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3.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3.
나물과 고기를 자급자족하더라도 사람 사는 데에는 부족한 물건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물며 무공과는 연이 없는 여아도 함께 사는 집이니 정기적으로 장을 보는 게 당연했다. 그렇기에 노사부는
비류향이 시장에 다녀오는 것을 막지 않았고, 돈을 달라고 할 때도 망설임 없이 쥐어주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온갖
이유를 들어 거부하였으나, 귀찮은 일거리 시킬 요량으로 한두 번 허락해주다보니 매우 편해져서 아예 가계家計를 맡기게 된 것이다.
어차피 비류향이 사오는 건 전부 집안살림에 보탬이 되는 것들이었고, 헛돈은커녕 결코 자신을 위해 쓰는 일이 없는 비류향의
경제관념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저잣거리에 널리고 널린 군것질거리며 그 나이대 소녀라면 눈이 돌아갈 화장품과 장신구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물건값은 결코 부풀리거나 축소시키는 일이 없으니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육체의 편리와는 별개로 심적 부담은 한없이
늘어갔지만.
그런 고로 장에서 돌아온 비류향이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며 한동안 출가를 요청해왔을 때 노사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드디어 자유로운 생활이! 근심없는 일상이! 춤이라도 추고 싶은 감정을 애써 감추며 노사부는 짐짓 근엄한
얼굴로 물었다.
"넌 어찌하고 싶으냐?"
"……노야께서 윤허하신다면 다녀오고자 합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본래 제 일이라면 한사코 거절하고 원하는 것은 어디 도망치지 못하게 붙들고 늘어져야 간신히 입에 담는 게 비류향이라는
소녀였다. 어차피 허락할 테지만 어째서 가고 싶어하는지 본심이 듣고 싶어졌기에 노사부는 슬그머니 캐물어보기로 했다.
"평생토록 은혜갚기로 한 말은 벌써 잊은 게로구나?"
"어찌 그것을 잊겠습니까. 모시지 못하는 날만큼 더욱 보은할 것입니다."
"흠, 네 여태껏 해 온 정성이 있으니 일단은 믿겠다만……."
그 말에 무언가를 자극받은 것일까. 비류향이 당황한 듯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괜한 말로 노야께 심려를 끼쳐 송구합니다. 이 일은 없던 일로,"
"아니, 아니다! 어흠! 아직 말을 끝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짐
짓 내키지 않는 듯한 노사부의 태도에 비류향이 곧바로 없었던 일로 만들려고 하자, 노사부는 황급히 비류향의 말을 끊었다.
위험했다. 대나무가 가볍고 단단하여 가공하기 쉬워보여도 되려 그 대쪽 같음에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하게 하여 일을 어렵게 하듯,
올곧고 진솔한 비류향의 성품을 가볍게 생각했다가 일을 그르치게 만들 뻔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노사부가 질문을
이어나갔다.
"정천맹주正天盟主의 여식이 용안龍眼인 것과 네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모르면서 가겠다는 것이냐."
"정천맹주 같은 이가 만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은 여아에게 청을 한다면 연유가 있으리라 짐작만 할 뿐입니다."
"용안이 무엇인 줄 아느냐?"
"모릅니다."
"
물줄기 하나 만으로도 세상 흐름을 읽는 신안神眼이요, 손짓 하나만으로도 심상心想을 꿰뚫는 마안魔眼이다. 범인凡人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어찌보면 애비인 정천맹주보다 더 위험한 것일 수도 있어. 맹주조차도 힘든데 용안까지 네 일신一身만으로 감당해야
한다. 돌봐줄 이가 하나도 없어. 사지死地로 가는 길일 수도 있단 말이다. 그럼에도 가고 싶으냐?"
"……예."
"허허……."
고작 반나절 본 이의 부탁에 무엇이 있길래. 노사부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질문을 던졌다.
"정천맹주라는 감투의 향기에 취했느냐?"
"아닙니다."
즉답이었다. 그러나 이는 흉계凶計를 지적당한 소인배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렇기에 뒤이어진 비류향의 말은 얄팍한 변명이 아니었다.
"
소녀가 배운 것은 없으나 일신의 영달을 위해 보은하지 않음은 사람답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물며 권세의 향기가 아무리
달콤하여도 쉬이 상하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아비가 여식을 생각하여 미천한 여아에게 청을 한 것이니 응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아비의 청이라……."
그렇군. 그런 것이었나. 노사부는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친先親이 생각난 게냐."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자
기 딴에는 애써 숨긴다고 했지만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게 뭐 대수라고 숨기는가 싶었지만 본인이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걸 알기에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노사부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양친 잃은 소녀가 무슨 마음으로 그리 하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허나 부모들이 아이를 위해서라며 부탁하면 어지간한 건 다 들어주고, 저잣거리에서 자기 부모 손을 잡고, 품에 안겨
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빛에 아련함이 깃들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정천맹주의 여식 생각이 지극했나보군. 노사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비류향이 이렇게까지 움직일 리가 없었다. 무인武人의, 그곳도 정천맹주 정도 되는 자의
심후함이라면 사욕을 위해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내공이 없는 비류향에게는 그러한 사술邪術은 통하지 않는다.
어쨌든 이만하면 체면치레는 한 셈이다. 그렇기에 노사부는 깊게 한숨을 내쉬는 척 하고는 입을 열었다.
"천향루라 하였느냐."
"예."
"다녀오거라."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언제 돌아오든 상관 없다. 아니,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깊이 고개를 숙이던 비류향의 몸이 멈칫했다. 역시 내키지 않으시는 걸까. 아아, 미련한 향아. 어찌 네 욕심을 우선하여 은인의 심기를 불편케 한단 말이더냐. 그런 생각으로 굳어버린 소녀에게 노사부가 말했다.
"무학도, 깨달음도 없는 여아가 세상에 나가면 천하 험사險事와 다망多忙한 인과因過에 얽메일 것이다. 그 모든 것에 네 스스로 매듭結을 짓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거라."
"……노야의 금언金言, 삼가 받들겠나이다."
이
모자란 여아의 짧은 출가出家에도 금과 같은 참眞된 말씀을 내려주시는구나. 과연 은인이로다. 비류향은 흘러넘치는 감사의 마음으로
바닥에 이마가 닿게 큰절을 올렸다. 심히 부담스러운 광경이었지만 노사부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갈 아이다. 저 성품으로 분명
바깥에서 덕을 쌓아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않을 아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이틑 날 아침, 짐을 꾸린 비류향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노사부와 비류연의 식기를 정리한 후 오두막을 나섰다.
"몸조심하고. 스승님 말씀 잘 듣고. 알겠지?"
"안다니까. 누나는 내가 무슨 앤 줄 알아."
"구순 노모가 칠순 아들을 걱정하는 법이야."
네
가 천하제일인이 되어도 매사에 조심하라 하겠지. 그렇게 말하며 비류향은 동생을 품에 안았다. 어머니보다 더 많이 안긴 누이의 품
안에서 비류연은 머뭇거리다 이내 마찬가지로 누이를 꼭 끌어안았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온 남매다. 짧다고
해도 헤어짐에 아쉬움이 없을 리가 없었다.
"……누나도 몸조심해."
"응."
천천히 동생을 떼어놓은 비류향은 노사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옥체 보전하십시오."
"그래."
그렇게 두 노소老少를 뒤로 한 체 비류향은 떠났다. 그 곁으로 어느 새 말 만한 백호白虎 한 마리가 나타나 소녀를 지키듯 따라 걸었다. 노사부가 나물 캐러 산에 갈 때 데려가라며 붙여준 호위虎衛였다. 그르렁거리며 비류향의 손길에 머리를 부비는 품새는 저잣거리 고양이 같았으나 범인凡人이라면 울음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릴 만한 산왕山王의 기운이 품고 있으니 영물靈物이 틀림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백호는 아미산 인근은 물론 사천땅 전역에 소문만 무성한 백무후白武后의 직속인 팔섬풍八閃風 중 한 마리였다. 어지간한 무림 고수도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강하건만 정작 영물 취급해주는 이는, 정확하게 말해서 그나마 대우해주는 이는 비류향 하나 뿐, 노사부와 비류연에게는 그저 소녀에게 도움이 되는 좀 센 고양이 취급이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비류향의 영물 취급 역시 털 빗어주기와 벌레 떼어주기 같은 수준인지라 큰 차이는 없었지만 이게 의외로 호평인지라 팔섬풍 중에서도 가끔씩 순번(?)을 바꾸기 위해 싸우는 일이 있었다.
어찌되었든 비류연은 무언가에 홀린 것마냥 멍하니 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뒤의 노사부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뺨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자유다! 오오, 이 얼마나 달콤한 울림인가! 자유! 오오, 자유, 오오! 광희난무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비류연이 있었기에 참았다. 그러나 환희에 잠식된 육신은 이미 앞으로 펼쳐질 무릉도원에 반응하여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 노사부는 그러했던 자신의 모습에 후회하게 된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비류향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한탄하게 되지만, 어찌되었든 훗날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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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천四川 땅은 산세가 험하고 변두리에 있어 발달하지 못했다는 얘기는 되려 무식한 촌부나 하는 말이다. 되려 그 험한 산세와
원지遠地의 이치로 외적으로부터 수많은 학사와 경전을 지키고, 촉한대에는 승상인 제갈공명을 필두로 한 사영四英의 활약으로 법규가
지켜지고 물자가 풍부해지니 낙양과 북경이 부럽지 않은 땅이 바로 사천 땅이다.
그런 사천성에서 천향루는 특히나 이름
높은 기루로 유명하였다. 화려함과 정갈함을 고루 갖춘 객실에 수준 높은 악공樂工과 가무인歌舞人이 상시하며, 향이 강하기로 소문한
사천요리를 누구나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도록 조리하여 온갖 미주味酒와 함께 나오니 한 번이라도 들른 이들의 칭송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천향루 후원의 한 고급 객실은 널리 알려진 천향루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원래는 아기자기한
침상과 호화로운 장식들이 돋보였을 객실은, 태양이 중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침침해서 윤곽만 겨우 잡힐 뿐이었다. 이는 창문을
모조리 닫은 것도 모자라 그 위로 검은 천을 덧씌워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상喪중인 것마냥 칙칙한 분위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
인공적인 어둠 속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그야말로 실낱같은 빛줄기 밖에 없는
공간이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부드럽고 은은하게 빛나는 백옥 같이 하얀 피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만큼 정교한 비율의 이목구비. 그리고 소녀가 있는 어둠과도 같지만, 공허한 그것과는 다르게 신묘한 마력이 담긴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가 매혹적인, 누구라도 보게 된다면 한눈에 마음을 빼앗길 만큼 아름다운 소녀였다.
허나 침상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소녀의 표정은 무미건조했고 눈동자는 생기 없이 흐릿했다.
"……."
초점 없는 눈동자는 창문 너머, 자투리가 살짝 떨어진 검은 천 틈새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란 하늘이었다. 너무나도 맑고 아름다운 하늘. 그러나 닿지 않는, 가질 수 없는 하늘. 그 하늘이 소녀의 마음에 파문을 그렸다.
사람의 마음은 어찌 저러지 못할까.
아
름다운 미색과 더불어 소녀에게는 용안龍眼이라는 능력이 있었다. 상대의 마음 속 단편을 읽어내는 이 능력은 만약 소녀가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나 난세에 천하패업을 도모하는 영웅이었다면, 여인의 몸으로도 능히 삼황오제의 뒤를 잇거나 창업군주로 이름을 떨치게
하는 힘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어린아이가 아무런 단련 없이 있는 그대로의 인심지욕人心之慾을 그대로 접하면
어찌 되겠는가. 그 독기에 쐬일 때마다 소녀는 며칠이고 앓아누워야 했다. 빼어난 미모로 인한 수십 번의 납치 역시 소녀의 심력을
갉아먹어왔다. 게다가 그때마다 접하게 되는 사람들의 심저心底에 들끓는 악독惡毒이란.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소녀는 더더욱 사람을 기피하게 시작했다. 부모님과 함께 도망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소녀의
아버지는 정천맹주라는 직급을 가진 절정의 무인인지라 쉽사리 은거할 수 없는 몸이었다. 맹주의 권세와 일신의 무공 덕분에 딸을
지키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소녀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 마음 놓을 곳은 없는 걸까.
그러한 생각에 소녀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린아, 들어가마."
"……네."
아
버지의 질문에 소녀는 침묵 속에 가라앉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집에 계신 어머니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아버지였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파란 하늘빛과 함께 아버지인 정천맹주 나백천이 들어왔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소녀는 곧
아버지와 함께 들어온 그 시리도록 투명하고 따스한 푸른빛이 하늘빛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화려함이 없는
옷가지였다. 오랜 세월 입어온 듯 헤지고 닳아 천을 덧대거나 수를 놓은 부분도 보였다. 그러나 품새가 단정했고, 덧대거나 수 놓은
솜씨도 상당하여 거슬리지 않았다. 그 나이대 여인이라면 으레 할 장신구도 체면치레할 정도만 겨우 달고 있었으나 그로 인해 더욱더
단정하고 고아한 인상이었다.
천상의 미를 가진 소녀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이는 단순한 외적인 미가 아니었다. 용안으로 보이는 찬란한 심상心相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저 하늘 선녀들이 이러할까. 그런 생각이 소녀의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하
늘빛의 여인은 나백천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다가왔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나백천이 경악했으나 이미 소녀의 눈에는 그 모습이 들어오지 않았다. 한 장丈 정도 거리를 두고 소녀와 여인은 서로를
마주보며 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여인이었다.
"안녕. 난 비류향이야. 너는?"
"……예린…… 나예린羅叡璘이에요……."
오
랜 시간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투명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범인凡人들이었다면 이미
소녀─나예린의 모습과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여인은, 비류향은 그저 생긋 웃을 뿐이었다.
"예쁜 이름이네. 예쁜 얼굴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그
것 뿐이었다. 시기와 질투도 아닌, 집착과 음욕도 아닌 순수한 칭찬. 그 모습에 나예린은 천천히 비류향에게 다가가 그 품에
파고들었다. 결코 손에 닿지 않으리라 여겼던 청천淸天에 닿은 안도감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비류향은 처음 보는 아이가 자신을 붙들고
울기 시작하자 당황하였지만 이내 말없이 나예린을 끌어안아주었다.
한여름 나무 그늘 아래서 맞이하는 산바람의 상쾌함.
한겨울 바람막이 돌담 안에서 쬐는 햇살의 따스함.
청명한 햇살을 머금은 이불에서 느낄 수 있는 포근함.
그것이 나예린이 기억하는 비류향의 첫인상이었다.
#####
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옷자락을 꼭 쥔 손을 떼어내는데 조금 애를 먹기는 했지만, 울다 지쳐 잠이 든 나예린을 침상이 뉘인 후
나백천과 비류향은 천향루 후원 다정茶停으로 향했다. 사천 제일 기루라는 명성에 걸맞는 화려한 후원에는 이미 몇몇 선객들이 있었으나
빈 자리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고맙구나."
향이 피어오르는 차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인 나백천이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비류향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대인大人께 감사를 받겠습니까."
"아니야. 그 아이가 저토록 평온하게 자는 걸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그게 네 덕분인데 어찌 아비로서 감사하지 않겠느냐."
"어린 동생이 있어 달래는 게 익숙할 뿐입니다. 그런 일로 어찌……."
"그런 일조차 불가능했던 아이였거든."
나백천은 찻잔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용안龍眼. 삼라만상을 꿰뚫고 심저心底를 투시透示하는 조물주의 눈. 득의得意한 자가 얻을 수 있는 눈. 그걸 타고난 아이야.. 보지 말아야 할 것도, 봐선 안 될 것도,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모두 보이는 기분이 어떨 것 같으냐."
"……끔찍하겠지요."
"그래. 고행자苦行者도 쉽지 않을 심마心魔를 저 어린 것이, 그것도 자신의 것조차 아닌 심마와 접하며 괴로워해. 그런데 아비라는 자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어. 아무 것도 못하고,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
과
거의 고통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나백천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지금 그 순간만큼은 최고의 권세를 자랑하는 정천맹주도,
지고한 무공을 자랑하는 고수도 아니었다. 자식의 고통에 무력함을 느끼는 한 사람의 아버지일 뿐이었다. 그 마음을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비류향 역시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와병臥病. 부모의 무조건적인 자애慈愛에서 오는
고통에 비하면 보잘 것 없겠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이들이 괴로워하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데에서 오는 무력감이 얼마나
고통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스스로 다가간 이가 바로 너다. 부모를 대하듯 마음을 놓았어. 그러니 어찌 내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고맙다."
그렇게 말하며 나백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비류향 역시 황급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과분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아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감사를 받겠습니까."
"말했잖느냐. 예린이가 안심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야 노부의 마음이 편해지니 받아다오."
"……알겠습니다."
얼마 없는 객인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두 사람은 그제서야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찻잔을 비우고, 다시 채운 찻잔을 반 정도 비웠을 즈음 나백천이 물었다.
"기인께서 얼마나 말미를 주셨느냐."
"만사에 스스로 매듭을 짓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매듭結이라……."
인연에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는 법인데 매듭을 입에 담으셨다. 마치 제천대성에게 부처님 손바닥에서 벗어나보라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불가해한 말에 나백천이 다른 것을 물었다.
"또다른 말씀은 없었느냐."
"'갓 쓴 선비 곁에 사람을 두고 파란 원을 전하노라.' 이러면 아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 그렇군. 허허……."
"아시겠습니까?"
"그래. 잘 알았다. 참으로 대인大人이시구나……."
갓
쓴 선비壬 곁에 사람亻을 두겠다는 것은 임任이다. 파란 원은 청靑이고 이를 글이 아닌 말言로 전하니 청請이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인연에 매듭을 논하시며 임 자와 청 자를 전함은 눈앞의 소녀를 자신에게 부탁하겠다는 뜻이리라. 용안자龍眼者와의
인연은 사람의 힘으로 끊을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스스로 인연을 끊어 이토록 성정이 곧고 맑은 아이를 보내시다니. 나백천은 노사부의
배려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노사부가 자유를 원하며 한 짓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체.
"앞으로 필요한 것이 있거든 언제든지 말하거라."
"예. 허나 말씀만으로도 족합니다."
"어려워하지 말거라. 이는 대인께 보은하기 위함이기도 하니 너무 거절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 뒤로는 조용한 다도의 시간만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주전자와 찻잔이 모두 비워지자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린이를 잘 부탁하마."
"여부가 있겠습니까."
두 사람의 모습에 호기심이 동한 이들이 은근슬쩍 뒤를 따르려 했으나, 슬그머니 눈에 힘을 주어 바라보는 나백천을 보고는 모두 움찔하며 되돌아갔다.
#####
나
예린이 있는 객실로 돌아온 비류향은 고민하다 결심한 듯 창가의 검은 천들을 모조리 떼어냈다. 단단히 고정된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녀의 힘으로도 간단히 떨어졌다. 따스한 노을빛이 창호지를 빛내 방 안이 은은하게 빛났다. 아예 창문을 열어 환기까지 시킬까
했지만 나예린을 떠올린 비류향은 손길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물
론 이는 비류향의 개인적인 감상이었다. 이름 높은 천향루의 객실답게 정돈된 상태는 양호했으나 나예린이 입실하고 며칠 간 아무도
들어가지 못해 청소되지 않은 객실은 먼지투성이였다. 나예린이 누워있는 침상 역시 살짝만 건드려도 먼지가 풀풀 날릴 듯 싶었다.
허름한 오두막을 신선이 기거하는 도원처럼 보일 정도로 부지런히 청소하며 살아온 비류향에게는 끔찍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구세요?"
잔
뜩 겁먹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비류향은 침상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눈을 뜬 나예린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익숙한 어둠이 아닌 빛이 보여서일까. 아니면 낯선 이가 있어서일까.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른다. 허나 한두 시진 전에 보지
않았던가. 무심코 하늘을 보며 시간을 파악하려 했던 비류향은 그제서야 자신이 역광의 위치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법도 하구나. 비류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였다.
"기억하니? 비류향이라고 했는데."
"……아, 아아!"
나
예린은 언제 두려워 했었냐는 듯 침상을 박차고 일어나 비류향에게 달려왔다. 비류향은 갓 태어난 아기 사슴마냥 넘어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다가온 어린 소녀를 붙잡아 주었다. 나예린은 홀린 듯한 눈으로 천천히 손을 뻗어 비류향의 뺨에 닿았다.
"꿈이, 아니었어……."
"꿈이길 바랐니?"
"아뇨……. 꿈이 아니었으면 했어요……. 정말로…… 꿈이 아니었어……."
나
예린이 멍하니 자신을 보는 동안 비류향 역시 천천히 나예린을 살펴보았다. 아름다웠다. 대체 누가 이 소녀가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며
몸단장 한 번 안했다 할 수 있을까. 백옥 같은 피부와 청명한 밤하늘과도 같은 눈동자가 어찌 울다 지쳐 잠들었던 이의 것일 수
있단 말인가. 허나 비류향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야위었구나."
나예린과
마찬가지로, 그보다 더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얼굴의 눈물 자국을 닦아내었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 수더분한 곳들이 눈에
들어왔다. 폭력적일 정도로 압도적인 미색은 그것조차도 미용구가 되게 하였으나 보통 아이었다면 꾀죄죄한 몰골이었으리라. 넘어지지
않게 붙잡은 팔 역시 동년배 아이들보다 가늘었다. 정천맹주의 자식이 먹을 게 없어 굶지는 않았을 테니 마음고생이 심해 쉽사리 먹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안타까움에 마음이 저려왔다. 나예린은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우섯 씻어야지."
"……네."
고
급 객실이라 뜨거운 물이 상시 나오는 욕탕이 따로 구비되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용탕으로 가야했을 텐데 남녀
구분없이 홀리는 나예린의 미모를 생각하면 어불성설이었다. 그렇다고 물지게로 퍼나르기에는 너무 번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렸으리라.
아무래도 나백천이 여식을 위해 일부러 이 방을 잡은 듯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비류향은 나예린을 이끌고 욕탕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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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욕장면은 다음 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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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예린이 비류연보다 한 살 더 많았네요. 어찌할까 하다가 이게 정확히 1년인지 어떤지 모르고, 비류연이 아이답게 조금이라도 더
어른이고 싶어해서 열 두 살이라고 하는 걸로 했습니다. 타입문넷 이르실렌 님 감사합니다. 덤으로 이름도 물 이을 연沇이 아니라
이을 연連이군요. 이 놈, 출판물에서 이름을 바꾸다니……. 타입문넷 라이티르 님 감사합니다.
- 비뢰도 옛날에 보고, 군대서 재탕하고 그게 다 1부만이라 헤매고 있습니다. 시간 들여 2부도 봐야 하는데 시간이 영…….
- Crimsoneyes님께는. 지원그림. 언제나. 항상.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네. 정말로요. 하하하하하핳하하하하핳하하하!!!
한자漢字, 오타,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