시 경에 도착할 겁니다."
"불길한 예언하기는 싫지만 분명 그 전에 도착할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낙관주의에 물든 조사부 녀석들이 말한 시간이니까."
우리 보통 그 조사부 사람들한테서 네우로이 출현 예정 시간 받지 않습니까. 그리고 녀석이 아무리 느리다고해도 도버 해협이 40km가 안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게까지 지연시키다니. 특수전마녀단 굉장하다. 여튼.
"우리 부대 출격인원은요?"
"전원."
"……네?"
역시 항공 재킷만으로는 북해의 칼바람을 막기 힘들었나. 귀마개를 해서 귀를 보호했어야 했어. 안 그러니까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듣잖아.
"501부대는 전원 출격이다."
"……예비나 방어병력 하나도 안 남기고요? 다른 부대는요?"
"그쪽도 마찬가지라더군."
다른데도? 게다가 501부대 열두 명 전원이 출격이라니. 어째서? 아무리 상대가 최종보스 같다고 해도 전원출격은 좀 아닌 것 같은데.
"동체만해도 길이 약 230m, 폭과 높이는 약 160m. 거기에 길이가 1m 정도 되는 소형종들은 측정불가 수준. 이런 적을 상대로 여유를 둘 수는 없죠."
"뭐, 그것보다는 위에서부터의 압력이 더 큰 이유지만."
"위에서라뇨?"
"적의 규모가 평소의 배 이상인만큼 최소한의 경계 및 방어병력을 제외한 모든 전력을 투입시킨다는 게 사령부의 판단이라고 하더군."
"어차피 해상에서 요격에 실패하면 그 다음은 이 기지야, 미오. 600mm 빔이 스치기만해도 이 기지는 끝이야."
"알고 있다. 하지만 녀석들의 움직임이……."
"그건 그렇지만……."
또 위에서부터의 압력이 문제인가. 네우로이보다 저쪽이 더 문제가 아닌가 싶은데. 국군의 주적은 간부라고 하기도 하고. ……뭔가 진실을 꿰뚫는 듯한 말인데? 국군의 주적은 간부. 여튼 두 분의 반응을 보아하니 강물을 모으는 이도 이 작전에 별다른 이견을 보인 것 같지는 않다. 하긴 그 양반은 외교 담당이지 군사담당은 아니니까. 게다가 군사담당인 나는 사령부가 아니라 최전선에서 포나 쏘고 있고.
새삼스럽게 이로쿼이 해외파병체계가 엉망이라는 걸 알겠군. 절반은, 이 아니라 거의 다 내가 원인이지만.
어, 잠깐. 우리 부대 전원 출격이라고? 그러면.
"요시카도 이번 전투에 참가하나요?"
"1선에는 나오지 않아요. 후방에서 부상자들을 돌볼 예정입니다. 군의관이니까요."
"그것보다는 네 호위가 더 큰 목적이지만."
예전에 페리느와 했던 말이 현실이 되었군. 후소보급함대 방어전 때 엄청나게 활약했다고는 하지만 이제 겨우 두 번째 실전인데 이런 녀석하고 싸우는데 투입되다니. 험난한 운명이구만. 후방지원이라고는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만큼 여차하면 전방에 투입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전위가 붕괴해서 후방이 초토화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지간에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지.
"결론은 501부대를 포함해서 마녀 4부대의 인원을 예비부대 배치없이 전원 투입이라는 거군요."
거의 도박처럼 보이는데. 이 작전 입안한 거 누구냐.
"사령부 전원이겠죠."
"언제나 그렇듯 말이지."
쓴웃음을 짓는 미나 대장님과 사카모토 소령님. 정말 그럴까 싶었지만 전사장이 되어 몇 번인가 본 사령부 양반들의 작전수립장면이 떠오르니 왠지 모르게 납득이 가고 말았다. 일단 개요는 훌륭하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은 정말 대충대충이니까. 내가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작전이고 뭐고 정말 즉석에서 대충대충 결정하는 감이 없잖아 있다. 누구냐. 세상은 굉장히 머리좋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치밀하게 만든 계획대로 돌아간다고 한 건. 아무리봐도 별 생각없이 막 가고 있잖아.
"그리고 이건 세라 당신 바로 앞으로 온 의견서에요."
"뭡니까?"
미나 대장님은 1급 기밀 도장이 찍힌 서류철을 내게 건네주셨다. 옛날 같았으면 이걸 봐도 되나 고민했겠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냥 중요하구나 하는 수준이다. 성장이라고 해야 하나. 여튼 서류철을 펼쳐보았다.
[이로쿼이 전사장 화력보완계획]
당장 덮었다.
"조금이라도 읽어볼 생각이 없나보군."
"우선 사령부를 갈아엎어야겠다는 생각은 있습니다."
"진정해. 적을 눈앞에 두고 아군 핵심 전력을 제압하고 싶지는 않아."
"그리고 항명하고 싶지도 않답니다."
미나 대장님이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씀하셨다. 전투지휘권은 둘째치고 계급은 일단 내가 우위니까 사령부로 쳐들어가려는 나를 막으면 항명하는 꼴이 되는가. 누가 보면 이 동네 지휘체계 정말 엉망이라는 소리 하겠구만. 것보다 이게 뭡니까 대체.
"말 그대로 전사장님 화력보완계획이지."
"지금 88mm에 105mm로도 부족하다는 소리가 나오나요?"
이 사람들─사령부 양반들 지금 나를 항공보병이 아니라 폭격기나 전함급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뭘 어떻게하면 저 화력이 부족해서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이 나오는 거지? 제정신이야?
"일단 서류를 제대로 읽어봐. 영구적인 화력증강도 아니고 이번 작전에 유용할지도 모르니까."
"어느 쪽이든 싫습니다만……."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서류철을 펼쳐보았다.
*****
"계획은 순조로운가?"
"네. 이대로라면 8월말에는 실험기동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늦어. 좀 더 빨리는 못하나?"
리 말로리의 질문에 부관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연막작전이 힘들어 쉽지 않습니다."
"……마녀들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일선의 마녀들은 늘지 않았지만 후방의 마녀는 늘었다. 덕분에 통신 보급 정찰 초계 등의 기반이 단단해져 일선에도 그 효과가 전해지고 있었다. 특히 야간초계능력과 통신능력이 뛰어난 이로쿼이와 리베리온 마녀들 덕분에 브리타니아의 하늘은 훨씬 더 견고한 초계망과 방공망을 형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몰래 움직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좋지 못한 소식이라는 것이었다.
"허가처가 어디냐고 깐깐하게 묻는 마녀들이 많아져서 그 뒷처리 비용과 시간 소모가 늘고 있습니다."
"사령관급 명령서는 진작에 내줬을 텐데?"
"방공 사령부에서는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대응하고 있습니다."
"귀찮은 년들……."
불편한 기색을 숨기려는 생각이 없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그의 모습에서, 그가 정말로 마녀들을 싫어한다는 걸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가까이 있는 서류 중 하나를 집어 사인을 휘갈기고는 부관을 향해 내밀었다.
"방공 사령관을 구슬려뒀으니 이제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지. 계획에 박차를 가하도록."
"네."
말로리가 내민 서류를 받아든 부관은 경례를 올리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부관이 나간 문을 잠시 바라보든 말로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물든 하늘 너머로 가끔씩 희미한 인공불빛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나이트 위치들의 불빛이다. 그는 그것을 고까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전부다 마녀에 빠져서는……. 흥."
*****
「 현재 이로쿼이 전사장의 화력은 기동성과 방어력을 포기함으로써 얻어낸 것이다.
그때문에 포격으로 부족해진 근접전투능력을 보강하기 위해 2연장 M2 2문을 장착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여전히 전사장의 근접전투능력과 자기방어능력은 턱없이 부족하여 별도의 호위병력을 대동해야 한다.
최소 3인 이상의 마녀가 호위병력으로 차출되지만 전선의 화력이 부족한 경우는 없다.
그렇다면 별도의 호위병력을 편성하여 전사장의 방어력을 높인다.
더불어 해당 부대로 하여금 전사장을 위협하는 고속 소형종을 요격하게 하여 생존능력을 향상시킨다.
호위병력으로 자기방어무장의 효율이 감소하므로 2연장 M2 2문은 제거한다.
자기방어무장을 제거하여 생긴 여유자리에 장거리에서도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대구경 화포를 탑재하여 거대종에 대한 저지력을 높인다. 」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다. 일단 내 생각을 말하자면…….
"이 사람들 지금 마녀랑 전함을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게다가 1차대전과 2차대전 개념도 헷갈리고 있어. 뭐야 이건. 내가 드레드노트냐. 아니 드레드노트는 중장갑이라도 있지 나는 종이장갑이라고? 지금 상대할 게 600mm 주포를 뿜어대는 정신나간 녀석인데 그걸 고작 호위부대 몇 명으로 때우겠다고? 내가 등가교환으로 착탄압력을 바로바로 실드강화에 때려박아도 한 발을 막아낼 수 있을까 없을까 한 판에?
"게다가 양쪽에 88mm랑 105mm를 추가하다뇨. 아무리봐도 M2 뺀 여유자리에 놓을 만한 추가무장이 아니잖습니까."
그나마 같은 포끼리 묶어서 좌우로 쌍열주포를 매단 게 아니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날 때 균형잡는 것도 힘들겠지 그러면. 아니 그전에 지금 포 두 개만으로도 반동제어하느라 빌빌거리는 사람한테 포를 또 얹어준다고? 신종 괴롭힘이냐. 나이가 배 이상 차이나는 여자애가 비슷한 계급자리에 앉아있다고 심술부리는 거냐. 그리고 이건 또 뭐야.
"리베리온제 90mm/120mm/155mm랑 카를스란트제 10.5cm/12.8cm 이건 뭡니까?"
"거기 써있는 그대로에요."
반동제거용 주퇴복좌기에 연사장치까지 장착한 신형 항공보병지원화기 패키지. 원하는 구경의 포를 장착하여 전장에 압도적인 화력을…… 집어쳐?! 왜 이런 거 만들겠다는 거야?! 것보다 이런 대구경 화기는 또 언제 연구했어?! 리베리온-카를스란트 합작품? 셜리랑 바르크호른 대위님이 좋아하겠, 지가 아니라 대놓고 항공보병지원화기라고 쓰지마! 어딜봐서 항공보병용이야?! 아무리봐도 나보고 쓰라고 만든 무기잖아?!
"개념 자체는 괜찮지 않나?"
"예. 개념은 나쁘지 않죠. 하지만 무장이 안 좋잖아요."
맥이 탁 풀려 가까운 의자에 풀썩 앉았다. 중기관총을 빼고 거기에 대구경 화포를 얹겠다는 건 대체 누구 생각일까. 아니, 뭐. 사령부 전원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하하하 제기랄. 이 화력덕후 아저씨들이. 두고보자. 음? 항공 재킷 아직도 입고 있었네. 그래서 더 열받은 건가.
"그렇다고 소구경 화기를 달 수는 없잖나. 네가 근접한다면 모를까, 현 상태에서 그 구경 아래 포는 네가 쏘는 거리에서는 탄만 낭비할 뿐이고."
"그건 맞는 말입니다만, 지금 화력도 부족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충분하다 못해 흘러넘치잖아요? 제 자랑할 생각은 없지만 연사장치 단 쌍포 화력은 전함 함포사격급이라구요? 항공보병 화력은 애저녁에 뛰어넘었잖습니까? 그런데 더 필요하신가요?"
"있으면 좋지."
이보세요. 게다가 미나 대장님도 옆에서 "맞아요. 있으면 좋죠."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계신다. 아군은 없단 말인가.
"농담이에요."
전혀 농담같지 않았습니다만. 여튼 미나 대장님은 진지한 얼굴로 다시 말씀하셨다.
"지금 화력으로도 충분하지만 더 많은 화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나쁠 건 없어요. 특히 이번 작전처럼 적의 대구경 빔 때문에 위치 이외의 다른 병력을 활용할 수 없다면 더더욱 그래요."
"아예 지원이 없는 건가요?"
"순수한 마녀들만 투입되는 작전입니다."
일반 빔도 구축함 정도는 대파시키는데 600mm 빔이 긁으면 뭐든지간에 작살날 게 뻔하니까 다들 몸을 사리는구만. 아니, 제대로 된 판단이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지. 알고는 있다.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내 허리를 제물로 바치고 싶지는 않아. 가뜩이나 앨리스나 요시카한테 지금도 고생이지만 나이 먹으면 더 고생할 거라는 소리 듣고 있는데 여기서 더 고생하라는 거냐.
물론 의도는 알고 있다. 나는 포 반동 제어에 마력을 소비하느라 실드가 약해지니 네우로이와는 최대한 거리를 벌려야 하고, 그러면 먼 거리에서도 네우로이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대구경 화기를 장착해야 한다. 포격은 둘째치고 야전보급을 위해서라도 내가 살아야 한다 -> 종이장갑이니까 적과의 거리를 최대한 벌려야 한다 -> 멀어질수록 먼 거리에서도 효과적인 대포를 써야 한다 -> 포 구경이 늘어난다 -> 이참에 포를 늘리거나 구경 큰 걸로 바꿔보면 어때? 라는 건 알지만, 포격으로 인한 반동을 마법으로 제어하고 있는데도 맨날 허리가 아픈 사람한테 포를 더 얹어주려고 하는 게 잘못되었다는 거다.
그리고 내 일신상의 사정을 제외하고서라도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다. 지금 88mm랑 105mm 두 포 연사하는 반동도 겨우 제어하고 있는데 여기에 포를 더 얹거나 구경을 바꾸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탄착군이 벌어진다 수준이 아니라 여차하면 아군이 맞을 수도 있다. 비행도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닌데다가 반동제어도 간신히 균형을 맞추고 있는 상황에서 냅다 화력만 증강하자고 하면 나는 반대다.
신형 패키지는 반동 제어를 위해 주퇴복좌기를 달아서 화력이 증가하더라도 반동은 동일하거나 줄일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걸 어느 세월에 만들어 어느 세월에 가져와서 실험하고 있냐고. 적은 아무리 낙관적으로 잡아도 이틀 뒤에는 도착한다. 불가능하다.
"이미 도착했는데."
"……네?"
"격납고에 들어온 거 봤잖아?"
착륙해서 스트라이커 유닛 탈착하자마자 회의실로 오느라 못 봤습니다만. 사냐랑 에이라한테 인사하느라 잠깐 지체하기는 했지만 그런 건 못 봤는데? 생각해보니까 뭔가 사람들이 묘하게 북적이기는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옛날에 88mm냐 105mm냐로 싸울 때처럼 카를스란트 정비반장님하고 리베리온 정비반장님이 투닥거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벌써 도착했다고?! 그럼 이거 벌써 연구 끝내고 만들었단 말이야?! 페이퍼 플랜이 아니었어?! 뭐야, 도대체 예산을 어디에 퍼붓고 있는 거야?!
"아침 조례 때도 얘기했답니다. 오늘 신형 포격지원기기가 도착한다고."
"처음 듣는데요?!"
"무슨 소리야? '아주 내 허리를 부숴라 이것들아. 그래 까짓거 쏴주지.' 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했잖아."
"……제가 그랬나요?"
"그랬지."
"그랬죠."
위대한 어머니시여. 당신의 딸이 피로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헛소리까지 했답니다. 부디 가엽게 여기시어 굽어 살피소서.
"예산이 부족해서 거기 써있는 그대로의 대구경 화포를 모두 쓰기는 불가능하지만, 일단 주퇴복좌기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양쪽에 88mm와 105mm를 다는 건 가능해보이던데."
"이왕이면 전부다 불가능했으면 좋겠지 말입니다……."
세상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고 하더니만. 이 무슨 기회주의적 전개야. 노린 거냐. 노린 거구나.
이 세계는 뭔가 잘못됐어. 왜 이렇게 다들 거함거포주의로 못 돌아가서 안달인 거야. 거함은 좀 미묘하지만 왜 거포주의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거야.
"……일단 실험은 해보죠."
조금이라도 불편하다 싶으면 곧바로 바다에 빠트려 버리자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
- 세라가 아프다 하는 건 대체적으로 제가 아프기 때문일 때가 상당히 많습니다. 본격 작가와 캐릭터가 함께 골골거리는 팬픽 <-
- 4년반 동안 활동했던 자커가 좀 갑작스럽게 끝이 났습니다. 싱숭생숭한 기분이네요.
- 월탱하는데 자주포 들이박아서 체력 깎는 놈이 있어 뭔가 봤더니 한국인이네요. 훠킹 김치맨 […] 해외게임에서 이러지 맙시다 제발.
- 요즘 걸즈&판처를 보고 있습니다. 월탱하다보면 이게 떠오르고, 이거 보고 있으면 월탱이 떠오르고. 이 애니 덕분에 한국 월탱 슈퍼테스트에 참여하시는 분들이 늘었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좋은 현상입니다 <-
- 에이왁스에 작은 위치도 올라와 행복했던 주였습니다. 정작 저는 별의 바다 연성하느라 힘이 빠져 이렇게 늦었습니다만. […]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32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한다. 아무리 놀라운 일이라도 익숙해지면 더 이상 놀라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나 사람을 놀랍게 하는 일들도 있는 만큼 저 말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지간한 일들은 모두 익숙해지는 게 사람이니 적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총소리나 대포 소리도 익숙해질 수 있다. 요란하게 울려퍼지는 굉음과 땅을 타고 전해지는 둔중한 진동도 익숙해지면 하품을 하며 지켜볼 수 있게 된다. 물론 실전테스트 중인 연구소라면 모를까 전장에서 그러한 소리가 난다는 것은 적이 접근했다는 경보와 마찬가지인만큼 느긋하게 있을 여유 따위는 없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수면 중이던 501부대원들은 오밤 중에 울려퍼지는 포격음에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가 격납고 쪽에서 들려오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별말없이 다시금 잠자리에 들었다. 화력과 보급 모두를 담당하는 부대 제일의 어른(?)이, 혹은 그 어른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정비반이 요란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사이렌도 울리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온갖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건 체력과 정신력을 낭비할 뿐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군의관으로서 이곳 501부대에 임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소 소녀─미야후지 요시카였다.
포격음에 눈이 번쩍 뜨인 요시카는 창 밖 너머를 살피다 그 소리가 격납고 쪽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것과, 비상사태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서야 자신의 심장이 미칠 듯이 두근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증거로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고, 오한이 든 것 마냥 몸이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여기는 전장이 아니야. 아카기의 갑판 위가 아니야. 부상자는 없어.
그렇게 되뇌이며 북소리와 종소리가 뒤섞인 듯한, 거기에 그 두 소리에는 없는 소름끼치는 날카로움이 섞인 둔중한 소음에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그리고 머리맡에 둔 주전자를 기울여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새벽 공기에 차갑게 식은 물이 식도를 통과하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덕분에 잠기운은 모두 달아났지만 동시에 가슴의 두근거림도 약간이나마 줄어들었다.
"……하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겨우 몸을 진정시킨 요시카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미묘한 후끈함과 끈적끈적한 축축함이 느껴졌다. 식은땀이 나왔던 걸까. 이렇게 겁쟁이면서 어떻게 모두를 지키겠다는 걸까. 아카기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겁없이 움직일 수 있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요시카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포격음이 들릴 때마다 몸이 움찔움찔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어떡하고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자고 있을까? 아니면 나처럼 불안한 마음으로 애써 잠을 청하고 있을까. 여튼 도저히 익숙해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잠은 자야했다. 내일은 내일의 일이 있으니까. 누워있으면 어느 순간 잠들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며 요시카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런다고 포격음이 안 들리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태풍이 몰아치고 있는 거야. 저건 천둥소리야. 괜찮아. 문제없어.
필사적으로 자기최면을 걸며, 요시카는 잠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
그리고 여기, 요시카와는 다른 의미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10.5cm……. 고폭탄음 같은데……. 그럼 역시 KwK 42 L/28인가? StuH 42 L/28는 여기까지 끌고올 여유분이 없었을 테니……. ……소리가 변했군. 철갑탄으로 바꿨나? KwK 45 L/52나 KwK 45 L/52 Ausf. B는……. 그럼 KwK 46 L/68인가? 아니 K 18 L/52 같은데……. KwK 45 L/52 Ausf. K와 KwK 46 L/70……는 욕심이 너무 큰가. ……포음이 변했나. ……12.8cm……. PaK 44 L/55! ……PaK 44/2 L/61도 있는 건가……?"
조국 무기의 위력을 알아보러 가고 싶지만 군율을 어기게 될까봐 안절부절하고 있는 카를스란트 소녀─게르트루트 바르크호른이 있었다.
지금 울려퍼지는 포격음이 88mm나 105mm와는 전혀 다르며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지금 실험중인 포가 어떤 포인지를 추리하느라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참고로 셜리는 상황파악이 끝난 순간 그대로 망설임없이 침대에 몸을 던지고 수면상태에 돌입했다. 바르크호른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일단 리베리온제 장비에 대한 관리나 확인은 당신의 임무였던 걸로 기억하지 말입니다 셜롯 E. 예거 중위님. 괜찮은 겁니까.
*****
시계는 이미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건만, 격납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격납고 앞 활주로 한켠에 모인 일련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시간관념은 아무래도 좋은 듯 했다. 되려 시간을 극복하려는 것처럼 묘한 열기를 띄고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밤하늘을 가르는 전조등의 강렬한 불빛과 기지 앞 해상에 듬성듬성 떠 있는 야간사격용 플로트는 어둠과 싸우기 위한 무기처럼 보였다.
"주퇴복좌기는 어때요?"
임시로 설치된 무전기기 앞에서 미나는 마이크에 대고 그렇게 물었다.
[……굉장히, 좋네요.]
"좋은지 싫은지 알 수 없는 반응이로군."
사카모토의 말대로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세라의 목소리는 당최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담겨 있었다.
[기기 성능 자체는 좋습니다. 특히 10.5cm와 120mm는 땅에서 쏠 때에 비해서 체감 반동이 확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반응인가?"
[……이대로라면 포 한두 개 쯤 더 올려도 괜찮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벌써 물들었나해서 괴롭지 말입니다.]
"……뭐, 그건 그렇다치고 이번에는 다른 걸 실험해보지."
[Rog.]
대답과 함께 밤하늘의 별처럼 고정되어 있던 조그마한 불빛 한 쌍이 기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트라이커 유닛에 붙어있는 유도등 불빛이었다. 전조등 불빛이 스쳐지나갈 때마다 얼핏 보이는 세라의 모습은 평소와 비교해서 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기지에 다가올 수록 그 모습이 조금씩 달라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양옆에 달린 두 주포(?)의 형태가 조금 달랐다. 포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부분에 궤짝 같은 크기의 기묘한 장치가 덧붙여져 있었다. 덕분에 가뜩이나 거대한 포가 더 크게 보였다. 거기에 일반 스트라이커 유닛보다 더 큰 세라의 유닛까지 합쳐져 하늘을 날고 있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착륙 상태였다면 항공보병이 아니라 장갑보병이라고 해도 믿는 사람이 나올 것 같았다. 항공보병 특유의 가벼운 장갑과 무장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활주로를 미끄러져 내려와 임시 거치대에 무장과 스트라이커 유닛을 고정시킨 세라는 사역마와의 융합을 해제하였다. 슈르르─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뿔과 귀, 그리고 꼬리가 사라지자 세라는 허리를 두드리며 미나와 사카모토가 있는 무전기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는 사이 정비반원들이 세라의 무장에 달라붙었다. 10.5cm와 120mm를 떼어내고 다른 무기를 장착하기 위해서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0.5cm자리에는 카를스란트제 12.8cm 포를, 120mm자리에는 리베리온제 155mm 포를 달기 위해서 말이다. 다른 구경의 포도 차례차례로 실험할 예정이다.
그러한 광경을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세라의 모습에 사카모토가 웃으며 말했다.
"누가 보면 작전 실패하고 돌아온 줄 알겠군. 얼굴 좀 풀어."
"허리를 옭아매는 사슬이 두꺼워지고 있는데 환한 얼굴로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주퇴복좌기가 붙어있으면 부담이 줄어든다며?"
"주퇴복좌기로 줄인 부담을 대구경포로 늘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잖습니까."
그 말에 사카모토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이렇게 실험에 협조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니저러니해도 스스로도 화력 증강의 유용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혹은 이로쿼이 전사장이라는 위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이로쿼이에서 실질적으로 전투에 투입되는 마녀는 상냥한 들소─세라 한 사람 뿐이다. 다른 이로쿼이 마녀들은 기초군사훈련과 더불어 정찰이나 통신 등의 비전투 활동 및 후방지원 중이다. 기간은 약 3개월로 9월에나 되서야 전장에 투입될 예정이다. 그 말은 그때까지는 이로쿼이 마녀들이 투입될 예정인 곳을 혼자서 모두 다 커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문에 매일 같이 투덜거리고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전장으로 향하는 것이리라. 게다가 그 투덜거림이나 앓는 소리도 동료들에게만 할 뿐이고 대외적으로는 건강한 척 하고 있으니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그럼 그만둘 건가?"
"……그럴 수는 없죠. 그랬다가는 이로쿼이 애들이 전장에 투입될 테니까요."
그런 계약이었다고 한다. 세라가 활약하면 할 수록, 혼자서도 서유럽 전선 전역에 충분한 전과를 내면 낼 수록 이로쿼이 아이들이 전방으로 갈 확률이 줄어든다고. 그러니까 저 때문에 이역만리까지 끌려온 애들을 전장에까지 떠밀 수는 없어요. 세라는 그렇게 말했다. 바보 같은 자기희생논리였지만, 사카모토는 그것이 그리 싫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튼, 얼른 끝내고 자고 싶지 말입니다."
"그렇네요. 이 이상 계속하면 내일 일정에도 영향을 끼치니까 저것만 확인해보고 나머지 조합은 내일 오전에 확인하도록 하죠."
잠으로 체력을 회복하는 경우가 많은(사실 그 외의 체력회복수단이 없기도 하지만) 세라가 하품을 하며 말하자 미나는 시계를 보고는 그렇게 대답했다. 낮잠을 잤다고는 해도 세라의 피로누적도는 부대 내 1위 자리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다. 쉴 수 있을 때는 쉬게 해줘야 했다. 물론 정비반은 위로는 반장부터 아래로는 이병까지 모두들 밤을 새워도 걱정없다는 기세였지만, 그렇다고해서 철야작업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 열의가 대단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다음 날의 업무에 지장을 줄 수 있는 행위는 금지해야하는 게 상관의 일이다.
이제 그만 놀고 자라는 말을 들은 아이들 같은 정비반원들이 초롱초롱하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미나를 바라보았지만, 501부대의 대장은 엄한 표정으로 철야작업을 불허한다는 의사를 재확인시켜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정비반원들은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고, 세라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자국 무기에 대한 자부심과 간만에 남심을 자극하는 크고 아름다운 장비가 와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그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사용자는 저거든요? 제가 못 써먹겠다고 하면 그냥 폐기되는 거거든요? 이 사람들이 정말…….
여튼 이제는 항공보병인지조차도 의심스러운 수준으로 마개조된 내 유닛을 바라보았다.
전투기가 아닌 수송기를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졌기에 1.5배 정도 더 큰 자신의 스트라이커 유닛에, 날지 않는 대신 장갑과 화력을 증대시킨 장갑보병들도 쓰지 않는, 그야말로 전차에나 다는 대구경포가 양옆에 하나씩 고정대에 거치되어 있다.
그것도 단순히 야전에서 응급처치로 때운 듯한 물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화력투사를 위해 급탄장치에 연사장치, 그리고 주퇴복좌기까지 붙은 흉악한 물건이다. 게다가 각 장치들을 보호하기 위해 장갑까지 붙어 있다보니 가뜩이나 큰 물건이 훨씬 거대하게 느껴졌다.
10.5cm, 90mm, 120mm도 이것들과 마찬가지로 덕지덕지 붙어있엇지만 이것들은 묘하게 더 커보인다. 산술급수적 증가가 아니라 기하급수적 증가인가.
이제 어깨에 사냐의 플리거 허머를 달면 맥워리어나 건담이 되겠구만. 생각만으로도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지만 입에 담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면 그것도 실험해보자고 할 게 뻔하다. 그만둬. 내 라이프를 어디까지 깎을 셈이냐. 지금도 한계야.
고개를 흔들고 어깨를 한두 바퀴 돌려 몸을 풀었다.
우드득거리는 요란한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뽀득뽀득이라던가 끼리릭 하는 기묘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더 불안하다. 한계치까지 마모된 건가.
불안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아침에는 쑤시고 덜덜 떨리고 저녁에는 삐걱거리냐. 오늘 일진이 영 아니구만.
오만 잡상이 떠올랐지만 뇌리 한 켠으로 밀어놓고 스트라이커 유닛을 장착하고, 마력을 끌어올려 사역마와 융합했다.
뿔과 귀, 꼬리가 솟아나는 감각은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싫은 건 아니지만 없던 기관이 새롭게 생기고 그게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뭐라 설명해야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고정대의 레버를 잡아당겼다.
철컥. 찰칵. 끼릭끼릭.
고정대가 움직여 조금 떨어져 있던 주포가 접근하고, 그 틈새를 수많은 벨트와 지지대가 금속 마찰음을 내며 몸에 밀착된다.
그 뭐였더라. 학교가 변신하는 만화가 떠오른다. 아니면 로봇의 변신합체 장면이라던가. 가만히 보고 있자면 도저히 이 시대 있을 법한 기술이 아니라 오버테크놀로지 같지만, 종사자들이 쏟아내는 전문적인 지식을 듣고 있자면 그리 오버테크놀로지는 아닌 듯 하다.
이 세계는 대체……. 마법과 기술이 동시발전한 거냐.
장착이 완료되자 조준경을 끼고 주포 조종간을 움직여봤다. 기잉. 끼리릭. 쿠궁. 유압 실린더와 각종 장비들이 삐걱거리며 마찰음이 들렸지만 그건 불길한 낡은 소음이 아니라 힘차고 활발한 새것의 소리였다.
부앙각과 좌우각도 나쁘지 않았다.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별 차이가 없는 듯 했다. 좀 더 길고 두꺼워진 포 때문에 시야가 조금 좁아진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조종간의 움직임도 부드러운 축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큰 차이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술의 승리라고 해야하나.
그렇지만.
[상태는 어떤가요?]
"별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 하나 엄청 변한 게 있네요."
[뭐죠?]
인컴으로 들려오는 미나 대장님의 질문에 나는는 스트라이커 유닛에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마력을 주입하며 대답했다.
"무게요."
철컹. 고정대에서 벗어나자마자 그걸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상에서 시험사격했을 때는 하나씩 잡고 쐈기 때문에 잘 몰랐고, 방금 전에 쏜 10.5cm와 120mm는 이렇게까지 무겁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들은 다르다. 서류상의 무게는 어떨지 몰라도 체감상 무게는 거의 두 배에 가깝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는데.
주퇴복좌기로 반동을 확실하게 줄인다고 해도 비행자세제어에 좀 더 신경쓰지 않으면 그대로 균형을 잃고 추락할 것 같다. 고작 몇 cm 늘어난 것 뿐인데 왜 이 모양이야. 진짜로 무게 증가가 기하급수적이냐.
사실 단순한 무게 증가는 아무렇지도 않다. 이래 봬도 수송대에 있을 때 이것저것 온갖 무거운 것들은 다 들어봤고, 기관차를 포함해서 열차도 옮겨본 경험이 있으니까 포 두 개 정도의 무게는 그렇게 큰 부담이 아니다. 사용하는 건 둘째치고 말이지.
하지만 문제는 허리와 골반을 압박하는 듯한 묵직한 감각이다. 이놈들 무게 균형 어떻게 잡은 거야. 인체공학적 디자인은 아직 멀었는가. 트랜스포머틱한 장면은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주면서 그런 쪽은 개발되지 않은 거냐.
보급창이 없어 어깨가 가벼운 게 다행이다. 그랬으면 어깨, 척추, 허리가 앙상블 효과를 일으켰을 테니까. 지금도 힘들지만!
[포가 커진만큼 무게도 무거워졌고, 그에 맞춰 포탄과 관련장비들도 다 같이 무거워졌으니까요.]
"뭐, 그렇겠죠."
주퇴복좌기가 굉장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이 구경은 폐기하자. 이런 거 들고 쏘다가 균형 잃고 바다에 쳐박히는 건 사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활주로 위를 미끄러져 내달려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평소보다 활주로를 더 사용했다. 착륙할 때 주의해야겠는데.
별빛만이 전부인 밤하늘에 떠올라 지정된 위치로 가 자세를 잡았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게 하나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네.]
"왜 굳이 다른 나라 포를 하나씩 달고 있어야 하는 건가요?"
이제와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있지만, 최소한 88mm와 105mm는 서류상으로는 각각 공대공/공대지 타격이라는 구분이 있었다. 카를스란트와 리베리온의 자존심 싸움이라는 원래 목표(…)는 둘째치고서라도, 최소한 초기에는 그렇게 운용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데다가 어차피 네우로이에 대한 저지력과 타격력만 있으면 되니까 그냥 되는대로 뿜뿜 쏘고 있지만.
그러니까 이상한 것이다. 양쪽에 같은 포를 달면 무게 균형 맞추기도 쉽고 예산도 줄일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두 국가가 완전히 다른 보급 체계를 갖춘 무기를 만드는 걸까. 초기의 자존심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건가. 정치외교적 압력 같은 거라도 있었던 걸까.
하지만 이 문제는 생각보다 그리 심각한 이유가 아니었다.
[한 나라 포만 달고 난다고 하면 선택받지 못한 나라 정비병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해 보세요.]
"……."
너무 잘 상상이 되서 되려 무섭다.
[게다가 꽤 오래 전에 각각 좌우 한쪽만 개발하기로 합의를 봤다더군.]
[그래서 이제와서 다른 쪽 장비를 개발하기 힘들다네요.]
"……그런 합의를 당사자면서 전사장인 제가 왜 몰랐던 건가요."
[네가 전사장 자리에 오르기 전에 있었던 일이니까 그렇겠지.]
과거의 유산이 현재를 덮쳐오는 건가. 하긴 그때는 리베리온 소속인데다가 하사 밖에 안되었으니까.
……잠깐만. 그럼 이 정신나간 대구경 주포 계획이 그때부터 설립되었다는 말인가. 이 사람들 진짜 무슨 화력 못 올려서 웬수진 일이라도 있었나.
아냐. 예전에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유능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다른 사람보다 일을 더 시킨다. 그 사람은 유능하므로 약간의 부담을 느끼지만 모든 일을 완수한다. 이에 이 정도는 문제없다고 판단한 상부는 더 많은 일을 시킨다. 유능한 사람은 이번에도 일을 완수한다. 그럼 상부는 일의 양을 더 늘리고 그 사람은 다시 어떻게 해내고…….
즉, 내가 계속 포격으로 효과를 내고, 범용적으로 활용가능하니까 이렇게 대구경화 계획이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야, 신난다! 나를 그렇게 유능한 인재로 봐주는구나는 개뿔이! 아무리 마법으로 제어해도 조금씩 쌓인 부담이 허리를 짓누르고 있구만!
그놈의 거함거포주의 좀 벗어나란 말이야! 나중에는 아예 자주포 매고 싸우라고 하겠구만!
"……하아……."
늘어나는 건 한숨 밖에 없구만. 에이, 모르겠다.
주포 조종간을 움직여 조준경이 보여주는 목표를 향해 포구를 움직인다. 조준 완료.
"시작합니다."
[관측준비 완료. 쏘세요.]
"Rog."
복창과 함께 방아쇠를 당겼다.
*****
"어젯밤에는 요란하더라."
"그런 것치고는 푹 잔 얼굴이구만."
"익숙하니까."
아침 식사 시간. 식당에서 마주친 셜롯과 세라는 그렇게 대화하며 서로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우물우물……. ……피곤해."
"그런 대사는 적어도 깨작거리면서 해야 신뢰받을 수 있다고."
"음식을 깨작거린다니. 아예 먹지 못하는 게 아니라면 그런 짓은 못하지."
"어련하시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셜롯도 세라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다. 루키니와 함께 이 기지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는 둘째라면 서러운 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멀쩡한 척 하지만 골골거릴 때가 많은 세라의 상태를 쉽게 눈치채고 있었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조금이라도 몸 상태가 안 좋다 싶으면 왼팔의 경련이 약간이나마 심해진다. 아니나 다를까. 탁자 밑으로 내려간 왼팔의 경련이 제법 눈에 띄었다.
"얼마나 잤어?"
"네 시간, 하고 반 정도. ……꿀꺽. ……그런데 말야."
세라는 야채스프를 탕국처럼 들이마시고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잠을 못 이룬 듯 피곤해보이는 얼굴의 바르크호른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위님은 왜 저래?"
"글쎄."
설마하니 무슨 포를 쏘는가 궁금해서 잠을 설쳤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르트만만이 어렴풋이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지만, 검은 악마라는 별명을 가진 카를스란트의 에이스는 굳이 묻지 않고 모든 걸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전우를 지켜볼 뿐이었따.
요시카와 루키니가 식당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안녕, 셜리~ 안녕, 세라~ 엇? 세라 어제 저녁에 북유럽 갔다가 오늘 저녁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
"예정이 변경됐어. 있다가 미나 대장님이 말씀해주실 거야."
"그래? 아, 밥 받아올게!"
"뛰지말고 조심해."
"응!"
"저도 다녀오겠습니다."
"그래그래."
두 소녀가 떠나가자 셜리가 입을 열었다.
"미야후지도 못 잔 기색인데."
"군인된 지 한 달도 안된 애가 온갖 포 소리가 쾅쾅 울리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자면 그게 더 신기하지 않아?"
"그렇지. 그런데 실전에서 첫 비행을 성공시켰잖아? 굉장하네."
"재능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도박이었지."
"그래서 소령님하고 대판 싸웠다면서."
"뭐, 그랬지."
한 쪽은 좀 미묘하지만 어찌되었든 둘 다 베테랑인만큼, 아침식사중인 소녀들의 대화라는 외견과는 달리 내용은 묵직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자리가 자리인만큼 무거운 대화는 서로 피하려고 했고, 거기에 요시카와 루키니가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딱히 말은 없었지만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소녀들의 아침식사는 끝이 났다.
그리고 아침조례가 시작되었다.
*****
- 새벽에 올릴 수 있을까 했지만 역시나 무리였습니다. 연성 속도가 느리다는 자각만 늘어날 뿐입니다.
- 예전에 자주포에 들이박는 한국인 얘기를 했었는데, 그게 아군이라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러니까 일부러 아군 자주포에게 들이박는다는 거죠. 일부러.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지만 매너 좀 지킵시다. 특히 해외에서는 더더욱.
- 밀덕 분들께서는 바르크호른의 혼잣말에서 무진장 태클을 걸고 싶으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언제나 말하듯 지적하셔도 반영하기 어렵지 말입니다. <-
- 모 마트서 전시제품이었던 알터제 에이라 피규어를 파는데 오프 매장에서만 판다고 하기에 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새 판매완료. 우린 인연이 아니었나보다 에이라. 재판 나온다고 하니까 그때 신품으로 살 수 있다면 좋겠네요.
그래서 지금은 피그마 에이라를 살 것인가 아이마스 넨도푸치 vo.2를 살 것인가로 고민중입니다. 어떡할까나. <-
- 하늘아리님의 마탄의 사수가 사라졌네요. 리메이크 하시려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그러니까 포병은 하늘에서도- #33
600mm라고 하면 듣는 것만으로도 뭔가 굉장하게 커다랗게 느껴지지만, 단위를 올리면 60cm가 된다. 0.6m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 몸통보다 조금 큰 정도라고 하면 될까. 생각만큼 그렇게 큰 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포탄의 구경을 말하는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6mm 이하의 총알도 사람을 죽이는 데에는 충분하다. 그런데 600mm라고? 현용 무기 중에 그만한 포탄을 쏠 수 있는 포도 없지만, 만약 그런 게 있고, 그걸 사람을 향해 쏜다면 맞은 사람은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렇지만 네우로이의 빔에도 그런 상식이 적용되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녀 석들의 빔은 얼핏 보기에는 균일하게 보이지만 실은 다 제각각이다. 이건 직접 얻어맞아본 내가 장담한다. ……뭘 이런 걸 장담하고 있는 걸까 나는. 여튼 이 빔은 위력조차도 제각각이다. 팔뚝 만한 두께건만 한 번 훑어내리는 것만으로도 순양함급 함선을 침몰시키기도 하는가 하면, 사람만한 빔이건만 전차나 항공기 장갑도 버틸 때가 있다. 완전히 제멋대로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600mm 빔이라는 말을 반쯤 무시하고 있었다. 착탄압력은 어찌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실드로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지 않겠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예상은 언제나 그러했든 이번에도 훌륭하게 빗나가 있었다.
"저거, 섬 하나 정도는 일격에 승화시킬 수 있는 거 아냐?"
특 수전마녀단의 마녀 하나가 눈이 돌아갈 것 같은 공중기동으로 유도한 네우로이의 빔이 먼 바다에 꽂히며 솓구쳐 오른 물기둥을 본 셜리는 자신의 감상을 솔직하게 입에 담았다. 과연 자유로운 리베리안. 모두가 떠올렸을 테지만 아무도 입에 담지 않았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줄이야.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럴 만 했다. 말은 물기둥이라고 했지만, 저게 해안가에 떨어졌으면 소규모 해일이라도 일어났을 것 같았으니까.
마녀를 따라가는 유도광의 두께는 사람 머리만했다. 그러나 그 빔이 희미해진다 싶은 순간 뿜어져 나오는 본 공격─약 600mm 빔은 다른 빔에 비하면 느린 축에 속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일 뿐이다. 게다가 그 느린 속도를 보충하듯 파괴력은 어마어마했고, 뿜어져나온 양도 어마어마했다.
거기에 600mm 빔 주변으로 흩어지듯, 모여들듯, 대체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를 궤적을 그리며, 마치 하늘에 파고드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붉은 빛줄기들이란. 시적으로 표현한 것 같지만 명백하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부수적 효과범위, 다시 말해서 스플래시 범위가 아무리봐도 기본 빔의 열 배는 되어 보인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피해범위가 6000mm. 6m. 상상이 가는가? 지금까지 저걸 피해온 특수전마녀단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합시다. 아니 일반 총알도 그렇고 포탄도 그렇고 날아가면 그 주변으로도 피해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저렇게 눈으로 확연하게 볼 수 있는 확산범위는 너무하지 않나?
"……일단 복귀하도록 합시다."
미 나 대장님의 말에 우리는 정찰 및 사전조사차 교전공역에 들어왔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사전조사차, 라고는 해도 언제든 교전 시작될 수 있었기에 완전무장─그러니까 88mm와 105mm에 보급창까지 모두 장착─하고 왔지만, 빔을 한 번 쏟아낸 녀석은 한 시간 정도는 움직이지 않을 테고, 그 동안 소형종들도 경계를 하듯 맴돌기만 할 테니 작전 개시 전까지는 휴식을 취하는 게 옳은 선택이다.
그랬기에 우리는 임시 기지인 마녀사출장치를 장착한 연합군 소속 경순양함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가는 내내 고민했다.
저 놈, 어떻게 해야 박살낼 수 있을까…….
*****
작 전회의를 겸한 아침조례가 끝나자마자 리네트 비숍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불필요한 행동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몰래라는 게. 모두들 신음을 흘리거나, 인상을 찌푸리거나, 깊은 한숨을 내쉬거나, 책상 위로 엎어졌기 때문이었다. 변함없는 사람을 꼽으라 미나 중령과 사카모토 소령 정도일까. 그러나 두 사람 또한 희미하게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럴 만 했다.
크고 Huge 느리며Slow 무수히 많은 소형종NumberLess을 달고 다니는 네우로이를 격파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소형종의 엄호를 뚫는 것도 어렵고, 거대한 몸뚱아리에서 코어를 찾는 것도 쉽지 않으며, 두터운 장갑을 꿰뚫는 것 또한 간단하지 않다. 그나마 코어를 찾는 건 사카모토의 마안으로 쉽게 해결되지만, 그렇다고해서 나머지 둘의 난이도가 내려가지는 않는다.
게 다가 이번에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600mm 구경의 빔도 상대해야 한다. 계획상으로는 일단 쏘게 한 후 재충전(?) 시간 동안 교전을 벌인다고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될런지는 의문이었다. 전장에서 이전까지 쌓인 정보를 토대로 수립한 계획이 실전에서 쓸 수 없게 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특히나 네우로이를 상대로 하면 더더욱. 출격 및 교전 횟수는 다른 부대원들에게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지만 그래도 리네트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작전 자체는 단순했다. 우선 세라가 네우로이보다 더 높은 곳에서 제압포격을 실시하고, 501부대를 제외한3 개의 마녀부대가 각각 전방, 좌측, 우측에서 압박하며 포위망을 구축하고 소형종을 저지한다. 이렇게 소형종들을 끌어내서 방어가 얇아진 후방으로 급습조가 침투해서 네우로이 내부로 들어가 코어를 타격한다. 일반적인 네우로이들이 몸 전체에 빔을 내뿜는 붉은 장갑부를 가진 것에 비해, 이번 녀석은 주포에 해당하는 곳을 제외하면 그 어디에도 빔을 내뿜는 부분이 없었기에 가능한 작전이었다.
급습조는 단시간에 대량의 화력을 투사할 수 있는 사냐, 그러한 사냐를 엄호할 루키니와 에이라, 그리고 이 세 사람을 빠르게 강습시킬 기동성을 가진 셜리가 선택되었다. 원래 에이라는 상부 포위망에 투입될 예정이었지만 본인의 강력한 희망에 의해 급습조로 들어가게 되었다. 만에 하나 급습이 실패하더라도 자신이 있으면 전원 무사히 탈출할 수 있다는 열변에 미나가 잠시 고민한 끝에 투입한 것이다. 포위망이 얇아질 수 밖에 없지만, 거대형 네우로이 안으로 파고들어야 하는 인원들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후방지원분과는 제압포격을 실시하는 세라와 야전군의관이자 세라를 실드로 보호해야하는 요시카,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엄호할 리네트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포격과는 별개로 이번에는 탄약 보급이 매우 중요했기에 부대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는 두 사람만으로 세라를 지키는 게 적절한 판단인가 하는 의문이 있었지만, 세라는 자신의 스트라이커 유닛에 2연장 M2 중기관총을 4문 장착하는 정신나간 대공무장─본인의 발언─으로 문제를 해결해냈다. 탄약창이라는 희대의 장비로 거의 무한정 탄을 공급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불어 고유마법인 등가교환의 힘으로 무지막지한 적재량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정작 발언한 본인은 이제 될 되라 되라지 하는 얼굴이었지만.
그 뒤로 남은 미나, 사카모토, 바르크호른, 에리카, 페리느는 엄호 및 지원조였다. 급습조를 엄호하고, 그들이 네우로이 내부로 들어가면 이후에는 다른 마녀부대를 지원하는 것이다. 후방지원과 급습으로 반토막난 병력으로 한 구역을 맡을 수는 없기에 이렇게 된 것이었다.
과연 무사히 이번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그러한 불안 속에서 소녀들은 회의실을 나섰다.
*****
회 의가 끝나고 격납고로 간 나는 어제 정비고 사람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카를스란트제 12.8cm포와 리베리온제 155mm포 사격 연습을 실시했다. 고막이 터져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포격음과 함께 설치해둔 표적이 박살나는 모습은 스트레스 해소에 일조해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허리에 극심한 무리를 가져다 주었다. 더럽게 아팠다. 요시카에게 마법으로 치료받지 않았다면 작전 직전에 의무대에 강제 입실 당할 뻔했다.
여튼 그러한 우여곡절이 끝나고 점심시간.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무 것도 아니다."
평소에도 엄한 인상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한 얼굴로 식사 중인 바르크호른 대위님. 어라, 예전에도 이런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언제였을까 기억을 뒤적거리기 전에 대위님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돼, 빵이 남았어! ……농담은 이쯤 해두고. 전투 직전이라 예민하기는 할 테지만 그래도 저렇게 굳어있을 사람이 아닌데 왜 저러는 걸까.
고민은 생각보다 빠르게 해결되었다. 점심 먹고 이동한다기에 일어나서 휘청거리는 사냐와 함께 점심을 먹고 있자니, 대위님과 교차하듯 나타난 요시카와 리네트의 얼굴이 매우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아무 것도 아닌,"
"바르크호른한테 한소리 들었거든."
"셔, 셜리 씨……."
대답은 두 사람 뒤에 나타난 셜리가 해주었다. 뭔가 얼버무리려고 했던 걸까. 두 사람은 깜짝 놀란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셜리는 한 쪽 눈을 찡긋 하며 말했다.
"맞잖아?"
"아뇨, 그렇게까지는……."
딱 딱한 카를스란트 아가씨가 또 뭐라고 한마디 했구만. 우물쭈물하는 요시카와 그런 요시카를 보고 안절부절 못하는 리네트를 보고 있자니 한소리 들은 게 요시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죽고 싶지 않다면 돌아가라고 했다는데, 이미 작전과 편제 다 짷여진 거 알면서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신 겁니까 대위님.
"……아."
"왜?"
"대위님이 왜 그렇게 까칠하게 굴었는지 알 것 같아서."
예 전에 하르트만 중위님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요시카는 바르크호른 대위님의 동생과 똑 닮았다고 했던가. 그 여동생은 지금 의식불명으로 병원에 누워있고. 그렇다면 저 반응이 이해가 되기는 한다. 그렇지만서도 말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대위님. 그래서 불안해하고 있는 요시카에게 말했다.
"너무 신경쓰지 마. 지금 좀 까칠한 시기니까.─마법의 날? 셜리가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아니 그런 건 아니고."
대위님이 예민한 이유를 사실 그대로를 말할 수는 없기에 나는 조금 말을 돌려서, 그리고 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사실 나도 대위님 의견에 어느 정도는 동의해."
"예?"
"안 싸웠으면 좋겠어. 너 같은 아이들이 총을 잡고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거, 마음에 안 드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그래, 알아. 단지……."
네우로이가 없는 세계.
전쟁이 없는 세계.
총 같은 건 필요 없는 세계.
흘러넘치는 기적인 마법이, 언제나 타인의 행복을 위해 사용되는 세계.
이런 아이들이 총을 들고 싸우는 게 아니라, 사소한 일들로 고민하고 웃을 수 있는 포근한 세계.
가끔 그런 꿈과 같은 세계를 생각한다. 유토피아는 현실에는 없기에 유토피아라고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갈망하는지도 모른다.
요시카와 리네트를 봤다. 그 뒤에 셜리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냐를.
"그 마음의 방향이 전장으로 향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야."
그렇게 말하며 난 웃었다.
*****
옛날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뭐, 네우로이가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겠지."
그리 말하며 식사를 재개하는 세라의 모습에 나는 생각했다. 이 녀석만 이런 건가 아니면 다른 이로쿼이 애들도 이런 건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말한다. 때때로 아주 먼 미래를 생각하듯 말한다. 생각의 깊이가 다르다는 걸 가끔씩 느낀다.
단지 사고방식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애늙은이 같다고 놀리곤 하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네우로이가 사라지면, 이라.
군 인이 아닌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곤 한다. 지금까지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아니, 생각은 했었지만 잊어버린 건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출격 속에서 자연스럽게 잊혀진 걸지도 모른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전장을 왕복하다보면 미래 같은 걸 고민할 틈이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세라는 아니다. 전쟁 자체도 싫어하지만, 위치들이 전장에 나서는 것을 특히나 싫어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안타까워 하는 게 옳으리라. 다른 미래를 고민하지도 못한 체 산화하는 위치들의 모습을 견디지 못해 한다. 그래서일까.
"이로쿼이 아이랑 통신을 했어."
격 추당하기 전 어느 날, 세라는 그렇게 말했다. 그때의 표정은 기뻐하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표정이었다. 자신 때문에 군에 남았다는 아이의 말이 마음에 걸리는 듯 했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하루 종일 고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먼 길을 떠난 아이를 생각하는 부모 같았다. 그러한 사람이다. 세라는. 그래서 항상 허리가 아프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전장으로 나선다. 자신이 나가지 못하면 이로쿼이 아이들이 전장으로 나가게 된다면서. 남들 때문에 몸 사리지 않는 바보다. 그래도.
"뭐, 그렇겠지. 네우로이가 사라지면 만사 OK니까."
그리 말하며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그래서 너를 싫어할 수가 없는 거야 세라.
*****
눈을 떴다. 그리고 하늘과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쪽에 있는 태양. 마녀사출장치가 있는 순양함 갑판 위로 내려앉는 그림자들.
슬슬 시간이 되었겠다 싶어서 심호흡을 두어 번 하고는 천천히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러한 내 모습에 셜리는 곁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루키니를 깨웠다.
"우웅……. 몇 시야?"
"16시 30분."
셜 리는 시계를 보고 시간을 알려주었다. 작전 개시 30분 전이었다. 태양의 위치를 보고 대충 맞춘 시간이 맞았군.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조사부에서 예상했던 그 시간이 되서야 네우로이는 전투 공역에 도착할 듯 싶었다. 왠일이니. 시간 개념이라는 건 아주 오래 전에 날려버렸던 애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여튼 전투 준비를 위해 스트라이커 유닛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자니 501 멤버들도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건 에이라와 사냐였다. 괜찮을까. 특히 사냐는 아침에 회의랑 이곳 임시기지인 경순양함으로의 이동 등으로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할 텐데. 걱정거리를 얘기하자 사냐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러니까 좀 더 사람들 좀 징발해 봐 세라-. 힘 좀 내보라고 전사장님-."
에이라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말이다.
"징발해봤자 증발할 게 뻔한데 어떻게."
함 선은 네우로이의 대구경 빔을 회피할 수 없을 테고, 설령 회피한다고 해도 소규모 해일을 일으키는 수준의 물보라가 솟구치니 버틸 수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 좀 쉴 수 있는 경순양함을 부대별로 하나씩해서 네 척이나 보내준 게 어디냐 싶을 정도다. 마녀는, 글쎄. 인근 마녀들은 거의 다 긁어오지 않았나. 이제는 더 구해온다고 해도 작전 시간에 맞춰 투입할 수도 없고. 전투기는……. 왠지 모르겠지만 전투기 부대의 지원은 상부에서 거절당했다. 뭐냐. 뭐가 문제냐. 교전비냐. 정치적인 문제라고 하면 사령부를 갈아엎어 주겠어!
투덜거리면서 스트라이커 유닛을 장착했다. M2가 하나씩 더 붙어 이게 과연 하늘을 나는 장비가 맞을까 싶은 외형이 된 내 유닛을 보고 있자니 싱숭생숭한 기분이다. 아침에 회의 끝나고 어제 저녁에 못 했던 12.8cm와 155mm 사격 연습으로 냅다 쏴갈겨서 스트레스는 풀고 왔다고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작전 직전이 되니 다시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 같다. 안 쌓이면 그게 더 신기하겠지만.
……생각해보니까 그거 다 쏘고 나니까 허리가 너무 쑤셔서 요시카에게 마법으로 치료받았으니까 스트레스 풀었다고 하기에는 좀 그런가. 역시 지금 포 구경은 지금이 적당한 것 같다. 그러니까 화력보완계획 같은 거 집어쳐라 사령부. 한 사람의 인생과 건강이 달려있단 말이다!
"잊고 있는 것 같아서 해주는 말인데, 88mm와 105mm도 항공보병이 매고 다닐만한 무장은 아니잖아?"
"……."
잊고 있던 사실을 정확하게 짚어주시는 에리카 중위님. 그렇습니다. 항공보병은 포를 들고 날지 않습니다 여러분. ……난 뭐야.
좌절감에 휩쌓여 축 늘어진 내 어깨를 루키니가 토닥거려주었다. 고맙다 루키니. 엄마는, 이 아니라 언니는 루키니가 있어 기쁘단다.
어 찌되었든 별 문제 없이 작전 개시 시간이 되자, 우리는 하나씩 사출장치의 힘을 빌려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른 부대의 마녀들까지 합쳐 40여명의 소녀들이 편대를 이뤄 나는 모습은 장관이었지만, 사지가 될지 모를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러고보니까 오늘 저녁 뭐야?]
[소세지 튀김.]
[뭣!?]
[가뜩이나 살찌는 소세지를 튀겼다고?!]
[악마다! 오,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씁쓸함을──
[닥쳐! 오늘 레이드가 끝나고 더 달라고나 하지 마! 수량 부족하니까!]
[음!]
[음!]
[그렇다면 먹을 수 밖에 없군!]
[강탈이다!]
[남는다면 먹지 않겠지만 부족하다면 약탈이다!]
[야, 이 X들아!]
감출 수가──……
[어, 잠깐만. 그러고보니까 우리는 오늘 저녁 누가 해?]
[밥 얹혀놓고 왔어.]
[만세! 사랑해 엘리아!]
[왜 밥인데? 빵 없어? 빵?]
[보급 나온 쌀 먹어 치워야 하니까.]
[헛, 그렇다면 반찬은?!]
[고기!]
[고기!]
[고기!]
[찬양하라! 닭고기를 찬양하라!]
[오오오오!]
……없다…….
뭐 랄까. 인컴을 타고 전해지는 다른 부대 저녁 논쟁을 듣고 있자니 갑자기 긴장감이라던가 고민 같은 게 확 사라진다. 그래, 에이스 오브 에이스들만 모아놓은 501은 둘째치고, 다른 부대들도 다들 베테랑들만 있으니까 전투 직전의 긴장감 같은 건 없겠지. 사망 플래그 같은 느낌도 없잖아 있지만 늘 하던대로 하면 큰 문제 없이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으리라.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셜리와 루키니는 대놓고 폭소중이고, 다른 사람들도 피식거리고 있었다. 요시카와 리네트 둘 만이 당혹스러워하고 있었지만, 뭐, 익숙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저녁밥 뭐야?"
"우왓, 세라가 저녁밥 메뉴를 묻기 시작했어!"
"큰일이다! 벌써 전투가 시작됐나!"
"마지막으로 세라가 뭔가를 먹은 게 언제였지?!"
"……."
아니, 이 사람들이 사람을 아귀 취급하고 있어? 두고보자. 내 이 원한은 부대 식량 저장고 재고를 중파 이상으로 격파하는 것으로 보여주겠어!
"가능한 살살 부탁해요……."
"적당히 말이지."
좀처럼 보기 드문 미나 대장님의 곤란한 미소와 진심 가득한 사카모토 소령님의 얼굴을 보았다. 아니, 진심으로 대응하시면 제가 뭐가 됩니까. 내가 그렇게까지 부대 식량 사정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건가.
그렇게 농담과 진담을 주고받으며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적 발견."
우리의 적─네우로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
NG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바르크호른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시간에 누가 방문을 두드린단 말인가.
심지어 그 소리도 그리 크지 않았다. 신경쓰이는 고민을 애써 떨쳐내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고 하는 이 순간이 아니었다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지?"
"……미야후지 요시카입니다."
그 목소리에 바르크호른의 몸이 경직되었다.
"……무슨 일이냐."
잠시 고민한 끝에 문을 열자, 잠옷을 입고 베개를 껴안은 요시카의 모습이 나타났다. 왜 이 아이가 지금 이 시간에 내 방문을 두드리는 걸까.
그 고민은 곧바로 나온 요시카의 대답이 해결해주었다.
"같이 자면 안될까요……?"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과는 달리 바르크호른의 마음은 한없이 소란스러워졌다.
누가? 네가? 어디서? 여기서? 내 침대에서? 왜? 뭐지? 하르트만의 장난인가? 아니면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헛것을 듣고 있는 건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공황 상태에 빠진 바르크호른에게 요시카는 본의 아니가 결정타를 날렸다.
"그게, 저기……. 포 소리 때문에……. 떨림이 멈추지 않아서……. 안될까요?"
조심스럽게 올려다보는 요시카의 모습에 바르크호른은 머리 뒤쪽에서 뚝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꼈다.
"무무무무무무문제없다!!!!"
진정하세요 바르크호른 씨. 아직 당신의 호감도는 마이너스 상태라는 설정입니다.
"상관없다! 문제없어!"
"바르크호른 씨?"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자자!"
그 리고 함께 침대에 누워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경직된 바르크호른과, 그런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지금 부대에서 잘 할 수 있을지 고민 상담을 신청해온 요시카가 서로 이것저것 얘기하며 이해한 끝에 마음을 터놓게 된 것은 하룻밤의 기적. 다음 날 사이좋게 얘기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부대원들은 당황스러워했다나 뭐라나.
"이게 왜 NG인 거야……."
진심으로 우셔도 곤란합니다 바르크호른 씨.
*****
<<- 결국 피그마 에이라를 질렀습니다. 언젠가 사냐도 구할 수 있는 날이 오겠죠.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위치스 캐릭터는……. 딱히 없네요. 뭐, 그러니까 세라를 투입시켰겠지만요. 그렇다고 애정이 없는 게 아니라 이거다 싶은 걸 고르기 어렵다는 겁니다. 캐릭터보다는 세계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요.
여튼 에이라가 모니터 옆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안 쓰는 거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 제가 보는 위치스 팬픽은 아브공군 님의 쏙독새 이야기, InYou 전투폭격기, 라디오노이즈 님의 에이왁스, 메이사이님의 창공의 배달부, 하늘아리님의 마탄의 사수, 아스타르테스 님의 작은 위치 이야기, Hydronica님의 그리고 위치는 강하한다, 마이레 님의 솔 위치 등등. 순서는 생각나는데로입니다.
많네요. 이제 제가 없어도 될 만큼 <-
- 수요일에 라디오노이즈 님과 저녁을 먹었습니다. 같은 학교입니다. 과와 학년은 다르지만요. 으악! [?]
- 2월 5일 입대입니다. 102보충대라네요.>>
위 내용은 입대 전, 그러니까 12년 12월 언저리에 작성했던 후기가 될 것들[…]입니다. 뭐 여튼.
진짜 후기는 아래에 계속됩니다. <-
- 포상 휴가 나와서 복귀날에 하나 올립니다. Wynn님의 부탁과 이제는 올려야지 하는 생각에 이제서야 한 편 올립니다. 이게 얼마만이야 대체. 전역은 11월 4일입니다. 말출 때 한 편 더 올……라갈지 안 갈지 모르겠네요.
- 요즘에 위치스 팬픽이 많아서 좋습니다. 잡고 볼 시간은 애매한 게 문제지만요. 이놈의 군대. 이놈의 사지방 자리…….
- 아시는 형님의 친구분이 경계선상의 호라이즌 번역 중이시라는 얘기라던가, 워해머 유저들 가운데 문넷에서 포병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라던가, 러브 라이브 극장판 예매를 못한 현직 검사가 사재기 한 인간들 맹렬하게 뒤쫓고 있다더라, 라노베 집에 몇 권씩 있느냐 등등. 어제 만난 분들과 이것저것 얘기했습니다.
- 스트라이크 위치스 X 칸코레 X 걸즈 앤 판처 팬픽 같은 걸 구상하고 있습니다. 어제 만나신 분께 그런 거 안 쓰시냐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군대 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지 싶었습니다. 시간되면 자창게에 어떻게 쓸 건가 올려볼 계획이기는 합니다만. 언제나 그렇듯 연재 계획은 전역 이후입니다. ……생각해보니까 나이트런이랑 로그 호라이즌이랑 워해머랑 기타 이것저것 계획한 게 많네요. ……내 무덤을 내가 파고 있나……. <-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무기 고증 지적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은 반영하기 어렵습니다. […]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1화를 타입문넷에 2010년 3월 29일에 올렸으니까, 여기까지 오는데 4년 5개월 정도 걸린 건가...
[단편][동방] 그녀에 대한 단상 -下-
메이린? 누군지 모르겠는데. 아, 아아 그 홍마관 문지기?
응. 기억해. 홍마관 녀석들이 전부다 날 바보 취급하는데 ─실제로도 그러하지만 지적하지 않았다.─유일하게 바보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거든.
여름?
몰라. 여름만 되면 기억이 사라지니까.
아, 홍마관 지하에서 있었던 기억은, 으음, 날듯말듯한데......
아, 기억나. 문지기가 거기에 집어던졌던 것 같은데.
뭔지 모르겠지만 시원하게 해준 대가로 문지기들한테 얼음 한 덩어리씩 줬던 것 같기도 하고.
그 대장 문지기한테는 한 열 개 줬던가?
뭐야 그 눈은? '용케 기억하고 있군, ⑨주제에.' 하는 것 같은데?
다른 얘기? 놀라운 거? 아, 하나 있어.
음, 제일 놀랐던 게 아마 얼린 개구리에 놀랐던 일일까.
놀랐다고 해도, 다른 녀석들처럼 '우와아아앗!' 이 아니라 '오오오오!' 하는 거라서 말이지.
뭐라고 했더라. 중국 음식은 부모님과 책상과 비행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재료가 될 수 있다고 하던가.
어떻게 조리했는지 모르겠지만 얼린 개구리로 꽤 맛있는 음식을 해줬어. 아, 그래! 얼음 볶음밥! 뜨겁고 매콤한 밥알 위에 얼음 알갱이가 그대로 살아있는 거였어. 나중에 또 해주려나.
하여튼 그걸 만들어주면서 어머니가 해주던 음식이라고 하더라고.
그러고는 내 꺼말고 자기 꺼 조금 먹다가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봤어.
눈가가 반짝였던 것 같은데 난 먹기에 바빠서 잘못본 걸지도 몰라.
나중에 보니까 울면서 밥을 먹더라? 역시 내가 구해준 얼린 개구리가 밥맛을 끌어올린 원동력일거야. '엄마, 엄마...' 하고 울면서까지 싹싹 비우는 걸 보니, 나중에 다시 구해다줘야겠어.
-호수 근처의 ⑨OOL한 바보 요정
ㅡㅡㅡㅡㅡ
아, 그일은 아직도 기억해.
그게 아마 여름이었지?
언제나처럼 미니 팔괘로로 화려하게 홍마관 앞을 쏴날렸는데, 평소에는 날아가면 그대로 꽂혀버리던 녀석들이 계속 일어서서 내 앞을 막는 거야.
하나가 쓰러지면 옆에서 끌어당겨 일으키고, 또 하나가 쓰러지면 다시 일으키고......
코끼리에 대항하는 개미떼 같았지.
서로의 어깨를 걸치고, 손을 맞잡고, 허리를 둘러메고, 힘이 풀려가는 다리를 쓰러진 동료들이 부축하고......
뭐랄까, 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
문지기를 중심으로 필사적으로 일어나서, 아니면 기어서라도 나를 막으려드는걸 보니까 지금까지 내가 별 생각없이 마스터 스파크를 쓴 게 무슨 죄악같더라고?
꼬마 애들이 합심해서 근사한 모래성을 만들었는데 그걸 보고 '좋아, 잘했어!' 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이것도 모래성이냐? 와하하하핫!' 하며 짓밟는 못되먹은 인간이 된 것 같은 거야.
그리고 솔직히 감탄도 했고.
맨날 내가 정문을 뚫어도 한방에 날아가서는 여기저기 꽂혀서 웃긴 모습만 보여주다가 이렇게 진지하게 날 막는 걸 보니까 가볍게 파츄리 책 좀 몇 개 빌려가려고 하는 내가 참 초라해보이더라고.
그 왜 있잖아, 목적의식인가, 의무와 권리인가.
나는 단순한 목적인데 쟤네들은 의무인 거야.
그게 딱 머릿 속을 촥─ 하고 지나가는데 이야, 이게 말로 설명할 수가 없는 기분이더라고.
거기다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눈빛은 또 그게 아니란 말이지.
그때 그 중국이 외치더라고.
"오늘은 뚫리지 않는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문지기 애들이 다 그 말을 따라하데?
처음에는 시장통 같더니 나중에는 응원단 저리가라 할 정도로 딱딱 맞춰서는
"오늘은 뚫리지 않는다!"
"오늘은 뚫리지 않는다!"
"오늘은 뚫리지 않는다!"
그걸 보니까 이제 머리 속에 생각이 하나 탁 떠오르지.
그래, 오늘은 내가 져준다, 하는 거.
맨날 이기는 게임은 재미없잖아?
쟤네들도 가끔 이런 날이 있어야 일할 맛이 나지.
그리고 기합의 차이라는 것도 느껴졌고.
"기합의 차이인가. 오늘은 돌아가겠어.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지고, 브레이브 파이터즈!"
음? 파이터즈가 아니라 가디언즈라고?
뭐 어때. 의미만 통하면 됐지.
하여튼 그날 저녁에 문지기 애들 전부다 밤참새네 포장마차에서 막 퍼마시더라고.
낮에 나 막았다고 보너스 조금 받은 것 같기는 한데 그거 낼 돈이 될까 싶은 양이었지.
게다가 얘들 월급이 짠 건 환상향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거든.
저기 마을의 애들 용돈의 한 10배 정도?
의식주는 홍마관에서 받쳐준다고 해도 말이지, 값싼 포장마차도 제대로 못가서 적당히 빼돌린 쌀로 만든 막걸리랑 남은 음식들을 조리해서 그 날의 해후로 삼는 애들이 할 짓이 아닌 거야.
뭐, 남은 음식 조리라고 해도 중국 녀석 요리 솜씨가 의외로 훌륭해서 원래 이런 게 아닐까 할 만큼 만드니까 문제는 없지만.
전부다 술에 취해가지고는 나도 그 사이에 몰래 껴서 마셨는데 유일하게 정상적인 녀석이 중국이었거든?
그때 밤참새가 중국한테 가더니 뭐라고 속삭이는데, 아마 돈 내라고 하는 거였을 거야.
중국이 보너스 주머니를 줬는데 밤참새가 그걸 세보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더라고?
돈이 모자라는구나, 하는 생각이 딱 들대.
중국이가 그걸 보고는 난처한 얼굴로 고민하다가 잠깐 자리를 비웠어.
난 그때 얘가 날른 줄 알았지.
사실 밤참새 얘도 이 바닥에서는 봉이거든.
저승의 무한 위장에게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이리저리 빼앗기는 게 얘 사는 삶이라서.
향림당에서 뒷받침을 해준다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몰라. 맨날 적자같은데도 계속 장사하는 걸 보면.
하여튼 잠시 후에 중국이가 돌아와서는 다시 대금을 계산하더라고.
나중에야 그게 얘가 새옷 사겠다고 저축하고 있던 돈이라는 걸 알았지.
......그 알지? 마지막에 가장 작은 빵을 받으면서도 언제나 감사 인사를 하는 애 이야기.
왠지 그게 떠오르더라?
그 뒤로는 한동안 홍마관을 갈 때 뒷쪽으로 경유했어.
적어도 정문이 뚫리지는 않았으니 걔네들이 심하게 욕먹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다가 폭설이 지나가고 나중에 다시 한 번 대문으로 가봤지.
이제 다시 정문을 뚫어도 괜찮겠다 싶었거든.
폭설도 지나갔으니까 화려하게 신고식을 해보고 싶기도 했고.
그런데 막상 마스터 스파크를 날리고 가보니까 안보이잖아.
이상하게 생각해서 눈속에 처박혔다가 간신히 빠져나와서 생체 바리케이트가 되어 있는 문지기들한테 물어봤지.
그러니까 일주일 내내 끙끙 앓고 있다데?
찾아가보니까 구들장인가 뭔가 뜨끈뜨끈한 데서 팔자 좋게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완전히 다 죽어가는 거야.
"우와, 나 이 녀석이 끙끙대는 거 처음 봤어."
반쯤 장난 어조로 말했는데 부관이라는 녀석이 그러더라고.
음식은 먹지도 못하고 묽은 죽과 물만 간신히 먹이고 있다고.
그 말을 듣고서는 주변을 살펴봤지.
이불이 무슨 솜이불이기는 한데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그것도 크기가 작아서 하나는 상반신, 하나는 하반신을 덮고 있더라고. 아마 부하들 거였겠지.
눈앞이 뿌옇게 되더라.
"......니들 참......"
그리고는 곧장 홍마관 본관에 갔지.
사쿠야한테 내가 보고온 참상, 그래 그건 진짜 참상이었어. 어쨌든 그걸 말해줬지. 덧붙여서 명색이 홍마관인데 문지기들이 왜 저렇게 구질구질하냐고도 해줬고.
그러고 나니까 사쿠야가 약간 얼빠진 표정으로 "에?" 하더니 곧장 가서는 이불이랄까 거적때기랄까 말하기 참 묘한 걸 덮고 있던 중국이를 그대로 보쌈해 대려가더라고.
그 뒤는 모르겠는데, 봄쯤 되서 날씨가 풀렸을 때 가보니까 할머니들 쓰는 것 같은 걸로 재활훈련하고 있데?
주화입마라나 뭐라나 그것 때문에였다던가.
그렇게 다 죽어가면서도 홍마관 문지기 때려칠 생각 안하는 거 보면 용하다니까 정말.
음? 개인적인 의견?
언제나 볼때마다 형편 없이 약하지만 밉상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렇잖아, 그렇게 바보 같이 순진해서는 미워할래도 미워할 수가 없다고.
-평범한 과잉 화력 방출 마법사
ㅡㅡㅡㅡㅡ
겨울 때는 모르겠어.
그때는 신년 축제 준비로 한창 바빴으니까.
눈이 오는데도 기어코 축제를 해내겠다고 하는 바보 녀석들때문에 힘들었다고.
그러고보니 너도 근하신년을 써달라고 나한테 달라붙었었지.
제대로 나가지도 않는 신문─취재를 포기하고 한방 날려줄까 하다가 참았다.─에 무슨 신년 축하 축전을 쓰라는 거야.
하여튼 그해 여름은 굉장했지.
태어나서 그렇게 비가 많이 오는 건 처음이었다고.
사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저기 삼도천 사신의 의뢰였다고.
이 세계의 비가 저승의 삼도천을 불어나게 하고 있다나 뭐라나.
이승의 물이 저승으로 흘러드는 건 분명 뭔가가 있는 것이니 조사해달라는 거였지.
별
수 있나, 사건 터지면 처리해야하는게 하쿠레이 신사 무녀의 숙명─당시 같이 있었던 유카리 씨의 증언에 비추어볼때 무녀가 움직인
이유는 습기로 인해 숙면을 취할 수 없었고, 차가 맛이 없으며 전병이 쉽게 눅눅해져서일 것이테지만 입에 담지는 않았다.─인데.
저승으로 물이 흘러들어간다는 말에 우선은 백옥루를 의심했어.
그래서 그쪽에 가보니까 벚나무와 집은 안 보이고 바다가 있는 거야.
잘못 온건가 싶어서 근처를 돌다 다시 신사로 돌아오니까 유카리가 차를 끓여두고 기다리고 있더라고.
비오는 날 어딜 다녀왔냐는 말에 자초지종을 설명하니까,
"백옥루 침수된지 꽤 되서 지금 유-코랑 몽몽이는 우리 집에 살고 있어. 며칠 전에 말했잖아?"
......확실히 그랬었지.
하여튼 그래서 다른 데를 찾아봤어.
영원정이나 향림당에도 들러보고, 삼도천의 상류로도 가보고, 구름 위로도 올라가보고.
마지막으로 가본 게 홍마관이었는데 거기서 홍미령, ......메이린, ......중국인가? 하여튼 중국─홍 메이린이라 알려주었지만 가볍게 무시하였다.─이랑 문지기들이 홍마관 입구를 막고 있더라.
쓰레기를 쌓고 진흙을 퍼서 틈을 메꾸는데 솔직히 왜 그러고 있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가.
어쨌든 일단 들어가야하니까 음양옥으로 날려버리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말이지.
어떻게 된게 걔네들 눈이 퀭한게 일주일 굶은 얼굴이였어.
그래서 물었지.
"너희들, 밥 먹은지 얼마나 됬어?"
아무 말도 안하더라.
묵묵히 쓰레기산─차마 그것이 무녀를 막기 위해 쌓은 바리케이트라고 말할 수 없었다.─만 지키고 있는데 옷을 보니까 흙바닥에 뒹굴었는지 지저분해서,
"그 옷 며칠 째 입고 있는 거야?"
라고 물었는데도 아무 말도 없길래 대답받는 건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물어봤어.
사실 제일 중요했는지도 모르겠네.
"씻은 지는?"
냄새가 심해서─아무렇지도 않게 무의식적으로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도 능력이라면 무녀는 이미 달인일것이다.─숨쉬기 힘들었던 건 그때가 처음일거야.
거기에 홍마관 문지기들은 요괴라고는 해도 여성이거든.
조금은 위생에 신경써줬으면 하는데 말이지.
그런데 그 때 문지기가 외쳤어.
"사적인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홍마관을 방문하신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부당한 이유일 경우 방문 거절 및 침입자로 간주하여 전력으로 격퇴시키겠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다고나할까.
그때는 그랬어.
그렇잖아? 넌 저기 호수의 얼음 바보가 너한테 "뭐라고 하던지 간에 제대로 기사로 내지 않을 거라면 신문 공장을 통째로 얼려주겠어!" 라고 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그냥 싹 쓸어버릴까 했는데, 보니까 불쌍하더라고.
제
대로 먹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하고 옷도 못 갈아 입으면서 이 빗속에서 죽어라 고생하고 있는데 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쌓아놓은
걸 치워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걸 치우면서까지 쳐들어가서 레밀리아를 만나야 할 용무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홍마관이 이 비의 흑막이라고 한다면 부하들을 여기까지 혹사시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었고.
나중에 다른 애들 말 들어보니까 문지기들은 아예 홍마관 외부 단체를 임시로 취직시켜 놓은 것처럼 취급받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몰랐으니까.
"뭐, 그 꼴을 보아하니 여기도 엉망인 것 같네."
그렇게 말하고는 신사로 되돌아오니까 유카리가 가르쳐주더라고.
환상향에 흘러넘치는 비는 바깥 세계가 말라들어가면서 수분이 모두 여기로 밀려들어오는 거라고.
진작에 말해주지 않은 잠탱이 요괴한테 부적을 날려주는 걸로 여름이 끝났지.
음, 그 해 여름 겨울에는 그다지 보지 못했는데 그 해 앞뒤로는 꽤 많이 봤지.
작년에는 신사에서 임시로 가을동안 일하기도 했고.
솔직히 나는 그 애를 문지기로 쓰기보다는 메이드로 일하게 하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해.
차 끓이는 건 보통 수준보다 약간 높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달인이니까.
신
사 경내 청소하고 먼지 안 나게 물뿌리고 잡초 뽑는 걸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 먹기 전에 다 해치우고, 여기저기 난 풀들을 다
알아보고 식용 약용 구분해내고, 마을 사람들한테도 인기가 있는지 좋은 물건들 싸게 받아오고, 그덕분인지 신사 방문객들도 늘어서
새전함도 평소보다 2배 정도 찼었고.
내가 입는 것 말고 평범한 무녀복이 잘 어울리는걸 보고 계속 입으라고 했었는데 가을 내내 그것만 입더니 나중에 돌아갈 때도 그걸 입고 돌아가려고 했었지.
본인은 자각도 없더라고.
데리러 왔던 사쿠야가 한숨을 내쉬면서 "수문대 시절에 입던 옷은 어디다 둔 거니?" 라고 묻자 그제서야 원래 입고 왔던 옷으로 갈아입고 왔지.
뭐, 그 무녀복은 아예 줘버렸어.
그 녀석이라면 소중히 쓸 것 같고, 나중에 또 불러서 일 시켜볼까 하고 있으니까.
장점? 일단 밥상이 풍성해져.
잡초랑 별 볼일 없는 조그마한 생선, 혹은 버리는 고기들로 다양하고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내는 것도 능력이니까.
거기에 귀찮은 가사를 모조리 떠넘길 수 있지.
뭐가 악질 고용주야? 적어도 나는 매일 씻을 수 있도록 해주기는 한다고? 밥도 제대로 주고. 게다가 최소한 3일에 한 번은 옷을 갈아줬어. 빨래야 그 녀석이 했지만.
개인적인 의견이라, 문지기말고 다른 것을 시켜라.
그냥 내가 빼와서 계속 신사 잡일 시키고 싶어.
들어보니까 신사 새전에서 그 애 월급을 빼더라도 충분할 것 같으니까.
게다가 그 애가 신사일을 하는 동안은 새전도 늘어나니까 효율적이지.
-무력개입식 전방위 범용 초고속 기동 무녀. 부제:주석(태클)이 너무 많았다.
ㅡㅡㅡㅡㅡ
......어째서 내가 그렇게 악독한 인상이 되어 버린 거야?
천구,─순간 세계가 멈췄던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착각일 것이라 믿고 싶다.─너 때문인 걸까.
어쨌든 메이린은 우수하지는 못하지만 성실한 아이야. 음? 이름을 제대로 부른다고?
당연하잖아, 부하의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해서야 상관이라고 할 수 없는 건.
지금 그 애는 좀 곤란해.
홍마관의 수문장으로서 조금 위엄을 가져야 하는데 맨날 깨지기만 하니.
게다가 요 몇 해 동안 하쿠레이 신사에서 일하다보니까 아예 그쪽에 머무르려고 하는 분위기란 말이지.
인간 마을의 꼬마들과 친해지는 건 나쁘지 않지만, 그애들이 메이린을 찾아와서 함께 놀다가 마을로 바래다 주는 건 곤란하고.
홍마관의 위상도 문제고 근무지를 이탈하는 것도 나쁘다고.
뭐, 그건 최근에 주의를 줘서 부하를 대신 보내는 걸로 됬지만, 어째서 그게 내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이 된 건지 알고 있어? 하아, 됐어.
어쨌든 그 해는 여러가지로 다사다난한 해였지.
여름은 그렇게 비가 쏟아지더니 푹푹 찌는 더위가 찾아왔었고 그것도 모자라 겨울에는 홍마관이 덮일 정도로 엄청난 눈이 내렸으니까.
그러고보니까 그 해에 메이린이 흑백과 무녀를 돌려보냈었지.
최초이려나? 하지만 흑백은 그 뒤로 정문 돌파 대신에 측면 돌파로 전략을 바꿔서 내부 수리 담당들이 고생했다고. 무녀야 뭐 그 때만 오고서 다시는 안왔으니까 문제 없지만.
아, 그애들 여름에 숙소가 날아가서 홀에서 잤었지.
비에 쫄딱 젖어서 홀을 물바다로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식료품을 훔쳐서 그대로 먹는다던가 해서 고생했다고.
내가 제대로 밥을 안주네 어쩌네 하는데, 그건 말 안듣는 메이드 요정들 때문이야.
왜 그렇게 수문대랑 사이가 나쁜지 모르겠어.
메이린 걔도 참 말 안 들어.
빈 방 하나 빌려줄 테니까 거기서 자라고 해도 부하들은 고생하는데 자기만 편하게 잘 수 없다는 정신은 좋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식료품 탈취에 미끼가 되는 건 조금 틀린 방법이라고 생각해.
바보라니까, 그 애는.
마음먹으면 메이린과 수문대 모두 칼집을 내줄 수 있지만, 새벽에 양손으로 가득 식료품을 챙겨서 달아나는 그 애를 보면 '하, 어쩔 수 없네.' 하고 그 애만 혼내고 말지.
즐기는 것 같다고? 그럴지도 모르겠네. 조금만 건드려도 화들짝 놀라는 걸 보면 계속 놀려주고픈 기분이 드니까.
하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훔친 식료품 양만큼 메이린 급료에서 제외했지.
한 1년 뒤에 수문대 애들이 돈 모아서 메이린 새옷 해줬지 아마?
슬슬 새옷을 해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평소에 정규복 빨고 나면 무녀복을 입고 있길래 조금 심술이 나서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그애들이 먼저 해주더라고.
이불을 둘둘 말고 있었다거나 알몸으로 있었다면?
흠, 어땠을까나. 무녀의 말을 들어보면 잡일도 잘하는 것 같으니까 메이드 복을 입혀서 이쪽 일을 시켰었겠지.
노동자 탄압? 메이린은 홍마관의 피고용인이야. 고용주가 무슨 일을 시키던지 해야하는 게 그 애의 입장이라고.
......새전의 일부로도 먹여살릴 수 있을만한 쥐꼬리만한 월급─무녀의 의견이라고 말해주었지만 어째서인지 나를 노려보고 있다.─밖에 안 주는 악덕 상사?
다음 해부터는 나름 급료도 올려줬고 초소도 세워줬고 정규복도 새로 갈아줬으면 됬지 뭘 더 바래?
겨울?
말 돌리려고 하는 것 같지만,─또 시간이 멈춘 것 같다. 메이드장의 위치가 조금 변했어!─ 응해줄게.
글쎄, 그 해 겨울이라면, 기를 이용해서 눈을 날리는 걸 보고 주변 제설 작업을 명했었지.
역시 이런 겨울에 제일 편한 건 저기 영원정 근처 대나무 숲에 사는 그 애일지도 몰라.
흑백이야 뭐, 눈 치우는데 마스터 스파크를 뻥뻥 날려댈 것 같고.
어쨌든 제설 작업을 하면서 근처 숲에서 나무를 꺾어오길래 뭘 하나 봤더니 장작을 패서 자기네들이 개조한 숙소의 땔감으로 쓰더군.
그걸 보고는 나름 편하게 사는 것 같아서 신경쓰지 않고 지냈어.
수문대보다 더 급한 일들이 가득했기도 했으니까.
그
런데 겨울 끝나갈 때즘 되니까 한동안 보이지 않던 흑백이 와서는 하는 말이 "니들도 참 정없다. 부하들이 다 쓰러져가는 흙집에서
구멍 숭숭 뚫린 누더기 덮고는 쓰러져서 일주일 내내 의식불명이라는데 문병 한 번 안 가냐." 이러는 거야.
솔직히 놀랐어.
그렇잖아? 건강 빼면 시체인 애가 쓰러져서 끙끙대고 있다고 하니까. 가서 보니까 실제로도 그랬고.
속옷만 입고 있길래 누더기─수문대 입장에서는 이불이지만 지적하지 않았다.─째로 홍마관에 대려와서는 내 방에 두고 간병했지.
......빈 방에 놔두고 요정들 시키면 제대로 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내가 하려고 마음 먹었으니까 이왕이면 가까운 쪽이 낫잖아.─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일주일 정도 지나니까 눈을 떴어.
기를 너무 많이 써서 주화입마에 빠졌었다고 스스로 말하더라고.
이불을 꼼지락거리면서 부끄러운 듯이 말하길래 꿀밤을 한대 먹여줬지.
이렇게 쓰러져서 여러 사람 곤란하게 하지 말고 평소에 자기 관리 좀 하라고.
한 달 정도 지나니까 몸을 일으킬 정도가 되어서 보행 보조기를 주니까 그걸로 재활 훈련을 하더라고.
그 애가 그 정도였으니까 보통 인간이었다면 어땠을까 싶어.
그러고 한 달 후에는 다시 수문대로 복귀했고.
마지막이라니, 개인적인 의견?
글쎄, 수문대 말고 다른 일을 시켜볼까 진지하게 고민중이라고 전해줘.
말 잘 전해야 돼. 자기가 잘린 줄 알고 짐 싸버리면 이쪽도 곤란하니까.
플랑 아가씨의 보좌 역, 이라고 전하면 어떤 표정이 될지 궁금한데?
-로드롤러는 전수받지 못한 스탠드 하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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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도 완료되면 옮겨달라고 해야하는 건가요?
그리고 하루 이틀 후에 올린다고 하고 사흘 만에 올리기 [도주]
이 글은 http://blog.naver.com/mileunai 와 http://www.typemoon.net/ 에도 올라갑니다.
[단편][동방] 그녀에 대한 단상 -상-
이 글은 지금까지 단순 바보에 언제나 부실한 덜떨어지고 신체 특정 부위만 큰 바보로만 알려져 있었던 한 여인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하여, 몇 년 전 환상향을 휩쓸었던 살인적인 더위와 경악스러운 태풍, 그리고 악몽같았던 폭설 속에서 그녀가 어떤 활동을
벌였었는지에 대한 목격자들의 단상을 집약하여 작성한 문서이다.
본래는 본문에 실어 모두에게 공포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조사 도중 이 사실이 당사자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알려져 주요 정보로써의 가치를 잃어버린바, 보존 기록으로 처리하여 보관한다.
-붕붕신문 기자 겸 편집자 샤메이마루 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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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때가 환상향 최고의 여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바깥 세계의 더위가 모조리 환상향으로 밀려들어왔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더위였죠.
아마 그분이 아니었다면 전 분명 더위에 죽었을 겁니다.
아니, 저뿐만이 아니라 저희 홍마관 수문대가 모조리 몰살당했겠죠.
사쿠야 씨가 이끄는 메이드대야 언제나 적정 온도에서 변동이 없는 홍마관 안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모를 겁니다.
찌는 듯한 여름에도 정규복장을 착용하고 순찰해야하고 살은 에는 추위 속에서도 관의 위엄을 위해 코트 하나 입지 못하는 수문대는 참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수문대를 때려치지 않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대장 메이린 님 덕분입니다.
에,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까요.
몇 년 전 여름, 그 엄청나게 더웠을 때 말입니다.
네, 그 ⑨OOL한 얼음 요정이 호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녹아내려가면서 코마치 씨에게 죽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심도 깊고 철학적인 논제를 던졌을 때 말입니다.
바보라고 생각했던 애가 지상 생명체를 몰살시키려는 듯한 열폭풍을 지상으로 방출하고 복사열이 끓어오르던 땅바닥에 정좌를 하고서는,
"생각하기에 고로 존재한다고 한다면, 죽은 자들은 생각이나마 하고 있기에 존재한다는 거지. 그렇다면 죽어서 물리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관찰자를 잃어버린 자들은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면 영원이 관측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걸까? 그리고 그것을 죽는 것이라고 하는 건가? 이 명제를 증명하려면 우선 내가 죽는 수 밖에 없는데, 실질적인 육체가 없는 요정은 우선 살아있다는 명제에 합당하는 건가? 만약 내가 이미 죽어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코마치 씨는 내가 이미 죽어있는데도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염마 님에게 혼쭐이 날 것이고, 내가 살아있다고 한다면 코마치 씨는 제대로 일을 한 것이니까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겠지. 하지만 이 경우 영혼과 육체에 관한 논증이 제대로 이루어져있지 않으니까 절대적인 증명은 불가능하고 상대적으로 살아있는가 죽어있는가를 증명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요정이 살아있는 존재인가라는 논제로 되돌아가게 되어버리니 곤란해."
더위 먹었던 게 확실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 바보 요정이 어려운 말을 할 리가 있나요.
만약 그랬다가는 세계 멸망의 징조일 겁니다.
그 뒤로도 한참을 말하는 걸 메이린 님이 잽싸게 구해와서 홍마관 지하의 얼음 창고에 넣어뒀지요.
나중에 메이린 님은 사쿠야 씨에게 멋대로 외부인을 관에 끌어들였다고 혼이 났지만, 그래도 "그 애가 살았으면 된 거야." 라고 말하시는 메이린 님의 모습은 정말......
아, 죄송합니다. 눈물이 났네요.
하여튼 간신히 정신을 차린 바보는 다음 해 여름, 매일같이 제일 더운 2시 쯤에 수문대 모두에게 주먹만한 얼음을 하나씩 쥐어주었습니다.
대장은 10덩어리였죠. 그냥 주고 싶다고 말한 걸로 봐서는 은혜를 기억한다기 보다는 본능으로 보답하는 것 같았습니다.
은혜를 갚는 건 좋았는데 양이 조금 많았습니다.
그러나 거절도 못하고 잔꾀를 부리지도 못하는 우리 대장님은 매일 주먹만한 얼음 10덩어리씩 먹고 결국 배탈이 났습니다만, 그래도 대장은 쉬지 않았습니다.
여름감기까지 겹쳐 건강미인이라는 사람이 새하얀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매일같이 서있는 것을 보는 저희들의 마음 속에서는 항상 폭포수같은 눈물이 흘렀습니다.
쓰러지기 직전의 대장은 하얀 천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메고 빗자루를 지팡이 삼아 후들거리는 다리로, 그러나 당당히 홍마관 정문 앞에 섰습니다.
혹시 기적이라는 게 있다면 그거겠죠.
여느 때처럼 마스터 스파크에 휩쓸려 날아가버린 대장와 저희 수문대는 필사적으로 일어섰습니다.
하나가 쓰러지면 옆에서 끌어당겨 일으키고, 또 하나가 쓰러지면 다시 일으키고......
코끼리에 대항하는 개미떼가 그랬을까요.
서로의 어깨를 걸치고, 손을 맞잡고, 허리를 둘러메고, 힘이 풀려가는 다리를 쓰러진 동료들이 부축하고......
서로가 서로를 부축하여 일어선 가운데 대치 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그때, 메이린 님이 외치셨죠.
"오늘은 뚫리지 않는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우리는 메이린 님의 말을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중구난방으로 난잡한 소음에 불과했던 우리들의 외침은 하나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뚫리지 않는다!"
"오늘은 뚫리지 않는다!"
"오늘은 뚫리지 않는다!"
생체 바리케이트+확성기가 된 우리는 필사적이었습니다.
결국 흑백이 우리에게 등을 보였습니다.
"......기합의 차이인가. 오늘은 돌아가겠어.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자고, 브레이브 파이터즈!"
그날 우리는 밤참새의 포장마차에서 첫 승리를 축하했습니다.
꽤 돈이 나갔을텐데 아무도 계산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음날 밤참새를 찾아가니, 이미 대금은 다 지불했다고 하더군요.
메이린 님은 흑백을 막은 것에 대한 보너스로 충당했다고 했는데, 확실히 보너스가 있었기때문에 그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었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게 나중에 본관 메이드들의 뒷담화를 듣게 되었는데, 우리 보너스가 메이드들 급료의 1할 정도였다는 겁니다.
평소에 친분이 있던 소악마에게 부탁해서 파츄리 씨에게 사쿠야 씨가 수문대에 준 보너스가 얼마인지 물어보게 해서 돌아온 답변은 뒷담화 내용 그대로였습니다.
네, 그게 보너스가 한 20배 정도 되야 포장마차 돈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시겠어요? 메이드들의 급료와 우리들 급료는 거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수입 정도로 차이가 난단 말입니다.
하여튼, 그럼 돈은 어디서 났는가.
메이린 님이셨습니다.
쥐꼬리만한 월급 '에헤헤'하고 푼수 같이 웃으면서 받아 되는대로 저축하면서, 새옷 사겠다고 한푼 두푼 모아왔던 자비를 모두 술값으로 처분해버린 겁니다.
그러고서는 하는 말이 "일년 정도 이 옷 더 입고 내년에 사면 돼." 였죠.
우리가 모아온 돈으로는 그 포장마차비 간신히 냈을 겁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대장에게 감사합니다.
하지만, 바보에요. 뭐든지 퍼주다가 어딘가에서 덜컥 죽어버릴 것 같다구요.
바보니까 뒷생각은 하지도 않고 자신을 깎아먹고 있어요.
......그래도 이런 사람이 대장이니까 수문대가 탈영없는 부대인 겁니다.
이 바보 같은 대장이 어디서 혼자 픽 죽어버리지 않도록 우리가 항상 감시하는 거예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아, 그 해는 또 태풍이 휘몰아쳤죠.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수문대는 초소도 없습니다.
잠이야 홍마관 제일 바깥쪽의 단체 숙소에서 잡니다만, 모이는 장소라던가 하는 건 홍마관 정원이나 정문 앞 같은 외부입니다.
햇빛이 내리쬐도 버텨야 하고, 비가 와도 비를 맞아야 하고, 눈이 와도 눈을 맞아야 하고, 우박이 떨어지면 그것도 맞아야 합니다.
하다못해 우비라도 지급해줬으면 합니다.
아니면 빨래라도 제대로 해주던가요.
우리들 빨래는 항상 물에 설렁설렁 헹궈서 대충 말려 뭉쳐서 단체 숙소에 던져두고 가는 메이드대를 보면서 우리는 항상 이를 갑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대장 빨래만큼은 좀......
아, 죄송합니다. 하아, 후우, 좀 진정하고 다시 할게요. 흑, 죄송합니다.
ㅡㅡㅡㅡㅡ
그녀는 한동안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린 후에야 간신히 눈물을 멈추었다.
그러나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 보여 함부로 말을 걸 수 없었다.
잠시 후, 굳은 결의를 한 듯한, 슬픔을 참는 듯한 눈과 울먹이는 얼굴로 그녀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ㅡㅡㅡㅡㅡ
그래요, 우리들이야 항상 제대로 일하지 못하는 부서라는 건 알고 있어요.
상대가 너무 강하다는 변명을 하지는 않습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홍마관 수문대입니다.
실제적으로는 항상 깨지고 부숴지는 부대라고 해도, 그 긍지와 자존심만큼은 살아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수문대 대장인 메이린 님은, 그분은, 그분 빨래 만큼은 제대로 해줬으면합니다.
우리 숙소에 함께 던져지냐구요?
아뇨.
당신은 빗물을 큰 통에 모아 세제도 없이 맨손으로 돌에 박박 문질러 때를 빼내고 있던 대장의 모습을 보셨어야 해요.
우리가 맨처음 그걸 목격했을 때, 우리는 화를 냈습니다.
이게 뭐냐고. 그래도 대장인데 왜 이런 것까지 하냐고.
차라리 저 버릇없는 메이드들 대신 우리가 하겠다고.
그랬더니 뭐라고 하셨는 줄 아십니까?
"맨날 뚫리는 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내 손으로 해야지. 내가 일을 제대로 못하는 건 사실이니까. ......미안, 너희들은 맨날 고생하는데 대장이 못나서."
ㅡㅡㅡㅡㅡ
여기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울음을 터뜨렸다.
주변에 있던 수문대들 역시 새하얗게 될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위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들의 눈가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으나, 숙연한 분위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다시 말하기를 기다렸다.
ㅡㅡㅡㅡㅡ
───하.
이 얘기는 그만하겠습니다.
하여튼 태풍 얘기로 돌아가죠.
절망적이었습니다.
단체 숙소는 이미 바람에 날아가버린지 오래라 우리는 밤늦게 홍마관 홀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아침 일찍 다시 관을 나서서 경비와 수문 업무를 봐야했습니다.
빨래요? 비가 오니까 몸만 움직이면 빨래가 된다고 하는 중간 관리급 메이드를 후려치는 바람에 내란이 일어날 뻔했지만 메이린 님이 필사적으로 사과한 덕분에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한 녀석이 바람에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4인1조로 서로 허리에 끈을 묶어 생존력을 높힌 우리들 앞으로 날아가버렸던 녀석이 되돌아왔습니다.
진흙투성이가 된 체 가까스로 생환한 그 녀석은 놀라운 정보를 알려주었습니다.
깡패무녀가 온다.
홍마관 인근의 숲에서 억수로 쏟아지는 폭우 덕분에 날아오는 것보다 기어오는, 반은 헤엄쳐서 온 게 더 빨랐다는 부하의 말에 나는 재빨리 대장을 찾았습니다.
기상이변과도 같은 폭풍우의 뒷배경에 홍마관이 있다고 판단한 깡패무녀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다.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관련되지 않았다고 해도 홍마관을 초토화시킬 것이다.
일반 수문대보다 더 힘들게 일하고 새벽에는 사쿠야 씨에게 칼집이 되고, 그럼에도 먹는 건 우리와 똑같으며 자는 시간은 우리보다 더 적은 대장은 퍼붓는 빗속에서 초췌한 얼굴로 제 보고를 들은 후,
"근처의 나뭇가지나 잡동사니를 모아서 바리케이트를 만들자."
처절했습니다.
뿌리째 뽑힌 나무와 굵은 나뭇가지, 바람에 날려온 쓰레기와 흘러넘친 빗물에 떠내려온 잡동사니들로 홍마관의 입구를 막고 삽 한 자루로 진흙이 되어버린 근처의 흙으로 틈을 메꾸고 그 뒤에서 쓰러지려는 바리케이트를 지탱하기를 몇 시간.
체력과 기력과 정신력 모두 바닥을 보일 즈음, 깡패무녀가 나타났습니다.
태풍 속을 날아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산뜻한 외형의 무녀는 당장에라도 음양옥을 발출시킬 것 같더니, 우리들을 보고는 한순간 멈칫했습니다.
그리고는 물었습니다.
"너희들, 밥 먹은지 얼마나 됬어?"
"씻은 지는?"
"그 옷 며칠 째 입고 있는 거야?"
......요괴지만, 그래도, 그래도 우리도 여자입니다. 그때,
"사적인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홍마관을 방문하신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부당한 이유일 경우 방문 거절 및 침입자로 간주하여 전력으로 격퇴시키겠습니다!"
뛰쳐나가 패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에 침묵하던 수문대 모두의 마음을 받은 것처럼, 대장은 그렇게 외쳤습니다.
빗소리에 사라질 법도 하건만, 지친 몸으로 낼 수 없을 법도 하건만 대장의 목소리는 우리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컸습니다.
저것이 얼마만에 들어보는 수문대 공식 멘트이던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바리케이트 맨 위에서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는,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쇠파이프에 홍마관을 상징하는 깃발을 멘 임시 깃발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쓰러지지 않도록 하고 있는 대장의 모습.
그리고 사실상 바리케이트의 가치를 상실한 쓰레기 산을 필사적으로 다시 세우는 우리들을 보며 무녀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바보 같았지만, 그 바보 같은 일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뭐, 그 꼴을 보아하니 여기도 엉망인 것 같네."
그말과 함께 무녀는 되돌아가버렸습니다.
무녀가 돌아가는 것에 긴장이 풀려 바리케이트가 완전히 무너져버려 파묻혀버리는 부하들도 나왔지만 곧바로 뚫고 나와 서로를 끌어 안으며 환성을 내질렀습니다.
흑백과 홍백의 침략을 저지했다고.
아마 최초였을 겁니다. 그 둘의 침공을 저지했던 것은.
ㅡㅡㅡㅡㅡ
거기까지 말을 한 그녀는 그리운 듯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어찌어찌 홍마관 정문 부근에 지어진 수문대 초소 건물 밖으로 여전히 홍마관의 수문장으로 일하고 있는 한 여성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ㅡㅡㅡㅡㅡ
인간도 그렇지만 요괴도 의식주는 필수입니다.
사는 곳이야 뭐, 홍마관이라는 이름에 비하면 부실하지만 나름 괜찮고, 옷도 빨래가 엉망일지언정 됩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밥은 제대로 줘야 되는 게 아닙니까?
지금이야 나아졌지만 그 폭풍 때, 삼시 세 끼 꼭꼭 챙겨먹으며 음식이 맛이 있었네 없었네 하는 메이드들을 보면서 우리는,
시간에 맞지 않는다며 밥도 못먹고 새벽에 몰래 주방에 들어가 조리는커녕 손질도 안된 식료품을 그대로 먹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희는 못들어갑니다. 주방.
사쿠야 씨의 영역이라서 저희같은 일반 요괴들은 들어가기도 전에 순살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냐고요?
......메이린 님이 스스로 제물이 되십니다.
일부러 요란하게 들켜 사쿠야 씨에게 죽기 직전까지 칼집이 되는 동안, 저희가 필사적으로 식료품을 탈취, 동료들에게 나눠주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장 굶어죽을지언정 이런 짓거리를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탈취해 굶주린 배를 채웠던 식료품들은, 모조리 메이린 님의 급료에서 '영구 삭감'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태풍이 지나간 지 1년이 지난 다음 해에야 그것을 알았고, 다 함께 운 뒤에 한 푼 두 푼 있는 돈 없는 돈 긁어모아 인간 마을에 부탁하여 메이린 님의 치수에 맞는 옷을 주문했습니다.
몇 년 동안 같은 옷만 입어 이미 헤질대로 헤진 옷을 입고 계셨던 메이린 님께 부대 모두가 바치는 선물이었죠.
선물받은 새 옷을 끌어안고 눈물을 글썽이던 대장의 모습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지금 저기 입고 계시는 옷이 그 옷입니다.
끝이 다 헤져서 새 옷 입으라고 하셔도 저 옷만 입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준 옷이라고 말이죠.
또 돈 모아서 새 옷 사드려야죠.
그 해 겨울이요?
네, 그때도 정말 얄짤없었죠.
추수를 하자마자 날씨가 추워지는데 그 어디더라, 바깥 세계에서 조선이라는데서 왔다는 요괴 덕분에 구들장이라는 것을 만들 수 있어서 살았죠.
그게 없었으면 우리들 다 얼어죽었을 겁니다.
어쨌든 가뜩이나 부족한 수문대 인원을 쪼개고 쪼개서 하나는 구들장 만들게 하고, 하나는 땔감 준비하게 하고, 하나는 경비로 돌리고 이렇게 해서 간신히 첫눈이 오기 전에 우리들 겨우내 따뜻하게 지낼 곳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가 좀 추웠던가요?
이게 땔감이 부족해질게 딱 보이더라구요.
그래도 땔감이야 근처 숲에서 해오면 되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폭설이었죠, 그 해는.
그것도 환상향에 기록적인 폭설.
홍마관의 제설 작업은 저희 수문대가 합니다.
봐요, 기본적인 수문대 업무, 경비, 외관 청소, 우리 숙소 땔감 찾기, 제설 작업, 기타 등등. 죽어납니다.
겨울 최고의 적은 바로 눈이었어요. 흑백도, 홍백도 눈이 하도 많이 쌓여서 안 찾아왔으니까요.
이게 눈이 그때 얼마나 왔냐면, 한 40m 정도? 본관 시계탑 높이가 한 100m 정도인데 그게 반 하고 약간 더 보이는 정도였으니까 그 정도 되겠네요.
이러다보니까 우리 땔감을 얻으려면 눈부터 치워야하는 겁니다.
우리도 당장 얼어죽을지 모르니까 필사적으로 땔감을 모으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죠.
우리는 메이린 님 덕분에 살았던 겁니다.
기氣를 이용해서 눈을 날려버리는 기술은, 탄막대전을 벌이는 환상향에서 전투에서는 쓸모없을지 몰라도 이렇듯 일상 생활에서는 굉장히 유용한 기술입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는 사쿠야 씨가 메이린 님에게 그걸로 홍마관 주변의 눈도 모두 치우도록 명령했던 겁니다.
대장은 고지식해서 그걸 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는 겨울 내내 봄이 올 때까지 기를 펑펑 쏴대며 눈을 치우고 우리들 땔감을 쓸만한 곳에 쌓인 눈을 날려주며 보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무한정 끝나지도 않을 것 같던 겨울이 끝나고 슬슬 날이 풀려갈 때 즈음, 눈이 이제 한 5m정도 남았을 때 사건이 터졌죠.
사실 우리가 조금만 더 신경썼어도 그런 일은 안 일어났을 겁니다.
대장이 숙소 제일 윗목에서 자는데 항상 춥다고 하길래 잘 때 몰래 아랫목으로 옮겨드렸는데도 계속 춥다 춥다 잠꼬대를 하고, 일어나는 시간이 계속 늦어진다 싶더니, 픽 쓰러져버리더군요.
처음에는 잠이 부족해서 잠깐 현기증으로 쓰러지신 줄 알았죠.
근데 그대로 쓰러지더니 일어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이제 일났다 싶어서 남은 장작 다 아궁이에 쑤셔넣고 아랫목 뜨끈뜨끈하게 만들어서 이불 덮어 눕히고 교대로 돌아가며 간호를 했습니다.
눈을 뜨지도 못하고, 가끔 눈을 떠도 눈이 풀려서는 다 죽어가는 환자처럼 보이고, 식은땀만 계속 흘리고, 몸은 사시나무 떨 듯 하고, 입은 항상 바짝 말라있고, 그게 한 일주일동안 그러시더라고요.
이게 웃긴게 가장 먼저 병문안, 이랄까 하여튼 그걸 온게 흑백입니다.
여름엔가 그냥 돌아가고는 안오고 있다가 이제야 왔는데, 와보니까 대장이 안보이길래 대타로 서있던 부하들에게 물어보고 왔다고 하더군요.
"우와, 나 이 녀석이 끙끙대는 거 처음 봤어."
대장은 계속 혼수상태였는지라 우리가 먹이는 묽은 죽과 물만으로 일주일을 버티고 있다고 얘기해줬더니, 흑백은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니들 참......"이라고 말하더니 곧장 본관으로 가버리더군요.
그리고는 잠시 후에 사쿠야 씨가 와서는 대장을 데려갔습니다.
우리 수문대는 정식 업무로 돌아갔고 면회가 거절되었기 때문에 메이린 님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약 한 달 뒤였습니다.
그동안 수문대의 대우는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우선 숙소가 정비되었고 경비 초소가 만들어졌습니다.
거기에 급료가 메이드들의 3분의 1까지 파격적으로 올라가고, 식사도 드디어 사람(인간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게 사람이죠)이 먹을 수 있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만한 것으로 바뀌었죠.
지금 신입들은 부실하다고 하지만, 과거를 기억하는 우리들로써는 정말 사람 대접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여튼 다시 본 메이린 님은 초췌했지만, 생기를 조금씩 회복해가고 있었습니다.
왜 쓰러졌냐고 물으니,
"기를 너무 많이 써서 주화입마에 빠졌었어."
그러니까, 이 사람 바보예요.
적당히 자기 몸 사린다고 누가 욕한답니까?
하여튼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환자복을 입고 보행 보조기로 아기들 걸음마 연습하듯 재활 훈련하는 거 보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약 두 달 정도 흘러서 봄이 돌아올 즈음에 대장은 다시 수문대로 복귀하였습니다.
확실히, 메이린 님은 홍마관이라는 거대한 관의 수문장치고는 약합니다.
하지만 그거야 흑백이나 홍백 같은 이름 날리는 괴악한 녀석들 때문에 약한 거지, 듣도보도 못한 것들에게 쉽사리 뚫려버리지는 않습니다.
난 이분이 좋습니다.
바보 같지만 누구보다도 홍마관을 사랑하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는 메이린 님이 좋습니다.
-홍마관 수문대 부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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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편은 내일이나 내일 모레쯤에.
네이버 환상 도서관 엔세스 담당지부나 타입문넷의 글 역시 본인의 것입니다.
이걸 제로의 나노하 때처럼 밑에 써야하나...
[제로X나노하] 제로의 나노하 Episode 7. 공주님의 방문.
[제로X나노하] 제로의 나노하 Episode 7. 공주님의 방문.
꿈이다.
루이즈는 확실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루이즈! 루이즈, 어디 간 거니? 루이즈! 아직 설교는 끝나지 않았다! 루이즈!”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은 분명 어머니이리라. 가장 최근이었던 겨울 방학 때 들었던 목소리보다 조금 더 젊은 느낌이었지만 그것은
미묘하게 주변 사물이 크게 보이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이해가 되었다. 자신도 어려진 것이다. 어머니 역시 젊어지신 것이리라.
비록 꿈이지만.
그렇지만 왜 이 덤불 아래에 숨어 있는 것일까.
옛날부터 혼나게 된다면 당연히 벌을 받았다. 도망치거나 숨는 것은 귀족의 긍지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것을 어릴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깨닫고 있었으니까. 고민하고 있자니 주위를 지나가는 하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이즈 아가씨도 고생이시네.”
“맞아. 손윗 누이 두 분은 그렇게 마법을 잘하시는데…….”
아, 그랬구나.
다른 것은 몰라도 마법에 관한 것에 대해 비난을 듣게 되면 자신은 언제나 도망쳤다. 조금 나이를 먹고 나서는 반발심에 덤벼들었지만.
하인들이 덤불 속을 뒤지기 시작하자 루이즈는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굳이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기보다는 그냥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의 꿈이라고는 하지만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런 꿈도 많으니까. 보통은 대부분 악몽이지만.
그
렇게 생각하면서 루이즈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목표는 중앙정원의 연못. 주변에는 계절마다 아름다운 꽃이 피고 작은 새들이 모이는
다리와 쉴 수 있게끔 준비된 의자가 있고, 연못 중간에는 조그마한 인공 섬에 새하얀 돌로 만든 정자가 있는 곳이었다. 근처에는
작은 배가 떠 있는데 루이즈가 어릴 때는 가족 모두가 뱃놀이를 했었다.
지금은 아무도 하지 않지만.
그렇게 언제나 가족들이 함께 놀던 아름다운 정원이 자신이 언제나 숨게 되는 비밀의 장소가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래도 루이즈는 그곳을 향해 움직였다.
관리를 하지 않아 잡초가 생기고 흙먼지가 가득한 연못 주변을 보며 루이즈는 다리를 건넜다. 연못 중앙의 인공 섬 근처에 묶여 있는 작은 배에 숨어 있는 게 루이즈의 목표였다.
그렇지만 꿈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루이즈는 준비해 둔 모포 속으로 파고드는 대신 모포를 배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졌다. 누구일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울지 않으시네요.”
갈색 머리카락을 트윈테일로 묶은 소녀였다. 가슴 부분에 커다란 빨간색 리본이 달린 하얀 옷을 입은 소녀는 희한하게 생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이제 10대 초반에 들어섰을까.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의 소녀였다.
그것은 분명 자신이 소환해낸 사역마, 나노하였다.
꿈속에서는 미래의 사역마인가?
루이즈는 시답잖은 고민은 그만두기로 하고 나노하의 말에 대답했다.
“울 리가 없잖아.”
“어째서요?”
물어보고는 있지만 소녀는 대답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천천히 이끌어주는 것 같은 얼굴로 말하고 있는 데에서 눈치 챘다.
그랬기에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이제 내 마법의 길을 찾았으니까.”
나의 말에 소녀 역시 웃으며 답해주었다.
“잊지 않게 될 때까지 곁에 있어드릴게요. 루이즈 씨.”
나는 대답했다. “고마워.” 라고.
그리고 꿈에서 깼다.
─────
차라는 것은 미묘한 음료이다. 물을 끓여서 찻잎을 달이는 것만으로도 마실 수 있는 간단한 음료이지만, 그와 동시에 어떻게 끓이느냐에 따라 향 좋고 맛 좋은 차가 나오기도 하고 쓰고 떫기만 한 차가 나오기도 한다.
그렇기에 지금 조리실은 다도 연습에 빠져 있는 메이드들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학원의 잡다한 일들로 바쁘더라도 시간이 남으면 다도 연습을 하는 게 학원 메이드들의 실익이 걸린 취미였다.
객
관적으로 봤을 때 메이드들이 노리는 것은 남은 재료들로 만든 케이크와 함께 차를 마시는 것으로 보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엄격한 교육을 받은 메이드라고 하더라도 일단은 소녀이다. 이런 일을 하지 않는 게 더 신기할지도 모른다.
조리실의 총책임자인 마르토는 그런 광경을 보면서 혀를 찼다.
“이렇게 만들어도 귀족들은 맛도 모르고 먹기만 하다가 대충 버리니, 쯧.”
“그래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들도 있어요.”
“수가 너무 적어. 요리라는 건 단순히 먹는 게 아니란 말이야!”
여전히 열혈 중년인 마르토를 진정시킨 것은 메이드들이었다. ‘시끄럽다.’, ‘차는 주방장의 영역이 아니다.’, ‘소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냐.’ 등의 말과 함께 다같이 노려보자 기력 좋은 그도 후퇴한 것이다.
“하아, 기력이 넘치는 건 좋지만 분위기를 조금은 파악해주셨으면 하는데 말이지.”
시에스타의 한숨 섞인 말에 나노하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기운 넘치지 않는 마르토 씨는 마르토 씨 같지 않잖아요.”
“그렇기는 하네. 아, 케이크 다 됐어. 들고 가기만 하면 돼. 찻잎은 미스 바리엘의 것을 쓸 거지?”
“네.”
“그럼 조심해서 가.”
“네. 나중에 봬요.”
시에스타의 마중을 받으며 나노하는 조리실을 나섰다.
─────
후우케 사건이 끝나고 나서부터 루이즈를 보는 학생들의 시선은 180도 바뀌어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나
제로라 불리며 무시당하던 소녀가 트리스테인 귀족 모두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도적을 잡은 것이다. 시선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루이즈는 최근 기분이 상당히 좋은 상태였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좋게 바뀌어 있었고 공을 세운 덕에 슈발리에의 칭호도 얻었다. 그리고…….
“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도 있나요?”
시선을 느낀 나노하가 루이즈를 향해 물었다. 차를 끓이고 있었기 때문에 무언가 잘못한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아니, 기대돼서 말이야.”
“어제도 마시셨잖아요?”
“잘 끓여진 차는 언제나 사람을 기대하게 만드는 거야.”
루이즈의 말에 나노하가 덧붙였다.
“거기에는 당연히 케이크가 들어가겠죠?”
“당연하잖아? 감사히 여기도록 해. 내가 먹어주는 거니까. 혹시라도 부족하기만 해봐. 난 입이 높다고?”
“미도리야의 차와 케이크는 언제나 손님들을 만족시킬 수 있어요.”
나노하는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대답했다. 관리국의 교도관이라고 해도 아직은 12세. 자랑하고픈 것이 있다면 속으로 감추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칭찬받고 싶은 게 당연한 나이다. 자신도 아직 어린 쪽이지만 그것을 아는 루이즈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들어와.”
“자, 그럼 실례~”
“들어갈게.”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큐르케와 타바사였다. 각자의 손에는 조그마한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자연스럽게 방 중앙에 있는 탁자의 의자에 앉는 큐르케를 보며 루이즈가 말했다.
“설마 너와 다과회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 큐르케.”
큐르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 어때? 맛있는 차와 케이크가 있다면 소녀들이 모일 이유는 충분하다고? 이쪽의 타바사도 이래 보이지만 실제로는 꽤 많이 먹기도 하고 특히나 단 것에는 취약하니까, 잠깐, 타바사, 우왓! 알았어, 꺄악! 그만할게, 핫!”
옆구리를 꼬집는 타바사의 공격에 큐르케는 항복의 제스쳐를 취했다. 그것을 보며 루이즈와 나노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잠깐, 뭘 웃는, 읏! 타바사 그만!”
“푸흡, 아하하하!”
결국 웃음은 터져 버렸다. 처음부터 무리였다. 이 나이의 소녀들에게 웃음을 참으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고문보다도 잔혹한 일이니까.
“그만 웃으라니까아—!!”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외친 큐르케의 목소리가 탑에 울려 퍼졌다.
─────
다음날.
학원 최악의 선생이라는 이명 아닌 이명을 가진 기트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화를 잘 내며 긴 흑발에 칠흑의
망토를 두르고 다니는 이 교사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니, 어떻게 보면 학원 최악의 선생이라고 불리는
데에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교실에 들어옴과 동시에 대뜸 말을 시작했다.
“수업을 시작하지. 모두 알고 있는 대로, 나의 이명은 질풍. 질풍의 기트이다.”
조금 소란스러웠던 교실이 고요한 분위기에 감싸이자, 기트는 그 모습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큐르케를 가리켰다.
“최강의 계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미스 첼프스트?”
“허무가 아닌가요?”
“전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현실적인 답을 묻고 있는 거다.”
으스스하며 음침한 목소리에 하나하나 거슬리는 말투. 그러니 인기가 없지요, 미스터 기트. 그렇게 생각하며 큐르케는 조금 대담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거야 당연히 불꽃이지요, 미스터 기트.”
“호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모든 것을 불태워 없앨 수 있는 것은 불길과 정열. 그렇지 않나요?”
“아쉽지만 그렇지 않다.”
“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트가 대답했기 때문에 큐르케는 순간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곧 상황을 파악한 큐르케는 표정이 굳었고, 그것을 본 기트는 허리춤에 꽂아두었던 자신의 지팡이를 꺼내 들며 말했다.
“시험 삼아 나에게 불꽃 계통의 마법을 사용해보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이 선생은.
상대방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큐르케는 잠시 기트를 바라보았다.
적을 탐색하는 것이다. 머리 빈 게르마니아 여자라고 불려도 그것은 평소 생활과 연애의 이야기. 결투, 전투 등 싸움이라 칭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게르마니아 무가 집안의 피가 작용하게 되어 냉철해진다. 그것이 큐르케라는 여자의 숨겨진 모습의
일부였다.
집안사람들과 타바사 밖에 모르는 이야기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무언가 오해한 기트는 피식, 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뭐하는 건가, 미스 첼프스트? 불꽃 계통이 너의 특기가 아니었나?”
비웃는 듯한 태도에 큐르케는 씩 웃었다. 차가운 미소. 상대방을 쓰러뜨리겠다는 의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미소였다. 큐르케는 가슴 사이에서 지팡이를 꺼내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화상으로는 안 끝날 겁니다, 미스터 기트?”
“상관없다. 진심으로 하게나. 그 유명한 첼프스트 가의 붉은 머리가 장식이 아니라면.”
큐르케는 차가운 미소마저도 지운 체 주문을 영창 해 나아갔다. 조그마한 불구슬이 직경 1m의 거대한 화구(火球)가 되는데
걸린 시간은 10초도 걸리지 않았고, 당황한 학생들은 책상을 옆으로 세우고 연금 마법으로 강화하거나 자신의 사역마를 불러들이는
등의 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대비를 하던 말던 큐르케는 화구를 가슴 쪽으로 끌어들이는가 싶더니 부드럽게 밀어내었고, 화구는 처음에 부드럽게 밀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화르륵!
주변의 공기를 태우며 짐승의 포효 같은 소리와 함께 날아드는 화구를 보면서도 기트는 여전히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손에 쥔 지팡이를 검을 휘두르듯 가로로 휘둘렀다.
그
러자 기트를 집어삼킬 것 같았던 화구는 흩어져버렸다. 그렇지만 화구가 가지고 있던 열량은 주변의 공기를 뜨겁게 달군 뒤, 기트가
조작한 바람에 실려 큐르케를 향해 날아들었다. 불이 없다고 해도 달아오른 공기는 간단히 맨몸으로 맞기에는 무리가 있는 법. 그것도
열량을 간직한 체 바람 계열의 메이지가 압축한 바람은 큐르케가 만든 화구와 동급이었다.
그 순간,
<Protection>
몰아칠 열풍에 대비해 허리를 숙이고 방어자세를 취하고 있던 큐르케 앞에 기계음 같은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분홍빛 마법진이 펼쳐졌다.
콰앙!
폭발음과 함께 주변으로 열풍이 흩어졌다. 여전히 후끈한 열기를 품고 있었지만 적어도 화상을 입을 정도로 심한 열기는 아니었기에 주변에 피해가 가지는 않았다.
후끈한 바람이 어느 정도 가시자 큐르케는 방어 자세를 풀고 앞을 바라보았다.
“나노하…….”
“괜찮아요, 큐르케 언니? 꺄악!”
“우와아앗, 나노하! 이 언니를 구하기 위해서 바람같이 촥! 멋져 멋져!”
상대가 나노하임을 깨달은 큐르케는 곧장 나노하를 끌어안았다. 루이즈가 대놓고 노려보았지만 이미 큐르케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읍, 저, 저기, 조금 놓아주셨으면, 푸하!”
“흐흥~ 싫은 거야? 이 언니가 싫은 거야?”
“시, 싫은 건 아니지만, 하아, 숨이!”
큐르케의 가슴에 파묻힌 형태가 된 나노하는 호흡곤란 직전까지 가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 장면에 대다수의 남학생들과
소수의 여학생들이 얼굴을 붉히며 엄지를 치켜든다거나 흘러넘치는 코피를 닦아낸다거나 했던 것은 무시해도 될만한 일이었다.
학생들과 함께 붉어진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기트는 헛기침으로 아득히 머나먼 이상향으로 떠나가려는 학생들을 현실로 끌어내린 뒤 수업을 재개하기 위해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유비키타스 델 윈데-”
그 순간, 교실 문이 열리며 굉장히 말하기 힘든, 그러니까 “취향이니 존중해주시죠.” 같은 대사를 내뱉을 것 같은 긴장된 얼굴의 콜베르가 들어왔다. 커다란 롤 케이크 같은 둘둘 말린 금발 가발을 쓰고 로브에는 풍성한 레이스나 정성스럽지만 어울리지 않는 자수가 놓여 있는 로브를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어색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꾸미고 있는 것일까.
“무엇입니까, 미스터 콜베르?”
눈썹을 찌푸리며 한눈에 봐도 호의적이지 못한 시선을 보내는 기트의 모습에 콜베르는 당황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아차차, 미스터 기트. 실례하겠습니다.”
“지금은 수업중입니다만?”
“아, 그것 때문입니다.”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기트를 뒤로 하고 콜베르는 학생들을 향해 외쳤다.
“오늘 수업은 모두 중지입니다!”
그 말에 모든 학생들이 “와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귀족답지 못한 태도에 일갈을 한 콜베르는 잠시 후 학생들이 진정하게 되자 말을 이었다.
“황송하게도, 선제 폐하가 남기신 유품, 우리 트리스테인이 하르케기니아에 자랑하는 가련한 한 송이 꽃, 앙리엣타 공주님께서, 오늘 게르마니아 방문에서 돌아오시는 길에, 이 마법학원에 행차하십니다.”
눈에 보일 정도로 교실이 술렁였다.
당연한 일이다. 귀족 중의 귀족인 왕족, 그것도 여자라고는 하지만 정통 왕위 계승자인 앙리엣타 공주의 방문은 귀족들로 이루어진 이 학교에 상상 이상의 파급을 불러온다.
“따라서,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갑작스런 일입니다만,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 환영식전의 준비를 합시다. 그 때문에 오늘의 수업은 중지. 학생 여러분은 정장으로 정문에 서주십시오.”
학생들은 긴장한 얼굴이 되어 일제히 끄덕였다. 미스터 콜베르는 엄중하게 끄덕이고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여러분들이 훌륭한 귀족으로 성장한 것을 공주님께 보여드릴 절호의 기회입니다! 전하께서 좋게 기억하실 수 있도록 정신 차리고 지팡이를 닦아놓으십시오! 알겠습니까!”
─────
공주가 가지 않을 것이 뻔한 학원 구석이나 주방, 그리고 하인들의 숙소까지 대청소의 열기에 빠져 있는 것을 큐르케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희한한 데까지 준비하는구나, 너네 나라는.”
루이즈는 그런 큐르케를 노려보았다.
“시비 거는 거야?”
“아니, 그냥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서 놀란 것뿐이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낮은 게르마니아의 귀족인 큐르케로서는 공주가 가지도 않을 곳까지 일일이 정비하는 트리스테인 귀족들의
모습이 이색적으로 보인 것이다. 전통을 귀하게 여기는 나라다운 일이지만 전통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큐르케에게는 쓸데없는
일이었다.
근처에 서 있던 기슈가 그 둘의 말싸움에 끼어들었다.
“게다가 귀하신 분이시라고? 우리 공주님은. 여왕이 한번도 없었던 다른 나라와는 달리 우리는 여왕님도 몇 분 계셨으니까, 잘하면 여왕이 되실 분이시니까.”
“그게 기슈 너의 자랑스러운 태도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물론 아름답고 청초한 공주님과 우리 그라몬 가는, 흐익, 몽모랑시?!”
“헤에, 계속해보시지?”
“아, 아니, 저기 잠깐만!”
등 뒤에 몽모랑시가 있었다는 걸 잊은 채 공주님의 미모를 칭송하던 기슈는 그대로 끌려가버렸다. 자기 무덤을 판 꼴이다.
어찌되었든 공주가 마차에서 내려 학생들에게 손을 흔들자 환호가 울려 퍼졌다. 그것을 보며 큐르케는 앙리엣타를 보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야, 내 쪽이 더 아름답잖아. 어때, 나노하? 언니랑 저기 공주님이랑 누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
“에에, 두 분 다 굉장히 아름다우신데…….”
“그래도 그 중에서 누가 더? 응? 말해봐.”
“고, 곤란해요…….”
큐르케의 압박에 나노하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루이즈를 바라보았다. 그녀라면, 평소에는 좋은 사람이지만 이런 때는 곤란한 큐르케의 폭주를 한방에 멈춰 주리라. 그렇지만 루이즈는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 순간 루이즈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 변화에 신경이 쓰여서 앞을 보니 멋진 깃털
모자를 쓴 늠름한 모습의 젊은 귀족이 있었다. 확실히 남자다운 모습은 멋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독촉하던 큐르케도 그 젊은 귀족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나 오빠에 비하면 그다지…….
확실히 단련된 듯 균형 잡힌 몸과 부드러움과 강함을
겸비한 듯한 외모는 여성들에게 사랑받을 타입이었지만, 시로나 쿄우야 같이 이미 평범한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사람들과 살아온
나노하에게 저 정도는 한눈에 푹 빠질만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12세이며 그쪽 방면으로는 둔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나노하에게
눈앞의 귀족은 그저 멋진 사람일 뿐이었다. 즉, 루이즈와 큐르케가 왜 멍하니 쳐다보는지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고민에 빠진 세 사람을 보며 타바사는 한마디로 압축했다.
“생각의 차이.”
이러나저러나 객관적으로 가장 사령탑에 어울리는 사람의 말투였다.
─────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시에스타와 함께 씻고 루이즈의 방으로 돌아온 나노하가 본 것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루이즈였다.
“루이즈 씨?”
“응. 아, 왔어?”
방으로 들어온 나노하를 이제야 깨달은 듯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뭘 그리 놀라세요?”
“아니, 아무것도.”
“안 주무세요?”
“자야지. 아니, 조금 있다가…….”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자신에게도 말 못할 비밀이라도 있는 것일까.
말해주지 않아서 서운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고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것을 지켜주어야 한다. 가깝기 때문에 비밀을 들추어도 될 거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그렇기에 나노하는 루이즈의 행동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너무 긴장하고 있다는 게 보일 정도가 되자, 나노하는 방안을 이리저리 어지럽게 돌아다니던 루이즈의 앞에 딱 섰다. 그리고는 놀라 비명을 지른 루이즈가 뭐라고 하기 전에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말 못하는 것이라면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만큼 중요한 일일 테니까. 그래도 조금은 진정해주세요. 적당한 긴장은 좋지만 너무 긴장하는 건 일을 망치니까요.”
“……나노하.”
뜻밖의 말에 루이즈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나노하의 눈을 보았다. 한점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루이즈는 점차 진정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길게 두 번, 그리고 짧게 세 번.
그
소리에 루이즈가 다시 긴장으로 굳어갔다. 그렇지만 방금 전처럼 심한 수준은 아니었기에 나노하는 루이즈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방문을 열었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새까만 로브에 후드까지 푹 눌러쓴 사람이었다. 주변을 살피듯 좌우를 돌아본 소녀는
허둥지둥하며 방으로 들어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저기, 누구신지…….”
나노하의 말에 그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대며 조용히 하라는 동작을 취하고는 망토 틈에서 지팡이를 꺼내 들고 가볍게 흔들며 룬을 읊었다. 그러자 빛의 가루들이 방안에 머물다 사라졌다.
“……디텍트 매직?”
“어디에 귀와 눈이 있을지 모르니까.”
방 어딘가 도청 마법이나 훔쳐보기 구멍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후드를 벗었다. 방의 불빛 아래 드러난 그 사람은 놀랍게도 앙리엣타 공주였다.
나
노하는 순수하게 놀라서 읏, 하고 숨을 삼켰다. 평범한 서민 가정에 갑자기 찾아온 고위 정치인을 보게 된 아이의 기분이랄까.
게다가 분명 루이즈와 같은 나이 또래의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행동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어른스러움과 신성하게 느껴질 정도의 고귀함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게 하도록 압박한다. 이른바 타고난 기품이라는 것이다.
“공주님!”
루이즈는 부서져라, 까지는 아니더라도 황급히 무릎을 꿇었고 나노하 역시 엉겁결에 그 옆에 함께 무릎 꿇었다. 그것을 보며 앙리엣타는 듣기 좋은 미성(美聲)으로 말했다.
“오랜만이야, 루이즈 프랑소와즈.”
─────
이 글은 마법小女Love 나노하 =StrikerS=(http://cafe.naver.com/lovenanoha.cafe), 『제로의 사역마 - 쌍월의 기사』(http://cafe.naver.com/saitolouise.cafe), 타입문넷(http://www.typemoon.net/), 환상 도서관 반쪽사서 담당 지부(http://halflibrarian.tistory.com/), 환상 도서관 엔세스 담당 지부(http://blog.naver.com/mileunai)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1부를 약 두 달만에 끝냈듯이, 2부도 약 두 달 만에 재개하게 되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그리고 비축분을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안 만들었을까요?
이게 다 TIG(This Is Greece)때문입니다. [전속력 도주]
그래도 갓 토순의 가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저는 살아있습니다.
일일 연재의 벽을 깨부수겠다고 하시는 분들을 보면 날려주고 싶어요. [야]
[제로의 사역마X나노하] 제로의 나노하 Episode 6. 파괴의 지팡이. 하편
[제로의 사역마X나노하] 제로의 나노하 Episode 6. 파괴의 지팡이. 하편
“아, 맞네. 파괴의 지팡이야. 분명 견학 때 봤던 거야.”
나노하의 신호에 오두막으로 들어온 큐르케가 파괴의 지팡이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곁에 서 있던 타바사 역시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기슈 역시 “일단 여기가 후우케의 은신처가 맞기는 했었나보네.” 하는 대사로 그것이 파괴의 지팡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덧붙여서 루이즈는 바깥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일행의 반응에 나노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게, 파괴의 지팡이라고요?”
“나노하는 처음 보는 거지? 소문에 의하면 드래곤도 한 방에 잡을 수 있다는데, 것보다 이거. 어딜 봐서 지팡이라는 거야?”
“……유니크.”
“확실히 유니크하기는 한데 재질이 뭐지? 연금 마법으로 조금 바꿔볼까?”
“하지만, 그건…….”
나노하는 말하려 했다. 파괴의 지팡이라 말하는 그것은 사실─.
콰아앙!!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오두막이 흔들렸고 루이즈를 떠올린 나노하는 곧장 밖으로 나섰다.
문을 박차고 나온 나노하의 눈에 들어온 것은 팔 하나를 재생시키고 있는 거대한 골렘과 그 골렘에게 지팡이를 겨누고 있는 루이즈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튀어 나왔다고! 그러고 팔을 휘두르려고 하길래 폭발시킨 거야!”
밖으로 나온 타바사는 골렘을 보며 말했다.
“더 커졌어.”
학원 보물고를 습격했을 때보다 더 커진 골렘을 향해 타바사는 지팡이를 겨누었다. 재생하는 동안 다른 곳을 공격하면 간단히 골렘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하고 룬을 읊는 순간,
“위험해!”
쿠당탕탕!
부웅─.
등 뒤에서 갑작스럽게 큐르케에게 습격 받아 쓰러진 타바사는 화를 내려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는 엄청난 질량 덩어리를 본 순간 생각을 바꿨다.
“하아, 늦을 뻔 했다.”
“……고마워.”
타바사의 인사에 큐르케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친구잖아? 것보다 말이지…….”
두 사람의 시선은 자신들을 공격했던 방향을 향했다. 기슈는 언제 챙겼는지 모를 파괴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고, 그 뒤로는 자신들이 있었던 오두막이, 그 너머에는 루이즈가 팔을 폭발시킨 골렘과 같은 형태의 골렘이 두 개나 서 있었다.
“이거, 제대로 걸린 것 같은데?”
“아하하, 그냥 마법 위사대의 힘을 빌리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지.”
큐르케의 말에 뒤를 돌아본 기슈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농담조로 말하면서도 발키리들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흩날린 장미꽃잎 수와 같이 나타난 여성형 갑옷의 청동 병사들은 창과 방패를 들고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
그것을 본 큐르케와 타바사 역시 일어서서 다른 골렘에게 지팡이를 겨누었다.
“학원 최약체인 기슈에게 질 수는 없지.”
“마찬가지.”
“어이, 너무 직설적인데.”
긴장하고 있던 기슈는 등 뒤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말에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긴장을 덜어낸 것이었다.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며 루이즈는 벌써 팔을 재생시킨 골렘을 보며 말했다.
“가자, 나노하. 저 셋에게 질 수는 없잖아? 귀족의 명예도 달려 있다고. 잊지 않았지, 큐르케!”
“물론이지!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의 소원 뭐든지 들어주기야! 승부는 누가 먼저 골렘을 쓰러뜨리는가!”
“그런 거라면 나도 참전하겠어! 여기는 남자의 자존심도 걸려 있다!”
“……나도.”
모두의 기운 넘치는 대화를 들으며 나노하 역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특별히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참여했든, 휘말려 버렸던 어설프게 있을 수는 없는 법. 여기까지 왔는데 가만히 있으면 그건 관리국의 교도관으로서도, 루이즈 씨의 사역마로서도 자격 미달. 그러니까—.
“전력 전개! 갑니다!”
<역시 할 때는 하잖아, 파트너! 레아! 제대로 서포트 하라고!>
<문제없습니다.>
든든한 동료들을 믿으며 나노하는 골렘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마음 속 깊이 굳은 결심을 한 소녀의 왼손 손등의 룬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
후우케는 골렘을 세 마리나 만들어낸 것이 문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우세한 듯 했으나 큐르케와 타바사의 콤비
플레이는 손쉽게 깰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최근 수많은 모의전을 벌인 기슈 역시 예전과는 다르게 훌륭히 발키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나노하는 골렘의 몸 위에 올라타서 상대적으로 얇은 팔 다리의 관절 부위를 재생하는 족족 베어내고 있었고 루이즈가 자신의
폭발 마법으로 엄호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후우케는 마지막 작전을 쓰기로 했다. 적어도 기슈가 들고 있는 파괴의 지팡이는 회수해야 다. 사용 방법을 알기 위해서 이런
위험한 작전을 사용했지만 이 상태가 유지된다면 자신의 정신력이 모두 소모되어 실패하는 것밖에 남지 않는다. 최악의 선택지만큼은
피해야 한다.
후우케는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룬을 읊기 시작했다.
—————
“응?”
한참 발키리들을 지휘하던 기슈가 이상을 느낀 것은 그 때였다. 발키리들의 방패 전진 돌격과 투창에 전진하지 못하고 있던
골렘이 갑자기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큐르케와 타바사가 맡고 있던 골렘과 루이즈와 나노하가 맡고 있던 골렘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보며 한순간이나마 술자의 마력이 다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일행의 실수였다.
골렘이 붕괴하면서 만들어진 엄청난 양의 흙더미가 일행을 덮친 것이었다.
“우와앗!”
“꺄아아악!”
“크읏!”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규모 연금 마법으로 일행이 파묻혀 있던 흙더미가 그대로 단단하게 굳어버린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숨조차 쉬지 못하고 그대로 생매장될 뻔했다.
무력화된 일행 앞에 롱빌이 나타난 것은 그 때였다.
그녀를 본 큐르케가 소리쳤다.
“미스 롱빌! 대체 어디 있다가 나타난 거예요!”
그러나 롱빌은 대답 대신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품에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상냥한 모습이었던 여비서는 날카로운 눈을 가진 맹금류가 되어 일행을 노려보았다.
“마법 학원 학생들이라기에 누구 하나쯤은 사용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모른단 말이야? 멍청한 애들이네.”
“잠깐, 당신 무슨 말을 그렇게……. 설마!”
롱빌의 공격적인 어투에 반발하던 기슈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외쳤다.
“그 ‘설마’가 사실이야.”
기슈의 반응에 미소를 지으며 롱빌, 아니 후우케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단단한 흙더미 속에서 파괴의 지팡이가 튀어나왔다. 후우케는 그것을 품에서 꺼낸 보자기로 잘 싸서 등에 맨 뒤 일행을 향해 말했다.
“사용 방법은 알 수 없게 됐지만, 뭐 별 수 없지. 그리고 너희는 증거 인멸을 위해 죽어줘야겠어.”
“어째서,”
“응?”
지팡이를 휘둘러 일행을 그대로 생매장 시키려 했던 것을 멈추게 한 것은 나노하의 외침이었다.
“어째서 이런 일을 하는 건가요!”
—————
어째서일까.
골렘을 상대하는 동안 나노하는 의문이 들었다.
왜 후우케는 보물을 훔치는 것일까. 그 정도로 강력한 골렘을 만들 수 있다면 떳떳하게 일을 해서 돈을 벌수도 있을 텐데 어째서 그런 일을 선택한 것일까.
굳어져 버린 흙더미 속에 파묻혔을 때 나노하는 한 가지 소망을 품었다.
이야기를 듣고 싶다. 사정을 듣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돕고 싶다.
거짓된 환상에 상처 받는 일도, 반복되는 슬픈 운명도 단 한 마디가 시작이 되어 너무나도 간단히, 그리고 깨끗하게 풀렸다.
안경을 벗은 그녀의 눈을 봤을 때 나노하는 깨달았다.
이 사람은 단순히 돈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지만, 그럴 수밖에 없기에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불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죄를 저지르는 것 같은, 평생을 단 하나를 위해 살아온 사람들이 결국 로스트 로기아라는 위험한 힘을 탐하는 것 같은, 이 사람은 그런 사람들의 눈을 하고 있다.
“뭣 때문인가요?”
“도둑이 왜 도둑질을 하겠어? 당연히 돈 때문에,”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면 돈을 버는 건 쉽잖아요! 알려주세요! 적어도 그것만은!”
후우케는 나노하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이 작은 소녀의 말에 자신을 끌어들인 것일까. 묻지 않아도 말해주고픈 기분이 들게 하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후우케는 고개를 세차게 휘저었다.
안 된다. 자신은 도둑. 단순히 말에 휘둘릴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팡이를 휘두르려는 순간,
“지금이야!”
루이즈의 폭발 마법에 흙더미가 날아감과 동시에 나노하가 레이징 하트를 손에 쥐었다.
<캬하하, 해제 완료! 날뛰어 보라고 파트너!>
“레이징 하트, 셋 업!”
<네, 마스터!>
후우케는 빛으로부터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숲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마법이 봉인되기 전에는 하늘을 나는 일곱 환수들과 싸워
승리했고, 마법을 봉인한 후에도 발키리들과 싸워 이긴 상대다. 파괴의 지팡이도 회수했으니 증거 인멸은 포기하는 쪽이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후우케는 숲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도주로는 확보해 두었으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관리국의 에이스의 실력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
“이 정도면, 히익!”
배리어 재킷을 걸친 체 하늘을 날아오고 있는 나노하의 모습에 후우케는 헛바람을 삼켰다. 그리고 무언가 번쩍하며 거대한 섬광에 덮쳐진 것이 후우케가 정신을 잃기 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마력 데미지로 완벽하게 실신해버린 후우케를 보며 나노하는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조금 심했나?”
<문제없습니다.>
“그렇겠지?”
둘의 대화를 들은 델프링거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을 쓰러뜨려 놓고 그 태도는 뭐냐?>
“아하하하.”
나노하는 그저 웃어넘길 따름이었다.
—————
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었기에 여기저기 흙과 먼지를 뒤집어 쓴 일행은 후우케를 포박한 뒤 학원으로 되돌아왔다. 대충 흙먼지를 털어낸 후 학원장실로 들어온 일행은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얘기하였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오스만은 미소를 지으며 일행을 축하했다.
“잘해주었네. 왕실에는 자네들에게 슈발리에의 작위 신청을 제출해두었네. 미스 타바사는 이미 슈발리에의 작위를 가지고 있으니 정령 훈장 수여 신청을 제출해두었고 말일세.”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문득 나노하를 바라본 루이즈는 어쩐지 가라앉아 있는 나노하를 보고서는 오스만을 향해 물었다.
“올드 오스만, 나노하에게는?”
“유감스럽지만, 그녀는 귀족이 아닐세.”
“그런…….”
“아, 저는 괜찮아요. 루이즈 씨가 그만큼 더 받으시면 되니까.”
웃으며 말하는 나노하를 보며 루이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오스만이 기운찬 목소리로 말했다.
“자, 후우케도 잡았고, 파괴의 지팡이도 돌아왔네. 게다가 오늘 밤은 브릭의 무도회이지 않나? 누가 뭐래도 오늘 무도회의 주인공은 그대들일 테니 즐겁게 지내보게나.”
큐르케는 얼굴이 확 밝아지며 말했다.
“그랬었죠! 이 일 때문에 완전히 있고 있었네. 일단 씻는 게 우선이겠지만.”
네 사람은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문을 향했다.
“뭐해? 어서 와.”
따라오지 않는 나노하를 보며 루이즈가 말했다.
“먼저 가주세요. 오스만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루이즈는 잠시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빨리 와.’ 라고 말하고는 문을 닫고 나섰다.
“뭔가. 내게 하고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은?”
“파괴의 지팡이에 대해서요.”
나노하는 이 세계에서 파괴의 지팡이라 불리고 있는 로켓 런쳐에 대해서, 자신의 세계에 대해서, 시공 관리국에 대해서, 그 외의 이러저러한 것들을 얘기했다.
“흠, 그렇군. 그래, 역시 우주는 넓구만.”
“저건 아마도 저희 세계의 무기예요. 어떻게 저게 여기에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나노하의 질문에 오스만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저것을 나에게 준 것은 내 생명의 은인이었단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나요? 저희 세계의 사람일 거예요. 틀림없어요.”
“삼십년 전에 죽었다.”
노마법사는 오랜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삼십년 전, 숲을 산책하고 있던 나는 와이번에게 습격당했지. 거기서 나를 구해준 것이 저 '파괴의 지팡이'의 주인이었다. 상처를 입고 있었기에 나는 그를 병원으로 옮기고 열심히 간호했다만, 상처가 너무 깊었지.”
“……돌아가신 건가요?”
오스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죽고 나서, 그가 사용했던 한 자루는 무덤에 같이 묻고, 나머지 한 자루를 '파괴의 지팡이'라고 이름 붙여 보물고에 넣어두었지. 은인의 유품으로써…….”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눈이 된 노마법사를 보며 나노하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는 침대 위에서 죽을 때까지 헛소리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단다. '여기는 어디냐.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라고. 분명, 그는 너와 같은 세계에서 온 것일 테지.”
“대체, 누가 이쪽 세계에 그 사람을 부른 건가요?”
“그건 모르다. 어떤 방법으로 그가 이쪽 세계로 온 것인지, 최후까지 알 수 없었단다.”
“예…….”
그 파괴의 지팡이는 분명 자신의 세계의 군인들이 쓰던 무기. 적어도 죽은 사람이 시공 관리국의 사람이 아닌 것만큼은 확실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노하는 문득 떠오른 듯이 왼손을 내뻗었다.
“이 룬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을까요?”
잠시 고민하던 오스만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의 손에 있는 이 룬. 이건 간달브라고 한단다. 신의 왼손이라 불리며 모든 무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시조 브리밀의 사역마가 썼다는 전설의 룬이란다.”
나노하는 환수와 발키리들과 싸울 때를 떠올렸다.
“아, 그래서…….”
“그럼 이제 다른 질문이 있니?”
“아니요.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나노하를 보며 오스만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나노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힘이 될 수 없어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믿어다오. 난 네 편이란다, 간달브여.”
“예.”
“그리고 한 가지 더.”
오스만은 나노하의 양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간달브는 모든 무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지. 그 말은 무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자가 필요한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혼란의 시대가 올 게다. 스스로를 지키고 너의 주인을 잘 지켜야 한다. 알겠니?”
“으음, 예.”
노마법사의 말이 어렵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던 나노하는 스스로를 지키고 주인을 지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가 보거라.”
인사와 함께 방을 나선 나노하를 보며 오스만은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한 번 생각했었지만, 간달브는 평화로운 세상이라면 필요 없는 룬이다. 그러나 간달브는 이미 세상에 나와 버렸고, 그것을 현재 대륙의 정세와 연결해보면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대체, 저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닥치게 될 런지…….”
—————
무도회는 알뷔즈의 식당 위층의 큰 홀에서 열리고 있었다.
난생 처음 무도회에 참가한 나노하는 발코니에서 조용히 사람들의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나노하가 사역마이기 때문이라던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루이즈와 큐르케가 세 시간동안
정성들여 코디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나노하의 모습은 설사 상대가 사역마라고 하더라도 한 번 쯤 춤을 신청해 볼만한 모습이었다.
문제는 나노하가 전혀 춤을 출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춤 출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리사나 스즈카는 잘 추겠지?
기분 전환을 위해 친구들을 떠올렸지만 오히려 더 우울해진 나노하는 시에스타가 건네주고 간 고기 요리를 포크로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뭐하고 있는 거야?”
“엣?! 아, 루이즈 씨.”
고개를 돌린 곳에는 루이즈가 있었다. 긴 복숭아 색이 깃든 머리카락을 커다란 장식핀으로 고정하고 하얀 파티드레스를 입고, 팔꿈치까지 하얀 장갑이 루이즈의 고귀함을 싫을 정도로 연출하고, 가슴부근이 트인 드레스가 작은 얼굴을 보석처럼 빛나게 하고 있었다.
"헤에, 굉장히 예쁘세요."
<어울립니다, 하이 마스터.>
나노하와 레이징 하트의 솔직한 감상헤 루이즈는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것보다 뭐하고 있는 거야? 기껏 힘들게 옷 입혀 놨더니 이런 데서 혼자 있으면 어떡해?”
<내가 기억하기로는 둘이서 즐겁게 인형 놀이를 했던 것 같은데.>
“왠지 큐르케에게 동맹을 청해서라도 너를 불꽃 구덩이에 넣고 싶어졌는데.”
<미안, 농담이었어.>
단숨에 델프링거를 격침시킨 루이즈를 보며 나노하가 말했다.
“춤을 못 추니까요. 그리고, 이런 데는 처음이라 지쳐서 쉬고 있어요.”
“흐음, 나도 좀 쉴래. 평소에는 제로라고 놀려대던 녀석들이 이럴 때는 헤벌래 해가지고 춤 신청 하는 걸 거절하느라 힘들었거든.”
발코니 난간에 몸을 기댄 루이즈는 잠시 무도회 쪽을 바라보다가 나노하를 향해 물었다.
“원래 세계에 돌아가고 싶어?”
“예?”
“예전에 말했잖아. 돌아가고 싶다고.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고.”
루이즈의 말에 나노하는 무도회의 반대편, 어두워진 학원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돌아가고 싶어도 갈 방법을 알 수가 없으니까요. 본국하고 통신도 되지 않고. 그리고…….”
말끝을 흐리는 나노하를 바라본 루이즈는 나노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루이즈 씨가 말씀하셨잖아요. 답장은 반드시 올 거라고.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고. 설사 돌아갈 수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사역마니까 안 보내줄 거라고.”
“그,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만약 못 돌아가게 된다면 책임져 주셔야 되요.”
“그건 걱정하지 마! 반드시 책임져 줄 테니까!”
“정말이시죠?”
웃으며 말하는 나노하의 모습에 루이즈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대답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델프링거가 중얼거렸다.
<어째 위험 수위의 대사란 말이야.>
그렇게 밤은 깊어져 가고 있었다.
—————
“신호가 다시 포착되었습니다!”
“위치 좌표 저장하고, 각 승무원 위치로!”
무인 통신선과 접촉했지만 나노하의 신호가 끊어진 것 때문에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아스라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언제나 느긋한 듯 보였지만 걱정이 가득했던 린디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그 애는 사람들 걱정시키는 데 뭐가 있단 말이지.”
“아슬아슬하게 사람 애간장 태우는 데는 선수들이니까요.”
모자의 대화를 들으며 에이미가 말했다.
“뭐, 어찌되었든 죽어가는 사람 하나 살리기는 했네요.”
에이미의 말에 크로노와 린디는 페이트를 바라보았다.
양손으로 입을 막고 눈물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 그게 지금의 페이트였다.
그런 딸의 모습에 린디는 피식 하고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나중에 신부랍시고 나노하를 데려오는 게 아닐까 싶은데.”
“가능성이 있다는 것 때문에 뭐라 말을 할 수가 없군요.”
크로노는 고개를 절래절래 휘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좌표 저장 완료!”
“좋아요. 아스라는 차원 항행 속도로 발진합니다. 하는 김에 외곽 항로도 설정해두세요.”
“알겠습니다!”
“ADS(Auto Defence System:자동 방어 체계) 작동, 자동 항법 장치 작동, 자동 항로 기록 장치 작동. 스텐바이.”
모든 준비를 마친 승무원들을 보며 린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아스라 발진!”
“예스, 캡틴!”
수많은 사건을 거쳐 온 함선 아스라가 또다시 새로운 사건을 위해 기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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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마법小女Love 나노하 =StrikerS=(http://cafe.naver.com/lovenanoha.cafe), 『제로의 사역마 - 쌍월의 기사』(http://cafe.naver.com/saitolouise.cafe), 타입문넷(http://www.typemoon.net/), 환상 도서관 반쪽사서 담당 지부(http://halflibrarian.tistory.com/), 환상 도서관 엔세스 담당 지부(http://blog.naver.com/mileunai)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제로의 사역마 2기 12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스타라이트 브레이커 비살상 설정이라면 저주도 마법이니까 날아가지 않을까 싶은데. 그 대신 떡실신 하는 사람들이 많겠구나.'
생각해보면 위험한 사상입죠.
죽지만 않으면 된다, 니까.
오리지날 설정을 넣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입니다.
나노하 카페에서 옛날에 본인의 소설에 나왔던 오리지날 캐릭터들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아니, 그건 안돼지 이 사람아!' 를 외칠 겁니다.
아, 진짜 넣고 싶다. [야]
된다면 갓 토순을─. [그건 네놈 것도 아니잖아!]
마력석에 관해.
비행선도 풍석이라는 것을 이용하므로 비슷한 것이 있을 것이라 판단함.
그래서 후우케는 부족한 마력을 마력석을 이용했다, 라는 설정이지만, 어째 괜히 쓴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 문제의 설정.
사실 나노하는 로켓 런쳐 대신에 PPC를 사람이 쏠 수 있도록 개조한 것을 들고 쏘려고 했습니다.
맥워리어를 해본 사람, 그리고 이것을 써보고 맞아본(...) 사람은 다 아는 최강 최악의 병기입죠.
무게도 장난이 아니지. 우지엘이나 매드켓 마크 투가 아니면 힘들었어......
하여튼 그렇게 쓰다보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
약 2달 만에 간신히 1권 부분을 끝냈습니다.
이래서야 어디 알비온 올 때까지 쓸 수 있을래나 걱정이 됩니다.
역시 학교 축제 준비로 페이스를 잃어버린 게 잘못이었나.
하여튼 2권 부분은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비축분이라는 것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어이]
2권 부분부터는 나노하를 놓고 서로 싸우는 루이즈, 시에스타, 큐르케, 타바사를 써볼까나. 17금 리미터도 예전에 풀었으니.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