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1.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1.
아미산은 험준하기로 소문난 산이지만 그렇다고해서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무작정 절벽과 수풀만 무성한 곳은 아니다. 다른 산처럼 세월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공터도 제법 있는 편이고, 그러한 공터 중 한 곳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노인. 여인. 여아 둘. 험하디 험한 아미산 산중, 그것도 이제 산 너머로 쏟아지기 시작한 햇살 아래서 보기에는 매우 기묘한 조합이었고, 이들이 하고 있는 일 또한 기묘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낸다면 여인의 모습은 이제 갓 중년에 든 것처럼 보이리라. 그만큼 고아하고 차분한 인상이었다. 슬그머니 그어지기 시작한 주름은 단순한 세월의 흔적이 아니라 수많은 경험의 증명이자, 유의미한 시간을 쌓아올린 이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현묘함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체, 앞에 선 노인에게 쉼없이 공세를 퍼붓는 여인의 모습은 마치 이제 갓 검을 잡은 무가武家의 아이 같았다. 물론 여인의 검로劍路에 아이와 같은 미숙함과 젊은이 특유의 조급함은 없었지만, 아이들만이 가지는 활기와 즐거음, 그리고 젊은이들의 특기라 여겨지는 패기와 기세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향상심. 무武를 향한, 상승의 경지를 갈망하는 진지함. 경탄할만큼 순수하고 올곧은 마음心이 나예린의 용안과 의사용안을 전개한 비류연의 눈에 파고들었다. 저런 식으로도 사람의 마음이 빛날 수 있다는 사실에 두 사람은 적잖은 충격을 받고 있었다.
반면 노사부는 시종일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이는 손에 쥔 대나무 빗자루를 설렁설렁 휘둘러 여인의 검을 막는 와중에도 마찬가지였다. 무학을 수련하지 못한 나예린은 물론이거니와 비뢰문의 유일한 제자로 제법 수련을 쌓은 연비─비류연 역시 마음 속으로 지금의 자신이라면 절대 막지 못한다고 생각한 공격들을 노사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고 있었다.
“……빗자루를 선택하신 건, 그게 제일 길었기 때문이십니까?”
“오냐.”
여인이 잠시 물러서 숨을 고르며 묻자 노사부는 그렇게 대답했다. 정말 귀찮은 듯한 태도였다. 아마 단 한 번도 반격을 하지 않은 이유 역시 그것일 것이다. 그러나 사정을 아는 이들이라면 경악을 금치 못했으리라. 천무삼성의 일원인 검후 이옥상의 진심어린 공격을 발 한 자국도 떼지 않고 모조리 파훼하는 노인이라니. 그것도 보이는데로 그냥 집어온 대나무 빗자루로 해낸 일이라는 건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손목만 까딱여도 될 만큼 긴 게 빗자루라서 빗자루 드신 걸 거에요. 게으르신 분이시거든요.”
“다 들린다 이것아!”
나예린에게 몰래 사부의 험담을 속삭이던 연비는 노사부의 호통에 꺄아, 하고 거짓 비명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노사부는 못 볼 것을 본 것마냥 부르르 떨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검후를 향해 말했다.
“제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를 확실하게 잡아야 돼. 알겠냐?”
“아하하하, 명심해두죠.”
“거 네가 데려갈 애는 향이가 잘 가르쳐서 괜찮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돼. 제자라는 건 꼭 순식간에 비뚫어지더라고. 거참 제자 복이 없어, 제자 복이……."
노사부의 푸념에 검후가 웃으며 대답했다.
“대신 인복人福이 있으시잖아요?”
“인복? 뭐? 아, 향이?”
“네. 요즘 세상에 그런 애가 어딨는데요. 없어요. 마음 같아서는 그 아이도 데려가고 싶은걸요?”
“안돼. 간만에 발품 좀 팔아서 피곤한 거, 향이 수발 받아서 풀어야 돼.”
“사부님, 그 얘기 언니가 들으면 어쩌시려고요?”
“아, 거…… 끄응……. 못 들은 걸로 해 둬.”
제자의 말에 말을 바꾸는 노사부의 모습에 검후는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만사 두려울 게 없는 노인이건만 비류향이라는 소녀에게만큼은 약했다. 극진함의 화신인 듯한 소녀의 정성이 부담스러운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게 인간의 본성이고, 본성에 연연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음에도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노인이라도 소녀─비류향의 지극함에는 당해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절정고수들의 싸움으로 내력이 부딪쳐 만들어지는 파동으로 내상을 입을 수 있으니 따라오지 말고 기다리라는 노사부의 말에 홀로 남은 비류향이 방금 전 노사부의 말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노인의 수발을 들기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정성을 다해 준비하리라. 얼굴을 본 건 고작 일주일이지만 검후는 어렵지 않게 그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미소를 그려졌다.
“하여튼, 이제 끝난 거냐?”
노사부는 퉁명스레 물었다. 애초에 원하지 않는 대련이었다. 노사부가 돌아다니다보니 예상보다 일주일 정도 늦게 도착했는데, 먼저 와 있던 검후가 그동안 진기 고갈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비류향에게 진기를 주입해었주고, 그와 더불어 매우 좋은 술 한 병을 바친 덕분에 간신히 이 자리가 성립된 것이었다. 혼자서도 알아서 쑥쑥 크는 애가 뭘 더 배우겠다고 노구를 힘들게 해, 아 몰라 뭐가 아쉬워서 너랑 투닥거리냐, 한참 어린 애랑 싸우면 주변에서 욕해서 안해요 등등 온갖 변명을 늘어놓다 이 자리에 섰으니 내키지 않을 만도 했다.
그런 노사부의 심정과는 달리 검후는 굉장히 신이 난 상태였다. 검후 정도의 고수에게 있어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상대란 극히 한정되어 있으며, 말 그대로 전력을 다할 수 있는 상대란 손가락에 꼽을 정도가 된다. 그런데 눈앞의 노사부는 자신의 모든 절초와 비기를 쏟아붓더라도 쓰러뜨릴 수 없는 상대였다. 손끝 하나 닿지 못한다는 건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일이었지만, 안심하고 모든 기술을 아낌없이 써볼 수 있다는 것은 그러한 단점을 단숨에 메꿔버릴만큼 굉장히 매력적인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검후는 구상을 마치고 이제 갓 연검練劍을 시작한 최후의 절기를 사용해보기로 했다.
“마지막 하나만 더 받아주시면 됩니다.”
함께 천무삼성이라 불리는 친구 중 하나인 도성 하후식이 강을 갈랐다며 보여준 초식에 자극받아 수련중인 기술. 아직 미완성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노사부에게 사용해보기로 한 것이다. 이 괴물 같은 노인은 분명 아무 탈 없이 받아내리라. 그 옛날 검을 처음 배우던 시절, 스승님께 어설픈 검기를 자신만만하게 펼치던 것을 떠올리며 검후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것만으로도 순식간에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고오오오오────
겨울바람이다. 투명하고 날카로운 냉기를 머금은 동풍冬風은 계절에 맞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초월적인 힘이었다. 의념意念이 자연의 섭리에 간섭하는 초월의 경지. 그러나 그것을 보고도 노사부는 안색을 바꾸지 않았다.
“에잉, 쯧. 후딱 해 봐!”
자세를 가다듬기는커녕 귀찮다는 듯한 얼굴 그대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서 있는 노사부의 모습은 헛점 투성이였다. 허나 검후는 어디를 향하더라도 사문死門이 되는 노사부의 헛점을 보며 미소지었다. 과연 기인奇人이며 성인成人이다. 그리 생각하며──
“말학末學의 기술, 받아주십시오!”
해상비조천참절海上飛鳥千斬切
──무지막지한 내공이 실린 검을 노사부를 향해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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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천……. 천겁령……. 허허……."
서천에서 한중으로 가는 문턱인 검각.
촉한 최후의 항전지로 유명한 이곳에서 누군가에게는 마지막이고 누군가에게는 처음인 객잔에 앉은 한 노인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후자는 100년 전부터 뒤숭숭한 단어였고 전자는 요 근래에 뒤숭숭하게 된 단어였다. 한 달 전 같았으면 노인네가 불길한 말을 입에 담는다며 꺼림칙해 했을 테지만, 다행스럽게도 요즘에는 언제 어디서든 모이기만 하면 다들 그 얘기였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범인凡人들과 다른 점이라면 은연중에 두려운 기운을 풍기는 대중과는 달리, 노인은 매우 귀찮아하면서 동시에 짜증 섞인 분노를 피워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기운으로 인해 거리에서 이름 좀 날린다하는 건달패가 기세 좋게 객잔에 들어왔다가 노인의 기도에 눌려 숨도 크게 못 쉬고 조용히 나간 게 방금 전 일이었다.
“성질머리만 급해서는 노인공경도 못하는 놈들 때문에 놓쳤구만. 에잉…….”
한 달 동안 이 잡듣 사천땅을 뒤지던 노인─노사부는 개방 거지들로부터 불과 나흘 전에 뒤숭숭한 기운을 풍기는 외팔이가 이 근방에서 목격되었다는 정보를 얻었다. 고작 나흘 차이로 놈을 놓쳤단 말인가. 간만에 사천땅을 돌아다니다보니 별 것 아닌 무인 나부랭이들이 시비를 걸어대길래 친히 교육적 가르침을 사사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리고 그로 인한 적절한 보상을 받느라 지체되지만 않았더라면 직접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노사부는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아, 조지러 갈까, 말까…….”
굳이 인간이 아니더라도 좋다. 원념이든 지박령이든 정령精靈이든 신수神獸든 닥치고 후드려패 놈이 간 길을 묻다보면 금방 뒤를 쫓을 수 있으리라. 정 안되면 구역질 나는 놈의 혼백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면 될 일이다. 섭리와 천도天道에 위배되는 일인지라 저승사자니 상천지사上天之士니 하는 것들이 시끄러워 심히 귀찮은 일이기는 하지만 못할 거야 없다. 허나 이제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슬슬 진원진기도 다 떨어졌겠지. 으음…….”
혹시 몰라 되는대로 대충 듬뿍 넣어주기는 했지만 비류향에게 주라고 하며 비류연에게 넣어줬던 진기는 이제 거의 다 고갈되었을 시점이었다. 진기 주입이야 그럭저럭 실력이 되는 무인(어디까지 노사부 기준)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테지만 문제는 그런 무인이 과연 비류향 같은 아이에게 아무런 댓가 없이 진기를 주입해줄 것이냐는 것이었다. 세상은 비정하기 그지 없는 밀림이다. 노사부는 문명과 지성을 가진 이들이 더 잔혹하다는 것을 수백 년 동안 지켜봐왔다.
“……쯧. 흐유……. 가야겄다. 나중에 찾지 뭐.”
한참 동안 고민하던 노사부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나일천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놈의 행적을 보아하니 아예 사천땅을 떠난 것을 보였다. 쉽사리 돌아오지는 않으리라. 신뢰할 수 없는 직감과 석연찮은 증거들이 가득했지만 왠지 그러한 생각이 노사부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무엇보다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조질 수 있는 쓰레기에게 시간을 버리는 것보다, 부담스럽더라도 자기 수발 들어주는 소녀에게 시간을 투자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혹시라도 돌아올 때를 대비해 노사부는 꼬박 하루를 소비해 지역 전체에 금제진禁制陳을 설치했다. 진법에 통달한 이가 보았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승상(제갈량)께서 살아돌아오셔서 다시 진법을 설치하면 이러지 않을까 싶을 만큼 정교하고 치밀하면서도, 오로지 특정한 한 사람만을 잡을 수 있는 진법이라니. 설령 어디 한 군데가 망가지더라도 자연스럽게 축을 바꾸어 스스로 고쳐지니 마치 살아있는 생물과 같았다. 진법을 기동시킨 노사부는 마지막으로 진의 중심인 바위에 한 문장을 새겼다. 놈이 이 진에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이 바위 앞으로 인도되어 문장을 보게 되리라.
[다시 사천땅 밟으면 뒤진다.]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폭력적인 문구는 노인의 화법이라기에는 매우 난폭했지만, 제자인 비류연이 봤다면 “야, 정말 사부다운 말이네요.” 라고 할만큼 노사부의 개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일을 마친 노사부는 천향루를 향한 귀로에 올랐다. 만약 검후가 다음 날 천향루에 도착할 것을 알았다면 그로 인해 벌어질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극한의 경공을 발휘해 달려왔으리라. 허나 노사부가 검후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은 불행히도 일주일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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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연이야 워낙 괴물 같은 사부를 두었기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지만, 나예린은 달랐다. 정천맹주인 아버지 나백천을 두고도 용안의 부작용으로 사람을 멀리했던 소녀는 아버지의 검식劍式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어떤 무인의 무학도 제대로 구경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소녀의 눈에 비친 노사부와 검후의 격돌은 단순한 무인들의 비무 이상의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단순한 병장기가 부딪침에도 놀랄 것인데 심후한 내공이 격돌하였다. 범인凡人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압도적인 파격이 담긴 무학武學의 소용돌이는 그 안에 깃든 기氣의 흐름까지 심오하기 그지없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이치가 폭포수 사이로 빛나는 무지개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술값은 했구만.”
노사부는 떫은 표정으로 말했다. 손가락 마디 하나 만큼 왼발이 앞으로 나가 있었다. 귀찮아서 별 생각 없이 대응했다고는 하나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약조가 깨진 것은 사실이었다. 만에 하나 움직인다면 한 번 더 대련에 응해주기로 했다. 어쩌자고 그런 약조를 맺은 걸까. 까놓고 말해서 선금으로 술도 받았으니 대련이야 이기든 말든 아무래도 좋았고, 한 번 더 해주는 거야 검후 정도로 실력도 얼추 되고 아리따운 꼬마 아가씨(어디까지나 노사부 기준이다)와 어울려주는 것 쯤은 기분이 좋다면 못해줄 것도 없다. 허나 안 해도 되었을 일을 괜히 입을 놀렸다가 하게 되었으니 찝찝할 따름이었다.
“반 걸음 정도는 움직이실 줄 알았는데…….”
검후의 말에 노사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제대로 가다듬지도 않고 그냥 거칠기만한 공격인데 뭘 반 걸음이나 움직여. 한 마디만으로 만족해. 그리고 그 기술 완성되면 그때 다시 찾아와.”
“에이, 그건 아니죠! 분명 금산적주金山赤酒받으실 때 언제든 다시 받아주시기로 하셨으면서!”
“네 기술들 중에 그나마 괜찮은 게 그거 하나 뿐인데 뭘! 또 이번처럼 한 마디 움직이고 끝내려고? 그럴 거면 덤비던가!”
“으으……!”
얼핏 보기에는 짠돌이 스승과 천덕꾸러기어린 제자처럼 보이는 대화을 나누며 투덜거렸지만 검후의 얼굴은 밝았다. 전력을 다한 공격이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후련한 표정이었다. 천상천天上天에 절망하던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나갔기에 새로운 경지가 있다는 것과 노력하면 닿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검후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설마 이 나이에 처음 검을 잡을 때처럼 두근거리는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이야.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류……연비야! 먼저 가서 식탁 좀 차려놔라!”
“네~ 가요, 린!”
“네. 먼저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마침과 동시에 길이라 하기도 힘든 좁은 오솔길을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까르르 웃으며 내달려가는 소녀들의 모습에 검후가 미소지었다.
“참 활기차네요.”
“너무 활기차서 문제야.”
“풀죽어있는 것보다는 좋잖아요?”
“이왕이면 얌전한게 좋아.”
“향이처럼요?”
“거긴 너무 얌전하고.”
소녀들이 뛰어간 길로 향하며 노사부는 빗자루로 허리를 두드렸다. 대련이라고 해봤자 노사부가 움직인 건 손목 뿐이었지만 이런 건 마음의 문제라 괜시리 허리나 무릎을 어루만지게 된다. 그러면 하나뿐인 제자는 정정하신 분이 왜 상노인네 흉내내냐 투덜거리고, 그 제자의 누이는 찜질하시라며 냉수건과 온수건을 준비한다. 망할 놈. 역시 제자는 휘어잡아야 되는 거야. 속으로 궁시렁거리던 노사부는 문득 검후를 향해 말했다.
“밥 먹고 나서 가는 거냐?”
“네.”
“짐은 다 챙겼고?”
“그럼요.”
노사부가 천향루로 돌아와 검후와 만난지로부터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나흘은 천향루에서 서로 온갖 이야기를 하며 지냈고 이틀은 아미산 모옥에서 지냈다. 노사부는 검후와 나예린의 모옥 숙식을 썩 내키지 않아 했지만 검후가 넘긴 금산적주의 독특한 주향이 노사부의 불만을 잠재웠다. 그러나 그것도 이틀이 한계였다.
그래도 목표인 대련을 해냈으니 검후는 아쉬울 건 없다. 다만 그 아이는 아쉬워하겠지.
검후는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한 나예린을 떠올렸다. 소문과는 달리 감정표현도 잘 하고 말수는 적지만 하고 싶은 말은 할 줄 아는 아이였다. 그렇게 되기까지 도움을 준 어머니이자 친구였던 이와의 이별이 어찌 아쉽지 않을까.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그 반대도 있는 거지 뭘. 너도 그만큼 나이 먹었으면 알잖냐. 걱정도 팔자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니까요.”
“평생 헤어지는 것도 아니구만.”
귀찮다 어쩌다 투덜투덜 말이 많았지만 그래도 노사부는 일일히 답을 주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검후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오늘 아침은 뭘까요? 먼 길 가야 되니까 맛있는 거면 좋을 텐데.”
“향이 밥은 뭐든 맛있어.”
“그래도 그날 딱 먹고 싶다는 거 있잖아요.”
“음, 죽순무침이 끌리는구만.”
“죽순무침 좋네요. 거기에 대나무통밥도 있으면 최고겠어요.”
그런 대화를 나누며 모옥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잠시 후, 식탁에 올라온 대나무통밥과 죽순무침을 보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 길러 가질 못해서 부득이하게 죽향竹香을 빌려 밥을 지었습니다.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반찬을 내오겠,”
“노야. 정말 데려가면 안될까요?”
“안된다니까.”
“금산적주 열 병 보내드릴게요.”
“평생 먹을 분량 가져다 줘도 안 보낼 거야.”
“저기……?”
심상치않은 표정으로 못 알아들을 대화를 나누는 어른들을 보며 당황해하는 비류향을 식탁에 앉힌 것은 연비와 나예린이었다.
“언니, 괜찮아. 그냥 밥 먹으면 돼.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어, 응, 그래…….”
자연스럽게 식기를 집는 동생들의 모습에 비류향 역시 조심스레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노사부와 검후의 말싸움은 아이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을 덧붙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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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스러운 아침식사를 마치고 차 한 잔을 마신 후 마지막으로 짐을 확인한 검후와 나예린은 오두막을 나섰다. 배웅하는 이는 비류향과 연비 뿐이었다.
“원래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만남인데 무슨 배웅을 해. 어차피 쉽사리 끊어질 인연도 아닌데 그냥 가.”
노사부는 그리 말하며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인연의 소중함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말이었지만 노사부의 성품을 알기에 다들 아무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
나예린은 말없이 비류향을 끌어안았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부모님을 제외하면 가장 깊은 인연과 헤어지는 것이며, 동시에 처음으로 만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이와 헤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이 따스한 품에 다시 안길 수 있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어린 소녀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런 불안을 읽은 것일까. 비류향의 손길이 살포시 나예린의 머리를, 뺨을 쓰다듬었다. 순식간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아아, 정말, 못 당해내겠구나. 이 온기를 지키고 싶다. 그날처럼 무력하게 보호받고만 있지는 않을 테다. 그렇게 다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나예린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스스로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갈게요.”
“……응.”
당찬 소녀의 말에 비류향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그리고는 검후를 향해 말했다. 비록 혈육은 아니나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걱정 말거라. 어지간한 놈팽이들은 손짓 하나로 내쫓을 수 있는 아이로 만들 터이니. 그런 대화를 하는 동안 나예린은 연비를 향해 말했다.
“갈게. 기회가 된다면 서찰을 보낼게. 답장, 해줄 거지?”
“기대하고 있을게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몸조심이에요. 알죠?”
“응.”
비류향이 친구이자 어머니였다면, 연비는 언니동생하며 지내기는 했지만 나예린이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꼭, 다시 만나자.”
“네. 아, 그때는 처음 만나는 걸지도 몰라요.”
“……후훗,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럴지도 모르죠.”
아마도 그때는 연비가 아닌 비류연으로서 만나게 되리라.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날이 어서 오기를. 그렇게 생각하며 나예린은 인사를 마치고 검후와 함께 남해로의 여정길에 올랐다.
산천초목의 신록이 더욱더 짙어지는 푸른 여름의 초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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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었네요. 역시 술이 웬수입니다. 이걸로 과거편은 종료입니다. 다음화부터는 다시 1부 초입으로 돌아갑니다.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