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8.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8.
정신을 차렸을 때는 새카만 공간에 오직 자신만 있었다.
발에는 분명 땅을 디디는 감촉이 있건만 전후좌우상하 그 무엇도 구분되지 않았다. 시험해보지는 않았지만 허공에 발을 내밀어도 디뎌질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지금 자신이 제대로 서 있는 건지 누워있는 건지도 구분되지 않았다. 그렇게 그 어떤 것도 정확하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불안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문득 비류향은 고개를 돌렸다. 사실 어느 방향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위로 젖히든 아래로 숙이든 시선이 향하는 곳은, 바라봐야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봐야할 곳을 알고 있고 그대로 몸이 움직인다는데서 의구심이 들 법도 했지만 희한하게도 그런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새카맣던 공간에 유일한 빛이 있었다. 아득히 먼 곳에 바늘 구멍과도 같은 작은 빛이 보였다. 아주 먼 곳에 있는 아주 작은 빛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시선을 집중하자 그 빛이 매우 가깝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빛 속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굴까. 역광의 그림자 때문에 쉽사리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조금 더 집중하자 서서히 윤곽이 떠오르고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비류향은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오래 전에 자신의 곁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깨닫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엄마. 아빠.
입을 뻐끔거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쉼없이 불렀다. 엄마. 아빠. 아주 어릴 때 배웠을 가장 단순한 단어였건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 그제서야 이 불합리한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면서 비류향은 달리기 시작했다. 새카만 어둠 속에 뭐가 있는지도, 무엇을 밟고 가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내달렸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이들의 품으로 뛰어들기 위해서.
그러나 닿지 않았다. 도달할 수 없었다. 달리기 전에는 열댓 걸음 남짓으로 보이던 부모님과의 거리가 달리면 달릴수록 멀어졌고, 희미해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었다. 멈춰버리는 순간 그때는 저 희미한 모습마저도 다시 볼 수 없게 될까봐. 망가져버린 몸으로 뛰느라 순식간에 숨이 거칠어지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래도 달렸다. 애달픈 숨소리만이 정체모를 공간에 울려퍼졌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듣고 싶은 말이 많았다. 동시에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온갖 말들이 거품처럼 피어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대체 무엇을 전해야 할까. 나는 무엇을 전하고 싶은 걸까.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걸까. 어떤 말씀을 해주실까.
온몸을 부수는 듯한 통증이 덮쳐온 건 그때였다.
갑작스러운 격통에 균형을 잃은 몸은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구른 게 맞는지는 의문이었다. 몸 어딘가가 바닥에 부딪치는 감각도 없었고 넘어진 것 같은 느낌도 아니었다. 그러나 시야는 빙글빙글 돌았다. 폐부가 찢어질 듯 했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온몸의 뼈란 뼈에서 가시가 돋아나는 것 같았고 마디란 마디에 바늘이 수십 수백 개씩 꽂히는 듯 했다. 살이란 살은 죄다 비틀려 찢겨지는 것 같았고 오장육부는 누군가가 헤집는 것처럼 뒤틀려왔다.
그러나 육체의 고통보다 더 괴로운 것은 정신의 고통이었다. 부모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안타까움. 간절함. 초조함. 당혹감. 허탈함.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허상이라도 좋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고 싶어. 닿는 순간 사라지더라도 만지고 싶어. 어지럽게 흔들리는 시야 너머로 새하얀 빛이 보일 때마다 비류향은 그곳으로 향하려 했다. 부질없는 행위라 해도 포기할 수 없었다.
억겁일까 찰나일까. 어느 순간 그 모든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부모님과 빛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순간 비류향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엎드려 울었다.
계집애 하나가 운다고 세상이 돌아봐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울고 앉아있으면 누군가 밥을 떠먹여주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있어야 했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후에는 어린 동생의 유일한 혈육으로서 결코 약해질 수 없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보은을 위해 스스로 값싸다 여기며 눈물을 막았다.
그렇게 버티고 참았던 눈물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서러웠다. 왜 나는 어머니 품에서 울지 못하는가. 왜 나는 아버지께 노리개 하나, 과자 하나 사달라 조르지 못하는가. 진상인지 허상인지도 모를 것에 다가서는 것조차도 못한단 말인가. 보고 싶은데. 만나고 싶은데. 하염없이 서글프게 울던 소녀가 누군가의 손길을 느낀 건 너무도 지쳐 더 이상 울 기력도 없을 때였다.
투박하지만 따스한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칠지만 다정한 손길이 눈물을 훔쳤다. 익숙한, 허나 오랫 동안 느끼지 못했던 손길에 비류향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그토록 닿고자 했던 이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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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부는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로 했다. 기나긴 삶 동안 수많은 실수와 잘못이 있기는 했지만 노사부가 잘못을 인정한 횟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것은 강자의 오만이라기보다는 천성이었다. 물론 최강을 넘어 지고至高를 지나 무적無敵이 되면서 그 어떤 것도 그에게 물리적, 정신적 고난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일은 그에게 무시무시한 고난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지?”
“오늘로 닷새입니다.”
자연스러운 하대에도 불구하고 정천맹주 나백천은 공손히 답했다. 이미 비류향의 몸을 살폈을 때 노사부의 내공이 심후하다는 것을 알았던 만큼 처음 본 순간 노인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자연스럽게 노사부의 하대를 받아들였다. 것보다 이 노인,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펄럭! 좌악!
“!”
“아, 아!”
노사부는 거침없이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누워있던 소녀의 나삼을 벗겼다. 비명소리가 울려퍼질만도 했건만 정작 당사자인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옷섬을 여밀 생각은커녕 눈조차 뜨지 않고 죽은 듯 누워있을 뿐이었다. 나신이 허공에 노출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일까. 되려 옆자리에 있던 나예린이 놀라 소리쳤을 뿐이었다. 허나 그게 아니었다.
“……사흘 지난 시체 색깔이구만.”
아주 작기는 하지만 곰팡이처럼 조그만 시반屍斑이 여기저기 보이는 몸이었다. 특히 손가락이나 발끝으로 갈 수록 증상이 심했다. 왼쪽 어깨는 아예 시커멓게 죽어있었다.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게 기적이었다. 한 차례 소녀의 몸을 죽 훑어본 노사부는 한숨을 내쉬고는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날 내려왔어야 했나. 그리고 나예린이 조심스레 비류향의 옷섬을 여매는 것을 보며 나백천에게 말했다.
“쯧쯧쯧. 나 따라한다고 애썼구만 그래. 부족한 안력眼力은 딸내미 힘을 빌렸지?”
“그렇습니다.”
“그럼 그냥 삼단전하고 임독양맥 다 같이 돌렸으면 됐을 텐데. 용안龍眼이 있는데 뭘 망설였어. 그리고 어차피 남는 내공은 틈새로 흘러가 자연스레 흩어질테니 주화입마 걱정도 없었잖아.”
“그렇습니까……?”
“몰랐냐?”
“……예.”
“그, ……하아, 그래. 이런 몸이 세상 천지에 또 어디 있어서 그걸 알겠냐.”
대체로 타인이 억지로 주입한 내공은 쉽사리 섞이지 않고 맴돌다가 몸에 이상을 일으키거나 주화입마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내공이 흐르는 통로인 기맥과 혈도가 망가진 비류향에게 타인의 내공은 그저 스쳐지나갈 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서천의 악랄한 수법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물론 그 역시 지나치면 몸을 망가트리는 법이지만.
어찌되었든 산 사람의 몸은 아니었다. 천하의 화타가 살아돌아온다고 한들 차라리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숨을 끊으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놈 보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길 잘했군. 제 누이가 이런 몸이라는 걸 안다면 당장에 서천인지 뭐시긴지 잡아 족치겠다고 갈 게 뻔했다. 말릴 생각은 없지만 아직은 아니다. 10년은 더 수련하지 않으면 복수는커녕 한 줌 혈수로 녹아내릴 실력차일 것이다. 제자의 목숨도 중요하지만 비뢰문의 후계자가 고작 그런 놈에게 쓰러지게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놈 손에 맡기면 간단히 죽여서 안 되지.”
보자마자 전력을 다해 격살하려 들겠지. 그러면 안 된다. 어린아이가 팔다리날개 하나하나 떼어내고 개미굴에 던져버리는 벌레처럼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여야지. 어이쿠, 큰일날 뻔했군. 죽이다니. 죽이면 안 되지. 미쳐서도 안 되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숨 붙은 상태로 고통을 느껴야지.
“무슨 말씀 하셨습니까?”
“아니, 어찌 고칠까 혼잣말 좀 했어.”
서천, 아니 하늘이라니. 당치도 않다. 서쪽 쓰레기西汚에 대한 차가운 분노를 잠시 접어둔 노사부는 나백천의 질문에 그리 대답하며 다시금 비류향을 살폈다. 아무리 다시 살핀다한들 반송장인 몸상태가 돌아오지는 않았다.
“…….”
노인의 온갖 고약한 요청과 심부름에도 해맑게 웃던 아이였다. 하루종일 병상에 누워 있어도 뭐라할 사람 없는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수발을 드는 아이였다. 이미 심득의 경지조차 초월해 보는 순간 사람 됨됨이를 아는 노사부의 눈이 부실 정도로 선함이 빛나는 아이였다. 인간 오욕칠정 모두 가지고 살면서도 인연만큼은 가차없이 끊고 살아온 인생이었건만 이토록 정을 붙이게 될 줄 몰랐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간신히 숨만 붙어 죽어가고 있었다. 극진한 정성이 부담스럽고 힘든 몸 좀 편하게 살라고 내보냈더니 이렇게 되었다. 통한의 실수였다.
서오西汚놈이 사천멸겁의 하나고 그게 천겁령이라는 집단에 속한 놈들이라고 했던가. 그거 분명, 그놈이 만든 거였던가.
“매질이 부족했어, 매질이…….”
깊은 한숨을 내쉰 노사부는 그대로 비류향의 단전 위에 손을 얹었다. 어쨌든 낫게 해야지. 설마 같은 상대에게 똑같은 시술을 하게 될 줄이야. 노사부에게 있어 어렵지는 않지만 매우 귀찮은 일이었다. 그나마 비류향의 몸은 이미 혈도와 기맥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지라 편한 축에 속했지만 그래봤자 오십보백보였다. 허나 어찌하랴. 자신의 실수로 이렇게 된 것을.
문득 노사부는 곁에 선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나예린이 몸을 굳혔다. 마음을 읽을 수 없는 노인이었다. 마치 아버지 나백천처럼 단단한 심상이 속내를 가리고 있었다. 단순히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바위를 살펴본다고 사람의 심성을 느낄 수 있을까. 드넓은 바다를 꿰뚫어본다고 인정이 느껴질까. 인간 아닌 대자연의 시간축에서나 느껴질 법한 압도적인 무언가──
“넋놓고 멍하니 보는 게 아냐. 명확하게 봐라. 용안은 그럴 때 가치가 있는 거니까.”
“……! 네!”
“네가 나중에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직시直示하지 못하는 용안은 쓰레기야 쓰레기. 솔직히 조금만 생각하고 보면 다 보일 거 보는 눈이 뭐 그리 귀하다고. 이게 다 사람들이 생각이 없어서 그래 생각이. 쯧쯧.”
가진 자는 가진 것을 저주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자를 시기하는 눈에 대해 노사부는 그렇게 평가했다. 그리고 그런 평가에 소녀가 충격을 받거나 말거나 노사부는 비류향의 몸에 조심스럽게 내공을 흘려넣으려다,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주변을 살펴보던 노사부는 어느 한 곳을 유심히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이며 나백천을 향해 말했다.
“제문지祭文紙랑 초혼향招魂香이랑 위령소종慰靈小鐘 좀 챙겨와.”
“……역시 안되는 것입니까.”
노사부의 입에서 상喪을 치를 때 필요한 물건들이 튀어나오자 나백천이 나직히 탄식하며 말했다. 아무리 기인奇人이라도 역시 사기死氣에 침식된 이는 살리지 못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노사부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 걱정마. 향이 제사 지내려는 거 아니니까.”
“그럼?”
“쓸 데가 있어. 그러니까 챙겨와.”
그렇게 말하며 노사부는 내공과 진원진기를 동시에 끌어올렸다. 내공을 다루는 솜씨도 솜씨였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육신의 근간이 되는 진기를 뽑아내면서도 낯빛이 변하지 않는 노사부의 모습에 나백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예린 역시 용안에 비치는 기의 흐름에 눈이 멀어버리는 것 같았다. 어찌 저토록 찬연하고 화사할 수 있을까. 상황이 이러지 않았다면 순수한 감탄이 흘러나올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뼈까지 상했나……. 근골筋骨……. 중추中樞……. 두골頭骨…… 오장五腸……. 육부六腑……. 멀쩡한 곳이 없군. 근단根丹과 단로丹路도……. 서오西汚놈…….”
비류향의 단전 위에 오른손을 얹은 노사부는 빠르게 소녀의 몸을 검진하기 시작했다. 멀쩡한 곳이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나일천의 사악한 내공을 정면으로 받아낸 몸은 예상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심각했다. 그나마 나백천과 나예린의 처치가 있었기에 노사부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리라.
“우선 뇌장腦腸과 근골……. 폐부肺腑는 옛 병 때문인가. 한 번에 손봐야겠군……!”
노사부의 내공과 진원진기가 흘러들어 갈수록 비류향의 몸에서 지독한 악취가 흘러나왔다. 시체가 썩는 냄새와 같았는데 이는 몸 안의 썩은 살과 죽은 피가 흘러나오기 때문이었다. 몸 밖으로 흘러나온 노폐물을 노사부가 삼매진화의 이치로 모조리 태워버렸기 때문에 잔여물이 남지는 않았지만 냄새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환기를 하면 사라질 수준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나예린은 그 냄새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내었다. 그리고 이를 잊기 위해 용안으로 비류향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앞서 노사부가 했던 말을 떠올린 소녀는 정확하게 보기 위해貞眼之勢 노력했다.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개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저 흘러들어오기만 하던 것들을 의사적으로 배제하고 보고자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직시直示하게 된 나예린은 노사부의 기가 몸 속 깊은 곳의 사혈死血과 부육腐肉, 폐골廢骨을 태우고, 새 살과 신선한 피가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환골탈태가 이러할까. 그만큼 경이적인 순간이었다,
“거 이제야 좀 제대로 보는구만.”
노사부의 말이 나예린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는 낯빛 하나 변치 않고, 심지어 자신의 내공과 진원진기를 주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되려 뒤에 있던 나백천이 경악했지만 노사부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그 눈으로 어떻게 봐야되는지 좀 알겠냐?”
“앞으로 계속…… 이렇게 보면 되는 건가요?”
“그래 그렇게, 아니 죄다 직시하라는 게 아니라 때에 따라 볼 거 안 볼 거 가려 보라고. 나중에 심력心力이 쌓여서 자연스럽게 흐름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러라는 거지 누가 맨날 직시하랬냐?”
투덜거리면서도 노사부는 제법 자세하게 소녀에게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옛날 같았으면 혀만 찼을 뿐 어찌하라 알려주는 일은 없었을 텐데. 물러졌군. 나도 물러졌어. 그러나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소녀를 보고 있자니 그리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 식경 쯤 흘렀을까. 비류향의 몸에서는 더 이상 사기死氣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비록 안색은 파리했지만 미약한 병색이 있는 수준이라 할 정도였다. 한 식경 전까지 사경에 들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여겨졌던 소녀라고 믿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었다. 노사부는 요란하게 허리를 펴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끝났다. 에잉, 말년에 참 귀찮은 일 많이 하는구만!”
“수고하셨습니다, 노야.”
“그래, 수고했지. 거 급하게 오느라 밥도 못 먹었다니까.”
“식당으로 가시겠습니까? 곧 상을 차리라 하겠습니다.”
“괜찮지만 차려준다는데 먹어야지. 아 참, 아까 말한 거 제문지랑 그것들 좀 가져다 놓고.”
“알겠습니다.”
나백천의 말에 노사부는 거절하는 척 하면서도 잽싸게 식사대접을 수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객실을 나서며 그 앞에 서 있던 소녀(?)를 향해 말했다.
“이제 들어가 봐도 된다.”
대답은 없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녀(?)─비류연은 침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제 누이를 닮으면……, 아니 반의 반의 반 정도만, 딱 그 정도만 닮으면 좋을 텐데. 제자의 뒷모습에 노사부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비 소저의 동생입니까?”
“그래.”
“……남동생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쪽은 친동생. 저쪽은, 여튼 동생.”
“그렇군요.”
비류연을 미심쩍어하는 나백천에게 노사부는 그리 둘러댔다. 수련(?)을 위해 여장시킨 소년이라고 사실대로 말해도 거리낄 게 없었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소년이라고 하면 괜히 일이 더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배가 고팠기 때문에 노사부는 휘적휘적 식당을 향했다.
그런 어른들과는 별개로 아이들은 의외의 방법으로 진실(?)에 접근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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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예린은 노사부와 아버지가 방을 나섬과 동시에 들어온 현의玄衣소녀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그 소녀가 비류향의 맥없이 늘어진 손을 자신의 이마에 대며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깊은 한숨을 내쉰 순간 깨달았다. 이 아이가 언니의 동생이구나. 한동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한 말은 그 생각에 쐐기를 박아주었다.
“누, 언니는 이제 괜찮은 거죠?”
“네. 노야께서 다 치료하셨어요.”
“따로 뭐 해야한다, 조심해야 한다는 말 없었죠.”
“네.”
“다행이다…….”
바로 곁에서 보고서도 못 믿을 치료였다. 방금 전까지 시반屍斑이 보이던 몸을 말끔하게 고쳐냈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그러나 그 광경을 보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노사부의 실력을 믿고 있기 때문인지 소녀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
“……왜요?”
밝은 갈색, 아니 황금빛 눈동자였다. 그것만으로도 신기한데 눈앞의 소녀는 전혀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치 아버지처럼 든든한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했다. 그래도 궁금하여 방금 전 노사부가 말해준 것처럼 직시直示하려고 하자,
“소녀의 비밀은 같은 여자라도 함부로 엿보는 게 아니랍니다.”
소녀가 그렇게 말하며 경계의 기색을 띄었기에 그만두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용안으로도 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아 미련은 없었기에 나예린을 고민하게 만든 건 소녀의 말이었다. 그런 건가? 무색투명하게 모든 걸 볼 수 있었던 비류향과 함께해서 그런지 소녀의 반응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어찌되었든 상대가 불쾌하게 여기기에 나예린은 순순히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잘못한 일은 바로 사과할 것. 그게 비류향이 가르쳐준 것들 중 하나였다.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으음, 그렇게까지 사과는 안 해도 되는데……. 여튼 알았어요. 것보다 그 옷.”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현의소녀는 나예린의 옷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 혹시, 언니가 만들어준 건가요?”
“네.”
“역시나. 그런데 앞부분이 왜 그런 거죠?”
“그건…….”
나예린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나일천이 소녀에게 새기고자 했던 심저心底의 사악은 비류향 덕분에 없었지만, 날카로운 쇳조각이 몸에 닿을 듯 말 듯 옷을 가르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두려움에 몸이 떨려오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말하기 힘들면 말 안해도 괜찮아요. 일부러 망가뜨린 건 아니죠?”
“아니에요! 언니가 만들어준 옷인데, 그런데, 그런데…….”
“어, 아, 알았어요.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어두워지는 안색을 보고 농담삼아 던진 말에 기어코 나예린의 눈가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자 현의소녀가 당황하며 말했다. 어찌할 줄 몰라 하던 현의소녀는 누이가 해주던 것처럼 소녀를 안아주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흘러 진정한 두 소녀는 침대 곁에 의자를 가져와 나란히 마주보고 앉았다.
“이제 좀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고마워요.”
눈가가 부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시시 웃는 나예린의 모습에 현의소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렇게 울 줄 알았으면 안 물어봤을 거에요.”
“좀, 많이……. 많이 무서운 일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나예린은 고개를 돌려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가슴께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닷새 동안은 송장마냥 미동도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용안에 비치는 몸은 얼마나 끔찍했던가. 그러나 이제는 생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이, 푸르디 푸른, 하늘과도 같은 그대가 있었기에 이렇게 무사해요.
“언니가 있어줬어요. 그리고 두 번이나 구해줬어요.”
“……그렇군요.”
자랑스러움 반, 부러움 반. 현의소녀는 그러한 감정이 묻어나는 대답과 함께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자랑스럽지만 동시에 나만의 누이를 빼앗긴 듯한 느낌이지 않을까. 나예린은 현의소녀의 반응을 그렇게 추측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예린은 처음 봤을 때부터 품어왔던 질문을 던졌다.
“저기…….”
“뭔가요?”
“왜 여장하고 있는 거에요, 비류연?”
움찔. 현의소녀의 첫번째 반응은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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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뢰신전, 검령사, 탈혼경인을 읽고 있는데, 역시 선현의 문장이 좋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어서 다음 편이 나오길 바라고 있지만, 저도 글 쓰는 입장에서 재촉해봤자 안 나온다는 걸 알고 있는지라 […]
- 향이가 너무 전형적인 평면적 캐릭터라는 얘기를 들었고, 실제로도 그러하기에 입체감과 작품의 재미를 위해 흑화 같은 걸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싶더군요. 역시 결론은 굴리기 뿐인가 [?]
- 전공과 타과 전공이 화, 수 발표였기에 늦었습니다. 다음주 역시 시험기간인지라 늦거나, 연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학점이 바람에 스치운다. […]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