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7.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7.
흔히들 백색白色은 물들기 쉬운 연약함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나백천의 백색은 그렇지 않았다. 그 앞에 감히 어떤 것이 자신의 색을 뽐낼 수 있을까 싶은 고압적인 백색. 모든 것을 살라먹는 백색의 어둠은 직시하는 것조차 두려운 재앙이었고, 마주하는 것은 더더욱 피하고 싶은 폭력이었다.
“크윽…….”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정신을 잃었던 나일천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온몸이 얻어맞은 듯 욱신거렸다. 일격一擊. 고작 일격이었는데 이 모양이란 말인가. 만약 서천西天의 독문병기가 없었다면 진작에 고깃덩어리가 되어 처참하게 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눈에 들어온 것은 예상했던, 그러나 틀리기를 바랐던 인물이었다.
"……형님."
히죽. 입가가 자연스레 미소를 그렸다. 질투와 욕망으로 뒤틀어진 속내와, 이를 대변하듯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과는 다른 기계적이고 반사적인 미소였다. 그러나 그 인물─나백천은 나일천을 향해서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어느 새 침대에서 가져온 이불로 딸의 몸을 감싸며 물었다.
“괜찮느냐.”
“……아, 아아…….”
다정한 말에도 나예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그 여린 몸을 보는 사람이 안타까울 정도로 세차게 떨며 손끝이 새하얘질 정도로 아버지의 옷자락을 쥐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퍼뜩 고개를 들며 뒤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시선은 벽에 기대어 있는 비류향을 향하고 있었다.
처참한 몰골이었다. 예리한 칼바람에 찢겨져 나간 어깨에서 흐른 피로 물든 상반신. 입가와 코에서 흘러나온 피거품에 젖은 얼굴. 실 끊어진 인형 마냥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꺾인 체 축 늘어진 팔다리. 무엇보다도 가장 끔찍한 것은 망가진 수준을 넘어 처참하게 찢겨나간 기맥이었다. 숨은 간신히 붙어있었지만, 쓰러지기 직전의 포대자루도 이것보다는 생명력이 흘러 넘쳐 보일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백천은 가슴이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그런가. 네가 또 예린이를 구해주었구나.
“언니……, 언니……!”
“…….”
엉금엉금 기어 비류향에게로 가는 딸을 보며 나백천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어느 틈에 집어넣었는지 모를 검을 다시 뽑으며 몸을 돌려 자세를 잡았다. 어지간한 고수의 눈으로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일천은 목에, 가슴에, 단전에, 사람 몸의 급소란 급소에 모두 칼이 닿는 느낌을 받았다. 농밀하다, 섬뜩하다, 날카롭다, 싸늘하다.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정련되고 폭력이며 구체적인 살기였다. 심검心劍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지 않을까.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왜 이리도 크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변명을……, 해 봐라."
"무슨 변명 말씀이시오, 형님?"
"이 상황에 대한 변명 말이다."
"이 상황?"
나일천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방을 한 번 둘러보고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관의 말은 씨알도 들어먹지 않는 무례한 호위병들 혼쭐내고,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계집이 주제도 모르고 나대길래 벌 좀 주고, 우리 이쁜 예린이에게 사내 맛을 알려주려고 한 것 말이오? 하, 하하하하! 아니, 형님. 어찌 어른으로서, 남자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인데 변명을 한단 말입니까? 예? 노망이라도 드셨, 흡!"
콰아아아아아앙!
초식조차 아닌 일검一劍. 그러나 어지간한 초식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위력적인 공격에 검과 검이 부딪쳤다고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허공에서 몇 바퀴 돌아 간신히 기세를 가라앉히고서야 겨우 바닥에 착지한 나일천은 증오 가득한 눈길로 나백천을 보며 외쳤다.
"왜? 변명하라고 하면 내가 '아이고, 형님! 내가 욕심이 과해 눈이 멀었었소! 부디 용서해주시오!'하면서 바닥에 엎드릴 줄 알았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할 줄이라도 알았어?! 당신이 저 높은 자리에서 내려보며 대범하게 지껄이면 내가 다 나불거릴 줄 알았냐고!"
악에 받친 나일천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백천은 묵묵히 자세를 잡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격二擊이 몰아쳤다. 이번에는 명백한 살초殺招였기에 나일천은 반사적으로 오른손까지 뻗어 공세를 막으려 했으나──
콰아아아아아앙! ──콰앙!
"크헉!"
이번에는 바닥을 수 차례 굴러 벽에 부딪치고 나서야 멈추었다. 손에서 떨어진 검은 저만치 굴러가 있었고 왼팔에서는 한 줄기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왼손으로 검을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쳇. 일이 틀어졌나. 나일천은 자연스럽게 오른팔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섰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고개를 들어보니 정작 나백천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군. 그러니 저토록 냉정하게 자신에게 살초를 흩뿌는 것이겠지.
“놀라지도 않으시는구려. 당신이 자른 팔이 다시 돋아났는데. 거 좀 기뻐해주시지. 동생 팔이 다시 돋아났는데 말이오.”
“내 동생은 죽었다.”
“…….”
방금 전의 살초는 혈육의 연을 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리라. 나백천의 동생 나일천은 이제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선언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죽었노라 담담하게 공언하는 나백천의 모습에 나일천은 뒤틀린 심기를 감출 생각 없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서천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럼 여기 서 있는 나는 뭐요. 귀신이오?”
“서천멸겁이라는 악귀지.”
“허, 그렇구만.”
고오오오오──
서로를 바라보는 형제의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는 당장이라도 상대를 격살시킬 만큼의 공력이 맺혀있었다. 서로를 향한 살기가 방 안에서 부딪치며 자연의 것과는 다른 인위적인 불꽃이 튀어올랐다. 초식의 교환은 고사하고 출수조차 하지 않은 검권劍圈의 충돌이건만, 범인凡人은 순식간에 고깃덩어리가 될 정도의 압력이 휘몰아쳤다.
나백천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냐.”
“이런 짓? 무슨 짓? 남궁가주를 격살한 것? 무례한 계집들 손봐준 것? 예린이를 탐하려 한 것? 서천의 무공을 배운 것? 어떤 것 말이오?”
“전부 다 말이다.”
“거, 방금 전에 변명하라고 할 때 다 한 거 뭘 또 굳이 들으려 하시는 거요?”
“그건 죽은 내 동생의 변명이었지. ……이번에는 네가 이런 짓을 하는 이유를 말해보라는 것이다, 서천멸겁!”
번쩍! 새하얀 검기가 나일천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명백한 살계殺計로서 천둥번개와 함께 쏘아진 검기를 인지하거나 피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나일천은 신속하게 오른손을 휘둘러 공격을 막았다. 카앙! 맑은 쇳소리가 울려퍼졌으나 이번만큼은 멀쩡히 서있던 자리에 그대로 선 나일천이 코웃음치며 대답했다.
“흥! 서천멸겁이라 불리면 내가 뭔가 대단한 이유라도 댈 줄 알았나, 정천맹주? 이 엿 같은 세상 뒤엎어보겠다는 거 외에 뭐 더 있을까.”
“……!”
나백천은 단 번에 세 장 정도 뒤로 물러나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일만 삼천 장의 싸늘한 쇳조각으로 만들어진 서천의 독문병기 서풍의 광란西風狂亂. 자신의 검과 내공이라면 충분히 베어낼 수 있으리라 판단했지만 그것은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말은.
“……얼마나 서천의 내공을 수련한 것이냐.”
“흠, 뭐, 꽤 되었다고만 해두지.”
역시 그랬나. 나백천은 직접 검을 부딪쳐본 결과 나일천의 내공이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과거 천무삼성이 합공으로 상대하여 간신히 팔을 베어낸 것이 서천멸겁이다. 비록 눈앞의 상대는 옛날에 팔이 잘린 서천멸겁 본인이 아니라 무기와 내공만을 이어받은 후계자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무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언제부터 그 사이한 무공을 수련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검을 맞대보니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고사하고 싸우게 된다면 백중지세의 싸움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나백천에게는 지켜야만 하는 이들이 있었다. 나예린과 비류향. 그 둘을 무사히 지키면서 서천을 상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상대 역시 썩 유리하기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쳇, 아직 부족한가.'
방금 전의 일격으로 나일천은 지금 이 순간 나백천을 상대로 승리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신경쓰고 있는 두 소녀를 노려 빈틈을 만들지 않는다면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서천의 무공에 대한 수련과 이해가 조금 더 깊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아무래도 성급했던 것 같았다. 빌어먹을 놈. 높은 자리에 올랐으면 호위호식하며 있을 것이지 죽어라 수련해서 실력을 쌓았나. 겉으로는 자신만만한 척 했지만 나일천의 속은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해야 했다. 아둥바둥 싸운 끝에 얻는 승리는 의미가 없었다. 철저하고 확고한 승리로 상대를 짓밟아야 의미가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그 앞에서 딸을 범한다. 그러지 않으면 복수의 의미가 없다. 그러한 집착이 심마心魔가 되어 그를 얽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아쉽지만 이 정도로 끝내주지. 예린이를 못 취해서 흥이 나질 않거든.”
“네놈이……!”
“크흐흐, 그 얼굴 참 볼 만 하군.”
분노로 일그러지는 나백천의 얼굴을 비웃으며 나일천은 그 너머,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반송장 상태인 비류향을 끌어안고 두려움에 가득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조카의 시선에 나일천은 가학심이 충족되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예린아! 이 숙부가 오늘은 바빠서 이만 가봐야겠구나!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참으로 미안하구나! 허나 걱정하지 말거라! 이 숙부가 언젠가 꼭 네게 어른의 맛을 가르쳐 줄 터이니! 네 보드라운 속살을 가르고 듬뿍 귀여워 해 줄 것이니 기다리고 있거라! 반드시!”
검디 검은 악의였다. 색욕과 집착이 서로 뒤엉키고 얽히고설켜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의념이 소녀의 여린 마음을 부수고 집어삼키기 위해 날아들었다. 압도적인 악의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려는 소녀의 귓가에──
“……괜찮아…….”
──구원의 문구文句가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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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눈을 뜬 것일까.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숨을 애써 이어가며,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힘껏 치켜뜨며,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경련을 간신히 억누르며 비류향은 품 안의 소녀를 위해 입을 열었다. 기절할 것 같은 악의에 몸을 떨던 나예린의 귓가에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걱정마…….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은…… 겁이 나서야……. 무서울 거…… 없단다……."
“언니……. 언니이…….”
팔이 왜 이리도 무거울까. 그나마 왼팔은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나마 말을 듣는 오른팔로 울먹이는 나예린을 안아주었다. 피에 젖은 상의에 얼굴이 닿게 되어 아차 싶었지만 나예린은 떨어지지 않았다. 되려 가슴께에 얼굴을 파묻으며 자신을 불렀다. 그 모습에 비류향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나일천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시야에 자세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거무죽죽한 무쇠팔을 단 사내의 형상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평생…… 얻지 못할 것을…… 얻으려 헤매다…… 광야에서…… 아무도 모르게…… 쓰러져 죽을…… 그런 것의 말에…… 귀 기울일 것 없어…….”
폐부와 식도에 들어찬 피거품에 소리는 이상했지만 다정한 말투였다. 품 안에서 떨고 있는 소녀를 위한 것이리라. 나예린에게만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경지에 이른 무림고수인 두 형제 역시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나일천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허나 비류향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눈길로 나일천을 바라보았다. 추악한 존재에 대한 혐오와 악의어린 시선조차 아니었다. 마치 불 속에 뛰어드는 날벌레를 보는 것과도 같은, 아니. 그보다 더한, 저잣거리 모퉁이에 쌓여있다 바람에 휩쓸려 어디론가 굴러가는 먼지덩어리를 보는 듯한 무심하디 무심한 눈길.
사실 너는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느냐. 대단한 것은 네가 주워다 몸뚱아리에 붙인 그 쇳덩어리지. 자신도 모르게 품고 있던 열등감 때문에 나일천은 비류향의 시선을 그렇게 느꼈다. 만약 그에게도 용안이 있어 비류향의 심상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그는 더더욱 분노했을 것이다. 이 시선이 의도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욕망과 광기를 제외하면 오만과 자존심만이 남는 사내의 평정심과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과연 그가 언제쯤이면 알게 될까. 아니나 다를까.
“네년! 이 빌어먹을 년! 이 개 같은 년!!!!!!”
언제 미소짓고 있었냐는 듯 나일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압도적인 살기와 끔찍한 악의가 비류향과 나예린을 집어삼키려는 듯 몰아쳤다. 검디 검은 악의의 홍수가 밀려온다. 시선을 돌리고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사실에 나예린은 더욱더 비류향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처럼 고독과 공포가 가득한 세상에서, 홀로 길을 밝히는 등대가 그러하듯 온기와 안도감을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온기와 안도감을 발판 삼아 두려움을 극복할 용기를 주는 이였다.
피냄새가 가득 했지만 그 안에서도 비류향의 체취와 더불어 한 줄기 청량함이 나예린의 폐부를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모든 것을 직시直示하는 용안은 흔들리면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태양 같은 빛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린아…… 보렴…….”
“…….”
“괜찮아……. 괜찮아, 린아……. 봐…….”
“……네…….”
귓가에 맴도는 속삭임에 나예린은 용기를 내어 눈을 떴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바로 옆에서 넘실거리는 심독心毒이 너무나도 무서웠지만, 독기가 강하게 느껴질수록 바로 곁에서 자신을 감싸는 온기와 청량감 역시 대비되어 증폭돼 소녀의 마음을 지탱해주었다. 크게 심호흡하고 나예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일천을 바라보았다.
광기와 탐욕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굳이 용안으로 보지 않더라도 추악했다. 그러나 무섭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덮치려고 했던 사내다. 하지만 방금 전과 같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압도적인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비류향의 말에 분노가 일렁이는 나일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치 싸움에서 지고 분을 삭히지 못해 낑낑거리는 투견이 저러할까 싶었다.
"……어때……. 무섭지 않지……?"
“……네. 하나도, 하나도 안 무서워요!”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다. 그러나 어느 덧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정신을 좀먹던 공포는 사라져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추악한 심정心精이 눈에 들어와 욕지기가 치밀었지만 이제 그것은 공포라기보다는 단순한 생리적 거부감이 만들어낸 역겨움이었다. 두려운 것이 아니라 더러운 것. 나일천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런 나예린의 모습에 비류향은 힘겹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짖는 개는…… 시끄러울 뿐이야……."
“네!”
어느 새 나예린의 눈에는 적의敵意가, 나일천을 향한 저항의지가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일천은 실성한 듯 실없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허, 허허……. 허허허허허허허…….”
이제는 정말 참을 수 없었다. 그러한 생각에 나일천은 이를 갈며 오른손에 공력을 집중시켰다.
"그 개에게 물려 죽어가는 년이 말은 잘 하는, 크헉!"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찰나의 방심이 부른 빈틈은 치명적인 일격이 되어 나일천의 하복부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 일반적으로도 급소지만 무인에게 있어 하복부는 단전이며, 이곳은 내공을 담아두는 그릇과 같은 역활을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이곳에 공격을 받았다는 것은 무술의 근본이 흔들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혈육의 정은 기대하지 마라!!!!!”
“크으으으으으으으!!!!!!!!”
나백천은 확실하게 잡은 승기를 굳히기 위해, 그와 동시에 무림에 큰 위협이 될 서천멸겁을 이 자리에서 쓰러뜨리기 위해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혈육의 정은── 이미 살초를 펼친 시점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오른팔과 머리를 베는 검로劍路를 따라 부드럽게, 그러나 강맹하고 파괴적인 검기劍氣가 휘몰아쳤다. 그것을 본 나일천은 다급히 왼손을 뻗어 비류향과 나예린을 향해 장력을 내뿜었다.
“광풍장狂風掌!!!”
과거 백풍검객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의 나일천이 자랑하던 절초가 소녀들을 향해 내뿜어졌다. 이를 무시하면 서천의 목을, 하다못해 팔이라도 벨 수 있다. 허나 그렇게 되면 소녀들은 한 줌 혈수血水로 녹아내리리라. 찰나의 순간, 고민 끝에 나백천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취하기로 했다.
“이 금수 만도 못한 노오오오옴!!!!”
“무, 아닛?!”
백혼검뢰천검식白魂劍雷天劍式
오의奧義
뇌망백렬雷網白裂
새하얀 백광이 나일천의 장풍을 흩어버리고, 그의 상반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허나 그 압도적인 검풍에 휩쓸리기 직전, 나일천은 비릿한 웃음과 함께 오른팔을 휘둘렀다. 공격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집중한 나백천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벽력탄霹靂炭!”
주먹만한 쇳덩어리 겉에 난 조그마한 구멍에서 나온 실에 심상치 않은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본 순간, 나백천은 경악했다. 암기와 독에 능한 사천당문이라해도 함부로 쓰지 못하는 것이 화약무기다. 위력도 위력이지만 화약은 국가에서 엄격히 관리하는 통에 쉽사리 손댈 수 없거늘 어떻게!
“하하하하! 결판은 다음으로 미뤄두겠소!!!”
와장창창!
경악하는 나백천을 뒤로 하고, 나일천은 오른팔을 휘두른 반동을 활용해 창문을 부수며 폭풍우 속으로 사라졌다. 나백천은 허공섭물의 기지로 허공에 뜬 벽력탄을 나일천이 도망친 창문을 향해 내던졌고── 콰아아아아아앙! ──천둥번개와는 엄연히 다른 이질적인 굉음과 함께 후끈한 바람이 비바람과 함께 실내로 들이쳤다 가라앉았다. 재빨리 창가로 다가간 나백천은 이를 악물었다. 나일천의 흔적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으음……!”
안타까운 일이었다. 매우 위협적인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천겁령 사천멸겁 중 하나를 완전히 끝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쉽지 않은 상대였으나 적절한 기습으로 단전을 뒤흔들었기에 순식간에 승기가 기운 상황이었던 만큼 아쉬움은 배가 되었다. 게다가 이렇게 도망친 서천이 훗날 벌일 패악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졌다.
허나 이미 엎질러진 물. 지금은 뒷수습을 해야하는 시점이었다.
“아버지! 언니가!”
딸의 외침에 나백천은 잊고 있던 것이 떠올라 급히 신형을 날렸다. 부어오른 딸의 뺨에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위급한 이가 있었다. 나백천은 기어코 바닥에 쓰러진 비류향를 바로 눕히고 맥을 짚으며 물었다.
“정신차리거라.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
“……맹주님…….”
“그래. 힘들겠지만 절대 정신을 잃으면 안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백천의 마음 속에는 이미 낭패의 기색이 흐르고 있었다. 틀렸다. 출혈도 출혈이지만 기맥이 심하게 망가졌다. 이미 망가져 있던 기맥이 망가져봤자 얼마나 더 망가지겠냐 싶었지만, 전회前回가 구멍을 임시방편으로 막은 둑과 같았다면, 작금의 몸은 거센 홍수에 어디랄 것 없이 금이 가 터지기 직전의 보와 같았다. 그것을 알기 때문일까. 눈이 거의 감긴 비류향의 입에서 유언과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연이에게…… 노야께…… 부디…….”
“그런 건 살아서 훗날 전하면 된다! 눈을 뜨거라!”
“언니! 안돼요! 제발!”
용안에 비치는 가시화된 죽음의 형태에 나예린이 절규했다. 그런 딸을 본 나백천은 순간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에 눈을 부릅 떴다. 노사부의 그것이라면. 자신 혼자서라면 불가능할 테지만 딸의, 나예린의 도움을 받는다면 해볼만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순간, 당장 위급한 이 순간만을 넘겨 시간을 번다면 급히 노사부를 찾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가 과연 비류향의 몸을 고쳐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해봐야 했다.
“맹주님! 괜찮으십니까?!”
“대체 이게 무슨, 아닛?! 의원! 의원을 불러! 어서!”
“서둘러 조를 나눠 명을 따르도록! 1조는 전前 정천맹 사천지부 부총령 나일천에 대한 수배령을 내려라! 그는 2대 서천멸겁이다! 2조는 시급히 의원과 약재를 구해오도록! 그리고 3조는 당장 호법護法을 설 준비를 해라!”
“맹주님, 그게 무슨,”
“설명할 시간이 없다! 어서!”
때마침 도착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나백천은 비류향을 침대 위로 옮겼다. 맹주의 명령에 따르던 이들은 나백천이 옮기는 비류향의 모습을 보며 경악했다. 그들 역시 일정 경지에 이른 무인들이었다. 외상도 외상이지만, 외상으로 드러날 정도로 심각한 내상을 입은 소녀의 모습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것 외에도 무인들은 비류향이 나예린의 말벗을 하는 소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끔 지나가다 마주치면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아름다운 소녀라는 게 그들이 가진 비류향에 대한 인상이었다. 그렇게 알던 이가 반송장이 되어 있으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부하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은 체 나백천은 함께 따라온 딸에게 말했다.
“예린아, 네 도움이 필요하단다.”
“제, 제 도움이요?”
“그래.”
나백천은 당혹스러워하는 나예린에게 지금부터 자신이 할 일에 대해, 그리고 거기서 나예린이 해야할 일에 대해 간략하고 빠르게 설명했다. 내공으로 깨지고 망가진 기맥을 일시적으로 감싸 보호하는 것. 그러나 완전히 망가져 손을 댈 수 없는 부분은 피해야 하는 것. 그러기 위해 용안으로 시급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가려내어야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단시간에 끝나지 않으며 매우 힘들 것이라는 것.
“할 수 있겠느냐.”
“……할게요.”
하늘 없이 새가 살 수 있을까天鳥之關. 물 없이 물고기가 살 수 있을까水魚之交. 그대 없는 삶은 지옥과 같은데 어찌 여기서 물러설까. 나예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나백천은 항상 유약하게만 느껴지던 딸아이의 결의에 감탄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으며 비류향의 하단전과 상단전─아랫배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시작하마.”
“네.”
나예린의 대답과 동시에 나백천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내공을 흘려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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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8일. 제 생일입니다. 그래서 연참으로 자축하려 했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생일인데 왜 그런 고난의 행군을 해야하는가 싶더라구요. <-
-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오면 왜 그리 창작욕구가 치솟기 시작하는 걸까요. 정작 쓰기 시작하면 팍 식어버리지만요. […]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6.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6.
"아, 오셨습니까, 맹주님!"
"사인死因이 뭔가?"
"심장을 적출당했습니다."
"……."
보고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비가 심해 업무를 위한 출발이 지체되지 않았더라면 이 비보悲報를 저녁에나 들었으리라. 수하의 보고를 들으며 나백천은 정천맹 사천지부 지부장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피투성이였다. 한 사람의 몸에서 이만큼의 피가 쏟아질 수도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이미 복도까지 가득찬 진득한 혈향에 예상하고 있던 광경이었지만 가능하면 빗나가기를 바랐던 장면이었다. 특히나 그게 아끼던 수하의 죽음이라면 더더욱.
"어찌 그리 쉽게 갔는가 이 사람아. 어찌 그리 맥없이 갔어……."
얼굴에 씌인 천 하나로 생사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뼈와 살이 파헤쳐지고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가슴부위를 보면 생사는 싫어도 구분하게 되는 법이다. 명문세가의 가주가 맞이하기에는 너무나도 처참한 죽음이었다. 안타까움에 비난의 말이 흘러나왔지만 그것은 결코 진심이 아니었다. 서천西天의, 천겁령의 준동이 의심되는 이 상황에 유능한 이를 이렇게 잃다니.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 조직의 수장으로서도 아쉬운 순간이었다.
들것에 실려나가는 남궁현의 시신을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나백천은 그가 쓰러져있던 장소를 살펴보았다. 단서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싶은 심정이었다. 여전히 마르지 않은 피에 비릿한 혈향과 더불어 미지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동시에 지독히도 깔끔한 광경이었다. 피가 튀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망가진 가구도 없었고 흐트러진 기물 또한 없었다. 저항의 흔적이 없다는 말이었다. 대체 누가 어떻게 했길래 남궁세가의 가주를 이런 식으로 죽일 수 있었을까.
심장의 적출 방향은 앞. 게다가 방어흔과 저항의 흔적이 없다. 그렇다면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면 오대세가의 가주를 일격에 순살할 수 있는 은거기인이었던가. 허나 남궁현이 쓰러진 위치는 응접용 의자 근처로 아는 이가 찾아와 다가오다 당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러운 위치였다. 게다가.
"……사絲 변…… 아니, 마馬 변인가?"
피웅덩이에 아슬아슬하게 덮이지 않은 바닥에 피로 휘갈겨진 작은 글자가 있었다. 초서라 하기에도 조악한 글자였으나 생명이 다하여 스러져가는 와중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남긴 증거였다. 한참 동안 글자를 살피며 궁리하던 나백천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 떠졌다. 뇌리에 무의미하게 떠돌며 조각조각 흩어져있던 정보들이 순식간에 하나로 이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독문병기였던 '팔'을 가져간 서천. 악랄하기 그지 없었던 그의 무공과 기교. 외팔이. 안심할 수 밖에 없는 익숙한 상대. 여기 남겨진 한 글자.
일馹.
"……."
"맹주님? 맹주님?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괜찮네. 것보다, 자네 혹시 부총령을 보았는가?"
"부총령이라면 아까 천향루로 간다고 했습니다. 천둥 치는 날은 술이 잘 들어간다, 고……."
그 말을 하던 수하는 말하던 도중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피투성이였습니다! 부총령은 피투성이였는데, 그게, 너무 자연스럽게, 그래서──"
나백천은 그 뒷말을 듣지 못했다. 들을 겨를이 없었다. 이미 창문을 넘어 쏟아지는 폭우와 천둥번개 속을 돌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쿠르르르릉── 쿠쾅! 콰르르르릉!
천지를 울리는 천둥소리는 잠잠해져가는 듯 하다가도 예상치 못한 번쩍임과 함께 다시금 세상을 뒤흔들었다. 그때마다 나예린이 몸이 펄떡 뛰었다. 쉼없이 몰아치는 천둥번개 때문이기도 했지만, 눈을 감아도 눈가에 파고드는 심저心底의 사악邪惡이 자신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호랑이 입 안에 머리가 들어가 있더라도 이것보다는 희망적일 것이다. 바닥없는 늪도 이것보다는 긍정적일 것이다. 그 정도로 사내의, 나일천의 심상心想은 끔찍했다. 그나마 앞에 선 비류향이 없었다면 어찌되었을지 모른다. 혀를 물었을 수도, 창문 너머로 몸을 던졌을 수도 있다. 아니, 그게 가능할까? 자살은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생각조차 못하게 하는 압도적인 탁기 앞에서? 그렇기에 그저 방패처럼 앞에 버티고 선 소녀의 등 뒤에서 오들오들 떨 수 밖에 없었다.
등 뒤로 전해져오는 떨림에 비류향은 지금이라도 나예린을 품에 안고 달래주고 싶었다. 허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하는 건 이 악몽 같은 현실이 지나간 후에 할 일이었다. 허나 그게 과연 가능할까. 무공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힘도 못 쓰는 소녀 둘이 팔 하나가 없다고는 하나 건장한 남성을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추격을 뿌리칠 수나 있을까? 팔 하나가 없다고 해도 기본 체력과 체격에서 차이가 나는데? 게다가.
"어허, 뭐하고 있어. 이 숙부가 빗물에 젖어가면서도 여기까지 찾아왔거늘, 어찌 근본도 모를 계집 뒤에 숨어서 얼굴도 안 비추는 게냐! 자, 이리 오너라."
나일천은 마치 아이를 맞이하는 부모처럼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양 팔을 넓게 펼쳤다. 오른팔과 왼팔. 두 팔. 한 쌍. 본디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나 형제 간의 비무 이래 오랜 세월 그에게는 없던 것이 돋아나 있었다. 비록 소매 바깥으로 보이는 팔이 새카만 무쇠 같아 보였지만, 다섯 가락 열네 마디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팔이었다. 어떻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텅 빈 소매를 흔들며 돌아다니던 사내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했으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가 사지 멀쩡한 데다가 호위무사들을 소란 없이 살해할 정도로 강한 자라는 게 문제였다.
"허허, 그것 참. 예나 지금이나 부끄러움이 많구나. 아무리 그래도 숙부가 왔으면 얼굴을 비춰야지. 내 어릴 때부터 너를 가르쳤다면 이런 예의에 어긋난 행동은 하지 않았을 텐데."
피투성이인 사내가 하기에는 너무나 부드럽고 자상한 말투였다. 허나 용안 따위가 없어도 알 수 있는 광기狂氣가 들끓는 눈이었다.
소름끼치는 눈이다. 비류향은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수련한 자는 아니지만 백무후와 팔섬풍과 함께하며 짐승의 눈과 날카로운 살기殺氣 어린 눈빛을 겪어봤기에 구분 정도는 할 줄 알았다. 그렇기에 깨달은 것이다. 저것은 패륜悖倫을 행하는 자의 눈이다. 살고자 하는 짐승도 아니고 억울함과 분노에 불타는 인간의 눈도 아니었다. 오로지 탐욕과 아집에 얽메여 뒤틀린 자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네가 오지 않으니 내가 갈 수 밖에 없구나. 형님께서 너무 너를 감싸기만 하셨어! 내 형님을 대신하여 오늘 예절을 가르쳐줘야겠구나!"
짐짓 혼내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 모습을 직시하고 있던 비류향은 나일천의 얼굴이 추잡한 미소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색욕으로 가득찬 웃음. 그렇기에 소녀는 짐승조차 되지 못할 악귀가 발을 내딛는 순간 입을 열었다.
"물러서십시오."
"……."
바닥에서 떨어지려던 나일천의 발이 멈췄다. 그나마 남아있던 인간의 조각인 미소가 사라진 건 거의 동시였다. 지옥불에 빛나는 악귀의 얼굴이 저러할까 싶을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로 나일천이 울부짖었다.
"무공은 고사하고 제 몸뚱이 하나 간수 못하는 계집이 감히!"
사자후와 같은 포효. 어설프게 무공을 배운 이라면 곧바로 운기조식을 해야할 정도로 사특한 기세였다.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몸을 뒤흔드는 사이함에 속이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그러나 역으로, 내공은 고사하고 진원진기조차도 노사부에게 간신히 주입받은 몸이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상중하 삼단전과 전신 기맥이 망가진 비류향의 몸은 나일천의 탁기에 흔들리기는 했지만, 그 탁기를 몸 안에 잔류시키지 않고 모래사장에 쏟아진 물처럼 곧바로 흘려내버려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거센 바람은 깃대를 부러지게 하나 바람에 흩날리는 실타래는 끊지 못하는 법. 과거의 악재가 지금은 호재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비류향은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되려 등 뒤에 선 나예린을 지탱하며 외쳤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러서십시오. 맹주꼐서 윤허하시지도, 예린이가 허락하지도 않았습니다."
"……네 년이 감히, ……흠? 으음……."
그제서야 무언가를 감지한 듯 나일천의 눈이 비류향을 훑어내렸다. 미심쩍은 것을 보는 불신과 불쾌감, 그리고 업신여김이 뒤섞인 눈이었으나 이는 곧 경계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바로 눈앞에 있건만 기맥조차 잡히지 않았다. 몇 번 스쳐지나갈 때는 그러려니 했다. 형님꼐서 예린이 말벗 삼아 부른 년이라 했으니 필시 백도白道 어딘가의 후지기수리라. 그때의 나일천은 외팔이 한량이었기에 기맥조차 잡을 수 없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서천西天의 힘을 얻은 지금도 잡을 수 없다고?
"네 년, 그냥 병신이 아니었군. 어느 문파에서 온 거냐."
당장이라도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것 같은 섬뜩한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하자 비류향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무서웠다. 무섭고 두려웠다. 돌림병으로 죽을 날을 기다리던 그때와는 다른, 어찌될 지 알 수 없는 공포가 몸을 휘감았다. 사랑스러운 동생이, 존경하는 노야의 얼굴이 떠올라 울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만을 의지하며 떨고 있는 나예린을 떠올리며 참았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순간적인 도박이었다. 무공은커녕 범인凡人의 기력조차 가지지 못한 계집이 그런 거짓말을 한다면 대체 누가 믿을까. 그러나 비류향은 한 달 전 시장에서 만났던 나백천의 말을 떠올렸다. 기묘한 기맥이라 했던가. 무림 백도白道의 집약체인 정천맹의 맹주조차도 의심에 고개를 갸우뚱했던 자신의 몸. 이 보잘것 없는 몸뚱아리를 판돈 삼아 마음을 독하게 먹고 그럴 듯한 말로 상대를 속여 시간을 벌자. 짐승만도 못한 자를 막을 누군가가 올 때까지.
등 뒤에서 떨고 있는 이 아이를, 이 어린 것을 지켜야 한다. 맹주의 신의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무섭다. 허나 조금이나마 일찍 태어난 이로서, 어찌 겁먹고 물러서겠는가. 다짐과 함께 비류향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금부터 자신은 저 사내가 쉽게 덤빌 수 없는 무언가를 숨긴 무인武人이 되어야만 한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떨리는 손을 숨기기 위해 자연스럽게 소매를 늘어뜨렸다. 그리고 한 쪽 발을 살짝 앞으로 내딛으며 양 무릎을 살짝 굽혔다.
'무언가'를 하기 위한 것처럼.
'무엇인가'가 있는 것처럼.
노사부와 비류연의 수련을 곁눈질하며 배운 어설픈 흉내가 결코 자연스러울 리 없었다. 나일천 역시 헛점 투성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앞서 말했다시피 이 거리에서도 잡히지 않는 기맥의 희미함과 더불어 그 어설픔 때문이었다. 수십 년간 고개를 숙이고 등 뒤로 칼날을 갈아오면서 온갖 의심암귀와 모략을 일삼아왔던 사내는 경천동지할 힘을 얻고서도 정체불명의 상대에게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 누군가는 겁이라고 할 신중함이 몸에 배어 고정관념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도 우습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일천은 코웃음과 함께 출수出手하려 했다. 무엇이 있는지는 부딪쳐보면 알게 되리라. 설령 숨겨진 무언가가 있더라도 저 어설픈 꼴을 보아하니 쓰기도 전에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비류향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숙부가 조카를 탐함은 패륜悖倫이고, 색욕色慾으로 어린 아이를 범하는 것은 천도를 따르지 않음이니 의를 망각함不從天道卽忘義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으십니까?"
"……흐흐, 흐흐흐흐, 흐허허허, 흐하흐하흐하하하하하하하!!!!!!!"
광소狂笑. 그 단어가 이토록 잘 어울리는 이가 어디 있을까. 사람의 탈을 쓴 악귀가 웃는 모습이 이러할까. 입가에 흐르는 침에도 개의치 않은 체 그는 미친 듯이 웃었다.
"패륜? 천도? 후, 흐흐흐흐, 흐하하하하하하! 무림은 강자지존强者之存이다! 무법無法의 땅이었어! 흐후하흐하하하하! 되먹지도 않는 예법禮法을 나불거리면 내가 물러설 것 같더냐? 응? 그래? 아니면 네가 예린이 대신 몸을 바치기라도 할 테냐? 열다섯이라 했던가? 혼례를 올릴 때가 된 계집이니 패륜도 아니고 천도에도 어긋나지 않는구나? 네 그리하면 예린이는 건드리지 않겠다 약조하마. 어떠냐? 응?"
"그럴 수 없습니다."
"……후흐흐흐, 그래. 그동안 예린이를 아끼는 척 했지만 결국 네년도 사람이야. 제 몸뚱이가 제일 중요하지."
일언지하의 거절에 나일천이 비아냥거렸다. 허나 곧바로 이어진 소녀의 말에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인을 해치니 적이요賊仁者 謂之賊, 의를 해치니 잔이라賊義者를 謂之殘, 잔적한 자를 일부라 한다殘賊之人 謂之一夫."
"……네 이년."
맹자 양혜왕 장구 하편 제8장 孟子梁惠王 章句 下編 第八章. 나일천이 마음에 들어하는 문구였지만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문구의 해석은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도道를 품은 군자君子도 아니며, 신념信念을 지키는 패자覇者도 아닌, 추잡한 욕망만 들어찬 일부一夫의 약속을, 아니, 조카를 겁탈하려는 색마色魔과 어찌 약조를 나눌 수 있단 말인지요?"
"이 빌어먹을 년이─────!!!!!!!!!!!!!!!"
와장창창!
실성한 듯한 사내의 발길질에 탁자가 소녀들의 곁까지 날아와 나뒹굴었다. 일부러 그런 것이리라. 그러나 비류향은 바로 옆을 스쳐지나가는 탁자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아미산을 함께 오르내리는 백무후와 팔섬풍의 장난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되려 침착하게 함께 날아든 반짇고리 안에서 바늘이 걸린 실을 하나 꺼내 손가락 끝에 감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팔을 내려 소매로 손끝을 가렸다. 동생 비류연이 비뢰도를 수련하던 모습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떨림없이 자연스럽게 실을 감는 소녀의 모습이 나일천에게는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역시 이 년은 무언가가 있다. 스스로가 만든 의심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나일천은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하는 속내를 감추고 말했다.
"설마 그 바늘 하나로 나를 어찌할 수 있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예羿는 화살 하나로 태양을 떨어뜨렸습니다."
"흥! 말은 잘 하는구나. 혓바닥이 아주── 잘 움직여!"
사천지부장 남궁현의 목숨을 빼앗았을 때와 같은 살수殺手가, 이번에는 소녀의 목을 노리고 펼쳐졌다.
#####
콰르르르릉! 데구르르르…….
번개와 함께 노인의 손에서 떨어진 밥그릇이 바닥을 굴렀다. 내용물은 이미 노인의 뱃속으로 들어가 있었고 그릇은 튼튼하기로 소문난 고급 도기였기에 깨지지는 않았으나 식사 분위기를 깨트리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분위기 파괴의 공신인 노인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이마를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소녀(?)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집으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소녀가 지어 올린 밥이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흑, 죄송합니다, 어르신. 다시 지어오겠으니 부디 매질만은, 꺅……?!"
따악!
"비명소리도 여성스러워지는 걸 보니 수련의 성과가 나타나는구나. 여튼 스승을 놀리려 들다니. 벌이다, 이 녀석아."
"……."
노인이 그리 말했으나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답할 수가 없었다. 노인이 신속으로 내던진 젓가락에 맞은 이마를 부여잡고 고통을 참기 위해 몸을 떠는 것만이 소녀(?)─비류연에게 허락된 유일한 행동이었다. 제자의 모습을 한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던 노사부는 싱숭생숭한 얼굴로 방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쏴아아아아── 우르르릉──…… 콰르르르릉!! 우르르…….
물내음과 함께 요란한 천둥번개가 몰아쳤다. 이미 사람의 말로는 표현조차 하지 못할 경지에 든 노사부에게는 별볼일없는 자연현상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노인의 마음이 썩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편하지 못한 상태에서 썩 쾌적하지 못한 자연환경에 둘러쌓여 있자니 괜스레 심란해졌다. 맛있는 음식도, 훌륭한 술도, 그리고 모든 것을 뒷바라지할 노예 겸 제자도 있건만 노사부는 마음 한 켠에 들어선 찝찝한 감정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끄응……."
"……뭐가 그리고 신경쓰이십니까, 사부님?"
"거 참, 그러고 있을 때는 말버릇 좀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사부님?"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 비류연이 이마를 비비며 퉁명스럽게 묻자 노사부는 근래 몇 번이나 했던 말을 입에 담으며 비류연을 바라보다 말을 멈추었다. 쉽사리 보기 힘든 사부의 넋 나간 모습에 비류연이 불안을 느끼며 되묻자, 노사부는 그제서야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스승의 건강을 걱정한 제자는 집요하고 끈질기게 안위를 묻다가 "사부님,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그렇다니까. 뭘 그걸 몇 번이나 물어봐?" "……갑자기 제가 어른으로 보이신다던가, 애들 간식이 먹고 싶으신다던가," "노망난 거 아니다, 욘석아!" "끄흐으억?!" 젓가락을 맞았던 바로 그 부위에 노사부의 탄지공을 맞고 나서야 물러났다.
"향아……. 잘 있지……?"
빠른 시일 내에 저 놈과 함께 천향루에 가봐야겠군. 노예 겸 제자가 저녁상을 정리하는 동안 노사부는 처마 밑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비류향이 현 무림의 중진이자 경지에 도달한 고수라 할 수 있는 남궁현조차도 즉사를 면했을 뿐이었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나예린 덕분이었다. 숨막힐 듯한 나일천의 독심毒心이 비류향에게 집중되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예린은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를 용기로 연상의 소녀를 옆으로 잡아당겼다. 그로 인해 내뻗은 무쇠팔의 살상 범위에 나예린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일천이 급히 방향을 튼 덕분에 소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대신 왼쪽 어깨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절기도 아닌 단순한 공격의 후폭풍에 휘말려 벽까지 날아가 쳐박힌 소녀들을 본 나일천은, 그제서야 비류향이 무공은 고사하고 평범한 일반인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분노했다. 기만당한 분노는 단순했지만 화풀이는 단순하지 않았다.
나일천은 왼손 하나만으로 쓰러져 신음하던 비류향의 목을 우악스럽게 붙잡아 벽에 밀어붙여 올렸다. 아무리 건장한 성인이고 벽에 밀어붙이는 상태라고는 해도 열다섯 소녀의 몸을 한 손으로 들어올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서천의 무공으로 사이한 내공을 얻게 된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그는 기괴한 쇳덩어리 오른팔을 비류향의 단전 위에 얹으며 말했다.
"보통 무림인은 말이야, 단전이 파괴되면 즉사하거나 폐인이 되지. 일반인들도 뭐, 비슷하던가? 자, 그럼, 이미 단전이 깨지고 기맥이 망가져 내공이 없는 인간은 말이야. 과연 죽을까 살까?"
"그, 윽……!"
"한 번, 알아보자꾸나!"
"────────!!!!!!!!!!"
한떄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서천의 독문병기를 타고 들어오는 나일천의 내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격통이 되어 비류향의 몸을 휘저었다. 평범한 무인이나 일반인이었다면 단숨에 온몸의 혈도가 뒤틀리고 기맥이 망가지며 즉사했을 만큼 악랄한 수법이었다. 그러나 이미 망가진 비류향의 몸은 나일천이 우겨넣는 내공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상하지 않았다. 폭포에 바가지를 들이밀어 물을 받으려고 하면 거센 물줄기가 바가지를 깨트리지만, 채를 내밀면 틈새로 물이 빠져나가 멀쩡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허나 그것이 행운이라고 하기에는 소녀가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 너무나도 컸다.
"──────, …………! "
"졸릴 정도로 지루한가 보구나. 하긴 무작정 세게 매질하는 게 능사는 아니지."
"……크흡, 흐으, 끄으으윽, 그륽……!"
""어떠냐, 이제 좀 정신이 들지?"
"─, ──, 컥──!!!"
나일천은 비류향의 반응을 보며 불어넣는 내공의 양과 강약을 조절했다. 쉽게 죽일 수는 없었다. 고작 이러한 꼬맹이에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사내는 최대한 고통을 주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비류향은 목이 졸려 숨을 쉬지 못하는 것도, 피가 철철 흐르며 욱신거리는 어깨도 잊을 수 있었다. 가시나무가 큰 바람에 흔들리는 것과 같은 기세로 내장을 헤집는 격통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런 반송장 몸뚱이였으니 기맥이 안 잡히는 거였는데 말이야. 응?"
"윽──, ──────!!!"
"그런 것도 모르고 뭐가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허 참, 대단해. 아주 대단해. 여태껏 이렇게 나를 엿먹은 건 네 년이 처음이야. 자랑스러워 해도 좋아!"
"─────!! 하악, 륽……."
그리고 채 역시 폭포 아래 오래 두면 망가지는 것은 자명한 이치. 어느 덧 비류향의 입가에는 기침과 함께 검붉은 액체가 함께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상의 증거였다.
"……."
나예린은 그 광경을 보며 공포에 휩쌓였다. 용인의 능력은 비류향이 겪고 있는 끔찍한 고통을 아무런 여과 없이 전달해주었다. 마치 자신이 고문당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일천이 내뿜는 광심狂心과 비류향에게서 전해져오는 고통이 소녀의 심상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예린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
도망쳐, 린아. 어서.
"윽──, 악──…………."
"어른을 놀리니 기분이 좋더냐? 응? 그래? 어디, 음?"
"────!!! ……, ……!"
"대꾸조차 안하다니. 이래서 길가에서 굴러먹던 년들은 안된다니까. 예의가 없어, 예의가!"
"그윽──, ────!!!!!"
어서. 도망쳐. 린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의 격류 속에서 도망치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그 순간에도 자신을 걱정하는 비류향의 마음에 나예린을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를 용기로 나일천에게 달려들었다.
"숙부! 놔주세요! 언니 놔주세요! 숙부! 언니를,"
"귀찮게 굴지 말고 얌전히 있어!"
"꺄아악!"
쿠당탕탕!
거칠게 내쳐진 나예린의 몸이 벽에 부딪쳤다 떨어졌다. 그 모습에 나일천은 흥이 식었다는 듯 공력 주입을 멈추었다. 침과 피거품이 뒤섞인 액체가 비류향의 입가를 타고 흘러 손까지 적시고 있었다. 더럽게. 나일천은 눈살을 찌푸리며 슬슬 이 행위를 그만두고자 했다. 어차피 이 소녀는 전채요리였다. 주식은 말할 것도 없이 조카딸인 나예린. 수작을 걸어두어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인 친형 나백천이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한 상태기는 했지만 맹신할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비류향 때문에 시간을 소비한 상황이었다. 이 년은 예린이를 맛보고 남는 시간에 가지고 놀아도 충분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던 나일천은──
"뭐, 네 년은 나중이다. 지금은 우선 예린이를──"
따끔. ──아주 작은 통증을 느꼈다.
"……."
말 그대로 따끔이었다. 그 통증의 원인은 비류향의 손끝에 걸린 바늘이었다. 손끝에 걸어두었던 그것이었다. 그 작은 바늘 끝이 나일천의 손을 찌르고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돌린 나일천은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피거품 섞인 침을 흘리면서도, 눈조차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도 자신을 막아서려고 하는 소녀의 모습에 사내는 말없이 오른손을 소녀의 단전 위에 얹었다.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냐, 이 빌어먹을 년!!!!!!!"
나일천은 전력을 다해 일격一擊의 내공을,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쏟아넣은 후, 비류향의 몸을 나예린이 쓰러진 쪽으로 내동댕이쳤다. 콰앙! 털썩. 물 담은 가죽주머니 같은 소리가 났다. 허나 바닥에 나뒹구는 것은 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나예린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 비류향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어, 언니……? 언니……? 눈 떠요……. 일어나요…… 꺅!"
"숙부가 예의를 가르쳐주고 있는데 어찌 다른 사람을 보는 거냐, 예린아!"
"느, 놔주세요……. 싫어요……!"
"가만히 있어!"
짜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나예린의 고개가 세차게 꺾였다. 뺨이 화끈거리고 얼얼했다. 그와 동시에 혀끝에 찝찔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제서야 나예린은 자신이 바닥에 눕혀져있고 그 위에 나일천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옆 벽에는 비류향이 벽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아니, 저것을 앉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쓰러지지조차 못했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앉아 죽은 시체가 저러할까 싶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소녀에게 뭐라 말 한 마디 전하기도 전에 나일천의 목소리가 나예린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이런, 이런, 예쁜 얼굴이 엉망이 되었구나. 그러길래 숙부 말을 잘 들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잖느냐. 뭐, 이건 이거대로 독특한 맛이 있지."
악귀는 나예린의 턱과 뺨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에 혀를 댔다. 뱀의 혓바닥도 이것보다는 덜 소름끼칠 게 분명했다. 기묘한 신음성과 미지근한 입김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공포로 몸이 굳은 소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나일천은 께름칙한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으로, 날카로운 쇠 손톱으로 천천히 소녀의 가녀린 교구 한가운데를 따라 선을 그었다.
사라락.
날카로운 칼날은 비류향이 한 달 동안 공들여 만든 옷을 잔혹하게 갈라버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소녀의 나신에 나일천의 욕정과 광기가 화산처럼 들끓어 올랐다. 눈을 질끈 감아도 용안을 타고 파고드는 심상에 나예린은 숨이 막혀왔다.
와장창창!
"네 이노오오오오오오옴!!!"
노호와 함께 몰아친 정천맹주 나백천의 새하얀 검기劍氣가 나일천을 날려버린 것은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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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포맷하려는데 usb 인식이 되지 않아 하루를 날려버리고 이제서야 겨우 올립니다. 원래대로라면 00시 땡 하고 올릴 예정이었는데. 여튼 다음 편은 다음 주 수요일입니다.
- 하얀 늑대들의 카셀처럼 비류향을 무력 상향 시킬 계획은 전혀 없습니다만, 나중에는 전개하기 편하도록 호신술 정도는 가르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 편 정말, 무공 하나 없는 주인공을 비뢰도 세계관에서 굴린다는 건 정말…….
- 검령사를 읽었습니다. 청민 님 어서 써주시죠! <-
- 4월 5, 6일 포병, 4월 7, 9일 별의 바다, 4월 8일 하늘과도 같은 그대, 4월 10, 11일 세이야가 이렇게 일주일간 연참할 예정입니다. 음? 앗, 오늘의 날짜가!
- 타입문넷 Rudein님, 조아라 sEcho님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