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0.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0.
노사부가 천향루를 떠나고 비류향이 눈을 뜬 그날 이후 세상은 더없이 소란스러워졌다. 중원 전체에 서천멸겁의 부활과 그 정체가 정천맹주 나백천의 친동생 나일천이었다는 사실은 무림 뿐만이 아니라 관官과 민民에도 퍼져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백천은 그날로부터 약 2주 후인 오늘, 예정보다 일찍 사천을 떠나게 되었는데, 딸인 나예린은 남겨두고 먼저 떠난다는 결정을 내려 주위 인물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정말이십니까?”
“그렇네.”
살해당한 전 정천맹 사천지부장 남궁현의 동생인 남궁진은 맹주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천멸겁이 나일천이라는 사실은 이제 천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가 조카인 나예린을 덮치려 했다가 실패하고 도망쳤다는 것은 극히 소수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남궁진은 그 소수 중 하나였다. 언제 나일천이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그 아이를 이곳 사천 땅에, 그것도 일이 벌어졌던 천향루 숙소에 그대로 두겠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노야께서 안배해두셨으니 세상 어느 곳보다도 더 안전할 걸세.”
“그 무희舞姬말씀이십니까? 확실히 무시무시한 내공을 전해주고 가신 것 같습니다만, 그 아이 하나로 되겠습니까?”
남궁진이 연비를 언급하자 나백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 아이도 있지만, 그 외에도 몇 가지 더 준비해두고 가셨네. 내가 만일 그놈이라면 감히 그곳에는 얼씬도 안 할 거야.”
“대체 뭘 하고 가신 겁니까?”
“……알고 싶나?”
“……나중에 듣도록 하지요.“
대체 무슨 안배이기에 천하의 정천맹주가 저리 심각한 얼굴로 되묻는단 말인가. 어찌되었든 그가 안심하고 떠날 수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게다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검후劍后께서 예린이를 거두어가실 걸세.”
나예린을 검후에게 맡긴다는 얘기는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왔던 일이었기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제자가 될 나예린을 보내는 게 아니라 스승이 될 검후 이옥상이 남해에서 사천까지 직접 찾아온다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은 일이었다. 정천맹주라 하더라도 오라가라 할 수 없는 것이 천무삼성이다. 거기에 검성劍星과 도성刀星 모두 대결을 꺼리기에 사실상 제일인 검후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검후가 제자로 맞이할 아이를 위해 이곳에 직접 온다니?
“노야의 서찰을 함께 보냈네. 그랬더니 '이곳 일이 있어 바로는 못 가지만 곧 간다.'라고 하셨다더군. 노야께서 돌아오실 때쯤이면 그분께서도 이곳에 도착하시겠지.”
“대체 뭐라고 쓰셨길래 검후께서 직접 오신답니까?”
“글쎄. 엄청나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고 들었네만…….”
“……그거, 엄청나게 화가 나셨다는 얘기가……?”
노사부의 평소 언행으로 보아 결코 정중한 말투와 내용은 아니었으리라. 아마 '더 강해지고 싶으면 찾아와라.' 내지는 '더 강한 놈이랑 싸우고 싶으면 찾아와라.' 정도지 않았을까. 새삼스럽게 검후의 미소를 상상한 두 사람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일이 급하니 어서 본부로 돌아가봐야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갈길이 멉니다! 서두르시죠!”
천겁령과 싸울지언정 검후와는 절대 칼을 맞대고 싶지 않다. 그것은 검후를 아는 모든 남자들이 동의하는 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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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음률을 타고 소녀의 몸이 자연스럽게 튕겨오른다. 동시에 울려퍼지는 방울소리는 청량했지만 관객들의 시선은 무언가에 홀린 것마냥 몽롱했다. 그러면서도 소녀의 손짓 한 번에, 발디딤 한 번에 정확하게 고개를 움직인다. 맑은 밤하늘마냥 투명하게 검은 옷자락과 진주인지 유리인지 모를 것이 박힌 주단이 별빛처럼 반짝이며 펄럭일 때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소녀의 춤에 매료되어갔다.
아름다운 춤이다.
단순히 흩날리는 무복舞服 아룸다운 것이 아니다. 소녀의 외모가, 시리도록 투명하고 맑게 빛나는 영명황금안瑩明黃金眼이 아름다운 게 아니다. 잠재된 아름다움美을 표면으로 끌어올려 타인을 매료시킨다는 것은 지극한 의지와 수천 수만 번의 반복이 있어야 가능한 행위이다. 그렇기에 소녀의 동작은 그 나이대 아이들이 쉽사리 닿지 못하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손짓 발짓 하나하나가 절도 있으면서도 기품이 담겨 있고, 그러면서도 소녀답지 않은 강직함이 깃들어 있다. 동시에 우아하고 부드러운 곡선이 그려지는 춤사위. 이것을 아름다움美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아름다움일까.
너무나도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취한 관객들은 소녀의 춤과 음악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누군가의 박수소리를 듣고나서야 정신을 차린 듯, 혹은 신들린 듯한 얼굴로 박수를 치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관객들의 환호에 잠깐 눈을 반짝이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소녀가 대연무장大演舞場를 내려와 객석으로 향하자 수많은 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녀를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누군가 식탁에 부딪쳤는지 와장창 소리가 울려퍼졌지만 그걸 신경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 멋진 춤이구나. 굉장했다. 누구에게서 배운 춤이냐. 한 번 더 춰줄 수 있느냐. 훌륭하다 등등. 경탄과 환호가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에는 노골적으로 소녀에게 오늘 밤 자신의 객실로 와달라고 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니, 요청이면 그나마 양호하다. 칼밥 좀 먹은 듯 공력을 풀풀 풍기며 추잡한 미소와 함께 오라고 명령하는 이들까지 나오는 판국이었다. 허나 소녀는 그런 이들의 손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피해 대연무장 문 밖으로 나갔다. 뒤따르던 관객들이 소녀를 따라 문 밖으로 나왔지만, 소녀의 모습은 어느 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두 소녀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혼란스러운 대연무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비교적 한산한 식당으로 들어온 소녀들─나예린과 비류향은 어느 새 연무복을 벗고 평소 입던 현의玄衣로 갈아입은 연비가 구석 쪽 조용한 자리에 앉아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동생의 손짓에 두 사람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땠어?”
“정말 아름답더라.”
“멋진 춤이었어.”
“후후후,”
소녀들의 칭찬에 연비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실제 성별과는 별개로 다분히 소년 같은 웃음이었지만 이미 비밀을 아는 소녀들에게는 그다지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비류향은 처음 연비─여장한 비류연을 봤던 날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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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향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을 지나 산허리까지 반절 정도 온 거리에 걸려 있었다. 이렇게 오래 잠들었던 게 대체 얼마만일까. 다만 개운한 느낌은 없었기에 푹 자고 일어났다고는 할 수 없었다. 심지어 몸에 힘을 주면 어디랄 것 없이 파르르 떨려와 상반신을 일으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언니!”
“언니!”
익숙한 목소리와,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엔 두 명의 소녀가 있었다. 하나는 나예린이었다. 한 달 동안 정을 붙인 소녀는 망설임없이 비류향의 품에 파고들었다. 다행이다. 무사했구나.
“다친 데는 없지?”
“네!“
품 안에서 들려오는 나예린의 밝은 목소리에 안도한 순간, 또 한 명의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그 소녀는──,
“저기, 혹시 연이니?”
친동생인 비류연이 여장을 하면, 아니, 만약 소녀였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 외모였다. 게다가 저 황금안을 어찌 몰라볼까. 체형도 비슷했고 묘한 친숙함이 느껴졌다. 허나 소녀의 대답은 비류향의 예상과는 달랐다.
“아뇨, 전 연비라고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래……?”
“아, 소개할게요. 비류연이 아니라 연비에요. 이번에 천향루에 임시 무희舞姬로 일하러 왔대요.”
아버지께서 저랑 함께 있어달라고 하셨대요. 나예린이 그렇게 말했지만 비류향은 그러냐고 대답하면서도 석연찮은 표정으로 연비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연비는 그저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비류향의 시선이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연비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의혹 어린 시선에 어리둥절하거나 언짢아할 법도 하건만 그러지 않기에 의심이 더욱더 깊어져 갔다. 그러다 문득 창 밖을 보더니 말했다.
“하긴, 연이라면 지금쯤이면 대장간에서 쇠를 두드리고 있겠지. 미안해. 동생이랑 헷갈려서 괜히 불편하게 했구나.”
“……괜찮아요.”
비류향의 말에 연비는 방금 전까지 그리던 미소 대신 미묘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나예린의 손을 잡아 일으켜 거리를 두었다. 이제 괜찮지 않아? 더 해볼래요? 아니, 이제 그만할래. 나도 어쩌구 저쩌구. 소녀들 특유의 재잘거림과 속삭임이 뒤섞인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피로감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눈앞이 침침해져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두 소녀가 대화를 끝낸 듯 다가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예린이었다.
“언니, 이쪽은 '지금'은 연비에요.”
“……지금은?”
“'지금'은 연비랍니다.”
“……아!”
잠시 고민하다 무언가 깨달은 듯 비류향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말문이 막힌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몰랐다. '여장'한 동생을 본 누이는 뭐라고 해야하는 걸까. 해괴망측한 일이라며 나무라야 하는 걸까. 왜 그랬는지 연유를 물어야 하는 걸까. 고민하던 비류향은 이내 답을 내렸다.
“처음 만나는 거지만, 보고 싶었어.”
비류향이 이리 오라는 듯 팔을 벌리자, 연비는 눈을 글썽이며 그 안에 파고들었다.
“처음 만나는 거지만,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비류향과 연비─비류연은, 이 세상에 단 하나 남은 혈육은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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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벌써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잠드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전처럼 쪽잠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이것이 회복인지 아닌지는 애매한 사항이었지만 비류향은 이것을 회복세라고 판단했다. 길게 자도 피곤한 것보다는 옛날처럼 쪽잠을 자더라도 비교적 덜 피곤한 것이 몸 상태가 좀 더 나은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거기에 동생을 통해 노사부의 진원진기를 받아들인 몸이 점점 활력을 되찾아가는 것도 그러한 생각을 뒷받침해주었다.
호전되어가는 몸 상태와는 별개로 정신적으로는 답답했다. 지금까지 잠잘 때나 병마에 휩쓸렸을 때를 제외하면 뭐든지 일거리를 손에서 놓지 않던 소녀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니 답답할 수 밖에 없었다. 매일 같이 움직이던 몸이 가만히 있으니 좀이 쑤시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가볍게 청소라도 할라치면 나예린과 연비가 모두 달라붙어 쉬라며 억지로 침대로 이끌었기에 일주일간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조금이라도 무리다 싶으면 둘 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매달려 비류향을 쉬게 하였다.
그렇게 함께해서 그런지 나예린과 연비─비류연은 금새 친남매처럼 친해졌다. 그 또래 아이들은 친하게 놀다가도 어느 순간 틀어져서 싸우기도 하건만, 둘 다 어른스러운데다가 한쪽이 용안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다투는 일은 없었다. 지금만 봐도 춤이 아름다웠다, 언니들이 보러 와줘서 더 열심히 했다 등의 얘기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특이한 점이라면 비류연─연비가 나예린을 언니라 부르는 점이었다. 서로 친구처럼 지내다가 갑자기 자매처럼 지내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서로 한 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른스러운 아이들치고는 다분히 유치한 이유였지만, 어차피 진지하게 언니동생하는 것은 아니라 친구 사이의 장난 같은 행위였다. 거기에 더해 비류향이라는 언니와 함께하며 동생이라는 존재를 의식하고 손윗누이가 되고 싶었던 나예린과, 남들은 다들 세네 명씩 되는 집안에서 단 둘인 게 아쉬웠던, 그리고 누나라고 하면 비류향 하나 뿐이니 세상 누나들이 모두 다 착하고 좋은 줄만 아는 비류연의 속내가 맞아떨어졌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처음에 어색했던 것은 연비─비류연의 모습이었다. 어릴 때부터 봐 온 남동생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화장을 하고 여성복을 입고, 여성스러운 언행을 하고 다니니 기억과의 괴리감 때문에 뭐라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노사부가 수련을 위해 여장을 지시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몸은 남자로 태어났으나 마음은 여인인 자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 반대도. 나는 네가 어떤 삶을 살든 개의치 않을 거란다. 허나 미안하구나. 내가 마음을 쓰지 못해서. 진작에 알았다면 챙겨주었을 것을."
"……어, 어?! 아니, 아냐! 걱정 마! 그런 거 아니니까!”
“아니니?”
“아니야! 사부님이 수련 때문에 시키신 거야!”
다행스럽게도 오해는 풀어졌다. 동시에 한 소년의 성 주체성을 지켜낸 순간이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여장을 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동안 은연중에 새로운 세계에 눈 떠 가던(?) 소년은 누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비류연은 어느 새 흩어져가고 있던 있던 자신 안의 남성성을 다시금 확립할 수 있엇다.
“고마워, 언니(누나).”
“응? 응.”
어찌되었든 이제는 잘 지내고 있으니 괜찮은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비류향은 주문을 위해 점소이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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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온 지 한 달 정도 되었나. 연비─비류연은 오늘의 마지막 공연을 마친 후 객실로 돌아가면서 노사부와 함께 이곳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세상에 하나뿐인 사랑하는 누나가 오늘내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노사부와 함께 바람 같이 달려왔던 날로부터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누나가 쓰러져 있다는 것 때문에 정신이 없어 별다른 감상이 없었지만 확실히 이곳은 편했다. 여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일단 사부가 없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모든 문제가 사소(?)해졌다. 그와 더불어 온갖 집안일과 부업으로부터도 해방된 상태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금전적 손해가 있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춤과 노래를 팔아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구멍을 메꿀 수 있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누이가, 비류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노사부에게 핍박받으며 고난의 행군길을 걸어오던 소년에게 상냥한 누이를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은 분명한 행운이요, 삶의 축복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힘들었지?”
객실 문을 열자, 바느질하던 비류향이 그렇게 물었다. 석양빛을 등진 누이의 모습에 비류연─연비는 근래에 배운 의사용안擬似龍眼을 펼쳤다. 의사용안이 발동되자 붉은 석양과 더불어 따사로운 푸른빛이 눈을 파고들었다. 자신의 춤과 노래가 아무리 사람들을 매료시켜도 이것을 따라갈 수는 없으리라. 그만큼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연비는 그대로 비류향에게 다가가 허리춤에 파고들어 매달리며 말했다.
“힘~ 들~ 었~ 어~”
연무와 가악歌樂은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고 추파를 던지는 관객들─특히 무림인들을 따돌리는 것은 심히 귀찮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힘든 것은 의사용안 수련이었다.
의사용안은 나예린의 용안 직시直示수련을 돕다보니 자극을 받아 심심풀이 삼아 만들어 본 기술로 그 자체는 연비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허나 문제는 기술을 쓸 때마다 보이는 사람들 마음 속의 어둠이었다. 처음 의사용안을 발동시키고 본 인세人世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끔찍하기 그지 없었다.
“린, 언니는, 매일, 저런 걸, 웁, 보고, 있었어요?”
“……응.”
연비가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애써 참으며 던진 질문에 나예린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비는 새삼스럽게 나예린의 정신력에 경의를 표했다. 들끓는 욕심. 추잡한 사심. 사악한 갈구. 선량한 가면 아래,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어둠이 일렁이는 세상. 아무런 힘도 없는 소녀가 저 지옥을 보며 살아오면서 미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예린이 왜 그렇게 비류향에게 마음을 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시리도록 투명하면서도 봄햇살처럼 따스한 하늘빛 심상心想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수고했어.”
비류향은 바느질하던 옷감을 탁자 위에 두고, 허리춤에 매달린 동생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연비는 더해달라는 듯 뺨을 부볐고 비류향이 남는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자,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얌전해졌다. 과연 누가 이 소녀가 무대 위에서 초연한 얼굴로 춤을 추고 금을 타던 소녀라 볼까 싶을 만큼 행복한 미소였다. 눈앞에 빛나는 하늘빛 심상이 있는데 어찌 행복하지 않을까. 이 광경을 포기하지 못하기에 의사용안 수련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분명 괴로운 수련이었지만, 비류향을 보면 알 수 있듯 의사용안이 꼭 나쁜 것만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꽃을 보러 가자. 폭포도 보러 가자. 오색 단풍도.”
“설산은 오르기 힘들지만, 순백설산 정경은 얼마나 멋진데!"
“……보러갈 수 있을까요?”
노사부의 안배에 기대다보니 천향루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된 나예린은 연비와 비류향에게 산풍경 얘기를 듣다가 그렇게 되물었다.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예린은 그러한 얘기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흥미가 동하는 아이였다. 다만 지금은 어려웠다. 언제 어디서 서천멸겁이 올지 모르는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도 어찌될지 모른다. 그걸 알고 있기에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한 나예린이 시무룩해 하는 찰나, 비류향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용안!”
“네?”
“용안은 사람의 심상을 읽을 수 있잖니?”
“……아! 그러면 되는구나!”
“……?”
“용안으로 큰언니랑 내 심상을 보면 되잖아!”
연비의 말에 나예린큰 큰 충격을 받았다. 분명 그렇게 볼 수도 있었다. 노사부가 가르쳐준 방법으로 단련한 덕분에 지금의 나예린은 더 집중하면 타인의 기억을 실감나게 공유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이와는 반대로 자제하도록 노력하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더 정확하게, 더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나예린은 비류향과 이마를 맞대고 눈을 감았다. 연비는 곁에서 의사용안을 발동시키며 두 사람의 손을 잡았다.
──풍경風景이, 아미산의 사계절이, 각자가 머금은 아름다움이 눈에, 뇌리에 파고들었다.
등에는 가벼운 바구니의 무게가 느껴진다. 사람 발길이 없는 무성한 수풀의 진한 초목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지금 이 순간 산을 타는 것처럼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감각. 그러나 어째선지 익숙하다고 느끼는 풀숲을 헤치고 나와 언덕을 넘은 그곳에는,
“어때?”
"와아……."
때마침 불어온 산바람과 함께 그윽한 꽃향기가 폐부를 채웠다. 능선 한가득 피어오른 들꽃밭.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 다음은 여름 폭포였다. 당장이라도 귀가 멀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쏟아지는 거대한 물줄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흘린 땀을 싹 식게 만들어주었다. 한여름이건만 발끝만 살짝 담가도 순식간에 몸이 부르르 떨려올 정도로 계곡물이 차갑다. 수련하다 계곡물에 폭삭 젖어 오들오들 몸이 떨려도 햇살에 달궈진 바위에 잠시 누워있으면 금새 몸이 따듯해졌다. 옷이 마르는 건 덤이다. 맑은 밤에 하늘을 보면 쏟아질 듯한 별들이 있었다.
“저렇게 많은 별은 처음 봤어요.”
“겨울에는 더 많아. 추워서 오래 보기는 힘들지만.”
가을이 되자 색색이 물든 단풍이 보인다.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하늘과 조금씩 차가워지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맨다. 그러면서도 알록달록하게 변한 산에서 눈을 땔 수가 없다. 월동을 준비하는 동물들이 보인다. 때떄로 형형색색의 숲 사이로 새하얀 것들이 빠르게 돌아다니는 게 보인다.
“그러고보니 백무후는 잘 있니?”
“우리 없어도 잘 지내지.”
“백호, 인가요?”
“응.”
차가운 백은白銀에 뒤덮인 산은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웠다. 설경雪景. 투명한 하늘 아래 솜이불처럼 쌓인 눈은 그 누구에게도 밟히지 않은 체 고요히 겨울 햇살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가까이 쌓인 눈은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냈다. 조심스레 손에 쥔 눈을 녹기 전에 얼른 입에 머금어봤다. 청명한 눈 맛은 단순한 얼음과는 달랐다. 한창 찬바람을 맞다가 따스한 온기가 들어찬 방에 들어가면 저절로 몸이 풀렸다.
“…….”
“어때?”
“……굉장해요.”
근 반나절 동안 심상 속 여행을 한 나예린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비류향과 연비는 서로를 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언젠가 꼭 직접 보러 가자. 대답은 당연히 긍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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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과 배경을 떠올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다음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집니다. 그게 안되면요? 오늘처럼 연재가 늦는 일이 벌어집니다. […]
- 조아라 sEcho님께서 프롤로그와 연재작에서의 나예린의 반응이 아귀가 안 맞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맞습니다. 안 맞습니다. 프롤로그는 생각난 거 그대로 휘갈겼던 것이고, 연재작은 제가 2부를 읽으면서[…] 전개에 수정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 타입문넷 유운풍 님께서 주술계도 다루느냐 물어보셨는데, 직접적으로 다룰 생각은 없지만 필요하면 묘사할 예정입니다. 솔직히 노사부 나올 때 빼고는 주술계가 나올까 싶기는 하지만요.
- 댓글에 대한 댓글은 안 다는 예전에 한 번 해봤다가 너무 귀찮아서[…] 실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 언제나 말씀드리다시피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은 언제나 받고 있으며, 본문 안에서 설명할 수 없거나, 본문에 묘사되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싶은 사항에 대해서는 다음 화 후기에서 대답해드릴 예정입니다.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