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3.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3.
나물과 고기를 자급자족하더라도 사람 사는 데에는 부족한 물건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물며 무공과는 연이 없는 여아도 함께 사는 집이니 정기적으로 장을 보는 게 당연했다. 그렇기에 노사부는
비류향이 시장에 다녀오는 것을 막지 않았고, 돈을 달라고 할 때도 망설임 없이 쥐어주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온갖
이유를 들어 거부하였으나, 귀찮은 일거리 시킬 요량으로 한두 번 허락해주다보니 매우 편해져서 아예 가계家計를 맡기게 된 것이다.
어차피 비류향이 사오는 건 전부 집안살림에 보탬이 되는 것들이었고, 헛돈은커녕 결코 자신을 위해 쓰는 일이 없는 비류향의
경제관념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저잣거리에 널리고 널린 군것질거리며 그 나이대 소녀라면 눈이 돌아갈 화장품과 장신구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물건값은 결코 부풀리거나 축소시키는 일이 없으니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육체의 편리와는 별개로 심적 부담은 한없이
늘어갔지만.
그런 고로 장에서 돌아온 비류향이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며 한동안 출가를 요청해왔을 때 노사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드디어 자유로운 생활이! 근심없는 일상이! 춤이라도 추고 싶은 감정을 애써 감추며 노사부는 짐짓 근엄한
얼굴로 물었다.
"넌 어찌하고 싶으냐?"
"……노야께서 윤허하신다면 다녀오고자 합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본래 제 일이라면 한사코 거절하고 원하는 것은 어디 도망치지 못하게 붙들고 늘어져야 간신히 입에 담는 게 비류향이라는
소녀였다. 어차피 허락할 테지만 어째서 가고 싶어하는지 본심이 듣고 싶어졌기에 노사부는 슬그머니 캐물어보기로 했다.
"평생토록 은혜갚기로 한 말은 벌써 잊은 게로구나?"
"어찌 그것을 잊겠습니까. 모시지 못하는 날만큼 더욱 보은할 것입니다."
"흠, 네 여태껏 해 온 정성이 있으니 일단은 믿겠다만……."
그 말에 무언가를 자극받은 것일까. 비류향이 당황한 듯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괜한 말로 노야께 심려를 끼쳐 송구합니다. 이 일은 없던 일로,"
"아니, 아니다! 어흠! 아직 말을 끝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짐
짓 내키지 않는 듯한 노사부의 태도에 비류향이 곧바로 없었던 일로 만들려고 하자, 노사부는 황급히 비류향의 말을 끊었다.
위험했다. 대나무가 가볍고 단단하여 가공하기 쉬워보여도 되려 그 대쪽 같음에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하게 하여 일을 어렵게 하듯,
올곧고 진솔한 비류향의 성품을 가볍게 생각했다가 일을 그르치게 만들 뻔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노사부가 질문을
이어나갔다.
"정천맹주正天盟主의 여식이 용안龍眼인 것과 네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모르면서 가겠다는 것이냐."
"정천맹주 같은 이가 만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은 여아에게 청을 한다면 연유가 있으리라 짐작만 할 뿐입니다."
"용안이 무엇인 줄 아느냐?"
"모릅니다."
"
물줄기 하나 만으로도 세상 흐름을 읽는 신안神眼이요, 손짓 하나만으로도 심상心想을 꿰뚫는 마안魔眼이다. 범인凡人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어찌보면 애비인 정천맹주보다 더 위험한 것일 수도 있어. 맹주조차도 힘든데 용안까지 네 일신一身만으로 감당해야
한다. 돌봐줄 이가 하나도 없어. 사지死地로 가는 길일 수도 있단 말이다. 그럼에도 가고 싶으냐?"
"……예."
"허허……."
고작 반나절 본 이의 부탁에 무엇이 있길래. 노사부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질문을 던졌다.
"정천맹주라는 감투의 향기에 취했느냐?"
"아닙니다."
즉답이었다. 그러나 이는 흉계凶計를 지적당한 소인배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렇기에 뒤이어진 비류향의 말은 얄팍한 변명이 아니었다.
"
소녀가 배운 것은 없으나 일신의 영달을 위해 보은하지 않음은 사람답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물며 권세의 향기가 아무리
달콤하여도 쉬이 상하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아비가 여식을 생각하여 미천한 여아에게 청을 한 것이니 응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아비의 청이라……."
그렇군. 그런 것이었나. 노사부는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친先親이 생각난 게냐."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자
기 딴에는 애써 숨긴다고 했지만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게 뭐 대수라고 숨기는가 싶었지만 본인이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걸 알기에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노사부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양친 잃은 소녀가 무슨 마음으로 그리 하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허나 부모들이 아이를 위해서라며 부탁하면 어지간한 건 다 들어주고, 저잣거리에서 자기 부모 손을 잡고, 품에 안겨
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빛에 아련함이 깃들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정천맹주의 여식 생각이 지극했나보군. 노사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비류향이 이렇게까지 움직일 리가 없었다. 무인武人의, 그곳도 정천맹주 정도 되는 자의
심후함이라면 사욕을 위해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내공이 없는 비류향에게는 그러한 사술邪術은 통하지 않는다.
어쨌든 이만하면 체면치레는 한 셈이다. 그렇기에 노사부는 깊게 한숨을 내쉬는 척 하고는 입을 열었다.
"천향루라 하였느냐."
"예."
"다녀오거라."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언제 돌아오든 상관 없다. 아니,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깊이 고개를 숙이던 비류향의 몸이 멈칫했다. 역시 내키지 않으시는 걸까. 아아, 미련한 향아. 어찌 네 욕심을 우선하여 은인의 심기를 불편케 한단 말이더냐. 그런 생각으로 굳어버린 소녀에게 노사부가 말했다.
"무학도, 깨달음도 없는 여아가 세상에 나가면 천하 험사險事와 다망多忙한 인과因過에 얽메일 것이다. 그 모든 것에 네 스스로 매듭結을 짓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거라."
"……노야의 금언金言, 삼가 받들겠나이다."
이
모자란 여아의 짧은 출가出家에도 금과 같은 참眞된 말씀을 내려주시는구나. 과연 은인이로다. 비류향은 흘러넘치는 감사의 마음으로
바닥에 이마가 닿게 큰절을 올렸다. 심히 부담스러운 광경이었지만 노사부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갈 아이다. 저 성품으로 분명
바깥에서 덕을 쌓아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않을 아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이틑 날 아침, 짐을 꾸린 비류향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노사부와 비류연의 식기를 정리한 후 오두막을 나섰다.
"몸조심하고. 스승님 말씀 잘 듣고. 알겠지?"
"안다니까. 누나는 내가 무슨 앤 줄 알아."
"구순 노모가 칠순 아들을 걱정하는 법이야."
네
가 천하제일인이 되어도 매사에 조심하라 하겠지. 그렇게 말하며 비류향은 동생을 품에 안았다. 어머니보다 더 많이 안긴 누이의 품
안에서 비류연은 머뭇거리다 이내 마찬가지로 누이를 꼭 끌어안았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온 남매다. 짧다고
해도 헤어짐에 아쉬움이 없을 리가 없었다.
"……누나도 몸조심해."
"응."
천천히 동생을 떼어놓은 비류향은 노사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옥체 보전하십시오."
"그래."
그렇게 두 노소老少를 뒤로 한 체 비류향은 떠났다. 그 곁으로 어느 새 말 만한 백호白虎 한 마리가 나타나 소녀를 지키듯 따라 걸었다. 노사부가 나물 캐러 산에 갈 때 데려가라며 붙여준 호위虎衛였다. 그르렁거리며 비류향의 손길에 머리를 부비는 품새는 저잣거리 고양이 같았으나 범인凡人이라면 울음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릴 만한 산왕山王의 기운이 품고 있으니 영물靈物이 틀림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백호는 아미산 인근은 물론 사천땅 전역에 소문만 무성한 백무후白武后의 직속인 팔섬풍八閃風 중 한 마리였다. 어지간한 무림 고수도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강하건만 정작 영물 취급해주는 이는, 정확하게 말해서 그나마 대우해주는 이는 비류향 하나 뿐, 노사부와 비류연에게는 그저 소녀에게 도움이 되는 좀 센 고양이 취급이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비류향의 영물 취급 역시 털 빗어주기와 벌레 떼어주기 같은 수준인지라 큰 차이는 없었지만 이게 의외로 호평인지라 팔섬풍 중에서도 가끔씩 순번(?)을 바꾸기 위해 싸우는 일이 있었다.
어찌되었든 비류연은 무언가에 홀린 것마냥 멍하니 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뒤의 노사부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뺨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자유다! 오오, 이 얼마나 달콤한 울림인가! 자유! 오오, 자유, 오오! 광희난무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비류연이 있었기에 참았다. 그러나 환희에 잠식된 육신은 이미 앞으로 펼쳐질 무릉도원에 반응하여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 노사부는 그러했던 자신의 모습에 후회하게 된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비류향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한탄하게 되지만, 어찌되었든 훗날의 이야기다.
#####
사
천四川 땅은 산세가 험하고 변두리에 있어 발달하지 못했다는 얘기는 되려 무식한 촌부나 하는 말이다. 되려 그 험한 산세와
원지遠地의 이치로 외적으로부터 수많은 학사와 경전을 지키고, 촉한대에는 승상인 제갈공명을 필두로 한 사영四英의 활약으로 법규가
지켜지고 물자가 풍부해지니 낙양과 북경이 부럽지 않은 땅이 바로 사천 땅이다.
그런 사천성에서 천향루는 특히나 이름
높은 기루로 유명하였다. 화려함과 정갈함을 고루 갖춘 객실에 수준 높은 악공樂工과 가무인歌舞人이 상시하며, 향이 강하기로 소문한
사천요리를 누구나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도록 조리하여 온갖 미주味酒와 함께 나오니 한 번이라도 들른 이들의 칭송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천향루 후원의 한 고급 객실은 널리 알려진 천향루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원래는 아기자기한
침상과 호화로운 장식들이 돋보였을 객실은, 태양이 중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침침해서 윤곽만 겨우 잡힐 뿐이었다. 이는 창문을
모조리 닫은 것도 모자라 그 위로 검은 천을 덧씌워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상喪중인 것마냥 칙칙한 분위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
인공적인 어둠 속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그야말로 실낱같은 빛줄기 밖에 없는
공간이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부드럽고 은은하게 빛나는 백옥 같이 하얀 피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만큼 정교한 비율의 이목구비. 그리고 소녀가 있는 어둠과도 같지만, 공허한 그것과는 다르게 신묘한 마력이 담긴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가 매혹적인, 누구라도 보게 된다면 한눈에 마음을 빼앗길 만큼 아름다운 소녀였다.
허나 침상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소녀의 표정은 무미건조했고 눈동자는 생기 없이 흐릿했다.
"……."
초점 없는 눈동자는 창문 너머, 자투리가 살짝 떨어진 검은 천 틈새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란 하늘이었다. 너무나도 맑고 아름다운 하늘. 그러나 닿지 않는, 가질 수 없는 하늘. 그 하늘이 소녀의 마음에 파문을 그렸다.
사람의 마음은 어찌 저러지 못할까.
아
름다운 미색과 더불어 소녀에게는 용안龍眼이라는 능력이 있었다. 상대의 마음 속 단편을 읽어내는 이 능력은 만약 소녀가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나 난세에 천하패업을 도모하는 영웅이었다면, 여인의 몸으로도 능히 삼황오제의 뒤를 잇거나 창업군주로 이름을 떨치게
하는 힘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어린아이가 아무런 단련 없이 있는 그대로의 인심지욕人心之慾을 그대로 접하면
어찌 되겠는가. 그 독기에 쐬일 때마다 소녀는 며칠이고 앓아누워야 했다. 빼어난 미모로 인한 수십 번의 납치 역시 소녀의 심력을
갉아먹어왔다. 게다가 그때마다 접하게 되는 사람들의 심저心底에 들끓는 악독惡毒이란.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소녀는 더더욱 사람을 기피하게 시작했다. 부모님과 함께 도망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소녀의
아버지는 정천맹주라는 직급을 가진 절정의 무인인지라 쉽사리 은거할 수 없는 몸이었다. 맹주의 권세와 일신의 무공 덕분에 딸을
지키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소녀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 마음 놓을 곳은 없는 걸까.
그러한 생각에 소녀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린아, 들어가마."
"……네."
아
버지의 질문에 소녀는 침묵 속에 가라앉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집에 계신 어머니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아버지였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파란 하늘빛과 함께 아버지인 정천맹주 나백천이 들어왔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소녀는 곧
아버지와 함께 들어온 그 시리도록 투명하고 따스한 푸른빛이 하늘빛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화려함이 없는
옷가지였다. 오랜 세월 입어온 듯 헤지고 닳아 천을 덧대거나 수를 놓은 부분도 보였다. 그러나 품새가 단정했고, 덧대거나 수 놓은
솜씨도 상당하여 거슬리지 않았다. 그 나이대 여인이라면 으레 할 장신구도 체면치레할 정도만 겨우 달고 있었으나 그로 인해 더욱더
단정하고 고아한 인상이었다.
천상의 미를 가진 소녀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이는 단순한 외적인 미가 아니었다. 용안으로 보이는 찬란한 심상心相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저 하늘 선녀들이 이러할까. 그런 생각이 소녀의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하
늘빛의 여인은 나백천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다가왔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나백천이 경악했으나 이미 소녀의 눈에는 그 모습이 들어오지 않았다. 한 장丈 정도 거리를 두고 소녀와 여인은 서로를
마주보며 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여인이었다.
"안녕. 난 비류향이야. 너는?"
"……예린…… 나예린羅叡璘이에요……."
오
랜 시간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투명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범인凡人들이었다면 이미
소녀─나예린의 모습과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여인은, 비류향은 그저 생긋 웃을 뿐이었다.
"예쁜 이름이네. 예쁜 얼굴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그
것 뿐이었다. 시기와 질투도 아닌, 집착과 음욕도 아닌 순수한 칭찬. 그 모습에 나예린은 천천히 비류향에게 다가가 그 품에
파고들었다. 결코 손에 닿지 않으리라 여겼던 청천淸天에 닿은 안도감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비류향은 처음 보는 아이가 자신을 붙들고
울기 시작하자 당황하였지만 이내 말없이 나예린을 끌어안아주었다.
한여름 나무 그늘 아래서 맞이하는 산바람의 상쾌함.
한겨울 바람막이 돌담 안에서 쬐는 햇살의 따스함.
청명한 햇살을 머금은 이불에서 느낄 수 있는 포근함.
그것이 나예린이 기억하는 비류향의 첫인상이었다.
#####
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옷자락을 꼭 쥔 손을 떼어내는데 조금 애를 먹기는 했지만, 울다 지쳐 잠이 든 나예린을 침상이 뉘인 후
나백천과 비류향은 천향루 후원 다정茶停으로 향했다. 사천 제일 기루라는 명성에 걸맞는 화려한 후원에는 이미 몇몇 선객들이 있었으나
빈 자리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고맙구나."
향이 피어오르는 차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인 나백천이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비류향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대인大人께 감사를 받겠습니까."
"아니야. 그 아이가 저토록 평온하게 자는 걸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그게 네 덕분인데 어찌 아비로서 감사하지 않겠느냐."
"어린 동생이 있어 달래는 게 익숙할 뿐입니다. 그런 일로 어찌……."
"그런 일조차 불가능했던 아이였거든."
나백천은 찻잔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용안龍眼. 삼라만상을 꿰뚫고 심저心底를 투시透示하는 조물주의 눈. 득의得意한 자가 얻을 수 있는 눈. 그걸 타고난 아이야.. 보지 말아야 할 것도, 봐선 안 될 것도,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모두 보이는 기분이 어떨 것 같으냐."
"……끔찍하겠지요."
"그래. 고행자苦行者도 쉽지 않을 심마心魔를 저 어린 것이, 그것도 자신의 것조차 아닌 심마와 접하며 괴로워해. 그런데 아비라는 자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어. 아무 것도 못하고,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
과
거의 고통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나백천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지금 그 순간만큼은 최고의 권세를 자랑하는 정천맹주도,
지고한 무공을 자랑하는 고수도 아니었다. 자식의 고통에 무력함을 느끼는 한 사람의 아버지일 뿐이었다. 그 마음을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비류향 역시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와병臥病. 부모의 무조건적인 자애慈愛에서 오는
고통에 비하면 보잘 것 없겠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이들이 괴로워하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데에서 오는 무력감이 얼마나
고통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스스로 다가간 이가 바로 너다. 부모를 대하듯 마음을 놓았어. 그러니 어찌 내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고맙다."
그렇게 말하며 나백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비류향 역시 황급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과분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아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감사를 받겠습니까."
"말했잖느냐. 예린이가 안심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야 노부의 마음이 편해지니 받아다오."
"……알겠습니다."
얼마 없는 객인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두 사람은 그제서야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찻잔을 비우고, 다시 채운 찻잔을 반 정도 비웠을 즈음 나백천이 물었다.
"기인께서 얼마나 말미를 주셨느냐."
"만사에 스스로 매듭을 짓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매듭結이라……."
인연에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는 법인데 매듭을 입에 담으셨다. 마치 제천대성에게 부처님 손바닥에서 벗어나보라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불가해한 말에 나백천이 다른 것을 물었다.
"또다른 말씀은 없었느냐."
"'갓 쓴 선비 곁에 사람을 두고 파란 원을 전하노라.' 이러면 아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 그렇군. 허허……."
"아시겠습니까?"
"그래. 잘 알았다. 참으로 대인大人이시구나……."
갓
쓴 선비壬 곁에 사람亻을 두겠다는 것은 임任이다. 파란 원은 청靑이고 이를 글이 아닌 말言로 전하니 청請이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인연에 매듭을 논하시며 임 자와 청 자를 전함은 눈앞의 소녀를 자신에게 부탁하겠다는 뜻이리라. 용안자龍眼者와의
인연은 사람의 힘으로 끊을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스스로 인연을 끊어 이토록 성정이 곧고 맑은 아이를 보내시다니. 나백천은 노사부의
배려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노사부가 자유를 원하며 한 짓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체.
"앞으로 필요한 것이 있거든 언제든지 말하거라."
"예. 허나 말씀만으로도 족합니다."
"어려워하지 말거라. 이는 대인께 보은하기 위함이기도 하니 너무 거절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 뒤로는 조용한 다도의 시간만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주전자와 찻잔이 모두 비워지자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린이를 잘 부탁하마."
"여부가 있겠습니까."
두 사람의 모습에 호기심이 동한 이들이 은근슬쩍 뒤를 따르려 했으나, 슬그머니 눈에 힘을 주어 바라보는 나백천을 보고는 모두 움찔하며 되돌아갔다.
#####
나
예린이 있는 객실로 돌아온 비류향은 고민하다 결심한 듯 창가의 검은 천들을 모조리 떼어냈다. 단단히 고정된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녀의 힘으로도 간단히 떨어졌다. 따스한 노을빛이 창호지를 빛내 방 안이 은은하게 빛났다. 아예 창문을 열어 환기까지 시킬까
했지만 나예린을 떠올린 비류향은 손길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물
론 이는 비류향의 개인적인 감상이었다. 이름 높은 천향루의 객실답게 정돈된 상태는 양호했으나 나예린이 입실하고 며칠 간 아무도
들어가지 못해 청소되지 않은 객실은 먼지투성이였다. 나예린이 누워있는 침상 역시 살짝만 건드려도 먼지가 풀풀 날릴 듯 싶었다.
허름한 오두막을 신선이 기거하는 도원처럼 보일 정도로 부지런히 청소하며 살아온 비류향에게는 끔찍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구세요?"
잔
뜩 겁먹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비류향은 침상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눈을 뜬 나예린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익숙한 어둠이 아닌 빛이 보여서일까. 아니면 낯선 이가 있어서일까.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른다. 허나 한두 시진 전에 보지
않았던가. 무심코 하늘을 보며 시간을 파악하려 했던 비류향은 그제서야 자신이 역광의 위치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법도 하구나. 비류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였다.
"기억하니? 비류향이라고 했는데."
"……아, 아아!"
나
예린은 언제 두려워 했었냐는 듯 침상을 박차고 일어나 비류향에게 달려왔다. 비류향은 갓 태어난 아기 사슴마냥 넘어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다가온 어린 소녀를 붙잡아 주었다. 나예린은 홀린 듯한 눈으로 천천히 손을 뻗어 비류향의 뺨에 닿았다.
"꿈이, 아니었어……."
"꿈이길 바랐니?"
"아뇨……. 꿈이 아니었으면 했어요……. 정말로…… 꿈이 아니었어……."
나
예린이 멍하니 자신을 보는 동안 비류향 역시 천천히 나예린을 살펴보았다. 아름다웠다. 대체 누가 이 소녀가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며
몸단장 한 번 안했다 할 수 있을까. 백옥 같은 피부와 청명한 밤하늘과도 같은 눈동자가 어찌 울다 지쳐 잠들었던 이의 것일 수
있단 말인가. 허나 비류향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야위었구나."
나예린과
마찬가지로, 그보다 더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얼굴의 눈물 자국을 닦아내었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 수더분한 곳들이 눈에
들어왔다. 폭력적일 정도로 압도적인 미색은 그것조차도 미용구가 되게 하였으나 보통 아이었다면 꾀죄죄한 몰골이었으리라. 넘어지지
않게 붙잡은 팔 역시 동년배 아이들보다 가늘었다. 정천맹주의 자식이 먹을 게 없어 굶지는 않았을 테니 마음고생이 심해 쉽사리 먹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안타까움에 마음이 저려왔다. 나예린은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우섯 씻어야지."
"……네."
고
급 객실이라 뜨거운 물이 상시 나오는 욕탕이 따로 구비되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용탕으로 가야했을 텐데 남녀
구분없이 홀리는 나예린의 미모를 생각하면 어불성설이었다. 그렇다고 물지게로 퍼나르기에는 너무 번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렸으리라.
아무래도 나백천이 여식을 위해 일부러 이 방을 잡은 듯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비류향은 나예린을 이끌고 욕탕으로 향했다.
#####
- 목욕장면은 다음 화에(?)
-
나예린이 비류연보다 한 살 더 많았네요. 어찌할까 하다가 이게 정확히 1년인지 어떤지 모르고, 비류연이 아이답게 조금이라도 더
어른이고 싶어해서 열 두 살이라고 하는 걸로 했습니다. 타입문넷 이르실렌 님 감사합니다. 덤으로 이름도 물 이을 연沇이 아니라
이을 연連이군요. 이 놈, 출판물에서 이름을 바꾸다니……. 타입문넷 라이티르 님 감사합니다.
- 비뢰도 옛날에 보고, 군대서 재탕하고 그게 다 1부만이라 헤매고 있습니다. 시간 들여 2부도 봐야 하는데 시간이 영…….
- Crimsoneyes님께는. 지원그림. 언제나. 항상.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네. 정말로요. 하하하하하핳하하하하핳하하하!!!
한자漢字, 오타,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0~2화
살짝 찬바람이 불었다. 그래봤자 몸이 축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때에 맞지 않는 찬바람은 비류연에게 누군가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당신보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당신보다 아름다운 사람이요."
나예린의 물음에 비류연은 선문답 같은 대답을 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며 이맛살을 찌푸렸을 테지만, 나예린은 잠시 고민하더니 답을 내놓았다.
"어머님 생각이군요."
"아쉽네요. 아니에요. 하지만 비슷했어요."
"그럼 누이로군요."
"맞아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두 사람 중 하나에요."
"당신이 무서워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다는 게 신기하군요."
비류연은 나예린의 말에 고개를 으쓱했다. "그럴 만한 사람들이니까요." 그리고는 하늘을 보며 말을 이었다.
"뭐 한쪽은 너무 괴팍해서 그냥 무섭다고 해두는 거고, 누님은, 음. 누님은 말 그대로 무서워요. 앞서 말한 괴팍한 양반도 무서워할 정도니까요."
"엄한 분이신가요?"
"아뇨."
비류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세상천지에 누님만큼 다정한 사람도 없을 걸요."
#####
"누나, 나 머리 아파……."
꾀
병을 부려보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건 노사부의 수련을 빙자한 집안일과 잡무가 너무 힘들고 귀찮아서였다. 기실 노사부의 수련은 비록
미력하게나마 내공이 있다한들 태어난지 이제 열두 해를 겨우 넘긴 사내아이가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칠고 힘들었으니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했다. 이전에도 몇 번 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노사부 앞에서였고, 그러한 행위는 너무나도 쉽게 간파되어 더욱더 힘들어질
뿐이었다.
허나 이번에는 노사부가 잠시 출타하여 누이 밖에 없었고, 날씨도 쾌청하니 도저히 수련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어린 비류연은 최대한 몸을 놀려 몸에 열을 내고─노사부에게 배운 약초학으로 잠시 몸에 열이 더 나게 하는 약초도 몇 개
주워먹었다─, 흙먼지도 약간 들이마셔 콧물과 기침이 나게 한 뒤, 누이에게 가서 최대한 몽롱한 시선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저 잠시
방에 드러누워 쉬다가 저녁 때쯤 되면 다 나았다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이의 반응은 비류연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무슨 일이…… 세상에, 연아 너 왜 그래. 몸이 왜 불덩이야. 아침에는 멀쩡하더니 대체……"
이마는 물론 몸 여기저기 상태를 보던 누이는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뭔가를 고민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되려 비류연이 놀랄 정도였다.
"너 혹시 속 울렁거려?"
"어, 어? 어, 조금……."
"눈앞이 빙빙 돌아? 땅이 막 너한테 달려드는 것 같아?"
"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목은? 목 많이 타? 막 찢어지는 것 같고 그래?"
"응. 목말라."
흙
먼지를 들이켰으니 목이 안 마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비류연의 대답에 누이는 더더욱 얼굴이 새햐애지더니, 입술까지 파르라니 떨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 뭐라 할 새도 없이 누이는 어린 비류연을 방으로 데려가 이불 위에 눕히고는 양동이와 물수건으로 열심히 열을
내리려고 했다. 이쯤 되자 양심에 찔린 비류연은 이게 꾀병이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그 어린 눈으로도 너무나도 절박해보이는 누이의
모습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래서 에둘러 사부가 시킨 장작패기와 빨래를 입에 담았으나,
"그거 전부 다 누나가 할 테니까 그냥 누워있어. 물 많이 마시고. 소금도 좀 물고."
누
이가 당장이라도 비류연이 어찌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절대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양동이 물을 한 번
간 후에, 장작패기와 빨래를 하고 온다며 방을 나섰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자 비류연은 어찌해야될 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허나 약초로 인한 열로 정말로 정신이 몽롱해지며 의식이 흐려지다 이내 잠이 들게 되었다.
잠에서 깼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곁에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린 노사부와 근심걱정 가득한 누이가 있었다. 아, 망했구나. 그
생각이 들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비류연은 최대한 힘든 척하며 누이를 불렀다.
"누나……."
"그래 연아, 누나 여깄어."
누이의 손이 비류연의 손을 잡았다. 비록 스스로 열을 내고자 주워먹은 약초 때문이라고는 하나 열이 나는 몸에 서늘한 누이의 손이 닿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 기분은 곧바로 이어진 노사부의 말에 산산조각났다.
"음, 심각하군."
"노야老爺. 어찌하면 좋습니까."
"탕약을 먹이고, 그 뒤는 지켜봐야지."
"그 말씀은……."
"이 놈이 이겨내길 바라야지."
노
사부의 말에 누이는 말없이 비류연의 손을 꼭 쥐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비류연은 그렇게 누이가 보지 못하는 동안 노사부가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망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
"안 먹을래……."
"안돼. 어서 먹어. 투정 부리지 말고."
누
이는 평소와는 달리 엄한 말투로 약사발을 비류연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잠시 실랑이를 벌였지만 결국 비류연은 약사발을 들이켜야
했다. 누이의 등 뒤에서 눈을 번뜩이는 노사부의 모습을 본 순간 모든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류연은 정말로 이틀 동안 앓아누워야 했다.
온
몸의 뼈란 뼈는 전부 송곳으로 쑤시고 얼음물을 들이붓는 것처럼 시렸고, 살이란 살은 당장이라도 형체를 잃고 뭉개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머리는 쉼없이 망치로 뒷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았고,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몸 안의 공력은 운기조식이나 혈로와는 관계없이 제멋대로 온 몸을 완전히 헤집어놓았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비류연은 신음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렇게 이틀째 밤이 되었을 때에는, 처음 꾀병을 부릴 때 정도로 미약한 열만 남은
상태가 되어있었다. 동시에 청량한 개운함이 느껴졌지만, 이틀 간 앓으면서 체력이 사라졌는지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나른했다. 누군가가 손을 잡는 걸 느낀 건 그때였다.
"연아."
나지막한 목소리. 세상천지에 하나 밖에 남지 않은 혈육의 목소리. 언제나 다정하고 따스한 목소리. 나의 누이의 목소리.
"연아."
물수건을 갈면서 서늘해진 손길이 기분 좋았다. 똑같이 잡아주고 싶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서 나아라, 연아. 어서 나아라. 제발. 제발……. ……제발……."
잦아드는 누이의 목소리에 비류연은 서서히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누이의 얼굴 윤곽이, 그리고 투명하게 빛나는 눈물이── 눈물?
"나 혼자 두고 가지 말아줘……. 너마저도 가면, 난, 나는 어쩌니……. 나 홀로 두고 가지 마라 연아……."
행여나 동생이 깰까봐 숨죽여가며 우는 누이의 모습에 비류연은 등줄기에 번개가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어
릴 적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일을 관장하던 누이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던 누이였다. 돌림병으로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사람들 모두가 죽어가면서도 결코 울지 않던 누이였다. 해실해실 웃으며 태양처럼 밝게 빛나던 누이였다. 그런 누이가 울고
있었다. 그것도 마치 죄인인양 숨죽여가며. 어린 동생에게 죽지 말아달라며 울고 있었다.
그제서야 누이가 언제나 자기
앞에서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는 걸 깨달았다. 굉장한 충격이었다. 천년거목마냥 든든했던 누이가 사실은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앙상한 나뭇가지였다. 그걸 깨닫자 비류연은 지금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누이를 안아주고 싶었다. 자신은 괜찮다고.
꾀병으로 놀래켜서 미안하다고. 그러나 이틀 동안 앓았던 몸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기껏해야 신음소리를 낼
뿐이었는데 이는 되려 누이가 울음을 멈추고 간병에 힘쓰게 하는 역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미안, 누나. 미안해. 다시는 꾀병 안 부릴게.
그렇게 다짐하며 비류연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곁에는 누이 대신 노사부가 있었다.
"영약 먹고 앓다가 일어나니 기분이 어떠냐."
"누나는요?"
"욘석이, 사부 묻는 말에 대답도 안하고. 옆에 봐라."
노사부의 말에 비류연은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누이가 잠들어 있었다.
"사흘 간 잠도 안 자고 네놈 뒤치닥꺼리하다가, 아침에 너 괜찮아졌다고 하니 혼절해서 눕혀놨다."
"……."
"멍청한 놈. 세상에 사기쳐도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는데, 나랑 네 누이는 사기치면 안 될 사람이야. 왜 그런지 알겠냐?"
"……네."
"하여튼. 차라리 다리를 삐었다고 하지 그랬냐. 하필이면 돌림병 증상 비슷하게 꾀병을 부려서 괜히 네 누이 걱정하게 만들어."
비류연은 그제서야 증상을 물어보던 누이가 왜 그렇게 당황했었는지를 깨달았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돌림병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잃은 사람 앞에서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혈육이 비슷한 증상으로 아프다 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그렇게 잠든 누이는 그 다음날에서야 간신히 일어났다. 노사부는 비류연에게 누이는 사흘 간 잠 안자서 몸이 축난 것보다 네가 앓아서 마음의 충격이 더 심했던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 일이 있고난 후로, 비류연은 적어도 누이 앞에서만큼은 절대 꾀병을 부리지 않았다.
#####
"좋은 분이시군요."
"네."
비류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나예린은 비류연이 그토록 해맑게 웃는 걸 보며 자신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뵙고 싶네요."
"그렇잖아도 좀 있으면 만날 수 있을 거에요."
"……네?"
갑작스러운 비류연의 말에 나예린은 무슨 소리냐는 듯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이래저래 일이 좀 있었는데, 괴팍한 노인네가 누님 세상 구경 좀 시켜주라며 보냈다고 했거든요. 중양표국 사람들 딸려보냈다고 했는데, 내일쯤이면 도착할 거에요."
꼭 소개시켜 줄게요. 그렇게 말하며 싱글벙글 웃는 비류연의 모습에 나예린은 얼떨결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 밤, 정말로 비류연의 누이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민하다 잠이 들었다.
#####
비류연 이놈 한자로 뭐라 쓰는지 아시는 분 부디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누이 설정은 대충 비류연 이놈이 여장한 모습에서 미인 등급과 키가 한 단계 낮은 모습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름은 비류향響.
성
격은 착해빠져서 노사부도 어려워하는 상대로, "배운 것 없고 힘 없는 여식이지만, 세상천지 갈 곳 없고 기댈 곳 없는 어린 오누이
구해주신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연이가 사내로서 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도록 무공까지 하사해주셨으니, 평생 은혜
갚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하며 노사부가 양심에 찔려 부담을 느낄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비류연이 가출했을 때, 새하얗게 변해서 목숨으로 갚겠다고 하는 걸 노사부가 "죽어도 못 갚을 은혜를 죽어서 갚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 라고 해서 간신히 말릴 정도입니다.
전염병으로 아는 사람들이 죽는 걸 봐서 그게 트라우마인지라 누가 아프다 싶으면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비류연과 노사부의 브레이크 역할을 하며 이 두 사람을 갱생하는 느낌으로 써보고 싶은데, 언제나 그렇듯 언제 쓰게될런 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덧글 한 100개 달리면 모를까. ......어, 잠깐, 옛날에 이런 거 했더니 진짜로 100개 달렸던 것 같은데......
비뢰도 - 하늘과도 같은 그대 1.
"하나 더 파자."
"왜?"
"아버지 무덤에 물 안 차게 물 빠질 구멍 만들어 놔야지."
영
리하기는 했지만 세상물정을 잘 몰랐던 나는 누나가 시키는데로 아버지 무덤 옆에 좀 더 작고 크기로 약간 더 깊게 땅을 팠다. 사실
그냥 파라고 했어도 팠을 거다. 누나 말 들어서 나빴던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에 누나 말 잘 들으라고
하셨으니까.
누나도 함께 팠지만 흙먼지가 너무 심해 계속 기침을 해서 그리 많이 파지는 못했다. 한 삽 뜨고
재채기하고, 한 삽 뜨고 기침하고. 우리 남매는 그렇게 고생하며 간신히 무덤과 물 빠질 자리를 팠다. 열세 살 여자애와 열 살
남자애가 판 것 치고는 번듯하고 깊게 잘 파진 땅이었다. 문득 옆에 있는 어머니 무덤을 보고 떠올라 물었다.
"엄마 무덤 옆에는 물구멍이 없는데?"
"옛날에 있었는데 시간 지나면 물길이 생겨서 필요없어져서 메꾼 거야."
"그렇구나."
그렇게 대답한 누나는 한동안 그 아버지 무덤자리 옆 구멍을 보다가 말했다.
"연아."
"왜?"
"만약에……."
"만약에 뭐?"
"……아냐. 어서 가서 밥 먹자."
"응."
밥
이라고 해봤자 나물죽이었다. 농사는 흉년은 아니었지만 그리 잘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돌림병으로 마을 사람들이 거의 다
죽어서 먹을 걸 구할 곳도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돈 들어올 구멍이 없어졌으니 남아있는 것도 곧 바닥날 게 뻔했다. 이제
어쩌나 하고 있는데 누나가 내 밥그릇에 자기 죽을 부었다.
"더 먹어."
"누나는?"
"밥맛이 없네."
어서 먹어. 누나는 잔기침을 하며 그리 말했다. 너댓 숟갈이나 떴을까 하는 양이었기에 비어있던 내 그릇은 거의 가득 차다시피 했다. 나는 배가 고팠기에 망설임없이 숟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향響아, 연連아, 집에 있느냐."
"예-."
운
좋게 돌림병에 걸리지 않은 마을 아저씨의 부름에 누나가 대답하며 방을 나갔다. 따라나가지는 않았지만, 들려오는 얘기에 내일
아버지 관을 묻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괜시리 밥맛이 없어졌다. 누나가 왜 밥맛이 없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왜 안 먹고 있어."
방
에 들어온 누나는 내 밥그릇을 보더니 그리 물었다. 밥맛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내는 언제 무슨 일을 하게될 지 모르니 늘
배가 든든해야 한다고 누나가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 안 계시니 네가 누나 지켜줘야지, 하고 덧붙였다. 맞는 말이라는 생각에 남은
죽을 다 먹었다.
누나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잠자리를 준비했다. 무심코 아버지 자리를 펴다가 돌아가셨다는 걸 깨닫고
다시 접었다. 그 빈 자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방으로 돌아온 누나는 자기 자리에 앉아 잠시 아버지 자리를 바라보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누나 이불 속으로, 누나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누나는 말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지금껏 살면서 제일 따듯하고 포근한 잠자리였다.
#####
잠든 동생 몰래 방을 나와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제서야 억눌렀던 기침을 내뱉었다.
"콜록, 콜록, 크흠, 콜록……."
쉽
사리 멎지 않는, 애초에 끊이지 않는 기침을 애써 억눌러 가라앉히며 비류향飛流響은 오늘이 며칠인지를 생각했다. 아버지 관을 묻은 지
오늘로 나흘 째. 아니, 닷새 째인가? 집안 살림 중 돈 될 만한 것들은 처분했고, 마을 정리를 하면서 일가친척 다 죽어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나온 돈도 모아두었다.
마음 같아서는 버리고 싶은, 썩 내키는 돈이 아니었지만 함께 마을 정리를 하던
어른들이 억지로 떠넘기고 갔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에는 쉽사리 만져보지 못한 큰돈이었지만, 그네들이 챙겨간 것에 비하면
푼돈이었다. 찝찝한 돈이니 적게나마 애들에게 쥐어주며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심산이리라.
비류향은 그 돈을 몰래 버릴까 하다가 가지고 있기로 했다. 동생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자기 혼자였다면 안 받았겠지만 딸린 식구가 있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콜록, 커흑……. 큽……."
선
명하게 붉은 핏물이 기침과 함께 튀어나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뿜던 것과 비슷했다. 그러고나서 이틀 뒤에 돌아가셨으니
자기도 비슷하리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오늘이 사흘 째가 맞나? 엿새였나? 시간 감각도 점점 희미해져 가는 와중에 해 뜨고 지는
걸로 간신히 밤낮만 구분할 수 있었다. 먹은 것도 없건만 헛구역질이 올라오고 숨쉬기가 괴로웠다. 아버지도 이러셨을까.
"……."
죽
는 게 무섭지 않을 리가 있을까. 이제 열셋 된 아이가 뭘 알까 싶겟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 살림이며
아버지와 동생 뒷바라지를 하며 살아온 소녀의 정신연령은 더 높았다. 죽음을 아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랬기에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게
있었다.
비류연飛流連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동생. 이 세상에 하나 남은 혈육. 나 죽으면 너는 어떻게
될까. 이제 열 살인 아이가 밥은 챙겨먹을 수 있을까. 이 거친 세상 모진 풍파 헤쳐나갈 수 있을까. 네가 장성해 일가를 이루는
것까지는 보고 싶은데.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꿈이라는 것은 비류향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오늘내일 하는
몸뚱이로 10년 20년 뒤를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 그렇기에 고개를 휘휘 젓고는 품 안에서 꺼낸 무명천으로 입가를 닦았다.
몇 번이나 빨았지만 수 차례 각혈을 닦아낸 천에는 핏자국이 가득했다.
입가의 피를 닦아내자 새로운 핏자국이 생긴다. 그 모습을 보며 비류향은 결심했다. 내일, 아니 모레 보내자. 없는 살림이건만 아이 하나 보내는데 챙겨야 할 게 왜 이리 많을까.
동
생 비류연을 시장이 서는 큰 마을로 보내기로 결심한 건, 아버지와 자신이 돌림병에 걸린 걸 안 순간부터였다. 아버지가 목각을 팔던
가게에 모아둔 돈과 편지를 함께 보내기로 했다. 가게 주인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고 돈이 부족해도 류연은 손재주가 있어 가게에
도움이 될 테니 내치지 않을 것이다.
열 살 꼬마 혼자 보내기에는 멀고 험한 길이다. 비류연이 제법 빨리 걷는 축에 속하지만 그래도 아침부터 바지런히 걸어야 닿을 거리다. 도적도 걱정이지만 돌림병 도는 동네라는 소문이 나서 도적은 얼씬도 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그
러나 뭐라고 해야 아무 걱정 없이 갈까. 총명한 아이다. 어설프게 거짓말하면 금새 눈치채고 안 가려고 할 것이다. 일부러 모질게
대해야 할까. 나 혼자 먹고 살기도 힘든데 너까지 붙어있어 못 살겠다. 이 집구석 나가 알아서 살아라. 다시는 이 집 문턱 넘을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며 내쫓아야 할까.
한참 고민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천애고아가 될 아이에게 마지막에
모질게 대하면 그 어린 것이 얼마나 가슴 아파할까. 웃으며 보내도 모자랄 판에. 그럼 어떡해야 할까. 어찌하면 얼른 이 못난 누나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린 소녀가 하기에는 너무 힘든 고민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푸흡, 큭, 쿨럭……. 콜록……. 하아……."
또 한 번 피섞인 기침을 내뱉고, 한참 동안 숨을 고른 후에야 비류향은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
#####
아
버지 관을 묻고 엿새 쯤 됐나. 집안에는 남아있는 게 없었다. 정확하게는 마을 전체에 남아있는 게 없다고 하는 게 옳았다. 일가가
떼죽음 당한 집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 살아남은 사람들이 시체만 간신히 염하고, 남은 것들은 그나마 값어치 하는 것들만 모아놓고
죄다 불태웠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한동안 마을에는 탄내가 진동했다.
"나 아버지 무덤에 갔다올게."
"그래……. 후우, 조심하고."
누나는 가면 갈수록 파리해져갔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괜찮냐고 물어보면 조금 힘든데 괜찮다며 해실해실 웃는다. 그때만큼은 건강해보인다.
그
래서 괜찮다고 생각하며, 얼마 없는 어른들과 함께 마을 정리가 얼추 끝나고 시간이 남게 되자, 나는 아버지 무덤으로 갔다. 돈이
없어 휑한 무덤 앞에 조각이라도 깎아놓기 위해서였다. 장례가 끝난 그날 바로 하려고 했지만 영 시간이 나질 않았다.
"아버지, 우리 이제 어찌될까요?"
무
덤 앞에서 통나무를 깎고 있자니 요 며칠 간 일을 떠올리자니 답답해져서 괜시리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마을 탈탈 털고 불태우고,
음, 사실이기는 하지만 어감이 썩 안 좋군. 여튼 그러고 마을에 남은 사람은 열댓 명이 될까말까 한데 과연 어찌되려나. 솔직히
다른 사람들이야 알 바 아니고 누나랑 나만 잘 살면 되는데.
아버지 조각을 마치고, 허전한 느낌이 들어 어머니 조각도
했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비석을 세워야지. 내 살 길도 막막하건만 조각을 하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부모님
조각을 마치고 나니 점심 때 언저리였다. 집에 가서 밥이나 먹자.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보니 왠 노인이 서 있었다. 돌림병 돈다고
소문난 마을에 뭐하러 온 영감님인가 고민하고 있자니 그 노인이 물었다.
"이 무덤 네가 만들었느냐?"
"뭐, 누나랑 같이 만들었는데, 거의 제가 다 만들었죠."
그러자 노인은 흐음, 하고 고민하는가 싶더니 또 물었다.
"거기 조각들도 너랑 네 누이 솜씨고?"
"아뇨, 이건 전부 제가 만들었죠."
그
러자 노인은 찡그린 얼굴로 잠시 생각하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며 내게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모르는 사람 함부로 따라가지
말라는 누나 말이 떠올라서 따라갈 생각은 없었지만, 심심해서 당신을 따라가면 뭐가 생기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노인은 허허허 웃더니
천하제일의 무공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끌리기는 했다. 무림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고, 어차피 아무 것도 없는 마당에
따라가서 손해는 안 볼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갈 생각은 없었다.
"안 갈래요."
"왜?"
"누나 혼자 놔두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나 혼자였다면 따라갔을 테지만 누나가 있으니까.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누나 놔두고 혼자 어딜 간단 말인가? 이제 누나 지킬 사람은 나 밖에 없는데.
"그럼 네 누이랑 같이 간다면?"
"그럼 갈 수도 있죠."
"허허, 그럼 네 누이한테 말해보자꾸나."
노
인이라고는 해도 수상쩍은 인물을 집으로 안내하기가 영 껄끄러웠지만 어차피 털어봤자 아무 것도 없는 집구석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앞장 서서 걸었다. 나름 머리를 굴려 빙빙 돌아 길을 헤매도록 하면 어떨까 싶었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일가 전체가 떼죽음 당해
집까지 태워 휑한 마을인지라 돌 곳도 없었다.
"저기가 네 집이냐?"
"네."
예전에는 중간에 있던
다른 집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우리 집이 보였다. 중간에 있던 집이 두 채 있었는데 하나는 일가가 몰살당해서 불태웠고, 또
하나는 스물 조금 넘은 형 빼고 다 죽었는데 그 형이 스스로 자기 집을 불태웠다. 뭐, 나 같았어도 누나까지 죽었었으면 집
태워버렸을 것 같기는 하다.
"……너 누이랑 같이 산다고 했었지?"
"그랬죠."
"그렇구나. 그런데 네 누이는 건강하냐?"
"요새 밥도 잘 안 먹고, 좀 힘들어 보이기는 하는데 건강해요. 맨날 여기저기 바지런히 돌아다니고 그러면서도 집안일 다 하고."
"흐음……."
"왜요?"
"네 누이, 아니 가서 일단 보자꾸나."
노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누나~ 나 왔어~"
집
문턱을 넘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나갔나? 이 시간대면 밥 짓고 있을 텐데. 나물죽이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부엌에 연기도 안 올라온다. 진짜 나갔나? 그렇다면 마루에 뭔가 먹거리라도 놔뒀을 텐데 그것도 없다. 대체 어디를 간 거야.
"누나~ 어딨어~?"
방 안을 둘러보고 나오니 노인이 부엌문 앞에 서 있었다. 방 안에도 없으니 거기 있나 해서 누나를 부르며 들어가려니,
"누나 거기──"
"들어오지마!"
난생 처음 들어보는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날카로우면서, 동시에 찐득한 느낌이었다. 이상하고 싫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심한 기침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같은 잔기침이 아니라 좀 더 크고, 질척하며 소름끼쳤다.
"누나……?"
"쿨럭, 컥, 하아……. 연아……. 하아……. 들으륽……. 들어오지, 마, 쿨럭……."
아
궁이 불조차 없는 부엌 한 켠 그늘 속에 누나가 주저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수록 누나의 모습이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옷자락 앞섬 여기저기 피어난 붉은 자국. 백짓장처럼 새하얀 손과 얼굴. 그리고 그런 손과 얼굴에 어설픈 화가가
놀린 붓질마냥 그려진 선홍빛 흔적. 처음 보는 광경─── 아니, 아니다. 아주 최근에 이와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일주일
전쯤에. 그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
비류향이 눈을 떴을 때 가장 처음
보인 것은 늘 보던 집 천장이었다. 기이한 느낌이었다. 신선 같은 노인에게 동생을 부탁하고나서, 죽기 전에 동생 얼굴 본 게
다행이라는 생각과, 아버지도 모자라 누나까지 죽는 걸 보게 된 동생에게 미안한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으로 눈을 감은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다시는 못 보리라 생각했던 광경을 보니 정말 기이했다.
무엇보다도 몸이 가벼웠다. 몇 주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기침은 물론, 두통과 어지럼증까지 없어졌다. 온몸이 나른했지만 머리는 맑고 상쾌했다. 숨이 이토록 편안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대체 어찌된 영문이란 말인가.
"정신이 들었느냐?"
"……누구십니까."
새하얀 수염이 마치 신선과도 같은 노인이 곁에 앉아있었다. 노인은 비류향의 물음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허. 누구긴 누구야, 네 목숨 반 구한 생명의 은인이지."
"……! 은인께 결례를,"
"아아, 괜찮아, 괜찮아. 누워 있어라. 아직 회복이 덜 되었어.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지 않느냐."
노인은 비류향의 어깨를 슬쩍 누르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는 비류향을 막았다. 그말 그대로였다. 고작 몸을 일으키려 했을 뿐인데 쌀 가마니 하나를 옮긴 것마냥 숨이 가쁘고 온몸이 피곤했다.
"……어찌 이런 은혜를 베푸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잠시 후 몸 상태가 괜찮아지자 비류향이 물었다. 그 말을 어찌 여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노인은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자가 울고불고하며 누이를 살려달라고 하고, 내가 살릴 수 있었으니 살렸지."
"제자, 라 하심은……. 학사분이십니까?"
"그 샌님들보다 좀 더 활동적인 사람이다."
"……강호 분이시군요……."
노인의 눈썹이 씰룩였다. 고작 열 몇 살짜리 여아가 말 몇 마디에 자신이 강호인이라는 걸 알아차릴 줄이야. 영특한 아이를 보면 즐겁다고 했던가. 지금 노인의 심정이 그러했다.
"그래."
"연이를……, 무림인으로 키우려 하십니까?"
"그놈이 무림에 나갈지 어떨지는 그놈 마음이니 모르겠다만, 일단 무공을 가르치기는 할 게다. 그러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림인이 아니라 무인武人으로 키우는 게지."
"……연이가 하겠다고 한 겁니까?"
"그래."
"……."
정
확하게 말하자면, 침구나 탕약 없이 기공만으로 누이를 살려내는 노인의 모습에 비류연이 자신도 무공을 배우면 그리 할 수 있느냐
하기에 가능하다고 대답했기에 무공을 배우기로 한 것이었지만, 노인은 굳이 그 사실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나 비류향은 침묵했다.
그리고 노인은 어린 소녀의 침묵이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분명 무언가 있었음을 깨달았다는 것에 대한 표시임을 알아차렸다.
영특하다 영특해.
" 마음에 안 드느냐?"
"아닙니다. 사내아이가 선택한 길을 어찌, 계집아이가 왈가왈부 하겠습니까. 그리고, 은인께서 거두어 주신다는데, 감사를 못 올릴 망정 어찌 토를 달겠습니까."
"허허, 참. 얼굴에 금칠하는 재주가 있는 아이구만."
노인의 말에 비류향은 "송구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어른스러운 아이의 모습에 노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 쉬거라. 다 낫거든 여길 떠나 제법 멀리 가야할 터이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동생 무공 수련을 위해 산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 말에 비류향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연이만, 데려가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네가 다 나으면 그러려고 했는데, 일이 여의치 않게 되었어."
"……?"
노인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병 때문에 망가진 폐로 무리하게 멀쩡한 척 호흡을 하고 기침을 억누르는데 기맥氣脈이 버틸 리가 있나."
"그건,"
덜
컥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동생에게는 철저히 숨겼지만 다른 이들에게 숨길 생각은 없었다고는 해도 나름 빈틈 없이 숨겼다고
생각한 것을 본 지 얼마 되지 않는 노인에게 들킨 꼴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에 관해 굳이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
안다. 동생한테 병든 모습 보이기 싫어서 그랬겠지. 허나 그때문에 기맥이 망가지고, 기맥이 망가지니 혈도가 틀어지고, 혈도가
틀어지니 오장육부가 썩어들어가고, 오장육부가 뒤틀어지니 상중하 삼단전이 모두 깨져 진원진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화타가 살아돌아와도
못 살 몸이었어."
"……그런데 어찌……."
"어찌 살기는. 다 내 하늘과도 같은 내공으로 살렸지. 상한 피와 살을 내공으로 불태우고, 재생력을 촉진시켜 다시 생살이 돋게 하고, 망가진 기맥과 틀어진 혈도를 바로잡고! 깨진 삼단전을 다시 되살리고! 진원진기를 불어넣고!"
다
른 강호인들이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봤다면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말이야 내공으로 병환을 불사르고
삼단전을 고치고 진원진기를 불어넣는다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당장 건장한 무인의 운기조식을 돕는 것조차도 매우 위험한
행동이거늘, 무와는 일절 관련이 없는 아이의 몸에, 그것도 완전히 죽기 직전까지 망가진 아이의 몸에 내공을 불어넣어 몸을
치료한다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노인은 실제로 그 일을 해냈다.
"그래서, 네 진원진기가 돌아올 때까지 살펴야 하니 같이 간다는 게다."
"……감사합니다……."
겨우 내뱉은 한 마디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노인이 이를 모를 리 없었지만,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럴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너무 감사할 것 없다. 완전히 산 게 아니니."
"경청하겠습니다."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새어나간 진원진기는 내 천천히 회복시킬 테니 걱정이 없다. 되살렸다 한들 한 번 깨지고 뒤틀린 삼단전에 내공이 쌓이지 않는 거야, 어차피 네가 무학武學에 뜻을 두지 않았으니 개의치 않아도 된다. 허나……."
무
엇이 그리 걸리는 것일까. 세상 그 어떤 것도 거리낄 게 없어 보이는 노인이 망설이는 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본인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비류향은 묵묵히 노인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병환을 앓고 손가락 까딱할 힘 하나 없건만 아이 같지 않은 담담한
눈빛에 노인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인으로서의 삶은 힘들 것이다."
대답도, 반응도 없었다.
허나 노인은 비류향이 결코 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자기는 아이를 낳지 않으리라 결심하는 여인들도
있다지만 스스로 그리 선택하는 것과 하고자해도 못하게 되는 건 다르다. 이 아이는 어찌 반응할까. 호기심히 동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비류향의 대답은 예상 외이면서도, 예상했던 것이기도 했다.
"……살아서……."
어린 손이 노인의 손끝에 닿았다. 파르르 떨면서도 애써 손을 쥐었다. 감사를 전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아이의 손길이었다.
"살아서, 연이 장성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
새
벽에 눈을 뜨니 부엌에서 가마솥 물이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범인들은 듣지 못할 소리이나 심후한 내공을 갖춘
노사부에게는 생생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비류향이리라. 노사부는 그리 생각하며 방문을 나섰다. 문 옆에는 이미 미지근한 세숫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이 놓여있었다.
"끄응……."
쌓인 눈 위로 또다시 눈이 쌓이는 산 속의 겨울 날씨는
매섭다. 그런 산 속 오두막에서 세수하기 딱 좋은 미지근한 온도의 물을 적절한 때에 준비해두는 건 어지간한 정성이 아니고서는 못할
일이다. 심지어 뜨거운 물은 되려 더 빨리 식어 얼음이 생기니 온도 조절이 매우 중요한데, 그런 어지간하지 않은 정성을 여태껏
하루도 쉬지 않고 들이는 이가 있었으니…….
잠시 고민하던 노사부는 결국 세안을 했다. 이 정성을 어찌 무시한단 말인가. 씻은 물을 저 멀리 마당 너머로 훌쩍 쏟아낸 노사부는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부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
엌은 매우 깔끔했다. 4년 전까지만 해도 허름한 오두막 부엌 수준이었으나 노사부가 매일 그곳을 들락날락하는 비류향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겨 새로 짓게 된 것이었다. 물론 노동력을 담당한 것은 비류연 혼자였다. 소년은 당연히 처음 계획을 들었을 때는
맹반대를 했다. 노동력을 발휘할 인력이 자신 밖에 없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상당한 액수의 돈을 들여 으리으리한 부엌을
만들겠다는 노사부의 계획 때문이었다. 멀쩡한 부엌 뭣하러 큰돈 들여 새로 짓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네 누이가
맨날 저기 들락날락 하는데 불쌍하지도 않느냐!" 라는 스승의 일갈과, 새로 부엌 하려는데 어떠냐는 질문에 되려 "누나 신경쓰지
말고 네 무공 수련 열심히 하렴." 이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누이에게 자극을 받은 비류연이 단숨에 부엌을 신축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험준한 아미산을 거침없이 뒤져─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노사부 역시 숲을 뒤졌다─ 나무를 짜맞추어 견고한 대들보를
올리고 황토로 벽을 쌓고, 매끄럽게 갈아낸 돌로 아궁이를 세 개 짓고 그 위에 튼튼한 무쇠 가마솥을 얹었다. 남쪽으로는 큰 창을
내고 북쪽에는 작은 창을 달았다. 그 창은 둘 다 위아래로 열 수 있게 하였으며 이중창으로 만들었기에, 여름에는 시원하게 통풍을
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난방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렇게 만들고 나니 방 두 개 짜리 오두막에서 부엌이 제일 컸다.
가
마솥 하나는 방 쪽 벽에 붙은 둘과는 반대쪽에 있었는데 형태가 조금 특이하였다. 그 옆에 목욕탕으로 가는 작은 문이 있었다.
취사와 목욕을 위해 따로 배치한 것이었다. 이 목욕탕은 철저히 비류향을 위한 것으로, 부엌을 개축하던 당시 비류연이 푹푹 찌는
무더위에 땀을 닦다가 문득 떠올린 의문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사부님!"
"귀 안 먹었다. 작게 얘기해도 돼."
"누나는 어떻게 해도 내공 못 얻잖습니까?"
"그렇다고 몇 번이나 말했느냐."
"그럼 겨울에 사부님이나 저처럼 내공으로 몸을 청결케 하지 못하겠지요?"
"그래서 지난 겨울에 네가 열심히 향이 씻을 물 끓일 장작 만들었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부엌 옆에 목욕탕을 만들까 합니다."
"목욕탕?"
"네."
스
승과 제자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끓인 물을 손쉽게 소나무 욕조로 부을 수 있는
손잡이 달린 기울임식 솥과 수도水道, 미끄러지지 않을 정도면서도 맨살로 문질러도 살이 다치지 않는 돌바닥이 깔린 목욕탕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본인은 한사코 거절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사연 있는 부엌 안 아궁이 앞에 한 소녀가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그 모습에 노사부가 헛기침을 했다.
"어흠."
그 소리에 소녀의 눈이 뜨였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졸린 기색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전혀 보이지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는 정중하게 노사부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기침하셨습니까."
비류향.
5
년 전 동생과 함께 노사부의 거처로 온 소녀였다. 아니, 이제는 꽃다운 열 여덟의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앞치마를 두른 모습은 뭇
사내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정도로 단아하고 아름다웠지만, 노사부는 그것보다 불편함과 미안함(!)을 느꼈다.
"향아, 그냥 찬 물 놔두래도. 아니, 겨울에는 세숫물 안 떠놔도 된다 하지 않았느냐. 내 지난 번에도 말했는데. 수고를 들이지 말거라."
"어찌 노야老爺께 그러한 결례를 범하겠습니까. 그리고 노야께서도 겨울일수록 더 잘 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그건 이 집에서 너만 해당되는 얘기다. 나나 연이는 내공으로 안 씻어도 청결을 유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서 수련을 하는 게야."
"그럼 하릴없는 소녀가 보은키 위해 하는 일이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십시오."
정
내키지 않으시면 마당에 부으셔도 좋습니다. 비류향은 그리 대답하였고 노사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끄응……." 아이고 맙소사. 셀
수도 없을 만큼 반복된 논쟁은 언제나 노사부의 패배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노사부는 5년 전 병상에서 일어난 소녀가 정중히 절을
올리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배운 것 없고 힘 없는 여식이지만, 세상천지 갈 곳 없고 기댈 곳 없는 어린 오누이
구해주신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연이가 사내로서 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도록 무공까지 하사해주셨으니 그 은혜,
평생토록 갚겠습니다. 』
그때 노사부는 알지 못했다. 일생 동안 수발을 들겠다는 이 소녀의 말이 얼마나 진중했는지를. 그리고 5년 동안 그 말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비
류향은 무서울 정도의 부지런했다. 이는 병의 후유증이기도 했다. 상중하 삼단전이 모두 망가져 오래 잠들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침상에 누워 제대로 자는 건 자시子時에서 축시丑時까지 두 시진時辰 남짓이고 부족한 잠은 모두 쪽잠으로 때우고 있었다. 시장서
장보다 잠시 쉬다가 자고, 목욕하다가 자고, 빨래 널고 마루에 앉아 자고, 아궁이 불 보다가도 자고. 그러면서도 귀신 같이 일어나
제 할 일을 다하니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눈만 붙이고 있을 뿐 제정신으로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부지런함을 바탕으로 비류향은 요 5년간, 말 그대로 '극진히' 노사부의 수발을 들었다. 한겨울에 세안용 미온수를 준비하는 건
약과에 불과했다. 노사부가 생활의 편리를 위해 가르친 것이 있다고는 해도, 허름한 오두막이 조촐하지만 단정하고 깔끔한 정자와 같은
공간이 되고, 식탁에 오르는 요리의 다양함과 풍성함이 이전과는 비교를 할 수 없게 된 것은 모두 비류향의 손길을 거친 이후
였다. 술안주거리라도 할라치면 어쩌면 그렇게 딱 먹고 싶은 걸 그날 딱 마시고 싶은 술과 함께 준비하는지 몰랐다. 의복은 항상
깔끔하게 다려져 있었고, 조금이라도 닳거나 해지면 귀신 같이 새 것으로 바꾸거나 천을 덧댔는데, 그 솜씨는 마치 옷이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삶의 질이 변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처음에는 좋았다. 노사부는
타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때때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무한히 쏟아지는 비류향의 호의가 한없이
계속되자 노사부는 조금씩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만두라고 해도 생명의 은혜를 갚는다며 달라붙는 데에는 아무리 천하의
노사부라고 하더라도 장사가 없었다. 어린 소녀가 존경이 가득한 눈빛으로 하는 일을, 그것도 아무런 흠집 없이 하는 일에 무슨
트집을 잡는단 말인가.
그나마 식소사번의 예를 들어 침소사번이라 말하고, 정녕 오래도록 은혜를 갚고 싶다면 네 목숨을
중히 여겨야 하니 적절히 휴식을 취하며 일을 하라고, 까놓고 말해서 땡땡이 좀 치고 빈둥거리라고 애둘러 말해서야 이 정도다.
그전에는 정말 궁인宮人들 저리가라 할 정도로 따라다녔다. 그 와중에 자기 동생까지 챙기니 그 정성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아침 수련을 다녀오마. 그리고─"
"오시는 데로 식사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두겠습니다."
"─그래."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비류향의 모습에 노사부는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모를 표정으로 부엌을 나갔다. 천하의 노사부가 계집아이 하나에 쩔쩔매게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잠시 후, 비류연 역시 노사부와 비슷한 과정─세안용 미온수와 수건─을 거쳐 부엌에 들어왔다.
"아, 누나! 이런 거 안 해도 된다니까!"
"세안은 몸의 청결만이 아니라 마음도 다스리는 법이라잖니. 그리고 너 돕고 싶어서 한 일이니 신경쓰지 마렴."
"아, 그러니까……."
"씻을 물 끓여두마. 노야께도 말씀드리고."
"괜찮아! 괜찮다니까! 오늘 수련할 거 많아서 씻을 시간 없어! 안 해도 돼! 그리고 목욕탕 누나만 쓰면 된다고!"
"사람이 염치가 있지 어찌 그러니."
"……하아, 아침 수련 다녀올게. 그리고 물 준비 안해도 돼. 괜히 낭비하지 말고."
"그래, 알았어. 잘 다녀오렴. 식사 준비해두마. 먹고 싶은 거 있니?"
"누나 밥은 뭐든지 맛있으니까 아무 거나──!"
비
류연은 경공을 써 도망치듯 부엌을 나가며 그렇게 외쳤다. 이제 열 다섯. 입지立志의 나이건만 동년배는 물론 당대의 절정고수와도
견줄 수 있는 무공을 가진 소년이라도 어머니와 같은 누이에게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런 동생의 모습에 비류향은 활기차서
좋구나, 하고 미소를 지으며 공경하는 노사부와 사랑하는 동생을 위한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5년 동안 이어져 온 비뢰문의 평범한 아침이었다.
#####
- 새벽에 올리려 했으나 갑자기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아 미뤄졌습니다.
-
비류향의 증상은 '급성 폐결핵으로 나오는 각혈을 억지로 참아 혈전이 생겨 이게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지면 비슷한 증상일까.'
라고 부실한 의학적 지식으로 고민해봤으나, 그냥 무협식으로 기맥이 망가졌다고 하는 게 제일 무난하다고 판단했습니다.
-
쓰다보니 생각났는데, 군대서 누가 입원실에 비뢰도 1부 전권을 가져다놔서 시간날 때 보고 있자니, 군의관님께서 그걸 보시고는
이게 아직도 나오고 있느냐며 놀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분도 전역하셨을 텐데, 잘 지내고 계시려나…….
- 댓글
도박[…]으로 200 이상의 댓글이라는 화살에 맞고, Crimsoneyes님의 지원그림이라는 창까지 맞아 시작하게 되었습니만,
정말 이런 내용의 팬픽을 보고 싶은 분들이 계셨는지 의문이 듭니다. 마치 부모님 세대의 이상적인 누님상[…]이랄까, 조아라에
범람하는 여주인공 같은 주인공이 먹힐지 모르겠네요. 여튼 도박이라도 약속은 약속이니, 최소한 1부까지는 가보겠습니다. 더불어 댓글
200돌파 라는 성원에 힘입어[…] 주간 연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솔직히 일일 연재는 도저히 안되겠는지라……. 이번에 학점
붕괴되면 집에서 맞아 죽습니다. 살려주세요 /굽신굽신
- 다시 한 번 Crimsoneyes님께 (복잡한 심정이 뒤섞인)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 하늘과도 같은 그대 2
도끼를 보고 있자면 새삼스럽게 왜 이런 걸로 장작을 패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게 무슨 개소리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첨언을 하자면, 이는 힘이 없더라도 요령과 속도를 활용해 비도만으로 장작을 쪼개는 비뢰문의
수련을 하다보니 들게 된 생각이다. 처음에는 이게 과연 사람이 할 짓인가, 이 문파는 대대로 제자에게 이런 미친 짓을 시켜왔던
건가 싶었지만─추측이기는 하지만 왠지 정말 그렇게 해왔던 것 같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나 역시 그짓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
론 단번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고 1년 반이라는 기나긴 수련기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동안 장작패기에 사용된 것은 당연히
도끼였다. 금부연 도끼만행사건이라는 상당히 수상쩍은 사연을 가진 더럽게 무거운 도끼로 장작을 패면서 팔 힘과 균형감각을 배울 수는
있었지만 더럽게 힘들었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참고로 이 오두막에는 전설의 도끼 외에, 매우 가볍고 실용적이며,
장작에 슥 내려치면 쩍 하고 갈라지는 우수한 도끼가 하나 더 있지만, 그건 절대 내가 손대서는 안 될 물건이다. 누나를 위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행여나 손이라도 댔다간 사부에게 "수련으로 단련하지 않고 어찌 병약한 누이를 위한 물건으로 편함을 도모하려고
하느냐!" 라는 소리를 들으며 얻어맞는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째 제자보다 누나를 더 챙기는 것 같은 느낌인데.
여튼 그러한 이유로 빨랫방망이 역시 내가 쓰는 더럽게 무거운 쇠방망이와 누나가 쓰는 가볍고 튼튼한 나무 방망이 이렇게 두 개가
있다. 그리고 이 빨랫방망이 역시 수상쩍은 쇠도끼와 마찬가지로 익숙해지기까지 1년 반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동안
걸레 조각이 된 의복을 만결복이라 부르며 매일 바느질한 덕분에 바느질 실력 또한 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뭐, 이쪽은 누나의
도움을 좀 많이 받기는 했지만. 내공도 없이 슥삭슥삭 바느질을 해치우는 누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놀라울 따름인데, 누나 말을
들어보면 어머니께서도 생전에 마을 어느 아낙들보다도 삯바느질을 잘 하셨단다.
"그래서 나랑 네 옷은 물론 아버지 의복도 손수 만드시는 분이셨어."
호
롱불 아래서 함께 바느질을 하며 누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넝마 조각 같은 옷을 꿰메는 건 정말 싫었지만 그 동안 이런 얘기,
그러니까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듣는 게 좋았다. 어릴 때 돌아가셔서 자세히 기억나지 않기에 누나가 어머니에 대해 더 말해줬으면
하고 바랐지만, 괜시리 누나가 애잔해보여서, 애써 담담하려는 것 같아 보여서 더 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결론은 누나의 도움을 받아
성장해서 이제는 엄청나게 바느질을 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혹독하다 못해 무식하기까지 한 장작패기와 빨래로 육체적 수련을 지속함과 동시에 사부에게 배운 것은, 비뢰문의 2대 비전秘傳인 뇌령심법雷靈心法과 영사심결靈絲心訣이었다.
사
부는 침을 튀겨가며 "본문本門의 독문내공심법獨門內攻心法인 뇌령심법雷靈心法은 인체의 호흡뿐만 아니라 천지 간의 교류(交流)를 통해
천지 세상만물의 기운을 받아들여 그 기운으로 뇌령雷靈, 즉 뇌雷의 영혼靈魂을 생성生成하는 천하제일의 내공심법內攻心法이다." 라고
설명하였다. 거기에 "이 뇌령심법雷靈心法은 뇌雷의 기운인 쾌快, 섬閃, 강强, 찰나刹那의 구결과, 집集, 산散, 유柔의 구결이
있으니 이를 잘 암기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 역시 덧붙였다.
뇌령심법과 함께 배운 영사심결靈絲心訣은
일종의 정신수양법으로서, 어떠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영혼을 꼬아 실처럼 만들어 자연스럽게 부동심不動心을 가지게 하고, 그
마음이 항상 투명한 호수와 같이 맑고 고요하며 평안하도록 하는 심법이었다.
솔직히 처음에 2대 비전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는 이게 무슨 약장수의 헛소리가 아닌가 싶었지만, 수련하면 할 수록 장작패기와 빨래가 압도적으로 쉬워졌기에 효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동시에 사부가 처음부터 이걸 알려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묵금墨琴을 건드리려다 손가락을 베여 피를 보고 그로 인해 분뢰수吩雷手도 배웠다. 덤으로 분뢰수가 6성에 도달해야 묵금을 건드릴 수 있으니 그때까지는 평범한 금을 타라는 사부의 말을 들었다. 뭐, 이건 아무래도 좋다.
겨
우 기초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면서 영사심결을 활용하면서 비도 날리는 법과 비뢰문의 운신법運身法인 봉황무鳳凰舞를 배웠다. 비도
던지기와 봉황무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자 야외수업이라며 뒷산으로 가서 나물 채집과 사냥을 배웠다. 사부는 산 전체를 가볍게
돌아다니게 되니 봉황무의 수련이고, 비도만으로 사냥을 하니 무공의 수련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게 식비를 아끼기 위한 짓이라는 걸
순식간에 간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힘은 사부에게 있었고, 고생해서 얻은 나물과 고기는 나와 사부만 먹는 게 아니라 누나도 함께
먹는 식재료가 되었기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이 행위를 이어갔다.
나물 채집과 사냥은 새벽 눈뜬 이후부터 오전까지의
시간에만 이루어졌다. 오후에는 철화장鐵化莊에서 철을 두드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은자 2냥에 특별수당지급이라는 말도 안되는 조건으로
팔려나가 해가 기울 때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허나 집에 돌아와도 그곳에 안식은 없었다. 사부가 철을 만지며 둔화된 섬세한 손
감각과 안력을 수련하기 좋다며 구슬을 꿰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사부는 정교함과 섬세함을 단련하는 또다른
수련이라며 목각 조각상과 공예품 제작까지 만들게 하였다.
채집採集. 수렵狩獵. 제련製鍊. 관옥貫玉. 목각木刻.
모조리 돈이 되는 일이었다. 허나 수입이 늘어난다고 좋아하는 건 사부 뿐이었으며, 나는 숙달되면 숙달될수록 일거리가 늘어나 도저히 편해지지 않는 하루하루를 보내야했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세월이었다.
난
왜 이렇게 불행한가! 하늘은 어찌 이렇게 큰 시련을 주는가! 사나이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지만 너무나 서러워서 눈물이 마르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힘들었다. 만약 누나가 없었다면 정말 천하제일 무공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힘들지?"
"응. ……아니! 전혀!"
유
난히 힘든 날이었다. 쓸만한 나물도 없고, 괜찮은 사냥감도 없으며, 철도 잘 두드려지지 않았다. 구슬도 잘 꿰이지 않고, 조각칼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던 날. 영사심결을 단련해도 흔들리는 울분을 애써 억누르며 어찌어찌 잠자리에 든 내게 누나는 그렇게 물었다.
무심코 힘들다고 했다가 급히 상반신을 일으키며 아니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누나한테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린 아이의 치기稚氣이기도 했고, 나보다 더 힘들 혈육에게 괜히 걱정을 끼치고 싶지도 않다는 미숙한 배려이기도 했다.
누
나는 그런 내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혼나고 있는 것도 아니건만 괜시리 마음이 찔린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바느질을 하던 누나는 잠시 바느질거리를 내려놓고 내 곁으로 다가와 살포시 품에 나를 안아주었다. 부끄러웠지만 익숙한 체향과 귓가에
들리는 누나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자니 떨어질 수가 없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을 잊고 그 품 안에 있다보니 어느 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밖에 나갔다 오려고 했으나, 누나는 그런 날 더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참고 숨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고름을 짜내야 종기가 낫잖니. 울어도 뭐라할 사람 없어. 괜찮아. 괜찮아, 연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엄마 대신 누나를 부르며 말 그대로 펑펑 울었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도 그렇게 안 울었던 것 같다. 울다 지쳐
잠든다는 걸 그때 알았다. 여튼 그렇게 속이 후련해지도록 울고난 후로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고된 일과를 받아들였다. 물론 정말
힘들었지만 그때처럼 다 때려치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이 후련해졌지만 육체의 고단함은 변함이
없었다. 만약 그대로 내가 일만 주구장창했다면 분명 과로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불쌍한 우리 누나는 평생 사부 수발만 들다가 죽었을
테고. 하지만 그날의 사건 덕분에 나는 그렇게 될 뻔했던 미래를 바꿀 수 있었다.
#####
울다 지쳐
잠든 비류연을 자리에 뉘인 비류향은 동생의 눈물과 콧물에 푹 젖은 옷을 갈아입고 바느질감을 잡았다. 그리고 짧은 잠에 들었다. 일
다경一茶頃 쯤 지나 눈을 뜬 소녀는 호롱불에 남은 기름을 보고 자기가 얼마나 잤는지를 가늠하고는 바느질감을 가지런하게 정리해두고
부엌 아궁이에 장작을 넣기위해 방을 나섰다. 슬슬 불길이 사그라들 때였다. 산을 휘감아 내려오는 새벽바람은 계절을 막론하고
차가우니 온기가 돌게 하려면 이때 장작을 넣어둬야 했다.
그리 생각하며 문을 나선 비류향의 눈에 들어온 건 마당에 서서 밤하늘을 보고 있는 노사부였다. 비류향은 신속히, 그러나 결코 경망되지 않은 동작으로 신발을 신고 노사부에게 다가갔다. 기침해 계셨습니까, 라고 입을 연 순간,
"과하다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노야老爺."
노사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비류향은 당황하였으나 이내 사부의 경중을 읽고 대답하였다.
"대답이 늦는구나. 얼굴에 근심도 가득하고. 그러면서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느냐."
"송구스럽습니다."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깊게 허리를 숙이는 비류향을 보며 노사부는 됐다며 손을 휘젓고는 말했다.
"네 보기에는 노구가 일신의 영달을 위해 제자를 핍박하는 것처럼 보일 지 모르겠으나, 이는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네 동생이 성장함에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
거
짓말이었다. 전통적(?)으로 비뢰문은, 적어도 노사부는 '제자와 노예의 차이는 비전을 배우느냐 마느냐의 차이일 뿐, 하는 일은
똑같다.'는 견지를 유지해왔다. 그렇기에 노사부가 비류향에게 하는 말은 괜한 심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했다.
그러나 노사부는 모르고 있었다. 비류향이 얼마나 진심으로 노사부를 신뢰하고 있는지를.
"
어찌 그걸 모르겠습니까. 비록 무학武學의 궁리는 모르나 연이의 일과가 열두 살 아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연이가 그 힘든 수련을 하면서도 심화心火를 품을지언정 육신은 병에 걸리지 않으며 크게 다치지 않으니 노야께서 안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허나 이제는 세상에 없는 양친께 부탁받은 동생을 자식처럼 보살펴 왔습니다. 그러한 아이가
힘들어 하는데 손윗누이라는 것이 해줄 수 있는 게 치맛폭에 품고 원없이 울게 해주는 것 뿐입니다. ……스스로가 한심하여 노야
앞에서 안색을 어둡게 하였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
식은땀이 등 뒤로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제아무리 세상 무서울 것 없고 거칠 것 없는 노사부라도, 이렇게 올곧고 순수하게 자신을 믿어주는 소녀에게 차마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고, 네가 생각하는 안배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니, 설령 그게 아니라 일신의 탐욕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말하더라도 이 소녀가 과연 그걸 믿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분명 서투른 겸양의 표현이라 여길 게 뻔했다. 그래서
노사부는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스스로 일을 하고 식구를 먹여살리는 사내를 치맛폭에 감싸는 것은 과한 일이다."
"
압니다. 허나 연이가 사내라고는 해도 아직 열두 살 아이입니다. 그것도 스스로 우기니 열둘이지 아직 띠도 돌아오지 않아
실질적으로는 열하나입니다. 본디 모친의 품에서 울분을 하소연할 나이지 않습니까. 나이가 차면 스스로 사리구분하여 멀어질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
"하늘을 나는 용도 머무는 구름이 있고 호랑이 또한 잠드는 굴이 있는데, 저 어린 것에게도 마음 놓고 있을 곳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무례한 줄은 아나 그래도 부디 윤허해주셨으면 합니다."
쏴아아아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어내린 산바람이 숲을 흔들고는 노사부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이제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식은땀이 순식간에 식는 것과 동시에 노사부는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야, 이거. 이야. 정말.
"……어흠! 여튼, 밤이 깊었다. 어서 자거라. 짧은 잠이라도 편히 자야 다음 날 일하는데 지장이 없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아궁이만 확인하고 곧 들어가겠습니다."
그리 대답하며 비류향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노사부는 잠시 소녀가 들어간 부엌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별이 쏟아지는 것 같은 아름다운 밤하늘로 시선을 돌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
지금 뭔가 심적으로 엄청난 부담이 될 흉악한 것을 곁에 두고 키우고 있는 게 아닐까. 불현듯 떠오른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노사부는 애써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뭔가 해야한다. 그 생각에 노사부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인을 알지 못했다. 그 생각으로 인한 선택과 결과가 평생토록 그를 얽메는 쇠사슬의 단초가 될 줄은.
#####
정천맹주正天盟主 진천뇌벽검震天雷霹劍 나백천羅伯泉이 사천四川땅에 온 것은 자신의 딸을 검후劍后에게 맡기는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찌하다보니 시간이 남아 장터에 들어선 그는 기이한 것을 보게 되었다.
입
지立志와 약관弱冠 사이의 연배일까 싶은 여인이었다. 보통 그 나이대의 여성은 소녀라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나백천은 소녀라는 단어가
가진 앳됨이 없으며 마치 한 집안의 자당慈堂과도 같은 품격을 느껴 여성이라 표현이 적절하다 여겼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어른스러움 때문에 기이하다 여긴 게 아니었다.
"산 사람인데 기맥이 있는 듯 없는 듯 흐릿하고 희미하니, 이는 중병에
걸린 이나 곧 죽을 자의 맥동이다. 허나 저 처자는 비록 큰 움직임은 없으나 활기가 있고 중심은 진중하고, 그러면서도 내공은 한
줌도 느껴지지 않으니 괴이하다."
그 말 그대로였다. 희한한 일이었다. 별의별 일들을 마주했다 생각했건만 이토록
진귀한 경험도 하니 역시 세상은 넓도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 걸음을 뗀 나백천은 순간, 매서운 눈길로 방금 전 여인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없었다. 아니, 있었다. 절정의 고수인 나백천의 안력眼力으로도 찰나에 잡아내지 못한 것은 그 여인의 있는 듯 없는 듯
기이한 존재감 때문이었다.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은 존재. 잡히지 않는 기맥.
"……."
평소라면 단순히
넘어갔을 일이었으나, 나백천은 최근 사천땅에서 천겹령의 끄나풀이 움직였다는 징후가 포착되어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이를
우연이라 여기지 않고 은밀하게 여인의 뒤를 좇기 시작했다. 기우였다면 다행이다. 허나 정말로 저 여인이 천겁령에 속한 자라면
이대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나백천은 한 시각 동안 조심스레 의문의 여인의 뒤를 밟았고, 그 길은 기이함의 연속이었다.
이
미 몇 번이나 장터를 나온 듯, 여인은 상인들의 인사에 화답하며 물건을 샀다. 그러다 때때로 장터 틈바구니 어디나 쉴 자리가
있으면 그대로 앉거나 기대어 눈을 감고는 잠이 들었다. 저잣거리 소란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때는 잠깐이라도
눈을 돌리면 금새 기척이 사라져 있었다. 바로 보고 있거늘 인식할 수 없었다. 혹여 무림인인가 싶어 시험삼아 살기를 쏘아내도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다경, 혹은 그 이하의 짧은 쪽잠을 자고 나면, 마치 잠깐 눈만 감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짱히 눈을
뜨고 일어나 다시 장을 보기 시작했다.
"내 허깨비를 보고 있는 것인가……."
여인 곁을 지나가는
일반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건만 자신만이 저 여인을 기이하게 보는 작금의 상황에 나백천은 고심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의혹
역시 깊어져만 갔다. 그리하여 그는 여인이 장보기를 마친 듯한 시점에서 의문을 해소하기로 했다.
"소저. 잠시 몇 가지 물어보고 싶소만."
"……하문하십시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여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여인은 기척 조차 없이 나타난 이가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에
놀랐는지 약간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곧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리 대답했다. 짧으나 정중한 대답은 그 안에 의義와 예禮가 담겨
있었으나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으며, 감정을 절제하되 무공無空하지 않아 중용지도中庸之道를 실천하고 있었다.
나
백천은 재차 여인을 바라보았다. 의복은 허름하지만 단정했고, 옷매무새 역시 정돈되어 있었다. 잘 살거나 명문은 아니더라도
신의信意와 학식을 갖춘 고아한 선비士 집안의 자당慈堂과도 같은 품격이 느껴졌다. 이에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나백천은 말을 높여
물었다.
"혹 일가의 안주인이십니까."
연배가 있다고 한들 강호와 연관이 없는 일반인이라면, 지아비가 있고 자식이 있는 여인이라면 함부로 하대하지 않는 게 예법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대하십시오. 올해로 열다섯인 여아에게 말씀을 높이실 필요 없습니다."
"허어, 허허. 이거 미안하구나. 너무 어른스러워 결례를 저질렀구나."
"결례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아니다. 안사람이 여인의 나이는 함부로 아는 게 아니고 완숙하여도 어리게 보인다 해야한다고 했으니 내 결례를 저지른 게지."
"자당께서 농으로 하신 말씀이실 터이니 심려치 마십시오."
두
사람 사이에 훈훈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나백천은 점점 더 신중해졌다. 이 거리에서도 여인의 기맥이 희미했고
일반인 수준의 기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무형지기에는 반응조차 하지 않는다. 대체 이 처자는 누구란 말인가.
"하여, 제게 무엇을 묻고자 하십니까?"
"아, 미안하구나. 네 기맥이 기이하여 그 연유를 묻고자 하는데, 답해줄 수 있느냐?"
"기맥 말씀이십니까? 이상하다 하심은 어떤 것인지……."
여인이 잘 모르는 일인지 말을 흐리자 나백천이 설명했다.
"앞에서 보기에는 활기가 있거늘 죽기 직전이거나 중환자와도 같은 기맥이다. 내공은 한 줌도 느껴지지 않으며 기력도 없어 틈만 나면 잠에 드니 이는 산 사람의 형태가 아니니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그
설명을 들은 여인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백천의 의문에 대답해주었다. 돌림병에 걸려 죽을 뻔 했던 것. 노사부가
제자로 들인 동생의 청을 들어주어 몸을 고쳐준 것. 그러나 치료시기가 늦고 병세가 너무 깊어 상중하 삼단전과 전신 혈맥이 모두
망가진 상태라는 것. 그로 인해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해 부족한 잠을 쪽잠으로 때운다는 것 등을 모두 듣고도 나백천은 쉽게 믿지
못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인의 말에 따르면 노사부라는 인물은 내공으로만 죽기직전의 중환자를 살려낸 것이다. 그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일인지는 절정의 무인인 자신이 더 잘 알았다. 그걸 알기 때문일까. 여인은 조심스레 소매를 걷어 손목을
내밀었다.
"노야께서 무인들은 쉽사리 믿지 않을 터이니 맥을 짚게 하면 이해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의 몸에 함부로 손댐을 용서하게나."
맥을 짚은 나백천은 실제로 여인의 기맥의 뒤틀려 있고, 망가진 삼단전을 복구한 솜씨를 알게 되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천지 기인을 많이 만나봤다 생각했건만 아직도 내 견식이 부족하구나. 이와 같은 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이런 능력에 너와 같이 기품 있는 여인을 키워냈으니 범상치 않은 분이실 터. 필시 기인奇人이나 신인神人일 테지."
"신묘한 솜씨로 보잘 것 없는 여아女兒를 살려 주셨으니, 갚아야 할 은혜가 하해와도 같은 은인이십니다."
자
리에 없는 이에게도 공경을 다하는 여인의 태도는 의문이 풀려 마음이 가벼워진 나백천의 호감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여인의
상태를 이해하고 눈을 살피니 과연 맑고 투명하여 비록 내공은 없으나 깨달음을 얻은 자와 같은 정갈함이 있었다. 나백천은 자리를
바꿔 좀 더 대화를 함이 어떻겠냐 물었다. 여인은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하더니 반 시각이라도 괜찮다면 따르겠다 하였다.
"어째서 반 시각이더냐?"
"노야께 올릴 석반과 동생의 식사를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허허, 내 그리 시간을 뺏지 않도록 하마."
그
렇게 가까운 객잔에 자리잡은 두 사람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체적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나백천이었으나
여인은 경청하며 현명한 답을 하여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반 시각이 흐르자 서로는 아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토록 즐겁게 시간을 보냈건만 서로 통성명도 안하고 있었다니. 이제서야 자기소개를 하는구나. 노부는 정천맹주 진천뇌벽검 나백천이라고 한단다."
"……비류향이라 합니다. 귀한 분을 몰라뵌 점 용서해주십시오."
처
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살짝 놀란 듯 비류향의 눈이 약간 동그랗게 변했다가 돌아왔다. 호들갑을 떨 만도 하건만 일관된
태도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신뢰감이 생겼다. 저잣거리와 객잔에서 나눈 대화가 자신의 심상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소녀는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그렇기에 나백천은 이 소녀를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내 간만에 좋은 인연을 만들었는데 서로의 일정이 바빠 오늘은 이렇게 헤어지지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있겠느냐?"
"귀한 분께서 훗날을 기약하시니 응함이 옳으나, 은인의 수발을 들어야 하기에 함부로 약조할 수 없습니다."
"음, 어찌 안 되겠느냐?"
"사정을 설명해주시면 노야께 윤허를 구해보겠습니다."
비류향의 대답에 나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금 천향루에 머무르고 있는데, 여식과 함께 왔다. 헌데 아이에게 심병心病이 있어 쉽사리 바깥출입을 못하니 말벗이 필요한데 이를 부탁할 수 있겠느냐."
"저와 동년배인지요."
"올해로 열 둘이니 세 살 어린 셈이지."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인 비류향은 잠시 고민하더니 난처하다는 듯 되물었다.
"심병은 그 종류가 무궁무진하여 그 하나만으로는 윤허를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증상이라도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흠……, 네 몸 상태를 보면 기인께서는 무공과 의학에 조예가 깊으신 듯 하니 바른대로 말하는 게 좋겠지." 『용안龍眼』 "그리 전하면 아실 게다."
"……방금 그것은……."
"전음傳音은 처음 듣느냐?"
상
승의 경지에 달한 무인은 내공을 활용하여 원하는 이에게만 말을 전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전음인데 노사부와 비류연의 대화에서
그런 것이 있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을 뿐인 비류향은, 방향 없이 들리는 기묘함에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그것만으로도
용안이라는 것이 쉽사리 입 밖에 내놓으면 안 될 것이라는 것을, 눈앞의 무인이 얼마나 자신을 신뢰하고 있는가 또한 깨달았다.
"오늘 처음 만난 미숙한 여아에게 이토록 신의를 보여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부디 기인께서 윤허해주셨으면 좋겠구나."
"천지인 삼륜三倫을 깨달으신 분이시니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을 헤아리실 것입니다."
그날의 만남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인연이 시작됨을 알리는 효시이기도 했다.
#####
-
무협지는 공부가 많이 필요한 소설입니다. 구파일방 오대세가를 제외하고도 이름 있는 문파가 흘러넘치고, 그들의 절기와 본가의
위치와 중국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 어느 지역이 어떠하다까지 고민해야 하고, 주요 혈맥 자리 정도는 몇 가지 주워담을 수
있어야 하지요. 어휘 또한 온갖 옛말과 국한혼용체와 말 그대로 무협지에서만 활용되는 한자까지 꿰뚫고, 복잡한 인간관계와 거기에
맞는 호칭에 경어와 하대까지 능숙하게 써야 그래도 좀 무협지 같은 형태의 글이 나옵니다.
……그걸 아는데 왜 제가 이런 걸 쓰게 되었을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도박은 안됩니다 여러분.
- 쓰면서 처음과 마찬가지로 댓글 몇 개 달리면 곧바로 다음화 올리 같은 걸 해볼까 했다가, 이게 스스로를 지옥으로 몰아넣는 전초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포기했습니다. 이 놈의 도박……!
- 포병과 아스티와 세이야를 거치면서, 팬픽은 기세요 흐름이니 타오를 때 최대한 질러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공모전과 학점이 날아가는구나…….
- 비류연의 연이 뭔지 알기 위해 학교 도서관을 찾아가 본 결과 강 이름 연沇이었습니다. 이게 그리도 안 나오던가.
- 소제목 수정할까 하다가 일단 돌려놨습니다. 계획 없던 연재의 부작용이 이렇게 나타나는군요 <-
- Crimsoneys 님께서 또 그림을 그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정말로. 감사합니다. 크으으으으으……!!!!!!
한자 및 오타 지적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