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5.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5.
주객酒客들의 고성방가조차도 사라진 시간에 밤짐슴이나 분간하고 다닐 어둠이 내린 시간이었다. 그러한 어둠 뚫고 한 인영이 정천맹주 진천뇌벽검 나백천이 머무르고 있는 귀빈실의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이미 초목들도 잠든 시간인지라 대답이 들려올 리가 만무했으나 놀랍게도 반응이 있었다.
"들어오게."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작은 소리를 포착한 인영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솜을 누빈 신발이라도 신은 것을까. 그의 발걸음에는 자그마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백천의 방으로 들어온 인물은 쓰고 있던 초립을 벗었다. 혹여나 창문 너머로 새어나갈까 두려워하듯 작게 켠 등불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사천 지부장 남궁현이었다. 그를 보며 나백천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많이 놀랐는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다른 주머니 채우는 일 숨기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허허허, 사람하고는."
짖궂은 농담에 웃음이 피어났다. 그러나 곧 웃음기를 지운 나백천은 품 안에서 서찰 두 장을 꺼내 남궁현 쪽으로 내밀었다. 하나는 낡은 것이었고, 하나는 비교적 새 것이었다. 그것을 본 남궁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건……."
"2년 전, 본부에서 일어난 도난사건을 기억하고 있나?"
"제칠비고 도난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기억하고 있습니다."
2년 전이라면 남궁현 역시 본부에 적을 두고 있을 때였다. 정천맹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일곱 겹의 감시를 두른 엄중한 창고가 뚫린 것을 어찌 잊겠는가.
"음, 무엇을 도난당했는지는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나백천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남궁현은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정천맹주가 입을 열고 도난당한 물품과 그 유래를 설명하자 남궁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남궁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그는 낡은 서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그런 일이……. 그렇다면 이 서찰은……."
"그날 밤 범인이 두고 간 것일세."
"역시……."
남궁현은 낡은 서찰을 내려보다 나백천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나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었다. 그러자 남궁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서찰을 펼쳤다.
『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간다. 그동안 잘 보관해 줘 고맙다. 다음에 보자. -빚을 진 자가- 』
두 번, 세 번 읽어도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서찰을 원래대로 접어 내려놓은 남궁현은 또다기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서풍의 광란'……. 도난당한 것이 서천西天의 독문기문병기였다니……. ……설마, 서천이 아직 살아있다는……!"
남궁현의 나이가 올해로 쉰이다. 일반인이었다면 노년의 나이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강호에서 보자면 젊은 축이었다. 그런 그에게 100년 전의 천겁혈세는 전설 속 이야기와 다름이 없었다. 대전에 참전했던 그의 조부로부터 간간히 듣기만 했던 일이다. 그러나 조부의 이야기 속에 담긴 공포와 절망은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동요했던 것이다.
"그건 모르는 일이야. 그러니 쉽게 동요하지 말게. 적들이 바라는 게 바로 그것일 수도 있어."
"으음,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나백천의 지적에 간신히 정신을 되돌린 남궁현은 자신의 실책을 시인했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만 하더라도 서천멸겁이 쓰던 무기가 사라졌다는 말 한마디에 이토록 동요하는데, 이 사실이 공표되기라도 한다면 어떠할까. 무림 전체가 술렁이게 될 것이다. 설령 정말로 서천멸겁이 없다고 하더라도 정사흑백 구분 없이 강한 심리적 부담감을 느낄 게 분명했다.
"이제 왜 내가 이 늦은 시간에 자네를 불렀는지 알겠는가? 모든 판단은 사실 확인을 마친 후에 내려도 늦지 않네."
"명심하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저것을 펼쳐보게."
남궁현은 새 서찰을 펼쳐보았다.
『바야흐로 때가 되었다. 빚을 청산할 때가! 서쪽 관문을 넘어 서쪽 끝에서부터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할 것이다. -빚을 진 자가- 』
내용을 몇 번 곱씹어 읽은 남궁현은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서쪽 관문은 옥문관일 것이고, 서쪽 끝이라면 이곳, 사천땅이겠군요."
"그래. 그래서 내가 이곳으로 온 것일세."
나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 서찰은 그를 안마당인 본부에서부터 끌어내기 위한 함정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백천은 딸인 나예린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었다. 자신이 없는 정천맹에 놔두느니 차라리 자신의 곁에 두는 게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다. 함정이든 아니든 직접 나서야 했다. 이것은 일종의 도전장이기도 했다.
"2년 만에 나타난 유일한 단서라네.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야."
"바로 조사에 착수하겠습니다. ……허나, 너무 막막한 일이군요."
수하들에게도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이상 번거로움은 물론이거니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조차도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나백천이 말했다.
"작은 단서는 있네."
"무엇입니까?"
"100년 전, 천무삼성天武三星께서 그 자의 오른팔을 잘랐네."
"오른팔이라……."
남궁현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서천멸겁의 독문병기는 그의 팔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권법이라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팔이라는 뜻이었다. 몸에서 잘려나간 팔이 100년 넘게 멀쩡할 리가 있겠느냐마는, 그건 그것이 사람의 살이 아닌 차가운 쇳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주제에 진짜 살덩어리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니 믿을 수가 없는 얘기였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기로 했다. 만약 서천멸겁이 살아있다면? 2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이러한 도발을 펼치는 이유가 100년 동안 몸에서 떨어져 있던 독문병기의 조정을 마쳤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찾아야 하는 건 무엇일까. 곰곰히 고민한 끝에 그는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입에 담았다.
"외팔이였던 자, 허나 지금은 외팔이가 아닌 자를 찾아야겠군요."
"내 자네에게 이곳을 맡긴 게 정말 잘 한 일인 것 같네. 어찌 그리도 정확하게 내 생각을 꿰뚫나?"
"과찬이십니다."
담백한 반응이 오갔다. 그만큼 막중한 업무였다. 실패하면 사천의 실마리를 놓치는 꼴이고, 성공하더라도 여차하면 사천과 맞서야 하는 일이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으나 이럴 경우에는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압박감에 한숨을 내쉬던 남궁현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물었다.
"……비류향이라는 그 소저는 어떻습니까?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자네는 그 아이가 외팔이로 보이는가?"
"허나 끄나풀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맹주님께서 이곳에 오시고 얼마 되지 않아 만났다는 게 수상합니다."
"내 사람을 시켜 뒷조사를 해봤네만, 거짓이 없었네. 실제로 그 아이가 살았던 마을도 있었고, 돌림병에서 살아남은 이들 역시 그 아이에 대해 증언해줬고."
"허나 특이한 기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인神人이 몸을 살폈다고는 하지만, 그게 혹여 그들이 몸을 만져 금제禁制를 건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자네라면 그토록 특이한 세작을 놓겠는가?"
"맹주님."
지부장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백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나 역시 그걸 의심해본 적이 있네. 하지만 그런 걸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는 이가 바로 곁에 붙어있지 않은가?"
"……설마, 예린이가?"
"그 설마일세. 덕분에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지."
믿음을 위한 의심이었다. 믿고 싶었기에, 그렇기에 나예린은 난생 처음 스스로의 의지로 용안龍眼을 전개하여 비류향을 샅샅이 살폈다. 결과는 순백純白이었지만 영혼까지 뒤흔드는 충격에 비류향은 하루 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 다음날에야 간신히 눈을 떴다. 그 동안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나예린은 연유를 묻는 비류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믿고 싶었노라고. 그래서 한 행동이었다고. 혼이 날까, 미움받을까 두려워하는 어린 소녀를 향해 비류향은 물었다.
"이제 믿을 수 있겠니?"
"……네."
"그래, 그럼 됐어."
몸 한 번 앓고 신뢰를 얻었으면 남는 장사지. 열다섯 소녀는 그렇게 덧붙였다. 곁에 함께 있던 나백천이 경탄할만한 대범함이었다. 그와 관련된 얘기는 하지 않았으나 남궁현은 용안으로 확인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용안으로 살펴 아무 것도 없았다면 믿을 수 밖에 없겠군요. 어찌되었든 서천에 대한 정보,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네."
그렇게 말을 마친 남궁현은 왔던 것처럼 초립을 쓰고 조용히 객실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백천은 두 편의 서찰을 품에 갈무리했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가. 불안과 더불어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정녕 서천멸겁이 나타날 것인가. 과연 일신一身의 힘으로 그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혹여나 다른 멸겁들이 함께 있다면 어찌될 것인가. 그렇게 되면 예린이는. 지켜줄 이가 사라지면 그 아이를 누가 보살펴줄까.
결국 나백천은 닭이 울고 아침햇살이 방을 비출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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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이토록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어머니의 태반이 아니라 스스로 숨 쉰 것은 이제 고작 십이간지를 일순一巡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언제나 고통스러운 순간들 뿐이었고, 찰나의 안식조차도 그저 한 숨 돌릴 수 있을 뿐인 세월이었다. 하루하루가 메마른 사막과 음습한 늪지를 헤쳐나가는 느낌이었다. 나예린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과거는 그런 잔혹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비류향이 오고 나서는 그 반대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고통에 대한 보답처럼 너무나도 행복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주식이 담긴 그릇을 앞에 두고 찬은 그 위로 놓는 거야. 오늘처럼 누군가와 함께 먹으면 가운데 두고. 젓가락은?"
"받침대 위에요."
"응. 먹기 전에는 어떻게 말하지?"
"잘 먹겠습니다, 라고 해요."
"맞아. 자, 이제 먹자.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다 먹은 후에는?"
"잘 먹었습니다."
"응. 나중에 동생이 생기면 린이 네가 언니로서 가르쳐줘야 돼. 알겠지?"
"네."
그릇 놓는 법. 바르게 앉는 법. 입 안에 음식물이 있을 때는 말을 삼가하는 것, 반찬을 헤집지 않는 것, 식사 때의 인사법 등을 배웠다.
"젓가락 한 쪽은 약지와 엄지 안쪽으로 잡고, 다른 한 쪽은 엄지 끝으로 고정하면서 검지와 중지로 움직이는 거야."
"……어려워요."
"처음엔 다들 그래. 자, 이렇게."
젓가락질은 식사 후에 따로 더 배웠다.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나예린이 울상을 짓자 비류향은 곁으로 다가와 세심하게 집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하다보니 조금씩 익숙해져갔다.
"속옷이 작구나. 좀 더 큰 걸 입어야겠어."
"중요한가요?"
"응. 몸에 맞는 속옷을 입어야 쑥쑥 크니까. ……나도 저잣거리서 들은 장사꾼에게 얘기지만."
"일부러 새 것 사게 하려는 걸 거에요."
"후훗, 그럴지도 몰라. 그치만 지금 속옷 입고 있으면 답답하지?"
"……네."
"그럼 새 걸 사야지. 그리고 속옷을 잘 입어야 겉옷도 맵시가 살아나지. 옷고름과 치마 매듭짓는 법 기억하니?"
"네. 그렇게 묶었어요."
"어디 보자. 응. 잘했어."
옷을 정갈하게 입는 법을 배웠다. 단순히 몸을 가리도록 꽁꽁 싸매는 것이 아니라 속옷부터 겉옷까지, 적삼부터 치마까지 어디에 두르고 어떻게 입으며 어찌 매듭지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우선 큰 빗으로 빗고, 그 다음에 작은 빗으로 빗어야 머릿결도 안 상하고 당겨서 아프지도 않아."
"젖어있어도 괜찮나요?"
"어지간하면 말리고 해야지."
"여름에는 부채질하면 되는데, 겨울에는 힘들 것 같아요."
"그래. 겨울에는 머리가 시려서 부채질 하기 힘들지."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부채 같은 게 나오면 좋을 텐데……."
"그러게. 그런 게 있으면 참 좋겠다."
머리 빗질 하는 법을 배웠다. 두피가 당기지 않도록, 중간에 엉키지 않도록 빗는 법을 배우며 서로의 머리를 빗겨줄 때 도란도란 얘기하는 게 정말 좋았다.
"여기서는 삼현을 튕기면서, 언제나 당신을 그리며我永慕上────……."
"언제나 당신을 그리며……."
"그리고 오현과 일현을 타고, 돌아올 날을 기다립니다待上復日也──……."
"돌아올 날을 기다립니다……. 음音 틀리지 않았나요?"
"……아, 응. 실수했네. 처음부터 다시 해볼까?"
"네."
음악과 금琴을 배웠다. 비류향 역시 비류연이 노사부에게 금을 배울 때 투덜거리는 걸 달래며, 혹은 누이에게 들려준다며 튕기던 것을 곁눈질하고 몇 가지 배운 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아는 곡조도 많지 않고 금 역시 때때로 음이 튀었지만, 두 소녀는 그때마다 까르르 웃으며 금을 타고 노래를 불렀다.
"거기서는 엄지 손가락으로 윗 실을 걸고, 아랫 실 사이로 빼는 거야."
"이렇……게…… 아……."
"그 상태로 엄지와 검지를 펼쳐봐."
"아, 아아……, 와……. 됐어요!"
"자, 그럼 이번에는 내 차례지? 자, 풀어볼래?"
"……언니이……."
"알았어. 가르쳐 줄게. 이번에는……."
실뜨기를 배웠다. 소일거리 삼아, 그리고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나예린을 위해 천과 재봉도구를 받아온 비류향은, 소녀를 위한 새 옷을 지으면서 남는 실로 틈틈히 실뜨기를 가르쳐주었다.
비류향은 그렇게 많은 것들을 가르치면서 틈틈히 수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일상의 신변잡기와 생활지식부터 경전과 고문古文까지, 민담民談에서부터 경극과 사서史書까지 다종다양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물론 제대로 배우지 못한 소녀였는지라 큰 흐름이 없어 번잡하고 조잡했지만,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왔던 나예린에게는 하나하나가 모두 귀하고 즐거운 이야기였다.
함께하는 시간 모두가 좋았지만 나예린은 특히 비류향과 목욕할 때가 제일 좋았다. 이때는 보통 특이체질로 인해 비류향이 쪽잠에 들어 대화는 없었지만, 세 살 연상인 소녀의 품에 기대어 몸을 담그고 있으면, 모든 소리가 아련히 사라지면서 고요해져 마치 태아가 되어 어머니 뱃속에 있는 것처럼 평온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하나만 놓고 보면 별 것 아닌 사소한 일상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상. 그러나 타고난 미색美色과 용안龍眼은 소녀로부터 그러한 일상을 빼앗아갔다. 이것이 소녀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면 이토록 괴롭지는 않았으리라. 허나 여태껏 소녀의 삶에 선택은 없었다. 어디서나 넘실대는 사람의 악의와 욕망에 쫓기고 또 쫓겨 도망칠 뿐이었다. 만약 소녀의 부친이 무림의 양맥兩脈인 백도白道의 중심 정천맹正天盟의 주인된 자가 아니었다면, 그 무공이 절정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었다면 나예린의 과거는 지금보다 더 참혹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만큼 인고의 세월 끝에 나타난 비류향은 나예린에게 있어 구원이었다. 사욕 없이 자신을 마주대해주는 상대였다. 부모님을 제외하면 거의 유일하게 거부감 없이 살을 맞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때는 어머니처럼, 어느 때는 친구처럼 곁에 있어주는 이였다. 어찌 기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찌 미소 짓지 않을 수 있을까.
해맑게 웃게 된 딸아이의 모습에 나백천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비록 자신의 손으로 딸아이에게 웃음을 되찾아주지 못한 것은 아쉬워했지만 그는 아이의 행복을 우선시할 줄 아는 참된 아버지였다. 서천의 수작이 언제 펼쳐질지 몰라 걱정하면서도 여식의 미소를 볼 때마다 그는 마음의 평온을 얻어갔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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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이 덜컹거리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천둥번개가 요란했다. 꽁꽁 닫힌 창문에 가려도 알 수 있을 만큼 거친 날씨였지만 사내는 물끄러미 탁자 위에 놓인 것을 내려다보았다. 철로 만들어진 작고 기다란 관棺이었다. 산덩쿨 칡뿌리마냥 얼기설기 얽힌 듯 하면서도 정교하게 내용물을 감싸는 쇠사슬은 이 관이 얼마나 엄중한 물건인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폭풍이 부는구만……. 크흐흐흐……. 좋아, 이 녀석과 참 잘 어울리는 밤이 되겠어."
사내는 한손을 뻗어 이중 삼중으로 철저하게 휘감긴 쇠사슬을 걷어냈다. 양손으로 해도 버거울 작업을 굳이 한손으로만 하는 이유는 사내가 외팔이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텅 빈 오른소매가 문틈 새로 흘러들어온 바람을 타고 맥없이 펄럭였다. 힘들고 괴로울 법도 하건만 사내는 싱글벙글 웃으며 작업을 계속해나갔다. 되려 콧노래를 흥얼거리듯 중얼거렸다.
"인을 해치니 적이요賊仁者 謂之賊, 의를 해치니 잔이라賊義者를 謂之殘, 잔적한 자를 일부라 하니殘賊之人 謂之一夫 일부를 죽였다는 말은 들어봤어도聞誅一夫紂矣 군왕을 시해한 적은 없나이다未聞弑君也."
맹자 양혜왕 장구 하편 제8장 孟子梁惠王 章句 下編 第八章의 내용이다. 유교가 시작되고 생활 깊숙한 곳까지 뿌리내린 나라에서 비록 성현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언급하지 않는 내용이었다. 내키지 않으면 설령 왕이라 한들 뒤엎어버릴 수 있다는 내용이 쉽사리 용인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일천은 그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왕일지라도, 다시 말해서 아무리 높고 귀한 이라도 베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만인지상萬人之上도 그러할진데 친형이라고 아니 그럴까. 맹자께서 살아돌아오신다면 '그건 네놈의 욕망일 뿐이다!' 하고 노호할 해석이었으나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달칵.
쇠사슬이 모두 걷히자 자연스럽게 상자의 잠금쇠가 열렸다. 그와 동시에 오랜 세월 잠들어있던 내용물이 빛을 받았다.
"이것이……."
묵빛으로 빛나는 사람의 오른팔이었다. 아니, 사람의 것으로 보일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의수義手였다. 그러나 꺼림칙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신체 일부의 형태를 한 기괴함 때문인지 아니면 수많인 이의 피를 머금은 흉악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찌되었든 불길한 물건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흐흐, 흐히, 흐흐흐, 흐흐흐흐흐……."
허나 사내는 웃었다. 광기를 머금은 황홀한 미소를 그리며 오른쪽 소매를 걷어 흘러내리지 않게 물었다, 턱을 타고 흐르는 침에도 개의치 않고 실성한 듯 웃음소리를 흘리며 사내─나일천은 허공에 드러난 어깨에 의수를 들이댔다. 원래 팔이 있어야 했던 자리, 그러나 지금은 텅 빈 자리에 불길한 묵빛 철완이 닿았다.
"으음, 큭! 크으으으윽! 쉽게, 크흐흐흐, 굴복하지느으으은! 않는다는 게로구나! 흐히히히, 그래! 그래야 서천의 이름이 아깝, 지 않지이이이이이이!!!"
고통의 비명과 열락의 탄성이 뒤섞인 절규가 흘러나왔다. 나일천은 마치 주인의 목을 노리듯 하는 의수를 제압하려 안간힘을 썼다. 어찌보면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핏발 선 눈으로 광소狂笑를 터뜨리는 지옥의 수라가 저리할까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우우웅──
몸 안을 울리는 공명음과 함께 의수가 갑작스레 축 늘어졌다. 그 모습에 나일천은 천천히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기리릭.
희미한 마찰음이 났지만 진짜 사람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신이 생각한대로 움직였다. 폭발적인 환희가 그의 가슴 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길고긴 인고의 세월은 끝이 났다. 때가 되었다. 그리 생각하며 나일천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너무나도 달콤할 복수의 열매를 수확하러 가는 순간이었다. 평생 기억에 남을 순간을 이런 엉망인 모습으로 남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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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몰아치겠네."
산중턱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소녀(?)는 습기를 머금은 거친 산바람에 펄럭이는 치마를 내리누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물기 어린 풀내음이 진동했다. 아무래도 요란하게 쏟아질 듯 했다. 구름의 두께와 색깔을 보아하니 천둥번개를 동반한 먹구름이 분명했다. 우르릉. 쿠르릉. 용이 꿈틀거리기라도 하는 것 마냥 하늘이 울렸다.
"류…… 아니 연비燕飛야! 빨래 걷어라! 폭풍우가 올 게다!"
"네에──."
등 뒤 작은 오두막에서 들려온 노사부의 목소리에 연비라 개명당한 것도 모자라 성별까지 일시적으로 박탈당한 소년 비류연은 불만스러운 듯 말끝을 늘리며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정녕 여아女兒가 투정하는 것이라 보았을 것이다. 고된 수련(?)의 성과였으나 본인은 그리 썩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저 어서 사부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어 이 세상에 하나 남은 유일한 혈육을 만나러 가고 싶을 뿐이었다.
"근데 빨래가 문제가 아니라 집이 문제가 아닐까요?"
조촐하나 단정하고 깔끔한 정자와 같던 오두막은 이미 옛말이었다. 무성하게 피어나는 잡초를 뽑고 하루종일 쓸고 닦던 이가 없어진 오두막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낡고 후줄근한 건물이 되어 있었다. 참혹한 풍경이었다. 오밤중에 보게 된다면 귀신이 사는 집으로 보일 것 같았다. 그런 상태로 폭풍우를 맞이하게 생겼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걱정은 혼자만의 것인 듯 했다.
"근성으로 버티면 돼!"
"……근성만 있으면 예산도 계획도 필요없는 것입니까?"
"엉!"
"……."
폭군에게 목숨 걸고 직언하는 신하와 같은 마음으로 한 항의는 묵살당했고, 이에 소년은 남몰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집에 없는 누이의 품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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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틈새로 파고드는 바람에 촛불이 흔들렸다. 그러나 치마에 수를 놓는 소녀의 손길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의자에 앉아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는 섬세하면서도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수를 놓는 모습은 엄격한 사대부 집안의 솜씨좋은 규방아씨처럼 보였다. 한 땀 한 땀 정성 가득한 손길에 보기만해도 화려한 꽃무늬가 마침내 완성되었다. 소녀─비류향은 이를 대 실을 끊은 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다 됐다."
"정말요?"
"응. 입어볼래?"
"네!"
옆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예린은 비류향이 건네준 옷을 받아들고 탈의실로 뛰어갔다.
"넘어진다, 조심해."
"네─!"
덜컹! 털컹! 미닫이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비류향은 기지개를 켜며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하나가 끝났다. 한 달 동안 틈틈히 천을 놀려 만든 옷을 과연 저 나이대 여아女兒가 기뻐해줄까. 지금이야 선물이라 그저 기뻐하지만 마음에 안 내키면 어찌할까. 그럼 다음 옷은 어떻게 지어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자투리천과 반짇고리를 정리하던 비류향의 귓가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
바람에 날려 부딪친 소리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번에는 좀 더 명확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똑똑똑똑똑똑.
"……."
분명 사람이 문 두드리는 소리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문 앞 호위무사들이 방문객이 누군지 알렸을 터였다. 나예린은 여전히 꺼려했지만 비류향은 이곳을 드나들면서 얼굴을 익힌 여무사들이었다. 힘든 일에 고생한다면 꿀떡이나 다과를 챙겨주니 금새 호의적인 관계가 된 이들이었는데 어째서인지 그네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번쩍───
창호지 너머로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창호지에 비치는 그림자는 하나였다. 호위 둘과 방문객 하나라면 셋이어야 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조심스레 문으로 다가가던 비류향은 갑작스레 발걸음을 멈췄다. 꺼림칙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
눅눅한 공기였다. 허나 단순히 비로 인한 눅눅함이 아니었다. 좀 더 비릿하고 끈적하게 달라붙는 냄새. 돌림병이 돌 때 질리도록 맡았던 냄새. 혈향血香.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사천 제일의 객잔에서, 부엌도 아닌 곳에서 혈향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비류향의 생각을 부정하듯 검붉은 액체가 문틈으로 천천히 흘러들어왔다. 혈향이 더욱 짙어졌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똑똑똑똑똑똑쾅쾅쾅!
"예린아! 숙부가 왔다! 문 좀 열어 보거라!"
그 소리를 들은 순간 비류향은 탈의실을 향해 달려갔다. 다급히 문을 열자 나예린이 때마침 옷을 모두 입은 참이었다.
"꺄, 아, 언니? 어때요? 후아, 놀랐,"
"도망쳐야 돼."
"아, 네? 언니? 무슨 일이에요?"
처음 보는 비류향의 다급한 모습에 나예린이 묻자, 비류향은 객실문 반대쪽 비상구로 소녀를 이끌며 대답했다.
"숙부님이 오셨어."
아무리 숙부님이라도 아버지나 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여기로 들어오실 수 없어요. 나예린은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죽 그래왔으니까. 몇 번이고 여기까지 찾아와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소녀가 이번에도 그러리라 믿고 입을 연 순간,
콰르르르르르릉!!!!
근처에 떨어진 것일까. 대낮이 된 것과도 같은 번쩍임과 동시에 엄청난 천둥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와 더불어 그것과는 다른 이질적인 파열음과 함께 부서진 문이 바람과 함께 객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혈향은 머금은 거센 비바람에 등 안의 촛불들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어이쿠, 문이 너무 약하구나. 하하하, 걱정 말거라. 내 나중에 친히 고치러 올 테니."
철퍽. 철퍽. 진득한 발소리와 함께 피투성이 사내가 걸어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나예린이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기 시작했다. 단순한 육신의 공포를 넘어 용안에 비치는 사내─나일천의 심상이 영혼에까지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인륜人倫을 거스르는 사악邪惡함. 도리道理를 벗어난 뒤틀린 욕정慾精. 분간 없는 짐승들조차도 하지 않을 끈적이는 어둠의 눈길. 지옥불에 뛰노는 악귀惡鬼가 저럴까.
비류향은 그런 나예린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완전히 막아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저것을 직시直示하는 것은 피하게 할 요량이었다. 그런 소녀들의 모습에 나일천은 광소했다.
"예린아! 숙부가 왔는데 인사는 해야지! 크하하하하하!"
쿠르르르르릉!
소녀들의 심상을 대변하듯 요란한 천둥번개가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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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을 연連은 리옌lián이고 제비 연燕은 옌Yān으로 중국어 발음이 다릅니다. 어차피 한국 무협지니까 굳이 중국어 발음 따를 필요도 없고, 시대에 따라 변화한 한중간 한자 발음 고증 같은 걸 따져봤자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테니 그냥 넘어갑시다. [...] 그래도 연꽃 연蓮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만.
- 2부를 제대로 못 보고 쓰고 있다보니 시간선이 마구 꼬이네요. 그래서 큰 흐름만 잡고 나머지는 그냥 재구성하기로 했습니다.
- 천겁령이니 서천이니 어쩌니 할 때마다 하늘 같은 그대라는 제목이 떠오르더군요. 노리고 지은 제목이 아니었는데. 이놈들, 하늘에 무슨 짓을 하려고!
- 교수님들은 언제나 학생들이 자기 수업만 듣는 줄 아시죠. 그런 고로 다음 주 수요일에 뵙겠습니다 여러분.
한자漢字, 오타,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