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7.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7.
흔히들 백색白色은 물들기 쉬운 연약함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나백천의 백색은 그렇지 않았다. 그 앞에 감히 어떤 것이 자신의 색을 뽐낼 수 있을까 싶은 고압적인 백색. 모든 것을 살라먹는 백색의 어둠은 직시하는 것조차 두려운 재앙이었고, 마주하는 것은 더더욱 피하고 싶은 폭력이었다.
“크윽…….”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정신을 잃었던 나일천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온몸이 얻어맞은 듯 욱신거렸다. 일격一擊. 고작 일격이었는데 이 모양이란 말인가. 만약 서천西天의 독문병기가 없었다면 진작에 고깃덩어리가 되어 처참하게 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눈에 들어온 것은 예상했던, 그러나 틀리기를 바랐던 인물이었다.
"……형님."
히죽. 입가가 자연스레 미소를 그렸다. 질투와 욕망으로 뒤틀어진 속내와, 이를 대변하듯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과는 다른 기계적이고 반사적인 미소였다. 그러나 그 인물─나백천은 나일천을 향해서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어느 새 침대에서 가져온 이불로 딸의 몸을 감싸며 물었다.
“괜찮느냐.”
“……아, 아아…….”
다정한 말에도 나예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그 여린 몸을 보는 사람이 안타까울 정도로 세차게 떨며 손끝이 새하얘질 정도로 아버지의 옷자락을 쥐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퍼뜩 고개를 들며 뒤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시선은 벽에 기대어 있는 비류향을 향하고 있었다.
처참한 몰골이었다. 예리한 칼바람에 찢겨져 나간 어깨에서 흐른 피로 물든 상반신. 입가와 코에서 흘러나온 피거품에 젖은 얼굴. 실 끊어진 인형 마냥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꺾인 체 축 늘어진 팔다리. 무엇보다도 가장 끔찍한 것은 망가진 수준을 넘어 처참하게 찢겨나간 기맥이었다. 숨은 간신히 붙어있었지만, 쓰러지기 직전의 포대자루도 이것보다는 생명력이 흘러 넘쳐 보일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백천은 가슴이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그런가. 네가 또 예린이를 구해주었구나.
“언니……, 언니……!”
“…….”
엉금엉금 기어 비류향에게로 가는 딸을 보며 나백천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어느 틈에 집어넣었는지 모를 검을 다시 뽑으며 몸을 돌려 자세를 잡았다. 어지간한 고수의 눈으로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일천은 목에, 가슴에, 단전에, 사람 몸의 급소란 급소에 모두 칼이 닿는 느낌을 받았다. 농밀하다, 섬뜩하다, 날카롭다, 싸늘하다.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정련되고 폭력이며 구체적인 살기였다. 심검心劍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지 않을까.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왜 이리도 크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변명을……, 해 봐라."
"무슨 변명 말씀이시오, 형님?"
"이 상황에 대한 변명 말이다."
"이 상황?"
나일천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방을 한 번 둘러보고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관의 말은 씨알도 들어먹지 않는 무례한 호위병들 혼쭐내고,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계집이 주제도 모르고 나대길래 벌 좀 주고, 우리 이쁜 예린이에게 사내 맛을 알려주려고 한 것 말이오? 하, 하하하하! 아니, 형님. 어찌 어른으로서, 남자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인데 변명을 한단 말입니까? 예? 노망이라도 드셨, 흡!"
콰아아아아아앙!
초식조차 아닌 일검一劍. 그러나 어지간한 초식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위력적인 공격에 검과 검이 부딪쳤다고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허공에서 몇 바퀴 돌아 간신히 기세를 가라앉히고서야 겨우 바닥에 착지한 나일천은 증오 가득한 눈길로 나백천을 보며 외쳤다.
"왜? 변명하라고 하면 내가 '아이고, 형님! 내가 욕심이 과해 눈이 멀었었소! 부디 용서해주시오!'하면서 바닥에 엎드릴 줄 알았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할 줄이라도 알았어?! 당신이 저 높은 자리에서 내려보며 대범하게 지껄이면 내가 다 나불거릴 줄 알았냐고!"
악에 받친 나일천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백천은 묵묵히 자세를 잡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격二擊이 몰아쳤다. 이번에는 명백한 살초殺招였기에 나일천은 반사적으로 오른손까지 뻗어 공세를 막으려 했으나──
콰아아아아아앙! ──콰앙!
"크헉!"
이번에는 바닥을 수 차례 굴러 벽에 부딪치고 나서야 멈추었다. 손에서 떨어진 검은 저만치 굴러가 있었고 왼팔에서는 한 줄기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왼손으로 검을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쳇. 일이 틀어졌나. 나일천은 자연스럽게 오른팔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섰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고개를 들어보니 정작 나백천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군. 그러니 저토록 냉정하게 자신에게 살초를 흩뿌는 것이겠지.
“놀라지도 않으시는구려. 당신이 자른 팔이 다시 돋아났는데. 거 좀 기뻐해주시지. 동생 팔이 다시 돋아났는데 말이오.”
“내 동생은 죽었다.”
“…….”
방금 전의 살초는 혈육의 연을 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리라. 나백천의 동생 나일천은 이제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선언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죽었노라 담담하게 공언하는 나백천의 모습에 나일천은 뒤틀린 심기를 감출 생각 없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서천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럼 여기 서 있는 나는 뭐요. 귀신이오?”
“서천멸겁이라는 악귀지.”
“허, 그렇구만.”
고오오오오──
서로를 바라보는 형제의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는 당장이라도 상대를 격살시킬 만큼의 공력이 맺혀있었다. 서로를 향한 살기가 방 안에서 부딪치며 자연의 것과는 다른 인위적인 불꽃이 튀어올랐다. 초식의 교환은 고사하고 출수조차 하지 않은 검권劍圈의 충돌이건만, 범인凡人은 순식간에 고깃덩어리가 될 정도의 압력이 휘몰아쳤다.
나백천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냐.”
“이런 짓? 무슨 짓? 남궁가주를 격살한 것? 무례한 계집들 손봐준 것? 예린이를 탐하려 한 것? 서천의 무공을 배운 것? 어떤 것 말이오?”
“전부 다 말이다.”
“거, 방금 전에 변명하라고 할 때 다 한 거 뭘 또 굳이 들으려 하시는 거요?”
“그건 죽은 내 동생의 변명이었지. ……이번에는 네가 이런 짓을 하는 이유를 말해보라는 것이다, 서천멸겁!”
번쩍! 새하얀 검기가 나일천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명백한 살계殺計로서 천둥번개와 함께 쏘아진 검기를 인지하거나 피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나일천은 신속하게 오른손을 휘둘러 공격을 막았다. 카앙! 맑은 쇳소리가 울려퍼졌으나 이번만큼은 멀쩡히 서있던 자리에 그대로 선 나일천이 코웃음치며 대답했다.
“흥! 서천멸겁이라 불리면 내가 뭔가 대단한 이유라도 댈 줄 알았나, 정천맹주? 이 엿 같은 세상 뒤엎어보겠다는 거 외에 뭐 더 있을까.”
“……!”
나백천은 단 번에 세 장 정도 뒤로 물러나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일만 삼천 장의 싸늘한 쇳조각으로 만들어진 서천의 독문병기 서풍의 광란西風狂亂. 자신의 검과 내공이라면 충분히 베어낼 수 있으리라 판단했지만 그것은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말은.
“……얼마나 서천의 내공을 수련한 것이냐.”
“흠, 뭐, 꽤 되었다고만 해두지.”
역시 그랬나. 나백천은 직접 검을 부딪쳐본 결과 나일천의 내공이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과거 천무삼성이 합공으로 상대하여 간신히 팔을 베어낸 것이 서천멸겁이다. 비록 눈앞의 상대는 옛날에 팔이 잘린 서천멸겁 본인이 아니라 무기와 내공만을 이어받은 후계자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무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언제부터 그 사이한 무공을 수련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검을 맞대보니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고사하고 싸우게 된다면 백중지세의 싸움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나백천에게는 지켜야만 하는 이들이 있었다. 나예린과 비류향. 그 둘을 무사히 지키면서 서천을 상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상대 역시 썩 유리하기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쳇, 아직 부족한가.'
방금 전의 일격으로 나일천은 지금 이 순간 나백천을 상대로 승리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신경쓰고 있는 두 소녀를 노려 빈틈을 만들지 않는다면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서천의 무공에 대한 수련과 이해가 조금 더 깊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아무래도 성급했던 것 같았다. 빌어먹을 놈. 높은 자리에 올랐으면 호위호식하며 있을 것이지 죽어라 수련해서 실력을 쌓았나. 겉으로는 자신만만한 척 했지만 나일천의 속은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해야 했다. 아둥바둥 싸운 끝에 얻는 승리는 의미가 없었다. 철저하고 확고한 승리로 상대를 짓밟아야 의미가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그 앞에서 딸을 범한다. 그러지 않으면 복수의 의미가 없다. 그러한 집착이 심마心魔가 되어 그를 얽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아쉽지만 이 정도로 끝내주지. 예린이를 못 취해서 흥이 나질 않거든.”
“네놈이……!”
“크흐흐, 그 얼굴 참 볼 만 하군.”
분노로 일그러지는 나백천의 얼굴을 비웃으며 나일천은 그 너머,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반송장 상태인 비류향을 끌어안고 두려움에 가득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조카의 시선에 나일천은 가학심이 충족되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예린아! 이 숙부가 오늘은 바빠서 이만 가봐야겠구나!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참으로 미안하구나! 허나 걱정하지 말거라! 이 숙부가 언젠가 꼭 네게 어른의 맛을 가르쳐 줄 터이니! 네 보드라운 속살을 가르고 듬뿍 귀여워 해 줄 것이니 기다리고 있거라! 반드시!”
검디 검은 악의였다. 색욕과 집착이 서로 뒤엉키고 얽히고설켜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의념이 소녀의 여린 마음을 부수고 집어삼키기 위해 날아들었다. 압도적인 악의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려는 소녀의 귓가에──
“……괜찮아…….”
──구원의 문구文句가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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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눈을 뜬 것일까.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숨을 애써 이어가며,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힘껏 치켜뜨며,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경련을 간신히 억누르며 비류향은 품 안의 소녀를 위해 입을 열었다. 기절할 것 같은 악의에 몸을 떨던 나예린의 귓가에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걱정마…….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은…… 겁이 나서야……. 무서울 거…… 없단다……."
“언니……. 언니이…….”
팔이 왜 이리도 무거울까. 그나마 왼팔은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나마 말을 듣는 오른팔로 울먹이는 나예린을 안아주었다. 피에 젖은 상의에 얼굴이 닿게 되어 아차 싶었지만 나예린은 떨어지지 않았다. 되려 가슴께에 얼굴을 파묻으며 자신을 불렀다. 그 모습에 비류향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나일천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시야에 자세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거무죽죽한 무쇠팔을 단 사내의 형상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평생…… 얻지 못할 것을…… 얻으려 헤매다…… 광야에서…… 아무도 모르게…… 쓰러져 죽을…… 그런 것의 말에…… 귀 기울일 것 없어…….”
폐부와 식도에 들어찬 피거품에 소리는 이상했지만 다정한 말투였다. 품 안에서 떨고 있는 소녀를 위한 것이리라. 나예린에게만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경지에 이른 무림고수인 두 형제 역시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나일천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허나 비류향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눈길로 나일천을 바라보았다. 추악한 존재에 대한 혐오와 악의어린 시선조차 아니었다. 마치 불 속에 뛰어드는 날벌레를 보는 것과도 같은, 아니. 그보다 더한, 저잣거리 모퉁이에 쌓여있다 바람에 휩쓸려 어디론가 굴러가는 먼지덩어리를 보는 듯한 무심하디 무심한 눈길.
사실 너는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느냐. 대단한 것은 네가 주워다 몸뚱아리에 붙인 그 쇳덩어리지. 자신도 모르게 품고 있던 열등감 때문에 나일천은 비류향의 시선을 그렇게 느꼈다. 만약 그에게도 용안이 있어 비류향의 심상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그는 더더욱 분노했을 것이다. 이 시선이 의도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욕망과 광기를 제외하면 오만과 자존심만이 남는 사내의 평정심과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과연 그가 언제쯤이면 알게 될까. 아니나 다를까.
“네년! 이 빌어먹을 년! 이 개 같은 년!!!!!!”
언제 미소짓고 있었냐는 듯 나일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압도적인 살기와 끔찍한 악의가 비류향과 나예린을 집어삼키려는 듯 몰아쳤다. 검디 검은 악의의 홍수가 밀려온다. 시선을 돌리고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사실에 나예린은 더욱더 비류향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처럼 고독과 공포가 가득한 세상에서, 홀로 길을 밝히는 등대가 그러하듯 온기와 안도감을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온기와 안도감을 발판 삼아 두려움을 극복할 용기를 주는 이였다.
피냄새가 가득 했지만 그 안에서도 비류향의 체취와 더불어 한 줄기 청량함이 나예린의 폐부를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모든 것을 직시直示하는 용안은 흔들리면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태양 같은 빛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린아…… 보렴…….”
“…….”
“괜찮아……. 괜찮아, 린아……. 봐…….”
“……네…….”
귓가에 맴도는 속삭임에 나예린은 용기를 내어 눈을 떴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바로 옆에서 넘실거리는 심독心毒이 너무나도 무서웠지만, 독기가 강하게 느껴질수록 바로 곁에서 자신을 감싸는 온기와 청량감 역시 대비되어 증폭돼 소녀의 마음을 지탱해주었다. 크게 심호흡하고 나예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일천을 바라보았다.
광기와 탐욕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굳이 용안으로 보지 않더라도 추악했다. 그러나 무섭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덮치려고 했던 사내다. 하지만 방금 전과 같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압도적인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비류향의 말에 분노가 일렁이는 나일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치 싸움에서 지고 분을 삭히지 못해 낑낑거리는 투견이 저러할까 싶었다.
"……어때……. 무섭지 않지……?"
“……네. 하나도, 하나도 안 무서워요!”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다. 그러나 어느 덧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정신을 좀먹던 공포는 사라져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추악한 심정心精이 눈에 들어와 욕지기가 치밀었지만 이제 그것은 공포라기보다는 단순한 생리적 거부감이 만들어낸 역겨움이었다. 두려운 것이 아니라 더러운 것. 나일천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런 나예린의 모습에 비류향은 힘겹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짖는 개는…… 시끄러울 뿐이야……."
“네!”
어느 새 나예린의 눈에는 적의敵意가, 나일천을 향한 저항의지가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일천은 실성한 듯 실없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허, 허허……. 허허허허허허허…….”
이제는 정말 참을 수 없었다. 그러한 생각에 나일천은 이를 갈며 오른손에 공력을 집중시켰다.
"그 개에게 물려 죽어가는 년이 말은 잘 하는, 크헉!"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찰나의 방심이 부른 빈틈은 치명적인 일격이 되어 나일천의 하복부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 일반적으로도 급소지만 무인에게 있어 하복부는 단전이며, 이곳은 내공을 담아두는 그릇과 같은 역활을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이곳에 공격을 받았다는 것은 무술의 근본이 흔들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혈육의 정은 기대하지 마라!!!!!”
“크으으으으으으으!!!!!!!!”
나백천은 확실하게 잡은 승기를 굳히기 위해, 그와 동시에 무림에 큰 위협이 될 서천멸겁을 이 자리에서 쓰러뜨리기 위해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혈육의 정은── 이미 살초를 펼친 시점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오른팔과 머리를 베는 검로劍路를 따라 부드럽게, 그러나 강맹하고 파괴적인 검기劍氣가 휘몰아쳤다. 그것을 본 나일천은 다급히 왼손을 뻗어 비류향과 나예린을 향해 장력을 내뿜었다.
“광풍장狂風掌!!!”
과거 백풍검객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의 나일천이 자랑하던 절초가 소녀들을 향해 내뿜어졌다. 이를 무시하면 서천의 목을, 하다못해 팔이라도 벨 수 있다. 허나 그렇게 되면 소녀들은 한 줌 혈수血水로 녹아내리리라. 찰나의 순간, 고민 끝에 나백천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취하기로 했다.
“이 금수 만도 못한 노오오오옴!!!!”
“무, 아닛?!”
백혼검뢰천검식白魂劍雷天劍式
오의奧義
뇌망백렬雷網白裂
새하얀 백광이 나일천의 장풍을 흩어버리고, 그의 상반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허나 그 압도적인 검풍에 휩쓸리기 직전, 나일천은 비릿한 웃음과 함께 오른팔을 휘둘렀다. 공격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집중한 나백천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벽력탄霹靂炭!”
주먹만한 쇳덩어리 겉에 난 조그마한 구멍에서 나온 실에 심상치 않은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본 순간, 나백천은 경악했다. 암기와 독에 능한 사천당문이라해도 함부로 쓰지 못하는 것이 화약무기다. 위력도 위력이지만 화약은 국가에서 엄격히 관리하는 통에 쉽사리 손댈 수 없거늘 어떻게!
“하하하하! 결판은 다음으로 미뤄두겠소!!!”
와장창창!
경악하는 나백천을 뒤로 하고, 나일천은 오른팔을 휘두른 반동을 활용해 창문을 부수며 폭풍우 속으로 사라졌다. 나백천은 허공섭물의 기지로 허공에 뜬 벽력탄을 나일천이 도망친 창문을 향해 내던졌고── 콰아아아아아앙! ──천둥번개와는 엄연히 다른 이질적인 굉음과 함께 후끈한 바람이 비바람과 함께 실내로 들이쳤다 가라앉았다. 재빨리 창가로 다가간 나백천은 이를 악물었다. 나일천의 흔적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으음……!”
안타까운 일이었다. 매우 위협적인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천겁령 사천멸겁 중 하나를 완전히 끝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쉽지 않은 상대였으나 적절한 기습으로 단전을 뒤흔들었기에 순식간에 승기가 기운 상황이었던 만큼 아쉬움은 배가 되었다. 게다가 이렇게 도망친 서천이 훗날 벌일 패악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졌다.
허나 이미 엎질러진 물. 지금은 뒷수습을 해야하는 시점이었다.
“아버지! 언니가!”
딸의 외침에 나백천은 잊고 있던 것이 떠올라 급히 신형을 날렸다. 부어오른 딸의 뺨에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위급한 이가 있었다. 나백천은 기어코 바닥에 쓰러진 비류향를 바로 눕히고 맥을 짚으며 물었다.
“정신차리거라.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
“……맹주님…….”
“그래. 힘들겠지만 절대 정신을 잃으면 안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백천의 마음 속에는 이미 낭패의 기색이 흐르고 있었다. 틀렸다. 출혈도 출혈이지만 기맥이 심하게 망가졌다. 이미 망가져 있던 기맥이 망가져봤자 얼마나 더 망가지겠냐 싶었지만, 전회前回가 구멍을 임시방편으로 막은 둑과 같았다면, 작금의 몸은 거센 홍수에 어디랄 것 없이 금이 가 터지기 직전의 보와 같았다. 그것을 알기 때문일까. 눈이 거의 감긴 비류향의 입에서 유언과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연이에게…… 노야께…… 부디…….”
“그런 건 살아서 훗날 전하면 된다! 눈을 뜨거라!”
“언니! 안돼요! 제발!”
용안에 비치는 가시화된 죽음의 형태에 나예린이 절규했다. 그런 딸을 본 나백천은 순간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에 눈을 부릅 떴다. 노사부의 그것이라면. 자신 혼자서라면 불가능할 테지만 딸의, 나예린의 도움을 받는다면 해볼만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순간, 당장 위급한 이 순간만을 넘겨 시간을 번다면 급히 노사부를 찾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가 과연 비류향의 몸을 고쳐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해봐야 했다.
“맹주님! 괜찮으십니까?!”
“대체 이게 무슨, 아닛?! 의원! 의원을 불러! 어서!”
“서둘러 조를 나눠 명을 따르도록! 1조는 전前 정천맹 사천지부 부총령 나일천에 대한 수배령을 내려라! 그는 2대 서천멸겁이다! 2조는 시급히 의원과 약재를 구해오도록! 그리고 3조는 당장 호법護法을 설 준비를 해라!”
“맹주님, 그게 무슨,”
“설명할 시간이 없다! 어서!”
때마침 도착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나백천은 비류향을 침대 위로 옮겼다. 맹주의 명령에 따르던 이들은 나백천이 옮기는 비류향의 모습을 보며 경악했다. 그들 역시 일정 경지에 이른 무인들이었다. 외상도 외상이지만, 외상으로 드러날 정도로 심각한 내상을 입은 소녀의 모습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것 외에도 무인들은 비류향이 나예린의 말벗을 하는 소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끔 지나가다 마주치면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아름다운 소녀라는 게 그들이 가진 비류향에 대한 인상이었다. 그렇게 알던 이가 반송장이 되어 있으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부하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은 체 나백천은 함께 따라온 딸에게 말했다.
“예린아, 네 도움이 필요하단다.”
“제, 제 도움이요?”
“그래.”
나백천은 당혹스러워하는 나예린에게 지금부터 자신이 할 일에 대해, 그리고 거기서 나예린이 해야할 일에 대해 간략하고 빠르게 설명했다. 내공으로 깨지고 망가진 기맥을 일시적으로 감싸 보호하는 것. 그러나 완전히 망가져 손을 댈 수 없는 부분은 피해야 하는 것. 그러기 위해 용안으로 시급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가려내어야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단시간에 끝나지 않으며 매우 힘들 것이라는 것.
“할 수 있겠느냐.”
“……할게요.”
하늘 없이 새가 살 수 있을까天鳥之關. 물 없이 물고기가 살 수 있을까水魚之交. 그대 없는 삶은 지옥과 같은데 어찌 여기서 물러설까. 나예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나백천은 항상 유약하게만 느껴지던 딸아이의 결의에 감탄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으며 비류향의 하단전과 상단전─아랫배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시작하마.”
“네.”
나예린의 대답과 동시에 나백천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내공을 흘려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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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8일. 제 생일입니다. 그래서 연참으로 자축하려 했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생일인데 왜 그런 고난의 행군을 해야하는가 싶더라구요. <-
-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오면 왜 그리 창작욕구가 치솟기 시작하는 걸까요. 정작 쓰기 시작하면 팍 식어버리지만요. […]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