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5.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5.
주객酒客들의 고성방가조차도 사라진 시간에 밤짐슴이나 분간하고 다닐 어둠이 내린 시간이었다. 그러한 어둠 뚫고 한 인영이 정천맹주 진천뇌벽검 나백천이 머무르고 있는 귀빈실의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이미 초목들도 잠든 시간인지라 대답이 들려올 리가 만무했으나 놀랍게도 반응이 있었다.
"들어오게."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작은 소리를 포착한 인영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솜을 누빈 신발이라도 신은 것을까. 그의 발걸음에는 자그마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백천의 방으로 들어온 인물은 쓰고 있던 초립을 벗었다. 혹여나 창문 너머로 새어나갈까 두려워하듯 작게 켠 등불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사천 지부장 남궁현이었다. 그를 보며 나백천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많이 놀랐는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다른 주머니 채우는 일 숨기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허허허, 사람하고는."
짖궂은 농담에 웃음이 피어났다. 그러나 곧 웃음기를 지운 나백천은 품 안에서 서찰 두 장을 꺼내 남궁현 쪽으로 내밀었다. 하나는 낡은 것이었고, 하나는 비교적 새 것이었다. 그것을 본 남궁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건……."
"2년 전, 본부에서 일어난 도난사건을 기억하고 있나?"
"제칠비고 도난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기억하고 있습니다."
2년 전이라면 남궁현 역시 본부에 적을 두고 있을 때였다. 정천맹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일곱 겹의 감시를 두른 엄중한 창고가 뚫린 것을 어찌 잊겠는가.
"음, 무엇을 도난당했는지는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나백천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남궁현은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정천맹주가 입을 열고 도난당한 물품과 그 유래를 설명하자 남궁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남궁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그는 낡은 서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그런 일이……. 그렇다면 이 서찰은……."
"그날 밤 범인이 두고 간 것일세."
"역시……."
남궁현은 낡은 서찰을 내려보다 나백천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나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었다. 그러자 남궁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서찰을 펼쳤다.
『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간다. 그동안 잘 보관해 줘 고맙다. 다음에 보자. -빚을 진 자가- 』
두 번, 세 번 읽어도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서찰을 원래대로 접어 내려놓은 남궁현은 또다기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서풍의 광란'……. 도난당한 것이 서천西天의 독문기문병기였다니……. ……설마, 서천이 아직 살아있다는……!"
남궁현의 나이가 올해로 쉰이다. 일반인이었다면 노년의 나이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강호에서 보자면 젊은 축이었다. 그런 그에게 100년 전의 천겁혈세는 전설 속 이야기와 다름이 없었다. 대전에 참전했던 그의 조부로부터 간간히 듣기만 했던 일이다. 그러나 조부의 이야기 속에 담긴 공포와 절망은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동요했던 것이다.
"그건 모르는 일이야. 그러니 쉽게 동요하지 말게. 적들이 바라는 게 바로 그것일 수도 있어."
"으음,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나백천의 지적에 간신히 정신을 되돌린 남궁현은 자신의 실책을 시인했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만 하더라도 서천멸겁이 쓰던 무기가 사라졌다는 말 한마디에 이토록 동요하는데, 이 사실이 공표되기라도 한다면 어떠할까. 무림 전체가 술렁이게 될 것이다. 설령 정말로 서천멸겁이 없다고 하더라도 정사흑백 구분 없이 강한 심리적 부담감을 느낄 게 분명했다.
"이제 왜 내가 이 늦은 시간에 자네를 불렀는지 알겠는가? 모든 판단은 사실 확인을 마친 후에 내려도 늦지 않네."
"명심하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저것을 펼쳐보게."
남궁현은 새 서찰을 펼쳐보았다.
『바야흐로 때가 되었다. 빚을 청산할 때가! 서쪽 관문을 넘어 서쪽 끝에서부터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할 것이다. -빚을 진 자가- 』
내용을 몇 번 곱씹어 읽은 남궁현은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서쪽 관문은 옥문관일 것이고, 서쪽 끝이라면 이곳, 사천땅이겠군요."
"그래. 그래서 내가 이곳으로 온 것일세."
나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 서찰은 그를 안마당인 본부에서부터 끌어내기 위한 함정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백천은 딸인 나예린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었다. 자신이 없는 정천맹에 놔두느니 차라리 자신의 곁에 두는 게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다. 함정이든 아니든 직접 나서야 했다. 이것은 일종의 도전장이기도 했다.
"2년 만에 나타난 유일한 단서라네.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야."
"바로 조사에 착수하겠습니다. ……허나, 너무 막막한 일이군요."
수하들에게도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이상 번거로움은 물론이거니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조차도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나백천이 말했다.
"작은 단서는 있네."
"무엇입니까?"
"100년 전, 천무삼성天武三星께서 그 자의 오른팔을 잘랐네."
"오른팔이라……."
남궁현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서천멸겁의 독문병기는 그의 팔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권법이라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팔이라는 뜻이었다. 몸에서 잘려나간 팔이 100년 넘게 멀쩡할 리가 있겠느냐마는, 그건 그것이 사람의 살이 아닌 차가운 쇳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주제에 진짜 살덩어리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니 믿을 수가 없는 얘기였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기로 했다. 만약 서천멸겁이 살아있다면? 2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이러한 도발을 펼치는 이유가 100년 동안 몸에서 떨어져 있던 독문병기의 조정을 마쳤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찾아야 하는 건 무엇일까. 곰곰히 고민한 끝에 그는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입에 담았다.
"외팔이였던 자, 허나 지금은 외팔이가 아닌 자를 찾아야겠군요."
"내 자네에게 이곳을 맡긴 게 정말 잘 한 일인 것 같네. 어찌 그리도 정확하게 내 생각을 꿰뚫나?"
"과찬이십니다."
담백한 반응이 오갔다. 그만큼 막중한 업무였다. 실패하면 사천의 실마리를 놓치는 꼴이고, 성공하더라도 여차하면 사천과 맞서야 하는 일이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으나 이럴 경우에는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압박감에 한숨을 내쉬던 남궁현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물었다.
"……비류향이라는 그 소저는 어떻습니까?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자네는 그 아이가 외팔이로 보이는가?"
"허나 끄나풀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맹주님께서 이곳에 오시고 얼마 되지 않아 만났다는 게 수상합니다."
"내 사람을 시켜 뒷조사를 해봤네만, 거짓이 없었네. 실제로 그 아이가 살았던 마을도 있었고, 돌림병에서 살아남은 이들 역시 그 아이에 대해 증언해줬고."
"허나 특이한 기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인神人이 몸을 살폈다고는 하지만, 그게 혹여 그들이 몸을 만져 금제禁制를 건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자네라면 그토록 특이한 세작을 놓겠는가?"
"맹주님."
지부장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백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나 역시 그걸 의심해본 적이 있네. 하지만 그런 걸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는 이가 바로 곁에 붙어있지 않은가?"
"……설마, 예린이가?"
"그 설마일세. 덕분에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지."
믿음을 위한 의심이었다. 믿고 싶었기에, 그렇기에 나예린은 난생 처음 스스로의 의지로 용안龍眼을 전개하여 비류향을 샅샅이 살폈다. 결과는 순백純白이었지만 영혼까지 뒤흔드는 충격에 비류향은 하루 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 다음날에야 간신히 눈을 떴다. 그 동안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나예린은 연유를 묻는 비류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믿고 싶었노라고. 그래서 한 행동이었다고. 혼이 날까, 미움받을까 두려워하는 어린 소녀를 향해 비류향은 물었다.
"이제 믿을 수 있겠니?"
"……네."
"그래, 그럼 됐어."
몸 한 번 앓고 신뢰를 얻었으면 남는 장사지. 열다섯 소녀는 그렇게 덧붙였다. 곁에 함께 있던 나백천이 경탄할만한 대범함이었다. 그와 관련된 얘기는 하지 않았으나 남궁현은 용안으로 확인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용안으로 살펴 아무 것도 없았다면 믿을 수 밖에 없겠군요. 어찌되었든 서천에 대한 정보,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네."
그렇게 말을 마친 남궁현은 왔던 것처럼 초립을 쓰고 조용히 객실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백천은 두 편의 서찰을 품에 갈무리했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가. 불안과 더불어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정녕 서천멸겁이 나타날 것인가. 과연 일신一身의 힘으로 그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혹여나 다른 멸겁들이 함께 있다면 어찌될 것인가. 그렇게 되면 예린이는. 지켜줄 이가 사라지면 그 아이를 누가 보살펴줄까.
결국 나백천은 닭이 울고 아침햇살이 방을 비출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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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이토록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어머니의 태반이 아니라 스스로 숨 쉰 것은 이제 고작 십이간지를 일순一巡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언제나 고통스러운 순간들 뿐이었고, 찰나의 안식조차도 그저 한 숨 돌릴 수 있을 뿐인 세월이었다. 하루하루가 메마른 사막과 음습한 늪지를 헤쳐나가는 느낌이었다. 나예린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과거는 그런 잔혹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비류향이 오고 나서는 그 반대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고통에 대한 보답처럼 너무나도 행복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주식이 담긴 그릇을 앞에 두고 찬은 그 위로 놓는 거야. 오늘처럼 누군가와 함께 먹으면 가운데 두고. 젓가락은?"
"받침대 위에요."
"응. 먹기 전에는 어떻게 말하지?"
"잘 먹겠습니다, 라고 해요."
"맞아. 자, 이제 먹자.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다 먹은 후에는?"
"잘 먹었습니다."
"응. 나중에 동생이 생기면 린이 네가 언니로서 가르쳐줘야 돼. 알겠지?"
"네."
그릇 놓는 법. 바르게 앉는 법. 입 안에 음식물이 있을 때는 말을 삼가하는 것, 반찬을 헤집지 않는 것, 식사 때의 인사법 등을 배웠다.
"젓가락 한 쪽은 약지와 엄지 안쪽으로 잡고, 다른 한 쪽은 엄지 끝으로 고정하면서 검지와 중지로 움직이는 거야."
"……어려워요."
"처음엔 다들 그래. 자, 이렇게."
젓가락질은 식사 후에 따로 더 배웠다.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나예린이 울상을 짓자 비류향은 곁으로 다가와 세심하게 집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하다보니 조금씩 익숙해져갔다.
"속옷이 작구나. 좀 더 큰 걸 입어야겠어."
"중요한가요?"
"응. 몸에 맞는 속옷을 입어야 쑥쑥 크니까. ……나도 저잣거리서 들은 장사꾼에게 얘기지만."
"일부러 새 것 사게 하려는 걸 거에요."
"후훗, 그럴지도 몰라. 그치만 지금 속옷 입고 있으면 답답하지?"
"……네."
"그럼 새 걸 사야지. 그리고 속옷을 잘 입어야 겉옷도 맵시가 살아나지. 옷고름과 치마 매듭짓는 법 기억하니?"
"네. 그렇게 묶었어요."
"어디 보자. 응. 잘했어."
옷을 정갈하게 입는 법을 배웠다. 단순히 몸을 가리도록 꽁꽁 싸매는 것이 아니라 속옷부터 겉옷까지, 적삼부터 치마까지 어디에 두르고 어떻게 입으며 어찌 매듭지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우선 큰 빗으로 빗고, 그 다음에 작은 빗으로 빗어야 머릿결도 안 상하고 당겨서 아프지도 않아."
"젖어있어도 괜찮나요?"
"어지간하면 말리고 해야지."
"여름에는 부채질하면 되는데, 겨울에는 힘들 것 같아요."
"그래. 겨울에는 머리가 시려서 부채질 하기 힘들지."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부채 같은 게 나오면 좋을 텐데……."
"그러게. 그런 게 있으면 참 좋겠다."
머리 빗질 하는 법을 배웠다. 두피가 당기지 않도록, 중간에 엉키지 않도록 빗는 법을 배우며 서로의 머리를 빗겨줄 때 도란도란 얘기하는 게 정말 좋았다.
"여기서는 삼현을 튕기면서, 언제나 당신을 그리며我永慕上────……."
"언제나 당신을 그리며……."
"그리고 오현과 일현을 타고, 돌아올 날을 기다립니다待上復日也──……."
"돌아올 날을 기다립니다……. 음音 틀리지 않았나요?"
"……아, 응. 실수했네. 처음부터 다시 해볼까?"
"네."
음악과 금琴을 배웠다. 비류향 역시 비류연이 노사부에게 금을 배울 때 투덜거리는 걸 달래며, 혹은 누이에게 들려준다며 튕기던 것을 곁눈질하고 몇 가지 배운 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아는 곡조도 많지 않고 금 역시 때때로 음이 튀었지만, 두 소녀는 그때마다 까르르 웃으며 금을 타고 노래를 불렀다.
"거기서는 엄지 손가락으로 윗 실을 걸고, 아랫 실 사이로 빼는 거야."
"이렇……게…… 아……."
"그 상태로 엄지와 검지를 펼쳐봐."
"아, 아아……, 와……. 됐어요!"
"자, 그럼 이번에는 내 차례지? 자, 풀어볼래?"
"……언니이……."
"알았어. 가르쳐 줄게. 이번에는……."
실뜨기를 배웠다. 소일거리 삼아, 그리고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나예린을 위해 천과 재봉도구를 받아온 비류향은, 소녀를 위한 새 옷을 지으면서 남는 실로 틈틈히 실뜨기를 가르쳐주었다.
비류향은 그렇게 많은 것들을 가르치면서 틈틈히 수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일상의 신변잡기와 생활지식부터 경전과 고문古文까지, 민담民談에서부터 경극과 사서史書까지 다종다양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물론 제대로 배우지 못한 소녀였는지라 큰 흐름이 없어 번잡하고 조잡했지만,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왔던 나예린에게는 하나하나가 모두 귀하고 즐거운 이야기였다.
함께하는 시간 모두가 좋았지만 나예린은 특히 비류향과 목욕할 때가 제일 좋았다. 이때는 보통 특이체질로 인해 비류향이 쪽잠에 들어 대화는 없었지만, 세 살 연상인 소녀의 품에 기대어 몸을 담그고 있으면, 모든 소리가 아련히 사라지면서 고요해져 마치 태아가 되어 어머니 뱃속에 있는 것처럼 평온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하나만 놓고 보면 별 것 아닌 사소한 일상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상. 그러나 타고난 미색美色과 용안龍眼은 소녀로부터 그러한 일상을 빼앗아갔다. 이것이 소녀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면 이토록 괴롭지는 않았으리라. 허나 여태껏 소녀의 삶에 선택은 없었다. 어디서나 넘실대는 사람의 악의와 욕망에 쫓기고 또 쫓겨 도망칠 뿐이었다. 만약 소녀의 부친이 무림의 양맥兩脈인 백도白道의 중심 정천맹正天盟의 주인된 자가 아니었다면, 그 무공이 절정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었다면 나예린의 과거는 지금보다 더 참혹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만큼 인고의 세월 끝에 나타난 비류향은 나예린에게 있어 구원이었다. 사욕 없이 자신을 마주대해주는 상대였다. 부모님을 제외하면 거의 유일하게 거부감 없이 살을 맞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때는 어머니처럼, 어느 때는 친구처럼 곁에 있어주는 이였다. 어찌 기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찌 미소 짓지 않을 수 있을까.
해맑게 웃게 된 딸아이의 모습에 나백천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비록 자신의 손으로 딸아이에게 웃음을 되찾아주지 못한 것은 아쉬워했지만 그는 아이의 행복을 우선시할 줄 아는 참된 아버지였다. 서천의 수작이 언제 펼쳐질지 몰라 걱정하면서도 여식의 미소를 볼 때마다 그는 마음의 평온을 얻어갔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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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이 덜컹거리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천둥번개가 요란했다. 꽁꽁 닫힌 창문에 가려도 알 수 있을 만큼 거친 날씨였지만 사내는 물끄러미 탁자 위에 놓인 것을 내려다보았다. 철로 만들어진 작고 기다란 관棺이었다. 산덩쿨 칡뿌리마냥 얼기설기 얽힌 듯 하면서도 정교하게 내용물을 감싸는 쇠사슬은 이 관이 얼마나 엄중한 물건인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폭풍이 부는구만……. 크흐흐흐……. 좋아, 이 녀석과 참 잘 어울리는 밤이 되겠어."
사내는 한손을 뻗어 이중 삼중으로 철저하게 휘감긴 쇠사슬을 걷어냈다. 양손으로 해도 버거울 작업을 굳이 한손으로만 하는 이유는 사내가 외팔이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텅 빈 오른소매가 문틈 새로 흘러들어온 바람을 타고 맥없이 펄럭였다. 힘들고 괴로울 법도 하건만 사내는 싱글벙글 웃으며 작업을 계속해나갔다. 되려 콧노래를 흥얼거리듯 중얼거렸다.
"인을 해치니 적이요賊仁者 謂之賊, 의를 해치니 잔이라賊義者를 謂之殘, 잔적한 자를 일부라 하니殘賊之人 謂之一夫 일부를 죽였다는 말은 들어봤어도聞誅一夫紂矣 군왕을 시해한 적은 없나이다未聞弑君也."
맹자 양혜왕 장구 하편 제8장 孟子梁惠王 章句 下編 第八章의 내용이다. 유교가 시작되고 생활 깊숙한 곳까지 뿌리내린 나라에서 비록 성현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언급하지 않는 내용이었다. 내키지 않으면 설령 왕이라 한들 뒤엎어버릴 수 있다는 내용이 쉽사리 용인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일천은 그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왕일지라도, 다시 말해서 아무리 높고 귀한 이라도 베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만인지상萬人之上도 그러할진데 친형이라고 아니 그럴까. 맹자께서 살아돌아오신다면 '그건 네놈의 욕망일 뿐이다!' 하고 노호할 해석이었으나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달칵.
쇠사슬이 모두 걷히자 자연스럽게 상자의 잠금쇠가 열렸다. 그와 동시에 오랜 세월 잠들어있던 내용물이 빛을 받았다.
"이것이……."
묵빛으로 빛나는 사람의 오른팔이었다. 아니, 사람의 것으로 보일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의수義手였다. 그러나 꺼림칙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신체 일부의 형태를 한 기괴함 때문인지 아니면 수많인 이의 피를 머금은 흉악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찌되었든 불길한 물건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흐흐, 흐히, 흐흐흐, 흐흐흐흐흐……."
허나 사내는 웃었다. 광기를 머금은 황홀한 미소를 그리며 오른쪽 소매를 걷어 흘러내리지 않게 물었다, 턱을 타고 흐르는 침에도 개의치 않고 실성한 듯 웃음소리를 흘리며 사내─나일천은 허공에 드러난 어깨에 의수를 들이댔다. 원래 팔이 있어야 했던 자리, 그러나 지금은 텅 빈 자리에 불길한 묵빛 철완이 닿았다.
"으음, 큭! 크으으으윽! 쉽게, 크흐흐흐, 굴복하지느으으은! 않는다는 게로구나! 흐히히히, 그래! 그래야 서천의 이름이 아깝, 지 않지이이이이이이!!!"
고통의 비명과 열락의 탄성이 뒤섞인 절규가 흘러나왔다. 나일천은 마치 주인의 목을 노리듯 하는 의수를 제압하려 안간힘을 썼다. 어찌보면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핏발 선 눈으로 광소狂笑를 터뜨리는 지옥의 수라가 저리할까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우우웅──
몸 안을 울리는 공명음과 함께 의수가 갑작스레 축 늘어졌다. 그 모습에 나일천은 천천히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기리릭.
희미한 마찰음이 났지만 진짜 사람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신이 생각한대로 움직였다. 폭발적인 환희가 그의 가슴 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길고긴 인고의 세월은 끝이 났다. 때가 되었다. 그리 생각하며 나일천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너무나도 달콤할 복수의 열매를 수확하러 가는 순간이었다. 평생 기억에 남을 순간을 이런 엉망인 모습으로 남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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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몰아치겠네."
산중턱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소녀(?)는 습기를 머금은 거친 산바람에 펄럭이는 치마를 내리누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물기 어린 풀내음이 진동했다. 아무래도 요란하게 쏟아질 듯 했다. 구름의 두께와 색깔을 보아하니 천둥번개를 동반한 먹구름이 분명했다. 우르릉. 쿠르릉. 용이 꿈틀거리기라도 하는 것 마냥 하늘이 울렸다.
"류…… 아니 연비燕飛야! 빨래 걷어라! 폭풍우가 올 게다!"
"네에──."
등 뒤 작은 오두막에서 들려온 노사부의 목소리에 연비라 개명당한 것도 모자라 성별까지 일시적으로 박탈당한 소년 비류연은 불만스러운 듯 말끝을 늘리며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정녕 여아女兒가 투정하는 것이라 보았을 것이다. 고된 수련(?)의 성과였으나 본인은 그리 썩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저 어서 사부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어 이 세상에 하나 남은 유일한 혈육을 만나러 가고 싶을 뿐이었다.
"근데 빨래가 문제가 아니라 집이 문제가 아닐까요?"
조촐하나 단정하고 깔끔한 정자와 같던 오두막은 이미 옛말이었다. 무성하게 피어나는 잡초를 뽑고 하루종일 쓸고 닦던 이가 없어진 오두막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낡고 후줄근한 건물이 되어 있었다. 참혹한 풍경이었다. 오밤중에 보게 된다면 귀신이 사는 집으로 보일 것 같았다. 그런 상태로 폭풍우를 맞이하게 생겼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걱정은 혼자만의 것인 듯 했다.
"근성으로 버티면 돼!"
"……근성만 있으면 예산도 계획도 필요없는 것입니까?"
"엉!"
"……."
폭군에게 목숨 걸고 직언하는 신하와 같은 마음으로 한 항의는 묵살당했고, 이에 소년은 남몰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집에 없는 누이의 품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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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틈새로 파고드는 바람에 촛불이 흔들렸다. 그러나 치마에 수를 놓는 소녀의 손길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의자에 앉아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는 섬세하면서도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수를 놓는 모습은 엄격한 사대부 집안의 솜씨좋은 규방아씨처럼 보였다. 한 땀 한 땀 정성 가득한 손길에 보기만해도 화려한 꽃무늬가 마침내 완성되었다. 소녀─비류향은 이를 대 실을 끊은 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다 됐다."
"정말요?"
"응. 입어볼래?"
"네!"
옆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예린은 비류향이 건네준 옷을 받아들고 탈의실로 뛰어갔다.
"넘어진다, 조심해."
"네─!"
덜컹! 털컹! 미닫이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비류향은 기지개를 켜며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하나가 끝났다. 한 달 동안 틈틈히 천을 놀려 만든 옷을 과연 저 나이대 여아女兒가 기뻐해줄까. 지금이야 선물이라 그저 기뻐하지만 마음에 안 내키면 어찌할까. 그럼 다음 옷은 어떻게 지어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자투리천과 반짇고리를 정리하던 비류향의 귓가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
바람에 날려 부딪친 소리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번에는 좀 더 명확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똑똑똑똑똑똑.
"……."
분명 사람이 문 두드리는 소리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문 앞 호위무사들이 방문객이 누군지 알렸을 터였다. 나예린은 여전히 꺼려했지만 비류향은 이곳을 드나들면서 얼굴을 익힌 여무사들이었다. 힘든 일에 고생한다면 꿀떡이나 다과를 챙겨주니 금새 호의적인 관계가 된 이들이었는데 어째서인지 그네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번쩍───
창호지 너머로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창호지에 비치는 그림자는 하나였다. 호위 둘과 방문객 하나라면 셋이어야 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조심스레 문으로 다가가던 비류향은 갑작스레 발걸음을 멈췄다. 꺼림칙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
눅눅한 공기였다. 허나 단순히 비로 인한 눅눅함이 아니었다. 좀 더 비릿하고 끈적하게 달라붙는 냄새. 돌림병이 돌 때 질리도록 맡았던 냄새. 혈향血香.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사천 제일의 객잔에서, 부엌도 아닌 곳에서 혈향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비류향의 생각을 부정하듯 검붉은 액체가 문틈으로 천천히 흘러들어왔다. 혈향이 더욱 짙어졌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똑똑똑똑똑똑쾅쾅쾅!
"예린아! 숙부가 왔다! 문 좀 열어 보거라!"
그 소리를 들은 순간 비류향은 탈의실을 향해 달려갔다. 다급히 문을 열자 나예린이 때마침 옷을 모두 입은 참이었다.
"꺄, 아, 언니? 어때요? 후아, 놀랐,"
"도망쳐야 돼."
"아, 네? 언니? 무슨 일이에요?"
처음 보는 비류향의 다급한 모습에 나예린이 묻자, 비류향은 객실문 반대쪽 비상구로 소녀를 이끌며 대답했다.
"숙부님이 오셨어."
아무리 숙부님이라도 아버지나 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여기로 들어오실 수 없어요. 나예린은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죽 그래왔으니까. 몇 번이고 여기까지 찾아와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소녀가 이번에도 그러리라 믿고 입을 연 순간,
콰르르르르르릉!!!!
근처에 떨어진 것일까. 대낮이 된 것과도 같은 번쩍임과 동시에 엄청난 천둥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와 더불어 그것과는 다른 이질적인 파열음과 함께 부서진 문이 바람과 함께 객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혈향은 머금은 거센 비바람에 등 안의 촛불들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어이쿠, 문이 너무 약하구나. 하하하, 걱정 말거라. 내 나중에 친히 고치러 올 테니."
철퍽. 철퍽. 진득한 발소리와 함께 피투성이 사내가 걸어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나예린이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기 시작했다. 단순한 육신의 공포를 넘어 용안에 비치는 사내─나일천의 심상이 영혼에까지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인륜人倫을 거스르는 사악邪惡함. 도리道理를 벗어난 뒤틀린 욕정慾精. 분간 없는 짐승들조차도 하지 않을 끈적이는 어둠의 눈길. 지옥불에 뛰노는 악귀惡鬼가 저럴까.
비류향은 그런 나예린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완전히 막아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저것을 직시直示하는 것은 피하게 할 요량이었다. 그런 소녀들의 모습에 나일천은 광소했다.
"예린아! 숙부가 왔는데 인사는 해야지! 크하하하하하!"
쿠르르르르릉!
소녀들의 심상을 대변하듯 요란한 천둥번개가 울려퍼졌다.
#####
- 이을 연連은 리옌lián이고 제비 연燕은 옌Yān으로 중국어 발음이 다릅니다. 어차피 한국 무협지니까 굳이 중국어 발음 따를 필요도 없고, 시대에 따라 변화한 한중간 한자 발음 고증 같은 걸 따져봤자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테니 그냥 넘어갑시다. [...] 그래도 연꽃 연蓮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만.
- 2부를 제대로 못 보고 쓰고 있다보니 시간선이 마구 꼬이네요. 그래서 큰 흐름만 잡고 나머지는 그냥 재구성하기로 했습니다.
- 천겁령이니 서천이니 어쩌니 할 때마다 하늘 같은 그대라는 제목이 떠오르더군요. 노리고 지은 제목이 아니었는데. 이놈들, 하늘에 무슨 짓을 하려고!
- 교수님들은 언제나 학생들이 자기 수업만 듣는 줄 아시죠. 그런 고로 다음 주 수요일에 뵙겠습니다 여러분.
한자漢字, 오타,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4.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4.
"아, 잠깐만."
"……?"
비류향은 물음표를 띄우는 나예린을 놔두고 침상으로 되돌아갔다. 우선 손을 댄 것은 침상이었다. 마치 오랜 시간 이곳에서 일했던 사람처럼 침상 아래서 커다란 바구니를 꺼내고는, 능수능란하게 침상보와 이불깃, 그리고 배겟잇을 벗겨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거기에 더불어 옷장으로 가 한 켠에 들어가 있던 예비 포보布褓를 씌우는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주변까지 싹 쓸고닦았으면 했지만 아쉽게도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오늘은 일단 당장 잠을 잘 곳만 깨끗하면 되리라 판단한 비류향은 다시 나예린에게 돌아왔다.
"이제, 들어갈까?"
"……아, 네!"
손길이 닿으면 주름이 사라지고 칼 같은 각이 잡히는 침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예린은 어느 새 정리를 마친 비류향을 따라 욕탕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눈에 들어온 것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선반과 바구니, 그리고 잘 개어져 있는 수건 뭉치들이었다. 며칠 간 지내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던 나예린은 그곳이 탈의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면 부모님 외의 다른 사람에게 나신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덜컥 겁이 난 나예린은 무심코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평범하게 옷을 입 고 있어도 자신을 덮치려는 이들이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눈앞의 소녀는 그렇게 변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을까. 스멀스멀 피어오르은 불안감에 무심코 뒷걸음질치며 돌아보니 비류향은 벌써 겉옷을 벗고 내의內衣 옷고름에 손을 대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것일까.
"? ……아!"
비류향은 자신을 바라보는 나예린의 시선에 고개를 갸우뚱하다 이내 알았다는 듯 수건 뭉치에 다가가, 거기에서 제법 두터운 천뭉치를 하나 꺼내들어 나예린에게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은 나예린은 곧 뺨과 어깨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는 것을 느꼈다. 수건이었다. 망토처럼 두르니 허벅지까지 내려올 정도로 컸다.
"이러면 괜찮지?"
"……네."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자신이 바보 같아지는 순간이었다. 나예린은 망토처럼 두른 수건 아래서 벗은 옷을 바구니에 담았다. 비류향은 그러한 나예린에게 벗어둔 옷을 어떻게 정리해둬야 하는지와 더불어, 욕탕에서 양 팔을 자유롭게 움직이면서도 수건이 쉽사리 풀어지지 않게 몸에 두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보통 그러한 조언은 불쾌한 참견이나 쓸데없는 잔소리로 들리기 마련이지만, 나예린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압도적인 가사능력과 용안으로 보이는 티끌 하나 없는 순수한 선의 덕분에 그러한 부정적인 인상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나예린이 수건 아래서 옷을 벗기 위해 악전고투 하는 사이, 그와 비슷하나 다른 방식─겨드랑이 아래로 감싸 몸을 가리면서도 손이 자유로운 형태─으로 몸에 수건을 두른 비류향은 먼저 욕실에 들어왔다. 고급 나무로 만들어진 욕탕은 한동안 사람 손을 타지 못해 썩 깔끔하지 못했지만─어디까지나 비류향의 기준일 뿐이다─ 욕탕이라는 특성상 먼지 정도는 물로 가볍게 씻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닥이 미끄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우둘투둘한 대리석이라는 것도 장점이었다.
게다가 두발용과 신체용이 따로인 향유 섞인 고급 비누를 비롯한 각종 여성용품들이 친절하게도 그림을 포함한 목판 설명서와 함께 구비되어 있었다. 비류향은 남몰래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동생 비류연 덕분에 남아를 씻겨본 적은 많았지만─그것도 비류연의 머리가 굵어지면서 하지 않게 되었지만─ 여아를 씻겨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무엇이 필요한지 몰랐다. 저잣거리 아낙들에게 듣기는 했지만 원체 미용에 관심이 없었고 그렇기에 사치라 여겼던지라 흘려들었던 게 화근이었다. 이런 일이, 그러니까 다른 집 귀한 여식을 씻기게 될 줄 알았다면 귀담아 들었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객실 욕탕에 여성에게 필요한 세면도구가 구비되어 있다는 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자세한 구조는 알 수 없었지만 벽에 달린 수도꼭지의 손잡이를 돌리면 각각의 구멍에서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확인했다. 온溫과 냉冷 자가 새겨져 있었기에 손잡이를 잘못 돌려 화상을 입는 일은 없을 듯 했다.
몇몇 결점─어디까지나 비류향의 기준에서─이 보였지만 전체적으로는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렇게 점검을 마친 비류향은 앉은뱅이 의자와 바가지를 수도꼭지 앞에 두고 탈의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려준대로 겨드랑이 아래로 수건을 몸에 두른 체 문가에 기댄 나예린이 있었다. 조심스레 빼꼼히 얼굴만 내민 게 여전히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비류향이 손짓하자 천천히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그 뒤에 무릎을 꿇고 앉은 비류향은 손잡이를 비틀어 바가지에 적당한 온도의 물을 담으며 말했다.
"머리 감을 테니까 눈 감아줄래?"
"네."
쏴아아아─. 쌀 쏟아지는 것과 비슷한 소리와 함께 따스한 물줄기가 나예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어디 한 군데에만 맞지 않도록 골고루 뿌려지고 난 후 비류향의 손길과 함께 향긋한 비누거품이 일었다.
"으응……."
"아프니?"
"아, 아뇨……."
"아프면 얘기해 줘."
"네……. 후아……."
아프기는커녕 기분 좋은 손길이었다. 이마부터 뒷목까지 정수리와 관자놀이를 비롯한 혈도를 적절히 자극하면서도 두피가 상하지 않게 가감한 손길에 통증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머리카락 또한 우악스럽지 않은 손길로 쓸어내렸다. 무심코 기분 좋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헹굴게."
다시 한 번 따뜻한 온수가 쏟아졌다. 이번에는 처음과는 달리 좀 더 적은 양이 제법 오래 쏟아졌다. 그 동안 비류향의 손길이 나예린의 머리카락 구석구석의 비누거품을 깨끗하게 닦아내었다. 매한가지로 온유하고 애정이 가득한 손길이었다. 대체 얼마만에 느끼는 타인의 손길일까. 기억조차 없는 갓난아기 시절 이후로 이토록 정성스레 머리를 감아주는 사람은 비류향이 처음이었다.
"자, 이제 몸 씻어야지."
그리 말하며 비류향은 신체용이라 적힌 통에서 비누를 꺼내 반투명한 무명천을 물에 적신 뒤 문질렀다. 순식간에 몽글몽글 거품이 일었다. 머리를 감던 것과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향이 은은하게 피어났다. 충분한 거품이 일자 비류향은 우선 오른쪽 어깨부터 손 쪽으로 닦아내려갔다.
사악─ 사악─
거품과 함께 피부를 스쳐가는 무명천의 감촉은 그 특유의 거칠음이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시원했다. 반대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손길은 갑작스럽게 끊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의 손길이 없자 나예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난처하다는 듯한 미소가 보였다.
"수건, 벗어줄래?"
탈의실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비류향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과연 다른 의도는 없는 것일까. 일반적인 소녀라면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나예린은 일반적인 소녀가 아니었고, 일반적이지 못한 상황들 또한 몇 번이나 겪어온 경험자였다. 부모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마음을 연 상대건만 오랜 경험으로 만들어진 인간 불신이 반사적으로 소녀에게 용안을 활용하게 만들었다.
악의는 없었다.
진득한 음심淫心도 없었다.
무색투명한 호의만이 빛나고 있었다.
나예린은 그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며 천천히 수건을 풀었다. 가식 없는 순수한 호의조차도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없게 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머리를 감을 때 젖은 수건을 풀자 느껴진 서늘한 한기는 그러한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마음을 어루만지듯 비류향의 부드러운 손길이 나예린의 몸에 비누칠과 동시에 땀과 먼지를 씻어냈다.
"시원하니?"
"네."
"화장은 아니더라도 세안은 매일 해야지. 자, 눈 감고."
"네, 으우……."
"코 풀고. 흥!"
"흥!"
"귀도 잘 닦아야 돼. 이목구비가 깔끔해야 괜히 깔보이지 않아."
"아, 네."
"앞으로 세안 잘 하기. 약속?"
"약속할, 앗! 아으으……"
"어머, 눈에 비눗물 들어갔구나. 잠깐만. 잠깐만. 자, 얼른 세수해."
"어푸, 어푸……. 으으, 아직도 따가워요……"
"한 번 더 세안하자."
나예린이 바가지에 받은 물로 눈가를 씻는 동안 비류향은 자연스럽게 다른 부분을 씻기기 시작했다. 등을 밀고, 가슴과 배를 문지르고, 둔부와 고간을 거쳐 허벅지를 타고 발끝까지 씻어내리는 솜씨는 매우 신속정확하면서도 애정이 가득했다.
비류향은 나예린을 씻기며 생각했다. 아름답다. 미성숙한 신체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리고 아름다움을 느끼면 느낄 수록 애잔한 감정 역시 커져갔다. 저잣거리에서 부모의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혹은 군것질거리를 찾아 홀로 휘적휘적 다니는 동년배에 비하면 너무나도 야윈 몸이었다. 서시빈목西施嚬目이라 하여 모든 이들이 저 야윈 몸조차도 아름답게 보고 있었지만, 비류향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용안이라고 했던가. 삼라만상의 이치를 직시하고 한 길 조차 알 수 없다는 사람 속을 꿰뚫는 재능. 그것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있는 그대로의 악의와 욕망을 경험하며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을까. 자신에게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가능한 이 아이를 도와주자. 비류향은 그렇게 다짐했다.
"비눗기 씻어내자."
"네."
쏴아아아──
물줄기에 비누거품이 씻겨내려갔다. 양액兩腋과 고간股間처럼 물이 쉽사리 닿지 않아 거품이 남아있던 부분도 비류향의 손길이 닿자 순식간에 녹아내려 사라졌다. 민감한 부위기도 했거니와 모친이 아이를 씻기는 손길이 이러할까 싶을 정도로 다정하고 부드러워 괜시리 부끄러워진 나예린은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완벽히 깔끔하게 몸을 씻은 나예린은 가히 천상의 선녀와 같았다. 스스로 빛을 내는 것 같은 희고 깨끗한 피부. 황금 비율로 배치된 이목구비. 살짝 야위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신체. 그야말로 미의 화신.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씻으니까 더 예뻐졌구나."
"……감사합니다."
나예린은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렇게 인사했다. 예쁘다는 칭찬에 이토록 솔직하게 감사를 표한 건 자신이 기억하기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음욕이나 질시 같은 어두운 감정 없는 칭찬이라서 그럴까. 익숙치 않았지만 싫지 않은 기분이었다.
"몸 식는다. 탕에 들어가 있으렴."
비류향은 나예린의 젖은 머리를 작은 수건으로 감싸 올려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나예린에게 해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몸을 씻기 시작했다. 나예린은 어깨까지 몸을 담그며 처음 해보는 수건 말아올림 머리가 풀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심스럽게 매만져보았다. 신기했다. 어떻게 하면 고작 천 한 장으로 이렇게 단단하게 고정할 수 있는 걸까. 푸스스 풀어지려는 수건을 어찌어찌 다시 끼워넣고 문득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한창 성장기에는 한두 살 차이도 성장 차이가 있다지만 그것과는 다른 어른스러움이 깃든 뒷모습이었다. 소녀에서 여인이 되어가는 몸이 그리는 완만한 곡선과 더불어 산중생활로 붙은 근육 위로 덮인 여인 특유의 부드러운 살이 육체적 성숙미를 보여주었다. 행동거지는 자유분방하면서도 절제되어 있고, 언행이나 배려가 사대부의 예법과는 거리가 있으나 무례하지 않으니 정신적으로도 성숙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
그와 동시에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덧없어 보였다.
손을 뻗으면 흩어질 것 같은 안개 같은 흐릿함.
깊은 산 속 바닥까지 비쳐보이는 고요한 호수와도 같은 투명함.
그런 이율배반적인 감상이 나예린의 뇌리에 맴돌았다. 온수의 따스함이 몸에 스며들수록 그러한 인상은 선명해졌다. 문득 불안해졌다. 정말 저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저렇게 자애로운 심상과 형용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공존할 수 있는 걸까?
당장이라도 욕조에서 뛰쳐나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달려나가 손을 뻗었을 때 상대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면? 끌어안고 울었던 상대가 사실은 그 자리에 없었고, 침상을 정리하고 자신을 씻겨주던 이가 그저 자신의 상상 속의 존재였다면? 너무 힘들고 지쳐서 환상 속의 존재를 만들어 거기로 도피한 것이었다면?
사라락…….
기어코 수건이 풀어졌다.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수건이 시야를 가렸지만 도저히 그것을 치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걸 치우면 비류향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나홀로 이곳에 있는 게 아닐까. 그제서야 이 모든 게 꿈이었다고 깨닫게 되는 게 아닐까. 이질감에서 시작된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크기를 키워나갔다. 간신히 숨만 쉬며 물에 젖어들어가는 수건 끄트머리를 붙잡고만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기다려 봐. 다시 해줄게."
찰박찰박. 물 밟는 소리와 함께 타인의 손길이 수건을 들어올렸다. 비류향이었다. 순식간에 다시 수건을 휘감아 머리에 고정하는 솜씨는 만약 이것이 환상이고 사실 나예린 스스로의 손길이었다고 할 수 없는 경지였다.
"이제 됐다."
비류향은 그리 말하며 탕 안으로 들어와 벽에 닿아있는 후미진 구석 자리에 앉았다. 너댓 명이 들어가도 될 법하건만 굳이 그런 자리로 가는 게 비류향다웠다. 이대로 쪽잠을 자 두자. 그리 생각하며 벽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피로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천향루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평소와 같은 쪽잠도 들지 못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러나 곧바로 잠들 수는 없었다.
"……언니……."
"……응?"
나예린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탕의 온기와 피로 때문에 반응이 늦었지만 거기에 잠을 방해받았다는 불쾌함은 없었다. 다가가는 것도, 멀어지는 것도 아닌 애매한 거리에 선 나예린을 보며 비류향은 끈기있게 어린 소녀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언니는……. 환상이 아니죠?"
처음 입에 담아보는 단어─언니의 어감이 익숙치 않은 듯 머뭇거리던 나예린은 그렇게 물었다.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소녀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떤 대답을 해줘야 저 아이의 불안이 해소될까. 고민하던 비류향은 살포시 손짓했다. 이리 오렴. 망설이던 나예린은 이내 비류향에게 다가와 그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비류향은 둥지로 돌아온 아기새를 보듬듯 나예린을 꼭 껴안아주며 물었다.
"이렇게 끌어안고, 서로 대화하고 있는데 환상인 것 같니?"
"……아니면, 꿈이거나……."
갑작스레 찾아온 작은 행복이 과연 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온기와 감촉이 눈 감았다 떴을 때 사라질 일장춘몽이 아니라 단정지을 수 있을까. 혹은 그럴지언정 찰나의 환상에 용기를 얻어 세상에 맞설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두려웠다. 칠흑 같이 어둡고 늪처럼 질척이는 인세人世에 대항하기에 소녀는 너무나도 여렸다. 그런 소녀에게 어떻게 하면 믿음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비류향은 부드럽게 나예린의 머리를 기울여 가슴께에 귀를 대게 하였다.
"예린아."
"네……."
"심장소리가 들리니?"
"……네."
두근. 두근. 희미했던 고동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다. 그 사이로 자신의 고동 또한 들려왔다. 어느 새 두 사람의 고동이 조화를 이루며 울려퍼지자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감이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것에 쐐기를 박듯 나예린의 귓가에 비류향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나는 여기 있어. 곁에 있어."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토록 하기 위해서일까. 비류향은 더욱 힘을 주어 끌어안으며 그렇게 속삭였다. 나예린은 그 속삭임에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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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인 요리 실력을 따지자면 사부가 제일이고, 그 다음이 나며, 매우 아쉽게도 누나가 마지막이다. 물론 이것은 상대적인 평가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내공이라고는 씨알도 없는 누나에 비해 대놓고 무학武學의 묘리妙理와 공력을 아낌없이 쓰는 사부와 나를 도저히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분뢰수를 이용해 펄펄 끓는 기름 속이든 활활 타오르는 가마솥 안이든 맨손을 들이밀어 온도를 조절하며, 육안으로는 구분조차 하기 힘든 섬세한 결을 따라 재료를 갈라 본연의 맛에 손상을 주지 않는 칼솜씨에, 소금 알갱이 하나까지 조절하여 간을 맞추는 안력眼力을 가지고도 요리를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만.
어찌되었든 앞서 말했다시피 내 요리 실력은 분명 누나보다 앞선다. 이건 내 오만이나 맹신이 아니라 깐깐하기로 소문난 사부 역시 인정한 사실이다. 누나야 뭐, 나쁜 짓만 아니면 성장하는 걸 다 축하해주는 사람이라 되려 자랑스러워 하고 있고. 여튼 그렇게 맛있는데.
"으음……."
"아니, 사부님. 왜 그리 깨작거리십니까. 맛없으면 치울까요?"
"아, 맛있어. 맛있다니까."
그러고는 또 젓가락질을 하는 둥 마는 둥. 요리를 해본 사람은 내 심정을 잘 알 것이다. 기껏 차려줬더니 이거 집다 저거 집다, 이거 깨작 저거 깨작. 차라리 맛 없다고, 이러저러하니 입에 안 맞는다고 하면 나중에 이래저래 다른 찬거리를 준비하든 조리방식을 바꾸든 할 텐데 그것도 아니고. 누나가 이 오두막을 떠나고 나서부터 식사시간만 되면 이 모양 이 꼬라지다. 사흘 정도는 괜찮았지만 나흘 정도 지나고 나니 매일 이 모양이니 식사준비하기 정말 싫어진다. 그렇다고 때려치자니 사부의 주먹과 누나의 부탁 때문에 내던질 수도 없고.
그나마 깨작거리는 걸로 끝나면 다행이다. 어떨 때는.
"거 네놈 밥은 맛만 있지 흥취가 없어, 흥취가. 향이가 했던 밥 생각해봐라. 얼마나 좋으냐! 보기만해도 이게 '아, 이게 정말 정성이 흘러넘치는 밥상이구나!' 하는 수준이잖아! 요리하는 거 보기만 해도 배부를 정도로 정성이 가득하잖아! 술상 차리는 솜씨는 또 어떻고! 보기만 해도 그냥 취해! 흥이 돋아! 너도 그렇게 좀 해봐라!"
"에이, 사부님! 제가 얼마나 정성을 쏟아붓는데요! 사부가 그렇게 칭찬하는 누나가 제 상을 얼마나 칭찬하는지 모르시죠? 그런데도 왜 이리 핍박하십니까!"
"말했잖아! 정성이 부족하다고!"
"그렇게 정성 좋아하시는 분이 왜 평소에 누나가 해주겠다고 하면 죄다 손사래 치십니까!"
"그건 정성을 초월해서 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한다. 심지어는.
"너도 나이 들어봐라. 시커먼 남정네가 해준 밥보다 고운 처자가 해주는 밥이 더 좋지!"
"시커먼 남정네라뇨! 이토록 멋진 미소년에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망난 색골 영감 같은 소리를 하기도 하니 원. 대체 누나는 이 사부의 뭘 보고 공경해야할 사람이라며 정성을 쏟아붓는 걸까. 알 수가 없다.
그런 사부의 반찬투정과는 별개로 나 역시 누나 밥이 그립기는 하다. 누나의 요리는 일품이기는 해도 극상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다. 당장 시장에서 유명한 객잔에서 큰돈 주고 먹는 요리가 더 맛있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맛있는 요리라는 게 꼭 혀가 닿자마자 눈앞에 별이 날아다니고 천하가 내 안에서 살아움직이는 것 같은 환상을 봐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소박하지만 풍미가 있고 매일 같은 반찬이더라도 질리지 않는 요리 또한 맛있는 요리다.
고된 수련과 노동행위 나가기 전에 먹는 아침밥과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먹는 저녁밥의 행복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르리라. 하물며 그게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 정성스레 차려주는 상이라면 더더욱. 가슴에 스며드는 어머니의 맛이라는 게 이런 거겠지.
"하아……."
오늘로 보름째인가. 어디 있는지도 알겠다, 마음 같아서는 수련과 가계활동 모두 때려치고 찾아가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사부에게 묵사발이 될 테니 차마 그럴 수가 없다. 졸지에 생이별이라니. 무림에 피바람이 불어도 나라는 갈라지지 않았건만 어째서 우리 남매는 이리 살아야 하는 걸까. 게다가 그런 비극의 원흉에게 밥을 지어 바쳐야 하다니. 비극도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
이것 뿐만이 아니다. 최대한 사부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매우 적극적으로 누나를 만나러 갈 수 있느냐고 했더니 사부가 말하기를.
"그러고보니 금琴 수련도 해야지. 하는 김에 여장女裝도 하고."
"……네?"
이게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었건만 아무래도 사부는 진심인 듯 했다. 누나가 없어졌다고 그 자리에 여장한 소년을 채워넣고 싶으신 건가. 세상에 맙소사.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것은 사부의 자금계획의 일환일 뿐이었다. 남정네가 타는 금보다 미소녀가 타는 금이 훨씬 더 가치있으며 돈 벌기 쉽다는 것이었다. 무학의 묘리니 수련이니 하는 포장을 제거하면 딱 그거였다. 사부가 이상성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해야할지, 그 악랄한 자금탈취수법에 이를 갈아야할지 모르겠다.
그나마 이 여장수련을 마치면 누나를 보러 갈 수 있다는 게 위안이다. 그러기 위해 여성스러운 말투와 행동거지를 주입받으며 마음 속 무언가가 심히 깎여나가고 있는 느낌이지만. 괜찮다. 괜찮아. 이게 끝나면 누나를 볼 수 있으니까! 그거면 충분해!
"후우, 얼른 누나 보고 싶다……."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커다란 냄비와 국자를 절묘하게 휘둘러 볶아낸 밥을 그릇 위에 담았다. 복스럽게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사부님. 제발 얌전히 드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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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저는 누굽니까?"
"누구 말이냐?"
"거 린아璘兒 곁에 맨날 붙어있는 소저 말입니다."
"아, 비 소저 말인가. 내 예린이 말벗을 부탁한 아이야. 왜 그러느냐?"
정천맹주正天盟主 진천뇌벽검震天雷霹劍 나백천羅伯泉은 자신의 객실 앞에서 씩씩거리며 비류향이 누구냐 묻는 동생 나일천羅馹泉의 물음에 그리 되물었다. 이미 얼굴이 벌건 것을 보니 꽤나 술을 들이킨 듯 했다. 아직 해가 떨어지기에는 한참 시간이 남아있었건만 그러했다. 무심코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삼키고 있자니 나일천이 외쳤다.
"예린이 얼굴 좀 보러 갔더니 글쎄 대놓고 못 보게 막더이다! 형님이나 예린이 허락이 없으면 볼 수 없다면서요! 세상에 숙부가 조카 보는데 허가가 필요합니까!"
"……."
"'아이가 무서워하니 돌아가 주십시오. 아니면 맹주께 윤허를 받아오셨을 때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라니. 누가 보면 생판 남인 줄 알겠습니다! 예린이는 얼굴도 안 내밀고! 내 어릴 때 그토록 귀여워해줬거늘! 이리 문전박대라니!"
"……."
"이게 어찌 친지고 혈육입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침묵하는 나백천의 모습이 호응이라 생각한 것인지 나일천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그러나 너무 심하게 취했기 때문일까. 나일천은 친형의 눈이 매섭게 빛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허락 없이 아무도 예린이 숙소에 들어가지 마라고 했다."
"그야 그러시기는 했지만 친지 간에 굳이 그런 걸,"
"다시 한 번 말해야 알아들을 테냐."
"……."
서릿발 같은 형의 말에 나일천은 그제서야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동생을 노려보던 나백천은 축객령을 내렸다.
"내 이번 일은 취기로 인한 실수라 여길 테니 다음부터는 린아에게 함부러 가지 말거라."
"……흥. 팔병신 동생보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계집이 린아 옆에 있는 게 더 안심되십니까?"
"일천!"
나백천의 노호에 움찔한 나일천은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체 거칠게 몸을 돌려 사라졌다. 필시 또 술을 들이키리라. 피를 나눈 동생의 모습에 나백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비류향의 말이 떠올랐다.
『 이는 무례無禮로 형제간을 이간질함과 다름이 없는 죄악罪惡이나 감히 말씀드립니다. 예린이가 말하길 숙부의 마음에 큰 어둠이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두렵다 하였습니다. 부디 다가오지 않도록 살펴주십시오. 』
비류향이라는 소녀가 하기에는 제법 거친 말이었다. 그 자리에서는 형식상으로만 비류향을 꾸짖었으나 말 그대로 형식적일 뿐이었다. 딸을 바라보는 동생의 눈길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나백천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결혼도 하지 않아 자식도 없어 조카인 나예린을 특히 귀여워하는 것으로 여겼으나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딸인 나예린이 나일천을 꺼리는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혈육이었다. 거기에 정천맹 부총령으로서도 무난하게 일을 하며 자신을 도와주는 동생이었다. 언제까지고 강제로 밀어낼 수는 없었다.
"어렵구나, 어려워. 인사人事는 언제나 어려워……."
나백천은 탄식을 내뱉으며 객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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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이 목욕장면을 저리 길게 썼어야 했나 싶었지만, 마음 가는대로 타자를 두드렸기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
- 이제사 2부를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어 내용 수정이 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3화에서 비류향이 오두막 떠날 때 호위虎衛 관련 내용이 수정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 궁뢰신전 보고 싶네요 [?]
한자漢字, 오타,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