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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2.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2.
그러니까 대충 열다섯 살 되던 해 초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레에 한 번 대장간이 쉬는 날이었기에 오후 시간이 비어야 했지만 나는 나물캐기와 사냥을 위해 아미산을 타고 있었다. 사부도 술 마시러 놀러갔겠다, 놀기 딱 좋은 날이었지만 사부가 수련거리─인 척하는 재화벌이─를 명하고 갔기에 우울한 심정으로 오두막을 나섰다. 청명한 하늘과 상쾌한 바람이 나를 더욱더 우울하게 만드는 날이었다. 그나마 누나가 산 타다가 배고프면 먹으라고 싸준 도시락이 있어 그나마 기분전환이 되었다.
누나의 도시락과는 별개로, 놀기 좋은 환경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나를 위해 하늘에서 선물을 내려주신 걸까. 나무 그늘 아래서 청아한 향기와 고결한 기품이 느껴지는 청보랏빛 꽃 세 송이가 피어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내 뇌리에 경종이 울렸다. 돈 된다. 분명 이것은 돈이 된다. 그것도 매우 큰 돈이.
매우 신속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땅을 파던 나는 순간 깜짝 놀라 손을 멈추었다.
"우와……."
어른 손바닥 만한 나신裸身의 여체女體가 있었다. 세상에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숨쉬는 것조차 잊어버릴만큼 경이로운 광경을 얼마나 보고 있던 것일까. 코끝을 간질이는 청아한 향기가 아니었다면 하루 종일 그 광경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신 차려라 비류연. 세상에 손바닥만한 인간이 어디 있으며 그런 인간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단 말이더냐. 눈꺼풀 벗겨저라 거하게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거기에는 한 뿌리의 산삼이 다소곳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게 바로 인형설삼人形雪蔘이구나.
그야말로 금덩이를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산이 흔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환호성을 터뜨리고 싶었으나 급작스럽게 떠오른 사부의 모습에 냉정을 되찾았다. 진정해야지. 심호흡과 함께 영사심결로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곧 고민에 휩쌓였다. 이걸 팔 것이냐, 먹을 것이냐. 전자前者의 경우는 막대한 돈을 얻을 수 있었고, 후자後者의 경우에는 심후한 내공을 얻을 수 있었다.
아니면 누나를 먹이느냐.
이제 와서 무엇을 숨기랴. 사실 제일 바라는 건 이쪽이다. 허나 오래 전 돌림병으로 상중하 삼단전과 전신기맥이 모두 망가진데다가, 내가 열두 살 때쯤 서오西汚놈에게 큰 내상을 입었던 누나의 몸에 영약은 독으로밖에 작용하지 않는다. 주화입마나 뭐 그런 건 걱정이 없지만, 극양極陽의 영약을 먹으면 열이 심하게 나고, 극음極陰의 영약을 먹으면 반대로 체온이 심하게 떨어지는 식이다. 약발을 잘 받는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앓고 나서 몸이 전혀 안 좋아지니 결코 좋은 게 아니다.
그걸 뼈저리게 느낀 건 누나에게 산삼을 먹였을 때였다. 예린이가 떠난 그해 겨울, 사부가 잠깐 놀러간 틈을 타서 누나 몸보신을 위해 고려국 인삼이라 속이고 산삼 넣은 삼계탕을 준비했었는데 그걸 먹고 열이 올라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것이다. 다행히 의사용안과 수련으로 오른 공력을 사용해 재빠르게 양기를 흩어내고 흡수한 덕분에 누나는 반나절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소림의 대환단도 네 누이에게는 독이다. 알겠냐?"
제자는 가차없이 굴리면서 누나는 애지중지하는 사부님은 돌아와 누나를 보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채고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귀한 거 사부한테 안 바치고 지 누나한테만 갖다바친다고 맞았다. 약藥이라는 게 원래 몸이 약弱한 사람이 먹는 거니 당연히 누나에게 줘야 된다고 했더니, 되려 누나가 자기는 괜찮으니 다음부터는 사부님 드리라고 했다. 아니야, 누나. 사부님은 안 먹어도 강한 사람이야.
어찌되었든, 심사숙고 끝에 나는 이 인형설삼을 내가 먹기로 했다. 돈도 돈이지만 몸이 제일이니까. 우선 누나의 도시락으로 빈 속을 채우고 한 식경 동안 사부가 가르쳐 준 영약 섭취시 주의사항을 되새긴 후, 꽃부터 뿌리까지 조심스레 입 안에 머금었다. 그러자 분명 딱딱한 뿌리며 질긴 줄기 같은 게 느껴지지 않고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더니 청아한 향기만을 남기고 자연스럽게 식도를 타고 뱃속으로 사라졌다.
어느 시점부터 뇌령심법을 운용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시작은 양陽의 삼蔘이었을 인형설삼은 극양도 극음도 아닌 순수한 기운을, 폭포처럼 몰아치는 거대한 힘을 품고 있었다. 그 힘이 육신을 거세게 후려치고 영혼을 찢어발기는 듯 했다. 도저히 제정신이라고 할 수 없는 시원時原의 혼돈 끝에 엄청난 깨달음이 영혼을 강타하고 갔다. 뇌령심법을 운용하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거대한 충격이었다. 문득 주화입마라는 단어가 떠올랐지만 자연스럽게 뜨여진 눈에 보이는 풍경을 본 순간, 모든 것이 끝났기에 자연스럽게 뇌령심법 운용을 멈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부터 하고 있었는지 모를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끄응~”
상쾌하다. 몸은 날아갈 듯 가볍고 정신은 바다처럼 넓으면서도 호수처럼 고요했다. 맑고 청명한 기운이 몸 안에 가득했다. 이야, 좋구나.
문제는 운기조식 전에 캤던 약초들이 죄다 쓸모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뭐, 쓰자면 못쓸 것도 없지만 캐서 바로 다음 날 약장藥場에 파는 것에 비하면 시원찮은 상태였다. 상태를 보아하니 사나흘 정도 지난 듯 했다. 그나마 짐승을 안 잡아서 다행이구만. 만약 사냥한 것들이 있었다면 진작에 썩어버렸거나 다른 짐승들이 낚아채 갔으리라. 내가 힘들게 잡은 걸 그런 식으로 못 써먹게 만들면 정말 가슴이 아프다.
여튼 며칠 지났다는 걸 깨달은 순간 빈손으로 돌아가면 사부님에게 추궁당할 게 뻔했기에 해가 질 때까지 근방의 약초란 약초는 죄다 캤다. 하는 김에 주제 파악 못하고 나를 덮치려던 호랑이 한 마리도 잡았다. 몰래 팔면 제법 큰 비자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인형설삼 먹은 거에서 더 이득을 보려다 피를 보느니, 그냥 사부님께 바치기로 했다. 대를 위한 작은 희생이다.
여튼 그렇게 돌아온 나를 맞이해준 것은 마루에 앉아 잠든 누나였다. 그제서야 누나가 걱정하고 있었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마음 같아서는 조용히 들어가고 싶었지만, 약초 바구니와 호랑이 시체가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약초는 몰라도 호랑이는 지금 당장 손질을 해둬야 비싸게 팔 수 있다. 별 수 없이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누나, 나 왔어.”
“……어서오렴.”
언제 자고 있었냐는 듯 깜빡 하고 눈을 뜬 누나는 내가 짊어진 호랑이를 보고는 놀란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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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야라면 노을빛에 물든 대지의 잔광殘光이 남지만 산으로 둘러쌓인 오두막은 해가 빨리 진다. 해는 이미 산 너머로 넘어간지라 어둑어둑했기에 비류향은 아궁이에서 불씨를 꺼내 등불에 불을 붙였다. 오두막 문가에 하나. 마루에 하나. 홀로 남은 오두막에 불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사아아아…….
산바람에 빗소리처럼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비류향은 그 소리를 들으며 마루에 앉아 천천히 숨을 골랐다. 나름 시골출신에 산에 살면서 체력이 붙었다고는 해도, 사람이 두 번이나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오면 기초체력이라는 게 턱없이 낮아지는 법이다. 거기에 후유증까지 있다면야. 일반인이었다면 외공이라도 배워 단련할 테지만 체질상 그 어떤 무법武法도 효과를 얻을 수 없기에 그저 자주 쉬어주는 수 밖에 없었다.
호흡을 가라앉히며 비류향은 문가를 바라보았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등불이 비치는 곳만 약간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안 오려나. 벌써 닷새 째 본의 아니게 혼자 오두막을 지키고 있었다.
“천향루에 좋은 술이 들어왔다니 마시러 갔다오마. 한 일주일 정도 있다 올 거야.”
노사부가 그리 말하며 나가고 다음 날, 약초를 캐러 간다던 동생 비류연 역시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고라도 난 것일까. 만약 백무후가 찾아와 동생은 무사하다는 얘기─라기보다는 스무고개 방식으로 겨우 알아차린 것이다─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걱정하고 있었으리라. 단 둘뿐이라고는 하나 나름 무가인 곳에서 일하고 있어도 무인의 생리는 잘 모르지만 도중에 깨달음을 얻어 수련하고 있다보다 했다. 그런 일도 있다는 얘기를 시장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래도 벌써 나흘째. 해가 뜨면 닷새고 노사부가 돌아올 때도 되었기에 다시 걱정되기 시작했다. 혹시나 방해가 될까봐 쉽사리 그러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내일은 백무후와 팔섬풍에게 부탁해 동생이 있는 곳에 찾아가봐야 할 듯 싶었다. 무공 수련하는 몸인데다가 백무후와 팔섬풍에게 물을 때마다 괜찮다는 얘기를 듣지만, 여든 노모가 예순 노인을 걱정하는 법이라 했던가. 모자母子도 아니고 나이도 고작 세 살 차이지만 하나뿐인 혈육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비류연의 나이가 떠올랐다.
연이가 벌써 열다섯이구나.
내년이면 열여섯, 성인이 되는 아이건만 눈을 감으니 어릴 적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그래도 말하는 품새나 행동거지도 제법 어른스러워졌고, 여태껏 아미산을 들쑤시고 다니며 온갖 약초를 채집하고 짐승들을 사냥한데다가, 무공까지 수련했으니 겉보기랑은 다르게 힘도 엄청나게 강할 것이다. 키도 벌써 자신과 비슷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집 남매들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고작 세 살 차이 밖에 안 나는 누이 말을 잘 들와 줬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마저도 세상을 뜨셨건만 잘 자라주었다. 비류연. 연아.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나의 동생아. 네 누이로 태어난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매일 말해주지 못하는 게 미안하단다.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림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게 벌써 5년 전 일이었다. 열세 살 꼬마였던 자신 또한 어느 덧 열여덟 여인이 되어있었다. 조금 더 지나면 연이가 새색시를 데려와 일가의 가장이 되지 않을까. 무림에서 활동하게 될 테니 조금 더 늦으려나. 그러면 여기가 아니라 좀 더 마을에 가까운 곳에 집을 얻겠다. 어쩌면 사천을 떠나 다른 곳에 갈 지도 모르고. 노야께서 윤허해주셔서 가끔 보러갈 수 있으면 좋겠다…….
“누나, 나 왔어.”
언제 잠들었던 것일까. 동생의 목소리에 비류향은 눈을 떴다. 문가에는 호랑이 시체를 짊어진 동생 비류연이 서있었다. 놀랐다. 백무후와 팔섬풍과 함께 지낸 시간이 있어 덜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놀란 건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할 말이 있었다.
“어서오렴.”
“……응.”
멋쩍은 듯한 웃음과 함께 비류연은 마당 한 켠에 호랑이와 약초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왠 호랑이를 잡았니? 덮쳐오길래 제물이겠다 싶어서 잡았어. 제물? 공양이랄까. 사부님께. 기특하네. 하. 하. 하. 기특하기는. 아참, 배고프지? 저녁 준비할게. 아냐, 내가 준비할게. 호랑이 고기 먹자. 금방 되겠어? 물론이지. 아궁이 불만 지펴줘. 그래, 알았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짧은 대화가 오가고, 누이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비류연은 발끝으로 마당에 핏물 빠질 배수로를 파낸 후 품 안에서 비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호랑이 시체 앞에서 부처님께 기도하듯 합장을 한 후,
“자, 시작해볼까~ 흠~ 흠흠~”
정교하고도 재빠른 손놀림으로 호랑이 시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나흘 만에 누이와 함께하는 식사를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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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노사부는 구슬을 꿰는 동생 옆에서 옷자락에 수를 놓던 비류향을 불렀다. 드문 일이었다. 바깥이라면 모를까 이 산 속 오두막 안에는 어디든지 비류향이 노사부를 위해 준비한 것들 뿐이었다. 그리고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상황에 따라 적절히 노사부가 원하는 물건들을 내놓기에 부르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불려간 비류향이 받은 것은 한 잔의 술이었다. 무슨 술인지는 몰랐으나 밑도 끝도 없이 받은 잔에 술이 채워질 때마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노사부의 눈을 보아하니 매우 귀한 것인 게 틀림없었다. 귀한 것을 주시는구나. 어느 덧 스물둘 여인이 된 소녀는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잔을 받아들었다.
“마셔라.”
비록 주향이 맴돈다고는 하나 뭔지도 모를 것을 먹으라 명 받았건만 비류향은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는 잔을 입에 대고 내용물을 남김없이 마셨다. 청아하고 은은한 향과 입안에 맴도는 희미한 달콤함과는 달리, 식도를 태우며 위장으로 흘러들어간 액체는 자연스럽게 기침이 나오게 했다. 그러나 비류향은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 병자도 아니거늘 하사하신 주酒를 마시고 기침을 내뱉는 것은 무례無禮다. 그리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큽…… 쿠흡, 크흠……. 푸흡…….”
그 모습에 노사부는 참지 말고 기침하라 하였다. 그제서야 비류향은 거친 기침을 쏟아냈다. 격한 기침에 옆방에서 구슬을 꿰던 비류연이 달려왔지만 노사부는 약 먹은 거니까 호들갑 떨지 말라며 가볍게 제자를 쫓아냈다. 누나 괜찮은 거 맞죠?! 아 맞다니까! 넌 사부를 그렇게 못 믿냐! 사부님을 믿지만 사부님을 믿는 저를 더 믿습니다! 헛소리 하지 말고 구슬이나 꿰어 이것아! 소란 속에서 기침이 점점 잦아들어갔다.
“하, 하아……. 하아……. 후으…….”
“그래, 좀 어떠냐.”
한참 기침을 내뱉고 나니 근육이 당겼지만 술기운과는 다른 다른 청량감과 기분 좋은 온기가 온몸에 퍼져 있었다. 그것을 말하자 노사부는 “약쟁이 놈 약재 삥땅치지는 않았군.” 이라고 중얼거리고는 말했다.
“어제 내가 부엌에 가져다 놓은 항아리 있지?”
“예.”
”거기에 든 게 방금 준 술이다. 엄청 귀하고 비싼 약재 담가서 만든 건데 사흘에 한 잔 씩만 마셔라. 명심해. 딱 한 잔이야! 더 마시지 말어!”
“이리 귀한 술을 어찌…….”
“골골대지 말라고 주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식재만 축내는 부족한 아이도 이리 챙겨주시는구나. 그런 생각으로 감사의 마음이 가득한 비류향의 눈빛에 노사부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 향이랑 류연이 놈 섞어서 반으로 나누면 참 좋을 텐데. 그리 생각하며 노사부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절대 류연이 놈은 주지 마라. 그놈은 산 타고 다니면서 약초며 영물이며 제일 좋은 것들 알아서 주워먹고 있으니까 안 챙겨줘도 돼.”
“……네.”
반드시 지키라는 듯 엄포를 놓는 노사부의 말에 비류향은 유쾌한 사제지간의 모습에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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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 약초꾼과 사냥꾼들 사이에서 백호선녀白虎仙女의 소문이 떠돈 것은 대여섯 해 전부터였다. 처음에는 왠 소녀가 백호를 타고 아미산을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입소문을 타고 눈덩이처럼 불어나 이제는 사실 그 소녀가 둔갑한 백무후라느니, 아미파의 절정고수 중 하나가 반로환동으로 젊어져 백호를 타고 다니는 거라느니 하는 얘기까지 나오는 수준이었다.
아미산 산기슭 어디든 선녀가 백무후와 팔섬풍을 거느리고 다닌다는 얘기는 애들 잠자리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였으나, 실제로 멀리서 백호선녀의 모습을 보는 이가 하나 둘 늘어나자 이제는 다들 믿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호기심이 생기는 게 사람인지라 아미파에서 한동안 백호선녀의 정체를 알아보고자 했지만, 사람이 다가갈라치면 신출귀몰하게 사라져 결국 포기한 것이 3년 전이었다.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 사람 피하는 이를 애써 찾을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거기에는 지난 날 백무후를 토벌하자고 했다가 하지 않은 전례도 힘을 더했다.
무림인들이야 어찌되었든, 약초꾼과 사냥꾼, 그리고 나무꾼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백호선녀를 만나면 그날 운수가 좋다는 믿음이었다. 선녀를 보면 자주 보기 힘든 희귀한 약재를 캔다, 잡기 어려운 사냥감을 잡는다, 질 좋은 목재를 발견하거나 그날 도끼질이 잘 된다 등, 백호선녀는 이미 민간신앙의 영역에까지 도달해있었다.
물론 그런 건 단순한 헛소문이라 치부하는 사람들 또한 있었다. 금재월金才鉞 역시 그러한 사람이었다. 이름만 보면 도끼 좀 쓰는 나무꾼 같았지만 정작 그의 생업은 약초 채집이었다. 어찌되었든 그는 백호선녀 이야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혹여나 동료들이 그에 대해 얘기하면 말도 안되는 소리 말라며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적어도 며칠 전까지는 그랬다.
초여름에 들어서 제법 더웠던 그날, 재월은 땀 좀 씻고 목도 축일 겸 자신만 아는 냇가로 향했다. 초목에 가려 찾기는 어렵지만 들어가면 제법 너른 바위를 휘감는 계곡물이 흐르는 명당이었다. 잽싸게 등에 짊어진 약초 바구니를 내려놓고 소매를 걷은 후 계곡물에 손을 담갔다. 어이구, 차가워라. 계절에 아랑곳하지 않고 뼛속까지 시려오는 계곡물로 세안이며 양치며 땀과 흙먼지를 씻어내고 있자니 문득 이상한 기운을 느낀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음? 으헉?!"
적호赤虎. 아니, 백호白虎였다. 뭘 하다 그리 되었는지 모를 만큼 피칠갑한 얼굴 때문에 적호로 보인 것 뿐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대체 어느 새 이토록 가까이 다가왔단 말인가.
“그르르르르르…….”
“아, 으아으, 으흐흐, 으으…….”
낮게 깔리는 산군山君의 울음소리에 오금이 저려왔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이대로 죽는구나. 눈앞의 풍경을 덧씌우듯 지난 날의 삶이 좌르륵 스쳐지나갔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이라 생각했으나 별의별 오만가지 추억들이 우후죽순 떠올랐다. 그 끝이 이렇게 허무한가. 어머니 아버지. 불효자는 먼저 세상을 뜹니다! 재월은 천천히 다가오는 백호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지? 그 순간 찰박찰박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에라, 모르겠다. 죽더라도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고 죽어야지. 그런 생각에 재월은 눈을 떴다. 거기엔 백호가 계곡물을 핥짝이고 있었다. 단순히 물을 마시러 온 것이었나. 그 생각에 맥이 탁 풀리려 했으나 그 순간 백호가 고개를 들어 재월을 바라보았다. 맹수라고는 하나 결국 짐승이다. 허나 백호의 눈빛은 어지간한 사람들보다 깊고 맑았다. 영물이다. 영물이야. 백무후와 팔섬풍 중 하나겠구나. 어이구야.
자박자박 돌 밟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고개를 돌린 재월─훗날 그는 그때 도대체 어떻게 백호를 앞에 두고 고개를 돌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몸서리쳤다─의 시야에 지팡이인 듯한 장대를 든 여인이 들어왔다. 허름한 의복이었지만 끝단이 헤지거나 주름 잡힌 곳 없는 옷을 맵시있게 입은 여인이었다. 산행에 지친 듯 땀이 맺힌 얼굴은 산 사람치고는 생기가 희미했다. 그래서인지 제법 아름다운 얼굴이건만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여인은 백호를 보다가 재월을 눈치채고는 살짝 미소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 그, 그어, 그래……. ”
얼떨결에 인사를 받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웃으니까 좀 사람답구나. 아니, 정말 사람이 맞기는 한 건가? 피칠갑한 백호를 보고서도 놀라지 않으며 등에 짊어지고 있던 약초 바구니를 내려놓은 여인이 물가로 다가오는 것을 본 재월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아니, 너, 무슨…….”
찰박. 찰박.
여인은 자연스럽게 백호 곁에 다가가 피칠갑인 백호의 얼굴을 정성스레 씻기기 시작했다. 새끼 고양이마냥 낑낑거리는 백호를 어르고 달래며 피를 닦아내는 그 모습은, 마치 씻기 싫어하는 어린 동생을 씻기는 큰누나의 그것처럼 보였다.
“낑낑…….”
“참아. 백모白母께 한소리 듣는다.”
“끄응…….”
호랑이가 다른 고양잇과 생물들과는 달리 물을 좋아한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 손길로 귀며 수염이며 문지르는 걸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백호라고 아니그러할까. 그런데 우마牛馬보다 더 큰 백호가 훨씬 작은 여인의 행동에 따르다니.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이게 현실의 일이 맞는 건가?
공황 상태에 빠진 재월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호의 얼굴에서 피를 모두 씻어낸 여인은 자신 또한 계곡물로 세안을 하고는 다시 약초 바구니를 짊어졌다. 그러자 백호가 여인의 치맛자락을 살짝 물어당기며 엎드렸다. 그 모습에 여인이 괜찮다는 듯 가로저었지만 막무가내인 백호의 태도에 결국 조심스레 백호의 등 뒤에 올라탔다. 세상에 맙소사. 지금 내가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여인을 등에 태우고서야 일어난 백호는 마치 여인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듯한 발걸음으로 조용히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퍼뜩 정신을 차린 재월은 허겁지겁 짐을 챙겨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서두르던 나머지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진 그는 격통 속에 몸부림치다 백년삼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그는 열렬한 백호선녀의 신봉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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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백호선녀라…….”
“아 글쎄 진짜 있다니까요, 어르신!”
“누가 안 믿는다고 했나? 난 그저 어떤 고수인가 싶어서 그런 걸세.”
아미산 초입의 객잔에서 한참 백호선녀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철담비환鐵膽飛丸 진조운眞朝暈이었다. 천무학관의 요청에 따라 아미산으로 찾아올 주작단 16인을 가르치기 위해 온 무림고수인 그가 백호선녀 얘기에 관심을 드러내자 약초꾼이며 사냥꾼이며 아미산에 생업을 둔 이들 모두 신이 나서 그 얘기를 해주었다.
“아미파에서도 한때 정체를 밝혀볼까 했었는데 실패했지요.”
“그건 실패가 아니라 그냥 놔두자는 거였잖나.”
“아, 그렇구만.”
“여튼 여기 금재월이 이 사람이 백호선녀 얼굴 제일 가까이서 본 사람입니다.”
“어찌 생겼었는지 다시 말 좀 해드려 이 사람아.”
“그러니까, 와 이거 진짜 뭐라고 해야 되나. 음, 사람인데 사람 같지 않달까, 살아 움직이는데 허깨비처럼 생기가 없어 보이고. 예쁘긴 예쁜데 생기가 잘 안 느껴지니까 진짜 사람 같지가 않더라니까. 그런데도 웃으면 되게 예쁜,”
“거 누가 첫사랑 고백하랬나?”
“에이! 말도 안되는 소리 말어!”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을 보며 진조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적어도 자기가 아는 고수들 중에 약초꾼이 말한 인상착의나 기운을 풍기는 이는 없었다. 그것도 여성으로 한정한다면 하나도 없다. 혹시나 천겁혈세 때의 인물들까지 떠올려봤지만 도저히 맞는 이가 없었다. 대체 누구길래 백호가 자연스럽게 등에 태워주는 걸까. 특수한 무공을 수련했다 하더라도 고수일 것이고 그런 것 없이 순수한 힘으로 영물이 따를 정도라면 지고한 영역에 도달한 기인이리라. 그나마 나쁜 소문이 없다는 게 다행이었지만, 일반인에게만 이리 대하고 무림인에게는 달리 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먼저 가보겠네.”
“살펴가십시오, 어르신!”
일반인들에게도 이름이 알려진 고수가 자신들 얘기를 들어준 것이 기뻤는지 다들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객잔을 나선 진조운은 경공을 발휘해 아미산을 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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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타입문넷 자창게 글/조아라 1화)과 본문에서 등장인물들 간에 태도 차이가 나는 건, 서문은 연재 생각 없이 썼던 거라 그렇고 본문은 2부를 읽으면서 전개를 다 뒤집었기 때문입니다. 조아라 11화 후기에 언급했었는데 헷갈리시는 분들이 있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 최대한 원작의 등장인물과 전개를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하지만, 비틀어야 재밌는 게 팬픽이죠. 항상 고민하고 있습니다.
- 추가. 백호신녀라 되어 있던 부분 수정했습니다. 타입문넷 Satze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호랑이가 고양잇과 생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물을 좋아하는 동물이라는 제보를 받아 해당 부분 역시 수정했습니다. 조아라 다크비하인드 님 및 기타 제보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1.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1.
아미산은 험준하기로 소문난 산이지만 그렇다고해서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무작정 절벽과 수풀만 무성한 곳은 아니다. 다른 산처럼 세월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공터도 제법 있는 편이고, 그러한 공터 중 한 곳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노인. 여인. 여아 둘. 험하디 험한 아미산 산중, 그것도 이제 산 너머로 쏟아지기 시작한 햇살 아래서 보기에는 매우 기묘한 조합이었고, 이들이 하고 있는 일 또한 기묘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낸다면 여인의 모습은 이제 갓 중년에 든 것처럼 보이리라. 그만큼 고아하고 차분한 인상이었다. 슬그머니 그어지기 시작한 주름은 단순한 세월의 흔적이 아니라 수많은 경험의 증명이자, 유의미한 시간을 쌓아올린 이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현묘함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체, 앞에 선 노인에게 쉼없이 공세를 퍼붓는 여인의 모습은 마치 이제 갓 검을 잡은 무가武家의 아이 같았다. 물론 여인의 검로劍路에 아이와 같은 미숙함과 젊은이 특유의 조급함은 없었지만, 아이들만이 가지는 활기와 즐거음, 그리고 젊은이들의 특기라 여겨지는 패기와 기세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향상심. 무武를 향한, 상승의 경지를 갈망하는 진지함. 경탄할만큼 순수하고 올곧은 마음心이 나예린의 용안과 의사용안을 전개한 비류연의 눈에 파고들었다. 저런 식으로도 사람의 마음이 빛날 수 있다는 사실에 두 사람은 적잖은 충격을 받고 있었다.
반면 노사부는 시종일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이는 손에 쥔 대나무 빗자루를 설렁설렁 휘둘러 여인의 검을 막는 와중에도 마찬가지였다. 무학을 수련하지 못한 나예린은 물론이거니와 비뢰문의 유일한 제자로 제법 수련을 쌓은 연비─비류연 역시 마음 속으로 지금의 자신이라면 절대 막지 못한다고 생각한 공격들을 노사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고 있었다.
“……빗자루를 선택하신 건, 그게 제일 길었기 때문이십니까?”
“오냐.”
여인이 잠시 물러서 숨을 고르며 묻자 노사부는 그렇게 대답했다. 정말 귀찮은 듯한 태도였다. 아마 단 한 번도 반격을 하지 않은 이유 역시 그것일 것이다. 그러나 사정을 아는 이들이라면 경악을 금치 못했으리라. 천무삼성의 일원인 검후 이옥상의 진심어린 공격을 발 한 자국도 떼지 않고 모조리 파훼하는 노인이라니. 그것도 보이는데로 그냥 집어온 대나무 빗자루로 해낸 일이라는 건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손목만 까딱여도 될 만큼 긴 게 빗자루라서 빗자루 드신 걸 거에요. 게으르신 분이시거든요.”
“다 들린다 이것아!”
나예린에게 몰래 사부의 험담을 속삭이던 연비는 노사부의 호통에 꺄아, 하고 거짓 비명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노사부는 못 볼 것을 본 것마냥 부르르 떨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검후를 향해 말했다.
“제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를 확실하게 잡아야 돼. 알겠냐?”
“아하하하, 명심해두죠.”
“거 네가 데려갈 애는 향이가 잘 가르쳐서 괜찮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돼. 제자라는 건 꼭 순식간에 비뚫어지더라고. 거참 제자 복이 없어, 제자 복이……."
노사부의 푸념에 검후가 웃으며 대답했다.
“대신 인복人福이 있으시잖아요?”
“인복? 뭐? 아, 향이?”
“네. 요즘 세상에 그런 애가 어딨는데요. 없어요. 마음 같아서는 그 아이도 데려가고 싶은걸요?”
“안돼. 간만에 발품 좀 팔아서 피곤한 거, 향이 수발 받아서 풀어야 돼.”
“사부님, 그 얘기 언니가 들으면 어쩌시려고요?”
“아, 거…… 끄응……. 못 들은 걸로 해 둬.”
제자의 말에 말을 바꾸는 노사부의 모습에 검후는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만사 두려울 게 없는 노인이건만 비류향이라는 소녀에게만큼은 약했다. 극진함의 화신인 듯한 소녀의 정성이 부담스러운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게 인간의 본성이고, 본성에 연연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음에도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노인이라도 소녀─비류향의 지극함에는 당해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절정고수들의 싸움으로 내력이 부딪쳐 만들어지는 파동으로 내상을 입을 수 있으니 따라오지 말고 기다리라는 노사부의 말에 홀로 남은 비류향이 방금 전 노사부의 말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노인의 수발을 들기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정성을 다해 준비하리라. 얼굴을 본 건 고작 일주일이지만 검후는 어렵지 않게 그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미소를 그려졌다.
“하여튼, 이제 끝난 거냐?”
노사부는 퉁명스레 물었다. 애초에 원하지 않는 대련이었다. 노사부가 돌아다니다보니 예상보다 일주일 정도 늦게 도착했는데, 먼저 와 있던 검후가 그동안 진기 고갈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비류향에게 진기를 주입해었주고, 그와 더불어 매우 좋은 술 한 병을 바친 덕분에 간신히 이 자리가 성립된 것이었다. 혼자서도 알아서 쑥쑥 크는 애가 뭘 더 배우겠다고 노구를 힘들게 해, 아 몰라 뭐가 아쉬워서 너랑 투닥거리냐, 한참 어린 애랑 싸우면 주변에서 욕해서 안해요 등등 온갖 변명을 늘어놓다 이 자리에 섰으니 내키지 않을 만도 했다.
그런 노사부의 심정과는 달리 검후는 굉장히 신이 난 상태였다. 검후 정도의 고수에게 있어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상대란 극히 한정되어 있으며, 말 그대로 전력을 다할 수 있는 상대란 손가락에 꼽을 정도가 된다. 그런데 눈앞의 노사부는 자신의 모든 절초와 비기를 쏟아붓더라도 쓰러뜨릴 수 없는 상대였다. 손끝 하나 닿지 못한다는 건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일이었지만, 안심하고 모든 기술을 아낌없이 써볼 수 있다는 것은 그러한 단점을 단숨에 메꿔버릴만큼 굉장히 매력적인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검후는 구상을 마치고 이제 갓 연검練劍을 시작한 최후의 절기를 사용해보기로 했다.
“마지막 하나만 더 받아주시면 됩니다.”
함께 천무삼성이라 불리는 친구 중 하나인 도성 하후식이 강을 갈랐다며 보여준 초식에 자극받아 수련중인 기술. 아직 미완성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노사부에게 사용해보기로 한 것이다. 이 괴물 같은 노인은 분명 아무 탈 없이 받아내리라. 그 옛날 검을 처음 배우던 시절, 스승님께 어설픈 검기를 자신만만하게 펼치던 것을 떠올리며 검후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것만으로도 순식간에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고오오오오────
겨울바람이다. 투명하고 날카로운 냉기를 머금은 동풍冬風은 계절에 맞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초월적인 힘이었다. 의념意念이 자연의 섭리에 간섭하는 초월의 경지. 그러나 그것을 보고도 노사부는 안색을 바꾸지 않았다.
“에잉, 쯧. 후딱 해 봐!”
자세를 가다듬기는커녕 귀찮다는 듯한 얼굴 그대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서 있는 노사부의 모습은 헛점 투성이였다. 허나 검후는 어디를 향하더라도 사문死門이 되는 노사부의 헛점을 보며 미소지었다. 과연 기인奇人이며 성인成人이다. 그리 생각하며──
“말학末學의 기술, 받아주십시오!”
해상비조천참절海上飛鳥千斬切
──무지막지한 내공이 실린 검을 노사부를 향해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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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천……. 천겁령……. 허허……."
서천에서 한중으로 가는 문턱인 검각.
촉한 최후의 항전지로 유명한 이곳에서 누군가에게는 마지막이고 누군가에게는 처음인 객잔에 앉은 한 노인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후자는 100년 전부터 뒤숭숭한 단어였고 전자는 요 근래에 뒤숭숭하게 된 단어였다. 한 달 전 같았으면 노인네가 불길한 말을 입에 담는다며 꺼림칙해 했을 테지만, 다행스럽게도 요즘에는 언제 어디서든 모이기만 하면 다들 그 얘기였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범인凡人들과 다른 점이라면 은연중에 두려운 기운을 풍기는 대중과는 달리, 노인은 매우 귀찮아하면서 동시에 짜증 섞인 분노를 피워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기운으로 인해 거리에서 이름 좀 날린다하는 건달패가 기세 좋게 객잔에 들어왔다가 노인의 기도에 눌려 숨도 크게 못 쉬고 조용히 나간 게 방금 전 일이었다.
“성질머리만 급해서는 노인공경도 못하는 놈들 때문에 놓쳤구만. 에잉…….”
한 달 동안 이 잡듣 사천땅을 뒤지던 노인─노사부는 개방 거지들로부터 불과 나흘 전에 뒤숭숭한 기운을 풍기는 외팔이가 이 근방에서 목격되었다는 정보를 얻었다. 고작 나흘 차이로 놈을 놓쳤단 말인가. 간만에 사천땅을 돌아다니다보니 별 것 아닌 무인 나부랭이들이 시비를 걸어대길래 친히 교육적 가르침을 사사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리고 그로 인한 적절한 보상을 받느라 지체되지만 않았더라면 직접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노사부는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아, 조지러 갈까, 말까…….”
굳이 인간이 아니더라도 좋다. 원념이든 지박령이든 정령精靈이든 신수神獸든 닥치고 후드려패 놈이 간 길을 묻다보면 금방 뒤를 쫓을 수 있으리라. 정 안되면 구역질 나는 놈의 혼백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면 될 일이다. 섭리와 천도天道에 위배되는 일인지라 저승사자니 상천지사上天之士니 하는 것들이 시끄러워 심히 귀찮은 일이기는 하지만 못할 거야 없다. 허나 이제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슬슬 진원진기도 다 떨어졌겠지. 으음…….”
혹시 몰라 되는대로 대충 듬뿍 넣어주기는 했지만 비류향에게 주라고 하며 비류연에게 넣어줬던 진기는 이제 거의 다 고갈되었을 시점이었다. 진기 주입이야 그럭저럭 실력이 되는 무인(어디까지 노사부 기준)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테지만 문제는 그런 무인이 과연 비류향 같은 아이에게 아무런 댓가 없이 진기를 주입해줄 것이냐는 것이었다. 세상은 비정하기 그지 없는 밀림이다. 노사부는 문명과 지성을 가진 이들이 더 잔혹하다는 것을 수백 년 동안 지켜봐왔다.
“……쯧. 흐유……. 가야겄다. 나중에 찾지 뭐.”
한참 동안 고민하던 노사부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나일천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놈의 행적을 보아하니 아예 사천땅을 떠난 것을 보였다. 쉽사리 돌아오지는 않으리라. 신뢰할 수 없는 직감과 석연찮은 증거들이 가득했지만 왠지 그러한 생각이 노사부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무엇보다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조질 수 있는 쓰레기에게 시간을 버리는 것보다, 부담스럽더라도 자기 수발 들어주는 소녀에게 시간을 투자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혹시라도 돌아올 때를 대비해 노사부는 꼬박 하루를 소비해 지역 전체에 금제진禁制陳을 설치했다. 진법에 통달한 이가 보았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승상(제갈량)께서 살아돌아오셔서 다시 진법을 설치하면 이러지 않을까 싶을 만큼 정교하고 치밀하면서도, 오로지 특정한 한 사람만을 잡을 수 있는 진법이라니. 설령 어디 한 군데가 망가지더라도 자연스럽게 축을 바꾸어 스스로 고쳐지니 마치 살아있는 생물과 같았다. 진법을 기동시킨 노사부는 마지막으로 진의 중심인 바위에 한 문장을 새겼다. 놈이 이 진에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이 바위 앞으로 인도되어 문장을 보게 되리라.
[다시 사천땅 밟으면 뒤진다.]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폭력적인 문구는 노인의 화법이라기에는 매우 난폭했지만, 제자인 비류연이 봤다면 “야, 정말 사부다운 말이네요.” 라고 할만큼 노사부의 개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일을 마친 노사부는 천향루를 향한 귀로에 올랐다. 만약 검후가 다음 날 천향루에 도착할 것을 알았다면 그로 인해 벌어질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극한의 경공을 발휘해 달려왔으리라. 허나 노사부가 검후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은 불행히도 일주일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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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연이야 워낙 괴물 같은 사부를 두었기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지만, 나예린은 달랐다. 정천맹주인 아버지 나백천을 두고도 용안의 부작용으로 사람을 멀리했던 소녀는 아버지의 검식劍式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어떤 무인의 무학도 제대로 구경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소녀의 눈에 비친 노사부와 검후의 격돌은 단순한 무인들의 비무 이상의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단순한 병장기가 부딪침에도 놀랄 것인데 심후한 내공이 격돌하였다. 범인凡人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압도적인 파격이 담긴 무학武學의 소용돌이는 그 안에 깃든 기氣의 흐름까지 심오하기 그지없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이치가 폭포수 사이로 빛나는 무지개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술값은 했구만.”
노사부는 떫은 표정으로 말했다. 손가락 마디 하나 만큼 왼발이 앞으로 나가 있었다. 귀찮아서 별 생각 없이 대응했다고는 하나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약조가 깨진 것은 사실이었다. 만에 하나 움직인다면 한 번 더 대련에 응해주기로 했다. 어쩌자고 그런 약조를 맺은 걸까. 까놓고 말해서 선금으로 술도 받았으니 대련이야 이기든 말든 아무래도 좋았고, 한 번 더 해주는 거야 검후 정도로 실력도 얼추 되고 아리따운 꼬마 아가씨(어디까지나 노사부 기준이다)와 어울려주는 것 쯤은 기분이 좋다면 못해줄 것도 없다. 허나 안 해도 되었을 일을 괜히 입을 놀렸다가 하게 되었으니 찝찝할 따름이었다.
“반 걸음 정도는 움직이실 줄 알았는데…….”
검후의 말에 노사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제대로 가다듬지도 않고 그냥 거칠기만한 공격인데 뭘 반 걸음이나 움직여. 한 마디만으로 만족해. 그리고 그 기술 완성되면 그때 다시 찾아와.”
“에이, 그건 아니죠! 분명 금산적주金山赤酒받으실 때 언제든 다시 받아주시기로 하셨으면서!”
“네 기술들 중에 그나마 괜찮은 게 그거 하나 뿐인데 뭘! 또 이번처럼 한 마디 움직이고 끝내려고? 그럴 거면 덤비던가!”
“으으……!”
얼핏 보기에는 짠돌이 스승과 천덕꾸러기어린 제자처럼 보이는 대화을 나누며 투덜거렸지만 검후의 얼굴은 밝았다. 전력을 다한 공격이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후련한 표정이었다. 천상천天上天에 절망하던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나갔기에 새로운 경지가 있다는 것과 노력하면 닿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검후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설마 이 나이에 처음 검을 잡을 때처럼 두근거리는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이야.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류……연비야! 먼저 가서 식탁 좀 차려놔라!”
“네~ 가요, 린!”
“네. 먼저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마침과 동시에 길이라 하기도 힘든 좁은 오솔길을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까르르 웃으며 내달려가는 소녀들의 모습에 검후가 미소지었다.
“참 활기차네요.”
“너무 활기차서 문제야.”
“풀죽어있는 것보다는 좋잖아요?”
“이왕이면 얌전한게 좋아.”
“향이처럼요?”
“거긴 너무 얌전하고.”
소녀들이 뛰어간 길로 향하며 노사부는 빗자루로 허리를 두드렸다. 대련이라고 해봤자 노사부가 움직인 건 손목 뿐이었지만 이런 건 마음의 문제라 괜시리 허리나 무릎을 어루만지게 된다. 그러면 하나뿐인 제자는 정정하신 분이 왜 상노인네 흉내내냐 투덜거리고, 그 제자의 누이는 찜질하시라며 냉수건과 온수건을 준비한다. 망할 놈. 역시 제자는 휘어잡아야 되는 거야. 속으로 궁시렁거리던 노사부는 문득 검후를 향해 말했다.
“밥 먹고 나서 가는 거냐?”
“네.”
“짐은 다 챙겼고?”
“그럼요.”
노사부가 천향루로 돌아와 검후와 만난지로부터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나흘은 천향루에서 서로 온갖 이야기를 하며 지냈고 이틀은 아미산 모옥에서 지냈다. 노사부는 검후와 나예린의 모옥 숙식을 썩 내키지 않아 했지만 검후가 넘긴 금산적주의 독특한 주향이 노사부의 불만을 잠재웠다. 그러나 그것도 이틀이 한계였다.
그래도 목표인 대련을 해냈으니 검후는 아쉬울 건 없다. 다만 그 아이는 아쉬워하겠지.
검후는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한 나예린을 떠올렸다. 소문과는 달리 감정표현도 잘 하고 말수는 적지만 하고 싶은 말은 할 줄 아는 아이였다. 그렇게 되기까지 도움을 준 어머니이자 친구였던 이와의 이별이 어찌 아쉽지 않을까.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그 반대도 있는 거지 뭘. 너도 그만큼 나이 먹었으면 알잖냐. 걱정도 팔자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니까요.”
“평생 헤어지는 것도 아니구만.”
귀찮다 어쩌다 투덜투덜 말이 많았지만 그래도 노사부는 일일히 답을 주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검후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오늘 아침은 뭘까요? 먼 길 가야 되니까 맛있는 거면 좋을 텐데.”
“향이 밥은 뭐든 맛있어.”
“그래도 그날 딱 먹고 싶다는 거 있잖아요.”
“음, 죽순무침이 끌리는구만.”
“죽순무침 좋네요. 거기에 대나무통밥도 있으면 최고겠어요.”
그런 대화를 나누며 모옥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잠시 후, 식탁에 올라온 대나무통밥과 죽순무침을 보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 길러 가질 못해서 부득이하게 죽향竹香을 빌려 밥을 지었습니다.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반찬을 내오겠,”
“노야. 정말 데려가면 안될까요?”
“안된다니까.”
“금산적주 열 병 보내드릴게요.”
“평생 먹을 분량 가져다 줘도 안 보낼 거야.”
“저기……?”
심상치않은 표정으로 못 알아들을 대화를 나누는 어른들을 보며 당황해하는 비류향을 식탁에 앉힌 것은 연비와 나예린이었다.
“언니, 괜찮아. 그냥 밥 먹으면 돼.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어, 응, 그래…….”
자연스럽게 식기를 집는 동생들의 모습에 비류향 역시 조심스레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노사부와 검후의 말싸움은 아이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을 덧붙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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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스러운 아침식사를 마치고 차 한 잔을 마신 후 마지막으로 짐을 확인한 검후와 나예린은 오두막을 나섰다. 배웅하는 이는 비류향과 연비 뿐이었다.
“원래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만남인데 무슨 배웅을 해. 어차피 쉽사리 끊어질 인연도 아닌데 그냥 가.”
노사부는 그리 말하며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인연의 소중함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말이었지만 노사부의 성품을 알기에 다들 아무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
나예린은 말없이 비류향을 끌어안았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부모님을 제외하면 가장 깊은 인연과 헤어지는 것이며, 동시에 처음으로 만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이와 헤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이 따스한 품에 다시 안길 수 있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어린 소녀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런 불안을 읽은 것일까. 비류향의 손길이 살포시 나예린의 머리를, 뺨을 쓰다듬었다. 순식간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아아, 정말, 못 당해내겠구나. 이 온기를 지키고 싶다. 그날처럼 무력하게 보호받고만 있지는 않을 테다. 그렇게 다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나예린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스스로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갈게요.”
“……응.”
당찬 소녀의 말에 비류향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그리고는 검후를 향해 말했다. 비록 혈육은 아니나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걱정 말거라. 어지간한 놈팽이들은 손짓 하나로 내쫓을 수 있는 아이로 만들 터이니. 그런 대화를 하는 동안 나예린은 연비를 향해 말했다.
“갈게. 기회가 된다면 서찰을 보낼게. 답장, 해줄 거지?”
“기대하고 있을게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몸조심이에요. 알죠?”
“응.”
비류향이 친구이자 어머니였다면, 연비는 언니동생하며 지내기는 했지만 나예린이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꼭, 다시 만나자.”
“네. 아, 그때는 처음 만나는 걸지도 몰라요.”
“……후훗,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럴지도 모르죠.”
아마도 그때는 연비가 아닌 비류연으로서 만나게 되리라.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날이 어서 오기를. 그렇게 생각하며 나예린은 인사를 마치고 검후와 함께 남해로의 여정길에 올랐다.
산천초목의 신록이 더욱더 짙어지는 푸른 여름의 초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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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었네요. 역시 술이 웬수입니다. 이걸로 과거편은 종료입니다. 다음화부터는 다시 1부 초입으로 돌아갑니다.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0.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10.
노사부가 천향루를 떠나고 비류향이 눈을 뜬 그날 이후 세상은 더없이 소란스러워졌다. 중원 전체에 서천멸겁의 부활과 그 정체가 정천맹주 나백천의 친동생 나일천이었다는 사실은 무림 뿐만이 아니라 관官과 민民에도 퍼져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백천은 그날로부터 약 2주 후인 오늘, 예정보다 일찍 사천을 떠나게 되었는데, 딸인 나예린은 남겨두고 먼저 떠난다는 결정을 내려 주위 인물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정말이십니까?”
“그렇네.”
살해당한 전 정천맹 사천지부장 남궁현의 동생인 남궁진은 맹주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천멸겁이 나일천이라는 사실은 이제 천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가 조카인 나예린을 덮치려 했다가 실패하고 도망쳤다는 것은 극히 소수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남궁진은 그 소수 중 하나였다. 언제 나일천이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그 아이를 이곳 사천 땅에, 그것도 일이 벌어졌던 천향루 숙소에 그대로 두겠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노야께서 안배해두셨으니 세상 어느 곳보다도 더 안전할 걸세.”
“그 무희舞姬말씀이십니까? 확실히 무시무시한 내공을 전해주고 가신 것 같습니다만, 그 아이 하나로 되겠습니까?”
남궁진이 연비를 언급하자 나백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 아이도 있지만, 그 외에도 몇 가지 더 준비해두고 가셨네. 내가 만일 그놈이라면 감히 그곳에는 얼씬도 안 할 거야.”
“대체 뭘 하고 가신 겁니까?”
“……알고 싶나?”
“……나중에 듣도록 하지요.“
대체 무슨 안배이기에 천하의 정천맹주가 저리 심각한 얼굴로 되묻는단 말인가. 어찌되었든 그가 안심하고 떠날 수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게다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검후劍后께서 예린이를 거두어가실 걸세.”
나예린을 검후에게 맡긴다는 얘기는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왔던 일이었기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제자가 될 나예린을 보내는 게 아니라 스승이 될 검후 이옥상이 남해에서 사천까지 직접 찾아온다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은 일이었다. 정천맹주라 하더라도 오라가라 할 수 없는 것이 천무삼성이다. 거기에 검성劍星과 도성刀星 모두 대결을 꺼리기에 사실상 제일인 검후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검후가 제자로 맞이할 아이를 위해 이곳에 직접 온다니?
“노야의 서찰을 함께 보냈네. 그랬더니 '이곳 일이 있어 바로는 못 가지만 곧 간다.'라고 하셨다더군. 노야께서 돌아오실 때쯤이면 그분께서도 이곳에 도착하시겠지.”
“대체 뭐라고 쓰셨길래 검후께서 직접 오신답니까?”
“글쎄. 엄청나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고 들었네만…….”
“……그거, 엄청나게 화가 나셨다는 얘기가……?”
노사부의 평소 언행으로 보아 결코 정중한 말투와 내용은 아니었으리라. 아마 '더 강해지고 싶으면 찾아와라.' 내지는 '더 강한 놈이랑 싸우고 싶으면 찾아와라.' 정도지 않았을까. 새삼스럽게 검후의 미소를 상상한 두 사람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일이 급하니 어서 본부로 돌아가봐야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갈길이 멉니다! 서두르시죠!”
천겁령과 싸울지언정 검후와는 절대 칼을 맞대고 싶지 않다. 그것은 검후를 아는 모든 남자들이 동의하는 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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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음률을 타고 소녀의 몸이 자연스럽게 튕겨오른다. 동시에 울려퍼지는 방울소리는 청량했지만 관객들의 시선은 무언가에 홀린 것마냥 몽롱했다. 그러면서도 소녀의 손짓 한 번에, 발디딤 한 번에 정확하게 고개를 움직인다. 맑은 밤하늘마냥 투명하게 검은 옷자락과 진주인지 유리인지 모를 것이 박힌 주단이 별빛처럼 반짝이며 펄럭일 때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소녀의 춤에 매료되어갔다.
아름다운 춤이다.
단순히 흩날리는 무복舞服 아룸다운 것이 아니다. 소녀의 외모가, 시리도록 투명하고 맑게 빛나는 영명황금안瑩明黃金眼이 아름다운 게 아니다. 잠재된 아름다움美을 표면으로 끌어올려 타인을 매료시킨다는 것은 지극한 의지와 수천 수만 번의 반복이 있어야 가능한 행위이다. 그렇기에 소녀의 동작은 그 나이대 아이들이 쉽사리 닿지 못하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손짓 발짓 하나하나가 절도 있으면서도 기품이 담겨 있고, 그러면서도 소녀답지 않은 강직함이 깃들어 있다. 동시에 우아하고 부드러운 곡선이 그려지는 춤사위. 이것을 아름다움美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아름다움일까.
너무나도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취한 관객들은 소녀의 춤과 음악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누군가의 박수소리를 듣고나서야 정신을 차린 듯, 혹은 신들린 듯한 얼굴로 박수를 치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관객들의 환호에 잠깐 눈을 반짝이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소녀가 대연무장大演舞場를 내려와 객석으로 향하자 수많은 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녀를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누군가 식탁에 부딪쳤는지 와장창 소리가 울려퍼졌지만 그걸 신경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 멋진 춤이구나. 굉장했다. 누구에게서 배운 춤이냐. 한 번 더 춰줄 수 있느냐. 훌륭하다 등등. 경탄과 환호가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에는 노골적으로 소녀에게 오늘 밤 자신의 객실로 와달라고 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니, 요청이면 그나마 양호하다. 칼밥 좀 먹은 듯 공력을 풀풀 풍기며 추잡한 미소와 함께 오라고 명령하는 이들까지 나오는 판국이었다. 허나 소녀는 그런 이들의 손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피해 대연무장 문 밖으로 나갔다. 뒤따르던 관객들이 소녀를 따라 문 밖으로 나왔지만, 소녀의 모습은 어느 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두 소녀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혼란스러운 대연무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비교적 한산한 식당으로 들어온 소녀들─나예린과 비류향은 어느 새 연무복을 벗고 평소 입던 현의玄衣로 갈아입은 연비가 구석 쪽 조용한 자리에 앉아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동생의 손짓에 두 사람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땠어?”
“정말 아름답더라.”
“멋진 춤이었어.”
“후후후,”
소녀들의 칭찬에 연비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실제 성별과는 별개로 다분히 소년 같은 웃음이었지만 이미 비밀을 아는 소녀들에게는 그다지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비류향은 처음 연비─여장한 비류연을 봤던 날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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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향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을 지나 산허리까지 반절 정도 온 거리에 걸려 있었다. 이렇게 오래 잠들었던 게 대체 얼마만일까. 다만 개운한 느낌은 없었기에 푹 자고 일어났다고는 할 수 없었다. 심지어 몸에 힘을 주면 어디랄 것 없이 파르르 떨려와 상반신을 일으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언니!”
“언니!”
익숙한 목소리와,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엔 두 명의 소녀가 있었다. 하나는 나예린이었다. 한 달 동안 정을 붙인 소녀는 망설임없이 비류향의 품에 파고들었다. 다행이다. 무사했구나.
“다친 데는 없지?”
“네!“
품 안에서 들려오는 나예린의 밝은 목소리에 안도한 순간, 또 한 명의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그 소녀는──,
“저기, 혹시 연이니?”
친동생인 비류연이 여장을 하면, 아니, 만약 소녀였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 외모였다. 게다가 저 황금안을 어찌 몰라볼까. 체형도 비슷했고 묘한 친숙함이 느껴졌다. 허나 소녀의 대답은 비류향의 예상과는 달랐다.
“아뇨, 전 연비라고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래……?”
“아, 소개할게요. 비류연이 아니라 연비에요. 이번에 천향루에 임시 무희舞姬로 일하러 왔대요.”
아버지께서 저랑 함께 있어달라고 하셨대요. 나예린이 그렇게 말했지만 비류향은 그러냐고 대답하면서도 석연찮은 표정으로 연비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연비는 그저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비류향의 시선이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연비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의혹 어린 시선에 어리둥절하거나 언짢아할 법도 하건만 그러지 않기에 의심이 더욱더 깊어져 갔다. 그러다 문득 창 밖을 보더니 말했다.
“하긴, 연이라면 지금쯤이면 대장간에서 쇠를 두드리고 있겠지. 미안해. 동생이랑 헷갈려서 괜히 불편하게 했구나.”
“……괜찮아요.”
비류향의 말에 연비는 방금 전까지 그리던 미소 대신 미묘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나예린의 손을 잡아 일으켜 거리를 두었다. 이제 괜찮지 않아? 더 해볼래요? 아니, 이제 그만할래. 나도 어쩌구 저쩌구. 소녀들 특유의 재잘거림과 속삭임이 뒤섞인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피로감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눈앞이 침침해져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두 소녀가 대화를 끝낸 듯 다가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예린이었다.
“언니, 이쪽은 '지금'은 연비에요.”
“……지금은?”
“'지금'은 연비랍니다.”
“……아!”
잠시 고민하다 무언가 깨달은 듯 비류향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말문이 막힌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몰랐다. '여장'한 동생을 본 누이는 뭐라고 해야하는 걸까. 해괴망측한 일이라며 나무라야 하는 걸까. 왜 그랬는지 연유를 물어야 하는 걸까. 고민하던 비류향은 이내 답을 내렸다.
“처음 만나는 거지만, 보고 싶었어.”
비류향이 이리 오라는 듯 팔을 벌리자, 연비는 눈을 글썽이며 그 안에 파고들었다.
“처음 만나는 거지만,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비류향과 연비─비류연은, 이 세상에 단 하나 남은 혈육은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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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벌써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잠드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전처럼 쪽잠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이것이 회복인지 아닌지는 애매한 사항이었지만 비류향은 이것을 회복세라고 판단했다. 길게 자도 피곤한 것보다는 옛날처럼 쪽잠을 자더라도 비교적 덜 피곤한 것이 몸 상태가 좀 더 나은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거기에 동생을 통해 노사부의 진원진기를 받아들인 몸이 점점 활력을 되찾아가는 것도 그러한 생각을 뒷받침해주었다.
호전되어가는 몸 상태와는 별개로 정신적으로는 답답했다. 지금까지 잠잘 때나 병마에 휩쓸렸을 때를 제외하면 뭐든지 일거리를 손에서 놓지 않던 소녀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니 답답할 수 밖에 없었다. 매일 같이 움직이던 몸이 가만히 있으니 좀이 쑤시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가볍게 청소라도 할라치면 나예린과 연비가 모두 달라붙어 쉬라며 억지로 침대로 이끌었기에 일주일간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조금이라도 무리다 싶으면 둘 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매달려 비류향을 쉬게 하였다.
그렇게 함께해서 그런지 나예린과 연비─비류연은 금새 친남매처럼 친해졌다. 그 또래 아이들은 친하게 놀다가도 어느 순간 틀어져서 싸우기도 하건만, 둘 다 어른스러운데다가 한쪽이 용안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다투는 일은 없었다. 지금만 봐도 춤이 아름다웠다, 언니들이 보러 와줘서 더 열심히 했다 등의 얘기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특이한 점이라면 비류연─연비가 나예린을 언니라 부르는 점이었다. 서로 친구처럼 지내다가 갑자기 자매처럼 지내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서로 한 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른스러운 아이들치고는 다분히 유치한 이유였지만, 어차피 진지하게 언니동생하는 것은 아니라 친구 사이의 장난 같은 행위였다. 거기에 더해 비류향이라는 언니와 함께하며 동생이라는 존재를 의식하고 손윗누이가 되고 싶었던 나예린과, 남들은 다들 세네 명씩 되는 집안에서 단 둘인 게 아쉬웠던, 그리고 누나라고 하면 비류향 하나 뿐이니 세상 누나들이 모두 다 착하고 좋은 줄만 아는 비류연의 속내가 맞아떨어졌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처음에 어색했던 것은 연비─비류연의 모습이었다. 어릴 때부터 봐 온 남동생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화장을 하고 여성복을 입고, 여성스러운 언행을 하고 다니니 기억과의 괴리감 때문에 뭐라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노사부가 수련을 위해 여장을 지시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몸은 남자로 태어났으나 마음은 여인인 자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 반대도. 나는 네가 어떤 삶을 살든 개의치 않을 거란다. 허나 미안하구나. 내가 마음을 쓰지 못해서. 진작에 알았다면 챙겨주었을 것을."
"……어, 어?! 아니, 아냐! 걱정 마! 그런 거 아니니까!”
“아니니?”
“아니야! 사부님이 수련 때문에 시키신 거야!”
다행스럽게도 오해는 풀어졌다. 동시에 한 소년의 성 주체성을 지켜낸 순간이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여장을 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동안 은연중에 새로운 세계에 눈 떠 가던(?) 소년은 누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비류연은 어느 새 흩어져가고 있던 있던 자신 안의 남성성을 다시금 확립할 수 있엇다.
“고마워, 언니(누나).”
“응? 응.”
어찌되었든 이제는 잘 지내고 있으니 괜찮은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비류향은 주문을 위해 점소이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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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온 지 한 달 정도 되었나. 연비─비류연은 오늘의 마지막 공연을 마친 후 객실로 돌아가면서 노사부와 함께 이곳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세상에 하나뿐인 사랑하는 누나가 오늘내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노사부와 함께 바람 같이 달려왔던 날로부터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누나가 쓰러져 있다는 것 때문에 정신이 없어 별다른 감상이 없었지만 확실히 이곳은 편했다. 여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일단 사부가 없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모든 문제가 사소(?)해졌다. 그와 더불어 온갖 집안일과 부업으로부터도 해방된 상태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금전적 손해가 있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춤과 노래를 팔아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구멍을 메꿀 수 있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누이가, 비류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노사부에게 핍박받으며 고난의 행군길을 걸어오던 소년에게 상냥한 누이를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은 분명한 행운이요, 삶의 축복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힘들었지?”
객실 문을 열자, 바느질하던 비류향이 그렇게 물었다. 석양빛을 등진 누이의 모습에 비류연─연비는 근래에 배운 의사용안擬似龍眼을 펼쳤다. 의사용안이 발동되자 붉은 석양과 더불어 따사로운 푸른빛이 눈을 파고들었다. 자신의 춤과 노래가 아무리 사람들을 매료시켜도 이것을 따라갈 수는 없으리라. 그만큼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연비는 그대로 비류향에게 다가가 허리춤에 파고들어 매달리며 말했다.
“힘~ 들~ 었~ 어~”
연무와 가악歌樂은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고 추파를 던지는 관객들─특히 무림인들을 따돌리는 것은 심히 귀찮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힘든 것은 의사용안 수련이었다.
의사용안은 나예린의 용안 직시直示수련을 돕다보니 자극을 받아 심심풀이 삼아 만들어 본 기술로 그 자체는 연비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허나 문제는 기술을 쓸 때마다 보이는 사람들 마음 속의 어둠이었다. 처음 의사용안을 발동시키고 본 인세人世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끔찍하기 그지 없었다.
“린, 언니는, 매일, 저런 걸, 웁, 보고, 있었어요?”
“……응.”
연비가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애써 참으며 던진 질문에 나예린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비는 새삼스럽게 나예린의 정신력에 경의를 표했다. 들끓는 욕심. 추잡한 사심. 사악한 갈구. 선량한 가면 아래,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어둠이 일렁이는 세상. 아무런 힘도 없는 소녀가 저 지옥을 보며 살아오면서 미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예린이 왜 그렇게 비류향에게 마음을 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시리도록 투명하면서도 봄햇살처럼 따스한 하늘빛 심상心想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수고했어.”
비류향은 바느질하던 옷감을 탁자 위에 두고, 허리춤에 매달린 동생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연비는 더해달라는 듯 뺨을 부볐고 비류향이 남는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자,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얌전해졌다. 과연 누가 이 소녀가 무대 위에서 초연한 얼굴로 춤을 추고 금을 타던 소녀라 볼까 싶을 만큼 행복한 미소였다. 눈앞에 빛나는 하늘빛 심상이 있는데 어찌 행복하지 않을까. 이 광경을 포기하지 못하기에 의사용안 수련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분명 괴로운 수련이었지만, 비류향을 보면 알 수 있듯 의사용안이 꼭 나쁜 것만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꽃을 보러 가자. 폭포도 보러 가자. 오색 단풍도.”
“설산은 오르기 힘들지만, 순백설산 정경은 얼마나 멋진데!"
“……보러갈 수 있을까요?”
노사부의 안배에 기대다보니 천향루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된 나예린은 연비와 비류향에게 산풍경 얘기를 듣다가 그렇게 되물었다.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예린은 그러한 얘기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흥미가 동하는 아이였다. 다만 지금은 어려웠다. 언제 어디서 서천멸겁이 올지 모르는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도 어찌될지 모른다. 그걸 알고 있기에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한 나예린이 시무룩해 하는 찰나, 비류향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용안!”
“네?”
“용안은 사람의 심상을 읽을 수 있잖니?”
“……아! 그러면 되는구나!”
“……?”
“용안으로 큰언니랑 내 심상을 보면 되잖아!”
연비의 말에 나예린큰 큰 충격을 받았다. 분명 그렇게 볼 수도 있었다. 노사부가 가르쳐준 방법으로 단련한 덕분에 지금의 나예린은 더 집중하면 타인의 기억을 실감나게 공유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이와는 반대로 자제하도록 노력하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더 정확하게, 더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나예린은 비류향과 이마를 맞대고 눈을 감았다. 연비는 곁에서 의사용안을 발동시키며 두 사람의 손을 잡았다.
──풍경風景이, 아미산의 사계절이, 각자가 머금은 아름다움이 눈에, 뇌리에 파고들었다.
등에는 가벼운 바구니의 무게가 느껴진다. 사람 발길이 없는 무성한 수풀의 진한 초목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지금 이 순간 산을 타는 것처럼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감각. 그러나 어째선지 익숙하다고 느끼는 풀숲을 헤치고 나와 언덕을 넘은 그곳에는,
“어때?”
"와아……."
때마침 불어온 산바람과 함께 그윽한 꽃향기가 폐부를 채웠다. 능선 한가득 피어오른 들꽃밭.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 다음은 여름 폭포였다. 당장이라도 귀가 멀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쏟아지는 거대한 물줄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흘린 땀을 싹 식게 만들어주었다. 한여름이건만 발끝만 살짝 담가도 순식간에 몸이 부르르 떨려올 정도로 계곡물이 차갑다. 수련하다 계곡물에 폭삭 젖어 오들오들 몸이 떨려도 햇살에 달궈진 바위에 잠시 누워있으면 금새 몸이 따듯해졌다. 옷이 마르는 건 덤이다. 맑은 밤에 하늘을 보면 쏟아질 듯한 별들이 있었다.
“저렇게 많은 별은 처음 봤어요.”
“겨울에는 더 많아. 추워서 오래 보기는 힘들지만.”
가을이 되자 색색이 물든 단풍이 보인다.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하늘과 조금씩 차가워지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맨다. 그러면서도 알록달록하게 변한 산에서 눈을 땔 수가 없다. 월동을 준비하는 동물들이 보인다. 때떄로 형형색색의 숲 사이로 새하얀 것들이 빠르게 돌아다니는 게 보인다.
“그러고보니 백무후는 잘 있니?”
“우리 없어도 잘 지내지.”
“백호, 인가요?”
“응.”
차가운 백은白銀에 뒤덮인 산은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웠다. 설경雪景. 투명한 하늘 아래 솜이불처럼 쌓인 눈은 그 누구에게도 밟히지 않은 체 고요히 겨울 햇살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가까이 쌓인 눈은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냈다. 조심스레 손에 쥔 눈을 녹기 전에 얼른 입에 머금어봤다. 청명한 눈 맛은 단순한 얼음과는 달랐다. 한창 찬바람을 맞다가 따스한 온기가 들어찬 방에 들어가면 저절로 몸이 풀렸다.
“…….”
“어때?”
“……굉장해요.”
근 반나절 동안 심상 속 여행을 한 나예린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비류향과 연비는 서로를 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언젠가 꼭 직접 보러 가자. 대답은 당연히 긍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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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과 배경을 떠올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다음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집니다. 그게 안되면요? 오늘처럼 연재가 늦는 일이 벌어집니다. […]
- 조아라 sEcho님께서 프롤로그와 연재작에서의 나예린의 반응이 아귀가 안 맞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맞습니다. 안 맞습니다. 프롤로그는 생각난 거 그대로 휘갈겼던 것이고, 연재작은 제가 2부를 읽으면서[…] 전개에 수정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 타입문넷 유운풍 님께서 주술계도 다루느냐 물어보셨는데, 직접적으로 다룰 생각은 없지만 필요하면 묘사할 예정입니다. 솔직히 노사부 나올 때 빼고는 주술계가 나올까 싶기는 하지만요.
- 댓글에 대한 댓글은 안 다는 예전에 한 번 해봤다가 너무 귀찮아서[…] 실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 언제나 말씀드리다시피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은 언제나 받고 있으며, 본문 안에서 설명할 수 없거나, 본문에 묘사되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싶은 사항에 대해서는 다음 화 후기에서 대답해드릴 예정입니다.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9.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9.
“무슨 말이에요? 비류연이라니. 제 이름은 연비燕飛에요. 다른 사람하고 착각한 거 아닌가요? 그리고 여장이라뇨. 전 엄연히 여자에요!”
진짜 소녀와도 같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지만 나예린은 눈앞의 소년이 움찔하고 몸을 떨었던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히 진실을 간파당한 사람의 몸동작이었다.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는 착각할래야 착각할 수 없는 반응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
“……할 말 있으면 해요. 그렇게 보고 있지만 말고.”
“왜 여장하고 있는지 알려줘요.”
“그러니까 저는 여자라니까요?”
“거짓말.”
“거짓말 아니에요.”
“거짓말이잖아요.”
“아니라니까요?”
“…….”
나예린은 말없이 비류연을 바라보았고 비류연은 생글거리며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작은 언쟁이 있었지만 서로가 불쾌감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의문과 난처함이 있을 뿐이었다. 나예린은 생각했다. 화장을 하고 소녀다운 꾸밈을 하기는 했지만 저 모습은 분명 비류연이다.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한 달 동안 함께한 친구이자 어머니였던, 동시에 생명의 은인인 연상의 소녀가 투명한 심상 속에 가끔씩 떠올리던 활기차고 유쾌한 소년의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불구하고 너무나도 잘 알게 된 소년의 모습을 못 알아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소년은 어떤 사정이 있는지 자신을 속이려 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류연.”
“연비라니까요.”
“언니는 저한테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남동생'이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류연은 저를 처음 보는 거지만, 전 언니를 통해서 당신을 몇 번이나 '봤어요'. 그러니까 류연이 남자인 걸 알아요.”
나예린은 자신의 고백에 생글거리던 비류연의 얼굴이 그대로 굳는 것을 보며 말을 이었다.
”용안으로 직시直示하면, 아까 그분께서 알려주신 것처럼 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테지만 싫어하니까 그건 안 할 거에요. 사정이 있으니까 여장하고 있는 거겠죠? 그러니까 이제 이유는 묻지 않을게요. 하나만 대답해줘요. 비류연 맞죠?”
“……연비라니까요, 저는.”
“언니한테도 류연이 아니라 연비라고 할 거에요? 언니는 못 알아볼 거에요. 비슷한 다른 사람으로 보겠죠. 친동생처럼 대하는 게 아니라 생판 처음보는 남처럼 대할 텐데, 그래도 좋아요?”
조심스러우나 확고히. 담담하나 굳건하게.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살던 소녀가 이제는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허나 아직은 연약한 소녀의 수줍은 자기의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노사부와 교묘하고 치밀한 언쟁을 일삼던 비류연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거나 본심을 감추지 못한 체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된 이유는, 바로 한 달 동안 너무도 보고 싶었던 누이가 언급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류연은 올곧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나예린을 피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잠든 누이의 얼굴이 보였다. 누워 잠든 얼굴을 보는 게 대체 얼마만일까. 돌림병으로 죽다 살아나기 전에도 항상 자신보다 일찍 일어나고 비슷하거나 늦게 잠드는 누이였다. 간신히 살아난 이후에도 건강하다고 하기는 힘든 몸이건만 밤늦게 잠자리에 들어 이른 새벽에 깨어나 하루 종일 바지런히 돌아다니며 산 속 오두막 살림을 책임졌다. 낮에 드는 쪽잠도 앉아서 꾸벅꾸벅 졸거나 어딘가 기대에 눈만 붙이는 수준이고. 그러면서도 언제나 해실해실 웃으며 노인과 소년─두 남정네 뒤치다꺼리를 하며 지냈다.
정말 이 모습 보는 게 진짜 오래간만이구나. 새삼스럽게 누이가 제대로 누워자는 걸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은 비류연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높으신 분이 불러서 가길래 좀 편하게 지내나 했더니 누나도 참. 동시에 나예린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누나가 눈을 떠서 날 보며 “누구니?” 하고 묻는 광경이 무심코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다정하지만 어딘가 거리감 있는 태도로 웃으며 묻는 누나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연비라고 해요.”라고 대답하는 광경이 자연스럽게 그 뒤를 이었다.
“…….”
정말로. 소름끼치도록 끔찍한 광경이었다. 영사심결과 사부의 언어적 압력(?)을 통한 부동심과 평정심이 없었다면 격렬한 감정의 동요가 겉으로 드러났으리라. 지금도 썩 괜찮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나예린은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자, 그럼 이제 어떡한다. 비류연은 노사부가 여장을 하고 있는 동안은 그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된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노사부는 여장으로 완전히 자신을 잊고沒我 진정 한 사람의 여인이 되어一體 새로운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고 했지만, 비류연은 이미 그 말이 '시커먼 남정네보다 귀여운 소녀가 휠씬 더 돈 벌기 쉽다.'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물론 여장을 하고 춤과 노래를 파는 게 보법이나 분뢰수 등의 수련에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솔직히 노사부에게는 제자의 무공수련보다 수입증대가 더 중요할 것이라는 게 비류연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비류향이나, 누이를 통해 이미 자신이 누군지 아는 눈앞의 소녀─나예린에게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이 알려진다고 한들 수입에 별 영향이 없다면 괜찮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비류연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 밖의 호위─여무사들에게 다가가 묻고는 “사부님은 어디가셨나요?” “사부님?” ”수염이 긴 할아버지요.” “아, 그 분? 식당으로 가셨어. 왜?” “아무 것도 아니에요. 고마워요!” 그걸로도 모자라 창 밖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나서야 간신히 나예린 곁으로 돌아왔다.
“왜 그래요, 류연?”
“그러니까 저는 연비라니까요.”
그 말에 나예린이 입을 열려는 순간, 비류연은 검지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손짓과 함께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나예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요, 비류연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연비에요.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매우 빠르게 속삭인 말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잘못 들린 부분이 없었다. 말 못할 사정이 있구나. 어느 새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합장하듯 양손을 모아 부탁하는 자세를 취한 비류연의 모습에 나예린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잘못 봤었나 봐요, '연비'.”
“괜찮아요.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죠. 여튼 저는 '연비'랍니다. 비류연이라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게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소녀(?)는 이윽고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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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던가.
불과 닷새 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100년 전 악명을 날렸던 본인이 아니라 후계자라고는 하나, 천겁령을 지탱하는 네 기둥 중 하나인 서천멸겁이 부활하여 정천맹 서천지부장 남궁현을 살해하고 도주했다는 소식과 더불어, 그 정체가 정천맹주 나백천의 친동생 나일천이라는 사실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는 정천맹의 비상연락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나백천이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친동생이 혈겁의 후계자라는 사실은 나백천 개인은 물론이고 백도무림 전체의 치부가 될 수도 있는 사항이었지만, 그는 순간의 수치 때문에 사실을 은폐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무림은 물론이거니와 관官에서도 사람을 보내 정천맹 서천지부는 소란스럽기 그지 없었으나, 그는 쏟아지는 모든 비난과 아우성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동시에 말했다. 그러니 모두 힘을 모아 놈을 찾아야 하오.
그런 소란과는 관련 없다는 듯 이곳 천향루는 정상적인 영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문제의 서천멸겁이 직접 찾아와 후원 객실 한 곳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사람이 죽어나갔던 것을 생각하면 기이한 일이었으나, 이는 딸아이를 생각한 나백천이 재빨리 손을 써 정리한 덕분이었다.
“잘했어. 집에서 키우던 개가 광견병 걸려서는 도망쳤는데 마을 사람들한테 알려야지. 당연하잖아?”
“그렇습니까.”
“그래. 거, 지금이야 개를 어떻게 키웠길래 병에 걸렸느니, 키운 정이 있어서 못 잡았느니 어쩌니 징징거리겠지만, 그렇다고 입 다물고 있어? 당연히 알려야지.”
식사를 마친 후, 식후주酒를 홀짝이며 노사부는 그리 말했다. 나백천은 서천멸겁을 광견병 걸린 개라고 표현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비록 혈연을 끊기는 했지만 그래도 혈육이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가 저지르려 했던 죄악이 떠오르자 자연스럽게 그러한 마음 또한 사라졌다. 참살했어야 하는데. 나백천의 심정을 읽었는지 노사부가 말했다.
“지나간 일 후회하지 말고 앞으로 잘 하면 돼. 그놈, 분명 또 니 딸내미 노리고 다시 돌아올 거야. 그런 놈들은 꼭 그래. 그러니까 애 좀 강하게 키워. 꽁꽁 싸매지만 말고. 용안 가진 애니까 한 10년 동안 열심히 하면 오지게 크겠구만.”
“그렇잖아도 검후劍后에게로 보내 무학을 가르치려 합니다.”
노사부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에 나백천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노사부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검후?”
“모르십니까?”
“몰라. 요즘 애지? 내가 별호 알던 놈들 다 무덤으로 들어간지 오래 됐거든.”
노사부의 말에 나백천은 새삼스럽게 그가 얼마나 상식을 초월한 인물인지를 떠올렸다.
“천무삼성 중 하나인 여검객입니다. 천무삼성은 아십니까? ”
“이름은 들어봤던 것 같은데……. 아, 그, 걔들이구나! 걔들이지? 그 여자애 하나랑, 검 쓰는 애랑 도 쓰는 애랑 그 셋?”
“성별과 인원은 맞습니다만…….”
“그것만 맞으면 됐지 뭘. 어차피 걔네 말고 그렇게 다니는 세 사람 또 없잖아?”
“……네.”
“그래. 그럼 된 거지 뭘. 그래, 이제야 생각났다. 그리고 또, 공손, 거시기……. 에잉, 여튼 알아. 옛날에 봤지. 싹수가 있어 보인다 했더니 천무삼성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니는구만? 캬, 세월 참 빨라. 그래 그 꼬마 아가씨한테서 배우면 좀 괜찮겠네.”
세상에 누가 천무삼성에게 싹수가 있어 보였다고 하고, 천하의 검후를 꼬마 아가씨라고 할 수 있을까. 허나 나백천은 노사부의 말이 허언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술 한 잔을 넘긴 노사부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나백천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러고보니 너도 예전에 나랑 만났었나?”
“……저도 그게 궁금했습니다. 어디선가 뵜던 것 같은데…….”
“나야 늙었으니 그렇다치지만 넌 젊은 놈이 벌써부터 기억이 가물가물하면 어떡하냐.”
백을 넘긴 노인을 보고 젊다고 투덜거리며 노사부는 잔에 담긴 술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음, 술맛은 괜찮은데 안주가 영 좋지 못하구만. 향이가 만든 양고기 야채볶음이 생각나. 그런 생각을 하며 입 안의 주향을 음미하던 노사부의 눈에 나백천의 허리에 걸린 검이 들어왔다. 그것을 본 노사부는 술을 삼키며 손뼉을 쳤다.
“그 놈 매질할 때 기절해 있었던 꼬마!”
“무슨 말씀이신지……. ……설마!”
나백천은 천겁혈신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어 정신을 잃고 쓰러지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그때, 의식이 어둠으로 떨어지기 전 그가 봤던 것은 태극신군 혁월린과 패천도 갈중혁이 모두 중상을 입고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려는 찰나, 정체불명의 노인이 홀연히 나타났었다. 아니, 노인인지도 정확하지 않다. 그저 길고 매끈하고 새하얀 수염이 기억에 남아 노인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혹시 노야께서는, 양 무신이 천겁혈신을 상대할 때 오신, 그분이십니까?”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왔다. 대체 이 노인은 누구란 말인가. 도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베일에 감싸여 있던 과거가 벗겨지려는 순간이었다. 나백천의 물음에 노사부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도망친 노예 놈 잡으러 간 것 뿐이었어.”
정확하게는 그놈이 박살낸 명주가名酒家가 한둘이 아니라 매질 좀 해주러 간 거였지. 노사부는 그렇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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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자연스럽게 뜨였지만 시야가 맑아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주변이 어둡고 광원이라 할 것이 촛불 밖에 없었기에 시야가 제대로 돌아왔는지 확인하는 것도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여긴 어디인가 둘러보려고 했지만 고개를 살짝 움직이려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통증이 온몸에 울려퍼졌다. 산비탈을 굴러 온 몸에 멍이 들면 이러할까 싶은 통증이었다. 뼈마디며 근육이며 안 아픈 곳이 없어 저절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정신이 좀 드느냐.”
“……노야……?”
“그래. 나다.”
한 달 만에 듣는 목소리에 비류향은 고통을 참고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신선 같은 노인이 있었다. 초옥에 계실 분이 어째서.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가 싶어 어리둥절하고 있자니 향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그리고 딸랑, 하고 바람에 흔들린 작은 종소리가 들렸다. 풍경처럼 들리지만 그보다 더 가늘지고 길게 이어지는 건 초혼종招魂鐘 소리다. 설마. 아니나 다를까. 시야 한켠에 제문祭文이 보였다. 그렇다면…….
“얼굴을 보니 제대로 만났나 보구나.”
누구를, 이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노인도. 소녀도. 이미 알고 있는 질문과 대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녀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탄식했다.
“그럼, 그게, 꿈이 아니라…….”
위아래도 구분되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북받쳐오는 서러움에 하염없이 울고 있을 때, 다시는 느끼지 못하리라 여겼던 부모님의 손길이 자신을 달래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애썼다. 잘 했어. 연이도 잘 챙기고. 장하다 우리 향이. 사랑한다. 잘 지내렴. 양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히 남아있었다.
누군가에게 잘보이기 위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알아주기를 바랐다. 선행과 헌신은 천성이기도 했지만 또한 관심의 갈구이기도 했다. 열심히 했다고. 애썼다고. 어린 동생 잘 키웠다고.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비류향 역시 애정에 굶주린 아이였기에 진심어린 말 한마디가 고팠다. 한창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라나야 했던 시기에 모친이 세상을 떠났고, 남아있던 부친 역시 앳된 티를 벗어내고 소녀가 되어가는 시기에 그 뒤를 따랐다. 알고 있던 이들은 모두 돌림병에 죽었고, 유일하게 남은 동생은 사랑을 주는 상대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존재였다. 소중했지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꿈이라 생각했다. 너무나 간절해서 스스로가 만든 허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래. 그리고…….”
노사부가 손짓하자 초혼향이 세 번 울렸다. 딸랑. 딸랑. 딸랑. 그리고 제문이 펄럭이며 날아오르더니 끄트머리에서 조용히 피어오른 불꽃과 함께 재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조송지례祖送之禮. 지금의 것은 분명 산 자가 죽은 자를 배웅하는 방식이다.
“네 부모는 저승사자가 무사히 저승으로 데려갔다. 죽은 이가 곧바로 염라에게 가지 않은 건 중죄지만 사람을 홀리지도 않고 그저 자식들 보고 싶다는 마음에 남아있었던 것 뿐이니 참작되겠지. 염라가 어찌 판단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옥으로 가지는 않을 게다.”
만약 그렇게 되면 간만에 몸 좀 풀어야지. 노사부가 뒤숭숭한 발언을 덧붙였으나 비류향은 듣지 못했다. 환상이라 생각했던 것이 현실이었고, 그 현실이 오래 전부터 가장 바라마지 않았던 것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꿈이, 아니었구나……. 꿈이 아니었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가장 듣고 싶었던 이들이 들려주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여겼던 이들이 지금까지 지켜봐주고 있었다는 것과 이제는 진정 떠났기에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기쁨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감정에 목이 메여왔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순간 노사부가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비류향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힘이 없어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결례인데 어찌 함부로 눈물을 보일까. 그러나.
“울어라. 아니, 울어도 된다.”
노인은 그렇게 말했다. 어린 게 어린 것 답게 운다고 화낼 성 싶으냐. 부모 잃은 설움은 스스로 풀릴 때까지 울어야 하는 거다. 소돼지도 부모자식 잃으면 울게 놔두는데 사람은 아니할까. 노사부의 말에 비류향은 울었다. 목놓아 울지는 않았으나 그동안 쌓였던 회한을 강물에 흘려보내듯 조용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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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언제쯤이면 눈을 뜨나요?”
“오늘 오후 쯤이면 깨겠지.”
연비의 물음에 노사부는 그렇게 대답하며 국수그릇을 들어 입가에 대고 육수맛을 보았다. 음, 맛은 있지만 정성이 없구만. 유명한 객잔의 아침식사를 그렇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노사부 뿐일 게 분명했다. 어찌되었든 그 말에 연비는 물론이고 나예린 역시 눈을 빛냈다.
“정말요?”
“정말인가요?”
“아, 그래. 밥 좀 먹자 이것들아.”
갈 길도 먼데. 노사부가 궁시렁거렸다. 그걸 들은 나예린이 물었다.
“어딜 가시는데요?”
“사천땅 한 바퀴 돌러.”
“뒤숭숭한 시국에 유람가십니까?”
“유람은 무슨. 집 나간 똥개 잡으러 가는 거야.”
제자의 비아냥에 노사부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이 놈, 아니 이 년(?)이. 제 누이, 가 아니라 언니 반의 반의 반만 닮으면 좀 좋으련만.
“똥개요?”
“네 누이 물고 도망간 똥개.”
그 말에 연비 뿐만이 아니라 나예린까지 수저를 놀리던 손길을 멈추고 뜨거운 눈길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노사부가 허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향이 녀석, 인심은 잘 얻는구만.
“밥 먹고 준비 좀 하고 바로 떠날 거다. 그리고 연비 넌 여기 남아라.”
“왜요?”
“만의 하나고 정말 불가능한 일이지만 혹시라도 그놈이 돌아왔을 때 지킬 사람이 있어야 되니까. 알겠냐?”
“그건……. 네…….”
연비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납득한 듯 했다. 그러나 뒤이어진 노사부의 말에 결국 불만을 터뜨렸다.
“참고로 지금의 네 실력으로는 죽었다깨도 그놈을 못 이길 거다.”
“네? 아니 그럼 왜 남으라시는 건데요?”
“이길 수 있도록 진원진기를 주입해주고 갈 거니까.”
“……하나뿐인 제자 죽이시려구요?”
타인의 기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내공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 흡수해야 비로소 진정한 자신의 것이 되는데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매우 위험한 일이다. 같은 무공을 사용하는 사제지간에서도 매우 조심스럽게 시간을 들이는 일인만큼 연비의 의문은 도를 넘어선 것이기는 했지만 불합리한 것은 아니었다.
“너는 어째 사부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맨날 비뚫어지게 받아들이냐?”
“내력 증강하라고 하시는 건 아닐 테니까요.”
“그건 맞는데.”
“거봐요.”
“아, 거 참 말 끊지 말고 좀 들어라! 서오西汚놈 그거 조잡한 기술만 있는 놈이라 별 거 아니지만 지금은 네 공력이 부족해서 싸우면 개박살나! 그러니까 싸울 때만 쓸 수 있도록 금제를 걸어둘 거야! 알겠냐? 그리고 그 진기, 너만 쓰는 게 아냐! 향이한테도 정기적으로 주입해야 하는 거야!”
“……언니한테요?”
“그래.”
그제서야 연비는 진지한 눈빛으로 노사부를 바라보았다. 크으, 이런 것도 제자라고. 제자 복 참 없다. 노사부가 그렇게 속으로 한탄하고 있을 때 나예린은 무언가를 짐작한 듯한 눈빛으로 노사부에게 물었다.
“아직, 언니 다 안 나은 건가요……?”
“깨진 그릇은 아무리 멀쩡해보여도 물 부으면 물이 샌다. 그런 상태야.”
노사부는 아직 낫지 않았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리고 잠시 후, 식사를 마친 일행은 비류향이 잠들어 있는 객실로 향했다. 노사부는 연비의 몸에 진기를 주입하면서 말했다.
“지금보다 더 쪽잠이 많아지면 상중하 삼단전에 진기를 주입해라. 눈은 뜨고 있는데 안색이 하얗고 피곤해하면 소주천로와 대주천로를 따라 주입해라.”
대답은 없었다. 노사부야 이미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경지였지만, 보통 진기를 주고받을 때에는 말은 고사하고 입도 뻥끗하지 않는 게 상식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진 것의 몇 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공력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고통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주입이 끝나고 나서야 연비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얼마나 있다가 오시려고 이렇게 넣으시는 겁니까?”
“한 달. 일단 사천땅만 뒤져볼 거다.”
“없으면요?”
“그럼 내 손을 떠난 거지.”
“…….”
연비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럼 누이를 저렇게 만든 이가 잘 먹고 잘 살아도 신경 안 쓰신다는 얘기입니까. 그런 속내가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그 모습에 노사부가 말했다.
“그런 놈들은 절대 조용히 못 살아. 분명 어디서든 사고를 칠 거야. 허나 그때까지는 쥐죽은 듯 살 테니 찾고 싶어도 쉽지가 않아. 못 찾을 거야 없지만 귀찮게 찾아다니면 짜증이 나고, 그러면 보는 순간 죽여버릴 테니까 내버려두는 거야. 인생 즐기며 살다가 사고쳤다는 얘기 듣고 찾아가면서 가는 동안에 어떻게 꺾고 쑤시고 비틀고 뭉갤 지 궁리해야 되는 거다. 알겠냐?”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노사부의 눈 안에 번뜩이는 무언가를 엿본 연비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의 모습을 본 노사부는 이번에는 나예린을 향해 말했다.
“너도, 안력眼力 공부 좀 해둬라. 아니, 다른 건 몰라도 그 똥개 놈의 기운 기억하지?”
“……네.”
“그것만이라도 감지할 수 있도록 수련을 해. ……음, 아니다. 그냥 전체적으로 봐. 직시直示할 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직관直觀의 경지에 들 텐데 될 걸 괜히 샛길로 갈 필요는 없겠지.”
“알겠습니다.”
그 모습에 연비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좀 더 자세히 알려주면 안 돼요?”
“제자도 아닌데 뭘 더 알려줘? 내가 누누히 말했잖냐. 세상은 등가교환이야. 난 아무 것도 안 받았는데 이만큼이나 알려줬으면 됐지 뭘.”
“……예린이 아버지한테서 노잣돈 두둑히 받으시지 않으셨던가요?”
“그건 똥개 잡는데 쓰는 돈이고.”
자연스럽게 제자의 비난을 흘려보낸 노사부는 잠시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잠든 얼굴은 어제보다 안색이 밝아져 있었다. 마음의 짐을 덜어냈기 때문이리라. 내 참. 어쩌다 이렇게 정을 붙이게 되었을까. 세상 사는 일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다녀오마.”
그렇게 말하며 노사부는 방문을 나섰다. 그리고 연비가 미우나 고우나 스승인 노인을 배웅하러 나왔을 때, 노인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말 그대로 바람처럼 사라진 것이었다. 신출귀몰한 노인네. 연비는 그렇게 생각하며 방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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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뢰신전의 영압이 느껴진다……! 그리고 학점의 영압이, 사라졌어……?!
- 가끔 조아라에 보면 댓글 앞에 @ 다시는 분들 계시던데 이게 뭔가요?
- 어린 시절 편이 이렇게 길어질 내용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주작단은 언제 볼 수 있으려나…….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8.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8.
정신을 차렸을 때는 새카만 공간에 오직 자신만 있었다.
발에는 분명 땅을 디디는 감촉이 있건만 전후좌우상하 그 무엇도 구분되지 않았다. 시험해보지는 않았지만 허공에 발을 내밀어도 디뎌질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지금 자신이 제대로 서 있는 건지 누워있는 건지도 구분되지 않았다. 그렇게 그 어떤 것도 정확하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불안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문득 비류향은 고개를 돌렸다. 사실 어느 방향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위로 젖히든 아래로 숙이든 시선이 향하는 곳은, 바라봐야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봐야할 곳을 알고 있고 그대로 몸이 움직인다는데서 의구심이 들 법도 했지만 희한하게도 그런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새카맣던 공간에 유일한 빛이 있었다. 아득히 먼 곳에 바늘 구멍과도 같은 작은 빛이 보였다. 아주 먼 곳에 있는 아주 작은 빛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시선을 집중하자 그 빛이 매우 가깝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빛 속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굴까. 역광의 그림자 때문에 쉽사리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조금 더 집중하자 서서히 윤곽이 떠오르고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비류향은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오래 전에 자신의 곁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깨닫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엄마. 아빠.
입을 뻐끔거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쉼없이 불렀다. 엄마. 아빠. 아주 어릴 때 배웠을 가장 단순한 단어였건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 그제서야 이 불합리한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면서 비류향은 달리기 시작했다. 새카만 어둠 속에 뭐가 있는지도, 무엇을 밟고 가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내달렸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이들의 품으로 뛰어들기 위해서.
그러나 닿지 않았다. 도달할 수 없었다. 달리기 전에는 열댓 걸음 남짓으로 보이던 부모님과의 거리가 달리면 달릴수록 멀어졌고, 희미해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었다. 멈춰버리는 순간 그때는 저 희미한 모습마저도 다시 볼 수 없게 될까봐. 망가져버린 몸으로 뛰느라 순식간에 숨이 거칠어지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래도 달렸다. 애달픈 숨소리만이 정체모를 공간에 울려퍼졌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듣고 싶은 말이 많았다. 동시에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온갖 말들이 거품처럼 피어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대체 무엇을 전해야 할까. 나는 무엇을 전하고 싶은 걸까.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걸까. 어떤 말씀을 해주실까.
온몸을 부수는 듯한 통증이 덮쳐온 건 그때였다.
갑작스러운 격통에 균형을 잃은 몸은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구른 게 맞는지는 의문이었다. 몸 어딘가가 바닥에 부딪치는 감각도 없었고 넘어진 것 같은 느낌도 아니었다. 그러나 시야는 빙글빙글 돌았다. 폐부가 찢어질 듯 했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온몸의 뼈란 뼈에서 가시가 돋아나는 것 같았고 마디란 마디에 바늘이 수십 수백 개씩 꽂히는 듯 했다. 살이란 살은 죄다 비틀려 찢겨지는 것 같았고 오장육부는 누군가가 헤집는 것처럼 뒤틀려왔다.
그러나 육체의 고통보다 더 괴로운 것은 정신의 고통이었다. 부모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안타까움. 간절함. 초조함. 당혹감. 허탈함.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허상이라도 좋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고 싶어. 닿는 순간 사라지더라도 만지고 싶어. 어지럽게 흔들리는 시야 너머로 새하얀 빛이 보일 때마다 비류향은 그곳으로 향하려 했다. 부질없는 행위라 해도 포기할 수 없었다.
억겁일까 찰나일까. 어느 순간 그 모든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부모님과 빛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순간 비류향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엎드려 울었다.
계집애 하나가 운다고 세상이 돌아봐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울고 앉아있으면 누군가 밥을 떠먹여주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있어야 했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후에는 어린 동생의 유일한 혈육으로서 결코 약해질 수 없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보은을 위해 스스로 값싸다 여기며 눈물을 막았다.
그렇게 버티고 참았던 눈물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서러웠다. 왜 나는 어머니 품에서 울지 못하는가. 왜 나는 아버지께 노리개 하나, 과자 하나 사달라 조르지 못하는가. 진상인지 허상인지도 모를 것에 다가서는 것조차도 못한단 말인가. 보고 싶은데. 만나고 싶은데. 하염없이 서글프게 울던 소녀가 누군가의 손길을 느낀 건 너무도 지쳐 더 이상 울 기력도 없을 때였다.
투박하지만 따스한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칠지만 다정한 손길이 눈물을 훔쳤다. 익숙한, 허나 오랫 동안 느끼지 못했던 손길에 비류향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그토록 닿고자 했던 이들이 있었다.
#####
노사부는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로 했다. 기나긴 삶 동안 수많은 실수와 잘못이 있기는 했지만 노사부가 잘못을 인정한 횟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것은 강자의 오만이라기보다는 천성이었다. 물론 최강을 넘어 지고至高를 지나 무적無敵이 되면서 그 어떤 것도 그에게 물리적, 정신적 고난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일은 그에게 무시무시한 고난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지?”
“오늘로 닷새입니다.”
자연스러운 하대에도 불구하고 정천맹주 나백천은 공손히 답했다. 이미 비류향의 몸을 살폈을 때 노사부의 내공이 심후하다는 것을 알았던 만큼 처음 본 순간 노인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자연스럽게 노사부의 하대를 받아들였다. 것보다 이 노인,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펄럭! 좌악!
“!”
“아, 아!”
노사부는 거침없이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누워있던 소녀의 나삼을 벗겼다. 비명소리가 울려퍼질만도 했건만 정작 당사자인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옷섬을 여밀 생각은커녕 눈조차 뜨지 않고 죽은 듯 누워있을 뿐이었다. 나신이 허공에 노출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일까. 되려 옆자리에 있던 나예린이 놀라 소리쳤을 뿐이었다. 허나 그게 아니었다.
“……사흘 지난 시체 색깔이구만.”
아주 작기는 하지만 곰팡이처럼 조그만 시반屍斑이 여기저기 보이는 몸이었다. 특히 손가락이나 발끝으로 갈 수록 증상이 심했다. 왼쪽 어깨는 아예 시커멓게 죽어있었다.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게 기적이었다. 한 차례 소녀의 몸을 죽 훑어본 노사부는 한숨을 내쉬고는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날 내려왔어야 했나. 그리고 나예린이 조심스레 비류향의 옷섬을 여매는 것을 보며 나백천에게 말했다.
“쯧쯧쯧. 나 따라한다고 애썼구만 그래. 부족한 안력眼力은 딸내미 힘을 빌렸지?”
“그렇습니다.”
“그럼 그냥 삼단전하고 임독양맥 다 같이 돌렸으면 됐을 텐데. 용안龍眼이 있는데 뭘 망설였어. 그리고 어차피 남는 내공은 틈새로 흘러가 자연스레 흩어질테니 주화입마 걱정도 없었잖아.”
“그렇습니까……?”
“몰랐냐?”
“……예.”
“그, ……하아, 그래. 이런 몸이 세상 천지에 또 어디 있어서 그걸 알겠냐.”
대체로 타인이 억지로 주입한 내공은 쉽사리 섞이지 않고 맴돌다가 몸에 이상을 일으키거나 주화입마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내공이 흐르는 통로인 기맥과 혈도가 망가진 비류향에게 타인의 내공은 그저 스쳐지나갈 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서천의 악랄한 수법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물론 그 역시 지나치면 몸을 망가트리는 법이지만.
어찌되었든 산 사람의 몸은 아니었다. 천하의 화타가 살아돌아온다고 한들 차라리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숨을 끊으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놈 보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길 잘했군. 제 누이가 이런 몸이라는 걸 안다면 당장에 서천인지 뭐시긴지 잡아 족치겠다고 갈 게 뻔했다. 말릴 생각은 없지만 아직은 아니다. 10년은 더 수련하지 않으면 복수는커녕 한 줌 혈수로 녹아내릴 실력차일 것이다. 제자의 목숨도 중요하지만 비뢰문의 후계자가 고작 그런 놈에게 쓰러지게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놈 손에 맡기면 간단히 죽여서 안 되지.”
보자마자 전력을 다해 격살하려 들겠지. 그러면 안 된다. 어린아이가 팔다리날개 하나하나 떼어내고 개미굴에 던져버리는 벌레처럼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여야지. 어이쿠, 큰일날 뻔했군. 죽이다니. 죽이면 안 되지. 미쳐서도 안 되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숨 붙은 상태로 고통을 느껴야지.
“무슨 말씀 하셨습니까?”
“아니, 어찌 고칠까 혼잣말 좀 했어.”
서천, 아니 하늘이라니. 당치도 않다. 서쪽 쓰레기西汚에 대한 차가운 분노를 잠시 접어둔 노사부는 나백천의 질문에 그리 대답하며 다시금 비류향을 살폈다. 아무리 다시 살핀다한들 반송장인 몸상태가 돌아오지는 않았다.
“…….”
노인의 온갖 고약한 요청과 심부름에도 해맑게 웃던 아이였다. 하루종일 병상에 누워 있어도 뭐라할 사람 없는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수발을 드는 아이였다. 이미 심득의 경지조차 초월해 보는 순간 사람 됨됨이를 아는 노사부의 눈이 부실 정도로 선함이 빛나는 아이였다. 인간 오욕칠정 모두 가지고 살면서도 인연만큼은 가차없이 끊고 살아온 인생이었건만 이토록 정을 붙이게 될 줄 몰랐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간신히 숨만 붙어 죽어가고 있었다. 극진한 정성이 부담스럽고 힘든 몸 좀 편하게 살라고 내보냈더니 이렇게 되었다. 통한의 실수였다.
서오西汚놈이 사천멸겁의 하나고 그게 천겁령이라는 집단에 속한 놈들이라고 했던가. 그거 분명, 그놈이 만든 거였던가.
“매질이 부족했어, 매질이…….”
깊은 한숨을 내쉰 노사부는 그대로 비류향의 단전 위에 손을 얹었다. 어쨌든 낫게 해야지. 설마 같은 상대에게 똑같은 시술을 하게 될 줄이야. 노사부에게 있어 어렵지는 않지만 매우 귀찮은 일이었다. 그나마 비류향의 몸은 이미 혈도와 기맥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지라 편한 축에 속했지만 그래봤자 오십보백보였다. 허나 어찌하랴. 자신의 실수로 이렇게 된 것을.
문득 노사부는 곁에 선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나예린이 몸을 굳혔다. 마음을 읽을 수 없는 노인이었다. 마치 아버지 나백천처럼 단단한 심상이 속내를 가리고 있었다. 단순히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바위를 살펴본다고 사람의 심성을 느낄 수 있을까. 드넓은 바다를 꿰뚫어본다고 인정이 느껴질까. 인간 아닌 대자연의 시간축에서나 느껴질 법한 압도적인 무언가──
“넋놓고 멍하니 보는 게 아냐. 명확하게 봐라. 용안은 그럴 때 가치가 있는 거니까.”
“……! 네!”
“네가 나중에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직시直示하지 못하는 용안은 쓰레기야 쓰레기. 솔직히 조금만 생각하고 보면 다 보일 거 보는 눈이 뭐 그리 귀하다고. 이게 다 사람들이 생각이 없어서 그래 생각이. 쯧쯧.”
가진 자는 가진 것을 저주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자를 시기하는 눈에 대해 노사부는 그렇게 평가했다. 그리고 그런 평가에 소녀가 충격을 받거나 말거나 노사부는 비류향의 몸에 조심스럽게 내공을 흘려넣으려다,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주변을 살펴보던 노사부는 어느 한 곳을 유심히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이며 나백천을 향해 말했다.
“제문지祭文紙랑 초혼향招魂香이랑 위령소종慰靈小鐘 좀 챙겨와.”
“……역시 안되는 것입니까.”
노사부의 입에서 상喪을 치를 때 필요한 물건들이 튀어나오자 나백천이 나직히 탄식하며 말했다. 아무리 기인奇人이라도 역시 사기死氣에 침식된 이는 살리지 못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노사부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 걱정마. 향이 제사 지내려는 거 아니니까.”
“그럼?”
“쓸 데가 있어. 그러니까 챙겨와.”
그렇게 말하며 노사부는 내공과 진원진기를 동시에 끌어올렸다. 내공을 다루는 솜씨도 솜씨였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육신의 근간이 되는 진기를 뽑아내면서도 낯빛이 변하지 않는 노사부의 모습에 나백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예린 역시 용안에 비치는 기의 흐름에 눈이 멀어버리는 것 같았다. 어찌 저토록 찬연하고 화사할 수 있을까. 상황이 이러지 않았다면 순수한 감탄이 흘러나올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뼈까지 상했나……. 근골筋骨……. 중추中樞……. 두골頭骨…… 오장五腸……. 육부六腑……. 멀쩡한 곳이 없군. 근단根丹과 단로丹路도……. 서오西汚놈…….”
비류향의 단전 위에 오른손을 얹은 노사부는 빠르게 소녀의 몸을 검진하기 시작했다. 멀쩡한 곳이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나일천의 사악한 내공을 정면으로 받아낸 몸은 예상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심각했다. 그나마 나백천과 나예린의 처치가 있었기에 노사부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리라.
“우선 뇌장腦腸과 근골……. 폐부肺腑는 옛 병 때문인가. 한 번에 손봐야겠군……!”
노사부의 내공과 진원진기가 흘러들어 갈수록 비류향의 몸에서 지독한 악취가 흘러나왔다. 시체가 썩는 냄새와 같았는데 이는 몸 안의 썩은 살과 죽은 피가 흘러나오기 때문이었다. 몸 밖으로 흘러나온 노폐물을 노사부가 삼매진화의 이치로 모조리 태워버렸기 때문에 잔여물이 남지는 않았지만 냄새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환기를 하면 사라질 수준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나예린은 그 냄새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내었다. 그리고 이를 잊기 위해 용안으로 비류향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앞서 노사부가 했던 말을 떠올린 소녀는 정확하게 보기 위해貞眼之勢 노력했다.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개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저 흘러들어오기만 하던 것들을 의사적으로 배제하고 보고자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직시直示하게 된 나예린은 노사부의 기가 몸 속 깊은 곳의 사혈死血과 부육腐肉, 폐골廢骨을 태우고, 새 살과 신선한 피가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환골탈태가 이러할까. 그만큼 경이적인 순간이었다,
“거 이제야 좀 제대로 보는구만.”
노사부의 말이 나예린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는 낯빛 하나 변치 않고, 심지어 자신의 내공과 진원진기를 주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되려 뒤에 있던 나백천이 경악했지만 노사부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그 눈으로 어떻게 봐야되는지 좀 알겠냐?”
“앞으로 계속…… 이렇게 보면 되는 건가요?”
“그래 그렇게, 아니 죄다 직시하라는 게 아니라 때에 따라 볼 거 안 볼 거 가려 보라고. 나중에 심력心力이 쌓여서 자연스럽게 흐름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러라는 거지 누가 맨날 직시하랬냐?”
투덜거리면서도 노사부는 제법 자세하게 소녀에게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옛날 같았으면 혀만 찼을 뿐 어찌하라 알려주는 일은 없었을 텐데. 물러졌군. 나도 물러졌어. 그러나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소녀를 보고 있자니 그리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 식경 쯤 흘렀을까. 비류향의 몸에서는 더 이상 사기死氣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비록 안색은 파리했지만 미약한 병색이 있는 수준이라 할 정도였다. 한 식경 전까지 사경에 들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여겨졌던 소녀라고 믿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었다. 노사부는 요란하게 허리를 펴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끝났다. 에잉, 말년에 참 귀찮은 일 많이 하는구만!”
“수고하셨습니다, 노야.”
“그래, 수고했지. 거 급하게 오느라 밥도 못 먹었다니까.”
“식당으로 가시겠습니까? 곧 상을 차리라 하겠습니다.”
“괜찮지만 차려준다는데 먹어야지. 아 참, 아까 말한 거 제문지랑 그것들 좀 가져다 놓고.”
“알겠습니다.”
나백천의 말에 노사부는 거절하는 척 하면서도 잽싸게 식사대접을 수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객실을 나서며 그 앞에 서 있던 소녀(?)를 향해 말했다.
“이제 들어가 봐도 된다.”
대답은 없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녀(?)─비류연은 침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제 누이를 닮으면……, 아니 반의 반의 반 정도만, 딱 그 정도만 닮으면 좋을 텐데. 제자의 뒷모습에 노사부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비 소저의 동생입니까?”
“그래.”
“……남동생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쪽은 친동생. 저쪽은, 여튼 동생.”
“그렇군요.”
비류연을 미심쩍어하는 나백천에게 노사부는 그리 둘러댔다. 수련(?)을 위해 여장시킨 소년이라고 사실대로 말해도 거리낄 게 없었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소년이라고 하면 괜히 일이 더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배가 고팠기 때문에 노사부는 휘적휘적 식당을 향했다.
그런 어른들과는 별개로 아이들은 의외의 방법으로 진실(?)에 접근해가고 있었다.
#####
나예린은 노사부와 아버지가 방을 나섬과 동시에 들어온 현의玄衣소녀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그 소녀가 비류향의 맥없이 늘어진 손을 자신의 이마에 대며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깊은 한숨을 내쉰 순간 깨달았다. 이 아이가 언니의 동생이구나. 한동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한 말은 그 생각에 쐐기를 박아주었다.
“누, 언니는 이제 괜찮은 거죠?”
“네. 노야께서 다 치료하셨어요.”
“따로 뭐 해야한다, 조심해야 한다는 말 없었죠.”
“네.”
“다행이다…….”
바로 곁에서 보고서도 못 믿을 치료였다. 방금 전까지 시반屍斑이 보이던 몸을 말끔하게 고쳐냈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그러나 그 광경을 보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노사부의 실력을 믿고 있기 때문인지 소녀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
“……왜요?”
밝은 갈색, 아니 황금빛 눈동자였다. 그것만으로도 신기한데 눈앞의 소녀는 전혀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치 아버지처럼 든든한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했다. 그래도 궁금하여 방금 전 노사부가 말해준 것처럼 직시直示하려고 하자,
“소녀의 비밀은 같은 여자라도 함부로 엿보는 게 아니랍니다.”
소녀가 그렇게 말하며 경계의 기색을 띄었기에 그만두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용안으로도 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아 미련은 없었기에 나예린을 고민하게 만든 건 소녀의 말이었다. 그런 건가? 무색투명하게 모든 걸 볼 수 있었던 비류향과 함께해서 그런지 소녀의 반응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어찌되었든 상대가 불쾌하게 여기기에 나예린은 순순히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잘못한 일은 바로 사과할 것. 그게 비류향이 가르쳐준 것들 중 하나였다.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으음, 그렇게까지 사과는 안 해도 되는데……. 여튼 알았어요. 것보다 그 옷.”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현의소녀는 나예린의 옷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 혹시, 언니가 만들어준 건가요?”
“네.”
“역시나. 그런데 앞부분이 왜 그런 거죠?”
“그건…….”
나예린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나일천이 소녀에게 새기고자 했던 심저心底의 사악은 비류향 덕분에 없었지만, 날카로운 쇳조각이 몸에 닿을 듯 말 듯 옷을 가르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두려움에 몸이 떨려오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말하기 힘들면 말 안해도 괜찮아요. 일부러 망가뜨린 건 아니죠?”
“아니에요! 언니가 만들어준 옷인데, 그런데, 그런데…….”
“어, 아, 알았어요.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어두워지는 안색을 보고 농담삼아 던진 말에 기어코 나예린의 눈가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자 현의소녀가 당황하며 말했다. 어찌할 줄 몰라 하던 현의소녀는 누이가 해주던 것처럼 소녀를 안아주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흘러 진정한 두 소녀는 침대 곁에 의자를 가져와 나란히 마주보고 앉았다.
“이제 좀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고마워요.”
눈가가 부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시시 웃는 나예린의 모습에 현의소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렇게 울 줄 알았으면 안 물어봤을 거에요.”
“좀, 많이……. 많이 무서운 일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나예린은 고개를 돌려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가슴께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닷새 동안은 송장마냥 미동도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용안에 비치는 몸은 얼마나 끔찍했던가. 그러나 이제는 생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이, 푸르디 푸른, 하늘과도 같은 그대가 있었기에 이렇게 무사해요.
“언니가 있어줬어요. 그리고 두 번이나 구해줬어요.”
“……그렇군요.”
자랑스러움 반, 부러움 반. 현의소녀는 그러한 감정이 묻어나는 대답과 함께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자랑스럽지만 동시에 나만의 누이를 빼앗긴 듯한 느낌이지 않을까. 나예린은 현의소녀의 반응을 그렇게 추측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예린은 처음 봤을 때부터 품어왔던 질문을 던졌다.
“저기…….”
“뭔가요?”
“왜 여장하고 있는 거에요, 비류연?”
움찔. 현의소녀의 첫번째 반응은 그것이었다.
#####
- 궁뢰신전, 검령사, 탈혼경인을 읽고 있는데, 역시 선현의 문장이 좋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어서 다음 편이 나오길 바라고 있지만, 저도 글 쓰는 입장에서 재촉해봤자 안 나온다는 걸 알고 있는지라 […]
- 향이가 너무 전형적인 평면적 캐릭터라는 얘기를 들었고, 실제로도 그러하기에 입체감과 작품의 재미를 위해 흑화 같은 걸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싶더군요. 역시 결론은 굴리기 뿐인가 [?]
- 전공과 타과 전공이 화, 수 발표였기에 늦었습니다. 다음주 역시 시험기간인지라 늦거나, 연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학점이 바람에 스치운다. […]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7.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7.
흔히들 백색白色은 물들기 쉬운 연약함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나백천의 백색은 그렇지 않았다. 그 앞에 감히 어떤 것이 자신의 색을 뽐낼 수 있을까 싶은 고압적인 백색. 모든 것을 살라먹는 백색의 어둠은 직시하는 것조차 두려운 재앙이었고, 마주하는 것은 더더욱 피하고 싶은 폭력이었다.
“크윽…….”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정신을 잃었던 나일천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온몸이 얻어맞은 듯 욱신거렸다. 일격一擊. 고작 일격이었는데 이 모양이란 말인가. 만약 서천西天의 독문병기가 없었다면 진작에 고깃덩어리가 되어 처참하게 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눈에 들어온 것은 예상했던, 그러나 틀리기를 바랐던 인물이었다.
"……형님."
히죽. 입가가 자연스레 미소를 그렸다. 질투와 욕망으로 뒤틀어진 속내와, 이를 대변하듯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과는 다른 기계적이고 반사적인 미소였다. 그러나 그 인물─나백천은 나일천을 향해서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어느 새 침대에서 가져온 이불로 딸의 몸을 감싸며 물었다.
“괜찮느냐.”
“……아, 아아…….”
다정한 말에도 나예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그 여린 몸을 보는 사람이 안타까울 정도로 세차게 떨며 손끝이 새하얘질 정도로 아버지의 옷자락을 쥐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퍼뜩 고개를 들며 뒤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시선은 벽에 기대어 있는 비류향을 향하고 있었다.
처참한 몰골이었다. 예리한 칼바람에 찢겨져 나간 어깨에서 흐른 피로 물든 상반신. 입가와 코에서 흘러나온 피거품에 젖은 얼굴. 실 끊어진 인형 마냥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꺾인 체 축 늘어진 팔다리. 무엇보다도 가장 끔찍한 것은 망가진 수준을 넘어 처참하게 찢겨나간 기맥이었다. 숨은 간신히 붙어있었지만, 쓰러지기 직전의 포대자루도 이것보다는 생명력이 흘러 넘쳐 보일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백천은 가슴이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그런가. 네가 또 예린이를 구해주었구나.
“언니……, 언니……!”
“…….”
엉금엉금 기어 비류향에게로 가는 딸을 보며 나백천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어느 틈에 집어넣었는지 모를 검을 다시 뽑으며 몸을 돌려 자세를 잡았다. 어지간한 고수의 눈으로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일천은 목에, 가슴에, 단전에, 사람 몸의 급소란 급소에 모두 칼이 닿는 느낌을 받았다. 농밀하다, 섬뜩하다, 날카롭다, 싸늘하다.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정련되고 폭력이며 구체적인 살기였다. 심검心劍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지 않을까.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왜 이리도 크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변명을……, 해 봐라."
"무슨 변명 말씀이시오, 형님?"
"이 상황에 대한 변명 말이다."
"이 상황?"
나일천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방을 한 번 둘러보고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관의 말은 씨알도 들어먹지 않는 무례한 호위병들 혼쭐내고,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계집이 주제도 모르고 나대길래 벌 좀 주고, 우리 이쁜 예린이에게 사내 맛을 알려주려고 한 것 말이오? 하, 하하하하! 아니, 형님. 어찌 어른으로서, 남자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인데 변명을 한단 말입니까? 예? 노망이라도 드셨, 흡!"
콰아아아아아앙!
초식조차 아닌 일검一劍. 그러나 어지간한 초식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위력적인 공격에 검과 검이 부딪쳤다고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허공에서 몇 바퀴 돌아 간신히 기세를 가라앉히고서야 겨우 바닥에 착지한 나일천은 증오 가득한 눈길로 나백천을 보며 외쳤다.
"왜? 변명하라고 하면 내가 '아이고, 형님! 내가 욕심이 과해 눈이 멀었었소! 부디 용서해주시오!'하면서 바닥에 엎드릴 줄 알았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할 줄이라도 알았어?! 당신이 저 높은 자리에서 내려보며 대범하게 지껄이면 내가 다 나불거릴 줄 알았냐고!"
악에 받친 나일천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백천은 묵묵히 자세를 잡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격二擊이 몰아쳤다. 이번에는 명백한 살초殺招였기에 나일천은 반사적으로 오른손까지 뻗어 공세를 막으려 했으나──
콰아아아아아앙! ──콰앙!
"크헉!"
이번에는 바닥을 수 차례 굴러 벽에 부딪치고 나서야 멈추었다. 손에서 떨어진 검은 저만치 굴러가 있었고 왼팔에서는 한 줄기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왼손으로 검을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쳇. 일이 틀어졌나. 나일천은 자연스럽게 오른팔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섰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고개를 들어보니 정작 나백천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군. 그러니 저토록 냉정하게 자신에게 살초를 흩뿌는 것이겠지.
“놀라지도 않으시는구려. 당신이 자른 팔이 다시 돋아났는데. 거 좀 기뻐해주시지. 동생 팔이 다시 돋아났는데 말이오.”
“내 동생은 죽었다.”
“…….”
방금 전의 살초는 혈육의 연을 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리라. 나백천의 동생 나일천은 이제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선언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죽었노라 담담하게 공언하는 나백천의 모습에 나일천은 뒤틀린 심기를 감출 생각 없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서천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럼 여기 서 있는 나는 뭐요. 귀신이오?”
“서천멸겁이라는 악귀지.”
“허, 그렇구만.”
고오오오오──
서로를 바라보는 형제의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는 당장이라도 상대를 격살시킬 만큼의 공력이 맺혀있었다. 서로를 향한 살기가 방 안에서 부딪치며 자연의 것과는 다른 인위적인 불꽃이 튀어올랐다. 초식의 교환은 고사하고 출수조차 하지 않은 검권劍圈의 충돌이건만, 범인凡人은 순식간에 고깃덩어리가 될 정도의 압력이 휘몰아쳤다.
나백천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냐.”
“이런 짓? 무슨 짓? 남궁가주를 격살한 것? 무례한 계집들 손봐준 것? 예린이를 탐하려 한 것? 서천의 무공을 배운 것? 어떤 것 말이오?”
“전부 다 말이다.”
“거, 방금 전에 변명하라고 할 때 다 한 거 뭘 또 굳이 들으려 하시는 거요?”
“그건 죽은 내 동생의 변명이었지. ……이번에는 네가 이런 짓을 하는 이유를 말해보라는 것이다, 서천멸겁!”
번쩍! 새하얀 검기가 나일천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명백한 살계殺計로서 천둥번개와 함께 쏘아진 검기를 인지하거나 피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나일천은 신속하게 오른손을 휘둘러 공격을 막았다. 카앙! 맑은 쇳소리가 울려퍼졌으나 이번만큼은 멀쩡히 서있던 자리에 그대로 선 나일천이 코웃음치며 대답했다.
“흥! 서천멸겁이라 불리면 내가 뭔가 대단한 이유라도 댈 줄 알았나, 정천맹주? 이 엿 같은 세상 뒤엎어보겠다는 거 외에 뭐 더 있을까.”
“……!”
나백천은 단 번에 세 장 정도 뒤로 물러나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일만 삼천 장의 싸늘한 쇳조각으로 만들어진 서천의 독문병기 서풍의 광란西風狂亂. 자신의 검과 내공이라면 충분히 베어낼 수 있으리라 판단했지만 그것은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말은.
“……얼마나 서천의 내공을 수련한 것이냐.”
“흠, 뭐, 꽤 되었다고만 해두지.”
역시 그랬나. 나백천은 직접 검을 부딪쳐본 결과 나일천의 내공이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과거 천무삼성이 합공으로 상대하여 간신히 팔을 베어낸 것이 서천멸겁이다. 비록 눈앞의 상대는 옛날에 팔이 잘린 서천멸겁 본인이 아니라 무기와 내공만을 이어받은 후계자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무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언제부터 그 사이한 무공을 수련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검을 맞대보니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고사하고 싸우게 된다면 백중지세의 싸움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나백천에게는 지켜야만 하는 이들이 있었다. 나예린과 비류향. 그 둘을 무사히 지키면서 서천을 상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상대 역시 썩 유리하기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쳇, 아직 부족한가.'
방금 전의 일격으로 나일천은 지금 이 순간 나백천을 상대로 승리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신경쓰고 있는 두 소녀를 노려 빈틈을 만들지 않는다면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서천의 무공에 대한 수련과 이해가 조금 더 깊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아무래도 성급했던 것 같았다. 빌어먹을 놈. 높은 자리에 올랐으면 호위호식하며 있을 것이지 죽어라 수련해서 실력을 쌓았나. 겉으로는 자신만만한 척 했지만 나일천의 속은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해야 했다. 아둥바둥 싸운 끝에 얻는 승리는 의미가 없었다. 철저하고 확고한 승리로 상대를 짓밟아야 의미가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그 앞에서 딸을 범한다. 그러지 않으면 복수의 의미가 없다. 그러한 집착이 심마心魔가 되어 그를 얽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아쉽지만 이 정도로 끝내주지. 예린이를 못 취해서 흥이 나질 않거든.”
“네놈이……!”
“크흐흐, 그 얼굴 참 볼 만 하군.”
분노로 일그러지는 나백천의 얼굴을 비웃으며 나일천은 그 너머,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반송장 상태인 비류향을 끌어안고 두려움에 가득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조카의 시선에 나일천은 가학심이 충족되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예린아! 이 숙부가 오늘은 바빠서 이만 가봐야겠구나!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참으로 미안하구나! 허나 걱정하지 말거라! 이 숙부가 언젠가 꼭 네게 어른의 맛을 가르쳐 줄 터이니! 네 보드라운 속살을 가르고 듬뿍 귀여워 해 줄 것이니 기다리고 있거라! 반드시!”
검디 검은 악의였다. 색욕과 집착이 서로 뒤엉키고 얽히고설켜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의념이 소녀의 여린 마음을 부수고 집어삼키기 위해 날아들었다. 압도적인 악의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려는 소녀의 귓가에──
“……괜찮아…….”
──구원의 문구文句가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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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눈을 뜬 것일까.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숨을 애써 이어가며,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힘껏 치켜뜨며,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경련을 간신히 억누르며 비류향은 품 안의 소녀를 위해 입을 열었다. 기절할 것 같은 악의에 몸을 떨던 나예린의 귓가에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걱정마…….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은…… 겁이 나서야……. 무서울 거…… 없단다……."
“언니……. 언니이…….”
팔이 왜 이리도 무거울까. 그나마 왼팔은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나마 말을 듣는 오른팔로 울먹이는 나예린을 안아주었다. 피에 젖은 상의에 얼굴이 닿게 되어 아차 싶었지만 나예린은 떨어지지 않았다. 되려 가슴께에 얼굴을 파묻으며 자신을 불렀다. 그 모습에 비류향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나일천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시야에 자세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거무죽죽한 무쇠팔을 단 사내의 형상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평생…… 얻지 못할 것을…… 얻으려 헤매다…… 광야에서…… 아무도 모르게…… 쓰러져 죽을…… 그런 것의 말에…… 귀 기울일 것 없어…….”
폐부와 식도에 들어찬 피거품에 소리는 이상했지만 다정한 말투였다. 품 안에서 떨고 있는 소녀를 위한 것이리라. 나예린에게만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경지에 이른 무림고수인 두 형제 역시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나일천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허나 비류향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눈길로 나일천을 바라보았다. 추악한 존재에 대한 혐오와 악의어린 시선조차 아니었다. 마치 불 속에 뛰어드는 날벌레를 보는 것과도 같은, 아니. 그보다 더한, 저잣거리 모퉁이에 쌓여있다 바람에 휩쓸려 어디론가 굴러가는 먼지덩어리를 보는 듯한 무심하디 무심한 눈길.
사실 너는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느냐. 대단한 것은 네가 주워다 몸뚱아리에 붙인 그 쇳덩어리지. 자신도 모르게 품고 있던 열등감 때문에 나일천은 비류향의 시선을 그렇게 느꼈다. 만약 그에게도 용안이 있어 비류향의 심상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그는 더더욱 분노했을 것이다. 이 시선이 의도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욕망과 광기를 제외하면 오만과 자존심만이 남는 사내의 평정심과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과연 그가 언제쯤이면 알게 될까. 아니나 다를까.
“네년! 이 빌어먹을 년! 이 개 같은 년!!!!!!”
언제 미소짓고 있었냐는 듯 나일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압도적인 살기와 끔찍한 악의가 비류향과 나예린을 집어삼키려는 듯 몰아쳤다. 검디 검은 악의의 홍수가 밀려온다. 시선을 돌리고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사실에 나예린은 더욱더 비류향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처럼 고독과 공포가 가득한 세상에서, 홀로 길을 밝히는 등대가 그러하듯 온기와 안도감을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온기와 안도감을 발판 삼아 두려움을 극복할 용기를 주는 이였다.
피냄새가 가득 했지만 그 안에서도 비류향의 체취와 더불어 한 줄기 청량함이 나예린의 폐부를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모든 것을 직시直示하는 용안은 흔들리면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태양 같은 빛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린아…… 보렴…….”
“…….”
“괜찮아……. 괜찮아, 린아……. 봐…….”
“……네…….”
귓가에 맴도는 속삭임에 나예린은 용기를 내어 눈을 떴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바로 옆에서 넘실거리는 심독心毒이 너무나도 무서웠지만, 독기가 강하게 느껴질수록 바로 곁에서 자신을 감싸는 온기와 청량감 역시 대비되어 증폭돼 소녀의 마음을 지탱해주었다. 크게 심호흡하고 나예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일천을 바라보았다.
광기와 탐욕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굳이 용안으로 보지 않더라도 추악했다. 그러나 무섭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덮치려고 했던 사내다. 하지만 방금 전과 같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압도적인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비류향의 말에 분노가 일렁이는 나일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치 싸움에서 지고 분을 삭히지 못해 낑낑거리는 투견이 저러할까 싶었다.
"……어때……. 무섭지 않지……?"
“……네. 하나도, 하나도 안 무서워요!”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다. 그러나 어느 덧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정신을 좀먹던 공포는 사라져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추악한 심정心精이 눈에 들어와 욕지기가 치밀었지만 이제 그것은 공포라기보다는 단순한 생리적 거부감이 만들어낸 역겨움이었다. 두려운 것이 아니라 더러운 것. 나일천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런 나예린의 모습에 비류향은 힘겹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짖는 개는…… 시끄러울 뿐이야……."
“네!”
어느 새 나예린의 눈에는 적의敵意가, 나일천을 향한 저항의지가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일천은 실성한 듯 실없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허, 허허……. 허허허허허허허…….”
이제는 정말 참을 수 없었다. 그러한 생각에 나일천은 이를 갈며 오른손에 공력을 집중시켰다.
"그 개에게 물려 죽어가는 년이 말은 잘 하는, 크헉!"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찰나의 방심이 부른 빈틈은 치명적인 일격이 되어 나일천의 하복부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 일반적으로도 급소지만 무인에게 있어 하복부는 단전이며, 이곳은 내공을 담아두는 그릇과 같은 역활을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이곳에 공격을 받았다는 것은 무술의 근본이 흔들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혈육의 정은 기대하지 마라!!!!!”
“크으으으으으으으!!!!!!!!”
나백천은 확실하게 잡은 승기를 굳히기 위해, 그와 동시에 무림에 큰 위협이 될 서천멸겁을 이 자리에서 쓰러뜨리기 위해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혈육의 정은── 이미 살초를 펼친 시점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오른팔과 머리를 베는 검로劍路를 따라 부드럽게, 그러나 강맹하고 파괴적인 검기劍氣가 휘몰아쳤다. 그것을 본 나일천은 다급히 왼손을 뻗어 비류향과 나예린을 향해 장력을 내뿜었다.
“광풍장狂風掌!!!”
과거 백풍검객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의 나일천이 자랑하던 절초가 소녀들을 향해 내뿜어졌다. 이를 무시하면 서천의 목을, 하다못해 팔이라도 벨 수 있다. 허나 그렇게 되면 소녀들은 한 줌 혈수血水로 녹아내리리라. 찰나의 순간, 고민 끝에 나백천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취하기로 했다.
“이 금수 만도 못한 노오오오옴!!!!”
“무, 아닛?!”
백혼검뢰천검식白魂劍雷天劍式
오의奧義
뇌망백렬雷網白裂
새하얀 백광이 나일천의 장풍을 흩어버리고, 그의 상반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허나 그 압도적인 검풍에 휩쓸리기 직전, 나일천은 비릿한 웃음과 함께 오른팔을 휘둘렀다. 공격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집중한 나백천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벽력탄霹靂炭!”
주먹만한 쇳덩어리 겉에 난 조그마한 구멍에서 나온 실에 심상치 않은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본 순간, 나백천은 경악했다. 암기와 독에 능한 사천당문이라해도 함부로 쓰지 못하는 것이 화약무기다. 위력도 위력이지만 화약은 국가에서 엄격히 관리하는 통에 쉽사리 손댈 수 없거늘 어떻게!
“하하하하! 결판은 다음으로 미뤄두겠소!!!”
와장창창!
경악하는 나백천을 뒤로 하고, 나일천은 오른팔을 휘두른 반동을 활용해 창문을 부수며 폭풍우 속으로 사라졌다. 나백천은 허공섭물의 기지로 허공에 뜬 벽력탄을 나일천이 도망친 창문을 향해 내던졌고── 콰아아아아아앙! ──천둥번개와는 엄연히 다른 이질적인 굉음과 함께 후끈한 바람이 비바람과 함께 실내로 들이쳤다 가라앉았다. 재빨리 창가로 다가간 나백천은 이를 악물었다. 나일천의 흔적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으음……!”
안타까운 일이었다. 매우 위협적인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천겁령 사천멸겁 중 하나를 완전히 끝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쉽지 않은 상대였으나 적절한 기습으로 단전을 뒤흔들었기에 순식간에 승기가 기운 상황이었던 만큼 아쉬움은 배가 되었다. 게다가 이렇게 도망친 서천이 훗날 벌일 패악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졌다.
허나 이미 엎질러진 물. 지금은 뒷수습을 해야하는 시점이었다.
“아버지! 언니가!”
딸의 외침에 나백천은 잊고 있던 것이 떠올라 급히 신형을 날렸다. 부어오른 딸의 뺨에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위급한 이가 있었다. 나백천은 기어코 바닥에 쓰러진 비류향를 바로 눕히고 맥을 짚으며 물었다.
“정신차리거라.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
“……맹주님…….”
“그래. 힘들겠지만 절대 정신을 잃으면 안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백천의 마음 속에는 이미 낭패의 기색이 흐르고 있었다. 틀렸다. 출혈도 출혈이지만 기맥이 심하게 망가졌다. 이미 망가져 있던 기맥이 망가져봤자 얼마나 더 망가지겠냐 싶었지만, 전회前回가 구멍을 임시방편으로 막은 둑과 같았다면, 작금의 몸은 거센 홍수에 어디랄 것 없이 금이 가 터지기 직전의 보와 같았다. 그것을 알기 때문일까. 눈이 거의 감긴 비류향의 입에서 유언과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연이에게…… 노야께…… 부디…….”
“그런 건 살아서 훗날 전하면 된다! 눈을 뜨거라!”
“언니! 안돼요! 제발!”
용안에 비치는 가시화된 죽음의 형태에 나예린이 절규했다. 그런 딸을 본 나백천은 순간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에 눈을 부릅 떴다. 노사부의 그것이라면. 자신 혼자서라면 불가능할 테지만 딸의, 나예린의 도움을 받는다면 해볼만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순간, 당장 위급한 이 순간만을 넘겨 시간을 번다면 급히 노사부를 찾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가 과연 비류향의 몸을 고쳐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해봐야 했다.
“맹주님! 괜찮으십니까?!”
“대체 이게 무슨, 아닛?! 의원! 의원을 불러! 어서!”
“서둘러 조를 나눠 명을 따르도록! 1조는 전前 정천맹 사천지부 부총령 나일천에 대한 수배령을 내려라! 그는 2대 서천멸겁이다! 2조는 시급히 의원과 약재를 구해오도록! 그리고 3조는 당장 호법護法을 설 준비를 해라!”
“맹주님, 그게 무슨,”
“설명할 시간이 없다! 어서!”
때마침 도착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나백천은 비류향을 침대 위로 옮겼다. 맹주의 명령에 따르던 이들은 나백천이 옮기는 비류향의 모습을 보며 경악했다. 그들 역시 일정 경지에 이른 무인들이었다. 외상도 외상이지만, 외상으로 드러날 정도로 심각한 내상을 입은 소녀의 모습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것 외에도 무인들은 비류향이 나예린의 말벗을 하는 소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끔 지나가다 마주치면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아름다운 소녀라는 게 그들이 가진 비류향에 대한 인상이었다. 그렇게 알던 이가 반송장이 되어 있으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부하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은 체 나백천은 함께 따라온 딸에게 말했다.
“예린아, 네 도움이 필요하단다.”
“제, 제 도움이요?”
“그래.”
나백천은 당혹스러워하는 나예린에게 지금부터 자신이 할 일에 대해, 그리고 거기서 나예린이 해야할 일에 대해 간략하고 빠르게 설명했다. 내공으로 깨지고 망가진 기맥을 일시적으로 감싸 보호하는 것. 그러나 완전히 망가져 손을 댈 수 없는 부분은 피해야 하는 것. 그러기 위해 용안으로 시급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가려내어야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단시간에 끝나지 않으며 매우 힘들 것이라는 것.
“할 수 있겠느냐.”
“……할게요.”
하늘 없이 새가 살 수 있을까天鳥之關. 물 없이 물고기가 살 수 있을까水魚之交. 그대 없는 삶은 지옥과 같은데 어찌 여기서 물러설까. 나예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나백천은 항상 유약하게만 느껴지던 딸아이의 결의에 감탄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으며 비류향의 하단전과 상단전─아랫배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시작하마.”
“네.”
나예린의 대답과 동시에 나백천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내공을 흘려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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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8일. 제 생일입니다. 그래서 연참으로 자축하려 했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생일인데 왜 그런 고난의 행군을 해야하는가 싶더라구요. <-
-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오면 왜 그리 창작욕구가 치솟기 시작하는 걸까요. 정작 쓰기 시작하면 팍 식어버리지만요. […]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6.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6.
"아, 오셨습니까, 맹주님!"
"사인死因이 뭔가?"
"심장을 적출당했습니다."
"……."
보고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비가 심해 업무를 위한 출발이 지체되지 않았더라면 이 비보悲報를 저녁에나 들었으리라. 수하의 보고를 들으며 나백천은 정천맹 사천지부 지부장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피투성이였다. 한 사람의 몸에서 이만큼의 피가 쏟아질 수도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이미 복도까지 가득찬 진득한 혈향에 예상하고 있던 광경이었지만 가능하면 빗나가기를 바랐던 장면이었다. 특히나 그게 아끼던 수하의 죽음이라면 더더욱.
"어찌 그리 쉽게 갔는가 이 사람아. 어찌 그리 맥없이 갔어……."
얼굴에 씌인 천 하나로 생사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뼈와 살이 파헤쳐지고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가슴부위를 보면 생사는 싫어도 구분하게 되는 법이다. 명문세가의 가주가 맞이하기에는 너무나도 처참한 죽음이었다. 안타까움에 비난의 말이 흘러나왔지만 그것은 결코 진심이 아니었다. 서천西天의, 천겁령의 준동이 의심되는 이 상황에 유능한 이를 이렇게 잃다니.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 조직의 수장으로서도 아쉬운 순간이었다.
들것에 실려나가는 남궁현의 시신을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나백천은 그가 쓰러져있던 장소를 살펴보았다. 단서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싶은 심정이었다. 여전히 마르지 않은 피에 비릿한 혈향과 더불어 미지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동시에 지독히도 깔끔한 광경이었다. 피가 튀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망가진 가구도 없었고 흐트러진 기물 또한 없었다. 저항의 흔적이 없다는 말이었다. 대체 누가 어떻게 했길래 남궁세가의 가주를 이런 식으로 죽일 수 있었을까.
심장의 적출 방향은 앞. 게다가 방어흔과 저항의 흔적이 없다. 그렇다면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면 오대세가의 가주를 일격에 순살할 수 있는 은거기인이었던가. 허나 남궁현이 쓰러진 위치는 응접용 의자 근처로 아는 이가 찾아와 다가오다 당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러운 위치였다. 게다가.
"……사絲 변…… 아니, 마馬 변인가?"
피웅덩이에 아슬아슬하게 덮이지 않은 바닥에 피로 휘갈겨진 작은 글자가 있었다. 초서라 하기에도 조악한 글자였으나 생명이 다하여 스러져가는 와중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남긴 증거였다. 한참 동안 글자를 살피며 궁리하던 나백천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 떠졌다. 뇌리에 무의미하게 떠돌며 조각조각 흩어져있던 정보들이 순식간에 하나로 이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독문병기였던 '팔'을 가져간 서천. 악랄하기 그지 없었던 그의 무공과 기교. 외팔이. 안심할 수 밖에 없는 익숙한 상대. 여기 남겨진 한 글자.
일馹.
"……."
"맹주님? 맹주님?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괜찮네. 것보다, 자네 혹시 부총령을 보았는가?"
"부총령이라면 아까 천향루로 간다고 했습니다. 천둥 치는 날은 술이 잘 들어간다, 고……."
그 말을 하던 수하는 말하던 도중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피투성이였습니다! 부총령은 피투성이였는데, 그게, 너무 자연스럽게, 그래서──"
나백천은 그 뒷말을 듣지 못했다. 들을 겨를이 없었다. 이미 창문을 넘어 쏟아지는 폭우와 천둥번개 속을 돌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쿠르르르릉── 쿠쾅! 콰르르르릉!
천지를 울리는 천둥소리는 잠잠해져가는 듯 하다가도 예상치 못한 번쩍임과 함께 다시금 세상을 뒤흔들었다. 그때마다 나예린이 몸이 펄떡 뛰었다. 쉼없이 몰아치는 천둥번개 때문이기도 했지만, 눈을 감아도 눈가에 파고드는 심저心底의 사악邪惡이 자신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호랑이 입 안에 머리가 들어가 있더라도 이것보다는 희망적일 것이다. 바닥없는 늪도 이것보다는 긍정적일 것이다. 그 정도로 사내의, 나일천의 심상心想은 끔찍했다. 그나마 앞에 선 비류향이 없었다면 어찌되었을지 모른다. 혀를 물었을 수도, 창문 너머로 몸을 던졌을 수도 있다. 아니, 그게 가능할까? 자살은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생각조차 못하게 하는 압도적인 탁기 앞에서? 그렇기에 그저 방패처럼 앞에 버티고 선 소녀의 등 뒤에서 오들오들 떨 수 밖에 없었다.
등 뒤로 전해져오는 떨림에 비류향은 지금이라도 나예린을 품에 안고 달래주고 싶었다. 허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하는 건 이 악몽 같은 현실이 지나간 후에 할 일이었다. 허나 그게 과연 가능할까. 무공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힘도 못 쓰는 소녀 둘이 팔 하나가 없다고는 하나 건장한 남성을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추격을 뿌리칠 수나 있을까? 팔 하나가 없다고 해도 기본 체력과 체격에서 차이가 나는데? 게다가.
"어허, 뭐하고 있어. 이 숙부가 빗물에 젖어가면서도 여기까지 찾아왔거늘, 어찌 근본도 모를 계집 뒤에 숨어서 얼굴도 안 비추는 게냐! 자, 이리 오너라."
나일천은 마치 아이를 맞이하는 부모처럼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양 팔을 넓게 펼쳤다. 오른팔과 왼팔. 두 팔. 한 쌍. 본디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나 형제 간의 비무 이래 오랜 세월 그에게는 없던 것이 돋아나 있었다. 비록 소매 바깥으로 보이는 팔이 새카만 무쇠 같아 보였지만, 다섯 가락 열네 마디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팔이었다. 어떻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텅 빈 소매를 흔들며 돌아다니던 사내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했으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가 사지 멀쩡한 데다가 호위무사들을 소란 없이 살해할 정도로 강한 자라는 게 문제였다.
"허허, 그것 참. 예나 지금이나 부끄러움이 많구나. 아무리 그래도 숙부가 왔으면 얼굴을 비춰야지. 내 어릴 때부터 너를 가르쳤다면 이런 예의에 어긋난 행동은 하지 않았을 텐데."
피투성이인 사내가 하기에는 너무나 부드럽고 자상한 말투였다. 허나 용안 따위가 없어도 알 수 있는 광기狂氣가 들끓는 눈이었다.
소름끼치는 눈이다. 비류향은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수련한 자는 아니지만 백무후와 팔섬풍과 함께하며 짐승의 눈과 날카로운 살기殺氣 어린 눈빛을 겪어봤기에 구분 정도는 할 줄 알았다. 그렇기에 깨달은 것이다. 저것은 패륜悖倫을 행하는 자의 눈이다. 살고자 하는 짐승도 아니고 억울함과 분노에 불타는 인간의 눈도 아니었다. 오로지 탐욕과 아집에 얽메여 뒤틀린 자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네가 오지 않으니 내가 갈 수 밖에 없구나. 형님께서 너무 너를 감싸기만 하셨어! 내 형님을 대신하여 오늘 예절을 가르쳐줘야겠구나!"
짐짓 혼내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 모습을 직시하고 있던 비류향은 나일천의 얼굴이 추잡한 미소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색욕으로 가득찬 웃음. 그렇기에 소녀는 짐승조차 되지 못할 악귀가 발을 내딛는 순간 입을 열었다.
"물러서십시오."
"……."
바닥에서 떨어지려던 나일천의 발이 멈췄다. 그나마 남아있던 인간의 조각인 미소가 사라진 건 거의 동시였다. 지옥불에 빛나는 악귀의 얼굴이 저러할까 싶을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로 나일천이 울부짖었다.
"무공은 고사하고 제 몸뚱이 하나 간수 못하는 계집이 감히!"
사자후와 같은 포효. 어설프게 무공을 배운 이라면 곧바로 운기조식을 해야할 정도로 사특한 기세였다.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몸을 뒤흔드는 사이함에 속이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그러나 역으로, 내공은 고사하고 진원진기조차도 노사부에게 간신히 주입받은 몸이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상중하 삼단전과 전신 기맥이 망가진 비류향의 몸은 나일천의 탁기에 흔들리기는 했지만, 그 탁기를 몸 안에 잔류시키지 않고 모래사장에 쏟아진 물처럼 곧바로 흘려내버려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거센 바람은 깃대를 부러지게 하나 바람에 흩날리는 실타래는 끊지 못하는 법. 과거의 악재가 지금은 호재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비류향은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되려 등 뒤에 선 나예린을 지탱하며 외쳤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러서십시오. 맹주꼐서 윤허하시지도, 예린이가 허락하지도 않았습니다."
"……네 년이 감히, ……흠? 으음……."
그제서야 무언가를 감지한 듯 나일천의 눈이 비류향을 훑어내렸다. 미심쩍은 것을 보는 불신과 불쾌감, 그리고 업신여김이 뒤섞인 눈이었으나 이는 곧 경계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바로 눈앞에 있건만 기맥조차 잡히지 않았다. 몇 번 스쳐지나갈 때는 그러려니 했다. 형님꼐서 예린이 말벗 삼아 부른 년이라 했으니 필시 백도白道 어딘가의 후지기수리라. 그때의 나일천은 외팔이 한량이었기에 기맥조차 잡을 수 없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서천西天의 힘을 얻은 지금도 잡을 수 없다고?
"네 년, 그냥 병신이 아니었군. 어느 문파에서 온 거냐."
당장이라도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것 같은 섬뜩한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하자 비류향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무서웠다. 무섭고 두려웠다. 돌림병으로 죽을 날을 기다리던 그때와는 다른, 어찌될 지 알 수 없는 공포가 몸을 휘감았다. 사랑스러운 동생이, 존경하는 노야의 얼굴이 떠올라 울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만을 의지하며 떨고 있는 나예린을 떠올리며 참았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순간적인 도박이었다. 무공은커녕 범인凡人의 기력조차 가지지 못한 계집이 그런 거짓말을 한다면 대체 누가 믿을까. 그러나 비류향은 한 달 전 시장에서 만났던 나백천의 말을 떠올렸다. 기묘한 기맥이라 했던가. 무림 백도白道의 집약체인 정천맹의 맹주조차도 의심에 고개를 갸우뚱했던 자신의 몸. 이 보잘것 없는 몸뚱아리를 판돈 삼아 마음을 독하게 먹고 그럴 듯한 말로 상대를 속여 시간을 벌자. 짐승만도 못한 자를 막을 누군가가 올 때까지.
등 뒤에서 떨고 있는 이 아이를, 이 어린 것을 지켜야 한다. 맹주의 신의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무섭다. 허나 조금이나마 일찍 태어난 이로서, 어찌 겁먹고 물러서겠는가. 다짐과 함께 비류향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금부터 자신은 저 사내가 쉽게 덤빌 수 없는 무언가를 숨긴 무인武人이 되어야만 한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떨리는 손을 숨기기 위해 자연스럽게 소매를 늘어뜨렸다. 그리고 한 쪽 발을 살짝 앞으로 내딛으며 양 무릎을 살짝 굽혔다.
'무언가'를 하기 위한 것처럼.
'무엇인가'가 있는 것처럼.
노사부와 비류연의 수련을 곁눈질하며 배운 어설픈 흉내가 결코 자연스러울 리 없었다. 나일천 역시 헛점 투성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앞서 말했다시피 이 거리에서도 잡히지 않는 기맥의 희미함과 더불어 그 어설픔 때문이었다. 수십 년간 고개를 숙이고 등 뒤로 칼날을 갈아오면서 온갖 의심암귀와 모략을 일삼아왔던 사내는 경천동지할 힘을 얻고서도 정체불명의 상대에게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 누군가는 겁이라고 할 신중함이 몸에 배어 고정관념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도 우습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일천은 코웃음과 함께 출수出手하려 했다. 무엇이 있는지는 부딪쳐보면 알게 되리라. 설령 숨겨진 무언가가 있더라도 저 어설픈 꼴을 보아하니 쓰기도 전에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비류향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숙부가 조카를 탐함은 패륜悖倫이고, 색욕色慾으로 어린 아이를 범하는 것은 천도를 따르지 않음이니 의를 망각함不從天道卽忘義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으십니까?"
"……흐흐, 흐흐흐흐, 흐허허허, 흐하흐하흐하하하하하하하!!!!!!!"
광소狂笑. 그 단어가 이토록 잘 어울리는 이가 어디 있을까. 사람의 탈을 쓴 악귀가 웃는 모습이 이러할까. 입가에 흐르는 침에도 개의치 않은 체 그는 미친 듯이 웃었다.
"패륜? 천도? 후, 흐흐흐흐, 흐하하하하하하! 무림은 강자지존强者之存이다! 무법無法의 땅이었어! 흐후하흐하하하하! 되먹지도 않는 예법禮法을 나불거리면 내가 물러설 것 같더냐? 응? 그래? 아니면 네가 예린이 대신 몸을 바치기라도 할 테냐? 열다섯이라 했던가? 혼례를 올릴 때가 된 계집이니 패륜도 아니고 천도에도 어긋나지 않는구나? 네 그리하면 예린이는 건드리지 않겠다 약조하마. 어떠냐? 응?"
"그럴 수 없습니다."
"……후흐흐흐, 그래. 그동안 예린이를 아끼는 척 했지만 결국 네년도 사람이야. 제 몸뚱이가 제일 중요하지."
일언지하의 거절에 나일천이 비아냥거렸다. 허나 곧바로 이어진 소녀의 말에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인을 해치니 적이요賊仁者 謂之賊, 의를 해치니 잔이라賊義者를 謂之殘, 잔적한 자를 일부라 한다殘賊之人 謂之一夫."
"……네 이년."
맹자 양혜왕 장구 하편 제8장 孟子梁惠王 章句 下編 第八章. 나일천이 마음에 들어하는 문구였지만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문구의 해석은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도道를 품은 군자君子도 아니며, 신념信念을 지키는 패자覇者도 아닌, 추잡한 욕망만 들어찬 일부一夫의 약속을, 아니, 조카를 겁탈하려는 색마色魔과 어찌 약조를 나눌 수 있단 말인지요?"
"이 빌어먹을 년이─────!!!!!!!!!!!!!!!"
와장창창!
실성한 듯한 사내의 발길질에 탁자가 소녀들의 곁까지 날아와 나뒹굴었다. 일부러 그런 것이리라. 그러나 비류향은 바로 옆을 스쳐지나가는 탁자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아미산을 함께 오르내리는 백무후와 팔섬풍의 장난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되려 침착하게 함께 날아든 반짇고리 안에서 바늘이 걸린 실을 하나 꺼내 손가락 끝에 감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팔을 내려 소매로 손끝을 가렸다. 동생 비류연이 비뢰도를 수련하던 모습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떨림없이 자연스럽게 실을 감는 소녀의 모습이 나일천에게는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역시 이 년은 무언가가 있다. 스스로가 만든 의심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나일천은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하는 속내를 감추고 말했다.
"설마 그 바늘 하나로 나를 어찌할 수 있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예羿는 화살 하나로 태양을 떨어뜨렸습니다."
"흥! 말은 잘 하는구나. 혓바닥이 아주── 잘 움직여!"
사천지부장 남궁현의 목숨을 빼앗았을 때와 같은 살수殺手가, 이번에는 소녀의 목을 노리고 펼쳐졌다.
#####
콰르르르릉! 데구르르르…….
번개와 함께 노인의 손에서 떨어진 밥그릇이 바닥을 굴렀다. 내용물은 이미 노인의 뱃속으로 들어가 있었고 그릇은 튼튼하기로 소문난 고급 도기였기에 깨지지는 않았으나 식사 분위기를 깨트리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분위기 파괴의 공신인 노인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이마를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소녀(?)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집으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소녀가 지어 올린 밥이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흑, 죄송합니다, 어르신. 다시 지어오겠으니 부디 매질만은, 꺅……?!"
따악!
"비명소리도 여성스러워지는 걸 보니 수련의 성과가 나타나는구나. 여튼 스승을 놀리려 들다니. 벌이다, 이 녀석아."
"……."
노인이 그리 말했으나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답할 수가 없었다. 노인이 신속으로 내던진 젓가락에 맞은 이마를 부여잡고 고통을 참기 위해 몸을 떠는 것만이 소녀(?)─비류연에게 허락된 유일한 행동이었다. 제자의 모습을 한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던 노사부는 싱숭생숭한 얼굴로 방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쏴아아아아── 우르르릉──…… 콰르르르릉!! 우르르…….
물내음과 함께 요란한 천둥번개가 몰아쳤다. 이미 사람의 말로는 표현조차 하지 못할 경지에 든 노사부에게는 별볼일없는 자연현상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노인의 마음이 썩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편하지 못한 상태에서 썩 쾌적하지 못한 자연환경에 둘러쌓여 있자니 괜스레 심란해졌다. 맛있는 음식도, 훌륭한 술도, 그리고 모든 것을 뒷바라지할 노예 겸 제자도 있건만 노사부는 마음 한 켠에 들어선 찝찝한 감정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끄응……."
"……뭐가 그리고 신경쓰이십니까, 사부님?"
"거 참, 그러고 있을 때는 말버릇 좀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사부님?"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 비류연이 이마를 비비며 퉁명스럽게 묻자 노사부는 근래 몇 번이나 했던 말을 입에 담으며 비류연을 바라보다 말을 멈추었다. 쉽사리 보기 힘든 사부의 넋 나간 모습에 비류연이 불안을 느끼며 되묻자, 노사부는 그제서야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스승의 건강을 걱정한 제자는 집요하고 끈질기게 안위를 묻다가 "사부님,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그렇다니까. 뭘 그걸 몇 번이나 물어봐?" "……갑자기 제가 어른으로 보이신다던가, 애들 간식이 먹고 싶으신다던가," "노망난 거 아니다, 욘석아!" "끄흐으억?!" 젓가락을 맞았던 바로 그 부위에 노사부의 탄지공을 맞고 나서야 물러났다.
"향아……. 잘 있지……?"
빠른 시일 내에 저 놈과 함께 천향루에 가봐야겠군. 노예 겸 제자가 저녁상을 정리하는 동안 노사부는 처마 밑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비류향이 현 무림의 중진이자 경지에 도달한 고수라 할 수 있는 남궁현조차도 즉사를 면했을 뿐이었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나예린 덕분이었다. 숨막힐 듯한 나일천의 독심毒心이 비류향에게 집중되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예린은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를 용기로 연상의 소녀를 옆으로 잡아당겼다. 그로 인해 내뻗은 무쇠팔의 살상 범위에 나예린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일천이 급히 방향을 튼 덕분에 소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대신 왼쪽 어깨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절기도 아닌 단순한 공격의 후폭풍에 휘말려 벽까지 날아가 쳐박힌 소녀들을 본 나일천은, 그제서야 비류향이 무공은 고사하고 평범한 일반인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분노했다. 기만당한 분노는 단순했지만 화풀이는 단순하지 않았다.
나일천은 왼손 하나만으로 쓰러져 신음하던 비류향의 목을 우악스럽게 붙잡아 벽에 밀어붙여 올렸다. 아무리 건장한 성인이고 벽에 밀어붙이는 상태라고는 해도 열다섯 소녀의 몸을 한 손으로 들어올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서천의 무공으로 사이한 내공을 얻게 된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그는 기괴한 쇳덩어리 오른팔을 비류향의 단전 위에 얹으며 말했다.
"보통 무림인은 말이야, 단전이 파괴되면 즉사하거나 폐인이 되지. 일반인들도 뭐, 비슷하던가? 자, 그럼, 이미 단전이 깨지고 기맥이 망가져 내공이 없는 인간은 말이야. 과연 죽을까 살까?"
"그, 윽……!"
"한 번, 알아보자꾸나!"
"────────!!!!!!!!!!"
한떄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서천의 독문병기를 타고 들어오는 나일천의 내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격통이 되어 비류향의 몸을 휘저었다. 평범한 무인이나 일반인이었다면 단숨에 온몸의 혈도가 뒤틀리고 기맥이 망가지며 즉사했을 만큼 악랄한 수법이었다. 그러나 이미 망가진 비류향의 몸은 나일천이 우겨넣는 내공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상하지 않았다. 폭포에 바가지를 들이밀어 물을 받으려고 하면 거센 물줄기가 바가지를 깨트리지만, 채를 내밀면 틈새로 물이 빠져나가 멀쩡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허나 그것이 행운이라고 하기에는 소녀가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 너무나도 컸다.
"──────, …………! "
"졸릴 정도로 지루한가 보구나. 하긴 무작정 세게 매질하는 게 능사는 아니지."
"……크흡, 흐으, 끄으으윽, 그륽……!"
""어떠냐, 이제 좀 정신이 들지?"
"─, ──, 컥──!!!"
나일천은 비류향의 반응을 보며 불어넣는 내공의 양과 강약을 조절했다. 쉽게 죽일 수는 없었다. 고작 이러한 꼬맹이에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사내는 최대한 고통을 주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비류향은 목이 졸려 숨을 쉬지 못하는 것도, 피가 철철 흐르며 욱신거리는 어깨도 잊을 수 있었다. 가시나무가 큰 바람에 흔들리는 것과 같은 기세로 내장을 헤집는 격통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런 반송장 몸뚱이였으니 기맥이 안 잡히는 거였는데 말이야. 응?"
"윽──, ──────!!!"
"그런 것도 모르고 뭐가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허 참, 대단해. 아주 대단해. 여태껏 이렇게 나를 엿먹은 건 네 년이 처음이야. 자랑스러워 해도 좋아!"
"─────!! 하악, 륽……."
그리고 채 역시 폭포 아래 오래 두면 망가지는 것은 자명한 이치. 어느 덧 비류향의 입가에는 기침과 함께 검붉은 액체가 함께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상의 증거였다.
"……."
나예린은 그 광경을 보며 공포에 휩쌓였다. 용인의 능력은 비류향이 겪고 있는 끔찍한 고통을 아무런 여과 없이 전달해주었다. 마치 자신이 고문당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일천이 내뿜는 광심狂心과 비류향에게서 전해져오는 고통이 소녀의 심상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예린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
도망쳐, 린아. 어서.
"윽──, 악──…………."
"어른을 놀리니 기분이 좋더냐? 응? 그래? 어디, 음?"
"────!!! ……, ……!"
"대꾸조차 안하다니. 이래서 길가에서 굴러먹던 년들은 안된다니까. 예의가 없어, 예의가!"
"그윽──, ────!!!!!"
어서. 도망쳐. 린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의 격류 속에서 도망치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그 순간에도 자신을 걱정하는 비류향의 마음에 나예린을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를 용기로 나일천에게 달려들었다.
"숙부! 놔주세요! 언니 놔주세요! 숙부! 언니를,"
"귀찮게 굴지 말고 얌전히 있어!"
"꺄아악!"
쿠당탕탕!
거칠게 내쳐진 나예린의 몸이 벽에 부딪쳤다 떨어졌다. 그 모습에 나일천은 흥이 식었다는 듯 공력 주입을 멈추었다. 침과 피거품이 뒤섞인 액체가 비류향의 입가를 타고 흘러 손까지 적시고 있었다. 더럽게. 나일천은 눈살을 찌푸리며 슬슬 이 행위를 그만두고자 했다. 어차피 이 소녀는 전채요리였다. 주식은 말할 것도 없이 조카딸인 나예린. 수작을 걸어두어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인 친형 나백천이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한 상태기는 했지만 맹신할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비류향 때문에 시간을 소비한 상황이었다. 이 년은 예린이를 맛보고 남는 시간에 가지고 놀아도 충분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던 나일천은──
"뭐, 네 년은 나중이다. 지금은 우선 예린이를──"
따끔. ──아주 작은 통증을 느꼈다.
"……."
말 그대로 따끔이었다. 그 통증의 원인은 비류향의 손끝에 걸린 바늘이었다. 손끝에 걸어두었던 그것이었다. 그 작은 바늘 끝이 나일천의 손을 찌르고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돌린 나일천은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피거품 섞인 침을 흘리면서도, 눈조차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도 자신을 막아서려고 하는 소녀의 모습에 사내는 말없이 오른손을 소녀의 단전 위에 얹었다.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냐, 이 빌어먹을 년!!!!!!!"
나일천은 전력을 다해 일격一擊의 내공을,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쏟아넣은 후, 비류향의 몸을 나예린이 쓰러진 쪽으로 내동댕이쳤다. 콰앙! 털썩. 물 담은 가죽주머니 같은 소리가 났다. 허나 바닥에 나뒹구는 것은 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나예린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 비류향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어, 언니……? 언니……? 눈 떠요……. 일어나요…… 꺅!"
"숙부가 예의를 가르쳐주고 있는데 어찌 다른 사람을 보는 거냐, 예린아!"
"느, 놔주세요……. 싫어요……!"
"가만히 있어!"
짜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나예린의 고개가 세차게 꺾였다. 뺨이 화끈거리고 얼얼했다. 그와 동시에 혀끝에 찝찔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제서야 나예린은 자신이 바닥에 눕혀져있고 그 위에 나일천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옆 벽에는 비류향이 벽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아니, 저것을 앉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쓰러지지조차 못했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앉아 죽은 시체가 저러할까 싶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소녀에게 뭐라 말 한 마디 전하기도 전에 나일천의 목소리가 나예린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이런, 이런, 예쁜 얼굴이 엉망이 되었구나. 그러길래 숙부 말을 잘 들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잖느냐. 뭐, 이건 이거대로 독특한 맛이 있지."
악귀는 나예린의 턱과 뺨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에 혀를 댔다. 뱀의 혓바닥도 이것보다는 덜 소름끼칠 게 분명했다. 기묘한 신음성과 미지근한 입김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공포로 몸이 굳은 소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나일천은 께름칙한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으로, 날카로운 쇠 손톱으로 천천히 소녀의 가녀린 교구 한가운데를 따라 선을 그었다.
사라락.
날카로운 칼날은 비류향이 한 달 동안 공들여 만든 옷을 잔혹하게 갈라버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소녀의 나신에 나일천의 욕정과 광기가 화산처럼 들끓어 올랐다. 눈을 질끈 감아도 용안을 타고 파고드는 심상에 나예린은 숨이 막혀왔다.
와장창창!
"네 이노오오오오오오옴!!!"
노호와 함께 몰아친 정천맹주 나백천의 새하얀 검기劍氣가 나일천을 날려버린 것은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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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포맷하려는데 usb 인식이 되지 않아 하루를 날려버리고 이제서야 겨우 올립니다. 원래대로라면 00시 땡 하고 올릴 예정이었는데. 여튼 다음 편은 다음 주 수요일입니다.
- 하얀 늑대들의 카셀처럼 비류향을 무력 상향 시킬 계획은 전혀 없습니다만, 나중에는 전개하기 편하도록 호신술 정도는 가르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 편 정말, 무공 하나 없는 주인공을 비뢰도 세계관에서 굴린다는 건 정말…….
- 검령사를 읽었습니다. 청민 님 어서 써주시죠! <-
- 4월 5, 6일 포병, 4월 7, 9일 별의 바다, 4월 8일 하늘과도 같은 그대, 4월 10, 11일 세이야가 이렇게 일주일간 연참할 예정입니다. 음? 앗, 오늘의 날짜가!
- 타입문넷 Rudein님, 조아라 sEcho님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한자漢字 · 오타 교정 및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5.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5.
주객酒客들의 고성방가조차도 사라진 시간에 밤짐슴이나 분간하고 다닐 어둠이 내린 시간이었다. 그러한 어둠 뚫고 한 인영이 정천맹주 진천뇌벽검 나백천이 머무르고 있는 귀빈실의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이미 초목들도 잠든 시간인지라 대답이 들려올 리가 만무했으나 놀랍게도 반응이 있었다.
"들어오게."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작은 소리를 포착한 인영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솜을 누빈 신발이라도 신은 것을까. 그의 발걸음에는 자그마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백천의 방으로 들어온 인물은 쓰고 있던 초립을 벗었다. 혹여나 창문 너머로 새어나갈까 두려워하듯 작게 켠 등불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사천 지부장 남궁현이었다. 그를 보며 나백천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많이 놀랐는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다른 주머니 채우는 일 숨기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허허허, 사람하고는."
짖궂은 농담에 웃음이 피어났다. 그러나 곧 웃음기를 지운 나백천은 품 안에서 서찰 두 장을 꺼내 남궁현 쪽으로 내밀었다. 하나는 낡은 것이었고, 하나는 비교적 새 것이었다. 그것을 본 남궁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건……."
"2년 전, 본부에서 일어난 도난사건을 기억하고 있나?"
"제칠비고 도난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기억하고 있습니다."
2년 전이라면 남궁현 역시 본부에 적을 두고 있을 때였다. 정천맹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일곱 겹의 감시를 두른 엄중한 창고가 뚫린 것을 어찌 잊겠는가.
"음, 무엇을 도난당했는지는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나백천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남궁현은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정천맹주가 입을 열고 도난당한 물품과 그 유래를 설명하자 남궁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남궁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그는 낡은 서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그런 일이……. 그렇다면 이 서찰은……."
"그날 밤 범인이 두고 간 것일세."
"역시……."
남궁현은 낡은 서찰을 내려보다 나백천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나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었다. 그러자 남궁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서찰을 펼쳤다.
『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간다. 그동안 잘 보관해 줘 고맙다. 다음에 보자. -빚을 진 자가- 』
두 번, 세 번 읽어도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서찰을 원래대로 접어 내려놓은 남궁현은 또다기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서풍의 광란'……. 도난당한 것이 서천西天의 독문기문병기였다니……. ……설마, 서천이 아직 살아있다는……!"
남궁현의 나이가 올해로 쉰이다. 일반인이었다면 노년의 나이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강호에서 보자면 젊은 축이었다. 그런 그에게 100년 전의 천겁혈세는 전설 속 이야기와 다름이 없었다. 대전에 참전했던 그의 조부로부터 간간히 듣기만 했던 일이다. 그러나 조부의 이야기 속에 담긴 공포와 절망은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동요했던 것이다.
"그건 모르는 일이야. 그러니 쉽게 동요하지 말게. 적들이 바라는 게 바로 그것일 수도 있어."
"으음,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나백천의 지적에 간신히 정신을 되돌린 남궁현은 자신의 실책을 시인했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만 하더라도 서천멸겁이 쓰던 무기가 사라졌다는 말 한마디에 이토록 동요하는데, 이 사실이 공표되기라도 한다면 어떠할까. 무림 전체가 술렁이게 될 것이다. 설령 정말로 서천멸겁이 없다고 하더라도 정사흑백 구분 없이 강한 심리적 부담감을 느낄 게 분명했다.
"이제 왜 내가 이 늦은 시간에 자네를 불렀는지 알겠는가? 모든 판단은 사실 확인을 마친 후에 내려도 늦지 않네."
"명심하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저것을 펼쳐보게."
남궁현은 새 서찰을 펼쳐보았다.
『바야흐로 때가 되었다. 빚을 청산할 때가! 서쪽 관문을 넘어 서쪽 끝에서부터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할 것이다. -빚을 진 자가- 』
내용을 몇 번 곱씹어 읽은 남궁현은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서쪽 관문은 옥문관일 것이고, 서쪽 끝이라면 이곳, 사천땅이겠군요."
"그래. 그래서 내가 이곳으로 온 것일세."
나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 서찰은 그를 안마당인 본부에서부터 끌어내기 위한 함정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백천은 딸인 나예린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었다. 자신이 없는 정천맹에 놔두느니 차라리 자신의 곁에 두는 게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다. 함정이든 아니든 직접 나서야 했다. 이것은 일종의 도전장이기도 했다.
"2년 만에 나타난 유일한 단서라네.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야."
"바로 조사에 착수하겠습니다. ……허나, 너무 막막한 일이군요."
수하들에게도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이상 번거로움은 물론이거니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조차도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나백천이 말했다.
"작은 단서는 있네."
"무엇입니까?"
"100년 전, 천무삼성天武三星께서 그 자의 오른팔을 잘랐네."
"오른팔이라……."
남궁현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서천멸겁의 독문병기는 그의 팔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권법이라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팔이라는 뜻이었다. 몸에서 잘려나간 팔이 100년 넘게 멀쩡할 리가 있겠느냐마는, 그건 그것이 사람의 살이 아닌 차가운 쇳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주제에 진짜 살덩어리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니 믿을 수가 없는 얘기였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기로 했다. 만약 서천멸겁이 살아있다면? 2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이러한 도발을 펼치는 이유가 100년 동안 몸에서 떨어져 있던 독문병기의 조정을 마쳤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찾아야 하는 건 무엇일까. 곰곰히 고민한 끝에 그는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입에 담았다.
"외팔이였던 자, 허나 지금은 외팔이가 아닌 자를 찾아야겠군요."
"내 자네에게 이곳을 맡긴 게 정말 잘 한 일인 것 같네. 어찌 그리도 정확하게 내 생각을 꿰뚫나?"
"과찬이십니다."
담백한 반응이 오갔다. 그만큼 막중한 업무였다. 실패하면 사천의 실마리를 놓치는 꼴이고, 성공하더라도 여차하면 사천과 맞서야 하는 일이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으나 이럴 경우에는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압박감에 한숨을 내쉬던 남궁현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물었다.
"……비류향이라는 그 소저는 어떻습니까?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자네는 그 아이가 외팔이로 보이는가?"
"허나 끄나풀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맹주님께서 이곳에 오시고 얼마 되지 않아 만났다는 게 수상합니다."
"내 사람을 시켜 뒷조사를 해봤네만, 거짓이 없었네. 실제로 그 아이가 살았던 마을도 있었고, 돌림병에서 살아남은 이들 역시 그 아이에 대해 증언해줬고."
"허나 특이한 기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인神人이 몸을 살폈다고는 하지만, 그게 혹여 그들이 몸을 만져 금제禁制를 건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자네라면 그토록 특이한 세작을 놓겠는가?"
"맹주님."
지부장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백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나 역시 그걸 의심해본 적이 있네. 하지만 그런 걸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는 이가 바로 곁에 붙어있지 않은가?"
"……설마, 예린이가?"
"그 설마일세. 덕분에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지."
믿음을 위한 의심이었다. 믿고 싶었기에, 그렇기에 나예린은 난생 처음 스스로의 의지로 용안龍眼을 전개하여 비류향을 샅샅이 살폈다. 결과는 순백純白이었지만 영혼까지 뒤흔드는 충격에 비류향은 하루 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 다음날에야 간신히 눈을 떴다. 그 동안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나예린은 연유를 묻는 비류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믿고 싶었노라고. 그래서 한 행동이었다고. 혼이 날까, 미움받을까 두려워하는 어린 소녀를 향해 비류향은 물었다.
"이제 믿을 수 있겠니?"
"……네."
"그래, 그럼 됐어."
몸 한 번 앓고 신뢰를 얻었으면 남는 장사지. 열다섯 소녀는 그렇게 덧붙였다. 곁에 함께 있던 나백천이 경탄할만한 대범함이었다. 그와 관련된 얘기는 하지 않았으나 남궁현은 용안으로 확인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용안으로 살펴 아무 것도 없았다면 믿을 수 밖에 없겠군요. 어찌되었든 서천에 대한 정보,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네."
그렇게 말을 마친 남궁현은 왔던 것처럼 초립을 쓰고 조용히 객실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백천은 두 편의 서찰을 품에 갈무리했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가. 불안과 더불어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정녕 서천멸겁이 나타날 것인가. 과연 일신一身의 힘으로 그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혹여나 다른 멸겁들이 함께 있다면 어찌될 것인가. 그렇게 되면 예린이는. 지켜줄 이가 사라지면 그 아이를 누가 보살펴줄까.
결국 나백천은 닭이 울고 아침햇살이 방을 비출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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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이토록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어머니의 태반이 아니라 스스로 숨 쉰 것은 이제 고작 십이간지를 일순一巡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언제나 고통스러운 순간들 뿐이었고, 찰나의 안식조차도 그저 한 숨 돌릴 수 있을 뿐인 세월이었다. 하루하루가 메마른 사막과 음습한 늪지를 헤쳐나가는 느낌이었다. 나예린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과거는 그런 잔혹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비류향이 오고 나서는 그 반대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고통에 대한 보답처럼 너무나도 행복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주식이 담긴 그릇을 앞에 두고 찬은 그 위로 놓는 거야. 오늘처럼 누군가와 함께 먹으면 가운데 두고. 젓가락은?"
"받침대 위에요."
"응. 먹기 전에는 어떻게 말하지?"
"잘 먹겠습니다, 라고 해요."
"맞아. 자, 이제 먹자.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다 먹은 후에는?"
"잘 먹었습니다."
"응. 나중에 동생이 생기면 린이 네가 언니로서 가르쳐줘야 돼. 알겠지?"
"네."
그릇 놓는 법. 바르게 앉는 법. 입 안에 음식물이 있을 때는 말을 삼가하는 것, 반찬을 헤집지 않는 것, 식사 때의 인사법 등을 배웠다.
"젓가락 한 쪽은 약지와 엄지 안쪽으로 잡고, 다른 한 쪽은 엄지 끝으로 고정하면서 검지와 중지로 움직이는 거야."
"……어려워요."
"처음엔 다들 그래. 자, 이렇게."
젓가락질은 식사 후에 따로 더 배웠다.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나예린이 울상을 짓자 비류향은 곁으로 다가와 세심하게 집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하다보니 조금씩 익숙해져갔다.
"속옷이 작구나. 좀 더 큰 걸 입어야겠어."
"중요한가요?"
"응. 몸에 맞는 속옷을 입어야 쑥쑥 크니까. ……나도 저잣거리서 들은 장사꾼에게 얘기지만."
"일부러 새 것 사게 하려는 걸 거에요."
"후훗, 그럴지도 몰라. 그치만 지금 속옷 입고 있으면 답답하지?"
"……네."
"그럼 새 걸 사야지. 그리고 속옷을 잘 입어야 겉옷도 맵시가 살아나지. 옷고름과 치마 매듭짓는 법 기억하니?"
"네. 그렇게 묶었어요."
"어디 보자. 응. 잘했어."
옷을 정갈하게 입는 법을 배웠다. 단순히 몸을 가리도록 꽁꽁 싸매는 것이 아니라 속옷부터 겉옷까지, 적삼부터 치마까지 어디에 두르고 어떻게 입으며 어찌 매듭지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우선 큰 빗으로 빗고, 그 다음에 작은 빗으로 빗어야 머릿결도 안 상하고 당겨서 아프지도 않아."
"젖어있어도 괜찮나요?"
"어지간하면 말리고 해야지."
"여름에는 부채질하면 되는데, 겨울에는 힘들 것 같아요."
"그래. 겨울에는 머리가 시려서 부채질 하기 힘들지."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부채 같은 게 나오면 좋을 텐데……."
"그러게. 그런 게 있으면 참 좋겠다."
머리 빗질 하는 법을 배웠다. 두피가 당기지 않도록, 중간에 엉키지 않도록 빗는 법을 배우며 서로의 머리를 빗겨줄 때 도란도란 얘기하는 게 정말 좋았다.
"여기서는 삼현을 튕기면서, 언제나 당신을 그리며我永慕上────……."
"언제나 당신을 그리며……."
"그리고 오현과 일현을 타고, 돌아올 날을 기다립니다待上復日也──……."
"돌아올 날을 기다립니다……. 음音 틀리지 않았나요?"
"……아, 응. 실수했네. 처음부터 다시 해볼까?"
"네."
음악과 금琴을 배웠다. 비류향 역시 비류연이 노사부에게 금을 배울 때 투덜거리는 걸 달래며, 혹은 누이에게 들려준다며 튕기던 것을 곁눈질하고 몇 가지 배운 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아는 곡조도 많지 않고 금 역시 때때로 음이 튀었지만, 두 소녀는 그때마다 까르르 웃으며 금을 타고 노래를 불렀다.
"거기서는 엄지 손가락으로 윗 실을 걸고, 아랫 실 사이로 빼는 거야."
"이렇……게…… 아……."
"그 상태로 엄지와 검지를 펼쳐봐."
"아, 아아……, 와……. 됐어요!"
"자, 그럼 이번에는 내 차례지? 자, 풀어볼래?"
"……언니이……."
"알았어. 가르쳐 줄게. 이번에는……."
실뜨기를 배웠다. 소일거리 삼아, 그리고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나예린을 위해 천과 재봉도구를 받아온 비류향은, 소녀를 위한 새 옷을 지으면서 남는 실로 틈틈히 실뜨기를 가르쳐주었다.
비류향은 그렇게 많은 것들을 가르치면서 틈틈히 수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일상의 신변잡기와 생활지식부터 경전과 고문古文까지, 민담民談에서부터 경극과 사서史書까지 다종다양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물론 제대로 배우지 못한 소녀였는지라 큰 흐름이 없어 번잡하고 조잡했지만,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왔던 나예린에게는 하나하나가 모두 귀하고 즐거운 이야기였다.
함께하는 시간 모두가 좋았지만 나예린은 특히 비류향과 목욕할 때가 제일 좋았다. 이때는 보통 특이체질로 인해 비류향이 쪽잠에 들어 대화는 없었지만, 세 살 연상인 소녀의 품에 기대어 몸을 담그고 있으면, 모든 소리가 아련히 사라지면서 고요해져 마치 태아가 되어 어머니 뱃속에 있는 것처럼 평온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하나만 놓고 보면 별 것 아닌 사소한 일상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상. 그러나 타고난 미색美色과 용안龍眼은 소녀로부터 그러한 일상을 빼앗아갔다. 이것이 소녀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면 이토록 괴롭지는 않았으리라. 허나 여태껏 소녀의 삶에 선택은 없었다. 어디서나 넘실대는 사람의 악의와 욕망에 쫓기고 또 쫓겨 도망칠 뿐이었다. 만약 소녀의 부친이 무림의 양맥兩脈인 백도白道의 중심 정천맹正天盟의 주인된 자가 아니었다면, 그 무공이 절정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었다면 나예린의 과거는 지금보다 더 참혹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만큼 인고의 세월 끝에 나타난 비류향은 나예린에게 있어 구원이었다. 사욕 없이 자신을 마주대해주는 상대였다. 부모님을 제외하면 거의 유일하게 거부감 없이 살을 맞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때는 어머니처럼, 어느 때는 친구처럼 곁에 있어주는 이였다. 어찌 기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찌 미소 짓지 않을 수 있을까.
해맑게 웃게 된 딸아이의 모습에 나백천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비록 자신의 손으로 딸아이에게 웃음을 되찾아주지 못한 것은 아쉬워했지만 그는 아이의 행복을 우선시할 줄 아는 참된 아버지였다. 서천의 수작이 언제 펼쳐질지 몰라 걱정하면서도 여식의 미소를 볼 때마다 그는 마음의 평온을 얻어갔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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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이 덜컹거리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천둥번개가 요란했다. 꽁꽁 닫힌 창문에 가려도 알 수 있을 만큼 거친 날씨였지만 사내는 물끄러미 탁자 위에 놓인 것을 내려다보았다. 철로 만들어진 작고 기다란 관棺이었다. 산덩쿨 칡뿌리마냥 얼기설기 얽힌 듯 하면서도 정교하게 내용물을 감싸는 쇠사슬은 이 관이 얼마나 엄중한 물건인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폭풍이 부는구만……. 크흐흐흐……. 좋아, 이 녀석과 참 잘 어울리는 밤이 되겠어."
사내는 한손을 뻗어 이중 삼중으로 철저하게 휘감긴 쇠사슬을 걷어냈다. 양손으로 해도 버거울 작업을 굳이 한손으로만 하는 이유는 사내가 외팔이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텅 빈 오른소매가 문틈 새로 흘러들어온 바람을 타고 맥없이 펄럭였다. 힘들고 괴로울 법도 하건만 사내는 싱글벙글 웃으며 작업을 계속해나갔다. 되려 콧노래를 흥얼거리듯 중얼거렸다.
"인을 해치니 적이요賊仁者 謂之賊, 의를 해치니 잔이라賊義者를 謂之殘, 잔적한 자를 일부라 하니殘賊之人 謂之一夫 일부를 죽였다는 말은 들어봤어도聞誅一夫紂矣 군왕을 시해한 적은 없나이다未聞弑君也."
맹자 양혜왕 장구 하편 제8장 孟子梁惠王 章句 下編 第八章의 내용이다. 유교가 시작되고 생활 깊숙한 곳까지 뿌리내린 나라에서 비록 성현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언급하지 않는 내용이었다. 내키지 않으면 설령 왕이라 한들 뒤엎어버릴 수 있다는 내용이 쉽사리 용인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일천은 그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왕일지라도, 다시 말해서 아무리 높고 귀한 이라도 베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만인지상萬人之上도 그러할진데 친형이라고 아니 그럴까. 맹자께서 살아돌아오신다면 '그건 네놈의 욕망일 뿐이다!' 하고 노호할 해석이었으나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달칵.
쇠사슬이 모두 걷히자 자연스럽게 상자의 잠금쇠가 열렸다. 그와 동시에 오랜 세월 잠들어있던 내용물이 빛을 받았다.
"이것이……."
묵빛으로 빛나는 사람의 오른팔이었다. 아니, 사람의 것으로 보일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의수義手였다. 그러나 꺼림칙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신체 일부의 형태를 한 기괴함 때문인지 아니면 수많인 이의 피를 머금은 흉악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찌되었든 불길한 물건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흐흐, 흐히, 흐흐흐, 흐흐흐흐흐……."
허나 사내는 웃었다. 광기를 머금은 황홀한 미소를 그리며 오른쪽 소매를 걷어 흘러내리지 않게 물었다, 턱을 타고 흐르는 침에도 개의치 않고 실성한 듯 웃음소리를 흘리며 사내─나일천은 허공에 드러난 어깨에 의수를 들이댔다. 원래 팔이 있어야 했던 자리, 그러나 지금은 텅 빈 자리에 불길한 묵빛 철완이 닿았다.
"으음, 큭! 크으으으윽! 쉽게, 크흐흐흐, 굴복하지느으으은! 않는다는 게로구나! 흐히히히, 그래! 그래야 서천의 이름이 아깝, 지 않지이이이이이이!!!"
고통의 비명과 열락의 탄성이 뒤섞인 절규가 흘러나왔다. 나일천은 마치 주인의 목을 노리듯 하는 의수를 제압하려 안간힘을 썼다. 어찌보면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핏발 선 눈으로 광소狂笑를 터뜨리는 지옥의 수라가 저리할까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우우웅──
몸 안을 울리는 공명음과 함께 의수가 갑작스레 축 늘어졌다. 그 모습에 나일천은 천천히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기리릭.
희미한 마찰음이 났지만 진짜 사람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신이 생각한대로 움직였다. 폭발적인 환희가 그의 가슴 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길고긴 인고의 세월은 끝이 났다. 때가 되었다. 그리 생각하며 나일천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너무나도 달콤할 복수의 열매를 수확하러 가는 순간이었다. 평생 기억에 남을 순간을 이런 엉망인 모습으로 남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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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몰아치겠네."
산중턱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소녀(?)는 습기를 머금은 거친 산바람에 펄럭이는 치마를 내리누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물기 어린 풀내음이 진동했다. 아무래도 요란하게 쏟아질 듯 했다. 구름의 두께와 색깔을 보아하니 천둥번개를 동반한 먹구름이 분명했다. 우르릉. 쿠르릉. 용이 꿈틀거리기라도 하는 것 마냥 하늘이 울렸다.
"류…… 아니 연비燕飛야! 빨래 걷어라! 폭풍우가 올 게다!"
"네에──."
등 뒤 작은 오두막에서 들려온 노사부의 목소리에 연비라 개명당한 것도 모자라 성별까지 일시적으로 박탈당한 소년 비류연은 불만스러운 듯 말끝을 늘리며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정녕 여아女兒가 투정하는 것이라 보았을 것이다. 고된 수련(?)의 성과였으나 본인은 그리 썩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저 어서 사부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어 이 세상에 하나 남은 유일한 혈육을 만나러 가고 싶을 뿐이었다.
"근데 빨래가 문제가 아니라 집이 문제가 아닐까요?"
조촐하나 단정하고 깔끔한 정자와 같던 오두막은 이미 옛말이었다. 무성하게 피어나는 잡초를 뽑고 하루종일 쓸고 닦던 이가 없어진 오두막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낡고 후줄근한 건물이 되어 있었다. 참혹한 풍경이었다. 오밤중에 보게 된다면 귀신이 사는 집으로 보일 것 같았다. 그런 상태로 폭풍우를 맞이하게 생겼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걱정은 혼자만의 것인 듯 했다.
"근성으로 버티면 돼!"
"……근성만 있으면 예산도 계획도 필요없는 것입니까?"
"엉!"
"……."
폭군에게 목숨 걸고 직언하는 신하와 같은 마음으로 한 항의는 묵살당했고, 이에 소년은 남몰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집에 없는 누이의 품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
창문 틈새로 파고드는 바람에 촛불이 흔들렸다. 그러나 치마에 수를 놓는 소녀의 손길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의자에 앉아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는 섬세하면서도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수를 놓는 모습은 엄격한 사대부 집안의 솜씨좋은 규방아씨처럼 보였다. 한 땀 한 땀 정성 가득한 손길에 보기만해도 화려한 꽃무늬가 마침내 완성되었다. 소녀─비류향은 이를 대 실을 끊은 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다 됐다."
"정말요?"
"응. 입어볼래?"
"네!"
옆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예린은 비류향이 건네준 옷을 받아들고 탈의실로 뛰어갔다.
"넘어진다, 조심해."
"네─!"
덜컹! 털컹! 미닫이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비류향은 기지개를 켜며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하나가 끝났다. 한 달 동안 틈틈히 천을 놀려 만든 옷을 과연 저 나이대 여아女兒가 기뻐해줄까. 지금이야 선물이라 그저 기뻐하지만 마음에 안 내키면 어찌할까. 그럼 다음 옷은 어떻게 지어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자투리천과 반짇고리를 정리하던 비류향의 귓가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
바람에 날려 부딪친 소리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번에는 좀 더 명확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똑똑똑똑똑똑.
"……."
분명 사람이 문 두드리는 소리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문 앞 호위무사들이 방문객이 누군지 알렸을 터였다. 나예린은 여전히 꺼려했지만 비류향은 이곳을 드나들면서 얼굴을 익힌 여무사들이었다. 힘든 일에 고생한다면 꿀떡이나 다과를 챙겨주니 금새 호의적인 관계가 된 이들이었는데 어째서인지 그네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번쩍───
창호지 너머로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창호지에 비치는 그림자는 하나였다. 호위 둘과 방문객 하나라면 셋이어야 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조심스레 문으로 다가가던 비류향은 갑작스레 발걸음을 멈췄다. 꺼림칙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
눅눅한 공기였다. 허나 단순히 비로 인한 눅눅함이 아니었다. 좀 더 비릿하고 끈적하게 달라붙는 냄새. 돌림병이 돌 때 질리도록 맡았던 냄새. 혈향血香.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사천 제일의 객잔에서, 부엌도 아닌 곳에서 혈향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비류향의 생각을 부정하듯 검붉은 액체가 문틈으로 천천히 흘러들어왔다. 혈향이 더욱 짙어졌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똑똑똑똑똑똑쾅쾅쾅!
"예린아! 숙부가 왔다! 문 좀 열어 보거라!"
그 소리를 들은 순간 비류향은 탈의실을 향해 달려갔다. 다급히 문을 열자 나예린이 때마침 옷을 모두 입은 참이었다.
"꺄, 아, 언니? 어때요? 후아, 놀랐,"
"도망쳐야 돼."
"아, 네? 언니? 무슨 일이에요?"
처음 보는 비류향의 다급한 모습에 나예린이 묻자, 비류향은 객실문 반대쪽 비상구로 소녀를 이끌며 대답했다.
"숙부님이 오셨어."
아무리 숙부님이라도 아버지나 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여기로 들어오실 수 없어요. 나예린은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죽 그래왔으니까. 몇 번이고 여기까지 찾아와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소녀가 이번에도 그러리라 믿고 입을 연 순간,
콰르르르르르릉!!!!
근처에 떨어진 것일까. 대낮이 된 것과도 같은 번쩍임과 동시에 엄청난 천둥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와 더불어 그것과는 다른 이질적인 파열음과 함께 부서진 문이 바람과 함께 객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혈향은 머금은 거센 비바람에 등 안의 촛불들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어이쿠, 문이 너무 약하구나. 하하하, 걱정 말거라. 내 나중에 친히 고치러 올 테니."
철퍽. 철퍽. 진득한 발소리와 함께 피투성이 사내가 걸어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나예린이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기 시작했다. 단순한 육신의 공포를 넘어 용안에 비치는 사내─나일천의 심상이 영혼에까지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인륜人倫을 거스르는 사악邪惡함. 도리道理를 벗어난 뒤틀린 욕정慾精. 분간 없는 짐승들조차도 하지 않을 끈적이는 어둠의 눈길. 지옥불에 뛰노는 악귀惡鬼가 저럴까.
비류향은 그런 나예린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완전히 막아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저것을 직시直示하는 것은 피하게 할 요량이었다. 그런 소녀들의 모습에 나일천은 광소했다.
"예린아! 숙부가 왔는데 인사는 해야지! 크하하하하하!"
쿠르르르르릉!
소녀들의 심상을 대변하듯 요란한 천둥번개가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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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을 연連은 리옌lián이고 제비 연燕은 옌Yān으로 중국어 발음이 다릅니다. 어차피 한국 무협지니까 굳이 중국어 발음 따를 필요도 없고, 시대에 따라 변화한 한중간 한자 발음 고증 같은 걸 따져봤자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테니 그냥 넘어갑시다. [...] 그래도 연꽃 연蓮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만.
- 2부를 제대로 못 보고 쓰고 있다보니 시간선이 마구 꼬이네요. 그래서 큰 흐름만 잡고 나머지는 그냥 재구성하기로 했습니다.
- 천겁령이니 서천이니 어쩌니 할 때마다 하늘 같은 그대라는 제목이 떠오르더군요. 노리고 지은 제목이 아니었는데. 이놈들, 하늘에 무슨 짓을 하려고!
- 교수님들은 언제나 학생들이 자기 수업만 듣는 줄 아시죠. 그런 고로 다음 주 수요일에 뵙겠습니다 여러분.
한자漢字, 오타,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4.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4.
"아, 잠깐만."
"……?"
비류향은 물음표를 띄우는 나예린을 놔두고 침상으로 되돌아갔다. 우선 손을 댄 것은 침상이었다. 마치 오랜 시간 이곳에서 일했던 사람처럼 침상 아래서 커다란 바구니를 꺼내고는, 능수능란하게 침상보와 이불깃, 그리고 배겟잇을 벗겨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거기에 더불어 옷장으로 가 한 켠에 들어가 있던 예비 포보布褓를 씌우는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주변까지 싹 쓸고닦았으면 했지만 아쉽게도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오늘은 일단 당장 잠을 잘 곳만 깨끗하면 되리라 판단한 비류향은 다시 나예린에게 돌아왔다.
"이제, 들어갈까?"
"……아, 네!"
손길이 닿으면 주름이 사라지고 칼 같은 각이 잡히는 침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예린은 어느 새 정리를 마친 비류향을 따라 욕탕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눈에 들어온 것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선반과 바구니, 그리고 잘 개어져 있는 수건 뭉치들이었다. 며칠 간 지내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던 나예린은 그곳이 탈의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면 부모님 외의 다른 사람에게 나신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덜컥 겁이 난 나예린은 무심코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평범하게 옷을 입 고 있어도 자신을 덮치려는 이들이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눈앞의 소녀는 그렇게 변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을까. 스멀스멀 피어오르은 불안감에 무심코 뒷걸음질치며 돌아보니 비류향은 벌써 겉옷을 벗고 내의內衣 옷고름에 손을 대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것일까.
"? ……아!"
비류향은 자신을 바라보는 나예린의 시선에 고개를 갸우뚱하다 이내 알았다는 듯 수건 뭉치에 다가가, 거기에서 제법 두터운 천뭉치를 하나 꺼내들어 나예린에게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은 나예린은 곧 뺨과 어깨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는 것을 느꼈다. 수건이었다. 망토처럼 두르니 허벅지까지 내려올 정도로 컸다.
"이러면 괜찮지?"
"……네."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자신이 바보 같아지는 순간이었다. 나예린은 망토처럼 두른 수건 아래서 벗은 옷을 바구니에 담았다. 비류향은 그러한 나예린에게 벗어둔 옷을 어떻게 정리해둬야 하는지와 더불어, 욕탕에서 양 팔을 자유롭게 움직이면서도 수건이 쉽사리 풀어지지 않게 몸에 두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보통 그러한 조언은 불쾌한 참견이나 쓸데없는 잔소리로 들리기 마련이지만, 나예린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압도적인 가사능력과 용안으로 보이는 티끌 하나 없는 순수한 선의 덕분에 그러한 부정적인 인상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나예린이 수건 아래서 옷을 벗기 위해 악전고투 하는 사이, 그와 비슷하나 다른 방식─겨드랑이 아래로 감싸 몸을 가리면서도 손이 자유로운 형태─으로 몸에 수건을 두른 비류향은 먼저 욕실에 들어왔다. 고급 나무로 만들어진 욕탕은 한동안 사람 손을 타지 못해 썩 깔끔하지 못했지만─어디까지나 비류향의 기준일 뿐이다─ 욕탕이라는 특성상 먼지 정도는 물로 가볍게 씻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닥이 미끄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우둘투둘한 대리석이라는 것도 장점이었다.
게다가 두발용과 신체용이 따로인 향유 섞인 고급 비누를 비롯한 각종 여성용품들이 친절하게도 그림을 포함한 목판 설명서와 함께 구비되어 있었다. 비류향은 남몰래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동생 비류연 덕분에 남아를 씻겨본 적은 많았지만─그것도 비류연의 머리가 굵어지면서 하지 않게 되었지만─ 여아를 씻겨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무엇이 필요한지 몰랐다. 저잣거리 아낙들에게 듣기는 했지만 원체 미용에 관심이 없었고 그렇기에 사치라 여겼던지라 흘려들었던 게 화근이었다. 이런 일이, 그러니까 다른 집 귀한 여식을 씻기게 될 줄 알았다면 귀담아 들었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객실 욕탕에 여성에게 필요한 세면도구가 구비되어 있다는 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자세한 구조는 알 수 없었지만 벽에 달린 수도꼭지의 손잡이를 돌리면 각각의 구멍에서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확인했다. 온溫과 냉冷 자가 새겨져 있었기에 손잡이를 잘못 돌려 화상을 입는 일은 없을 듯 했다.
몇몇 결점─어디까지나 비류향의 기준에서─이 보였지만 전체적으로는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렇게 점검을 마친 비류향은 앉은뱅이 의자와 바가지를 수도꼭지 앞에 두고 탈의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려준대로 겨드랑이 아래로 수건을 몸에 두른 체 문가에 기댄 나예린이 있었다. 조심스레 빼꼼히 얼굴만 내민 게 여전히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비류향이 손짓하자 천천히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그 뒤에 무릎을 꿇고 앉은 비류향은 손잡이를 비틀어 바가지에 적당한 온도의 물을 담으며 말했다.
"머리 감을 테니까 눈 감아줄래?"
"네."
쏴아아아─. 쌀 쏟아지는 것과 비슷한 소리와 함께 따스한 물줄기가 나예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어디 한 군데에만 맞지 않도록 골고루 뿌려지고 난 후 비류향의 손길과 함께 향긋한 비누거품이 일었다.
"으응……."
"아프니?"
"아, 아뇨……."
"아프면 얘기해 줘."
"네……. 후아……."
아프기는커녕 기분 좋은 손길이었다. 이마부터 뒷목까지 정수리와 관자놀이를 비롯한 혈도를 적절히 자극하면서도 두피가 상하지 않게 가감한 손길에 통증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머리카락 또한 우악스럽지 않은 손길로 쓸어내렸다. 무심코 기분 좋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헹굴게."
다시 한 번 따뜻한 온수가 쏟아졌다. 이번에는 처음과는 달리 좀 더 적은 양이 제법 오래 쏟아졌다. 그 동안 비류향의 손길이 나예린의 머리카락 구석구석의 비누거품을 깨끗하게 닦아내었다. 매한가지로 온유하고 애정이 가득한 손길이었다. 대체 얼마만에 느끼는 타인의 손길일까. 기억조차 없는 갓난아기 시절 이후로 이토록 정성스레 머리를 감아주는 사람은 비류향이 처음이었다.
"자, 이제 몸 씻어야지."
그리 말하며 비류향은 신체용이라 적힌 통에서 비누를 꺼내 반투명한 무명천을 물에 적신 뒤 문질렀다. 순식간에 몽글몽글 거품이 일었다. 머리를 감던 것과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향이 은은하게 피어났다. 충분한 거품이 일자 비류향은 우선 오른쪽 어깨부터 손 쪽으로 닦아내려갔다.
사악─ 사악─
거품과 함께 피부를 스쳐가는 무명천의 감촉은 그 특유의 거칠음이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시원했다. 반대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손길은 갑작스럽게 끊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의 손길이 없자 나예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난처하다는 듯한 미소가 보였다.
"수건, 벗어줄래?"
탈의실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비류향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과연 다른 의도는 없는 것일까. 일반적인 소녀라면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나예린은 일반적인 소녀가 아니었고, 일반적이지 못한 상황들 또한 몇 번이나 겪어온 경험자였다. 부모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마음을 연 상대건만 오랜 경험으로 만들어진 인간 불신이 반사적으로 소녀에게 용안을 활용하게 만들었다.
악의는 없었다.
진득한 음심淫心도 없었다.
무색투명한 호의만이 빛나고 있었다.
나예린은 그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며 천천히 수건을 풀었다. 가식 없는 순수한 호의조차도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없게 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머리를 감을 때 젖은 수건을 풀자 느껴진 서늘한 한기는 그러한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마음을 어루만지듯 비류향의 부드러운 손길이 나예린의 몸에 비누칠과 동시에 땀과 먼지를 씻어냈다.
"시원하니?"
"네."
"화장은 아니더라도 세안은 매일 해야지. 자, 눈 감고."
"네, 으우……."
"코 풀고. 흥!"
"흥!"
"귀도 잘 닦아야 돼. 이목구비가 깔끔해야 괜히 깔보이지 않아."
"아, 네."
"앞으로 세안 잘 하기. 약속?"
"약속할, 앗! 아으으……"
"어머, 눈에 비눗물 들어갔구나. 잠깐만. 잠깐만. 자, 얼른 세수해."
"어푸, 어푸……. 으으, 아직도 따가워요……"
"한 번 더 세안하자."
나예린이 바가지에 받은 물로 눈가를 씻는 동안 비류향은 자연스럽게 다른 부분을 씻기기 시작했다. 등을 밀고, 가슴과 배를 문지르고, 둔부와 고간을 거쳐 허벅지를 타고 발끝까지 씻어내리는 솜씨는 매우 신속정확하면서도 애정이 가득했다.
비류향은 나예린을 씻기며 생각했다. 아름답다. 미성숙한 신체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리고 아름다움을 느끼면 느낄 수록 애잔한 감정 역시 커져갔다. 저잣거리에서 부모의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혹은 군것질거리를 찾아 홀로 휘적휘적 다니는 동년배에 비하면 너무나도 야윈 몸이었다. 서시빈목西施嚬目이라 하여 모든 이들이 저 야윈 몸조차도 아름답게 보고 있었지만, 비류향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용안이라고 했던가. 삼라만상의 이치를 직시하고 한 길 조차 알 수 없다는 사람 속을 꿰뚫는 재능. 그것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있는 그대로의 악의와 욕망을 경험하며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을까. 자신에게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가능한 이 아이를 도와주자. 비류향은 그렇게 다짐했다.
"비눗기 씻어내자."
"네."
쏴아아아──
물줄기에 비누거품이 씻겨내려갔다. 양액兩腋과 고간股間처럼 물이 쉽사리 닿지 않아 거품이 남아있던 부분도 비류향의 손길이 닿자 순식간에 녹아내려 사라졌다. 민감한 부위기도 했거니와 모친이 아이를 씻기는 손길이 이러할까 싶을 정도로 다정하고 부드러워 괜시리 부끄러워진 나예린은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완벽히 깔끔하게 몸을 씻은 나예린은 가히 천상의 선녀와 같았다. 스스로 빛을 내는 것 같은 희고 깨끗한 피부. 황금 비율로 배치된 이목구비. 살짝 야위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신체. 그야말로 미의 화신.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씻으니까 더 예뻐졌구나."
"……감사합니다."
나예린은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렇게 인사했다. 예쁘다는 칭찬에 이토록 솔직하게 감사를 표한 건 자신이 기억하기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음욕이나 질시 같은 어두운 감정 없는 칭찬이라서 그럴까. 익숙치 않았지만 싫지 않은 기분이었다.
"몸 식는다. 탕에 들어가 있으렴."
비류향은 나예린의 젖은 머리를 작은 수건으로 감싸 올려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나예린에게 해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몸을 씻기 시작했다. 나예린은 어깨까지 몸을 담그며 처음 해보는 수건 말아올림 머리가 풀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심스럽게 매만져보았다. 신기했다. 어떻게 하면 고작 천 한 장으로 이렇게 단단하게 고정할 수 있는 걸까. 푸스스 풀어지려는 수건을 어찌어찌 다시 끼워넣고 문득 비류향을 바라보았다.
한창 성장기에는 한두 살 차이도 성장 차이가 있다지만 그것과는 다른 어른스러움이 깃든 뒷모습이었다. 소녀에서 여인이 되어가는 몸이 그리는 완만한 곡선과 더불어 산중생활로 붙은 근육 위로 덮인 여인 특유의 부드러운 살이 육체적 성숙미를 보여주었다. 행동거지는 자유분방하면서도 절제되어 있고, 언행이나 배려가 사대부의 예법과는 거리가 있으나 무례하지 않으니 정신적으로도 성숙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
그와 동시에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덧없어 보였다.
손을 뻗으면 흩어질 것 같은 안개 같은 흐릿함.
깊은 산 속 바닥까지 비쳐보이는 고요한 호수와도 같은 투명함.
그런 이율배반적인 감상이 나예린의 뇌리에 맴돌았다. 온수의 따스함이 몸에 스며들수록 그러한 인상은 선명해졌다. 문득 불안해졌다. 정말 저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저렇게 자애로운 심상과 형용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공존할 수 있는 걸까?
당장이라도 욕조에서 뛰쳐나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달려나가 손을 뻗었을 때 상대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면? 끌어안고 울었던 상대가 사실은 그 자리에 없었고, 침상을 정리하고 자신을 씻겨주던 이가 그저 자신의 상상 속의 존재였다면? 너무 힘들고 지쳐서 환상 속의 존재를 만들어 거기로 도피한 것이었다면?
사라락…….
기어코 수건이 풀어졌다.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수건이 시야를 가렸지만 도저히 그것을 치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걸 치우면 비류향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나홀로 이곳에 있는 게 아닐까. 그제서야 이 모든 게 꿈이었다고 깨닫게 되는 게 아닐까. 이질감에서 시작된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크기를 키워나갔다. 간신히 숨만 쉬며 물에 젖어들어가는 수건 끄트머리를 붙잡고만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기다려 봐. 다시 해줄게."
찰박찰박. 물 밟는 소리와 함께 타인의 손길이 수건을 들어올렸다. 비류향이었다. 순식간에 다시 수건을 휘감아 머리에 고정하는 솜씨는 만약 이것이 환상이고 사실 나예린 스스로의 손길이었다고 할 수 없는 경지였다.
"이제 됐다."
비류향은 그리 말하며 탕 안으로 들어와 벽에 닿아있는 후미진 구석 자리에 앉았다. 너댓 명이 들어가도 될 법하건만 굳이 그런 자리로 가는 게 비류향다웠다. 이대로 쪽잠을 자 두자. 그리 생각하며 벽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피로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천향루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평소와 같은 쪽잠도 들지 못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러나 곧바로 잠들 수는 없었다.
"……언니……."
"……응?"
나예린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탕의 온기와 피로 때문에 반응이 늦었지만 거기에 잠을 방해받았다는 불쾌함은 없었다. 다가가는 것도, 멀어지는 것도 아닌 애매한 거리에 선 나예린을 보며 비류향은 끈기있게 어린 소녀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언니는……. 환상이 아니죠?"
처음 입에 담아보는 단어─언니의 어감이 익숙치 않은 듯 머뭇거리던 나예린은 그렇게 물었다.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소녀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떤 대답을 해줘야 저 아이의 불안이 해소될까. 고민하던 비류향은 살포시 손짓했다. 이리 오렴. 망설이던 나예린은 이내 비류향에게 다가와 그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비류향은 둥지로 돌아온 아기새를 보듬듯 나예린을 꼭 껴안아주며 물었다.
"이렇게 끌어안고, 서로 대화하고 있는데 환상인 것 같니?"
"……아니면, 꿈이거나……."
갑작스레 찾아온 작은 행복이 과연 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온기와 감촉이 눈 감았다 떴을 때 사라질 일장춘몽이 아니라 단정지을 수 있을까. 혹은 그럴지언정 찰나의 환상에 용기를 얻어 세상에 맞설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두려웠다. 칠흑 같이 어둡고 늪처럼 질척이는 인세人世에 대항하기에 소녀는 너무나도 여렸다. 그런 소녀에게 어떻게 하면 믿음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비류향은 부드럽게 나예린의 머리를 기울여 가슴께에 귀를 대게 하였다.
"예린아."
"네……."
"심장소리가 들리니?"
"……네."
두근. 두근. 희미했던 고동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다. 그 사이로 자신의 고동 또한 들려왔다. 어느 새 두 사람의 고동이 조화를 이루며 울려퍼지자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감이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것에 쐐기를 박듯 나예린의 귓가에 비류향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나는 여기 있어. 곁에 있어."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토록 하기 위해서일까. 비류향은 더욱 힘을 주어 끌어안으며 그렇게 속삭였다. 나예린은 그 속삭임에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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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인 요리 실력을 따지자면 사부가 제일이고, 그 다음이 나며, 매우 아쉽게도 누나가 마지막이다. 물론 이것은 상대적인 평가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내공이라고는 씨알도 없는 누나에 비해 대놓고 무학武學의 묘리妙理와 공력을 아낌없이 쓰는 사부와 나를 도저히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분뢰수를 이용해 펄펄 끓는 기름 속이든 활활 타오르는 가마솥 안이든 맨손을 들이밀어 온도를 조절하며, 육안으로는 구분조차 하기 힘든 섬세한 결을 따라 재료를 갈라 본연의 맛에 손상을 주지 않는 칼솜씨에, 소금 알갱이 하나까지 조절하여 간을 맞추는 안력眼力을 가지고도 요리를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만.
어찌되었든 앞서 말했다시피 내 요리 실력은 분명 누나보다 앞선다. 이건 내 오만이나 맹신이 아니라 깐깐하기로 소문난 사부 역시 인정한 사실이다. 누나야 뭐, 나쁜 짓만 아니면 성장하는 걸 다 축하해주는 사람이라 되려 자랑스러워 하고 있고. 여튼 그렇게 맛있는데.
"으음……."
"아니, 사부님. 왜 그리 깨작거리십니까. 맛없으면 치울까요?"
"아, 맛있어. 맛있다니까."
그러고는 또 젓가락질을 하는 둥 마는 둥. 요리를 해본 사람은 내 심정을 잘 알 것이다. 기껏 차려줬더니 이거 집다 저거 집다, 이거 깨작 저거 깨작. 차라리 맛 없다고, 이러저러하니 입에 안 맞는다고 하면 나중에 이래저래 다른 찬거리를 준비하든 조리방식을 바꾸든 할 텐데 그것도 아니고. 누나가 이 오두막을 떠나고 나서부터 식사시간만 되면 이 모양 이 꼬라지다. 사흘 정도는 괜찮았지만 나흘 정도 지나고 나니 매일 이 모양이니 식사준비하기 정말 싫어진다. 그렇다고 때려치자니 사부의 주먹과 누나의 부탁 때문에 내던질 수도 없고.
그나마 깨작거리는 걸로 끝나면 다행이다. 어떨 때는.
"거 네놈 밥은 맛만 있지 흥취가 없어, 흥취가. 향이가 했던 밥 생각해봐라. 얼마나 좋으냐! 보기만해도 이게 '아, 이게 정말 정성이 흘러넘치는 밥상이구나!' 하는 수준이잖아! 요리하는 거 보기만 해도 배부를 정도로 정성이 가득하잖아! 술상 차리는 솜씨는 또 어떻고! 보기만 해도 그냥 취해! 흥이 돋아! 너도 그렇게 좀 해봐라!"
"에이, 사부님! 제가 얼마나 정성을 쏟아붓는데요! 사부가 그렇게 칭찬하는 누나가 제 상을 얼마나 칭찬하는지 모르시죠? 그런데도 왜 이리 핍박하십니까!"
"말했잖아! 정성이 부족하다고!"
"그렇게 정성 좋아하시는 분이 왜 평소에 누나가 해주겠다고 하면 죄다 손사래 치십니까!"
"그건 정성을 초월해서 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한다. 심지어는.
"너도 나이 들어봐라. 시커먼 남정네가 해준 밥보다 고운 처자가 해주는 밥이 더 좋지!"
"시커먼 남정네라뇨! 이토록 멋진 미소년에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망난 색골 영감 같은 소리를 하기도 하니 원. 대체 누나는 이 사부의 뭘 보고 공경해야할 사람이라며 정성을 쏟아붓는 걸까. 알 수가 없다.
그런 사부의 반찬투정과는 별개로 나 역시 누나 밥이 그립기는 하다. 누나의 요리는 일품이기는 해도 극상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다. 당장 시장에서 유명한 객잔에서 큰돈 주고 먹는 요리가 더 맛있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맛있는 요리라는 게 꼭 혀가 닿자마자 눈앞에 별이 날아다니고 천하가 내 안에서 살아움직이는 것 같은 환상을 봐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소박하지만 풍미가 있고 매일 같은 반찬이더라도 질리지 않는 요리 또한 맛있는 요리다.
고된 수련과 노동행위 나가기 전에 먹는 아침밥과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먹는 저녁밥의 행복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르리라. 하물며 그게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 정성스레 차려주는 상이라면 더더욱. 가슴에 스며드는 어머니의 맛이라는 게 이런 거겠지.
"하아……."
오늘로 보름째인가. 어디 있는지도 알겠다, 마음 같아서는 수련과 가계활동 모두 때려치고 찾아가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사부에게 묵사발이 될 테니 차마 그럴 수가 없다. 졸지에 생이별이라니. 무림에 피바람이 불어도 나라는 갈라지지 않았건만 어째서 우리 남매는 이리 살아야 하는 걸까. 게다가 그런 비극의 원흉에게 밥을 지어 바쳐야 하다니. 비극도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
이것 뿐만이 아니다. 최대한 사부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매우 적극적으로 누나를 만나러 갈 수 있느냐고 했더니 사부가 말하기를.
"그러고보니 금琴 수련도 해야지. 하는 김에 여장女裝도 하고."
"……네?"
이게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었건만 아무래도 사부는 진심인 듯 했다. 누나가 없어졌다고 그 자리에 여장한 소년을 채워넣고 싶으신 건가. 세상에 맙소사.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것은 사부의 자금계획의 일환일 뿐이었다. 남정네가 타는 금보다 미소녀가 타는 금이 훨씬 더 가치있으며 돈 벌기 쉽다는 것이었다. 무학의 묘리니 수련이니 하는 포장을 제거하면 딱 그거였다. 사부가 이상성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해야할지, 그 악랄한 자금탈취수법에 이를 갈아야할지 모르겠다.
그나마 이 여장수련을 마치면 누나를 보러 갈 수 있다는 게 위안이다. 그러기 위해 여성스러운 말투와 행동거지를 주입받으며 마음 속 무언가가 심히 깎여나가고 있는 느낌이지만. 괜찮다. 괜찮아. 이게 끝나면 누나를 볼 수 있으니까! 그거면 충분해!
"후우, 얼른 누나 보고 싶다……."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커다란 냄비와 국자를 절묘하게 휘둘러 볶아낸 밥을 그릇 위에 담았다. 복스럽게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사부님. 제발 얌전히 드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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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저는 누굽니까?"
"누구 말이냐?"
"거 린아璘兒 곁에 맨날 붙어있는 소저 말입니다."
"아, 비 소저 말인가. 내 예린이 말벗을 부탁한 아이야. 왜 그러느냐?"
정천맹주正天盟主 진천뇌벽검震天雷霹劍 나백천羅伯泉은 자신의 객실 앞에서 씩씩거리며 비류향이 누구냐 묻는 동생 나일천羅馹泉의 물음에 그리 되물었다. 이미 얼굴이 벌건 것을 보니 꽤나 술을 들이킨 듯 했다. 아직 해가 떨어지기에는 한참 시간이 남아있었건만 그러했다. 무심코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삼키고 있자니 나일천이 외쳤다.
"예린이 얼굴 좀 보러 갔더니 글쎄 대놓고 못 보게 막더이다! 형님이나 예린이 허락이 없으면 볼 수 없다면서요! 세상에 숙부가 조카 보는데 허가가 필요합니까!"
"……."
"'아이가 무서워하니 돌아가 주십시오. 아니면 맹주께 윤허를 받아오셨을 때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라니. 누가 보면 생판 남인 줄 알겠습니다! 예린이는 얼굴도 안 내밀고! 내 어릴 때 그토록 귀여워해줬거늘! 이리 문전박대라니!"
"……."
"이게 어찌 친지고 혈육입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침묵하는 나백천의 모습이 호응이라 생각한 것인지 나일천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그러나 너무 심하게 취했기 때문일까. 나일천은 친형의 눈이 매섭게 빛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허락 없이 아무도 예린이 숙소에 들어가지 마라고 했다."
"그야 그러시기는 했지만 친지 간에 굳이 그런 걸,"
"다시 한 번 말해야 알아들을 테냐."
"……."
서릿발 같은 형의 말에 나일천은 그제서야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동생을 노려보던 나백천은 축객령을 내렸다.
"내 이번 일은 취기로 인한 실수라 여길 테니 다음부터는 린아에게 함부러 가지 말거라."
"……흥. 팔병신 동생보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계집이 린아 옆에 있는 게 더 안심되십니까?"
"일천!"
나백천의 노호에 움찔한 나일천은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체 거칠게 몸을 돌려 사라졌다. 필시 또 술을 들이키리라. 피를 나눈 동생의 모습에 나백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비류향의 말이 떠올랐다.
『 이는 무례無禮로 형제간을 이간질함과 다름이 없는 죄악罪惡이나 감히 말씀드립니다. 예린이가 말하길 숙부의 마음에 큰 어둠이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두렵다 하였습니다. 부디 다가오지 않도록 살펴주십시오. 』
비류향이라는 소녀가 하기에는 제법 거친 말이었다. 그 자리에서는 형식상으로만 비류향을 꾸짖었으나 말 그대로 형식적일 뿐이었다. 딸을 바라보는 동생의 눈길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나백천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결혼도 하지 않아 자식도 없어 조카인 나예린을 특히 귀여워하는 것으로 여겼으나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딸인 나예린이 나일천을 꺼리는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혈육이었다. 거기에 정천맹 부총령으로서도 무난하게 일을 하며 자신을 도와주는 동생이었다. 언제까지고 강제로 밀어낼 수는 없었다.
"어렵구나, 어려워. 인사人事는 언제나 어려워……."
나백천은 탄식을 내뱉으며 객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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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이 목욕장면을 저리 길게 썼어야 했나 싶었지만, 마음 가는대로 타자를 두드렸기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
- 이제사 2부를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어 내용 수정이 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3화에서 비류향이 오두막 떠날 때 호위虎衛 관련 내용이 수정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 궁뢰신전 보고 싶네요 [?]
한자漢字, 오타,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3.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3.
나물과 고기를 자급자족하더라도 사람 사는 데에는 부족한 물건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물며 무공과는 연이 없는 여아도 함께 사는 집이니 정기적으로 장을 보는 게 당연했다. 그렇기에 노사부는
비류향이 시장에 다녀오는 것을 막지 않았고, 돈을 달라고 할 때도 망설임 없이 쥐어주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온갖
이유를 들어 거부하였으나, 귀찮은 일거리 시킬 요량으로 한두 번 허락해주다보니 매우 편해져서 아예 가계家計를 맡기게 된 것이다.
어차피 비류향이 사오는 건 전부 집안살림에 보탬이 되는 것들이었고, 헛돈은커녕 결코 자신을 위해 쓰는 일이 없는 비류향의
경제관념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저잣거리에 널리고 널린 군것질거리며 그 나이대 소녀라면 눈이 돌아갈 화장품과 장신구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물건값은 결코 부풀리거나 축소시키는 일이 없으니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육체의 편리와는 별개로 심적 부담은 한없이
늘어갔지만.
그런 고로 장에서 돌아온 비류향이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며 한동안 출가를 요청해왔을 때 노사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드디어 자유로운 생활이! 근심없는 일상이! 춤이라도 추고 싶은 감정을 애써 감추며 노사부는 짐짓 근엄한
얼굴로 물었다.
"넌 어찌하고 싶으냐?"
"……노야께서 윤허하신다면 다녀오고자 합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본래 제 일이라면 한사코 거절하고 원하는 것은 어디 도망치지 못하게 붙들고 늘어져야 간신히 입에 담는 게 비류향이라는
소녀였다. 어차피 허락할 테지만 어째서 가고 싶어하는지 본심이 듣고 싶어졌기에 노사부는 슬그머니 캐물어보기로 했다.
"평생토록 은혜갚기로 한 말은 벌써 잊은 게로구나?"
"어찌 그것을 잊겠습니까. 모시지 못하는 날만큼 더욱 보은할 것입니다."
"흠, 네 여태껏 해 온 정성이 있으니 일단은 믿겠다만……."
그 말에 무언가를 자극받은 것일까. 비류향이 당황한 듯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괜한 말로 노야께 심려를 끼쳐 송구합니다. 이 일은 없던 일로,"
"아니, 아니다! 어흠! 아직 말을 끝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짐
짓 내키지 않는 듯한 노사부의 태도에 비류향이 곧바로 없었던 일로 만들려고 하자, 노사부는 황급히 비류향의 말을 끊었다.
위험했다. 대나무가 가볍고 단단하여 가공하기 쉬워보여도 되려 그 대쪽 같음에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하게 하여 일을 어렵게 하듯,
올곧고 진솔한 비류향의 성품을 가볍게 생각했다가 일을 그르치게 만들 뻔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노사부가 질문을
이어나갔다.
"정천맹주正天盟主의 여식이 용안龍眼인 것과 네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모르면서 가겠다는 것이냐."
"정천맹주 같은 이가 만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은 여아에게 청을 한다면 연유가 있으리라 짐작만 할 뿐입니다."
"용안이 무엇인 줄 아느냐?"
"모릅니다."
"
물줄기 하나 만으로도 세상 흐름을 읽는 신안神眼이요, 손짓 하나만으로도 심상心想을 꿰뚫는 마안魔眼이다. 범인凡人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어찌보면 애비인 정천맹주보다 더 위험한 것일 수도 있어. 맹주조차도 힘든데 용안까지 네 일신一身만으로 감당해야
한다. 돌봐줄 이가 하나도 없어. 사지死地로 가는 길일 수도 있단 말이다. 그럼에도 가고 싶으냐?"
"……예."
"허허……."
고작 반나절 본 이의 부탁에 무엇이 있길래. 노사부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질문을 던졌다.
"정천맹주라는 감투의 향기에 취했느냐?"
"아닙니다."
즉답이었다. 그러나 이는 흉계凶計를 지적당한 소인배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렇기에 뒤이어진 비류향의 말은 얄팍한 변명이 아니었다.
"
소녀가 배운 것은 없으나 일신의 영달을 위해 보은하지 않음은 사람답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물며 권세의 향기가 아무리
달콤하여도 쉬이 상하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아비가 여식을 생각하여 미천한 여아에게 청을 한 것이니 응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아비의 청이라……."
그렇군. 그런 것이었나. 노사부는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친先親이 생각난 게냐."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자
기 딴에는 애써 숨긴다고 했지만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게 뭐 대수라고 숨기는가 싶었지만 본인이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걸 알기에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노사부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양친 잃은 소녀가 무슨 마음으로 그리 하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허나 부모들이 아이를 위해서라며 부탁하면 어지간한 건 다 들어주고, 저잣거리에서 자기 부모 손을 잡고, 품에 안겨
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빛에 아련함이 깃들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정천맹주의 여식 생각이 지극했나보군. 노사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비류향이 이렇게까지 움직일 리가 없었다. 무인武人의, 그곳도 정천맹주 정도 되는 자의
심후함이라면 사욕을 위해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내공이 없는 비류향에게는 그러한 사술邪術은 통하지 않는다.
어쨌든 이만하면 체면치레는 한 셈이다. 그렇기에 노사부는 깊게 한숨을 내쉬는 척 하고는 입을 열었다.
"천향루라 하였느냐."
"예."
"다녀오거라."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언제 돌아오든 상관 없다. 아니,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깊이 고개를 숙이던 비류향의 몸이 멈칫했다. 역시 내키지 않으시는 걸까. 아아, 미련한 향아. 어찌 네 욕심을 우선하여 은인의 심기를 불편케 한단 말이더냐. 그런 생각으로 굳어버린 소녀에게 노사부가 말했다.
"무학도, 깨달음도 없는 여아가 세상에 나가면 천하 험사險事와 다망多忙한 인과因過에 얽메일 것이다. 그 모든 것에 네 스스로 매듭結을 짓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거라."
"……노야의 금언金言, 삼가 받들겠나이다."
이
모자란 여아의 짧은 출가出家에도 금과 같은 참眞된 말씀을 내려주시는구나. 과연 은인이로다. 비류향은 흘러넘치는 감사의 마음으로
바닥에 이마가 닿게 큰절을 올렸다. 심히 부담스러운 광경이었지만 노사부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갈 아이다. 저 성품으로 분명
바깥에서 덕을 쌓아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않을 아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이틑 날 아침, 짐을 꾸린 비류향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노사부와 비류연의 식기를 정리한 후 오두막을 나섰다.
"몸조심하고. 스승님 말씀 잘 듣고. 알겠지?"
"안다니까. 누나는 내가 무슨 앤 줄 알아."
"구순 노모가 칠순 아들을 걱정하는 법이야."
네
가 천하제일인이 되어도 매사에 조심하라 하겠지. 그렇게 말하며 비류향은 동생을 품에 안았다. 어머니보다 더 많이 안긴 누이의 품
안에서 비류연은 머뭇거리다 이내 마찬가지로 누이를 꼭 끌어안았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온 남매다. 짧다고
해도 헤어짐에 아쉬움이 없을 리가 없었다.
"……누나도 몸조심해."
"응."
천천히 동생을 떼어놓은 비류향은 노사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옥체 보전하십시오."
"그래."
그렇게 두 노소老少를 뒤로 한 체 비류향은 떠났다. 그 곁으로 어느 새 말 만한 백호白虎 한 마리가 나타나 소녀를 지키듯 따라 걸었다. 노사부가 나물 캐러 산에 갈 때 데려가라며 붙여준 호위虎衛였다. 그르렁거리며 비류향의 손길에 머리를 부비는 품새는 저잣거리 고양이 같았으나 범인凡人이라면 울음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릴 만한 산왕山王의 기운이 품고 있으니 영물靈物이 틀림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백호는 아미산 인근은 물론 사천땅 전역에 소문만 무성한 백무후白武后의 직속인 팔섬풍八閃風 중 한 마리였다. 어지간한 무림 고수도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강하건만 정작 영물 취급해주는 이는, 정확하게 말해서 그나마 대우해주는 이는 비류향 하나 뿐, 노사부와 비류연에게는 그저 소녀에게 도움이 되는 좀 센 고양이 취급이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비류향의 영물 취급 역시 털 빗어주기와 벌레 떼어주기 같은 수준인지라 큰 차이는 없었지만 이게 의외로 호평인지라 팔섬풍 중에서도 가끔씩 순번(?)을 바꾸기 위해 싸우는 일이 있었다.
어찌되었든 비류연은 무언가에 홀린 것마냥 멍하니 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뒤의 노사부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뺨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자유다! 오오, 이 얼마나 달콤한 울림인가! 자유! 오오, 자유, 오오! 광희난무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비류연이 있었기에 참았다. 그러나 환희에 잠식된 육신은 이미 앞으로 펼쳐질 무릉도원에 반응하여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 노사부는 그러했던 자신의 모습에 후회하게 된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비류향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한탄하게 되지만, 어찌되었든 훗날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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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천四川 땅은 산세가 험하고 변두리에 있어 발달하지 못했다는 얘기는 되려 무식한 촌부나 하는 말이다. 되려 그 험한 산세와
원지遠地의 이치로 외적으로부터 수많은 학사와 경전을 지키고, 촉한대에는 승상인 제갈공명을 필두로 한 사영四英의 활약으로 법규가
지켜지고 물자가 풍부해지니 낙양과 북경이 부럽지 않은 땅이 바로 사천 땅이다.
그런 사천성에서 천향루는 특히나 이름
높은 기루로 유명하였다. 화려함과 정갈함을 고루 갖춘 객실에 수준 높은 악공樂工과 가무인歌舞人이 상시하며, 향이 강하기로 소문한
사천요리를 누구나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도록 조리하여 온갖 미주味酒와 함께 나오니 한 번이라도 들른 이들의 칭송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천향루 후원의 한 고급 객실은 널리 알려진 천향루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원래는 아기자기한
침상과 호화로운 장식들이 돋보였을 객실은, 태양이 중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침침해서 윤곽만 겨우 잡힐 뿐이었다. 이는 창문을
모조리 닫은 것도 모자라 그 위로 검은 천을 덧씌워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상喪중인 것마냥 칙칙한 분위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
인공적인 어둠 속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그야말로 실낱같은 빛줄기 밖에 없는
공간이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부드럽고 은은하게 빛나는 백옥 같이 하얀 피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만큼 정교한 비율의 이목구비. 그리고 소녀가 있는 어둠과도 같지만, 공허한 그것과는 다르게 신묘한 마력이 담긴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가 매혹적인, 누구라도 보게 된다면 한눈에 마음을 빼앗길 만큼 아름다운 소녀였다.
허나 침상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소녀의 표정은 무미건조했고 눈동자는 생기 없이 흐릿했다.
"……."
초점 없는 눈동자는 창문 너머, 자투리가 살짝 떨어진 검은 천 틈새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란 하늘이었다. 너무나도 맑고 아름다운 하늘. 그러나 닿지 않는, 가질 수 없는 하늘. 그 하늘이 소녀의 마음에 파문을 그렸다.
사람의 마음은 어찌 저러지 못할까.
아
름다운 미색과 더불어 소녀에게는 용안龍眼이라는 능력이 있었다. 상대의 마음 속 단편을 읽어내는 이 능력은 만약 소녀가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나 난세에 천하패업을 도모하는 영웅이었다면, 여인의 몸으로도 능히 삼황오제의 뒤를 잇거나 창업군주로 이름을 떨치게
하는 힘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어린아이가 아무런 단련 없이 있는 그대로의 인심지욕人心之慾을 그대로 접하면
어찌 되겠는가. 그 독기에 쐬일 때마다 소녀는 며칠이고 앓아누워야 했다. 빼어난 미모로 인한 수십 번의 납치 역시 소녀의 심력을
갉아먹어왔다. 게다가 그때마다 접하게 되는 사람들의 심저心底에 들끓는 악독惡毒이란.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소녀는 더더욱 사람을 기피하게 시작했다. 부모님과 함께 도망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소녀의
아버지는 정천맹주라는 직급을 가진 절정의 무인인지라 쉽사리 은거할 수 없는 몸이었다. 맹주의 권세와 일신의 무공 덕분에 딸을
지키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소녀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 마음 놓을 곳은 없는 걸까.
그러한 생각에 소녀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린아, 들어가마."
"……네."
아
버지의 질문에 소녀는 침묵 속에 가라앉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집에 계신 어머니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아버지였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파란 하늘빛과 함께 아버지인 정천맹주 나백천이 들어왔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소녀는 곧
아버지와 함께 들어온 그 시리도록 투명하고 따스한 푸른빛이 하늘빛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화려함이 없는
옷가지였다. 오랜 세월 입어온 듯 헤지고 닳아 천을 덧대거나 수를 놓은 부분도 보였다. 그러나 품새가 단정했고, 덧대거나 수 놓은
솜씨도 상당하여 거슬리지 않았다. 그 나이대 여인이라면 으레 할 장신구도 체면치레할 정도만 겨우 달고 있었으나 그로 인해 더욱더
단정하고 고아한 인상이었다.
천상의 미를 가진 소녀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이는 단순한 외적인 미가 아니었다. 용안으로 보이는 찬란한 심상心相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저 하늘 선녀들이 이러할까. 그런 생각이 소녀의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하
늘빛의 여인은 나백천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다가왔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나백천이 경악했으나 이미 소녀의 눈에는 그 모습이 들어오지 않았다. 한 장丈 정도 거리를 두고 소녀와 여인은 서로를
마주보며 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여인이었다.
"안녕. 난 비류향이야. 너는?"
"……예린…… 나예린羅叡璘이에요……."
오
랜 시간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투명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범인凡人들이었다면 이미
소녀─나예린의 모습과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여인은, 비류향은 그저 생긋 웃을 뿐이었다.
"예쁜 이름이네. 예쁜 얼굴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그
것 뿐이었다. 시기와 질투도 아닌, 집착과 음욕도 아닌 순수한 칭찬. 그 모습에 나예린은 천천히 비류향에게 다가가 그 품에
파고들었다. 결코 손에 닿지 않으리라 여겼던 청천淸天에 닿은 안도감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비류향은 처음 보는 아이가 자신을 붙들고
울기 시작하자 당황하였지만 이내 말없이 나예린을 끌어안아주었다.
한여름 나무 그늘 아래서 맞이하는 산바람의 상쾌함.
한겨울 바람막이 돌담 안에서 쬐는 햇살의 따스함.
청명한 햇살을 머금은 이불에서 느낄 수 있는 포근함.
그것이 나예린이 기억하는 비류향의 첫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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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옷자락을 꼭 쥔 손을 떼어내는데 조금 애를 먹기는 했지만, 울다 지쳐 잠이 든 나예린을 침상이 뉘인 후
나백천과 비류향은 천향루 후원 다정茶停으로 향했다. 사천 제일 기루라는 명성에 걸맞는 화려한 후원에는 이미 몇몇 선객들이 있었으나
빈 자리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고맙구나."
향이 피어오르는 차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인 나백천이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비류향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대인大人께 감사를 받겠습니까."
"아니야. 그 아이가 저토록 평온하게 자는 걸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그게 네 덕분인데 어찌 아비로서 감사하지 않겠느냐."
"어린 동생이 있어 달래는 게 익숙할 뿐입니다. 그런 일로 어찌……."
"그런 일조차 불가능했던 아이였거든."
나백천은 찻잔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용안龍眼. 삼라만상을 꿰뚫고 심저心底를 투시透示하는 조물주의 눈. 득의得意한 자가 얻을 수 있는 눈. 그걸 타고난 아이야.. 보지 말아야 할 것도, 봐선 안 될 것도,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모두 보이는 기분이 어떨 것 같으냐."
"……끔찍하겠지요."
"그래. 고행자苦行者도 쉽지 않을 심마心魔를 저 어린 것이, 그것도 자신의 것조차 아닌 심마와 접하며 괴로워해. 그런데 아비라는 자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어. 아무 것도 못하고,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
과
거의 고통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나백천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지금 그 순간만큼은 최고의 권세를 자랑하는 정천맹주도,
지고한 무공을 자랑하는 고수도 아니었다. 자식의 고통에 무력함을 느끼는 한 사람의 아버지일 뿐이었다. 그 마음을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비류향 역시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와병臥病. 부모의 무조건적인 자애慈愛에서 오는
고통에 비하면 보잘 것 없겠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이들이 괴로워하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데에서 오는 무력감이 얼마나
고통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스스로 다가간 이가 바로 너다. 부모를 대하듯 마음을 놓았어. 그러니 어찌 내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고맙다."
그렇게 말하며 나백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비류향 역시 황급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과분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아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감사를 받겠습니까."
"말했잖느냐. 예린이가 안심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야 노부의 마음이 편해지니 받아다오."
"……알겠습니다."
얼마 없는 객인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두 사람은 그제서야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찻잔을 비우고, 다시 채운 찻잔을 반 정도 비웠을 즈음 나백천이 물었다.
"기인께서 얼마나 말미를 주셨느냐."
"만사에 스스로 매듭을 짓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매듭結이라……."
인연에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는 법인데 매듭을 입에 담으셨다. 마치 제천대성에게 부처님 손바닥에서 벗어나보라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불가해한 말에 나백천이 다른 것을 물었다.
"또다른 말씀은 없었느냐."
"'갓 쓴 선비 곁에 사람을 두고 파란 원을 전하노라.' 이러면 아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 그렇군. 허허……."
"아시겠습니까?"
"그래. 잘 알았다. 참으로 대인大人이시구나……."
갓
쓴 선비壬 곁에 사람亻을 두겠다는 것은 임任이다. 파란 원은 청靑이고 이를 글이 아닌 말言로 전하니 청請이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인연에 매듭을 논하시며 임 자와 청 자를 전함은 눈앞의 소녀를 자신에게 부탁하겠다는 뜻이리라. 용안자龍眼者와의
인연은 사람의 힘으로 끊을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스스로 인연을 끊어 이토록 성정이 곧고 맑은 아이를 보내시다니. 나백천은 노사부의
배려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노사부가 자유를 원하며 한 짓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체.
"앞으로 필요한 것이 있거든 언제든지 말하거라."
"예. 허나 말씀만으로도 족합니다."
"어려워하지 말거라. 이는 대인께 보은하기 위함이기도 하니 너무 거절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 뒤로는 조용한 다도의 시간만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주전자와 찻잔이 모두 비워지자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린이를 잘 부탁하마."
"여부가 있겠습니까."
두 사람의 모습에 호기심이 동한 이들이 은근슬쩍 뒤를 따르려 했으나, 슬그머니 눈에 힘을 주어 바라보는 나백천을 보고는 모두 움찔하며 되돌아갔다.
#####
나
예린이 있는 객실로 돌아온 비류향은 고민하다 결심한 듯 창가의 검은 천들을 모조리 떼어냈다. 단단히 고정된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녀의 힘으로도 간단히 떨어졌다. 따스한 노을빛이 창호지를 빛내 방 안이 은은하게 빛났다. 아예 창문을 열어 환기까지 시킬까
했지만 나예린을 떠올린 비류향은 손길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물
론 이는 비류향의 개인적인 감상이었다. 이름 높은 천향루의 객실답게 정돈된 상태는 양호했으나 나예린이 입실하고 며칠 간 아무도
들어가지 못해 청소되지 않은 객실은 먼지투성이였다. 나예린이 누워있는 침상 역시 살짝만 건드려도 먼지가 풀풀 날릴 듯 싶었다.
허름한 오두막을 신선이 기거하는 도원처럼 보일 정도로 부지런히 청소하며 살아온 비류향에게는 끔찍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구세요?"
잔
뜩 겁먹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비류향은 침상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눈을 뜬 나예린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익숙한 어둠이 아닌 빛이 보여서일까. 아니면 낯선 이가 있어서일까.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른다. 허나 한두 시진 전에 보지
않았던가. 무심코 하늘을 보며 시간을 파악하려 했던 비류향은 그제서야 자신이 역광의 위치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법도 하구나. 비류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였다.
"기억하니? 비류향이라고 했는데."
"……아, 아아!"
나
예린은 언제 두려워 했었냐는 듯 침상을 박차고 일어나 비류향에게 달려왔다. 비류향은 갓 태어난 아기 사슴마냥 넘어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다가온 어린 소녀를 붙잡아 주었다. 나예린은 홀린 듯한 눈으로 천천히 손을 뻗어 비류향의 뺨에 닿았다.
"꿈이, 아니었어……."
"꿈이길 바랐니?"
"아뇨……. 꿈이 아니었으면 했어요……. 정말로…… 꿈이 아니었어……."
나
예린이 멍하니 자신을 보는 동안 비류향 역시 천천히 나예린을 살펴보았다. 아름다웠다. 대체 누가 이 소녀가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며
몸단장 한 번 안했다 할 수 있을까. 백옥 같은 피부와 청명한 밤하늘과도 같은 눈동자가 어찌 울다 지쳐 잠들었던 이의 것일 수
있단 말인가. 허나 비류향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야위었구나."
나예린과
마찬가지로, 그보다 더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얼굴의 눈물 자국을 닦아내었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 수더분한 곳들이 눈에
들어왔다. 폭력적일 정도로 압도적인 미색은 그것조차도 미용구가 되게 하였으나 보통 아이었다면 꾀죄죄한 몰골이었으리라. 넘어지지
않게 붙잡은 팔 역시 동년배 아이들보다 가늘었다. 정천맹주의 자식이 먹을 게 없어 굶지는 않았을 테니 마음고생이 심해 쉽사리 먹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안타까움에 마음이 저려왔다. 나예린은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우섯 씻어야지."
"……네."
고
급 객실이라 뜨거운 물이 상시 나오는 욕탕이 따로 구비되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용탕으로 가야했을 텐데 남녀
구분없이 홀리는 나예린의 미모를 생각하면 어불성설이었다. 그렇다고 물지게로 퍼나르기에는 너무 번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렸으리라.
아무래도 나백천이 여식을 위해 일부러 이 방을 잡은 듯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비류향은 나예린을 이끌고 욕탕으로 향했다.
#####
- 목욕장면은 다음 화에(?)
-
나예린이 비류연보다 한 살 더 많았네요. 어찌할까 하다가 이게 정확히 1년인지 어떤지 모르고, 비류연이 아이답게 조금이라도 더
어른이고 싶어해서 열 두 살이라고 하는 걸로 했습니다. 타입문넷 이르실렌 님 감사합니다. 덤으로 이름도 물 이을 연沇이 아니라
이을 연連이군요. 이 놈, 출판물에서 이름을 바꾸다니……. 타입문넷 라이티르 님 감사합니다.
- 비뢰도 옛날에 보고, 군대서 재탕하고 그게 다 1부만이라 헤매고 있습니다. 시간 들여 2부도 봐야 하는데 시간이 영…….
- Crimsoneyes님께는. 지원그림. 언제나. 항상.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네. 정말로요. 하하하하하핳하하하하핳하하하!!!
한자漢字, 오타, 설정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하늘과도 같은 그대 0~2화
살짝 찬바람이 불었다. 그래봤자 몸이 축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때에 맞지 않는 찬바람은 비류연에게 누군가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당신보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당신보다 아름다운 사람이요."
나예린의 물음에 비류연은 선문답 같은 대답을 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며 이맛살을 찌푸렸을 테지만, 나예린은 잠시 고민하더니 답을 내놓았다.
"어머님 생각이군요."
"아쉽네요. 아니에요. 하지만 비슷했어요."
"그럼 누이로군요."
"맞아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두 사람 중 하나에요."
"당신이 무서워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다는 게 신기하군요."
비류연은 나예린의 말에 고개를 으쓱했다. "그럴 만한 사람들이니까요." 그리고는 하늘을 보며 말을 이었다.
"뭐 한쪽은 너무 괴팍해서 그냥 무섭다고 해두는 거고, 누님은, 음. 누님은 말 그대로 무서워요. 앞서 말한 괴팍한 양반도 무서워할 정도니까요."
"엄한 분이신가요?"
"아뇨."
비류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세상천지에 누님만큼 다정한 사람도 없을 걸요."
#####
"누나, 나 머리 아파……."
꾀
병을 부려보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건 노사부의 수련을 빙자한 집안일과 잡무가 너무 힘들고 귀찮아서였다. 기실 노사부의 수련은 비록
미력하게나마 내공이 있다한들 태어난지 이제 열두 해를 겨우 넘긴 사내아이가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칠고 힘들었으니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했다. 이전에도 몇 번 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노사부 앞에서였고, 그러한 행위는 너무나도 쉽게 간파되어 더욱더 힘들어질
뿐이었다.
허나 이번에는 노사부가 잠시 출타하여 누이 밖에 없었고, 날씨도 쾌청하니 도저히 수련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어린 비류연은 최대한 몸을 놀려 몸에 열을 내고─노사부에게 배운 약초학으로 잠시 몸에 열이 더 나게 하는 약초도 몇 개
주워먹었다─, 흙먼지도 약간 들이마셔 콧물과 기침이 나게 한 뒤, 누이에게 가서 최대한 몽롱한 시선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저 잠시
방에 드러누워 쉬다가 저녁 때쯤 되면 다 나았다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이의 반응은 비류연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무슨 일이…… 세상에, 연아 너 왜 그래. 몸이 왜 불덩이야. 아침에는 멀쩡하더니 대체……"
이마는 물론 몸 여기저기 상태를 보던 누이는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뭔가를 고민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되려 비류연이 놀랄 정도였다.
"너 혹시 속 울렁거려?"
"어, 어? 어, 조금……."
"눈앞이 빙빙 돌아? 땅이 막 너한테 달려드는 것 같아?"
"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목은? 목 많이 타? 막 찢어지는 것 같고 그래?"
"응. 목말라."
흙
먼지를 들이켰으니 목이 안 마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비류연의 대답에 누이는 더더욱 얼굴이 새햐애지더니, 입술까지 파르라니 떨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 뭐라 할 새도 없이 누이는 어린 비류연을 방으로 데려가 이불 위에 눕히고는 양동이와 물수건으로 열심히 열을
내리려고 했다. 이쯤 되자 양심에 찔린 비류연은 이게 꾀병이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그 어린 눈으로도 너무나도 절박해보이는 누이의
모습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래서 에둘러 사부가 시킨 장작패기와 빨래를 입에 담았으나,
"그거 전부 다 누나가 할 테니까 그냥 누워있어. 물 많이 마시고. 소금도 좀 물고."
누
이가 당장이라도 비류연이 어찌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절대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양동이 물을 한 번
간 후에, 장작패기와 빨래를 하고 온다며 방을 나섰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자 비류연은 어찌해야될 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허나 약초로 인한 열로 정말로 정신이 몽롱해지며 의식이 흐려지다 이내 잠이 들게 되었다.
잠에서 깼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곁에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린 노사부와 근심걱정 가득한 누이가 있었다. 아, 망했구나. 그
생각이 들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비류연은 최대한 힘든 척하며 누이를 불렀다.
"누나……."
"그래 연아, 누나 여깄어."
누이의 손이 비류연의 손을 잡았다. 비록 스스로 열을 내고자 주워먹은 약초 때문이라고는 하나 열이 나는 몸에 서늘한 누이의 손이 닿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 기분은 곧바로 이어진 노사부의 말에 산산조각났다.
"음, 심각하군."
"노야老爺. 어찌하면 좋습니까."
"탕약을 먹이고, 그 뒤는 지켜봐야지."
"그 말씀은……."
"이 놈이 이겨내길 바라야지."
노
사부의 말에 누이는 말없이 비류연의 손을 꼭 쥐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비류연은 그렇게 누이가 보지 못하는 동안 노사부가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망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
"안 먹을래……."
"안돼. 어서 먹어. 투정 부리지 말고."
누
이는 평소와는 달리 엄한 말투로 약사발을 비류연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잠시 실랑이를 벌였지만 결국 비류연은 약사발을 들이켜야
했다. 누이의 등 뒤에서 눈을 번뜩이는 노사부의 모습을 본 순간 모든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류연은 정말로 이틀 동안 앓아누워야 했다.
온
몸의 뼈란 뼈는 전부 송곳으로 쑤시고 얼음물을 들이붓는 것처럼 시렸고, 살이란 살은 당장이라도 형체를 잃고 뭉개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머리는 쉼없이 망치로 뒷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았고,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몸 안의 공력은 운기조식이나 혈로와는 관계없이 제멋대로 온 몸을 완전히 헤집어놓았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비류연은 신음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렇게 이틀째 밤이 되었을 때에는, 처음 꾀병을 부릴 때 정도로 미약한 열만 남은
상태가 되어있었다. 동시에 청량한 개운함이 느껴졌지만, 이틀 간 앓으면서 체력이 사라졌는지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나른했다. 누군가가 손을 잡는 걸 느낀 건 그때였다.
"연아."
나지막한 목소리. 세상천지에 하나 밖에 남지 않은 혈육의 목소리. 언제나 다정하고 따스한 목소리. 나의 누이의 목소리.
"연아."
물수건을 갈면서 서늘해진 손길이 기분 좋았다. 똑같이 잡아주고 싶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서 나아라, 연아. 어서 나아라. 제발. 제발……. ……제발……."
잦아드는 누이의 목소리에 비류연은 서서히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누이의 얼굴 윤곽이, 그리고 투명하게 빛나는 눈물이── 눈물?
"나 혼자 두고 가지 말아줘……. 너마저도 가면, 난, 나는 어쩌니……. 나 홀로 두고 가지 마라 연아……."
행여나 동생이 깰까봐 숨죽여가며 우는 누이의 모습에 비류연은 등줄기에 번개가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어
릴 적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일을 관장하던 누이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던 누이였다. 돌림병으로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사람들 모두가 죽어가면서도 결코 울지 않던 누이였다. 해실해실 웃으며 태양처럼 밝게 빛나던 누이였다. 그런 누이가 울고
있었다. 그것도 마치 죄인인양 숨죽여가며. 어린 동생에게 죽지 말아달라며 울고 있었다.
그제서야 누이가 언제나 자기
앞에서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는 걸 깨달았다. 굉장한 충격이었다. 천년거목마냥 든든했던 누이가 사실은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앙상한 나뭇가지였다. 그걸 깨닫자 비류연은 지금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누이를 안아주고 싶었다. 자신은 괜찮다고.
꾀병으로 놀래켜서 미안하다고. 그러나 이틀 동안 앓았던 몸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기껏해야 신음소리를 낼
뿐이었는데 이는 되려 누이가 울음을 멈추고 간병에 힘쓰게 하는 역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미안, 누나. 미안해. 다시는 꾀병 안 부릴게.
그렇게 다짐하며 비류연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곁에는 누이 대신 노사부가 있었다.
"영약 먹고 앓다가 일어나니 기분이 어떠냐."
"누나는요?"
"욘석이, 사부 묻는 말에 대답도 안하고. 옆에 봐라."
노사부의 말에 비류연은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누이가 잠들어 있었다.
"사흘 간 잠도 안 자고 네놈 뒤치닥꺼리하다가, 아침에 너 괜찮아졌다고 하니 혼절해서 눕혀놨다."
"……."
"멍청한 놈. 세상에 사기쳐도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는데, 나랑 네 누이는 사기치면 안 될 사람이야. 왜 그런지 알겠냐?"
"……네."
"하여튼. 차라리 다리를 삐었다고 하지 그랬냐. 하필이면 돌림병 증상 비슷하게 꾀병을 부려서 괜히 네 누이 걱정하게 만들어."
비류연은 그제서야 증상을 물어보던 누이가 왜 그렇게 당황했었는지를 깨달았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돌림병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잃은 사람 앞에서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혈육이 비슷한 증상으로 아프다 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그렇게 잠든 누이는 그 다음날에서야 간신히 일어났다. 노사부는 비류연에게 누이는 사흘 간 잠 안자서 몸이 축난 것보다 네가 앓아서 마음의 충격이 더 심했던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 일이 있고난 후로, 비류연은 적어도 누이 앞에서만큼은 절대 꾀병을 부리지 않았다.
#####
"좋은 분이시군요."
"네."
비류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나예린은 비류연이 그토록 해맑게 웃는 걸 보며 자신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뵙고 싶네요."
"그렇잖아도 좀 있으면 만날 수 있을 거에요."
"……네?"
갑작스러운 비류연의 말에 나예린은 무슨 소리냐는 듯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이래저래 일이 좀 있었는데, 괴팍한 노인네가 누님 세상 구경 좀 시켜주라며 보냈다고 했거든요. 중양표국 사람들 딸려보냈다고 했는데, 내일쯤이면 도착할 거에요."
꼭 소개시켜 줄게요. 그렇게 말하며 싱글벙글 웃는 비류연의 모습에 나예린은 얼떨결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 밤, 정말로 비류연의 누이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민하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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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연 이놈 한자로 뭐라 쓰는지 아시는 분 부디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누이 설정은 대충 비류연 이놈이 여장한 모습에서 미인 등급과 키가 한 단계 낮은 모습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름은 비류향響.
성
격은 착해빠져서 노사부도 어려워하는 상대로, "배운 것 없고 힘 없는 여식이지만, 세상천지 갈 곳 없고 기댈 곳 없는 어린 오누이
구해주신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연이가 사내로서 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도록 무공까지 하사해주셨으니, 평생 은혜
갚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하며 노사부가 양심에 찔려 부담을 느낄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비류연이 가출했을 때, 새하얗게 변해서 목숨으로 갚겠다고 하는 걸 노사부가 "죽어도 못 갚을 은혜를 죽어서 갚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 라고 해서 간신히 말릴 정도입니다.
전염병으로 아는 사람들이 죽는 걸 봐서 그게 트라우마인지라 누가 아프다 싶으면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비류연과 노사부의 브레이크 역할을 하며 이 두 사람을 갱생하는 느낌으로 써보고 싶은데, 언제나 그렇듯 언제 쓰게될런 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덧글 한 100개 달리면 모를까. ......어, 잠깐, 옛날에 이런 거 했더니 진짜로 100개 달렸던 것 같은데......
비뢰도 - 하늘과도 같은 그대 1.
"하나 더 파자."
"왜?"
"아버지 무덤에 물 안 차게 물 빠질 구멍 만들어 놔야지."
영
리하기는 했지만 세상물정을 잘 몰랐던 나는 누나가 시키는데로 아버지 무덤 옆에 좀 더 작고 크기로 약간 더 깊게 땅을 팠다. 사실
그냥 파라고 했어도 팠을 거다. 누나 말 들어서 나빴던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에 누나 말 잘 들으라고
하셨으니까.
누나도 함께 팠지만 흙먼지가 너무 심해 계속 기침을 해서 그리 많이 파지는 못했다. 한 삽 뜨고
재채기하고, 한 삽 뜨고 기침하고. 우리 남매는 그렇게 고생하며 간신히 무덤과 물 빠질 자리를 팠다. 열세 살 여자애와 열 살
남자애가 판 것 치고는 번듯하고 깊게 잘 파진 땅이었다. 문득 옆에 있는 어머니 무덤을 보고 떠올라 물었다.
"엄마 무덤 옆에는 물구멍이 없는데?"
"옛날에 있었는데 시간 지나면 물길이 생겨서 필요없어져서 메꾼 거야."
"그렇구나."
그렇게 대답한 누나는 한동안 그 아버지 무덤자리 옆 구멍을 보다가 말했다.
"연아."
"왜?"
"만약에……."
"만약에 뭐?"
"……아냐. 어서 가서 밥 먹자."
"응."
밥
이라고 해봤자 나물죽이었다. 농사는 흉년은 아니었지만 그리 잘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돌림병으로 마을 사람들이 거의 다
죽어서 먹을 걸 구할 곳도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돈 들어올 구멍이 없어졌으니 남아있는 것도 곧 바닥날 게 뻔했다. 이제
어쩌나 하고 있는데 누나가 내 밥그릇에 자기 죽을 부었다.
"더 먹어."
"누나는?"
"밥맛이 없네."
어서 먹어. 누나는 잔기침을 하며 그리 말했다. 너댓 숟갈이나 떴을까 하는 양이었기에 비어있던 내 그릇은 거의 가득 차다시피 했다. 나는 배가 고팠기에 망설임없이 숟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향響아, 연連아, 집에 있느냐."
"예-."
운
좋게 돌림병에 걸리지 않은 마을 아저씨의 부름에 누나가 대답하며 방을 나갔다. 따라나가지는 않았지만, 들려오는 얘기에 내일
아버지 관을 묻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괜시리 밥맛이 없어졌다. 누나가 왜 밥맛이 없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왜 안 먹고 있어."
방
에 들어온 누나는 내 밥그릇을 보더니 그리 물었다. 밥맛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내는 언제 무슨 일을 하게될 지 모르니 늘
배가 든든해야 한다고 누나가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 안 계시니 네가 누나 지켜줘야지, 하고 덧붙였다. 맞는 말이라는 생각에 남은
죽을 다 먹었다.
누나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잠자리를 준비했다. 무심코 아버지 자리를 펴다가 돌아가셨다는 걸 깨닫고
다시 접었다. 그 빈 자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방으로 돌아온 누나는 자기 자리에 앉아 잠시 아버지 자리를 바라보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누나 이불 속으로, 누나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누나는 말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지금껏 살면서 제일 따듯하고 포근한 잠자리였다.
#####
잠든 동생 몰래 방을 나와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제서야 억눌렀던 기침을 내뱉었다.
"콜록, 콜록, 크흠, 콜록……."
쉽
사리 멎지 않는, 애초에 끊이지 않는 기침을 애써 억눌러 가라앉히며 비류향飛流響은 오늘이 며칠인지를 생각했다. 아버지 관을 묻은 지
오늘로 나흘 째. 아니, 닷새 째인가? 집안 살림 중 돈 될 만한 것들은 처분했고, 마을 정리를 하면서 일가친척 다 죽어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나온 돈도 모아두었다.
마음 같아서는 버리고 싶은, 썩 내키는 돈이 아니었지만 함께 마을 정리를 하던
어른들이 억지로 떠넘기고 갔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에는 쉽사리 만져보지 못한 큰돈이었지만, 그네들이 챙겨간 것에 비하면
푼돈이었다. 찝찝한 돈이니 적게나마 애들에게 쥐어주며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심산이리라.
비류향은 그 돈을 몰래 버릴까 하다가 가지고 있기로 했다. 동생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자기 혼자였다면 안 받았겠지만 딸린 식구가 있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콜록, 커흑……. 큽……."
선
명하게 붉은 핏물이 기침과 함께 튀어나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뿜던 것과 비슷했다. 그러고나서 이틀 뒤에 돌아가셨으니
자기도 비슷하리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오늘이 사흘 째가 맞나? 엿새였나? 시간 감각도 점점 희미해져 가는 와중에 해 뜨고 지는
걸로 간신히 밤낮만 구분할 수 있었다. 먹은 것도 없건만 헛구역질이 올라오고 숨쉬기가 괴로웠다. 아버지도 이러셨을까.
"……."
죽
는 게 무섭지 않을 리가 있을까. 이제 열셋 된 아이가 뭘 알까 싶겟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 살림이며
아버지와 동생 뒷바라지를 하며 살아온 소녀의 정신연령은 더 높았다. 죽음을 아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랬기에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게
있었다.
비류연飛流連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동생. 이 세상에 하나 남은 혈육. 나 죽으면 너는 어떻게
될까. 이제 열 살인 아이가 밥은 챙겨먹을 수 있을까. 이 거친 세상 모진 풍파 헤쳐나갈 수 있을까. 네가 장성해 일가를 이루는
것까지는 보고 싶은데.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꿈이라는 것은 비류향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오늘내일 하는
몸뚱이로 10년 20년 뒤를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 그렇기에 고개를 휘휘 젓고는 품 안에서 꺼낸 무명천으로 입가를 닦았다.
몇 번이나 빨았지만 수 차례 각혈을 닦아낸 천에는 핏자국이 가득했다.
입가의 피를 닦아내자 새로운 핏자국이 생긴다. 그 모습을 보며 비류향은 결심했다. 내일, 아니 모레 보내자. 없는 살림이건만 아이 하나 보내는데 챙겨야 할 게 왜 이리 많을까.
동
생 비류연을 시장이 서는 큰 마을로 보내기로 결심한 건, 아버지와 자신이 돌림병에 걸린 걸 안 순간부터였다. 아버지가 목각을 팔던
가게에 모아둔 돈과 편지를 함께 보내기로 했다. 가게 주인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고 돈이 부족해도 류연은 손재주가 있어 가게에
도움이 될 테니 내치지 않을 것이다.
열 살 꼬마 혼자 보내기에는 멀고 험한 길이다. 비류연이 제법 빨리 걷는 축에 속하지만 그래도 아침부터 바지런히 걸어야 닿을 거리다. 도적도 걱정이지만 돌림병 도는 동네라는 소문이 나서 도적은 얼씬도 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그
러나 뭐라고 해야 아무 걱정 없이 갈까. 총명한 아이다. 어설프게 거짓말하면 금새 눈치채고 안 가려고 할 것이다. 일부러 모질게
대해야 할까. 나 혼자 먹고 살기도 힘든데 너까지 붙어있어 못 살겠다. 이 집구석 나가 알아서 살아라. 다시는 이 집 문턱 넘을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며 내쫓아야 할까.
한참 고민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천애고아가 될 아이에게 마지막에
모질게 대하면 그 어린 것이 얼마나 가슴 아파할까. 웃으며 보내도 모자랄 판에. 그럼 어떡해야 할까. 어찌하면 얼른 이 못난 누나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린 소녀가 하기에는 너무 힘든 고민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푸흡, 큭, 쿨럭……. 콜록……. 하아……."
또 한 번 피섞인 기침을 내뱉고, 한참 동안 숨을 고른 후에야 비류향은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
#####
아
버지 관을 묻고 엿새 쯤 됐나. 집안에는 남아있는 게 없었다. 정확하게는 마을 전체에 남아있는 게 없다고 하는 게 옳았다. 일가가
떼죽음 당한 집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 살아남은 사람들이 시체만 간신히 염하고, 남은 것들은 그나마 값어치 하는 것들만 모아놓고
죄다 불태웠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한동안 마을에는 탄내가 진동했다.
"나 아버지 무덤에 갔다올게."
"그래……. 후우, 조심하고."
누나는 가면 갈수록 파리해져갔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괜찮냐고 물어보면 조금 힘든데 괜찮다며 해실해실 웃는다. 그때만큼은 건강해보인다.
그
래서 괜찮다고 생각하며, 얼마 없는 어른들과 함께 마을 정리가 얼추 끝나고 시간이 남게 되자, 나는 아버지 무덤으로 갔다. 돈이
없어 휑한 무덤 앞에 조각이라도 깎아놓기 위해서였다. 장례가 끝난 그날 바로 하려고 했지만 영 시간이 나질 않았다.
"아버지, 우리 이제 어찌될까요?"
무
덤 앞에서 통나무를 깎고 있자니 요 며칠 간 일을 떠올리자니 답답해져서 괜시리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마을 탈탈 털고 불태우고,
음, 사실이기는 하지만 어감이 썩 안 좋군. 여튼 그러고 마을에 남은 사람은 열댓 명이 될까말까 한데 과연 어찌되려나. 솔직히
다른 사람들이야 알 바 아니고 누나랑 나만 잘 살면 되는데.
아버지 조각을 마치고, 허전한 느낌이 들어 어머니 조각도
했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비석을 세워야지. 내 살 길도 막막하건만 조각을 하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부모님
조각을 마치고 나니 점심 때 언저리였다. 집에 가서 밥이나 먹자.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보니 왠 노인이 서 있었다. 돌림병 돈다고
소문난 마을에 뭐하러 온 영감님인가 고민하고 있자니 그 노인이 물었다.
"이 무덤 네가 만들었느냐?"
"뭐, 누나랑 같이 만들었는데, 거의 제가 다 만들었죠."
그러자 노인은 흐음, 하고 고민하는가 싶더니 또 물었다.
"거기 조각들도 너랑 네 누이 솜씨고?"
"아뇨, 이건 전부 제가 만들었죠."
그
러자 노인은 찡그린 얼굴로 잠시 생각하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며 내게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모르는 사람 함부로 따라가지
말라는 누나 말이 떠올라서 따라갈 생각은 없었지만, 심심해서 당신을 따라가면 뭐가 생기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노인은 허허허 웃더니
천하제일의 무공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끌리기는 했다. 무림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고, 어차피 아무 것도 없는 마당에
따라가서 손해는 안 볼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갈 생각은 없었다.
"안 갈래요."
"왜?"
"누나 혼자 놔두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나 혼자였다면 따라갔을 테지만 누나가 있으니까.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누나 놔두고 혼자 어딜 간단 말인가? 이제 누나 지킬 사람은 나 밖에 없는데.
"그럼 네 누이랑 같이 간다면?"
"그럼 갈 수도 있죠."
"허허, 그럼 네 누이한테 말해보자꾸나."
노
인이라고는 해도 수상쩍은 인물을 집으로 안내하기가 영 껄끄러웠지만 어차피 털어봤자 아무 것도 없는 집구석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앞장 서서 걸었다. 나름 머리를 굴려 빙빙 돌아 길을 헤매도록 하면 어떨까 싶었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일가 전체가 떼죽음 당해
집까지 태워 휑한 마을인지라 돌 곳도 없었다.
"저기가 네 집이냐?"
"네."
예전에는 중간에 있던
다른 집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우리 집이 보였다. 중간에 있던 집이 두 채 있었는데 하나는 일가가 몰살당해서 불태웠고, 또
하나는 스물 조금 넘은 형 빼고 다 죽었는데 그 형이 스스로 자기 집을 불태웠다. 뭐, 나 같았어도 누나까지 죽었었으면 집
태워버렸을 것 같기는 하다.
"……너 누이랑 같이 산다고 했었지?"
"그랬죠."
"그렇구나. 그런데 네 누이는 건강하냐?"
"요새 밥도 잘 안 먹고, 좀 힘들어 보이기는 하는데 건강해요. 맨날 여기저기 바지런히 돌아다니고 그러면서도 집안일 다 하고."
"흐음……."
"왜요?"
"네 누이, 아니 가서 일단 보자꾸나."
노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누나~ 나 왔어~"
집
문턱을 넘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나갔나? 이 시간대면 밥 짓고 있을 텐데. 나물죽이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부엌에 연기도 안 올라온다. 진짜 나갔나? 그렇다면 마루에 뭔가 먹거리라도 놔뒀을 텐데 그것도 없다. 대체 어디를 간 거야.
"누나~ 어딨어~?"
방 안을 둘러보고 나오니 노인이 부엌문 앞에 서 있었다. 방 안에도 없으니 거기 있나 해서 누나를 부르며 들어가려니,
"누나 거기──"
"들어오지마!"
난생 처음 들어보는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날카로우면서, 동시에 찐득한 느낌이었다. 이상하고 싫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심한 기침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같은 잔기침이 아니라 좀 더 크고, 질척하며 소름끼쳤다.
"누나……?"
"쿨럭, 컥, 하아……. 연아……. 하아……. 들으륽……. 들어오지, 마, 쿨럭……."
아
궁이 불조차 없는 부엌 한 켠 그늘 속에 누나가 주저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수록 누나의 모습이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옷자락 앞섬 여기저기 피어난 붉은 자국. 백짓장처럼 새하얀 손과 얼굴. 그리고 그런 손과 얼굴에 어설픈 화가가
놀린 붓질마냥 그려진 선홍빛 흔적. 처음 보는 광경─── 아니, 아니다. 아주 최근에 이와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일주일
전쯤에. 그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
비류향이 눈을 떴을 때 가장 처음
보인 것은 늘 보던 집 천장이었다. 기이한 느낌이었다. 신선 같은 노인에게 동생을 부탁하고나서, 죽기 전에 동생 얼굴 본 게
다행이라는 생각과, 아버지도 모자라 누나까지 죽는 걸 보게 된 동생에게 미안한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으로 눈을 감은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다시는 못 보리라 생각했던 광경을 보니 정말 기이했다.
무엇보다도 몸이 가벼웠다. 몇 주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기침은 물론, 두통과 어지럼증까지 없어졌다. 온몸이 나른했지만 머리는 맑고 상쾌했다. 숨이 이토록 편안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대체 어찌된 영문이란 말인가.
"정신이 들었느냐?"
"……누구십니까."
새하얀 수염이 마치 신선과도 같은 노인이 곁에 앉아있었다. 노인은 비류향의 물음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허. 누구긴 누구야, 네 목숨 반 구한 생명의 은인이지."
"……! 은인께 결례를,"
"아아, 괜찮아, 괜찮아. 누워 있어라. 아직 회복이 덜 되었어.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지 않느냐."
노인은 비류향의 어깨를 슬쩍 누르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는 비류향을 막았다. 그말 그대로였다. 고작 몸을 일으키려 했을 뿐인데 쌀 가마니 하나를 옮긴 것마냥 숨이 가쁘고 온몸이 피곤했다.
"……어찌 이런 은혜를 베푸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잠시 후 몸 상태가 괜찮아지자 비류향이 물었다. 그 말을 어찌 여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노인은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자가 울고불고하며 누이를 살려달라고 하고, 내가 살릴 수 있었으니 살렸지."
"제자, 라 하심은……. 학사분이십니까?"
"그 샌님들보다 좀 더 활동적인 사람이다."
"……강호 분이시군요……."
노인의 눈썹이 씰룩였다. 고작 열 몇 살짜리 여아가 말 몇 마디에 자신이 강호인이라는 걸 알아차릴 줄이야. 영특한 아이를 보면 즐겁다고 했던가. 지금 노인의 심정이 그러했다.
"그래."
"연이를……, 무림인으로 키우려 하십니까?"
"그놈이 무림에 나갈지 어떨지는 그놈 마음이니 모르겠다만, 일단 무공을 가르치기는 할 게다. 그러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림인이 아니라 무인武人으로 키우는 게지."
"……연이가 하겠다고 한 겁니까?"
"그래."
"……."
정
확하게 말하자면, 침구나 탕약 없이 기공만으로 누이를 살려내는 노인의 모습에 비류연이 자신도 무공을 배우면 그리 할 수 있느냐
하기에 가능하다고 대답했기에 무공을 배우기로 한 것이었지만, 노인은 굳이 그 사실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나 비류향은 침묵했다.
그리고 노인은 어린 소녀의 침묵이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분명 무언가 있었음을 깨달았다는 것에 대한 표시임을 알아차렸다.
영특하다 영특해.
" 마음에 안 드느냐?"
"아닙니다. 사내아이가 선택한 길을 어찌, 계집아이가 왈가왈부 하겠습니까. 그리고, 은인께서 거두어 주신다는데, 감사를 못 올릴 망정 어찌 토를 달겠습니까."
"허허, 참. 얼굴에 금칠하는 재주가 있는 아이구만."
노인의 말에 비류향은 "송구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어른스러운 아이의 모습에 노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 쉬거라. 다 낫거든 여길 떠나 제법 멀리 가야할 터이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동생 무공 수련을 위해 산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 말에 비류향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연이만, 데려가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네가 다 나으면 그러려고 했는데, 일이 여의치 않게 되었어."
"……?"
노인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병 때문에 망가진 폐로 무리하게 멀쩡한 척 호흡을 하고 기침을 억누르는데 기맥氣脈이 버틸 리가 있나."
"그건,"
덜
컥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동생에게는 철저히 숨겼지만 다른 이들에게 숨길 생각은 없었다고는 해도 나름 빈틈 없이 숨겼다고
생각한 것을 본 지 얼마 되지 않는 노인에게 들킨 꼴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에 관해 굳이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
안다. 동생한테 병든 모습 보이기 싫어서 그랬겠지. 허나 그때문에 기맥이 망가지고, 기맥이 망가지니 혈도가 틀어지고, 혈도가
틀어지니 오장육부가 썩어들어가고, 오장육부가 뒤틀어지니 상중하 삼단전이 모두 깨져 진원진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화타가 살아돌아와도
못 살 몸이었어."
"……그런데 어찌……."
"어찌 살기는. 다 내 하늘과도 같은 내공으로 살렸지. 상한 피와 살을 내공으로 불태우고, 재생력을 촉진시켜 다시 생살이 돋게 하고, 망가진 기맥과 틀어진 혈도를 바로잡고! 깨진 삼단전을 다시 되살리고! 진원진기를 불어넣고!"
다
른 강호인들이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봤다면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말이야 내공으로 병환을 불사르고
삼단전을 고치고 진원진기를 불어넣는다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당장 건장한 무인의 운기조식을 돕는 것조차도 매우 위험한
행동이거늘, 무와는 일절 관련이 없는 아이의 몸에, 그것도 완전히 죽기 직전까지 망가진 아이의 몸에 내공을 불어넣어 몸을
치료한다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노인은 실제로 그 일을 해냈다.
"그래서, 네 진원진기가 돌아올 때까지 살펴야 하니 같이 간다는 게다."
"……감사합니다……."
겨우 내뱉은 한 마디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노인이 이를 모를 리 없었지만,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럴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너무 감사할 것 없다. 완전히 산 게 아니니."
"경청하겠습니다."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새어나간 진원진기는 내 천천히 회복시킬 테니 걱정이 없다. 되살렸다 한들 한 번 깨지고 뒤틀린 삼단전에 내공이 쌓이지 않는 거야, 어차피 네가 무학武學에 뜻을 두지 않았으니 개의치 않아도 된다. 허나……."
무
엇이 그리 걸리는 것일까. 세상 그 어떤 것도 거리낄 게 없어 보이는 노인이 망설이는 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본인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비류향은 묵묵히 노인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병환을 앓고 손가락 까딱할 힘 하나 없건만 아이 같지 않은 담담한
눈빛에 노인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인으로서의 삶은 힘들 것이다."
대답도, 반응도 없었다.
허나 노인은 비류향이 결코 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자기는 아이를 낳지 않으리라 결심하는 여인들도
있다지만 스스로 그리 선택하는 것과 하고자해도 못하게 되는 건 다르다. 이 아이는 어찌 반응할까. 호기심히 동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비류향의 대답은 예상 외이면서도, 예상했던 것이기도 했다.
"……살아서……."
어린 손이 노인의 손끝에 닿았다. 파르르 떨면서도 애써 손을 쥐었다. 감사를 전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아이의 손길이었다.
"살아서, 연이 장성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
새
벽에 눈을 뜨니 부엌에서 가마솥 물이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범인들은 듣지 못할 소리이나 심후한 내공을 갖춘
노사부에게는 생생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비류향이리라. 노사부는 그리 생각하며 방문을 나섰다. 문 옆에는 이미 미지근한 세숫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이 놓여있었다.
"끄응……."
쌓인 눈 위로 또다시 눈이 쌓이는 산 속의 겨울 날씨는
매섭다. 그런 산 속 오두막에서 세수하기 딱 좋은 미지근한 온도의 물을 적절한 때에 준비해두는 건 어지간한 정성이 아니고서는 못할
일이다. 심지어 뜨거운 물은 되려 더 빨리 식어 얼음이 생기니 온도 조절이 매우 중요한데, 그런 어지간하지 않은 정성을 여태껏
하루도 쉬지 않고 들이는 이가 있었으니…….
잠시 고민하던 노사부는 결국 세안을 했다. 이 정성을 어찌 무시한단 말인가. 씻은 물을 저 멀리 마당 너머로 훌쩍 쏟아낸 노사부는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부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
엌은 매우 깔끔했다. 4년 전까지만 해도 허름한 오두막 부엌 수준이었으나 노사부가 매일 그곳을 들락날락하는 비류향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겨 새로 짓게 된 것이었다. 물론 노동력을 담당한 것은 비류연 혼자였다. 소년은 당연히 처음 계획을 들었을 때는
맹반대를 했다. 노동력을 발휘할 인력이 자신 밖에 없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상당한 액수의 돈을 들여 으리으리한 부엌을
만들겠다는 노사부의 계획 때문이었다. 멀쩡한 부엌 뭣하러 큰돈 들여 새로 짓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네 누이가
맨날 저기 들락날락 하는데 불쌍하지도 않느냐!" 라는 스승의 일갈과, 새로 부엌 하려는데 어떠냐는 질문에 되려 "누나 신경쓰지
말고 네 무공 수련 열심히 하렴." 이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누이에게 자극을 받은 비류연이 단숨에 부엌을 신축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험준한 아미산을 거침없이 뒤져─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노사부 역시 숲을 뒤졌다─ 나무를 짜맞추어 견고한 대들보를
올리고 황토로 벽을 쌓고, 매끄럽게 갈아낸 돌로 아궁이를 세 개 짓고 그 위에 튼튼한 무쇠 가마솥을 얹었다. 남쪽으로는 큰 창을
내고 북쪽에는 작은 창을 달았다. 그 창은 둘 다 위아래로 열 수 있게 하였으며 이중창으로 만들었기에, 여름에는 시원하게 통풍을
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난방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렇게 만들고 나니 방 두 개 짜리 오두막에서 부엌이 제일 컸다.
가
마솥 하나는 방 쪽 벽에 붙은 둘과는 반대쪽에 있었는데 형태가 조금 특이하였다. 그 옆에 목욕탕으로 가는 작은 문이 있었다.
취사와 목욕을 위해 따로 배치한 것이었다. 이 목욕탕은 철저히 비류향을 위한 것으로, 부엌을 개축하던 당시 비류연이 푹푹 찌는
무더위에 땀을 닦다가 문득 떠올린 의문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사부님!"
"귀 안 먹었다. 작게 얘기해도 돼."
"누나는 어떻게 해도 내공 못 얻잖습니까?"
"그렇다고 몇 번이나 말했느냐."
"그럼 겨울에 사부님이나 저처럼 내공으로 몸을 청결케 하지 못하겠지요?"
"그래서 지난 겨울에 네가 열심히 향이 씻을 물 끓일 장작 만들었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부엌 옆에 목욕탕을 만들까 합니다."
"목욕탕?"
"네."
스
승과 제자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끓인 물을 손쉽게 소나무 욕조로 부을 수 있는
손잡이 달린 기울임식 솥과 수도水道, 미끄러지지 않을 정도면서도 맨살로 문질러도 살이 다치지 않는 돌바닥이 깔린 목욕탕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본인은 한사코 거절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사연 있는 부엌 안 아궁이 앞에 한 소녀가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그 모습에 노사부가 헛기침을 했다.
"어흠."
그 소리에 소녀의 눈이 뜨였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졸린 기색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전혀 보이지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는 정중하게 노사부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기침하셨습니까."
비류향.
5
년 전 동생과 함께 노사부의 거처로 온 소녀였다. 아니, 이제는 꽃다운 열 여덟의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앞치마를 두른 모습은 뭇
사내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정도로 단아하고 아름다웠지만, 노사부는 그것보다 불편함과 미안함(!)을 느꼈다.
"향아, 그냥 찬 물 놔두래도. 아니, 겨울에는 세숫물 안 떠놔도 된다 하지 않았느냐. 내 지난 번에도 말했는데. 수고를 들이지 말거라."
"어찌 노야老爺께 그러한 결례를 범하겠습니까. 그리고 노야께서도 겨울일수록 더 잘 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그건 이 집에서 너만 해당되는 얘기다. 나나 연이는 내공으로 안 씻어도 청결을 유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서 수련을 하는 게야."
"그럼 하릴없는 소녀가 보은키 위해 하는 일이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십시오."
정
내키지 않으시면 마당에 부으셔도 좋습니다. 비류향은 그리 대답하였고 노사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끄응……." 아이고 맙소사. 셀
수도 없을 만큼 반복된 논쟁은 언제나 노사부의 패배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노사부는 5년 전 병상에서 일어난 소녀가 정중히 절을
올리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배운 것 없고 힘 없는 여식이지만, 세상천지 갈 곳 없고 기댈 곳 없는 어린 오누이
구해주신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연이가 사내로서 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도록 무공까지 하사해주셨으니 그 은혜,
평생토록 갚겠습니다. 』
그때 노사부는 알지 못했다. 일생 동안 수발을 들겠다는 이 소녀의 말이 얼마나 진중했는지를. 그리고 5년 동안 그 말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비
류향은 무서울 정도의 부지런했다. 이는 병의 후유증이기도 했다. 상중하 삼단전이 모두 망가져 오래 잠들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침상에 누워 제대로 자는 건 자시子時에서 축시丑時까지 두 시진時辰 남짓이고 부족한 잠은 모두 쪽잠으로 때우고 있었다. 시장서
장보다 잠시 쉬다가 자고, 목욕하다가 자고, 빨래 널고 마루에 앉아 자고, 아궁이 불 보다가도 자고. 그러면서도 귀신 같이 일어나
제 할 일을 다하니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눈만 붙이고 있을 뿐 제정신으로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부지런함을 바탕으로 비류향은 요 5년간, 말 그대로 '극진히' 노사부의 수발을 들었다. 한겨울에 세안용 미온수를 준비하는 건
약과에 불과했다. 노사부가 생활의 편리를 위해 가르친 것이 있다고는 해도, 허름한 오두막이 조촐하지만 단정하고 깔끔한 정자와 같은
공간이 되고, 식탁에 오르는 요리의 다양함과 풍성함이 이전과는 비교를 할 수 없게 된 것은 모두 비류향의 손길을 거친 이후
였다. 술안주거리라도 할라치면 어쩌면 그렇게 딱 먹고 싶은 걸 그날 딱 마시고 싶은 술과 함께 준비하는지 몰랐다. 의복은 항상
깔끔하게 다려져 있었고, 조금이라도 닳거나 해지면 귀신 같이 새 것으로 바꾸거나 천을 덧댔는데, 그 솜씨는 마치 옷이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삶의 질이 변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처음에는 좋았다. 노사부는
타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때때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무한히 쏟아지는 비류향의 호의가 한없이
계속되자 노사부는 조금씩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만두라고 해도 생명의 은혜를 갚는다며 달라붙는 데에는 아무리 천하의
노사부라고 하더라도 장사가 없었다. 어린 소녀가 존경이 가득한 눈빛으로 하는 일을, 그것도 아무런 흠집 없이 하는 일에 무슨
트집을 잡는단 말인가.
그나마 식소사번의 예를 들어 침소사번이라 말하고, 정녕 오래도록 은혜를 갚고 싶다면 네 목숨을
중히 여겨야 하니 적절히 휴식을 취하며 일을 하라고, 까놓고 말해서 땡땡이 좀 치고 빈둥거리라고 애둘러 말해서야 이 정도다.
그전에는 정말 궁인宮人들 저리가라 할 정도로 따라다녔다. 그 와중에 자기 동생까지 챙기니 그 정성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아침 수련을 다녀오마. 그리고─"
"오시는 데로 식사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두겠습니다."
"─그래."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비류향의 모습에 노사부는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모를 표정으로 부엌을 나갔다. 천하의 노사부가 계집아이 하나에 쩔쩔매게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잠시 후, 비류연 역시 노사부와 비슷한 과정─세안용 미온수와 수건─을 거쳐 부엌에 들어왔다.
"아, 누나! 이런 거 안 해도 된다니까!"
"세안은 몸의 청결만이 아니라 마음도 다스리는 법이라잖니. 그리고 너 돕고 싶어서 한 일이니 신경쓰지 마렴."
"아, 그러니까……."
"씻을 물 끓여두마. 노야께도 말씀드리고."
"괜찮아! 괜찮다니까! 오늘 수련할 거 많아서 씻을 시간 없어! 안 해도 돼! 그리고 목욕탕 누나만 쓰면 된다고!"
"사람이 염치가 있지 어찌 그러니."
"……하아, 아침 수련 다녀올게. 그리고 물 준비 안해도 돼. 괜히 낭비하지 말고."
"그래, 알았어. 잘 다녀오렴. 식사 준비해두마. 먹고 싶은 거 있니?"
"누나 밥은 뭐든지 맛있으니까 아무 거나──!"
비
류연은 경공을 써 도망치듯 부엌을 나가며 그렇게 외쳤다. 이제 열 다섯. 입지立志의 나이건만 동년배는 물론 당대의 절정고수와도
견줄 수 있는 무공을 가진 소년이라도 어머니와 같은 누이에게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런 동생의 모습에 비류향은 활기차서
좋구나, 하고 미소를 지으며 공경하는 노사부와 사랑하는 동생을 위한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5년 동안 이어져 온 비뢰문의 평범한 아침이었다.
#####
- 새벽에 올리려 했으나 갑자기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아 미뤄졌습니다.
-
비류향의 증상은 '급성 폐결핵으로 나오는 각혈을 억지로 참아 혈전이 생겨 이게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지면 비슷한 증상일까.'
라고 부실한 의학적 지식으로 고민해봤으나, 그냥 무협식으로 기맥이 망가졌다고 하는 게 제일 무난하다고 판단했습니다.
-
쓰다보니 생각났는데, 군대서 누가 입원실에 비뢰도 1부 전권을 가져다놔서 시간날 때 보고 있자니, 군의관님께서 그걸 보시고는
이게 아직도 나오고 있느냐며 놀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분도 전역하셨을 텐데, 잘 지내고 계시려나…….
- 댓글
도박[…]으로 200 이상의 댓글이라는 화살에 맞고, Crimsoneyes님의 지원그림이라는 창까지 맞아 시작하게 되었습니만,
정말 이런 내용의 팬픽을 보고 싶은 분들이 계셨는지 의문이 듭니다. 마치 부모님 세대의 이상적인 누님상[…]이랄까, 조아라에
범람하는 여주인공 같은 주인공이 먹힐지 모르겠네요. 여튼 도박이라도 약속은 약속이니, 최소한 1부까지는 가보겠습니다. 더불어 댓글
200돌파 라는 성원에 힘입어[…] 주간 연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솔직히 일일 연재는 도저히 안되겠는지라……. 이번에 학점
붕괴되면 집에서 맞아 죽습니다. 살려주세요 /굽신굽신
- 다시 한 번 Crimsoneyes님께 (복잡한 심정이 뒤섞인)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오타 지적 환영합니다.
비뢰도 - 하늘과도 같은 그대 2
도끼를 보고 있자면 새삼스럽게 왜 이런 걸로 장작을 패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게 무슨 개소리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첨언을 하자면, 이는 힘이 없더라도 요령과 속도를 활용해 비도만으로 장작을 쪼개는 비뢰문의
수련을 하다보니 들게 된 생각이다. 처음에는 이게 과연 사람이 할 짓인가, 이 문파는 대대로 제자에게 이런 미친 짓을 시켜왔던
건가 싶었지만─추측이기는 하지만 왠지 정말 그렇게 해왔던 것 같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나 역시 그짓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
론 단번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고 1년 반이라는 기나긴 수련기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동안 장작패기에 사용된 것은 당연히
도끼였다. 금부연 도끼만행사건이라는 상당히 수상쩍은 사연을 가진 더럽게 무거운 도끼로 장작을 패면서 팔 힘과 균형감각을 배울 수는
있었지만 더럽게 힘들었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참고로 이 오두막에는 전설의 도끼 외에, 매우 가볍고 실용적이며,
장작에 슥 내려치면 쩍 하고 갈라지는 우수한 도끼가 하나 더 있지만, 그건 절대 내가 손대서는 안 될 물건이다. 누나를 위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행여나 손이라도 댔다간 사부에게 "수련으로 단련하지 않고 어찌 병약한 누이를 위한 물건으로 편함을 도모하려고
하느냐!" 라는 소리를 들으며 얻어맞는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째 제자보다 누나를 더 챙기는 것 같은 느낌인데.
여튼 그러한 이유로 빨랫방망이 역시 내가 쓰는 더럽게 무거운 쇠방망이와 누나가 쓰는 가볍고 튼튼한 나무 방망이 이렇게 두 개가
있다. 그리고 이 빨랫방망이 역시 수상쩍은 쇠도끼와 마찬가지로 익숙해지기까지 1년 반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동안
걸레 조각이 된 의복을 만결복이라 부르며 매일 바느질한 덕분에 바느질 실력 또한 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뭐, 이쪽은 누나의
도움을 좀 많이 받기는 했지만. 내공도 없이 슥삭슥삭 바느질을 해치우는 누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놀라울 따름인데, 누나 말을
들어보면 어머니께서도 생전에 마을 어느 아낙들보다도 삯바느질을 잘 하셨단다.
"그래서 나랑 네 옷은 물론 아버지 의복도 손수 만드시는 분이셨어."
호
롱불 아래서 함께 바느질을 하며 누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넝마 조각 같은 옷을 꿰메는 건 정말 싫었지만 그 동안 이런 얘기,
그러니까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듣는 게 좋았다. 어릴 때 돌아가셔서 자세히 기억나지 않기에 누나가 어머니에 대해 더 말해줬으면
하고 바랐지만, 괜시리 누나가 애잔해보여서, 애써 담담하려는 것 같아 보여서 더 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결론은 누나의 도움을 받아
성장해서 이제는 엄청나게 바느질을 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혹독하다 못해 무식하기까지 한 장작패기와 빨래로 육체적 수련을 지속함과 동시에 사부에게 배운 것은, 비뢰문의 2대 비전秘傳인 뇌령심법雷靈心法과 영사심결靈絲心訣이었다.
사
부는 침을 튀겨가며 "본문本門의 독문내공심법獨門內攻心法인 뇌령심법雷靈心法은 인체의 호흡뿐만 아니라 천지 간의 교류(交流)를 통해
천지 세상만물의 기운을 받아들여 그 기운으로 뇌령雷靈, 즉 뇌雷의 영혼靈魂을 생성生成하는 천하제일의 내공심법內攻心法이다." 라고
설명하였다. 거기에 "이 뇌령심법雷靈心法은 뇌雷의 기운인 쾌快, 섬閃, 강强, 찰나刹那의 구결과, 집集, 산散, 유柔의 구결이
있으니 이를 잘 암기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 역시 덧붙였다.
뇌령심법과 함께 배운 영사심결靈絲心訣은
일종의 정신수양법으로서, 어떠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영혼을 꼬아 실처럼 만들어 자연스럽게 부동심不動心을 가지게 하고, 그
마음이 항상 투명한 호수와 같이 맑고 고요하며 평안하도록 하는 심법이었다.
솔직히 처음에 2대 비전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는 이게 무슨 약장수의 헛소리가 아닌가 싶었지만, 수련하면 할 수록 장작패기와 빨래가 압도적으로 쉬워졌기에 효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동시에 사부가 처음부터 이걸 알려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묵금墨琴을 건드리려다 손가락을 베여 피를 보고 그로 인해 분뢰수吩雷手도 배웠다. 덤으로 분뢰수가 6성에 도달해야 묵금을 건드릴 수 있으니 그때까지는 평범한 금을 타라는 사부의 말을 들었다. 뭐, 이건 아무래도 좋다.
겨
우 기초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면서 영사심결을 활용하면서 비도 날리는 법과 비뢰문의 운신법運身法인 봉황무鳳凰舞를 배웠다. 비도
던지기와 봉황무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자 야외수업이라며 뒷산으로 가서 나물 채집과 사냥을 배웠다. 사부는 산 전체를 가볍게
돌아다니게 되니 봉황무의 수련이고, 비도만으로 사냥을 하니 무공의 수련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게 식비를 아끼기 위한 짓이라는 걸
순식간에 간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힘은 사부에게 있었고, 고생해서 얻은 나물과 고기는 나와 사부만 먹는 게 아니라 누나도 함께
먹는 식재료가 되었기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이 행위를 이어갔다.
나물 채집과 사냥은 새벽 눈뜬 이후부터 오전까지의
시간에만 이루어졌다. 오후에는 철화장鐵化莊에서 철을 두드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은자 2냥에 특별수당지급이라는 말도 안되는 조건으로
팔려나가 해가 기울 때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허나 집에 돌아와도 그곳에 안식은 없었다. 사부가 철을 만지며 둔화된 섬세한 손
감각과 안력을 수련하기 좋다며 구슬을 꿰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사부는 정교함과 섬세함을 단련하는 또다른
수련이라며 목각 조각상과 공예품 제작까지 만들게 하였다.
채집採集. 수렵狩獵. 제련製鍊. 관옥貫玉. 목각木刻.
모조리 돈이 되는 일이었다. 허나 수입이 늘어난다고 좋아하는 건 사부 뿐이었으며, 나는 숙달되면 숙달될수록 일거리가 늘어나 도저히 편해지지 않는 하루하루를 보내야했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세월이었다.
난
왜 이렇게 불행한가! 하늘은 어찌 이렇게 큰 시련을 주는가! 사나이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지만 너무나 서러워서 눈물이 마르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힘들었다. 만약 누나가 없었다면 정말 천하제일 무공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힘들지?"
"응. ……아니! 전혀!"
유
난히 힘든 날이었다. 쓸만한 나물도 없고, 괜찮은 사냥감도 없으며, 철도 잘 두드려지지 않았다. 구슬도 잘 꿰이지 않고, 조각칼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던 날. 영사심결을 단련해도 흔들리는 울분을 애써 억누르며 어찌어찌 잠자리에 든 내게 누나는 그렇게 물었다.
무심코 힘들다고 했다가 급히 상반신을 일으키며 아니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누나한테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린 아이의 치기稚氣이기도 했고, 나보다 더 힘들 혈육에게 괜히 걱정을 끼치고 싶지도 않다는 미숙한 배려이기도 했다.
누
나는 그런 내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혼나고 있는 것도 아니건만 괜시리 마음이 찔린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바느질을 하던 누나는 잠시 바느질거리를 내려놓고 내 곁으로 다가와 살포시 품에 나를 안아주었다. 부끄러웠지만 익숙한 체향과 귓가에
들리는 누나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자니 떨어질 수가 없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을 잊고 그 품 안에 있다보니 어느 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밖에 나갔다 오려고 했으나, 누나는 그런 날 더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참고 숨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고름을 짜내야 종기가 낫잖니. 울어도 뭐라할 사람 없어. 괜찮아. 괜찮아, 연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엄마 대신 누나를 부르며 말 그대로 펑펑 울었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도 그렇게 안 울었던 것 같다. 울다 지쳐
잠든다는 걸 그때 알았다. 여튼 그렇게 속이 후련해지도록 울고난 후로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고된 일과를 받아들였다. 물론 정말
힘들었지만 그때처럼 다 때려치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이 후련해졌지만 육체의 고단함은 변함이
없었다. 만약 그대로 내가 일만 주구장창했다면 분명 과로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불쌍한 우리 누나는 평생 사부 수발만 들다가 죽었을
테고. 하지만 그날의 사건 덕분에 나는 그렇게 될 뻔했던 미래를 바꿀 수 있었다.
#####
울다 지쳐
잠든 비류연을 자리에 뉘인 비류향은 동생의 눈물과 콧물에 푹 젖은 옷을 갈아입고 바느질감을 잡았다. 그리고 짧은 잠에 들었다. 일
다경一茶頃 쯤 지나 눈을 뜬 소녀는 호롱불에 남은 기름을 보고 자기가 얼마나 잤는지를 가늠하고는 바느질감을 가지런하게 정리해두고
부엌 아궁이에 장작을 넣기위해 방을 나섰다. 슬슬 불길이 사그라들 때였다. 산을 휘감아 내려오는 새벽바람은 계절을 막론하고
차가우니 온기가 돌게 하려면 이때 장작을 넣어둬야 했다.
그리 생각하며 문을 나선 비류향의 눈에 들어온 건 마당에 서서 밤하늘을 보고 있는 노사부였다. 비류향은 신속히, 그러나 결코 경망되지 않은 동작으로 신발을 신고 노사부에게 다가갔다. 기침해 계셨습니까, 라고 입을 연 순간,
"과하다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노야老爺."
노사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비류향은 당황하였으나 이내 사부의 경중을 읽고 대답하였다.
"대답이 늦는구나. 얼굴에 근심도 가득하고. 그러면서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느냐."
"송구스럽습니다."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깊게 허리를 숙이는 비류향을 보며 노사부는 됐다며 손을 휘젓고는 말했다.
"네 보기에는 노구가 일신의 영달을 위해 제자를 핍박하는 것처럼 보일 지 모르겠으나, 이는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네 동생이 성장함에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
거
짓말이었다. 전통적(?)으로 비뢰문은, 적어도 노사부는 '제자와 노예의 차이는 비전을 배우느냐 마느냐의 차이일 뿐, 하는 일은
똑같다.'는 견지를 유지해왔다. 그렇기에 노사부가 비류향에게 하는 말은 괜한 심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했다.
그러나 노사부는 모르고 있었다. 비류향이 얼마나 진심으로 노사부를 신뢰하고 있는지를.
"
어찌 그걸 모르겠습니까. 비록 무학武學의 궁리는 모르나 연이의 일과가 열두 살 아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연이가 그 힘든 수련을 하면서도 심화心火를 품을지언정 육신은 병에 걸리지 않으며 크게 다치지 않으니 노야께서 안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허나 이제는 세상에 없는 양친께 부탁받은 동생을 자식처럼 보살펴 왔습니다. 그러한 아이가
힘들어 하는데 손윗누이라는 것이 해줄 수 있는 게 치맛폭에 품고 원없이 울게 해주는 것 뿐입니다. ……스스로가 한심하여 노야
앞에서 안색을 어둡게 하였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
식은땀이 등 뒤로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제아무리 세상 무서울 것 없고 거칠 것 없는 노사부라도, 이렇게 올곧고 순수하게 자신을 믿어주는 소녀에게 차마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고, 네가 생각하는 안배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니, 설령 그게 아니라 일신의 탐욕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말하더라도 이 소녀가 과연 그걸 믿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분명 서투른 겸양의 표현이라 여길 게 뻔했다. 그래서
노사부는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스스로 일을 하고 식구를 먹여살리는 사내를 치맛폭에 감싸는 것은 과한 일이다."
"
압니다. 허나 연이가 사내라고는 해도 아직 열두 살 아이입니다. 그것도 스스로 우기니 열둘이지 아직 띠도 돌아오지 않아
실질적으로는 열하나입니다. 본디 모친의 품에서 울분을 하소연할 나이지 않습니까. 나이가 차면 스스로 사리구분하여 멀어질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
"하늘을 나는 용도 머무는 구름이 있고 호랑이 또한 잠드는 굴이 있는데, 저 어린 것에게도 마음 놓고 있을 곳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무례한 줄은 아나 그래도 부디 윤허해주셨으면 합니다."
쏴아아아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어내린 산바람이 숲을 흔들고는 노사부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이제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식은땀이 순식간에 식는 것과 동시에 노사부는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야, 이거. 이야. 정말.
"……어흠! 여튼, 밤이 깊었다. 어서 자거라. 짧은 잠이라도 편히 자야 다음 날 일하는데 지장이 없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아궁이만 확인하고 곧 들어가겠습니다."
그리 대답하며 비류향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노사부는 잠시 소녀가 들어간 부엌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별이 쏟아지는 것 같은 아름다운 밤하늘로 시선을 돌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
지금 뭔가 심적으로 엄청난 부담이 될 흉악한 것을 곁에 두고 키우고 있는 게 아닐까. 불현듯 떠오른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노사부는 애써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뭔가 해야한다. 그 생각에 노사부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인을 알지 못했다. 그 생각으로 인한 선택과 결과가 평생토록 그를 얽메는 쇠사슬의 단초가 될 줄은.
#####
정천맹주正天盟主 진천뇌벽검震天雷霹劍 나백천羅伯泉이 사천四川땅에 온 것은 자신의 딸을 검후劍后에게 맡기는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찌하다보니 시간이 남아 장터에 들어선 그는 기이한 것을 보게 되었다.
입
지立志와 약관弱冠 사이의 연배일까 싶은 여인이었다. 보통 그 나이대의 여성은 소녀라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나백천은 소녀라는 단어가
가진 앳됨이 없으며 마치 한 집안의 자당慈堂과도 같은 품격을 느껴 여성이라 표현이 적절하다 여겼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어른스러움 때문에 기이하다 여긴 게 아니었다.
"산 사람인데 기맥이 있는 듯 없는 듯 흐릿하고 희미하니, 이는 중병에
걸린 이나 곧 죽을 자의 맥동이다. 허나 저 처자는 비록 큰 움직임은 없으나 활기가 있고 중심은 진중하고, 그러면서도 내공은 한
줌도 느껴지지 않으니 괴이하다."
그 말 그대로였다. 희한한 일이었다. 별의별 일들을 마주했다 생각했건만 이토록
진귀한 경험도 하니 역시 세상은 넓도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 걸음을 뗀 나백천은 순간, 매서운 눈길로 방금 전 여인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없었다. 아니, 있었다. 절정의 고수인 나백천의 안력眼力으로도 찰나에 잡아내지 못한 것은 그 여인의 있는 듯 없는 듯
기이한 존재감 때문이었다.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은 존재. 잡히지 않는 기맥.
"……."
평소라면 단순히
넘어갔을 일이었으나, 나백천은 최근 사천땅에서 천겹령의 끄나풀이 움직였다는 징후가 포착되어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이를
우연이라 여기지 않고 은밀하게 여인의 뒤를 좇기 시작했다. 기우였다면 다행이다. 허나 정말로 저 여인이 천겁령에 속한 자라면
이대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나백천은 한 시각 동안 조심스레 의문의 여인의 뒤를 밟았고, 그 길은 기이함의 연속이었다.
이
미 몇 번이나 장터를 나온 듯, 여인은 상인들의 인사에 화답하며 물건을 샀다. 그러다 때때로 장터 틈바구니 어디나 쉴 자리가
있으면 그대로 앉거나 기대어 눈을 감고는 잠이 들었다. 저잣거리 소란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때는 잠깐이라도
눈을 돌리면 금새 기척이 사라져 있었다. 바로 보고 있거늘 인식할 수 없었다. 혹여 무림인인가 싶어 시험삼아 살기를 쏘아내도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다경, 혹은 그 이하의 짧은 쪽잠을 자고 나면, 마치 잠깐 눈만 감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짱히 눈을
뜨고 일어나 다시 장을 보기 시작했다.
"내 허깨비를 보고 있는 것인가……."
여인 곁을 지나가는
일반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건만 자신만이 저 여인을 기이하게 보는 작금의 상황에 나백천은 고심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의혹
역시 깊어져만 갔다. 그리하여 그는 여인이 장보기를 마친 듯한 시점에서 의문을 해소하기로 했다.
"소저. 잠시 몇 가지 물어보고 싶소만."
"……하문하십시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여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여인은 기척 조차 없이 나타난 이가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에
놀랐는지 약간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곧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리 대답했다. 짧으나 정중한 대답은 그 안에 의義와 예禮가 담겨
있었으나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으며, 감정을 절제하되 무공無空하지 않아 중용지도中庸之道를 실천하고 있었다.
나
백천은 재차 여인을 바라보았다. 의복은 허름하지만 단정했고, 옷매무새 역시 정돈되어 있었다. 잘 살거나 명문은 아니더라도
신의信意와 학식을 갖춘 고아한 선비士 집안의 자당慈堂과도 같은 품격이 느껴졌다. 이에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나백천은 말을 높여
물었다.
"혹 일가의 안주인이십니까."
연배가 있다고 한들 강호와 연관이 없는 일반인이라면, 지아비가 있고 자식이 있는 여인이라면 함부로 하대하지 않는 게 예법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대하십시오. 올해로 열다섯인 여아에게 말씀을 높이실 필요 없습니다."
"허어, 허허. 이거 미안하구나. 너무 어른스러워 결례를 저질렀구나."
"결례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아니다. 안사람이 여인의 나이는 함부로 아는 게 아니고 완숙하여도 어리게 보인다 해야한다고 했으니 내 결례를 저지른 게지."
"자당께서 농으로 하신 말씀이실 터이니 심려치 마십시오."
두
사람 사이에 훈훈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나백천은 점점 더 신중해졌다. 이 거리에서도 여인의 기맥이 희미했고
일반인 수준의 기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무형지기에는 반응조차 하지 않는다. 대체 이 처자는 누구란 말인가.
"하여, 제게 무엇을 묻고자 하십니까?"
"아, 미안하구나. 네 기맥이 기이하여 그 연유를 묻고자 하는데, 답해줄 수 있느냐?"
"기맥 말씀이십니까? 이상하다 하심은 어떤 것인지……."
여인이 잘 모르는 일인지 말을 흐리자 나백천이 설명했다.
"앞에서 보기에는 활기가 있거늘 죽기 직전이거나 중환자와도 같은 기맥이다. 내공은 한 줌도 느껴지지 않으며 기력도 없어 틈만 나면 잠에 드니 이는 산 사람의 형태가 아니니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그
설명을 들은 여인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백천의 의문에 대답해주었다. 돌림병에 걸려 죽을 뻔 했던 것. 노사부가
제자로 들인 동생의 청을 들어주어 몸을 고쳐준 것. 그러나 치료시기가 늦고 병세가 너무 깊어 상중하 삼단전과 전신 혈맥이 모두
망가진 상태라는 것. 그로 인해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해 부족한 잠을 쪽잠으로 때운다는 것 등을 모두 듣고도 나백천은 쉽게 믿지
못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인의 말에 따르면 노사부라는 인물은 내공으로만 죽기직전의 중환자를 살려낸 것이다. 그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일인지는 절정의 무인인 자신이 더 잘 알았다. 그걸 알기 때문일까. 여인은 조심스레 소매를 걷어 손목을
내밀었다.
"노야께서 무인들은 쉽사리 믿지 않을 터이니 맥을 짚게 하면 이해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의 몸에 함부로 손댐을 용서하게나."
맥을 짚은 나백천은 실제로 여인의 기맥의 뒤틀려 있고, 망가진 삼단전을 복구한 솜씨를 알게 되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천지 기인을 많이 만나봤다 생각했건만 아직도 내 견식이 부족하구나. 이와 같은 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이런 능력에 너와 같이 기품 있는 여인을 키워냈으니 범상치 않은 분이실 터. 필시 기인奇人이나 신인神人일 테지."
"신묘한 솜씨로 보잘 것 없는 여아女兒를 살려 주셨으니, 갚아야 할 은혜가 하해와도 같은 은인이십니다."
자
리에 없는 이에게도 공경을 다하는 여인의 태도는 의문이 풀려 마음이 가벼워진 나백천의 호감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여인의
상태를 이해하고 눈을 살피니 과연 맑고 투명하여 비록 내공은 없으나 깨달음을 얻은 자와 같은 정갈함이 있었다. 나백천은 자리를
바꿔 좀 더 대화를 함이 어떻겠냐 물었다. 여인은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하더니 반 시각이라도 괜찮다면 따르겠다 하였다.
"어째서 반 시각이더냐?"
"노야께 올릴 석반과 동생의 식사를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허허, 내 그리 시간을 뺏지 않도록 하마."
그
렇게 가까운 객잔에 자리잡은 두 사람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체적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나백천이었으나
여인은 경청하며 현명한 답을 하여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반 시각이 흐르자 서로는 아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토록 즐겁게 시간을 보냈건만 서로 통성명도 안하고 있었다니. 이제서야 자기소개를 하는구나. 노부는 정천맹주 진천뇌벽검 나백천이라고 한단다."
"……비류향이라 합니다. 귀한 분을 몰라뵌 점 용서해주십시오."
처
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살짝 놀란 듯 비류향의 눈이 약간 동그랗게 변했다가 돌아왔다. 호들갑을 떨 만도 하건만 일관된
태도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신뢰감이 생겼다. 저잣거리와 객잔에서 나눈 대화가 자신의 심상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소녀는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그렇기에 나백천은 이 소녀를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내 간만에 좋은 인연을 만들었는데 서로의 일정이 바빠 오늘은 이렇게 헤어지지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있겠느냐?"
"귀한 분께서 훗날을 기약하시니 응함이 옳으나, 은인의 수발을 들어야 하기에 함부로 약조할 수 없습니다."
"음, 어찌 안 되겠느냐?"
"사정을 설명해주시면 노야께 윤허를 구해보겠습니다."
비류향의 대답에 나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금 천향루에 머무르고 있는데, 여식과 함께 왔다. 헌데 아이에게 심병心病이 있어 쉽사리 바깥출입을 못하니 말벗이 필요한데 이를 부탁할 수 있겠느냐."
"저와 동년배인지요."
"올해로 열 둘이니 세 살 어린 셈이지."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인 비류향은 잠시 고민하더니 난처하다는 듯 되물었다.
"심병은 그 종류가 무궁무진하여 그 하나만으로는 윤허를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증상이라도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흠……, 네 몸 상태를 보면 기인께서는 무공과 의학에 조예가 깊으신 듯 하니 바른대로 말하는 게 좋겠지." 『용안龍眼』 "그리 전하면 아실 게다."
"……방금 그것은……."
"전음傳音은 처음 듣느냐?"
상
승의 경지에 달한 무인은 내공을 활용하여 원하는 이에게만 말을 전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전음인데 노사부와 비류연의 대화에서
그런 것이 있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을 뿐인 비류향은, 방향 없이 들리는 기묘함에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그것만으로도
용안이라는 것이 쉽사리 입 밖에 내놓으면 안 될 것이라는 것을, 눈앞의 무인이 얼마나 자신을 신뢰하고 있는가 또한 깨달았다.
"오늘 처음 만난 미숙한 여아에게 이토록 신의를 보여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부디 기인께서 윤허해주셨으면 좋겠구나."
"천지인 삼륜三倫을 깨달으신 분이시니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을 헤아리실 것입니다."
그날의 만남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인연이 시작됨을 알리는 효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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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는 공부가 많이 필요한 소설입니다. 구파일방 오대세가를 제외하고도 이름 있는 문파가 흘러넘치고, 그들의 절기와 본가의
위치와 중국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 어느 지역이 어떠하다까지 고민해야 하고, 주요 혈맥 자리 정도는 몇 가지 주워담을 수
있어야 하지요. 어휘 또한 온갖 옛말과 국한혼용체와 말 그대로 무협지에서만 활용되는 한자까지 꿰뚫고, 복잡한 인간관계와 거기에
맞는 호칭에 경어와 하대까지 능숙하게 써야 그래도 좀 무협지 같은 형태의 글이 나옵니다.
……그걸 아는데 왜 제가 이런 걸 쓰게 되었을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도박은 안됩니다 여러분.
- 쓰면서 처음과 마찬가지로 댓글 몇 개 달리면 곧바로 다음화 올리 같은 걸 해볼까 했다가, 이게 스스로를 지옥으로 몰아넣는 전초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포기했습니다. 이 놈의 도박……!
- 포병과 아스티와 세이야를 거치면서, 팬픽은 기세요 흐름이니 타오를 때 최대한 질러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공모전과 학점이 날아가는구나…….
- 비류연의 연이 뭔지 알기 위해 학교 도서관을 찾아가 본 결과 강 이름 연沇이었습니다. 이게 그리도 안 나오던가.
- 소제목 수정할까 하다가 일단 돌려놨습니다. 계획 없던 연재의 부작용이 이렇게 나타나는군요 <-
- Crimsoneys 님께서 또 그림을 그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정말로. 감사합니다. 크으으으으으……!!!!!!
한자 및 오타 지적 받습니다.