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2.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2.
그러니까 대충 열다섯 살 되던 해 초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레에 한 번 대장간이 쉬는 날이었기에 오후 시간이 비어야 했지만 나는 나물캐기와 사냥을 위해 아미산을 타고 있었다. 사부도 술 마시러 놀러갔겠다, 놀기 딱 좋은 날이었지만 사부가 수련거리─인 척하는 재화벌이─를 명하고 갔기에 우울한 심정으로 오두막을 나섰다. 청명한 하늘과 상쾌한 바람이 나를 더욱더 우울하게 만드는 날이었다. 그나마 누나가 산 타다가 배고프면 먹으라고 싸준 도시락이 있어 그나마 기분전환이 되었다.
누나의 도시락과는 별개로, 놀기 좋은 환경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나를 위해 하늘에서 선물을 내려주신 걸까. 나무 그늘 아래서 청아한 향기와 고결한 기품이 느껴지는 청보랏빛 꽃 세 송이가 피어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내 뇌리에 경종이 울렸다. 돈 된다. 분명 이것은 돈이 된다. 그것도 매우 큰 돈이.
매우 신속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땅을 파던 나는 순간 깜짝 놀라 손을 멈추었다.
"우와……."
어른 손바닥 만한 나신裸身의 여체女體가 있었다. 세상에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숨쉬는 것조차 잊어버릴만큼 경이로운 광경을 얼마나 보고 있던 것일까. 코끝을 간질이는 청아한 향기가 아니었다면 하루 종일 그 광경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신 차려라 비류연. 세상에 손바닥만한 인간이 어디 있으며 그런 인간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단 말이더냐. 눈꺼풀 벗겨저라 거하게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거기에는 한 뿌리의 산삼이 다소곳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게 바로 인형설삼人形雪蔘이구나.
그야말로 금덩이를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산이 흔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환호성을 터뜨리고 싶었으나 급작스럽게 떠오른 사부의 모습에 냉정을 되찾았다. 진정해야지. 심호흡과 함께 영사심결로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곧 고민에 휩쌓였다. 이걸 팔 것이냐, 먹을 것이냐. 전자前者의 경우는 막대한 돈을 얻을 수 있었고, 후자後者의 경우에는 심후한 내공을 얻을 수 있었다.
아니면 누나를 먹이느냐.
이제 와서 무엇을 숨기랴. 사실 제일 바라는 건 이쪽이다. 허나 오래 전 돌림병으로 상중하 삼단전과 전신기맥이 모두 망가진데다가, 내가 열두 살 때쯤 서오西汚놈에게 큰 내상을 입었던 누나의 몸에 영약은 독으로밖에 작용하지 않는다. 주화입마나 뭐 그런 건 걱정이 없지만, 극양極陽의 영약을 먹으면 열이 심하게 나고, 극음極陰의 영약을 먹으면 반대로 체온이 심하게 떨어지는 식이다. 약발을 잘 받는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앓고 나서 몸이 전혀 안 좋아지니 결코 좋은 게 아니다.
그걸 뼈저리게 느낀 건 누나에게 산삼을 먹였을 때였다. 예린이가 떠난 그해 겨울, 사부가 잠깐 놀러간 틈을 타서 누나 몸보신을 위해 고려국 인삼이라 속이고 산삼 넣은 삼계탕을 준비했었는데 그걸 먹고 열이 올라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것이다. 다행히 의사용안과 수련으로 오른 공력을 사용해 재빠르게 양기를 흩어내고 흡수한 덕분에 누나는 반나절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소림의 대환단도 네 누이에게는 독이다. 알겠냐?"
제자는 가차없이 굴리면서 누나는 애지중지하는 사부님은 돌아와 누나를 보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채고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귀한 거 사부한테 안 바치고 지 누나한테만 갖다바친다고 맞았다. 약藥이라는 게 원래 몸이 약弱한 사람이 먹는 거니 당연히 누나에게 줘야 된다고 했더니, 되려 누나가 자기는 괜찮으니 다음부터는 사부님 드리라고 했다. 아니야, 누나. 사부님은 안 먹어도 강한 사람이야.
어찌되었든, 심사숙고 끝에 나는 이 인형설삼을 내가 먹기로 했다. 돈도 돈이지만 몸이 제일이니까. 우선 누나의 도시락으로 빈 속을 채우고 한 식경 동안 사부가 가르쳐 준 영약 섭취시 주의사항을 되새긴 후, 꽃부터 뿌리까지 조심스레 입 안에 머금었다. 그러자 분명 딱딱한 뿌리며 질긴 줄기 같은 게 느껴지지 않고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더니 청아한 향기만을 남기고 자연스럽게 식도를 타고 뱃속으로 사라졌다.
어느 시점부터 뇌령심법을 운용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시작은 양陽의 삼蔘이었을 인형설삼은 극양도 극음도 아닌 순수한 기운을, 폭포처럼 몰아치는 거대한 힘을 품고 있었다. 그 힘이 육신을 거세게 후려치고 영혼을 찢어발기는 듯 했다. 도저히 제정신이라고 할 수 없는 시원時原의 혼돈 끝에 엄청난 깨달음이 영혼을 강타하고 갔다. 뇌령심법을 운용하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거대한 충격이었다. 문득 주화입마라는 단어가 떠올랐지만 자연스럽게 뜨여진 눈에 보이는 풍경을 본 순간, 모든 것이 끝났기에 자연스럽게 뇌령심법 운용을 멈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부터 하고 있었는지 모를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끄응~”
상쾌하다. 몸은 날아갈 듯 가볍고 정신은 바다처럼 넓으면서도 호수처럼 고요했다. 맑고 청명한 기운이 몸 안에 가득했다. 이야, 좋구나.
문제는 운기조식 전에 캤던 약초들이 죄다 쓸모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뭐, 쓰자면 못쓸 것도 없지만 캐서 바로 다음 날 약장藥場에 파는 것에 비하면 시원찮은 상태였다. 상태를 보아하니 사나흘 정도 지난 듯 했다. 그나마 짐승을 안 잡아서 다행이구만. 만약 사냥한 것들이 있었다면 진작에 썩어버렸거나 다른 짐승들이 낚아채 갔으리라. 내가 힘들게 잡은 걸 그런 식으로 못 써먹게 만들면 정말 가슴이 아프다.
여튼 며칠 지났다는 걸 깨달은 순간 빈손으로 돌아가면 사부님에게 추궁당할 게 뻔했기에 해가 질 때까지 근방의 약초란 약초는 죄다 캤다. 하는 김에 주제 파악 못하고 나를 덮치려던 호랑이 한 마리도 잡았다. 몰래 팔면 제법 큰 비자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인형설삼 먹은 거에서 더 이득을 보려다 피를 보느니, 그냥 사부님께 바치기로 했다. 대를 위한 작은 희생이다.
여튼 그렇게 돌아온 나를 맞이해준 것은 마루에 앉아 잠든 누나였다. 그제서야 누나가 걱정하고 있었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마음 같아서는 조용히 들어가고 싶었지만, 약초 바구니와 호랑이 시체가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약초는 몰라도 호랑이는 지금 당장 손질을 해둬야 비싸게 팔 수 있다. 별 수 없이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누나, 나 왔어.”
“……어서오렴.”
언제 자고 있었냐는 듯 깜빡 하고 눈을 뜬 누나는 내가 짊어진 호랑이를 보고는 놀란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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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야라면 노을빛에 물든 대지의 잔광殘光이 남지만 산으로 둘러쌓인 오두막은 해가 빨리 진다. 해는 이미 산 너머로 넘어간지라 어둑어둑했기에 비류향은 아궁이에서 불씨를 꺼내 등불에 불을 붙였다. 오두막 문가에 하나. 마루에 하나. 홀로 남은 오두막에 불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사아아아…….
산바람에 빗소리처럼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비류향은 그 소리를 들으며 마루에 앉아 천천히 숨을 골랐다. 나름 시골출신에 산에 살면서 체력이 붙었다고는 해도, 사람이 두 번이나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오면 기초체력이라는 게 턱없이 낮아지는 법이다. 거기에 후유증까지 있다면야. 일반인이었다면 외공이라도 배워 단련할 테지만 체질상 그 어떤 무법武法도 효과를 얻을 수 없기에 그저 자주 쉬어주는 수 밖에 없었다.
호흡을 가라앉히며 비류향은 문가를 바라보았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등불이 비치는 곳만 약간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안 오려나. 벌써 닷새 째 본의 아니게 혼자 오두막을 지키고 있었다.
“천향루에 좋은 술이 들어왔다니 마시러 갔다오마. 한 일주일 정도 있다 올 거야.”
노사부가 그리 말하며 나가고 다음 날, 약초를 캐러 간다던 동생 비류연 역시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고라도 난 것일까. 만약 백무후가 찾아와 동생은 무사하다는 얘기─라기보다는 스무고개 방식으로 겨우 알아차린 것이다─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걱정하고 있었으리라. 단 둘뿐이라고는 하나 나름 무가인 곳에서 일하고 있어도 무인의 생리는 잘 모르지만 도중에 깨달음을 얻어 수련하고 있다보다 했다. 그런 일도 있다는 얘기를 시장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래도 벌써 나흘째. 해가 뜨면 닷새고 노사부가 돌아올 때도 되었기에 다시 걱정되기 시작했다. 혹시나 방해가 될까봐 쉽사리 그러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내일은 백무후와 팔섬풍에게 부탁해 동생이 있는 곳에 찾아가봐야 할 듯 싶었다. 무공 수련하는 몸인데다가 백무후와 팔섬풍에게 물을 때마다 괜찮다는 얘기를 듣지만, 여든 노모가 예순 노인을 걱정하는 법이라 했던가. 모자母子도 아니고 나이도 고작 세 살 차이지만 하나뿐인 혈육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비류연의 나이가 떠올랐다.
연이가 벌써 열다섯이구나.
내년이면 열여섯, 성인이 되는 아이건만 눈을 감으니 어릴 적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그래도 말하는 품새나 행동거지도 제법 어른스러워졌고, 여태껏 아미산을 들쑤시고 다니며 온갖 약초를 채집하고 짐승들을 사냥한데다가, 무공까지 수련했으니 겉보기랑은 다르게 힘도 엄청나게 강할 것이다. 키도 벌써 자신과 비슷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집 남매들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고작 세 살 차이 밖에 안 나는 누이 말을 잘 들와 줬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마저도 세상을 뜨셨건만 잘 자라주었다. 비류연. 연아.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나의 동생아. 네 누이로 태어난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매일 말해주지 못하는 게 미안하단다.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림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게 벌써 5년 전 일이었다. 열세 살 꼬마였던 자신 또한 어느 덧 열여덟 여인이 되어있었다. 조금 더 지나면 연이가 새색시를 데려와 일가의 가장이 되지 않을까. 무림에서 활동하게 될 테니 조금 더 늦으려나. 그러면 여기가 아니라 좀 더 마을에 가까운 곳에 집을 얻겠다. 어쩌면 사천을 떠나 다른 곳에 갈 지도 모르고. 노야께서 윤허해주셔서 가끔 보러갈 수 있으면 좋겠다…….
“누나, 나 왔어.”
언제 잠들었던 것일까. 동생의 목소리에 비류향은 눈을 떴다. 문가에는 호랑이 시체를 짊어진 동생 비류연이 서있었다. 놀랐다. 백무후와 팔섬풍과 함께 지낸 시간이 있어 덜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놀란 건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할 말이 있었다.
“어서오렴.”
“……응.”
멋쩍은 듯한 웃음과 함께 비류연은 마당 한 켠에 호랑이와 약초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왠 호랑이를 잡았니? 덮쳐오길래 제물이겠다 싶어서 잡았어. 제물? 공양이랄까. 사부님께. 기특하네. 하. 하. 하. 기특하기는. 아참, 배고프지? 저녁 준비할게. 아냐, 내가 준비할게. 호랑이 고기 먹자. 금방 되겠어? 물론이지. 아궁이 불만 지펴줘. 그래, 알았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짧은 대화가 오가고, 누이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비류연은 발끝으로 마당에 핏물 빠질 배수로를 파낸 후 품 안에서 비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호랑이 시체 앞에서 부처님께 기도하듯 합장을 한 후,
“자, 시작해볼까~ 흠~ 흠흠~”
정교하고도 재빠른 손놀림으로 호랑이 시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나흘 만에 누이와 함께하는 식사를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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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노사부는 구슬을 꿰는 동생 옆에서 옷자락에 수를 놓던 비류향을 불렀다. 드문 일이었다. 바깥이라면 모를까 이 산 속 오두막 안에는 어디든지 비류향이 노사부를 위해 준비한 것들 뿐이었다. 그리고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상황에 따라 적절히 노사부가 원하는 물건들을 내놓기에 부르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불려간 비류향이 받은 것은 한 잔의 술이었다. 무슨 술인지는 몰랐으나 밑도 끝도 없이 받은 잔에 술이 채워질 때마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노사부의 눈을 보아하니 매우 귀한 것인 게 틀림없었다. 귀한 것을 주시는구나. 어느 덧 스물둘 여인이 된 소녀는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잔을 받아들었다.
“마셔라.”
비록 주향이 맴돈다고는 하나 뭔지도 모를 것을 먹으라 명 받았건만 비류향은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는 잔을 입에 대고 내용물을 남김없이 마셨다. 청아하고 은은한 향과 입안에 맴도는 희미한 달콤함과는 달리, 식도를 태우며 위장으로 흘러들어간 액체는 자연스럽게 기침이 나오게 했다. 그러나 비류향은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 병자도 아니거늘 하사하신 주酒를 마시고 기침을 내뱉는 것은 무례無禮다. 그리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큽…… 쿠흡, 크흠……. 푸흡…….”
그 모습에 노사부는 참지 말고 기침하라 하였다. 그제서야 비류향은 거친 기침을 쏟아냈다. 격한 기침에 옆방에서 구슬을 꿰던 비류연이 달려왔지만 노사부는 약 먹은 거니까 호들갑 떨지 말라며 가볍게 제자를 쫓아냈다. 누나 괜찮은 거 맞죠?! 아 맞다니까! 넌 사부를 그렇게 못 믿냐! 사부님을 믿지만 사부님을 믿는 저를 더 믿습니다! 헛소리 하지 말고 구슬이나 꿰어 이것아! 소란 속에서 기침이 점점 잦아들어갔다.
“하, 하아……. 하아……. 후으…….”
“그래, 좀 어떠냐.”
한참 기침을 내뱉고 나니 근육이 당겼지만 술기운과는 다른 다른 청량감과 기분 좋은 온기가 온몸에 퍼져 있었다. 그것을 말하자 노사부는 “약쟁이 놈 약재 삥땅치지는 않았군.” 이라고 중얼거리고는 말했다.
“어제 내가 부엌에 가져다 놓은 항아리 있지?”
“예.”
”거기에 든 게 방금 준 술이다. 엄청 귀하고 비싼 약재 담가서 만든 건데 사흘에 한 잔 씩만 마셔라. 명심해. 딱 한 잔이야! 더 마시지 말어!”
“이리 귀한 술을 어찌…….”
“골골대지 말라고 주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식재만 축내는 부족한 아이도 이리 챙겨주시는구나. 그런 생각으로 감사의 마음이 가득한 비류향의 눈빛에 노사부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 향이랑 류연이 놈 섞어서 반으로 나누면 참 좋을 텐데. 그리 생각하며 노사부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절대 류연이 놈은 주지 마라. 그놈은 산 타고 다니면서 약초며 영물이며 제일 좋은 것들 알아서 주워먹고 있으니까 안 챙겨줘도 돼.”
“……네.”
반드시 지키라는 듯 엄포를 놓는 노사부의 말에 비류향은 유쾌한 사제지간의 모습에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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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 약초꾼과 사냥꾼들 사이에서 백호선녀白虎仙女의 소문이 떠돈 것은 대여섯 해 전부터였다. 처음에는 왠 소녀가 백호를 타고 아미산을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입소문을 타고 눈덩이처럼 불어나 이제는 사실 그 소녀가 둔갑한 백무후라느니, 아미파의 절정고수 중 하나가 반로환동으로 젊어져 백호를 타고 다니는 거라느니 하는 얘기까지 나오는 수준이었다.
아미산 산기슭 어디든 선녀가 백무후와 팔섬풍을 거느리고 다닌다는 얘기는 애들 잠자리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였으나, 실제로 멀리서 백호선녀의 모습을 보는 이가 하나 둘 늘어나자 이제는 다들 믿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호기심이 생기는 게 사람인지라 아미파에서 한동안 백호선녀의 정체를 알아보고자 했지만, 사람이 다가갈라치면 신출귀몰하게 사라져 결국 포기한 것이 3년 전이었다.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 사람 피하는 이를 애써 찾을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거기에는 지난 날 백무후를 토벌하자고 했다가 하지 않은 전례도 힘을 더했다.
무림인들이야 어찌되었든, 약초꾼과 사냥꾼, 그리고 나무꾼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백호선녀를 만나면 그날 운수가 좋다는 믿음이었다. 선녀를 보면 자주 보기 힘든 희귀한 약재를 캔다, 잡기 어려운 사냥감을 잡는다, 질 좋은 목재를 발견하거나 그날 도끼질이 잘 된다 등, 백호선녀는 이미 민간신앙의 영역에까지 도달해있었다.
물론 그런 건 단순한 헛소문이라 치부하는 사람들 또한 있었다. 금재월金才鉞 역시 그러한 사람이었다. 이름만 보면 도끼 좀 쓰는 나무꾼 같았지만 정작 그의 생업은 약초 채집이었다. 어찌되었든 그는 백호선녀 이야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혹여나 동료들이 그에 대해 얘기하면 말도 안되는 소리 말라며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적어도 며칠 전까지는 그랬다.
초여름에 들어서 제법 더웠던 그날, 재월은 땀 좀 씻고 목도 축일 겸 자신만 아는 냇가로 향했다. 초목에 가려 찾기는 어렵지만 들어가면 제법 너른 바위를 휘감는 계곡물이 흐르는 명당이었다. 잽싸게 등에 짊어진 약초 바구니를 내려놓고 소매를 걷은 후 계곡물에 손을 담갔다. 어이구, 차가워라. 계절에 아랑곳하지 않고 뼛속까지 시려오는 계곡물로 세안이며 양치며 땀과 흙먼지를 씻어내고 있자니 문득 이상한 기운을 느낀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음? 으헉?!"
적호赤虎. 아니, 백호白虎였다. 뭘 하다 그리 되었는지 모를 만큼 피칠갑한 얼굴 때문에 적호로 보인 것 뿐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대체 어느 새 이토록 가까이 다가왔단 말인가.
“그르르르르르…….”
“아, 으아으, 으흐흐, 으으…….”
낮게 깔리는 산군山君의 울음소리에 오금이 저려왔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이대로 죽는구나. 눈앞의 풍경을 덧씌우듯 지난 날의 삶이 좌르륵 스쳐지나갔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이라 생각했으나 별의별 오만가지 추억들이 우후죽순 떠올랐다. 그 끝이 이렇게 허무한가. 어머니 아버지. 불효자는 먼저 세상을 뜹니다! 재월은 천천히 다가오는 백호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지? 그 순간 찰박찰박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에라, 모르겠다. 죽더라도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고 죽어야지. 그런 생각에 재월은 눈을 떴다. 거기엔 백호가 계곡물을 핥짝이고 있었다. 단순히 물을 마시러 온 것이었나. 그 생각에 맥이 탁 풀리려 했으나 그 순간 백호가 고개를 들어 재월을 바라보았다. 맹수라고는 하나 결국 짐승이다. 허나 백호의 눈빛은 어지간한 사람들보다 깊고 맑았다. 영물이다. 영물이야. 백무후와 팔섬풍 중 하나겠구나. 어이구야.
자박자박 돌 밟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고개를 돌린 재월─훗날 그는 그때 도대체 어떻게 백호를 앞에 두고 고개를 돌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몸서리쳤다─의 시야에 지팡이인 듯한 장대를 든 여인이 들어왔다. 허름한 의복이었지만 끝단이 헤지거나 주름 잡힌 곳 없는 옷을 맵시있게 입은 여인이었다. 산행에 지친 듯 땀이 맺힌 얼굴은 산 사람치고는 생기가 희미했다. 그래서인지 제법 아름다운 얼굴이건만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여인은 백호를 보다가 재월을 눈치채고는 살짝 미소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 그, 그어, 그래……. ”
얼떨결에 인사를 받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웃으니까 좀 사람답구나. 아니, 정말 사람이 맞기는 한 건가? 피칠갑한 백호를 보고서도 놀라지 않으며 등에 짊어지고 있던 약초 바구니를 내려놓은 여인이 물가로 다가오는 것을 본 재월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아니, 너, 무슨…….”
찰박. 찰박.
여인은 자연스럽게 백호 곁에 다가가 피칠갑인 백호의 얼굴을 정성스레 씻기기 시작했다. 새끼 고양이마냥 낑낑거리는 백호를 어르고 달래며 피를 닦아내는 그 모습은, 마치 씻기 싫어하는 어린 동생을 씻기는 큰누나의 그것처럼 보였다.
“낑낑…….”
“참아. 백모白母께 한소리 듣는다.”
“끄응…….”
호랑이가 다른 고양잇과 생물들과는 달리 물을 좋아한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 손길로 귀며 수염이며 문지르는 걸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백호라고 아니그러할까. 그런데 우마牛馬보다 더 큰 백호가 훨씬 작은 여인의 행동에 따르다니.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이게 현실의 일이 맞는 건가?
공황 상태에 빠진 재월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호의 얼굴에서 피를 모두 씻어낸 여인은 자신 또한 계곡물로 세안을 하고는 다시 약초 바구니를 짊어졌다. 그러자 백호가 여인의 치맛자락을 살짝 물어당기며 엎드렸다. 그 모습에 여인이 괜찮다는 듯 가로저었지만 막무가내인 백호의 태도에 결국 조심스레 백호의 등 뒤에 올라탔다. 세상에 맙소사. 지금 내가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여인을 등에 태우고서야 일어난 백호는 마치 여인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듯한 발걸음으로 조용히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퍼뜩 정신을 차린 재월은 허겁지겁 짐을 챙겨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서두르던 나머지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진 그는 격통 속에 몸부림치다 백년삼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그는 열렬한 백호선녀의 신봉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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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백호선녀라…….”
“아 글쎄 진짜 있다니까요, 어르신!”
“누가 안 믿는다고 했나? 난 그저 어떤 고수인가 싶어서 그런 걸세.”
아미산 초입의 객잔에서 한참 백호선녀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철담비환鐵膽飛丸 진조운眞朝暈이었다. 천무학관의 요청에 따라 아미산으로 찾아올 주작단 16인을 가르치기 위해 온 무림고수인 그가 백호선녀 얘기에 관심을 드러내자 약초꾼이며 사냥꾼이며 아미산에 생업을 둔 이들 모두 신이 나서 그 얘기를 해주었다.
“아미파에서도 한때 정체를 밝혀볼까 했었는데 실패했지요.”
“그건 실패가 아니라 그냥 놔두자는 거였잖나.”
“아, 그렇구만.”
“여튼 여기 금재월이 이 사람이 백호선녀 얼굴 제일 가까이서 본 사람입니다.”
“어찌 생겼었는지 다시 말 좀 해드려 이 사람아.”
“그러니까, 와 이거 진짜 뭐라고 해야 되나. 음, 사람인데 사람 같지 않달까, 살아 움직이는데 허깨비처럼 생기가 없어 보이고. 예쁘긴 예쁜데 생기가 잘 안 느껴지니까 진짜 사람 같지가 않더라니까. 그런데도 웃으면 되게 예쁜,”
“거 누가 첫사랑 고백하랬나?”
“에이! 말도 안되는 소리 말어!”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을 보며 진조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적어도 자기가 아는 고수들 중에 약초꾼이 말한 인상착의나 기운을 풍기는 이는 없었다. 그것도 여성으로 한정한다면 하나도 없다. 혹시나 천겁혈세 때의 인물들까지 떠올려봤지만 도저히 맞는 이가 없었다. 대체 누구길래 백호가 자연스럽게 등에 태워주는 걸까. 특수한 무공을 수련했다 하더라도 고수일 것이고 그런 것 없이 순수한 힘으로 영물이 따를 정도라면 지고한 영역에 도달한 기인이리라. 그나마 나쁜 소문이 없다는 게 다행이었지만, 일반인에게만 이리 대하고 무림인에게는 달리 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먼저 가보겠네.”
“살펴가십시오, 어르신!”
일반인들에게도 이름이 알려진 고수가 자신들 얘기를 들어준 것이 기뻤는지 다들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객잔을 나선 진조운은 경공을 발휘해 아미산을 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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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타입문넷 자창게 글/조아라 1화)과 본문에서 등장인물들 간에 태도 차이가 나는 건, 서문은 연재 생각 없이 썼던 거라 그렇고 본문은 2부를 읽으면서 전개를 다 뒤집었기 때문입니다. 조아라 11화 후기에 언급했었는데 헷갈리시는 분들이 있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 최대한 원작의 등장인물과 전개를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하지만, 비틀어야 재밌는 게 팬픽이죠. 항상 고민하고 있습니다.
- 추가. 백호신녀라 되어 있던 부분 수정했습니다. 타입문넷 Satze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호랑이가 고양잇과 생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물을 좋아하는 동물이라는 제보를 받아 해당 부분 역시 수정했습니다. 조아라 다크비하인드 님 및 기타 제보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